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각
생 각
■ 이어령 (李御寧)
0 문학평론가로 출발, 소설가, 극작가, 국문학자, 하이쿠 연구자, 에세이스 트, 언론인, 일본문화 연구자, 문예지 편집인, 출판인, 초대 문화부 장 관, 88서울올림픽 기획자, 새천년준비위원장, 2002한일월드컵 기획자, 이 화여대 교수, 현재 중앙일보 상임고문,
0 디지로그, 젊음의 탄생,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지향의 일본인 등
■ 머리글
0 보석들도 땅 속에 묻혀 있을 때에는 잡석과 다를 것이 없는 것들이다. 땅 밖으로 나왔을 때만이 비로소 보석들은 다른 돌들과 구별된다. 우리가 무 엇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바로 마음 깊숙이 숨어 있는 생각을 캐낸다는 뜻이다. 깊이 생각한다는 뜻의 사자성어인 ‘심사숙고(深思熟考)’라는 말에 도 깊을 심(深)자가 들어 있다.
0 누구나 마음속에 생각의 보석을 지니고 있다. 다만 캐내지 않기 때문에 잠 들어 있을 뿐이다 .아직도 우리의 교육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잠 재해 있는 생각이나 능력을 밖으로 캐내기보다는 이미 만들어진 어떤 이 념들을 머리와 가슴 속에 주입시키는 경우가 많다. 교육이 아니라 세뇌작 용이다.
0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자유로운 사고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편견과 고정관념, 그리고 이분화 된 흑백논리의 덫에 친 사람들이다. 사지가 묶여 있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지만 생각이 갇혀 있는 답답 함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사고가 틀 속에 갇혀 있음을 깨달으려 면 남이 도와줘야 할 것이다.
0 이 책은 그런 목적으로 쓰인 글이다. 벽을 넘는 방법, 360도로 열린 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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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자유롭게 달릴 수 있는 가능성, 그리고 어두운 지하 갱으로 들어가 남들이 지금껏 보지 못한 빛의 원석을 캐내는 연장, 그런 일을 돕기 위해 서 이 작은 책을 엮게 된 것이다.
《 Think 하나 》 흙과 디지털이 하나 되는 세상
■ 흙과 디지털이 하나 되는 세상
0 에티오피아의 동화 줄거리다.
- 서구의 두 탐험가가 에티오피아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정보를 수집하고 지 도를 만들었다.
- 이런 보고를 들은 황제는 두 탐험가에게 선물까지 보내며 근위병을 보내 그들이 신고 있던 구두를 벗기고 조심스럽게 흙을 털어낸 후 영문을 몰라 하는 그들에게 황제의 말을 전하였다.
- “그대들은 멀리 떨어진 강한 나라에서 왔다. 그대들은 에티오피아가 모든 나라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그대들의 눈으로 보았을 것이다. 이 땅 의 흙은 우리에게 소중하다. 우리는 그 흙에 씨앗을 심고 우리의 죽은 자 들을 묻는다. 우리는 피곤할 때 그 위에 누워 쉬고 들판에서 우리의 소 떼 에게 풀을 뜯긴다. 그대들이 계곡에서 산으로 평야에서 숲으로 걸어 다녔 던 바로 그 오솔길들은 우리 조상의 발과 우리 어린이들의 발로 만들어진 것이다. 에티오피아의 흙은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우리의 형제다. 우 리는 그대들을 환대했으며 귀한 선물을 주었다. 그러나 흙은 우리가 가지 고 있는 가장 값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흙을 단 한 알갱이도 줄 수 없다.
0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흙의 감동과 아름다움 때문에 에티오 피아인들은 3천 년의 긴 역사를 잃고 서구인의 지배를 받았다. 탐험가의 구두에 묻어 있는 보이지 않는 흙의 정보를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보지 못 했기 때문이다.
■ 정보를 가진 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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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10년이 걸릴 것이라던 아프간 전쟁이 불과 석 달 만에, 1ㆍ2차에 걸친 이 라크 전쟁이 싱겁게 끝난 것은 정보기술에 의한 무기 혁명이나 전략개념 을 몰랐기 때문이다. 정보기술의 산물인 속칭 스마트탄의 위력을.
0 말 그대로 스마트탄은 날렵하고 지능을 지닌 똘똘한 폭탄이다. 덩치와 화 력에만 의존하던 종래의 멍청한 TNT 폭탄과는 차원이 다른 무기다. 아날 로그 시대의 전쟁에서는 수평 폭격의 적중률이 낮다고 해서 비행사들에게 수직 폭격의 기술을 가르치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조종사들에게는 목 숨을 건 위험한 폭격술이었다. 그런데도 목표물을 정확히 맞힐 수 없어 마구잡이로 그 부근 일대에 다량의 폭탄을 투하하는 융단폭격 전술을 썼 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월남전 때까지만 해도 교량 하나를 파괴하는 데 평균 200~240톤의 폭탄을 투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레이저유도폭탄 이 생기면서부터 그것이 12.5톤으로 줄었고, 지난 이라크 전쟁에서는 4톤 이면 가능하게 되었다. GPS 유도탄처럼 위성으로부터 받은 위치정보로 목 표물을 향해 핀 포인트 폭격을 할 수 있게 된 까닭이다.
0 정보사회에서는 개개인의 입맛에 맞춰 제작되는 주문생산뿐만 아니라 마 케팅에서도 CRM 같은 방법이 도입되고 있다. 소비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기호나 환경을 파악하여 핀 포인트로 공략하는 맞춤식 경영관리기술이다.
의학 치료도 그렇다. 종래의 치료방식이 인체 전체에 투약하는 융단폭격 이었다면 유전자 치료는 문제의 세포만 핀 포인트로 공략하는 ‘텔러 메이 드 메디슨’이다. 교육도 예외가 아니다. 인터넷을 통해 학생 한 사람 한 사 람을 대상으로 한 맞춤식 교육이 개발되고 있다. ‘마이 페이스 레슨’이라는 것이 그렇다.
0 최첨단 스마트탄은 걸프전 당시 후세인의 침실은 물론 침대까지 정확하게 박살냈다. 그러나 후세인은 죽지 않았다. 사전정보가 누설되어서도 아니다. 이슬람교도들은 문제가 생기면 일라에게 구원을 청하는 아주 오래된 풍습 으로 밖에서 천막을 치고 자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정밀한 유도탄이 무용지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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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기술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유도탄 같이 기술을 다루는 하 드웨어의 정보기술이요. 또 하나는 상대방의 문화나 인간의 마음을 읽는 소프트콘텐츠에 관한 것이다. 전자를 기계기술, 후자를 지식기술이라고 구 별하기도 한다.
■ 사회 자본이 된 문화
0 지금까지 사회를 지배해온 것은 부국강병의 군사력과 경제력이었다. 지금 까지도 정보기술은 부국과 강병의 수단이요. 도구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 다. 지식 자체나 문화를 목적으로 정보기술이 사용되는 경우는 아직 미미 하다. 하지만 조지프 나이(Joseph S. Nye)의 지적대로 21세기로 들어서면 서 세계는 부국강병을 토대로 한 하드파워에서 문화 즉 교육, 학문, 예술, 과학, 기술 등 인간의 이성과 감성적 능력이 빚어내는 창조적 산물과 연결 된 소프트 파워로 옮겨갔다. 힘의 명령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코맨드파 워(command power)에서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cooperative power)'이 외교와 국방 등에서도 중요한 작용을 한다. 한 마디로 기계를 움직이는 기술보다 사람을 움직이는 기술이 진짜 정보기술의 힘이 된 것 이다. 그래서 기계의 기능과 효능의 가치에서 어떻게 하면 사람을 즐겁게 할 수 있고 보람과 감동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진짜 정보기술의 혁명 이다.
0 이제 더 나아가 조지프 나이는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를 어떠한 방식으로 활용할지를 결정하는 기술인 스마트파워를 강조한다. 스마트파워는 하드파 워와 소프트파워를 함께 결합한 힘이다.
《 Think 둘 》 종소리처럼 생각이 울려 왔으면
■ 종소리처럼 생각이 울려 왔으면
0 언제부터인지 모른다. 책장 한 구석에 작은 종 한 쌍이 놓여 있다. 우연히 눈에 띄어 무심코 흔들어 보았더니 뜻밖에도 투명한 소리가 난다. 크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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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 트리에 장식으로 매다는 종인 줄로만 알았는데 무슨 금속 같은 것에 도금한 진짜 종이었던 것이다. 높은 소리를 내는 것이 은종이고, 조금 낮 은 소리를 울리는 것이 금종이다. 별로 눈여겨 본 적도 없던 것이 소리를 내는 순간 무엇을 발견했을 때와 똑같은 충격을 받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 소리는 먼지 속에 감춰져 있었던 것일까. 내 손에 닿 기전까지 그것은 하나의 돌멩이와 같은 존재였거나 아니면 한 번도 존재 해 본 적 없는 그냥 텅 빈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지금 목숨을 지닌 새처럼 날개를 퍼덕이며 환한 대낮 속으로 날고 있다.
0 시인 청마(靑馬, 유치환)는 ‘깃발’ 이라는 시에서 맨 처음 공중에 깃발을 단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는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맨 처음 종을 만들어 울릴 생각을 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고 싶다. 종은 육체이고 숨소리는 영 혼이라는 진부한 아날로지(analogy : 유추) 때문이 아니다. 내가 오늘 아 침 우연히 작은 종을 흔들어 그토록 투명한 소리를 내는 것을 듣고 놀랐 듯 처음 종을 만들어 그 소리를 들은 사람도 그렇게 놀랐을 것이다.
지금까지 책장 한 구석의 먼지 속에서 침묵하던 소리, 흔들어 주기 전까 지는 존재하지 않던 그 맑은 소리. 더 이상의 의미를 붙이지 말자. 종은 침묵하지만 그 안에 수많은 소리를 담고 있다. 우리 육체의 욕망들처럼. 풀을 뜯는 양떼의 불타는 식욕처럼 말이다.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0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ils.)’는 존 던(John Donne) 의 기도서에 나오는 산문 가운데 하나다. (그는 시보다 아름다운 산문을 썼다.) 이제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는 존 던의 기도서가 아니 라 누구나 헤밍웨이의 소설 그리고 영화를 생각하게 된다. 헤밍웨이가 소 설을 다 쓴 다음 거기에 합당한 소설 제목을 찾다가 우연히 존 던이 쓴 이 구절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존 던의 그 말들은 벼락처럼 그의 머리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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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많은 사람들이 이 종소리를 무슨 축제의 소리나 일상적으로 울리는 종소 리로 착각한다. 하지만 존 던의 종은 조종(弔鐘)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누 군가 죽으면 마을 전체에 그의 죽음을 알리는 교회당의 종소리가 울린다.
릴케의 ‘말테의 수기’에서도 읽은 적이 있다. 옛날에는 하잘것없는 사람의 죽음이라고 해도 죽음은 장엄하고 엄숙한 사건이어서 가장 큰 뉴스거리 였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조종을 울렸으며, 사람들은 그것이 누구의 죽 음을 알리는 종소리인가를 궁금해 한다. 잠시 일손을 멈추고 죽은 자를 위 해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고개를 숙여 슬픔을 표시한다.
그러나 존 던은 말한다. 그것이 누구를 위해 울리는 종소리인가를 묻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나를 위한 종소리, 내 죽음의 조종이기 때문 이다. 어떤 사람들도 완전한 섬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홀로 있는 섬 이 아니다. 아무리 홀로 떨어져 있으려고 해도 인간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 다. 섬이 아니다. 나는 대륙의 일부다. 아무리 작은 모래나 흙덩어리라고 해도 그것은 광활한 대륙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존 던은 말한다. “바다 에서 밀려오는 파도에 모래 한 알과 작은 흙덩어리가 바다에 휩쓸려 가면 그만큼 대지는 가벼워지고 작아진다.”고 …….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왜 미국 청년 로버트 조던은 그와 관계도 없는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죽어야만 했는가. 그 제목이 소 설의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 아니 종처럼 울리게 한다.
■ 침묵하던 소리를 듣고 싶다
0 서양 사람들은 방울도 종도 다 같이 벨(bell)이라고 부른다. 방울이나 종 이나 크기가 다를 뿐 서양 것은 그 안에 소리를 울리는 장치가 있다. 말하 자면 공이가 내부에서 때려 소리를 낸다. 하지만 동양의 에밀레종 같은 한 국의 범종은 밖에서 공이로 쳐야 한다. 몸을 흔들어줘야 소리를 내는 서양 종과 달리 한국의 범종은 움직이지 않는다. 한 자리에 매달려 가만히 그리 고 무겁게 그냥 드리워 있다.
그것이 안에서 울리는 것이든 밖에서 울리는 소리든 우리의 모든 사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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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처럼 울린다. 그러나 혼자서는 울리지 못한다. 무엇인가가 내 몸을 흔들어주지 않고는, 누가 밖에서 공이로 때려주지 않고는 내 안에 고여 있 는 생각의 소리를 울릴 수 없다.
0 오늘 아침 우연히 흔든 그 종소리처럼 내 육체에서도 침묵하던 소리들이 울려 왔으면 좋겠다.
아직도 어느 구석엔가 맑은 소리를 감추고 내 손이 닿기를 기다리는 작 은종들이, 크리스마스 데코레이션이 아니라 진짜로 흔들면 울리는 금종, 은종이 남아 있을 것이다. 안에서도 치고 밖에서도 치는 종처럼 생각이 울 려 왔으면 좋겠다.
《 Think 셋 》 우물에 빠진 당나귀처럼
■ 통나무 자르기
0 나무의 한 가운데를 톱으로 자르면 동심원의 나이테 무늬가 나타난다. 하 지만 서양 사람들이 장작을 팰 때처럼 나무를 세워놓고 자르면 그 동그라 미들은 온데간데없고 물결처럼 흐르는 나무결의 곡선 모양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나무로 죽창을 만들 때처럼 사선으로 비스듬히 쳐보면 동그라미도 줄무늬도 아닌 타원형 파문이 생겨난다.
같은 통나무인데도 자르는 방식에 따라 이렇게 전연 다른 무늬가 생겨나 는 것처럼 우리네 삶의 무늬도 그와 같이 변한다. 슬픔이 즐거움이 되기도 하고 가난이 풍요로 바뀌기도 한다.
나의 운명, 나의 가정 그리고 사랑과 사업, 또 이념이나 나의 조국-그 모든 것들이 통나무를 자를 때처럼 다르게 변한다.
0 사람의 몸은 아주 놀라울 정도로 적은 영양분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많은 영양분을 섭취했을 때는 그것을 처리하는 장치와 방도를 모른다. 그 바람에 비만이나 당뇨병 그리고 고혈 압 같은 성인병이 나타나게 된다. ‘뽀빠이’ 같은 만화 영화에 나오는 에너 지의 원천인 시금치도 지나치게 많이 먹으면 결석에 걸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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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려야 한다
0 사람의 몸만이 아니다. 핸드백, 서랍, 호주머니, 신발장, 옷장을 열어 보라. 이미 용도가 폐기된 잊혀 진 물건들이 치매에 걸린 노인처럼 누워있다.
아이들의 물건일수록 버릴 것이 많다. 손과 발이 커지니 작아진 신발이나 장갑도 생겨난다. 키가 자라니 맞지 않는 옷들이 널려 있게 된다. 생각도 자라니 어제 읽던 책이나 오늘 갖고 놀던 장난감도 넝마처럼 쌓이게 된다.
0 우리도 아이처럼 매일 자란다. 그러니 조금 전까지 통했던 상식과 지식들 이 쓸모없는 것으로 변한다. 그렇게 우리를 괴롭히던 고정관념들, 집념이 나 원한도 모두 버려야 한다. 지식도 영양분처럼 넘쳐날 때가 더 위험한 법이다. 샘물은 퍼 써야만 새 물이 고인다. 고여 있는 지식도 퍼내야 새로 운 생각이 새 살처럼 돋는다.
■ 물에 빠진 당나귀처럼
0 당나귀가 빈 우물에 빠졌다. 농부는 슬프게 울부짖는 당나귀를 구할 도리 가 없었다. 마침 당나귀도 늙었고 쓸모없는 우물도 파묻으려고 했던 터라 농부는 당나귀를 단념하고 동네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동네 사람들은 우물을 파묻기 위해 제각기 삽을 가져와서는 흙을 파 우물을 메 워갔다.
당나귀는 더욱 더 울부짖엇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웬일인지 당나귀가 잠 잠해졌다. 동네 사람들이 궁금해 우물 속을 들여다보니 놀라운 광경이 벌 어지고 있었다. 당나귀는 위에서 떨어지는 흙더미를 털고 털어 바닥에 떨 어뜨렸다. 그래서 발밑에 흙이 쌓이게 되고, 당나귀는 그 흙더미를 타고 점점 높이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당나귀는 자기를 묻으려는 흙을 이용해 무사히 그 우물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0 뒤집어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삶에는 거꾸로 된 거울 뒤 같은 세상 이 있다. 슬픔이 즐거움이 되기도 하고, 가난이 풍요로 바뀌기도 한다. 사 람들이 자신을 매장하기 위해 던진 비방과 모함과 굴욕을 털어버리면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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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려 자신이 더 성장하고 높아질 수 있는 영혼의 발판이 될 수도 있다.
《 Think 넷 》 뽀빠이와 낙타의 신화
■ 뽀빠이와 낙타의 신화
0 뽀빠이 라고 하면 시금치를 생각하고 시금치에는 철분이 많아 아이들 건 강에 좋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다. 뽀빠이 신화는 식품 분석을 할 때 실수로 소수점을 한자리 위로 잘못 찍히는 바람에 철분 함유량이 10배 로 불어났고 이 실수로 미국의 시금치 소비량이 33% 늘어나고 독일에서 는 수백만 어린이들에게 시금치를 먹였다.
그러나 우리를 정말 놀라게 하는 것은 시금치의 실제 철분 함유량이 100g당 2.2mg으로 달걀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착 오가 1930년대에 밝혀져 수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뽀빠이 신화가 오늘날 까지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 있다는 점이다. 시금치를 과도하게 먹으면 근 육이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신장에 결석증이 생긴다는 의학적 진실 앞에 서도 뽀빠이 신화는 꺾이지 않고 세계를 제압한다.
0 낙타는 성경 속에서 운다. 만화가 성경으로 옮겨오고 점 하나가 문자 하나 로 바뀌게 되면, 이번에는 낙타의 신화가 등장한다. 마태복음 19장 24절 과 마가복음 10장 25절을 펼쳐보라.
거기에는 분명히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약대(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우니라’ 라고 되어 있을 것이다. 부자가 천국으 로 들어가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서커스단에 소속된 것도 아닌 낙타가 무엇 때문에 바늘귀로 들어가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도 이 성경 구 절만큼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그토록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드물 것 이다. 더구나 많은 연구가들이 이 성경 말씀이 오역이라는 사실을 누누이 지적하는데도 말이다.
발터 크래머도 ‘상식의 오류사전 2’에서 오류 중 하나로 이 성경 구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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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역을 예로 들고 있다. 원전대로 하자면 그것은 ‘낙타’가 아니라 ‘밧줄’인 데 잘못 번역되었다는 것이다. 아람어(Aram어)로 밧줄은 ‘gamta'고 낙타 는 ’gamla'다. ‘T’와 ‘L'의 한 글자 차이로 밧줄은 낙타가 될 수도 있고, 낙타는 밧줄로 변할 수 있다. 결국 그 한자 차이의 잘못으로 밧줄 대신에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 신화적 사고와 허구의 세계
0 그것이 오타요, 오역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난 뒤에도 여전히 뽀빠이는 시금치를 먹고 괴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사막을 건너야 할 낙타는 2천 년 동안이나 바늘귀 앞에서 점프를 계속한다. 사실과 과학이 지배하는 사고의 세계에서는 벌써 폐품이 되었어야 할 시금치 통조림과 낙타의 곡예가 어 째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흔들고 흥분시키고 현실 이상의 힘으로 우 리 앞에 군림하는가. 정말 놀라운 힘으로 뽀빠이가 거인 블루투스를 때려 눕히고, 가난한 자가 부자의 부러움을 사는 허구의 그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0 만화나 신화의 공간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은 사실이나 논리가 아니다. 시금치가 갑자기 불로초 같은 환상의 빛을 발하고 사막을 건너는 대상들의 낙타가 바늘귀만한 천국의 문 앞에서 금빛 머리를 치켜세우고 우는 그 충격은 우연과 허구의 세계에서만 가능하다.
■ 꿈꾸는 인간 - 미치광이와 연인과 시인들
0 소수점이 한 자리 잘못 쳐지고, 글자 한자를 바꿔 읽는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없었던 허구의 세계가 창조된다. 그러한 사실들을 의도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사람들이 바로 셰익스피어가 정의한 ‘꿈구는 인간’ - 미치광이와 연인과 시인들이다.
* 3F : 허구(Fiction), 여성(Femail), 감성(Feeling)
0 풀은 무엇인가를 붙이는 접착력이 생명이다. 붙지 않는 풀은 이미 풀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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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그러나 이 약품을 잘못 혼합하여 붙였다가도 떨어지는 불량품이 만 들어 졌을 때 3M 같은 메모지용 풀이 발명된 것이다. 떨어지는 풀의 약점 과 역기능을 창조적으로 살리면 종래의 접착제와 전혀 다른 신상품이 태 어 난다. 붙일 수도 뗄 수도 있는 융통성 있는 새로운 풀의 발상은 풀이라 는 개념 자체를 바꿔놓았으며 붙다/ 떨어지다 의 정반대되는 개념을 하나 로 모은 ‘포스트 잇’이 생겨난다.
0 풀이 붙는 것처럼 녹음기는 소리를 기록하는 작용을 한다. 그런데 공장장 이 우연히 한 공원이 녹음기에서 녹음장치를 떼어내고 대신 재생장치를 첨가하여 스트레오 음악을 즐기는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녹음이 안 되는 녹음기, 말하자면 녹음기를 재생기로 패러다임을 바꾼 그 발상에서 소니는 세계 최초로 워크맨을 개발하였다. 붙지 않는 풀, 녹음이 안 되는 녹음기 - 그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성경 구절처럼 오역이 창조로 변하고, 잘못 찍힌 소수점이 블루투스를 때려눕히는 뽀빠이의 놀라운 힘이 되는 기적의 파편들이다.
0 허구의 F(Fiction)를 향해 낚싯줄을 던져라. 시인처럼 연인처럼 혹은 광기 어린 사람처럼, 일상성에서 탈출하는 탈영병이 되어라. 그 행복한 우연의 오타와 오역 속에서 당신은 때때로 바늘귀를 향해 뛰어오르는 낙타의 놀 라운 천국을 볼 것이다.
《 Think 다섯 》 벽을 넘는 두 가지 방법
■ 벽을 긁는 글, 그림, 그리움
0 인간은 벽을 만들었다. 허허 벌판에서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 시에 벽 속에서는 감옥이나 동굴에서처럼 살아갈 수 없다. 벽에 의지하고 벽에 반발하는 앰비버런스(모순)에서 회화가 생겨난다. 그림은 벽에 뚫어 놓은 마음의 창이기 때문이다. 창을 벽의 상처라고 말하듯 그림 또한 피가 흐르는 벽의 상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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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누가 뭐라고 해도 회화는 벽을 죽이기 위해 존재하는 인간정신의 산물이 다. 허공은 그림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 자체가 이미 회화요, 빛이요 구도 이기 때문이다. 벽이 있기에 시야를 가리는 밋밋한 차폐막이 있기에 그림 을 붙인다. 붙인다기보다 뚫는다. 원시인의 동굴에 알타미라 같은 벽화가 발견되는 것은 바로 그 동굴을 뚫어 들판의 짐승, 숲 속의 사슴들에게 나 아 가려고 한 것이다. 그림을 붙이는 순간 그만큼의 벽은 사라진다.
0 어원적으로도 그림이라는 말, 긁는다라는 말 그리고 글이라는 말과 그리움이라는 말. 그것은 뿌리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따로 떨어져 불리 던 그 말들이 하나의 초점으로 합쳐지면서 떼어낸 달력의 벽면 위에는 글 과 그림과 그리움 같은 것들이 하나의 관자놀이처럼 뛴다.
아오모리의 벽화
그림은 긁는다에서 나온 말이다.
그림은 그리움에서 나온 말아다.
그림은 글에서 나온 말이다.
일본에 징용 온 조선 사람이
아오모리 탄광의 어두운 벽을
손톱으로 긁어 글을 썼대요.
어무니보고시퍼
고향의 그리움이
글이 되고
그림이 되어
남의 땅 벽 위에 걸렸대요.
아이구어찌나 어무니보고시퍼
맞춤법에도 맞지 않은 보고 싶다는 말
한국말 ‘싶어’는 참을 수 없는 욕망의 언어
배에 붙으면 먹고 싶어 배고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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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에 붙으면 듣고 싶어 귀 고프고
눈에 붙으면 보고 싶어 눈 고프고
가슴에 붙으면 가슴 아파 가슴 고프고.
“마음의 붓으로 그려 바친 부처님 앞에 엎드린 이 몸은.....” ‘보현십이 가’의 한 이두 문자처럼 해독하기도 힘든 그리움이 된대요.
옛날 옛적 이 일본 땅에 끌려온 조선 청년이
탄광 벽을 손톱으로 긁어 글을 썼대요.
어무니 보고시퍼.
그림은 긁는다에서 나온 말이다.
그림은 그리움에서 나온 말이다.
그림은 글에서 나온 말이다.
벽을 긁는 글과 그림과 그리움은 벽을 넘는다.
■ 세계에서 가장 가벼운 벽
0 나는 올림픽 개폐회식을 기획할 때에도 그 주제를 ‘벽을 넘어서’라고 했 다. 정말 몇 년 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철의 장막이 무너졌다. 서구 문화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벽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도시든 개인의 삶이든 모든 것이 두꺼운 벽을 기본으로 이루어진다.
서양의 폴리스 국가란 무엇인가. 그것은 완전히 성벽 안에 세운 도시다. 유럽은 섬이 아닌 대륙인데도 일찍부터 고층화가 이루어졌는데, 성벽이라 는 제한된 도시 안에서 살아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시가 커지면 옆으로 퍼지지 못하고 위로 치솟아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
0 거기에 비해 한국 집은 가구식(架構式)이라고 하여 기둥을 세워 놓고 집을 지은 비내력벽(非耐力壁)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전통적인 한옥은 벽을 터도 무너지지 않지만 양옥은 집 전체가 무너지고 만다.
■ 지하실 문화와 개구멍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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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지하실은 땅 밑을 팠기 때문에 그 벽은 땅과 직접 연결되어 있어 절대로 허물 수 없다. 서구의 문화, 예술, 정치적 담론과 온갖 음모 그리고 감금도 지하실에서 만들어진다.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에는 지하실이라는 것이 없다. 정반대로 벽에 구멍 을 뚫은 개구멍이라는 것이 있다. 개구멍을 통해 사람이나 개는 벽을 횡단 한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이 계획적으로 뚫었다기보다 허술한 담벽이어서 어디엔가 자연스럽게 생긴 구멍이다. 이 개구멍을 통해 궁궐과 사가의 내 통이 가능했고, 이 도령과 춘향이의 은밀한 사랑이 이뤄졌다.
0 개구멍이 뚫린 이 허술한 담벽을 인공적인 것으로 디자인 해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 병풍이다. 병풍이야말로 지하실문화와 다른 한국 문화의 특성을 한 눈에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병풍은 이 세계에서 가장 가볍고 얇으며 가변적인 벽이다.
상황에 따라 신축성 있게 적응한다. 부드러운 벽, 생멸하는 벽, 필요할 때 펴면 벽이 되어 공간을 가르고 막고 가린다. 그러나 그 필요가 없어 접어 가두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콘크리트 벽 같으면 쌓고 허무는데 큰 공사 를 해야 하지만 병풍으로 막은 벽은 손 하나로 쌓고 허문다.
이렇게 쉽게 세우고 허물 수 있는 벽을 만들어 그 견고하게 우리를 에워 싸는 지하실 벽을 극복한다. 그것을 넘어 자유롭게 왕래한다. 화조나 문방 구가 그려져 있는 아름다운 병풍이 너와 나를 가르고 인간과 자연을 분할 하는 서구의 그 두려운 벽 문화를 탈(脫) 구축한다.
《 Think 여섯 세 마리 쥐의 변신 》
■ 세 마리 쥐의 변신
0 ‘지적재산권’이라고 하면 극소수 사람에게나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고정관념에 불과하다. 앞으로의 세상은 누구나가 직접 혹은 간접으 로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두 재산’을 갖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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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가장 흔한 쥐를 놓고 생각해 보자. 집 안에 있는 동물 중 소, 닭, 돼지 등 은 소중한 재산이 되지만 쥐는 해만 준다. 그런데 이 쥐에게 인간의 상상 력을 불어 넣어 재창조한 미키마우스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는 쥐, 거대한 부를 창출하는 재산이 되는 쥐로 변신한다.
- 미키마우스 : 1930년대 미국의 불황 극복의 영웅으로 디즈니랜드라는 테 마파크의 원조
- 중국은 한 때 미키마우스 캐릭터가 보이는 곳에 커다란 쥐덫을 만들어 미 국의 자본주의를 경계했지만 지금은 디즈니랜드 유치 건설 중
- 미국은 미키마우스 캐릭터의 저작권을 75년에서 20년 더 연장함
0 월트 디즈니가 가난했던 시절, 그가 살던 집에 드나들던 쥐 한 마리가 그 의 만화에 등장하면서 디즈니의 지적재산으로 변하고 그것이 회사 전체 그리고 미국, 나아가서는 인류의 글로벌한 재산으로 변신하여 큰 감동과 부를 가져다주었다.
■ 미키마우스에서 피카추로 진화
0 20세기 미키마우스의 쥐가 21세기 일본에 오면 피카추로 진화했다는 사 실이다.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모아 인터넷이 다운되는 현상까지 일으킨 피카추 역시 쥐에서 발생한 상상물이다. 미키마우스와 달 리 꼬리가 번개 치는 모양으로 되어 있는 전기 쥐로 포켓몬스터 가운데 주인공 격인 캐릭터이다.
- 피카추 : 일본 말에서 나온 것으로 한국말로 하면 ‘번쩍번쩍’의 의태어
- 포켓몬스터 : ‘호주머니 괴물’이라는 뜻으로 일본인 특유의 축소지햔 괴물 이다.
0 미국의 지적 상상적 산물이 미키마우스를 낳은 것이라고 한다면 일본의 축소지향적인 지적, 상상적 특성 그리고 그 모방력이 새로운 국부의 재산 이 된 피카추의 포켓몬이 된 것이다.
이 쥐 한 마리의 놀라운 변신을 통해서 우리는 일본이 미국의 뒤를 이어 서 세계적인 지적 재산권 국가로 변신하고 있는 그 상징적 지표를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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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쥐의 또 다른 변신, 마우스
0 그런데 여기 또 하나의 쥐가 우리 눈앞에 출현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컴 퓨터와 인터넷을 할 때 사용하는 쥐 모양으로 생긴 ‘마우스’ 다. 세계의 누 리꾼들은 이 마우스를 클릭해서 정보의 바다로 출항한다. 클릭(딸가닥. 쥐 가 우는 소리의 의성어)하는 마우스의 그 작은 소리가 TNT 수천 개가 터 지는 폭발보다도 더 큰 위력으로 전 지구에 울려 퍼진다.
0 컴퓨터의 마우스는 사이버세계라는 정보시대의 새로운 황금의 땅, 신대륙 을 인류에게 가져다주었고, 소위 지적재산권이 공업소유권인 물적재산권을 능가하는 새 시대를 연 것이다.
■ 세계 최초 생물 특허를 얻은 온코마우스
0 특허와 저작권이라는 개념을 합쳐서 오늘날 지적재산권, 줄여서 IPR이라 고 하는데 IPR의 가장 상징적인 것이 생물 특허이다. 지금까지의 특허는 물질 특허 위주였다.
0 BT(바이오 테크놀로지)가 등장하면서 유전자에 관련된 생물 특허물이 나 오게 되었는데 가장 상징적인 것이 하버드의 ‘온코마우스’이다. 이것은 쥐 에 암세포 등 각종 병리실험 유전자 조작을 하여 특허품으로 생산 판매하 고 있는데 특허품이 된 쥐는 한 마리에 100달러로 그 시장은 어마어마하 다. 우리나라는 1994년 12월 서정선 교수가 두 마리의 쥐를 특허냄으로써 한국의 지적재산권 제1호가 되었다.
■ 새로운 3D (Digital, DNA, Design)
0 세 마리의 쥐는 한국 국민이 기피하고 있는 산업시대의 3D (Difficult, Dirty, Dangerous)가 온 국민이 희망과 기대를 걸고 있는 새로운 3D가 될 수 있음을 상징하고 있다. 인터넷 시대를 상징하는 마우스는 디지털의 D, 미키마우스는 디자인 파워를 의미하는 D, 하버드의 마우스는 DNA의 D를 각각 상징하는 지적 재산 시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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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우리가 과거 산업시대의 3D에 매달려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제조업은 지금까지 우리를 살려온 경제이긴 하지만, 빨리 이 제조업에서 IT나 문화 산업, 지적산업으로 옮겨가야 한다. 기계지식, 기계기술이 옮아가 구시대의 3D가 새 시대의 3D로 옮겨가는 데 세 마리 쥐의 반전은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갓이다. 현대의 페스트균이라 할 수 있는 각종 공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설령 그것이 제조업이라 해도 새로운 3D에 의해서 즐 겁고 깨끗하고 편한 새로운 지적산업으로 바뀌어져야 하는 것이다.
두말할 것 없이 그 세 가지 파워의 엔진이 되고 연료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지식이고 그것을 기르고 지켜주는 것이 지적재산권이라는 새로운 권력이다. 정치권력, 경제권력이 이 지적재산권의 권력과 손을 잡지 않으 면 페스트를 퍼뜨린 십자군의 행진과 다를 것이 없다.
《 Think 일곱 》 미키마우스의 신발
■ 발은 뿌리인가. 신은 신(神 )인가.
0 ‘신발’처럼 모호하고 이상한 말도 없다. 신을 신으면 신발이 되고 신을 벗 으면 맨발이 된다. 그러니까 신발은 신을 신은 발이고 맨발은 아무것도 신 지 않은 발이다. 신발의 반대말은 맨발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 은 ‘신발’을 ‘신’과 같은 존재로 생각한다. ‘신 한 켤레’를 ‘신발 한 켤레’라 고도 하고 신을 벗을 때도 ‘신발을 벗는다.’ 고 한다. 심지어 맨발은 아무 것도 신지 않은 발인데도 ‘맨발 벗고 뛴다.’고 한다. 신과 발이 동일시 되 거나 혼돈을 일으키는 예들이다.
0 모든 생명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 인간을 이 흙과 깊이 연결하 는 것이 다름 아닌 발이다. 나무로 치면 발은 뿌리다. 대지에 찍힌 발자국 은 인간이 자연적 존재임을 인정하고 확인하는 도장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지상에 남기는 것은 진짜 발자국이 아니라 신발자국이다. 문명인들 은 대지의 자연과 맨발로 직접 접촉하는 아프리카의 원주민처럼 살 수 없 다.
대지와 인간, 흙과 육신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한 꺼풀의 엷은 차단막. 그것이 신이고 신발이다. 그것 때문에 어머니인 대지를 직접 맨발로 느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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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못한다. 맨발에서 신발로 변화한 것이 바로 자연에서 문명으로 옮긴 인 간 의 운명이다.
■ 하회 마을과 맨발의 여왕
0 하회 마을을 방문했던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우리 풍습대로 신을 벗 고 대청마루에 오르자 외신기자들은 일제히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렸다. 황 실 사상 처음 있었던 여왕의 맨발 모습은 유럽의 특종기사가 되었다. 그러 나 국내 미디어들은 어떤 취재 경쟁도 벌이지 않았다.
문명화할수록 사람들은 맨발에 대해 콤플렉스를 갖는다. 맨발을 야만스러 운 것. 수치스러운 것. 노출된 섹스라고 생각하는 서양 사람들은 심지어 피아노나 가구의 다리에까지 헝겊으로 싸 신발을 신긴다.
0 “신을 신고 걸으면 길을 잃을 것 같다.”고 말하는 인디언들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인도 사람들만 해도 맨발로 축구를 한다. 가난해서가 아니다. 인도가 1950년 브라질 월드컵 본선 진출권을 얻고도 대회 출전을 포기해 야만 했던 것도 FIFA의 ‘축구화를 신지 않으면 출전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인도 선수들은 “맨발이 아니면 뛸 수 없다”며 기권했으며 그 이후 단 한 번도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다.
0 ‘신데렐라’는 17세기 프랑스 작가 샤를 페로가 구전되던 민간 설화를 소설 로 재구성한 것이다. 영어의 ‘신데렐라’는 불어의 ‘상드리옹’으로 ‘재를 뒤 집어 쓴 계집애’ 혹은 ‘더러운 부엌데기’라는 뜻이다
신도 원래는 유리구두가 아니라 은회색 다람쥐 가죽신이었는데 그 음(音) 이 비슷한 유리로 와전되어 유리구두가 되었다.
유리는 궁전의 샹들리에와 잘 어울리며 그것은 숲에서 궁정으로, 하녀에 서 왕자의 신부로 신분 상승을 기구하는 도시인들의 꿈을 담는 그릇이다.
■ 달마의 신발
0 신데렐라의 외짝 유리 구두와는 정반대에 있는 또 하나의 신발은 달마의 신발이다. 면벽(面壁) 참선하던 달마, 양나라 무제의 부덕과 오만함을 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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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죽음을 당한 달마. 그리고 관 속에서 다시 살아나 신발 한 짝만 남기고 서쪽으로 떠나갔던 달마.
그가 남기고 간 외짝 신발은 선(禪) 세계를 찾아 서천행으로 통하는 작은 문이다. 뿌리를 하늘에 박고 살아가는 자의, 자유로운 자의 신발이다. 지상 의 구속으로부터의 탈출. 궁정으로 향한 신데렐라와는 방향이 다른 그 신 발들은 ‘삼국유사’ 속에서도 많이 등장한다. 신발을 나란히 벗고 바다 건너 로 사라진 연오랑과 세오녀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 나이키와 알라신
0 나이키사가 ‘에어(Air : 공기)’ 라는 알파벳을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디 자인한 농구화를 아랍권에 팔려다가 호된 시련을 겪었다. 그것이 ‘알라’의 아랍어 표기를 연상시키며 신발에 ‘알라’라는 단어가 등장했다면 이는 분 명 신성모독에 속하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0 신발 한 짝을 벗어놓고 달마는 서천행을 떠났고, 신데렐라 는 궁정행을 했 다. 인간은 이렇게 신발을 놓고 정반대의 꿈을 꾼다. 그러나 미키마우스의 꿈은 무엇인가.
뜻밖에도 그가 신은 신발에 바로 그 비밀이 숨겨 있다고 하면 과연 사람 들은 그 말을 믿을 것인가. 그러나 그렇게 풀이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고 보니 정말 자기 발보다 훨씬 큰 신발을 신고 있는 미키 의 모양이 웃음과 귀여움을 자아낸다. 그렇다 우리는 그런 신발을 신고 다니는 아이들. 아니다. 우리가 한 번쯤 어렸을 때 경험해 본 적이 있는 것처럼 남몰래 아버지의 큰 신발을 신고 나와 놀던 바로 그 모습인 것이 다. 아이들은 자기 발에 안 맞는 어른 신발을 왜 굳이 신고 다니려고 하는 것일까. 잘못하면 걸려 넘어질 수도 있고 걷기에도 거북한 신발을 질질 끌 면서 왜 그렇게 흡족한 웃음을 지었던 것일까.
미키의 커다란 신발에는 자신의 작은 발로는 결코 다 채울 수 없는 헐렁 한 공백이 있다. 이 공백이야말로 땅의 현실로는 다 채울 수 없는 하늘의 공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미키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만들어 내는 꿈과 창조적 사고를 그 공백 속에 숨겨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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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어 있는 창조 공간
0 미키마우스의 신발은 신데렐라처럼 한 치의 틈도 없이 딱 들어맞는 신발 이 아니다. 신발의 크기만으로는 결코 그것을 미키의 신원증명으로 삼을 수 없다. 미키의 신발은 규격에 의해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고 남은 그 채워지지 않은 공백의 크기에 의해 확인된다.
어울리지 않는 그 큰 신발은 더럽고 비겁하고 눈치만 보고 사는 한 마 리 생쥐에게 고양이를 제압하는 슈퍼파워를 준다. 미키의 발은 튼튼하게 땅을 딛고 있지만 동시에 발로 채울 수 없는 공백 - 그 하늘을 신고 있다.
0 미키마우스가 신은 치수 큰 아버지의 신발은 땅을 딛고 있으면서도 하늘 의 구름 같은 허공을 끌고 다닌다.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에서 미키마우스 의 신발로 - 그것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생각 바꾸기, 신발 바꾸기 다.
《 Think 여덟 》 만리장성과 로마가도
■ 만리장성과 로마가도
0 거의 같은 무렵 로마인은 ‘아피아’ 같은 로마가도를 만들었고, 중국인들은 만리장성의 세웠다. 돌을 쌓아서 벽을 만드는 것이나 돌을 깔아 길을 만드 는 것은 다 같은 토목기술에 속한다. 로마가도의 돌을 세우기만 하면 만리 장성이 되고 만리장성의 돌을 눕히기만 하면 로마가도가 된다. 로마인들도 만리장성을 쌓을 수 있었고, 중국인들도 로마가도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 다.
0 성은 방어를 위한 것이고 길은 공격을 위한 것이다. 소설가 시오노 나나미 의 증언대로 로마가 전 유럽을 식민지로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현지에 군대를 주둔시키지 않고 언제고 필요할 때 파견할 수 있는 수송로를 만들 었기 때문이다ㅣ. 그러나 로마가도는 로마 군대만이 아니라 적들이 침공할 때도 똑같이 이용될 수 있는 위험성을 갖는다. 그런데도 로마인들은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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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위험성보다 공격의 능률을 선택하고 거기에 희망을 걸었다. 로마가도와 만리장성, 똑 같은 기술과 인력을 가지고도 한 쪽은 공격용 가도를 만들 고, 한 쪽은 방어용 만리장성을 쌓았다. 이 생각의 차이와 한계가 로마인 과 중국인의 서로 다른 역사와 문명을 낳게 했다.
0 정보 기술을 의미하는 IT라는 말 뒤에는 악마의 꼬리처럼 ‘거품’과 ‘위기’ 라는 말이 붙어 다닌다.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말레이시아는 사이버 법을 만들기 위해 200개 이상의 법률을 고쳤으며 싱가포르는 연중 계속 사이버 법에 대한 개정을 논의하고 있다. 프라이버시 침해 사이버 범죄, 해커로부 터 정보의 보호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가장 자유롭다는 사이버공간에 만리 장성의 돌 벽이 쌓여간다.
0 무릎이 깨지고 피멍이 들어도 우리는 세발자전거를 버리고 두발자전거를 배웠다. 위태롭게 두 발로 일어설 때 돌상에 모인 어른들은 박수를 보내고 기뻐하지 않았던가. 벤쳐리스트여! 쓰러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라.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자전거를 배울 때 그랬던 것처럼. 성이 아니다. 길이다. 생각을 바꿔라.
《 Think 아홉 》 당신은 정말 거북선을 아는가.
■ 당신은 정말 거북선을 아는가.
0 임란 때의 일본 배와 그 전략을 알게 되면 거북선은 일본의 근접전을 피 하는 방패 역할과 동시에 놋토리 전법(배를 상대방 배에 가까이 붙인 다음 상대방 배에 올라타 싸우는 전법)을 역이용하여 공격하는 날카로운 창이기 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이순신 장군의 승리는 거북선의 하드 웨어 발명보다 왜군의 전법에 대응한 소프트웨어의 전술적 산물이며 그 승리라고 할 수 있다.
거북선을 실체론으로 보지 않고 관계론으로 생각의 틀을 바꾸면 새로운 사실들, 진정한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이 드러난다. 지금까지 거북선의 발 명가로서의 이순신 장군이 아니라 전략가로서의 이순신 장군, 하드웨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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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소프트웨어의 승리로서의 새로운 전쟁의 의미가 떠오른다.
한 마디로 이순신 장군은 우리에게 거북선을 발명한 과학자로서, 백의종군 한 애국애족의 성웅으로서 그리고 시조시인이요, 난중일기를 쓴 문사로서 다양하게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이순신 장군을 통해 진정 배 워야 할 것은 실체론적 사고를 관계론적 사고로, 하드웨어적 발명을 소프 트웨어적 발견으로 그 생각을 바꿔나가는 것이다.
0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원수가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칠 때 사용 했다는 T형 전법은 다름 아닌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을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알 려져 있다. 쉽게 말해 적함이 좁은 해협을 지나기 위해 일렬종대로 들어올 때 그 앞에서 횡대로 맞서 공격하면 아무리 적함의 수가 많아도 소수의 배로 적선을 격파할 수 있다는 전술이다. 양측의 함대가 T자 모양으로 대 치 해 싸우기 때문에 아군이 5척이고 상대가 20척이라 해도 학익진 대형 의 전법을 쓰면 5대 20이 아니라 5대 1로 전세가 바뀌게 된다. 도고 원수 가 발틱 함대를 격파하고 영국을 방문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일본의 넬슨 이요. 이순신이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도고가 전첩 축하의 자리에서 어째 서 다음과 같은 답사를 했는지 사람들은 그 이유를 잘 몰랐을 것이다.
“불초 도고는 혹은 넬슨 제독에 비유되고 혹은 이순신 장군에 비견하여 칭송을 받고 있지만 그것은 분에 넘치는 광영입니다. 넬슨은 몰라도 이순 신 장군과 비교되는 것은 당치도 않습니다. 불초 도고 같은 존재는 이순신 의 발밑에도 이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0 눈물이 나오는 대목이다. 도고의 진솔한 고백이나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 때문이 아니다. 거북선이나 학익진은 이순신 장군 개인만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슬기요. 한국인의 철학의 틀에서 생겨난 것 이기 때문이다. 도고가 그의 발밑에도 이르지 못한다고 한 이순신 장군의 위대성은 바로 사물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그 틀이 한국문화 깊숙이 박혀 있는 상대성의 원리 그리고 관계론적 사고의 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상대성원리 그리고 관계론적 사고의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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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토박이 우리말을 보면 안다. 세계의 어느 나라 말보다 쌍방향성이나 상대 성 대립물을 한데 어우르는 통합력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 거짓말인지 아 닌지 아이들에게 “어머니 어디 가셨니?” 라고 한 번 물어 보라. 만약 그 아이가 미국 아이라면 “Mom is out."이라고 할 것이다. 같은 아시아 사람 이라도 일본 아이는 “외출 했다.”고 할 것이고 중국 아이는 “출문” 혹은 “출외”, “출거” 라고 할 것이다. 오로지 우리 아이들만이 “나들이 나가셨 습니다.”라고 할 것이다. 나들이는 ‘나가고 들어오는 것’의 준말이다. 다른 아이들은 일방통행적인 것으로 보는데 우리나라 아이는 어머니가 들어오 기도 전에 나가고 들어왔다고 겹 시각으로 말한다.
또 하나의 예로 서랍이라는 말도 어느 나라에서나 모두 ‘빼는 것’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영어의 ‘Drawer' 가 그렇고 일본의 ’하키다시‘가 그렇다. 중국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은 서랍을 밀어낸다는 뜻으로 ’추체‘라고 한다. 우리만이 빼고 닫는 서랍의 쌍방향성을 그대로 ’빼닫이‘라고 한다.
《 Think 열 》 국물문화의 포스트 모던적 발상
■ 국수와 스파게티
0 자장면과 스파게티를 합쳐 ‘짜파게티’라는 식품이 등장한 적이 있다. 자장 면은 중국 음식이고 스파게티는 이탈리아 음식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스파 게티는 이탈리아 고유의 음식이 아니다. 중국의 면, 남미의 토마토소스 등 이 합쳐진 것으로 이탈리아를 상징하면서도 이탈리아 문화가 보이지 않는 아이러니가 있다. 그러나 역시 스파게티는 이탈리아가 키운 이탈리아의 맛 이다.
0 요리의 소재나 맛보다 그것을 담고 먹는 방법에 의해 음식문화의 본질이 결정된다. 이솝(Aesop)은 그의 우화 ‘여우와 황새’에서 여우는 접시에 담 은 음식을 황새에게 대접하고. 앙갚음하기 위해 황새는 병처럼 목이 좁은 항아리에 음식을 담아 놓고 여우를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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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화에서 보듯 모든 음식은 접시에 담는 여우형 음식과 항아리에 담 은 황새형 음식의 대립항으로 나눌 수 있다. 서양 사람들은 스파게티를 포 크로 돌돌 말아 고기처럼 덩어리를 만들어 먹는다. 같은 면이라도 서양 음 식은 대게 접시에 담는 여우형 음식으로 국물이 없다. 그러나 우리의 음식 은 황새형으로, 항아리처럼 움푹 팬 사발에 담는 음식이 주종을 이룬다. 국물이 많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듯 우리 음식의 특성은 탕이다. 그런데 이 탕 문화 를 기호학적으로 말하면 탈 코드적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탕은 국과 밥 의 혼합으로, 유동식과 고체식의 경계를 파괴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탕뿐 만 아니라 우리의 음식에는 거의 예외 없이 국물이 있다.
우리의 김치, 깍두기에 해당하는 일본의 ‘오싱꼬’ 와 ‘다꽝(단무지)’에는 물기가 전혀 없다. 없는 것이 아니라 국물을 씻어내고 건더기만 남긴다. 우리의 경우에는 발효 과정에서 국물이 생기면 그것을 버리지 않고 오히 려 그 국물 맛을 이용해 맛을 살린다.
불필요한 것, 부수적인 것, 잉여적인 것을 제거하지 않고 포섭한다. 그렇 기 때문에 국물김치가 아니라도 김치, 깍두기에는 국물이 꼭 따르게 마련 이다.
0 무엇보다 “국물도 없다.”는 말이 욕으로 쓰이는 것을 보더라도 한국인의 ‘국물문화’가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젓가락 문 화권에 속해 있으면서도 유독 우리만 숟가락을 겸용하는 이른바 ‘수저문 화’의 특성을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수저란 숟가락과 젓가락을 한데 묶은 복합어인 것이다.
밥과 국, 건더기와 국물이 뒤섞여 있는 탈코드의 음식문화는 음식이라는 말 그 자체 속에도 들어 있다. 음(飮)은 마시는 것이고 식(食)은 먹는 것이 다. 같은 한자권에서도 일본은 ‘다베食 모노物’라고 부른다. 말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 국물을 떠먹는 숟가락도 없다.
음이 음(陰)이라면 식은 양(陽)이고, 숟가락이 음이면 젓가락은 양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빛과 그늘이 있다. 그것처럼 음식의 국물은 음식의 그늘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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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바로 이 국물 때문에 한국은 물론이고 동양에서는 패스트푸드나 인스턴트 음식이 어려워진다. 이 분야에서 세계를 제패한 미국의 맥도널드 햄버거는 철저하게 국물을 배제한 서양음식의 특성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할 수 있 다.
■ 포스트모던 시대의 국물문화 발상법
0 정보이론에서는 국물을 노이즈(잡음)라고 한다. 서구문화와 문명 그리고 모든 이념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국물 없애기(미각문화), 그림자 없애기 (시각문화), 노이즈 없애기(청각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스파게티 처럼 면에서 물기를 제거하는 요리술이었다고 할 수 있다.
노이즈가 없어야 접시에 그 음식을 담을 수 있는 것이다. 서양음악의 기 저를 이루어온 것은 음악으로부터 노이즈를 제거하는 작업이었고, 악기의 발전이란 철저하게 노이즈를 방지하는 기술에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우리의 음악은 노이즈를 제거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당연한 것 으로 받아들여 음악의 일부로 이용하는 데 그 특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창에서는 쉰 듯한 목소리의 탁성이, 그리고 가야금에서는 여운을 흔들어 주는 농현이 그렇다.
듣는 쪽도 마찬가지다. 서양음악이 연주될 때 관중은 기침 한 번 없이 숨 을 죽이고 앉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음악은 정반대로 연주 도중에 추임새 를 던지기도 하고, 창을 하는 사람이 고수와 농을 하기도 한다. 노이즈를 끌어들이는 것이 연희 형식의 하나로 되어 있다.
0 악기도 그렇다. 우리 악기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장구는 모양도, 소리 도 기하학적 대칭형에서 벗어나 있다. 보기에는 좌우가 같은 것처럼 보이 지만 그 크기와 울리는 소리가 각기 다르게 되어 있다. 손으로 치는 왼쪽 은 말가죽이고, 채로 치는 오른쪽은 쇠가죽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죽만 다른 것이 아니라 치는 법도 다르다. 한 쪽은 채로, 또 한 쪽은 손으로 쳐 그 울림에 국물(노이즈)을 섞는다.
그래서 장구는 귀로 먹고 마시는 탕이며, 그 양면을 치는 것은 수저의 역 할과도 같다. 흔히 서양음악은 맥박이요, 우리의 국악은 호흡이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쉽게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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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잡음은 변화를 상징한다. 끝없이 어떤 체계를 중단하고 탈구축하는 힘이 다. 잡음 즉 노이즈를 버리지 않고 근대 시스템에 끌어 들일 때 그 시스템 자체가 변화를 일으키고 뜻하지 않은 새로운 시스템으로 나아갈 수 있다.
■ 한국의 식객문화
0 우리의 생활의식 속에는 식객이라는 존재가 귀중한 비중을 차지한다. 사랑 이나 동네의 정자나무는 식객을 위한 공간이다.
문전에서 “이리 오너라.”하고 큰 기침을 하는 식객들의 잡음은 끝없이 굳 어 가려는 가정 체계에 도전해 변화를 일으킨다. 한국의 식객문화는 때로 는 풍문을, 때로는 시화(詩畵)를 교환한다.
식객자는 김삿갓처럼 풍자적인 웃음 스캔들 그리고 아름다운 예술을 놓 고 떠난다.
0 김삿갓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생활문화에서 식객은 부정의 요소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포용하고 흡수해야 할 요소로 작용했다. 이규태 칼럼의 한 대 목을 읽어보자.
“우리의 옛 조상들은 3덕(三德)이라 하여 식구 수에 세 명 몫을 덤으로 얹어 밥을 짓고 찬도 꼭 먹을 분량에서 덤을 얹어 만드는 것이 부덕(婦德) 이 돼 있었다. 지나가는 행인이나 걸인이 찾아올 수도 있고 어렵게 사는 이웃들이 갖다 먹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옛날 농촌이 그토록 가난 했으면서 각박하지 않게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조상님들의 3덕 때문이었 다 해도 대과는 없다.”
식객이 아니더라도 상물림이라는 한국 특유의 식사 매너도 기생 연쇄를 법칙화한 것이다.
“전통사회에서는 가장이 먹고 난 밥상을 안식구들이 물려 먹고, 안식구들 이 먹고 나면 종들이 물려 먹었으며, 종들이 먹고 나면 구정물통에 모아서 개나 돼지에게 물려 먹였다. 옛날 관청에서도 여섯 명의 하인들이 들어야 하는 대감 점심 밥상을 드리면 판서와 참판이 먼저 먹고 나서 이를 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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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참의와 정랑, 좌랑이 먹는다. 그 상을 다시 아전들에게 물리고 종들이 물려 먹었던 것이다. 윗사람은 상물림을 배려해 찬을 남기는 것이 도리요. 아랫사람은 그것을 다 먹어치우는 것이 예의였다.”
이러한 생활문화를 철학적 경지와 종교적 위상으로 발전시킨 것이 우리 가 믿고 살아온 상생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0 서구 산업사회의 근대문명 시스템에서 보면 우리의 전통문화 자체가 하나 의 노이즈일 수 있다. 이 노이즈를 버리지 않고 근대 시스템에 끌어들일 때 그 시스템 자체가 변화를 일으키고 뜻하지 않은 새로운 시스템으로 변 모해 갈 수 있다. 21세기란 바로 그러한 세기인 것이다.
《 Think 열하나 》 전통 물건에 담긴 한국인 생각
■ 문풍지 ㆍ 한복 : 융통성
0 같은 동아시아권 문화에 속하면서도 한국과 일본은 정밀함에서 대립을 보 인다. 한국에서는 적당히 문을 짜서 달기 때문에 틈이 생기면 문풍지로 막 는 융통성을 발휘한다. 이는 한 치 두 치를 꼼꼼히 따지는 정확성보다는 융통성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똑같이 창호지로 바른 문을 사용하지만 우리처럼 문풍지라는 것이 없다. 문을 닫으면 한 치의 오 차도 없이 꼭 들어맞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0 한국의 바지, 버선 그리고 되질, 밀질 등 모두가 정확한 치수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의 멋이라는 것이 어느 면에서는 약간의 비규격을 지향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한국의 문화는 무엇이든 재고 따지고 계산하는 자의 문화와 양극을 이루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0 서양의 양복바지와 스커트는 정확하게 허리둘레의 치수를 맞추고 있다. 이 렇게 정확한 치수 개념이 인간을 달나라에까지 갈 수 있게 한 과학 기술 의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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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한복 바지를 만든 전통적인 한국인의 눈으로 보면 서양 사람의 양 복 바지는 매우 불편하다. 원래 인체의 허리부분은 밥 먹을 때 다르고, 건 강할 때 다르고, 병들 때 다르다. 사람의 몸은 물질이 아니라 생체이기 때 문에 정확히 자로 잴 수가 없는 것이다.
몸이 조금만 불어도 양복바지는 입을 수 없지만 한복바지는 옷과 인간이 언제든지 융통성 있게 하나가 될 수 있다.
치수가 잘못되면 사람이 옷에 몸을 맞춰야 하는 주객전도의 양복문화. 그 것이 인간 소외 현상을 낳는 것이라면, 넉넉한 한국의 허리춤은 끝없이 인 간을 감싸주는 융통성 있는 문화의 상징이다.
■ 지게 : 자연과 기술의 조화
0 우리가 운반 도구로 개발한 가장 독특한 기술이 지게이다. 지게는 ‘지다’ 에서 나온 말이다. ‘덮다’에서 덮개란 말이, ‘베다’에서 베개란 말이 생겨난 것과 같다. 그러니까 지는 도구가 바로 지게인 셈이다. 외국에는 지게라는 것이 없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A프레임이라고 불렀다. 생 김새가 알파벳의 A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엇을 질 때 대개는 그 냥 맨 어깨에 메거나 등에 진다. 질 때 사용하는 도구가 없기 때문이다.
0 아무리 복잡하고 고도한 발명품이라 해도 인류가 만든 운반 도구는 두 개 의 동사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지다’이고 또 하나는 ‘끌다’이다. 그리 고 ‘지다’에서 생겨난 것이 멜빵이고 ‘끌다’에서 비롯된 것이 바퀴이다. 바 퀴문화는 기차가 되고 자동차가 되고 이윽고는 비행기나 로케트로까지 발 전해 갔지만 모르면 몰라도 멜빵문화를 완성시킨 것은 한국의 지게 이상 의 것이 없을 것 같다.
지게를 찬찬히 살펴보면, 지게발도 작대기도 모두 V자형 나뭇가지의 원 리를 받침대로 응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자연 그대로의 형태를 살려 약간 손질한 한옥의 서까래와 기둥도 그렇고 나무절구나 숫돌 모양도 그 렇다 한국인의 도구와 기술에는 의도적, 비의도적으로 자연과 문화의 중간 지향적 성격을 띤 것들이 많다.
특히 지게는 지렛대의 원리를 응용한 것으로 좌우의 무게가 조금이라도 균형이 깨지면 아무리 가벼운 것이라도 짊어질 수가 없다. 반대로 균형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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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으면 자기보다 몇 배나 무거운 짐이라도 운반할 수가 있다. 생체와 도구 가 하나의 균형과 리듬에 의해서 기능을 갖게 되는 조화의 기술인 것이다.
■ 병풍 : 신축성
0 서구의 근대 문명은 자아를 중심으로 한 개인주의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문화는 벽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된다. 즉 자아의 문화 란 너와 나를 구별하는 방벽(防壁)과 도시와 도시를 분리하는 성벽(城壁) 의 문화라 할 수 있다. 벽을 어떻게 튼튼하게 쌓느냐 하는 그 이상(理想) 을 가장 완벽하게 실현시킨 것이 사변이 벽으로 된 지하실 구조이다. 사생 활을 중시한 풍습, 타자를 배제하는 감시의 형벌 문화, 창조적인 예술 창 작 등이 모두 지하실과 같은 폐쇄된 공간에서 비롯되었다.
0 그러나 한국을 비롯한 동양문화권의 시인, 묵객들은 두꺼운 벽이 아니라 병풍을 둘러치고 창조 작업을 하였다. 병풍은 가장 가볍고 신축성 있는 벽 으로, 펴면 벽이 되고 접으면 공간이 하나로 통합된다.
병풍은 인류가 발견한 가장 아름답고 밝고 가동적인 벽이라고 할 수 있 다. 병풍 그림은 한 쪽 한쪽 떼어내면 독립된 구도를 갖고 있으며, 전체를 이어 놓으면 전체의 구성이 하나가 됨으로써 조화롭다. 즉 병풍의 공간은 하나이면서 전체인 것이다. 우리는 필요할 때 병풍을 거두듯이 집단이 되 고, 또 어느 경우에는 병풍을 두르듯 자기의 프라이버시를 소중히 지킨다.
■ 보자기 : 인간과 도구의 일체성
0 서양의 가방과 우리의 보자기. 가방은 넣을 물건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그 자체로 독립되어 있으며, 독자적인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보자기는 그 싸는 물건의 부피에 따라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며, 또 쌀 것이 있 을 때에는 존재하다가도 쌀 것이 없으면 하나의 평면으로 돌아가 사라져 버린다. 가방과는 달리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과 도구가 하나가 되어 있다.
0 뿐만 아니라 보자기는 그 환경에 따라 용도가 자의성을 띠게 된다. 가방에 걸리는 동사는 ‘넣다’ 하나지만 보자기는 ‘싸다’, ‘쓰다’, ‘두르다’, ‘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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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씌우다’, ‘가리다’, ‘매다’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비슷한 예로 서양의 침대는 사람과 관계없이 한 자리를 차지한다. 사람이 일어나 낮에 활동하고 있을 때에도 침대는 저 혼자 공간을 차지하고 누워 있다. 그러므로 인간과 도구가 가방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따로따로 논다.
한국의 이불이나 요는 누울 때에는 펴고 일어나면 갠다. 밥상이나 방석 등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서양의 경우에는 식탁은 인간이 밥을 먹지 않을 때에도, 그리고 의자는 사람이 앉지 않은 때에도 일정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서양 사람들의 주거 공간은 도구에 의해 분절되어 있지만 한국인의 공간은 인간이나 그 기능에 의해 다층화 한다. 안방에 상을 들여 놓으면 침실이 식당으로 바뀌지만 서양에서는 침대가 놓여 있는 곳은 침 실이요. 식탁이 놓여 있는 곳은 식당이다.
0 오늘날 파괴 공학이라는 특수한 기술이 대두되고 있는 것을 보면, 서구의 기술이 지닌 맹점을 알 수 있다. 보자기식 기술에는 파괴할 필요 없이 모 든 도구가 스스로 기능과 변화에 따라 가변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 다듬이 방망이 : 악기가 된 평화로운 곤봉
0 어떤 사람은 칼로 사과를 깎아 먹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칼로 사람을 찔러 죽이기도 한다. 인간의 마음이나 그 사용 방법에 의해서 도구의 마지 막 의미가 결정된다. 활과 하프는 같은 뿌리에서 생겨났지만 하나는 살육 의 피를 흐르게 하고 또 하나는 생명의 아름다운 선율을 흐르게 한다.
0 인간이 만든 무기의 원초 형태가 곤봉이라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 이다. 그런데 한국인은 그 곤봉을 평화적으로 사용하여 빨래 방망이, 다듬 이 방망이를 만들었다. 사람이나 동물을 때려죽이는 남성들의 폭력적 무기 가 우리나라에 오면 여인들의 것으로 변해, 때 묻은 옷을 빨고 다듬이는 재생산의 도구로 바뀌게 된다. 우리에게 방망이 소리는 싸움의 상징이 아 니라 평화의 소리, 어머니의 소리로 가슴깊이 새겨져 있다.
0 일본은 다르다. 포르투갈 사람들로부터 사들인 단 두 자루의 총을 가져다 가 불과 10년 만에 30만 자루 이상의 조총을 만들어낸 기적은 전국시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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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폭력문화의 원형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본인들은 우리와는 정반대로 누 워 있는 다다미 등의 평화로운 도구까지 전쟁의 도구로 이용했다. 오늘날 다다미의 치수는 전쟁이 날 때 바리케이드 방패로 사용할 수 있도록 고안 된 것이라고 한다.
■ 돗자리 : 하늘을 나는 융단
0 ‘아라비안 나이트’에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마법의 융단이 나온다. 그러나 한국인의 눈으로 보면 별로 신기할 게 없다. 본래 융단이라는 것은 이동해 다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의 돗자리나 멍석은 융단처럼 일정한 장 소에 깔아 놓은 것이 아니다. 원래의 기능이 말았다 폈다 하며 마법의 융 단처럼 옮겨 다니면서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0 누구나 멍석을 타고 하늘을 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여름의 긴 해가 지고 저녁이 되면 모기를 쫒는 모닥불 향기가 부드러운 어둠처럼 마당에 깔리 기 시작한다. 멍석이 펼쳐지는 순간이다. 그 순간 흙 마당은 옛날 중앙아 시아 고원의 풀밭이 된다. 그 위에 누우면 우리 옛 선조들이 그러했던 것 처럼 하늘의 별들이 보인다. 멍석에 누워 별을 헤는 동안 땀과 눈물로 얼 룩졌던 일상의 공간은 꿈과 초월의 공간으로 바뀐다.
0 평범한 일상의 공간에 돗자리를 깔면 손님을 맞는 연회의 공간이 되기도 하고, 노동공간이 갑자기 유희공간으로 바뀌어 놀음판이 되는가 하면, ‘속 (俗)’의 공간이 제사를 지내는 ‘성(聖)’의 공간으로 바뀌기도 한다.
“하던 짓도 멍석을 펴 놓으면 하지 않는다.”는 속담을 분석해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한국인에게 멍석이나 돗자리는 하나의 무대공간이고 색다른 생 활을 기획하는 연출공간이다.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가열한 공간에 멍석 이나 돗자리가 펼쳐지면 마법의 융단처럼 우리의 육신과 영혼은 자유롭게 허공을 난다.
■ 달걀꾸러미 : 포장문화의 원형
0 한국인들은 짚으로 달걀꾸러미를 만들었다. 충격과 습기를 막아주는 그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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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운 재료 자체가 이미 새의 둥지와 같은 구실을 한다. 그렇다. 짚으로 만든 달걀꾸러미는 가장 포근하고 안전한 달걀의 집. 제2의 둥지이다. 그 러나 한국의 달걀꾸러미가 보여주고 있는 놀라움은 결코 그 재료의 응용 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점이라면 일본의 달걀꾸러미도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같은 짚을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달걀을 완전히 다 싸버린 일본 사 람들과는 달리 한국인들은 그것을 반만 싸고 반은 그대로 두어 밖으로 드 러나게 했다는 데 있다.
0 왜 한국인들은 반 만 쌌는가. 일본과 같이 그것을 짚으로 다 싸버린다면 달걀의 형태, 구조가 가려져 그것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인지 등의 정보 성, 언어성 등은 사라지고 만다. 그러고 보면 한국인이 달걀을 반만 쌌다 는 것은 물리적인 기능만 생각한 갓이 아니라 그 정보성을 중시했다는 증 거이다.
한국의 달걀꾸러미는 형태와 구조를 노출시킨 아름다움, 깨지지 않게 내 용물을 보호하는 합리적인 기능성, 그리고 포장 내용을 남에게 알려주는 정보성의 세 가지 특성을 동시적으로 만족시켜주는 포장문화의 가장 이상 적인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 Think 열둘 》 김치, 맛의 교향곡
■ 오색(五色)과 오미(五味)의 우주론
0 오방색(五方色) : 푸른색은 동(東), 흰색은 서(西), 붉은색은 남(南), 검은색은 북(北), 노란색(黃)은 중앙
- 오방색은 춘하추동과 그 계절의 변화를 일으키는 중심 즉 우주의 시간을 상징하기도 하고, 자연과 인간의 현상을 木, 火, 土, 金, 水의 다섯 요소로 구조화한 동북아시아의 음양오행설에 뿌리를 둠
0 오미(五味) : 미각에서도 오행의 원리를 좇아 맵고(辛 매울 신), 달고(甘 달 감), 시고(酸 초, 산), 짜고(鹹 짤 함), 쓴(苦 쓸 고)의 오미로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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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오행설을 일상적인 음식문화에 이용해 요리의 시각기호와 미각기호의 코 드를 창출해낸 것은 한국만의 독창적인 식문화라 할 수 있다. ‘고명’과 ‘양 념’이 바로 그것이다.
달걀요리 등을 오방색으로 꾸며놓는 고명을 음식에 갖가지 색채를 부여 하는 ‘시각기호’라 한다면. 양념은 짜고 맵고 시고, 심지어는 쑥처럼 쓴 맛 을 주어 음식 전체 맛을 조율하는 ‘미각기호’라 할 수 있다. 고명과 양념을 없애면 한국음식은 침묵한다.
0 한국의 전통음식 가운데 이런 요리 기호체계를 가장 완벽하게 극적으로 보여준 것이 ‘오훈채(五葷菜)’라는 나물이다. 오훈채란 파, 마늘, 부추와 같 이 자극성이 강한 다섯 종류의 채소를 의미한다.
불가나 도가에서는 금기 음식으로 여겼지만 한국의 민속사상에서는 모든 것을 화합하고 융합시키는 우주적 기운의 식물로 생각했다. 그래서 입춘에 는 임금이 신하들에게 오훈채를 하사했는데 한복판에 임금을 상징하는 노 란색 나물을 놓고 그 주변에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청백적흑의 나물을 배 치하였다. 이것을 한데 섞어 먹음으로써 임금을 중심으로 여러 당파가 화 합하는 것을 상징했다. 여염집에서는 인(仁 : 靑 ), 예(禮 : 赤), 신(信 : 黃), 의(義 : 白). 지(志 : 黑)의 덕목과 비장(청), 폐(적), 심장(황), 간(백), 신장(흑)의 인체 기관을 의미하기도 했다.
0 오훈채를 무치면서 사람들은 정치적, 사상적, 신체적인 여러 층위에서 대 립하고 모순되는 것들을 뭉치게 하는 화합의 힘을 체험한다. 그리고 그것 을 씹어 먹는다는 것은, 춘하추동의 순환과 동서남북이 한 복판의 축으로 모여드는 우주의 신비하고 생동하는 기운을 삼킨다는 것이다.
한국음식과 그 요리법은 오훈채를 원형으로 한 크고 작은 변이항으로 볼 수 있다. 어육과 채소를 넣고 석이버섯, 호두, 잣, 은행, 황밤, 실백, 실고 추의 오방색 재료를 얹은 다음 국물을 부어 끓이는 여구자탕의 신선로요 리, 색동옷처럼 갖가지 색깔의 켜로 배열하는 산적이나 무지개떡 등 색채 는 물론 음식 재료에 있어서도 들, 산, 바다, 하늘에서 나는 것까지 모든 공간을 한데 섞는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음식은 제각기 다른 색채와 모 양 그리고 맛들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면서 화성(和聲)을 자아내는 ‘맛의 교향곡’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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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보자기처럼 한국의 음식은 모든 것을 하나로 싼다. 한국고유의 음식 가운 데 하나인 ‘쌈’이 바로 그런 것이다. 김이든 상추든 평면성과 넓이를 가진 것이라면 그것을 펴고 온갖 재료를 싸 통째로 입안에 넣는다. 포크와 나이 프로 음식을 썰어 먹는 식사법이 ‘배제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모든 음식을 한데 싸서 입안에 넣는 것은 ‘포함적’인 식사법이라 할 수 있다.
■ 맛을 교향곡
0 고명과 양념 그리고 오훈채를 원형으로 구성된 한국 음식문화를 추구해 들어가면 한국음식의 모양과 맛을 대표하는 김치가 무엇인지 저절로 그 암호를 해독할 수 있다. 그러니까 앞서 말한 것처럼 김치 맛을 푸는 첫 번 째 코드 역시 오색과 오미를 갖추려는 맛의 우주론이라고 할 수 있다.
김치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은 김치 색깔을 흔히 붉은 것으로 생 각하기 쉽다. 오훈채처럼 한국요리의 코드를 알고 나면, 김치야말로 오방 색을 모두 갖춘 음식이라는 것을 금세 깨닫게 된다.
김치가 붉은 색을 띠게 된 것은 17세기 이후 일본을 통해 서양의 고추가 들어온 뒤부터다. 배추를 흔히 ‘백채’라고도 하는데, 이처럼 배추를 주재료 로 하는 김치는 흰빛이 기조색이다. 무가 그 흰빛 계열에 악센트를 가하고 배춧잎이나 파잎들이 푸른빛을 더해, 청룡백호처럼 한국의 전통적인 색깔 을 만들어 낸다.
0 한국 요리 전문가인 강연숙씨의 말을 빌리면. “일본요리가 담백하고 단순 하고 산뜻한 맛에 기본을 둔 것이라면, 한국요리는 여러 맛이 서로 겹치고 한데 엉겨 조화를 이루는 데 맛의 큰 특성이 있다.”고 한다. 김치는 맛의 통합적 우주를 지향하는 한국음식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으로 색 깔이나 맛에서 오방색과 오미를 완벽하게 연출해 내고 있다.
■ 화식(火食)과 생식(生食)의 매개항, 발효식
0 김치 맛을 해독하는 두 번째 코드는 그것이 발효식이라는 것이다. 어떤 형 태의 요리든 맛의 근원적인 의미는 ‘날것’과 ‘익힌 것’ - 생식과 화식의 대 립항에 의해 구분된다. 크게 날달걀과 익힌 달걀 맛으로 구별해볼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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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요리의 코드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 자체의 코드가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신화의 상징에서도 그 유효성이 밝혀졌듯이, 날것은 자연. 익힌 것 은 문명이라는 대응관계를 나타낸다.
날것과 익힌 것의 요리코드는 서양음식에서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바비 큐처럼 서양의 육식요리는 불로 구운 정도로 맛을 차별화한다. 레스토랑에 가서 요리를 시킬 때 가장 중요한 의식의 하나가 어떻게 굽느냐, 즉 레어( rare)와 웰던(well-done), 미디움(medium) 의 방법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 다. 이와는 반대로, 채소의 경우에는 수프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날것 형태 로 요리된다. 문명과 자연의 이항대립이 육식과 채식의 대립으로 나타난 다.
그러나 한국의 요리코드는 화식, 생식의 대립항의 의존하지 않는다. 오히 려 대립코드에서 일탈해, 그것을 융합하거나 매개하는 제3항 체계를 만들 어 낸다. 날것도 익힌 것도 아닌 삭힌 것의 맛, 바로 발효식이다. 생식과 화식 사이에 발효식이 개재됨으로써 요리는 새로운 삼각구도를 지니게 된 다.
0 배추를 날것으로 요리하면 샐러드가 되고 불에 익히면 수프가 된다. 그러 나 그것을 삭혀 먹으면 김치가 되는 것이다. 그 맛은 샐러드와 같은 자연 의 맛이나 야채수프와 같은 문명의 맛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제3의 새로 운 미각이다. 자연과 문명이 조화를 이루고 융합했을 때 비로소 생성되는 ‘통합의 맛’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요리코드는 생식, 화식. 자연/문명의 대립항을 넘어서 삭혀먹는 제3의 가능성 즉 자연과 문명의 대립을 매개하 거나 뛰어 넘는 문화적 탈코드의 산물인 것이다.
화식이 성급한 불의 맛이라고 한다면 발효식은 시간의 맛이다. 날것과 마 찬가지로 화식은 요리에서 시간이라는 가장 중요한 절차를 생략하려 한다. 이에 비해 발효식은 어떤 형태의 것이든 기다리고 용해하고 변화하는 시 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김치는 샐러드와 단순한 겉절이처럼 즉석에서 먹을 수 없는 음식이다. 김치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는 배추도 고춧가루도 아닌, 바로 시간이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물은 시들고 사그라지고 썩는다. 누구 도 막을 수 없는 부패의 시간성을 역이용해서 새로운 맛을 창조해낸 것이 발효식의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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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치와 국물문화
0 김치는 홀로 있는 음식도, 독자적인 맛을 지닌 음식도 아니다. 밥이나 다 른 음식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맛으로서의 존재 이유를 갖는다. 그것은 밥맛인가 김치 맛인가? 이는 꼭 ‘피리 소리가 입김의 소리인가 젓대의 소 리인가.’ 라고 묻는 것처럼 어리석다. 함께 어우러짐으로써 손등과 손바닥 처럼 떼어낼 수 없는 일체형의 맛과 의미를 자아내는 것이 한국의 김치며, 동시에 한국인이 추구한 삶의 철학이기도 하다.
0 한국의 김치는 발효과정에서 저절로 우러나는 국물을 버리지 않고 이용해 오히려 맛을 잘 살린다. 불필요한 것, 부수적인 것, 잉여적인 것이라 생각 되는 것을 없애지 않고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그래서 국물김치가 아니더라 도 김치나 깍두기에도 꼭 국물이 따라다니게 마련이다. 국물과 건더기는 맛에서도 상호보완 작용을 해, 국물이 마르면 건더기의 맛도 죽어버린다. 건더기와 국물은 동양사상의 음과 양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한국인들은 음식 맛이 아니라 사람의 성격을 평가할 때도 ‘국물도 없다’라는 표현을 쓴다. 융통성이나 여유가 없는 사람, 지나치게 계산적인 사람을 일컫는 욕 이다.
《 Think 열셋 》 선비 생각이 상(商)과 만나다.
■ 선비 생각이 상(商)과 만나다.
0 ‘정신 자본주의’를 다른 이름으로 가장 한국적으로 부른다면 ‘선비 자본주 의’로 부를 수 있다. 21세기는 ‘지식 상인의 시대’라고 한다. 선비의 사(士) 가 상(商)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상인이라는 말은 상(商)나라가 망하자 유민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물건을 만들어 파는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수레와 말을 이용하여 물건을 먼 곳으 로 운반해 팔면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농사를 지을 때처럼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길을 통해 집시처럼 살아 가는 대상들이 나타나 동서를 왕래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나라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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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낸 직업이라고 하여 장사하는 사람을 상인(商人)이라고 부르게 되 었다는 것이다.
■ 인간의 모든 길은 상인들이 개척한 것
0 시대가 아무리 변화해도 상업의 비즈니스 마인드는 변하지 않는다. 옛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시대에서는 商이 최하의 계층으로 손꼽혔지만 그런 시대에서도 인간 고유의 특성인 보행능력과 정보의 힘을 지키고 발전시킨 것은 상인들이었다. 상인들의 보행과 정보의 힘을 구체적으로 가시화한 것 이 바로 길의 문화이다.
0 소금장수의 길에서 실크로드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모든 길은 상인들이 개 척해 간 것이다. 불교와 기독교가 발생하고 그것이 널리 전파된 것도 실 은 상인들이 닦아 놓은 그 길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룸 비니에서 간디스 중류지역까지 석가가 걸어간 500Km의 길이요, 예수가 나자레에서 예루살렘까지 횡단한 150Km의 길이다. 불교와 기독교의 그 길은 속세의 상도(商道)를 타고 발생한 것이나 다름없다.
0 소설의 원조라고 말해지는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도 전형적인 영 국 상인이 벌이는 무인도에서의 모험담이다. 소설가는 ‘완전한 영국 상인’ 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상인은 보편적인 학자이다. 그는 라틴어나 그리스어 등의 보통 전문가 보다도 높은 식견을 지니고 있다. 상인은 책 없이도 언어를 알고 지도의 도움 없이도 지리학을 안다. 그들의 교역의 통로는 전 세계에 퍼지고 그들 은 외국거래와 수표계약은 모든 나라의 말로 통한다. 그들은 자신의 사무 실에 들어 앉아 있어도 모든 국민과 어울려 이야기를 한다.”
■ 사(士)는 0차 산업
0 사(士)가 하는 일, 언론이나 예술 그리고 학자들이 종사하는 지식업은 어 떤 산업에 속하는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0차 산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생산하는 것은 꿈, 감동 그리고 즐거움처럼 눈에 보이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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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산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한국 사회 그리고 동양 사회를 지배해 온 사농공상 을 서구식 노동과 경제활동의 분류코드로 분석하면 士 는 0차 산업으로 지식(knowledge), 農은 1차 산업으로 지혜(wisdom), 工 은 2차 산업으로 기술(craft), 商 은 3차 산업으로 정보(information)의 영역으로 정리할 수 있다.
선비의 士는 공자의 말대로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아는 지식인으로 문 자를 비롯한 각종 지식미디어의 힘과 그것을 다루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농민들은 ‘북학의’를 쓴 박제가의 말대로 기후와 계절 같은 하늘의 힘과 논밭과 같은 땅의 힘 그리고 그곳에 씨를 뿌리고 곡식을 가꾸는 사람의 힘인 天地人 三才의 슬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모르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것이다.
0 20세기만 해도 상업은 공업에 의존하여 발전해 왔지만 21세기의 상업은 공업만이 아니라 0차 산업인 지식 즉 士 와 손을 잡는 지식정보의 독특한 산업으로 변화하게 된다.
되도록 멀리 세계의 끝을 나가려던 인간의 꿈, 상인의 그 꿈은 인터넷이 나 뉴미디어와 같은 디지털 네트워크에 의해서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지식정보사회 그리고 모든 경계가 무너지 는 ‘무경계’의 세계를 이끌어가는 상업은 단순한 정보만이 아니라 고도의 지식을 갖지 않고서는 시대의 환경에 대응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 금까지 가장 사이가 멀었던 士와 商이 처음으로 손을 잡은 ‘士商時代’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상업혁명은 공과 상이 손을 잡아 성공을 거두었다면 정보혁명의 시대는 사와 상 즉, 지식과 정보가 하나가 되어 만들어 내는 비즈니스 모델에 의해 전개된다는 점이다.
■ 지식과 상업의 결합
0 더 이상 상업과 서비스업은 전통적인 3차 산업으로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0차 산업인 지식문화와 어울리는 통합적인 산업으로 변하고 있다. 그러니 까 1차, 2차, 3차의 직선으로 전개해 오던 산업은 더 이상 선의 산업이 아 니라 상호 순환하는 원형의 형태로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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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세계가 지향해 온 부국강병의 원리는 군사력과 경제력이었다. 지식은 오직 부국과 강병의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뿐 지식 자체를 목적으 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지식은 앨빈 토플러의 지적대로 경제력이나 군사력의 부수적 요소에서 그 자체의 본질로 변했으며 독자적인 지식의 지배라는 새로운 힘을 형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재는 경제계에서도 문화자원, 문 화자본과 같은 말을 사용하고 있다. 오늘날 기업의 경쟁력과 생산력은 토 지나 공장이나 설비 같은 하드의 자원보다 지적 능력이나 서비스 능력에 있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기계로 움직이는 기술보다 그 기계를 어디에 무엇을 위해 어 떻게 사용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문화 에 더 많은 힘이 실려 있다.
0 지식, 정신, 문화, 그리고 선비, 이 모든 것이 한국의 경제 속에 어우러져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인 ‘선비 자본주의’ 나아가 ‘士商 자본주의’로 거듭 태어날 때 한국의 자본주의의 미래는 다시금 희망찬 항해를 계속할 것이 며, 우리는 그것을 만들어 낼 힘과 지혜를 우리의 머리와 가슴 속에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상 자본주의’에 걸맞은 정신 이 우리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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