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한글 실용문자의 글자꼴 변천사
판본류 글자체의 변천
◎ 정음시기 (1443~1526)
한글 글자꼴이 처음 생긴 1443 년 ( 세종 25) 부터 공식적으로 언문이란 명칭이 호칭되기 시작한 1527 년까지를 정음시기로 보는데 , 이 시기에는 훈민정음 원본을 비롯한 많은 판본류의 책들이 출간되어 아름답고 정적인 글자꼴을 선보이면서 한글문화의 꽃을 피웠다 .
고전의 모양을 본떠 만들어진 한글 최초의 글자인 훈민정음 (1443 · 목판본)의 글자꼴은 획의 조세가 일정하고, 입·수필부분이 원형이며, 종·획횡의 방향이 수직·수평, 획끼리의 접필은 모두 굵게 접필되었고 , 받침없는 글자의 자·모 크기는 비슷하게 정하여 외형을 정사각형 에 가깝게나타내는 등 한자 고전체와 비슷하다 . 이와같이 고전을 닮은 훈민정음은 획의 방향 이 바뀌는 부분에서 전서체의 전획 ( 轉畵 ) 부분 표현과는 다르게 예서의 절획형(折畵形)과 비슷하게 표현하여 글자꼴이 마치 전·예 필법을 절충하여 나타낸 것과 같다 .
1450 년대 이전에 나온 동국정운 (1447·목활자), 월인천강지곡 (1447·주활자), 석보상절 (1447·주활자), 용비어천가 (1447·목판본 ) 의 글자꼴은 훈민정음의 글자꼴과 비슷한 점이 많 은데 동국정운은 자모음자선의 입·수필 부분만 방획으로 바뀌고 , 모음의 둥근점은 같은 획형 을 이룬다 . 그러나 다른 원전들은 · 를 제외한 107} 지 모음에 나타나는 둥근 점이 모두 방획으 로 바뀌었다 .
1450 년대 이후에 나온 월인석보 (1459·목판본 ), 능염경언해(1461·목판본)는 글자꼴은 앞의 것과 비슷하게 나타냈으나 모든 서선의 입필부분이 사곡(科曲)형 , 수필부분은 원획(圓畵) 형으로 표현하여 부드러운 맛을 풍기게 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나온 세종어제 훈민정음(1459·목판본)과 홍무정운역훈(1455·목활자) 은 붓으로 더욱 부드럽게 쓴 느낌이 나도록 글자꼴을 표현하였다 . 즉 앞의 원전들보다 자음의 크기를 작게, 세로서선의 입·수필부분을 뾰족하게 하여 필사체획 형과 비슷하게 나타내었다 .
◎ 언문전기 (1527~1699)
이 사기에는 언문이란 명칭을 쓴 훈몽자회(1527·목활자), 훈민정음언해본(1556·목판본)을 비롯한 언해본이 많이 나온 관계로 글자꼴의 변화가 대단히 많았다.
정음 후기로부터 이어지는 형태로서의 글자꼴은 서선이 더욱 유연해졌으며 초성 자음을 작게 쓰고, 가로획의 오른쪽 부분이 약간 올라가도록 쓰면서 세로 서선의 굵기는 점점 가늘어지게 나타냈다 .
1500 년대 전기에 나온 훈몽자회(1527·목판·활자), 여씨향약언해(1518, 1574 활자)등은 정사각형 모양에 가까운 자형을 이루는데 종횡획서선을 수직 · 수평으로 운필하였고 , 서선 굵기는 정음 말기에 나온 것보다 가늘면서도 더욱 유연하게 나타냈다 .
그 후 1500 년대 중기에 나온 훈민정음 언해본(1556·목판본) 은 유연하고 서선이 굵으며 가로 서선을 사향으로 운필하였다 . 이어 나온 소학언해(1588), 융용언해(1590), 대학언해(1590)등의 활자본은 횡획을 사향운필하고, 종획의 수필부분은 점점 굵어지게 하면서 끝을 원획으로 하는 글자꼴로 꾸였으되 서선은 가늘게 나타냈다.
1600 년대에 이르면서 방점(備点)이 없어지고, 시경언해(1613·목판본), 대학율곡언해(1688·금속활자), 어제어필맹자언해(1693·금속활자)등의 자형은 상하로 길어지고, 세로서선의 수필부분이 굵어지는데 전체적인 서선 굵기는 대체로 가는 편이다. 1690 년대에 목판본으로 간행된 송강가사 관서본의 글자꼴은 자형상 상하길이가 짧으나 세로서선의 끝부분을 뾰족한 형태로 나타냈고 수평점의 입필부분은 가늘게 , 수필부분은 굵고 긴 모양의 형태로 나타냈다.
◎ 언문후기 (1700~1893)
한글 필사체 중에서 궁체가 발달되어 완숙되어가는 1700 년대의 영?정조 문화번영시기와 1894 년 갑오경장 직전까지 출간된 1700~1800 년대 판본체의 특징을 밝혀 보기로 한다.
1700 년대에 나온 여사서(1737, 놋쇠활자), 송강가사성주본(1747, 목판본), 쇽명의록(1777, 동활자본), 유듕외대쇼선셔륜음(1782, 목활자)등은 1500 년대의 여씨향약언해와 1600년대의 시경언해 등과 유사한 글자꼴로 서선이 아주 가늘고 상하로 긴 자형을 이루지만 필사적인 느낌은 전혀 풍기지 않는다.
1700 년말에 나온 오륜행실도(1797, 놋쇠,목활자본)의 글씨는 앞에서 나온 것과는 아주 다르게 알맞은 서선굵기로 유연하게 서선이 태세변화를 주어 상하로 긴 자형으로 나타냈고, 자음 의 서선방향에 대한 변화(ㄱ→ㄱ ㅋ→ㅋ)를 많이 주었다 . 또 이때에 나온 부모은듕경(1796, 목판본)은 더욱 유연하게 붓으로 직접 쓴 느낌이 나게 나타냈다 .
1800 년대에는 목판본, 목판각본(木均刻本), 목활자본, 놋쇠활자본 , 납활자본 등은 판종이 다양하고 글자꼴도 반고픽체, 정자체 , 반흘림 , 흘림체 둥 여러 서체형의 판본들이 등장하였다. 1700 년대 나왔던 여사서(1737)의 획형과 비슷하게 서선이 지극히 가느다랗고 상하로 긴 자형을 이루는 신간증보삼략(1805·목판본), 정자체로 각을 한 삼국자권지이(1859·목방각본)등은 세로서선을 쐐기 모양의 획형으로 특이하게 나타냈다. 그 후 이와 유사한 것으로 구운몽(1862, 방각본)이 출간되기도 했다 .
목판글자체로 필사체와 거의 같은 느낌이 나는 ㅌ.ㅣ감응편(1880)은 자형의 상하폭 크기를 작게 정하고 세로서선은 굵게 나타내되 가로서선을 가늘게 표현한 정자체본과 획간의 연결서선을 나타내면서 상하로 긴 자형을 이룬 반홀림체본, 그리고 자간에 연결서선이 나타나도록 더욱 흘려 상하로 긴 자형을 이룬 흘림체본 등 3 종의 자체로 간행하였다.
그리고 1892년에 납활자본으로 나온 일명 최지혁체라고 하는 성경직ㅎ.ㅣ 는 정자체본인데도 몇 몇 글자(제, 젼)는 흘림으로 나타내기도 하였다 .
◎ 국문시기 (1894~1910)
1894년에 고종의 국한문혼용에 대한 칙령이 공표되면서 언문이 국문이란 명칭으로 격상하게 되는데, 이 시기는 갑오경장에서 한일합방이 된 1910 년까지로 우리나라 개화기에 속하는 때이다.
이 시기에도 여러 유형의 글자체가 있었는데 그 하나로 1500 년대의 소학언해, 1600 년대의 시경언해 , 1700 년대의 쇽명의록 , 1800 년대의 화음계몽언해로 이어지는 글자꼴과 같은 가냘프고 상하로 긴 형태를 이룬 글자체로 조선지지(1895·목활자), 국민소학독본(1895·목활자)등이 나왔는가 하면, 이와는 아주 반대느낌이 나면서 명조체의 맛이 풍기는 딱딱한 느낌의 국문 정리 (1897·목판본), 국어문전음학(1908·철활자본)등이 간행되기도 했다.
1737년에 간행되었던 여사서가 1908년에 복간되었는데 이 글자체는 1787년에 간행된 병학지남(목판본)의 작은키 모양의 자형, 가로획의 사향운필, 약간의 딱딱한 느낌이 나는 특정과 비 슷한 글자꼴로 표현했다. 또 1797 년에 간행된 오륜행실도의 글자꼴과 비슷한 획형으로 나타낸 경신록언해(1902·목판본)도 출간되었다 . 또 한편으로 1800년 말 경에 나왔던 삼국지(1859)나 구운몽 (1862) 같은 특이한 형태의 글자꼴로 이루어전 유충렬전(1902), 쵸한전(1907)등 많은 방각본이 나오기도 했다 .
필사류 글씨체의 변천
필사류의 글씨체는 서예작품을 제외한 실용적인 면에서의 책자, 편지글, 비문글씨, 기록문 등에 나타난 것으로 붓으로 직접 쓴 글씨를 말한다 . 이러한 글씨체는 같은 크기의 판본체 글씨 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나 모두 일회성 표현에 의한 자료들이 남았기 때문에 대부분 희귀하여 다량으로 남아있는 판본류와 달리 현존하는 것은 극히 드문 편이다.
언문시기에 처음으로 쓴 필사체로는 현존하는 것 중 최고의 것으로 알려진 오대산 상원사중 창권선문(1464)이 있는데 이 글씨는 세종어제 훈민정음(1459)의 한글 글자체와 가장 유사한 편 이다. 이 권선문은 훈민정음 원본 (1443) 의 체와는 다르게 약간의 유연성을 나타내는 글씨체로 세로서선을 굵게 , 가로서선은 가늘게 나타냈다. 가로획 특히 一획은 조세표현에 있어서 한자 해서의 횡획과 같은 획형으로 나타냈고, 세로획 즉 1획도 한자의l 형과 비슷하게 나타내어 정자체의 느낌을 나는데 전체적인 자형은 전서체의 맛을 풍기는 편이다 . 따라서 이 글씨는 판본 서체중의 해서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1500 년대에 선조가 쓴 어필어간(1597·선조 30년)의 글씨는 권선문의 글씨체보다도 세종어제 훈민정음(1459)의 글씨꼴과 더욱 비슷하게 씌여졌다.
선조이후 1600 년대의 것으로는 효종·인선왕후, 현종·명성왕후, 숙종·인현왕후 등 남·녀어필이 많이 남아 있는데 왕후들의 글씨는 궁체의 맛을 듬뿍 나타내면서도 날카로운 남필 같은 맛이 풍기기도 한다.
1700~1800년대 들어서는 궁중에서 한글 필사활동이 활발해져서 많은 소설류를 언문으로 베끼는 일을 서사상궁들이 하게 되었다. 이때에 남긴 필사본들에 나타나는 글씨체는 정자·반흘림이 대부분이었는데 이것이 궁중서체 또는 궁체라고 호칭하는 것이다. 또 편지글을 대필하는 일들이 많이 생기면서 진흘림으로 쓴 봉셔가 오늘날까지 전해져 한글 진흘렴의 아름다움을 맛을 보여 주게 된 것이다.
이때의 것으로는 소설류 궁체원전인 옥원륭회연, 낙성비룡 등의 많은 글씨가 오늘날 궁체쓰기 학습을 하는 데에 가장 모범이 되는 교본체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 같은 궁중글씨는 조선말기에 이르러 이름도 밝히지 않는 현상궁, 천상궁이나 서기이씨 등 에 의하여 꽃을 피웠으며 , 이어서 사후당 윤백영(尹伯榮·1888~1986)은 궁중글씨를 작품화 하고 해제까지 하여 현대화하는데 가교적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23대 순조의 딸 덕온공주의 손 녀이며 조선말기 이조판서를 지낸 서화가로도 유명한 석촌 윤용구( 尹用求·1853~1939)의 딸로서 장서각소장 궁체원전 정리 및 후학들에게 궁체쓰기 지도를 손수 하였으며 , 이같은 일을 90 세가 넘는 노후까까도 계속하여 얼마 전까지 궁체에 대한 산증인 역할을 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조선말기 사대부 집안에서나 일반인들은 불경베끼기, 편지글쓰기, 소설베끼기 등 언문으로 쓰는 일을 많이 하였는데 이 글씨체는 궁체와는 다른 맛을 풍긴다. 그 중 1800년대의 추사 김정희와 그의 모친 유씨부인 글씨, 부친인 김노경의 글씨 등 추사 집안의 한글편지글이 많이 전해오고 있는데 궁체와는 필체가 전혀 다른 글씨체들이다 . 힘찬 서선 , 글자간의 조화미는 궁체와는 또 다른 품격의 서예미를 풍기기도 한다.
일반인들에게도 궁체가 아닌 글씨체의 전예서체 느낌이 나는 글씨 , 정자체 , 반흘림체 , 흘림체 모양의 다양한 글씨쓰기가 성행하여 오늘날까지 많은 필사본들이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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