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보해성산 2010. 9. 9. 07:49
반응형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 박완서 산문집 -

■ 박완서

0 1931 경기도 개풍 생, 숙명여고 졸, 서울대 입학 하던 해 한국전쟁으로    학업 중단

0 1970년 40세에 여성동아 장편소설 ‘나목’ 당선

  너무도 쓸쓸한 당신, 서 있는 여자, 그대 아직 꿈꾸고 있는가. 미망,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세 가지 소    원,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등

0 한국문학 작가상. 이상 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현대문힉상. 동인문학     상. 대산문학상. 만해문학상 등

 

■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0 집이 교외에 있어 작은 마당을 가꾸고 있는데 꽃나무 몇 그루 심고 나머    지 땅은 텃밭을 만들까 하다가 농사에 자신이 없어 잔디를 심었다.

   이른 봄 미처  잔디가 푸르러지기 전에 예서제서 푸릇푸릇 고개를 곧추    세우고 올라오는 풀은 틀림없이 잔디가 아니다. 나는 그런 풀을 ‘나도잔디’    라고 이름 붙이고 가차없이 뽑아버린다.

   잔디 사이에서 고개를 들고 싹트는 풀의 종류는 해마다 늘어나고 다양해    진다. 아무리 잡초라 해도 이 땅의 산야에서 번식하던 것은 낯설지 않은     법인데 그렇지 않은 신종 잡초도 많다. 이것들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들일    까. 온갖 잡새들이 산에[서 내려와 마당에서 놀다가는 일이 많으니 그것들    의 배설물이 원인일 수도 있지만 이국적인 잡초는 아마도 먼 나라에서 불    어온 바람, 특히 황사 바람을 타고 오는 게 아닐까. 몇만 리를 날아와서     하룻밤 새에 꽃까지 피우는 생명력이 경이롭고도 두렵다.

  

0 잔디밭에 등을 대고 누우면 부드럽고 편안하고 흙 속 저 깊은 곳에서 뭔    가가 꼼지락대는 것 같은 탄력이 느껴진다. 살아 있는 것들만이 낼 수 있    는 이런 기척은 흙에서 오는 걸까. 씨앗들로부터 오는 것일까. 아니 둘 다    일 것 같다. 흙과 씨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을 적이 많다. 씨를 품은 흙   

                                 - 1 -

  의 기척은 부드럽고 따숩다. 내 몸이 그 안으로 스밀 생각을 하면 죽음조    차 무섭지 않아진다.


0 생명 있는 것들의 힘은 비록 영양실조에 걸렸을망정 큰 돌을 움직이는 괴    력이 되기도 한다. 생명 있는 곳엔 바람의 형태로든 먼지의 형태로든 흙이    모여들어 씨앗과 합력한다. 돌계단의 이음새가 점점 더 넓어져서 안전을     위협하게 되자 금년에 집을 손보면서 돌을 바로잡고 틈을 시멘트로 빈틈    없이 바르도록 했다. 이 땅의 산야를 사통오달 굴을 뚫고 길을 내느라 단    단히 포장한 아스팔트 길 밑의 흙속에는 얼마나 많은 씨들이. 흙의 입자만    큼이나 무수한 씨들이 백 년 후건 천 년 후건 싹틀 날만 기다리고 잠들지    못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인간이 크게 못할 노릇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괜히 두렵고 뒤숭숭하다. 그렇다고 흙이 아스팔트야 들고 일어나겠    는가.

  

0 맨손으로 흙을 주무르다가 들어오면 손톱 밑이 까맣다. 외출할 일이 있으    면 정성들여 손을 씻지만 대강 씻고 무심히 외출할 적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고 사람을 만날 때면  열심히 내 손을 테이블 밑으로 감추지만 속으    로는 엉뚱한 상상력으로 비죽비죽 웃음이 나온다. 며칠만 나의 때 묻은 손    톱을 간직하면 열 손가락 손톱 밑에서 푸릇푸릇 싹이 돋지 않을까. 내 손    톱 밑에 낀 것은 단연 때가 아니고 흙이므로.

   매니큐어 대신 손끝에 푸른 싹이 난 열손가락을 하늘을 향해 높이 쳐들    고 도심의 번화가를 활보하는 유쾌하고 엽기적인 늙은이를 상상해본다. 


0 5월의 신록은 매번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롭고 눈부시다. 신록의 빛깔도 수    종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있다. 순전한 녹두색도 있고 갈색이나 보라색이    도는 연녹색도 있고, 젖빛이 도는 건 아마도 아카시아일 것이다. 그러한     미묘한 차이가 원근과 수종에 따라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바람이 불 때마    다 움직이고 살랑이는 모습도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한결같이 몽실몽실     부드럽고 귀여운, 꼭 아기 궁둥이 같은 게 오월의 나무들이다. 내 소유가    아니어서 욕심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자유와 평화, 그게 바로 차경(借景)의    묘미 아니겠는가. 내가 더 늙고 힘에 부쳐 우리 마당이 볼품없는 쑥대밭이    된다 해도 저 숲의 사계절 변화는 계속될 것이다. 노후에 빌려 보는 경치


                                 - 2 -

  가 아름다운 집에 산다는 게 큰 복이다 싶다. 창가에 앉아서 빌려 보는 경    치로 눈을 씻고 마음을 씻고 나서 그래도 몸담고 있는 세상 돌아가는 일    도 대강은 알아둬야 할 것 같아 마지못해 신문을 펴든다.


0 정치판이 죽기 살기로 싸우는 걸 오락처럼 즐길 수 있는 편리한 심장이라    해도 천안함 사건을 비켜갈 수는 없다. 젊은 죽음에 대한 애통한 마음도     쉬 가라앉지 않거니와 그 사건에 낀 우리의 입장, 주변국과 강대국의 태     도, 북에 대한 의구심과 적개심, 그 정당한 분노조차 자제해야 할 것 같은    그래도 전쟁만은 피해야지 하는 마지막 평화주의, 남들은 어떤지 잘 모르    지만 나의 평화주의는 전쟁에 대한 공포의 다른 이름일 뿐인지도 모르겠    다. 또한 나의 평화주의는 부끄럽게도 진상까지도 피해 가고 싶을 만큼 비    겁한 것이기도 하다.

    지금은 또 경인년이다. 나에게는 그냥 경인년이 아니라, 또 경인년이고    또 경인년이기 때문에 내 생전에 또 전쟁을 겪게 될까 봐 두려운 것이다.    6.25가 난 해도 경인년이었으니 꽃다운 20세에 전쟁을 겪고 어렵게 살아    남아 그해가 회갑을 맞는 것까지 봤으니 내 나이가 새삼 징그럽다. 더 지    겨운 건 60년이 지나도 여전히 아물 줄 모르고 도지는 내 안의 상처이니    노구지만 그 안의 상처는 아직도 청춘이다.

   

   그해의 5월도 아름다웠다. 내 생애의 가장 아름다운 5월이었다. 교정에     라일락 향기가 숨 막히던 5월에 나는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때 학제로는     중학교가 6학년까지 있었으니 지금으로 치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거였다.    어떻게 해서 졸업을 5월에 할 수 있었다. 다들 의아해하지만 그 또한 우리    학년만의 특혜였다. 우리는 6년제 중학교 재학 중에 해방을 맞았고 해방된    달이 8월이어서인지 다음 해 봄에 진급을 시키지 않고 일 년 있다가 9월    에 진급을 시켰다. 식민지를 벗어난 독립국에 맞는 국정교과서나 커리큘럼    이 정해지기도 전, 단지 해방되었을 뿐인 혼란기에 불가피한 조치였을 것    이다. 그 후 몇 년 동안은 8월을 학기말로 하고 9월에 새학기가 시작되었    다. 그게 미국식 학제라고 하니 뭐든지 미국식을 좋아할 때라 그대로 고정    되는 줄 알았는데 종전대로 봄 학년도로 환원한다고 했다. 별안간 그렇게    하면 그해 학년은 너무 짧아지니까. 그 과도 조치로 그해만 5월을 학기말    로 했던 것이다. 졸업식도 5월에 있었다.  대학 입시도 5월에 이미 치르고


                                  - 3 -

  나서 합격된 뒤였으니 근심 없이 마냥 들뜨고 행복한 졸업식이었다. 계절    의 여왕이라는 좋은 계절이 졸업의 기쁨을 더해 주었다.

   대학 입학식은 6월 초에 있었다. 대학로도 눈부신 6월이었다. 그러나       1950년 6월이었다. 하필이면 왜 5월 졸업식이었을까는 굉장한 행운이었지    만 하필이면 왜 50년 6월이었을까는 무서운 재난이었다. 입학식을 치르고    며칠 다니지도 않아 6.25가 났다. 집안 남자들의 비참하고 억울한 죽음.     굶주림. 폭격과 기총소사. 혹한의 피난길. 그 와중에서도 좌(左)냐 우(右)냐    하는 이념에 따라 혈육과 가정이 분열하고. 이웃과 친척, 직장 동료끼리도    서로 헐뜯고 고발하고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는. 사람 나고 이념 난 게 아    니라 이념이 인격이나 사람다움 위에 군림하던 전후의 공포분위기. 이청준    의 소설에도 나오는 전깃불 뒤의 어둠에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다짜고짜    우리 얼굴에 불빛을 쏘아대며 빨갱이인지 반동인지를 묻는 오만한 심문자.    내가 누구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대답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    가 더 중요했던 시기를 거치면서 잃어버린 내 정체성. 고달픈 소녀 가장을    거쳐서 안착한 사회의 외풍을 막아줄 남자와의 무탈한 결혼생활. 베이비     붐 시대가 이 땅의 가임여성에게 부과한 역사적 사명인 양 대책 없는 다    산(多産). 화목한 가정. 남들은 다 팔자 좋다고 알아주는 이러한 결혼 생활    이 문득문득 나를 힘들게 했다.

    

0 내가 당초에 되고 싶었던 건 소설가가 아니었다. 다만 대학에 가서 학문을    하고 싶은 꿈에 부풀어 있었다. 무엇이 되는 건 그다음 문제였다. 당시만    해도 대학은 학문의 전당이었을 뿐 졸업하고 뭐가 되는 직업인을 양성하    는 데가 아니었다. 어느 대학 어느 과가 더 출세에 유리하고, 돈을 잘 벌    고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식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가 아니었다.        사회적 부조리를 비판하고 약자의 편에 설 수 있는 지성을 길러내는 데    지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데가 아니었다. 특히 인문대가 그러해서 우    리는 인문대를 대학의 대학이라고 자부하며 기고만장했었다. 오죽하면 대    학을 상아탑이라 불렀겠는가. 그만큼 잡스러운 욕망이나 더러운 실리로부    터 보호받는다는 면이 강했다. 막 대학 문턱에 들어선 초년생에게 대학은    진리와 자유의 공간이었고 만 권의 책이었고, 그 안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문장이었고. 지적 갈등을 축여줄 명강의였고, 사랑과 진리 등 온갖 좋은     것들이었다. 나는 그런 것들로 나만의 아름다운 비단을 짤 수 있을 줄 알   

                                 - 4 -

  았다. 그러나, 막 베틀에 앉아 내가 꿈꾸던 비단은 한 뼘도 짜기 전에 무    참히 중턱을 잘리고 말았다.


0 전쟁은 그렇게 무자비했다. 그래도 나는 살아남았으니까 다른 인생을 직조    할 수도 있었지만 내가 당초에 꿈꾸던 비단은 아니었다. 내가 꿈꾸던 비단    은 현재 내가 실제로 획득한 비단 보다 못할 수도 있지만, 가본 길 보다는    목 가본 길이 더 아름다운 것처럼 내가 놓친 꿈에 비해 현실적으로 획득    한 성공이 훨씬 초라해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못 가본 길에 대한 새삼스러운 미련은 노망인가. 집념인가. 올해가 또 경    인년이기 때문인가. 5월이란 계절 탓인가. 6월이 또 오고 있기 때문인가.    나는 누구인가? 잠 안 오는 밤. 문득 나를 남처럼 바라보며 물은 적이 있    다.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영혼이다. 80을 코앞에 둔 늙은이다. 그 두 개    의 나를 합치니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푸른 영혼이 80년 된 고옥에 들어    앉아 조용히 붕괴의 날만 기다리는 형국이 된다. 다만 그 붕괴가 조용하고    완벽하기만을 빌 뿐이다.

  

■ 내 식의 귀향


0 친정 쪽은 휴전선이 이북이고. 시댁 쪽은 대대로 서울서도 서대문 안을 벗    어 나서 살아본 적이 없다는 걸 은근히 으스대는 서울 토박이라 명절이     돼도 돌아갈 곳이 마땅치 않다. 금년엔 좀 덜했지만 추석 때마다 전국의     도로란 도로가 엄청나게 정체하는 광경을 TV로 보면서 ‘돌아갈 곳이 없어    서 얼마나 다행인가’ 마음으로부터 그렇게 생각했고. 아이들한테까지 그것    으로 생색을 내곤 했다. 마치 집 없는 거지가 남의 집 불타는 걸 고소하게    구경하면서 제 자식들에게 “너희들은 집이 없어 불 날 걱정을 안 해도 좋    으니 얼마나 좋으냐. 다 애비 덕인 줄 알아라.” 했다는 옛날이야기 속의     거지아범처럼 말이다.

  

0 이제 많이 살아 친인척 간에 제일 연장자가 됐으니 가만히 앉아서 자식들    이나 손자들을 맞는 입장이 됐다고 해도 도리를 못다 한 것 같은 아쉬움    이 어찌 없겠는가. 아니, 그건 도리가 아니라 그리움일 것이다. 저 지는 잎   

                                   - 5 -

  들이 어찌 섭리만으로 저리도 황홀하고 표표하게 몸을 날릴 수 있겠는가.

   이 세상에 섬길 어른이 없어졌다는 건 이승에서의 가장 처량한 나이다.     만추(晩秋)처럼 돌아갈 고향이 없는 쓸쓸함. 내 정수리를 지그시 눌러줄     웃어른이 없다는 허전함 때문이었을까. 예년에는 한 번 가던 추석 성묘를    올해는 두 번 다녀왔다. 한 번은 벌초를 겸해 대가족을 이끌고 다녀왔고     며칠 있다 왠지 혼자 가고 싶었지만 차 없이 갈 수 없는 곳이라 운전자만    데리고 갔다 남편과 아들이 잠들어 있는 천주교 공원묘지다. 왜 혼자 오고    싶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이 먼저 간 지 여러 해가 지났건만 갈 때마다    가슴을 에는 듯 아프던 내가 이상하게 정답게 느껴지면서 깊은 위안을 받    았다.


0 십여 년 전 고 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몰고 최초로 휴전선을 넘어 고향을    방문한 적이 있다. 나는 그 역사적인 장관에 크게 감동했지만 될 수 있으    면 흥분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적이 있다.

 

   정 회장은 정 화장답게 고향에 갔지만 나는 내식으로 고향에 가고 싶다.    완행열차를 타고 개성역에서 내리고 싶다. 나 홀로 고개를 넘고 넓은 벌    을 쉬엄쉬엄 걷다가 운수 좋으면 지나가는 달구지라고 얻어 타고 싶다.     아무의 환영도 주목도 받지 않고 초라하지도 유난스럽지도 않게 표표히     동구 밖을 들어서고 싶다. 계절은 어느 계절이어도 상관없지만 때는 일몰    무렵이면 참 좋겠다. 내 주름살의 깊은 골짜기로 신산함 대신 우수가 흐    르고. 달라지고 퇴락한 사물들을 잔인하게 드러내던 광체가 사라지면서     사물들과 부드럽게 화해하는 시간. 나도 내 인생의 허무와 다소곳이 화해    하고 싶다. 내 기억 속의 모든 것들이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해도 어느    조촐한 툇마루, 깨끗하게 늙은 노인의 얼굴에서 내 어릴 적 동무들의 이    름을 되살려낼 수 있으면 나는 족하리라.

   그분이 철통같은 분단의 장벽을 뚫고 낸 물꼬는 마침내 금강산 관광, 개    성 관광까지 이어졌고, 나도 금강산 관광까지는 다녀왔지만 개성 관광엔    저항을 느꼈다. 어떻게 고작 6~7킬로미터 밖에 선영(先塋)이 있는 고향     마을을 놔두고 개성 구경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개성 관광을 제안 받    았을 때 나 홀로 경로 이탈을 해서 고향 마을 박적골에 다녀오고 싶다는    소원을 말해봤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 6 -

   돌이켜보면 내가 살아 낸 세상은 연륜으로도, 머리로도, 사랑으로도, 상    식으로도 이해 못 할 것 천지였다.


■ 유년의 뜰


0 시멘트와 철근의 숲에 멀미를 내고 시골과 비슷한 교외 마을을 택했다고    는 하지만 현관문만 열면 바로 흙을 밟을 수 있는 앞마당도 마음의 고향    일 뿐 삶의 현장은 아니다. 그래도 살아가면서 신기한 것은 우리 마당이     저절로 내 유년의 뜰을 닮아 간다는 것이다. 이 집을 보자마자 마음에 들    었던 것은 커다란 살구나무 때문이었다. 내 고향 집에도 살구나무가 있었    고 그건 그 마을 유일의 살구나무여서 봄에 그 꽃이 활짝 피면 온 동네가    다 환해졌다.

  

0  살구나무가 반가워서 마음에 든 집은 너무 낡아서 새로 짓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현대식 건축이라는 게 땅을 많이 파헤치게 돼 있어서 전부터 있던    나무들은 거의 다 없어졌지만 나는 특별히 부탁해서 살구나무만은 다치지    않게 했다.   

   마침내 집이 완성되자 색깔이 화려하고 세련된 서양 화초들을 사다가 마    당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몇 년 동안 그 짓을 하다가 곧 싫증이 나기 시작    했다. 수입 화초들은 어떻게 된 게 다음 해에 심을 씨앗도 받을 수가 없     고, 뿌리에서 다시 나지도 않는다. 해마다 사서 심도록 화훼 수입업자들이     그렇게 종을 조작한 것이 아닐까 싶은 기분 나쁜 의심이 생기니까 죄 없    는 수입 화초들까지 덜 예뻐지기 시작했다. 안사다 심는다고 놀고 있을 흙    이 아니다. 언제 어떤 경로로 우리 마당에 들어왔는지 확실치 않은 토종     화초들, 봉숭아, 백일홍, 상사초, 벌개미취, 꽈리들 천지가 되고 말았다. 다    내 유년의 뜰에 있던 것들이다. 우리 마당의 흙은 비행기 타고 온 종보다    는 바람 타고 온 종을 더 반기는 것인가. 옛날 옛적에 떠난 내 유년의 뜰    이 나를 따라온 것인가.

  

0 나이 들면서 해외여행보다는 국내여행을 더 선호하게 되는 것도 지금은     인위적으로 격리돼 돌아갈 수 없게 된 고향에 대한 상실감을 달래기 위함    이  아닐는지. 그래서 이름난 명승지나 사람들이 바글대는 관광지보다는


                                 - 7 -

  그런 수선스러운 변화의 물결이 비켜간 산골의 외딴 동네에 더 마음이 끌    리게 된다. 그런 동네는 소박하다가보다는 인기척 없이 퇴락해서 나도 잠    시 물질이 아닌 넋이 된 것처럼 이 집 저 집 빈 집에 남은 남루한 살림의    흔적들을 기웃대기도 하고 툇마루에 앉아 무너진 돌담 너머로 넝쿨 식물    들이 끼고 도는 장독대와 멀리 자운영 꽃이 질펀한 들판을 바라보기도 한    다.

   국내 여행으로 자주 가도 싫증이 안 나 거의 매년 가다시피해서 고향처    럼 느끼게 된 곳이 있는데 섬진강 가의 여러 마을이다. 매화다 산수유다     해서 도시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관광철의 관광지 말고 그런 계절적 호들    갑과 무관한 지역이 사실은 더 많다. 이런 곳 또한 나의 유년의 뜰과 닮았    기 때문이 아닐까. 


■ 흐르는 강가에서


0 서울 살다가 경기도로 거주지를 옮긴 건 서울 사람이 된 지 60년 만이었    다. 남다른 교육열과 도시 지향적인 엄마를 따라 상경한 게 여덟 살 때 일    이고 지금 살고 있는 경기도 구리의 산골짜기 마을로 이사를 한 게 내 나    이 예순여덟 살 되는 해였으니까.  

   작금의 이 나라의 민심은 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 옛날의 우리 엄마보다    훨씬 더 도시. 특히 서울 지향적이다. 젊은이들은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라    지만 늙은이도 마찬가지인 게 교통편이 좋고 편의시설이 가까운 도심에     살아야 자식들한테 걱정을 덜 끼치고 홀로서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까지 내가 살고 있던 아파트도 그런 면에서는 나무랄 데 없는 조건을     갖춘 곳이었기 때문에 그때 내가 아무한테도 의논하지 않고 단독으로 저    지른 탈 서울의 용단은 내 자식들도 이해할 수 없는 돌출행위였다.

 

0 한강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해 뜰 무렵이다. 강 건너로는 순한 짐승이 엎    드려 있는 것처럼 능선이 부드러운 산봉우리들이 보이고 그 사이로 해가    불끈 솟으면 수면이 금빛으로, 은빛으로 때로는 주황색으로 부서진다. 물    속을 노닐던 신비한 물고기가 잠시 그 아름다운 비늘을 드러내 보여준 것    처럼 그 순간은 짧다. 짧지만 그런 날은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고     몸도 온 종일 개운하지만 황사나 안개에 가려 안 보이는 날은 몸도 마음   

                                   - 8 -

  도 울적하게 가라앉는다.

   공기가 투명할 때는 매일 다른 물빛까지 구별할 수 있다. 장마가 지거나    폭우가 내린 후에는 당연히 한강물도 황토 빛으로 변하여 거칠게 뒤챈다.    추위가 혹독해 결빙하는 해는 비닐로 덮어 놓은 것처럼 움직임 없는 회색    빛이던 한강이 어느 날 햇빛에 부서지는 물결을 보여주면 어쩔 수 없이

   - 강물이 풀리나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서름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 로 시작되는 서정주의 ‘풀리는 한강 가에서’를     읊조리게 된다. 시인은 아마 그 시를 전후(戰後)에 썼으리라. 전쟁을 겪은    세대만이 한강과 더불어 공유할 수 있는 우울과 한탄이 짙게 깔려 있다.     전쟁 때 다리 끊긴 한강. 얼어붙은 한강은 군인 뿐 아니라 수많은 양민들    의 운명과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0 국운이 융성하고 태평할 때는 중국과 교역로로, 전쟁 때는 천연의 해자(垓    字)구실을 하던 한강을 가장 친근하고 사랑스럽게 볼 수 있는 데는 경기도    구리시에서 관리하는 한강 둔치가 아닌가 한다. 한강의 속삭이는 물소리까    지 잡힐 듯 인접한 산책로도 있고, 자전거 길도 있고. 몇 십만 평에 이르    는 광대한 둔치에는 봄의 유채꽃을 비롯해서 여름의 백일홍, 달리아, 가을    의 코스모스까지 사철 꽃이 그치지 않는다. 끝이 안 보이는 꽃밭을 보면     바로 서울과의 접경지대에 이런 선경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휴일    에 부모 손을 잡고 나온 어린 꽃 구경꾼들이 꽃밭 사잇길을 희희낙락 뛰    노는 걸 보면 화초가 더 예쁜지 인(人)화초가 더 예쁜지 분간이 잘 안 된    다.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한강이 아름다워진다. 계절따라 아름답고 지역에 따    라 아름답다. 대안의 경치가 특히 환상적이다. 그 길이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에 이르면 아름다운 강은 위대한 강으로 변한다. 이건     강이 아니라 바다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본 유럽 문화를 꽃피운 온갖 강들    의 이름을 떠올리며 애걔걔 그것도 강이라고 .... 무시해 주고 싶은 치기까    지 발동한다. 그런 기분은 아마도 유럽문화에 압도된 상처나 열등감의 반    작용일수도 있겠으나 우리민족 본연의 호연지기일 수도 있으리라.



                                  - 9 -

0 엄밀하게 말하면 거기까지가 한강이고, 한강으로 합쳐지기 전까지 흘러온    두 개의 큰 강은 남한강과 북한강이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 발    원지도, 받아들인 지류도 각각 다르다. 위대한 강, 한강을 이룬 두 개의 큰    줄기 남한강과 북한강을 함께 보려면 양수교를 건널 일이다. 양수교를 넘    으면 남한강과 북한강 사이에 넓고 살기 좋은 양평 땅이 나오고, 두 강이    합쳐지면서 생긴 삼각형 육지의 꼭짓점에 서볼 수도 있다. 요즘에는 그 근    방 일대가 온갖 종류의 연꽃밭으로 개발되어 여름이면 꽃구경으로 붐비지    만 전에는 그 꼭짓점만으로도 명소였다.   


0  두물머리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려면 발품을 팔아 운길산 수종사(水鍾寺)까    지 올라가 볼 일이다. 이 예쁜 이름의 절은 승용차로도 접근이 가능하다.    예쁜 이름대로 물속에서 들리는 종소리, 종소리인 줄 알고 찾아갔더니 동    굴속의 물소리였다는 등의 조금씩 다르지만 비슷한 창건 설화가 전해지     고 있다. 크지 않은 사찰이지만 5백 년 묵은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위엄     있고 우아하게 그리고 부부처럼 정답게 버티고 서 있다.  

   절에는 녹차를 거저 얻어 마실 수 있는 다실도 있다. 다실에 앉으면 두물    머리의 전경을 조망할 수 있다. 때가 가을이라면 숨 막히도록 찬란하게 물    든 은행나무도 볼 수도 있고, 바람까지 분다면 아낌없이 낙엽 지는 거목의    처연한 순명(順命)에 옷깃을 여미면서 맑은 풍경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예쁜 절 이름 때문일까. 내려다보는 두물머리의 장관 때문일까. 그 소리가    처마 끝 풍경소리 같지 않고 유구한 강물 속에 가라앉은 종소리처럼 들린    다.


0 그러나 어찌 빼어난 경치만 가지고 한강을 감히 위대한 강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수종사에서 내려와 양수교를 건너지 않고 가던 길로 계속해서     북한강을 오른쪽으로 끼고 갈 수 있는 길로 접어들면 다산 유적지 표지판    이 나온다. 한강을 놓치지 않고 표지판만 따라가다 굴다리 밑에서 오른쪽    으로 급커브를 하면 능내리 마재(馬峴) 땅이 나온다. 마재는 정약전, 정약    종, 정약용 형제의 고향이자, 그 아랫대에서는 성인(정하상) 성녀(정정혜)    를 배출하기도 한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지 중 하나이다. 다산 유적지 못     미쳐서 오른쪽으로 마재성지 들어가는 길이 나오고 다산 생가터와 묘소는    좀 더 앞으로 한강 가까이 왼쪽에 있다.


                                  - 10 - 

   아무리 경치가 빼어나도 자연 그 자체만으로는 감히 위대하다고는 말 못    하겠는데 한강을 그렇게 부르고 싶은 것은 위대한 사상의 발상지를 끼고    있고 그들이 오간 물길이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강의 원형이 더는 훼손되    지 말았으면 싶다.


■ 아아, 남대문


0 남대문을 처음 본 것은 여덟 살 때였다. 촌구석에서 개성이라는 소도시로    나왔을 때 서울역을 본떠 만들었다는 개성역도 어마어마해 보였는데 서울    역의 규모는 거기에 댈 것도 아니었다. 특히 기차에서 내려서 역사에 이르    기까지 거쳐야 하는 구름다리는 이층집도 못 보았던 촌 계집애에게는 너    무도 권위적이고 위압적이었다. 짐을 이고 지고도 뭐가 그리 급한지 앞다    투어 뛰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혼잡 속에서 엄마를 잃어버릴 것 같은 공    포감 때문에 더 그러했을 것이다. 가까스로 역사 밖으로 빠져나와도 사람    들한테 밟혀 죽을 것 같은 혼잡은 마찬가지였다. 짐이 많은 엄마를 보고     지게꾼들이 앞다투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지게꾼 말고도 거지도 많고 행    상도 많은 게 1930년대의 서울 역 광장이었다.

  

0 남대문은 홀로 크고 장엄했다. 하여 남대문로 양쪽의 건물들이 납작 엎드    려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다고 남대문이 위압적인 건 아니었다. 대도    시 혼잡에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진 계집애에게 괜찮다. 괜찮아. 라고    다독거릴 듯 인자하고 편안해 보였다. 한 가문의 맥을 한 손에 틀어쥔 것    처럼 당당하고 기가 센 종가댁 증조할머니도 매 맞고 우는 어린것들한테    는 기꺼이 당신 치마폭을 내주고 감쌌다. 남대문의 석축이 그렇게 부드럽    고 여성적으로 보였다. 저 문안의 도성이 살 만한 데가 될 것 같은 안도감    이 왔다. 그렇게 해서 나는 서울 사람이 됐다.

   그 후 어른이 될 때가지 여름 겨울 일 년에 두 차례씩 한 해도 안 거르    고 서울역을 거쳐 고향집에 다녀오곤 했지만 다시는 남대문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0 1974년 신인 시절에 쓴 단편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는 6.25를 소재로


                              - 11 -

  한 작품인데 나는 엄동설한에 서울을 버리고 마지막 피난 대열에 낀 주인    공의 눈을 통해 남대문을 이렇게 묘사했다.


   아침 느지막이 중학다리 집을 떠나 종로, 광교, 을지로 입구, 남대문까    지 우린 너무 느리게 걸었고, 어머니가 이렇게 굼벵이차람 걷다가는 해     안에 한강도 못 건너겠다고 걱정을 하는 바람에 이제부터라도 앞만 보고    기운 내서 열심히 가야겠다고, 마지막 돌아보는 셈치고 돌아다본 시야에    문득 남대문이 의연히 서 있었다.

   눈발을 통해 본 남대문은 일찍이 본 일이 없을 만큼 아름답고 웅장했다.    눈발은 성기고 가늘어서 길엔 아직 쌓이기 전인데 기왓골과 등에만 살짝    쌓여서 기와의 선이 화선지에 먹물로 그은 것처럼 부드럽게 번져 보이는    게 그지없이 정답기도 했지만 전체를 한 덩어리로 볼 땐 산처럼 거대하고    준엄해 내 옹색한 시야를 압도하고도 넘쳤다.

   나는 이상한 감동으로 가슴이 더워왔다. 남대문 미(美)의 극치의 순간을    보는 대가로 이 고난의 피난길이 마련되었다 한들 어찌 거역할 수 있으랴    싶었다. 그건 결코 안이하게 보아질 수 없는. 꼭 어떤 비통한 희생의 보   상이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종교적인 경건으로 예배하듯이 남대문을 우러르고 돌아서서 남으로   걸었다. 이상하게도 훨씬 덜 절망스러웠다.


0 이런 극한 상황에서도 우리를 덜 절망스럽게 하고 희망과 꿈을 갖게 하는    거야말로 바로 문화의 힘일 터이다. 그건 또한 문화민족이라면 문화재가     있어야 하는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문화재가 그걸 공유한 민족에    게 이러한 영감을 주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걸리게 돼 있다. 뛰어난 장인     과 훌륭한 재료를 구할 수 있는 재력만 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오랜 세월 자연의 풍상을 견디고. 사람들의 사랑과 공경을 받음     으로써 비로소 원형위에 그런 신비의 더께가 앉는 게 아닐까.  

  

   엊그저께는 본의 아니게 택시를 타고 남대문을 지나게 되었다. 불타버린    남대문과의 첫 대면이었다. 내 심장은 예상한 것처럼 충격받지 않았다.      TV로 반복해서 보는 사이에 길들여져 오히려 원형이 아득했다. 그래도 내    표정이 조금은 비통했나보다 운전기사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 12 -

   “오늘 얻어들은 웃기는 소리 하나 해 드릴까요. 젊은이들이 이런대요. 숭    례문은 탔지만 남대문은 남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나도 웃으면서 남대문을 무사통과. 인간이 하는 일은 어느 시대나 똑 같    다는 생각을 했다. 남대문은 멀쩡하게 복원될 테고. 오백 년 후에 오는 이    는 내가 본 더께 앉은 남대문을 다시 보게 되리라.

  

0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 중에서 언제 들어도 마음에 깊이 와 닿는 ‘내가 원    하는 우리나라’의 첫머리를 인용하는 것으로 이 졸문의 말미를 장식하려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    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    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    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     다.”


■ 식사의 기쁨


0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도 있지만 손수 지은 더운밥 한 그릇    이 손님에 대한 환대, 공경, 우정, 친밀감 등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온갖    좋은 것을 다 얹어줄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요새 세상    과는 댈 것도 아니게 먹을 것이 귀하고 모든 여건이 척박한 때였지만 행    복한 시절이기도 했다. 귀한 손님이 오셨을 때는 부랴부랴 더운밥을 지어    서 대접하는 건 기본이고, 끼니때 온 손님은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 하    나만 더 놓으면 된다는 것도 밥을 주식으로 하니까 가능한 미덕이었다. 식    구수에 맞춰서 빠듯하게 지은 밥에서 한 숟갈씩 덜어내어 감쪽같이 밥      한 그릇을 만들던 우리 엄마들의 십시일반 솜씨는 가히 예술이었다. 그렇    다면 한두 사람분의 쌀에다 물을 듬뿍 붓고 우거지와 푸성귀를 쳐넣어 열    사람도 먹일 수 있도록 늘이는 솜씨는 요술이 아니었을까.

  


                             - 13 -

0 우리 연배들의 식성 중에서도 나는 좀 더 촌스러운 편이어서 패스트푸드    나 서양요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우리식에다 서양식을 뒤섞은 국적 불    명의 요리는 혐오까지 하는 편이다. 자연히 손자들하고는 식성이 잘 안 맞    는다. 그래도 나는 그 아이들이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어서 격려해주고    싶을 때나. 까칠하고 의기소침해 보여 위로해 주고 싶을 때는 불현듯 밥을    먹이고 싶어진다. 나는 밥을 무척 좋아하는 것 같다. 특히 내가 지은 밥에    는 자부심 같은 것까지 가지고 있다. 자식들이나 손자들이 예고 없이 잠깐    들렀을 때도 내가 지은 밥을 먹여야 뼈가 되고 살이 될 것 같은 믿음은     근거는 없지만 자신에게는 위로와 보람이 된다.

  

0 이 나이에 아직도 극진히 공대해야 할 웃어른이 남아 있는 건 아니지만     환대하고 싶은 사람. 우의를 표하고 싶은 사람까지 주위에 없는 건 아니     다. 그런 사람한테도 밥 한번 같이 먹자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잘하는    편이다. 그때 밥은 식당 밥도 햇반도 아니고 집밥이다. 평소에 흉허물 없    이 무심하게 대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착하고 불쌍해 보일 때가 있    다. 위로해주고 싶어서 한다는 소리도 집에서 밥 한번 같이 먹자는 소리     다. 마음에 남는 친절한 대접을 받고 나서 답례로 한다는 소리도 같은 소    리다. 나는 아마도 밥을 여린 마음. 다친 마음 등. 마음에는 무조건 잘 듣    는 만병통치약쯤으로 아나 보다

  

0 내가 믿는 ‘집밥’의 효능을 믿어주는 건 그래도 피붙이밖에 없는 것 같다.    따로 사는 손자가 오늘 할머니한테 가서 저녁 먹고 싶다고 전화를 걸어올    때가 가끔 있다. 하는 일이 피곤한가. 뭐가 뜻대로 안 되니 녀석의 목소리    가 지친 듯 가라앉아 있다. 그럴 때 나는 막 신이 난다. 마치 내가 지은     더운 밥한 그릇이 녀석에게 새로운 기라도 불어넣을 수 있다고 믿는 것처    럼 가슴이 설레고 으스대고 싶어지기까지 한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못 말    리는 늙은이다.   


   성경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대목은 예수가 당시 사람들을 신분에 상관없    이 당신 식탁에 초대했다는 기록이다. 예수님의 식탁에 초대받은 손님은     거지나 병신, 세리, 창녀들로 당시의 계급사회에서는 최하층의 불가촉천민    들이었다. 가난하지는 않지만 감히 예수를 초대할 엄두도 낼 수 없는 신분


                                - 14 -

  인 세리 자케오에게는 예수께서 자청하여 오늘은 너의 집에 가서 식사를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초대할 집도 초대할 끼니도 없는 거지나 부랑자들은    자기가 초대받은 식탁에 같이 초대하고 자케오처럼 돈은 있으되 소외당한    이에게는 당신을 초대하도록 유도하신다. 그들 죄인과 소외 계층은 예수님    과 한 식탁에 앉아 동등한 대접을 받음으로써 위로와 용서와 은총을 받았    을 것이다. 예수님이 죄인과 가난뱅이를 용서하고 위로하는 방법은 바로     식탁을 같이하는 거였다.

   나는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서는 정말 그랬을까 믿는 둥     마는 둥 하는 편이다. 그러나 가장 천한 신분의 죄인들과 한 식탁에서 먹    고 마시고 우의를 다졌다는 기록은 사대복음서에 공히 여러 번 반복해서    나오는 말이니 아마 실화일 것이다.


0 나는 이십 년 전에 참척을 겪은 일이 있다. 너무 고통스럽거나 끔찍한 기    억은 잊게 돼 있다던가. 기억력의 그런 편리한 망각작용 때문인지 그 당시    일이 거의 생각나는 게 없다. 나중에 딸들한테 들은 건데 아들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나는 우리 집 아닌 어딘가에 자리보전하고 드러누워 있었다    고 한다. 장례를 치르고 온 딸들이 엄마가 듣건 말건 위로가 되라고 한 말    이 장례식에 아들 친구들이 많이 와서 성대했다고 전했다고 한다. 그걸 전    해 듣자 내가 눈을 번쩍 뜨더니 그 친구들 뭣 좀 잘 먹여 보냈느냐고 물    었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듣고 아이들은 아아. 고통스럽긴 하겠지만 엄마는    다시 삶을 이어갈 수 있겠구나 안도했다는 것이다.

   삶이란 존엄한 건지. 치사한 건지 이 나이에도 잘 모르겠다.

 

■ 노인, 최신 영화를 보러 가다.


0 모든 모임이나 약속은 서울특별시에서 이루어진다. 특별시에서도 강남이거    나 종로구거나 그런 데서 나를 불러주기도 하고 내가 누굴 보자고 부르기    도 한다. 사는 건 서울에서 못 살고 경기도 구리에서 산다. 교외의 전원주    택에 산다고 하면 그럴듯하게 들릴 수도 있으련만 겉멋으로라도 그러고     싶지 않다. 시골스러운 경치도 인심도 사라지고 발랑까진 동네가 돼 버린    지 오래다. 단지 교통이 불편할 따름이다. 운전만 할 수 있다면 그런대로    살 만할 텐데 그걸 배우기엔 너무 늦은 나이에 차 없이 살 수 없는 동네   

                               - 15 -

  에 둥지를 튼 것이다. 시골에 산다는 걸 핑계로 웬만한 모임에는 안 나가    기도 하고 시내에 나간 날 여러 가지 일을 몰아서 보기도 한다. 자연히 첫    번째 볼일과 두 번째 세 번째 볼일 사이에 자투리 시간이 생기게 된다. 언    제부터인지 자투리 시간을 영화 보기로 심심하지 않게 보낼 수 있게 되고    부터는 그걸 즐기기까지 하게 되었다. 한 건물에 열 몇 개씩 영화관이 들    어서 있고 상영시간도 각각이라 내 시간에 맞는 영화를 골라잡기만 하면    된다. 대부분의 영화관에서 늙은이는 관람료를 할인해주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다.

   시내에서 백화점 세일, 볼만한 미전(美展), 개성 있는 박물관, 고궁, 전망    좋은 찻집 등 남는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장소가 쎄고 쎘는데 왜 하필 영    화관일까.


0 거슬러 올라가자면 해방 후 약간 혼란스럽고도 완고했던 여고시절까지 가    야한다. 지금의 고2, 고3에 해당하는 학년이 돼도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대    학 갈 애가 많지 않을 때였다. 여고 졸업한 나이를 결혼 적령기로 칠 때여    서 학교에서도 가사과를 따로 두고 신부 수업에 해당하는 과목을 중점적    으로 가르치긴 했어도 대학 갈 애를 위한 배려는 없어서 각자 알아서 해    야 했다. 졸업이 가까우니 건방만 늘어서 일제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는    교칙 같은 거 살짝살짝 무시하고 앞머리로 애교머리를 만들기도 하고, 박    스형 교복허리에 다트를 넣어 허리선을 강조하기도 했다. 나는 공부벌레도    못 되면서 교칙에 정해진 일이라면 머리 꼬랑이 길이가 정해진 길이에서     1Cm만 넘어도 벌벌 떠는 소심한 모범생이었다. 그런 내가 잘 못 걸리면    정학을 당할지도 모르는 짓을 예사로 저질렀는데, 그건 학생 관람 불가 영    화를 보라 다니는 일이었다. 그 비용을 위해 예사로 엄마를 속였다.

  

   사춘기라 불리는 나의 꽃봉오리 시절은 우리 민족의 격동기였다. 식민지    시대에 입학해서 같은 학교에서 해방을 맞고 미군정시대를 거쳐 남한 만    의 독립을 이룩한 지 얼마 안 될 때였다. 어리둥절할 정도로 세상이 변해    도 변하지 않는 것은 궁핍과 불안이었다. 학교에서는 열심히 자유와 민주    주의에 대해 가르쳤고, 세상에도 그 소리가 넘쳐났지만 그걸 써 먹는 일엔    다들 서툴렀다.


  

                                 - 16 -

   서양 영화의 매혹은 식민지시대에 태어나 낳을 때부터 몸에 벤 전체주의    적인 억압과는 딴판인 세상을 눈으로 확인하는 놀라움이라고 볼 수 있었    다. 아아. 사람이 저렇게도 살 수 있는 거로구나. 남녀노소에 구애받지 않    은 거침없는 자기표현도 눈부셨지만 해 놓고 사는 건 또 얼마나 편리하고    으리으리해 보였는지. 우리의 생활양식이 거의 서양사람 수준으로 또는 그    이상으로 변한 뒤에 태어난 요새 젊은이들은 아마 상상도 못할 것이다. 학    교에서 가까운 서양영화 위주의 재개봉관은 그 시절의 나의 궁전. 판타지    이자. 카타르시스의 장이었던 것이다.

  

0 문학적 성향과 영화에 대한 애착이 같은 것일 수는 없다고 해도, 문학에     있어서는 십 대의 마지막 해에 받은 영향만 갖고 울궈먹어도 동시대인과    소통할 수 있는 글을 쓰는 데 큰 무리가 없는데 영화는 전혀 안 그렇다.     자투리 시간에 영화 보러 가고 싶어 하는 건 어릴 적 버릇일 뿐. 그런 버    릇을 만든 기본적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영화를 만나기는 점점 더 어려워    지는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요새 영화는 이해가 잘 안 된다. 영화를 다    운 받거나 DVD로 보지 않고 굳이 영화관까지 가는 건 여럿이 같이 보는    재미, 교감 때문이기도 한데 젊은이들이 많이 든 영화일수록 쟤들은 왜 이    런 영화를 재미있어할까. 소외감만 느끼게 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는 아카데미 상을 받았다는 것 때문에 보게     되었다. 친구가 미리 표를 사 놓았고. 약속시간 보다 많이 늦게 가서 시작    부분을 10분 쯤 놓치고 보았다. 마약과 돈가방 때문에 사람이 무수히 죽    었다. 그렇게 사람 많이 죽는 영화는 전쟁영화 빼고는 처음 봤다. 내 몸에    도 피가 튈 것 같은 끔찍한 영화였다. 그 지겨운 시간을 견딘 건 오로지     늙은 보안관이 범인 잡는 걸 보기 위한 것이었는데 영화는 노 보안관 부    부의 아리까리한 대화로 돌연 끝났다. 뒤통수를 치듯이 그렇게 돌연 끝나    는 영화는 처음 봤기 때문에 그럴 리가 없다고, 그 영화에 참여한 모든 이    름이 지루하게 상승하는 엔딩 자막이 끝나고 불이 켜질 때가지 멍청히 기    다렸다. 그게 끝이라니. 카타르시스가 안 된다는 게 그렇게 찜찜한 것인     줄은 몰랐다.

 

0 또 한 번은 자투리 시간이 생긴 김에 소싯적 버릇대로 영화를 보게 되었    다. ‘추격자’라는 영화였는데 하필이면 이십 여명을 죽여서 토막 낸 살인범


                                  - 17 -

  을 추적하는 영화였다. 구역질과 현기증이 나는 걸 참고 그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었던 것은 살인범의 소굴에서 처절한 악전고투 끝에 마침내 빠져    나온 여자만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는 창녀였지만 예쁜 딸을 둔 엄마이기도 했고. 끝까지 삶을 포기    하지 않는 초인적인 용기도 보여주었다. 영화적으로 살아남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 영화는 그 정도의 해피엔드도 관객에게 선물하지 않았    다.

   판타지도 없고 카타르시스의 욕구도 채워지지 않자 이상하게도. 아니 당    연하게도 마음이 살벌해지는 걸 느꼈다.

   ‘저런 인간은 죽여야 돼.’

   그전까지 한 번도 동의해본 적이 없는 사형제도를 열렬하게 지지하고 있    었던 것이다.


0 최근에도 행복한 영화 보기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웨이 프롬 허    Away From Her.' 는 입소문을 듣고 보게 되었다. 처음 가 본 아담한 영    화관이었는데 기다리고 있는 관객들은 멀티플렉스상영관과는 다르게 중년    층 이상의 여성들이 대부분이었고, 부부동반도 알맞게 섞여 있었다. 제 시    간이 되자 영화관은 꽉 찼다.  영화도 재미있었지만 보는 동안 내내 같이    보는 사람들과의 교감 같은 게 느껴지는 것도 근래에 느껴보지 못한 행복    한 체험이었다.

   끝나고 영화관을 빠져나오면서 흘려들은 영화평도 슬며시 사람을 웃게     만들었다. “줄리 크리스티, 그 여자 어쩌면 그렇게 곱게 늙었을까. 닥터 지    바고에 나왔을 때보다 더 섹시하더라.” 아무나 그렇게 늙을 수 있는 게 아    니다. 영화니까 가능한 판타지일 뿐이다. 치매는 더군다나 그렇다 다들 치    매에 공포감을 갖는 건 치매란 인간성 속의 좋은 부분, 사랑할 수 있는 능    력, 연민, 배려, 수치심 등을 상실하고 가장 추한 밑바닥을 드러내는 일이    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자기도 모르는    걸 어느 날 갑자기 드러낼 수도 있다는 게 어찌 공포스럽지 않으랴. 수세    식 변소 때문에 한 번도 자세히 볼 기회조차 없었던 자기X을 남이 가장     잘 보이게 벽에 쳐바르는 치매의 대표적인 증세만 봐도 치매가 표현하고    자 하는 걸 알 수가 있다. 영화를 보러 온 중년층 이상의 여성들이라면 어    른을 모셔본 실제경험이나 주위에서 보고 들은 걸로 다들 그쯤은 알고 있


                                  - 18 -

  을 것이다. 여전히 아름다운 여성성을 잃지 않고 새로운 사랑까지 할 수     있고, 게다가 그동안 해로해온 착한 남편의 다분히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사랑에 멋진 복수까지 할 수 있다면 그건 얼마나 황홀한 치매인가. 그런     치매는 판타지알 뿐 치매의 실체는 아니다. 그러나 그런 치매도 있다고 생    각하고 싶은 건 인생의 마지막 복병, 치매에 대한 공포를 위로받고 싶어서    이다. 카타르시스야말로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영화의 위대한 힘이지만    무엇이 우리 마음에 와 닿아 그런 작용을 하는지는 넘을 수 없는 세대차    가 있는 것 같다.


* 카타르시스(Catharsis : 淨化)

- 비극을 봄으로써 쌓여 있던 우울함, 불안감, 긴장감 따위가 해소되고, 마    음이 정화 되는 일

- 정신분석에서 마음속에 억압된 감정의 응어리를 언어나 행동을 통해 외부    에 표출함으로써 정신의 안정을 찾는 일    

  

■ 친절한 나르시시스트


* 나르시시스트(narcissist) : 자기도취형의 사람. 왕자병, 공주병


0 유럽의 고성을 방불케 하는 교외의 음식점에서였다. 겉보기 뿐 아니라 실    내장식이나 전망도 좋아 두리번대면서 그렇게 근사한 곳에 초대해준 이에    게 고맙다는 말부터 했다. 그가 말했다. “요새 누가 배고파서 이런 데 나    와 먹습니까. 다 분위기 값이죠.”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교외라고 음식값    이 싼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점잖게 생긴 중년 아줌마가 메뉴판을 가지고    주문을 받으러 왔다. 종업원이 아니라 안주인 같기도 해서 우리는 각자의    취향과 평소의 식사량가지 들려주면서 아줌마의 의견을 참조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주문을 했다.


0 우리 중 누구도 그가 연변 아줌마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남쪽에 온 지    오래 돼서인지 남다른 노력의 결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아줌마는 거    의 연변 사투리가 남아 있지 않은 완전한 표준말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말하는 것과 알아듣는 것과는 다른 모양이다. 그 여자는 우리보다 먼저 주


                                  - 19 -

  문을 한 테이블 손님들로부터 대단히 혹독한 야단을 맞고 있었는데 손님    의 말을 잘못 알아들어서 엉뚱한 음식이 나온 모양이었다. 그 손님이 어디    가나 말귀 못 알아듣고 촌스러운 연변 아줌마들 때문에 기분 잡친다고 호    통을 치고 있는 걸 듣고 안에서 주인 같은 남자가 급히 뛰쳐나왔다. 그는    그 남자에게도 종업원 똑바로 쓰라고, 비용 몇 푼 아끼려고 연변 아줌마를    써서 가게 품위 떨어뜨리면 이따위 고품격 인테리어가 무슨 소용이냐고     일장 훈시를 해대는 것이었다. 비굴할 정도로 깍듯한 주인의 백배사례로     그 소동은 일단락 됐다.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난 때여서 마당에도 우리밖에 없었다. 그 꼴사나운     인간들은 언제 그랬더냐 싶게 포만감으로 이드르르해진 얼굴로 나오더니    몇 대의 차로 나눠 타고 우리 눈앞에서 사라졌다.


0 작년 겨울 홋카이도를 여행할 때 만난 연변 아줌마생각이 났다. 목적 없는    여행이었다. 일상생활이라고 무슨 목적이 있을까마는 직장이 있는 것도 아    니면서 톱니바퀴에 맞물린 것처럼 내 뜻과는 상관없이 쉴 새 없이 돌아가    야 하는 일상에 대한 싫증에서 비롯된 여행이었다. 단지 여기가 아닌 딴     데 있고 싶어서 비싼 비행기 타고 외국여행까지 하는 건 좀 사친가? 내가    보기에 여행가라기보다는 여행의 달인으로 보이는 L 시인이 그쪽을 권하    고 동행까지 해주었으니 금상첨화, 분에 넘치는 사치였다.

   시인이 예약해 놓은 숙소는 한적한 일본식 여관이었다. 우리를 반갑게 맞    는 여주인은 물론 일본 여자였지만 주인과 거의 동격으로 보이는 중년 여    자는 곱고 상냥한 우리말을 쓰는 연변 아줌마였다. 장춘 대학의 일본어과    를 나와 교편생활을 하다가 이곳으로 취직해 왔다고 했다. 남편은 아직도    중국에서 교편생활을 하고 딸은 여중생이라고 했다. 고학력 여성이 앞으로    더 잘살기 위해 남편과 자녀와 헤어져 사는 사정이 우리나라에 취업해 와    있는 연변 여성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 여자는 방을 안내해주면서 동    행인 시인과 어떤 관계인지 물었다. 친구라고 할까. 문우라고 할까 하다가    많은 나이 차이를 생각해서 친척이라고 했다. 그러면 한 방을 쓸 것이지     여기 방값이 얼마나 비싼데 각방을 쓰느냐고 안타까워했다.

  

   사실 그건 주인의 이익을 도모해야 하는 종업원이 해야 할 소리가 아니    었다. 그런 소리를 그 여자는 마치 시골 사는 이모나 고모가 도시에서 펑   

                                 - 20 -

  펑대며 사는 조카에게 ‘뭣 하러 이런 과용을 하고 그래. 돈 아껴야지.’ 하    는 투로 아무렇지도 않게 구수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거기서 하룻밤을 묵고 두 끼 식사를 하는 동안 그 연변 아줌마가 우리의    서비스를 도맡아주었고 그녀를 통해 오타루라는 고장을 이해하게 되었다.    오타루는 한국 관광객이 가정 선호하는 고풍스러운 도시로 우리나라의 유    명한 가수들이 거기서 뮤직 비디오를 찍었고 유명 연예인 누구누구가 다    여기서 휴가를 보내면서 이 집에 묵었노라고 했다. 다음 날 아침식사 때는    자신의 디카를 가지고 와서 그녀가 틈틈이 홋카이도의 각지를 여행하면서    찍은 풍경 사진을 보여주었다. 홋카이도 하면 눈경치만 생각하던 나에게     꽃으로 뒤덮인 홋카이도는 환상적이었다. 그녀는 오뉴월의 홋카이도는 말    도 못하게 아름답다며 꼭 다시 오라는 유혹의 말도 잊지 않았다. 그 여자    는 오타루뿐 아니라 홋카이도의 관광유치까지 훌륭하게 해내고 있었다. 내    이름을 알고 밤새 인터넷으로 검색해 봤다면서 친밀감을 표하더니 나에게    그 여관의 인상을 한마디 남겨달라고 종이를 내 오니 차마 거절하지 못했    다.

   눈치가 빠르니까 아마도 글 써먹고 사는 동네 주변 사람이 나타나면 그    종이를  적절하게 써 먹을지도 모른다. 한국 사람이 많이 들리는 업소에서    그 여자를 고용한 것은 탁월한 용인술이었다.

  

0 우리나라의 연변 아줌마와 일본의 연변 아줌마의 현격한 차이는 개인의     성격이나 운명의 차이가 아니라 그쪽과 우리의 사람 부리는 요령, 용인술    의 차이가 아닐까. 사실 한 사람이 가진 모든 능력을 이용해 최대의 이익    을 취하고 있는 건 우리보다는 그쪽이 더하건만 그쪽은 자존심을 최대한    살려가며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점이 고용과 착취의 차이가 아닐까.

   나는 일본을 여행할 때마다 감탄하게 되는 그들의 친절, 일본 여행을 하    고 온 사람 누구나 말하는 편안함, 대하는 사람 뿐 아니라 제도상의 갖가    지 친절한 배려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건 결코 아부에 능하고 속    과 겉이 다른 섬나라 근성이 아니라 지독한 자부심과 도저한 우월감의 소    산이 아닐까.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친절이 우월감의 소산이라면 우리의 불친절은 열등감의 소산인지    도 모르겠다. 점점 나아지고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지만.



                               - 21 -

■ 내 생애의 밑줄


0 시간만 나면 분주하게 뭔가를 정리하다가 하루해가 갈 때가 많다. 요즈음    특히 그렇다. 그 분주함 속에는 쫓기는 것 같은 조급증과 짜증 같은 것이    섞여 있어. 이러다가는 신경줄이 끊어지고 말 것 같은 위기의식을 느낄 적    도 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는 심심한 시간을 갈망하면서도 그걸 제대    로 누리질 못한다. 한가할 때 말고도. 외출할 적엔 외출했다가 돌아왔을     때 말끔하게 정돈된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서. 저녁에 잠들 때는 내일 아침    에 깨어났을 때 지저분한 집에서 깨어나기 싫어서. 또는 혹시 못 깨어났을    때는 남들에게 흉잡히지 않기 위해 눈에 거슬리는 것들. 늘어놓았던 것을    치우기도 하고 안 보이는데다가 대강 들이 박기도 한다. 어쨌든 하루를      살고 난 흔적들을 마치 범죄자가 증거인멸 하듯이 깨끗이 없애고 나야 개    운해서 잠이 잘 온다.  


   그렇다고 안 보인다고 다는 아닌 것 같다. 골방이나 장롱 속도 꽉 차 있    는 게 싫다. 주기적으로 때로는 느닷없이 광이나 장롱 속을 정리해서 불필    요한 것을 솎아내 헐렁하게 해놓아야 마음이 편해지고 일을 할 기운도 생    긴다. 옷이건 그릇이건 도구건 그것이 거기 있다는 걸 내가 기억할 수 있    을만큼 만 갖고 있고 싶지 그 이상은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그     불필요한 것들이 설사 값나가는 물건이라 해도 쟁여 놓고 있으면 스트레    스가 된다. 내 집 안에서는 눈에 보이는 공간이건, 다락이나 광 속처럼 눈    에 안 띄는 공간이건 간에 썰렁하게 비워 놓고 싶다. 그러고 나면 답답하    던 마음에 숨통이 트인다. 내 나름의 스트레스 해소법일 뿐 욕심 없음과는    다른 거라고 생각한다. 비어 있거나 헐렁한 공간을 많이 확보하고 싶은 공    간욕(空間慾)도 - 그런 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 욕심은 욕심일 것이다.

  

0 필요한 것들이 제자리에 가지런히 있다는 것은 내가 어디 있다고 믿는 그    자리를 뜻하는 것일 뿐 보기 좋은 것. 능률적인 것 하고는 다르다. 능률면    으로는 주방 서랍에 있어야 마땅한 것이 욕실 선반에 있다고 해도 내가     욕실 선반으로 기억하고 있는 한 있던 자리에 그냥 놔두는 것이 그것을     필요로 할 때 찾기에 편하다. 그만큼 머리가 융통성을 잃고 굳어졌으니 변    화가 두려울 수밖에 없다.


                                 - 22 -

   특히 책에 있어서 그렇다. 십 년 전 이사할 때 책을 왕창 정리했다. 거긴    아파트였고 그 아파트엔 주민들이 읽던 책을 꽂아 놓으면 자연스럽게 돌    려 볼 수 있는 책장이 지하로 내려가는 층계참에 마련돼 있어 내가 그 작    은 도서관의 주공급원 노릇을 해 왔다. 내 서가에서 책을 솎아내기가 그만    큼 쉬웠던 것이다.

   단독 주택으로 이사하면서 서재는 아파트보다 별로 넓히지 못했어도 지    하에 서고를 하나 마련했다. 비로소 책을 헐렁하게 꽂을 수 있었다. 여기    저기에 여유롭게 삐딱하게 서 있는 책을 보니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    었다. 내가 책이 된 것처럼 숨통이 트였다.

   그러나 내 책들에게 이런 행복감을 준 것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파    트에서 단독주택으로 이사하고 난 후의 지난 십 년간은 내가 느끼기에 책    출판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시기와 맞먹지 않나 싶다. 신인들도 등단한 지    얼마 안 돼 책을 내고 원로들의 전집 출판도 늘어나 기증본 사인본만 해    도 주체할 수 없게 되었다. 다시 서고와 서가가 빈틈없이 되었고 여기저기    쌓아 놓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자연히 내가 책을 솎아 내는    방법도 다양해졌다.


0 나로서는 책을 대접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고 믿고 있지만 워낙 쏟아져 나    오는 출판물의 양이 많다 보니 단지 서가를 헐렁하게 유지하는 것만도 이    렇게 힘에 부쳐서야. 절로 한탄을 하게 된다. 그럴 때는 나도 모르게 책에    대한 대접이 난폭해져서 동업자들한테 미안해할 적이 많다.

   나에게는 책 자체를 끔찍하게 애지중지하던 할아버지의 피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며느리들과 함께 당신들이 읽던 언문책만 빼고는 할아버지의    한적을 모조리 물에 불려 먹물을 빼고 절구에 찧어 가볍고 튼튼한 함지박    을 만들면서 희희낙락하던 할머니의 피가 같이 섞여 있는 것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그건 그때 우리 집안 여인들이 특별히 난폭하거나 독창적이어서    책으로 그릇을 만들 생각을 한 것은 아니고 일제가 농촌의 놋그릇을 모조    리 빼앗아 가 그릇이 귀해졌을 때 한지를 불려 묽게 쑨 풀과 함께 찧어서    그릇을 만드는 게 우리 고장에서 크게 유행했었다. 그렇게 만든 그릇은 가    볍고 단단해서 마른 곡식을 저장하는 데 유용했다. 치자 물을 들이고 콩기    름을 발라 서로 아름다움을 다투기도 했다. 다들 작은 그릇밖에 못 만들었    는데 우리 집은 한지가 많아 큰 함지박을 만들 수 있는 것을 할머니는 몹   

                                - 23 -

  시 흐뭇해하셨다.


0 내 서가는 자식들과 손자들이 즐겨 찾는 가족 공용의 도서관 구실을 하     고 또 책들을 보낼 수 있는 곳들을 몇 군데 정해 놓고 있어서 서가에서     책이 질식하는 걸 막아주고 있다.

   일전에 신축한 우리 본당 도서실에 보낼 책을 추릴 때였다.

   90년대에 출간된 책으로 일본의 카톨릭 작가 앤도 슈사쿠의 책을 옮긴이    는 작고한 작가 이석봉으로 돼 있었다. 내용은 잘 생각이 안 나지만 책 중    간에 접힌 자국이 삐죽이 나와 있어 이상하게 여기고 펼쳐보게 되었다. 접    힌 페이지에는 연필로 밑줄까지 쳐 있어 처음엔 이건 내 책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버릇이 읽던 페이지에는 반드시 표시가 될 만한 걸 끼워     놓지 접지 않을 뿐 아니라 읽다가 기억해 두고 싶은 좋은 문장을 발견했    다고 해도 밑줄이라는 걸 쳐 본 적은 절대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남이 해놓은 것처럼 호기심 반 경멸하는 마음 반으로 밑줄 친 부분    을 읽어가면서 그 밑줄은 내가 친 게 틀림없다는 걸 인정 안 할 수가 없    었다. 책 내용이 생각났을 뿐 아니라 그때의 내 마음상태까지 어제 일처럼    선명하고 고통스럽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접어놓고 밑줄까지 쳐 놓은 부분은 예수가 처형되기 전 총독빌라도    와 대면하는 장면이다.

  

   빌라도는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는 죽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네. 그대를 따라다니던 자들은 다 어    디로 갔나?”

    (중략)

   “나는 ……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스쳐 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내 인생도 스쳐갈 셈인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내 인생에도 그대의 흔적을 남길 셈인가?”

     (중략)

   “나는 그대를 잊을 걸세.”

   “당신은 잊을 수 없을 겁니다. 내가 한 번 그 인생을 스쳐 가면 그 사   

                                 - 24 -

   람은 나를 잊지 못하게 됩니다.”

   “왜지?”

   “내가 그 사람을 언제까지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놀라서 얼굴을 들었다.


0 연필로 친 밑줄은 희미한데 ‘스쳐간다’에만 몇 겹이나 진하게 덧칠이 돼     있다. 그 밑줄 때문에 그날 그 책을 기증하는 책에서 제외시켜 간직하고     있다.

   독자가 책에 밑줄을 긋는 것은 그게 명문이기 때문이 아니라 읽을 당시    의 마음상태에 와 닿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점 때문에 밑줄 긋는 일을 기피    했다면 그것도 일종의 허영심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여학교 다닐 때는 책    이 귀할 때여서 그때 읽은 대부분의 책은 빌려 보았다. 순번을 정해 돌려    볼 정도로 남들이 보던 책이었으니 밑줄이 그어진 문장을 발견하는 경우    가 드물지 않았다.

   남의 밑줄을 보는 게 당시 건방기 많은 소녀에게는 은밀한 쾌감이 되지    않았나 싶다. 겨우 요 정도의 문장이 뭐가 좋다고 밑줄씩이나. 유치하긴.     하는 우월감까지 먼저 읽은 동무들에게 느꼈을 것 같다. 그런 나는 얼마나    겁쟁이인가. 남이 나를 그렇게 경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밑줄 같    은 건 절대로 안 칠 것 따위나 신조로 삼았으니.

 

0 앞으로 몇 년이나 더 글을 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작가로서의 나의 새    로운 다짐이 있다면 남의 책에 밑줄을 절대로 안치는 버릇부터 고쳐 볼     생각이다. 내 정신상태 내지는 지적 수준을 남이 넘겨짚을까 봐 전전긍긍    하는 것도 일종의 잘난 척. 치사한 허영심.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폐증이    라고 생각되자. 그런 내가 정떨어진다. 자신이 싫어하는 나를 누가 좋아해    주겠는가. 나를 스쳐 간 시간 속에 치유의 효능도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    들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이 나를 솎아 낼 때까지는 이승에서    사랑받고 싶고, 필요한 사람이고 싶고, 좋은 글도 쓰고 싶으니 계속해서     정신의 탄력만은 유지하고 싶다.

   그나저나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가지. 고통의 기억뿐 아니라 기쁨의 기    억까지 신속하게 지우면서. 나 좀 살려줘. 비명을 지르며 뛰어내리고 싶게    시간은 잘도 가는구나.

  

                                - 25 -

■ 구형예찬(球型禮讚)


0 이 나이에도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우리나라에서 월드컵 경기    가 열리기 전까지 나는 내가 축구에 열광할 수 있으리라는 걸 꿈에도 몰    랐다. 게임에도 감동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운동경기를 싫어한다고    까지는 할 수 없지만 그냥 무심한 편이었다.

   그런 축구 맹문이가 개막경기부터 축구에 푹 빠질 줄이야. 세네갈과 프랑    스가 붙은 개막전을 집에서 TV로 보면서 축구 경기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처음 알았다. 한 번도 마음으로부터 공감한 적이 없는 ‘검은 것이 아름답    다’  라는 말에 공감 정도가 아니라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을 정도로 세네    갈의 검은 선수들에게 매료됐다. 

  

0 한국이 16강전에서 4강전까지 가는 동안 내 눈을 의심할 정도로 믿어지지    않았던 건 세계가 놀랐다는 한국의 축구 실력이 아니라 붉은 악마였다. 어    떻게 ‘Be the Reds' 에 너도나도. 아빠의 어깨 위에 올라앉은 두 살배기    부터 머리가 허연 늙은이까지 얼씨구 호응을 해 붉은 셔츠를 떨쳐입고 광    장을 찾아 거리로 뛰쳐나갈 수 있을까. 나처럼 평생을 빨갱이 콤플렉스에    짓눌려 산 세대에게는 붉은 색을 단지 역동적이고 정열적이고 아름다운     기쁨의 색일 뿐이라고 알고 있는 새로운 세대가 마치 신인류의 등장처럼    이나 눈부셨다.

   한창 꽃다운 나이에 나라가 분단되고 그 후 우리는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북조선과. 남한에서도 좌익 이념을 가진 사람들을 한데 싸잡아 빨갱이라고    불렀다. 북조선에서 반동분자로 지목되는 게 치명적이었던 것처럼 이 땅에    서 빨갱이로 몰리는 게 가장 가혹한 따돌림이었다. 빨간 빛깔이 연상시키    는 건 떠오르는 태양도, 젊은 피도, 노을도, 장미도 봉숭아도 아니고 특정    이념이었다.

   우리에게 빨강은 의식의 한 올을 가시처럼 찌르고 잡아당기는 이상한 빛    깔이었다. 빛깔 속에 가시나 이념이 들어 있을 리 없건만 오랜 편 가르기    와 눈치 보기가 없는 걸 있는 것처럼 헛보이게 했다. 붉은 악마들은 우리    세대의 이런 고질적이고도 황당한 빨간 빛깔과의 악연을 단숨에 날려버렸    다. 그들은 아무의 눈치도 보지 않고, 아무런 선입관도 없이 곧이곧대로     빨간 빛깔을 다만 아름답고 정열적이고 눈에 잘 띄는 빛깔로 느꼈고 그


                                - 26 -

  색채효과를 충분히 활용해 역동적인 축제 분위기를 만들고. 일체감을 뜨겁    게 달구고. 기쁨을 만끽했다.

   나는 그들이 눈부시게 신기하고 많이 부러웠지만 그들을 따라 하기는 역    시 버거웠다. 우리나라가 4강전까지 가는 동안 6월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    게 살맛나는 시간이 흘렀다. 만나는 사람마다 행복하고 생기가 넘쳐 보였    고. 정신병원에 환자가 현저하게 줄었다는 소문도 들렸다. 정신질환 대부    분이 우울증에서 비롯된다고 할 때 꾸며낸 소문이 아닐 수도 있었다.  

   우리가 지구촌 축제의 중심이 되어 한바탕 신명 나는 잔치를 치른 기억    도 서서히 멀어져 가고 있다. 내 생전에 이렇게 피가 끓고 가슴이 울렁거    리고 살맛나는 경험을 또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0 이 지구상에서 나에게 허락된 시간도 이제 골인 지점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이 나이까지 살면서 하나 깨달은 게 있다면 비슷한 기억을 되풀이    하며 어디로 가고 있을 뿐 처음은 없다는 사실 정도이다. 인간의 삶의 궤    적이 직선인지 곡선인지 모르지만 죽는 것을 돌아간다고 말하는 우리의     전통적인 생사관으로 치면 원(圓)일지도 모르겠다. 지구가 공전하면서 자    전하듯이 시간도 되풀이하며 어디론가 우리를 데려가고 있다. 월드컵을 치    르고 나서 길에서 공놀이 하는 아이들이 부쩍 늘어났다. 아마 학교 운동장    이나 놀이터는 더할 것이다. 공은 차기만 하면 스스로 생명력이 생긴다.     지구도 신(神)이 찬 공이 아닐까. 지구를 신이 찬 가장 멋진 공. 또는 신의    시구(始球)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지구인의 오만일 테지만, 공이라는 형태    를 최초로 만들어낸 이가 즉 신이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건 그 완벽    성 때문이다. 구형의 표면에선 아무데나 자기가 선 자리가 중심이 된다.     만인이 중심일 수 있는 조형물은 신의 상상력 아니면 될 수 없는 일이다.    축구공만 한 지구의를 조만간 하나 장만해야겠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구형    의 원만함. 아름다움을 느끼고 쓰다듬어야겠다. 초강대국도, 축구 강국도,    경제 대국도, 우리가 3,4위를 다투는 동안 꼴찌와 안 꼴찌전을 벌인 작고    착한 나라도 내 손바닥 안에서는 평등할 것이다. 그게 창조의 뜻이고 구형    의 미덕이라는 걸 직접 느껴봐야겠다. 공 모양을 평면에 그려넣기 시작한    인간의 지혜 때문에 중심과 변방이 생긴 평면 지도를 보는 것보다 한결     지구촌이 사랑스러워질 것이다.

  


                                   - 27 -

■ 꿈이지만 현실, 진실이지만 거짓인 세계

   - 존 코넬리 ‘잃어버린 것들의 책’ -


0 나이 먹고 기억력이 희미해져 어제 일도 까먹는다 해도 잊지 못할 옛날이    야기는 누구에게나 있다. 엄마한테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어    린 시절은 나의 일생 중 완벽하게 행복한 시절이었다. 무서운 얘기도 많았    지만 결국은 착한 사람이 이기고 못된 인간은 멸하거나 개과천선하게 돼     있었고, 동물이나 식물하고도 교감할 수 있는 조화롭고 아름다운 세계였    다. 그래서 엄마의 옛날이야기는 엄마처럼 안전했지만 언젠가는 벗어나야    할, 아니 내 쫓겨야 할 세계이기도 했다.

 

0 ‘잃어버린 것들의 책’의 주인공 데이빗도 엄마가 해주는 옛날이야기를 들    으며, 엄마가 읽어주는 동화책을 들으며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내지만 엄마    는 병들어 언제 죽을지 모른다. 소년은 엄마를 안 죽게 하려고 어린이다운    온갖 짓을 다 한다. 소년에게 엄마는 곧 이야기였다. 소년이 잃을까봐 전    전긍긍해 한 건 엄마가 아니라 이야기였고 이세상의 의미였던 것이다. 병    들기 전 엄마는 소년에게 말하곤 했다. 이야기는 누군가가 읽어줄 때 살아    나는 특이한 생명체라고. 읽어주지 않으면 이야기 속 세상이 결코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건너 올 수 없다고 속삭이던 엄마가 결국은 죽는다. 소년은    엄마와 공유하던 이야기의 세계로부터 쫓겨나 추운 밤 담요를 뒤집어쓰고    홀로 책을 읽는 고독한 독서의 세계로 넘어간다.

  

0 데이빗의 엄마가 말했던 것처럼 오래된 이야기의 세상은 우리가 살고 있    는 세상과 분리되어 그 나름으로 존재해 왔다. 그러나 그 두 개의 세계를    구분하는 벽은 너무도 얇고 약했고 언젠가부터 그 두 세계가 섞이기 시작    했다. 바로 그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부터 나쁜 일들이     일어나가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부터 꼬부라진 남자가 데이빗을 찾아    오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 꼬부라진 남자는 이름은 없지만 모든 동화 속에 나오는 악역    심술쟁이의 총칭이다. 그러나 그 남자를 거쳐 소년은 엄마를 잃은 후 새롭    게 맞이한 이붓엄마, 이붓동생과의 화해에 이르고 동생에게 책임감을 느낄


                                - 28 -

  줄 아는 어른이 된다. 이 책 속에서 우리는 인생의 냉정한 리얼리즘과 따    뜻한 해피엔딩을 함께 만날 수 있고 까마득하게 잊은 줄 안 옛날이야기,     아름답고 황홀한 온갖 동화의 세계로 초대받는 판타지도 맛볼 수 있다.

     

■ 증손자 볼 나이 …… 난, 아직도 엄마가 필요해

         -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 -


0 이 나이에 머지않아 증손자 볼 나이에도 지치거나 상처받아 잠 못 이루는    밤이면 이불 속에서 몸을 태아처럼 작고 불쌍하게 오그리고 엄마, 엄마 나    좀 어떻게 해달라고 서럽고도 서럽게 엄마를 찾아 훌쩍인다면 누가 믿을    까. 우리 엄마는 딸이 손자를 다섯이나 볼 때까지 장수하셨는데 그때까지    도 이 늙은 딸은 엄마를 한 번도 어머니라고 불러보지 못했다. 내가 자랄    때만 해도 어느 정도 나이가 먹으면 엄마 대신 어머니로 부르게 하는 게    제대로 된 가정교육이었는데도 우리 엄마는 그러지 않았다.

  

   동무들 중에서 자기 엄마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아이를 보면 “쟤 엄마는    의붓엄마인가 봐” 하고 동정할 정도였다. 엄마는 부르는 것만으로도 위로    가 된다. 내 시름에 겨워 엄마, 엄마를 연거푸 부르면 끝도 없이 옛날 생    각이 나고, 이야기가 이야기를 부르면서 마음이 훈훈하게 젖어오면 오그렸    던 몸이 펴진다. 이 몸이 얼마나 사랑받은 몸인데, 넘치게 사랑받은 기억    은 아직도 나에게 젖줄이다.

  

0 신경숙의 장편 ‘엄마를 부탁해’도 엄마가 붙은 제목이 반가워 받자마자 읽    기 시작해서 마치 잠 안 오는 밤 엄마를 부르듯이 성마르게 읽다가 이야    기에 빠져들면서 우리 엄마와 신경숙의 엄마를 구별 못하게 되었다. 책에    나오는 대로라면 신경숙의 엄마는 1938년생이니 나보다도 훨씬 어리다.     그런데도 지금 살아계신다면 백세가 넘었을 우리 엄마하고 그의 엄마를     헷갈리고 있었다. 아마 사라져가는 농경시대의 엄마라는 공통점 때문이기    도하고 옛날 엄마 노릇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실종된 신경숙의 엄마를 줄곧 우리 엄마하고 동일시하고 읽다가 그 엄마    가 이 세상 어디선가 마지막 정신을 놓기 전에 남긴 독백. “내 새끼. 엄마    가 양팔을 벌리네. (중략) 나의 겨드랑이에 팔을 집어넣네. (중략) 엄마는   

                              - 29 -

  웃지 않네. 울지도 않네.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에 이르러 마침내 우리 엄마가 아닌 나하고 하나가 된다.    나야말로 엄마의 도움 없이는 죽지도 못할 것 같은 나약하고 의존적인 인    간이니까.


■ 맛있고 몸에 좋은 것만 찾는 세상이 얄밉다.

     - 공선옥 ‘행복한 만찬’ -


0 요새 아이들은 감자나 고구마나 호박이 어디서 나는 줄 알까. 어디서 나긴    어디서 나? 슈퍼에서 나지. 아마도 그것이 아이들의 정답이 아닐까. 어른    이 장보러 나온 대형 마트 카트에는 아이가 올라타고 있거나 따라다니면    서 먹을 것을 직접 골라잡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그 아이들 눈에는     감자나 고구마나 라면이나 초코파이나 다 같이 상자나 비닐. 스티로폼에     포장된 상품이라는 걸로 동등해 보일 것이다. 공장을 거치지 않은 농산물    들도 흙의 흔적은 무슨 독극물이라도 되는 양 말끔히 제거되고 반들거리    는 포장 안에 들어 있다.

  

0 공선옥이 쓴 ‘행복한 만찬’은 그 세련된 제목에서 연상되는, 복잡한 드레    싱이 들어가는 퓨전 음식이나 격식 갖춘 상차림과는 딴판의 이야기이다.     흙냄새가 물씬 나는 우리 먹을거리의 근본에 관한 이야기이다. 오히려 어    떤 음식이 몸에 좋은 지 어떻게 요리해야 보기 좋은지에만 관심이 있는     이 먹을거리 넘치는 세상인심이 얄미워서 썼다고까지 작가는 말하고 있     다. 불모의 사막지대를 관광이랍시고 여행하고 돌아왔을 때, 흙이 있는 데    는 어디든 심지어는 아파트 단지  보도블록 틈새에도 돋아나는 질긴 녹색    생명력이 눈에 들어왔을 때, 이 나라 흙이 고마워서 엎드려서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0 이 책에 나오는 가공되기 이전 흙냄새를 그냥 묻히고 있는 농산물과 산채    들은 이 세상에 먹을 것이 쇠고기만 있는 게 아니라고 넌지시 귀띔해주는    구황의 역할까지 하고 있다. 설교나 영양 분석 같은 것 전혀 없이도 그렇    게 읽히는 것은 음식 하나하나마다 다른 내력, 그 소박하고도 재미있는 이    야기의 매력 때문일 듯싶다.


                              - 30 -

   예전에는 귀했지만 지금은 흔해빠진 달걀이 그의 추억담 없이 어찌 이다    지도 아름다운 한 송이 꽃처럼 피어날 수 있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아무    리 하찮게 보이는 사람도 그 생애는 한 권의 소설책이듯이 그의 애정 어    린 시선은 푸성귀나 푸성귀에도 못 미치는 먹을 수 있는 풀이나 나뭇잎까    지도 동화 같은 한 편의 이야기로 만들어 주고 있다.


■ 천진한 얼굴 가지신 아담한 노신사

     - 김수환 추기경님 선종 -


0 나는 민주화 운동이 한창 치열했던 1980년대에 커톨릭 교리 공부를 시작    해서 몇 번의 재수 끝에 1985년 영세를 받았다. 카톨릭에 대한 확신이 생    겨서가 아니라 민주화 운동의 한가운데 그분이 계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분은 정의를 위해 박해받고 쫓기는 이들을 말없이 그분의 날개로 덮고    품으셨을 뿐, 결코 선동하거나 부추기지는 않으셨다. 만약 그분까지 투쟁    적이었다면 그분의 그늘. 그 분의 날개 밑이 그렇게 편했을 리가 없다. 정    의의 투사에게도 그분의 그늘이 필요했지만. 자유를 위해 피 한 방울 흘리    기 싫었던 나처럼 소심한 비겁자에게도 그분의 그늘은 필요했던 것이다.

  

0 추기경님을 모시고 조촐하게 식사도 하고 대화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그    분이 서울 대교구장에서 은퇴하시고 비교적 한가해지신 후였는데 그것도    내가 찾아뵙거나 요청해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중간에서 마련하거나 초청    해준 자리였다. 어느 신문사의 초대로 러시아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를 보    러 간 적이 있는데 나란히 앉아 측근에서 뵌 추기경님은 제의가 아닌 간    편한 복장이어서인지 너무도 가볍고 작은 분으로 보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공연이 끝나자 일어나셔서 어찌나 열렬하게 오랫동안    박수를 치시는지 연예인에 열광하는 요즘 청소년과 다름이 없었다. 누군가    정말인지 추측인지 “저 발레리나 중 한 명을 추기경님이 특별히 아끼셔서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저렇게 열렬히 박수를 치시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누구도 어린이같이 되지 못하면 하늘나라에 들지 못할 것”    이란 성경 구절이 생각나 ‘저 어른이야말로 천당은 떼어 놓은 당상’ 이라    고, 좀 무엄한 생각을 했었다.



                            - 31 -

0 그 후에도 더러 모시고 같이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한 번은 엘리베    이터 앞에서였다. 우릴 초청해준 측에서 승강기 앞에 양쪽으로 지켜서서     추기경님이 먼저 안으로 드시도록 안내했지만, 추기경님은 옆으로 비켜서    시면서 나한테 먼저 타라고 하셨다. 당연히 내가 사양하자 “레이디 퍼스     트!” 하셨다. 더 사양하지 않고 냉큼 올라타면서 “영 레이디 (young lady)    가 아니어서 죄송합니다.” 했더니 “나보다 영이지요.” 하면서 뒤따라 타셨    다. 그럴 때 그분은 추기경 같지도, 소년 같지도 않은 매너 좋고 유머감각    풍부한 노신사처럼 보였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종하시고 나서 접하게 된 그의 어록 중에 이런 것    이 있었다. “바티칸은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다. 이 작은 나라가 전쟁    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제로에 가깝지만, 평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무한대다.” 그게 바로 카톨릭 정신이라면 김수환 추기경님이야말로     그 존재 자체가 하나의 교회였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      

  

 

■ 보석처럼 빛나던 나무와 여인

    - 박수근 화백 추모 -


0 박수근 화백을 알게 된 것은 1951년이 저물어 가는 겨울이었다. 그때 나    는 스물한 살이었고,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문과에 입학한 이듬해였다. 그    때만 해도 서울대에 여학생 수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희귀했고,    특히 문리대는 대학의 대학이라고 자부심이 대단할 때라 나도 내 위에 누    가 있으랴 싶게 콧대가 높았었다.

   그러나 입학하자마자 6.25가 나고 집안이 몰락해서 어린 조카들과 노모    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고 말았다. 생산업체도 관공서도 없는 환도 전    의 최전방 도시 서울에서 찾을 수 있는 직장은 미군부대가 고작이었다. 살    아 있는 경기라곤 오직 미군부대 주변의 양공주 경기가 무슨 도깨비불처    럼 요괴롭게 명멸할 뿐이었다. 그런데 PX라니. 나는 그때 PX 근처를 얼쩡    거리기만 했을 뿐인데 거짓말처럼 PX에 취직이 됐다. 그때 미 8군 PX는    지금의 신세계백화점에 자리 잡고 있었다.

  

0 당시 PX에서 흘러나오는 미군 물자와 PX를 드나드는 미군을 상대로 한    

                               - 32 -

  장사로 그 일대는 딴 세상처럼 화려했고 시끌시끌한 활기가 넘치고 있었    다. 전쟁의 불안과 가난에 찌든 우리가 밖에서 보기엔 PX야말로 별세계였    다. 알리바바의 동굴처럼 들어가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들어가기만 하    면 온갖 진귀한 보물이 널려 있는 꿈의 보고였다.

   그만큼 줄 서서 기다리는 구직자도 많았는데 그 중에서 쉽게 발탁이 된    것은 서울대 학생이라는 게 눈길을 끈 것 같았다. 쉽게 임시 패스를 받고    그 안에 들어가 보니 진짜 PX 걸이 된 것이 아니라 한국물산 위탁매장의    점원이 된 것이었다. 그때 PX는 아래층만 매점이었는데 그것도 삼분의 일    가량은 한국인 업자에게 위탁 매장으로 내 주고 있었고, 그 중의 하나가     초상화부였는데 나는 그곳으로 배치를 받았다. 초상화부엔 다섯 명 정도의    궁기가 절절 흐르는 중년 남자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전쟁 전엔 극    장 간판을 그리던 사람들이라고 했다. 업주가 그들을 간판장이라고 얕잡아    보니까 나도 그렇게 알고 함부로 대했다. 박수근 화백도 그중 한 사람이었    다. 나는 그가 다른 간판장이와 다른 점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0 내가 초상화부에서 할 일은 화가를 뒷바라지하면서 미군들로부터 초상화    주문을 맡는 일이었다. 제 발로 걸어와서 초상화를 그리겠다고 주문하는     미군은 거의 없었다. 먼저 말을 걸어 초상화를 그리도록 꼬시는 일이 나의    주된 임무였다. 그 일은 물건을 파는 일보다도 훨씬 어려웠다. 영어도 짧    은데다가 꽁하고 교만한 성격도 문제였다.

   내가 차츰 말문이 열리고 또 어느 정도 뻔뻔스러워지기도 해서 미군에게    수작을 걸기도 하게 되면서 그림 주문도 늘어날 무렵부터 화가들에게 안    하무인으로 굴기 시작했다. 내 덕에 그들이 먹고 살 수 있다는 교만한 마    음이 그들을 한껏 무시하고 구박하게 했다. 그들은 거의 오십대로 나에겐    아버지뻘은 되는 어른인데도 나는 그들을 김씨, 이씨 하고, 마치 부리는     아랫사람 대하듯이 마구 불러댔다.

   그때 나는 그들에게 내가 아무리 잘난 체를 해도 지나칠 것이 없다고 여    기고 있었다. 양갓집 딸로, 또 서울대 학생인 내가 미군들에게 갖은 아양    을 다 떨고, 간판장이들을 우리나라에서 제일급의 예술가라고 터무니없는    거짓말까지 해가며 저희들의 일거리를 내주고 있는데, 그만한 생색쯤 못     낼게 뭔가 싶었다. 나는 그때 내가 더는 전락할 수 없을 만큼 밑바닥까지    전락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불행감에 거의 도취해 있었다.

  

                              - 33 -

0 초상화부는 주문을 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찾으러 올 때가 더     문제였다. 미군들은 자신의 얼굴을 그려달라는 이는 거의 없고, 애인이나    아내, 누이의 사진을 맡기고 주문을 하는데 찾으러 와서는 닮지 않았다느    니, 실물보다 못하다느니 트집을 잡기가 일쑤였다. 반품을 받으면 그림의    재료로 쓴 스카프, 손수건, 또는 천조각의 원가 1달러 30센트는 고스란히    물어내야만 했다. (당시의 그 돈은 제법 큰돈이었다.) 그럴수록 나는 그들    을 깔보고 한껏 신경질을 부렸다.

   그 무렵 내가 그들에게 얼마나 싹수없이 못되게 굴었나는 지금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나는 틈만 나면 고개를 곧추세우고 뒷짐을 지고 화가    들이 작업하고 있는 책상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그들의 그림 솜씨를 모    욕적으로 평하기를 즐겼다.

   어느 날 박수근이 두툼한 화집을 한 권 옆구리에 끼고 출근을 했다. 나는    속으로 ‘꼴값하고 있네, 옆구리에 화첩 낀다고 간판장이가 화가 될 줄 아    남’ 하고 비웃었다. 그러나 순전히 폼으로만 화집을 끼고 나온 것을 아닌    모양이었다. 그가 화집을 펴들고 나에게로 왔다. 얼굴에 망설이는 듯 수줍    은 미소를 띠고, 마치 선생님에게 칭찬받기를 갈망하는 초등학교 학생처럼    천진무구한 얼굴이었다. 그가 어떤 그림 하나를 가리키며 자기 작품이라고    했다. 일하는 촌부(村婦) 그림이었다. 일제시대의 관전인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자기의 그림이라고 했다. 내가 함부로 대한 간판장이 중에 진짜 화    가가 섞여 있었다는 건 사건이요 충격이었다.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고. 내    가 그동안 그다지도 열중한 불행감으로부터 문득 깨어나는 기분을 맛보았    다. 그리고 나의 수모를 말없이 감내하던 그의 선량함이 비로소 의연함으    로 비치기 시작했다.

 

0 그는 어느 날 느닷없이 그 화집을 나에게 보여줬을까. 간판장이들과 다르    게 보임으로써 내 구박을 조금이라도 덜 받아보려고 그랬을까? 그러나 나    에게 그 화집을 잠깐 보여준 후에도 그는 여전히 잘난 척이라고는 모르는    간판장이들 중에서 가장 존재 없는 간판장이로 일관했다. 그가 신분을 밝    힌 것은 내가 죽자꾸나 열중한 불행감으로부터 헤어나게 하려는 그다운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그 후 그와 나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퇴근길을 같이하면서 한 치 앞    을 내다볼 수 없는 시국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서로 나누면서 위로받곤


                                 - 34 -

  했지만. 서로의 가정사에 대해선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나는 휴전이 되    기 전에 결혼해서 PX 걸 생활을 청산했고 그는 휴전 후 정부가 환도하면    서 PX가 용산으로 옮겨간 후 까지도 초상화 그리는 일을 한 걸로 알고 있    다.


0 내가 비교적 평탄한 결혼 생활을 하면서 많은 아이를 낳아 기르느라 문화    계 소식과는 담을 쌓고 사는 사이에 그는 조금씩 유명해졌지만 여전히 그    림만으로는 생활이 안 될 때 백내장으로 고생하다가 타계한 걸 전해 들었    다. 그의 유작전 소식을 신문 문화면에서 읽고 마음먹고 찾아가 ‘나무와     여인’이라는 작은 소품에 매료되어 오랫동안 그 앞을 떠나지 못했고, 그때    의 감동이랄까. 소름이 돋을 것 같은 충격을 참아내기 어려워 놓여나기 위    해 쓴 게 내 처녀작 ‘나목’이다. 그는 왜 꽃 피거나 잎 무성한 나무를 그리    지 못하고 한결같이 잎 떨군 나목만 그렸을까. 왜 나무 곁을 지나는 여인    들은 하나같이 머리에 뭔가를 이고 있지 않으면 아이라도 업고 있는 걸까.

   남자들은 일자리가 없고. 그 대신 여인들이 두 배로 고달팠던. 그러나 강    한 여인들은 결코 절망하지 않고 전후의 빈궁을 온몸으로 감당하고 사는    모습이 그의 선한 눈엔 가장 아름다워 보였을 것 같다. 그래서 오래오래     남기고자 화폭을 돌 삼아 돌을 쪼듯이 힘과 정성을 다해 그린 게 아니었    을까. 여인들이 바쁘게 지나가는 길목마다 나목이 서 있다. 조금만 더 견    디렴. 곧 봄이 오리니 하는 위로처럼. 그와 내가 한 직장에서 보낸 그해     겨울. 같이 퇴근하던 폐허의 서울에도 나목이 된 가로수는 서 있었다. 내    황폐한 마음엔 마냥 춥고 살벌하게만 보이던 겨울나무가 그의 눈엔 어찌    그리 늠름하고도 숨 쉬듯이 정겹게 비쳐졌을까.

   이번 현대화랑에서 열리는 박수근 회고전에서 제일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것도 나에게 소설 ‘나목’을 쓰게 한 그 ‘나무와 여인’ 이었다. 그건 작지만    보석처럼 빛나며 내 눈을 끌어 당겼다.

 

                                                  - 끝 -




 

  

                             - 35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