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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지난해 한옥을 헐고 집을 새로 지었다. 공부하는 사람이니 독립된 서재 하나를 마련하고 싶었다. 아이가 둘이니 각자 공부방을 챙겨주고 싶었고, 사람 좋아하고 술 좋아하니 친구들이 몰려오면 편하게 뒹굴 공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기상청 예보연구원인 부인 최영진씨의 의견이고 정작 하선생은 밟을 마당이 조금이라도 있기를 원했다.
아마 5단쯤 되는 그가 자주 어울리는 바둑친구 중 조건영이란 건축가가 있다. 작고 콤팩트한 집을 짓고 싶다는 하선생의 뜻에 동조하고 넉넉잖은 주머니 사정도 이해하는 친구였다. 땅을 산 지 10년 만에 설계가 시작됐다( 평당 600만원 드는 건축비가 절반 정도 모아지는 기간이었다). 그리고 1년 후 집이 제 모양을 드러냈다.
바닥 면적 15평에 기역자 꼴을 한 3층 집. 담장을 없앤 대신 앞뒤로 자그마한 뜰이 생겼다. 외장은 오렌지 빛 도는 넓적한 사암을 붙였다. 화강암이나 벽돌보다 얇다는 미덕 때문에 선택한 재료였다. 공간이 좁아 1mm라도 벽두께를 줄이는 게 관건이었다. 아래층 15평엔 부엌에 잇댄 거실과 아들 방을 두고 2층 12평엔 복도로 연결된 안방과 딸의 방을 뒀다. 3층 9평은 오매불망하던 서재였다. 서재 벽엔 오래 전부터 집 지으면 당호로 삼으려고 찜해두었던 '옥선관'이란 편액을 걸었다.
"글씨가 하도 좋아 탐을 냈더니 고서점 주인이 그냥 가져가래요. 저게 아마 이덕무 선생 글씨 같은데….나중에 딴소리 할까 봐 얼른 5만원을 집어줬지요, 하하. 이 선자가 신선 선(仙)자와 같은 글자예요. 볼 관(觀)자는 예부터 집이름에 많이 써왔고. 뜻은 알아서 짐작하세요들."
하선생은 어딜 가든 승려 같다는 평을 자주 듣는다. 머리칼이 짧은 데다 표정이 맑고 한문 책들 속에서 여러 십년 살아서인가, 우리 나이로 쉰이 넘었다는데 웃는 모습이 어째 아이 같다. 실상사 도법스님과 아닌 게 아니라 꼭 닮았다.
집안은 살림살이가 거의 없다. 침대도 소파도 장롱도 카펫도 생략이다. 벽에도 붙인 게 아무것도 없이 그냥 희다. "사람들이 와보면 금방 이사했느냐고 물어요. 심지어 콘도 같다고도 하고." 수납공간도 거의 만들지 않았다. "수납공간이 많으면 쓸데없는 물건이 많아져요. 쓰지도 않는 거 잔뜩 쌓아두느라 공간을 낭비할 이유가 있습니까. 서울사람들 평생 집 늘리느라 허덕거리지만 몇 년 저축해서 한 댓평 늘려봤자 그게 수납공간으로 다 들어가잖아요. 거기 안 입는 옷, 가전제품 잔뜩 쌓아두느라고. 그리고 그 소파란 게 대한민국 사람들 척추를 다 망가지게 합니다. 이렇게 똑바로 등을 펴고 앉아 텔레비전을 보면 될 걸…. 집집마다 소파놓고 침대 놓느라고 또 한 일고여덟평을 그냥 잡아먹으니 그 공간을 벌기 위해 도대체 몇 년을 고생하는 겁니까."
그러나 이런 의견이 늘 그렇듯 아내와는 마찰이다. 쓸데없는 물건도 좀 늘어놓고 살고 싶은 것이 아내의 희망이지만 남편 말이 본질적으로 옳다는 것에는 찬동하니 별수 없이 살림을 늘리지 않는다. 창이 많지만 커튼 같은 건 아예 없다. "자연채광이 최고예요. 그리고 커튼에 먼지가 얼마나 많은데요."
터는 좁지만 옥선관은 동쪽 담장이 오래된 학교 뜰과 닿아 있어 여간 덕을 보는 게 아니다. 학교의 고목 아카시아 나무들이 옥선관의 창 앞에다 꽃과 잎과 향을 몽땅 넘겨부어준다. 이 집은 3층 서재에서 내다보는 경관이 특히 빼어나다. 동쪽 창엔 비원이, 서쪽 산엔 인왕산이 그림 속 풍경같이 다가와 옛 책을 펼쳐놓고 앉으면 현재 시점이 조선인지 고려인지 아득해진다. 그뿐만 아니라 9평 실내가 아연 광활하게 확장된다.
하영휘 선생은 임창순 선생의 지곡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하고 '아단(雅丹)문고'라는 고서도서관 연구원으로 한적들에 파묻혀 평생 옛글들을 읽으며 살아왔다. 한문 해독능력이 나라 안 최고라는 소문을 미리 듣고 갔다. "나는 역사란 게 사람 체취가 묻어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고문서에는 그게 있어요. 사람 냄새가 나거든요. 역사학자란 자료를 읽는 필드에 살아야 하건만 그 어렵고 빛 안나는 일에 나 같은 사람 말고 누가 매달리려 해야지요…. 우리 연구실 한 구석에서 무슨 편지 같은 게 수천통이 나왔습니다. 살펴보니 1800년 태어나 1870년 죽은 조병덕이란 유학자가 바로 옆 동네에 사는 아들과 주고 받은 서찰이었지요."
그걸 분석해 10년 만에 '한 유학자의 서간을 통한 19세기 호서 사회사 연구'라는 논문을 썼다. 숨어 있던 하선생이 학계의 주목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한문 초서로 쓰인 그런 묻힌 기록을 읽어낼 때, 옛 사람의 체취가 생생하게 느껴질 때 그는 행복하다. 역사학자의 길을 선택한 것이 기뻐진다. 장소도 마침 가회동이고 공간의 내음이 담백, 수수하고 눈앞에 이웃집의 골기와 지붕이 그윽하게 내려다보이기에, 무엇보다 주인의 풍모에 도학자 같은 맑음이 돌기에, 옥선관의 컨셉트는 '21세기형 선비의 집'으로 잡아야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하선생은 펄쩍 뛰었다. "선비는 무슨…. 저녁마다 인사동에 가서 술이나 퍼마시고 사람들 욕이나 해대는 주제에."
아무리 본인이 펄쩍 뛰어도 그는 이 시대의 선비임이 확실하다. 책에 묻혀 사는 건 그렇다 치고 하는 짓이 두루 예사롭지 않다. 그는 황혜성 선생을 찾아가 궁중요리를 직접 배웠다. 이 시대 기름 과잉, 양념과잉의 국적 없는 음식들에 물들기 싫어서였다.
지곡서당에 가면 하선생은 일쑤 쑥과 산나물을 뜯어온다. 그리고 퇴근 늦은 부인 대신 직접 쑥국을 끓인다. 앞에 말했듯 차 타지 않고 걸어서 출근하고 도시락을 싸들고 다닌다. 변기의 물은 하루 한번만 내리고 음식 쓰레기는 최소한으로 줄여 땅에 묻으며, 어렵게 얻은 자그만 뜰에다는 야생화를 심어 가꾼다. 딸아이 이름 '아나'는 총각 시절 시경을 읽다 나중 딸을 갖게 되면 붙이리라 미리 작정해뒀다 하고, 책 읽는 서안은 전우익 선생에게 주문해 일부러 맞춘 것이라 한다.
"봉화가 본래 소나무가 좋은 고장이잖아요. 저절로 마른 소나무가 목재로는 최상인데 산에 가면 그게 그냥 썩어가는 게 아깝다고 하셔서 내 몸에 맞는 너비 20cm짜리 책상을 선생에게 부탁했지요." 이 시대 우리가 지켜갈 진정한 품위가 뭔지, 옥선관에서 하영휘 선생을 보며 나는 속으로 목록 몇 개를 얼른 만들어봤다.
김서령 생활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사진=권혁재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