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숲을 거닐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문학 에세이 -
■ 장영희
0 서강대 영문과졸, 뉴욕 주립대 영문학 박사, 컬럼비아대에서 번역학 공부
0 서강대 교수이자 번역가, 칼럼니스트, 중ㆍ고교 영어 교과서 집필자
0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생일, 축복 등의 에세이
0 2003년 아버지 장왕록 교수의 10주기 기념집 ‘그러나 사랑은 남는 것’ 편집
0 번역서로 종이시계, 살아있는 갈대, 톰소여의 모험, 슬픈 카페의 노래 등 20여 편
0 한국문학 번역상, 올해의 문학상 등
0 5세까지 누워 지낸 소아마비 1급 장애우, 평생 목발에 의지, 9년간의 긴 암투병, ‘09. 5. 9. 57세로 사망
■ “같이 놀래?”- 작가의 말
0 미국 TV 토크쇼 중 가장 인기 있고 영향력 있다는 ‘오프라 윈프리 쇼’에 서는 언젠가 집중적으로 마리아 슈라이버라는 아동문학가가 쓴 ≪ 티미는 왜 저래? What's Wrong with Timmy? ≫ 라는 책을 소개했다. 한 시간 에 걸쳐 예화를 들어가며 윈프리가 소개한 이 책은 케이트라는 여덟 살짜 리 소녀가 이웃에 새로 이사 온 소년이 혼자 공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보 고 “엄마, 쟤는 왜 저래?” 라는 질문을 하는 데서 시작한다. 다운증후군으 로 정신박약인 티미가 공놀이를 하는 모습이나 부정확한 발음으로 천천 히 말하는 품이 여느 아이와 달랐기 때문이다.
0 엄마는 케이트를 티미에게 데리고 가서 소개하고 티미도 ‘너와 하나도 다 를 게 없는 아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네가 산수 문제를 풀 때 어려워하 듯이 티미는 무엇인가 배우는 데 조금 더 시간이 걸릴 뿐이란다.” 엄마의 말을 이해한 케이트는 티미와 인사를 나누고 함께 농구를 하며 놀자고 제 안, 자연스럽게 다른 친구들도 가담해 함께 어울리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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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토크쇼 중에 윈프리는 탐 설리반이라는 시각장애인 사업가와의 인터뷰를 인용했다. 설리반은 절망과 자괴감에 빠졌던 자기의 인생을 바꿔 놓은 말 은 단 세 단어였다고 했다. 어렸을 때 혼자 놀고 있는 그에게 옆집 아이가 “같이 놀래? (Want to play?)” 라고 물었고, 그 말이야말로 자신도 다른 사람과 똑 같은 인간임을 인정해 주고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는 말이 었다고 했다.
이에 슈라이버는 “같이 놀래?”는 자기가 쓴 모든 작품의 주제로 볼 수 있다고 답했다. 모든 아이들이 서로 다름을 극복하고 함께 하나가 되어 ‘같이 놀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자신의 작품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라는 것이었다.
0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나는 비단 슈라이버뿐만 아니라 어쩌면 동서고금을 통해 씌어진 모든 위대한 문학작품들의 기본적 주제는 ‘같이 놀래?’ 인지 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형색색으로 다르게 생긴 수십억의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고 자리싸움하며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인간의 보편성을 찾아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궁극적으로 화합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가를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문학의 과업이기 때문이다
0 다른 사람의 슬픔과 고뇌를 이해하지 못 하는 사람, 그에게 동정을 느끼고 “같이 놀래?”라고 말하며 손을 뻗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문학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너와 내가 같고, 다른 사람 도 나와 똑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고뇌와 상처를 이해하는 능력을 기르는 일이다. 그리고 삶을 영위하기 위해 이러한 인간 이해는 필 수 조건이다.
■ 어느 봄날의 단상
0 수업을 마치고 책상위에 쌓인 우편물을 뜯어보니 미국 친구가 보내 준 라 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얇은 책자가 있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이름이었다. 이 세상이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작가 이름 중 가장 낭만적이고 아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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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이름. ‘말테의 수기’ ‘두이노의 비가’ 등 고독, 슬픔, 사랑, 죽음의 시를 쓰고 장미 가시에 찔려 죽은 시인. 중학교 때 열심히 외웠던 윤동주의 ‘ 별 헤는 밤’ 에 나오는 시인....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을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 름과. 프랑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 다.”
“때로는 가슴 안에 우울도 꽃이 될 수 있다네/ 때로는 가슴 안에 사랑도 죄가 될 수 있다네/ 오늘 내가 그대에게 보내는/ 흑장미 한 송이/ 전생에 뉘 가슴에 맺혔던 피망울인지” 라고 처절할 정도로 낭만적인 연가를 부른 시인. 그리고 이렇게 자지러질 듯 샛노란 개나리가 필 때면 불현듯 밀려 오는 향수처럼 내 어린 시절 어느 봄날과 함께 생각나는 이름이다.
0 릴케가 1903년부터 1908년까지 어느 시인 지망생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은 그의 사랑에 관한 정의 이다.
“ 우리는 어려운 것에 집착하여야 합니다. 자연의 모든 것들은 어려운 것 을 극복해야 자신의 고유함을 지닐 수 있습니다. 고독한 것은 어렵기 때문 에 좋은 것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어렵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아마도 내가 알기에 그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고 다른 모든 행위는 그 준비의 과정에 불과 합니다. 젊은이들은 모든 일에 초보자이기 때문에 아직 제대로 사랑할 줄을 모릅니다. 그러나 배워야 합니다. 모든 존재를 바쳐 외롭고 수줍고 두근대는 가슴으로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사 랑은 초기 단계에서는 다른 사람과의 합일, 조화가 아닙니다. 사랑은 우선 홀로 성숙해지고 나서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하 나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 병원에서 만난 어린 왕자
0 어느 날 대학병원 방사선 치료실 앞에 앉아 있을 때였다. 그때 치료를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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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위해 환자복을 입은 예닐곱 살 된 남자 아이가 엄마와 함께 내 쪽으로 왔다. 항암치료를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는 소뇌 암이고 유난히 흰 얼굴에 파리하게 깎은 머리가 안쓰러워 보였다.
아이는 내 옆 빈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한동안 내 목발을 번갈아 보더 니 물었다.
“아줌마 이 목발들을 짚어야 걸을 수 있어요?” “그렇다.”고 끄덕이자 아 이는 “그럼 어깨가 너무 아프겠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몇 년 전 프랑스에 다녀온 학생이 선물로 준 작은 어린왕자 플라스틱 인형 이 달린 내 열쇠고리를 한참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아줌마, 이 어린 왕자는 눈이 없어요.” 너무 낡아 눈이 지워졌기 때문이다. “아줌마가 다시 눈을 그려 줬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어린왕자 가 다시 볼 수 있잖아요.”
0 1943년 출간된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는 동화의 범주에 속하지만 내용상 어른에게 걸맞은 책이다.
- 어느 날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사 ‘나’는 이상한 복장의 어린아이를 만난다. 그 아이는 투정만 부리는 장미꽃을 별에 남겨두고 여행을 떠난 소 혹성의 왕자로 여섯 개의 별을 여행한다.
첫째 별 : 명령할 줄 밖에 모르는 왕 (남에게 군림 하려고만 하는 어른)
둘째 별 : 남들이 박수쳐주기만 기다리는 허영꾼
셋째 별 : 술 마시는 게 부끄러워 그걸 잊기 위해 술을 마시는 술꾼 (허무주 의에 빠진 어른)
넷째 별 : 우주 5억 개의 별이 자기별이라고 되풀이 세어보는 상인 (물질 만 능주의 어른)
다섯째 별 : 1분에 한 번씩 불을 켜고 끄는 점등인 ( 기계문명에 인간성을 상실한 어른)
여섯째 별 : 자기별도 탐사해 보지 못한 지리학자 (이론만 알고 행동이 결여 된 어른 )
- 을 만나고 지구에 도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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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어린 왕자는 우연히 아름다운 장미가 가득 피어 있는 정원을 보고 지금까 지 단 하나의 장미를 갖고도 부자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초라해져서 그만 풀밭에 엎드려 울고 만다. 너무 쓸쓸한 나머지 여우에게 친구가 되자고 제 안하자 여우는 아직 ‘길들여지지’ 않아서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작별 인사를 할 때. 여우는 선물로 비밀 하나를 가르쳐 준다.
“내 비밀이란 이런 거야. 제대로 보려면 마음으로 봐야 해.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거든.” 어린 왕자는 마음을 쏟아 ‘길들인’ 장미의 소중 함을 기억하고 다시 자기별로 돌아간다.
0 무조건 ‘보임’이 중요한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관심과 이기주의로 단단히 무장하고 살아가는 내게 자신의 고통보다는 남의 고통을 먼저 알 아 보던, 병원에서 만난 어린왕자(이름이 ‘호재’라고 했다)는 이 ‘비밀’을 다시 일깨워 주었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호재의 부탁을 잊지 않고 내 열쇠고리의 색 바랜 어 린 왕자 얼굴에 눈을 그려 넣었다.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잠자고 있을 어린 왕자가 깨어나 다시 ‘마음의 눈’ 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끔......
■ 사랑의 힘
0 때로는 선생이라는 내 직업이 두려울 때가 있다. 내가 별 생각 없이 한 말 이 젊은 학생들의 마음에 두고두고 남거나 어떤 때는 그들이 삶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지난 스승의 날 병희에게서 온 편지에는 “선생님 말씀에 힘입어 저는 교 사가 되었습니다. 인문관 앞에 앉아 있는 제게 선생님이 ‘졸업하면 뭐 하 니? 넌 좋은 선생님이 될 텐데’ 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전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라고 쓰고 있었다. 좋은 선생님 되기에 완벽한 조건을 갖추 고 있는 병희이지만, 난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 는다.
0 지난 주 청첩장을 들고 찾아 온 민우는 병약하다고 부모님이 반대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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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사귀었던 여자 친구와 결혼한다고 했다. “선생님이 말씀 하셨죠.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고. 사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 줄 겁니다.” 오래 전 영문학 개론 시간에 내가 브라우닝 의 시를 가르치면서 결론적으로 그렇게 말했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민우를 가르칠 때 내가 이런 브라우닝 부부의 사랑 이야기를 해 주었었나 보다. 사랑의 힘을 믿는 민우의 앞날에 행복과 축복만이 가득하 기를 절실히 소망하며 나는 결혼 축하 카드에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의 또 다른 시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구요?’ 를 적어 주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구요?
방법을 꼽아 볼게요. 내 영혼이 닿을 수 있는
깊이만큼, 넓이만큼, 그 높이만큼 당신을 사랑합니다.
■ 교통순경과 욕심꾸러기
0 아직 우리나라에서 신체장애에 대한 사회의식이 전혀 없던 70년대 초반, 내가 대학에 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ㆍ고등학교 에 진학하는 것도 너무나 힘들었으니 대학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다행히도 (아니 아이로니컬하게도)내 학교 성적은 좋았고, 나는 꼭 대학에 가고 싶 었다. 내가 고3이 되자 아버지(고 장왕록 박사)는 여러 대학을 찾아 다니 시며 입학시험을 보게 해 달라고 구걸하듯 사정하셨지만, 학교 측은 어차 피 합격해도 장애인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했다. 아버 지는 당시 서강대학교 영문과 과장이셨던 브루닉 신부님을 찾아가 제발 시험만이라도 보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셨다.
0 신부님은 너무나 의아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말씀하셨다.
“무슨 그런 이상한 질문이 있습니까? 시험을 머리로 보지 다리로 보나요. 장애인이라고 해서 시험을 보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라고 반문 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두고두고 그때 일을 말씀하셨다. “마치 갑자기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기쁜 바보가 어디 있겠느냐”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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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신부님은 당시 우리말을 배우고 계셨지만, 이미 환갑에 가까운 나이시라 별로 큰 진전은 없는 듯했다. 그런데 한 번은 강의를 하시다가 문득 한국 말에서 제일 발음하기 힘든 두 단어는 ‘교통순경’ 과 ‘욕심꾸러기’ 라고 하 셨다. 정말 신부님의 발음이 어찌나 우스꽝스러웠던지, 철없는 우리는 책 상을 치며 깔깔대고 웃었다. 조금 머쓱해진 신부님은 말씀하셨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문학은 삶의 ‘교통순경’이다 교통순경이 차들이 남의 차에 방해되지 않도록 자기 차선을 따라 반칙 없이 잘 가고 있는가 를 지키듯이, 문학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진정 사람답게, 제대로 살아가도 록 우리를 지킨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부나 권력을 좀 더 차지하려는 나 쁜 ‘욕심꾸러기’들이 많지만, 지식과 사랑, 그리고 꿈의 욕심꾸러기가 되는 것은 나쁘지 않다. 책을 많이 읽고 제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라. 그리 고 지식과 사랑의 욕심꾸러기들이 되어라.
0 이제 20여 년이 흘렀고, 나는 2002학번 새내기들에게 그때 그 신부님이 담당하셨던 영문학 개론을 가르친다. 알량한 체면 때문에 나는 학생들 앞 에서 신부님처럼 그렇게 재미있는 모노드라마를 연출하며 가르치지 못하 지만 오랜만에 신부님을 기억하며 새삼 생각한다. ‘삶의 교통순경’인 문학 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나는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제자들을 ‘지식과 사랑의 욕심꾸러기’로 만들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단 한 번이라도 진정 제자들을 위해 눈물 흘린 적이 있는지..... 먼 훗날 지금 내가 가르치는 많 은 학생들 중에 누군가 단 한 명이라도 지금 내가 브루닉 신부님을 기억 하는 것처럼 나를 기억해 줄른지....
■ 꿈꾸는 아버지
0 미국에서 제일 인기 있는 TV 토크쇼인 오프라 윈프리 쇼의 지난 주 주제 는 ‘꿈꾸는 아버지’ 였다. 30대에서 50대에 걸친 가장(家長) 예닐곱 명이 모여 이제껏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은 속내를 털어 놓았다. 사회라는 거대 한 메커니즘 속에 던져져 방향감각 잃고 방황하는 혼자만의 삶도 버거운 데, 몇 사람의 행복이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무거운 책임감, 자연히 ‘나’는 없어지고 ‘가족’이 삶의 전부가 되지만 늘 ‘밖에 있는 존재’로서 가족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소외감. 아이들의 꿈, 가족 공동의 꿈에 밀려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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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슴속에 갖고 있는 꿈을 비밀에 부칠 수밖에 없는 좌절감 등을 그들 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했다.
0 후에 비디오로 그 모습을 본 아내들은 이구동성으로 “놀랐다”고 말했다. 남편들은 단지 ‘남편’이며 ‘아버지’일 뿐. 그들도 두려움을 느끼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 하나의 ‘인간’ 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고 했다. 그들도 가 족과 상관없이 하고 싶은 일. 나름대로의 꿈이 있다는 것에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고 했다.
0 테네시 윌리엄스, 유진 오닐과 함께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극작 가로 평가 받는 아서 밀러(Arthur Miller 1915-2005)의 대표작 ‘세일즈맨 의 죽음 1949’ 은 바로 이런 주제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 윌리 로우맨은 예순 세 살 된 세일즈맨이다. 그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최선을 다 해 열심히 일하면 언젠가는 세일즈맨으로 성공하고 자기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는 꿈을 갖고 있다. 가정적이고 상냥한 아애 린다가 있고, 월부로 집 한 채도 샀으니 몇 십 년 후면 그것도 자기 소유가 될 것이다. 게다가 이웃이 부러워하는 두 아들까지. ‘행복한 삶’의 조건을 모두 갖춘 셈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윌리의 꿈은 점점 희박해져 간다. 세일즈맨으로서 의 성과급은 자꾸 줄어들고, 결국 회사에서 일방적으로 해고를 당한다. 희 망의 상징이던 두 아들도 무능한 아버지에게 반항하며 빗나가기 시작한다. 배반감, 슬픔, 피로 그리고 깨어진 꿈에 대한 절망감은 윌리를 거의 정신 착란으로까지 몰고 간다.
윌리는 결국 두 아들에게 보험금이라도 남기기 위해 자동차를 폭주해서 자살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타게 된 보험금은 겨우 집의 마지막 월부금을 낼 수 있을 만한 액수였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산업화되고 물질주의화된 현대문명 속에서 마치 하 나의 소모품처럼 버려지는 소시민의 삶을 그리고 있다.
■ 시인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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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사랑이 이우는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우리들의 슬픈 영혼은 이제 지치고 피곤합니다.
헤어집시다. 정열의 시간이 우리를 잊기 전에
수그린 당신 이마에 입맞춤과 눈물을 남기고.....
어제는 낙엽 쌓인 교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도서관 창가에서 책을 읽 다가 20세기 영국 시의 거장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 William Butler Yeats 1865-1939)의 시 ‘낙엽’을 떠 올렸다. 사랑의 좌절과 이별, 식어가 는 정열을 생명이 스러져 가는 가을에 비유한 이 시는 잘 알려지지는 않 았지만 예이츠 초기 시의 낭만성이 돋보이는 시다.
0 ‘낙엽은 그가 일생을 걸고 운명처럼 사랑한 모드 곤(Maud Gonne 1866-1953)을 처음으로 만난 1889년 가을에 쓰여진 시로서, 순조롭지 못한 두 사람의 사랑을 예견하고 있다.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가 ‘특출하게 아름답다’ 고 묘사한 모드 곤이 친구 소개로 예이츠를 방문하던 날. 예이츠는 그가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 이미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한다. 짤막한 시 ‘화살’에서 그는 큐피드의 화살을 맞 은 달콤한 고통을 묘사한다.
“당신의 아름다움을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그 생각은 날카로운 상념의 화 살이 되어 내 뼈 속 깊이 박혔습니다.”
그러나 모드 곤에 대한 예이츠의 사랑은 처음부터 일방적인 것이었다. 금 발 미녀에 열정적인 성격의 모드 곤은 당시 유명한 아일랜드 독립운동가 로서 늘 시위나 회의를 주도했고. 한 남자의 연인으로 남기에는 너무 야심 많고 자유분방한 여인이었다. 1891년 예이츠는 마침내 그녀에게 청혼하지 만 거절당한다. 그녀에 대한 예이츠의 집착은 거의 숭배에 가까웠고 그래 서 그의 사랑은 극심한 고뇌만 가져올 뿐이었다.
■ 우동 한 그릇
0 일본 작가 쿠리 료헤이의 ‘우동 한 그릇’은 일본 국회에서 한 국회의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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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읽어 온 국회를 눈물바다로 만들었다는 유명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0 섣달 그믐날 ‘북해정’ 이라는 작은 우동 전문점이 문을 닫으려고 할 때 아 주 남루한 차림새의 세 모자(母子)가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안주인이 인사를 하자 여자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우동을 1인분만 시켜도 될까요?”
그녀의 등 뒤로 열두어 살 되어 보이는 소년과 동생인 듯한 소년이 걱정 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 물론이죠. 이리 오세요.”
안주인이 그들을 2번 테이블로 안내하고 “우동 1인분이요!” 하고 소리치 자 부엌에서 세 모자를 본 주인은 재빨리 끓는 물에 우동 1.5인분을 넣었 다. 우동 한 그릇을 맛있게 나누어 먹은 세 모자는 150엔을 지불하고 공 손하게 인사를 하고 나갔다. “새해 복 만이 받으세요!” 주인 부부가 뒤에 대고 소리쳤다.
다시 한 해가 흘러 섣달 그믐날이 되었다. 문을 닫을 때쯤 한 여자가 두 소년과 함께 들어왔다. 안주인은 곧 그들을 알아보았다.
“우동을 1인분만 시켜도 될까요?”
“아, 물론이죠, 이리 오세요.” 안주인은 다시 2번 테이블로 그들을 안내 하고 곧 부엌으로 들어와 남편에게 말했다. “3인분을 넣읍시다.” “아니야, 그럼 알아차리고 민망해 할 거야.” 남편이 다시 우동 1.5인분을 끓는 물에 넣으며 말했다.
우동 한 그릇을 나누어 먹으며 형처럼 보이는 소년이 말했다. “엄마, 올 해도 북해정 우동을 막을 수 있어 참 좋았지요?” 그런데 내년에도 올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소년의 엄마가 말했다.
다시 한 해가 흘렀고 밤 열 시경 주인 부부는 메뉴판을 고쳐 놓기에 바 빴다. 200엔으로 오른 우동값을 150엔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10시 30분경 그들이 예상했던 대로 세 모자가 들어왔다. 두 아이는 몰라 보게 커서 큰 소년은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고 동생은 작년에 형이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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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던 점퍼를 입고 있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같은 재킷을 입고 있었다.
“우동 2인분만 시켜도 될까요?”
“ 물론이지요. 자 이리오세요.”
주인은 예약석이라는 푯말을 치우고 2번 테이블로 안내했다. 그리고 주인 부부는 세모자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너희들에게 고맙구나. 네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신 후 졌던 빚을 이제 다 갚았단다. 현이는 신분 배달을 해서 도와주고 준이 는 살림을 도와주어서 내가 열심히 일을 할 수 있었지.
“엄마 너무 다행이에요. 그리고 저도 엄마에게 할 말이 있어요. 지난 주 준이가 쓴 글이 상을 받았어요. 제목은 ‘우동 한 그릇’이에요. 준이는 우리 가족에 대해 썼어요. 12월 31일에 우리 식구가 모두 함께 먹는 우동이 세 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고, 그리고 주인 아저씨랑 아주머니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하는 소리는 꼭 ‘힘내요.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라 고 들렸다고요. 그래서 자기도 그렇게 손님에게 힘을 주는 음식점 주인이 되고 싶다고요.”
부엌에서 주인 부부는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0 다음해에도. 북해정 2번 탁자 위에는 ‘예약석’이라는 푯말이 서 있었다. 그 러나 세 모자는 오지 않았고. 다음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오지 않았다. 그동안 북해정은 나날이 번창해서 내부 수리를 하면서 테이블도 모두 바 꾸었으나 2번 테이블 만은 그대로 두었다. 새 테이블 사이에 있는 낡은 테 이블은 곧 고객들의 눈길을 끌었고. 주인은 그 탁자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언젠가 그 세 모자가 다시 오면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할 수 있게 해 주고 싶다고 했다. 곧 2번 탁자는 ‘행운의 탁자’로 불리었고 젊은 연인들 은 일부러 멀리서 찾아와서 그 식탁에서 식사를 했다.
0 십수 년이 흐르고 다시 섣달 그믐날이 되었다. 그날 인근 상가의 상인들이 북해정에서 망년회를 하고 있었다. 2번 탁자는 그대로 빈 채였다. 10시 30분 경 문이 열리고 정장을 한 청년 두 명이 들어왔다.
그들은 14년 전의 형제였고 하나는 의사, 하나는 은행원이 되어 옛날의 그 식당을 찾아왔던 것이다. 형제는 십수 년 동안 예약되어 있던 낡은 식 탁에서 우동 3인분을 먹을 수 있었고 집 주인은 눈물을 닦으며 그들을 바 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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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한 위대함
0 20세기 미국문학 시간에 단골로 읽히는 소설은 단연 F.스코트 피츠제럴드 (1896-1940)의 ‘위대한 개츠비’이다. 나는 이 작품을 공부하기 전에 이 책의 제목 속에 있는 ‘위대함’에 대해 학생들에게 물어 보면 대체로 이렇 게 대답한다.
‘자기를 희생하여 남에게 봉사하는 사람’. ‘진정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 ‘부ㆍ명예ㆍ권력에 개의치 않고 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사람’ 등 많은 의견을 내 놓는다. 그런 위대함이 이 세상 에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이에 학생들은 ‘물론’ 이라고 대답한다. 그렇 다면 작가 피츠제럴드가 생각하는 개츠비의 ‘위대함’은 무엇일까?
0 소설 속에서는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여자를 사랑한 개츠비에게서 ‘위대 한’ 속성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결국 돈 때문에 떠나간 사랑을 돈으로 찾겠다는 단세포적 발상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법으로 재산을 축적한 불법축재자였으며, 이미 흘러간 과거를 돌이킬 수 있다고 생각한 비현실적 몽상가였고, 사랑의 대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유아적 낭만주 의자였을 뿐 결코 ‘위대하다’고 할 수 없다.
0 1920년대 혼돈의 시대. 미래에 대한 이상을 찾는 ‘아메리칸 드림’이 순수 함과 낭만을 잃어버리고 물질만능주의와 퇴폐주의로 타락해 가는 시대에 피츠제럴드는 개츠비의 꿈과 희망을 하나의 ‘위대함’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80년이 흘렀지만 변한 것은 없다. 아니 변하기는커녕 이리저리 삶의 횡포에 채이고 휘둘리면서 우리는 더 이상 낭만을 얘기조차 하지 않 는다. 또한 개츠비의 순진무구한 꿈에 ‘위대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일 사람 은 이제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젊고 순수한 우리 학생들은 여전히 시대를 살아가는 ‘위대함’을 꿈꾼다. 돈과 권력 영웅심에 연연하지 않고 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그 런 위대함을. 그리고 나는 그들의 그런 굳건한 믿음과 희망이야말로 진정 위대하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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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과 생명
0 어느 학생이 제출한 공책 앞면에 ‘사랑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 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 ye sorry.' 이라는 영문이 인쇄 되어 있었다. 아마 사랑에 관한 정의 중 자주 인용되는 말일 것이다. 주인 공 제네퍼가 동거하는 애인 올리버와 말다툼을 하고 집을 나갔다 돌아 오 니 열쇠가 없어서 집에 못 들어간다. 제니퍼를 찾아 헤매다가 돌아온 올리 버가 현관 앞에 앉아 울고 있는 제니퍼를 발견하고 미안하다고 사과하자 제니퍼가 하는 말이다.
오래 전 그 책을 읽었을 때,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는 그 말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사랑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다. 아니, 진정 사랑한다면 미안해하는 마음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건지 도 모른다.
0 대재벌 총수가 유서 세 통 달랑 남겨 놓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 대북 사업을 계속해 달라. 내 유분(遺粉)을 금강산에 뿌려 달라는 사뭇 사무적 인 메시지. 그리고 “당신 윙크하는 버릇 고치시오”라는 허탈한 농담 외에 남긴 가장 슬픈 메시지는 아들에게 남긴 “너하고 사랑을 많이 나누지 못 해 미안하다.”라는 말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소유한 것 같던 사 람이 죽으면서 가장 가슴 아파한 것은 결국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다는 회 한이었다.
문학의 주제를 한 마디로 축약한다면 ‘어떻게 사랑하며 사는가’에 귀착된 다. 동서고금의 모든 작가들은 결국 이 한 가지 주제를 전하기 위해 글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0 내가 이제껏 본 사랑에 관한 말 중 압권은 논어 12권 10장에 나오는 “애 지 욕기생 愛之 欲其生 ” 즉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살게 끔 하는 것이다.”라는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 단순하지만 사랑의 모든 것 을 품고 있는 말이다.
여기서 ‘산다’는 것은 물론 사람답게 제대로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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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하지만. 생명을 지키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사랑하는 일은 남의 생 명을 지켜주는 일이고,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내 생명을 지키는 일이 기본 조건이다. 사는 게 힘들다고, 왜 날 못살게 구느냐고 그렇게 보 란듯이 죽어버리면, 생명을 지켜주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사람들이 사랑할 몫도 앗아가는 것이다.
■ 셜록 홈즈와 왓슨 박사
0 명탐정 셜록 홈즈-어렸을 때 한두 번쯤 그 가공할 만한 추리력에 감탄해 탐정이 되는 것을 꿈꾸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유명한 베에커가 221B 번지. 깡마른 체격. 승마 모자. 파이프. 친구이자 조수격인 왓슨 박 사 등등은 아직도 생각나는 홈즈에 관련된 사항들이다.
0 셜록 홈즈는 안과 의사였던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 1859- 1930)이 개업을 해도 환자가 없어서 호구지책으로 일련의 추리 소설을 쓰 면서 창조해 낸 가상의 인물이다. ‘빨간 머리 연맹’. ‘바스카빌 가의 개’. ‘여섯 개의 나폴레옹 상’ 등 지금은 추리 소설의 고전들이 된 작품을 쓰면 서 코난 도일은 탐정소설을 단순히 범죄소설에서 하나의 장르로 발전시킨 주인공이다. 당시 홈즈의 인기는 대단해서 1893년 ‘마지막 사건’에서 홈즈 가 숙적 모리아티 교수와 대결하다가 폭포에 떨어져 죽자 출판사에 항의 전화는 물론. 홈즈의 죽음을 애도하는 상장을 가슴에 달고 다니기도 했다. 후에 독자들의 요청에 못 이겨 ‘셜록 홈즈의 귀환’에서 부활시켰다.
0 얼마 전 ‘영국 과학발전협회’는 인터넷 투표로 세계에서 가장 재미있는 유 머로 다음 이야기를 뽑았다.
명탐정 셜록 홈즈와 닥터 왓슨이 캠핑 여행을 갔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그들은 함께 누워 잠을 잤다. 얼마 후 홈즈가 갑자기 왓슨 박사를 깨웠다.
“왓슨 하늘을 보고 뭘 알 수 있는지 말해 주게.”
왓슨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수백만 개의 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천문학적으로 은하계가 수백만 개 있으며 항성이 수십 억이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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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시학적으로는 시간이 새벽 3시쯤 되었다는 것. 신학적으로 신은 전능하 고 인간은 미미한 존재라는 것. 기후학적으로는 내일 날씨가 청명하리라는 것. 자네는 무슨 사실을 알 수 있는가?”
한동안 말이 없던 홈즈가 이윽고 말을 꺼냈다.
“누군가 우리 텐트를 훔쳐 갔다는 걸 알 수 있네.”
■ 시와 사랑의 강
0 타고르는 아인슈타인에 대해 언급하면서 “내게 있어 과학과 예술은 둘 다 인간의 생물학적 필요를 떠나 궁극적 가치를 지닌 우리의 영혼의 표현이 다.” 라고 말한 바 있다. 서로 존경의 마음을 표하던 타고르와 아인슈타인 은 1930년 여름 독일에서 만난다.
두 사람이 만나기 전 아인슈타인은 타고르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타고르는 우리에게 살아 있는 영혼과 빛, 조화의 상징이다. 폭풍우 가운 데서 날아오르는 자유로운 새요. 에어리얼 요정이 금색 하프로 타는 영원 의 노래다. 그러나 그의 예술은 인간의 불행이나 투쟁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는 이 세상의 ‘위대한 파수꾼’이다. 이제껏 인간이 성취하고 창조한 모든 것의 뿌리는 시와 사랑의 강 속에 있다.”
0 ‘시와 사랑의 강’ 아인슈타인이 시인인지 물리학자인지 모를 정도의 문학 적 표현이다. 하지만 지금은 21세기, 아침에 눈만 뜨면 세상이 달라지고 아인슈타인에게 새로운 용기를 준 세 가지 이상. ‘친절과 아름다움과 진리’ 도 점차 힘을 잃어간다. 그래서 우리는 너 나 할것 없이 로봇같이 움직이 고, 시와 사랑의 강은 자꾸 말라간다.
■ 푸른 꽃
0 대학 다닐 때 나의 부전공 독문학을 꽤 잘 한다는 환상 속에 살 수 있었 던 것은 독문과 교수이셨던 이유영 선생님 때문이었다.
키가 자그마하고 불그스레한 얼굴에는 늘 웃음을 머금고 계셨던 선생님 의 강의는 항상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목소리가 우렁차고 백묵을 교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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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짓이기면서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말씀하셔서 매시간 수업이 끝 날 때쯤이면 교탁은 백묵 조각으로 수북했다. 그때 읽은 독문학 작품 중에 내 기억에 남는 것은 노발리스(Novalis, 1772-1801)의 ‘푸른 꽃’이다.
스무 살 청년 하인리히는 꿈에서 푸른 꽃을 본다. 그가 푸른 꽃에 다가서 자 꽃은 상냥한 소녀의 얼굴로 변한다. 그 소녀를 동경한 나머지 하인리히 는 먼 여행길을 떠난다. 마침내 아우구스부르크에서 할아버지의 친구이자 시인인 크링스오르를 만나 그의 딸 마틸데에게서 꿈에서 본 푸른 꽃의 모 습을 찾는다. 그가 다시 꿈을 꾸는데, 나룻배에 앉아 노를 젓는 마틸데를 거대한 풍랑이 덮친다. 꿈은 현실이 되어 마틸데는 죽고, 마틸데에 관한 그의 사랑과 그녀의 죽음은 그를 시인으로 만드는 결정적인 체험이 된다.
0 선생님은 ‘푸른 꽃’은 낭만주의 작가들이 말하는 ‘무한한 동경’과 시, 사랑, 신앙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이상향의 상징이라면서 우화를 하나 말씀해 주셨다.
“늘 이상향을 동경하고 힘든 현실로부터 해방되기를 꿈꾸는 사람이 있었 다. 그는 행복한 세계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났다. 며칠 동안 여행을 하고 잠을 자는데, 장난꾸러기 요정이 몰래 그의 신발 코를 반대 방향으로 돌려 놓고, 그의 꿈속에 나타나 계속 가면 네가 찾는 곳이 나온다고 말해 주었 다. 며칠 동안 여행을 한 그 사람은 드디어 자신이 동경하던 이상향을 찾 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사실 그가 이상향이라고 믿은 그곳은 자신이 떠나온 바로 그곳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찾으려고만 하면 ‘푸른 꽃’은 바 로 우리 곁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포기하지 않는 자만이 그것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 어느덧 물 내린 가지위에
0 “사람을 좋아하고 책을 즐기며/ 외길 걸어 온 한 인생/ 발분망식 發憤忘 食, 낙이망우 樂以忘憂 (열심히 분발하니 먹는 것도 잊고 근심을 잊으니 즐겁도다)/ Fugit Inreparable Tempus(잃어버린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 는다)/ 어느덧 물 내린 가지 위에도/ 화사한 꽃, 열매 영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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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어제가 아홉 번째 기일이었던 나의 아버지, 故 장왕록 박사의 묘 비에 적인 말이다.
0 셰익스피어의 묘비
“누구든 이 돌을 건드리지 않는 자는 축복 받으리요./ 내 뼈를 옮기는 자 는 저주 받으리다.” 라고 적혀 있는데 셰익스피어의 글치고는 너무 졸시라 실제로 그가 썼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0 보물섬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묘비
“드넓은 별이 총총한 하늘 아래/ 바다에서 고향 찾은 선원처럼. 산에서 고향 찾은 사냥꾼처럼.”
0 와인즈버그, 오하이오의 작가 셔우드 앤더슨의 묘비
“죽음이 아니라 삶이야말로 위대한 모험이다.”
0 그런데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묘비문은 언젠가 아버지가 쪽지에 적어 놓으셨던 웨스트민스트 사원에 묻힌 어느 성공회 주교의 글 이다.
“내가 젊고 자유로워서 무한한 상상력을 지녔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 키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좀 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 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 화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혼의 나 이가 되었을 때는 마지막 시도로, 가장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는 자 리에서 나는 깨닫는다. 만일 내가 나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얻어 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 있었을 것을, 누가 아는가. 그러면 세상까지도 변화 되었을지!”
■ 저 하늘의 별을 잡기 위해
0 세르반테스(1547-1616)의 돈키호테를 뮤지컬로 만든 ‘라만차의 노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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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가 부르는 노래는
“용감한 사람도 가기 두려워하는 곳에 가고.... 순수하고 정결한 것을 사 랑하고..... 잡을 수 없는 저 별을 잡으려고 손을 뻗는 것. 이것이 나의 여 정이다. 아무리 희망이 없어 보여도, 아무리 길이 멀어도, 정의를 위해 싸 우고 천상의 목표를 위해서는 지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 영광 의 여정에 충실해야 나 죽을 때 평화로우리..... 그리고 이것 때문에 세상 은 더 좋아지리. 아무리 조롱받고 상처 입어도 한 사람이라도 끝까지 노력 한다면... 잡을 수 없는 저 별을 잡기 위해.... ”
0 줄거리만 보면 우스꽝스러운 광인의 어쭙잖은 모험담 같지만 ‘돈키호테’는 단순한 익살이나 풍자소설이 아니다. 전편은 1605년에, 후편은 1615년에 출판된 이 방대한 작품은 서구문학 최초의 소설이라는 문학사적 가치 외 에도 진정한 ‘인간’을 그린 최초의 작품이라는 격찬을 받기도 했다.
프랑스의 비평가 티보테는 이 책을 ‘인류의 책’이라고 평가했고, 영어의 ‘키호티즘’이라는 단어도 ‘돈키호테’에서 비롯되었다.
0 그런데 학창시절에 이 책을 읽고 난 후 이제껏 살아오며 내가 깨달은 것 한 가지는, 이 세상은 돈키호테가 기사도 정신으로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중세처럼 평화롭지 못하고 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손을 뻗는 일 은 결국 허사로 돌아가기 일쑤라는 것이다. 늘 깨어진 꿈에 좌절하고 이상 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괴로워하게 마련인 것이 우리네 삶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키호테가 마지막 모험에서 돌아와 제정신이 들어 임종한 후 그 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새겨졌다.
“광인으로 살다가 제정신으로 죽은 이여.”
하지만 햇빛 눈부신 이 가을날 오후. 돈키호테처럼 잡을 수 없는 별에 손 을 뻗치고, 순수하고 정결한 것을 사랑하고, 이루지 못할 꿈이라도 끊임없 이 꾸는 ‘광인’의 삶이 차라리 행복한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은 이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미련이 너무 커서 “아무리 조롱당하고 상처 입 어도 한 사람이라도 끝까지 노력한다면 이 세상은 좋아지리... ” 라는 돈키 호테의 믿음을 완전히 저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 사랑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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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16세기 영국의 작가이자 인문주의자인 토머스 모어(1478-1535)는 헨리 8세의 이혼을 반대 하다가 종교 반역자로 몰려 단두대에서 처형되기 직전 이렇게 말한다.
“내 수염은 잘리지 않도록 조심하슈. 그건 죄가 없으니...”
모어가 사형선고를 받자 주변의 친척들과 친구들이 다른 사람들처럼 왕 과 타협해서 목숨만은 건지라고 설득에 나선다. 그 중 한 친구가 제발 이 성적으로 행동하라고 말하자 모어가 답한다.
“그렇지만 그건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a Matter of Love)이 지 않나.”
0 처칠을 끔찍이 싫어하던 영국의 여성 국회의원 레이디 에스터가 한껏 화 가나서 처칠에게 “ 당신이 내 남편이었다면 당신 커피에 독을 탔을 겁니 다.” 라고 말하자 처칠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내가 당신 남편이었다면 서 슴지 않고 그걸 마셨을 것이요.”
사전을 찾아보면 ‘유머 감각’이란 ‘우습거나 재미있는 것을 감지하고 즐기 고 표현하는 능력’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그러나 유머 감각은 그보다 좀 더 넓은 관점에서도 볼 수 있다. 누군가 무슨 일을 할 때 상황의 정곡을 찔러 유머 감각을 발휘하여 대처한다는 것은 그의 날카로운 상황 판단력 과 자신의 의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전제로 한다. 이는 또한 근시안적 판단을 유보하고 한 발자국 물러서서 좀 더 객관적으로 상황을 관찰할 수 있는 여유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 신. 그리고 그 누구 앞에서도 떳떳하고 당당할 수 있는 정직함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 내가 이상을 버리지 않는 이유
0 운명은 인간의 것이지만 생명은 신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도 다 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없고, 그 무슨 명분을 갖다 붙인다 해도 ‘정의로운’ 전쟁은 없다.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그의 꿈, 소망 사 랑을 송두리째 없애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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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안네의 일기’는 문자 그대로 안네 프랑크라는 열세 살 난 유태인 소녀의 일기이자. 전쟁의 참화를 가장 현실적이고 감동적으로 전하는 세계적인 베 스트셀러 작품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 6월 14일부터 2년여에 걸쳐 씌어진 이 일 기는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 소녀의 눈으로 전쟁의 비극을 묘사한다. 유태 인 말살 정책을 편 히틀러를 피해 안네의 가족은 다른 두 가족과 함께 비 밀 입구가 있는 은신처에서 은둔 생활을 한다. 언제 발각되어 수용소로 보 내질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불안. 다른 동거 가족들과의 갈등, 안타깝게 기 다리는 연합군 상륙작전과 승전 소식. 함께 사는 또래 소년 페터에 대한 안네의 사랑과 꿈. 그리고 무엇보다 비참한 삶을 희망으로 바꾸어가려는 안네의 슬픈 의지가 경건한 감동을 준다.
0 “누가 우리에게 이런 고통을 안겨 준 것일까요?” 라고 자문하는 안네는 “만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 세상에 살아남는 일이 허락 된다면 나는 꼭 이 세상을 위해 일하겠습니다.”라고 꿈을 밝힌다. 작가가 되어 “주변의 모 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기쁨을 주는 존재”가 되고 싶은 안네의 소망 은 단지 일상의 작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삶 - 마음대로 자전거를 타고 자유롭게 춤을 추고 휘파람을 불고 젊음과 자유를 누리는 그런 삶이었다.
“가끔씩 나는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곳으로 숨어들어 오지 말고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이 비참한 고통 을 겪지 않고 우리를 보호해 주는 사람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일도 없겠 지요. 하지만 곧 이런 생각을 거두게 됩니다.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 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자연의 목소리를 잊지 않았고, 여전히 모든 일에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안네의 일기는 1944년 8월 1일로 끝이 난다. 일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안 네는 자신의 이상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내가 이상을 버리지 않는 이유는 인간은 결국 선하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혼란과 불행과 죽음위에 내 희망을 쌓아 올릴 수는 없습니다. 나는 세계가 차츰 황폐해 가는 것을 보고 수백만의 고통을 직접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늘을 보면 언젠가는 모든 일이 다 잘되고 이 잔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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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결말이 나고. 또 다시 평화와 고요가 돌아오리라고 믿습니다. 그때까지 는 어떻게든 이상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어쩌면 정말 그것들을 실현 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나 결국 그날은 오지 않았다. 안네의 가족은 1944년 8월 4일 체포되 고 이듬해 3월 안네는 베르겐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는다. 연합군이 수용소 를 해방시키기 불과 며칠 전 일이었다.
■ 어머니, 그 위대한 이름으로
0 불후의 명작 ‘대지’ 이외에도 80권에 달하는 작품을 남기고 여성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 중국에서 자랐고 동서양의 벽을 허문 자선사업 가. 우리나라에도 혼혈아를 위한 재단을 세웠던 펄 s.벅(1892-1973)여사. 나는 그녀의 작품 중 가장 인상 깊은 책은 1951년 발표한 ‘자라지 않는 아이’이다.
0 펄 s. 벅은 한국의 고아들을 포함, 국적이 다른 아홉 명의 고아들을 입양 했지만 그녀의 친자는 중증의 정신지체와 자폐증이 겹친 딸 하나뿐이었다. 그녀가 ‘가장 어렵게 쓴 책’이라고 고백한 ‘자라지 않는 아이’는 최고의 명 예를 누리는 작가로서가 아니라 장애 자녀를 낳아 길러 본 어머니로서의 체험을 마음으로 토로한 책이다.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의 행복감. 그러 나 정신지체아로 일생 동안 ‘자라지 않는 아이’로 남게 되리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의 절망을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죽음이 더 편할지 모릅니다. 죽음은 그것으로 끝나기 때문입니 다. 내 딸 아이가 지금 죽어 준다면 얼마나 다행일지 모른다고 생각 했습 니다.....”
0 “나는 누구에게든 존경과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내 딸이 없었다면 나는 분명히 나보다 못한 사람을 얕보는 오만한 태도를 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능만으로는 훌륭한 인간이 될 수 없음도 배웠 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결론적으로 말한다.
“나는 결코 체념하지 않고 내 딸 아이를 ‘자라지 않는 아이’로 만든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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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반항할 것입니다.”
그녀가 말한 ‘운명에 대한 반항’은 무지로 인해 출산 전 실수로 장애아가 태어나는 것을 예방하고 장애를 가진 아이들도 “교육받을 권리, 행복을 추 구할 권리가 있음을 자나 깨나. 어디를 가나 외치는” 것이다. 장애아에게 더불어 살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은 비단 부모의 책임뿐만 아니 라 이웃과 사회, 국가의 의무라고 그녀는 역설한다.
0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생각하는 사람은 물론 나의 어머니이다. 기동력 없는 딸이 발붙일 한 뼘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목숨 걸고 ‘운명에 저항’하여 싸운 나의 어머니. 장애는 곧 죄를 의미하는 사회에서 마음속으로 피를 철 철 흘려도 당당하고 의연하게 딸을 지킨 나의 어머니. 무엇보다 이 땅에서 배움의 기회를 얻는 것은 부모님과 내게 너무나 힘겹고 고달픈 싸움이었 다. 업어서 교실에 데려다 놓고 밖에서 추위에 떨며 기다리시던 나의 어머 니. 장애를 이유로 입학시험 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학교들을 찾아가 제발 응시만이라도 하게 해달라고 사정하며 다니시던 나의 아버지. 아버지 를 기다리며 초조하게 문간을 서성이던 나의 어머니.
조금만 도와주면 나도 잘 해낼 수 있다고. 제발 한몫 끼어달라고 애원해 도 자꾸 벼랑 끝으로 밀쳐내는 이 세상에 악착같이 매달릴 수 있었던 것 은 어머니,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벨 문학상의 위업도 그 위대한 이름 ‘어머니’에 비할까. ‘신은 모든 곳 이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 어디선가 본 책의 제목이다.
■ ‘특별한’ 보통의 해
0 오늘은 TV를 보는데 선글라스 낀 여자가 “내 아기는 특별해요!” 라고 말 하는 광고가 있었다. 이유식 광고 같은데 보통을 넘는 특별한 아기는 특별 히 좋은 것을 먹여야 한다는 뜻이겠지만, 아기들이야 다 똑같지 ‘특별한 아기’ 라는 발상 자체가 이해가 안 간다.
몇 년 전 강남의 부자 동네에 저소득층을 위한 아파트를 짓는다는 말에 주민들이 데모에 나선 적이 있었다. 자기의 아이들과 저소득층의 아이들을 같은 학교에 보낼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것도 아마 물질적 조건을 갖추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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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므로 ‘내 아이는 특별하다.’ 는 논리에서 나왔음직 하다.
0 ‘특별한’ 또는 ‘완벽함’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동화가 있다.
귀퉁이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가 온전치 못한 동그라미가 있었다. 동그라미 는 너무 슬퍼서 잃어버린 조각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났다. 여행을 하며 동 그라미는 노래를 불렀다. “나의 잃어버린 조각을 찾고 있지요. 잃어버린 내 조각이 어디 있나요.” 때로는 눈에 묻히고 때로는 비를 맞고 햇볕에 그 을리며 이리저리 헤맸다. 그런데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빨리 구 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힘겹게 천천히 구르다가 멈춰 서서 벌레와 대화도 나누고, 길가에 핀 꽃 냄새도 맡았다. 어떤 때는 딱정벌레와 함께 구르기 도하고, 나비가 머리위에 내려앉기도 했다.
오랜 여행 끝에 드디어 몸에 꼭 맞는 조각을 만났다. 이제 완벽한 동그라 미가 되어 이전보다 몇 배 빠르고 쉽게 구를 수 있었다. 그런데 떼굴떼굴 정신없이 구르다 보니 벌레와 얘기하기 위해 멈출 수 없었다. 꽃 냄새도 맡을 수 없었고, 휙휙 지나가는 동그라미 위로 나비가 앉을 수도 없었다.
“내 잃어버린 힉, 조각을 찾았지요. 힉!”
노래를 부르려고 했지만 너무 빨리 구르다 보니 숨이 차서 부를 수가 없 었다.
한동안 가다가 동그라미는 구르기를 멈추고, 찾았던 조각을 살짝 내려놓 았다. 그리고 다시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간 몸으로 천천히 굴러가며 노래했 다.
“내 잃어버린 조각을 찾고 있지요...”
나비 한 마리가 동그라미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0 ‘잃어버린 조각’ 이라는 동화는 우리에게 알려진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쓴 셸 실버스타인(Shel Siverstein 1952-1999)이 쓴 것으로 ‘완벽함의 불 편함’을 전하고 있다. 사실 특별하게 잘나서 ‘보통’의 다수와 분리되어 살 아 간다는 것은 어쩌면 겉보기처럼 그렇게 멋진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가서 삐뚤삐뚤 구르는 동그라미처럼 조금은 부족하게, 느리게, 가끔은 꽃 냄새도 맡고 노래도 불러가며 함께하는 삶이 더욱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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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고 행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이다.
0 그런 의미에서 나는 새해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별로 ‘특별’하지 않은 가 장 보통의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무슨 특별하게 좋은 일이 일어나거나, 대박이 터지거나, 대단한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누구나 노 력한 만큼의 정당한 대가를 받고 상식에서 벗어나는 기괴한 일이 없고, 별 로 특별할 것도, 잘난 것도 없는 보통 사람들이 서로 함께 부족함을 채워 주며 사는 세상 말이다.
■ ‘초원의 빛’
0 초원의 빛
- 오래 전 나탈리우드와 워렌 비티 주연의 인기 있었던 영화 제목
- 19세기 영국의 계관시인이자 낭만주의 시의 대부격인 윌리엄 워즈워즈의 ‘영생(永生)의 깨달음에 부치는 노래’ 라는 장시 중 “한때 그렇게도 찬란한 빛이었건만/ 이젠 영원히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 광이여... ”에서 제목을 따 온 것이다. (사실 원문의 정확한 번역은 ‘초원의 빛’이라기보다 ‘풀의 광휘’가 되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영화 제목과 함께 거의 고유명사화 되었으므로 그대로 쓴다.)
0 워즈워즈 하면 영문학도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무지개’라 는 유명한 시가 떠오른다.
하늘에 무지개 보면
내 가슴은 뛰노라
내 인생 시작되었을 때 그랬고
지금 어른이 돼서도 그러하며
늙어서도 그러하기를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나으리.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자연에 대한 경외로 이어질 수 있다면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오지 않은 들 어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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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남아 있는 것에서 힘을 찾으리.....
워즈워즈는 낭만주의의 효시가 된 그의 유명한 시집 ‘서정시집 1798’ 의 서문에서 시인을 정의한다.
“시인이란 인간의 본성을 지키는 바위 같은 존재이다. 그는 지지자요, 보 호자이고 어디를 가든 정과 사랑을 지닌 사람이다.” 라고.
■ 사흘만 볼 수 있다면
0 제대로 된 수필은 진정한 의미에서 엄연한 문학의 한 장르이다. 물론 수필 을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문제이겠지만, 웬만한 작가들이나 사상가들 - 찰 스 램, 버지니아 울프, 조지 오웰, 헨리 데이빗 소로우, 제임스 서버 등 - 은 모두 위대한 수필가로도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렇게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훌륭한 수필가들의 작품들보다 도 내가 더 인상 깊게 읽은 수필은 ‘사흘만 볼 수 있다면’ 이라는 글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20세기 최고의 수필’로 선 정한 이 글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헬렌 켈러의 작품이다. 시각과 청각의 중복 장애를 극복한 인간 승리의 본보기로 알려져 있지만 그녀는 훌륭한 문필가이기도 했다.
“누구든 젊었을 때 며칠간만이라도 시력이나 청력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하는 것은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로 시작하는 이 글에서 켈러는 ‘단 사흘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이라는 가정 하에 계획표를 짠다.
0 “보지 못하는 나는 촉감만으로도 나뭇잎 하나하나의 섬세한 균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봄이면 혹시 동면에서 깨어나는 자연의 첫 징조, 새순이라도 만져질까 살며시 나뭇가지를 쓰다듬어 봅니다. 아주 재수가 좋으면 한껏 노래하는 새의 행복한 전율을 느끼기도 합니다.
때로는 손으로 느끼는 이 모든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으면 하는 갈망에 사로잡힙니다. 촉감으로 그렇게 큰 기쁨을 느낄 수 있는데, 눈으로 보는 이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그래서 꼭 사흘 동안 이라도 볼 수 있다 면 무엇이 제일보고 싶은지 생각해 봅니다. 첫날은 친절과 우정으로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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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가치 있게 해 준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남이 읽어 주는 것을 듣기만 했던 내게 삶의 가장 깊숙한 수로를 전해준 책들을 보 고 싶습니다.
오후에는 오랫동안 숲 속을 거닐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보겠습니다. 찬란한 노을을 볼 수 있다면, 그날 밤 아마 나는 잠을 자지 못할 겁니다. 둘째 날은 새벽에 일어나 밤이 낮으로 변하는 기적의 시간을 지켜보겠습 니다. 그리고 이날 나는.....”
이렇게 이어지는 켈러의 사흘간의 ‘환한 세상 계획표’ 는 그 갈증과 열망 이 너무나 절절해서 멀쩡히 두 눈 뜨고도 제대로 보지 않고 사는 내게는 차라리 충격이다.
■ 사랑하는 너에게
0 ‘실낙원’을 쓴 밀턴은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잘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지만 나도 스승으로서 네게 실망스럽지 않 도록 ‘잘’ 살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삶은 해답 없는 질문이지 만 그래도 그 질문의 위엄성과 중요성을 믿기로 하자” 는 테네시 윌리엄 스의 말처럼 우리의 삶은 낭비하기에는 너무나 소중하다. 하루하루의 삶은 버겁지만 “삶이 주는 기쁨은 인간이 맞닥뜨리는 모든 고통과 역경에 맞설 수 있게 하고 그것이야말로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라고 서머셋 몸은 말한다.
0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쓴 보마르셰는 묻는다. “사랑과 평화가 한 가슴속 에 공존할 수 있는가? 청춘이 행복하지만은 않은 것은 이 끔찍한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평화 없는 사랑, 사랑 없는 평화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나는 네가 사랑 없는 평화 보다는 평화가 없어도 사랑하는 삶을 선택해 주기를 바란다. 새뮤얼 버틀러가 말한 것처럼 “살아가는 일은 결국 사랑하 는 일”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헨리 제임스는 “한껏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말한다. 알베르 카뮈는 더 나아가서 “눈물 날 정도로 혼신을 다해 살아라!”고 충고한다. ‘정글북’의 작가 러디야드 키 플링은 “네가 세상을 보고 미소 지으면 세상은 너를 보고 함박웃음 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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찡그리면 세상은 너에게 화를 낼 것이다.” 라고 했다. 너의 아름다운 신념, 너의 꿈, 야망으로 이 세상을 보고 웃어라.
0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쓴 스토우 부인은 “어려움이 닥치고 모든 일이 어 긋 난다고 느낄 때, 이제 1분도 더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 그래도 포기 하지 말라. 바로 그때 그곳에서 다시 기회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우리에게 충고 한다. 네 삶의 주인은 너 뿐이다. 너만이 네 안의 잠 자는 거인을 깨울 수 있다.
■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
0 1845년 헨리 데이비드 소로 (Henny David Thoreau 1817-1862)가 직 접 오두막을 짓고 계절에 따른 호수와 숲의 변화를 관찰하며 진정 가치 있는 인생과 진리에 관해 사색한 책 ‘월든’은 그의 자아 여행의 기행문이 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는 2년 2개월 2일 동안 그곳에서 살았지만. 사계 절로 압축하여 이른 봄에서 시작하여 다음해 봄에 이르기까지. 가장 기본 적인 경제, 사회생활만을 유지하면서 자연 속에서 어떻게 우주와 신과의 합일을 이루고 진리를 추구했는지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을 독자에게 전하 고 있다. 아름다운 이미지, 유려한 문체뿐만 아니라 정신적 황무지에 사는 현대인의 영혼 지침서로서 ‘월든’은 한 번도 소위 말하는 문학도의 필독서. 정전(正典)에서 제외되는 일이 없지만. 요즈음 문학과 환경학과의 연계가 대두되며 더욱 부상하는 작품이다.
0 ‘나는 어디에 살았고,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이 책 제2장의 제목이다. 이 두 개의 질문 중 ‘어디에 살았는가?’에 대한 답은 확실하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에 대한 답 은 궁하다
소로는 이 질문에 관한 답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주도면밀하게 살
고 싶었다. 군더더기를 다 떼어낸 삶의 정수만을 대면하고 삶이 가르쳐 주 는 바를 배우고 죽을 때가 되어 내가 진정으로 살았구나. 하는 느낌을 갖 고 싶어 나는 숲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월든에서 그는 “삶의 골수까지 빨 아내는” 방법을 터득하고 영혼적으로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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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은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소로의 모범답안이다.
0 죽을 때가 되어 나도 “내가 진정 살았구나”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 서 ‘산다’는 것은 그냥 숨쉬고 신진대사하는 물리적인 생명유지가 아닐진 대. 참다운 목적의식을 갖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았는가에 대한 질문에 확신 에 찬 답을 할 자신이 나는 없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다. 나는 백 번 죽었다 깨어나도 소로나 디킨슨 같 이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없지만. 내가 가르치는 작품들을 통해 나의 학생 들이 올곧고 가치 있는 삶의 실마리를 찾는다면 나의 삶도 완전한 낭비는 아니리라.
■ 11월의 영혼
0 “내 이름은 이쉬마엘이다. 내 입가에 우울한 빛이 떠돌 때, 관을 쌓아두는 창고 앞에서 저절로 발길이 멈춰질 때. 즉 내 영혼에 축축하게 가랑비 오 는 11월이 오면 나는 빨리 바다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
위의 글은 19세기 미국 작가 허만 멜빌(Herman Melville 1819-1891)이 쓴 유명한 소설 ‘백경’의 시작 부분이다. 오늘같이 부슬부슬 비가 오는 날 이면 나는 이쉬마엘이 말하는 ‘11월의 영혼’이 생각난다.
0 피쿼드호의 선장 에이헤브는 자기의 한쪽 다리를 앗아간 흰 고래 모비딕 을 쫓아 오대양을 누빈다. 선원들에게도 백경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 일으 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백경을 포획할 것을 명하고, 오직 모비딕의 경로를 따라 배를 운항한다. 드디어 백경이 모습을 드러내고 에이헤브는 3일간의 사투 끝에 백경의 거대한 등 위에 작살을 내리꽂지만 결국 헴프줄에 엉 켜 죽고, 피쿼드호는 바다의 소용돌이 속에 가라앉는다. 선원 전원이 배와 함께 가라앉고, 혼자 살아남은 이쉬마엘이 이 이야기를 전한다.
0 고래뼈 의족에 잘린 다리를 의지한 채 복수심에 불타 광인처럼 백경을 쫓 는 에이헤브는 자신이 모비딕을 쫓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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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은 마분지 가면일 뿐이다. 이 세상에서 일 어 나는 모든 사건 속에는 알 수 없는, 그렇지만 분명히 계획적인 어떤 힘 이 그 무심한 가면 뒤에서 은밀히 움직인다. 죄수가 벽을 쳐부수지 않고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그 흰 고래는 나를 밀어 붙이는 바로 그 벽 이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증오하는 것이다. 내게 신성모독이라고 얘기하지 말라. 날 모욕한다면 태양이라도 쳐부수겠다! 진리에는 한계가 없다.”
0 그래서 ‘백경’은 흰 고래와 에이헤브가 벌이는 한 판 승부이다. 그러나 결 국 이 소설은 이 승부를 관찰하고 해석해서 우리에게 전하는 1인칭 화자 이쉬마엘의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이쉬마엘이 피쿼드호에서 배운 것은 인 간과 인간이 서로 맞잡는 손이야말로 그 어떤 추상적 진리보다 더 위대하 고 궁극적 구원에 이르는 방편이라는 것이다. 멜빌은 자신이 읽던 책에 “나는 머리만 있는 주피터보다는 마음만 있는 바보가 되겠다.”고 적어 놓 은 적이 있다.
■ 어떻게 하늘을 팔 수 있습니까?
0 19세기 중반 미국 정부가 수쿼미시 인디언들에게 그들의 땅을 매입하고 새로운 보호구역을 마련해 주겠다고 했을 때 인디언 추장이 썼다는 글입 니다. 여러 버전이 있지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0 워싱턴에 있는 위대한 지도자가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요청을 해 왔습 니다. 우리는 그의 제의를 고려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총을 가지고 와서 우리의 땅을 빼앗아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하늘, 그리고 땅을 팔고 살 수가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아주 이상한 생각입니다. 신선한 공기와 반짝이는 물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팔 수 있겠습니까?
땅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 거룩한 곳입니다. 아침 이슬에 반짝이는 솔잎 하나도, 해변의 모래톱도, 깊은 숲 속의 안개며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도 모두 신성합니다. 나무줄기를 흐르는 수액은 바로 우리의 정맥을 흐르는 피 입니다. 우리는 땅의 일부이고 땅은 우리의 일부입니다. 거친 바위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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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장의 이슬, 향기로운 꽃들, 사슴과 말, 커다란 독수리는 모두 우리의 형 제입니다. 사람은 이 거대한 생명 그물망의 한 가닥일 뿐입니다. 만일 사 람이 쏙독새의 아름다운 지저귐이나 밤의 연못가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듣 지 못한다면 인생에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백인들의 도시에는 조용한 곳이라곤 없습니다. 아무 데서도 봄바람에 흔 들리는 나뭇잎 소리며 벌레들이 날아다니는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내 가 야만인이어서 이해를 못하기 때문이겠지만 그 소음은 내 귀를 상하게 합니다. 인디언들은 한낮의 비로 씻겨지고 소나무의 향기가 나는 부드러운 바람 소리를 더 좋아 합니다.
우리가 만약 당신들에게 땅을 판다면, 땅은 거룩하다는 것을 기억해 주십 시오. 이 땅을 목장의 꽃향기를 나르는 바람을 맛볼 수 있는 곳으로 지켜 주십시오. 우리가 우리의 자손에게 가르친 것을 당신들도 당신들의 자손에 게 가르쳐 주십시오. 땅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고. 모든 좋은 것은 땅으 로부터 나오고, 이 땅의 운명이 곧 우리의 운명이라는 것을 ......
■ 가던 길 멈춰 서서
0 어느 상가를 지나는데 아주 화려하고 예쁜 잠옷이 걸려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꽤 고가품 같았다. 얼마냐고 물으니 주인 여자가 “손님이 입으실 거예요?” 하고 되물었다. 사실 나는 호기심에 값만 물어 본 것이지만 그냥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여자는 대답 대신 아래에서 내복 한 벌을 꺼내 앞으로 툭 던지며 “제고 남은 건데 만 이천 원 주세요.” 하는 것이었다.
장애인이니 가난해서 고가의 잠옷은 엄두도 못 낼 거고 목발까지 짚은 별로 아름답지 못한 몸에 예쁜 잠옷이 가당찮다는 생각에서 그 여자 나름 대로의 배려와 친절이었을 테지만, 난 적이 불쾌했다.
0 어느 해 여름 방학에 잠깐 귀국해 동생과 함께 패션가를 지난 일이 있었 다. 난 별달리 옷이 없었으므로 낡은 청바지에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 다. 한참 윈도우 쇼핑을 하며 걷는데 동생이 어떤 옷가게에 걸린 옷을 보 더니 기필코 한 번 입어보고 싶다는 것이다. 함께 가게에 들어가려고 했으 나 입구의 턱이 너무 높아 동생만 들어가고 나는 목발을 짚은 채 문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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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있었다.
그런데 주인 여자가 문간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동전 없어요. 나중 에 오세요.” 하는 것이었다. 눈치 없기로 소문난 나는 못 알아듣고 눈만 껌벅이고 서 있는데 이번에는 더욱 표독스런 얼굴로 “영업방해 말고 나중 에 오라는데 안 들려요?” 하는 것이었다.
그때 동생이 옷을 반만 걸친 채로 뛰어 나오며 소리쳤다.
“뭐예요! 우리 언니를 뭘로 보고 그러는 거예요?”
난 그제서야 주인 여자가 날 거지로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체장애 는 곧 가난과 고립을 의미하는 사회에서, 그것도 유행의 최첨단을 걷는 거 리에서 낡은 청바지에 티셔츠를 걸친 것만 해도 뭣한데 결정적으로 목발 까지 짚고 서 있었으니 거지가 될 필요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0 시인 중에도 거지가 있다. ‘걸인 시인’으로 알려진 영국의 윌리엄 헨리 데 이비스(W.H. Davis 1871-1940)
- 어릴 때 부모 여의고 조부모 밀에서 자람
- 13세 때 친구들과 도둑질로 퇴학
- 액자 공장에서 도금 기술을 배우며 책을 읽다가 주인에게 들키키 일쑤
- 조모가 죽자 걸식 방랑
- 28세 때 미국에 가서 서부로 가는 열차에 오르다가 떨어져 한쪽 무릎 위 까지 절단
- 걸인 행각이 어려워지자 시를 쓰기 시작
- 특이한 삶을 산 방랑 걸인 시인으로 관심을 끌기 시작
- 그의 대표작
< 가던 길 멈춰 서서 >
근심에 가득 차, 가던 길 멈춰 서서
잠시 주위를 바라볼 틈도 없다면 얼마나 슬픈 인생일까?
나무 아래 서 있는 양이나 젖소처럼
한가로이 오랫동안 바라볼 틈도 없다면
숲을 지날 때 다람쥐가 풀숲에
개암 감추는 것을 바라볼 틈도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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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눈부신 한낮, 밤하늘처럼
별들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볼 틈도 없다면
아름다운 여인의 눈길과 발
또 그 발이 춤추는 맵시 바라볼 틈도 없다면
눈가에서 시작한 그녀의 미소가
입술로 번지는 것을 기다릴 틈도 없다면
그런 인생은 불쌍한 인생. 근심으로 가득 차
가던 길 멈춰 서서 잠시 주위를 바라볼 틈도 없다면
0 까짓, 동전 구하는 거지로 오인되고 예쁜 잠옷 안 입으면 어떠랴. 온 세상 이 풍비박산 나는 듯 왁자지껄 시끄러운데. 나는 이 아름다운 봄 날 가던 길 멈춰 서서 나뭇가지에 돋는 새순을 한 번 만져보고 하늘 한 번 올려다 볼 수 있는 여유가 있으니 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 인간 시간표
0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 사상가, 사업가, 과학자, 발명가, 자선가 등 다방면 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벤자민 프랭클린 (1706-1790)은 완벽한 ‘인 간 시간표’의 예이다. 그는 가난한 양초제조업자의 열일곱 형제 중 열다섯 번째로 태어나서 초등학교도 중퇴하고 인쇄공이던 형의 일을 돕다가 열일 곱 살에 무작정 상경, 타고난 성실함과 치밀함으로 자수성가해 거부가 된, 그야말로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다.
0 그가 자신의 성공담을 아들에게 주는 편지 형식으로 쓴 ‘벤자민 프랭클린 자서전’ 은 자서전 문학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아침 5시에 일어나 하루 계획을 세우고 밤 9시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는 철저하게 규칙적으로
생활함과 동시에 열세 가지 덕목을 정해 놓고 철칙으로 지켰다.
- 절제 : 과식하지 말고 기분 좋아질 만큼 술 마시지 말 것
- 과묵 : 필요 이상의 말을 하지 말 것
- 질서 : 모든 물건을 제자리에 두고 사업에 있어 시간을 맞출 것
- 결단력 : 결정한 것을 꼭 행동에 옮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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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약 : 나 또는 남에게 선행을 하는 이외에는 절대로 돈을 쓰지 말 것
- 근면 : 1분도 낭비하지 말 것
- 성실 : 속이지 말고 언행을 일치할 것
- 정의 : 남에게 나쁜 일을 하지 말 것
- 중용 : 극단적인 것을 피할 것
- 청결 : 몸, 옷, 주거지의 불결함을 참지 말 것
- 침착 : 사소한 일이나 불가피한 상황에 동요하지 말 것
- 정결 : 건강이나 자손을 위해서만 성교를 할 것
- 겸손 : 예수와 소크라테스를 닮을 것
등을 생활신조로 지켰고 거의 무학이지만 막대한 독서량으로 실력을 키운 것이 자신의 성공의 근간이 됐다고 스스로 분석 함
■ 마지막 잎새
0 오 헨리 (O Henry, 본명은 윌리엄 시드니 포터, 1862-1910)의 ‘마지막 잎새 ( The Last Leaf 1907)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에 사는 화가 지망생 존시는 폐렴에 걸려 나날이 병세가 악화되지만 삶을 포기한 채 창밖 담쟁이의 잎만 세며 마지막 잎새 가 떨어질 때 자신도 함께 죽게 될 거라고 말한다. 친구 수는 존시의 살려 는 의지를 돋워 주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지만 소용이 없다. 그들의 아래 층에 사는 화가 베어먼 노인은 필생의 걸작을 꿈꿔 보지만 싸구려 광고물 이나 그리며 근근이 살아간다.
밤새도록 세찬 비와 사나운 바람이 불던 다음 날 아침 수가 창문을 열어 보니. 벽돌 담벽에 담쟁이 잎새 하나가 그대로 붙어 있다. 이틀째 마지막 잎새가 그대로 붙어 있자 존시는 생명을 포기하려던 마음을 고쳐먹고 살 려는 의지를 가진다. 의사가 존시의 완쾌를 알려 주던 날. 수는 존시에게 그 마지막 잎새는 베어먼 노인이 비바람 몰아치던 밤 담장에 그려 놓은 것이었으며, 노인은 그날 밤 얻은 폐렴으로 죽었다고 말해 준다.
0 단 한 권의 장편 소설도 쓰지 않은 채 300여 편의 단편만 남긴 오 헨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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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예외 없이 기발한 착상과 페이소스로 알려져 있지만 그 중 압권은 ‘놀라운 결말’ 즉 마지막에 스토리가 반전을 이루면서 예기치 않은 귀결을 맺는 구성의 묘미이다. 그의 단편들은 무엇보다도 삶의 아이러니를 그리고 있는데, 긴 머리를 잘라 남편의 시계줄을 산 아내와 아끼던 시계를 팔아 사랑하는 아내의 머리핀을 산 가난한 남편 이야기 인 ‘크리스마스 선물 (원제 : 동방박사의 선물)’ 이 그렇고 20년 후에 한 명은 형사로, 또 한 명 은 수배되어 도망 다니는 범죄자로 만나는 두 친구의 이야기 인 ‘20년 후’ 라는 이야기 또한 예외가 아니다.
0 그리고 자주 인용되지는 않지만 오 헨리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경찰관과 찬송가’라는 단편이 있다. 뉴욕의 부랑자 소피는 겨울이 되어 날씨가 노숙 하기에 부적합해지자 사생활을 간섭하는 자선 기관에 의탁하기 보다는 가 벼운 범죄를 저질러서 숙식이 보장되는 교도소에 들어가 겨울을 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가게의 창을 깨도, 일부러 여성을 희롱해도, 난동을 부 려도, 물건을 훔쳐도 도무지 체포되지 않는다. 소피는 우울해진 마음으로 노숙을 하던 공원으로 돌아가다가 우연히 길모퉁이의 한 교회에서 흘러나 오는, 어린 시절 들었던 찬송가를 듣게 된다. 수피는 비로소 순수했던 어 린 시절에 비해 타락해 버린 현재의 자신을 깨닫는다. 앞으로 직업도 구하 고 진실된 삶을 살아 보겠다고 새롭게 마음먹는 순간 경관이 나타나 그를 부랑자라고 체포하고 소피는 금고 3개월을 선고 받는다.
■ 사랑할 수 없는 자
0 오늘 오후에 백화점에 들를 일이 있었다. 어찌나 사람이 많던지 누군가 무 심히 내 목발을 툭 건드려서 나동그라지게 될까 봐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 다. 그런데 한 구석에서 어떤 젊은 여자가 딸인 듯 보이는 네다섯 살 난 어린 아이를 달래고 있었다. 아이는 무슨 일인지 막무가내로 떼를 쓰면서 울고 있었다. 그때 마침 나를 발견한 그 여자는 갑자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저 봐, 에비 에비, 너 계속 울면 저 사람이 잡아 간다.” 하는 것 이었다.
나를 흘끗 올려다본 아이는 참으로 신기하게도 순식간에 울음을 그쳤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여자는 나를 한 번 흘끔 보더니 아이의 손을 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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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졌다.
0 황당한 경험이었다. 물론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은 이제 익숙한 일이지만, 그냥 호기심일 뿐, 우는 아이도 당장 그치게 할 만큼 그 렇게 가공할 만한 괴물처럼 보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 아이의 엄마는 내 모습에 ‘공포’라는 의미를 부여했고, 아마도 이제 그 아이는 앞 으로 신체 장애인을 보면 자연스럽게 ‘무서운 사람, 내게 해코지를 할 사 람’ 을 연상할 것이다.
0 이렇게 신체장애에 ‘악이나 공포’ 의 의미를 부여하는 데에는 미디어뿐만 아니라 분명 문학도 큰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 이 읽는 동화에서 ‘악당’들은 대부분 신체적으로 모종의 결손이 있거나 ‘정 상’이 아닌 모습을 하고 있다. ‘헨젤과 그레텔’에 등장하는 마녀는 다리를 절고, 럼펠스틸스킨은 난쟁이 이고, ‘보물섬’의 롱 존 실버는 나무다리에 애꾸눈, ‘피터 팬’의 악한 캡틴 훅은 외팔에 갈고리를 끼고 있다.
내친 김에 동화뿐만이 아니라 어이들에게 더욱 가까운 만화나 영화를 생 각해 봐도 마찬가지이다. 신체적으로 정상이 아닌 사람이 자동적으로 악한 성품이나 도덕적 결핍과 연결되는 예는 허다하다. 70년대의 ‘외팔이 시리 즈’를 비롯하여 ‘하록 선장’은 애꾸눈이고. ‘뽀빠이’의 브루터스는 거인인데 다 팔뚝에 커다란 흉터가 있고 ‘은하철도 999’에 등장하는 악인들도 곱추 이거나 외팔이거나 모종의 신체 기형. 또는 결손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 다. 디즈니 프로덕션의 ‘미녀와 야수’ 는 단적으로 ‘아름다움과 추함’이라 는 외모의 상치로 선과 악의 대비를 시도한 작품이다.
0 매부리코에 관절염으로 다리를 절룩거리는 근시 노파가 밝고 아름다운 성 품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는 적이 없고 ‘이 세상에서 육체적으로 가장 아름 다운’ 백설 공주는 품성적으로도 완벽한 선을 상징한다. 아름다운 여왕은 백설 공주에게 사과를 먹이는 악한 일을 하기 위해 사마귀가 나고 허리가 굽어 신체적으로 추한 노파의 모습으로 변해야 한다.
따지고 보면 동화 속에서 ‘착한 일’이 보상 받는 길도 매우 ‘육체적’이다. 미운 오리 새끼는 아름다운 백조가 되고. 징그러운 두꺼비는 잘 생긴 왕자 님이 되고 괴물같이 생긴 짐승은 멋진 왕이 되고. 딸을 만난 행운이 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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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 위해 심봉사는 눈을 떠야 하고 착한 혹부리 영감은 혹이 떨어져 나 가서 ‘정상’이 되어야만 이야기가 끝날 수 있다.
0 얼마 전 어느 대학신문 칼럼의 제목은 ‘절름발이 지성’ 이었고, 어느 일간 지 사설에는 정부 시책을 비난하면서 ‘곱사등이 정책’이라는 말을 썼다. ‘벙어리 삼룡이’ ‘백치 아다다’ 는 가난과 불운. 비참과 우둔의 상징이고 우리말에서 ‘소경 코끼리 더듬듯 한다.’ 거나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한다.’는 비유도 종종 심심찮게 사용되는데. 이 모두가 그러한 장애가 갖는 좌절과 능력 부족을 전제로 한다.
0 신체장애는 단지 의학적 케이스일 뿐, 악이든 선이든 모종의 의미를 부여 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또한 인간 치유의 역할을 가진 문학이 한 집단에게 부정적인 역할을 한다면 그것은 문학의 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0 어차피 인생은 장애물 경기이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작은 드라마의 연 속이고 장애물 하나 뛰어 넘고 이젠 됐다고 안도의 한숨을 몰아쉴 때면 생각지도 않았던 또 다른 장애물이 나타난다. 그 장애가 신체장애이든, 인 간관계 장애이든, 돈이 없는 장애이든, 돈이 너무 많은 장애이든, 아무리 권력 있고 부를 누리는 사람이라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인데, 왜 유독 신체 장애에만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가.
나도 남들처럼 사랑하며 살고 싶은데, 날 ‘사랑할 수 없는 자’ 로 만들어 버린 아까 그 여자에 대한 궁색한 변이 너무 길어졌다.
■ 어느 가을날의 추억
0 부드러운 음성이 사라져도 그 음악은
추억 속에서 메아리치고
달콤한 오랑캐꽃이 져도 그 향기는
감각 속에 생생하게 남습니다
장미꽃이 져도 그 꽃잎은
사랑하는 이의 잠자리를 뒤덮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떠나도, 당신에 대한 생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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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에 사랑으로 남을 것입니다.
사랑의 영원성을 노래한 이 시는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퍼시 비시 셸리 (Percy Bysshe Shelley 1792-1822) 의 작품이다.
0 셸리는 그의 시 ‘서풍부(西風賦)’ 의 마지막에 나오는 “ 겨울이 오면 봄은 멀지 않으리” 라는 구절로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이다. 하지만 죽음의 계절 인 겨울에서 희망을 본 사람 치고는 그의 삶은 그야말로 치열한 투쟁과 고뇌의 연속이었다.
-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돈 때문에 두 번이나 결혼한 세속적인 아버지를 혐오
- 명문 이튼 고등학교에 입학하지만 전통적 학습방법에 적응하지 못함
- 옥스퍼드 대학에서는 ‘무신론의 필요성’이라는 팸플릿 때문에 퇴학
- 열여섯 살 난 친구의 동생 해리엇과 결혼하나 파경
- 1818년 건강 때문에 간 이탈리아에서 그의 대표적 걸작 극시 ‘해방된 프 로메테우스’ 창작
- 30세 되던 1822년 폭풍을 만나 배가 침몰, 사망
0 해방된 프로메테우스에서 셸리는 결론적으로
“사랑하는 것, 그리고 견뎌 내는 것/... 이것만이 인생이고. 기쁨이며, 왕 국이고, 승리이다.” 라고 말한다.
“시는 인간 속에 있는 신성함을 퇴락 속에서 구하고. 모든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환원시킨다.” 고 한 그는 절대 진ㆍ선ㆍ미와 사랑이 존재하는 세계 는 오직 시를 통해 성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 그 사람을 가졌는가.
0 “선생님,‘인생 성공 단십백’ 이 뭔지 아세요?” 학생이 물었다. 모른다고 답 하자 학생이 말한다. “한 평생 살다가 죽을 때 한 명의 진정한 스승과, 열 명의 절친한 친구, 그리고 백 권의 좋은 책을 기억할 수 있다면 성공한 삶 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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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빨리 내 삶이 성공인지 실패인지 따져 보았다. 한 명뿐 아니라 운 좋게도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까지 훌륭한 스승들을 여럿 만났고, 책 읽는 게 업이니 내가 좋아하는 책을 백 권 아니라 이백 권도 더 댈 수 있다. 그런데 암만 생각해도 ‘열 명의 진정한 친구’는 좀 무리이다.
‘진정한 친구’는 어떤 사람일까. 함석헌 옹은 <그 사람을 가졌는가.> 라는 시에서 말한다.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 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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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그 사람을 가졌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나는 “아니오, 가지지 못했 습니다.” 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제껏 그 누구에게도 진정한 친구 가 되어 준 적이 없고, 내게도 그런 친구가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 다. “너 만은 제발 살아다오.” 하며 구명대를 내놓기는커녕 더욱 움켜쥐고 남보다 조금 더 앞서기 위해 죽기 살기로 뛰면서 주위 한 번 제대로 쳐다 본 적 없이 살았으니 당연한 노릇이다.
■ 성냥팔이 소녀
0 “안데르센은 아주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들이었고 비참할 정도로 불우 한 환경에서 자랐어. ‘성냥팔이 소녀’는 어린 시절 가난하게 자랐던 자기 엄마를 모델로 해서 쓴 동화라잖아. 그런 환경을 극복하고 그렇게 아름다 운 이야기들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이 놀랍지 않니. 그런데 쇼펜하우어를 봐. 국적은 달랐지만 둘은 같은 시대에 살았거든 쇼펜하우어는 거부 집에 서 태어나서 온갖 영화를 다 누리고 자랐지만 그렇게 철두철미한 염세주 의자가 되었잖아. 그래도 나는 ‘성냥팔이 소녀’가 해피엔딩이었으면 좋겠 어. 그렇게 얼어 죽게 만든 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 대한 안데르센의 말없 는 항거였는지도 몰라.”
0 ‘성냥팔이 소녀’ 외에도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Hans Christian Andersen 1805-1875) 은 ‘인어 공주’ ‘미운 오리새끼’ ‘벌거숭이 임금 님’ 등 아동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130편 이상의 걸작 동화를 썼다. 안데르센 동화 속에는 늘 서정적이면서도 아름다운 환상의 세계가 있고 따뜻한 인간애가 녹아 있다. 그의 동화는 곧잘 비극으로 끝난다. 부잣집 창 밑에 앉아 성냥불로 몸을 녹이던 불쌍한 소녀는 싸늘한 주검으로 변하 고. 짝사랑하는 왕자를 만나기 위해 목소리를 팔아 두 다리를 얻은 인어공 주는 결국 바다의 물거품으로 변한다.
0 안데르센은 말년에 방대한 자서전 ‘내 삶의 이야기’를 썼는데 아우구스티 누스의 참회록, 루소의 고백록, 괴테의 시와 진실, 등과 함께 서양의 5대 자서전의 하나로 꼽힌다. 그야말로 미운 오리새끼처럼 갖은 천대와 고난 끝에 백조로 태어나는 그의 삶의 여정이 담겨 있다. 그러나 머리말에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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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역경이야말로 자신의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토로한다.
“내 인생 이야기는 아주 멋진 이야기다. 그 어떤 착한 요정이 나를 지켜 주고 안내했다 하더라도 지금보다 더 좋은 삶을 살지는 못했을 것이다.”
■ 나는 소망합니다.
0 헨리 나우엔 (1932-1996)
< 소망 합니다 >
나는 소망 합니다.
내가 모든 이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기를
나는 소망 합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볼 때 내가 더욱 작아질 수 있기를
그러나 나 자신의 죽음이 두려워 삶의 기쁨이 작아지는 일이 없기를
나는 소망 합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줄어들지 않기를
나는 소망 합니다.
다른 이가 내게 주는 사랑이
내가 그에게 주는 사랑의 척도가 되지 않기를
나는 소망 합니다.
내가 언제나 남들에게 용서를 구하며 살기를
그러나 그들의 삶에는 내 용서를 구할 만한 일이 없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언제나 나의 한계를 인식하며 살기를
그러나 내 스스로 그런 한계를 만들지 않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모든 사람이 언제나 소망을 품고 살기를.
0 ‘각피 석회화증’ 이라는 우리나라에서 단 한 명뿐인 불치병으로 온몸이 굳 어 가서 꼼짝 못하고 누워 있는 박진식 님의 ‘소망’이라는 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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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겨우 겨우라도 잠자리에서 일어나
아침 햇살을 볼 수 있기를
아무리 천대받는 일이라 할지라도
일을 할 수 있기를
점심에 땀 훔치며
퍼져 버린 라면 한 끼라도 먹을 수 있기를
저녁에는 쓴 소주 한 잔 마시며
집으로 돌아오는 기쁨을 느낄 수 있기를
타인에게는 하잘것없는 이 작은 소망이
내게 욕심이라면. 정말 욕심이라면
하느님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0 하느님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올해는 저보다 조금 더 낮고, 아프 고 불편한 사람들과 그들 곁을 지키는 사람들의 소망을 먼저 들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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