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이야기들

[스크랩] 홍인의 마음에 비춰 본 한국의 서예

보해성산 2009. 3. 17.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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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다시읽기 1    

                                        홍인의 마음에 비춰 본 한국의 서예

                          

            


                                                              김 수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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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 정태수 선생으로부터 「서예문화」에 연재할 글을 부탁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생각을 깊게 가다듬어 온축(縕蓄) 한 것이 충분치 못한 상태에서 글을 지속적으로 쓰게된다는 것이 마음에 부담으로 남아 선뜻 이를 실행하지 못하다가 이번 여름방학에 갑자기 용단(勇斷)을 내리게 되었다. 더 이상 우리의 서예가 현대가 요구하는 정보화의 흐름에서 밀려나서는 안되겠다는 것을 깊이 절감했기 때문이다. 정보시대가 말하는 ‘정보’에서는 뭔가를 한 수 가르치겠다는 교훈이나 가르침이 아닌 “정보를 주고받는”, 소통(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 상호간에 원만한 소통이 이뤄지려면 먼저 자기를 개방하는 진솔하고 겸허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논자는 이런 취지에서 아직 완결된 생각은 아니지만 서예발전을 위해 건전한 담론이 형성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내용이라면 가급적 자신의 생각을 숨기지 않고 생생하게 드러내려고 한다. 그러나 앞으로 여기에서 다루게될 내용들은 오랫동안 논자가 연구한 성과물이라기 보다는 아직 해결되지 않아 고민중인 문제들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여, 이러한 내용은 앞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진지한 토론이 필요한 것들임을 미리 밝혀둔다. 

 

  본고에서 다룰 논제는 서예사 중심의 논의를 넘어서 서예문화를 포괄적으로 인식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론들을 될 수 있으면 다양하게 수용하려고 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한중서예사 뿐만아니라 그동안 심도있게 논의된 바 없는 ‘문자발생 이전의 미의식․서양의 문자예술․폰트서체에 대한 이해․서양사람들의 동아시아 서예에 대한 인식․서예치료’ 등을 다루면서 21세기의 한국서예가 나아갈 방향에 대하여 새로운 방향제시를 모색하려고 한다. 이러한 주제들을 두고 먼저 어떤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가에 대해 한동안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가, 시급한 것은 무엇보다 “서단의 정화”가 아닐까라는 마음에서 가장 먼저 이와 관련한 글을 쓰기로 정했다.

 

  이에 대하여서 논자는 이미 지면이나 강단에서 목이 쉴 정도로 열변을 토해 왔다. 그러나 분명히 문제가 있어 답답하기는 한데 이를 어떻게 해결하여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실마리가 전혀 보이지 않는 막막함에서 오는 흥분을 토로하는데 그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런 비분강개(悲憤慷慨) 식의 태도는 지양하려고 한다. 아무리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건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감정이 순화되지 않은 채 전달되는 주장은 화기(火氣)를 불러들여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했기 때문이다. 불난 데 부채질하는 식의 언사가 아닌, 우리의 현실을 조용하게 되돌아보며 그러면서도 요즘 유행하는 말로 상생하는 화법(話法)은 없을까? 논자는 명리(名利)에 어두워 판단을 그르치는 이 시대의 사람들, 특히 끈끈한 정(情)으로 인하여 보다 큰 것을 잃어버리고 사는 많은 서예인들에게 큰 깨침을 줄 수 있는 해법의 실마리를 불교의 경전인『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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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는 선종의 법맥을 이은 제6대 조사 혜능(惠能, 唐, 638~713)의 수행과정이 자세하게 나온다. 그 중에서도 특히 논자의 시선을 끈 부분은 5조인 홍인(弘忍)으로부터 6조 혜능(惠能)으로 이어진 의발(衣鉢)과 법통의 상속이다.

 

  혜능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며 땔나무를 해 장터에 내다 팔면서 어렵게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여관에서 나무 배달한 돈을 받고 대문을 나서려하는데, 어떤 사람이 『금강경』을 암송하는 소리를 듣는다. 이 순간 마음이 열린 혜능은 그 경전에 대해 자세히 물어, 당시 황매산(黃梅山)에서 설법을 하고 있던 홍인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혜능은 바로 그 순간 자기가 갈 길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곧 노모에게 작별인사를 드린 뒤 삼십여 일에 걸린 여행 끝에 황매산의 홍인대사와 대면하게 된다.

 

  혜능을 본 홍인대사가 “자네는 어디 사는 사람이고, 무엇을 구하러 왔는가”라고 묻자, 혜능은 “저는 영남(嶺南)의 신주(新州) 사람이며, 멀리서 스님을 뵙고자 찾아 왔으며, 오직 부처가 되고 싶을 뿐이며 다른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고 하였다. 대사는 이 말을 듣고 “자네는 영남사람이며, 변방에 사는 미개인․갈료(猲獠)나 다름없는데, 어찌 감히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하고 하자 혜능은 “사람에게는 남북의 구별이 있을지라도 불성에는 본디 남북이 없습니다. 비록 갈료라는 신분이 스님과 다를지언정, 불성에서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이 대답을 듣고 홍인대사는 직관적으로 혜능의 사람됨(材木)을 알아본다.

 

  혜능이 황매산에 도착한지 팔 개월이 지난 어느 날, 홍인대사는 모든 제자들을 불러모으고 테스트를 통해서 가사와 법통을 물려줄 제6대 조사를 선발하겠다고 선언한다. 선발방법은 스님 각자가 깨달은 진리를 노래로 표현한 게송(偈頌)을 짓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  승려들은 한결같이 “우리가 게송을 지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결국은 상좌 신수(神秀)가 그가 상속을 받을 것이 뻔하다. 우리들이 게송을 지어본들 괜한 정력만 낭비할 따름이지.” 라고 말했고, 신수 또한 당연히 자기가 의발과 법통을 이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수는 게송을 지어 홍인대사를 뵙고 그것을 제출하려고 하였으나 어쩐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흘동안 13번이나 게송을 드릴 기회가 있었는데도 드리질 못한 신수는 고심 끝에 밤 12시가 넘어 준비된 게송을 남쪽 복도 벽에 몰래 붙여 놓고 대사께서 그곳을 지나가다가 그것을 발견하여 읽어주기를 기대하며 마음이 불안해 잠을 이루지도 못했다.

  신수가 제출한 게송은 아래와 같다.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명경대와 같으니, 때때로 부지런히 닦아 티끌이 붙지 못하도록 하리라.”(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莫使染塵埃.)


  게송을 본 홍인대사는 다음날 여러 사람들에게 “이 게송에 의거하여 수행하는 자는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짐을 면할 수 있을 것이며, 이에 따라 수행한다면 크게 이로울 것이다.” 라고 하면서 게송 앞에 향을 피워 올리게 했다. 여러 승려들은 이 말을 들은 후 모두 이 게송을 암송하고 찬미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 홍인대사의 본심은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에 대사는 깊은 밤중에 신수를 자기 방으로 불러 그가 아직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였음을 솔직하게 알려주고 다시금 게송을 짓도록 명한다. 그런데 신수는 며칠이 지났지만 끝내 게송을 짓지 못하고 만다.   

 

  이런 일이 있은 이틀 후, 천진한 한 동승(童僧)이 혜능이 일하고 있던 방앗간 앞을 지나며 신수의 게송을 읊조렸다. 혜능은 동승에게 지금 읊조린 것이 무슨 게송인지를 물어서, 오조 홍인대사가 여러 승려들에게 게송을 지어서 올리라 했는데, 대사가 신수가 지은 게송을 찬미했더라 하는 말을 전해듣는다. 이 말을 들은 혜능은 “나 또한 게송이 있는데, 글 좀 써주시오”라고 하니, 동승은 혜능이 글자를 모르는 문맹자임을 의식하고는 “당신도 게송을 짓겠다고요, 정말로 별꼴을 다 보네”라고 하며 비웃는다. 그러자 혜능은 동승에게 “부처를 배우고 싶은데, 초학이라 하여 무시하지 마시오. 하하인(下下人)도 상상지(上上智)가 있으며, 상상인(上上人)도 지혜가 없을 수 있으니, 사람을 무시하면 곧 무량무변(無量無邊)의 죄가 된다오”라고 했다. 순간 동승은 깜짝 놀라 “당신의 게송을 한번 불러보시오. 내가 대신 써 줄 테니 나중에 심법을 얻으면, 반드시 먼저 나를 잊지말고 인도해주세요”라고 하였다.

 

  이때 혜능이 지은 게송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고 명경 또한 대가 아니다. 본래 아무 것도 없는데, 티끌 있는 곳이 어디인가.” (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


  이 게송이 벽에 걸리자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여 “신기하구나! 용모를 보고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되겠구나. 언제부터 그가 육신보살이 되었는가”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사람들이 혜능을 찬미하고 경탄하며 칭송하는 것을 본 홍인대사는, 혹시 대중들의 마음에 질투심이 생겨 은근히 혜능을 해할까 걱정하는 깊은 마음에서, 신발을 벗어 벽에 있는 송사를 지워버리면서 “또한 견성을 하지 못했구나”라 말하니 이 말을 들은 여러 사람들은 모두 대사의 말이 옳다고 여기게 되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딴 곳으로 돌려진 다음날 홍인대사는 몰래 혜능을 찾아가 달마조사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심법과 의발을 수여하므로서 오조(五祖)로부터 육조(六祖)로의 법통을 상속했다. 법통상속 후에는 혹시 앞으로 혜능을 시기․질투할 사람이 그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남쪽으로 피난을 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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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너무나 유명한 일화이므로 불교인은 물론 일반인들 사이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고사를 읽거나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이미 주인공이 6조인 혜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신수나 심지어 홍인대사 같은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수는 홍인대사를 보좌하던 상좌(上座)로서 500명의 스님을 영도하는 막강한 실력자였고 불교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은 물론, 본래 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유교와 불교를 두루 섭렵한 수재였다. 그는 50살 때 5조 홍인대사를 찾아가 6년 동안 수행을 하였으니 홍인과 신수와는 각별한 사제지간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신수에게 법통을 상속하지 않고,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인 혜능을 택해 법맥을 이을 후계자로 선택한 홍인대사는 세속의 눈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하므로서 그는 두 사람의 천재를 모두 살려낸 위대한 인물이다. 어느 날 논자는 이렇게 주인공 혜능의 뒤에 가리워진 숨은 그림으로 주인공보다도 더 커다랗게 버티고 서있는 홍인대사를 발견하였다.  


  조사의 상징인 의발을 혜능에게 물려주어 남쪽으로 피신시킨 뒤에, 다시 황매산으로 들어가 신수와 그 제자들의 얼굴을 대해야 했던 홍인대사의 심경은 어떠하였을까? 이미 혜능에게 의발을 넘겨준 그에게는 이제 조사를 상징할만한 물건조차 없다. 그런 상태에서 그는 조사에 선발되지 못하여 실의에 빠져있을지도 모를 신수상좌 및 많은 제자들과 얼굴을 맞대고 평생을 살아야 했다. 물론 홍인대사로서는 그러한 눈치를 감당할 정도의 힘과 경지에 있었겠지만, 그 또한 인정(人情)을 가진 한 인간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의 행위는 그야말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을 몸소 실천한 것이 아닐 수 없다. 


  홍인대사의 위대함은 다른 무엇보다 두 사람의 천재를 모두 살려낸 데 있다고 본다. 그의 사심 없는 선택은 신수에게 한때 커다란 상처와 패배감을 주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로 인해 신수는 더욱 용맹정진하는 기회를 얻어 비록 홍인으로부터 6대 조사를 전승받는 일에는 실패하였으나, 나중에 북종선(北宗禪)의 창시조가 되었고, 100살이 넘도록 설법을 하는 영광을 누렸다.

 

  사욕 없이 인간을 대해 혜능과 신수라는 두 사람의 위인을 동시에 살린  홍인대사의 평등관(平等觀)은 한낱 과거에 있었던 이야기 거리에 그치지 않고 오늘의 서예계라는 현실을 비춰주는 거울이 될 수 있다. 이 거울은 오늘날 학연․지연․혈연에 얽매어 보다 큰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우리의 부끄러운 소아적(小我的)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의 서예계는 끈끈한 정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가? 예(藝)이기 이전에 도(道)와 법(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통상적으로 말하는 한국의 서예인들이여! 우리는 진리의 지팡이(法杖)를 들고 진리의 상속을 고민했던 외로운 홍인대사의 모습을 가끔 떠올려 보자.



글쓴이 김수천교수는 중국문화대학 예술연구소에서 석사학위, 대전대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원광대 서예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 저자이메일 주소 : cnlwjd@hanmail.net



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三道軒정태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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