2008. 11. 5. 19:20ㆍ독서후기
지리산 편지
■ 이원규 산문집 : 62년 문경 출생, 지리산 시인, 환경운동가
■ 철새는 집이 없어도 불행하지 않습니다.
0 철새는 아예 둥지를 틀지 않으니 집이 없습니다.
날개를 접는 곳이 바로 둥지이며, 두 발을 내리는 곳이 날마다 도착해야 할 바로 그곳이니 굳이 둥지를 틀 필요가 없겠지요. 철새들에겐 수십만 평의 순천만 갈대밭 모두가 둥지이며, 섬진강이며 한강, 낙동강, 영산 강, 금강 모두가 한 채의 거대한 집입니다.
그리하여 철새는 집이 없어도 좌불안석 불행하지 않습니다.
0 지난 10여 년 동안 지리산 칩거 기간을 뺀 나머지 날들은 언제나 길 위 에 있었습니다. 얻어 먹고 얻어 자며 2만 리 이상을 걸었고,모터사이클 을 타고 50만 킬로미터 이상을 달렸으니 ‘인간 네비게이션’ 수준이 된 셈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안타깝게도 아무리 둘러보아도 스스로 행복하다는 사람을 만나기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아무리 인생은 고해라지만 모두들 경제 가 어렵다고 했으며, 얼굴을 찡그리며 불행하다거나 사방의 적들에게 포 위돼 있다고 했습니다.
■ 섬진강에 첫 매화가 피었습니다.
0 그대에게 당도할 나의 지리산 편지는 이름하여 ‘화살편지’입니다. 우 편 집배원과 우체국과 우체통을 거치지 않고 그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날아가는 화살편지, 핸드폰을 끄고, 그대 심장의 문설주를 향하여 꽃눈 의 화살촉과 일초직입(一超直入) 시누대의 곧은 몸과 봄 햇살의 깃을 단 화살에 편지를 질끈 동여매어 날리고 또 날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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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지리산과 섬진강 사이에 수만 그루의 매화나무가 있지만 유독 일찍 꽃을 피워낸 이 나무를 자세히 들여다 봅니다. 나무 주변을 둘러 보고 이 마 을의 지수화풍을 읽다가 털썩 주저앉아 무릎을 치고 말았습니다.
이 나무의 열흘 빠른 개화는 일종의 병이었습니다.
환하게 꽃을 피우는 일이 병이라니요? 그러나 어이없게도 병도 아주 깊 은 병이었습니다. 이 나무의 아랫도리 두 군데가 톱날에 뭉텅 잘려 나가 있었습니다. 일상적인 가지치기 정도가 아니라 아예 팔다리 두 개가 잘 려버린 나무, 이 나무의 깊은 상처가 마침내 먼저 꽃을 피운 것이지요.
그러나 병은 병이되 다행히도 스스로 치유과정에 있는 병이었습니다.
0 숙명처럼 다가온 사랑이 뜻하지 않은 상처가 되고 그 상처가 또 사랑을 부르듯이 이 매화나무의 섣부른 개화도 깊은 상처의 산물이었습니다. 겨 우내 느닷없는 위기에 처하자 이 봄을 열흘이나 앞당기고 또 앞당기는 생존본능의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환경오염이 심한 서울 남산의 소나무들이 위기를 느끼자 더 많은 솔방울 들을 매달고, 태풍 ‘매미’에 심하게 부러진 경남의 벚나무들이 때 아 닌 가을에 우르르 꽃을 피우고, 한국전쟁이 끝나자마자 폐허의 가난속에 서 살아남은 이들이 집집마다 아이들을 낳았으니 ........
중상의 매화나무와 그대와 내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상처도 없이 어찌 봄이 오고 상처도 없이 어찌 다시 깊은 사랑이 움트겠 는지요.
■ 꿏상여 하나 먼 길을 떠납니다.
0 예로부터 호상은 대성통곡의 장례식이라기보다는 축제의 한 형식이었으 니 어쩌면 망자가 이승의 인연들을 초대하는 마지막 잔치인지도 모릅니 다. 웬만한 지도에는 잘 나오지도 않는 아주 작은 강변마을 마고실의 강 씨 할아버지.
여든세 살의 그는 동갑내기 할머니와 더불어 이 마을에서만 꼭 60년을 살며 지난해 금강혼식까지 치렀습니다. 부부싸움하는 소리가 단 한 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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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을 넘은 적이 없다고 하니 그야말로 보기 드문 천생 연분이었지요.
“함께 60년을 살다 봉께, 한 몸이여. 영감이 먼저 갔다능 게 안적 믿기 지 않는당께. 오늘도 종친회 같은 디서 영감 이름 앞으로 편지가 오니 절대로 죽은 게 아니랑께.”
0 그렇지요. 그런 것이지요.
요즘 세상이야 만남도 쉽고 그만큼 이별도 쉽다 보니 돌아서면 그만이지 만. 할머니는 일평생 단 한 번의 만남에 꼭 한 번의 이별이었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지요.
할머니는 섬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고구마 밭 옆에 할아버지를 묻었습니 다.
■ 자운영 꽃이 피었습니다.
0 시방 구례군의 드넓은 논들은 자운영꽃들에게 점령당했습니다. 말 그대 로 거대한 ‘보랏빛 꽃구름’이 온 들녘에 안착한 것이지요. 구름이 어 찌 하늘에서만 거처하겠는지요. 아래로 내려오면 비가 되고, 그 비가 꽃 을 피우고 강물로 흐르다 수증기로 오르면 다시 구름이됩니다. 이처럼 태초부터 구름과 비 사이에 꽃이 있지요.
0 장미목 콩과의 두해살이풀인 자운영은 사월 중순부터 모내기를 하기 전 까지 누가 봐주지 않아도 묵묵히 꽃을 피웁니다.
보리처럼 늦가을에 발아한 뒤 일단 가나긴 겨울을 묵언으로 보내지요. 매화며 산수유꽃이며 벚꽃들이 축제의 이름으로 화려한 날들을 다 보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뒤늦게 슬그머니 온 들녘을 구름처럼 슬슬 뒤덮는 것이지요.
0 마침내 자운영은 죽어서도 천연의 녹비가 되어 벼를 키우고 우리들의 세 끼 밥상에 오르는 쌀이 됩니다.
몇 년 전 친환경 농업의 일환으로 농가에 씨앗을 보급하면서부터 구례군 의 너른 들녘과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의 무딤이들, 그리고 곡성군의 들 녘까지 해마다 보랏빛 꽃구름이 보름정도 뒤덮이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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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이 자리가 꽃자리요 별자리입니다.
0 해마다 찔레꽃 필 무렵이면 북두칠성은 동쪽 밤하늘에 그 모습을 드러냅 니다.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고 돌겠지만 내 기억 속의 북두칠성은 언제 나 동쪽 산마루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지요. 아마도 별자리 중에 북두칠 성이 가장 선명하게 잘 보이기 때문이며, 찔레꽃이 피고 소쩍새가 우는 봄 밤에 더 자주 하늘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옛날 같으면 이맘때가 보릿고개 춘궁기의 시절이었으니 저 북두칠성이 국자로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는지요.
나는 얼마전에 쓴 시 ‘북두칠성’에서
지구 한 귀퉁이
오늘도 굶어 죽는 아이들
밤 하늘에 갈비뼈가 자꾸 삐져 나온다.
< 중 략 >
라면 국물이라도 한 사발 퍼 주고픈
저 거대한 국자.
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0 특히 문사들에게는 그 첫 번째 별이 문운을 뜻하는데, 그리하여 예로
부터‘문창별’이라 불렀지요. 또한 예로부터 절에는 칠성각이나 삼성각 이 있었는데, 자손이 귀한 이들은 이곳에 가서 삼신 할미에게 빌고 또 빌었습니다.
어디 그뿐이겠는지요.
계곡 건너 저무는 산마을, 집집마다 외등을 켜는데 오호라, 그마저 지상 의 북두칠성으로 켜지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면 우리는 모두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앉은자리 그대로가 꽃자 리요, 걸어 다니는 지상 최후의 별자리입니다.
■ 인드라망의 세상이 현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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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불가에서 얘기 하듯이 우리 모두는 하나하나 우주적인 그물코에 매달린 맑은 구슬들이라는 ‘인드라망’의 세계가 현현한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동시에 공간을 초월해 만날 수 있는 인터넷 시대는 어찌 보면 우주 자연 의 섭리와 흡사하지 않은지요.
매화꽃들이 서로 메일을 보내지 않고도 앉은자리 바로 그 자리에서 화르 르 타오르고, 유선이나 무선의 통신망 없이도 그렇게 온몸으로 봄을 밀 어 올리지 않는지요.
0 다만 문제는 인간들이 쌓아 올린 최첨단 문명에 오히려 인간이 소외되거 나 파괴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인터넷 또한 마찬가지 아닌지요.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터넷을 비롯한 최첨단 정보화 시대에 물을 주고 씨앗을 뿌리는 일입니다. 컴퓨터와 핸드폰에 따스한 온기를 불어 넣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꽃을 피우는 것이지요.
그래야 문명의 이기 자체도 마침내 인간과 공존하는 스스로 그대로의 자 연이 되지 않겠는지요.
■ 오월의 푸른 산빛을 보냅니다.
0 내가 아직 젊은 20대일 때 눈 밝은 선배에게 호를 하나 받은 적이 있는 데 청람(靑嵐 :남기 람, 산 속에 생기는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었습니 다. 호를 갖는다는 게 왠지 쑥스러워 잘 쓰지는 않았지만 마음 속에 고 이 간직해 왔지요.
그런데 해마다 오월이 되면 청람이란 호가 불쑥불쑥 두더지처럼 목구멍 을 타고 올라오곤 했습니다.
청람의 뜻은 ‘오월에 이는 푸른 산 기운’입니다. 말하자면 지금 이 순 간 신록의 산색을 낳는 미완의 바람으로서 연초록에서 초록으로 넘어가 는 과정의 산기운인 것이지요.
결과만을 좇지 말고 내내 과정을 사랑하라는 뜻이 너무나 좋아서 오히려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0 실상사 수월암의 연관 스님이 운서 주굉이 쓴 ‘죽창수필’을 다시 선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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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 냈는데, 그 제목이 또한 ‘산색’입니다. 나는 이 책의 첫장을 들여다 보 다 단 두 문장에 무릎을 치고 말았지요.
“날쌘 말은 채찍 그림자만 보고도 내 달린다. 송곳이 살갗에 꽃혀서야 알 아채는 것은 둔한 말이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경구인지요. 신록의 산색을 보고도 깨닫지 못한다면 무엇을 보고 살아 있음의 묘미를 알아채겠습니까.
0 지금은 다만 잠시라도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저 산색이 주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날마다 초심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미완의 과정을 대충 건너 뛰려는 자세부터 버려야 하지 않겠는지요.
우리네 삶의 지난한 과정이 바로 신록처럼 푸르되 그 푸름을 강요 하지 않고, 철쭉꽃처럼 붉되 그 붉음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 또한 소중합니다. 스스로 그러한 산색이 주는 자기 최면과 말씀을 경청하며 오월의 지리산 을 바라봅니다.
굳이 송곳에 깊이 찔려야 알겠는지요. 피를 토하는 철쭉꽃들을 연초록의 산색이 슬그머니 감싸주고 있습니다. 그러하니 철쭉꽃 또한 더욱 붉을 수 밖에요.
■ 하느님의 눈물을 보신 적이 있나요?
0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마을에서 그대의 안부를 묻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눈물’을 볼 줄 알았던 유일한 사람, 너무나 사람답다 못해 마침내 하느님과 동격이 된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
“교회와 절이 많아진다고 세상이 그만큼 행복해지느냐.” 반문하시던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권정생 선생님은 무신론자인 내게 바로 옆집에 사는 하느님의 존재를 일 깨워 주고, 아주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눈물까지 보여준 이땅의 유일무이 한 스승이었습니다.
0 10여 년 전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을 읽는 순간 제 삶은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졌습니다. 교회 종지기였던 선생님이 어느해 겨울의 새벽 예배당 마룻바닥을 닦으려다 발견한 ‘얼어 있는 하느님의 눈물 몇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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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은 제 삶의 이정표이자 등대가 되었습니다.
가난한 이 마을의 어느 할머니인지 할아버지 인지는 모르지만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죄가 없는 사람이 남몰래 새벽 기도를 하며 참회의 눈 물을 흘리고, 그 눈물 몇 방울이 얼어 있었다니 이보다 더 구체적인 하 느님의 눈물이 또 어디에 있겠는지요.
0 그리하여 마침내 선생님 또한 그 눈물을 알아본 이 땅의 유일한 사람으 로서 일생을 하느님과 동격이 되어 살았습니다. 다섯 평짜리 낡은 집에 서 날마다 아픈 하느님이 혼자 밥을 해 먹으며 고무신을 신고 살았습니 다.
선생님의 고무신에 나의 맨발을 슬쩍 넣어보고도 싶었지만 차마 부끄러 워 오래 바라만 보다가 그만두었습니다.
그대의 가슴속에도 지금 하느님의 눈물이 흐르고 있는지요.
■ 불륜의 밤꽃 냄새가 만만치 않습니다.
0 밤꽃 피는 유월의 지리산은 현기증이 다 날 정도입니다. 피아골과 문수 골 등 지리산의 아랫도리를 밤꽃 향기가 기습적으로 점령하는 바람에 온 산이 환하다 못해 머리가 아플 지경이 된 것이지요.
잘 아시다시피 비릿한 밤꽃 향기는 남자의 정액 냄새로 비유되어 왔습니 다. 한 번이라도 맡아본 이는 알겠지만, 사실 또한 그러하다 보니 ‘매 화향’처럼 향기로 불리기보다는 왠지 조금 더 비하된 듯한 ‘냄새’로 더 잘 통하지요.
매화 향기를 매화 냄새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또한 밤꽃 냄새를 밤꽃 향 기라고 부르지는 않으니까 말이지요.
0 향기라는 말이 단순히 사대주의적인 한자여서 더 품격이 있는 것처럼 보 이는 것이 아니라, 더 포괄적이며 모호한 우리말 ‘냄새’로 은근히 격 하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성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지극히 꺼리던 유교문화의 영향일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과부들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러가며 엄동설한을 견딜 수는 있 어도, 밤마다 봉창문으로 밤꽃 냄새가 스며드는 오뉴월에는 참으로 수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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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가 힘들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밤꽃 피는 유월은 불륜의 달인 것 이지요.
남녀관계의 불륜도 조금 더 깊이 들여다 보면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 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처럼 입장이 다르거나 대개가 여성비하적 혹은 성의 불평등으로 점철돼 왔습니다. 그래도 예전보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 만, 밤꽃 냄새를 두고도 시도 때도 없이 성 충동이 강한 남성을 숨기고, 예나 지금이나 죄도 없이 불행한 약자인 과부를 등장시켜 뒤집어 씌우니 말입니다.
■ 입은 하나요 귀는 둘입니다.
0 오래 지리산에 살다 보니 말을 하기보다는 많이 듣게 됩니다. 어째서 ‘입은 하나요 귀는 둘인지’알 것도 같습니다. 할 말은 많아도 자꾸 혀 가 짧아지고 두 귀는 토끼처럼 쫑긋 세워집니다.
사실 남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 이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에 있을까요. 생존의 양식이 겨우 남의 말을 들어 주는 것뿐이라면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요.
그러나 가면 갈수록 경청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남의 얘기를 듣고 두 눈을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이며, 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며 도대체 남의 일 같지 않은 일을 결국 남의 일로 치부해버리 고 마는 일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절감하게 됩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동안 잘 안다고 믿었던 것들도 가면 갈수록 잘 모르겠 고, 그동안 최소한 믿었던 것들도 가면 갈수록 잘 믿지 못하게 됩니다.
다시금 돌아보건대 나는 아직 경청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그 저 남의 얘기를 들어주며 미소를 짓거나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 으로는 딴 생각을 하거나 무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설핏 보면 경청은 최소한의 인간적인 예의이지만 그것은 제대로 들은 뒤 비로소 나의 의견을 분명히 표현하고 상대와 허심탄회한 논쟁으로까지 이어져야만 완성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은 경청은 기만이었습니다. 남의 일을 나의 일로 받아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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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는 대화는 그 자체가 불필요한 것 아니겠는지요.
생각이 좀 다르거나 달라 보이면 어느새 들어주는 척 했을 뿐입니다. 이 미 내 마음속에 정해진 틀 밖의 얘기라면 두 귀를 틀어 막았습니다.
다만 예의라는 허울을 쓰고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형편 없는 놈 그러면 그렇지, 안 되겠군. 다시는 상종할 일도 없을거야’라고 폄하 했지요. 사실이 이러하니 나는 ‘청’도 모르고 ‘경’도 모르는 것이었 습니다.
그리하여 옛 사람들은 구시화문(口是禍門)이라. 입은 곧 화가 들어오는 문이라 했습니다.
0 그렇다면 두 귀는 복이 들어오는 문이 아닌지요. 그것을 알지 못하고 스 스로 존재 자체를 무시하거나 학대하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통탄할 노릇 인지요. 시시로 두 귀를 파고드는 온갖 진리의 말씀마저 제대로 듣지 못 했으니. 어찌 소리를 보는 관음(觀音)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겠는지요.
먼 길을 가며 생각하니 나는 아직 나의 숨소리나 심장 박동 소리 조차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 여기 이곳에서의 생을 외면하고 남에게 혹은 다른 그 어떤 곳에서의 거창한 생을 꿈꾸었습니다. 모두 기가 막히 고 귀가 막혔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자연의 소리는 고사하고 남의 말이 제대로 들리겠는지요.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면 세상을 바꾸는 힘은 달변이 아니라 경청에 있습니다. 삶의 아름다운 해답이 바로 경청의 자세에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하여 다시 입은 하나요 귀는 둘입니다.
■ 우리네 삶도 한 호흡 아닌지요.
0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제 몸을 울려 꽃을 피워내고
피어난 꽃은 한 번 더 울려
꽃 잎을 떨어뜨려버리는 그 사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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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호흡이라 부르자. 꽃나무에게도 뻘처럼 펼쳐진 허파가 있어
썰물이 왔다가 가버리는 한 호흡
바람에 차르르 키를 한 번 흔들어 보이는 한 호흡
예순 갑자를 돌아 나온 아버지처럼
그 홍역 같은 삶을 한 호흡이라 부르자.
- 문 태 준, (한 호흡) -
0 실은 ‘한 호흡’도 불교적인 사유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들숨 날숨의 한 호흡이 살아 있음의 전제조건이지만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 한 호흡이라 부르자’는 선언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흔히 불가에서는 현생뿐만이 아니라 전생 현생 내생의 삼세를 한 호흡이 라 하지만, 이는 아무래도 너무 추상적이지 않은지요.
그리하여 문태준 시인은 꽃이 피고 지는 한 호흡으로 시작해, ‘예순 갑 자를 돌아 나온 아버지처럼 / 그 홍역 같은 삶을 한 호흡이라 부르자’ 고 새삼 천명합니다.
■ 악연은 없습니다.
0 이 세상에 인연은 있어도 악연은 없습니다.
소중하고도 소중한 인연마저 스스로 망쳐 놓고 자기 합리화의 세 치 혀 로 악연이었다고 우길 뿐이지요. 행여 첫 만남이 불쾌하거나 불행 했다 손 치더라도 조금만 깊이 들여다 보면 그저 핑계에 불과합니다.
언젠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지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은 인연입니다. 윤회나 환생을 믿지 않더라도 소중 하지 않은 인연은 없지요. 처음에 사소하여 잘 알아보지 못할 뿐, 이 사 소함이야말로 존재의 자궁 같은 것. 불랙홀이나 미로일 수도 있지만 바 로 이곳에서 꽃이 피고 새가 웁니다.
돌아보면 마치 전생의 악연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그동안 마주치지 않으 려고 우리는 또 얼마나 오랫동안 몸부림을 쳤는지요. 악연은 잘못된 만 남이 아니라 한 하늘아래 살면서 아예 만나지도 못하는 것. 결국 인연과 악연의 그 무서운 갈림길은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아직은 가지 않은 길. 내내 가지 말아야할 길. 악연의 길을 가기엔 인생이 너무나 짧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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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0 인연의 크고 넓고도 촘촘한 그물인 ‘인드라망’.
우리는 모두 인연이라는 이 아름다운 그물에 걸린 ‘천상천하 유아독 존’이것이 ‘내가 바로 너이며 네가 바로 나‘인 경지. ’네가 아프니 나도 아프다.‘는 경지의 참 인연이 아니겠는지요.
다시 반복하거니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상에 악연은 없습니다. 행여 악연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다만 잘못 살았다는 것의 반증일 뿐입니다.
■ 한센인의 슬픔을 아시나요.
0 모처럼 경상도 출신의 고향 친구나 동창을 만나면 참으로 반갑게 내 뱉 는 말이 ‘문디자식’ 아니면‘문디가시나’입니다. 친밀감의 표현으로 는 이보다 더 좋은 말이 없을 정도지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쌀도 아닌 ‘보리’요. 나병환자를 비하하는 ‘문둥이’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 아야 합니다.
‘보리문디’의 어원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전라도보다 상대적으로 곡창지대가 적은 경상도에는 보리가 많이 났으니 ‘보릿고개’로 상징되는 가난의 의미요. 그 가난을 뛰어넘기 위해 공부 를 하는 아이들(문동 文童), 즉 보리 먹고 출세를 위해 공부하는 아이들 이 ‘보리 문동’이었던 것이지요.
그 ‘보리문동’이 ‘보리 문둥이’로 격하되다 마침내 ‘보리문디’로 이어져 왔다는 얘기도 있고. ‘보리를 먹으며 공부하는 동쪽 사람들’이 라는 설도 있습니다.
0 우리나라에는 1년에 겨우 20여 명 미만의 환자가 발생하는데, 그마져 리 팜피신이라는 약을 네 알 정도만 복용하면 전염력이 완벽하게 사라질 정 도로 전염력이 가장 약한 병이며, 이 병은 또 유전이 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일제 강점기 때처럼 한센인들은 여전히 소록도나 정착촌 등에 서 격리되듯이 살고 있으며, 지독한 사회적 편견에 사로잡혀 최소한 인 간으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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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감 그 오래된 미래를 찾아 갑니다.
0 몇 년 전 남아시아의 지진해일로 전 세계의 새해 아침은 온통 초상집 분 위기 였습니다. 희생자가 15만 명 이상이라니 그야말로 대 재앙이 아닐 수 없었지요.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자연재해로만 치부하기엔 최첨단 과 학을 자랑하는 현대 문명이 초라하기 그지없었습니다.
0 이처럼 참담한 뉴스들 가운데 뒤통수를 후려치는 한 소식이 있었습니다.
2만 명 이상이 희생된 스리랑카의 한 야생동물 국립공원에서는 신기하게 도‘토끼 한 마리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주 짧은 뉴스였지만 야 생동물국 관계자는 “동물들은 제 육감을 갖고 있어 재앙이 언제 일어날 지 미리 알았으며 높은 곳으로 대피한 것 같다.”고 전했습니다.
사실 인간보다 뛰어난 동물들의 육감은 이미 오래전부터 주목받아 왔습 니다.
1902년 카리브해 마르티니크 섬에서 화산이 폭발했을 때 생피에르 시민 은 3만 명이나 죽었지만 동물 사체는 고양이 한 마리밖에 없었다고 합니 다. 놀랍게도 동물들은 이미 한 달 전부터 피신했답니다.
1923년 관동 대지진 이틀 전에는 심해어가 해안의 수면으로 떠오르는 징 조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동물들의 뛰어난 육감으로 인한 기이한 행동, 그 징조를 먼저 읽었다면 남아시아의 참사를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지는 않았을까요.
0 청개구리가 울거나 개미 떼들이 줄지어 가면 곧 비가 온다든지. 출항 준 비 중인 배에서 쥐들이 내리면 머지않아 폭풍우가 온다든지 하는 것들은 상식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예감 혹은 예지력이 뛰어난 시인들을 ‘잠수 함의 토끼’라 부르지 않았던가요.
0 지리산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섬진강 용두리에 살던 1998년 7월 31일 오후였습니다. 이 마을에는 20대 중반의 총각이 하나 살고 있었는데 정신지체인이었습니다. 다운증후군이 었지요. 일반인들과는 의사소통이 어려운 그였지만 그는 언제나 이 마을 을 휘젓고 다니는 주인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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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가 청명한 그날 오후 내내 아주 낮은 솔밭산에 올라 산짐승처럼 소리를 지르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뒷집 할머니도 처음에 대수롭지 않 게 여기다가 “쟤가 왜 저러지. 날도 좋은데 비가 오려나.”중얼거리며 빨래와 고추를 걷어다 툇마루로 들였습니다.
그리고 채 세 시간이 지나지 않아 느닷없이 먹장구름이 밀려오더니 폭우 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기상특보가 발효되기도 전에 밤새 천둥 번개 가 치더니 지리산에선 80여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세 시간 만의 기습 적인 집중폭우였습니다.
뒷집 할머니에 따르면 그가 이처럼 심하게 울기는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이 마을과 지리산의 기상예보관이었지요. 그의 예감 혹은 육감은 정확했으되 그 누구도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 듣지 못한 것입니 다.
0 육감이란 무엇인지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오감을 넘어서 는 제 6의 감각이 아닌지요. 부연하자면 육감은 분석적인 사고나 오감 이전의 예감 혹은 직감을 말합니다.
지구 온난화 등 인재에 가까운 재앙들을 목도하면서 현대인들이 잃어버 린 제일 소중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육감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0 진정한 농부나 어부들은 달무리나 구름, 바람의 방향을 보고 일기를 미 리 예측했습니다. 현대인들의 출세를 위한 교육이나 이기적 욕망 때문에 갈수록 잃어버리거나 퇴행한 것이 있다면 바로 자연과의 교감이자 우주 적 세계관인 육감이 아닐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환경파괴는 재앙을 부르는 인간 교만의 극치이지만, 하 늘을 읽고, 바다와 바람을 읽어내는 자연과의 교감은 현대인들이 되찾아 야 할 고향이자 오래된 미래입니다.
자연인으로서 인간 최대의 행복은 언제나 탐진치의 오감을 넘고 넘어 마 침내 육감을 타고 오는 것이 아닌지요.
■ 그대 무엇으로 지리산에 오시는지요.
0 휴가지에 와서도 내내 핸드폰을 들고 언성을 높이며 정신이 없는 이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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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아니면 안된다’는 일중독을 이해할 만도 합니다.
본격적인 휴가철을 맞았으니 지금 지리산은 만원입니다.
전국의 휴가지가 모두 그러하지만 지리산의 거의 모든 계곡들도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내 삶이야 날마다 휴가이니 지리산 문수골에 조용히 머 물면서도 이맘때면 바로 집 앞 계곡에 나가는 것마저 두렵습니다. 계곡 은 온통 삼겹살 굽는 냄새와 술병 등의 쓰레기로 가득해지기 때문이지 요.
모처럼 삭막한 도시를 벗어나 지리산을 찾아온 이들의 심사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왜 모두들 한결같은지 궁금하고 또 궁금합니다. 참으로 신기할 정도로 우리나라의 휴가철 행태는 삼겹살이나 닭백숙을 곁들인 술판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듯 합니다.
이는 계곡 주변과 청정수를 오염시키는 환경파괴 이전의 문제이지요.
0 휴가를 통해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기는 고사하고 마음의 방전상태를 자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집니다. 모두들 일중독보다 무서운 획 일화된 휴가중독에 걸려 있는 것 같아 답답합니다.
‘월요병’이나 ‘휴가병’모두 휴식을 잘못 취했기 때문이 아닌지요.
■ 길과 집과 무덤은 한 식구입니다.
0 이 가을에 문득 생각하니 길이 곧 집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길은 곧 집이었습니다.
집 밖의 그 어느 곳으로 향하는 길이 있으리라 믿었지만 그게 아니었습 니다. 모든 길이 곧 집이었지요. 집과 길은 자웅동체의 한 몸이었습니 다. 점과 점을 이으면 선이 되듯이 집과 집을 이으면 그게 바로 길이었 지요.
0 21세기 현대인들에게 집은 무엇인지요.
일평생 집 한 채 장만하기 위해 몸부림치다 죽어 두 평의 집, 무덤 하나 가지는 게 인생의 전부라면 길은 어디에 있는지요. 집과 무덤으로 곧바 로 향하는 무한질주의 행로 속에 과정으로서의 길은 적당히 생략되어도 좋은지요. 그것이 참 인생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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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으로서의 길을 생략하고, 길이 집이라는 사실을 외면한 채 집착과 욕망으로서의 집만 존재할 때 우리는 자주 길을 잃게 됩니다.
0 잃은 길도 길이요. 좌불안석의 집도 집이라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고 앞 만 보고 달려가다 보니 더더욱 혼돈의 길이 아닌지요. 옆도 뒤도 돌아보 지 않고 결과와 목표만을 추구하며 살다보면 그 화사해 보이던 결과의 꽃마저 바로 죽음의 조화요 무덤자리의 할미꽃일 뿐이 아닌지요.
그리하여 이 가을에 벌초를 하고 성묘를 하는 것이지요.
■ 황금빛 들녘이 부릅니다.
0 지리산의 가을 들녘은 지금 농부들의 막바지 수확의 손길로 분주합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단풍나무며 붉나무며 온 산을 물들이는 노랗고 붉은 기 운에 넋을 빼앗기지만, 사실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단풍의 기운은 황금 빛 들녘입니다.
아니 그보다 아름다운 단풍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누군가의 일용할 양식 을 꿈꾸며 온 몸을 던지는 농부들의 구릿빛 근육입니다.
0 농부들은 단절의 시간을 모릅니다.
봄에 여름을 생각하고, 여름에 가을을, 가을에 겨울을, 겨울에 봄을 미 리 생각하고 옴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지요. 아니, 한발 더 나아가 봄에 가을을, 가을에 봄을 미리 살아가는 것이지요.
0 굳이 한 예를 들자면, 구례 들녘에는 벼 수확을 하면서 동시에 미리 내 년 봄에 피어날 자운영 꽃씨를 뿌립니다.
당장 눈 앞의 수확에만 눈이 멀지 않고, 내년 봄 모내기를 하기 전에 자 운영 꽃이 피고 그 아름다운 보랏빛 꽃물결이 구례 들녘에 피어날 것을 생각하며, 그 꽃들이 마침내 내년의 어린 벼들을 살찌게 키우리라는 부 푼 마음으로 올해의 농사를 마감합니다.
추수가 끝나면 다시 마늘을 심거나 양파를 심어놓고 혹한의 겨울을 기다 리니 가을 들녘은 이미 단풍의 미혹을 넘어 봄의 기운으로 충만합니다. 천대 받으며 별로 돈도 되지 않는 농사도 이러할진대. 우리는 지금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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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사는지 많이 궁금합니다.
■ 눈 덮인 무욕의 겨울산이 부릅니다.
0 눈 덮인 겨울산이 부릅니다.
춥고, 배고프고, 외롭고, 높은 겨울산.........
저 산은 이제 우리들의 ‘정신의 희디흰 밥입니다.’정신없이 앞만 보고 뛰다가 문득 주저앉아 ‘왜 어떻게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지.’문득 회의 가 들거나 막막할 때 저 눈 덮인 겨울산은 있는 그대로 무욕의 스승이 자 ‘돌아온 탕아들’의 안식처가 아닌지요.
그리하여 사계절 중에서 겨울산이 던지는 화두는 더없이 각별합니다.
봄과 여름과 가을의 산은 자연 그대로의 풍요로움으로 이끌지만 겨울산 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는 엄격한 스승처럼 맵고도 차가운 회 초리를 들기 때문이지요.
0 누구나 한 번쯤 꿈꿔보는 히말라야는 아니더라도 아주 가까이 눈 덮인 겨울산들의 부름에 화답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다만 하나의 조건이 있다면 등산(登山)은 말고 입산(入山)하러 가시길.
등산은 인간의 정복욕과 교만의 길이지만 입산은 자연과 한 몸이 되는 상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누구나 정복해야 할 것은 마음속 욕망의 화산이지 몸 밖의 산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치 속세에 서처럼 경쟁하듯이 백두대간이며 지리산 종주를 하다보면 보이는 것이라 곤 앞사람의 발뒤꿈치 뿐입니다. 하지만 입산의 마음으로 호흡을 가다듬 고 겨울산이 던지는 메시지를 성찰하며 걷다보면 어느새 몸 속에 거대한 산이 들어와 있게 되지요.
눈 덮인 겨울산이 추우니 당연히 나도 춥고, 산이 목마르고 배고프니 나 도 마르고 고픕니다. 그래야 합니다. 그래야만 겨울 산행의 백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0 겨울 산행의 백미는 아무래도 상고대 숲을 만나는 일입니다.
상고대는 안개나 습기가 나무에 얼어붙어 마치 하얀 산호같이 피어나는 설화를 말하지요. 나무에 흰 눈꽃이 핀다고 다 상고대는 아닙니다. 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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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인 것은 설화 쌓였던 눈이 얼면서 얼음 알갱이가 줄기에 매달리는 것 은 빙화입니다. 물론 한겨울 눈이 내린 뒤에는 설화며 상고대며 빙화가 함께하기도 합니다.
0 설화는 눈이 내리면 볼 수 있지만 상고대는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온도와 습도 그리고 차가운 바람 등 기상 조건이 맞아야 합니다. 영하 6도 이하, 습도 90퍼센트 정도(짙은 안개), 풍속 초속 3미 터 이상일 때 해발 1천미터 이상에서 피어난다는 게 정설이지요.
어쨌든 겨울 산행에서 마주치게 되는 너무나 차고 맑다 못해 희디희게 빛나는 상고대와 설화와 빙화는 꼿꼿한 정신의 표상이 아닐 수 없습니 다. 말하자면 우리 마음속에 깊이 내장돼 있는 초심, 그러나 문득문득 놓치고 있던 첫 마음 같은 것이지요.
0 눈 쌓인 산길을 걷다가 문득 돌아보면 발자국 또한 나를 따라오고 있다 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금, 바로, 여기 이 자리에서 내가 나를 만나러 가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 주는 방증이지요.
산 아래의 내가 산 꼭대기의 나를 만나러 가는 길, 그러니 나는 산 아래 에도 있고, 산 위에도 있으며, 산을 오르는 숨 가뿐 길 위에도 있는 것 이지요.
저 눈 덮인 산정의 나를 만나러 오르는 길이나 속세의 나를 만나러 하산 하는 길이나 우리가 가야 할 산길은 모두 하나입니다.
오늘도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리하여 ‘정신의 흰 밥’인 저 눈 덮 힌 무욕의 겨울산이 부릅니다.
■ 문수골의 깊은 겨울잠에 듭니다.
0 아침이면 섬진강 물안개가 서서히 차올라 나의 몸을 가리고. 저녁이면 강 건너 오산의 노을이 나의 이마를 붉게 물들입니다. 창을 열고 산 아 래 마을을 내려다보노라면 문득 가파른 지난날들이 떠 오릅니다.
0 하지만 지리산 입산 10년 그 이전의 세월, 속진의 날들은 어느 새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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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노을 너머 마치 전생의 일인 것처럼 아득하기만 합니다.
오늘처럼 일기예보에 없던 폭설이 내려 문득 고립이 되고 보니 더욱 그 러하지요. 세상으로 통하는 길이 막히면 더욱더 세속의 일이 궁금하거나 안타까워야 할 터인데 오히려 더 편하니 이 무슨 심사일까요.
0 고립된 며칠간은 찾아올 사람이 없어 좋고, 문득문득 바깥세상으로 향하 던 마음과 몸마저 바로 여기 이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으니 더욱 좋 습니다.
산중의 반달곰과 다람쥐들도 겨울잠에 들고, 나 또한 무욕의 겨울잠에 들기에 너무나 좋은 조건이 아니겠는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고립은 홀로 외로운 고립이 아니라 홀로 높게 서는 고 립입니다. 자본주의식 생존경쟁처럼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는 것이 아니 라 내가 나를 누르고 ‘외롭고도 높게’서 보는 것이니 이 얼마나 행복 한 자족인지요.
0 행복의 조건은 욕망의 무한질주가 아니라 자족과 달관으로부터 오는 것 이니, 나날이 ‘자발적 가난’과 ‘청빈’의 삶을 즐기는 여유야말로 참 다운 행복이 아닌지요.
조금 건방진 말이겠지만 사실 한 달에 50만 원 정도면 지리산에서 내 한 몸 유지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습니다.
0 그렇지요 강물도 목이 말라서 흐르고, 인생도 자꾸 목이 마르기에 오히 려 살 만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보면 오히려 입속에 침이 고이고 빗물처 럼 참회와 용서의 눈물이 흐릅니다. 자꾸 목이 마르니 마음속에 물이 고 이도록 천천히 걸어보고 또 멈추어 명상을 하겠지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잠시 맛보는 문수골의 겨울잠이 너무나 답니다. 여 전히 목이 마르겠지만 푹 자고 매화꽃이 피면 일어나 또 걸어야겠지요. 그대 또한 한없이 목이 마르도록 여여하시길 바랍니다.
■ 말은 곧 마음의 표정입니다.
0 산중의 가까운 벗들이나 먼 곳의 소중한 인연들이 놀러 오면 우선 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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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 대접하든지 더불어 유쾌하게 술을 마십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차 를 마실때와 술을 마실때의 풍경은 사뭇 다릅니다.
지리산 녹차에 매화꽃 한 송이라도 띄워서 마시는 자리는 그야말로 야생 차밭과 섬진강변 매화나무의 풍경이 어우러지는 듯 마주 보는 얼굴과 눈 짓이 녹차와 매화의 향기처럼 그윽해 집니다.
표정과 눈짓이 그러하듯이 주고 받는 말 또한 그러합니다. 굳이 많은 말 을 하지 않아도 이심전심으로 알아듣게 될 뿐 아니라 굳이 논쟁을 하더 라도 상대를 배려하면서 동의를 구하거나 그저 묵묵히 듣는 것만으로도 긍정 혹은 훌륭한 반론이 됩니다.
말하는 이와 듣는이가 이미 마음을 열어놓고 주고 받으니 교집합은 늘어 나고 차집합은 줄어들게 마련이지요. 누구나 상대를 배려하고 겸허해지 는 경청의 자세를 잃지 않기 때문입니다.
0 그러나 술은 함께 마시다 보면 유쾌하면서도 이따금 자기만의 감정에 빠 지기 쉽습니다. 다행히도 취기의 솔직담백한 토로나 노래가 된다면 좋으 련만, 한 번이라도 일심동체의 호방함에서 옆길로 새기 시작하면 험담이 오가고 욕설이 난무해집니다.
제 아무리 이성적인 논쟁도 서로에게 비수를 들이대는 상처의 말들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이 세상의 말들은 모두 무시되고 아집과 이기적인 자 기만의 말들이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한 채 허공을 떠돌게 됩니다. 말 이 넘쳐나 충돌하다 보니 술자리는 어느새 아수라장이 되기 십상입니다.
0 그렇습니다. 말은 곧 마음의 표정입니다.
아름다운 매화꽃을 보며 욕을 하거나 험담을 하는 이는 없겠지요. 그러 하듯이 마음의 표정이 맑고 밝으면 행여 욕을 하거나 비하하더라도 할머 님들이 어여쁜 손녀를 보며 “아이구 못난이“ 라고 하듯이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나 어여쁜 나머지 역설의 말로 그 어여쁨 을 오래 지켜주고픈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기 때문 이지요.
한 번이라도 애지중지 강아지를 키워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함부로 “개새끼 같은 놈”이라는 욕을 쓰지 않습니다. 가족이나 친척 중에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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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병신’‘또라이‘’문둥이‘등과 같은 욕을 하지 않습니다.
바로 마음의 표정 때문입니다. 식물이든 짐승이든 사랑과 연민의 정으로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을 나날이 깨우치고 있다면 절대 용납될 수 없는 말들이지요.
■ 새해 단식은 아찔한 충만입니다.
0 다시 새해 아침이 밝아옵니다.
날마다 태양은 떠오르지만 하루의 소망이 한 해의 소망으로 확대 재생산 되는 즈음이기에 누구나 들뜨게 되겠지요.
들뜬다는 것은 뭔가 에너지가 충만하다는 것을 뜻하지만 되짚어보면 에 너지 분출의 방향이 혼돈에 빠져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새해 소 망이라는 지나친 기대와 두려움이 암수한몸처럼 우리를 다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0 이는 들 뜬 마음을 가라앉히는, 보다 근원적으로 돌아가서 에너지의 분 출이 아니라 속으로 에너지를 더 다지는, 말하자면 내공을 키우는 맹세 인 것이지요.
0 그러나 어쩌면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모두들 새해 소망이라는 보따리에 뭔가 자꾸 채우려고만 했지 비우려 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그 모든 소망과 맹세는 해마다 반복되는 용 두사미일 수밖에요.
새해를 맞으며 나는 비우는 일로 충만한 이들을 만났습니다. 지리산 실 상사에 모인 일단의 무리들과 저녁 시간을 함께 했습니다. 이름하여‘비 움의 잔치’에 초대된 것이지요. 전국에서 몰려온 50여 명의 사람들이 4 박 5일간의 단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창자를 비우지 않고 어찌 마음을 비울 수 있겠는가. 욕망, 그 모 든 욕구는 이 몸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 메스를 사용하지 않는 내장 수술, 가장 완벽하고 섬세한 만병통치 요법’이라는 단식을 새해의 화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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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삼은 이들이지요.
0 새해를 맞으며, 굶는 사람들을 만났으나 하나같이 행복해 보였습니다. 금단현상과 관장 등으로 육신은 조금 고통스럽지만 한결같이 환한 웃음 과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지요. 이들은 단식 중에 ‘자비심 연습’이라 는 독특한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간단히 소개 하자면 이렇습니다. 가 까운 누군가에게 주의를 쏟으면서 혼잣말을 합니다.
“나와 똑같이 이 사람도 자기 삶에서 고난을 피해보려 하고 있다. 나와 똑같이 이 사람도 슬픔과 외로움과 절망을 겪어 알고 있다. 나와 똑같이 이 사람도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키려 하고 있다. 나와 똑같이 이 사람도 삶에 대해 배우고 있다.”
어찌 보면 별것도 아닌 이 주문이 참으로 옆 사람을 다시 보게 합니다. 나 자신 또한 새롭게 보입니다.
■ 그대 맨발에 입을 맞춥니다.
0 저물녘 섬진강에 다녀 왔습니다. 그곳에서 청둥오리 떼를 만났지요. 강 물을 박차며 날아 오르는 새 떼들을 보면서 문득 나도 한 번 날아보고 싶었습니다. 훨훨 날아서 강을 넘고 산을 넘어 당장이라도 그대에게 가 고 싶었습니다. 북풍한설의 기나긴 밤, 그대와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나 누고 싶었습니다.
아, 그러나 청둥오리의 빛나는 날개에 넋이 빠졌다가 문득 뒤로 쭈욱 뻗 은 두 다리를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저 다리가 없다면 새 들이 어찌 날아오를 수 있겠는지요. 그동안 온통 시기심에 빠져 새들의 날개만 생각했지 새들의 맨발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 던 것입니다.
0 그랬지요. 강물을 박차며 날아오르는 청둥오리의 시린 두 발,겨울 창공 의 두 맨발을 바라보며 어쩌면 뼛속까지 차가울 그의 발등에 문득 입을 맞추고 싶었습니다.
그대의 두 발은 오늘도 여여하신지요. 하루 종일 헤엄을 치느라 고단했 을 청둥오리의 차가운 물갈퀴, 신발이나 양말도 신지 않은 그 두 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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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며 그대의 발 또한 그러하리라 생각했습니다.
0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은 걷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직립보행보다 더한 축복이 있겠는지요. 걷다 보면 알게 됩니 다. 한 번쯤 쉬어야 하는 길이 십 리 길이고, 하루 종일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가 바로 백 리 길이지요. 이는 사람만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꽃이 피면서 북상하는 속도가 그러하고 남하하는 단풍의 속도가 그러하 다는 것을 걷고 걸으면서 알게 됐지요. 사람의 속도와 자연의 속도가 모 두 한 걸음 한 호흡이었습니다.
도인들의 축지법이나 비보(飛步)를 믿지 않지만 오래 걷다 보니 알겠습 니다. 길가의 풀이며 지렁이며 나무며, 꽃을 바라 보며 걷다가 문득 돌 아보면 지나 온 길이 아득합니다. 걸으며 마주치는 모든 것들에게 마음 을 주다 보니 마치 날아온 것 같습니다.
축지법이나 비보는 단순히 속도를 말하는 게 아니라 정신적인 경지라는 것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발바닥은 곧 인간의 날개 입니다.
그리하여 걷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며 세상에서 가장 빠른 길입니다.
0 참 못생긴 발이지만 머나먼 길을 돌고 돌아서 예까지 묵묵히 함께한 두 발을 만져봅니다. 두 눈으로 볼 것 못 볼 것 다 보는 동안, 두 손으로 누군가의 손을 잡고 쓸 것 안 쓸 것 다 쓰는 동안, 두 귀로 들을 것 못 들을 것 다 듣는 동안, 한 입으로 먹고 또 먹으며 할 말 안 할 말 다 하 는 동안 두 발은 두터운 양말과 신발 속에서 부르트고 또 부르트기만 했 습니다.
이제야 족적이 발자취라는 말의 뜻을 알겠습니다.
인생을 한마디로 얘기 한다면 족적이 아닌지요. 우리가 자주 잊고 사는 ‘발의 기억’이 바로 인생의 나이테입니다. 발의 기억을 따라가면 우리 의 인생살이가 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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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지금의 이 편지는 머리와 심장과 손으로 쓰는 듯하지만 사실 은 발의 기억의 일부요. 발로 쓰는 족필입니다. 이 세상에 족필보다 더 좋은 붓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은 족필로 쓰는 것이 요, 그 족필의 문자는 두 발로 걸어서 가는 길의 문자입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새겨진 오솔길이야말로 우주적인 문장이 아니겠는지 요. 날이 많이 찹니다.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그대의 시린 맨발에 입을 맞추고픈 겨울밤입니다.
■ 자발적 가난은 행복의 보증수표입니다.
0 스스로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을 만나기가 이렇게도 어려우니 나 또한 고 통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무지 행복이란 물건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일가요. 답답합 니다. 인생은 고해라지만 이건 해도 너무한 것이 아닌지요. 선재동자처 럼 헤매지만 우리 시대의 선지식과 청학동은 고사하고 우선 발등에 떨어 진 불을 끄지 못해 안절부절 못하는 이들만 마주치게 되니 행복한 ‘자 족의 삶’은 이상일 뿐인지요.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발언은 온통 빼앗고, 싸우고, 시기하느라 혈안 이 돼 있는 ‘사람만이 문제다’ 혹은 ‘사람만이 절망이다’로 수정돼 야 하는 것 아닌지요.
살아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죄라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요. 처참한 심정으로 걷고 또 걸었습니다. 서로 나누고 서로 모시는 세 상을 꿈꾸며 만나고 또 만났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욕망이었습니 다. 모두들 브레이크가 고장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정신없이 앞만 보며 달리고 있었습니다.
삶을 보장해 주는 것이 브레이크인데 세상 사람들은 모두 브레이크는 곧 죽음이라고 믿고 있는 듯 했습니다. 무한질주의 욕망이라는 전차에 타지 못해 아우성이고 그 전차에서 내리는 것은 곧 패배와 불행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잘못된 길을 버리거나 지우며 새로운 길을 가려 하지 않았지요. 가난한 자도 불행하고, 부자도 불행하다고 했습니다.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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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어려워 죽겠다고 했습니다. 모두들 더 갖지 못해 아우성이었습니다.
0 절대적인 가난을 이길 장사는 없지만. 대개는 ‘자발적 가난’의 삶을 선택하는 순간 불행의 급브레이크가 잡히고 행복으로 유턴을 할 수 있습 니다.
21세기 행복으로의 초대는 자발적 가난 뿐입니다. 덜 가진 자는 덜 가진 대로 자족하며, 나눌 줄 알고, 더 가진 자 또한 자족하며 나눌 줄 아는 청빈과 청부의 삶이 곧 행복의 보증수표가 아닌지요.
오늘도 지구 어느 한 귀퉁이에서는 끝내 굶어 죽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 그대여 봄마중 갑시다.
0 경칩이 오기도 전에 얼음 풀린 무논에서 조심스레 산개구리가 목청을 가 다듬으면, 섬진강 하구에서부터 매화꽃이 피어납니다. 꽃잎이 흐르는 섬 진강 물빛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해에서부터 힘차게 올라온 황어 떼가 꽃이 피는 속도로 북상하고 있습니다.
봄은 그렇게 소리로 향기로 빛깔로 온몸으로 오고 있는 것이지요. 아니 이미 곳곳에 도착하고 있으니, 고로쇠 나무의 수액처럼 우리 몸속에도 봄물이 오르고 있음을 어찌 모르겠는지요.
그러나 우리는 아직 수동적인 기다림에 익숙하다 보니 몸과 마음이 자주 아픕니다. 봄을 기다린다는 것은 분명 설레는 일이지만 밤낮의 기온차가 심한 환절기이다 보니 자주 몸살을 앓거나 입술이 터집니다.
오는 봄을 어찌 피할 수 있으며 가는 봄을 어찌 잡을 수 있으랴만 이미 온 몸에 와 닿은 봄이 ‘잔인한 봄’이 될 때 우리는 슬픕니다.
0 날이 따스해지니 그저 외투를 벗고,꽃이 피었으니 꽃구경이나 가야겠다 는 자세로는 일평생 봄을 온전히 모실 수 없습니다. 먼저 오는 봄을 향 하여 걸어가야 합니다. 벌떡 일어나 봄 마중을 나가야 하는 것이지요.
온 몸에 고로쇠 수액이 오르듯이 천천히 황어 떼가 꼬리를 치며 강물을 오르듯이 낮게 낮게, 매화꽃이 피면서 옆 나무의 꽃봉오리에게 후우 입 김을 불어 또 꽃을 피우듯이 속삭이며 속삭이며, 그 매화나무 아래 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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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개불알꽃들에게도 연대의 손을 내밀듯이 따스하게 따스하게 우리 모두 봄마중을 갑시다.
0 차를 세워두고, 하루 종일 꽃이 피는 속도로 걸어서 봄 마중을 나갑시 다. 북상하는 꽃의 속도는 가을에 남하하는 단풍의 속도와 같지만 이마 저 날씨에 따라 허루하루가 다릅니다. 꽃샘추위가 몰려오면 매화며 산수 유꽃들이 그 자리에 잠시 멈춥니다. 날씨가 좋으면 하루 백 리 길도 달 려가는 꽃의 속도이지만 문득 멈출 줄도 아는 것이지요.
대대 봄의 꽃들이 하루에 오십 리 길을 북상하니 우리는 그 반대로 하루 오십 리 길을 걸어서 남하하며 봄 마중을 나갑시다. 아직 피지 않은 벚 나무에게 말을 걸고 곧 먼 길을 떠날 철새들에게 손을 흔들며, 아직은 시린 강물에 손을 씻으며 봄을 온 몸으로 모십시다.
먹고 살기 힘든 날들이지만 이래저래 핑계만 대지 말고, 바로 그 자리에 서 벌떡 일어나 봄 마중을 나가자구요. 주변의 공원도 좋고, 동네 뒷산 도 좋습니다. 오는 봄을 맞이하지 못하고서 어찌 또 봄을 보낼 수 있겠 는지요.
0 세상사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능동적으로 잘 맞이해야 또 잘 보낼 수 있 습니다. 봄을 잘 맞이한 이는 어느새 봄을 배웅하면서도 ‘봄날은 간 다’노래를 부르며 탄식조의 애상에만 젖지 않습니다. 그 자신이 이미 온몸 그대로 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봄이면 송이송이 꽃이 피듯이 그대도 봄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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