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 소 유
무 소 유
■ 법정
0 1932. 10. 8 출생. 2010. 3. 11 입적
■ 이해인 수녀의 법정스님 추도시
- 2010. 3. 15(월) 조선일보에서
3월의 바람 속에
차갑고도 따뜻한 봄눈이 좋아
3월의 눈꽃 속에 정토로 떠나신 스님
‘난 성미가 급한 편이야’하시더니
꽃 피는 것도 보지 않고 서둘러 가셨네요.
마지막으로 누우실 조그만 집도 마다하시고
스님의 혼이 담긴 책들까지 절판을 하시라며
아직 보내 드릴 준비가 덜 된 우리 곁을
냉정하게 떠나가신 야속한 스님
탐욕으로 가득한 세상을 정화시키려
활활 타는 불길 속으로 들어가셨나요.
이기심으로 가득 찬 중생들을 깨우치시고자
타고타서 한 줌의 재가 되신 것인가요.
스님의 당부처럼 스님을 못 놓아 드리는
쓰라린 그리움을 어찌할까요.
타지 않는 깊은 슬픔 어찌할까요.
많이 사랑한 이별의 슬픔이 낳아준 눈물은
갈수록 맑고 영롱한 사리가 되고
스님을 향한 사람들의 존경은 환희심 가득한
자비의 선행으로 더 넓게 이어질 것입니다.
종파를 초월한 끝없는 기도는 연꽃으로 피어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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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까지 닿는 평화의 탑이 될 것입니다.
하얀 연기 속에 침묵으로 잔기침하시는 스님
소나무 같으신 삶과 지혜의 가르침들 고맙습니다.
청정한 삶 가꾸라고 우리를 재촉하시며
3월의 바람 속에 길 떠나신 스님, 안녕히 가십시오.
언제라도 3월의 바람으로 다시 오십시오. 우리에게.
■ 법정의 대필(大筆) - 조용헌 살롱(조선일보 2010. 3.15)
이번에 열반에 들어간 법정은 어떤 선풍이었는가? ‘무소유선(禪)’이 아 닌가 싶다. 그의 궁극적 관심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는 무소유를 실천 함으로써 깨달음을 얻고자 했다. 깨달음은 다른 게 아니라 무소유였던 것 이다. 승려가 아닌 일반 대중에게는 이 ‘무소유선’이 화두나 염불보다 훨씬 더 파괴력이 강하다. 소유를 하지 못해 안달하는 중생들의 가슴을 무소유라는 시퍼런 취모검(吹毛劍)으로 후벼팠기 때문이다. 소유를 근본 에서부터 흔들었다고나 할까. 법정의 수필집은 마치 느끼한 돼지고기를 먹은 후에 먹는 새우젓의 느낌과 비슷하였다.
오늘날 미국 문화를 그나마 정화시켜 주는 한 줄기 맑은 물이 월든 호숫 가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던 소로에게서 흘러왔다고 본다면. 돈으로 범벅 이 된 오늘날 한국 사람들에게 법정의 ‘무소유’는 ‘월든’과 같은 한 줄기 세례였다. 160년 전 월든 호숫가에 지었던 소로의 오두막집이 바로 꽃 피고 산새 울던 불일암이었고 한 밤에 소낙비 내리는 소리를 듣던 오 대산의 오두막집이었다. 선승 법정은 취모검 같은 대필(大筆)을 휘두르고 갔다.
* 吹毛劍 :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칼, 머리카락을 칼날 위에 올려놓으면 저절로 잘려 나가는 날카로운 칼.
■ 나의 취미는
0 취미는 사람들의 얼굴만큼이나 다양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선 택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누구도 무어라 탓할 수 없다. 남들이 보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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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짓을 뭣하러 할까 싶지만, 당사자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성을 지니게 된다. 그 절대성이 때로는 맹목적일 수도 있다. 그래서 지나치게 낭비적이요 퇴폐적인 일까지도 취미라는 이름아래 버젓이 행해 지는 수가 있다.
0 모든 일이 그렇듯이 취미다운 취미라면 우선 자기 분수에 알맞은 일이어 야 한다. 자기 처지로서는 도저히 같이 어울릴 수 없는데 체면 때문에 마 지 못해 섞인다거나, 모처럼의 주말을 가족들과 함께 지내고 싶은데 상사 의 시야를 의식하고 끌려나가는 일이 있다면, 드넓은 초원과 맑은 공기도 그들에게는 오히려 공해임이 분명하다.
바람직한 취미라면 나만이 즐기기보다 고결한 인품을 키우고 생의 의미 를 깊게 하여,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오늘 나의 취미는 끝없는, 끝없는 인내다. (1973)
■ 비독서지절
0 가을 하면 독서의 계절을 연상한다는 친구를 만나 어제는 즐겁게 입씨름 을 했다. 내 반론인즉 가을은 독서하기에 가장 부적당한 비독서지절(非讀 書之節)이라는 것. 물론 덥지도 춥지도 않은 추야장(秋夜長)에 책장을 넘기 는 그 뜻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어디 그 길이 종이와 활자로 된 책에만 있을 것인가. 이 좋은 날에 그게 그것인 정보와 지식에서 좀 해방될 수는
없단 말인가. 이런 계절에는 외부의 소리보다 자기 안에서 들리는 그 소리 에 귀를 기울이는 게 제격일 것 같다.
0 독서가 취미라는 학생. 그건 정말 우습다. 노동자나 정치인이나 군인들의 취미가 독서라면 모르지만, 책을 읽고 거기에서 배우는 것이 본업인 학생 이 그 독서를 취미쯤으로 여기고 있다니 정말 우스운 일이 아닌가. 하기야 단행본을 내 봐도 기껏해야 1,2천부밖에 나가지 않는데, 어느 외국 백과사 전은 3만 부도 넘게 팔렸다는 게 우리네 독서풍토이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나는 이 가을에 몇 권의 책을 읽을 것이다. 술술 읽히는 책 말고, 읽다가 자꾸 덮어지는 그런 책을 골라 읽을 것이다. 좋은 책이란 물 론 거침없이 읽히는 책이다. 그러나 진짜 양서는 읽다가 자꾸 덮이는 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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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야 한다. 한 두 구절이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주기 때문이다. 그 구절들 을 통해서 나 자신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양서란 거울 같은 것 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 한 권의 책이 때로는 번쩍 내 눈을 뜨게 하고, 안 이해지려는 내 일상을 깨우쳐 준다. (1973)
■ 가을은
0 가을은 참 이상한 계절이다.
조금 차분해진 마음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볼 때, 푸른 하늘 아래서 시름시 름 앓고 있는 나무들을 바라볼 때, 산다는 게 뭘까 하고 문득 혼자서 중얼 거릴 때, 나는 새삼스레 착해지려고 한다. 나뭇잎처럼 우리들의 마음도 엷 은 우수에 물들어 간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한낮에는 아무리 의젓하고 뻣뻣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해가 기운 다음에 는 가랑잎 구르는 소리 하나에, 귀뚜라미 우는 소리 하나에도 마음을 여는 연약한 존재임을 새삼스레 알아차린다. 이 시대 이 공기 속에서 보이지 않 는 연줄로 맺어져 서로가 믿고 기대면서 살아가는 인간임을 알게 된다. 낮 동안은 바다 위의 섬처럼 저마다 따로따로 떨어져 있던 우리가 귀소의 시 각에는 같은 대지에 뿌리박힌 지체(肢體)임을 비로소 알아차린다.
0 시골마다 도시마다 크고 작은 길로 이어져 있다. 아득한 태고적 우리 조상 들이 첫걸음을 내 딛던 바로 그 길을 후손들이 휘적휘적 걸어간다. 그 길 을 거쳐 낯선 고장의 소식을 알아오고, 그 길목에서 이웃 마을 처녀와 총 각은 눈이 맞는다. 꽃을 한아름 안고 정다운 벗을 찾아가는 것도 그 길이 다. 길은 이렇듯 사람과 사람을 맺어 준 탯줄이다.
그 길이 물고 뜯는 싸움의 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사람끼리 흘기고 미워하는 증오의 길이라고도 생각할 수 없다. 뜻이 나와 같지 않다고 해서 짐승처럼 주리를 트는 그런 길이라고는 차마 상상할 수 없다. 우리는 미워 하고 싸우기 위해 마주친 원수가 아니라. 서로에 의지해 사랑하려고 아득 한 옛적부터 찾아서 만난 이웃들이다.
0 사람이 산다는 게 뭘까?
잡힐 듯하면서도 막막한 물음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일은 태어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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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한 번은 죽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생자필멸(生者必滅) 회자 정리(會者定離), 그런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노상 아쉽고 서운하게 들리 는 말이다. 내 차례는 언제 어디서일까 하고 생각하면 순간순간을 아무렇 게나 허투루 살고 싶지 않다.
이 가을에 나는 모든 이웃들을 사랑해 주고 싶다. 단 한 사람이라도 서운 하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가을은 정말 이상한 계절이다. (1973)
■ 무소유
0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 은 평판. 이것뿐이오.”
마하트마 간디가 193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제2차 원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 마르세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면서 한 말이다. K. 크리팔라니가 엮은 ‘간디 어록’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고 나는 몹시 부 끄러웠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 의 내 분수로는 그렇다.
0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 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 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랴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 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 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0 나는 지난해 여름까지 난초 두 분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다. 관계서적을 구해 읽고, 비료를 구해 오고, 철 따라 날씨 따라 자리를 옮겨 주고, 온도를 조절하는 등 애지중지 길렀다. 지난여름 장마가 갠 어느 날, 운허 노사를 뵈러 간 적이 있었다. 한 낮이 되자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매미들은 목청을 돋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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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 난초를 뜰에 내 놓았구나.
나는 허둥지둥 돌아와 축 늘어진 난에 샘물을 축여 주었다.
나는 이때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이 느끼게 되었다. 집착이 괴 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한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 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난을 가꾸면서 산철(승가의 遊行期)에도 나그네 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을 못했다. 밖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 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 놓아야 했고, 분을 내 놓은 채 나가 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 놓고 나간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 다. 그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 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분을 안겨 주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아갈 듯 홀가분한 해방감, 3년 가까이 함께 지낸 ‘유정(有情)’을 떠나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 전함 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0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 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 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다. 물건 만으로는 성이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하면서,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뜬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 이 육신마저 버리고 훌훌히 떠나갈 것이다. 하고 많은 물량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 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번 쯤 생각해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 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 다른 의미이 다.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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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해 : 이해 이전의 상태
0 이해란 정말 가능한 걸까.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가 상대방을 이해하노라 고 입술에 침을 바른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에서 영원을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이해가 진실한 것이라면 항상 불변해야 할 텐데 번번이 오해의 구렁으로 떨어진다.
‘나는 당신을 이해합니다.’ 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언론 자유에 속한다. 남 이 나를. 또한 내가 남을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이 해하고 싶을 뿐이지.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타인이다.
0 ‘자기 나름의 이해’란 곧 오해의 발판이다. 우리는 하나의 색맹에 불과한 존재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 색맹이 또 다른 색맹을 향해 이해해 주지 않 는다고 안달이다. 연인들은 자기만이 상대방을 속속들이 이해하려는 맹목 적인 열기로 하여 오해의 안개 속을 헤매게 된다.
그러고 보면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상상의 날개에 편승한 찬란 한 오해다. “나는 당신을 죽도록 사랑합니다.”라는 말의 정체는 “나는 당 신을 죽도록 오해합니다.” 일지도 모른다.
0 누가 나를 추켜세운다고 해서 우쭐댈 것도 없고 헐뜯는다고 해서 화를 낼 일도 못된다. 그건 모두가 한 쪽만을 보고 성급하게 판단한 오해이기 때문 이다.
오해란 이행 이전의 상태가 아닌가. 문제는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 냐에 달린 것이다. 실상은 말밖에 있는 것이고 진리는 누가 뭐라 하건 흔 들리지 않는다. 온전한 이해는 그 어떤 관념에서가 아니라 지혜의 눈을 통 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 이전에는 모두가 오해일 뿐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무슨 말씀. 그건 말짱 오해라니까. (1972)
■ 설해목
0 해가 저문 어느 날. 오막살이 토굴에 사는 노승 앞에 더벅머리 학생이 하 나 찾아왔다. 아버지가 써준 편지를 꺼내면서 그는 사뭇 불안한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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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인즉, 이 망나니를 학교에서고 집에서고 더 이상 손댈 수 없으니, 스님이 알아서 사람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노승과 그의 아버지 는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편지를 보고 난 노승은 아무런 말도 없이 몸소 후원에 나가 늦은 저녁을 지어왔다. 저녁을 먹인 뒤 발을 씻으라고 대야에 가득 더운 물을 떠다 주 었다. 이때 더벅머리의 눈에서는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아까부터 훈계가 있으리라 은근히 기다려지기까지 했지만 스님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시중만을 들어 주는 데에 크게 감동한 것이다. 훈계라 면 진저리가 났을 것이다. 그에게는 백 천 마디 좋은 말보다는 다사로운 손길이 그리웠던 것이다.
0 산에서 살아 보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겨울철이면 나무들이 많이 꺾 인다. 모진 비바람에도 끄떡 않던 아름드리 나무들이, 꿋꿋하게 고집스럽 기만 하던 그 소나무들이 눈이 내려 덮이면 꺾이게 된다. 가지 끝에 사뿐 사뿐 내려 쌓이는 그 가볍고 하얀 눈에 꺾이고 마는 것이다.
깊은 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나무들이 꺾이는 메아리가 울려올 때. 우 리들은 잠을 이룰 수 없다. 정정한 나무들이 부드러운 것 앞에서 넘어지는 그 의미 때문일까. 산은 한 겨울이 지나면 앓고 난 얼굴처럼 수척하다.
0 더벅머리의 눈에 눈물이 나게 항 것은 엄한 훈계가아니라 훈훈한 사랑이 었고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든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이다. (1968)
■ 종점에서 조명을
0 자기의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았으면 좋겠다는 별난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를 데리고 불쑥 망우리를 찾아간 일이 있다. 짓궂은 성미 에서가 아니라 성에 차지 않게 생각하는 그의 생을 죽음 쪽에서 조명해 주고 싶어서였다. 여지가 없는 무덤들이 거기 그렇게 있었다.
망우리!
과연 이 동네에서는 모든 근심 걱정을 잊어버리고 솔바람 소리나 들으며
누워 있는 것일까. 우뚝우뚝 차갑게 지켜 서 있는 비석들만 아니라면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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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평온할 것 같았다. 죽어 본 그들이 살아 있는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만약 그들을 깊은 잠에서 불러 깨운다면 그들은 되찾은 생을 어떻게 살아갈까?
0 사형수에게는 일분 일초가 생명 그 자체로 실감된다고 한다. 그에게는 내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오늘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에 살고 있으면서도 곧잘 다음날로 미루며 내일에 살려고 한다. 생명 의 한 도막인 하루하루를 소홀히 낭비하면서도 뉘우침이 없다.
일상이 지겨운 사람들은 때로는 종점에서 자신의 생을 조명해 보는 일도 필요하다. 그것은 오로지 반복의 깊어짐을 위해서. (1970)
■ 탁상시계 이야기
0 지난해 가을, 새벽 예불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큰 법당 예불을 마치고 판전(版殿)을 거쳐 내려오면 한 시간 가까이 걸린다. 돌아와 보니 방문이 열려 있었다. 도둑이 다녀간 것이다. 평소에 잠그지 않는 버릇이라 그는 무사통과였다. 살펴보니 평소에 필요한 것들만 골라 갔다. 내게 소용된 것 이 그에게도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가져간 것보다 남긴 것이 더 많았다. 내게 잃어버릴 물건이 있었 다는 것이, 남들이 보고 탐낼 만한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적잖이 부끄러웠다. 물건이란 본래부터 내가 가졌던 것이 아니고 어떤 인연으로 해서 내개 왔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떠나가기 마련이라 생각하니 조금도 아까울 것이 없었다. 어쩌면 내가 전생에 남의 것을 훔친 그 과보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빚이라도 갚고 난 듯 홀가분한 기분이다.
0 그런데 그는 대단한 것이라도 있는가 싶어 있는 것 없는 것을 샅샅이 뒤 져 놓았다. 잃은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애석하지 않았는데 흐트러 놓고 간 옷가지를 하나하나 제자리에 챙기자니 새삼스레 인간사가 서글퍼지려고 했다.
당장에 아쉬운 것은 다른 것보다도 탁상에 있어야 할 시계였다. 도군이 다녀간 며칠 후 시계를 사러 나갔다. 이번에는 아무도 욕심내지 않을 허름 한 것으로 구해야겠다고 작정, 청계천에 있는 어떤 시계 가게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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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런데. 허허, 이거 어찌된 일인가. 며칠 전에 잃어버린 우리 방 시계가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웬 사내와 주인이 목하 흥정중이었다.
나를 보자 사내는 슬쩍 외면했다. 당황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에게 못 지 않게 나도 당황했다. 결국 그 사내에게 돈을 건네주고 내 시계를 내가 사게 되었다. 내가 무슨 자선가라고 그를 용서하고 말고 할 것인가. 따지 고 보면 어슷비슷한 허물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간의 처지인데, 뜻밖에 다 시 만난 시계와의 인연이 우선 고마웠고, 내 마음을 내가 돌이켰을 뿐이 다. (1972)
■ 회심기(回心期)
0 소유 관념이나 손해에 대한 개념도 내 것이란 본래 아무 것도 없기 때문 에 본질적으로 손해란 있을 수 없다. 또 내 손해가 이 세상 어느 누구에겐 가 이익이 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잃은 것이 아니라는 논리이다.
절에도 가끔 도둑이 든다. 절이라고 이 지상의 풍속권에서 예외는 아니 다. 주기적으로 기웃거리는 단골 도둑이 있어 허술한 문단속에 주의를 환 기 시킨다. 날마다 소용되는 물건을 몽땅 잃었을 때 괘씸하고 서운한 생각 이 고개를 들려고 했다. 그러자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한동안 맡아 가지고 있던 걸 돌려보낸 거라고.
자칫했더라면 물건 잃고 마음까지 잃을 뻔하다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 手去)의 교훈이 내 마음을 지켜주었던 것이다.
0 대중가요의 가사를 빌릴 것도 없이 내 마음 나도 모를 때가 없지 않다. 정 말 우리 마음이란 미묘하기 짝이 없다.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 들이다가 한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여유조차 없다, 그러한 마음을 돌이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마음이라면 그 누구 도 아닌 나 자신이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화나는 그 불꽃 속에서 벗어나 려면 외부와의 접촉에도 신경을 써야겠지만, 그보다도 생각을 돌이키는 일 상적인 훈련이 앞서야 한다.
그래서 마음에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라고 옛사람들은 말한 것이 다.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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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조(早朝) 할인
0 나는 조조할인을 좋아한다. 그 까닭은 결코 할인에 있는 것이 아니고 早朝 의 그 분위기에 있다. 우선 창구 앞에 늘어설 필요가 없으니 절차가 간단 해서 좋다. 줄지어 늘어서서 기다릴 때 오락은 절반쯤 그 폭이 줄어들 것 이다.
그리고 아무데나 앉고 싶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는 특권이 있다. 안내양의 그 불안하도록 희미한 플래시의 지시를 받을 필요도 없이 선택의 좌석이 여기저기 마련되어 있다. 모처럼 배당받은 좌석 앞에 버티고 앉은 좌고(坐 高)가 시야를 가릴 경우 나의 죄 없는 고개는 피해를 입어야 한다. 그러나 조조에는 그런 피해도 없다.
무엇보다도 조조의 매력은 듬성듬성 앉아 있는 그 여유있는 공간에 있을 것 같다. 우리들이 영화나 연극을 보는 것은 단조롭고 반복되는 일상적인 굴레에서 벗어나 색다른 세계에 자신을 투입하여 즐기려는 것인데, 밀집한 일상이 영화관에까지 연장된다면 어떻게 색다른 세계를 이룰 수 있을 것 인가. 그러한 밀집은 출퇴근 시간의 만원 버스나 다닥다닥 붙은 이웃집 처 마끝만으로도 충분하다. 가뜩이나 각박한 세정에 듬성듬성 앉을 수 있는 그러한 공간은 여유가 있어 좋다.
0 그렇게 앉아 있는 뒷모습을 보노라면 말할 수 없는 친근감이 출렁거리게 된다. 이 아침에 모인 이웃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혹은 너무 선량하기 때 문에 일터에서 밀려난 사람들일까? 아니면 지나는 길에 훌쩍 들른 그런 사람들일까? 어쨌든 다 선량한 사람들만 같다. (1970)
■ 나그네 길에서
0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물론 개인의 신체적인 장애나 특수 사정 으로 문밖에 나서기를 꺼리는 사람도 없지 않겠지만, 대개의 경우 여행이 란 우리들을 설레게 할 만큼 충분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호주머니의 실력 이나 일상적인 밥줄 때문에 선뜻 못 떠나고 있을 뿐이지 그토록 홀가분하 고 마냥 설레는 나그네 길을 누가 마다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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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지난해 가을, 나는 한 달 가까이 나그네 길을 떠돌았다. 승가(僧家)의 행 각은 세상 사람들의 여행과는 다른 데가 있다. 볼일이 따로 있는 것도 아 니고 누가 어디서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발길 닿는 대 로 가는 것이다.
구름처럼 떠돌고 물처럼 흐른다고 해서 운수행각(雲水行脚)이라고 한다. 예전부터 선가(禪家)에서는 석 달 동안 한 군데서 안거하고 나면 그 다음 석 달 동안은 행각을 하도록 되어 있다. 행각은 관광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돌아다니면서 교화하고 정진할 수 있는 기회다. 말하자면 덧없는 세상 물 정을 알면서 수행하라는 뜻이다.
0 이렇게 지난 가을 동으로 서로 그리고 남으로 발길이 닿는 대로 구름처럼 떠돌아다니면서 입산 이후의 자취를 되새겨 보았다. 그때마다 지나간 날 의 기억들이 저녁 물바람처럼 배어들었다. 더러는 즐겁게 혹은 부끄럽게 자신을 비춰주었다.
그러면서도 단 한 군데만은 차마 가볼 수 없는 데가 있었다. 아니 참으로 가보고 싶은 곳이기 때문에 가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출가한 지 얼마 안 된 시절, 구도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배웠고, 또한 빈틈없는 정진으로 선 (禪)의 기쁨을 느꼈던 그런 도량이라 두고두고 아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리산에 있는 쌍계사 탑전!
그곳에서 나는 16년 전 은사 효봉 선사를 모시고 단둘이서 안거를 했었 다. 선사에게서 문자를 통해 배우기는 ‘초발심자경문’ 한 권밖에 없지만 이 곳 지리산시절 일상생활을 통해서 입은 감화는 거의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 시절 내가 맡은 소임은 부엌에서 밥을 짓고 찬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 리고 정진 시간이 되면 착실하게 좌선을 했다. 양식이 떨어지면 탁발을 해 오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40리 밖에 있는 구례장을 보아왔다.
하루는 장에 갔다가 호돈의 ‘주홍글씨’라는 소설 한 권을 사서 정신없이 읽다가 선사에게 들켰다. 선사는 단박에 태워버리라는 것이었다. 그 길로 부엌에 나가 태워버렸다. 최초의 분서였다. 그때는 죄스럽기보다 좀 아깝 다는 생각이었지만 얼마 뒤에야 책의 한계 같은 걸 느낄 수 있었다.
또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찬거리가 떨어져 아랫마을에 내려갔다가 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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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 지을 시간이 예정보다 십 분쯤 늦었었다. 선사는 엄숙한 어조로 “오 늘은 단식이다. 그렇게 시간관념이 없어서 되겠니?” 하는 것이었다. 선사 와 나는 그 시절 아침에는 죽을, 점심때는 밥을 먹고, 오후에는 전혀 먹지 않고 지냈었다. 내 불찰로 인해 노사(老師)를 굶게 한 가책은 그때뿐 아 니라 두고두고 나를 일깨웠다.
이러한 자기 형성의 도량을 차마 들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보나마나 관 광지로 주저앉았을. 고시 준비를 위한 사란들의 별장쯤으로 빛이 바래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0 나그네 길에 오르면 자기 영혼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하며 지내고 있는지, 자신의 속 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행 이 단순한 취미일 수만은 없다. 자기 정리의 엄숙한 도량이요 인생의 의미 를 새롭게 하는 그러한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하직하는 연 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1971)
■ 미리 쓰는 유서
0 죽게 되면 말없이 죽을 것이지 무슨 구구한 이유가 따를 것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지레 죽는 사람이라면 의견서(유서)라도 첨부되어야겠지만. 제 명대로 살 만치 살다가 가는 사람에겐 그 변명이 소용될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말이란 늘 오해를 동반하게 마련이므로, 유서에도 오해를 불러 일 으킬 소지가 있다.
그런데 죽음은 어느 때 나를 찾아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많은 교 통사고와 가스 중독과 그리고 원한의 눈길이 전생의 갚음으로라도 나를 쏠는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죽음 쪽에서 보면 한 걸 음 한 걸음 죽어 오고 있다는 것임을 상기할 때, 사는 일은 곧 죽는 일이 며, 생과 사는 결코 절연된 것이 아니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내 이름을 부를지라도 “네”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준비만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유서는 남기는 글이기 보다 지금 살고 있는 생의 백서(白 書)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육신으로서는 일회적일 수밖에 없는 죽음을 당해서도 실제로는 유서 같은 걸 남길 만한 처지가 못 되기 때문에 편집 자의 청탁에 산책하는 기분으로 따라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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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내가 할 일은 먼저 인간의 선의지를 저버린 일에 대한 참회다. 이웃의 선의지에 대해서 내가 어리석은 탓으로 저지른 허물 을 참회하지 않고는 눈을 감을 수 없을 것이다.
때로는 큰 허물보다 작은 허물이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다.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동무들과 어울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서였다. 엿장수가 엿판을 내려놓고 땀을 들이고 있었다. 그 엿장수는 교문 밖에서 도 가끔 볼 수 있으리만치 낯익은 사람인데 그는 팔 하나가 없고 말을 더 듬는 불구자였다. 대여섯 된 우리는 그 엿장수를 둘러싸고 엿가락을 고르 는 체하면서 적지 않은 엿을 슬쩍슬쩍 빼돌렸다. 돈은 서너 가락치밖에 내 지 않았다. 불구인 그는 그런 영문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일이, 돌이킬 수 없는 이 일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지은 허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중에는 용 서받기 어려운 허물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그때 저지 른 그 허물이 줄곧 그림자처럼 나를 쫓고 있다.
0 “날카로운 면도날은 밟고 가기 어렵나니, 현자가 이르기를 구원을 얻는 길 또한 어려우니라.” ‘우파니샤드’의 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다.
내가 죽을 때에는 가진 것이 없을 것이므로 무엇을 누구에게 전한다는 번거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은 우리들 사문의 소 유관념이다. 그래도 혹시 평생에 즐겨 읽던 책이 내 머리맡에 몇 권 남는 다면 아침 저녁으로 “신문이오”하고 나를 찾아 주는 그 꼬마에게 주고 싶 다.
장례식이나 제사 같은 것은 아예 소용없는 일, 요즘은 중들이 세상 사람 들보다 한술 더 떠 거창한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 그토록 번거롭고 부질없 는 검은 의식이 만약 내 이름으로 행해진다면 나를 위로하기는커녕 몹시 화나게 할 것이다.
아무데서나 다비해도 무방하다. 사리 같은 걸 남겨 이웃을 귀찮게 하는 일을 나는 절대로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육신을 버린 후에는 훨훨 날아서 가고 싶은 곳이 있다. ‘어린 왕자’가 사 는 별나라 같은 곳이다. 의자의 위치만 옮겨 놓으면 하루에도 해지는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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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몇 번이고 볼 수 있다는 아주 조그만 그런 별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안 왕자는 지금쯤 장미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 을까. 그런 나라에는 귀찮은 입국사증 같은 것도 필요 없을 것이므로 한번 가보고 싶다.
그리고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고 싶다. 누가 뭐라 한 대도 모국 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 다시 출가 수행자가 되어 금생에 못 다한 일들을 하고 싶다. (1971)
■ 인형과 인간
0 사람을 흙으로 빚었다는 종교적인 신화는 여러 가지로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 것이다. 고대 인도인들도 우리들 신체의 구성요소로 흙과 물과 불과 바람을 들고 있는데, 쇠붙이나 플라스틱을 쓰지 않고 흙으로 만들었다는 데는 그만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대지는 영원한 모성, 흙에서 음식물을 길러내고 그 위에다 집을 짓는다. 그 위를 직립보행하면서 살다가 마침내는 그 흙에 누워 삭아지고 마는 것이 우리들 인생의 생태다. 그리고 흙은 우리들 생명의 젓줄일 뿐 아니라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씨앗을 뿌리면서 움이 트고 잎과 가지가 펼쳐져 거기에 꽃과 열매가 맺힌다. 생명의 발아 현상을 통해 불가 시적인 영역에도 눈을 뜨게 한다.
그러기 때문에 흙을 가까이 하면 자연 흙의 덕을 배워 순박하고 겸허해 지며, 믿고 기다릴 줄을 안다. 흙에는 거짓이 없고 추월과 무질서도 없다.
0 시멘트와 철근과 아스팔트에서는 생명이 움틀 수 없다. 비가 내리는 자연 의 소리마저 도시는 거부한다. 그러나 흙은 비를, 그 소리를 받아들인다. 흙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우리들 마음은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정결해지고 평온해 진다. 어디 그뿐인가. 구두와 양말을 벗어버리고 일구 어 놓은 밭흙을 맨발로 감촉해 보라. 그리고 흙냄새를 맡아 보라 그것은 약동하는 생의 기쁨이 될 것이다.
0 혜월(慧月) 선사는 절 곁에 논을 쳤다. 쓸모없이 버려진 땅을 보고 논을 만들었으면 싶었다. 때마침 흉년이 들어 동구 사람들이 살기가 어렵게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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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보고 그들을 불러다 일을 시킨다. 한 달 두 달이 걸려도 논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다. 보는 사람마다 그 노임으로 더 많은 논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만류하지만 노승은 끝내 굽히지 않는다. 마침내 그를 미친 노장 이라고 비웃게 된다.
선사는 못 들은 체 날이 새면 일터에 나가 일꾼들과 어울려 일을 한다. 이와 같이 해서 몇 백 평의 논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거기에 든 노임은 이 루어진 논의 시세보다 몇 곱 더 들어갔다. 그러나 선사는 없던 논이 새로 생긴 것을 기뻐했다.
0 그는 세속적인 눈으로 볼 때 분명히 산술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어리석음으로 해서 흉년에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을 면할 수 있 었다. 그와 같은 사연이 깃들인 논이므로 절에서는 그 논을 단순한 땅마지 기로서가 아니라 오늘날 까지도 사풍(寺風)의 상징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한결같이 약고 닳아빠진 세상이기 때문에 그토록 어리석고 우직스런 일 이 우리를 포근하게 감싸 준다. 대우(大愚)는 대지(大智)에 통한다는 말이 결코 빈말은 아닐 것이다.
0 현대인들은 자기 행동은 없이 남의 흉내만을 내면서 살려는 데에 맹점이 있다. 사색이 따르지 않는 지식을, 행동이 없는 지식인을 어디에다 쓸 것 인가. 아무리 바닥이 드러난 세상이기로, 진리를 사랑하고 실현해야 할 지 식인들까지 곡학아세(曲學阿世)와 비겁한 침묵으로써 처신하려 드니, 그것 은 지혜로운 일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배반이다.
얼마만큼 많이 알고 있느냐는 것은 대단한 일이 못 된다. 아는 것을 어 떻게 살리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인간을 탈을 쓴 인형은 많아도 인간다운 인간이 적은 현실 앞에서 지식인이 할 일은 무엇일까. 먼저 무기력하고 나약하기만 한 그 인형의 집에서 나오지 않고서는 어떠한 사명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무학(無學)이란 말이 있다. 전혀 배움이 없거나 배우지 않았다는 뜻이 아 니다. 학문에 대한 무용론도 아니다. 많이 배웠으면서도 배운 자취가 없는 것을 가리킴이다. 지식이 인격과 단절될 때 그 지식인은 사이비요 위선자 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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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책임을 질 줄 아는 것은 인간뿐이다. 이 시대의 실상을 모른 체하려는 무 관심은 비겁한 회피요. 일종의 범죄다. 사랑한다는 것은 함께 나누어 짊어 진다는 뜻이다. 우리에게는 우리 이웃의 기쁨과 아픔에 대해 나누어 가질 책임이 있다. 우리는 인형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다. 우리는 끌려 가는 짐승이 아니라 신념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야 할 인간이다. (1974)
■ 녹은 그 쇠를 먹는다.
0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사람의 마음처럼 불가사의한 것이 또 있을까.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두루 받아 들이다가도, 한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가 없는 것이 우리 마음 이다. 그래서 가수들은 오늘도 “내 마음 나도 몰라.....”라고 우리 마음을 대변한다. 자기 마음을 자신이 모른다니, 무책임한 소리 같다. 하지만, 이 것이 평범하면서도 틀림이 없는 진리다.
0 아니꼬운 일이 있더라도 내 마음을 내 스스로가 돌이킬 수밖에 없다. 남을 미워하면 저쪽이 미워지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미워진다. 아니꼬운 생각 이나 미운 생각을 지니고 살아간다면 그 피해자는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아간다면 내 인생 자체가 얼룩지고 만다.
그러기 때문에 대인 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인생을 배우고 나 자신을 닦 는다. 회심(回心), 즉 마음을 돌이키는 일로써 내 인생의 의미를 심화시켜 야 한다.
0 미워하는 것도 내 마음이고, 고와하는 것도 내 마음에 달린 것이다. ‘화엄 경’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한 것도 바로 이 뜻이다.
그 어떤 수도나 수양이라 할지라도 이 마음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그 것은 마음이 모든 일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법구경’에는 이런 비유가 있다.
“녹은 쇠에서 생긴 것인데 점점 그 쇠를 먹는다.”
이와 같이 그 마음씨가 그늘지면 그 사람 자신이 녹슬고 만다는 뜻이다.
(1973)
■ 영원한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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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산에서 사는 사람들이 산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있다면, 속 모르는 남들은 웃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산승들은 누구보다도 산으로 내닫는 진한 향수를 지닌다. 이 산에 살면서 지나온 저 산을 그리거나 말만 듣고 아직 가보지 못한 그 산을 생각한다.
산에는 높이 솟은 봉우리만이 아니라 깊은 골짜기도 있다. 나무와 바위와 시냇물과 온갖 새들이며 짐승, 안개, 구름, 바람, 산울림 그리고 퇴락해 가 는 고사(古寺), 이밖에도 무수한 것들이 우리들의 상념과 한데 어울려 하 나의 산을 이루고 있다.
0 산이 좋아 산에 산다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거짓이 아니다. 산이 싫어지면 산에서 살 수가 없다. 그러니 한번 산에 들어 살게 되면 그 산을 선뜻 떠 나올 수 없는 애착이 생긴다.
산은 사철을 두고 늘 새롭다. 그 중에도 여름이 지나간 가을철 산은 영원 한 머시마인 우리들을 설레게 한다. 물든 잎이, 머루와 다래와 으름이 숲 에서 손짓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일과가 끝나는 가을날 오후에는 선원(禪 院)이고 강원(講院)이고 절 안이 텅 빈다. 다들 숲에 들어가 산짐승처럼 덩 굴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0 나옹선사 시 (고려말)
흰구름 무더기 속에 삼간 초막 있어
앉고 눕고 거닐기에 저절로 한가롭다
차가운 시냇물은 반야(般若)를 노래하고
맑은 바람 달과 어울려 온몸에 차다. (1973)
■ 침묵의 의미
0 침묵을 배경 삼지 않는 말은 소음이나 다를 게 없다. 생각없이 불쑥불쑥 함부로 내뱉는 말을 주워 보면 우리는 말과 소음의 한계를 알 수 있다. 오 늘날 우리들의 입에서 토해지는 말씨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자꾸만 거 칠고 천박하고 야비해져 가는 현상은 그만큼 내면이 헐벗고 있다는 증거 일 것이다. 안으로 침묵을 조명을 받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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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성급한 현대인들은 자기 언어를 쓸 줄 모른다. 정치 권력자들이, 탤런트들이, 가수가, 코미디언이 토해낸 말을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대로 주워서 흉내 내고 있다. 그래서 골이 비어 간다. 자기 사유마저 빼앗기고 있다.
我有一卷經(아유일권경) : 사람마다 한 권의 경전이 있는데
不因紙墨成(불인지묵성) : 그것은 종이나 활자로 된 게 아니다.
展開無一字(전개무일자) : 펼쳐 보아도 한 글자 없지만
常放大光明(상방대광명) : 항상 환한 빛을 발하고 있네
불경에 있는 말이다. 일상의 우리들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잡 히는 것으로써만 어떤 사물을 인식하려고 한다. 그러나 실체는 저 침묵처 럼 보이지도 들리지도 잡히지도 않는 데에 있다. 자기중심적인 고정관념에 서 벗어나 허심탄회한 그 마음에서 큰 광명이 발해진다는 말이다.
0 말은 의사소통의 구실을 하지만 때로는 불필요한 잡음의 기능도 하고 있 다. 구시화문(口是禍門). 입을 가리켜 재앙의 문이라고 한 것도 그 역기능 적인 면을 지적한 것이다.
칼릴 지브란은 우리들이 해야 할 말을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귓속의 귀 에” 하는 말이라고 했다. 사실 언어의 극치는 말보다도 침묵에 있다. 너 무 감격스러울 때 우리는 말을 잃는다. 그러나 사람인 우리는 할 말은 해 야 한다.
침묵의 의미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대신 당당하고 참된 말을 하기 위해서이지, 비겁한 침묵을 고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어디에도 거리낄 게 없는 사람만이 당당한 말을 할 수 있다. (1974)
■ 영혼의 모음
- 어린 왕자에게 보내는 편지 -
0 어린 왕자!
지금 밖에서는 가랑잎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창호에 번지는 하오의 햇살 이 지극히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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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각에 나는 티없이 맑은 네 목소리를 듣는다. 구슬 같은 눈매를 본 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해 지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그 눈매를 그린다. 이런 메아리가 울려온다.
“나하고 친하자. 나는 외롭다.”
“나는 외롭다..... 나는 외롭다..... 나는 외롭다....”
어린 왕자!
이제 너는 내게서 무연한 남이 아니다. 한지붕 아래 사는 낯익은 식구다. 지금까지 너를 스무 번도 더 읽은 나는 이제 새삼스레 글자를 읽을 필요 도 없어졌다. 책장을 훌훌 넘기기만 해도 네 세계를 넘어다 볼 수 있기 때 문이다. 행간에 쓰여진 사연까지도. 여백에 스며 있는 목소리까지도 죄다 읽고 들을 수 있게 되었다.
0 몇 해 전. 그러니까 1965년 5월. 너와 마주친 것은 하나의 해후였다. 너 를 통해서 비로소 인간관계의 바탕을 인식할 수 있었고 세계와 나의 촌 수를 헤아리게 되었다. 그때까지 보이지 않던 사물이 보이게 되고,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리게 된 것이다. 너를 통해서 나 자신과 마주친 것이다.
너는 메마른 나의 가지에 푸른 수액을 돌게 했다. 솔바람 소리처럼 무심 한 세계로 나를 이끌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 곧 나의 존재임을 투명 하게 깨우쳐 주었다.
0 어린 왕자!
너의 아저씨(생텍쥐페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더라.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어른들에게 새로 사귄 동무 이야기를 하면, 제일 중요한 것은 도무지 묻지 않는다. 그분들은 ‘그 동무의 목소리가 어 떠냐? 무슨 장난을 제일 좋아 하느냐? 나비 같은 걸 채집하느냐?’ 이렇게 묻는 일은 절대로 없다. ‘나이가 몇이냐? 형제가 몇이냐? 몸무게가 얼마나 나가느냐? 그 애 아버지는 얼마나 버느냐?’ 이것이 그분들의 묻는 말이다. 그제서야 동무를 아는 줄로 생각한다.
어린 왕자!
너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 ‘버섯’이라고 했지?
“그는 꽃향기를 맡아 본 일도 없고 별을 바라본 일도 없고, 누구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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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본 일도 없어. 더하기밖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 그러면서도 온종 일 나는 착한 사람이다. 나는 착한 사람이다. 하고 뇌고만 있어. 그리고 이 것 때문에 잔뜩 교만을 부리고 있어. 그렇지만 그건 사람이 아니야. 버섯 이야!”
그래 네가 여우한테서 얻어 들은 비밀처럼.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 이지 않아. 잘 보려면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사실 눈에 보이는 것은 빙산 의 한 모서리에 불과해. 보다 크고 넓은 것은 마음으로 느껴야지. 그런데 어른들은 어디 그래? 눈앞에 나타나야만 보인다고 하거든. 정말 눈뜬 장님 들이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도 꿰뚫어볼 수 있는 그 슬기가 현대인 에겐 아쉽다는 말이다.
0 어린 왕자!
너는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꽃인 줄 알았다가, 그 꽃과 같은 많은 장 미를 보고 실망한 나머지 풀밭에 엎드려 울었었지? 그때에 여우가 나타나 ‘길들인다’는 말을 가르쳐 주었어. 그건 너무 잊혀진 말이라고 하면서 ‘관 계를 맺는다’는 뜻이라고.
그토록 절절한 ‘관계’가 오늘의 인간 촌락에서는 퇴색해 버렸다. 서로를 이해와 타산으로 이용하려 들거든. 정말 각박한 세상이다. 나와 너의 관계 가 없어지고 만 거야. ‘나’는 나고 ‘너’는 너로 끊어지고 말았어. 이와 같이 뿔뿔이 흩어져 버렸기 때문에 나와 너는 더욱 외로워질 수밖에 없는 거야. 인간 관계가 회복되려면, ‘나’. ‘너’ 사이에 ‘와’가 개재 되어야 해.
0 어린 왕자!
네 목소리를 들을 때 나는 누워서 들어. 그래야 네 목소리를 보다 생생 하게 들을 수 있기 때문이야.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펼치고 날아다닐 수 있는 거야. 네 목소리는 들을수록 새롭기만 해. 그건 영원한 영혼의 모음 (母音)이야.
아, 그토록 네가 나를 흔들고 있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건 네 영혼이 너무도 아름답고 착하고 조금은 슬프기 때문일 것이다. 사막이 아 름다운 건 어디엔가 샘물이 고여 있어서 그렇듯이.
네 소중한 장미와 고삐가 없는 양에게 안부를 전해다오.
너는 항시 나와 함께 있다.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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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0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물건과 인연을 맺는다. 물건 없이 우리들의 일상 생활은 이루어질 수 없다. 인간을 가리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것도 물 건과의 상관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아끼던 물건을 도둑맞았거나 잃어 버렸을 때 그는 괴로워한다. 소 유관념이란 게 얼마나 지독한 집착인가를 비로소 체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개의 사람들은 물건을 잃으면 마음까지 잃는 이중의 손해를 치르게 된 다. 이런 경우 집착의 얽힘에서 벗어나 한 생각 돌이키는 회심(回心)의 작 업은 정신 위생상 마땅히 있음직한 일이다.
따지고 보면, 본질적으로 내 소유란 있을 수 없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온 물건이 아닌 바에야 내 것이란 없다. 어떤 인연으로 해서 내게 왔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가 버린 것이다. 더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나의 실체도 없는데 그밖에 내 소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저 한동안 내가 맡아 있을 뿐이다.
0 어느 날 외딴 암자에 ‘밤손님’이 내방 했다. 노스님이 정랑엘 다녀오다 보 니 웬 사람이 지게에 짐을 지워 놓고 끙끙 거리고 있었다. 뒤주에서 쌀을 퍼내긴 했는데 힘이 부쳐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노스님은 지게 뒤로 돌 아가 도둑이 다시 일어나려고 할 때 지그시 밀어 주었다. 겨우 일어난 도 둑이 힐끗 돌아보았다.
“아무 소리 말고 지고 내려가게.”
노스님은 밤손님에게 나직이 타일렀다. 이튿날 아침. 스님들은 간밤에 도 둑이 들었다고 야단이었다. 그러나 노스님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에게는 잃어버린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부터 한 물건도 없다는 이 말은 선가(禪家) 에서 차원을 달리해 쓰이지만 물건에 대한 소유 관념을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그 후로 그 밤손님은 암자의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는 후문이다. (1970)
■ 아름다움
- 낯모르는 누이들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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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 글을 읽어 줄 네가 누구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슬기롭고 아름다운 소녀이기를 바라면서 글을 쓴다. 슬기롭다는 것은, 아름답다는 것은 그 사 실만 가지고도 커다란 보람이기 때문이다.
일전에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종로에 있는 제과점에 들른 일이 있다. 우 리 이웃 자리에는 여학생이 대여섯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애들이 깔깔거리며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다보니 나는 슬퍼지려고 했다. 그 까닭은 고1이나 2쯤 되는 소녀들의 대화치고는 너무 거칠고 야한 때문이었다.
한번은 버스 종점에서 여차장들끼리 주고받는 욕지거리로 시작되는 말을 듣고 나는 하도 불쾌해서 그 차에서 내려버린 적이 있었다. 고물차에서 풍 기는 기름 냄새는 골치만 아프면 그만이지만. 욕지거리는 듣는 마음 속까 지 상하게 한다. 그것은 인간의 대화가 아니라 시궁창에서 썩고 있는 추악 한 악취나 다름없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 잠시라도 나를 빠지게 할 수가 없었다.
0 사람들은 흔히 아름다움이라면 거죽만을 보려는 맹점이 있어. 그래서 아름 답게 보이려고 갖은 수고를 다한다. 값진 화장품을 써야 하고, 사람이 먹 기도 어려운 우유에 목욕을 하는가 하면 무슨무슨 운동을 하고, 값비싼 옷 을 해 입어야 하고......
그들은 모르고 있어. 감추는 데서 오히려 나타난다는 예술의 비법을. 현 대인들은 그저 나타내는 데만 급급한 나머지 감추는 일을 망각하고 있어. 겉치레에만 정신을 파느라고 속을 다스릴 줄 모른단 말야. 이런 점은 우리 춘향이나 심청이한테 배워야 할 거다.
그런데 아름다움은 누구에게 보이기 전에 스스로 나타나는 법이거든. 꽃 에서 향기가 저절로 번져 나오듯.
어떤 시인의 말인데 꽃과 새와 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정결한 기쁨을 우 리에게 베풀어 준다는 거야. 그러나 그 꽃은 누굴 위해 핀 것이 아니고 스 스로의 기쁨과 생명의 힘으로 피어난 것이래. 숲 속의 새들도 자기의 자유 스런 마음에서 지저귀고, 밤하늘의 별들도 스스로 뿜어지는 자기 빛을 우 리 마음에 던질 뿐이란 거야. 그들은 우리 인간을 위한 활동으로서 그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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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안에 이미 잉태된 큰 힘의 뜻을 받들어 넘치는 기쁨 속에 피고 지저귀고 빛나는 것이래.
0 얼굴이란 말의 근원이 ‘얼의 꼴’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한 사람의 얼굴 모 습은 곧 그 사람의 영혼의 모습일 거다. 아름다운 얼굴은 지금까지 아름다 운 행위를 통해 아름답게 얼을 가꾸어 와서 그럴 거고. 추한 얼굴은 추한 행위만을 쌓아 왔기 때문에 그럴 거야. 그렇다면 아름답고 추한 것은 나 아닌 누가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게 아니라,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 그런 꼴 (탈)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0 누이야, 이 살벌하고 어두운 세상에서 너의 그 청청한 아름다움으로 인해 서 살아갈 만한 세상이 되도록 부디 슬기로워지거라. 네가 할 일이 무엇인 가를 찾아라. 그것이 곧 너 자신일 거다. (1971)
■ 진리는 하나인데
- 기독교와 불교 -
0 대개의 경우 어떤 종교를 통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종교를 갖지 않 은 일반인들에 비해 대인관계에 있어서 너그럽다고 한다. 그러나 그 대인 관계가 이교도로 향하게 될 때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수가 더러 있다. 너그 러웠던 아량이 갑자기 움츠러들어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돋우는 것이다.
이와 같은 씁쓸한 현상은 어디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일까. 자기가 믿고 있는 종교적인 신념에서라기보다, 이교도라면 무조건 적대시하려 드 는 배타적인 감정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기가 믿는 종교만이 유일한 것 이며 그밖에 다른 종교는 일고의 가치조차 없는 미신으로 착각하고 있는 맹목에서 일 것이다. 이렇듯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선민의식이 마치 자기의 신심을 두텁게 하는 일인 양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시야를 가리게 되는 것이다.
0 많은 종교가 존재하고 있는 한 어떤 종교이든지 그 나름의 독자적인 상징 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상징이 맹목적인 숭배물로 되거나 혹은 다른 종교에 대해 우월을 증명하는 도구로 쓰인다면 그것은 무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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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오해는 이해 이전의 상태이다. 따라서 올바른 비판은 올바른 인식을 통해서만 내려질 수 있다. 그릇된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일부 종교인들은 성급하게도 인식을 거치지 않고 비판부터 하려 든다. 물론 인식이 없는 비 판이란 건전한 비판일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들이 진정으로 자기 종교의 본질을 알게 된다면 저절로 타 종교의 본질도 알게 될 것이다.
0 내가 즐겨 읽는 ‘요한의 첫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 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 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부처님’으로 바꿔 놓으면 사이비 불교도들에게 해당될 적절한 말씀이다.
모든 오해는 저마다 자기 집에만 갇혀 있는 데서 오게 마련이다. 굳게 닫 았던 문을 열고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서로가 형제임을 마음속으로부터 느끼게 된다. 최근에 종교인들끼리의 모임이 활발해지면서부터는 종래 편 견에 사로잡힌 이해 이전의 상태가 많이 해소되고 있다.
0 ‘리그베다’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하나의 진리를 가지고 현자들은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다.”
여러 종교를 두고 생각할 때 음미할 만한 말씀이다. 사실 진리는 하나인 데 그 표현을 달리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가끔 성경을 읽으면서 느끼는 일이지만 불교의 대장경을 읽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수가 있다. 조금도 낯설거나 이질감을 느낄 수 없다.
마하트마 간디의 표현을 빌리면 종교란 가지가 무성한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 가지로 보면 그 수가 많지만 줄기로 보면 단 하나뿐이다. 똑 같은 히말라야를 가지고 동쪽에서 보면 이렇고 서쪽에서 보면 저렇고 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하나에 이르는 개별적인 길이다. 같은 목적에 이르는 길 이라면 따로따로 길을 간다고 해서 조금도 허물될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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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문제는 우리가 얼마만큼 서로 사랑하느냐에 의해서 이해의 농도는 달라질 것이다. 진정한 이해는 사랑에서 비롯된다.
“아직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 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서 완성될 것입니다.” (요한의 첫째 편지 4장 12절) *1971
■ 나의 애송시
심심 산골에는
산울림 영감이
바위에 앉아
나같이 이나 잡고
홀로 살더라
0 청마(靑馬) 유치환의 ‘심산’이라는 시다. 시가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읽을 때마다 내 생활의 영역에 물기와 탄력을 주는 이런 언어의 결정을 나는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제부턴가 말년을 어떻게 보낼까를 생각했다. 새파란 주제에 벌써부터 말년의 일이냐고 탓할지 모르지만, 순간에서 영원을 살려는 것이 생명 현 상이다.
0 인적이 미치지 않은 심산에서는 거울이 소용없다. 둘레의 모든 것이 내 얼 굴이요 모습일 테니까.
일력(日歷)도 필요없다. 시간 밖에서 살 테니까.
혼자이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얽어매지 못할 것이다.
홀로 있다는 것은 순수한 내가 있는 것. 자유는 홀로 있음을 뜻한다.
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어디에도 거리낄 것 없이 산울림 영감처럼 살고 싶네.
태고의 정적 속에서 산신령처럼 무료히 지내고 싶네.(1972)
■ 불교의 평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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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불타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평화가 무엇인가를 보여 준 그 한 가지 사실만 가지고도 인류 역사에 불멸의 자취를 남겼다고 할 수 있다.
불교가 사회적인 실천 윤리의 바탕을 삼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자비다. 중생을 사랑하여 기쁨을 주는 것을 자(慈)라 하고, 중생을 가엾이 여겨 괴 로움을 없애 주는 일을 비(悲)라 한다. 그러므로 자비는 인간 심성의 승화 라고 할 수 있다.
초기 불교에서는,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듯 그런 마음가짐으로 모든 이 웃을 사랑하라고 강조했다.
“어머니가 자기 외아들을 목숨을 걸고 지키듯이,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 해서 한량없는 자비심을 일으켜야한다.”(숫타니타파)
0 평화의 적은 어리석고 옹졸해지기 쉬운 인간의 그 마음에 있다. 또한 평화 를 이루는 것도 지혜롭고 너그러운 인간의 그 마음에 달린 것이다. 그래서 평화란 전쟁이 없는 상태이기보다는 인간의 심성에서 유출되는 자비의 구 현이다.
우리는 물고 뜯고 싸우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서로를 의지해 사 랑하기 위해 만난 것이다.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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