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야나기무네요시의 서예이야기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서예이야기
이두희 (경기대 서예과 강사)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는 일본 공예운동의 아버지로 불리어지고 동양의 공예미론을 정립한 종교철학자이자 민예운동가이다.
한국미학에서 ‘한국의 미란 무엇인가’라고 얘기할 때 필수적으로 거론되는 인물이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이다. 그는 1912년(24세)에 박람회에서 우연히 조선의 도자기를 처음 본 후 조선의 미에 깊이 빠져 평생을 조선예술을 연구한다. 1916년(28세)에 처음 조선여행을 하면서 해인사, 경주, 불국사, 석굴암 등지를 답사하여 큰 감명을 받아 그 후 20여 차례에 걸쳐 조선을 방문하면서 우리 민족이 깨닫지 못한 미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야나기는 3.1운동이 일어날 때 수많은 조선인이 학살되고 문화가 파괴되는 것에 분노하였다. 조선의 역사가 강자에게 억압당하는 안타까움을 글로 나타낸 「조선인을 생각한다」라는 번역문과 「조선의 친구에게 보내는 글」이 1920년 동아일보에 연재되면서 큰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조선의 예술과 공예를 보존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가며 수집한 조선의 민예품을 모아 1924년 경복궁 집경당에 ‘조선민족미술관’을 개관하기에 이른다.
그는 특히 ‘민예(民藝)’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었으며, 민중의 생활과 예술의 아름다움을 중개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하는 것이 ‘공예’이다. 그리고 “민중의 삶이 담긴 공예문화가 성숙하는 때가 곧 아름다움의 나라가 오는 때이다.”라고 역설하였다.
그는 「조선과 그 예술」, 「조선시대 도자기의 특질」, 「조선의 항아리」, 「조선의 찻잔」, 「조선의 목공예품」, 「조선의 석공」 등 조선의 예술과 공예에 대하여 많은 저서와 논고를 남겼다. 한국에서는 그의 많은 업적과 공로를 인정하여 1984년에 ‘보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여기에 소개하는 글은 『柳宗悦全集第十三巻』(筑摩書房, 1982년)에 나오는 「서도잡어(書道雑語)」를 번역하여 편집하였다. 민예운동의 창시자이며 동양에서 공예이론의 대가인 야나기 무네요시의 서예관을 조금이나마 접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번역을 하면서 야나기 무네요시 원고가 지니고 있는 문체의 어눌한 맛을 살려 전달하고자 조금 덜 매끄럽더라도, 의역을 하지 않고 직역하였음을 밝힌다.
내 글씨가 왜 서투른지 생각한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하지만 그런데도 충분하게 설명을 하지 못한다. 첫째로, 습자(習字)1)를 게을리 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좀더 수업을 쌓았으면 오늘과 같이 서투른 글씨를 쓰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아무래도 공부가 부족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으로 대답은 벌써 끝나는 것인가. 여러 가지 모르는 것이 나온다. 나는 이 길에 정진한 사람이나 지금 정진하고 있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과연 나보다 훨씬 더 능숙하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은 정말 아름다운 글씨를 쓰고 있을까. 결국은 감탄할 수 없다.
어느 날 아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습자 체본을 보고서, 내가 매우 싫어하는 글씨라서 놀랐다. 고작해야 안진경(顔眞卿)의 아류라고나 할 것이다. 어쨌든 저명한 서가(書家)가 쓴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습자의 선생님까지 될 수 있어도, 변변한 글씨는 쓸 수 없다. 지금보다 잘 쓸 수 있다고 하는 정도라면 별로 문제는 없다. 잘 쓸 수 있어도 아름답지 않으면 의미가 없지 않은가. 나는 의혹이 깊어진다.
중국에서는 습자에 아주 열심인 사람이 있었다. 왕희지(王羲之)의 7대 손자인 지영(智永)이라고 하는 유명한 사람이다. 그는 「난정서(蘭亭序)」를 소중하게 가지고 있던 사람이라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서예를 배워서, 붓털이 나빠지면 큰 죽바구니를 책상 옆에 놓아두고 필두(筆頭)를 거기에 버렸다. 일석(一石, 약 180리터)도 들어간다고 하는 이 바구니가 5개나 가득하게 되었다고 한다. 30년 동안 오로지 공부했다. 이리하여 지영의 「천자문(千字文)」은 유명하지만, 육조(六朝)나 한(漢)의 서(書)에 비해 뒤지지 아니한가. 나에게는 지영이 그렇게 대단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지영 정도에서는 아직 부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배우는 것은 배우지 않는 것보다 좋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배워도 반드시 좋은 글씨를 쓸 수 있다고는 보장할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인가.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
그런데 두 번째로 이렇게도 생각한다. 서예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행히 요즘은 다양한 서적이 있어서, 주대(周代)부터 당대(唐代)를 거쳐서 근대(近代)에 이르기까지, 3천년 가까운 세월에 동양인들이 어떤 글씨를 써 왔는지를 거뜬히 알 수 있다. 옛날이라면 육조(六朝)의 비(碑)를 하나 찾아내도 소동이었는데, 하물며 원탁본(原拓本)을 손에 넣을 수 있어서야……. 그것을 생각하면 현대는 고맙다. 『서도전집(書道全集)』이라도 사면 고금(古今)의 명필이 눈앞에 갖추어진다. 그리고 서예이론에 관한 여러 권의 명저(名著)가 언제라도 헌책방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류사추간(流沙墜簡)』2)은 성서(聖書) 같은 것이다. 나카무라 후세츠 서도미술관(中村不折書道美術館)3)은 흡사 서예의 천국 같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자주 보고, 어느 정도 서예의 역사에 대한 소양도 있고, 어엿한 서예에 관계된 논의를 세울 수 있을 때까지 되어도, 글씨를 잘 쓸 수 있을까. 거의 관계없는 것 같다. 나는 그것들 고금의 서예에 대해서, 지식이나 견해의 임금님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의 글씨가 신같이 뛰어난 솜씨인가 라고 말하면, 도저히 호감을 주지 못한다. 여기서, 지식으로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진다.
셋째로, ‘나에게는 천성이 없다’라고 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정리해버리려고도 생각했다. 제일 민첩한 해답이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간단하게 말할 수 있지 않다. 천성이 있는 사람도 변변한 글자를 쓰지 않은 것은 어찌 된 건가. 능숙한 글씨라면 얼마나 있지만, 그런 곳에 표준을 두지 않게 되면 문제는 어려워진다. 그리고 곤란한 것은 옛날 글씨, 예를 들어서 돈황장래(燉煌将来)의 목간(木簡) 등을 보면 적어도 모두가 모두 천재의 붓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아주 평범한 사람이 아주 평범히 조심 없게 썼다고 생각되는 것이 많다. 그렇지만 서(書)의 갖춤도 지니고 있어 훌륭한 것이다. 그 중에서는 서(書)의 극한이라고 생각되는 것까지 있다. 그렇다면 재능의 유무는 결정적인 자격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천재가 아니어도 아름다운 글씨를 쓸 수 있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귀찮은 문제이다. 배우지 않으면 서툴고, 배워도 아직 서투르다. 서예에 대해 모르는 것도 어리석지만 알아도 알았던 만큼 잘 쓸 수 없다. 없으면 곤란하지만, 재능이 있었다고 해도 또 곤란하다. 생각하는 대로 글씨를 내가 쓸 수 없는 것은 위에서 얘기한 세 가지의 원인에도 따르지만, 그렇다고 충분한 해답이 되지는 않는다. 무엇인가 다른 원인이 있어서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글씨를 못 쓰게 하는 것이다. 그 숨은 다른 원인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지금의 시대로는 누구라도 아름다운 글씨를 쓸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닌가. 적어도 그것이 매우 어려워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당연히 서(書)와 시대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 얼마 전에 명치시대(明治時代, 1868~1912)의 서(書)의 변천에 관한 서가(書家)의 추억이야기를 읽어 봤더니, 그곳에 나오는 모든 서가(書家)들이 명치(明治) 이전의 「어가류(御家流)」4)의 글씨를 공격하고 명치유신(明治維新)5) 이후 이른바 「당양서(唐様書)」(중국양식서예)가 흥성해서 「어가류」를 넘어뜨려 버린 그 공적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무래도 수긍이 가지 않는 곳이 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어가류」로 하면 곤란할지도 모른다. 더욱이 그것이 죽은 형태에 빠지고 싱싱하게 살아있는 곳이 없어지면 곤란하다. 하물며 명치유신(明治維新)의 개혁 같은 시기이다. 서(書)에서도 무엇인가 신선한 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 심리과정에 대해서는 별로 의심은 없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하다. 과연 「당양서」의 대가들은 「어가류」의 글씨보다 더 아름다운 글씨를 썼는가. 한층 더, 또 「당양서」로 풍미된 일반사람들이 명치 이전보다 더욱 좋은 글씨를 쓰게 되었는가. 슬픈 일이지만 사실은 정반대였다고 생각된다. 「어가류」는 틀에 박힌 글씨지만 그 중에서 어떤 것은 정말 아름다운 글씨도 있다. 명치시대가 되고 나서 글씨에 「어가류」에 비교할 수 있는 아름다운 것이 있는지. 하물며 일반사람의 글씨라면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생각된다. 명치시대가 되어서 서풍이 바뀌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역사적인 추이일 뿐이며, 개선이라고는 단언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제일 먼저 다음의 비극이 눈에 뜨인다.
만일 한 걸음 양보해서 명치시대 서가(書家)의 글씨가 훌륭한 것이라고 해도 서가 이외의 일반 사람들의 글씨는 어떨까. 폭락에 떨어졌던 것이다. 즉, 능숙한 사람과 서투른 사람과의 차이가 매우 격렬해졌던 것이다. 그런데 돌이켜 江戶幕府(에도막부) 말기의 「어가류」의 글씨를 보자. 어느것도 놀라울 정도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관료가 쓰는 제찰(制札)부터 하위자가 쓰는 납부서(納付書)까지 꽤 좋은 글씨를 쓰고 있다. 그 차이가 매우 적다. 아니, 어떨 때는 상가에서도 멋지고 훌륭한 것을 만난다. 즉, 모두 평균적으로 능숙하다고 하는 이 현상은 실로 놀라운 일인 것이다. 지금의 시대가 도저히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보면 꿈과 같은 일이다.
서양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서양에서 일반 서민까지가 글씨를 잘 쓴 것은 대체로 17세기 무렵까지이다. 18세기 이후 점점 서체(書體)가 무너지고, 현재는 일본과 큰 차이가 없다. 능숙한 사람과 서투른 사람과의 차이가 심하다. 아니, 서투른 사람 쪽이 몇 배 많은지 알지도 못한다. 아니, 사실 훌륭한 서가는 정말로 찾기가 힘들다.
그러나 한층 더 거슬러 올라가서 중세기까지 가면 서투른 글씨가 오히려 아름답다고 하는 기적에까지 다다른다. 동양에서도 한(漢)이나 육조(六朝)는 그러한 무서운 시대였다.
그렇다면 나도 시대의 희생자인 것이다. 아니, 나 같은 글씨 잘 못 쓰는 사람을 예를 들면 진리가 약해진다. 나보다 훨씬 능숙한 서가라고 해도 실은 시대의 희생자에 불과하다. 진짜로 감탄하는 글씨를 그들이 썼을 경우가 과연 있었을까. 나카무라 후세츠(不折氏)6)가 소장하는 고옹(古甕, 지금은 중요미술품에 등록되어 있다)에 기록된 후한(後漢)의 「영수이년(永壽二年)」 등의 문자를 보면 머리를 들 수 없다. 어느 명가가 쓴 것은 아니기 때문에 반대로 시대의 은혜를 입은 것이 밝혀진다. 현대의 대가(大家)가 되지 않은, 나와 같은 잘 못 쓴 사람이라도 만약 같이 후한에 태어났으면 훌륭한 책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글씨가 좋다, 나쁘다는 얼마나 시대에 관계된 것인가가 밝혀지지 아니하였는가. 시대의 힘 앞에서는 연습도 지식도 천성도 작은 요소에 불과하다.
혹은 이렇게 새롭게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다. 지금은 시대가 나쁘니깐 더욱더 습자를 익히고 지식을 닦고 천성을 소중히 해서 서예의 융성을 꾀어야 한다고. 이것은 서예의 도덕으로서 당연한 일이고, 확실히 우리의 의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 것을 게을리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갖고 있는 천명은 꽤 힘이 큰 것이다.
더욱 병의 근원에 거슬러 올라가서, 지금은 서예가 시대의 희생이 되어 있다는 사정을 없애는 것이 한층 더 근본책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사회조직에 무엇인가 결함이 있기 때문에 서예를 위해서 그것을 개선하는 것이 더 본질적인 조치가 아닌가. 뿌리의 병을 고치지 않고 잎이나 꽃을 잘 기르려고 해도 무리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문제를 더 한 걸음 거슬러 올라가서 무엇이 시대의 병인가, 어떤 사회조직에 결함이 있는 것인가 그것을 밝혀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의 결론은 이러하다. 일반적으로 글씨를 못 쓰게 된 것은 개인주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펜으로 글씨를 쓰기 때문이나 학생시절에 강의를 필기하기 때문에 글씨가 엉망으로 되었다거나 타이프라이터를 쓰기 때문에 글씨를 쓸 기회가 줄어졌다거나 여러 가지 서투르게 된 원인을 셀 수도 있지만, 그것들은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다. 나에게는 그것보다 개인주의의 풍조가 사회를 지배했기 때문에 서(書)가 타락해 왔다고 말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에는 두 가지 방향에서 설명할 수 있겠다. 첫째로, 훌륭한 글씨를 낳았던 시대를 생각해 본다. 혹은 전체의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모두 글씨를 잘 썼을 시대를 생각한다. 더 과격하게 말하면, 재능이 없는 서투른 무학자에게 아름답고 절묘한 글씨를 쓸 수 있었던 시대를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그러한 시대는 개인주의였을 경우가 없다. 아마 그 당시의 독실한 종교심이 사회가 개인주의에 빠지는 것을 구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개인보다 공존의 이념이 더 많이 사회에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훌륭한 서예의 시대와 훌륭한 종교의 시대가 일치하고 있다. 동양에서는 한말(漢末)부터 육조(六朝)에 들어서, 서양에서는 중세기가 가장 순수한 신앙 시대였다. 그렇게 해서 그러한 시기에 있어 인류는 가장 훌륭한 서(書)를 낳았다. 어느 기성 종파에 소속하는 것을 권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사회조직에 무엇인가 종교 또는 종교에 대신하는 정신적인 힘이 작용해서, 사회를 협동체로 묶지 않는 한, ‘미(美)’는 번영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개인이 서(書)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서(書)를 지킨다고 하는 단계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서(書)의 전통은 이런 때에 태어난다. 지금까지의 최상의 서(書)는 모두 전통을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것들은 모두 비개인적인 요소로 태어나고 있다. 어쨌든 타력적(他力的)으로 구해져 오는 서(書)가 만연되지 않으면, 서예의 왕국은 실현되지 않는다. 즉 시시한 인간들이 훌륭하게 쓸 수 있게 될 때까지 사회를 높이지 않으면 서(書)는 해결 못 한다. 그 「永壽二年」 글씨는 ‘그렇다’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둘째로는 왜 개인주의가 형편이 나쁜 것인가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개인주의라고 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중요시하는 사조이기 때문에 근대에 갈채를 받았다. 전통주의의 폐해에 대한 반동으로 역사적 발전의 한 과정으로서 보면 존재 이유가 충분히 있고, 이것을 위해 개발된 문화의 일면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주의로 인류가 어떤 경험을 겪었는가. 개인주의라고 하는 것은 개성의 존중이라서 개성 즉, 천재(天才)에게의 숭배를 의미한다. 영웅주의라고 말을 바꾸어도 된다. 연극이나 소설을 보면 남자 주인공이 있다(혹은 여주인공이 있다). 오페라를 보러 가면 반드시 프리마 돈나(prima donna)가 있어서 노래한다.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은, 지금은 스타를 보러 가는 의미마저 있다. 영웅을 두지 않으면 인기가 없다. 이 영웅 숭배는 인간적인 자연의 정(情)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근대에서는 그 뒷면에 비극이 많다. 너무나 많다. 두 개의 폐해가 눈에 들어온다.
하나는 개인주의의 사회에 있으면 자아에게의 의식이 강해진다. 신앙시대에서는 이것을 악행이라고 보고 수양으로 충분히 억제했지만 근대에는 그 억제가 없다. 자신이 대단해지자.유명해지자. 금을 빼앗자. 사람을 놀라게 하자. 참신한 일을 해 보이자……. 근대에서는 그 억제가 없다. 이런 욕심이 모여 온다. 글씨나 서예에 대해서도 같다. 한 번 잘 쓰자. 진부한 글씨는 쓰지 말자. 신기(新奇)한 것을 낳자. 개성을 내 주자. 이런 욕심이 달라붙어온다. 말하자면 사기(邪気)가 많아진다. 이렇게 되면 요령 있게 능숙한 글씨는 많아지지만, 이것이 서예를 순수하게 하지 않는다. 능숙한 사람이 상당히 있어도, 실로 좋은 글씨가 태어나지 않는 것은 이것 때문이 아닌가. 그러니까 특별하게 재능이 있는 천재라도, 자아(自我)를 위해서 흠이 생겨 버리는 것이다. 모든 방향으로 개인주의가 되어 버린 현대에서는, 자칫 서예를 불순한 것으로 바꿔 버린다. 의식적으로 쓴 글씨에는 고민이 많다. 나는 여행을 많이 하는데 여관이라고 하는 여관 모두가 명사(名師)의 쓴 글씨를 액자에 넣고 건다. 매번 보는 것도 지겨워 죽는다. 쓰는 편도 촐랑거린다. 창피한 일인데 깨닫지 못하는 것인가. 터무니없이 일필(一筆)을 부탁하는 일본인의 습관도 마음에 안 든다.
다른 하나의 비극은 천재주의는 천재가 아닌 대중의 존재를 예상한다. 스타 조직은 스타가 아닌 것을 그에 희생시킨다. 재능 있는 인간의 소수에 대해서 어리석은 인간의 다수가 대치한다. 일부에 불과한 사람은 글씨 잘 쓰게 되어도, 대다수의 사람은 변변치 않아진다. 이것이 당연한 천명(天命)이다. 말하자면 서예가 사회에 지지를 받지 않고, 소수의 사람들이 사유 하는 것으로 바뀌어 간다. 그러니까 아까도 말한 대로, 글씨에 상하의 차이가 격렬해져 버린다. 아니, 무수한 악필로 세상이 충족시키는 지경에 빠져 버린다. 이제 벌써 시대가 서예를 지지할 수 없게 된다. 재능이 없는 사람까지 아름다운 글씨를 쓸 수 있었다고 하는 사회는 꿈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개혁하지 않는다면 서예의 진전을 존경하는 것은 무리이지 않을까. 하물며 이런 사회에서는 천재조차 변변한 책을 쓸 수 없는 것이다. 좋은 글씨를 낳을 수 있으면 오히려 기적이다. 나쁜 서예를 낳지 않았던 시대의 기적과 대립한다. 서예의 문제는 서예만의 문제가 아니다.
필자는 중국미술학원 서법과(석사), 일본나라교육대학 대학원 서도전공(석사)을 졸업하였으며, 경기대 서예과 강사, 한국민족서예인협회 사무처장이다. 한국서예가협회, 한국전각학회,한국서예학회, 한국서예치료학회 회원이다.
* 이 글은 올 초 서예문인화에 두번에 걸쳐 연재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