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13세현주공묘(배숙부인고흥유씨열녀정려지문비각
玄洲公 行狀
公諱纘韓字善述, 其先漢陽人也 有曰之壽仕麗朝 爲僉議中書事, 此爲鼻祖. 中書生諱暉 雙城摠管. 摠管生諱良琪 年十三爲摠管 當元世祖時 破哈丹獻俘 賜袍帶獎之. 摠管生諱暾 龍城府院君. 龍城生諱仁璧 龍元府院君 贈漢山伯 諡襄烈公. 襄烈生諱溫 佐我太祖開國錄 勳封漢川府院君 諡良節公. 良節生諱玩 知中樞府事. 中樞生諱瑠 知嘉山郡事. 嘉山生諱壽昌 副護軍. 護軍生邦彦 文科禮曹參判 於公爲曾祖. 參判生諱玉 綾城縣令. 綾城生諱揚庭 贈資憲大夫 吏曹判書 則公之考也. 妣贈貞夫人 谷山韓氏 牙山縣監應星之女也 以萬曆壬申正月十四日生公.
公自幼有異質 儼若成人 遊戱不凡 稍長知讀書 汎濫羣書 日月將就 奄成大家 名譽藹蔚. 己丑丁外艱 廬於墓側 竭誠循禮 以盡三年. 壬辰倭亂 背負母夫人 避兵於山峽 擧室糊口不給 而獨不以甘旨闕於一日. 大夫人安之 忘其爲播遷. 及丁內艱 葬祭盡禮 猶前喪益不懈.
辛丑中司馬試 乙巳魁庭試. 宣祖大加稱賞 以御筆批點 特命直赴殿試. 丁未分隸成均館學諭. 戊申陞典籍 移拜刑曹佐郞. 己酉拜戶曹佐郞. 辛亥拜司諫院正言 遞拜兵曹佐郞. 壬子除靈巖郡守 罷歸 旋敍復爲正言兼紙製敎. 乙卯除榮川郡守. 時有劇賊 蟠據胡嶺 以公兼討捕使. 公發將吏捕誅 褒加通正. 戊午拜禮曹參議. 己未除同副承旨.
是時昏朝政亂 廢母之論方盛. 公無意仕宦 力求補外 庚申除尙州牧使. 鄭愚伏經世 李蒼石埈 在其地 腹公行事 知公心迹. 嘗與遊於聞慶鳳笙池 公謂曰 時事至此 無復可爲 士大夫之落南者多 處江湖山水之間 吾亦秩滿後 退居鄕曲. 此地可以卜築. 兩公仍謀 諸鄕中士大夫 各出役需 造成精舍. 公定爲投(役)緩 仍留之計矣. 癸亥反正 處江湖者 無不彈冠而起. 公亦以瓜滿還朝 卽拜刑曹參議兼承文院副提調. 冬除赴京使 以疸病甚重 不克行.
甲子春逆适反 報至上南幸. 公所患疸病尤極 追不及差 後到行在. 以此爲言路所劾 而人皆知實病 未幾除左承旨. 有一臺諫 挾其私憾 復以後至 論遞 幷推銓曹. 金淸陰時爲吏曹參議 緘答之辭 卞明甚詳. 其略曰 當初去邠之日 趙某駄疾渡江 濱死危苦之中 趕到公州. 其間稍 後實緣病重所患疸症 正在面目. 扈從諸臣 目見知狀. 情實可恕. 豈可以一彈 而長廢乎. 若一時爲臺諫者 自謂公論必出於己 而必欲 銓曹每事 不敢違越 則其弊何可勝言哉.
其時 憲長張皇 引避攻斥銓曹 至以公旣有當斥之愆 且被臺劾 雖欲愛護 豈容私情云. 公在昏朝時 未嘗爲名宦 常爲州郡 入朝則暫爲承旨而已. 當時除隱遁不出人外 仕宦內外 爲承旨等官 而後爲名宰者 非一二 計而獨於公謂之有愆 此出於偏聽 後輩誣妄之謗也. 一時公論 無不寃之 旋除刑曹參議 復兼槐院提調.
乙丑拜淮陽府使. 丙寅 姜天使曰廣來頒詔 朝廷以公有華國才名 使佐儐伴使 與華使酬唱 公作最多. 時公仲兄知事公在襄陽 亦以製述被召 聯璧詞華之美 一時稱之. 丁卯爲承旨 以聾病陳疏見遞 戊辰拜禮曹參議 己巳除善山府使.
辛未秩滿還京. 其年九月 猝患面疽 卒于正寢 享年六十. 十月葬于交河孟谷 新卜卯向之原. 公資稟粹美 識量宏深 忠懿而剛方 莊栗而寬弘. 平居必夙興洗濯 正襟而坐 毅然 有不可干之像. 敎子弟嚴 而有家法 家庭之內凜若朝廷. 常以仕不及養 爲終身痛 對珍味輒悲痛. 有一姊窮居 奉之如親 至老靡懈. 性雖疾惡 而罕言人之過失. 累典州郡 廉潔奉職 平恕得民心 束下不已嚴 而爲吏所畏憚 常有去後之思. 代還之日 行槖蕭然 家無峙餘之財. 公雖不規規於講習 而行己處事 自合於古人者 如此.
公之述作 出於天才. 雄篇大作 汪洋奮肆. 直接揚馬眞派 詞律聲章 淸健贍蔚 得之杜韓 尤長於騈儷. 世以唐之四傑 擬之一時作者 如權石洲韠 李東岳安訥 車五山天輅 莫不推以爲高. 後進之士 如素隱愼天翊兄弟 白軒李相公景奭 天坡吳䎘 皆從公受業 以至成就焉. 公嘗自號玄洲 有玄洲集 若干篇行于世.
晩好筆法 以鍾王爲[範] 則楷草俱極其精 尺牘小紙 造次揮灑者 亦必動 人皆藏去而珍之. 旣賢且才 何施不宜 而在昏朝時 與世相違 荏苒下列. 癸亥 反正之後 又爲後輩媚嫉者所排 抑終不得展其才 此其時命之不諧也. 世之知公者 乃其文章之美 政事之才 而若其內行修飭 動中禮法 恬於勢利淸白 自厲 則未必盡知之也.
公凡再娶. 前夫人 高興柳氏 持平溵之女也 歸公五歲 遭丁酉倭亂 聞賊鋒猝至 以佩刀自剄而死 有一女先夭 葬在羅州草谷 (?)向之原. 後夫人幸州奇氏 德陽君高峯先生大升之孫 軍器寺僉正孝曾之女也 有至行至德 宗黨化之 事公三十餘年 先意恪恭 婦道無違 生於萬曆己卯正月 以庚子九月十日卒 享年八十二. 附葬于公之墓左 生二男二女. 男長休龍宮縣監 次備弘文館敎理. 女長適砥平縣監李尙弼 次適戶曹參判洪處大.
龍宮有二子三女 男長斗祥監役 次奎祥進士. 女適監役朴錞 士人李桓 尹世徵. 敎理有二男六女. 男長麟祥 次龜祥. 女適生員李亨稷 幼學朴縑 生員韓濟愈 幼學李啓 李著徵 餘幼. 砥平有二男四女. 男任漢儀漢. 女適士人權恊權愍 參奉尹焃 幼學朴斗旺. 參判有五子二女. 男受容童蒙敎官 次受寬受益受完受寅. 女適主簿李觀周 士人尹普. 內外曾玄孫 男女並三十餘人.
女婿前兵曹參議 紙製敎 洪處大 謹狀
<현주공(玄洲公) 일대기(一代記)>
공(公)의 이름은 찬한(纘韓)이며 자(字)는 선술(善述)이다. 그의 선조는 한양 사람으로 지수(之壽)라는 사람이 고려조에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 벼슬을 하였는데 이 분이 시조(始祖)이다. 지수(之壽)는 쌍성총관(雙城摠管) 휘(暉)를 낳았다. 휘(暉)는 양기(良琪)를 낳았는데 양기(良琪)는 나이 열셋에 총관이 되었다. 그가 원(元) 나라 세조(世祖) 때 합단(哈丹)을 쳐부수고 포로를 바치자, 원 세조는 관복과 허리띠를 내려 그의 공적을 치하하였다. 양기(良琪)는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 돈(暾)을 낳았다. 돈(暾)은 용원부원군(龍元府院君) 인벽(仁璧)을 낳았다. 인벽(仁璧)은 한산백(漢山伯)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양렬공(襄烈公)이다. 인벽(仁璧)은 온(溫)을 낳았다. 온(溫)은 태조(太祖)의 개국을 도와 공신이 되었으며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양절공(良節公)이다. 온(溫)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완(玩)을 낳았다. 완(玩)은 류(瑠)를 낳았으며 류(瑠)는 가산(嘉山)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류(瑠)는 부호군(副護軍) 수창(壽昌)을 낳았다. 수창(壽昌)은 방언(邦彦)을 낳았다. 방언(邦彦)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역임하였다. 공(公)에게는 이 분이 증조(曾祖)이시다. 방언(邦彦)은 능성(綾城) 현령(縣令)을 지낸 옥(玉)을 낳았다. 옥(玉)은 양정(揚庭)을 낳았으며 양정(揚庭)은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이 분이 공(公)의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으며 곡산(谷山) 한씨(韓氏)이다. 아산(牙山) 현감(縣監)을 지낸 응성(應星)의 딸이다. 만력(萬曆) 연간(年間) 임신(壬申,1572) 년 정월 14일에 공(公)을 낳았다.
공(公)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데가 있어 마치 어른처럼 의젓하였으며 노는 것도 범상치 않았다. 조금 커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자 여러 서적을 섭렵하였으며, 나날이 자라고 발전하여 어느새 대가(大家)가 되어 명성이 높았다. 기축년(己丑,1589)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묘 옆에 초막을 짓고 삼년이 다하도록 정성껏 묘를 돌보았다. 임진(壬辰)년에 왜(倭)가 쳐들어오자 어머니를 업고 산골짜기로 피신하였는데 온 집안 식구가 먹을 것이 없었어도 어머니에게 만은 음식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올렸다. 어머니께서는 편안해 하셨으며 피난해 와 있다는 것을 잊고 계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가 돌아가신 때와 같이 예를 다하여 장사지내고 제사를 올렸으며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신축년(辛丑,1601)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을사년(乙巳,1605)에는 정시(庭試)에서 수석을 차지하였다. 선조(宣祖)는 크게 칭찬하시고 어필(御筆)로 답안지에 점을 찍어 잘 쓴 대목을 표시하며 전시(殿試)에 바로 응시할 수 있도록 특별히 명하셨다. 정미(丁未,1607) 년에 학유(學諭)를 맡아 성균관(成均館)에 배속되었다. 무신(戊申,1608) 년에는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으며 형조(刑曹) 좌랑(佐郞)에 제수되었다. 기유(己酉,1609) 년에는 호조(戶曹)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 신해(辛亥,1611) 년에는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에 임명되었으며 병조(兵曹) 좌랑(佐郞)으로 자리를 옮겼다. 임자(壬子,1612) 년에 영암(靈巖) 군수(郡守)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돌아오자 곧 바로 다시 정언(正言) 겸 지제교(紙製敎)에 임명하였다. 을묘(乙卯,1615) 년에 영천(榮川) 군수(郡守)에 제수되었다. 이 때 호남과 영남 지방에 도적들이 웅거하고 있었는데 공(公)으로 하여금 토포사(討捕使)를 겸하게 하였다. 공(公)은 군관(軍官)을 통솔하여 도적들을 토벌하고 포상 받아 통정대부(通正大夫)에 올랐다. 무오(戊午,1618) 년에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제수되었고 기미(己未,1619) 년에는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
이 때는 광해군(光海君) 치세기(治世期)였는데 정정(政情)이 혼란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廢位)하자는 논의가 자못 거세게 일어났다. 공(公)은 벼슬할 마음이 없어 외직(外職)으로 내보내 줄 것을 간청하여 경신(庚申,1620) 년에 상주(尙州) 목사(牧使)로 나가게 되었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와 창석(蒼石) 이준(李埈)이 거기에 있었는데, 공(公)을 좇아 섬겨 공(公)의 심사(心事)를 이해하였다. 일찍이 그들과 함께 문경(聞慶)의 연못 봉생지(鳳笙池)를 둘러보았다. 공(公)이‘세상 일이 이렇게 돌아가니 조정에 돌아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 남쪽으로 낙향한 사대부(士大夫) 다수가 강호 산간에 묻혀 지내고 있는데, 나 역시 임기가 끝나면 물러나 시골에 살아야겠다. 이 곳이 점쳐 집지을 만한 곳이다.’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이 말을 듣고 향청(鄕廳)의 모든 사대부들이 각자 일꾼과 비용을 대 정사(精舍)를 지을 것을 계획하였다. 공(公)은 역사(役事)에 무리가 없도록 하였으니 역시 거기에 머무를 계획이었다. 계해(癸亥,1623) 년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강호 산간에 있던 자들이 갓의 먼지를 털고 모두 일어났다. 공(公)도 임기가 끝나 조정으로 돌아가자 바로 형조참의(刑曹參議) 겸(兼) 승문원(承文院) 부제조(副提調)에 임명되었다. 겨울에 명(明) 나라에 보낼 사신(使臣)인 부경사(赴京使)에 임명되었으나 황달병이 심하여 가지는 못했다.
갑자(甲子,1624) 년 봄에 역도(逆徒)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임금께서 남쪽으로 피난한다는 연락이 왔다. 공(公)은 황달병이 매우 심하여 차사(差使)를 따라잡지 못하고 나중에야 임금이 피난한 행궁(行宮)에 도착하였다. 이 때문에 사간원(司諫院)의 탄핵을 받게 되었으나 사람들이 모두 실제 병 때문이었음을 알았으며 얼마 되지 않아 좌승지(左承旨)에 제수되었다. 대간(臺諫) 한 사람이 개인적 감정을 가지고 다시 늦게 도착한 것을 문제 삼아, 다른 사람으로 교체할 것을 주장하며 이조(吏曹)를 탄핵하였다. 이 때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서면 진술서의 변론(辨論)이 매우 상세하다. 그 대강을 보면 이렇다.
“당초 임금님께서 서울을 버리고 피난하실 때, 조찬한(趙纘韓)은 병중에 강을 건너 빈사지경에도 달려와 공주(公州)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동안 조금 좋아졌다가 그 후 합병증이 앓고 있던 황달을 악화시켜 그 증세가 눈에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임금님을 수행(隨行)했던 모든 신하들이 보고 그 진상을 알았습니다. 실상은 참으로 용서받을 만 했습니다. 한 번 탄핵 받았다 하여 어찌 장기간 동안 무관(無官)으로 있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한 때의 대간(臺諫)인 자가 스스로 ‘공론(公論)은 반드시 자신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며 이조(吏曹) 병조(兵曹)로 하여금 매사에 어김이 없도록 하려한다면, 그 폐단을 어찌 말로 다 지적하겠습니까?”
그 때 사헌부(司憲府)의 대사헌(大司憲) 장황(張皇)은 이조(吏曹) 징계(徵戒)를 꺼리고 있었다. 그는 공(公)이 이미 배척 받은 허물이 있는데다 사간원(司諫院)의 탄핵을 받은 데 대하여‘아끼고 비호하고 싶지만 어떻게 사정(私情)을 용인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한다. 광해군(光海君)이 재위(在位)하고 있을 때 공(公)은 고위직(高位職)에 나가지 못했다. 항상 외직(外職)을 맡았고 반정(反正) 후에 조정으로 돌아와서는 잠시 승지(承旨)를 맡은 것이 고작이었다. 당시에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은둔(隱遁)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조정 내외에서 벼슬한 뒤 승지(承旨)가 되어 나중에 고위직에 오른 자가 한 둘이 아니었는데, 인사 고과(考課)에서 오직 공(公)에게만 과실이 있다고 말한 것은 소인배들의 거짓 비방만을 들은 때문이었다. 한 때 공론(公論)이 그에게 원한을 갖게 하였으나 곧 바로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되었고 다시 승문원(承文院) 제조(提調)를 겸직하게 되었다.
을축(乙丑,1625) 년에 회양(淮陽) 부사(府使)에 제수되었다. 병인(丙寅,1626) 년에 명나라 사신 강광(姜廣)이라는 자가 황제의 조서(詔書)를 가지고 왔는데, 조정에서는 공(公)이 명나라에 재주로 소문났다 하여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접반사(接伴使)를 보좌하도록 하였다. 명나라 사신과 시문(詩文)을 지어 주거니 받거니 하였는데 공(公)의 작품이 제일 뛰어났다. 이 때 공(公)의 형 위한(緯韓)이 강원도 양양(襄陽) 군수(郡守)로 있었는데 역시 시문(詩文)을 잘 짓는다는 이유로 부름을 받았다. 형제의 뛰어난 시문에 모두들 일시에 칭찬하였다. 정묘(丁卯,1627) 년에 승지(承旨)에 임명 되었으나 귀가 잘 들리지 않아 교체해 줄 것을 상소하여 무진(戊辰,1628) 년에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제수되었다. 기사(己巳,1629) 년에는 선산(善山) 부사(府使)에 임명되었다.
신미(辛未,1631) 년에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 해 9월 갑자기 얼굴에 종기가 나, 본채 방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60세였다. 10월에 새로 점을 쳐 교하(交河) 맹곡(孟谷)의 묘향(卯向)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公)의 자질과 품성은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식견과 도량은 크고도 깊었다. 충성심은 깊고 굳셌으며 공손하고 위엄이 있었지만 관대하였다. 평소에는 반드시 일찍 일어났으며 씻은 뒤 용의를 단정히 하고 앉아 있으면, 의연(毅然)하여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자제를 엄격하게 교육하였으며 가법(家法)이 있어 가정에서의 의젓함이 조정에서와 같았다. 계속되는 벼슬살이 때문에 부모를 잘 모시지 못함을 평생의 고통으로 여겼으며 좋은 음식을 대하게 되면 문득 비통해 하였다. 누이 하나가 옹색하여 모시게 되었는데 부모처럼 하였으며 늙도록 소홀히 하지 않았다. 천성이 악(惡)을 미워하였으나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 여러 차례 외직을 맡았으나 청렴결백하게 봉직하였다. 항상 백성의 처지에 서서 민심을 얻었으며, 엄격하여 백성들이 두려워 꺼리게 되는 관리가 되지 말라고 수하를 단속하여, 전임지(前臨地) 백성들이 항상 그를 그리워하였다. 내직(內職)으로 다시 돌아오는 날, 그의 짐 꾸러미는 텅 비어 허전하였으며 집안에 따로 비축할 재물이 없었다. 비록 공(公)이 학문을 연구하는 일에는 불규칙하였지만 자신을 닦고 처신함은 옛 성인들의 행적에 이처럼 부합하였다.
공(公)의 저작(著作)은 그의 천재성으로부터 나왔다. 그의 웅대(雄大)한 시문(詩文)들은 넓은 바다와 같이 거침이 없었다. 한대(漢代)의 양웅(揚雄)과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진수(眞髓)를 터득해, 문장 격조(格調)의 구사(驅使)가 맑고 건강하였으며 문사(文辭)가 풍부하고 아름다워, 당대(唐代)의 시인(詩人) 두보(杜甫)와 문장가(文章家) 한유(韓愈)를 능가하였다. 또한 문체(文體)의 한 가지인 변려(騈儷)에 더욱 뛰어났다. 세상 사람들은 당 나라의 뛰어난 작가 네 사람(李伯, 杜甫, 韓愈, 柳宗元)을 공(公)과 동시대 작가인 석주(石洲) 권필(權韠),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에 비견하였는데 모두 공(公)을 으뜸으로 여겼다. 소은(素隱) 신천익(愼天翊) 형제와 영의정(領議政)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천파(天坡) 오숙(吳䎘) 등이 모두 공(公)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여 뜻을 이루었다. 공(公)은 일찍이 스스로 호(號)를 현주(玄洲)라 하였다. 저작(著作)으로 현주집(玄洲集)이 있으며 그 중 몇 편이 항간에 유행하였다.
만년에는 서예를 좋아하여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를 모범으로 삼아 해서(楷書)와 초서(草書)에서는 그 정수(精髓)를 모두 익혀, 작은 종이 조각에 쓴 편지나 잠깐 휘갈긴 글씨 몇 자라도 꼭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 사람들은 감추어 보관해 두고 보배로 여겼다. 현명하고 재주 많은 분이 어찌 불의(不宜)를 저질렀겠는가마는 광해군(光海君)의 암울한 치세기에 처하여 세리(世利)를 좇지 않아 관위(官位)는 점점 낮아졌다. 계해(癸亥) 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는 또 아첨하고 시기하는 소인배들의 배척을 받아 끝내 그 재능을 펼쳐 보이지 못했으니 이는 시운(時運)의 탓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공(公)에 대하여 안다는 것이 고작 그 문장의 아름다움과 정사(政事)를 돌볼 줄 아는 재주가 있었다는 것뿐인데, 가정에서의 규범과 일상에서의 예법, 세리(勢利)로부터의 초연함, 청렴함과 자기 연마를 보지 못했다면 진정 그를 알았다고 말 할 수 없다.
공(公)은 두 번 장가들었다. 전 부인 고흥(高興)유씨(柳氏)는 지평(持平)을 역임했던 은(溵)의 딸인데 공(公)에게 시집 온지 5년 만에 정유재란(丁酉再亂,1597)을 만났다. 적이 공격해 온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졸지에 적이 들이닥치자 허리에 차고 있던 칼로 스스로 자기 목을 쳐 죽었다. 딸 하나를 남기고 젊은 나이에 먼저 죽으니 나주(羅州) 초곡(草谷)의 (?)방향의 둔덕에 묻었다. 후 부인 행주(幸州) 기씨(奇氏)는 덕양군(德陽君)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선생의 손녀이며 군기시(軍器寺) 첨정(僉正)을 역임했던 효증(孝曾)의 딸이다. 지극한 덕행이 있어 종친들이 그녀를 따라 배웠으며 공(公)과 함께한 30년 동안 부군(夫君) 공경을 먼저 생각하여 아내의 도리를 어긴 일이 없었다. 만력(萬曆) 기묘(己卯,1579) 년 정월에 태어나 경자(更子,1660)년 9월 10일 돌아가시니 향년 82세였다. 공(公)의 왼쪽에 함께 묻었다. 아들 둘과 딸 둘을 낳았다. 장남이 용궁(龍宮) 현감(縣監) 휴(休)이며 둘째가 홍문관(弘文館) 교리(敎理) 비(備)이다. 큰 딸은 지평(砥平) 현감(縣監) 이상필(李尙弼)에게 시집갔으며 둘째 딸은 호조참판(戶曹參判) 홍처대(洪處大)와 결혼하였다.
큰 아들 휴(休)는 아들 둘과 딸 셋을 두었는데 장남이 감역(監役) 두상(斗祥)이며 둘째가 진사(進士) 규상(奎祥)이다. 딸들은 각각 감역(監役) 박순(朴錞), 사인(士人) 이환(李桓)과 윤세징(尹世徵)에게 시집갔다. 둘째 아들 비(備) 는 아들 둘과 딸 여섯을 두었다. 장남이 인상(麟祥)이며 둘째가 구상(龜祥)이다. 딸들은 각각 생원(生員) 이형직(李亨稷), 유학(幼學) 박겸(朴縑), 생원(生員) 한제유(韓濟愈), 유학(幼學) 이계(李啓)와 이저징(李著徵)에게 시집보냈다. 나머지 딸들은 어리다. 지평(砥平) 현감(縣監) 이상필(李尙弼)은 아들 둘과 딸 넷을 두었다. 아들은 임한(任漢) 의한(儀漢)이며 딸들은 각각 사인(士人) 권협(權恊)과 권민(權愍), 참봉(參奉) 윤혁(尹焃), 유학(幼學) 박두왕(朴斗旺)에게 시집보냈다. 호조참판(戶曹參判) 홍처대(洪處大)는 아들 다섯과 딸 둘을 두었다. 아들은 동몽교관(童蒙敎官) 수용(受容)과 수관(受寬) 수익(受益) 수완(受完) 수인(受寅)이다. 딸들은 주부(主簿) 이관주(李觀周) 사인(士人) 윤보(尹普)에게 시집보냈다. 공(公)의 내외 증손과 현손은 남녀 모두 30여명이다.
사위 전(前) 병조참의(兵曹參議) 지제교(紙製敎) 홍처대(洪處大)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