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가 족

보해성산 2009. 10. 5.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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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          족


■ 최인호


0 샘터에 ‘가족’을 연재하기 시작한 것은 1975년, 어느덧 35년이 흘러갔으    며 ‘가족’은 400회를 맞게 되었다. 매달 20매씩의 원고가 8천 매에 이르    는 장편소설이 되었으며, 나는 청년에서 장년, 그리고 중년과 노년을 거쳐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라고 쓴 버나드 쇼의 묘비명처럼 우    물쭈물하다가 어느덧 죽음을 앞 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    동안 펴낸 ‘가족’은 이번으로 아홉 번째가 되어 간다. 내가 쓴 소설 중에     가장 긴 대하소설(?)이 되어버린 것이다.


■  명명백백한 나의 마음


0 요즘 나는 차를 타고 가면서 음악 한 곡을 즐겨 듣고 있다. 남녀가 서로     달콤한 목소리로 사랑을 노래하는 중국 가요다. 노래의 제목은 ‘명명백백    한 나의 마음’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늘에 뜬 태양처럼 의심할 여지가    없는 자신의 명명백백한 사랑을 고백하는 이 노래는 지난 달 중국에 보름    간 여행을 하고 돌아올 때, 내가 워낙 이 노래를 좋아하니까 함께했던 중    국 측 가이드가 선물한 음반에 들어 있는 노래이다. 이 노래를 좋아한 데    는 유래가 있다.  


0 1990년대 중반 무렵 나는 ‘왕도의 비밀’이라는 제목 아래 만주 대륙을 중    심으로 한 고구려의 유적 탐방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었다. 특히 광개    토왕의 발자취를 좇는 이 프로그램을 찍는 동안 나는 세 번이나 체포되었    으며, 문화 간첩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1999년 12월 31일까지는 중국에    입국할 수 없다는 공안당국의 최종 판결을 받고 추방당했다. 중국에서는     특히 고구려의 역사에 대해 취재하는 것을 매우 예민하게 생각하고 있었    다. 그 심장부인 만주를 누비며 촬영하는 우리의 신상은 낱낱이 중국 공안    당국에 의해서 포착되고 있었으며, 우리를 도와준 조선족들은 백 일간이나    감옥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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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1990년대 말 내가 K회장과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 중국 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했더니 발급 이틀 만에 취소되었는데, 전해들은 말로는 ‘최인    호씨는 매우 중국에 불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나는 7년간 중국에 입국조차 할 수 없었다.


0 그러던 중 최근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중국에 비자 신청을 해야 하는 입장    에 처하게 되었다. 중앙일보에 연재하고 있는 ‘해신’을 KBS에서 또다시 5    부작 다큐멘터리로 만들고자 해서 장보고의 발자취를 좇아 산둥 반도를     비롯한 중국의 내륙 지방을 여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일단 비자    를 신청해 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다행히 비자가 발급되었다.


0 하루 평균 4~500킬로미터, 우리가 달린 거리는 모두 6000킬로미터가 넘    는 대장정.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발길’ 로 시작되는 유행가를     부르면서 대장정을 시작했고,  밤이면 낮선 곳에서 고꾸라져 잠들었다.

   그때 들은 노래가 ‘명명백백한 나의 마음’이라는 달콤한 노래였다. 원래     이 노래는 7년 전 만주 대륙을 누빌 때 대유행을 하던 노래였다.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애창되고 있었다. 이 노래를 듣자 문득 7년 전의 추억이 되    살아 나 내 가슴을 아련하게 적셨다.       

    6000킬로미터에 이르는 대장정은 고달프면서도 기쁨이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대륙을 횡단하면서 나는 내 마음속에서 사라졌던 야성(野性)이    샘솟아 오르는 것 같은 열정을 느끼고 있었다. 일찍이 프랑스의 작가이자    사상가였던 볼테르가 말했던가.

   “중국의 왕조가 비록 멸망할 때가 있었으나 그 문화는 우세하다. 정복된    것은 오랑캐지 결코 중국 사람은 아닌 것이다.”


0 같이 여행을 하던 조선족 코디네이터 김성우 군이 내게 중국말 한마디를    가르쳐주었다. 

   “워 밍밍바이바이더 아이 니. 니 아이 워 마?”

   그 말의 뜻은 다음과 같다.

   “나는 명명백백하게 너를 사랑한다. 너도 나를 사랑하느냐?”

   나는 중국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배운 중국말을 사용하였다.    할머니를 만나도, 아가씨를 만나도, 어린아이를 만나도 나는 이렇게 묻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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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말하곤 했다.

   “니 아니 워 마?”

   그러면 중국 사람들은 슬며시 웃곤 하였다.


■ 말의 문은 닫고, 지갑의 문은 열어라.


0 구두쇠의 비극은 자신의 인생을 재산과 맞바꾸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알    코올 중독자가 자신의 인생을 술과 맞바꾸고, 마약 중독자가 자신의 인생    을 마약으로, 도박 중독자가 인생의 주인공을 도박으로 맞바꾸듯 이러한     수전노는 자신의 인생을 한 푼의 물질과 맞바꾸고 있는 것이다. 고대 그리    스의 목가 시인이었던 비욘은 인색한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인색한 사람은 자기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재산이 그    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색한 사람은 어느 누구에게도 너무 가까운 접근은 용납하지    않으려고 항상 긴장해서 경계하고 있다. 그는 모든 사람을 멀리하려 하는    데 실은 그가 사람들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에게서 멀어    져가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색한 사람들이야말로 우리의 인생 자체를    불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0 이처럼 나이가 들어갈수록 인색해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또 상대적으로     많아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말(言)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한결같이    말은 많아지고 돈에 대해서는 인색해지게 마련인 것이다.

   “말의 문은 닫고, 지갑의 문은 열어라.”

   최근에 들은 말 중 가장 인상 깊은 말은 바로 이것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입은 닫아 말은 줄이고, 대신 귀를 활짝 열어 남의     말을 열심히 듣는 한편 무엇보다 지갑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는 말로,     모든 늙어가는 노인이 명심해야 할 금과옥조인 것이다. 인색한 사람의 피    는 붉은색이 아니라 파란색이다. 파란색의 피는 다른 사람에게 수혈되지     못한다. 남에게 덕을 베푸는 것은 바로 지갑을 여는 일이다. 닫힌 지갑은    고집불통의 바윗덩어리 노인으로 인간을 화석화 시킨다.

   그렇다.

   보기 좋은 노인으로 늙어가는 일은 그 어떤 명예를 얻는 것보다 힘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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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며, 지갑을 열어 남에게 베푸는 일이야말로 저물어가는 석양을 붉게 물    들이는 인생의 가장 황홀한 낙조(落照)인 것이다.


■ 꽃 피고 새 우는 나의 집


0 가정의 즐거움을 찬양하는 노래 중에 가장 유명한 노래는 뭐니뭐니 해도    ‘홈 스위트 홈’일 것이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    은 내 집뿐이라~’라고 시작되는 이 노래는 이 지상에서 가장 아늑하고 편    안한 곳은 ‘꽃 피고 새 우는 내 집뿐이리’라고 끝맺음으로써 제목 그대로    ‘스위트 홈’을 찬양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이 노래를 작곡한 존 하워드 페인은 한 번도 가정을 가져     본 적이 없었던 떠돌이였다. 그가 이 노래를 지은 때도 프랑스 파리에서     엽전 한 푼 없는 거렁뱅이 신세에 놓여 있을 때였다. 한평생 아내를 얻지    않고 집을 가지지 않은 채 지상을 헤매던 방랑자였던 그는 1851년 3월 3    일, 친구였던 C.E.그리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이상한 얘기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가정의 기쁨을 자랑스럽게 노래    한 나 자신은 솔직히 말하면 아직 가정이라는 맛을 모르고 지냈으며 앞으    로도 영원히 맛보지 못하고 말 것이오.”  

   그는 이 편지를 쓴 지 1년 뒤 튀니지 어느 길가에서 쓰러져 세상을 떠났    다. 얼마 후 그의 시체는 다시 고향인 미국 워싱턴의 오크 언덕 공동묘지    에 이장되었다. 죽은 후에야 비로소 안주의 땅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스위트홈의 작곡가가 방랑객이었다는 사실    은 매우 아이러니컬하게 느껴진다. 


0 이 세상에서 피를 나눈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는 없을 것이다. 오래 전에     읽은 내용이지만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스승은 언제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덧없이 사라지는 환상’이라고 말해    왔다. 그런데 어느날 자신의 아들이 죽자 스승은 크게 통곡하고 울었다.     이를 본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은 언제나 가족은 환상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환    상에 불과한 아들이 죽었는데 어찌 그리 슬피 우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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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말을 들은 스승은 대답했다.

   “그렇다. 내 아들 역시 환상이다. 그러나 아들에 대한 환상은 다른 환상    보다 더욱 절실하고 애틋한 환상인 것이다.”

   이 우화처럼 같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둔 형제자매야말로 이 세상에서 만    날 수 있는 가장 절실하고 애틋한 환상의 인연일지도 모른다.


0 가족들이 하는 말 한 마디가 서로에게는 상처가 되는 것이다.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끼리의 모임이라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말도 가족끼리가 되    면 독을 묻힌 화살처럼 치명적인 상처가 되어버린다.

   예수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 며느리는 시어머니    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예수의 말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이다.”

   예수는 어째서 가장 다정해야 할 집안 식구, 즉 가족이 원수라는 극단적    인 표현을 하였을까. 비록 자신은 떠돌이로 죽었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곳은 꽃 피고 새 우는 내 집뿐이다.’  라고 한 존 하워드 페인의     노래를 예수는 어째서 부정하고 있는 것일까.

  

0 가족은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려고     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실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가족들이 나누는 사    랑은 납세의 의무처럼 형식적인 것이 되고 만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사랑의 가장 근원적인 것이므로 이 방법을 모르는 가족들은 만나면    부둥켜안고 울거나 아니면 손잡고 노래를 부르거나 술을 마시고 춤을 춰    버린다.

   우리가 가정을 통해 진심으로 배워야 할 것은 사랑하는 방법을 올바로     배워나갈 때 비로소 우리의 집은 꽃 피고 새 우는 지상의 낙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오만에서 본 바다거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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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아라비아 반도의 남동부에 위치하는 이슬람 군주국으로 여간해서는 찾아    갈 수 없는 생소한 국가 오만은 ‘신밧드의 모험’으로 유명한 나라인데, 다    들 알다시피 신밧드는 일곱 번이나 인도양에 나가 갖가지 모험을 통해 최    고의 부자가 된다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주인공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    듯이 오만은 아라비아 반도에 있는 사막 국가이긴 하지만 전 국토가 아라    비아 해와 맞닿아 있고, 특히 해안에는 16Km의 너비로 평야가 이루어져    있어서 다른 나라와는 달리 바다를 통해 장사를 하고 신밧드처럼 인도양    으로 나아가 전 세계를 상대로 무역을 벌였던 해양 국가였다. 우리가 흔히    아라비아 상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오만 사람이다. 아라비아 상    인들은 7,8세기에 인도를 거쳐 중국과 국제 무역을 성행시켰으며, 특히 이    들은 그 당시 무역도시였던 양주에 이슬람 사원을 짓고 집단 부락을 이루    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랍인들은 신라와도 많은 교역을 하고 있었다. 인삼과 비     단, 황금 같은 신라의 특산물이 아랍인들이 즐겨 수입하던 물품이었다. 우    리나라에도 아랍의 특산물이 많이 수입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물건은 유향    이라고 불리는 향료와 대모(玳瑁)라고 불리는 바다거북의 등껍질이었다.     대모는 통일 신라의 귀족들이 즐겨 쓰던 사치품으로 여인들은 이 바다거    북의 껍질로 빗을 만들었고, 남자들은 수레의 장식품으로까지 사용했다.

   따라서 통일신라의 흥덕왕은 834년 이와 같은 외래품의 사용을 엄금하는    규정을 반포하였다.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람은 상하(上下)가 있고 주인은 존비(尊卑)가 있어 명칭과 법칙이 같지    않고 의복도 다르다. 그런데 풍속이 점점 각박하고 백성들이 다투어 사치    와 호화를 일삼고, 외래품의 진귀한 것들만을 숭상하고, 도리어 국산품을    야비한 것이라 싫어하니, 예절이 참람하려는 데 빠지고 풍속이 파괴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미 1,200년 전에 흥덕왕이 교시할 정도로 신라인들은 ‘외래품의 진귀    한 것만을 숭상’하고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귀족들이 수레에서 사용    하던 거북의 등껍질 장식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 벌써 아라비아 상인들의 거북의 등껍질이 인기였을 만큼 오만    은 오늘날에도 멸종되어가는 푸른 바다거북의 산란지로 전 세계에서 유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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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를 찾아볼 수 없는 장소다. 


0 지금껏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빼어난 풍경을 보아 온 나에게도 그날 밤     열두 시가 가까운 늦은 시간에 신밧드가 항해를 떠나던 수르 항구에서 캄    캄한 사막을 한 시간이나 달려 도착한 바닷가에서 본, 바다거북의 알을 낳    는 장엄한 모습은 정말 잊을 수 없는 장면 중의 하나였다. 


0 그 물체는 천천히 바다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안내원의 설명인 즉 이미    산란을 끝내고 바다로 돌아가는 거북이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거북이    가 올라왔다가 돌아간 발자국들이 두 개의 선으로 선명하게 남아 있었고,    어둠이 눈에 익자 곳곳에 거북의 발자국들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안내원을    설득하여 한 개의 조명만 밝히고 거북이의 모습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이    제 막 알을 낳기 시작하는 거북의의 모습을 촬영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    과도 같은 행운이었다. 

   거북이는 모래를 헤치고 백 개 정도의 알을 낳을 수 있는 구덩이를 만들    고 그곳에 집중적으로 알을 낳는데, 안내원은 알을 낳기 위해서 진통을 시    작한 거북이가 편하게 알을 낳을 수 있도록 뒷다리를 조심스럽게 펼쳐 주    었다. 마침내 거북은 흰 알을 한 개, 두 개 연거푸 낳기 시작하였다. 나는    엉겁결에 거북의 등을 잡고 산통을 하는 거북을 도와주기 위해 함께 힘을     주느라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거북의 눈물이었다. 알    을 낳는 고통을 이기느라 거북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거북의 눈물을 본    순간 내 눈에도 함께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0 알에서 깨어난 거북의 새끼는 바다로 나아가 30년 가까이 자라다가 보통    150Kg, 큰 것은 300Kg 가까이 될 정도로 성장한 후 자신이 태어난 고향    의 바닷가를 찾아와 이렇게 알을 낳고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 것이다.


0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 거북이가 30여 년 바다를 떠돌다가 정확히    자기가 태어난 고향을 찾아오듯이 우리의 인생, 그 바다와 같은 인생의 마    지막은 어디인가. 그리고 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 바다로, 세계로 나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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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해신’은 8,9세기 통일신라시대 때 실재했던 장보고를 주인공으로 삼아 그    당시 신라 사람들의 해외 무역 활동을 주로 다루게 되는 다큐멘터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극히 단편적인 자료로만 남아 있는 해상왕 장보고의 유    적이 중국과 일본에는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은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나    로서도 무척이나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0 특히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발견된 놀라운 지료는 장보고를 중심으로    한 그 무렵의 신라 상인들이 얼마나 진취적이며 광범위한 해양활동을 했    던가를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카이로의 국립박물관에서 우리는 1154년에 만들어진 세계 지도를 볼 수    있었다. 중세 지리학의 거장이라고 알려져 있는 알 이드리쉬가 그린 ‘세계    지도 및 세분도’에는 놀랍게도 신라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었다. 그뿐인가!    신라로 가는 항해로를 상세히 그리고 있으며 신라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중국의 동쪽에 있는 신라라는 나라는 매우 풍요롭고 살기 좋은 나라이    다. 특히 황금이 많이 산출되고 있어 심지어 개도 금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곳이다.”


   이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846년 저술한 이븐 그루다시아의 ‘제 도로 및     제국지’란 책의 내용이다. 이 책에는 신라에 대해 더 엄청난 사실을 기록     하고 있다. 846년이면 장보고가 살았던 무렵이었는데 그는 신라에 대해     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중국 동쪽에는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이슬람에서는 신라로부터 비단,    도포, 도기, 인삼 등 11종의 무역품을 수입하고 있다. 황금이 많이 산       출되고 있어 살기에 좋은 나라인 것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븐 그루다시아의 말은 우리에게 더 큰 충격을 준    다.

   “따라서 많은 아라비아 상인은 신라에 정착해 살고 있다.”

   많은 아라비아 상인이 신라에 정착해 살고 있다는 이 기록은 엄청난 역    사적 의미를 갖는다. 이 역사적 가치를 입증하는 재미있는 설화가 우리나    라 역사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서 신라 제 49대 임금인 헌강    왕 무렵의 기록에 등장하는 향가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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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경(지금의 경주) 밝은 달에

   밤늦도록 놀며 다니다가

   돌아와 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이었고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디 내 것이지마는

   빼앗은 것을 어찌하리오.“


   이 노래의 가사는 밝은 달밤에 집으로 돌아와 보니 자기 아내가 다른 남    자와 자고 있는 것을 보고도 춤을 추고 물러갔다는 처용랑(處容郞)의 노래    에서 비롯된 설화이다.


0 학자들은 이 처용을 아라비아에서 온 상인으로 보고 있다. 이 견해는 아마    도 정확한 추정일 것이다. 처용이 구름과 안개가 낀 앞이 보이지 않는 바    다에서 온 용의 아들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처용이 동해 용의 아들로    묘사된 것은, 어느 날 바다에서 처음 본 이상하게 생긴 이방인이 나타났기    때문일 것이다. 아라비아 상인이었던 처용에게 왕이 미녀를 주어 아내로     삼아 살게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아내가 아라비아 인인 남편 몰    래 간통을 저질렀지만 이를 보고도 용서한 내용이 ‘처용가’로 승화되어 귀    신을 물리치는 벽사(辟邪)로 계속남아 전해지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도 최치원이 직접 쓴 다섯 수의 한시가 전해진다. 그 한시의     내용은 모두 서역에서 온 사람들의 춤과 가면극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    다. ‘많은 아라비아 상인이 신라에 정착하여 살고 있다.’는 이븐 그루다시    아의 기록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0 우리는 지금껏 우리민족을 폐쇄적이며 쇄국적인 아시아의 동쪽에 위치한    작은 소국민이라고 생각했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나 역시 우리나라가 국    제적으로 교역을 맺은 나라는 중국과 일본으로 한정되었다는 소국주의적    역사관에서 지금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1,200년 전에 벌써 신라인들의 물품이 이집트를 비롯한 페르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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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역에까지 수출되고, 황금의 나라 신라에 대한 기록이 이집트의 국립 박    물관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우리민족은 그동안 ‘소아병적 역사관’을 가지고 스스로를 난쟁이화 시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21세기는 바야흐로 코스모폴리탄의 시대.

   미래로 나아갈 길에서는 오직 국경을 초월한 국제적 안목을 키우는 일이    가장 중요한 숙제일 것이다. 내가 1년 동안 장보고를 주인공으로 한 신라    인들의 국제 활동을 취재한 후 느낀 소감은 바로 그것이다.

   일찍이 키케로는 자신의 친구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했다.

   “바다로 나아가라. 바다를 제압하는 자는 언제나 제국까지 제압하기에 이    를 것이다.”

   나는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자랑스런 젊은이들이 키케로의 말처럼 바다    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 유향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0 원래 유향은 아프리카의 소말리아 지방이 원산지이지만 이 유향을 가장     많이 사용한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이었다. 유향의 영어 이름을 ‘프랑크    인센스’라고 하는데, 이는 원래 이스라엘 민족이 제사 때 쓰던 향료라는     뜻이다. 성경에도 이스라엘 민족이 이 유향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가     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기 예수가 태어났을 때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유향    을 꺼내 경배드렸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유향이 1,200년 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나    온 것이다.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불국사의 석가탑이 도굴범들에 의해 훼손되자       1966년 10월에 탑신을 해체하고 수리하였다. 이때 해체된 석가탑 내부에    서 동경(銅鏡)과 옥, 그리고 은제 사리함과 다라니경과 같은 국보급 유물    들이 쏟아졌는데, 놀랍게도 이 속에서 약간의 유향이 출토된 것이다. 원래    탑을 쌓을 때는 그 탑신 속에 그 무렵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상징적인 물    건들을 놓고 쌓는 것이 상례다. 석가탑 안에서 유향이 나왔다는 것은 그     무렵 우리나라 불교에서도 유향을 신성한 향료로 사용했음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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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석가탑에서 유향이 나왔다는 것은 또 다른 의문점을 던지고 있다. 유향의    원산지는 원래 아프리카의 소말리아이지만 성경에 나오는 동방박사들이     아라비아 지방에 살고 있던 현자인 것을 보면 유향은 주로 오늘날의 중동    지방에서 나오고 있는 특산물이다. 그런데 1천 2,3백 년 전인 통일신라 때    에 아라비아의 특산물인 유향이 어떻게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귀중품으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일까.

   그 무렵의 누군가가 아라비아 상인들로부터 이 유향을 수입했다는 것이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이 아닌가. 이 무렵 아라비아 상인들로부터 유향을     수입한 사람, 그뿐인가, 그들로부터 단순히 특산품을 수입만 한 건 아니리    라. 신라의 특산품, 비단과 도자기, 인삼 등을 아라비아로 수출한 사람이     분명히 실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장보고, 이들 신라 상인을 지휘하고 오고가는 뱃길을 장악한 사람이 바로    장보고였던 것이다. 내가 오만으로 여행을 떠난 것은 장보고의 해상활동을    취재하기 위함이었다.


■ 내 얼굴을 본 적이 있는가.


0 우리의 얼굴은 태어났을 때부터 가지고 있는 가면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    신만의 가면을 쓰고 한평생을 살아간다. 철학자 칸트는 이렇게 말하지 않    았던가.

   “사람은 모두 문명이 진보하면 할수록 점점 더 배우가 되어 간다. 말하자    면 사람은 남에 대한 존경과 호의, 정숙함과 공평무사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것에는 속아 넘어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일까. 칸트의 표현처럼 나는 어    떤 위선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일까. 


0 일찍이 만공 스님은 1946년 10월 12일 입적을 앞두게 되자 시자에게 물    을 떠오라고 일렀다고 한다. 시자들이 물을 떠오자 세수를 하고 단좌한 후    거울을 가져오라고 했다. 시자가 거울을 가져오자 만공은 거울에 비친 자    신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본 후 껄껄 웃었다든가.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    다던가.

   “자네와 내가 이제 이별할 인연이 되었나 보구려. 그럼 잘 가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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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공은 평생 동안 쓰고 다녔던 자신의 얼굴, 그 가면과 이별할 때임을 알    고 마지막으로 거울을 들여다보고는 작별 인사를 나눴던 것이다.


■ 자신의 일부를 주어라


0 오래 전에 내게 영세를 주셨던 신부님이 어느 날 집으로 플라스틱 물통을    들고 온 적이 있다. 무슨 물이냐고 했더니 자신이 묵고 있던 수도원의 물    맛이 너무 좋아서 내게 줄 겸 한 통을 들고 왔다는 것이었다. 냉장고에 넣    어 두고 며칠 동안 마시면서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리곤 했었다.

   “ 아 그렇구나. 물도 훌륭한 선물일 수가 있구나.”


0 ‘선물이 중요한가. 마음이 중요하지.’ 하고 말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는데,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성의가 없으면 선물    하고 싶은 마음마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랑스 3대 고전 희곡    작가인 코르네유는 ‘선물하는 물건 보다 선물하는 방법이 중요하다’ 고 말    하고 있는 것이다. 


0 몇 달 전 법정 스님이 TV의 한 프로그램에 나와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을 하는 것을 인상 깊게 본 적이 있다. ‘남에게 물건을 주려면 반드시     살아 있을 때 주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이 가졌    던 물건도 함께 죽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과연 나는 남에게 죽어 있는 물건이 아니라 살아 있는 물건을 나눠 주고    선물한 적이 있는가. 나는 대부분 내게 있어도 좋고 없어도 그만인 죽은     물건만을 선물하고 있지 않은가. 쓸모없는 물건을 남에게 주는 것보다 차    라리 현금을 선물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여 마치 결혼식장에 축의금을     내듯 흰 봉투를 내밀지 않았던가.

   에머슨은 선물에 대해 말하였다.

   “반지나 보석은 선물이 아니다. 그것은 성의가 없는 핑계에 지나지 않는    다. 유일한 선물은 너 자신의 일부분이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시를 바    치고 ,양치기는 양을, 농부는 곡식을, 광부는 보석을, 사공은 산호와 조가    비를, 화가는 자신의 그림을, 그리고 처녀는 자기가 바느질한 손수건을 선    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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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아내는 남에게 선물을 할 때 혼신의 힘과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자신이 갖고 싶어 남에게 절대 주고 싶지 않은 물건들을 골라 남에게 선    물한다. 그렇다고 무엇을 바라거나 어떤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다.

   평소 사회 활동을 하지 않고 만나는 사람도 없어 거의 집에서 은둔 생활    을 하고 있는 전업주부인데도 아내는 자신이 만나는 사람 대부분에게 선    물을 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아내가 주는 선물들은 죽어 있는 물건이 아    니라 살아 있는 물건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아내는 남으로부터 많은 선물    을 받고 있는데, 그 선물 역시 죽어 있는 물건이 아니라 살아 있는 물건이    다.

   한의사의 부인인 아내의 친구는 환절기면 한약을 달여 오고, 돌아가신 화    가는 생전에 아내를 위해 자신이 그린 그림과 편지를 보내왔다. 아내는 지    금도 가끔 그 편지를 꺼내 읽고 혼자서 눈물을 흘린다. 그 편지를 내가 본    적이 있는데 꽃이 예쁘게 그려진 그 편지에서는 마치 동성연애를 하는 것    처럼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짙게 베어 나온다. 


0 그렇다. 선물은 하나의 물건이 아니다. 선물의 교환은 물물 교환이 아니     다. 그것은 사랑의 교환인 것이다. 사랑의 교환에 무슨 값비싼 선물이 필    요한 것일까. 에머슨의 말처럼 농부에게는 곡식이, 처녀에게는 자신이 바    느질한 손수건이 최고의 선물이 아닐 것인가.


■ 바람과 먼지와 풀처럼


0 내가 좋아하는 시 중에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란 시가 있다. 시인 김    수영씨가 쓴 작품으로 그 시의 첫 두 연은 다음과 같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 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    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    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째    네 번째/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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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 시를 읽으면 나는 언제나 가슴을 흔드는 공감을 느끼곤 한다. 나 역시    김수영의 시처럼 절대 권력을 가진 권력자에게는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50원짜리 갈비탕에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는 속물 중의 하나임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이러한 자책감을 김수영은 이렇게 끝맺음을 하고 있    다.

   “.....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    문에/ 모래야 나는 얼만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만큼 적으    냐/ 정말 얼만큼 적으냐.”     

  

0 나도 걸핏하면 갈비탕에 기름 덩어리가 나왔다고 설렁탕집 주인에게 소리    를 지르며 핏대를 올리던 속물 중의 하나였다. 야경비를 받으러 오는 야경    꾼에게 1원 때문에 핏대를 올리고 교통위반 때문에 딱지를 끊으려던 교통    순경에게 고함을 지르던 속물이었다. 


0 페르시아 시인이자 신비주의자였던 ‘사디’는 30년 동안 탁발승으로 널리     이슬람권에 방랑 여행을 계속하면서 온갖 고난을 이겨낸 후 고향으로 돌    아와 말하였다. “사악(邪惡)에 대해서는 친절로써 하라. 날카로운 칼도 부    드러운 결을 벨 수는 없을 것이다. 친절한 마음씨와 부드럽고 착한 행위로    대한다면 한 올의 머리털로써도 코끼리를 이끌어 갈 수 있으리라.”


■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해도


0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모습을 열심히 찍는 사진사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훌륭한 직업을 가졌소. 당신은 외과 의사를 닮았다는 것을 아십    니까?”

   사진사가 물었다.

   “어째서 제가 외과 의사를 닮았다는 말씀이십니까?”

   아인슈타인은 대답하였다.

   “외과 의사들은 메스를 잡고 생명을 다뤄 사람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지    만 당신은 셔터를 누를 때마다 사람의 삶을 보존시켜 주고 있소. 사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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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를 먹지 않으니 사진사는 퍽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은 늙    어도 사진은 여전히 변함이 없으니 추억 속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진    속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0 “대자연은 신의 의상이고, 모든 사상과 형식, 제도는 그 의상을 꾸미는 단    추와 같은 액세서리에 불과하다.”는 의상철학을 펼친 토마스 칼라일의 말    처럼 우리가 한 때 입었던 옷들은 결국 우리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존재    의 양식인 것이다.

   우리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생각한다.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간다고.

   그러나 며칠 전 어느 비오는 여름날 아내와 둘이서 그동안 모아 놓은 수    천 장의 사진을 뒤져 마침내 한 장의 사진을 찾아 낸 후 느낀 소감은 다    음과 같다.

   흘러간 것은 강물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나 자신이며, 끊임없이 지나    가고 있는 것은 세월이 아니라 나 자신인 것이다. 

   일찍이 육조혜능(六祖慧能)이 말하였다.

   ‘깃발이 휘날리는 것은 바람 탓도 아니고 그것을 보는 마음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혜능의 말은 진리의 구경이다. 

   언젠가 그 사진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은 죽을 것이다. 나도 죽고, 아내도    죽고, 우리 아이들도 죽고. 그 사진 속에 남아 있는 모든 사물과 삼라만상    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죽고 사라질지라도 ‘꽃잎은 떨어지지    만 꽃은 영원히 지지 않는다.’는 성 프란치스코의 말처럼 우리의 인생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장엄한 업적’을 이룬 나라                     


0 인도를 다녀온 사람들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갈린다.

   인도를 예찬하거나 혹은 인도를 멸시하거나. 인도를 예찬하는 사람들은     인도야말로 전 세계에서 인간적인 삶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 유일한    ‘낙원’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는가 하면 인도를 혐오하는 사람들은 인도는     더럽고 미개하며 온갖 미신들이 들끓고, 인간을 네 종류의 계급으로 나눠    야만 간신히 국가로서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생지옥’이라고 혹평을 하    고 있다. 지금껏 나는 후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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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인도가 낳은 세계적인 시인 타고르는 ‘생의 실현’이란 책 속에서 인도의     고대 문명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인도의 고대 문명은 그 자체의 완전한 이상을 가지고서 노력을 기울였    다. 그 목적은 힘을 얻는 데 있지 않았다. 재능을 기르는 일을 극도로 등    한시 하였고, 방비나 공격을 목적으로 국민을 조직하는 일, 또는 부를 얻    는 데 있어서의 협조라든지 군사적 정치적 지배권을 목적으로 국민을 조    직하는 일을 등한시 하였다. 인도 문명이 실현하고자 노력한 이상은 최고    인간을 관조적인 생활로 이끌어 가는 것이었고, 인도가 실재의 신비로 침    투함으로써 인류의 위하여 얻은 보화들은 인도에게는 가치가 있는 성공이    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장엄한 업적이었다. 이것은 한계를 모르는 인류    열망의 숭고한 표현이었다. 또 그 열망은 무한의 실현에 못지않은 목적을    가졌다.” 


0 나는 전적으로 시성 타고르의 말에 동의한다.

   지금껏 나는 내가 여행한 나라 중에서 가장 사랑하는 나라로 중국 대륙    을 손꼽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그 엄청난 유적들은 대부분 군사적 정치    적 지배권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만리장성’도 결국에는 군사    적 방어를 목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대공사였다. 그러나    인도의 유적들은 타고르의 말처럼 힘을 얻거나 부를 축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 자체로서 완전한 미와 조화, 극도의 이상을 추구하기 위한 것    이었다.

   따라서 세계 4대 문명 중의 하나인 인도 문명은 최고 인간을 관조적인     생활의 격리로 이끌어갔으므로 석가모니라는 위대한 성인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0 GNP가 높은 나라만이 문명국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물질에 지나지 않는    다. 인도는 인류의 스승인 석가를 탄생시킨 인류의 태반이다. 또한 20세기    최고의 예언자 간디를 낳은 정신적 선진국인 것이다. 뛰어난 인도의 그 화    려한 문화유산은 정치적인 목적이거나 권력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오직 완    전한 이상을 추구하는 열망의 숭고한 표현이므로, 타고르의 표현처럼 이것    은 인도만이 가질 수 있는 ‘장엄한 업적’인 것이다.  

   뉴델리의 교외에는 간디의 무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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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전에 그의 삶답게 조촐하고 단순한 무덤에는 영원히 타오르는 성화가    그의 넋을 달래고 있다. 그 한옆에는 20세기 초 간디가 ‘젊은 인도’에서     표현하였던 ‘일곱 가지의 사회악’이 영문으로 새겨져 있다. 간디는 국가가    멸망할 때 나타나는 징조를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원칙 없는 정치, 노동 없는 부, 인간성 없는 과학, 인격 없는 교육, 양심    없는 쾌락, 도덕 없는 경제, 희생 없는 신앙.”


   간디의 무덤 위에 헌화하고 맨발로 걸어와 그 문구를 보면서 나는 부끄    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간디의 예언은 어찌 우리나라의 현실을 그처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일까. 간디의 예언대로라면 우리나라는 지금     멸망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국민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인도의 국부 간     디. 그러한 위대한 스승조차 갖지 못하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인도를 무시    하고 깔볼 수가 있을 것인가. 


0 인도를 여행하고 돌아오면서 이제는 내가 자주 인도를 여행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도는 인도 이상도 아니고 인도 이하도 아닌, 인도 그 자    체라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나는 이제 인도의 신비 속으로 새로운 여행을 떠날 것이다. ‘삼국시대’에    나온 대로 2천 년 전 인도의 아유타에서 시집 온 허황옥(許黃玉)의 나라.    김수로 왕의 왕비였던 허황후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인도는 더 이상 우    리에게 있어 갈 수 없는 아득한 별나라가 아닌 것이다.

   인도는 바로 우리 옆에 있다.


■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


0 서양의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Out of sight, out of mind.' 즉 ‘눈에    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뜻이다. 자주 보지 않으면 사이가 멀어진    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들은 우정을 확인하기 위해서 자주 만난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확인하기위해서 전화를 하고, 편지를 쓰고, 꽃을 보내고, 섹스를 나    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일까. 눈에서 멀어져 자주 만나지 않으면 마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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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 멀어지는 것일까. 자주자주 만난다는 것은 혹시 자신의 외로움에 대    한 불안  때문에 소외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일종의 출석부와 같은 것이    아닐까.         


0 내게도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비록 자주 만나는 사람들은 아니지    만 이상하게도 마음속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날이 갈    수록 향기를 뿜어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가끔 만나는 정도가 아니라 평    생을 통해 극히 짧은 기간 동안 만난 찰나적인 인연에 지나지 않는다.

   그 중 한 사람은 ‘샘터’에도 이미 썼던 초등학교 4학년 때의 담임이셨던    이종윤 선생님이시다. 이 분은 내 성격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스    승으로 나는 평생 동안 선생님을 잊을 수가 없다. 1년 전일까. 어느 날 아    내가 내게 말하였다.

   “당신 이종윤 선생님이라고 알아요?”

   나는 깜짝 놀라 대답하였다.

   “알지, 그런데?”

   “오늘 그분 따님에게서 전화가 왔었어요.”

   나는 가슴이 철렁 하였다.

   “뭐라 그랬어.”

   “살아생전에 아버지께 당신이 자신에 대해 쓴 원고를 보여 드리면서 그    렇게 사랑하는 제자와 한 번 연락이라도 해 보시라고 권유했더니 선생님    께서 그냥 웃으시며 아니야, 그것으로 됐어,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무슨,     하고 손을 저으시더래요.”

   “살아생전이라니.”

   “이미 돌아가셨대요.”

   “언제?”

   “모르겠어요.”    

   “연락처는 알아 놨어?”

   “아니요.”

   나는 순간 화가 났으나 곧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렇지. 이종윤 선생님 말    씀처럼 서로 마음과 마음으로 사랑을 나누었으면 됐지 새삼스럽게 연락처    를 알아 안부를 묻고 이러저러고 얘기를 나눠서 무엇을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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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초등학교 4학년에 불과한 어린 소년의 성급한 성격을 고쳐주기 위해서 일    부러 우등상을 주지 않으셨던 이종윤 선생님, 평소에 나를 천재(이런 표현    을 쓰는 것을 용서해 주기 바란다.) 라고 부르면서도 이상하게 내게 만큼    은 준엄하셨던 선생님.

   아아, 허락된다면 나는 선생님의 무덤을 한 번만 찾아가 보고 싶다. 두     번은 아니고 딱 한 번만 찾아가 꽃을 바치고 어째서 선생님이 나를 그토    록 꿰뚫어 보셨는지 그 마음을 헤아리고 싶다. 엎드려 삼배 올리고 소주     한 잔을 올리고 싶다. 그리고 가만히 바람결에 실어서 선생님의 이름을 천    천히 불러보고 싶다.

   “고맙습니다, 이종윤 선생님.”


■ 안녕 하세요.


0 인사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해야 할 평등한 것이기에 어린 아이라고 인    사를 생략해서는 안 된다. 인사를 먼저 하는 것은 무엇을 바라서가 아니라    우선 내가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인사는 마치 꺼진 촛불에 불을 댕기는 것과 같아서 인사를 건네고 나면    두 사람 사이에 촛불이 켜진 것처럼 마음이 따뜻해지고 정감이 흐르게 된    다. 작은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인사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부딪는 부싯돌    과 같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이 인사에 인색한지 그 이유를 나는 모르겠     다.

   ‘내가 어떻게 먼저 인사를 해. 나는 인사를 받는 쪽이지, 먼저 인사를 하    는 것은 반드시 상대방이어야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다.    분명히 아는 사람인데도 눈인사조차 나누지 않고 피하는 사람은 고독한     사람이다. 그럴 때면 나는 일부라 찾아가서라도 악착같이 인사를 나누곤     한다.

   왜냐하면 인사는 감기처럼 전염되는 것이어서 모임 같은 데서 어떤 한     사람이 마음이 담긴 인사를 시작하고 나면 곧바로 이 사람 저 사람으로     확산되어 모임 전체가 축제 분위기로 변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0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라는 소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떤 때라도 인사가 부족한 것보다는 지나친 편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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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톨스토이의 말에 동의 한다. 인사를 나누지 않거나 대충함으로써 부    족한 것보다는 좀 지나치더라도 확실하게 나누는 편이 나은 것이다.          세계 각국의 인사법은 달라서 에스키모들은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서로    뺨을 때린다고 한다. 티베트에서는 서로 혀를 내밀고, 아프리카의 마이족    들은 뺨과 발바닥을 핥아 준다고 한다. 또 다른 종족들은 얼굴에 침을 뱉    기도 하고 보르네오 민족들은 서로 콧등을 문지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    한다고 한다. 


0 어떤 아프리카인들은 이런 인사말을 나눈다고 한다. “스커트와 돈과 땅      을.” 아라비아인들의 작별인사는 “알라신의 은혜로 당신의 코에 살이 찌기    를”이라고 한다. 어린아이를 하늘이 베푼 가장 큰 은혜로 생각하는 타타르    인들은 이별할 때 “당신의 침대가 아이들로 충만하고 당신은 감기에 걸리    지 않기를”이라고 인사하며, 바크라인들은 “당신이 열두 명의 아이를 갖기    를” 이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베레케인들은 이런 작별인사를 나눈다고    한다. “나는 당신이 목이 길고 살찐 아내를 얻기를 바랍니다.” 


0 굳이 이런 독특한 인사말이 아닐지라도 우리에게는 “안녕하세요.” 라는 간    단한 인사말이 있지 않은가. 언제부터인가 나는 작은 결심을 하기 시작하    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면 내가 먼저 인사하리라. 내가 먼    저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건네리라. 


0 독일의 작가 뮐러는 ‘독일인의 사랑’에서 말하였다.

   “우리는 서로 인사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답례가 없는 인사를 하면 우    리 마음이 쓰라리게 되며, 또 인사를 하고 악수한 사람과 헤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뮐러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설혹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사람들에    게 내가 먼저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했을 때 상대방이 답례를 하니     않고 내 인사를 묵살해 버린다고 해도 그것이 내 마음을 쓰라리게 하거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으므로, 나는 나부터 우리 아파트에서 인사의 전    도사가 되려한다. 받거나 말거나 나는 먼저 웃고 먼저 인사를 하고, 먼저    “안녕하세요.” 라고 말하고, 먼저 “안녕히 가세요.” 라고 작별 인사를 나누    는 작은 행위를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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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 내 작은 인사가 모든 사람에게 전염되기를. 온 아    파트 주민이 밝은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그리하여     내가 사는 아파트가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가 울긋불긋 피어나는     꽃대궐이 되기를. 


■ 뉴스형 인간으로부터의 자유


0 저녁을 먹고 내가 꼭 빠뜨리지 않는 일은 TV를 통해 뉴스를 보는 일이다.    몇 달 전부터 나는 신문을 읽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신문을 구석구석 찾아 읽던 ‘뉴스형 인간’중의    한 사람이었다. 또한 미국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신문 없는 정부와 정    부 없는 신문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는 지체 없이 정부 없는 신문을 선    택할 것입니다.”란 말처럼 신문에 대해 신뢰를 갖고 있던 ‘뉴스형 인간’이    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신문을 보지 않는 것이 내 생활의 지평을 넓히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뉴스와 정보는 한 시간의 TV 뉴스만으로    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느낀 것이다.


0 신문을 보지 않으면 세상에 대한 궁금증이 커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    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고 일에 대한 집중력이 더 깊어지는 것이었다.    사실 신문은 우리에게 필요치 않은 정보를 집중투하하고 있다.

- 어제 일어난 한일 축구전 결과를 모른다고 세상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 이번 겨울의 패션 경향을 모른다고 해서 꼭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 부동산 시세, 웰빙 정보를 모른다고 무슨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또     수도 이전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내가 알아야 하는 일도 아니다.  - 대통령이 꼴 보기 싫다고, 대통령이 예쁘다고 해서 세상은 갑자기 좋아지    거나 나빠지지도 않는다. 

- 거물 정치인의 뇌물 수수, 연예인 C양의 이혼, 여권 실세 정치인의 아버지    가 친일 형사라서.... 등 모든 일은 내가 흥분한다고 달라질 일이 아니다. 


0 신문을 읽으면 나는 흥분하게 된다. 나라가 걱정되고, 곧 망할 것 같으며    한반도에서 핵전쟁이 일어날 것 같다. 뭔가 한 마디 이 사회에 대해 날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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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운 비판을 하지 않으면 지식인으로서 퇴보될 것 같은 강박관념을 느낀    다. 신문을 보면 작가로서 나도 문학상을 타고 싶어지며, 다른 작가의 험    담을 하고 싶게 된다. 그야말로 공연히. 신문을 보면 여배우 누가 성형 수    술을 한 사실을 알게 되어 내 입에서 자연 욕설이 나오게 된다. 그야말로    공연히. 신문을 보게 되면 부시도 싫어지고 빈 라덴도 X새끼가 된다. 그야    말로 공연히.

   그런데 신문을 보지 않게 되니까 이 모든 것으로부터 나는 해방되었다.     나는 남을 비난하지 않게 되었으며, 관심조차 없게 되었으므로 정신의 낭    비를 하지 않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일에 더 집중하게 되었던 것이다.

  

0 성철 스님의 상좌였던 원택 스님은 수행 중에 우연히 산속 암자에서 바람    에 날아 온 신문지를 주워 읽었다고 성철 스님으로부터 당장 산문을 떠나    라는 경책을 받았다는데, 그것은 신문을 읽는 행위가 나빠서가 아니라 세    상에 대한 쓸데없는 호기심에 대한 질타가 아니었을까.

   실제로 숲 속에 오두막을 짓고 자연을 벗 삼아 살았던 소로우는 “신문을    읽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연에 눈을 돌려 그것을 통    해 신(神)을 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신문에 대한 요즘의 내 의견에 대해 오해는 하지 말기 바란다. 여전    히 나는 신문 없는 정부 보다는 정부 없는 신문에 더 많은 신뢰를 보내는    신문예찬자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지나치게 신문에 의지하고 여론에 민    감하여 스스로를 정보의 노예로 만드는 ‘뉴스형 인간’으로부터의 자유는     마땅히 우리가 선택해야 할 권리라고 생각한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말했다.

   “신문을 안 읽게 되면서부터 나는 마음이 편해지고 실로 기분이 좋습니    다. 왜냐하면 신문은 남이 하는 것만 생각하게 하고 마땅히 자기가 해야     할 의무는 잊게 하기 때문입니다.”


0 그렇다 5평의 방을 넓히려면 집을 부숴서 8평의 방을 신축할 것이 아니라    5평의 방을 가득 채운 쓸모없는 것을 버려 공간을 확보할 일이다. 마찬가    지로 하루의 24시간은 고정되어 있다. 하루를  여유 있고 풍요롭게 보내    기 위해 24시간을 26시간으로 연장할 수 없다. 하루 속에 들어 있는 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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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없는 생각의 잡동사니들을 정리하여 시간을 확보할 수는 있을 것이다.

   요즘 나는 신문을 읽지 않음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훨씬 더 많이 비축하    고 있다. 이것이 요즘 내가 한 달에 600매의 원고를 쓰면서도 지치지 않    고 행복할 수 있는 비결 중의 하나이다.


■ 즐거운 편지


0 명색이 작가이면서 나는 ‘편지쓰기’를 싫어한다. 아니 싫어한다기 보다는    귀찮아한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왜냐하면 편지의 소중함은 인정하고 있    으므로.

   아내와 연애할 때는 수십 통의 편지도 보냈다. 이 낯간지러운 편지는 아    직도 아내의 사물함 깊숙이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아내가 이 편지를 보관    하고 있는 것은 아득한 사랑의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내게 사랑받았다는 증거를 확보해 두려는 공증 문서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0 편지를 쓰기는 귀찮아하면서도 받는 것을 좋아하는 내 이중성격은 사랑을    하기보다 받기를 좋아하는 이기적 성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시인 유    치환도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던가.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는 것보다 행복하느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0 워싱턴 우체국 동남쪽 모서리에는 명문(明文)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소    식과 지식의 전달자, 산업과 상업의 매개자, 상호면식의 추진력, 사람들 사    이의 그리고 국가 간의 평화와 친선의 것.” 

   편지와 통신의 역할을 거창하게 사회와 국가적 입장에서 압축시킨 이 명    문에 비해 남서쪽 모서리에는 편지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함축하고 있다.

   “동정과 사랑의 전달자, 멀리 떨어진 친구들의 하인, 외로운 사람의 위로    자, 흩어진 가족의 이음새, 공통된 생활의 확산자.”

   편지야말로 사랑의 전달자이며, 친구들과의 우정을 전달하는 하인이며 위    로자인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연서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백미인 것이다. 시인 한용운은 이 연서를 ‘당신의 편지’ 라는 제목으로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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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름답게 노래하였다.


   “당신의 편지가 왔다기에

   꽃밭 매던 호미를 놓고 떼어 보았습니다.

   그 편지는 글씨는 가늘고 글줄은 많으나 사연은 간단합니다.

   만일 님이 쓰신 편지이면 글은 짧을지라도 사연을 길 터인데.

   당신의 편지가 왔다기에

   바느질 그릇을 치워 놓고 떼어 보았습니다.  

   그  편지는 나에게 잘 있느냐고만 묻고 언제 오신다는 말은 조금도 없습     니다.

   만일 님이 쓰신 편지이면 나의 일은 묻지 않더라도 언제 오신다는 말을     먼저 썼을 터인데.”  


   한용운의 이 아름다운 시처럼 사랑하는 사람끼리 보내는 ‘님의 편지’는     글을 짧더라도 사연을 길 것이고, 사랑한다는 화려한 수식어보다 보고 싶    어 못 견디겠으니 만나자는 짧은 내용이 더 가슴을 울릴 것이다.

   그런 내가 요즘 시도 때도 없이 편지를 날리고 있다. 편지를 ‘날린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종이에 사연을 쓰고 우표를 붙여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핸드폰을 통해 문자를 날리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이들의 표현을 빌    리면 핸드폰으로 편지, 즉 문자메시지를 ‘때리고’ 있는 것이다.  


0 옛날 선비들은 꽃이 피면 꽃잎에 사연을 적고 가을이 오면 편지 속에 낙    엽을 동봉해서 화신(花信)을 보내곤 하였다. 이처럼 편지야말로 워싱턴 우    체국에 새겨진 명문처럼 지친 우리들을 달래주는 위로자이자, 감미로운 사    랑이며 칭찬이 아닌가. 한 잔의 커피보다 한 통의 문자메시지가 격무에 지    친 내 아들의 피로를 회복시켜주는 영양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시인 고은은 노래하였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고은의 노래처럼 나는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때리    고 또 때릴 것이다. 누구라도 좋으니 그대가 되어 내가 때리는 편지에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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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 게 맞아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허락된다면 내게도 답장을 때려 주기     바란다.


                                                  - 끝 -

  

★ 이 책에는 작가 최인호 씨가 그의 부인, 아들, 딸 그리고 손자 손녀의 실    명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그들과의 정감어린 사랑과 진솔한 삶의 모습을     작가 특유의 사려 깊은 필치로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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