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바다의 기별

보해성산 2009. 1. 5. 20:41
반응형

바다의 기별

 

■ 김 훈 에세이 :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 등

 

■ 바다의 기별

 

0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 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 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0 내가 사는 마을의 곡릉천(曲陵川)은 파주평야를 구불구불 흘러서 한강 하 구에 닿는다. 여름내 그 물가에 나와서 닿을 수 없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 는 것들을 생각했다. 마침내 와서 닿는 것들과 돌아오고 또 돌아오는 것 들을 생각했다. 생각의 나라에는 길이 없어서 생각은 겉돌고 헤매었다. 생각은 생각되어지지 않았고, 생각되어지지 않는 생각은 아프고 슬펐다.

바다는 멀어서 보이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 바다의 기별이 그 물가에 와 닿는다. 김포반도와 강화도 너머의 밀물과 썰물이 이 내륙 하천을 깊이 품어서 숭어 떼들이 수면 위로 치솟고 호기심 많은 바다의 새들이 거기까 지 물을 따라 날아와 갯벌을 쑤신다. 그 작은 물줄기는 바다의 추억으로 젖어서 겨우 기신기신 흐른다. 보이지 않는 바다가 그 물줄기를 당겨서 데려가고 밀어서 채우는데, 물 빠진 갯벌은 ‘떠돌이 창녀 시인 황진이의 슬픈 사타구니’(서정주의 <격포우중>에서)와도 같이 젖어서 질퍽거린다. 저녁 썰물에 물고기들 바다로 돌아가고 어두워지는 숲으로 새들이 날아가 면 빈약한 물줄기는 낮게 내려 앉아 겨우 이어가는데, 먼 것들로 부터의 기별은 젖은 뻘 속에서 질척거리면서 저녁의 빛으로 사윈다.

 

■ 광야를 달리는 말

 

0 아버지를 묻던 겨울은 몹시 추웠다. 맞바람이 치던 야산 언덕이었다. 언

- 1 -

땅이 곡괭이를 튕겨내서 모닥불을 질러서 땅을 녹이고 파내려갔다. 벌써 30년이 지났다. 그때 나는 육군에서 갓 제대한 무직자였다.

아버지는 오래 병석에 누워 계셨고 가난은 가히 설화적이었다. 병장 계 급장을 달고 외출 나와서 가끔씩 아래를 살펴 드렸다. 죽음은 거역할 수 없는 확실성으로 그 언저리에 와 있었다. 아래를 살필 때 아버지도 울고 나도 울었다.

 

0 “요사스럽다. 곡을 금한다.” 내 아버지 한테 배운 말투였다. 여동생들 은 질려서 울지 못했다. 아버지의 관이 내려갈 때 나는 비로소 내 여동생 들의 ‘오빠’라는 운명에 두렵고도 버거운 충만감을 느꼈다. 나는 가부 장의 아들로 태어난 가부장이었던 것이다. ‘오빠’라는 호칭은 지금도 나에게 두렵고 버겁다.

 

0 지금은 한식날 무덤에 성묘 가서도 나는 울지 않는다. 내 여동생들도 이 제는 다들 나이 먹어서 울지 않는다. 슬픔도 시간 속에서 풍화되는 것이 어서 30년이 지난 무덤가에서는 사별과 부재의 슬픔이 슬프지 않다.

우리 남매들이 더 이상 울지 않는 세월에도, 새로 들어온 무덤에서는 사 람들이 울었다. 이제는 울지 않는 자들과 새로 울기 시작한 자들 사이에 서 봄마다 풀들은 푸르게 빛났다.

 

0 허클베리네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에다 돈은 안 벌어오고 집에도 안 들어오 는 사내였다. 다시는 술 안 먹겠다고 아들한테 맹세해놓고서 그 다음날 대낮부터 또 마시는 사내였다. 어렸을 때 나는 내 아버지가 허클베리 아 버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중학교 1학년 때던가. 천지분간 못하는 나 는 어느날 모처럼 집에 온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꼭 허클베리네 아버지 같아요.”

그 때 아버지는 술에 취해 있었는데, 내 말이 무엇을 겨누고 있는지를 대번에 알아 차렸다. 아버지가 허공을 올려다보더니 한참 뒤에 말했다.

“광야를 달리는 말이 마구간을 돌아볼 수 있겠느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또 말했다.

“내 말이 어려우냐?”

아버지에게 말을 달릴 선구자의 광야가 없다는 것을 나는 좀 더 자라서

- 2 -

알았다. 아버지는 광야를 달린 것이 아니고 달릴 곳 없는 시대의 황무지

에서 좌충우돌하면서 몸을 갈고 있었던 것이었다.

 

0 아버지는 자상하지 않았고 가정적이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가난했고 거칠 었으며 늘 울분에 차 있었다. 아버지에게 광야란 없었다. 아버지는 그 불 모한 시대의 황무지에 울분과 열정을 뿌리고 갔다. 나는 언제나 그런 아 버지의 편이었다. 내가 너무 아버지 편을 들어서 늙은 어머니는 지금도 내가 못마땅하지만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 무사한 나날들

 

0 행복에 대한 추억은 별 것 없다. 다만 나날들이 무사하기를 빌었다. 무사 한 날들이 쌓여서 행복이 되든지 불행이 되든지, 그저 하루하루가 별 탈 없기를 바랐다. 순하게 세월이 흘러서 또 그렇게 순하게 세월이 끝나기를 바랐다.

죽을 생각을 하면 아직은 두렵다. 죽으면 우리들의 사랑이나 열정도 모 두 소멸하는 것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삶은 살아 있는 동안만의 삶일 뿐이다. 죽어서 소멸하는 사랑과 열정이 어째서 살아 있는 동안의 삶을 들볶아 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사랑 과 열정으로 더불어 하루하루가 무사할 수 있다는 것은 복 받은 일이다.

 

0 사람의 죽음을 가까이서 지켜본 일이 있었다. 연기가 빠져나가듯이, 생명 은 가뭇없이 빠져나갔다. 생명은 본시 연기나 바람같은 기체가 아니었을 까. 생명이 빠져나간 육신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고, 죽어가는 육신의 눈을 떠서 마지막 이승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눈을 감았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이승의 마지막 풍경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0 딸아이가 공부를 마치고 취직해서 첫 월급을 받았다. 딸아이는 나에게 휴 대폰을 사 주었고 용돈이라며 15만 원을 주었다. 첫 월급으로 사 온 휴대 폰을 나에게 내밀 때, 딸아이는 노동과 임금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 고, 그 자랑스러움 속에는 풋것의 쑥스러움이 겹쳐 있었다. 그때 나는 이 진부한 삶의 끝없는 순환에 안도하였다.

- 3 -

그 아이는 아마 월급쟁이로 평생 살아가게 될 것이었다. 진부하게, 꾸역 꾸역 이어지는 이 삶의 일상성은 얼마나 경건한 것인가. 그 진부한 일상 성 속에 자지러지는 행복이나 기쁨이 없다 하더라도, 이 거듭되는 순환과 반복은 얼마나 진지한 것인가. 나는 이 무사한 하루하루의 순환이 죽는 날까지 계속되기를 바랐고, 그것을 내 모든 행복으로 삼기로 했다.

나는 휴대폰을 내미는 딸을 바라보며. ‘아, 살아 있는 것은 이렇게 좋 은 것이로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혼자 기뻐했다.

 

0 다시 눈을 뜨고 이 살아 있는 동안의 시간들을 들여다 보니. 거기서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고 누렇고 붉은 열매들이 열린다. 그리고 태어난 모든 것들은 사라진다. 시간 속에서는 덧없는 것들만이 영원하다. 모든 강고한 것들은 무너지지만, 저녁노을이나 아침이슬은 사라지지 않는다.

갓난아이가 여자로 자라는 기적과, 영원히 덧없는 것들의 영원함만이 구 덩이를 기다리는 이 무사한 그날그날의 행복이다.

 

■ 생명의 개별성

 

0 창세기 이래로 인간은 죽음으로써 지구를 구해냈을 것이다. 다들 죽어 없 어지지 않았다면, 또 다들 살 자리가 없어서 죽었을 터이다. 그래서 죽음 이야말로 인간이 세계와 후손을 위해서 베푸는 가장 큰 보시이며 은혜일 것이다. 나는 산 자들의 그 어떤 위업도 그 죽음이 베푸는 은혜만은 못하 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산 자는 필멸인 것이다.

 

0 나는 이제마의 글의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의 <동의수세보원> 의 ‘성명론(性命論 )’편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다. 이제마가 이해한 인간의 몸과 병은 정치사회적인 것이고 몸과 마음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 다. 그리고 그가 수많은 임상 경험을 통해 규명했던 ‘사상의학’은 바로 인간의 개별성에 접근하려는 노력이었던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동일한 징후에 동일한 처방’이 아무런 효험이 없는 경우를 그는 너무 나도 많이 경험했을 것이다. 병의 실체는 보편적이거나 획일적일 수 없다 는 깨달음이 병의 구체성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고대 중 국의 전설적인 명의 편작은 “몸속의 병은 겉으로 드러나서 감출 수가 없

- 4 -

다”고 말했다. 그는 망진(望診)을 최고의 진찰술로 꼽았다. 환자를 자세 히 들여다 봄으로써 그 병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체 무슨 말 일까. 나는 편작의 ‘망진’이란 보편성의 편안함을 버리고 보편성의 함 정에 빠지지 않고 환자의 개별성을 개별성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0 창공(倉公)은 제나라의 명의다. 그는 얼굴에 나타나는 다섯가지 빛깔을 보고 오장의 병을 진단했다고 한다. 창공 역시 망진의 대가였던 모양이 다. 창공은 말했다. “내 마음이 맥을 정밀하게 볼 수 없는 상태일 때 나 는 흔히 실수했다. 치료할 수 없는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병으로 판단하기 도 했다. 나는 완전하지 못하다.”

0 창공의 고백은 의사와 환자 관계의 직접성 위에서 치료는 가능하다고 말 하고 있는 것 같다. 보편성 속에 개별성을 매몰시켜서는 문학도 의학도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나의 아픔은 개별적인 아픔이다. 그리고 생로병사 는 경멸받아 마땅한 병리적 징후가 아니라. 개별적인 자연현상인 것이다.

 

■ 시간의 무늬

 

0 지난 여름에 만경강 하구에 다녀왔다. 거기는 김제평야가 끝나는 심포리 바닷가에서 옥구 염전에 이르는 갯벌이었다. 보름사리의 갯벌은 아득히 멀었다. 물이 들고 또 나가면서 갯벌에는 물결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가 주름잡혀 있었다. 뻘밭의 주름은 수평선 쪽까지 퍼져나갔다.

그 주름들은 뻘밭에 새겨진 시간의 무늬들이었다. 시간은 인간과는 무관 하게 물밑을 드나들면서 뻘과 뒤엉켰다. 시간은 바닷물에 끌리고 밀리면 서, 해독할 수 없는 문양을 그리고 있었다. 그 뻘밭 무늬를 바라보면서 나는 한없는 치매감을 느꼈다. 그것은 결단코 언어화될 수 없는 어떤 절 대의 실체였거나, 그 실체의 존재를 입증할 만한 흔적이었다. 실체를 그 리워한다고 하지만 그처럼 언어나 인간과 무관하게 드러나는 시간의 흔적 들을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세계의 실체 또는 그 흔적과 맞닥뜨렸을 때 인간의 앞을 가로막는 이 절벽 같은 치매감 앞에서 나는 늘 속수무책이었 다. 나는 뻘밭에 새겨진 시간과 더불어 끝끝내 자유롭지 못하다.

 

- 5 -

0 그 여름에 나는 최하림의 새 시집 <풍경 뒤의 풍경>을 읽었다. 최하림의 시들은, 내가 그 시들을 읽은 것이 아니라, 그 시들이 나에게 흘러들어온 것처럼 내 마음에 스몄다. 최하림의 시들은 시간의 실체에 닿을 수 없는 격절감을 쓰라리게 토로하지도 않는다. 최하림의 시들은 그 격절감이 주 는 거리를 거리로서 긍정하면서 인간의 바깥쪽을 흘러가는 시간에 포개진 다. 그리고 시간과 더불어 흘러간다. 시 한편을 옮겨 적는다.

 

< 버들가지들이 얼어 은빛으로 >

 

하늘 가득 내리는 햇빛을 어루만지며

우리가 사랑하였던 시간들이 이상한 낙차를

보이면서 갈색으로 물들어 간다 금강물도 점점

엷어지고 점점 투명해져 간다 여름새들이

가고 겨울새들이 온다. 이제는 돌 틈으로

잦아들어가는 물이여 가을 물이여

강이 마르고 마르고 나면 들녘에는

서릿발이 돋아 오르고 버들가지들이 얼어

은빛으로 빛난다 우리는 턱을 쓰다듬으며

비좁아져 가는 세상 문을 밀고 들어 간다.

겨울과 우리 사이에는 적절한지 모르는

거리가 언제나 그만쯤 있고 그 거리에서는

그림자도 없이 시간들이 소리를 내며

물과 같은 하늘로 저렇듯

눈부시게 흘러 간다

0 이 시를 읽을 때 인간과 시간의 관계는 인간이 끝끝내 시간을 짝사랑하 는 일방적 관계다. 시간은 인간쪽으로 눈길 한번주지 않는다. 인간은 시 간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이 소외는 대책이 없는 소외다. 가을 물이 마 르고 강이 마르고, 여름새가 가고 겨울새가 온다. 시간은 그렇게 인간과 는 무관하게 인간이 속해 있는 공간을 드나든다. 시간은 인간과 놀아주지 않는다. 시간으로부터 제외된 인간이 그 시간에 관하여 말할 때, 인간의 말은 인간을 데리고 가지 않으려는 시간을 따라간다. 최하림의 시 속에서

- 6 -

는 시간들 사이에는‘이상한 낙차’가 있고 계절과 인간 사이에는 ‘적절 한지 모르는 거리’가 언제나 있다.

 

■ 기다려라 우리가 간다

 

0 도심을 뒤흔드는 소방차의 사이렌 쇠는 다급하고도 간절하다. 질주하는 소방차의 대열을 바라보면서 나는 늘 인간과 세상에 대해서 안도감을 느 낀다. 재난에 처한 인간을 향하여, 그 재난의 한복판으로 달려드는 건장 한 젊은이들이 저렇게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인간다움이 아직도 남아 있고, 정부와 국가의 기능이 정확하고도 아름답 게 작동되고 있다는 신뢰감을 느끼게 한다. 인간만이 인간을 구할 수 있 고 인간만이 인간에게 다가갈 수 있으며, 인간만이 인간을 위로할 수 있 다는 그 단순명료한 진실을 나는 질주하는 소방차를 바라보면서 확인한 다. 자동차가 자동차에 막혀서 오도 가도 못하는 도심 한복판을 사이렌으 로 헤치며 나아가는 소방차의 대열은 아름답고 고귀한 풍경이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베푸는 절박한 신뢰이며 사랑이다. 인간은 인간이기 때 문에 구조 받을 권리가 있고 또 인간이기 때문에 재난에 처한 인간을 구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 자명한 윤리가 매일매일의 도심에서 확인되고 있다.

 

0 많은 소방관들이 불구덩이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들 대부분이 젊은이 들이었다. 갓난아기를 둔 신혼의 가장도 있었고 아직 미혼인 젊은이들도 있었다. 불구덩이 속에서 질식한 사람을 찾아내 들쳐 업고 나오다가 무너 지는 건물에 깔린 대원들도 있었고 어둠속에서 갑자기 프로판 가스통이 터져서 산화한 대원들도 있었다. 불타는 건물의 지붕위로 올라가서 도끼 로 지붕을 때려 부수다가 무너지는 건물과 함께 숨진 대원들도 있었다.

 

0 숨진 대원이 암흑 속에서 고립되어 어둠을 뚫고 다가오는 동료의 전짓불 빛을 기다리고 있었을 순간을 생각하면서 나는 울음을 참았다. 아무도 그 에게 다가가지 못했고, 그는 결국 고립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인간에게 다른 인간이 다가오지 않으면 고립된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또 많은 소방대원들이 암흑과 화염 속에 고립 되어 있다가 동료들에 의해

- 7 -

구출되었다. 고립된 대원들이 그 암흑을 뚫고 다가오는 동료의 인기척을 느꼈을 때, 그는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 다가오고 있는 인기척, 그것 이 인간의 희망인 것이다.

 

0 시회가 고도로 조직화되고 세분화될수록 인간은 고립되게 마련이다. 다들 제각기 아파트와 오피스텔과 자동차와 밀실 안에 들어 앉아 있다. 그 수 많은 세포들의 틈새에 재난은 복병처럼 숨어 있다. 밀실에 고립된 인간들 은 재난을 돌파하는 능력이 전혀 없다. 소방대원들이 그 밀실을 깨고 들 어가 인간을 구한다. 지금 소방대원들의 역할은 화재 진압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재난 구조로 확대되고 있다. 산불, 수재, 해양사고, 교통사고, 붕 괴, 매몰, 추락 응급환자 수송뿐 아니라 아파트 문 열어주기, 미친 개 죽 이기와 한강철교에 올라 가서 자살하겠다고 날뛰는 사람을 달래서 끌고 내려오는 일까지도 모두 다 그들의 업무다.

0 그 대원들은 이 사회의 기초를 지키고 버티어 주는 안전판이고,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실천하는 보살들이다. 그들은 인간에게 다가오는 인 기척이다. 소방차가 도심을 질주할 때 나는 보살이 화염 속의 중생을 향 해 달려가고 있음을 안다. 보살은 늘 우리 곁에 있다.

 

■ 고향과 타향

 

0 나는 고향이라는 어휘가 물고 늘어지는 정한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진화할 수 없는 비 논리성이 그 정한의 바탕을 이루는 듯싶다. 나는 고향 도 없고 타향도 없는 세상이 좋다. 고향이라든지 타향이라든지 하는 그런 어휘가 아예 없는 세상에서 나는 살고 싶다.

 

0 나의 이른바 고향은 서울 사대문 안이다. 사대문 안에서도 청계천을 기준 으로 남촌과 북촌을 갈랐는데, 내 본적지는 대궐(경복궁) 근처인 북촌이 었다. 북촌에도 나처럼 가난한 사람들은 넘쳐났지만 북촌 사람들은 자기 네들이 세계와 문명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이 넘쳐 있었고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을 다 싸잡아서 ‘문 밖 것들’ 이라고 통칭했다.

 

 

- 8 -

0 내 어머니는 서울 토박이 여자였다. 어머니는 가난했다. 사실 나는 어머 니가 그 결핍과 적막을 어찌 다 감당해내면서 자식들을 기른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어머니는 가난했지만 경우 바르고 깔끔한 여자였다. 어머니는 자,됫박, 저울 같은 도량형기를 존중하고 신성시했다. 쌀 됫박 밑바닥에 양초를 발라서 됫박을 속이는 쌀장사와 저울 눈금을 속이는 푸줏간을 어 머니는 증오했고, 동네 여자들과 합세해서 불매 운동을 벌였다. 두부 한 모의 규격이 일정치 않아서 콩값이 오르면 두부모가 작아졌는데, 어머니 는 가게에서 두부모의 가로 세로 높이를 따졌다. 내가 심부름으로 석유를 사러갈 때도 어머니는 주전자나 양철통을 들고 가지 못하게 했고 반드시 한 되들이 정종 됫병을 들려 보냈다. 정종병은 투명해서 속이 들여다보였 고 또 들이가 정해진 병이어서 석유가게에서 양을 속이지 못하기 때문이 었다.

 

0 어머니는 거칠고 사납고 과장된 말을 무척 싫어 하셨다. 남의 감정을 상 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아름답고 순한 서울말 을 어머니는 좋아하셨다. 내가 문밖 아이들과 놀다 돌아 오면 어머니는 “ 너, 걔네들 말버릇 따라하지마. 왜가리 짖어대는 것처럼 말하지마. 반 듯하고 조용히 말해라. 조용히 말해야 남이 듣는다.”고 타이르셨다. 어 머니는 종결어미가 불분명한 말을 싫어하셨고 늘 대하는 이웃집 아낙네들 에게도 말꼬리가 분명한 존댓말을 쓰셨다. 어머니는 이제 너무 늙고 또 아파서 당신의 고운 말씨를 모두 잃어버리셨고 한 되와 두 되를 구분하지 못하시지만, 내 가난한 어머니의 고향은 향토가 아니라 척도와 언어였던 모양이다.

 

0 명절이 되어 고향으로 사람들이 다들 빠져나가면, 내 고향 서울 사대문 안은 문득 넓고 적막하다. 명절이 되어도 갈 곳이 없는 나는 텅 빈 내 고향의 거리를 혼자서 어슬렁거린다. 거기는 과연 누구의 고향도 아니었 고 고향으로 갔던 사람들이 다들 돌아와도 그 또한 아무의 고향도 아니었 다. 거기는 만인의 타향이었다. 2008년 설에 고향으로 내려갔던 사람들이 다시 서울로 돌아오던 날, 내 고향 서울의 남대문은 불타서 없어졌다. 아 침에 택시를 타고 가보니 남대문은 타다 만 장작더미였다.

나는 10년이 넘게 일산에서 살고 있다. 사대문 안에서 셋방, 시민 아파

- 9 -

트를 전전하다가 불광동, 연신내를 거쳐서 일산가지 내려 왔다. 일산에 와보니, 이 또한 아무의 고향도 아니다. 여기는 신도시다.

 

0 사람들이 명절이면 기어이 돌아가는 그 고향이 아직도 그들의 고향일 것 인가. 당신들의 고향은 아늑하고 포근한 어머니의 품인가. 정말로 그러한 가. 불타버린 남대문의 잿더미를 바라보면서 나는 사람들이 고향으로 가 는 것이 아니라 고향의 영원한 허상을 향해 기를 쓰고 달려가는 것이 아 닌가 싶었다. 사람들아, 설에 고향을 다녀온 사람들아, 불타버린 내 고향 의 남대문을 보아라. 그리고 내 고향 서울을 다시는 타향이라고 말하지 마라. 타향위에 고향을 건설하지 못하는 한 당신들은 영원히 고아이며 실 향민인 것이다. 내 고향 서울에 이제 남대문은 없다.

 

■ 말

 

0 우리는 의견과 사실을 구별해서 말하는 능력을 이미 상실한 것이죠.상실 한지가 오래 됐어요. 사회의 언어 자체가 소통불가능하게 되어버렸을 때 우리는 민주주의를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견과 사실을 구분해서 말 한다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를 만드는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 는 소통에 의해서만 가능할 터인데 소통되지 않는 언어로 무슨 민주정치 를 하겠습니까.

 

0 말이라는 것은 허약한 것이죠.내가 무슨 말을 하거나 칼럼을 써서 자기 주장을 했다고 칩시다. 아주 고귀하고 고매한 진리를 말했다고 칩시다. 나의 생각과 정반대로 얘기를 해도 훌륭한 말이 됩니다. 그 반대로 이야 기 해도 또한 말이 성립되고 훌륭한 담론이 되고 멀쩡한 틀이 되는 것이 에요. 그럼 나의 말은 무엇인가. 나의 주장은. 그것은 남의 언어에 의해 서 부정당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리고 나를 부정한 남의 말, 그것은 또한 다른 언어에 의해서 부정됩니다.

이 허약한 것이야말로 언어의 힘인 것입니다. 언어란 바로 그렇게 무너 지고 수정되듯 허약한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 소통할 수 있는 힘이 들어 있는 것이죠. 그렇지 않고 언어가 완강한 돌덩어리처럼 굳어져 다른 언어 에 의해서 절대로 부서질 수 없다면 그것은 언어가 아니고 무기입니다.

 

- 10 -

0 그런 언어는 소통되는 것이 아니죠. 그런데 지금 우리 시대의 언어는 무 기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정의라고 말하는 것이죠. 소통을 단념한. 단절만의 정의이지요. 단절만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나에 게 대안은 없어요. 이런 사태에 무슨 대안이 있는지를 나는 모르겠습니 다. 다만, 어려운 문제가 우리에게 닥쳐 왔다는 인식을 우리가 공감,공유 라도 할 수만 있다면 나의 말은 헛된 말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 말과 사물

 

0 제가 쓴 몇 편의 소설 속에는 아무런 위안이 없습니다. 다만 독자들을 한 없는 고문과 고통과 절망의 늪으로 몰고 나가는 것. 그 결과로써 독자들 로 하여금 이 세계의 의미와 무의미를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것, 그것이 저의 글쓰기입니다.

0 사람이 말을 하거나 언어를 사용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글을 잘 쓰고 세 련된 수사학을 구사하는 것이 아니라 의견과 사실을 구분해서 말해야 한 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말을 할 때, 글을 쓸 때, 내가 말하는 것이 사실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의견을 말하는 것인지, 사실을 바탕 으로한 의견인지, 혹은 아무런 사실을 바탕에 두지 않고 그저 나의 욕망 을 지껄이는 것인지를 구별하지 않고 말을 하면, 이런 말들은 인간과 인 간 사이의 소통에 기여할 수가 없습니다.

0 이 세상에 언어가 존재하는 목적은 오직 하나입니다. 언어는 소통을 위해 서만 존재합니다. 시나 소설들도 다 소통을 꿈꾸면서 존재하는 예술입니 다. 소통이 목적이 아니라면 언어는 이 세상에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이 지요. 그런데 우리가 의견과 사실을 구별하지 않고 말을 해버리면, 이런 언어는 인간의 소통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단절을 심화시킵니다.

 

0 요즘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언어적 비극은 듣기(hearning)가 안 된다는 것 이죠. 우리는 채팅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듣기가 안되니까 청각

- 11 -

장애인들이 다 모여 있는 거죠. 인간의 언어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말하 기, 듣기, 읽기, 쓰기입니다. 말하기는 쓰기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내 가 나를 드러내는 행위죠. 그리고 듣기는 읽기입니다. 이것은 내가 세상 을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언어는 말하기와 듣기 두가 지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채팅만 있고 듣기가 전혀 안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죠. 혼자 서 담에 대고 떠들어대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극적인 언어 현상이 벌어지 고 있습니다. 또 하나 비극적인 것은 의견과 사실을 뒤죽박죽해서 말한다 는 것이죠.

 

0 한국어는 조사 하나에 의해 의견의 세계와 사실의 세계가 바뀔 수 있습니 다. 나는 조사를 안 좋아해요. 한국말의 조사는 나한테는 너무 어렵고 다 루기가 힘들어요 조사는 한 음절인데 그게 몇 개 안 되요.대 여섯 개밖에 안 되는 이 한 움큼을 이리저리 떼었다 붙였다 하면서 가난한 살림을 사 는 것입니다.

 

0 우리말은 ‘나는 너를 사랑한다.’할 때 ‘는’과 ‘를’을 안 읽으면 누 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어로 글을 읽는다 는 것, 한국어로 사유를 한다는 것은 조사를 읽고 조사를 경영한다는 것 입니다. 조사를 읽지 않고는 한국말을 이해할 길이 없어요. 한국어의 모 든 언어적 장치, 문법의 구조, 사유의 전개는 조사의 매개가 없으면 불가 능합니다. 이것이 우리말의 운명적인 특징이죠.

 

0 인간의 시비(是非)는 끝이 없고 인류의 질문은 끝날 날이 없는 것입니다. 이 끝없는 시비 속에서만 말은 소통이 가능한 것이죠. 비로소, 그렇게 허 약한 속성 안에 소통을 가능케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의 힘 이기도 합니다. 말이 허약하지 않고 완강한 돌덩어리나 철근처럼 생겨서 다른 어떠한 언어에 의해서도 부정당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말이라 할 수 없죠. 그것은 소통의 기능이 없는 것이죠. 그런 언어로는 인간과 소통할 수가 없는 것이죠. 내 언어는 남의 언어에 부정당하면서 소통의 문을 겨 우겨우 열어나가는 것이죠. 말의 꿈은 소통입니다. 소통의 꿈은 무엇인 가. 소통은 이 세계를 좀 더 나은 세계로 만들려는 꿈을 갖고 있는 것이 죠. - 끝 -

- 12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