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

보해성산 2008. 11. 5.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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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


■ 최인호  지음

- 45년생, 연세대, 63년 고교 2학년 때 신춘문예 당선

 - 별들의 고향, 잃어버린 왕국, 왕도의 비밀, 상도, 해신, 유림, 꽃밭 등

 - 현대 문학상, 이상 문학상, 카톨릭 문학상, 불교 문학상 외...


■ 서문


 0 이 글은 ‘98 - 99 2년 동안 천주교 서울 대주교 주보에 연재된 ’말씀     의 이삭‘을 모은 것


 0 유명한 샹송 ‘고엽’의 작사자인 프랑스 시인 프레베르는 이렇게 노래     하였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냥 그곳에 그렇게 머물러 계십시오.

   그러니 그곳에서 제발 우리를 참견하지 마십시오.


   물론 프레베르는 주의 기도문 맨 처음에 나오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     버지’라는 구절을 빗대어 이런 독특한 시를 쓴 것이다. 그러나 프레베     르가 그렇게 노래했다고 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하늘에만 머물     러 있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한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영혼     의 숨결과 손으로 참견하지 않은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교묘히 참견하여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차라리 그     러한 아버지를 두려워하거나 어려워할 필요없이 ‘아빠’라고 부를 수      있다면 하느님은 마침내 하늘에만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속에 드     리우게 될지도 모른다.


   책의 제목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라고 한 것은 그런 소박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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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서다.


   하늘 높은 곳에는 아빠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아들들에게 평화.


■ 하느님께 앙갚음한 사나이


 0 존 그린 한닝은 1849. 1. 12 미국 캔터키에서 태어남

 - 그는 불같은 성격으로 싸움을 좋아하고 반드시 앙갚음하는 거친 성격

 - 16세 때 아버지와 싸우고 앙갚음으로 아버지의 담배 창고에 불을 지르고     가출하여 카우보이가 됨

 - 9년만에 집으로 돌아와 메리라는 여인에게 매혹되어 청혼하지만 메리로     부터 자기 남편이 될 사람은 카톨릭 신자여야 한다는 말을 듣고 앙갚음     을 결심하고 36세의 늦은 나이에 트라피스트 봉쇄수도원에서 메리 요아     킴 수사로 이름을 바꿈

 - 수도원에서도 많은 말썽을 일으키다가 40세 되던 해 문득 깨닫게 된 그     는 수도원장을 찾아가  무릎 꿇고 빌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부끄럽     습니다. 저의 기질, 저의 오만, 격렬한 피가 저를 망치고 말았습니다.”     하고 용서를 빔


 - 그는 거칠고 교만한 성격을 주신 하느님이야말로 앙갚음을 하고 복수를     해야 할 최고의 대상임을 깨닫고 하느님을 향해 앙갚음을 할 결심을 합     니다.


 0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밭에 좋은 씨를 뿌린     것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밭     에 가라지(강아지풀, 잡초)를 뿌리고 갔다.”


   우리들의 마음은 하느님이 주신 밭입니다. 이밭에 하느님께서는 겸손과     절제와 온유와 인내의 좋은 씨앗을 뿌리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원수     인 악마는 우리들이 모르는 사이에 마음의 밭에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     과 교만, 방탕과 이기주의의 나쁜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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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가꾸시는 우리들 마음의 밭은 좋은 씨와 나쁜 가라지의 잡초들이 뒤     엉켜 자라는 황폐한 정원으로 바뀌었습니다.


 0 불같이 격렬한 성격의 존 그린 한닝이 온순하고 겸손한 메리 요아킴 성     인으로 변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에게 그런 거친 성격을 허락하신 하느     님에게 앙갚음을 하고 말리라는 정열로써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속에 자     라는 잡초를 뽑아내고 솎아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야말로 반드시 앙갚음을 해야 할 최고의 상대입니다.


■ 가짜 목걸이


 0 모파상

 - 프랑스 노르망디 출생, 12세 때 부모 별거, 모친 밑에서 문학적 감화,      청년 시절에는 플로베르의 지도를 받아 작가로 성장

 - 그의 장편 소설 ‘여자의 일생’은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과 함께     그 시대의 문학적 걸작으로 평가

 - 신경질환으로 고통, 자살 기도, 43세로 사망

 - ‘목걸이‘는 그의 세계적 단편임


 0 단편 ‘목걸이’의 줄거리

 - 주인공 마틸드는 호화로운 생활을 꿈꾸는 여자. 그러나 남편은 말단 직     원으로 경제적 능력 없음, 어느날 두 사람은 장관이 주최하는 파티에 초     대 받음

 - 남편은 모아 두었던 돈으로 새옷을 사줌, 마틸드는 친구인 프레스체 부     인에게 값비싼 목걸이(다이아몬드)를 빌림

 - 파티에 참석한 남자들은 아름다운 마틸드에게 춤을 추려고 안달

 - 새벽녘 파티가 끝나고 집에 와 보니 목걸이가 없어짐, 부부는 전 재산을     처분하고 돈을 빌려 같은 목걸이를 사서 돌려 줌

 - 부부는 숱한 고생을 겪으며 10년만에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었지만 그동     안 마틸드는 늙고 주름진 얼굴로 변해 있었다.


 - 어느날 프레스체 부인을 만나 그간의 일을 얘기 했더니 “마틸드 그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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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이는 싸구려 가짜였어요. 그것 때문에 10년이나 고생했단 말이오?”


 0 “하늘나라는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것에 비할 수 있      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면 있는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

   우리들의 인생이란 주님의 말씀처럼 좋은 진주 하나를 찾아다니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찾아다니는 진주들은 대부분     모파상의 소설처럼 가짜인 것입니다. 그 진주는 가짜이므로 오히려 진짜     보다 더 화려하며 하룻밤의 무도회에서는 샹들리에 불빛 아래서 눈부시     게 반짝일 것입니다. 가짜 목걸이에 몰려드는 인기와 갈채야말로 우리들     을 황홀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 하룻밤에 지나지 않습니     다. 우리는 가짜 목걸이에 취해서 아까운 인생을 허비하며 가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진짜 진주목걸이입니다. 주님의     진주목걸이야말로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모두 팔아 그것을 살 만큼 충분     한 가치가 있는 천상의 보물인 것입니다. (마태 13:44 - 52)


■ 만남과 나눔


 0 주님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배불리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를 채울 정도로 음식을 남겼다는 이야기는 주님이 베푸신 기     적중에 ‘나눔’의 상징으로 잘 알려진 대표적인 기적입니다.

   

   물론 주님은 이 기적을 통해 ‘나눔’의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의 깊게 살펴보면 주님께서 ‘나눔’의 기적을 말씀     하시기에 앞서 ‘만남’의 소중함을 더욱 더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     닫게 됩니다. 


 0 주님은 많은 군중이 모이자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변명합니다.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것     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제자들의 대답은 ‘나눌 수 없는 이유’의 보편적인 세 가지 변명입니      다. 그것은 ‘외딴 곳’이라는 공간적 변명과 ‘시간이 늦었다’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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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 변명과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라는 소유적 변명입니      다. 제자들의 이러한 변명은 오늘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그것     이 불가능함을 변명하는 우리들의 입에서도 똑같이 흘러나오고 있습니      다.

   “난 시간이 없어. 우린 너무 멀리 떨어져 있구나. 나누기에는 내가 가     진 것이 너무 없어.”


   주님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런 시간적,     공간적, 소유적 변명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인 것입니다. 주님은 ‘나       눔’의 사랑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만남’의 절대성이 앞서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5천 명의 군중을 하나의      군중으로만 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고통을       ‘측은한 마음’으로 보셨으며 그들과의 만남을 절대적인 만남으로 생각     하셨던 것입니다. 사랑은 나눔입니다. (마태 14:13 - 21)


■ 사랑의 힘


 0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1182 - 1226)는 카톨릭 사상 가장 위     대한 성인입니다. 단순하고 천진한 신앙, 자연에 대한 사랑과 겸손 등으     로 ‘또 하나의 그리스도’ 라고 불리었습니다. 실제로 그리스도 십자가     상흔을 손 위에 받았던 이 성인이 노래하라고 말하면 새들도 노래하였다     고 합니다.

   클라라(1194 - 1253)는 프란체스코의 설교에 감동하여 가족의 반대를 무     릅쓰고 수녀가 된 성인입니다. 두사람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     오고 있습니다. 


 0 두 사람은 사랑하였습니다. 수도원 사람들은 두 사람의 영적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들이 많았습니다. 결국 프란체스코는 클라라를 멀리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그날은 차가운 겨울 바람과 함께 눈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클라라는 작별 인사를 하고 눈길을 걸어가다가 갑자기 돌아     서서 프란체스코에게 물었습니다.

   “언제 우리가 또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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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다시 만나기 힘들다는 것을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프란     체스코는 말없이 눈 쌓인 산꼭대기를 바라본 후 대답하였습니다.

   “저 산의 눈이 녹고 꽃이 필 때쯤이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눈이 녹고 산마다 꽃이 피었습니다.


 0 주님은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번의 기적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많     은 환자를 고쳐 주고 귀신을 몰아내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까지 살린 주     님이셨지만  자신이 직접 기적의 주체가 되었던 적은 없습니다. 한밤중     역풍을 만난 풍랑으로 파도가 치고 있는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의      모습은 그러므로 매우 이례적인 것입니다.


 0 클라라를 사랑하는 프란체스코의 마음이 한순간에 눈 덮인 산꼭대기에서     눈이 녹게 하고 꽃을 피우는 기적을 일으킨 것처럼 제자를 사랑하는 주     님의 마음이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물위를 걸으셨던 기적의 힘은 바로 사랑의 힘이었던 것입니다.


 0 믿음은 사랑입니다.

   사랑하십시오. 제자를 사랑하여 물위를 달려오는 주님처럼 사랑하고, 사     랑하고, 또 사랑하십시오, 그리하면 눈 덮인 산봉우리에서 갑자기 눈이     녹고  단숨에 꽃들은 피어나 그대와 나는 헤어지는 일 없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 영원히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 14:22 - 33)


■ 무지개


 0 워즈워즈 : 영국, 19세기 대표적 낭만파 시인, 자연에 대한 미적 관심으     로 유럽 문학에 큰 영향을 미침


 0 하늘에 걸린 무지개를 바라볼 때면 내 가슴은 설레인다.

   나 어렸을 때도 그러하였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거니

   나 늙어진 다음에도 제발 그러하여라.

   그렇지 않다면 죽어버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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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옵나니 내 목숨의 하루하루여

   천상의 자비로 맺어지거라.   


 0 마리아의 노래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흔히 ‘마니피       캇’이라 불리는데 이는 ‘찬양하다’가 라틴어로 마니피캇이기 때문입     니다. 이 노래는 원래 마리아가 지은 노래가 아니라 당시 유행하던 노래     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으나 누가 언제 지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     라 하느님을 찬양한 기쁨과 자신을 선택해 주신 하느님에 대한 고마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보살핌을 찬양한 것이기 때문     입니다.


   워즈워즈가 “하늘에 걸린 무지개를 바라볼 때면 내 가슴은 설레인다.”     고 노래하였듯이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     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인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워즈     워즈가 노래한 ‘하늘에 걸린 무지개’야말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     지 하느님’ 이신 것입니다.

  

   하느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며 그것은 내가 어렸을 때도 그러하였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나 늙어진 다음에도 그러할 것입니다. ‘바라옵나      니, 내 목숨의 하루하루여, 천상의 자비로 우리를 채워 주소서.’

   어린이야말로 모든 어른의 아버지. 하늘나라는 어린이 같은  사람들의      것입니다.  (마태 19:14)


■ 분노의 포도


 0 미국 작가 존 스타인백(1902 - 1968)의 소설 , 1940년 퓰리쳐상 수상


 0 이 소설은 오클라호마의 농민 가족 조드 일가가 대자본에 의한 기계화로     경작지를 잃고 낡은 자동차에 가재도구를 싣고 온 가족이 비옥하다는 캘     리포니아의 포도원을 향해 출발하는데서 시작하며 구약성서의 출애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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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식을 빌려 묘사한 서사시적 작품이다.


 - 그러나 그들을 기다린 것은 착취와 기아와 질병이라는 점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과는 대비되고.......

 - 노동력 과잉으로 전가족이 일해도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현실에서 결국     아들은 파업에 가담해서 살인을 저지르고, 온 가족은 흩어지게 된다.

 - 품삯일도 바닥나고, 홍수까지 겹쳐 그들의 가슴에는 분노의 포도만이 주     렁주렁 열린다.

 -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긂주림과 과로로 아이를 사산한 딸을 부축하고     어느 오막살이로 비를 피해 들어가 보니 거기에는 더 비참한 소년과 그     의 아버지가 있었는데 소년이 아버지를 위해 훔쳐온 빵조차도 먹을 기력     이 없는 소년의  아버지에게 아이를 사산한 딸은 모든 사람을 밖으로 내     보내고 자신의 젖을 물려 주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먹어야 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더 가까이 다가가서 남자의     머리를 안아들고 젖을 물려 주었다. ‘자’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손이 가만가만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들어 창고 너     머를 바라보았고 입을 꼭 다물면서 신비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0 하늘나라의 포도원에서는 먼저 온 ‘난사람’이 첫째가 아닙니다. 그곳     은 먼저 온 ‘난사람’보다 꼴찌였던 ‘된사람’이 오히려 첫째가 될 수     있는 곳입니다. 하늘나라의 포도원에 ‘분노의 포도’가 아닌 ‘평화의     포도’가 주렁주렁 열리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주님의 평등사상 때문일     것입니다.  

   

■ 이방인


 0 카뮈(1913 - 1960) :알제리 출생 소설가이자 극작가

 - 생후 얼마 안되어 1차 대전으로 아버지 잃고 귀머거리인 어머니 손에 빈     곤속에 성장  

- 1942.7월 독일 점령하에서 29세의 청년 카뮈가 발표한 ‘이방인’은 그     를 문단의 총아로, 실존주의의 거두로 만듬. 1957년 노벨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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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교통사고로 사망(47세)

 - 이방인의 부조리와 절망 그리고 인간 실존의 본질을 날카롭게 파헤친 20     세기 최고의 걸작


 0 소설 제목 ‘이방인’은 성경에서 비롯된 용어입니다. ‘이방인’이란      말은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을 뜻하지만 원래 유태인의 세계관     에서 나온 말로, 하느님이 유다민족을 특별히 선택하여 선민으로 내세웠     다는 사상에 입각하여 유다인이 아닌 이들을 ‘이방인’이라고 불렀습니     다.


 0 주님도 이방인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를 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마태 5:47).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 말을 되풀이하지 마라.”(마태 6:7)“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이 찾     는 것이다.” (마태 18:17) 여기서 주님이 사용하신 ‘이방인’은 유다     인들 처럼 유다인이 아닌 이들을 지칭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믿지 않는 비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용어임을 깨닫게 됩     니다.


 0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 중에서 인간의 부조리를 파헤친 카뮈의 ‘이방      인’은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20세기의 비극은 무     신론적 허무주의와 유신론적 물질주의의 대립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무신     론적 허무주의는 공산주의의 몰락과 더불어 사라진 듯 싶지만 카뮈의 이     방인에서 보듯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부재, 절망, 쾌락의 탐닉, 가치관의     혼돈, 밑도 끝도 없는 폭력과 광기는 오히려 한층 심화되고 있습니다.


■ 용서의 전문가


 0 베드로가 “주님, 형제의 잘못을 일곱 번 용서해 주면 되겠습니까?”라     고 물었을 때 주님께서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     서하여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웃의 잘못을 무한대로 용서하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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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도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     못을 용서하시고”(마태 6:12)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만 우리에게 잘못한     형제를 무한정 용서하라는 말이 정말 가능한 일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너희가 남을 용서할 수 없     다.’는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내가 남을 용서 한다는 것은 사랑의 행위인것 같지만 실은 교만인 것입     니다. 내가 어떻게 남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남을 단죄할 수 없     듯이  내가 남을 용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0 주님께서는 죄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나는 너희를 용     서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      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라고 말씀     하심으로써 용서야말로 하느님이 하실 수 있는 일임을 분명히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 자, 일어나 가자.


 0 간디

 - 인도의 민족지도자. 인도의 문호 타고르로 부터 ‘마하트마’ 즉 ‘위대     한 영혼’으로 칭송 받음

 - 18세에 영국 유학, 변호사로 남아공에 감

 - ‘아힘사‘ 즉 비폭력 간디주의 형성

 - 61세에 추종세력과 함께 서해안에서 소금의 대행진을 주도 : 비폭력 무     저항 주의의 극치

 - 1947. 7 인도 독립

 - 78세에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융화를 위해 애쓰다가 반이슬람 극우파 청     년의 총탄에 사망


 0 그는 생전에 국가가 망하는 일곱가지 조건을 말하였습니다.

   “이럴 때 국가는 희망이 없으며, 멸망의 길로 나아갈 것입니다. 첫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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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칙없는 정치이며, 둘째는 도덕없는 상업이며, 셋째는 노동없는 부이      며, 넷째는 인격없는 교육이며, 다섯째는 인간성없는 과학이며, 여섯째     는 양심없는 쾌락이며, 일곱째는 희생없는 신앙인 것입니다.


 0 간디가 말한 그 마지막 조건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한 번쯤 심각히 생각     해야 할 조건인 것입니다. 바로 ‘희생이 없는 신앙’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셧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0 주님께서 말씀하신 ‘자기를 버리는 매일의 십자가’야말로 ‘희생’인     것입니다. ‘희생’은 간디가 말하였던 것처럼 우리들 신앙에 반드시 있     어야 할 필요조건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들이 제 십자가를 지고 일어서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인 것입니다. 자. 희생의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리고 앞장서      외치고 계신 주님의 목소리를 따라 갑시다.

   “자, 일어나 가자.”(요한 14:31)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


 0 하느님을 개인적으로 ‘아버지’라고 부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첫      번째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을 뿐만아니라 아     기가 아빠를 부르듯 자연스럽게 ‘아빠 abba'라는 애칭으로 불렀습니다.     주님께서 게쎄마니에서 하느님에게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     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마     르 14:36) 라고 기도 했을 때 그중 ‘아버지, 나의 아버지’의 첫 번째     호칭이 ‘abba’로 표현된 것을 보면 주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빠,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신 증거라고 신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0 그보다도 주님께서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신 결정적인 증거는 사도     바울로가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느님께서는 여     러분의 마음속에 당신의 아들의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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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갈라       4:6)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      다.”(로마 8:15) 라고 했던 것으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0 또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복음을 통해서 170군데나 부르     셨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문 첫머리에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허락하심으로써 하느님이 이제 우     리에게 ‘아빠’가 되셨음을 정식으로 선언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는     이제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부터 하느님은 나의 아빠이며, 나는 그분의 친자이며, 예수는 나의 형님     인 것입니다. (마태 21:33 - 43)


■ 무소유


 0 고려말 학자이자 명신인 이조년의 이야기

 - 호 매운당, ‘이화에 월백하고’ 시조 작가

 - 소년시절 형 억년과 한강가를 거닐다가 금덩어리를 주워서 형제가 나누     어 가졌는데 배를 타고 가다가 동생 조년이 금덩어리를 강물에 던져버림

 - 깜짝 놀라 형이 묻자 조년이 대답했습니다.

   “형님 금덩이를 버리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 졌어요. 금을 형님과 나누     어 갖고난 후 줄곧 욕심이 솟구쳐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형님이 없었더     라면 내가 몽땅 가질 수 있었는데 하는 생각도 들고 형님것을 뺏고 싶다     는 충동까지 느끼지 뭡니까. 그래서 나는 황금이 요물임을 깨닫고 버린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형 억년도 금덩이를 한강물에 던져 넣으며 말하였습니다.

   “ 나도 마음 속으로 너와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하마터면 우리 사이     가 금이 갈 뻔하였구나.”


 - 후세 사람들은 형제들이 금을 던졌던 양천나루를 투금탄이라고 불렀습니     다. 금덩어리를 던진 여울이라는 뜻이지요. 고려조의 마지막 보루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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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 장군도 집안의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은 가훈을 남겼습니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0 주님은 완전한 무소유를 실천하셨습니다. 돌아가셨을 때 주님은 어머니     마리아께서 만들어 준 것이 분명한 ‘혼솔없이 통으로 짠 속옷’(요한      19:23) 만을 입고 계셨는데 이것도 로마 병정들이 제비를 뽑아 나누어      가졌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시대는 황금 만능의 물질시대입니다. 지     금이야말로 부정한 방법으로 은밀하게 돈주머니를 채우는 유다(요한        12:6) 와 돈의 일부를 빼돌리는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 (사도 5:1 - 2)의     행위에서 벗어나 황금을 강물 속에 던져버리는 이조년 형제의 선비 사상     을 본받고 주님의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실천할 때입니다. 마음이 가난     한 사람이야말로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마태 22:15 - 21)


■ 맹세와 약속


 0 우리는 사랑을 맹세하고, 우정을 약속하고, 계약을 맺습니다. 그러나 우     리들의 맹세와 약속은 한갓 들에 핀 풀포기와 같은 것입니다. 예언자 이     사야가 “모든 인생은 한낱 풀포기, 그 영화는 뜰에 핀 꽃과 같다. 풀은     시들고 꽃은 진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이사     40:6 - 8)라고 노래하였듯 사람들의 약속은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영원     한 것은 오직 하느님의 말씀과 우리주 그리스도뿐인 것입니다.


 0 주님께서 “아예 맹세를 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마태 5:34 - 36) 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우리들 인생이 풀포기와 같아서 맹세와 약속의 유한성을 경계하고     계신 것입니다.     

   

■ 큰바위 얼굴


 0 호손(1804 - 1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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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선장의 아들로 태어남, 청교도 후손

 - 그의 소설 ‘주홍글씨’는 19세기 미국의 대표적 소설

 - 그의 단편 ‘큰바위 얼굴’은 주옥같은 교훈적 작품

 * 줄거리 생략 : 옛날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


 0 주님은 대접받기를 원하고 스스로 존경 받기를 원하는 사람을 위선자라     고 질책하십니다. “너희 중에 으뜸 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진     다.” 우리들에게는 누구나 두가지의 ‘나’가 있습니다. 하나는 ‘남에     게 보이기 위한 나’이고 또 하나는 ‘내 속에 들어 있는 나’입니다.


   불교에서는 ‘내 속에 들어 있는 나‘ 를 진짜 나, 즉 진아(眞我)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은 자기 속에 들어 있는 진짜 보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나에게만 집착합니다. 소설 큰바위 얼굴에 나오듯 돈을 모으고, 권력을     얻고, 명예에 집착하는 것은 결국 허상이며 허명일 뿐입니다.


 0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가치는 권력을 얻고 명예를 얻어 ‘남에게 보     여지는 ’나’를 드러내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 존재의 최고 가치     는 살아 있는 큰바위 얼굴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릿돌(마태 21:42)이자 큰바위 얼굴입니다.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큰바위 얼굴과 닮고 싶은 것뿐입니     다.(마태 23:1 - 12 )    


■ 성춘향


 0 춘향전은 심청전과 더불어 우리 민족이 낳은 대표적인 고전 소설의 하나     입니다. 전세계적으로 이처럼 아름다운 로멘스의 구전문학을 갖고 있는     나라도 드물 만큼 ‘춘향전’은 우리 민족이 창조한 사랑의 송가입니다.


 0 이 소설이 우리 민족에게 주는 메시지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양반집     자제와 기생의 딸이라는 신분을 뛰어넘어 사랑을 쟁취하는 평등사상이      고, 또 하나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기약없는 연인을 기다리는 춘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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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개와 순결입니다. 특히 과거에 급제하여 금의환향하는 이도령이 일부     러 거지꼴을 하고 춘향을 만나러 가는 장면은 극적 클라이맥스의 백미라     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0 춘향은 슬기로운 처녀였습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사랑하는 신랑을 기다     리며 항상 깨어 있었습니다. 그 집요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정     절로 자신의 믿음을 지켰으며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이 비렁뱅이 차림으     로 찾아 왔지만 자신의 사랑을 의심치 않았던 것입니다.

             
   춘향이의 슬기로움은 우리 민족이 지닌 슬기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그 많은 순교자가 탄생한 것은 그러한 성(聖) 춘향의 굳은 믿음이     우리 민족의 피 속에 원형질로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0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오시기로 되어 있는 우리 민족이 기다리고 있는 이     도령 바로 그분인 것입니다. 이제 그분이 오십니다. 그러니 등잔불을 밝     히고 주님이 쉽게 오실 수 있도록 어두운 길을 대낮같이 비추어 깨어 일     어나 다같이 나아갑시다. (마태 25:1 - 13)


■ 신앙의 조건


 0 임상옥(1779 - 1855 )

 - 평북 의주에서 가난한 상인의 아들로 출생, 인삼 교역으로 조선 최고의     거상이 되었으며 상업의 정도를 지켜 나간 위대한 거인


 - 그에게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날 세명의 장사꾼이 돈을 빌려 달라고 찾아옴, 임상옥은 각각 한 냥     씩을 주고 장사를 해서 닷새 뒤에 이문을 남겨 오라고 함

   상인 1) 짚신 다섯 켤래를 팔아 다섯푼의 이익

   상인 2) 대나무와 창호지를 사서 연을 만들어 팔아 한 냥의 이익

   상인 3) 백지를 한 장 사서 그 종이에 ‘절간에 들어가 글을 읽을 터이     니 비용을 대 달라.’는 소지를 의주 부윤께 올린 후 열 냥을 꾸어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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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상옥은 1)에게는 100냥, 2)에게는 200냥, 3)에게는 천냥을 빌려주고 1     년 후에 갚으라고 함. 상인 1과 2는 1년 후 얼마의 이문을 남겨 찾아 왔     지만 3은 나타지 않음. 마침내 6년이 지난 후 그 돈으로 인삼씨를 사서     태백산에 들어가 씨를 뿌린 상인 3)은 6년의 기다림 끝에 인삼 열바리      그러니까 10만 냥의 거금을 벌어 돌아왔다.        

 - 임상옥은 “씨앗을 뿌린 상인이야말로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과 상업의     근본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반드시 거상이 될 것이다.”라고     평가 했다고 한다.


 0 임상옥의 이러한 일화는 주님이 말씀하신 하늘나라의 비유와 신기하게도     일치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세 명의 종에게 각자의 능력에 따라 돈을 맡기고 떠났으나, 주님     이 무서운 분인줄 알고 있어 받은 돈 한 달란트를 그대로 땅에 묻어 두     었던 사람에게 ‘너야말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라고 호통을 치시고     그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사람에게 주면서 다음과 같     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해지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임상옥이 인삼씨앗을 사서 뿌린 후 6년 후에 거두어들인 창조적이고 생     산적인 상인이야말로 거부가 될 자격이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처럼 주님     께서도 우리가 받은 신앙의 씨앗을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정성된      마음으로 이웃에게 뿌리는 사람이야말로 주님과 더불어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사람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 마태 25:14 - 30)


■ 꿈


 0 삼국유사에 나오는 ‘조신의 꿈’이라는 설화 이야기

 - 신라시대 스님 조신이 그 지방 태수의 딸을 사랑하게 됨, 그러나 그녀에     게는 배필이 있었음

 - 하루는 그가 법당안에서 관음보살에게 그녀와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나타나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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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일찍부터 스님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조신은 기뻐하며 여인과 함께 40년을 숨어 살아갑니다. 자녀 다섯을 두     었는데 가족들은 걸인처럼 살다가 열다섯 살 된 큰 아이가 굶어 죽고 두     내외는 늘고 병들어 열 살 된 딸을 앞세워 동냥질을 하여 먹고 살게 됩     니다. 이에 부인이 말합니다.

   “아름다운 모습도 풀 위의 이슬이요, 지초와 같은 사랑의 약속도 바람     에 흔들리는 버들가지와 같습니다. 이제 그대는 내가 있어 더 누가 되      며, 나 역시 그대 때문에 더 근심이 됩니다.”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이 울면서 헤어지는 순간 꿈에서 깨어나는 것입니      다. 그러니까 부부간의 50년 세월이 깜빡 불당안에서 졸았던 하룻밤의      꿈인 것을 조신은 그제서야 깨달았던 것입니다.


   일연은 이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지금 모든 사람들이 속세의 즐거움만 알아 기뻐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이것은 다만 하룻밤의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0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서 너희가 잠자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면 큰 일이     다. 늘 깨어 있어라.”  

   주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최후의 기도를 드리는 순간에도 잠들어 있던 배드로처럼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으며 마음은 간절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      는”(마태 26:41) 불쌍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0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마태 26:41)

   일찍이 성욕에 괴로워하던 프란체스코는 눈밭을 뒹굴고 나서 눈으로 아     내와 자식들의 눈사람을 만든 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것이 너의 아네고, 저것이 너의 아이들이다. 보아라. 그 가족들이      저처럼 녹아서 흔적도 없지 아니하냐.”


■ 보이지 않는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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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애덤 스미스 (1723 - 1790)

 - 경제학자, 그의 명저 ‘국부론’에서 개인의 이기심에 의한 경제행위가     결국 사회적 생산력 발전에 이바지 하며 이러한 사적 이기심과 사회적      번영을 매개하는 것은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말함

 

 - 그후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용어는 사회, 역사, 문화, 예술의 각 분     야에 널리 사용


 0 특히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이던 샤르뎅(1881 - 1955)은 신학과는     정반대의 대표적 학설인 진화론 속에도 ‘보이지 않는 손’의 끊임없는     창조가 깃들어 있으며 이 끊임없는 창조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있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이 이론을 ‘진화자로서의 그리스도’라고 부르는데,      어쨌든 이러한 사상은 21세기를 맞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0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처음 말한 사람은 의외로 세례자 요     한입니다. 그는 질문을 받자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 한 분이 당신     들 가운데 서 계십니다.”라고 대답함으로써 우리들 가운데 서 계신 알     지 못하는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을 ‘성령과 불의 세례’(마태  3:11)로     새로운 천지를 창조하실 그리스도임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 생각하는 갈대


 0 데카르트(1596 - 1650)와 파스칼(1623 - 1662)

 - 두사람 모두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이며 철학자

 - 파스칼은 데카르트에게 많은 영향을 받음

 - 데카르트 :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 파스칼 : “인간은 자연 가운데 가장 약한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     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 두 사람 모두 인간의 위대함을‘생각 즉 자기 존재의 사유’에서 발견함


 0 하느님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의 집을 찾아가 “은총을 가득히 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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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여,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라고 인사하였을 때 마리아는 몹시 당     황하며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곰곰이 생각하였던 것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 예수께서 열두 살 되던 해, 잃었던 예수를 성전에서 찾으신 후 “얘야      왜 이렇게 애를 태우느냐.”고 꾸짖자 아들인 예수로부터 “나는 내 아     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을 모르셨습니까”(루가 2:49)라는 뜻밖의 말     을 듣게 됩니다. 마리아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 하였던”(루가 2:51)것입니다. 이처럼 마리아     는 데카르트의 말처럼 ‘생각하는 인간’의 원형이었습니다


 0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키웠습니다. 신중하게 마음에 깊이 새기고 오래 간직하는 마음으     로..... 마리아, 우리 성모님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루가 1:26 - 38)            


■ 이심전심


 0 서산대사는 ‘선가귀감’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부처님의 마음이 전하는     것은 선지(禪旨)가 되고 가르치는 것은 교문(敎門)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 선가귀감의 핵심이 되는 이 말은 석가께서 영산회에서 설법하시다가 허     공에서 떨어지는 꽃을 보고 그 의미를 물으셨는데 모든 제자들이 침묵하     였지만 유독 가섭만이 빙그레 웃자 부처님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부터 나의 마음을 가섭에게 전한다.”

   말이나 글에 의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이심전심(以心傳     心) 이란 말은 여기서부터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0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성서중에서 가장 장엄한 장면은 바로 주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장면일 것입니다. 우리가 삼위일체로 믿고 있     는 성부이신 하느님과 성자이신 예수님과 성령이신 하느님의 영이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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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리에서 일치하여 나타나는 장면은 주님께서 세례를 받는 이 한 장면     뿐입니다.


 - 하느님은 예수님에게 ‘너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써 부처님이 가섭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해주셨듯이 하느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주님에게 전하셨음을 알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이라     고 믿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마음을 전해 받았기 때문입니      다. 그분을 믿는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그분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야 합니     다. (루가 3:15 - 16, 21 - 22)


 - 서산대사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경을 보되 마음속으로 돌이켜 봄이 없다면 비록 팔만대장경을 다 보     고 외운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 존경하는 데오필로님


 0 ‘루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루가는 원래      의사로서 바울로가 순교할 때 그를 지켜본 유일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     니다. 루가는 평생을 미혼으로 지냈으며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0 루가가 쓴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모두 특이하게도 ‘존경하는 데오필로님    ‘ 으로 시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루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일종의 서간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입니다.


 0 데오필로는 ‘하느님의 벗’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고유명사이지만 앞     에 존경하는 이라는 존칭을 사용하고 또한 ‘각하’라는 경어를 사용한     것을 봐서 데오필로는 루가가 살았던 시절의 장관과 같은 고위 관리이거     나 아니면 마음속으로 존경하고 있었던 친구중의 한 사람인 것으로 추축     됩니다.

   어쨌든 루가가 데오필로에게 보낸 그 두장의 긴 편지가 하나는 복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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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었고 또 하나는 사도행전이 되었던 것입니다.


■ 박씨부인전


 0 박씨부인전 : 조선 후기, 작자 미상의 소설

 - 인조반정의 공신 병조판서 이시백(1581 - 1660)의 부인 박씨 이야기

 - 첫날 밤 박씨가 추물임을 알고 모든 가족들이 비웃고 욕함 - 박씨는 별     당에서 홀로 살게됨 - 그러나 이시백은 박씨의 영특함으로 장원급제하고     - 어느날 액운이 풀려 절세 미인으로 변신하는 박씨  - 박씨부인은 마침     내 호왕(胡王)을 물리치고 왕으로 부터 ‘충렬부인’에 봉함을 받는다는     이야기  


 0 베드로는 예수께서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신      모습’으로 변모하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실제 모습임을     몰랐던 베드로는 자기도 모르게 얼빠진 말이나 하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내 아내가 실제로는 박씨부인처럼 최고     의 절색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내 남편이 예수님처럼 해와 같은 얼굴과     눈부신 모습을 지닌 고귀한 영혼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우리들이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자기를 죽이면     서까지 사랑받는 거룩한 존재임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깨어나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잠들어 있지 말고 깨어나 내 가족들 그리     고 이웃들의 모습 속에 깃들어 있는 영광의 실제 모습을 꿰뚫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루가 9:28 - 36)


■ 우리를 기다리시는 아버지


 0 T.S. 엘리엇 (1888 - 1965) : 영국시인, 20세기 문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 금세기 최고의 시인


 - “그러면 우리는 갑시다. 그대와 나 / 지금 저녁은 마치 수술대 위에 에     테르로 마취된 환자처럼 / 하늘을 배경으로 열려 있습니다.” 로 시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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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프루프록의 연가‘ 로 문명(文名)을 얻고


   “사월은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로 시작되는        ‘황무지’로 정상의 자리를 굳힘

 - 어려서부터 기독교적 이상주의 영향, 56세 때 쓴 ‘네 사중주’는 종교     적 색채가 강렬

   

   나는 나의 영혼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조용히 기다려라. 그리고 희망 없이 기다려라.

   왜냐하면 희망은 그릇된 것에 대한 희망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없이 기다려라.

   왜냐하면 사랑도 그릇된 사랑에 대한 사랑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 신앙이 있다.

   그러나 신앙과 사랑과 희망은 모두 기다림 속에 있는 것


 0 ‘돌아온 탕아’의 이야기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작은 아들의 입장에서       보면 ‘돌아옴’이지만 그 아들을 맞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기다      림’인 것입니다. 그래서 루가는 ‘집으로 돌아 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라고 표현 합니다.


   집으로 오는 아들을 멀리서 보았다면 어버지는 언제나 어디서나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에 비하면 큰 아들은 아버지와 항상 함께     있었지만 ‘집 가까이에서 나오는 음악소리’를 듣고서야 아우가 돌아온     것을 알았습니다. 한마디로 형은 아우를 기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처럼 아버지와 형의 차이는 기다림의 차이이며, 기다림의 차이는 결국      사랑의 차이인 것입니다.

   사랑은 기다림입니다.


 0 밤은 낮을 기다리고 낮은 밤을 기다립니다. 그리하여 하루가 흘러가는      것입니다. 겨울은 봄을 기다리고 봄은 겨울을 기다립니다. 그리하여 일     년이 흘러 갑니다. 일 년이 흘러가서 세월이 되며 세월이 흘러가서 영원     이 됩니다. 삶은 죽음을 기다리며 죽음은 삶을 기다립니다. 하느님은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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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을 기다리며 인간은 하느님을 기다립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한다     는 생각없이 사랑하시고 하느님은 인간을 기다린다는 생각없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사랑 그 자체이신 것입니다. (루가 15:1 _      3, 11  - 32)


■ I don't know   how to love him.

   (아리아 곡명 : 어떻게 그를 사랑해야 할지 나는 알지 못한다)


 0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는 앤드류 로이드 웨버 라는 영     국의 천재가 만든 작품으로  ‘캣츠’‘에비타’‘오페라의 유령’등도     그의 작품이다.


 -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는 예수의 생애를 그린 기념비적 작품인     데 지친 예수님을 안고 부르는 여주인공(마리아 막달레나)의 아리아가      유명하다.


   어떻게 그를 사랑해야 하나.

   어떻게 그이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지난 며칠간 나는 변했어. 정말로 변했어.

   마치 난 딴 사람이 된 것 같아.

   어떻게 해야 하나.

   그가 왜 내 마음을 끄는 것일까.

   그는 다만 한 남자일 뿐인데.

   전에도 나는 많은 남자를 알았어.

   그도 역시 한 남자일 뿐인데........


 0 마리아 막달레나 : 매춘부, 행실이 나쁜 여자,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     힌 현행범

   “그녀를 어떻게 하면 좋겟습니까?” 라고 율법학자가 묻자. 예수는 땅     바닥에 무엇인가를 쓰며 심사숙고 하다가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자, 비로     소 고개를 들고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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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당신은 창녀를 죽음에서 구하시고 그녀     에게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 주셨습니다. 그 이후부터 이 여인은 주님을     따라다니는 제자가 되었는데 주님께서 못 박혀 돌아가실 때도 십자가 곁     에 있던 사람이 되고(마태 27:56), 무덤에 묻히실 때도 끝까지 지켜본      증인이었으며(마태 27:61),부활날 아침 무덤으로 찾아왔던 첫사람(마태     28:1),이었습니다. 그뿐인가요. 부활하신 주님께서 처음으로 나타나신      것도 바로 이 여인이었습니다.(요한 20:13 - 18),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     까. 거리의 창녀를, 모든 제자들이 다 도망갔을 때도 자신의 무덤을 지     켜보는 최후의 증인으로 변회시켰을 뿐 아니라 부활의 기쁜 소식을 처음     으로 전하는 복음 전파의 성녀로 변화시킨 당신은 누구십니까?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노래처럼 그녀를 딴사람으     로 변하게 한 바로 그 남자.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그녀의 탄식처     럼 저 역시 당신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요한 8:1 - 11)       


■ 주님과 나는 하나


 0 타이타닉호 침몰 : 1912. 4. 14 23:40

 - 사상 최초 4만 톤이 넘는 호화 여객선, 승객 2208명 중 1513명 희생

 -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해난사고 였지만 어린이와 여자 그리고 약한     노인들을 먼저 구해주고 자신들은 국가를 부루며 죽어간 수많은 영국인     들의 기사도 정신은 감동적


 - 그때 레스토랑의 오캐스트라 단원들의 실화

   배가 난파되기 직전까지 연주, 물이 무릎까지 차오르기 시작힐 무렵 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찬송가를 연주하기 시작하자 모든 단원들도 찬송가를     연주하며 죽음을  맞이함. 그때 그 찬송가 제목은

   “내 주를 좀 더 가까이. Nearer, My God. to Thee."

   내 주를 가까이 가려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님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 24 -

 0 우리들의 인생이란 망망한 대해를 처녀 항해하는 호화 여객선에서의 삶     과도 같습니다. 언제 밀어닥칠지 모르는 빙산과의 충돌도 깨닫지 못한      채 우리들은 오직 먹고 마시며 춤추는 쾌락에만 빠져 있습니다.

   이 세기말적 시대에 우리가 배울 교훈은 죽어가면서까지 ‘내 주를 가까     이, 좀더 가까이’를 연주하였던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태도입니다.


   죽음의 바닷물이 우리를 덮쳐온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      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과 내가 하나일 수는      없다 해도 우리들은 그분께 한 발자국이라도 좀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     입니다. 그것이 우리들 인생의 목표인 것입니다. (요한 10:29 - 30)

                             

■ 서로 사랑하여라


 0 최후의 만찬에서 주님께서는 최후의 유언을 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주님이 주신 새 계명. 그것은 “서로 사랑하여라.”입니다. 하지만 주      님, 서로 사랑하여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훌륭한 줄은      알지만 과연 사랑이 무엇인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주님, 무엇이 사랑입     니까. 사랑하면서도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는 우리들이야말로 눈뜬 장님     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우리들에게 주님은 한 가지 조건까지 내거십니      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0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사     랑하셨던가를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아무런 죄     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 십자가야말로 “서로 사     랑 하여라.”라고 새 계명을 내리신 주님이 내 건 단 하나의 ‘사랑의      조건’인 것입니다. (요한 13:31 - 35)


■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0 성 프란체스코의 ‘평화의 기도’


                            - 25 -

   주님 저를 당신 평화의 도구로 삼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모욕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거짓이 있는 곳에 참됨을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주님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자기를 줌으로서 받고

   자기를 잊음으로써 찾으며

   용서함으로써 용서받고

   죽음으로써 영생으로 부활하게 하소서 .

                                  (요한 14:23 - 29, 17:20 - 26)


■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0 추사 김정희 (1786 - 1856) : 조선 최고 서예가, 사상가 등...


 - “만약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 실제로 있지도 않은 것으로써 일을 삼아서     다만 속이 텅 비고 엉성한 잔꾀로써 방법을 삼는다거나 그 올바른 이치     를 찾지 않고 다만 잘못 얻어들은 말로써 주장을 삼는다면 이는 성현의     길에 어긋나는 일인 것이다.”


   공허한  이론에서 학문의 길을 찾을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     에서 학문의 길을 찾음을 김정희는 실학(實學)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따라서 김정희는 공허한 이론을 숭상하는 것이 학문의 길이 아니라 가르     침을 몸소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학문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 26 -

   리하여 김정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다만 넓게 배우고 힘써 행할 것이니 오로지 ‘실제 있는 일에서부터      올바른 이치를 찾는다.‘ 는 한 마디의 말을 기본으로 삼아서 이를 실천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0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대답해주시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뿐입니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아는 체하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진정으로 강조한 것은 ‘너도 가서 그     렇게 하여라.’ 라는 실행의 믿음뿐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말     씀처럼 그곳에 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학문의 길이란 공허한 이론을 숭상하는 것이 아니라 옛 성현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는 것에 있다고 주장한 김정희의 ‘실시구시’정신     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참 믿음의 정신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산 믿음이 아니라 죽은 믿음인 것입니     다.  (루가 10:25 - 37)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0 1961. 4. 12 소련의 보스토크 1호는 유리가가린을 태우고 최초의 우주      유영에 성공했다. 그는 그 감동을 이렇게 표현했다.

   “지구는 아름다운 초록별이다.”

   “하늘 어디서도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다.”


 -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하자 친히 ‘하늘에 계신 우     리 아버지’로 시작하는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그러나 이 ‘주님의 기     도’로 인해 유리가가린의 농담처럼 우리가 드리는 기도도 우리와는 멀     리 떨어져 하늘에 살고 계시는 하느님께 외우는 주문이 되고 말았다.


 

                            - 27 -

 0 유명한 샹송 ‘고엽’의 작사가인 프랑스 시인 자크 프레베르는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그냥 그곳에 그렇게 머물러 계십시오.

   우리는 이 헐벗은 땅에 머물러 살겠나이다.

   그러니 그곳에서 우리를 참견하지 마십시오.


   이 우스꽝스러운 시처럼 우리들도 하느님을 우리와 상관없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당신’의 신화적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0 이러한 우리들의 마음을 알고 계시는 주님은 하느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     아니라 한 밤중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어 있는 우리들의 친구이자      이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는 아이처럼 귀찮게 졸라     대고 자꾸 문을 두드리고 떼를 쓰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루가 11:1 - 13)  


■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라


 0 나르키소스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소년으로 물의 신 케페소스와 요     정 사이에서 태어남 

 

 - 요정 에코는 나르키소스에게 반해 사랑한 나머지 목소리만 남아 메아리     가 되었고

 

  - 예언자는 나르키소스가 자신의 모습을 보면 안된다고 했으나 어느날 사     냥을 하다가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모습에 홀려 그곳     을 떠나지 못하고  죽게 됨 


 0 1899년 독일 정신과 의사 케네는 이 신화를 이용해서 자기 자신을 사랑     하는 심리상태를 나르시시즘이라 명명했고 이 용어는 프로이트에 의해      널리 알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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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프로이트는 대부분의 유아들이 이러한 자기애(自己愛)에 빠져 있으나 성     숙되면서 점점 어머니와 이성과 같은 대상애(對象愛)로 나아간다고 말하     였습니다. 그런 대상애로 발전하지 못하고 계속 자기애에만 빠져 있을      때 프로이트는 정신병의 원인이 된다고 분석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     나 자기애에 빠져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지닌 숙명적인 비극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집착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자기 문제에만 집착하는     나르시시즘은 자기 가정만을 사랑하는 가족애로 발전되며, 자기 지역만     을 사랑하는 지역주의로 나아가게 마련입니다. 또한 자신이 남보다 우월     하다고 생각할 때는 교만이 되고,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할 때는 독선이     되는 법입니다.


 0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부모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고서는 내 제     자가 될 수 없다.”

   ‘나’를 섬기는 이교도에서 ‘주님’을 섬기는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     는 무엇보다 먼저 자기의 물가를 떠나야 할 것입니다. 자기의 물가를 떠     나고 자기의 목소리에서 벗어나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     의 얼굴을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의 모습으로 돌려 주님의 모습이 물에     비친 나의 참모습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것    입니다. (루가 14:25 - 33)


■ 성전을 허물어라


 0 안토니오 가우디(1852 - 1926) : 스페인 금세기 최고의 건축가

 - 바르셀로나의 ‘성 가족교회’ 는 가우디에 의해 1882년 첫 돌을 놓은      뒤 아직까지 건축이 진행중임


 0 유럽의 성당들

 - 노트르담 대성당 : 200년

 - 밀라노 대성당 : 250년

 - 독일의 쾰른 대성당 : 750년, 아직까지 진행 중

 - 예수님이 직접 드나들던 성전은 46년


 

 0 그러나 이 아름다운 돌과 예물로 화려하게 꾸며진 당신이 드나드는 성전     을 보시며 주님은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새로 세우겠다.”(요한 2:19) 예     수님의 이 말씀은 자신의 몸이야말로 최고의 성전임을 분명히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0 바울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안에 살     아 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1고린 3:16 - 17)


   바울로가 말하였듯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성령이 살아계신 거룩한 성전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20세기 최고의 걸작품인 가우디의 성 가족교회     도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들의 몸을 뛰어 넘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는 하느님께서 직접 자신의 형상을 따서 만든 창조물이며 하느님의 입김     을 받음으로써 생명을 지닌 인간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는 그분의 외     아드님이신 예수께서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써 용서      받고 눈부신 새 인간으로 재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화려한 예물과 치장으로 아름답게 꾸밀것은 돌로 만든     건축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몸과 영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몸은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삼위일체가 머물고         계시는 거룩한 대성당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루가 21:5 - 19)


■ 신 포도주


 0 로마의 국립 미술관에는 독특한 모습을 한 조각상이 있습니다. 꼽추에      안짱다리, 불룩 나온 배, 허공을 노려보는 추악한 용모의 이 조각상은      바로 고대 그리스의 우화 작가인 이솝의 모양입니다.


 0 정확하지는 않지만 기원전 6세기 경에 살았던 이솝은 원래 노예였으며      피살되어 비참한 생애를 마쳤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4세기경 이스탄불    

                            - 30 -

   에 살았던 수도승 플라누데스가 편집해서 전승된 ‘이솝이야기’는 동물     을 통해 인생의 기미(機微 : 낌새)를 교묘하게 묘사하는 그 특유의 풍자     성으로 인류 최고의 우화로 찬사받고 있습니다.


 0 이솝이야기에는 많은 우화가 실려 있는데 그중에서 ‘여우와 포도’이야     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어느 날 여우가 먹을 것을 찾아서 헤메다가 탐스러워 보이는 포도 송이     를 발견합니다. 배고픈 여우는 그 포도를 따먹으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너무 높이 있어서 따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여우는 그 자리를 떠     나면서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저 포도는 맛이 없을 거야. 저 포도는 신 포도일 테니까.”

   이 짧은 우화는 인간은 누구나 힘이 모자라 무슨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그것을 저주함으로써 마음의 위안을 삼는다는 어리석음을 풍     자하고 있습니다.


 0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무렵 “목 마르다.”라고 말씀 하십     니다. 그러자 군인들은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셔서 풀대에 꿰어 그것을     주님의 입에 대어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맛 보신후 “이제      다 이루었다.”(요한 19:30) 라고 말씀하시고 숨을 거두십니다.


 0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4:13)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도 막상 자신이 목이 마르셨을 때는 해면에     적신 신 포도주를 입에 적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우리들은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하는 그분의 물’(요한 4:14)     을 받아 마시면서도 정작 그분께서 목말라하실 때 우리들은 멸시와 저주     의 ‘신 포도주’를 그분의 입에 대어드리는 것입니다. 

   

■ 하느님은 약속을 지키셨다.


 0 아일랜드 출신 프랑스 작가 사무엘 베케트(1906 - 1989)

 - ‘고도를 기다리며’ 라는 희곡으로 1969년 노벨 문학상 수상

 

                            - 31 - 

 - 해질 무렵 어딘지도 모르는 시골길에서 두 사람의 떠돌이가 ‘고도’라     는 인물을 기다리는 동안 부질없는 대사와 동작을 주고 받으며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반복되고 ‘고도’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결국 연     극은 끝난다.


 0 작가는 ‘고도’라는 이를 밑도 끝도 없이 기다리는 인물들을 통해 현대     인의 존재론적 불안을 독특한 수법으로 파헤치고 있습니다. 많은 비평가     들은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Godot)'가 결국 ’신(God)'에서 빌려온 이     름이며, 따라서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는 절대자 즉 하느님의 상징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어디로부터 왔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우리들의 인생은      마치 베케트의 부조리한 연극 무대에서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고도’     를 기다리는 우스꽝스러운 떠돌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불확실한 인간에게 있어 ‘예수’는 오기로 약속된 단 한 사람입니      다. 일찍이 하느님에게서 창조된 그 수많은 인간들 중에서 하느님으로부     터 예언된 사람은 오직 ‘예수’뿐인 것입니다.


■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


 0 셰익스피어(1564 - 1616)의 햄릿

 -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쪽이 더 사나이다울까.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받아도 참고 견딜 것인가. 아니면 힘으로 막아 싸워 이길     것인가.”         

 - 극중 내내 고민하는 햄릿은 결국 복수 끝에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데, 죽느냐 사느냐의 선택에서 방황하는 햄릿은 흔히 현대인의 상징으로     비유됩니다.

   현대인들은 햄릿처럼 언제 어디서나 선택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20세기의 철학자들은 현대인들을 자유선택에 맡겨진 ‘선택의 인간’이     라고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0 예수님은 하느님이 원하셨으므로 사람의 아들이 되어 말구유에 누우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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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또 죄 많     은 사람들과 하나가 되시기 위해 스스로 죄인이 되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선택하신 길임을 주님은 깨닫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들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을 생각하기 보다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마태 16:23) 베드로의 제자들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하느님의 길 보다 사람의 길을 선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도 햄릿처럼 항상 두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고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느님의 일이냐. 아니면 사람의 일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주님은 항상 하느님이 원하는 일을 선택하심으로써 우리들에게 그 정답     을 몸소 행동으로 실천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태 3:13 - 17)


■ 쓰러진 소금단지


 0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 - 1519)의 최후의 만찬

 - 밀라노의 산타마리아 델레그라치 스도원의 식당에 그린 그림으로 주님께     서 수난 전날 밤 열두 사도들과 함께한 만찬을 표현

 - 3~4년 동안 걸린 이 그림에서 주님의 얼굴과 배신자 유다의 얼굴 표현에     고심하던 다빈치는 밀라노에서 가장 고결한 인품을 지닌 사람을 데려와     그를 모델로 주님을 그렸다.


 - 삼사년이 걸린 이 작업 끝에 단 한 사람의 얼굴만이 남게 되었는데 그것     은 바로 유다의 얼굴이었다. 이번에는 밀라노에서 가장 잔인한 흉악범을     데려와서 그의 얼굴을 모델로 유다의 얼굴을 완성하였다. 마침내 유다의     얼굴이 완성된 날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흉악범은 다빈치에게 이렇게 소     리쳐 말했다.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네가 누구냐?”

   다빈치가 묻자 그 사형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 33 -

   “저는 몇 년 전 나으리께서 예수를 모델로 그리셨던 바로 그 사람입니      다.”        


 0 ‘최후의 만찬’ 에는 또 하나의 미스테리가 있습니다. 많은 그릇들 가     운데 오직 소금단지 하나만  쓰러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우연이     아닙니다. 날카로운 관찰력과 엄격한 사실의 바탕위에 객관적인 묘사를     하였던 다빈치가 그 소금단지를 우연히 쓰러뜨렸을 리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짠     맛을 만들겠느냐? 그런 소금은 아무데에도 쓸데 없어 밖에 내버려져 사     람들에게 짓밟힐 다름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인간의 내부에는 누구나 주님의 신성과 가롯 유다     의 악마성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음을 알리고, 짠 맛을 잃으면 영성을 잃     은 유다처럼 쓸데없이 밖에 버려져 짓밟힐 뿐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쓰러     진 소금단지를 통하여 우리에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 5:13 - 16)  

 

                                                      - 끝 -















                            - 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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