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이야기들

[스크랩] 10월 고희연 여는 원로서예가 남석 이성조

보해성산 2008. 2. 10.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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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고희연 여는 원로서예가 남석 이성조

반백년이 넘도록 오로지 먹갈고 붓질하며 사경에만 전념해온 원로서예가 남석 이성조. 지난 6월29일 대구 팔공산 파계사자락에 있는 공산예원에서 그를 만났다. 오는 10월 ‘서예인생 52년 고희연’을 앞둔 그는 “금생에 할일은 다 했다”고 말했다.

1997년 원로서예가 남석(南石)은 환갑을 맞아 가족들과 태백산 인근을 여행했다. 경북 봉화를 거쳐 안동을 지나다 ‘현불사’라는 표석을 본 순간, 이 절에 주석하는 한 노스님이 떠올랐다. 현불사는 득도한 팔순 노승이 머문다는 소문에 오가는 객인들이 깨나 득실댔던 절. 절문에 들자마자 노스님은 대중을 향해 “그 분을 정중히 모시라”며 남석을 알아챘다. “남석은 나를 모르제? 나는 니가 두번째다!” “무…슨…” 1950년대 남석이 청남 오제봉 스님 옆에서 교복 입고 먹 갈던 모습을 봤다는 게 스님의 설명이다. 40여년만의 재회다. 그날 밤 스님과 남석은 밤새는 줄 모르고 울고 웃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헤어지기 전 스님은 남석에게 꼭 집어 말했다. “자네 글씨는 너무 규격화 되었어.” 글씨가 가지런한 것도 잘못이란 말인가. 스님은 이어서 “글씨가 차렷하고 서서 경직되어 있으면 힘들어서 어디 편하게 보겠나. ‘편히 쉬어’도 해야 맛이지. 쯧쯧…” 남석은 일주문을 빠져 나오자마자 남은 여행 일정을 다 접고 집으로 달음질쳤다. ‘내 글씨가 그리도 형편없었나.’ 열여덟에 서예에 입문하여 부산대 사범대학 미술과를 나와서 최연소로 국선에 입선한 남선이 나이 환갑에 받은 ‘혹평’은 그를 미칠 지경까지 내몰았다. “며칠밤을 꼬박 새면서 고민했지예. 그 때 종이 참 많이 버렸제.”

그가 고민끝에 고안해낸 선택은 ‘암중취호’(暗中醉毫). 눈을 감고 글씨를 썼다. 눈알이 튀어나오도록 간과 격을 맞추면서 획마다 혼과 열을 담아쓴 글씨가 눈을 감고나니 오롯이 종이와 붓의 마음따라 휙휙 지나갔다. “이게 자네의 글씨네.” 한달여간 써온 글씨를 한무덩이 싣고 노스님을 찾아갔더니 그제서야 스님은 글씨를 인정했다. “지금도 그 글씨 더미가 스님의 방 ‘금고’안에 간직되어 있다 아이오.”

남석 이성조(李成祚, 70). 40여년간 눈을 부릅 뜨고 지켜온 글씨를 하루아침에 눈감아 ‘휘갈기고 말았’을 때, 순간 그는 시원한 뚫림을 느꼈다고 한다. 반평생 눈을 뜨고도 갑갑했던 마음이 눈을 감고서야 비로소 트였다는 말은 쉬 이해되지 않는 경지다.

1960년대 후반 성철스님 아래 잠시 출가했던 시절 그가 사경한 〈법화경〉 ‘보현행원품’ 병풍을 스님께 선물했었다. 사진 뒤 병풍이 그 작품이다.

환갑때 팔순 노스님에 “글씨가 규격화” 혹평 듣고

며칠밤 꼬박 새다 눈 감고 일필휘지 새 경지 터득

법화경 168폭 120m 병풍으로 ‘서예 52년’ 회향

남석은 서른 즈음에 성철스님을 은사로 출가를 했었다. “속세에서는 도저히 글씨가 써지지 않아서 사경을 하기 위해 출가를 했다”는 그는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런저런 이유로 환속했다. 남석은 〈법화경〉을 줄곧 보면서 화엄사상에 심취했다. 자연스레 사경기도로 이어졌다. 1960년대 후반 〈법화경〉 ‘보현행원품’으로 병풍을 만들어 성철스님의 ‘생신선물’로 드렸다. 지금도 잘 알려진 성철스님의 사진 뒤 병풍이 바로 남석이 사경한 작품.

그가 서예계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시절은 아마도 1981년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 초대전에 노산 이은상 선생과 함께 한국 예술계를 대표하여 참석했을 때다. 당시 뉴욕과 LA에서 75일간 서예전을 연 뒤, 돌아오는 비행기서 노산은 남석에게 귀국하자마자 전시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물론 노산 선생이 갑작스레 눈을 감는 바람에 약속은 물거품이 됐지만, 이후 남석은 천신만고 끝에 서울 세종문화회관서 ‘법화경 60폭 병풍’을 선보였다. 그 전시회서 남석은 5공화국 당시 실세였던 문공부 허문도 차관과 인연을 맺었다. 허 차관은 남석의 병풍을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과 조 회장의 사위 이태희 변호사에게 소개했다. “남석 선생, 불경을 장엄한 이 병풍은 얼마의 값을 치러야 하오?” 조 회장의 물음에 남석은 “돈은 필요없으니 맘 편히 사경을 할만한 작업실 하나 만들어 달라”고 잘라 말했다. 조 회장측은 즉시 4000만원을 전해줬다. 1983년 당시 4000만원이면 상당히 큰돈이다. 그동안 글쓰느라 식구들 입에 풀칠하며 살았던 고생 끝에 낙이 온 것이다. 400만원 세금 떼고 2000만원은 빚갚고 남은 1500만원으로 마련한 작업실이 지금까지 살고 있는 대구 팔공산 파계사 자락 공산예원이다.

이곳에서 그는 20년이 넘도록 산다.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붓을 잡는다. 여기서 그는 그가 반백년간 오롯이 걸어온 붓길을 회향했다. 지난 1999년부터 2001년까지 2년간 〈묘법연화경〉 전문을 사경한 산실이다. 〈법화경〉 전 7권26품에 적힌 6만9천384자를 전지(가로 71×세로 240cm)에 168폭으로 사경했다. 50자루의 붓을 버렸다. 병풍 길이만도 120m에 달하고 표구제작비만 4800만원이 들었다.

남석은 이 작품을 하던 도중 눈동자가 빠져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법화경 전문이 담긴 이 병풍은 이 자체로도 부처라예. 병풍을 눈으로 훑는 것만으로도 환희심이 절로 날깁니더.” 남석은 오는 10월22일~28일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서예인생 52년 남석 이성조 고희연’을 겸하여 이 병풍을 세상에 내놓을 계획이다. 물론 그동안 사경한 〈반야심경〉 1080점과 다채로운 사경과 글씨의 세계를 그만의 독특한 필체로 선보일 예정이다.

“서도(書道)의 문은 무량무변해서 헤엄치면 칠수록 깊고 멉니더. 나이 칠순에 50년째 붓을 잡아도 아직 마음이 갑~갑~하제예. 아는 것이 많을수록 모르는 것이 더 분명해지기 때문이라예.”

남석 이성조가 눈을 감고 사경한 〈반야심경>(왼쪽)

 

눈을 뜨고 사경한 〈반야심경〉(오른쪽)

 

 

 

 

대구=하정은 기자 tomato77@ibulgyo.com

 

[불교신문 2341호/ 7월7일자]

 

출처 : 대한불교조계종대구광역시신도회
글쓴이 : 海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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