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고구려 서풍의 특징과 독창적 미의식
지난 6월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발표한 논문 "고구려 서풍의 특징과 독창적 미의식"의 결론부분을 올려 놓습니다.
아직까지도 고구려의 서예를 당시 중국서예의 아류내지는 미개화된 글씨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고구려의 서예가 갖는 서예미학적인 위치를 밝히고자 했습니다.
고구려 서예에 나타난 미의식 -溯源의 미의식-
도1) <광개토왕릉비> 4면
고구려 서예에 나타난 미의식 중에서 가장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는 것은 "溯源의 美意識"이다. '溯源"은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간다는 뜻이다. 서예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글씨들을 보면 좀 더 본원적인 세계에 접어들기 위하여 거슬러 올라가 古法에서 眞意를 발견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러한 글씨들은 해서를 쓴다 하더라도 그 속에 예서의 필의를 담으려고 했고, 때로는 전서의 고풍을 해서에 담기도 했다. 이렇게 위로 거슬러 올라가 창조의 깊이를 더하려는 '溯源'의 미의식은 서예가 시작된 이후로 끊이지 않고 전승되어 왔다.
고구려인들은 當代에 중국에서 유행하던 글씨를 거의 쓰지 않았다. 예를 들어, <광개토왕릉비>에 있어서도 당시에 중국에서 성행하던 해서체를 본받지 않고 예서 중에서도 가장 원시적인 미감을 지닌 古隸를 본받고 있으며, <광개토왕호우>는 三代 금문을 연상할 정도로 尙古의 미의식이 존중되었던 것 같다. 이렇게 고풍을 중시하는 경향은 5세기 후반의 <농오리산성마애각석>과 6세기 후반에 제작된 <평양성각석>과 금동불상명문들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도2) 高句麗 <廣開土王陵碑> 도3) 고구려<광개토왕릉비> 동일자 비교표
도4) 高句麗 <廣開土王壺杅>
이와같이 古法을 중시하는 고구려의 서예에 대해 어떤 미적 가치를 부여해야 하는가. 옛 것 속에서 모범을 발견하려고 하는 의식은 인류의 역사상 보편적 가치를 지녀왔기 때문에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老子』의 "본래적 상태로 돌아가라(復歸於樸)"거나 『周易』,「復卦」에 "되돌아옴에서 천지의 마음을 볼 수 있다.(復其見天地之心)"는 것은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동양의 선인들은 문화의 원형을 출발시킨 원시 상태를 미숙하여 청산하여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향으로 보았던 것이다. 서양의 경우에 있어서도 멀리 그리스로 거슬러 오르면 바로 동양과 다름없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 사람들은 보다 큰 변화와 성장을 보다 큰 붕괴와 혼돈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들의 목적은 가능한 한 변화로부터 보존된 세계를 다음 세대에 넘겨주는 일이었다.”1) 동서양을 막론하고 “막히면 古代로 돌아가라”는 말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고대는 인류가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 해법을 제공해 주는 거대한 창고였다.2) 동아시아의 서예는 특히 복고풍을 중시하는 尙古主義가 끊임없이 추구되어져 왔다. 그 대표적인 예가 米芾(1051-1107)의 『海岳名言』에 실려 있다.
글씨는 예서가 흥성함에 이르면서 大篆의 고법이 크게 무너지게 되었다. 篆籒는 글자형태에 따라서 大小를 자유자재로 발휘하였으므로, 만물의 표현을 다양하게 알아야 운필의 생동감이 원만하게 갖추어져 각각 스스로 만족하게 된다. 그런데 예서에서는 처음으로 파책을 만들고 빠른 필세로 표현하게 되어 三代의 法이 없어지게 되었다. 구양순·우세남·저수량·안진경·유공권 등은 모두 변화대소가 없이 한결같은 필법으로 쓰면서 안배와 공교에 힘을 낭비하였으니 어찌 능히 세상에 이름을 세울 수 있겠는가.3)
인용문에서 보는바와 같이 미불이 고법에서 서예의 原型性을 발견하려는 견해는 고풍을 중시하는 고구려 글씨에 대한 의미부여를 분명하게 하고 있다고 본다. 글씨에서 古法을 중시하는 경향은 비단 미불 뿐 아니라, 중국 역대 서예가들이 추구한 보편적인 미의식이었다. 특히 서예의 古法을 추구하려는 경향은 고대 금석서예에 특별히 가치비중을 두었던 청대 서예가 중에서 많이 찾아질 수 있다고 본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학자가 강유위이다. 康有爲는 "古文을 쓰는데 있어서의 마음가짐으로서, 夏·殷·周 시대의 문장과 前漢과 後漢時代의 문장이 아니면 읽고 싶지도 않다"고 한 韓愈(768-824)의 말을 인용하면서, 고문을 배우는데 있어서는, 前漢과 後漢까지를 모범으로 하여야 할 것이고, 서법을 배우는데 있어서는 육조시대까지를 모범으로 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4) 이렇게 古法에서 서예의 원형을 찾으려고 했던 강유위의 서예관은 고구려의 <평양성각석>을 북위서의 대표작으로 불리어지는 <장맹룡비>나 수나라의 대표작으로 불리어지는 <용장사비>보다 더 높은 등급으로 인정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된다고 생각한다. 완당 서예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翁方綱 (1733-1818) 역시 "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대인들의 작품을 배우고 그들이 제시하고 있는 규범에 따르는 일이다"라고 하였는데, 완당 역시 이러한 尙古主義를 자신의 예술론의 기초로 삼고 있다.5)
서법은 변천하여 그 유파가 마구 뒤섞이었으니, 그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어떻게 옛날의 올바른 법으로 되돌아 갈 수 있겠는가. 대개 篆字로부터 변하여 正書(楷書)와 行書 그리고 草書가 되었는데, 그 轉移는 모두 漢末과 魏晉 사이에 있었다.
인용문에서 보듯이 완당은 올바른 典範을 찾기 위해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는 '溯源'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서예에서 근원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篆隸이며, 이로부터 漢末 魏晉 사이에 다양한 서체가 성립했다는 것이다. 고전예술의 참다운 가치를 인식하고 예술의 보편성을 지향하는 가운데 그가 취하고 있는 尊古的인 학예태도는 다름 아닌 서예의 원류인 篆隸를 체득해야 한다는 생각과 결부되어 있다.6) 위에서 열거한 예 이외에도 세상에 명작을 남긴 위대한 서예가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원류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溯源의 미의식을 “美의 經典”처럼 생각했다는 것이 서예 문헌 곳곳에 실려 있다.
도5) 高句麗 <籠吾里山城磨崖刻石>
도6) 高句麗 <平壤城刻石>
도7) 高句麗 <牟頭婁墓誌>의 墨書
도8) 高句麗 <延嘉七年銘金銅如來立像>과 銘文
도9) 高句麗 <永康七年銘金銅佛像> 銘文
이러한 전거들은 고구려인들의 서예가 당대에 중국에서 유행한 서체를 쓰지 않았다고 하여 고구려의 글씨가 서법을 숭상하는 기풍이 없다고 평하는 것이 얼마나 근거 없는 주장인가를 반성하게 하게 한다. 오히려 위의 인용문에 의한다면 고구려인들이 당시 중국의 유행서풍을 따르지 않고 고법을 중시한 것은 뒤떨어진 서예를 쓴 것이 아니라, 옛 것에서 더 큰 의미를 찾으려는 尙古意識이 작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해석일 것이다.
“소원의 미의식”이 가지고 있는 함의는 대단히 深遠하다. 여기에서 고구려 서예의 미의식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 이유는 고구려의 서예가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溯源'의 정신 속에 는 이미 다양한 창조적 서체미를 싹트게 하는 에너지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동안 논자는 삼국시대 서예의 미의식에 대해 "자연미, 부정형의 미, 선의 미, 졸박원시, 신명의 부정형, 象의 미” 라는 이름으로 의미부여 한 바 있다.7) 이것들은 이번 논문에서 제시하는 “溯源의 미의식”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