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하여(2)

2013. 9. 13. 09:26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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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

위하여(2)

■ 신봉승 지음

Chapter 3. 새로운 역사인식을 위하여

■ 낡은 틀, 새로운 내일

고정관념처럼 무서운 게 없다. 우연하게 얻어져서 자리가 잡혔다고 하더라도 그런 고착된 관념들이 자신의 이해관계와 맞물리게 되면 특정한 틀을 만들게 되고, 그 틀에 의지하여 매사를 해결하려 들면 구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물론, 한 치 앞으로도 나갈 수 없게 된다. 이 같은 현상은 사람이나 정당이나 다를 것이 없다.

지난 날, 야당이 국민들의 신망과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목숨을 걸고 독재 정권에 항거하였던 선명성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야당은 군사정권과 완연히 다른 문민정부인데도, 야당의 행태는 반대하는 명분으로 선명성을 유지하려는 구태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정치인들의 천박하고도 단세포적인 사고가 구태를 단절하기보다 현실에 안주하면서 원한과 보복의 정치로 갈등과 대립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국가의 미래보다 패거리, 떨거지들을 돌보는 일에 매달리는 과거 지향적인 시행착오를 불러들였으므로 자업자득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지난 18대 대통령을 뽑는 선거판도 예외가 아니었다. 여당이나 야당이나 아니면 말고 식의 네거티브 비방전이라는 낡은 틀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어느 쪽이건 시대가 변하면서 흘러가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외면하고 낡고 찌든 지난날의 선거 관행에만 매달렸다는 뜻이다. 그런 구태 속에서도 금전 선거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획기적으로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지난날의 선거는 사람을 동원하는 것이 승패의 관건이었다. 유신 정권의 핍박이 노골화되면서 관중을 동하기가 어려워지자 체육관 선거라는 해괴한 방법을 창안해 내면서 돈 덩어리나 다름없는 관중을 동원하지 않아도 승리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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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고 자찬하였다. 그런 터무니없는 일을 맹비난하던 야당 앞에 이번에는 SNS라는 괴물이 나타나면서 사람을 모으는 유세 현장을 개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 위력이 선거를 돈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등 공신으로 작용하게 되면서 금전 선거라는 퇴폐적 행태에서 벗어나게 하였다는 점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새로움이란 세계의 흐름이나 다름이 없다. 세계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고 낡은 틀에 얽매이는 것은 지적인 소양이 부족하다는 비난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줄 안다.

구태에 젖은 ‘낡은 틀’은 정부나 정당이 아닌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생각이 낡았다는 것은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틀’이 낡았다는 뜻과 다르지 않다.

이젠 정말로 ‘새 틀’을 짜야 할 때다. 반대를 위한 선명성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진로를 놓고 함께 갈 길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여야가 첨예한 대결을 하면서도 양보하는 아름다운 정치 문화를 만들지 않고는 명실상부한 선진국의 대열로 들어설 수가 없음은 자명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낡은 틀을 깨고 새로운 틀을 짜야 하는 것이 바로 삶의 지혜로움이다.

■ 선량들의 한심한 자질

한강에 둥실 떠 있는 여의도의 모래밭은 김포공항이 생기기 전까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비행장(공항)이었다. 김현옥 서울 시장이 윤중제를 둘러쌓으면서 금싸라기 땅으로 변하였고, 외양도 멋진 고층 빌딩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마침내 국회의사당까지 자리 잡고부터는 당당히 정치 1번지로 불리게 되었다.

여의도의 북쪽 땅을 널찍하게 차지하고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석조 건물이 이른바 대한민국의 국회의사당이다. 애초의 설계도(이광노 설계)에는 지붕 위에 솟은 둥근 돔이 없었는데, 다른 나라의 의사당에 모두 돔이 있다는 식의 무지한 사람들의 강권에 의해 설계도가 고쳐지면서 마치 성냥갑에 사발을 엎어 놓은 모양이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돌로 만든 상여 같다고 비아냥거리는데, 의원들이 하는 짓거리가 하도 딱해서 하는 소리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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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국회의원 수는 300명이고, 그들의 전력은 호화롭기 그지없다. 판사와 검사, 의사와 장군, 대학의 교수와 박사들, 거기에 전직 장관, 기관장 등 최고의 경력과 학력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이다. 그러나 하는 짓거리가 난장판의 야바위 장사꾼이나 다를 것이 없다.

그러면서도 누리는 특권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회기 중에는 아무리 무식하고 근거 없는 말을 하여도 면책특권의 혜택을 받고,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동료 의원들의 동의가 없으면 잡혀가지 않는다. 게다가 의원 본인을 비롯한 여러 보좌관들이 받아가는 급료는 가히 천문학적이다. 어찌 그뿐인가. 국회의원 배지를 하루만 달아도 65세 이후에는 매달 120만 원씩 꼬박꼬박 연금을 받는다.

뿐만이 아니다. 인사청문회라도 열리는 날이면 염라대왕으로 돌변한 듯 고위 공직자로 지명된 후보자들의 일신상의 일은 물론 그 가족들의 프라이버시까지 들추어내면서도 자신들이 저질렀던 무지막지했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는 두 가지 얼굴을 여지없이 드러내곤 한다.

2013년도 국가 예산을 심의하면서는 예결 위원장이 의안이 마무리되기 3일 전에 해외로 여행을 떠났다. 그런가 하면 예결 위원들은 해를 넘겨서 국가 예산 심의를 마친 데 대한 반성은 고사하고, 다음날 세계의 관광 명소인 코스타리카로 날아갔다. 그들은 국가 예산을 마치 남의 돈 쓰듯 하며 앞뒤 가리지 못하는 저질 양상을 보이면서도 태연하다. 이 같은 일이 하루 이틀 쌓인 것이 아니다.

제헌국회에서 오늘에 이르는 동안, 정권이 바뀌고 새로운 법령이 만들어질 때마다 국회의원에 대한 새로운 권한이 보장된 사례도 적지 않다. 삼권분립에 보장된 민주주의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조처일 수도 있지만, 똑같은 삼권분립의 틀 안에 있다 해도 행정부는 나름대로 법도와 교양을 갖추고 있고, 사법부도 소임에서 벗어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이심전심이라 했던가. 지난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이나 낙선한 문재인 후보도 서로 약속이나 한 듯 국회의원들에게 주어진 특권을 줄이겠다는 공약을 하였다.

대선이 끝나고 예산 국회가 소집되었다. 여야의 어느 당직자도, 또 어느 국회의원도 국민과의 약속을 입에 담지 않았음은 물론 실행하고자 하지도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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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다. 이만저만한 배임이 아닐 수 없고, 또 구태로의 회귀를 부추기는 행태나 다름이 없다.

현역 국회의원들이 원외에서 활동했을 때의 발언을 기억하게 하는 장치는 없을까, 그런 장치는 없더라도 의원들의 학벌이 아깝다.

대체 어디서, 뭘 배운 사람인지 꼭 좀 알고 싶다.

■ 선비의 직언

조선 선비의 반이 영남이 있다는 말은 야은 길재가 선산에 학문의 씨를 뿌린 결과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훗날 정조도 “영남에서 절의 있는 선비가 배출된 것은 조식의 힘 때문이니, 후세에 어찌 중도의 선비를 얻을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도 얻기가 쉽지를 않다.”라고 평한 것도 같은 맥락이나 다름이 없다.

정조가 거론한 남명 조식은 70평생 동안 단 한 번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재야의 큰 지식인이었기에 자신이 해야 할 말은 설혹 그것이 임금을 능멸하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직설로 입에 담았던 참으로 고결하고 보기 드문 선비였다. 그는 사랑하는 문도들에게 출처를 분명히 하라고 가르쳤다 더 소상하게는 임금이 부른다 하더라도 나갈 때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 것을 당부하고 또 당부하였던 참으로 고매한 인품이었다.

실제로 남명 조식은 3대에 걸쳐 임금으로부터 지극한 부름을 받았으면서도 끝내 관직에 나가지 않으면서 오히려 시폐(時弊) 열 가지를 낱낱이 열거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선정할 것을 충언하였다. 그런 고매한 기품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도야를 엄격히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남명 조식은 홀로 앉아 책을 읽을 때는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옷깃에 달고 그 소리로써 자신의 몸가짐이 흐트러지는 것을 경계하였고, 때로는 목 밑에 날이 선 칼을 세우는 것으로 곧은 자세를 유지하였다. 후일 이 칼이 수제자인 정인홍에게 전해짐으로써 그 또한 스승 못지않은 올곧은 성품으로 임진왜란 때는 몸소 의병장이 되어 왜적을 무찌르는데 앞장섰다.

명종 10년(1555), 남명 조식은 재야의 인재로 발탁되어 단성현감으로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단호한 상소문으로 입사를 거부한다. 그 단성소(丹城疎)라 불리는 상소문의 내용에 이런 구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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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없어졌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나 버렸고 민심도 이반되었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들은 아랫자리에서 시시덕거리며 술과 여자에만 빠져 있습니다. 높은 벼슬아치들은 버둥거리며 뇌물을 받아 재산 모으기에만 여념이 없습니다. 온 나라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려 하지 않습니다.”

정말 절묘한 구절이 아닐 수 없다.

조선 시대의 명예는 지식인 사회가 건전하였다는 사실에 기초를 두게 된다. 남명 조식이 임금에게 ‘단성소’와 같은 글을 올렸던 것은 임금뿐 아니라 지도층 인사들로 하여금 대오각성하게 한 것이다. 이같이 엄중한데도, 오늘의 지식인들은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부패한 권력의 주변을 맴돌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니 이만저만 한심한 노릇이 아니다.

■ 대통령이 할 일, 장관이 할 일

영화나 TV 드라마를 만드는 일은 개인의 능력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집단 작업이기에 유능한 스태프를 거느리지 않고서는 소기의 성과를 올리기 어렵다. 다수의 병력을 거느리고 움직이기 위해서도 작전참모, 군수참모, 정보참모 등의 유능한 막료를 거느려야만 부하들의 생명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승전의 기쁨을 맛볼 수가 있다.

삼성이나 현대 같은 대기업에서도 사장, 부사장, 전무와 같은 불굴의 인재들을 확보하고 있어야 세계적인 기업으로 도약할 수가 있다. 그 막료들이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오너로 하여금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는 일이다. 대개 그런 일들은 분석한 결과를 문건으로 올려야 하는데, 그 문건이라는 것이 학술 논문처럼 장황해서는 안 된다. 다른 말로 하면 간단명료하게 작성하되 오너의 ‘하느냐’, ‘마느냐’의 판단만 유도하면 된다. 그런 연유로 막료가 하는 일은 세계의 정세를 살필 정도로 정확하고 풍부한 정보를 수집하여 연구해야 하고, 오너는 그것을 막료들에게 맡겨 두는 아량이 있어야 날로 복잡해지는 국제 정세를 판단할 수 있다.

만에 하나라도 이 모든 일을 오너가 스스로 정하고, 막료들은 심부름만 하는 정도에 그친다면 그 기업은 발전보다는 퇴보하게 되고 마침내는 파산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 모두가 사회과학의 기초이론에서 거론되는 말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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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기업의 운영 방식은 오너의 독단에 의해 판단되고 처리된다는 게 일반적인 지적이다.

격조 있는 오너는 훌륭한 스태프를 거느리고, 그들의 뜻을 존중하면서 기업의 성장을 이끌어 간다. 이 논리는 나라를 경영하는 일이라 하여 다르지 않다. 유능한 대통령은 총리를 비롯한 여러 장관이라는 막료를 거느리며 국가의 일을 살핀다. 그 과정에서 대통령의 목소리가 커지고, 자신의 뜻대로 사리를 판단해 간다면 나라의 미래가 걸린 제백사가 잘못되기 쉽다. 막료들의 헌신이 쓸모없게 되기 때문이다.

대통령도 그렇다. 역대 대통령의 경력이나 학벌을 살펴보면 세계의 이름 있는 대학에서 교육한 사람도 없고, 그 흔한 박사 학위도 취득한 사람이 없다. 가장 내 세울 만한 경력은 야당의 당수를 했다는 것이 고작이다. 그 반대로 국무총리 이하 여러 장관들의 학력이나 경험은 나무랄 데 없이 화려하다. 이 같은 엄연한 현실을 전제로 대통령이 선봉에 나서서 설치는 것은 경영학 이론에서 심히 어긋나는 일이다.

여기서 대통령과 고위 공직자의 기탄없는 소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의 선현들은 자신의 옳은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을 책무로 삼았다. 오리 이원익이 정승의 자리에 머물면서 60여 회의 사직상소를 올렸던 것은 겸손의 아름다움이면서도 해당 임금에게는 경각심을 주고자 하는 속내도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 민주화가 아니고, 국민 행복을 외치는 일보다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이 더 급하다. 지금 우리에게 정말로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반값 등록금이 아니라 자라는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어 주는 나라를 만드는 일이다. 국가 정체성이 확립되면 모든 부정은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된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주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는 역사 인식이 깨어 있어야 한다. 이 간단한 이치를 성사시키려면 대통령의 국정 철학에 반영되어야 한다. 오너가 하는 일과 막료가 할 일을 혼돈하지 말아야 모두가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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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통령들은 차관이나 국장이 할 일을 입에 담고 있는 몰골을 쉽사리 보게 된다. 잘난 척하고 나대는 대통령이 수없이 청와대를 거쳐 나갔는데도 우리의 몰골이 개선되지 않는 것은 국장이나 차관이 해야 할 일에 대통령이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 정경유착의 뿌리

제18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었다.

돌이켜 보면 역대 대통령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임기 5년 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면서도 선거 기간 중에 철통같이 약속하였던 공약들은 내동댕이친 채 눈앞에 있는 실익에만 매달렸던 탓에 천금 같은 임기 5년을 헛되게 보내곤 하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 엄연한 사실이 되풀이되는 원인부터 제거해야 한다. 방법과 절차는 지난 역사에 아주 소상하게 명시되어 있다.

“한 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한 가지 해로운 일을 줄이는 것만 못하고(興一利不 若除一害 흥일이불 약제일해), 한 가지 일을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은 한 가지 일을 줄이는 것만 못하다.(生一事不 若滅一事 생일사불 약멸일사)”

새로운 일을 만드는 것보다 지난날의 폐단을 줄이는 것이 선정의 시작이라는 몽골의 재상 야율초재의 가르침은 진리나 다름없다.

같은 맥락이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적용된다. 우리가 오늘 이만큼이나마 잘 살게 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룩한 여러 기초에서 시작된 일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우리나라가 이처럼 성장하게 된 동력은 중화학공업의 성장에 기초를 두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경유착은 바로 그 성장의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에서 보면 정경유착, 권력형 부정부패 등 엄청나게 쌓인 적폐를 들어내지 않고는 한 발짝도 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그 병폐를 또 다른 권력이나 선심으로 이용할 정도로 이율배반적인 대통령이 더 많았다.

아, 바로 여기에 엄청난 장벽이 있다. 정경유착의 뿌리가 박정희 정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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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것이 국가 발전의 동력이었더라도 지금은 잘라 낼 수밖에 없는 패덕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엄연한 사실이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묵인으로 뿌리내려진 정경유착을 뿌리 뽑으려면,아버지가 이루어 놓은 업적에 흠집을 낼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는 뒤로 미룰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말 그대로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서 태어난 분이다. 역사인식을 몸에 간직하는 것은 학문이 하는 것도, 지식이 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대통령의 마음 하나에 달려 있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역대의 다른 대통령들과 같은 무능에서 벗어나는 일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정경유착 척결이 뒤로 미루어져서 다음 대통령에 의해 바로잡아진다면 그때 박근혜 대통령이 이루어 놓은 업적은 모두 무너지고 오직 독재자 아버지만을 비호한 대통령으로 비하될 위험이 있다.

■ 살아서 떠도는 돈뭉치

역사가 소중한 것은 우리들의 지난날을 비추어 주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그 거울에 때가 끼어 있으면 비쳐진 영상에 얼룩이 지게 마련이다. 거울에 비쳐진 영상에 얼룩이 질 정도로 때가 낀 거울은 깨끗이 닦아서 쓰든가, 아니면 버리고 세 거울을 마련하는 것이 현명하다. 때 묻은 거울을 버리지 않고 쓴다면 자신의 얼굴은 물론 세상만사를 때가 낀 상태로 볼 수밖에 없는 참담함을 우리는 이미 수없이 경험해 온 터이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천박한 풍토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적폐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의 군사정권에 이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에 이르는 역대 문민정부 지도자들에게 국가관이 결여되었다는 사실은 모두가 때 묻은 거울을 가지고 있으면서 깨끗하게 닦아서 쓸 줄 몰랐던 탓이다. 그들에게 진실로 새롭고 당당한 국가를 만들 의향이 있었다면 선봉에 서서 고칠 수 있었을 것인데도 아무 조처도 내리지 않고 구태를 답습한 것이 측근들이나 가솔들의 불행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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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 동안, 군사정권에서 발생하고 자란 적폐로 인해 그들 자신은 물론 가솔들이나 측근들이 겪은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도, 그 뿌리를 다스리는 일보다 자신들의 이해와 연관되게 한 것은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돈뭉치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해서다. 가난과 궁기에 시달리던 지난날의 원념을 벗어 던지지 못한 우유부단이 결국 가솔들이나 측근을 감옥으로 보내면서도 그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이다.

정치자금으로 사람을 모으고 그런 사람들로 정당과 정부를 꾸려 가려는 지도자의 속된 욕심이 작용되면서 마침내 기업들은 돈으로 인한 불이익에서 벗어나기 위해 현금을 실은 자동차를 집권당에 보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 자업자득의 응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대통령이나 정당의 책임자들이 국가의 미래를 내다보는 정체성이 부족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다.

꼭 정치자금이 아니더라도 허공에는 예나 지금이나 돈뭉치가 떠돌아다닌다. 그 돈뭉치는 손을 뻗어 만지는 사람이 임자여서 어느 시대나 유혹의 대상이 된다. 건전한 기업의 창업은 때로 그 돈뭉치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정치자금으로 유용되면 패가망신으로 이어지기가 십상이다.

우리의 역대 대통령들이 허공을 오가는 돈뭉치의 오용으로 평생을 쌓아 올린 공덕을 무너뜨린 경우는 그 용처가 공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고비마다 반복되는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살피면서 구구한 말들을 앞세우곤 하지만, 그들 모두에게 국가 정체성이 결여되었다는 판별이 가장 신빙성을 갖는다.

기업이 존재하는 한, 하늘에 떠다니는 돈뭉치는 사라지지 않는다. 선진국이라 하여 다를 것이 없다. 그 돈뭉치가 양식 있는 기업인의 손으로 가면 기업자금이 되지만, 정치 쪽에 쓰이면 정치자금이 된다. 그러나 그 쓰임의 공정성으로 공과가 판별된다.

국가 정체성이 확립된 시대, 국가 지도자의 국가관이 엄정해지면 떠다니는 돈뭉치가 구름일 뿐이다. 역사를 제대로 읽으면 하늘을 떠도는 돈뭉치와 구름의 상관관계를 정확하게 살필 수 있다.

■ 상피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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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근목피로 연명할 정도로 가난했던 조선왕조가 무슨 힘으로 519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단일 왕조로 버틸 수 있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뜻밖으로 많다. 그럴 때마다 나는 조선시대의 공직자들이 불의에 항거할 줄 알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에 충실했기 때문이며, 국가가 그것을 철저하게 보장해 주었던 도덕사회였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곤 한다.

그 대표적인 장치의 하나가 ‘전랑천대법(銓郞薦代法)’으로 불리는 제도다. 전랑이란 이조의 정랑(正郞 정5품)과 좌랑(佐郞 정6품)을 통칭하는 말이다. 전랑에게는 삼사(三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간관들을 천거하는 막강한 권한이 주어져 있다. 삼사의 간관들이란 공직자들의 부정과 부패의 처단을 논하는 언관(言官)들을 말한다. 이를 요즘말로 설명하면 행정안전부의 인사과장(서기관)이 검찰청과 감사원의 핵심 수사관과 감사관을 추천하여 임명하게 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는 뜻이 된다. 참으로 엄청난 실권이 아닐 수 없다.

간관들의 추천을 전랑들에게 맡긴 것은 정승이나 판서들이 함부로 간관들을 뽑아서 자신이 울타리를 삼는 파렴치를 없애자는 장치나 다름이 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전랑들이 직속상관(이조판서)의 영향력을 받지 않도록 그들의 임기와 임면을 그들 스스로 정하도록 하였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전랑의 자리에 있을 만큼 있게 되면 영전하여 다른 부서로 옮겨가게 된다. 그때 자신의 후임을 지명하여 임명하게 한 장치를 ‘전랑천대법’이라고 한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아름다운 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관직의 표상인 전랑의 자리를 ‘관직의 꽃’이라고 부르면서 우러러보았고, 역사의식에 넘치는 젊은 선비들은 전랑의 자리에 오르고 싶어 할 수밖에 없다. 또 전랑의 자리에 발탁되어 성실하게 일한 사람은 반드시 판서의 자리를 거쳐 정승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 통례가 되어 있었다.

불행은 예나 지금이나 공직자의 탐욕에서 시작된다. 권문세도가 되어 독단으로 정사를 전횡한 사람들은 대개가 전랑의 자리를 탐내곤 했다. 물론 3사의 언관들을 장악하여 타인의 비리를 캐내어 탄핵하게 하면서도 자신의 부정을 묻어 두기 위해서다. 그렇게 막강한 전랑의 자리도 ‘상피(相避)’의 관행에서는 예외가 될 수 없다. 상피란 부자나 친형제간은 같은 부서에 근무할 수 없도록 한 규정이다. 물론 혈연이 합작하는 부정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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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19년(1564), 당대의 척신인 이양이 자신의 아들을 천신만고 끝에 전랑 자리에 올려놓는 데까지는 성공하였으나, 정작 자신은 이조판서가 될 수 없었다. ‘상피’의 규정 때문이다.

후세의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교훈을 주고, 이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겪은 불행을 예고하는 법전이나 다름없는 기록인데도 작금의 고위 관직들은 이런 경고의 장치가 있는 줄도 모른다.

■ 국가 그리고 기업

일본의 전기제품인 'NATIONAL' 하면 반드시 떠오르는 한 사람의 기업인이 있다. ‘마쓰시타 전기’의 창업주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의 국가관은 참으로 뚜렷하다 자신의 기업에서 생산되는 모든 전기용품을 ‘국가’라는 뜻에서 'NATIONAL'이라 했다면 알만한 일이 아니랴. 기업이 국가의 발전에 부응한다는 의지가 이보다 더 선명하고 강렬할 수가 없다.

필자와 가까이 지내는 일본인 시나리오 작가의 집에 갔을 때, 모든 가전제품이 ‘NATIONAL’ 제품이었고 ‘SONY’ 제품은 눈 닦고 찾아도 없기에 그 까닭을 물어본 일이 있다. 돌아온 대답은 명료하였다.

“내셔널은 국민기업이니까.” 국민기업이라니. 누가 그렇게 정했느냐고 묻는 나에게 “일본 국민들의 이심전심”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창업주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국가관이 알게 모르게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마쓰시타 전기’의 창업주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제품만으로 국가에 기여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바람직한 미래를 열기 위해서는 참신하고도 시대를 읽을 수 있는 인재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1979년, 21세기의 일본을 이끌어 나갈 국가적 인재의 양성을 표방하면서 70억 엔을 투자하여 특수대학원인 ‘마쓰시타 정경의숙(松下政經義塾)’을 설립하였다. 매학기 25세에서 35세 까지의 젊은 인재들 중에 7~8명 정도의 정예만을 뽑아서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하루 12시간 동안 혹독한 수업을 강행한다.

체력단련을 위한 장거리 달리기, 화장실 청소하기, 구체적인 소양교육, 고도한 학술과목 등의 커리큘럼으로 국가관의 확립을 몸에 익히는 실질적인 교육을 실시하면서 학생들에게 월 20만 엔(200만원)의 급료를 지급하여 가정 생활을 안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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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시타 정경의숙이 개교한 1979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약 30년 동안의 성과는 실로 엄청나다. 총리대신이었던 간 나오토가 1회 졸업생이고, 민주당 정조회장을 지낸 마에하라 세이지 는 3기생이며, 2012년을 기준으로 29명이 중의원에 진출하는 등 일본을 이끌어 가는 동력으로 자리 잡았다.

기업의 이윤이 국가로 돌아가야 한다는 설립자의 창업정신은 일본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일본국 최고의 아사히대훈장을 받던 날, 일본국 천황은 그가 탄 휠체어를 밀면서 몸소 식장으로 들어왔다. TV로 생중계되는 이 화면을 지켜보면서 수많은 일본인들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많은 일본인들의 가슴에 천황 다음으로 존경하는 인물이 마쓰시타 고노스케라고 새겨지는 이유가 바로 국가와 기업의 상관관계에서 나왔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업이 국가관을 확립하고, 나라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에 이바지할 수 있어야 국민이 존경하는 기업이 된다는 실증을 보여 준 실례가 아닐 수 없다.

■ 건국 대통령의 동상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동상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광화문 거리에 건국 대통령의 동상을 세워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정통성을 과시해야 한다는 말이 심심찮게 나도는 요즘이다. 역사인식 부족을 드러내는 사사로운 감정이 마치 중론인양 부추기는 언론도 있는 모양이다. 아무리 생각이 짧기로 엊그제 겪었던 일을 그렇게 깡그리 잊을 수가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1945년, 조국이 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나면서 우남 이승만 박사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의 망명생활을 끝내고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 올 때는 국부(國父)의 예우를 받았었고, 그가 초대 대통령이 된다는 사실에 반기를 드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면 그의 국가에 대한 헌신과 노고가 온 국민들에게 존경의 대상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런 국민적 여망에 힘입어 우남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된다.

그 후에도 6‧25라는 전대미문의 전란을 겪으면서 그의 외교 역량이 발휘되어 UN군의 참전을 이끌어 내는 것을 계기로 북진 통일을 주장하는 등 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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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카리스마가 거세지기 시작한다. 그가 대한민국 2, 3대 대통령을 연임하게 되는 것도 당시로는 순리로 받아들일 정도라, 그를 따르는 아첨배들에 의해 영구 집권의 음모가 요동치기 시작한다. 부산 피난지에서의 정치 파동과 사사오입 개헌 이후, 문자 그대로 이승만 독재정권 시대가 절정에 이르게 되지 않았던가. 마침내 이승만의 80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서울 한복판인 탑골공원에 조각가 윤효중의 작품으로 거대한 동상이 세워지기에 이른다.

1960년 4대 정‧ 부통령 선거(3‧ 15부정선거)로 이승만 박사는 다시 대통령으로 당선 되었으나,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에 거부감이 실리면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대대적인 학생 시위가 일어나게 되었다.

4‧ 19는 그렇게 시작되어 안타깝게도 서울에서만 130여 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1천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국부의 예우를 받던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이화장으로 물러났다가 임시정부 내각 수반 허정의 도움으로 하와이로 망명함으로써 탑골공원에 세워졌던 동상은 4‧ 19를 주도한 젊은이들에 의해 무참하게 쓰러지고 말았다.

경찰의 발포로 희생된 어린 학생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국립 4‧ 19민주묘지’가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조성되었다.

“서울 한복판에 건국 대통령의 동상 하나 없대서야 말이 되는가, 정부의 예산이 없으면 모금이라도 하겠다.”라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아흔아홉 가지 선정(善政)도 한 가지 악정(惡政)을 상쇄하지 못한다!’

이렇게 역사는 준엄하게 흘러왔다. 국부이든 건국 대통령이든 간에 이승만 박사의 동상이 서울 한복판에 다시 서기 위해서는 애오라지 50년 정도의 세월이 더 필요하다. ‘국립 4‧ 19민주묘지’가 건재하는 한, 그들의 부모 형제와 친구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거론될 수 없는 것이 역사의 준엄함이다.

■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은 소위 말하는 이념의 갈등에 불을 지르고, 또 방치한 세월이나 다름이 없다. 멀쩡하던 역사 해석에 이념을 적용하면서 좌파니 우파니 하는 파당적인 개념을 공공연하게 나돌게 하였고, 그 갈등이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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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서 혹은 교직에까지 번지게 한 것은 망국의 병을 생겨나게 한 것과 같다. 동족상잔으로 국토가 분열된 것도 통분하기 그지없는 판국에 세대 간, 이념 간 갈등과 대결을 부추기는 두 정권의 과오는 용서받을 수 없다.

2007년 12월, 제17대 대통령으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면서 상당히 예민하면서도 큰 정치적인 지각변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10년 세월 동안 진보적인 정치 성향으로 좌편향적 인사들이 정치 중심에까지 진입하면서 우리가 경험한 현대사 해석에 엄청난 오류를 범했기 때문이다.

일테면 이승만 대통령이 주도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조국의 분단을 고착화하였다면서 반통일 세력으로 몰아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을 왜곡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또 여기에 동조하는 젊은이들을 방치함으로써 이른바 친북 좌파라고 불리는 세력까지 생겨나게 하였다. 젊은이들의 역사인식을 바르게 이끌어야 하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할 기본적인 과제이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이를 방치하는 것으로 야기되는 역사인식의 난맥을 정치에 이용하였고, 때로는 부추기기까지 하였기에 소위 보수 성향의 지식인들을 분노하게 하였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지던 10년간의 역사의식 좌경화가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으로 힘을 잃게 될 것이 명백해지면서 보수 성향의 원로들이 한자리에 모여 구길 대로 구겨진 우리의 현대사를 바로잡을 수 있는 항구적인 대책을 모색하는 중론을 모아 보기로 하였다.

서영훈 전 적십자사 총재, 강영훈 전 국무총리, 고 박세직 재향군인회 회장, 중앙일보 고문 이어령, 그리고 말석에 필자도 끼어 앉게 되었다. 화제의 핵심은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를 확실하게 바로잡고, 그 결과를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정확하게 알려서 다시는 이에 대한 왜곡이나 혼란을 없게 하자는 것이었다. 토의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을 한 눈에 살필 수 있는 역사박물관이라도 하나 지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개진되었다.

이심전심이라고 했던가.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을 세우겠다고 천명하였고, 옛 문화관광부의 청사를 리모델링하여 역사박물관으로 쓰겠노라고 당차게 선언하였다.

그러나 내부전시물의 수집과 배치가 쉽지 않았던 까닭에 그 진척이 지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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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하였다가 겨우 대통령의 퇴임을 앞두고서야 개관(2012. 12. 26)하게 되었다. 이미 갈라진 이념 갈등을 봉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 주는 구체적인 사례이다.

젊은이들에게 묻노니 자신들의 아버님이나 삼촌들이 직접 체험한 일들에 이념을 곁들여서 왜곡하는 일은 옳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 예가 이념이나 남북의 일이어서 허용될 수 없는 것은 더욱 자명한데도, 진실을 살피는 일을 외면한다면 곧 후회가 되어 돌아올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헤아려야 하지 않겠는가.

설혹 그렇기는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역사박물관이 확고한 논리적 바탕 위에서 보전되기 위해서는 완성 후에라도 양식 있는 관리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점을 당국에 일러두고 싶다.

■ 역사가 스승인 까닭

역사는 사람의 가치를 되새기는 일이어서 존 스튜어트 밀이 쓴 책인 ‘자유론’에는 우리가 꼭 새겨 두어야 할 명언이 있다.

“국가의 가치란 무엇인가.”

그 답을 알기 쉽게 풀이하면 대한민국의 가치는 대한민국을 구성하고 있는 국민들의 가치가 된다. 그러므로 변변치 못한 국민을 가지고는 위대한 사업을 결코 이룰 수가 없다는 경고가 그 ‘가치’에 포함된다. 좀 더 비근하게는 ‘대한민국 국민’과 같이 천박한 생각, 천박한 행동으로는 결단코 ‘큰 일을 할 수 없다’라고 설명되는 상황이 우리들 자신을 몹시 부끄럽게 한다.

KDI(한국개발연구원)에서 발표한 리포트에는 우리의 가슴을 섬뜩하게 하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한국은 준법정신의 결여로 연성장률 1%를 깎아 먹고 있다.”

이 보고는 남의 나라에서 우리의 국민성을 평가한 것이 아니라 KDI와 같은 국가기관에서 그것도 공문서로 언급한 것이어서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다.

준법정신이 결여된 까닭은 무엇일까. 우리가 지켜야 하는 관행과 법도를 무시한 것이 이젠 한계를 넘었음을 의미한다. 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이 생떼를 쓰는 것은 다반사가 된지 오래고. 법을 집행하는 판사님의 교양과 위엄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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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변치 못한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면 근본이 무너지게 되고, 그것을 바로 일으켜 세울 지도자가 없다면 바닥으로 떨어진 준법정신을 회생할 수가 없음은 자명한 이치다.

청나라를 세계 최강의 대국으로 만든 강희제의 지도 이념은 간단하기 그지없다.

국궁진력, 안거낙업 鞠躬盡力 安居樂業

있는 힘을 하여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백성들에게 절할 준비를 갖추면, 백성들은 편하게 살면서 생업을 즐길 것이다.

지극히 간단하면서도 당연한 치자의 도리지만, 이를 실천하는 치자들은 찾기 어렵다.

박근혜 대통령도 선거를 치르면서 ‘안거낙업’을 서너 번 외쳤고, 취임 후에도 몇 번 더 되풀이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안거낙업’의 조건이 되는 ‘국궁진력’은 한 번도 거론하지 않았다. ‘백성들을 편하게 살게 하겠다’하고 하면서도 자신이 선행해야 할 일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반만 알고, 반은 몰랐다는 뜻이 된다. 백성들이 편하고 생업을 영위하게 하려면 정치적인 신념은 물론 실천의지를 선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스림이란 무엇인가?

백성들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다. 백성들의 가치를 높이는 일은 치자의 솔선수범에서 나온다. 그러나 국민들이 그 가치를 지키고 따라주지 않으면 모두가 무용한 것이 된다. 영국 런던의 한 공원에는 정부를 비방할 수 있는 연단이 마련되어 있다. 이 연단 위에서라면 어떠한 누구도 정부의 행태를 맹렬한 어조로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왕실의 험담을 입에 담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단순한 ‘룰’이 지켜지느냐 지켜지지 않느냐 하는 것이 ‘국민의 가치’가 되어 정착하게 된다.

역사는 그런 일들을 축적하여 기록하면서 국민들을 유도하고, 그 성패도 함께 하면서 흐른다.

■ 문인 정치가 의 기품

대개의 통치자들은 측근 실세들의 농간에 빠지면서 사리판단에 어두워지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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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실정(失政)은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사마광(司馬光, 자치통감의 저자)은 실세들의 방자함과 무능한 군왕과의 함수관계를 아주 절묘하게 설파하였다.

“임금의 근심은 신하의 간사한 것을 알지 못하는 데에 있으니, 만약에 알고서 다시 용서해 주면 알지 못하고 있는 것보다 못하다.”

광해군의 절대적인 신임을 등에 업은 이이첨은 군왕의 모후를 폐하여 서궁(덕수궁)에 가두고, 어린 왕자를 쩌서 죽이는 난정을 주도하였던 인물로 기록되면서 명문에 먹칠을 했을 뿐만 아니라 후대의 자손들에게까지 누를 끼쳤다.

광해군 시대의 난맥상을 대표하는 ‘폐모살제(廢母殺弟)’에 연루되어 파직되고, 원지에 부처된 사람은 하나둘이 아니다. 그 많은 사람들의 수난 중에서도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1617)의 경우는 좀 각별한 데가 있다. 오리 이원익이나, 백사 이항복의 상소는 임금의 선정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윤선도의 상소는 절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이이첨을 탄핵했다는 점에서 곧은 선비의 소임을 다하였다. 이는 당 시대는 물론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곧은 선비의 소임을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읽고 되새기는 맛이 일품이다.

“아, 임금의 위엄과 권위를 제 마음대로 농간하는 것은 남의 신하로서는 극악한 대죄인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는 빨리 권세를 가진 권간(權奸)을 내몰아 종묘사직을 편안케 하시고 다음으로 삼사의 무리들이 저지른 악죄를 다스리소서, 종사가 행복하면 신하와 백성도 행복합니다.”

문인 정치가 고산 윤선도의 뼈아픈 직언은 이이첨에게만 미친 것이 아니다. 현종 1년 4월, 이른바 ‘예송(禮訟)’이라고 불리는 길고도 지루한 예론 싸움에서도 효종의 사부이자 조선 유학의 거벽과도 같은 우암 송시열을 극렬하게 탄핵하였다. 당시 우암 송시열을 탄핵하는 것은 지식인 사회에서 매장될 각오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암의 한 마디면 그의 문도(門徒)는 탄핵으로 인해 재기불능의 상태로 추락되기 때문이다. 고산 윤선도가 이 사실을 모를 까닭도 없지만 그는 이미 오래전에 임금의 은밀한 당부까지도 사리에 맞질 않는다 하여 거절한 일도 있었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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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가 우암을 맹공하는 상소를 올렸을 때가 74세, 삶이 무르익었을 만한 연치에도 불구하고,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것은 문인(文人) 정치가만이 갖춘 성정이 아닐 수 없다.

결국 고산 윤선도는 삼수로 귀양을 떠나게 된다. 도성을 떠나는 늙은 시인을 한성부 우윤(右尹) 권시(權諰)가 멀리까지 따라가 배웅을 하면서 물었다.

“심중은 충분히 짐작하옵니다만, 너무 과격한 언사를 쓰지 않으셨습니까. 노구에 북변 한지의 유배 생활을 어찌 견디려 하십니까.”

그는 태연하게 대답한다.

“이미 늙었으니 따뜻한 곳인들 특별히 즐거울 것 없고, 춥고 험한 곳인들 유별나게 괴로운 것도 없을 터... 나와 같은 사람이나 이런 말을 하지 또 뉘라서 하겠는가. 내 한 몸의 화를 충분히 짐작하면서도 그런 언사를 쓴 까닭은 모두 주상전하를 위해서이네. 보령 스물인 주상전하의 어의를 송시열 등이 좌지우지 하니. 이대로야 종사가 제대로 되겠는가. 내 보잘 것 없는 상소가 우암을 내치지는 못하더라도, 경계하는 뜻은 충분했을 것이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선비의 참모습인가.

고산 윤선도는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에 달을 포함하여 다섯 친구라 부르고 그 모두를 담은 ‘오우가(五友歌)’를 남겼다. 그중에서도 대(竹)를 노래한 대목은 가히 절창이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곱기는 뉘 시키며 속은 어이 비었는가

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문인 정치가 고산 윤선도는 때로 융통성이 없어 곧기만 하다는 비난도 받았으나, 우리 정치사에 획을 그을 수 있는 정직함을 심어 놓았다.

퇴계 이황이 “고산이야말로 정치가의 풍도가 있다.”라고 평한 것은 두고두고 곱씹히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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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미래의 정치를 위하여

■ 진보와 보수

지금 우리는 이른바 보수와 진보 세력 간의 갈등을 지켜보면서 때로는 한숨짓고, 때로는 분노하면서 산다. 보수와 진보가 대립하는 것은 세계 모든 나라가 공통되고, 또 국가 발전의 동반자인 관계를 유지한다면 구태여 탓할 일도 나무랄 일도 아니다.

유럽이나 문명국들의 진보와 보수는 자신들의 의견을 충분히 개진할 수 있을 만큼 당당하지만, 우리의 진보 세력에는 ‘종북’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니기에 동조 세력을 넓혀 가기가 어렵고, 자신들의 정강을 밝히기조차도 쉽지 않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고 애국가 대신 ‘아침 이슬’이나 ‘님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진정 진보라고 할 수 있을까. 진실로 미래를 걱정하는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노릇임이 분명하다.

조선 시대에도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 있었고, 그 갈등이 사생을 결단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음은 놀라운 일이 못된다. 진보 세력의 발호가 없이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득권 세력과 그것을 개혁하려는 세력 간의 다툼이 격렬해 질 수밖에 없다. 정암 조광조는 중종 임금에게 당 시대의 정치 상황을 육성으로 고해 올렸다.

“지금 조정 안에서 재상(宰相)은 ‘옳다’ 하고 대간(臺諫)은 ‘그르다’ 하여, 하나의 시비 속에서 조금만 뜻이 맞지 않으면 반드시 반목하여 서로 헐뜯어 위아래가 결리하게 되니, 신은 재변이 생기는 것을 조정의 불화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려 480년 전의 일인데, 어찌하여 지금의 우리 처지와 이토록 같을 수가 있는가. 정암 조광조 선생이 지금의 우리 모습을 보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위의 글을 지금의 우리 형편으로 옮겨 놓으면 소름이 끼칠 정도의 같은 양상이 된다.

“지금 우리 정치를 보면 보수꼴통은 옳다 하고 2040은 그르다 하여, 하나의 시비 속에서 조금만 뜻이 맞지 않으면 반드시 반목하여 서로 헐뜯어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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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가 결리하게 되니, 나라에 재변이 생기는 것은 정치의 불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지난 시대의 거울이라 하고, 미래로 이어지는 맥락이라는 사실을 완벽하게 입증해 보인 글이다. 우리가 역사를 바로 읽어야 하고, 그 내용을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음이다. 중종은 그 해결책을 다시 물었고, 조광조의 대답은 명쾌하게 이어진다.

“ 만일 보수꼴통은 2040 보기를 자제처럼 하고, 2040은 보수꼴통 보기를 부형처럼 하여, 상하의 사이에 꺼리어 숨기는 일이 없이 서로 바로잡고 경계하여 엄숙하고 화기애애하여진다면, 자연히 군자가 진출하게 되고, 소인은 물러나게 될 것입니다."

어휘만 요즘 것으로 적었을 뿐 내용에 손을 대지는 않았다.

왜 우리 진보 세력에게는 ‘종북’이라는 거부감이 묻어 다닐까. 누가 시켜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진보 세력들의 자업자득의 결과가 스스로 발붙일 곳을 잃게 하였다는 사실이 사상 체계의 기본을 망치게 된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른바 진보 세력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지난 30여 년 동안 독재로 일관한 군사정권을 무너뜨린 개혁 세력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진보적인 사상을 궁구하거나 거기에 물든 일이 없음에도 민주사회를 이루어 낸 핵심 세력임을 자부한다. 군사 군사독재 세력이 무너지면서 진보 세력들은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국토가 남북으로 갈라져 있고, 그로 인한 남남갈등의 요소가 꿈틀거리게 되자 정권의 중심부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정권 실세와 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고서는 생존의 방법이 없게 된다.

이른바 또 다른 이념의 한 축이 진보 세력의 곁방살이를 하게 된 것이 비극의 단초가 되었다.

비근한 예로 천안함 사건이나, 연평도 포격에 대한 명백한 답변을 못하는 사람들에게 진보 세력임을 인정하는 그 자체가 자가당착이요, 자기모순인데 그들의 일부가 국회에 진출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기도착이라는 말이 아니고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라는 데 문제가 심각하다.

한국의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 맹목적일 정도로 극렬한 것은 이른바 진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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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자처하는 세력들이 논리적 근거를 마련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현대 국가에 진보 세력이 있어 기득권 세력의 독주를 몸으로 막아야 하는 일은 아름답기 그지없는 노릇이지만, 우리의 진보 세력에게 존립의 근거를 마련해 줄 수 있는 여건은 아직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 20세기에 대한 성찰

우리의 20세기는 참담하였다. 불행하게도 ‘나라 잃고 반세기, 국토 동강나고 반세기’로 집약되기 때문이다. 19세기의 아시아는 중국, 조선, 일본으로 대표되지만 나라마다 근대화의 성패로 흥망이 좌우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 나라가 겪은 근대화의 성패는 유럽에서 건너온 이양선에 대한 대처 능력에서 비롯되었다.

유럽 문화의 동진은 19세기 아시아 문화를 발칵 뒤집어 놓을 정도로 강력하였다. 청나라는 1840년, 아편전쟁으로 힘없이 무너졌고, 조선은 1866년, 평양의 대동강으로 거슬러 올라온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 호’를 화공(火攻)하는 것으로 양이보국의 잘못된 기치를 세우게 되었다.

고종 초기의 사회현상은 목불인견의 참상이었으나, 그런 현상을 솔직하게 적어서 남긴 우리 기록이 없으므로 서양 사람들의 기록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영국인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 혈혈단신으로 조선 땅을 밟았다. 아무리 모험심이라고 하더라도 50대의 여성 지리학자가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서 조선 땅을 밟았다는 사실, 게다가 ‘조선과 그 이웃 나라’라는 저작을 남겼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또한 선진 문물을 경험한 외국인에 의해 당시 조선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사벨라 비숍 여사나 또 다른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들을 살펴보면 ‘조선의 관아에는 기생충이 우글거렸다’라고 하였고,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에는 길바닥에 굶어서 죽은 시체들이 즐비하게 깔려 있었고, 갓 태어난 계집아이를 중국 뱃사람에게 팔 때는 그 가격이 쌀 한 말 값이었다’라고 적고 있다. 그 때와 또 다른 각도로 살펴서 지금의 황해도와 평안도에 그와 비슷한 상태가 있다면 20세기 1백년의 처참함이 아직도 이어진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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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2월 11일, 한 나라의 임금이 달랑 아들 한 사람(후일 순종)만 데리고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야반도주를 하였다. 그것도 남의 눈에 띌까 두려워 여자들이 타는 가마에 몸을 실었다면 한심하고 창피한 지경이 아닐 수 없다. 소위 아관파천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입에 담기조차 민망하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불과 반년 전인 1895년 8월 20일, 일본의 낭인들과 군인들이 무엄하게도 조선왕실의 주궁인 경복궁의 담장을 넘어와 중전 민 씨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 제국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년의 치욕까지 아직 10년이나 남아 있었지만, 황후를 잃은 조선 정부는 항의할 곳도 항의 할 능력도 없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숨긴지 2개월 쯤 지난 1896년 4월 7일, 조선에 주목해야 할 큰 변화가 있었다. 독립신문이 민간인에 의해 편집 간행된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사건이 되고도 남는다.

독립신문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미국에 망명해 있던 서재필이 돌아와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창간되었다. 조국의 개항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이른바 개화파의 선봉들인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일본 땅으로 망명하였지만, 서재필만은 일본을 거쳐 미국 땅에 정착하게 되었다. 청년 서재필은 온갖 고초를 극복하면서 워싱턴 대학의 의과대학을 졸업하였고, 가정교사로 있었던 암스트롱 가의 딸 뮤리엘과 결혼하여 개업의사로 활동하면서 미국식 이름인 필립 제이슨(필립 제이슨이라는 이름은 ‘서재필’을 거꾸로 표시하고 있음)으로 개명하고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모국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는 그의 마음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1896년 12월 26일, 서울로 돌아온 서재필은 명예회복을 겸한 입신양명과 다름없는 관직은 사양한다. 대신 옛 동지이자 친구인 유길준이 내부대신의 자리에 있음을 계기로 ‘독립신문’ 발간에 몸을 던진다. 나라의 근대화와 국민들의 계몽이 더 절실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때의 일을 서재필은 자신의 자서전에 이렇게 피력하였다.

“그들은 나를 독약처럼 미워한다. 내가 며칠 전 조선 상인들에게 일본의 중계를 거치지 않고 미국을 통해 직접 석유를 수입하는 것이 가격을 낮게 하여 소비자의 이익이 된다고 연설하였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나는 혼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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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부는 나를 지원하지 않을 것이고, 조선의 관민은 일본의 암살 계획으로부터 나를 보호할 수도 없고, 하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보호받지 못한 채 혼자이다.”

1896년 11월 21자 논술을 여기에 옮겨 본다.,

“정부의 벼슬하는 사람은 임금의 신하요. 백성의 종이라. 종이 상전의 경계와 사정을 자세히 알아야 그 상전을 잘 섬길 터인데, 조선은 거꾸로 되어 백성이 정부 관인의 종이 되었으니 백성은 죽도록 일을 하여 돈을 벌어 관인들을 주면서 상전 노릇을 하여 달라 하니 어찌 우습지 아니하리오.” 이와 같이 ‘독립신문’은 언론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면서 정부의 잘못을 질책하며 백성들을 계몽하고, 또 정부와 백성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통로의 마련에도 힘을 쓴다.

1897년 2월 18일 고종 임금이 지난 1년 남짓 파천해 있던 러시아 공사관에서 나왔다. 고종은 애초에 떠나왔던 경복궁으로 환궁하지 않고,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들어섰다.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경복궁으로 가기는 싫었다. 거처를 옮긴 뒤에도 러시아 공사관을 비롯한. 미국, 영국 공사관으로 연결되는 새로운 문을 냈다는 사실은 고종의 심중을 읽게 하는 대목이다.

때를 같이하여 고종이 황제로 등극해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치듯 올라온다.

마침내 8월 14일. 고종은 연호를 광무로 선포한다. 통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명나라도 청나라도 아닌 조선의 연호를 사용하게 된 것은 조선 근대화의 일대 각성이 아닐 수 없다.

10월 11일, 조선조 5백 년 역사상 처음으로 왕이 아닌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임을 선포하고, 새로운 나라 이름 ‘대한제국’을 세계만방에 알렸다.

대한제국의 탄생으로 조선왕조는 역사 이래 두 가지 나라 이름을 갖게 되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5백 5년의 세월이 흐른다음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바꾸었다는 뜻이 된다.

대한제국은 1897년 부터 1910년까지 사용되다가 치욕의 합병으로 사라져 버렸으니 겨우 13년 동안 나라의 국명으로 사용된 셈이다.

파란과 곡절로 이어진 조선왕조지만, 외세가 판을 치는 격동의 20세기를 몸부림치며 겪어 낸 흔적은 비교적 소상히 읽을 수가 있다. 그런 세월을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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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치하의 36년과 비교할 수 있으랴만, 그 잘못된 시대를 겪었던 지식인들에 의해 나라가 다스려지면서 이조(李朝), 이조 5백 년, 이조실록 등 식민 사관의 폐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조’라는 말은 일본 제국이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나서 ‘이씨가 다스리던 나라’라는 뜻으로 비하된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아주 보잘것 없는 한 성씨의 것으로 비하하던 식민지 시대의 잔재이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이 세계의 7대 교역국으로 성장한 이 시점에 ‘이조’라는 말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오늘의 지식인들이 이 말을 쓰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그야말로 후안무치가 아니고 무엇인가. 더 놀라운 것은 광복 이후 태어난 지식인들까지도 ‘이조백자’, ‘이조실록’ 운운하는 지경이면 이들은 대체 누구로부터 그런 말을 배워서 쓰고 있는지 답답하고 한심한 심기를 가늠할 길이 없다.

대통령, 장‧ 차관들, 판‧ 검사들, 젊은 국회의원들의 입에서까지 심지어 신문사의 젊은 논설위원들에게까지 이런 터무니없는 말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되고 있는 현실에 나는 절망감을 느끼곤 한다.

20세기는 멀리 떠나간 세월이 아니다. 따뜻한 성찰로, 조금은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우리 선대의 노고를 헤아리는 길이며, 우리들의 미래를 열어가는 길이 아니겠는가.

■ 입으로만 하는 정치 현실

‘말로써 천 냥 빚을 갚는다’, ‘세치 혓바닥이 제 몸을 베는 칼’, ‘말이 씨가 된다’ 등의 우리 속담은 말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천금 같은 가르침이다.

서양에도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말이 화근’이 된다는 사실을 경고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우리나라 역사의 기본 틀은 말과 행실이 같은 사람을 높이 사모하여 명현으로 섬겼고, 말과 행실이 다른 사람은 아무리 학문이 높아도 존경의 대상보다는 경원의 대상으로 여겼다. 그렇게 경건히 흘러왔던 탓으로 우리말에는 존경어가 다른 나라의 언어에 비하여 월등하게 많고 다양하다.

그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우리말이 일제의 식민지 치하를 겪으면서 점차 난맥의 길로 들어섰다. 또 동족상잔이라는 전대미문의 상처를 입고, 지역의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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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과 이념의 대립, 세대 간 갈등과 같은 충돌이 잦아지면서 언어생활까지 살벌하고 자극적이며 저급한 표현을 하는 것이 무슨 선각의 지식인 것처럼 번져 나갔다. 그러더니 마침내 ‘나꼼수’나 ‘딴지일보’와 같은 인터넷 문화가 우리말 파괴의 선봉으로 등장하여 시퍼런 칼날을 흔들어댔고, 자칫 자해를 할 수도 있는 그 아슬아슬한 칼춤에 맞추어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위험천만한 광경이 목도되기 시작하였다. 그 주된 내용이 저질의 정치판을 혐오하며 까뭉개고 있었기에 이에 동조하는 젊은이들이 물경 30여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4‧ 11 총선의 막이 오르면서 그들의 영향력이 두려웠던 탓에 온전한 비판조차 없었고, 여야 모두 어법에도 맞지 않는 그들의 장난 같은 어법에 기대 보려는 얄팍한 행태를 보였다. 그러나 투표 경향이나 결과는 그들의 무엄방자한 행태를 비판한 쪽으로 나옴으로써 뜻있는 사람들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였다.

그들의 화두대로라면 당연히 참패했어야 할 새누리 당이 152석을 얻었고, 승리를 기대했던 민주당이 127석에 머물게 된 결과는 양측 모두에게 무성한 뒷말을 남기게 하였다. 가장 정직한 분석은 ‘김용민 막말 파문’등에 민주통합당이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실책에 있었고, 이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였다. 그 결과는 말에 대한 우리 민족의 생각이 얼마나 건전하고 엄중한가를 다시 한 번 확실하게 보여 준 것이다.

필리핀에서 태어나 자란 한 여성이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여 두 남매의 어머니가 되었고, 그 어려운 차별과 멸시를 겪으면서도 한국인으로 귀화하여 15년째 한국인으로 살고 있다. 새누리 당의 비례대표로 선정된 이자스민 씨, 그녀는 마침내 국회로 입성하여 20만 명을 웃도는 다문화 가족들의 어려운 사정을 국정에 반영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자스민 씨가 극복하였던 고난의 세월에 박수와 갈채를 보내는 것이 온전한 도리다. 그럼에도 우리의 젊은 네티즌과 트위터러들이 인종주의적인 선동으로 그녀를 비난하고 비하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용인될 수가 없는 저질 행태다. 그야말로 한 입으로 두 말하는 혐오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입으로 두 말하는 사람을 가장 저급하고 경박한 사람으로 취급하였던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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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민족의 역사인식이 살아나야 막말이 자신을 베는 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인터넷에 배치된 여러 사이트가 막말을 하는 장소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의 본심을 숨긴 말들을 함부로 쏟아 내면서 쾌감을 느낀다면 위험천만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제 버릇 개 주랴’는 속언은 있지만, 습관은 오래되어야 관행이 된다. 남을 속이고 헐뜯는 일로 위안을 삼는 것은 오랜 세월을 면면히 이어 오는 우리의 관행을 헐뜯는 일이 된다.

특히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인터넷 사이트의 무분별이 그렇다.

■ 사관과 사초

우리에게는 국보 151호요, 유네스코에서 세계의 기록유산으로 지정한 ‘조선왕조실록은 해당 시대마다 제백사를 정직하고 소상한 필치로 편찬되었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원전이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은 세계적인 자부심이고도 남는다.

‘조선왕조실록’의 크기를 옛날의 기록대로 읽으면 1,866권 887책이 되지만 한글로 번역한 국역본은 모두 413권이나 되고, 한 권마다 A4 용지 크기의 판형으로 대개 300~350페이지 분량이다. 하루에 한 페이지씩 읽어간다면 전부를 읽는데 꼬박 4년이 걸린다.

‘조선왕조실록’은 각 왕조별 사관들이 적는다. 사관은 해당 왕조마다 13명에서 24명 정도가 지명되지만, 관직을 겸하는 사관도 있고, 겸직하지 않는 사관도 있다. 그들은 직급이 높지 않았지만 사관에 선정된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군주가 두려워 할 것은 하늘과 역사입니다. 하늘이란 저 푸르고 높은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理)일 뿐이옵니다. 사관은 임금의 선악을 만세에 전하니 어찌 두렵질 않습니까.” - 정종 1년 1월 7일자 ‘정종 실록’

첫째, ‘조선왕조실록’은 ‘태조실록’, ‘단종실록’ 등 각 왕조별로 편찬이 된다. 그러므로 해당 임금이 세상을 떠나야 비로소 편찬이 착수된다.

사관들이 적은 사초(私草, 기사의 초본)는 자신의 목숨이 걸린 극비 문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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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이 없다. 아무리 고위 관직자도 확인할 수 없을 만큼 은밀히 작성되고, 목숨보다 소중히 간직하게 된다. 그렇게 보관된 사초는 임금이 세상을 떠나야 비로소 춘추관(春秋館)에 제출된다.

이때부터 춘추관은 ‘실록청(實錄廳)으로 개편되어 제출된 사초를 취사선택하면서 편찬 작업을 실행하게 된다. 먼저 제출된 사초를 엄중히 선별하여 재초(再草)로 삼고, 그 재초를 다시 선별하여 삼초로 정하면 그것이 ’실록‘의 기초가 되어 권위 있는 문장으로 정리된다.

이 과정에서 선택이 되지 않은 사초의 양은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고, 그 내용이 공개되면 모두가 분쟁의 씨앗이 되고도 남는다. 그러므로 채택되지 않은 사초는 흐르는 물에 불려서 먹물을 씻어내게 되고, 이 일을 세초(洗草)라 하였다. 먹물이 빠진 종이는 섬유의 일종인 ‘닥’으로 남고, 그 닥을 다시 활용하여 재생지를 만든다. 우리 선현들의 지혜로움이 놀랍기 그지없다.

둘째, 왕들은 그 누구도 실록을 읽지 못한다.

27명이나 되는 조선왕조의 군왕들 누구도 ‘실록’을 읽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을 오늘에 전하게 하였다. 그 빛나는 역사인식이 세계를 감동시켰기에 UNESCO에서 ‘세계의 기록유산’으로 지정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부심으로 삼아야 한다.

셋째, 엄밀하게 선택된 삼초가 통일된 문장으로 정리되면 인쇄를 하게 된다. 그렇게 완성된 4벌의 ‘조선왕조실록’은 사고에 보관된다. 사고는 전주사고, 오대산사고, 묘향산 사고, 임진왜란 뒤에는 강화도의 정족산사고 등이 있었다. 이렇듯 사고를 깊은 산중에 두는 것은 인재로 인한 사고와 화재로 소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사람의 왕래가 적은 산중에 사고(史庫)를 지었고, 승병(僧兵)으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그동안 임진왜란, 병자호란, 6‧ 25와 같은 미증유의 전란이 있었어도 묘향산 사고가 무사하였고, 오대산사고(일부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가 반환됨)가 무사하였기에 오늘 우리는 ‘조선왕조실록’의 원본을 남쪽과 북쪽이 모두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역사를 두려워할 줄 아는 민족의 자부심이 아닐 수 없다.

■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노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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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실부인 흥선군 이하응은 고종이 어려서 보위를 이으면서 섭정의 중책을 맡았으므로 그를 예우하는 절목은 모두 새로 만들어 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고종 이전에도 궐 밖에서 태어나 임금이 된 예는 두 번이나 있었다. 선조의 아버지 덕흥부원군과 철종의 아버지 전계부원군이 그들이다. 하지만 아들이 임금이 되었을 때는 죽고 없었으므로 군호만 내리면 되었지 특별한 예우절목을 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예는 이들과 판이하게 달랐다. 장김(壯金 안동 김씨 일문)의 60년 세도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 우두머리격인 김좌근의 위세가 시퍼렇게 살아 있다면 비록 왕권을 손아귀에 넣었다고 하더라도 허울뿐일 수도 있었다. 대왕대비로 불리는 익종비 조씨의 비호와 후원이 있었다 해도 아직 탄탄한 권력기반을 갖추고 있는 안동 김씨의 위세를 다스리기에 역부족임은 불문가지의 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탁월한 정치력과 넘쳐나는 카리스마로 60년 세도를 누려 온 안동 김씨 일족의 손발을 묶고, 그 엄청난 조직을 해체하고 잘라내면서도 피 한 방울 흘리게 하지 않았다. 그들이 모아 놓은 재산을 모조리 환수하면서도 그들의 일족에게 죄를 주거나 파직을 하지 않을 만큼 아무 희생 없이도 자신이 목표로 한 모든 것을 달성하였다. 그들의 난정에 시달려 온 백성들은 천천세를 부르면서 흥선대원군의 카리스마에 탄성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흥선대원군은 그 여세를 몰아 경복궁 중건을 선언한다. 임진왜란 때 불탄 채 장장 250년 세월 동안 잡초 밭으로 변해 있고서야 왕실의 위엄이 설 까닭이 없다. 하지만 중건을 할 만한 경비가 없었다. 흥선대원군은 원납전(願納錢)을 걷을 것을 명한다. 궁궐을 지어 왕실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스스로 원해서 내는 돈’이라 하여 이름조차도 원납전이다. 흥선대원군의 눈 밖에 나고서야 재물도 온전하게 보전할 수가 없다면 원납전을 낼 수밖에 없다. 아무리 그렇기로 경복궁의 대역사가 원납전만으로 이루어질 까닭이 없다.

흥선대원군은 권문세도의 사유재산을 강탈해서라도 경복궁의 중건을 이루어 내리라고 다짐한다. 그때부터 강제성을 띤 원납전을 증수한다. 그 돈에 백성들의 원한이 잠겨 있다 하여 원납전(怨納錢)이 되었지만, 흥선대원군의 독선은 성문을 출입하는 가난한 백성들에게조차 문세라는 것을 걷어들인다. 이 같은 그의 독단에 찬성할 사람은 없지만 마침내 경복궁 중건이 이루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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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왕실의 기쁨을 어찌 말로 다 할 수가 있음이던가.

흥선대원군의 용단이 다시 발휘되어 이번에는 서원 철폐를 명한다. 서원(書院)은 조선 유림의 본거지로 거기에 모인 양반 사대부들이 왕실과 정부에 불리한 여론을 조성하고, 또 다른 여론을 형성하는 상소를 올린다. 그들이 성화가 하늘을 찌르면서 정부의 능력은 무력화되고. 왕실의 위엄이 곤두박질친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은 조선의 사대부와 결전을 선언한 용단이나 다름이 없다. 이에 전국의 서원을 가득 메운 유림들이 분노 한다.

“그자가 동방의 진시황이 되려는가!”

전국 서원의 유생들이 떼를 지어 서울로 몰려든다. 흥선대원군의 퇴진을 주장할 기세라면 타협을 하는 것이 순리겠지만, 오히려 흥선대원군의 격노가 하늘을 찌른다.

“설혹 공자가 살아온다 해도 서원은 철폐되고 말 것이니라!”

임금의 아버지요. 천신만고 끝에 경복궁을 중건한 흥선대원군의 위엄이며 카리스마다. 도성으로 몰려들던 유림들은 한강의 다리도 건너지 못한 채 패잔병처럼 흩어지고 말았다.

흥선대원군이 아무리 정치를 잘해도 아들인 고종이 20세의 청년이 되면 섭

정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는 것이 국법이다.

그것을 문건으로 정해 놓은 것은 아니지만, 조선 왕실의 관행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한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고종을 대신하여 여러 분야의 개혁에 성공하면서 실종되었던 왕실의 위엄까지 세워놓았다면, 권좌에서 물러나기 전에 미진한 점을 더 완벽하게 해놓고 싶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요. 권력의 속성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고종이 성년이 되었어도 물러나지 않았다. 결국 나이든 사람의 노탐을 버리지 못하면서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 노탐이 흥선대원군의 말로를 참담하게 하였던 원인이다.

고종 초기에 있었던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는 조선왕조를 빛낼 정도의 성과였지만, 그의 노탐이 작용하고부터는 독선으로 스스로 실인심하게 된다.

역사를 가정에 실어서 논란하는 것은 어리석음이지만, 만에 하나라도 흥선대원군이 고종이 성년이 되었을 때 만인의 축복을 받으면서 운현궁으로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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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갔다면, 그는 조선왕조에서 가장 유능하였던 종친이요, 정치지도자로 평가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노탐, 그렇다. 나이 들면서도 탐욕을 버리지 못한다면 반드시 비난의 대상이 된다. 우리 현대사에도 노탐으로 인해 인생을 망친 지도자들이 있었으니 이를 다시 새겨 볼 일이다.

■ 광해군의 이중외교

조선왕조 5백 년의 역사가 흐르면서 스물일곱 분의 임금이 왕좌에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연산군과 광해군은 쿠데타로 왕위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스물다섯 분이 된다. 임금의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왕위를 박탈당하면 보통 왕자라는 뜻에서 군호는 유지되지만 위패는 종묘에 봉안되지 못하여 왕실에서 올리는 제사도 받아 자시지 못한다.

그분들의 처지가 참담하기 그지없지만, 왕으로서의 업적이나 실정을 기리는 기록은 완벽하게 남아 있어서 모든 행적이 세세히 드러나 있다. 그 기록은 ‘실록’이라 하지 않고, ‘연산군일기’ ‘광해군일기’로 격하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록된 내용은 다른 임금의 ‘실록’과 똑같은 방법으로, 그 시대의 사관들에 의해 적혔으므로 그분들의 치적을 살피는 데 아무 하자도 없다.

그 결과 ‘연산군일기’에는 재임 중에 썼다는 연산군의 시가 무려 120여 편이나 등재되어 있어 그가 시인의 감수성으로 정치에 임하였음을 입증할 수 있다. ‘광해군 일기’를 통해서는 명나라와 청나라를 오가는 이중외교를 시도한 광해군의 외교 역량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 같은 기록을 남겨 놓지 않았다면 광해군의 이중외교는 한낱 전설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이 표제어로 등장하면서 명청교체기에 겪어야 했던 조선의 난감했던 처지를 실록은 눈에 본 듯이 전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광해군의 이중외교를 다시 평가해야 된다고 학문 수준으로 거론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16세기, 명청교체기의 조선은 이념 갈등으로 극도의 정신적 혼란을 겪어야 했다. 지금까지 섬겨 온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욱일승천의 기세로 떠오르는 후금(청나라)과의 우의를 새롭게 정립해야 할 것인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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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조선왕조의 존립을 좌우하는 화두이기도 하였다. 비록 후금이 욱일승천의 기세로 떠오른다 하더라도 오랜 세월 동안 조선의 국경을 어지럽혀 온 세력이다. 조선은 그들을 ‘오랑캐’라 불렀고 그들의 편발이나 여성들의 편족은 야만임을 알리는 실증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오랑캐의 무리가 이번에는 국경을 어지럽히는 것이 아니라 명나라와 대등하게 싸우는 지경이 이르렀다면 조선왕조로서는 골칫거리를 넘어 심각한 지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 패색이 짙어가는 명나라에 원병을 보내라는 채근이 시작되었다. 광해군으로서는 난감한 지경이 아닐 수 없었다. 원병 제의를 거부하였다가 명나라가 승전을 하면 그때의 핍박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반대의 경우 후금이 승리한다면 조선왕조는 그 책임을 추궁당하면서 혹독한 후유증을 치러야 한다. 광해군의 이중외교는 그런 고통 속에서 나왔다.

명나라를 지원하는 병력은 보내되, 세가 불리해졌을 때 후금진영으로 귀순하게 한다면 양쪽 모두에게 체면을 살려 주면서 조선 병사들의 희생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광해군은 오도도체찰사 강홍립을 불러 자신의 뜻을 개진하였고, 강홍립의 동의도 얻어낸다.

명나라를 지원하기 위한 강홍립 휘하의 2만 병사들이 압록강을 건너 요동 땅으로 들어간다. 그것만으로도 명나라에게는 조선의 의리를 충분히 지킨 것이 된다. 그러나 전투의 양상은 광해군이 짐작한 대로 명나라의 패퇴로 기울어 간다. 이에 강홍립은 휘하 장명 2만을 거느리고 후금 진영으로 귀순한다. 후금의 야전사령관인 홍타이지(후일 청나라 태종)의 기쁨은 헤아릴 길이 없다.

강홍립을 매개로 한 조선과 후금의 밀월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왕위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여 강화도에 부처되었지만, 강홍립의 가족들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는 무너져 버렸다.

반정군에 의해 왕위에 오른 인조는 전왕의 정책을 따를 수가 없지만, 강홍립의 소행 또한 그냥 둘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후금은 더더욱 조선의 철천지원수가 될 수밖에 없었고 배신자로 낙인찍힌 강홍립의 가족은 불안에 떠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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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귀순 명령을 내렸던 주군(광해군)이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나 강화도에 유배되었다면 한양에 남아 있는 가족들의 안위가 당연히 걱정이다. 또 그 사실을 과장하여 알려 주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당시 조선의 범법자들은 국경을 넘어 후금으로 도망하는 것이 살아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분노한 강홍립은 새로이 권력을 장악한 홍타이지에게 조선을 정벌할 것을 제의한다.

“조선은 의리를 배반하였소. 응징을 해 두어야 후일을 기약할 수가 있을 것이요!”

또 그것은 홍타이지의 울분을 자극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아버지 누르하치의 장례를 치를 때 조선은 조문 사절을 보내지 않았다. 오랑캐의 두령이 죽었는데 조문 사절을 보낼 까닭이 있던가.

“조선을 칠 것이요. 장군이 선봉에 서시오!”

조선왕조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후금의 진영으로 투항하였던 2만 여의 강홍립 군을 선봉으로 후금군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의 국토를 철저하게 유린한다. 이 이율배반적인 강홍립의 귀환을 역사는 ‘정묘호란’이라 적는다.

바로 여기에 쿠데타로 왕위를 찬탈당한 광해군의 이중외교가 내포하는 역사의 교훈이 있음을 상기하게 된다.

■ 시인 연산군

연산군은 시인이었다.

그는 스스로 시집을 엮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종 1년(1505) 6월 10일 자의 ‘중종실록’에는 연산군의 시집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정승 및 김근의 등이 계하기를 연산군의 자제시집(自製詩集)과 실록각에 소장된 경서문 등은 태워 없애는 것이 어떻습니까.”

위의 기사를 따르면 연산군의 자제시집은 불태워진 것으로 보이나 천만다행으로 그의 실록인 ‘연산군일기’에 125편의 시가 등재되어 있어 그의 시적 재능을 살펴 보는 데는 아무 불편함도 없다.

시인이란 감수성이 예민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그 시절은 지금과 달라서 학문적인 바탕이 없으면 훌륭한 시를 지을 수가 없었다. 비록 연산군의 치세가 난세인 것은 분명해도, 그의 시적 감수성과 상상력으로 정무에 임한 흔적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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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멀고 땅은 미끄러워 / 다니기 어려운데 / 충성심 가시지 않아

대궐에 나왔구려. / 비나니 어진 정승들이여. / 나의 잘못을 살펴주고

복령(茯笭)과 대춘(大椿)처럼 / 오래오래 사시오.“

- 원문 생략

연산군 초기의 시는 편수로도 얼마 되지 않지만, 담고 있는 내용들이 다정하여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그것은 곧 연산군의 폭정이 내재된 정서가 다른 방향에서 진행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해도 무리일 수 없다.

반대로 집권 중반기를 지나서 종반기로 들어서면 갑자기 시의 편수가 늘어나기 시작하고, 담겨진 내용도 전과 달라서 읽는 사람들을 몹시 불안하게 한다.

“사시철 아름다운 경치도 / 놀이만은 못한 것이니. / 부디 그윽한 대(臺) /

밝은 달을 구경하리. / 물결 타고 건너기 좋아마오 / 배 뒤집혀 위급할 때 /

그 누가 구해 주리.“ -원문 생략

얼마나 솔직하게 심회를 토로하고 있는가.

연산군이 남긴 125편의 시 중에서 무려 108편이 집권 마지막 2~3년 동안 쓰여 졌다. 이것을 보면 그는 자신의 과실을 시에 담아 위안을 삼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배 뒤집혀 위급할 때 / 그 누가 구해 주리.”

자신의 종말까지 처연한 심정으로 예견하고 있다. 이 예견은 참으로 정확한 것이어서 그가 왕위에서 쫓겨나 강화도로 유배될 때 아무도 그를 구하고자 하지 않았다.

중종반정이 있기 몇 달 전 연산군은 풍악과 기생 사이를 오가며 현실과 전혀 다른 환각 상태를 마음껏 즐기면서도 문득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와 탄식하였음도 시로 적어 남기고 있다.

“인생은 풀잎의 이슬 같아서 (人生如初露)

만날 때가 많지 않은 것 (會合不多時)”

연산군의 심저에 깔려 있던 참으로 인간적인 심회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는 이 시를 쓴 지 두 달 후에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나 강화섬에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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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폭정이 극에 이르자 내시나 상궁들의 입에서 군왕의 횡포를 비방하는 소리가 자자해지자 그들로 하여금 말을 삼가게 하는 특단의 조처를 취한다. 내시의 목에 ‘신언패(愼言稗)’를 걸고 다니게 한 것인데 그 ‘신언패’에 적힌 구절이 절묘하다.

“입은 화를 불러들이는 문이요 (口是禍之門 구시화지문)

세치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舌是斬身刀 설시참신도)”

내시들은 그런 ‘신언패’를 목에 걸고 다니면서도 연산군의 부도덕을 입에 담았다. ‘입은 화를 불러들이는 문이요, 세 치 혀가 몸을 베는 칼’이라는 사실이 내시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연산군 자신에게 돌아간다는 진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묘미는 읽는 방법에 따라 참으로 다양하게 해석되기도 한다.

■ 깨인 백성이 으뜸이다

교산 허균(蛟山 許筠 1569-1618)의 문학적인 인생은 나무랄 곳 없이 빛나지만, 관직에 입사하여 그 직급이 높아지는 데 비례하여 그의 행적은 파란을 거듭하였다.

허균은 주자학을 학문과 행실의 근간으로 삼는 유학의 나라에서 태어났으되, 그로 인한 고질적인 제도와 관행에 대해서는 칼날같은 비판을 가했다. 당시(唐詩)에 소상하다 하여 삼당(三唐)이라고까지 불리었던 서출의 시인 이달(李達)로부터 배우고 터득한 평등사상은 그의 평생을 개혁과 참여의식에 불타게 하였고, 그것이 허균의 목숨까지 앗아 가게 하였다.

허균의 호민론(豪民論)이 이를 잘 말해준다.

“대체로 자기가 처한 상황을 깊이 인식하지 않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면서 윗사람에게 충성을 다하는 백성을 항민(恒民)이라한다. 이들은 조금도 무서울 것이 없다. 다음은 살이 닳고 뼈가 으스러지도록 모은 재산을 착취당하고 혼자 우는 백성들이 있다. 이들은 위정자를 원망하는 백성, 즉 원민(怨民)이라 한다. 이들은 그렇게 무서운 존재는 아니다. 다음으로 호민(豪民)이다. 이들은 잘못되어 가는 세상일에 불만을 품고 인적이 없는 곳으로 잠적한다. 이들이 몸을 감추는 것은 잘못된 세상을 자기 손으로 바로잡을 기회를 노리기 위한 것이다. 이들이 무서운 존재들이다. 이들이 주먹을 흔들며 개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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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을 외쳐대면, 원민들은 소리만 듣고 모여든다. 이렇게 되면 수종하던 항민들도 호응한다.”

이른바 민중들의 저항 의식을 자극한 호민론은 ‘홍길동전’의 주제의식으로 구체화되면서 허균의 삶을 관통한다.

허균은 판서의 반열에 오를 만큼 학문에 통달했으면서도 제도의 모순점에 대해서는 저항의식이 강한 진보적인 사상가였다. 그는 불경에 통달하여 퇴청 후에는 승복을 입고 승려들과 교유할 만큼 자유분방하기도 하였다. 또 강원도 삼척 부사가 되어 임지에 도착하여서는 기생과의 스캔들이 문제가 되어 임지에 도착한지 13일 만에 파직되는 불운도 겪었다. 허균을 말할 때 유, 불, 선에 통달하였다고 하는 것은 이런 연유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허균은 47세가 되던 해(1616) 형조판서에 재수되었다가 다섯 달 만에 파직이 된다. 그의 파격적인 행적으로 미룬다면 파직은 예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지만, 다시 1년 뒤에 좌참찬으로 발탁되는 것은 기적적인 그의 회생이라기보다는 광해조 말기의 난정 때문이었다.

허균은 누님 난설헌처럼 자신에게 닥쳐오는 비극적인 종말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이미 처형되기 4년 전에 자신의 문집을 완벽하게 정리한 다음 절필하였다.

마흔 세 살 되도록 / 글이나 짓는다고.

천금을 널리 털어 / 애쓰며 버티었네.

시와 문장 열 권을 / 방금 옮겨 쓰길 마쳤으니,

오늘부턴 이 몸이 / 다시는 시를 짓지 않으리. -‘문집을 다 엮고 나서’ 전문

허균의 불행은 애제자인 예조좌랑 기준혁이 자신의 아버지 기자헌을 살리기 위해 허균의 반정 계획을 고발하는 비밀상소를 두 번에 걸쳐 올린 것 때문이다.

광해군은 정승들과 의금부의 당상들을 거느리고 허균의 친국에 임했다. 혹독한 매질 속에서 작성된 현웅민의 공초는 음미해 볼만한 내용을 담고 잇다.

“전후의 흉서는 모두 신이 한 짓으로 허균은 모르는 일입니다. 단지 신만을 처형하소서. 허균이 죽는 것은 억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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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국이 길어지면 허균이 입을 열지도 모른다. 그가 입을 열어서 ‘서궁을 핍박한 일’등을 거론한다면, 폐모의 난정이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공초에 적혀야 하지 않겠는가. 이를 두려워한 절친한 친구 이이첨 등은 서둘러 정형하기를 주청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광해군이 이를 가납함으로써 친국을 끝내게 되었다.

교산 허균은 결안에 승복하지 않은 채 광해군 10년 8월 24일, 서쪽 저잣거리로 끌려 나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의 ‘호민론’에 담긴 의지는 지금 우리 처지에 놓인다 해도 아무 손색이 없다. 선각의 지식인이 한없이 그리운 대목이다.

■ 선진화의 좌절

조선왕조의 역사 중에서 ‘병자호란’의 치욕은 송두리째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수치스러운 대목이다. 임금(인조)이 적장의 앞에 나아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의 예를 올리면서 오랑캐라고 천시하던 후금(청)을 상국으로 섬겨야 했고, 두 사람의 왕자와 신하들, 그리고 60만 명이 넘는 백성들을 인질로 보내야 했던 것은 아무리 지나간 역사라 하여도 참극이란 말이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야 할 소현세자도 빈궁 강씨와 함께 오랑캐의 수도인 심양으로 끌려갔다.

명나라가 멸망하면서 청나라의 섭정왕 다이곤이 장군 오삼계를 거느리고 북경으로 진군할 때, 그는 소현세자에게도 동행을 청했다. 강요나 다름없는 청이었다.

조선과도 다르고 심양과도 또 다른 북경의 풍물은 소현세자의 모든 관심을 일거에 끌어당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명나라는 망하고 없어도 그들의 문물과 풍속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문물 중에서도 서양에서 들어온 신문물은 소현세자의 사고 체계를 바꿀 만큼 충격적이었다.

소현세자가 북경에 머문 것은 고작 70여 일에 불과하였으나, 그에게 있어서는 실로 7년의 세월에 버금가는 일대 ‘변혁의 시간’이었다. 소현세자는 북경에서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였다. 그중에서도 북경 교외에 있는 남성당(南聖堂)에 와 있던 서양 신부이자 과학자인 아담 샬과 교유할 수 있었던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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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의 사상을 바꾸어 놓는 일대 전기가 되었다.

아담 샬과 자주 만나면서 역법, 천문학, 천주교 등과 같은 서양 문물에 거침없이 심취해 들어갔다.

소현세자는 촌각을 아껴 쓰며 되도록 많은 것을 배우고자 힘썼다. 그 자신에게도 크나큰 포부가 있었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아담 샬은 자신이 한역한 ‘천문역산서’와 ‘지구의’, ‘천주상’ 등과 같은 진귀한 서책과 물건들을 소현세자에게 선물하였다. 이에 화답한 소현세자의 서찰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귀하가 주신 천주상과 여지구와 과학에 관한 서책은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즉시 그 중 몇 권의 책을 읽어 보았는데, 그 속에서 정신수양과 덕행을 실천하는 데 적합한 최상의 교리를 발견하였습니다. 천문학에 관한 책은 귀국하면 곧 간행하여 학자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합니다. 그것들은 조선인이 지구과학을 습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서로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태어난 우리들이 이국땅에서 상봉하여 형제와 같이 서로 사랑해 왔으니 하늘이 아마 우리를 이끌어 준 것 같습니다.”

-아담 샬에게 보낸 소현세자의 편지

우리는 이 편지를 통해 서구 문물에 대한 소현세자의 관심과 흥미가 얼마나 깊었던가를 알 수 있으며, 아담 샬과의 돈독한 우의도 꽤나 깊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이 편지에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천주교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도 기억해 둘만한 대목이다.

25세에 청나라로 끌려가 장장 9년간의 볼모살이를 마치고 34세의 연부역강한 나이가 되어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온 소현세자는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개명하고 진보적인 임금이 될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섬겨야 할 청나라의 내정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명나라가 패망하는 사상적인 배경을 몸소 확인하였다. 아울러 중국에 들어와 있던 서양문물까지 꿰뚫어 보는 안목을 갖추었기에 조선왕조 최초의 개명하고 진보적인 임금이 될 왕재가 분명하였다. 그러나 그 진보적인 사상이 자신을 비운의 왕세자가 되게 하는 원인임을 어찌 짐작이나 했던가.

타인의 쿠데타로 왕위에 옹립되어 지독한 정쟁에 시달리던 편협하고 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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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인조는 희망과 포부를 안고 귀국한 아들 소현세자에 대한 신하들의 진하(進賀)를 금지하였다. 세자의 진보적이고도 개명한 사상을 오히려 오랑캐의 문물에 넋을 판 파렴치로 낙인찍었기 때문이다.

상심한 소현세자는 귀국한 지 두 달 만인 그해 4월 23일에 병상에 눕게 된다. 어의는 학질이라고 진단하였으나, 인조는 엉뚱하게도 세자에게 침 놓기만을 강요하였다. 마침내 소현세자는 발병한 지 이틀만인 26일에 약 한 첩 써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치료과정 때문에 소현세자는 편협하고 의심 많은 아버지의 용렬함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으로 되지만…….

그 후에도 인조는 소현세자의 복제를 12일 만에 마치게 하는 등의 한심한 작태를 보였다. 뿐만 아니라 맏며느리인 세자빈 강씨에게까지 누명을 씌워 강제로 폐출시키더니 곧 사사하였으며, 친손자이자 세손인 석철을 비롯한 두 아우까지 제주도에 귀양 보내는 등 잔혹한 저주를 계속하였다. 친아들 내외와 친손자에게까지 가한 인조의 편협함은 피를 나눈 아버지의 소행으로 보기는 참으로 어려운 대목이다.

역사를 가정에 적용하여 생각하는 것은 금물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소현세자의 죽음은 조선왕조가 스스로 근대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상실했다는 점에서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 아쉬움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생생한 것은 우리가 정신적, 물질적인 근대화를 이루지 못했기에 자초할 수밖에 없었던 갖가지 비극의 씨앗으로 작용되었기 때문이다.

인조와 같이 옹졸한 군왕의 치세는 나라의 발전을 위해 백해무익하다는 뼈아픈 교훈을 역사는 적어서 남기고 있다.

■ 원로의 수범

조선시대에는 청백리로 추앙받으면서 모범적인 삶을 보여주었던 정승들이나 원로가 세상을 떠나면 대개는 장례를 치를 수 있는 비용이 없었다. 임금은 그 상가에 장례비를 보내 고인을 애도하고, 며칠씩 조회를 중단하는 것으로 개인의 죽음을 국가의 손실로 승화하곤 한 것은 곱씹어 볼만한 아름다움이다.

세종조의 명신이자 삶의 아름다운을 실천하여 보여 준 고불 맹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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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9-1428)은 원로의 표상이다. 그가 다시 살아나 우리 곁으로 돌아 와 주기를 바라는 환상에 젖어 보는 것은 고불 맹사성의 큰 그늘이 세파에 시달리는 우리 모두의 상처를 그나마 안온하게 어루만져 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맹사성은 고려말 공민왕 때 태어났고, 유명한 최영 장군의 손자사위이다. 고려의 우왕 때 문과에 장원하여 세종조에 이르러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어도 삶이 청빈하고 검소하여 평생을 초가집에서 살았던 청백리의 표상이었다.

어느 날 당시의 병조판서가 국사를 의논하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았다가 소낙비를 맞게 되었다. 정승이 거처하는 방에 있었는데도 관복이 빗물에 젖는 지경이었다. 병조판서는 국사의 의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행랑채를 모두 헐어버렸다. 이 고사는 너무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실화를 요즘말로 바꾸면 부총리의 집이 그같이 검소한 것을 보고, 국방장관이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자신의 집 별채를 헐어 버렸다는 얘기가 된다. 세종조를 찬란한 태평성대라고 하는 것은 정승과 판서의 이 같은 정신적인 유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고, 원로의 인품이 널리 아랫사람에게 귀감이 되어야 나라가 평안해지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맹사성의 고향은 온양이다. 그의 효성이 지극하여 고향의 어른들을 찾아뵙기 위해 자주 온양으로 내려가면서도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언제나 소를 타고 다녔다. 머리엔 삿갓을 쓰고 소잔등에 올라앉아 피리를 불며 지나가는 노인을 어찌 일국의 좌의정으로 볼 수 있을까. 그런데도 연도에 있는 고을의 원들은 맹사성의 눈도장을 받기 위해 길가에 차일을 쳐 놓고 그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곤 했다.

어느 날 진위 현감과 양성 현감이 연못가에 차일을 치고 맹사성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황소를 타고 가는 노인을 발견하고 수하들에게 당장 달려가서 질타하기를 명했다. 부하들이 달려가 힐문하다 노인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무리 원님이기로 길을 가는 백성을 막을 수가 있겠느냐. 어서 가서 ‘맹 고불’이 제 소를 타고 가더라고 일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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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들이 달려와서 노인의 말을 전하자 두 고을의 원은 얼마나 혼비백산하였던지 몸을 일으키면서 허리에 차고 잇던 고을의 인감을 연못에 빠뜨렸다. 그런 연유로 지금도 그 연못을 침인연(枕印淵, 도장을 빠뜨린 연못)이라고 부른다는 고사가 전해지고 있을 정도다.

또한 맹사성은 피리를 잘 불었다. 그가 집에 있을 때마다 피리를 불었으므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의 피리 소리를 듣고 그가 집에 있음을 알았다고 한다. 맹사성이 남긴 이 같은 일화를 적자면 끝이 없지만, 그는 섬기고 있는 임금에게는 직언을 서슴지 않았고, 거느리는 아랫사람에게는 따뜻한 사랑으로 다독였다. 그러므로 당 시대의 사람들은 물론 오늘을 산은 우리들에게도 친근감과 존경심, 그리고 신뢰감을 치솟게 한다.

중종조의 명신 유관(柳寬, 1346-1433)도 초가집에서 살았다.

비기 심하게 오는 날이면 유관은 방 안에서도 우산을 받고 독서를 해야 했다. 후둑후둑 빗방울이 우산에 떨어지자, 유관은 비를 피해 구석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는 정경부인에게 물었다.

“부인 오늘같이 비가 오는 날, 우산이 없는 집에서는 어찌 살꼬?”

우의정 유관의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리라. 그는 정승의 반열인 자신의 삶이 이만큼 어렵다면 백성들은 오죽하랴 싶은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고 있음이 아니던가.

오늘을 사는 우리들 주위에는 어찌하여 조선 시대의 정승들과 같은 인품이 없을까. 맹사성이나 유관과 같은 원로가 제공하는 그늘에서 잠시 쉬면서 삶에 찌든 땀방울을 식히고 싶은 것은, 아니 조선시대의 정승들이 다시 살아와서 우리들의 곁에 있어 주기를 바라는 환상에 빠지는 것은 우리 시대를 풍미하는 휴머니스트가 없기 때문이다.

■ 죽음이라는 명작

죽음이란 하늘이 만든 영원불멸의 명작이다. 그러므로 애써 마중을 나갈 필요도 없지만 구태여 피해 다닐 필요도 없다. 죽음에는 나름대로의 존엄성이 따르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의 고매한 선비들은 죽음에 임하면 종명시를 남겼는데 그 내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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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는 대개가 같다. “하늘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고 ,책 속의 가르침에 어긋남이 없었다.” 이 구절은 사람이 해야 하는 도리를 충실히 다했기에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자신의 삶에 후회를 남기지 않았음을 다짐하는 글이기에 후세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게 된다.

죽음은 피할 수 없이 준엄하게 다가오는 경우도 있다. 우리 조선의 선비들은 참으로 고매하게 죽음을 앞당긴 경우가 허다하게 많다. 살아서는 물론이지만 죽음에 이르러서도 참된 도리를 지킨 참으로 아름다운 선비의 죽음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과 강제 합방되기에 이르자 매천 황현은 “지식인 노릇하기가 참으로 어렵다.”라는 종명시를 썼고, 가족들에게는 지고한 가르침을 유서에 적은 ‘유자제서(遺子弟書)’를 남겼다.

“내게는 꼭 지금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그러나 조선이 선비를 기른 지 5백 년이 되었는데도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도 목숨을 끊는 이가 없다면 가슴 아픈 일이고도 남는다. 내가 위로는 하늘이 지시하는 아름다운 도리를 저버리지 아니하였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책 속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았다. 이제 깊이 잠들려 하니 참으로 통쾌하기 그지없다. 그러니 너희들은 너무 슬퍼하지 마라.”

이때 황현의 연치 쉰다섯이었다. 나는 이 글을 수만 번 읽으면서 지식인의 덕목을 익히는 도리로 가슴에 간직하였다.

꼭 이라크 후세인이나 리비아의 카다피가 아니더라도 세계에는 수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있다. 그들 모두가 우리 조선의 선비들이 지키고 간직했던 삶과 죽음의 의미를 배운다면 세계가 오늘처럼 혼란하지 않을 것임이 분명하다.

■ 예가 없으면 나라도 없다

조선조 예학의 거벽이자 종주격인 사계 김장생은 마치 오늘 우리의 일을 경계하듯 그 대책을 확실하게 제시하였다.

“법으로 규제하면 피동적인 국민이 되고, 예(禮)를 가르치면 스스로 알아서 행동하는 상식적인 국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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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4백 여 년 전의 기록인데도 오늘 우리의 현실을 눈여겨 살펴보면서 적은 구절로 착각하게 한다. ‘예’로써 청소년을 가르치면 스스로 알아서 행동 하는 상식적인 국민이 되고, ‘지식(법)’으로 청소년을 가르치면 피동적인 국민이 된다. ‘예’는 ‘의(義 )’와도 같다는 가르침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우리 역사에 기록된 이 같은 선현들의 가르침은 그대로 교육의 기본이 되어야 마땅하지만, 교육정책을 입안하는 고위 인사들은 사상누각을 짓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 그들이 모두 세계의 명문 대학에서 공부한 석학들이지만, 우리의 역사에 기록된 선현들의 지혜로움을 알지 못한다.

어떤 선진 지식인도 세월과 함께 영글어 온 ‘관행’을 앞지를 수 없다. 관행을 헌법보다 우위에 두는 것은 역사를 존중하는 사상의 기본이다.

어느 좌석에서든가. 교육과학부 장관에게 “왜 역사를 가르치지 않느냐?” 라고 물었더니 “신 선생님이 몰라서 그렇지, ‘가르치고’ 있습니다.”라고 정색하면서 대답한다. 그렇다면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 “역사가 어디 의붓자식입니까. 사회과목에 빌붙어 있게요.” 라고 재차 물었다. 그의 대답이 우리 교육의 현주소를 아주 소상히 말하고 있어 여기에 소개해 둔다.

“……많은 수험생들에게 가방의 무게를 덜어주는 게 옳은 교육이 아니겠습니까.”

참담하다는 말이 아니고는 더 설명할 길이 없다.

두툼한 외국 원서를 읽으면서 아는 체 떠벌릴 일이 아니다. 우리 역사책을 읽으면 모든 대답이 아주 소상하게 적혀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은데도 우리 선현들이 겪으면서 살았던 지혜로움이 적힌 역사책을 읽힐 방법이 없다.

역사는 경험의 보고다. 그 안에 모든 방책이 있음을 알릴 수 있는 방책은 없을까.

2013. 9.10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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