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경, 천년의 지혜를 담은 그릇(2)

2011. 4. 2. 14:09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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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 천년의 지혜를 담은 그릇(2)


■ 오윤희 저


■ 오랑캐의 대장경


월지국의 지루가참이 ‘호반니원경’의 ‘호(胡 오랑캐 호)’를 ‘범반니원경’으로 바꾼 이래 ‘개원석교록’을 비롯하여 이후의 모든 목록들이 이 원칙을 그대로 인용하며 따르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천축, 곧 인도까지도 ‘오랑캐’라고 불렀는데 이제부터는 오랑캐라는 말을 씨강(氏羌)과 같은 변방의 저속한 무리들로 제한해서 쓰겠다는 말이다. 청정한 부처님의 나라를 오랑캐로 구분할 수 없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개원석교록’에 나오는 왕조는 부진, 요진, 서진, 북량, 후위, 고제, 주 등의 나라가 이른바 오랑캐의 나라이고 위에서 언급한 ‘씨강의 무리들’에 포함되는 선비와 흉노가 세운 나라들이며 이들 오랑캐 나라에서 번역한 문헌들이 352부 1597권에 달한다.

분량만으로 따져도 삼장법사 현장의 활약으로 불전번역의 새역사를 열었다는 당나라의 통계에 비해 절대 떨어지는 양이 아니다.

또한 불교문헌이 한문으로 번역되는 시기는 오호십육국에서 남북조를 거쳐 당, 송으로 이어지는 시기이다. 곧 오랑캐의 무리(오호십육국)가 극성을 이루던 시기였고, 그들이 실크로드를 넘나들며 범어로 된 불전을 번역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아무튼 오랑캐에 대한 이른바 중국 사람들의 견해는 갈수록 심해진다. 그래서 그런지 후대의 대장경에는 낯선 고장의 이름들은 줄어들고 점차 중국식의 왕조로 바뀌어 간다. ‘요진구자국 삼장’보다는 ‘후진 삼장’을 선호하게 되고, 오랑캐의 역사는 희미해진다. 이런 일이 굳이 따져야 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대장경의 역사 안에도 그런 차별과 경향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런 견해에 따르자면 고려 또한 오랑캐의 나라일 뿐이다. ‘서유기’가 그렇듯, 천축과 중국을 빼고는 모두가 오랑캐일 뿐이다. 천축이 고상하고 크다지만, 석가모니의 나라 가비라성도 변방의  변변찮은 성이었다. 적어도 천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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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하는 고장은 아니었다. 여래의 장(藏)에 ‘변방의 저속한 무리들’을 차별하는 기억이 들어 있을 까닭도 없다. 거꾸로 고상한 계급의 언어, 범어보다 지역의 방언을 선호했다. 방언을 중시하는 태도는 대장경의 역사에도 분명하게 남아 있다. 번역의 역사이다. 불교가 넓은 지역으로 퍼져가면서 온갖 동네의 언어로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차별 때문에 고려 재조대장경의 편역자 표기방식이 유별나게 느껴진다. 혹 재조대장경의 편집자들이 이런 인종적 민족적인 차별을 의식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대장경의 역사를 중화의 역사로 독점하려는 경향에 대해 경계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의심과 상상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편역자의 출신지역을 분명하게 표기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모든 차별을 부정하는 여래의 가르침, 그런 기억의 전통을 이어 오랑캐들의 기억을 생생하게 남기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9할이 넘는 규칙성, 누가 왜 고쳤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뭔가 이유는 있었을 것이고, 이유가 있었다면 고려인들의 대장경에 담긴 주체적인 해석과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그런 개연성 정도는 상상해 볼 수는 있고, 이를 계기로 아직껏 남아 있는 이런저런 차별에 대해 생각해 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 고려 오장법사


‘서유기’에서 백마를 타고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과 함께 천축으로 떠나는 스님의 공식 명칭이 ‘당삼장(唐三藏)’이다. 당나라 때의 삼장법사라는 말이겠다. 삼장법사는 경율론 삼장에 정통하거나 삼장의 문헌들을 폭넓게 번역한 스님들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고려대장경에도 ‘대당삼장 현장 역’ ‘요진삼장 구마라 역’ 등으로 여러 명의 삼장법사들을 기록하고 있다. 당삼장은 그 중에서도 대표선수격 삼장법사이다. 인도로부터 워낙 많은 삼장을 수집하여 가져온 공도 있지만,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역장(譯場)을 열고 숱한 삼장을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나라에 삼장법사가 있었다면 고려에는 오장법사가 있었다. 느닷없이 당삼장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고려오장 얘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당삼장이 당나라의 문명을 대표하는 슈퍼스타였다면 고려오장은 만국무쌍의 고려대장경, 동아시아 대장경 문화를 대표하는 슈퍼스타였다. 다만 당삼장이 시공을 넘어 밝게 빛나는 명실상부한 슈퍼스타였다면 고려오장은 고향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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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도 빛을 내지 못했던 숨은 별이었을 뿐이다.


대각국사 의천, 고려속장경을 처음으로 편찬한 분이다.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사실이다. ‘대각국사 문집’에는 속장경 편찬에 관련된 사연을 담고 있다. 속장경이라는 표현은 근래 일본의 학자가 붙인 이름이다. 대장경에 이어서 조성한 ‘속편 대장경’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의천은 물론이고, 그 이전의 누구도 속장경이란 말을 쓴 적은 없다. 의천은 ‘여러 종파의 교장(敎藏)’이라는 뜻에서 ‘제종교장(諸宗敎藏)’이라고 불렀고, 줄여서 그냥 교장(敎藏)이라고도 했다.

의천은 기존의 대장경을 삼장의 정문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삼장에다 하나의 장을 더하겠다고 했다. 그는 더하고자하는 일장을 ‘삼장의 정문’에 대응하여 ‘백가(百家)의 과교(科敎)’ 또는 ‘百家의 장소(章疏)’라고 불렀다. 삼장에 대한 주석서들을 가리킨다. 백가라는 말은 ‘제자백가’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여러 종파를 가리킨다. 경장, 율장, 논장, 이 전통의 삼장에다 교장이라는 일장을 더해 삼장을 사장(四藏)으로 늘리겠다는 것이다.

의천은 말이나 소망, 포부를 넘어 살아서 이를 실현시켰다. 오천 권 규모의 장소, 주석서들을 모아 목판에 새겼다. 삼장의 정문, 대장경에 버금가는 대규모의 결집이었다. 이것이 속장경이고, 제종교장이다. 의천 이전에는 누구도 흉내내지 못했던 일이었다. 근대에 이르러 일본 학자들이 의천의 교장을 속장경이라는 이름으로 평가했고, 이를 이어 속장경이라는 이름으로 재현했다.


의천의 교장을 처음 체계적으로 연구 정리한 사람이 일본의 오야 도꾸죠(大屋德城)라는 학자였다. 그는 ‘신편제종교장총록’이나 교장의 현존본들은 물론, 의천이 결집한 모든 문헌들을 모두 조사하여 1937년 ‘고려속장조조고(高麗續藏雕造攷)’라는 책을 출간했다. 지금까지도 교장연구의 결정판이라는 평가를 받는 책이다. 이후 교장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껏 이 연구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교장의 편찬을 다방면으로 발달했던 고려문화, ‘불교문화의 정화(精華)요, 공전(空前)의 위관(偉觀)’이라고 찬탄했다.

만국무쌍과도 견줄 수 있는 또 다른 차원의 극찬이었다. 가치 평가는 아는 사람만이 내릴 수 있는, 말하자면 일종의 특권 같은 것이다. 본 사람만이 아는 법이다. 팔만대장경, 고려속장경, 고려대장경에 대한 가치 평가는 모두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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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의 학자들로부터 나왔다. 보았기 때문이고 알았기 때문이겠다.

이로 인해 대장경의 규모는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당시 대장경의 규모는 6000여 권, 고려 이후 원, 명, 청 대장경들도 이 규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고려사와 김부식이 지은 ‘영통사 대각국사 비문’의 기록에 따르면 흥왕사 교장도감에서 4000여 권이 조성된 것으로 보이고 일본에 현존하는 ‘신편제종교장총록’에는 총 4857권의 문헌이 포함되어 있다.

이 문헌들은 의천이 송나라를 직접 방문하여 수집한 장소, 이후에 송과 거란과 일본등과 교류하며 수집한 장소, 국내의 사찰들을 다니며 직접 수집한 장소들을 망라한 것이었다. 이런 숫자만 보더라도 의천의 결집을 통해 대장경의 규모가 11,000~12,000권 규모로 확장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의천은 교장의 결집에서 멈추지 않았다. 5천 권의 주석서에 이어 교(敎)에 보완이 되는 ‘고금의 문장’을 모아 ‘석원사림(釋苑詞林)’을 결집하려 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했다. 의천이 평소에 수집하고 정리해 두었던 자료를 그의 문인들이 250권으로 묶어서 펴냈을 뿐이다.

의천의 교장도 하루아침에 그저 생겨난 것은 아니다. 새로운 그릇이 필요하다는 요구와 전통을 잇는 일이었고 새로운 결집을 완성시키는 일이었다. ‘현성집’의 전통과 원조의 ‘정원속개원석교록’이 의천의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의천은 백가의 장소에 대하여는 제일장으로서의 지위를 당당히 주장했다. 삼장을 넘어 사장의 결집이 완성된 것이다. 양으로 보아도 원조의 64권에 비해 교장의 5천 권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그 사이에 3백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석원사림’도 원조의 사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주석서 이외의 문장들을 담는 일이었고 내용도 유사하다. 그래도 ‘석원사림’의 분량은 크게 늘었다. 의천의 집성이 중요한 까닭은 무엇보다 목록에서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의천은 현존하는 문헌들을 수집하였고, 정리하고 교정하여 목판에 새겼다. 역사상 처음으로 양에서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대장경을 완성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의천은 현종조부터 이어 온 초조대장경, 삼장의 정문의 역사를 이어 제4장인 교장을 조성했다. 삼장의 정문에 백가의 장소를 묶어 12,000권에 달하는 대규모 문헌집성을 완성시킨 것이다. 말 그대로 공전의 위관, 의천은 아난과 가섭에서 시작된 결집의 역사에 뚜렷한 획을 그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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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의천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의천이 몇 년만 더 일을 할 수 있었더라도 고려대장경의 모양새는 아주 달라졌을 것이다. 고려대장경에 수천 권의 문장이 더 추가되었을 것이고 공전의 위관을 넘어 천 년의 한문 불전이 고려대장경이라는 이름으로 완벽하게 결집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 대장경의 역사, 불전의 역사도 아주 달라졌을 것이다. 의천의 일은 그렇게 불과 몇 걸음 앞에서 멈춰졌다.


삼장법사라는 말도 그저 호칭일 뿐이다. 삼장을 번역하거나 집성하는 분들, 그런 분들이 일생에 했던 일에 대한 평가랄까. 말하자면 훈장 같은 것이겠다. 그러나 천 년의 고려대장경을 돌아보며, 의천이라는 존재를 생각하면 불편한 마음이 앞선다. 일본 학자가 찬탄했던 ‘고려문화의 정화(精華)요, 공전(空前)의 위관(偉觀)’을 드리운 분이다. 

의천이 정말로 그런 분이었다면 그에 대한 평가도 어차피 시간문제일 것이다. 바른 때가 온다면 새삼 빛나는 별이 될 것이다. 그렇긴 해도 닥쳐온 천 년의 순간, 의천에게 오장법사라는 훈장 정도는 바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의천이 했던 일, 일에서만큼은 넘치는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의천의 고려대장경


고려사에는 현종 2년(1011) 고려대장경 조성을 시작한 이후 성종 4년(1087) 초조대장경 완성, 그리고 고종 38년(1251) 재조대장경이 완성되기 까지 240년이라는 시간 속에 섬처럼 한점한점 쪼가리 기록들만 남아 있다.

고려대장경은 그런 틈새 사이에 떠 있는 섬 같은 존재다. 우리는 아직도 고려대장경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하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 어떤 연유나 경로를 거쳐 해인사로 옮겨지게 되었는지조차 분명치 않다. 세간에서는 고려대장경이라는 섬을 단지 ‘몽고병화로 인해 16년 만에 새로 새긴’ 물건으로 기억할 뿐이다. 그런대도 고려대장경은 만국무쌍 진미진선, 수세기 동안 아시아 불교문헌의 표준으로 존경을 받아 왔다. 일본인들은 고려대장경 한 질을 얻기 위해 예절도 굴욕도 상관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의천의 ‘대각국사문집’에는 그나마 그런 빈 공간을 채워 줄 증거들이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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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교장 조성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사이에 대장경의 역사를 돌아보기도 하고, 대장경이 지닌 가치와 의의를 역설하기도 한다.

그래서 의문으로 가득한 시간의 틈새를 메우기 위한 상상의 원천이 되어 준다. 그리고 의천이 꿈꾸었던 천년의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새로운 대장경의 꿈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의천은 분황사에서 원효의 초상화를 보고 감격에 겨워 제를 올리며 글을 쓴다. 여기서 그는 원효를 성사(聖師)라고 하고 해동보살이라고 칭한다. 원효는 100여종이나 되는 주석서를 저술했다.(현재 남은 것은 20종) 그는 화쟁국사(和諍國師)라 불렸고 그의 세계를 통방지훈(通方之訓)이라는 한 마디 말로 요약했다. 빈자리 없이 어디에나 통하는 가르침이다. 원효가 이 책 저 책 종파를 넘나드는 광범위한 저술을 했던 까닭은 그 뜻이 백가의 이쟁을 화합하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의천이 백가의 장소를 수집하려는 까닭은 원효의 뒤를 잇고자 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원효는 의천의 롤모델이다 그저 좀먹은 책이나 수선하고 글자 한두 개 가지고 고심하던 고리타분하고 지루한 일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크고 화려한 꿈, 자유분방한 상상력도 있었다. 그들의 꿈과 상상력은 천 년을 넘나들고 사막과 설산을 주름잡았다. 그 세계를 종으로 횡으로 누비던 사람들이었다.

의천이 원효의 통방(通方)과 백가(百家)의 장소에 주목하는 까닭은 “스승은 각기 자신의 종습(宗習)만을 북돋우려 하고, 제자들은 또한 보고 들은 것만을 집착”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자기네 얘기만 하고 남의 얘기는 보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자기들이 좋아하는 책만 읽고, 생각이 다르고 그래서 맘에 들지 않는 책은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의천은 이런 풍속을 경박한 말세의 풍속이라고 한탄했다.


말법에 무너지는 가르침의 그물 그 누가 알리

모두들 구구하게 명리만을 재촉하네     

등(燈)을 전해 도(道)를 돕는 일 참으로 신기한 일

위통(魏統)은 숲 같은데, 재목 없음을 부끄러워하네.


교망(敎網), 가르침의 그물, 의천은 가르침을 그물망 요즘식으로 얘기하자면 네트워크로 이해한다. 그물은 대장경에서는 참으로 익숙한 비유이다. 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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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큰 깨달음의 세계를 그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그물은 이를테면 연기(緣起)의 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비유이다. 서로가 연결되어 끊임없이 소통하며 끊임없이 생성하는 역동적인 그물망, 의천의 또 다른 롤모델, ‘개원석교록’의 지승은 화망(化網)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교화의 그물’이다.


의천은 당시의 상황을 말법의 시대. 교망이 훼손된 시대로 이해하였다. 이것이 그의 시대정신이었다. 그래서 교망을 복구하는 일을 그의 시대적인 사명으로 삼았다. 그리고 교장의 결집은 그가 선택한 시대적 수단이었다.

의천은 자신의 시대를 ‘교망이 훼손된 시대’로 이해하는 한편,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이후, 천 년의 역사를 ‘종파별로 발전해 온 종승의 역사’로 이해 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원효가 있다. 가장 정교한 종승의 일을 원효는 교장 전체로 확장시켰고, 모든 종파 모든 방향으로 전개했다. 이것이 의천이 그리던 이상적인 불교, 이상적인 대장경의 모델이었다.   


우리가 아는 고려대장경은 송나라의 개보대장경에 큰 빚을 지고 있다. 그래서 ‘고려’라는 이름을 달기조차 민망한 면도 없지 않다. 의천의 고려대장경은 명실상부 고려대장경이다. 무엇보다 그 안에는 고려인의 생각과 노심초사가 담겨있다. 교망의 종승, 이들을 묶는 통방과 화쟁, 고려인들이 발견한 고려인들의 생각과 꿈이 담겨 있다. 의천의 고려대장경 안에는 그런 생각과 꿈을 바탕으로 한 고려인의 설계도가 들어 있다. 고려인이 설계한 고려인의 그릇이다. ‘달단의 무리’가 없었고, 그래서 그때, 의천의 고려대장경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대장경의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아니 어디 바뀌는 것이 대장경뿐이겠는가?

그래봤자 그런 고려대장경은 지금 없다. 숲과 개울가의 즐거움마저도 넉넉히 즐기지 못하고 간 의천이다. 사라졌다고 잊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겠다. 그의 꿈과 노심초사, 그거라도 잊지 않는 게 고려대장경의 꿈을 이어가는 길일 것 같다.


대각국사 의천은 문종의 아들로 태어나 11세에 출가했다. 19세 약관에 친형인 왕에게 교장을 집필하겠다고 포부를 밝힌 후, 31세에 반대를 무릅쓰고 중국행을 강행한다.

의천의 문집에는 교장과 관련하여 세 편의 글이 남아 있다. 열아홉 살에 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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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원상소문(代世子集敎藏發願疏)과 ‘신편제종교장총록’의 서문, 그리고 교장의 조인(調印)을 청원하는 상소문의 세 편이다. 시간도 다르고 목적도 다르지만 내용으로 보면 이 세 편은 대동소이하다. 그는 끝내 1091년에 조인을 시작하여 교장을 완성, 대장경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1101년에 입적하였으니 세수 47세 법랍 36세였다. 짧은 인생이었지만 그의 글과 인생사에는 무서울 정도로 놀라운 집념과 집중력이 담겨 있다.


■ 책을 찾는 여행


의천은 선종 3년(1085) 4월, 오랫동안 염원해 오던 송나라 여행을 단행한다. 선종은 그의 친형이고 어머니도 살아계실 때였다. 상소문도 올리고 눈물로 호소도 했지만, 송과 요나라와의 외교관계가 어수선한 때여서 조정 중신들의 강한 반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의천은 제자 한 사람을 데리고 장사꾼의 배를 물색하여 말하자면 밀항을 결행했다. 선종은 이 소식을 듣고 의천의 제자 몇 사람과 관료들을 뒤따라 보내 의천을 돕도록 배려했다. 의천의 여행은 준비된 여행이었다. 송나라 땅 밀주에 도착하자. 밀주의 관아로 편지를 보내 구법의 의지를 밝히고 도움을 청했다. 아득히 먼 동방으로부터 대국의 문물과 스승을 구해 바다를 건너 왔다는 얘기이다.

이후 의천의 소망이 통했든, 뒤따라 온 고려 관리들의 외교력 탓이든 송의 철종 황제와 황태후가 직접 나서 외교사절단 수준의 특별한 대우를 하게 된다. 어머니 인예태후도 경비를 보내고, 송의 조정에서도 여러 가지로 배려를 하여, 처음 떠날 때의 비장함에 비해 편안하고 풍족한 여행을 하게 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선종이 철종에게 편지를 보내 의천의 귀국을 종용하게 되자 14개월 만에 법상종, 화엄종,  천태종, 남산종의 향로와 불자를 전해 받고, 제종의 교장 삼천여 권을 수집하여 귀국한다. 그 사이 돌아다닌 곳만 해도 산동, 강소, 안위, 하남, 절강 등이었으니 짧은 기간 안에 간 곳도 많고 만난 사람도 많고 얻은 소득도 많았던 성공적인 여행이었다고 하겠다.


의천의 여행은 처음부터 철저하게 준비된 여행이었다. 그리고 준비된 목표를 거의 완벽하게 성취했다. 우선 의천의 목적지는 미리부터 정해져 있었다.

의천은 귀국한 뒤에도 정원을 비롯하여 송과 요, 일본, 고창국 등의 학승들과 활발히 교류를 가졌다. 모두 책에 관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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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3 장,   교정 이야기 》


■ 고려 교정 각판장


교정, 아마도 고려대장경 이야기 가운데 가장 극적이고 흥미진진한 부분이 바로 이 교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물론 고려대장경이 교정대장경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교정이 책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책이라는 물건이 그때나 지금이나 익숙한 물건이듯, 교정이라는 일도 익숙한 일이다. 교정을 하다 보면 미심쩍은 일도 생기고 선택이나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들도 생긴다. 최선의 선택도 있을 수 있지만, 차선을 고민해야 할 때도 있다. 개선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개악을 하게 되는 경우도 물론 있을 수 있다. 아무리 애를 쓰고 정성을 들여도 엉성한 문맥과 오자는 남는다. 고려대장경 교정의 흔적을 찾아 가는 일도 마찬가지다. 천 년 전 책을 만들던 사람들의 생각, 그들의 선택과 결단, 고민과 정성의 흔적을 찾아가는 일이다.


국본(초조대장경), 단본(丹本, 거란본대장경), 송본(宋本, 개보대장경)을 나란히 놓고 대조해 보고 그 차이를 밝히는 일,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그 일을 재조대장경 당시에도 했었다. 그리고 틀리는 부분에 대한 기록을 남겨 ‘미래의 현명한 사람들에게 고(告)한다’고 했다.

대단한 기록이다. 이런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을 달리 보는 것이다. 이런 기록 앞에서 시비를 붙을 현명한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흔치 않다. 아무튼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할 일이다. 우리가 현명한지는 몰라도 미래의 사람인 것만은 틀림없기 때문이다.


고려대장경 전산화 사업을 시작한 게 1990년 무렵이다. 고려대장경 일을 하면서 늘 궁금했던 것도 교정에 관한 문제였다. 5천 2백만 글자, 1천 5백여 종의 문헌, 구두점도 없는 새카만 한문본을 교정하는 일이다 저본으로 사용했다는 북송본, 국전본, 거란본, 여기까지만 해도 2만 5천 권이 넘는다. 여기에 수 종의 필사본, 주석서 등 여러 편본들을 일일이 대조해야 했다. 상상이 가질 않는다.

지금은 컴퓨터도 있고, 복사기 프린터도 있고, 종이나 빨간 연필도 넘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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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세상이다. 일본이나 대만, 중국 등 한문대장경 전산화 사업을 하던 그룹이라면 모두가 느끼던 막막함이다. 교정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나마 그런 경험을 하면서 조금이나마 일 맛을 봤다고나 할까? 그래서 할 수 있는 얘기이다. 고려대장경의 교정, 몇 년 안에 뚝딱 해치울 수 있는 일이 절대로 아니다. 요즘세상에서도 사정이 이런데, 13세기 강화도에서 그것도 전쟁통에 믿기가 어렵다. 16년이라는 시간도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불교문헌의 역사는 질과 양, 유통한 공간과 시간, 어느 면을 보아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고 방대하다. 여러 지역 언어로 번역되고 다양한 계통을 통해 전승하고 유통했다. 단순한 언어의 차이만이 아니라, 문화의 연원이 다른 지역들로 퍼져 나가면서 오독이나 오해도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진짜와 가짜, 정통과 방계의 사이비 논쟁이 끊이질 않았고, 그만큼 교정의 요구도 클 수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대장경이라는 문헌 집성 자체가 그런 역사의 필연적인 귀결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대장경의 역사는 불교라는 특정 종교의 역사 이전에, 문헌의 역사이며 지식과 문화의 역사이다. 2500년에 걸쳐 광범위한 지역에서 생겨나고 떠돌았던 기억의 역사이다. 대장경은 불교문헌, 특정 종교의 경전이라는 이유로 왜곡되거나 가볍게 취급되어 온 면이 있다. 앞에서 인용했던 별자리 이야기(A), 그런 얘기가 특정 종교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교정을 하던 일만 해도 그렇다. 대장경 교정의 역사는 목판인쇄술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매체혁신과 긴밀하게 연결된 지적 문화적 의의를 갖고 있다. 

고려대장경이 없었다면 아주 잊혀지고 말았을 숱한 이야기들이 있다. 세간의 이분법을 빌리자면 온전하게 남아 있는 해인사 팔만대장경이 미디어라면 그 안에는 컨텐츠가 담겨 있다. 교정이야기는 소프트웨어, 컨텐츠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이런 이야기야말로 진짜 세계의 기억(Memory of World), 인류의 유산이 아닐까?   

* A, 牛宿이라는 별자리가 당시 서역에는 없었고, 중국에는 우수가 포함된     28수의 별자리를 사용했다.


고려대장경을 교정대장경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교정이라는 일을 그때 처음 창안해 냈던 것도 아니고, 고려대장경만 유독 교정을 했던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고려 재조대장경보다 1세기 이상 일찍 조성된 금나라 대장경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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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한 흔적이 남아 있다. 아직 본격적인 연구가 이뤄진 적이 없어서 분명하게 단언할 수는 없지만 고려 재조본의 교정과 금장의 교정 사이에도 특정한 상관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교정에도 역사가 있고 계보가 있다.


초조대장경이 공개되기 시작했다. 초조대장경은 교정의 문제를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알짜배기’ 가능성을 함께 가져다 주었다. 재조대장경이 북송본을 저본으로 국본(國本)과 요본(遼本, 거란본)을 대교했다고 하는데, 이전에는 ‘교정별록’에 인용된 문장들 외에 확인할 길이 없었다. 남아 전하는 북송본이나 거란본이 각기 불과 십여 권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상황이 더 나빴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영인본만이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일한 대장경이었다. 비교할 대상이 없으니 알 수도 짐작 할 수도 없었다. 2004년 이후 이천여 권의 초조본이 공개 되었다. 이천여 권이면 대장경 전체 분량의 1/3에 육박하는 양이다. 이제 초조본과 재조본 사이에 발견되는 차이, 그 차이 안에  재조대장경에서 했던 교정의 실체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 재조대장경 교정의 실태


* 교정과정에 대한 전문적인 내용이 담겨 있음  


■ 재조대장경 목록체계와 고려대장경의 꿈


앞에서 소개했던 개보대장경은 ‘개원석교록’을 기초로 조성한 대장경이다. ‘개원석교록’이 엄정한 설계하에 체계적으로 문헌들을 분류했기 때문에 개보대장경 까지만 해도 대소승의 삼장과 인도와 중국에서 찬술한 ‘현성집’ 등으로 분류의 원칙이 지켜졌다. 하지만 개보장 이후의 대장경에서는 위의 초조본 , 금장, 재조본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분류의 원칙이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 시간을 두고 이것 저것 필요한 문헌들을 입장하고 있지만, 원칙도 없고 체계도 없다.


흔히 재조대장경의 목록체계를 ‘누더기’라고  폄하하지만, 이는 재조대장경만의 문제가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양적으로는 분명히 성장하고 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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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이지만, 질적으로 보자면 지속적으로 퇴보의 경향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경향은 근대 일본에서 대정신수대장경을 완전히 새로운 분류 체계로 정리할 때까지 개선된 적이 없었다.


재조본의 구조를 의천의 언급에 다시 비춰보면, 의천의 시대에 이미 재조본 골격이 완성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말은 의천이 대장경, 의천의 표현을 따르자면 ‘삼장의 정문’이 체계없이 증보되어 왔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의천은 경록(經錄)의 역사나 문헌의 교정에도 두루 익숙한 전문가였다. ‘공전(空前)의 일’ ‘삼장의 정문’에 버금가는 대량의 문헌을 집성했던 사람이다.

의천에게는 분명 더 큰 대장경의 그림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의천의 고려대장경은 몽고군의 침략과 함께 재로 사라졌다. 그리고 고려대장경은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재조대장경으로 남았다. 재조대장경 안에는 의천의 고려대장경은 없다. 어렴풋한 흔적만 남기고 의천의 꿈도, 고려대장경의 꿈도 불에 타버린 셈이다. 재조대장경 ‘교정별록’의 편집자 수기(守其)는 ‘신조대장경(新調大藏經)’ 새로 새긴 대장경이라고 불렸던 그 대장경은(의천의 속장경) 그래서 미완의 대장경이다. 2세기 전 부인사의 장경각을 채웠던 대장경은 해인사 장경각을 채운 대장경과는 다른 대장경이다. 양에서도 질에서도, 꿈에서도 새기다가 만 대장경이다.


근래 한글대장경을 조성하면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다. 한글대장경의 편집자들은 처음부터 ‘고려대장경을 우리말로 번역한다’ 는 명분을 내세우고 번역사업을 추진했다. 하지만 편집위원회가 선택한 편제는 일본의 신수대장경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번역의 영역이 팔리삼장이나 한국의 저술 등으로 확장되면서 한글대장경의 편제는 고려대장경보다 더 심한 누더기가 되고 말았다. 편제를 정리하는 일은 역시 당장의 번역사업에 밀려 이후의 일로 늘 미뤄졌기 때문이다.

한글대장경의 편집자들도 물론 소망이 있고 꿈이 있을 것이다. 새로운 대장경, 새로운 틀에 대한 일이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한글대장경의 구성은 의천의 꿈에 근접해 보인다. 한국의 저술들을 포함시키면서 장소와 문집류가 다량으로 입장되었기 때문이다. ‘삼장의 정문’ ‘백가의 장소’ ‘고금의 문장’이 고루 섞여 있다. 기왕에 새로 만드는 일, 못다한 고려대장경의 꿈을 다시 시도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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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장,  천년의 장(藏) 》


■ 천하를 천하에 담는다.


배를 골짜기에 감추고, 그물을 못 속에 감추고는 안전하다고 한다. 그러나 한밤중에 힘이 있는 자가 지고 달아나더라도, 어두운 자는 알지 못한다. 크고 작은 것을 잘 감추어 두더라도 달아나는 것이 있다. 그러나 만일 천하를 천하에 감추어 둔다면 달아날 수가 없다. 이것이 영원한 존재의 큰 실상이다.

‘장자’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감춘다는 말도 장(藏)이다. 천하를 천하에 감춘다(藏天下於天下)고 한다. 이 말은 또 무슨 말일까?

장자에게 세 가지 감춤(三藏)이 있으니, 산을 못 안에 감추는 것이요, 배를 골짜기에 감추는 것이며, 천하를 천하에 감추는 것이다. 안전하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무상(無常)이 한밤중에 지고 달아나더라도 어두운 자는 깨닫지 못한다. 세 가지 장이라는 것은 사람을 집안에 감추거나, 물건을 그릇에 감추는 것은 작은 감춤(小藏)이요. 배를 골짜기에 감추거나, 산을 못에 감추는 것은 큰 감춤(大藏)이다. 천하를 천하 안에 감추는 것은 장소가 없는 감춤(無小藏)이다. 크고 작다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모두 감출 수는 없다. 다만 생각이 생각을 흘러서 새록새록 옮겨 바뀌니 이로써 변화하는 도리에는 피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겠다. 천하를 천하에 감춘다는 것이 어찌 감추는 것이겠는가? 장소가 없는 감춤이라 하겠다.


장자의 藏 에 대한 ‘종경록(宗鏡錄)’의 해석이다. ‘종경록’은 송나라 때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 스님이 지은 책이다.

연수는 소장, 대장, 무소장의 삼장으로 구별했지만 명나라 때 덕청(德淸)이라는 분은 소장이나 대장을 유소장(有小藏)이라 해석한다. 이렇게 하면 세 가지 장이 아니라, 유소장-무소장이라는 두 가지로 설명이 된다. 이런 불교식의 해독은 부처님이 늘 하시던 말 ‘여래는 감추지 않는다. 무소장적(無所藏積)’을 연상시킨다.

어쨌거나 무소장이라는 해석은 연수의 독특한 해석인 것만큼은 분명하고, 藏 을 공간적으로 해석했다는 것도 분명하다. 연수가 장자의 이 말을 인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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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까닭은 무상(無常), 순간순간 생각생각으로 변하는 세상과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변화로부터 피하거나 숨을 공간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감추려고 하지 않고 피하려고 하지 않는 일, ‘천하를 천하에 감추는 일’을 얘기하는 것이다.  


잘 감춘다는 것은 하늘에 감추는 것이다. 태허라는 것은 하늘의 실상이다. 비었는데도 감추는 쓰임새가 있으니 그 감춤은 감춤이 없는 것(無藏)이다. 물건을 숨기지 않는다면 사람들도 다투지 않는다. 크게는 천하로부터 작게는 한낱 물건이라도 힘으로 잡아당기면 망가지고 지혜로 덮는다면 잃어버린다. 물건마다 물건대로 놓아 두어 자연에 감춘 뒤에 하늘의 처분을 기다려야 한다.


하늘에 감추고, 자연에 감추고, 물건은 물건대로 물건에 맡기고, 장자의 ‘감출 장’ 자에 대한 조식의 견해이다. 이 글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이 소장했던 그림 병풍에 부친 단상이다.      

바라건대, 집안에 소장하지 말고 선생의 서원에 소장토록 한다면 이것이 잘 감추는 일이지 않겠는가. 만일 쇠로 봉하여 대대로 지킨다 해도 골짜기 안에 배를 감추는 격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상상은 자유라지만, 상상에도 흐름이 있고 품격이 있는 것 같다. 장천하어천하(藏天下於天下), 장자의 상상력은 영명연수의 무소장으로 변주되고, 조식의 무장의 장으로 구체화 된다. 조식은 자연에 맡기는 천장(天藏) 이를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모델까지 제시한다. 집안에 모셔두지 말고 서원에 두라고 한다. 복잡할 것도 없다. 좋은 물건을 감추지 말고 함께 나누라는 말이다.

이른바 유불도(儒彿道) 삼교(三敎)의 거물들이다. 서 있는 자리가 다르고 생각의 바탕도 다르다. 그런데 장(藏)이라는 글자 하나를 매개로 이들은 비슷한 상상과 비슷한 얘기를 나눈다.


그런데 초조대장경 이미지들을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여 인터넷 시험서비스를 막 시작하고 한 시간도 되지 않아서 누군가 하염없이 사이트의 부하를 독점하고 있었다. 회원제로 방침을 바꾸고 어찌어찌 방어 작전을 펴기도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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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그저 남이 하는 대로 여러 가지 방법을 하는 도리외에는 완벽하게 안전한 방법이란 없어보였다.

장천하어천하(藏天下於天下)/ 천하를 천하에 담는다.

  그냥 멋진 표현만은 아니다. 인터넷은 이미 우리의 천하이다. 인터넷에 그냥 열어 놓는 일이 가장 안전한 일이다. 어디선가 누구인가 보고 있으면 될 일이다. 필요한 사람이 가져다 어디엔가 저장하겠지. 천하에 담긴 물건은 절대로 사라지는 법이 없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조식이 서원에 두라고 조언했던 그 그림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자연으로 돌아갔을까? 누군가가 아직도 보고 있을까?


■ 천 년의 지혜를 천 년의 미래로


의천은 그의 문집에서 몇 차례 천 년의 시간을 언급하고 있다.


지혜의 태양(慧日) 천 년을 비춰오니, 이어 온 가르침 얻은 기쁨 한이 없네.


고금의 현인과 철인들의 주소(注疏 : 자세한 설명)가 천 년 동안 대대로 계속되어 이 또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천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해와 달고 함께 나란히 걸리고, 귀신과 오묘함을 다투도록 해야 합니다.


법륜(法輪)을 다시 염부제에 굴려 道 의 광명이 천 년을 다시 비추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천 년의 지혜를 천 년의 미래로’라는 구절은 말하자면 의천의 저런 언급들을 한 데 뭉뚱그린 것이다. 과거로부터 이어 온 지혜의 햇빛, 그 빛을 천 년 뒤까지 다시 비추도록 하는 일이다. 의천은 그 일을 문헌의 결집, 교장(敎藏)의 조성에서 찾았다.


의천이 출가하던 시기로부터 천 년 전 불교가 중국 땅으로 들어 올 때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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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마등과 축법란이 가져온 ‘사십이장경’이라는 책은 새로운 천 년 역사의 시작이 되었다.

의천이 넘겨받은 것은 천 년을 이어 온 책의 역사였다. 책 한 권의 역사는 6천 권의 대장경이 되었고, 다시 오천 권의 교장이 되었다. 의천은 그가 물려받은 책 한권이 그냥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 안에 담긴 지혜 그리고 그런 지혜를 얻기 위해 또는 전하기 위해 치러야 했던 값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무튼 2011년은 또 다른 천 년의 순간이다. 그리고 이 순간은 우리가 맞이하는 우리의 순간이다. 우리라고는 하지만 우리란 게 또 무엇인가? 시간에 새긴 금이 허망하듯, 우리라는 금도 허망하긴 매한가지겠다. 그 순간을 함께  숨쉰다고 해서 그 순간이 그냥 우리의 순간이 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주는 자가 있으면 받는 자도 있어야 한다. 받는 자가 없다면 받는 일도 없을 것이다. 당연히 줄 수도 없고 주는 일도 없을 것이다. 


■ 디지털 대장경


0 EBTI 전자불전협의회 결성

- 1993년 봄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루이스 랭카스터 교수의 자택에서 태    국 마이돌 대학의 젊은 스님들과 세계 각국의 불교 학자들이 모임

- 한문불전, 한문대장경에 관심집중 : 당시 한국은 고려대장경 전산화 사업    이 출범한지 몇 달도 안 됨

- 고려대장경 전산화를 가장 먼저 시작했던 사람도 루이스 랭카스터 교수였    고, 후일 그는 2백만 자 규모의 입력 자료를 고려대장경 연구소에 조건없    이 기증

- 종림 스님은 삼성전자의 지원을 얻어 1996년 고려대장경 입력 완성 및     2000년 검색 프로그램을 내장한 CD-ROM 발표


0 통합대장경의 꿈 : 팔리어, 산스크리트, 티베트 등 모든 언어, 여러 전통의    불전들을 통합시키려는 시도 

1. 입력을 위한 모색단계 : 산발적으로 불전 전산화가 시작되던 때로부터       1996년 고려대장경 입력이 완료된 시점까지               

2. 활용을 위한 모색단계 : 1996년 - 2000년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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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통합을 위한 모색단계 : 1999년 이후 현재까지


0 중국의 ‘신편대장경’ 계획

   2006년 현대인들의 독서 습관에 맞추어 최고의 선본(善本), 통일된 편집방식, 번체자 출판, 이체자들의 표준화, 적당한 단락 구분, 나아가 새로운 표점 장식을 채용하여 대장경의 현대적인 형식을 철저하게 완성시킬 예정이라고 했다. 이 계획은 원래 중국 최대의 출판사업이라는 기치 아래 5년을 목표로 시작했으나, 이후의 진행은 시작처럼 화려하지만은 않아 보인다.


0 2008년 2월 대만에서 열린 EBTI 국제학술대회에서 IBA프로젝트 발표

  중국의 ‘신편대장경’계획보다 훨씬 유연하고 실용적임

- 각국의 여러 기관이 확보한 디지털 자원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목록작성 및 방안 강구

불전전산화 이 일은 그릇을 바꾸는 일이었다. 전산화라는 용어 안에는 그릇을 바꾸는 일에 대한 열망이 담겨있다. 고려대장경을 전산화한다는 말은 고려대장경을 전자라는 매체에 옮겨 담는다는 뜻이었다. 처음 전산화를 시작하면서 세웠던 목표도 그랬다. 고려대장경을 있는 모양 그대로 컴퓨터 안에 집어넣겠다는 목표였다. 이전부터 존재하던 내용을 그대로 새로운 그릇에 옮겨 담는 일이다. 일의 중심은 그래서 언제나 그릇에 있었다. 대정신수대장경 프로젝트도, 팔리나 티베트문헌의 전산화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일이 어디 그런가? 그릇이 바뀌면 당연히 내용도 바뀌는 법이다. 아니 그릇에 옮겨 담으려면 내용물을 먼저 그릇에 맞춰 주어야 한다.


■ 바다 그릇(海藏)


용녀(용왕의 딸) : 대왕이시여, 이 성인을 뵙자니 절대로 소인배가 아닙니다. 우리 해장(海藏)안에 천하(天河)의 강바닥을 다지던 신진철(神珍鐵)이라는 무기가 하나 있는데, 요 며칠 사이에 노을빛이 아름답게 빛나고 상서로운 기운이 등등하였습니다. 이 성인을 만나려고 나타난 징조가 아닌가 싶습니다. 

용왕 : 그것은 우왕(禹王)이 물을 다스릴 적에 강과 바다의 깊이를 고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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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해 바닥을 다지던 물건이다. 이런 신비한 쇳덩이를 어디에 쓰겠는가?

용왕의 부인 : 그가 쓰건 못쓰건 상관할 것 없습니다. 그냥 줘 버립시다. 어떻게 고쳐 쓸지야 그가 알아서 할 것이고 . 중 문을 나가 주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오공 : 가져와 보세요. 내가 볼 테니.

용왕(손을 저으며) : 멜 수도 들 수도 없습니다. 상선(上仙)께서 직접 가서 보실 수밖에 없습니다.

오공 : 어디 있어요? 당신이 날 데려다 줘요.

용왕이 도리 없이 오공을 안내하여 해장(海藏)으로 가는 중간에 문득 금빛이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용왕(빛을 가리키며) : 저기 빛나는 게 바로 그거예요.

오공이 옷을 걷어 올리고 만져보니, 그것은 쇠기둥이었다.


서유기의 초반, 제천대성 손오공이 용궁에 들어가 여의봉을 ‘갈취’해 오는 장면이다.  용왕은 오공의 억지에 못이겨 ‘해장(海藏)을 열고 여의봉을 보여 준다. 신비한 보배쇠로 만든 여의봉은 예전 우왕이 치수 사업을 벌일 때 강과 바다의 바닥을 다지던 도구였다고 한다. 쓸모가 다했는지 바다 깊은 창고에 보관해 둔 물건이 이제 새로 임자를 만났다. 토목공사에 쓰던 도구가 오공의 무기로 다시 빛을 발하는 장면이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을 때 마법의 채찍을 휘두르면, 산과 바위들이 저절로 움직였다는 전설도 있다. 요즘 세상에 꼭 필요한 마법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용궁해장은 불교적 비유, 불교적 상상력의 소산이다. 비가 됐건 눈이 됐건, 더러운 물이건 깨끗한 물이건 모든 물은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그 바다 깊은 곳에 보배 창고가 있다. 물살에 쓸려 흘러들어 온 온갖 보배들이 그 깊은 창고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깊고 넓은 바다는 그래서 훌륭한 창고요, 좋은 그릇의 모델이 된다. 용궁해장과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을 해장으로 비유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용궁해장을 매개로 인도와 중국의 상상력이 섞인다. 여의봉이란 무기는 그렇게 탄생했다.


대룡보살(大龍菩薩)이 아깝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여, 곧 용수를 이끌어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궁전 안에서 칠보의 창고를 열고 칠보의 꽃 상자를 꺼내어 심오한 경전과 미묘한 법을 주었다. 용수가 90일 동안 읽어 보니 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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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이해되는 것이 참으로 많았다. 마음은 깊이 침잠하여 귀한 이익들을 체득할 수 있었다.

용이 그 마음을 알고 물었다.

용 : 경전을 충분히 읽었는가?

용수 : 그대의 함 가운데 경전이 하도 많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제가 다 읽을 수 있었던 것만 해도 염부제에 있는 경전보다 열배는 넘습니다.

용 : 나의 궁전 안에 있는 경전들은 다른 곳에 비해 헤아릴 수가 없다.

용수가 이미 여러 경전들을 얻어 무생(無生)의 깊은 경지에 들어 두 가지 지혜를 갖추었으니, 용이 밖으로 다시 내보내 주었다.


이 경전은 마하연장(摩河衍藏)이다 문수사리와 아난이 철위산에서 이 경전을 결집하여 용궁에 넣어 두었다. 용수보살이 용궁에 가서 이 경전을 보니 3본이 있었다. 그 가운데 세 번째 하본(下本)이 10만 게송으로 48품이었다. 용수가 외워서 세간에 유통시켰다. ‘화엄경에 얽힌 전설이다. 앞의 이야기는 여의봉 이야기와 매우 닮았다. 용왕이 해장을 열어 오공에게 무기를 꺼내 주듯, 용왕이 해장을 열어 경전을 꺼내 준다. 손오공의 이야기는 용수의 이야기를 아주 조금 비튼 것일 뿐이다. 가르침에서 무기로, 용왕의 가엽게 여기는 마음에서, 오공의 무례한 갈취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런 보물들을 담고 있는 곳이 바로 용궁의 해장이다.

동북아시아 대승불교에서 ‘화엄경’의 위치는 절대적이다. 종교적 측면에서 화엄종이라는 종파의 영향력도 막대하지만, 아시아 문화 곳곳에 ‘화엄경’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그렇게 중요한 문헌이 오로지 이런 전설에 기대어 있다. 언제 누가 어떻게 결집을 했는지, 남이 있는 기록은 없다. 법장(法藏)이 지은 ‘화엄경 전기’에도 문수보살이 결집했다고만 되어 있다.


■ 연생(緣生)의 법에는 주인이 없다.


고려대장경지식베이스에서 ‘연생’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361종의 문헌에서 총 3,699건의 결과가 나온다. 재조대장경 안에 입장된 문헌의 약 24%에서 이 단어가 들어 있다는 말이다.

‘연생’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만의 고유한 특성도 없고, 자기라는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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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꺼낸 주체(說主)로서의 부처님도 예외가 없다. 평생 자기 얘기라고는 한 마디도 해 본적이 없다는 분이다. 주인도 없고 자성도 없다. 무명의 세계 속에서  굴러다니던 법을 이리 저리 엮어서 가르침을 편 것 뿐이다. 그 가르침은 단 하나의 명제를 지향하고, 그 단 하나의 명제에 근거한다. 연생의 법에는 주인이 없다.

고려대장경 재조본에는 “을사세(乙巳歲)에 고려국 대장도감에서 칙명으로 조조(調造) 했다”라는 간기(刊記)가 붙어 있다. ‘누구’도 있고 ‘언제’도 있다. 그런데 초조본에는 이름도 시간도 없다. 어디에나 다 붙어 있는 간기가 없다. 그래서 한때는 이 역시 무아(無我)를 표현하고 싶은 깊은 뜻이 담긴 것이라는 고상한 해석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초조본은 경우가 좀 다르다. 송나라 개보대장경을 그저 복각한 것이어서 이름이나 시간을 달아 주기가 민망했을 것이다.

남의 나라 간기(刊記)를 그냥 두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그렇다고 고려국 간기로 바꿔 달기에도 어설픈 입장이었을 것이다. 역시 개보대장경을 복각한 금장(金藏)도 똑 같다. 간기가 없다.

조선시대에는 일본에 재조대장경을 하사하면서 재조본의 간기만을 빼고 인경하여 준 경우도 있다. 대장경이야 달라니까 주긴 하겠지만 ‘고려국’이라는 이름까지는 주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름이란 게 이렇게 묘한 것이다.


연생(緣生)의 법을 절감한 사람들에게 이름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디지털 시대, 네트워크 세계의 표현을 빌자면, 이들은 모두 ‘천상 도둑놈’일 뿐이다. 여기서 오려내고 저기서 핥아다가 얘기를 지어낸다. 그래도 그들을 도둑놈이라고 부르지 않는 까닭은 자기의 스타일을 주장하지도, 자기의 이름을 내걸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늘에 담고 바다에 담는다. 천하에서 얻어 온 것, 천하에 그대로 맡겨 둔다. 때로는 이름을 걸고, 시간과 장소를 밝히기도 하지만, 다만 연(緣) 조건을 밝히자는 것 뿐이다. 이들에게 天藏이나 海藏은 더 이상 몽상이 아니다. 비유가 아니다. 훔쳐 오고 훔쳐 가고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이름을 걸고 멋을 부리는 자랑스러운 일도 아니다. 그런 게 그들이 존재하는 조건이고 살아가는 방식이다.

네트워크 시대에 표절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카피레프트라는 표현은 이런 경향을 암시한다. 샘플링 기술은 이제 불법이 아니다. 적정한 규칙만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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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다면 베끼는 것도 예술이 된다. 용궁혜장의 여의봉도 용왕의 것이 아니듯, 손오공의 것도 아니다. 굴러다니던 물건 쓸 수 있는 자가 잘 쓰면 그만이다. 찾는 자가 없으니 묻혀 있었을 뿐 그가 굳이 감추려고 한 것도 아니다.


부처님은 緣生의 법을 깨달은 자들을 연각(緣覺)이라 불렀다. 저들 새로운 연각들에게 천 년이라는 시간, 천 년의 순간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쨌거나 천 년의 대장경, 천 년의 일은 저들의 일이다. 이 일은 처음부터 미래의 중생들을 위한 일이었다. 시간이 간다고 시간만 바뀔까? 사람들이 바뀌고 모든 것이 바뀌는데 천 년 전의 일로 천 년 뒤의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미래, 아직 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지금은 없는 일들이다. 없는 일을 생각하는 것을 꿈이라고 부른다. 천 년의 일은 그래서 어차피 꿈이고 몽상이다. 아무려나 상상은 자유라지 않던가?


■ 그릇에 대한 몽상


藏이라는 글자는 묘한 글자이다. 무엇보다 쓰기가 아주 편리하다. 우리의 고려대장경지식베이스나, 대만의 CBETA, 일본의 SAT, 대장경 데이터베이스에 藏이라는 글자를 검색해 보면 담박에 느낄 수 있다. 앞에 거론했던 쓰임새 외에도, 天藏, 地藏, 海藏, 虛空藏, 華藏, 秘密藏, 無盡藏, 覺藏, 胎藏, 功德藏, 無明藏 등에서부터, 藏識이나 如來藏, 신통대광명장(神通大光明藏)....... 글자의 양도 많지만 쓰임새도 다양하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두 찾을 수 있을 것도 같다. 용례별로 뜻을 찾아가다 보면 얽히고 설킨 실타래 속에 갇혀 오리무중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다 보면 뭐 분명하지는 않더라도 대충 써도 얼추 맞는 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쓰기가 편한 글자라고 하는 것이다. 대강 써도 말이 되는 것 같고, 뭔가 그럴듯해 보이기 때문이다.


기억장치들이 발달하면서 고려대장경과 대정신수대장경을 몽땅 노트북에 담고 다니던 때의 생각이 난다. 1,000쪽짜리 무거운 책 수백 권을 가방에 넣고 다닐 수 있다니, 천하를 수중에 얻은 기분이랄까.... 세월이 흘러 이제 그런 정도는USB 한 개에 들어가고도 남는다. 하지만 이젠 그런 걸 주머니에 넣고 다닐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이 인터넷에 다 들어 있다. 수십만 장의 고해상도 이미지들을 갖고 노는 ‘그림찾기’ 놀이도 인터넷만 있으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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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놀고, 놀던 흔적조차 그 자리에 그대로 저장이 된다. 인터넷에 연결만 할 수 있다면 다른 그릇은 이제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접속하는 순간 기억도, 생각도, 일도, 놀이도 함께 이어진다. 이런 게 우리 시대의 ‘천하를 천하에 담는’ 방식이다. 요즘의 아이들은 인터넷이란 큰 그릇 안에서 이리저리 요동친다. 파도가 치고 그릇이 뒤집힌다. 야차왕처럼 그런 아이들은 멀리서도 금세 안다. 요동치는 그릇의 정체를.


■ 도장 찍기


법보종찰 해인사에서는 매년 음력 3월 10일 ‘팔만대장경 정대불사’라는 큰 법회를 열고 있다. 1961년부터 이어 온 최대의 행사라고 한다. ‘정대(頂藏)’라는 말은 ‘머리에 인다’는 뜻이다. 팔만대장경을 머리에 이고 모시는 법회라는 뜻인 만큼, 법회에 동참한 사람들은 대장경을 머리에 이고 마당에 그려 놓은 ‘해인도(海印圖)’를 따라서 돈다. 해인도를 따라서 도는 법회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모르겠지만, 해인사와 팔만대장경, 해인도를 도는 정대불사,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에 해인도(海印圖)는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를 가리키며 시(詩)를 합하여 도장(印)으로 만든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시(詩)는 ‘법성게(法性揭)’라고 하는 노래이다. 우리나라 어느 절에 가든지 적어도 하루에 한 차례 쯤은 들을 수 있을 만큼 애송되는, 말하자면 애창곡 중의 하나이다. 화엄종의 핵심을 뽑아 210자의 노래로 만들었다는데 왜 하필 도장으로 만들었을까?

물음 : 어떤 까닭에 도장에 의지 하는가?

대답 : 석가여래의 가르침의 그물(敎網)에 갈린 ‘세 가지 세간(三種世間)’이 해인삼매로부터 나타났다는 것을 표현하려는 까닭이다. 세 가지 세간이란 기세간(器世間), 중생세간(衆生世間),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이다. 지정각은 불(佛), 보살(菩薩)이다. 세 가지 세간 안에 모든 법이 포함되기 때문에 나머지는 논하지 않는다.


바다도장 海印은 비유에서 나온 이름이다. 태평양 같은 큰 바다에 파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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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잠해지면 우주의 삼라만상을 거울 같은 물 위에 있는 그대로 비추게 된다. 큰 바다에 큰 파도, 그런 파도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비유한 말이다.

                   

210자의 법성게, 네모꼴의 도장은 만만한 대상이 아니다. 화엄종의 교리, 인간과 우주가 몽땅 거기에 담겨 있다. 팔만대장경을 머리에 정대하고 해인도를 따라 54굽이를 도는 까닭은 복잡한 교리에 있다기보다는 종교적인 신앙심이랄까. 주로 복을 비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정대불사에서는 법성게나 해인도도 사유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신앙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법성게나 해인도는 수행을 위하여, 깨달음을 향하여 가는 도구로써 설계된 그릇이다. 화엄의 종요(宗要)를 도장에 담아 눈으로 찍고 마음으로 찍는 방법, 해인삼매를 실험하고 터득해 가는 기술이다.

도장에는 해인도 같이 눈으로 찍는 눈도장도 있지만, 법성게와 같은 시(詩), 노래처럼 귀로 찍는 귀도장도 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그런 것은 비유이다. 목표는 하나, 심인(心印), 마음에 도장을 찍는 일이다.   


아난이 결집한 삼장은 여래장을 모도잡기 위한 특정한 기술로 설계된 특정한 그릇이었다. 시대가 바뀌고 그릇도 바뀌었다. 우리 시대의 그릇에는 우리시대에 어울리는 모도잡이 기술이 있을 것이다. 마음 도장까지야 누가 알랴마는 귀도장 눈도장 쯤은 별일도 아니다. 목판대장경의 시대로부터 시간은 얼마나 흘렀고, 사람들은 또 얼마나 바뀌었는가? 디지털시대의 디지털대장경은 이런 기술들, 새로운 상상력을 바탕으로 새롭게 설계되어야 한다. 사본대장경, 목판대장경을 읽는 방식과 디지털대장경을 읽는 방식은 당연히 달라야 한다. 디지털 도장으로 여래장을 모도잡는 젊은 연각들, 미래의 중생들을 상상해 본다. 아니 미래랄 것도 없겠다.


■ 다만 그릇일 뿐


온 법계가 다만 하나의 藏일 뿐이다. 이 장 밖에 다른 법은 하나도 없다.

藏 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중생이 다 여래의 지혜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여(如如)한 지혜가 여여한 대상에 대응하는 까닭에 모든 중생은 절대로 여여한 대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모두 여래가 포섭하여 의지해 주기 때문에 소장(所藏)이라고 부른다. 중생들은 여래장(如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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藏)이다.

중생을 여래장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여래의 그릇에 담겨 있기(所藏) 때문이라고 한다. 여래의 그릇에도 능장(能藏)의 측면이 있고 소장(所藏)의 측면이 있다. 능장이나 소장을 구분하는 까닭은 나누어 보아서 이해를 돕자는 것뿐이다. 능장도 여래장이고, 소장도 여래장이다. 담고 담기는 일, 藏 이외에 일은 그래서 단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여래의 그릇에 담겨 있고 여래의 그릇에서 나온다.


그릇의 상상력, 담고 담기는 이야기가 이런 데까지 미치면 좀 막막해지는 면도 있다. 하지만 불교에는 분명 이런 사고방식, 그릇 일원론이랄까. 그릇의 상상으로 모든 법, 모든 존재를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시도에 여래장사상이라는 거창한 이름도 붙어 있다. 장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까닭은 이 안에 모든 존재 모든 법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미래로 통하는 그릇과 기억, 그런 전제는 뒤에 나온 여래장 사상이 아니더라도 처음부터 있었다. 어원은 달라도 생각은 섞이고, 따라서 말도 섞인다. 장이나 그릇에 대한 상상은 말의 어원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별 생각 없이 쓰는 이런 말에도 많은 생각들이 담긴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게 없다”는 표현도 자주 쓴다. 천라지망(天羅地網)이라는 무협지 스타일의 표현도 있다. 위로는 비단 그물, 아래로는 쇠 그물, 빠져 나갈 구멍이 없다는 뜻이다 무협지만이 아니다. 불교는 물론 도교와 유교도 함께 공유하던 상상이다. 말이나 행동이나, 생각까지도 누군가 듣고, 누군가 보고, 누군가 기억한다는 뜻이겠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전에 나투었던 망가진 수레, 병들고 나약한 노인의 모습 안에 그런 의도가 이미 담겨 있다. 법을 빛으로 삼고, 자기 자신을 빛으로 삼는 일이다. 법장에 대한 기억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억을 자기 안에 되살려 낼 수 있어야 한다. 법장을 결집했던 까닭은 살아 있는 기억을 산 채로 전해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안에는 기억의 기술은 물론, 기억을 살리는 기술 또한 담겨 있다. 아난과 가섭의 갈등은 말하자면 이런 두 가지 기술의 갈등이다. 이 두 가지 일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아난과 가섭, 오백성중이 함께 성취한 결집은 살아 있는 기억의 결집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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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살아 있는 기억을 살아 있는 채로 미래로 전하자는 것이었다.                          

대승경전 안에서 성문(聲聞)과 보살(菩薩) 또한 기억을 두고 맞선다. 성문이 글자 그대로 귀로 들은 기억을 상징한다면, 위로는 보리(菩提)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들을 돕는 (上求菩提 下化衆生) 보살들은 기억을 되살려 중생에게 돌려 준다. 보살이 성문을 성문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들의 기억이 죽은 기억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억은 죽은 자들의 머리 속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기록한 문자 안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기억은 살아 있어야 한다. 여래의 그릇, 여래장의 사상 안에는 그런 열망이 담겨 있다. 기억을 살리는 기술을 담고 있다. 가르침의 기억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내용이야 어찌되었건 의도는 분명하다. 큰 그릇, 큰 기억, 대장경 안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모두 담겨 있다.


■ 마지막 이야기


이 글이 마무리되어 갈 무렵 이른바 ‘위키리크스(Wikileaks)’ 사건이 터졌다. 이 말이 재미있다. 물이 새듯 비밀이 새는 것도 ‘leak’이다.

위키리크스의 배후에는 수많은 헤커들이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그릇의 약점, 새는 부분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의 존재 자체가 이 그릇의 속성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예전의 그릇, 예전의 비밀창고는  더 이상 닫힌 창고가 아니라는 점이다. 주인의 허락없이 드나들 수 있는 뒷문도 있고, 굳이 드나들려고 하지 않아도 새어나오는 빈틈도 있다는 뜻이다.

법을 들으면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여러 경전으로부터 허실을 따지고, 계율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여 본말을 깊이 헤아려 봐야 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뉴스를 들으면 근거가 되었던 원문들을 클릭하여 읽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어산지는 이를 ‘과학적 저널리즘’이라고 부르지만 불교식으로 따져보면 현대판 ‘법등명 자등명’으로 보인다. 미래의 중생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부처님의 법이 열려 있어야 했듯, 위키리크스는 독자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뉴스의 원천들을 누설해야 했다.


1990년대 전후 고려대장경 전산화를 시작하면서 겪은 수많은 어려움들, 이런 저런 우여곡절을 거치며 대장경은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매체, 새로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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릇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들을 직간접적으로 겪으면서 느끼던 ‘감정’이 있었다. 이 일은 ‘파장(破藏)’, 곧 ‘그릇을 깨뜨리는 일’이었다.

그 사이 20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이천오백 년 불전의 역사에서 말 그대로 경천동지의 대혁신이 벌어졌다. 이제까지의 성과들을 바라보며, 많은 사람들이 다시 불전의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다. 앞으로 어째야 하나. 해답은 분명해 보인다. 이전의 그릇을 깨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매체의 그릇은 물론이고, 언어의 그릇, 민족이나 국가의 그릇, 문화나 전통의 그릇, 일을 추진하는 연구기관들의 이해관계, 일에 종사하는 담당자들의 공명심이나 경쟁심과 같은 그릇들조차 몽땅 깨버려야 한다.


우리는 그릇의 시대, 그릇이 깨지고 뒤집히는 시대, 그릇을 밥먹듯 깨뜨려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모도잡아 다라니, 결집의 꿈, 대장경의 꿈은 이제 디지털과 인터넷이라는 그릇으로 옮겨가고 있다. 옮겨 담는 일은 깨뜨리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꺼내기 위해서도 깨뜨려야 하지만, 담기 위해서라도 깨뜨려야 한다. 꺼내고 담는 일은 그릇의 모양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2011.  3.  30   (수)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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