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2)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2)
제3장 제국의 야망사
1. 야망이 만들어 낸 ‘제국’이라는 괴물
■ 세계사는 정체성을 둘러싼 분쟁의 기록
0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거쳐, 1922년 15개 공화국으로 이루어진 거대연방으로 탄생한 소련은 1991년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계기로, 각 공화국에서 독립의 기운이 고조되면서 같은 해에 15개 공화국 모두 독립해 마침내 붕괴하고 맙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러시아에서는 지금도 독립을 위해 줄기차게 투쟁하는 민족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인 체첸은 19세기 러시아제국에 합방된 이후 줄곧 연방내 공화국을 유지해 온 나라입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연방의 일원으로 같이해왔는데 왜 독립을 하려는 걸까요?
그것은 ‘민족의 자긍심’과 관계되는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민족으로부터 학대받고 고통을 당한 쓰라린 기억, ‘제국’이라는 거대한 세력에 의해 삼켜지는 과정에 생겨난 차별은 쉽사리 꺾이거나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소수민족을 안고 있는 나라들이 민족문제로 골치를 썩는 것도 알고 보면 다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최근 티베트 문제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중국은 여러 소수민족들과의 관계 악화로 인해 앞으로도 적잖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0 독립운동은 한마디로 ‘이민족의 지배로 상실한 민족의 자긍심과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이민족의 지배를 받는 것은 자긍심과 정체성을 빼앗기는 고통스러운 체험입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원나라는 몽골족이 한족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을 지배했던 왕조입니다. 인구에서는 한족의 수가 월등히 많았지만 원나라는 몽골인 제일주의를 취했기 때문에 피지배민족인 한족에게는 굴욕적인 법률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원나라의 법전인 ‘원전장’에
- 1 -
는 한족은 몽골인에게 맞아도 같이 때려서는 안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이 법전에 쓰여 있다니 우습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한족에게는 그것이 결코 웃을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0 중국은 한족이 중심인 나라라는 인상이 강한데. 사실은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시기가 더 길었습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5~6세기에 중국대륙의 북부지역을 지배했던 북위는 북아시아 유민족인 선비족의 왕조였고, 서태후와 마지막 황제로 유명한 청나라도 중국 동북부를 거점으로한 여진족이 세운 이른바 오랑캐 왕조였습니다.
청나라 때 한족은 지배자에 대한 복종의 의미로 ‘변발’이라는 머리 형태를 강요당했습니다. 그런 억압이 변발에 그치지 않고, 생활 전반과 민족 고유의 전통과 문화까지 강제로 바꾸면 당하는 사람은 큰 상처를 받게 됩니다. 지배층이야 기분 좋을지 모르지만 당하는 쪽은 참기 어려울 정도의 모욕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정체성과 자긍심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원한’이 남기 때문에 소수민족은 저마다 독립에 목숨을 걸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정체성을 둘러싼 싸움’은 세계의 제국사를 읽는데 매우 중요한 열쇄가 됩니다.
0 오늘날 세계적으로 독립의 기운이 고조되는 것은 제국의 폭압적인 지배 속에서 솔솔 연기를 내고 있던 원한의 불씨, 피지배민족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희망의 불씨가 제국이 쇠락해감으로 인해 급격히 불씨가 피어오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땅은 빼앗을지언정 사람의 정체성과 자긍심까지 완전히 말살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 제국의 야망의 근원은 “내 앞에 무릎을 꿇어라!”
- 페르시아, 중국 -
0 고대 페르시아 제국과 스파르타의 싸움, BC 5세기의 페르시아 전쟁에서 소재를 찾은 헐리우드 영화 ‘300’에도 그러한 남성만의 야망과 민족의 주체성을 놓고 벌어지는 싸움이 그려집니다. 세계제국의 야망을 품고 도시국가 스파르타를 공격하는 페르시아, 사실 페르시아가 스파르타에 요구했던 것은 따지고 보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앞에 무릎을 꿇으라는 것” 뿐이었지요.
- 2 -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는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에게 “무릎을 꿇으라. 나를 숭배하라. 그러면 전부 용서해 주겠다. 또한 너희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라를 유지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겠다. 그러니 내 앞에 무릎을 꿇어라”하고 요구합니다. 무릎만 꿇으면 모든 것이 원만히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스파르타는 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0 “내 앞에 무릎을 꿇어라”의 전형은 중국 전통인 조공무역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조공무역은 중국 황제의 덕을 우러러 주변국의 군주가 복종하는 뜻으로 공물을 바치고, 그에 대해 황제가 상사(賞賜)라는 명목의 답례물을 주는 전통적인 무역형식입니다. ‘무역’이라고는 하지만 그 실체는 상거래가 아닙니다. 선물을 들고 가서 머리를 숙이는 대가로 상을 받아 오는 것이지요. 황제는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공물을 바친 상대에게 덕(德)을 보여주기 위해 그 몇 배의 답례물을 주는 것이 관례입니다. 여기서의 관계는 ‘무릎을 꿇어라. 그러면 보물을 주겠다. 그리고 너를 그 땅의 왕으로 인정해주마’하는 것입니다.
이 관계에서 중국에게 물질적 이점은 거의 없습니다. 그들이 얻은 것이라고는 상대가 무릎을 꿇음으로써 얻는 우월감과 쾌감 정도입니다. 그것이 뭐 그렇게 중요할까 싶지만 남의 위에 서고 싶어하는 본성을 가진 사람에게 그 매력은 상상외로 큰 것입니다.
■ 끝을 몰라 자멸하는 제국 - 알렉산드로스라는 우상
0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 북방의 마케도니아라는 작은 신흥국의 왕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전 그리스를 마케도니아의 깃발 아래 통일하고, 이집트를 손아귀에 넣고. 대국 페르시아를 무너뜨리면서 불과 8년 만에 인도에 이르기까지 전부 자신의 제국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욕망은 거기서 그칠 줄 몰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토를 더욱 넓히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제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는 병사들의 간곡한 청원을 뿌리치지 못하고 돌아가는 도중에 그만 병에 걸려 죽고 맙니다. 참고로 알렉산드로스는 10대 때 당대 최고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밑에서 공부해 교양과 과학적인 탐구심을 갖춘 지성파였습니다. 그러나 제국의 건설과 확장에 대한 그의 욕망은 끝이 없었지요.
- 3 -
0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건설한 제국은 그의 죽음과 함께 분열되어 그 제국이 존재했던 것은 고작 10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동서양의 활발한 문화교류로 헬레니즘 문화가 생겨났다는 의의는 있지만 한 국가, 그리고 제국의 흥망성쇠라는 관점에서는 그리 대단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동경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로마제국의 기초를 쌓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유럽을 정복해 프랑스 제국을 건설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동경했습니다. 젊은 시절의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자신을 비교해 그가 제국을 이룬 나이가 되었음에도 자신은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고 한탄했고, 나폴레옹은 원정에 나설 때 그를 흉내 내어 대규모의 학자를 동행시켰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것도, 카이사르가 반대파의 반감을 사서 타살된 것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갈 수 있는 데까지’라며 자신의 욕망을 불도저처럼 추구한 사람들의 운명이 비극적이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멈추지 못하고 결국 자신 역시 그들과 같은 최후를 맞게 된 것입니다.
2. 성공하는 제국 실패하는 제국
■ 그리스 시대부터 계속되어온 ‘연설’의 전통
0 고대 그리스 로마 사회에는 공공장소에서의 표현력에 의해 신임받는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형태가 있습니다. 이것이 ‘연설’이라는 문화를 만든 것이죠.
서양에서는 그만큼 ‘말’에 대한 신뢰가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연설은 단순히 인기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말로 한 것을 얼마나 실행할 수 있는가가 신뢰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어로 로고스(logos)는 ‘말’ ‘토론’ ‘척도’ ‘이성’을 뜻하며 서양의 이성관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이 로고스 중시야말로 ‘서양다움’입니다.
0 이러한 말에 대한 신뢰는 성서에 “태초에 말씀(logos)이 있었다”(요한복음) 라는 기술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설을 키운 것은 시대나 발상
- 4 -
이 전혀 다른 그리스 로마(헬레니즘)와 기독교(헤브라이즘)입니다.
이 상호 이질적인 두 가지가 합치한 데에 ‘서양’이라는 세계사적인 카데고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서양의 형태는 고대 그리스 로마에 원형이 만들어지고. 그 방식은 현재의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 제국의 본질 - 이집트 왕국과 로마 제국의 차이
0 이집트의 파라오는 영혼의 불멸신앙도 있지만 태양신의 화신인 동시에 신관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신관이 지배하는 구조는 통치구조인 동시에 신앙의 대상도 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같이 종교적인 사업을 하자. 히는 일체감이 생깁니다. 이 일체감은 “내가. 내가”하고 자기 주장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서양적 감각과는 다르죠.
이것은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둘러싼 해석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최초에 이집트 문명을 발견한 서양인은 거대한 피라미드를 보고 전제군주가 노예에게 강제노동을 시켜서 만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이러한 노예 강제노동설이 역사의 정설이 되어 있었는데. 최근 연구에서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피라미드는 강제적으로 노예를 시켜서 만든 것이 아니라 나일강의 범람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시기에 민중을 구제하기 위해 이루어졌던 일종의 공공사업이었습니다. 물론 현재의 공공사업과는 달리 종교적인 의미를 가졌지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민중은 더욱 적극적으로 건설 과정에 참가했고, 그토록 대단한 건축물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0 이렇듯 기저에 종교가 깊게 자리한 문화와 연설을 잘하는 사람을 승자로 뽑는 문화에서는 근본적으로 민중이 원하는 것이 서로 다릅니다.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양인들은 피라미드를 보며 ‘노예를 강제 노동시켰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또 하나, 이집트와 로마의 다른 점은 땅의 비옥함 정도입니다. 이집트는 기본적으로 땅이 비옥해서 국외로 나갈 필요가 없었지만 상대적으로 척박한
- 5 -
땅을 소유한 로마는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이 ‘밖으로의 확장’이 로마를 ‘제국’으로 만든 것이죠.
제국(imperial)은 ‘임페리움(impetium)’이라는 라틴어에서 온 말로 원래는 ‘주권’ ‘주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현제 제국이라고 할 경우 그 정의의 가장 큰 특징은 급속한 확장에 의해 여러 민족을 지배하는 것에 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커도 이집트는 파라오가 지배하는 이집트 민족국가이기 때문에 ‘왕국’일 뿐 제국은 아닙니다. 제국은 이민족을 정복에 의해 자국의 영향권 안에 편입시켜 적극적으로 지배하는 체제입니다.
여기에 제국의 가장 큰 포인트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제국은 그야말로 ‘제국’을 완성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로마 이전에도 페르시아제국과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건설한 헬레니즘제국 등 제국이라 불릴 만한 나라들이 있었지만 우리가 가장 ‘제국’의 느낌을 받는 것은 역시 정복한 땅을 속주로 하여 중앙 지배를 시행한 로마제국입니다.
■ 종교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던 율리우스 카이사르
0 로마제국의 기틀을 다진 카이사르는 무력으로 정복은 하지만 그 지역의 종교에는 일절 손을 대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로마 시민권을 주고 의무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통치하죠. 즉 정치적인 권력으로서의 시민권을 피지배민족에게 부여하면서도 그 민족의 정신적 핵심. 즉 민족으로서의 긍지와 정체성은 건드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현명한 방법으로 카이사르 이후에도 이러한 기본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로마는 발전을 지속합니다.
그런데 이 방식을 계승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납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가 급격히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의무를 다하면 어떤 신앙의 갖든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했던 로마가 기독교에 대해 대규모 탄압을 가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요? 로마가 다신교문화인 데 반해 기독교는 다른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일신교였기 때문입니다.
0 로마의 관용은 다양한 신을 믿는 신자간의 관용이기도 했습니다. 그에 대해 다른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는 신은 자신들이 믿는 신만이 참신이라 주장했고, 그것이 문제의 발단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기독교와 로마의 불협화음은 제국 말기에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황제를 신격화
- 6 -
하는 것으로 더욱 커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대규모 기독교 탄압으로 이어진 것이죠.
그런데 그 후 로마의 태도는 일변합니다. AD313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AD 274 - 337) 가 기독교를 정식 종교로 인정하고, 이어서 392년에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화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탄압해도 수그러들지 않는 기독교 세력을 적이 아닌 같은 편으로 끌어안는 것으로 황제의 권위를 높이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의도와는 반대로 이 무렵부터 로마는 본격적으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리고 395년 마침내 제국은 동서로 분열해버립니다. 탄압해도 안 되고 적극적으로 끌어안아도 안 된다. 역시 종교에는 손을 대지 않았던 카이사르의 방식은 현명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다른 민족들과 사회적인 구조를 공유하는 시스템이 무너지면 서 붕괴하는 로마제국
0 로마제국 쇠퇴의 원인이 물론 기독교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주지하다시피 무력으로 탄압한 주변국을 속주로 만들어 제국의 지배권에 편입하는 것이 로마의 기본적인 지배 방식입니다. 중앙이 주변을 착취하는 구도는 어느 제국이나 마찬가지지만, 로마의 경우 는 달랐습니다. 속주 사람들에게도 중앙의 사람들과 똑같이 시민권을 부여함으로써 통합구조를 가능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제국의 중앙은 소비의 기능만 담당하고 그 소비의 부담은 전부 속주에 떠넘김으로써 피지배인들의 불만이 높아진 것이죠. 어떤 제국이든지 기본적으로 속주에게는 가급적 적은 권리를 주고 최대한 착취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그나마 속주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이점이 있다고 느낄 때는 그나마 그런 방식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국의 지배력이 약해지거나 착취가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잠자고 있던 ‘민족의 자긍심’이 눈을 떠 독립을 외치게 됩니다. 따라서 중앙과 주변간의 착취와 혜택의 균형이 제국 지배의 명암을 가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제국은 사회적인 시스템을 공유하는 것으로 제국이 확대 유지되었고 그것이 무너지면서 제국도 붕괴했습니다.
- 7 -
■ 가장 이질적인 제국, 이슬람
0 이슬람교에 따르면 사람은 유일신 알라 앞에서 모두 평등합니다.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AD 570 - 632) 조차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신의 말을 전하는 예언자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슬람제국의 경우 ‘알라 앞에서의 평등’이 제국 지배를 지탱해 주었습니다. 제국 초기. 무함마드 시대에는 알라 앞에서의 평등이 엄격하게 시행되었고, 이슬람교라는 종교를 중심으로 제국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7세기 후반 우마이야 왕조(661 - 750) 시대가 되자 이민족은 이슬람교로 개종해도 아랍인과 동등한 대접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아랍인과 이슬람교도는 세금이 면제되는데 반해 피정복 민족은 개종과 상관없이 세금이 부과됩니다. 그러나 아랍인 중에서도 알라의 가르침에 반하는 이러한 강권정치에 불만을 품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우마이야 왕조는 무너지고 750년 아부 알 아바스를 초대 칼리프로 하는 아바스 왕조가 들어섭니다.
0 이후 이슬람 세계가 확대되는 것은 이 아바스 왕조 때 ‘알라 앞에서의 평등’을 기초로 한 이슬람법이 제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슬람법에서는 이슬람교로 개종한 자는 아랍인이 아니어도 인두세를 면제하고, 동시에 농업에 종사하는 자는 아랍인이어도 똑같이 토지세를 내야 한다고 정해져 있습니다. 이민족을 차별하지 않는 이러한 평등한 세법이 이후의 이슬람 왕조에서 적용되었기 때문에 이슬람교는 전 세계로 확산될 수 있었고, 제국은 번영을 유지하게 됩니다.
■ 힘만으로는 제국을 유지할 수 없다 - 진의 시황제
0 그러나 이슬람제국처럼 피정복민에 대해서도 평등한 대우를 하는 것은 제국으로서는 매우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개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착취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이 정복자의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중국의 경우 원나라든 청나라든 이민족이 지배할 때 한족은 상당한 차별을 받았습니다. 세계 최대의 건조물이라는 만리장성은 진나라 때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건설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당초의 장성은 현재와는 위치가 달랐습니다. 현재의 모습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명나라(1386
- 8 -
- 1644)때에 이르러서입니다. 두 번 다시 굴욕적인 이민족의 지배는 받고 싶지 않다는 한족 사이에 흐르는 강한 공감대가 만리장성이라는 구조물을 만들어 낸 것이죠.
‘천고마비(天高馬肥)’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통 가을의 여유로운 풍경을 묘사하는 말로 쓰이곤 하는데. 원래는 중국인이 북방 유목민의 침공을 경계하는 말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중국인은 북방 유목민의 침입을 두려워했습니다.
0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인 진나라는 (BC 221 - 206)는 광대한 영토를 장악했다는 점과 수많은 주변국들을 다스렸다는 점에서 명실상부한 동양 최초의 제국입니다. ‘황제’라는 명칭을 최초로 사용한 것도 시황제(始皇帝 BC 259 - 210)입니다.
그는 분명 ‘내 앞에 무릎을 꿇어라’하는 방식으로 제국의 야망을 강하게 드러낸 사람임이 확실합니다. 사실 ‘시(始)황제’라는 명칭은 그가 살아 있을 때는 사용된 기록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가 죽은 후 ‘최초의 황제’ 라는 의미에서 부여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아무튼 황제는 ‘황황한 상제’ 즉 눈부시게 빛나는 절대적인 존재라는 뜻입니다. 대단한 자부심이죠.
광대한 토지를 정복해 중앙집권을 이루고, 도량형의 통일과 분서갱유로 언론을 통제하고, 대외적으로 만리장성을 쌓는다. 이렇듯 진나라는 이미 제국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고, 그것이 동양적인 제국의 모델이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런 진나라도 시황제가 살아 있는 동안에만 제국이 유지됩니다.
제국은 물리적인 힘으로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카이사르 당시의 로마제국이나 전성기의 이슬람제국처럼, 제국을 오래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피정복민에게도 다소의 이점이 느껴지도록 하면서 지배하는 구조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3. 세습은 제국 붕괴의 첫걸음
■ 전국제패와 ‘삼국지’에 자극 받는 남심(男心)의 비밀
- 9 -
0 패(覇)라는 글자는 묘하게 남심(男心)을 자극합니다. 전국제패, 패권, 패자와 같이 ‘패’라는 글자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아마도 남자가 본성적으로 갖고 있는 ‘세계정복의 꿈’을 자극하기 때문일 겁니다.
남자들이 품고 있는 것은 대부분 조금은 애매한 감각, ‘특별한 이유는 없고, 그냥 제패하고 싶다’ 하는 정도의 생각입니다.
다시 말해 구석구석까지 ‘내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 그런 조금은 엉뚱한 욕심이 남자의 마음속에 둥지를 틀고 있는‘ 야망’의 본질입니다.
0 ‘삼국지’를 좋아하는 남성이 많은데, 그 책이 인기가 있는 것은 삼국의 세력이 어느 한 쪽에 쏠려 있지 않고 나름대로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세 나라 가운데 진 나라의 시황제처럼 압도적인 힘을 가진 어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식이라면 자칫 이야기의 흥은 깨져버릴 것입니다.
‘제패’에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삼국지’에는 남자가 좋아하는 것들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우선 위,촉,오 세 나라의 실력이 서로 비슷해서 야망이 쉽게 실현되지 못합니다. 삼국을 세운 주인공들 역시 저마다 캐릭터가 확실해서 그들은 나라뿐 아니라 인기도 셋으로 나눕니다. 일본인의 경우 촉나라의 유비를 좋아하는 사람이 약간 많은 편인데, 위나라의 조조가 스케일이 크다는 사람도, 오나라의 손권이 멋있다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그들 말고도 제갈공명과 관우, 사마의 같은 영웅들이 많이 등장해 활약하는 것도 커다란 매력 요소입니다. 게다가 그들 각자가 야망을 자극하는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를 갖고 있습니다.
0 제국의 야망이 단순한 지배욕에 그친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삼국지’의 영웅들보다 진나라의 시황제를 더 좋아할 겁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삼국지가 단연 인기가 높습니다. 철저한 지배, 압도적인 힘만으로는 ‘제패’라는 낭만은 충족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국의 야망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경쟁자가 있고, 고난이 있고, 때로는 그 야망이 무너지는 드라마틱한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 사후에도 살아 남았던 황제들
- 10 -
0 남자는 ‘정복욕’ 여자는 ‘독점욕’이라고 하는데, 확실히 성별에 따른 심리 차이가 있습니다.
타인을 폭력으로 정복해 자신이 그 위에 서는 ‘원숭이 산의 보스’같은 행위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어느 시대나 여성이 아닌 남성이었습니다. 자연을 봐도 원숭이 산의 보스는 거의 예외 없이 수컷이지 암컷이 아닙니다. 자연계에서도 수컷은 언제나 서열을 정하고 싶어 합니다. 물론 거기에는 보다 많은 암컷을 차지한 뒤 가능한 한 자신의 유전자를 많이 남기고 싶어하는 본능이 숨어 있습니다. 인간의 경우에도 야망의 근저에는 그런 본능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황제는 대부분 자신의 아들에게 제국을 물려주고 싶어 하는데, 거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자식이 없었을 때는 거의 완벽한 무장이었는데, 자식이 태어난 뒤부터 돌변합니다. 자신의 뒤를 잇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던 사람들을 미련 없이 죽이고 자기 아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남겨주기 위해 조선을 침범하는 등 갈수록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대에 한한 것이라면 자기가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니까 지나치게 욕심 부릴 필요가 없어지지만 대대손손 이어질 경우에는 욕망에 한계가 사라집니다. 무한대로 치닫게 되는 거죠.
0 여하튼 많은 제국에서 ‘일족에 의한 현세적인 이익분배’와 ‘자신의 유전자에 의한 지배’라는 두 가지 현안이 많은 문제를 만들어 내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로마제국도 실제로는 대부분 혈족이 후계자가 되었고, 로마제국이 둘로 나뉘어진 것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두 아들에게 제국을 반씩 나눠준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몽골제국도, 러시아, 영국, 프랑스의 왕실도 전부 세습이고 중국도 그러했습니다.
나폴레옹도 고향 코르시카 섬에서 데려온 일족을 여러 관리직에 등용한 것이 나중에 그의 발목을 잡게 되죠.
역사적으로 보면 세습에도 이점은 있습니다. 가장 큰 이점은 제국의 근간을 흔들만한 후계자 다툼이 일어나기가 어렵다는 것이지요. 또한 어린 시절부터 차기 후계자가 정해지기 때문에 체계적인 황제 교육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아 세습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안정기뿐입니다. 대외적으
- 11 -
로 압력이 심해지면 평범한 군주로는 대항할 수 없기 때문에 실력 있는 사람이 필요하게 되고, 결국 왕권 교체가 이루어집니다.
이렇듯 자신의 유전자가 자신이 죽은 후에도 통치를 계속 한다는 것은 어쩌면 환상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 현대세계를 주무르는 ‘보이지 않는 제국’
0 얼핏 보면 제국의 야망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국의 야망은 영역을 바꿨을 뿐 지금도 엄연히 살아 있습니다. 특히 제국의 야망이 가장 심하게 소용돌이치는 것은 경제 분야입니다. 예를 들어 컴퓨터의 세계에서는 애플과의 패권다툼에서 승리한 마이크로소프트가 독주를 해왔는데 지금은 구글이 상당부분 그 영역을 잠식했죠. 패권을 둘러싼 그들의 싸움은 과거 제국의 이미지와는 조금 다르지만 모든 것을 자신이 장악하겠다는 야망은 제국주의의 본질을 조금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제국주의에 의한 패권다툼은 금융계에서도 일어나고 있는데. ‘글로벌리즘’이라는 이름으로 그럴 듯하게 포장되어 불리고 있습니다. 일본도 예외는 아니어서 글로벌리즘이라는 이름하에 시장 개방에 거세게 내몰리고 있습니다. 시장을 개방하라는 것은 좀 거칠게 말해 ‘나의 먹이가 돼라’. ‘내가 너를 먹게 해 달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규모의 영토적 침략은 줄었지만 그 대신 금융기관들이 탐욕스럽게 먹이를 찾아다니게 되었습니다.
0 현대사회는 국제적인 자본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어떤 나라도 다른 나라나 거대한 금융집단으로부터 직·간접적 지배를 받게 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그런 상태가 당사자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보이지 않는다.’ 는 것이 현대 제국주의의 최대 문제입니다. 지금 전 세계로 확대되어가는 제국은 이렇듯 눈에 보이지 않는 제국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전쟁의 이면에는 국제금융자본의 존재가 늘 도사리고 있다는 것도 납득이 됩니다. 아무튼 전쟁을 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니까요. 게다가 자본은 ‘국가’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전쟁이 길어질수록 돈을 벌고, 어느 쪽이 이기든 손해를 보지 않는 구조를 만들 수 있습니다.
- 12 -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제국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이제는 ‘자본’이라는 보이지 않는 새로운 제국으로 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4장 세계사에 나타난 몬스터(Monsters)들
- 자본주의, 사회주의, 파시즘이 일으킨 격진 -
1. 현대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주의
■ 마르크스가 간파한 자본주의의 본질
0 현대세계를 결정짓는 시스템은 ‘자본주의’입니다. 미국을 필두로 한 세계화는 좋든 싫든 지구 위의 모든 나라들을 집어 삼키고 있습니다. 이 자본주의는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 직성이 풀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치 고장난 브레이크를 달고 질주하는 기관처럼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현대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시스템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빈부의 격차’입니다. 자본이 자본을 만들어 내는 이 사회에서는 가진 자는 자신이 가진 것으로 더 많은 재물을 모을 수 있는 반면, 가지지 못한 자는 아무리 애를 써도 부를 축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지 못함으로 인해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을 지속적으로 강요받기 때문입니다.
0 또한 자본은 늘 새로운 시장을 찾아 자신을 확대하려는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창시자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은 자기 증식을 행하는 가치의 운동체다.”라는 말로 사회에 투하된 화폐가 유통하는 과정에서 보다 큰 화폐가 되어 회수 된다는, ‘자본이 이윤과 잉여가치를 낳는 사회 시스템’을 자본주의라 정의한 것입니다.
자본이 자기증식을 한다는 말은 돈 있는 사람은 투자를 통해 더 큰 이익을 얻을 수도 있고 땀 흘려서 일하지 않고도 자본의 힘과 자기 증식만으로 얼마든지 막대한 부를 손에 거머쥘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자본을 소유한 소수의 사람들에게 자본주의는 매우 좋은 시스템이
- 13 -
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는 이보다 불공평한 시스템이 없습니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바로 이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사이의 불공평함을 날카롭게 통찰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덕분에 자본주의의 함정을 깨닫게 됩니다.
■ 자본주의라는 ‘녹슨 기관차’는 왜 멈추지 않을까?
0 이렇듯 문제가 많고 모순덩어리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라는 기관차는 도대체 왜 멈추지 않는 걸까요? 왜 자본주의는 수많은 모순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재한데 반해 사회주의는 백 년도 버티질 못하고 붕괴해버리고 말았을까요? 우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태생적으로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자연적인 시스템인데 반해 사회주의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는데 있습니다.
인간은 맨 처음 문명이 생겨나기 전부터 이미 물질에 대한 욕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욕망을 바탕으로 인간은 부를 축적한 뒤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어 그것을 더욱 크게 만드는 방식으로 부를 늘려왔습니다. 그런 오랜 시간을 지나며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 진 것이 바로 자본주의입니다.
0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의 싸움은 시대의 발전과 시스템의 차이로 인한 다툼이 아니라 ‘자연 발생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과의 투쟁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르크스처럼 뛰어난 인간의 두뇌도 그 발상에는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고, 수천 년에 걸쳐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시스템에는 수많은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좋은 점이 있었습니다.
욕망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입니다. 예컨대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 마음, 좋은 물건을 갖고 싶은 마음, 이런 것이 모두 욕망입니다. 그런 다양한 욕망들이 모여 서로 충돌하고 화합하여 시나브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자본주의 시스템입니다.
사회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완전히 무시한 채 이론적으로 이상적인 시스템을 만들었지만 결국 그것을 운용하는 인간은 여전히 욕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제대로 돌아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0 자본주의가 멈추지 않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 멈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두면 17세기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가 말한
- 14 -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같은 상황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현대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라고 하는, 상황에 따라 아군도 될 수 있고 적군도 될 수 있는 ‘몬스터’를 적절히 길들이는 지혜입니다.
■ 사회주의 몸체에 자본주의 바퀴를 달고 달리는 중국
0 자본주의의 모순과 문제점을 통렬히 비판했던 마르크스의 사상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공산주의의 이상은 소련의 역사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이 붕괴하면서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도 너나 할것 없이 앞장서서 자본주의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상당히 흥미로운 실험장이 되고 있는 곳이 바로 중국입니다. 중국은 소련을 따라 공산주의의 실현을 목표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던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중국은 지금까지도 정치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공산당에 의한 일당독재 체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중국이 흥미로운 것은 공산주의 국가 특유의 독재적인 시스템은 유지한 체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받아들여 야누스처럼 기묘한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중국은 사회주의 몸체에 자본주의 바퀴를 달고 달리는 기관차와도 같습니다.
0 지난번 텔레비전의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했다가, 중국에 주제하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최근 중국에서는 여러 가지 환경문제가 대두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백색오염’문제라고 합니다. ‘백색’은 비닐봉투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하고 난 비닐 봉투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올림픽을 개최해야 하는데, 이대로는 안 된다. 이런 고민 끝에 정부가 비닐봉투의 사용을 유료화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유료화 실행 당일부터 거의 모든 사람이 비닐 봉투를 전혀 쓰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제까지는 어차피 공짜이니 쓰지 않으면 손해라고 생각하는 듯 무분별하게 사용했던 사람들이 유료로 바뀐 순간 마치 서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외면했을 뿐만 아리라 오히려 돈을 주고라도 사용하려는 사람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 15 -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금의 중국은 무슨 일이든 ‘위(정부)’에서 “오늘부터 이렇게 하라.”하고 지시하면 일제히 그 말에 따를 정도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고 합니다. 도대체 그들은 어떤 심리로 규칙에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것인지 궁금해서 중국인에게 물어보았는데, 그의 대답은 의외로 단순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좋아진다면 좋은 거 아닌가요?”
정치적인 체제 면에서는 공산당 독재에, 경제적인 시스템 면에서는 자본주의라는 이중구조의 거대한 나라 중국이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나갈 것인지가 향후 세계사의 흐름에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2. 20세기 최대의 실험, 사회주의
■ 마르크스주의가 지식인에게 ‘리트머스 시험지’였던 시대
0 예전 대학에는 ‘좌익사상을 갖지 않으면 학생이 아니다’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내가 대학에 입학했던 1980년 전후만 해도 아직 그런 기운이 남아 있었지요. 예를 들어 대학생이라면 한 번쯤 천황제를 비판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위기였고, 일반인에 비해 좌익적인 사상이 훨씬 강한 편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당시 대학에서는 좌익적인 사상, 즉 마르크스주의적인 사상이 곧 지식인의 소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본주의에 의해 만들어지는 계층은 금전적인 면 이외에도 여러 가지 불공평한 조건을 만들어 낸다는 인식이 팽배한 당대의 지식인들은 그런 불합리함과 불공평을 개선하기 위해 지성을 활용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까닭에 당시 대학에 입학한 학생이 사회주의 세례를 받게 되는 것은 ‘너, 이 리트머스 시험지를 핥아봐’ 하는 의미와도 같았습니다. 그 결과 반응이 좋지 않으면 ‘아직도 무지몽매한 자본주의 앞잡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나?’하는 비판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당시에는 자본주의를 향한 엄격하고 비판적인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소련의 상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현실 사회주의국가에서는 이미 치유하기 어려운 다양한 모순과 문제점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었
- 16 -
습니다. 그런데도 사상계는 그런 현실에 대해 의도적으로 눈을 감는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 스스로 붕괴한 제국 소비에트 연방
0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비에트 연방(Soviet Union)에서의 공산주의 실험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물론 미국과의 광적인 경쟁도 거기에 한몫을 했지만 궁극적으로 소련은 다른 나라에 의해 멸망한 것이 아닙니다. 그 자신이 만들어낸 사회주의라는 시스템이 빚어낸 수많은 문제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곪을 대로 곪고 썩을 대로 썩어 마침내 붕괴로 치달은 것입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라는 기치를 내걸고 탄생한 국가로 1922년에 성립되어 1991년 붕괴하기까지 69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하며 유지되었습니다.
소비에트의 역사는 처음부터 피로 물들었습니다. 스탈린 독재시대, 혁명이래 정적이었던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부하린 등이 숙청당한 것은 그런 공산당원을 비롯한 장교뿐 아니라 비당원과 일반 민중까지 포함하면 그 수를 다 셀 수 없을 정도(수백만에서 1천만 명이 넘는다는 주장도 있음)라고 합니다.
입으로는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국가를 자처하며 민중을 최우선시 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엄청난 수의 반대파를 숙청한 잔인한 체제였습니다. 이 체제에서는 자유로운 발언도 인정되지 않았고 선거도 입후보에 의한 자유선거가 아니었습니다.
0 스탈린, 흐루시초프, 브레즈네프로 이어지는 동안 소비에트 연방은 미국과의 냉전을 주도하며 세계사의 주역으로 군림하지만 경제정책의 실패,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으로 안팎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습니다. 결국 1991년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와 ‘글라디노스트(개방)’으로 각 연방국이 주권국으로 독립함으로써 소련은 세계사에서 사라져버립니다. 이렇듯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건국 당시 내 걸었던 이상을 거의 실현하지 못한 채 붕괴하고 말았습니다.
사회주의는 착취와 억압을 당하던 노동자들이 힘을 갖게 되면 자유롭고 풍요로운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논리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자유는 더욱 억압되고, 생활은 갈수록 어려워졌으며, 수많은 생
- 17 -
명이 희생을 당해야 했습니다.
■ 마르크스의 ‘자본’이라는 미궁에서 탄생한 사회주의라는 이 름의 종교
0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한 영국의 철학자 칼 포퍼는 “마르크스주의는 ‘반증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과학이 아니다”라고 주장합니다. 마르크스주의는 부정하려고 해도 요리조리 발뺌을 해서 제대로 반증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런 것은 과학이라고 할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0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것은 사회가 원시공동체에서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로 진화하고 발전한 결과로서 필연적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주의의 기초이론인 사적유물론의 요점입니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반복으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그 투쟁은 하층민이 상층민을 타도함으로써 평등하게 된다. 따라서 역사의 필연으로 언젠가는 완전히 평등한 사회가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마르크스의 주장에 따르면 프랑스혁명은 민중을 탄압하고 학대하는 왕을 단두대로 보내 사형에 처했기 때문에 ‘혁명’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것이 빠져 있는 미완의 혁명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왜냐하면 프랑스혁명으로 자유를 얻은 것은 전체 민중이 아닌 부르주아인 유산계급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자유롭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남아 있다. 그들의 자유는 어떻게 되는가’를 생각한 마르크스는 남겨진 많은 무산계급인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세계혁명의 필연성을 이야기 합니다.
마르크스가 쓴 방대한 책 가운데 ‘프롤레타리아의 독재’의 개념에 대해 가장 알기 쉽고 이상적인 부분만을 저술한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소련이라는 나라의 이론적 근간이 되었는데, 여기에서는 다소 교조(敎條)적인 사고방식이 느껴져 왠지 종교적인 냄새가 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탈린은 기존의 종교를 탄압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또한 스탈린 시대의 소련은 스스로를 ‘과학적인 학문’이라는 그럴듯한 엑세서리로 포장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본질을 보기 어렵게 만든 측면도 있습니다.
■ ‘평등’과 ‘독재’는 종이 한 장의 차이
- 18 -
- 소련, 중국, 캄보디아의 비극 -
0 사회주의를 고찰함에 있어 또 하나 지나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주의가 왜 필연적으로 폭력에 의한 독재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탄생은 로마노프 왕조의 니콜라이 2세(1868-1918)의 처형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 당시 국왕을 처형한 것을 모방한 것이지만 소련에서는 그 후에도 많은 숙청과 학살이 일어납니다. 이 무렵 일본에서도 좌익단체 등에서 내부인에 의한 폭행과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행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면서 그들은 이전까지 해온 운동의 업적을 스스로 평가한다는 뜻의 ‘총괄(總括)’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혁명가가 되고자 한다면 자기를 총괄하라.”고 말하며 정신없이 다그쳤는데, 그 실상은 폭력에 의한 사상개조. 혹은 내부의 권력 다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절대 권력자가 생겨나고 그 권력자에 대한 충성이 요구되는데, 만일 그에 따르지 않으면 ‘총괄’이라는 이름하에 폭력적인 방식으로 사상개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0 소비에트뿐 아니라 중국과 캄보디아의 폴 포트(1928-1998) 정권 하에서도 이런 현상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마오쩌둥(毛澤東 1925-1998) 시대의 중국 공산당이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일어난 문화대혁명을 통해 학살한 자국민의 수는 일설에 따르면 무려 1천만 명이 넘는다고 말합니다. 폴 포트 시대의 학살은 1백만 명, 혹은 3백만 명 정도로 추산하는데, 당시 캄보디아의 인구는 약8백만 명 남짓이었으므로 학살당한 사람의 수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동족을 학살한 인물은 누구일까?”라는 퀴즈를 낸다면 톱리스트는 마오쩌둥, 스탈린, 폴 포트의 순서일 것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회주의 국가, 혹은 공산주의 국가를 지향했다는 것입니다.
0 사회주의화에 더욱 박차를 가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입니다. 소련군의 추격에 의해 나치스 독일로부터 해방된 동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차례로 공산당 정권이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동독, 폴란드, 불가리아,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국가의 확대를 두려워한 미국은 1947년 반소·반공 정책인 트루먼
- 19 -
독트린을 발표합니다. 이것으로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대국을 중심으로 하는 냉전시대가 시작됩니다. 그 후 1949년 미국이 중심이 되어 서방 12개국으로 이루어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결성하자 소련은 1955년 동유럽 국가들과 군사기구인 ‘바르샤바조약기구’를 결성해 그에 대항합니다.
이로써 20세기 말이 이르기까지 지속되는 ‘동서 냉전체제’가 확고히 자리잡게 됩니다.
현재 사회주의 국가는 중국, 북한, 베트남, 라오스, 그리고 쿠바 정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무렵만 해도 이대로 가면 전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사회주의화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일만큼 엄청난 속도로 세력이 확대되었습니다.
■ 국가의 노예로 전락한 ‘위대한’ 노동자들
0 자본주의에서는 치열한 경쟁에 의해 여기저기서 사업체가 망하기도 하고 성공하기도 하는 역동적인 변화 속에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균형이 유지됩니다. 그런데 사회주의는 그 속성상 그것이 한쪽으로 굳어지는 방향으로 치닫기 쉽습니다. 일당독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선거도 없고, 설사 있다 하더라도 내부적인 것이라서 변화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노동자의 처지는 점점 약화됩니다.
0 즉 사회주의에서는 노동자의 처지가 나빠지는 것은 물론이고 중요한 권리인 ‘파업의 권리’마저 빼앗겨서 노동자의 예속성이 근본적으로 강화된다는 것입니다. 베버의 말대로 사회주의 국가의 노동자는 혹독한 고통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3. 위기가 만든 파시즘이라는 괴물
■ 나치스의 파시즘을 받아들인 ‘보통’ 사람들
0 20세기의 몬스터로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가 ‘파시즘’입니다. 파시즘 하면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독일의 히틀러,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과 일본이
- 20 -
떠오를 겁니다. 파시즘이라는 말은 무솔리니가 자신의 사상을 그렇게 부른 것에서 비롯되었는데, 이후 그와 유사한 사상을 총칭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파시즘이란 무엇인가? 야마구치 야스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1) 그 국민사회의 심각한 통합의 위기를 민족주의 고양과 ‘지도자 숭배’에 의해 극복하려는 시도
2) 단순한 민족주의나 지도자 숭배에 그치지 않고 기성의 전통적인 지배체 제의 과감한 재편성
- 마르크스 사회주의에 대한 적대감과 기존의 지배층에 대한 반발을 포함
3) 중간 계층의 위기의식을 강렬하게 반영
0 파시즘 하면 나치스의 독일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나치당(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은 선거를 통해 의석수를 늘려 나갔습니다. 즉 나치스의 약진에는 독일 국민의 의지가 반영된 셈이죠. 최종적으로는 100% 의석을 획득했으므로 거의 전 국민이 나치당을 지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데 그 시작 지점에서 나치스 자체의 모체가 된 것은 ‘중간층’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은 베르사이유 체제 속에서 경제적으로 상당한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특히 더 막대한 경제적 피해를 입은 것이 그전까지 그럭저럭 생활했던 중류층이었습니다.
참고로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의 인플레이션은 전쟁 전 마르크대 달러의 환률이 1:1이었다면 1923년에는 1조 마르크대 1달러, 예를 들면 1Kg 빵 한 조각이 3990억 마르크에 이르러 마르크화는 휴지조각이 되었습니다.
■ 파시즘을 지탱하는 ‘무엇이든지 반대’ 정신
0 제1차 세계대전(1914-1918)과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그리고 그 사이의 21년간은 전체를 하나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파시즘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과정에서 생겨났고, 제2차 세계대전은 파시즘이 일으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파시즘의 특징은 ‘무조건 반대’입니다.
0 파시즘은 사회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는 반(反)사회주의입니다. 그렇다고 자본주의도 아닌, 반(反 )자본주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밖에도 국제 협력에도 반대, 국내에서는 반 유태인 등 다양한 사안에 대해 반대하는 입
- 21 -
장을 취하는 것이 파시즘입니다.
파시즘의 정체성은 적극적인 자기규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것에 무조건 반대해 무너뜨리려는 파괴 본성에 의해 성립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왜 반대하는가’ 하는 명확한 이유는 없습니다. 아무튼 반대입니다. 그래서 반(反)마르크스주의, 반 자유주의, 반 국제주의인 동시에 금권적인 자본주의에도 반대, 전통주의에도 반대, 단순한 보수주의에도 반대함으로써 진짜 입장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0 그런데 파시즘이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렇습니다. 근대 철학의 길을 연 데카르트는 ‘심신 이원론’으로 ‘마음’ 즉 정신과 이성이 중시되고 ‘신체와 그에 따르는 생물적인 요소는 그 아래쪽에 위치한다’고 했습니다.
19세기 후반이 되면 이성보다는 인간이 본래 갖고 있는 감정과 직관 같은 능력의 우위성을 설명하는 ‘생의 철학’이 사상계에서 조금씩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포스트모던의 주류와 함께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운 시대의 철학으로 지지를 받습니다. 그러나 감정을 이성보다 우위에 두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이 갖는 폭력성을 긍정하는 것이 됩니다.
사회 모더니즘은 찰스 다윈의 ‘생물진화론’에서 파생한 ‘사회진화론’인데 사회도 이상적인 상태로 진화해 간다는 사상입니다. 이 발상은 강자의 권리를 정당화하며 나치스의 민족정화사상으로 이어져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발전해 갑니다.
■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의 본질
- ‘더 많이 가진 자’와 ‘덜 가진 자’의 싸움 -
0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처리로 독일과 승전국 사이에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은 해외 식민지 영토의 전면 포기, 알자스와 로렌 두 지방을 프랑스에 양도, 배상금 1,320억 마르크를 지불하는 등의 가혹한 짐을 지게 됩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손해는 해외식민지의 전면 포기였습니다. 아무리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부흥을 시도하고 생산력을 높인다 해도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식민지를 확보하지 않으면 상황이 나아질 것을 기대하기 어렵기
- 22 -
때문입니다.
제국주의가 세상을 지배하던 이 시기에 식민지를 확보하지 못한다는 것은
강대국으로 도약하는 데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습니다. 한데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 이탈리아, 일본 모두 식민지가 전혀 없거나 영국, 프랑스 등의 다른 제국주의 열강들에 비해 훨씬 적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살펴보면 ‘파시즘 대 자본주의의 진영’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제국주의 경쟁에서의 선발주자와 후발주자의 싸움, 즉 식민지를 이미 갖고 있던 나라와 갖지 않은 나라와의 싸움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 역사상 전무후무한 선전선동가였던 히틀러
0 히틀러는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회복시키는 방식으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방법은 매우 교활했습니다.
히틀러는 종교적인 신(神)도 신의 대리자도 전부 몰아내고 ‘모든 사람의 대변자’라는 위치에 자신을 올려놓습니다. 그는 그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민중의 압도적 다수는 진지하고 냉철한 사고나 이성보다 감정적, 혹은 감상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여성적 기질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복잡하지 않고 매우 단순하며 폐쇄적이다....... 긍정 아니면 부정이며, 사랑 아니면 미움이고, 정의 아니면 불의이며, 참 아니면 거짓이다. 반은 그렇고 반은 그렇지 않다든가. 혹은 일부분이 그렇다는 일은 없다.
0 히틀러는 ‘가장 간단한 개념조차 몇 천 번의 반복을 통해서만 기억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말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히틀러는 선전에 대해 그리고 대중의 본질에 대해 무서우리만치 날카롭게 꿰뚫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수법은 지금의 광고방송에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20세기 광고업계가 치밀하게 연구하고 실행해온 기법인데 그것을 남보다 빨리 국가 규모로 실행해 조직한 것이 바로 히틀러였던 것입니다.
■ ‘전부 없었던 것으로’ 하고 싶은 대중의 마음을 교묘히 파 고 든 파시즘
- 23 -
0 제 1,2차 세계대전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처했던 미묘한 위치를 알아야 합니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인 이 시기에 예사롭지 않은 발전으로 ‘황금의 1920년대’를 이뤄냅니다.
당시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도 전쟁 중 미국에 진 거액의 채무로 고심하고 있었고, 패전국 독일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했지만 독일은 그 빚을 갚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독일은 미국으로부터 돈을 빌려서 배상금을 할부로 지불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자신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한 자금을 또다시 빌려준 셈이죠.
유럽은 승전국 패전국 모두 무역부진과 실업자 증대 등으로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0 이런 유럽 국가들과는 대조적으로 미국은 이 전후 10년 동안 수출을 두 배로 늘려서 미국에 부가 집중되는, 부자연스러울 정도의 독주체제를 만들어 냅니다. 당시 세계의 공업생산량 가운데 미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상당히 커서 석유가 전체의 70%, 자동차는 85%, 철강이 40%를 차지했습니다.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도 런던의‘시티’에서 뉴욕의 ‘월가’로 이동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은 정신적 경제적인 양 측면에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거기에 히틀러가 제시한 국가와 민족이라는 정체성 강조는 일제히 그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며 나치스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마음이 약해 있을 때 자신감을 갖고 길을 제시한다. 사실 이것은 매우 효과적인 마인드 컨트롤 방법입니다. - ‘너는 안 된다. 안 된다.’ 하고 자신감을 처참하게 꺾어 놓은 뒤 슬쩍 부드러운 말을 던진다. - 이것은 신흥 사이비종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수법입니다. 파시즘은 이것을 국가단위로 실행했습니다. 그 수법이 어떠했든 간에 여기서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미국의 독주체제로 인해 가장 부채가 컸던 독일이 궁지에 몰렸고, 그 때문에 파시즘 같은 몬스터가 탄생했다는 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미국이 두각을 나타낸 1920년대라는 시대가 파시즘을 준비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0 그리고 1929년 미국 월가에서 시작된 ‘대공황’은 미국도 많은 고통을 겪었지만 유럽 국가들은 더욱 심각했습니다. 특히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고심하던 독일은 비참한 상태가 되어 감액된 배상금마저도 지불할 수 없는 지경
- 24 -
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대공황과 인플레이션, 채무이행 불능 등의 악조건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은 독일인들은 ‘전부 없었던 일로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독일 국민에게 있어 나치스를 지지하는 것은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리셋 버튼’을 누르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 현대세계는 과연 파시즘을 무너뜨렸는가?
0 유대인과 폴란드인이 독일인에게 학대받고 대량학살 당한 것은 나치스 독일이 그들을 열등 민족으로 규정함으로써 자신들 게르만족은 우수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하기 위한 하나의 비열한 수단이었습니다.
유대인이 학살된 배경에는 역사적으로 그들이 유럽의 기독교사회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는 측면도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의 마음속에 있던 유대인에 대한 차별의식을 확대하는 것으로 가상의 적을 만들고, 자기 민족에 대한 우월의식을 만들어냄으로써 단결력을 높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생물은 자연에 적응한 종(種)이 살아남는 것으로 진화한다”라는 본래의 진화론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왜곡하고, 유대인은 열등인종이므로 어차피 멸종할 운명이라며 인위적으로 말살하려 한 것이 홀로코스트(나치스 독일이 행한 유대인 대학살) 였습니다. 나치스의 유대인 학살은 자(自)민족 정화를 위한 타(他)인종 청소‘를 시도한 것이었는데, 게르만족의 피를 깨끗이 유지하기위해서라도 유대인은 사라져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나치스 독일이 말살하려한 것은 유대인만이 아닙니다. 수많은 폴란드인들과 슬라브계 민족들, 집시, 그리고 동성애자와 정신장애자도 그 리스트에 있었습니다. 무서운 것은 이 끔찍한 홀로코스트가 히틀러를 비롯한 일부 지배층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행위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일반인들도 동참한 반인륜적인 행위였다는 점입니다.
0 사람은 불안해지면 자신과 다른 것을 찾아내 배제하는 것으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하나가 됨으로써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관동대지진 직후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는 루머가 나돌아 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당했고, 유럽에서는 비상식적인 종교 탄압이 수없이 일어났습니다.
- 25 -
제5장 세계사의 중심에는 언제나
종교가 있었다.
- 신들은 과연 세상을 구원했는가? -
1. 세계사를 움직이는 일신교 삼형제
-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
■ 근대에 되살아나는 신(神)들
0 근대화가 진행되었어도 종교는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합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환상에 불과한 종교가 어떻게 전 세계로 확산되어 지금까지도 세력을 떨치고 있는지 신기합니다.
칼 마르크스는 “종교는 아편”이라고 말했고, 현대 영국의 동물 행동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 이라는 책에서 “어떻게 생각해도 신이 이 세상을 지켜준다고 믿을 만한 합리적인 이유는 없다.”고 말합니다.
0 최근 미국에서는 기독교 원리주의자가 늘고 있습니다. ‘기독교 원리주의자’는 성서에 나와 있는 내용을 기적까지 포함해서 전부 사실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미국만이 아닙니다. 전 세계적으로 봐도 이슬람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에서 원리주의자의 수가 증가하고 있고 급속히 힘을 얻는 등 최근에는 마치 근대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처럼 종교에 심취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 남미 정복의 첨병 역할을 했던 기독교
0 기독교 이외의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보았을 때 서양근대는 악의 화신입니다. 서양근대에는 제국주의 하에서 전쟁과 침략이 이루어졌고 대량학살까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이제까지 저지른 범죄는 무엇인가. 근대화라는 죄를 짓지 않았나. 라는 것이지요. 유감스럽게도 이에 대해 유럽이나 미국, 그리고 독일과 일본 등의 현대 제국주의 국가들은 제대로 반성을 하지
- 26 -
않고 있습니다. 그 배경에는 서양근대가 낳은 제국주의와 기독교가 하나가 되어 정복을 추진했다는 냉혹한 현실이 있습니다. 제국주의적 침략의 희생이 된 잉카제국의 최후를 기록한 도미니크파의 신부이자 수도사인 라스카사스( Bartolom de LasCasas 1474-1566)의 ‘인디언 파괴에 대한 간결한 보고’에는 인디오에 대한 기독교의 잔혹한 행위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극악무도하고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들로부터 도망친 인디오들은 산에 틀어박히거나 산 깊숙이 도망쳐 몸을 피했다. 그러자 기독교인들은 그들을 잡아내는 사냥개를 사나운 개로 훈련했다. 개는 인디오를 발견하면 잔인하게 물어뜯어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또 정복자들은 인디오가 한 명의 기독교도를 살해하면 그 대가로 백 명의 인디오를 죽여야 한다는 규칙을 정했다고 합니다.
■ 거의 모든 전쟁의 역사는 일신교 3형제의 집안 다툼이었다?
0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제국의 야망과 하나가 되었고, 이슬람교는 한편으로 관용적인 측면을 갖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전 세계적인 분쟁의 불씨가 되고 있습니다.
원래 기독교와 이슬람교 모두 유대교라는 일신교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유대교가 말하는 메시아(구세주)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는 것이 기독교, 아직 메시아는 왕림하지 않았다고 믿는 것이 유대교, 예수도 모세처럼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의 하나로, 무함마드가 최후의 예언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이슬람교입니다. 따라서 세 종교가 말하는 ‘신’은 사실상 같은 신입니다.
당연하게도 세 종교의 경전을 보면 공통적인 내용이 많습니다. 유대교의 경전 토라는 기독교의 구약성서에 해당합니다. 기독교에는 여기에 신약성서가 더해지죠. 이슬람교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경전은 무함마드가 받은 신의 말씀을 기록한 꾸란인데, 구약·신약 성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단, 성서에는 잘못된 것도 쓰여 있다. 진짜 정확한 신의 말씀은 꾸란뿐이다. 라는 것이 이슬람교의 입장입니다.
- 27 -
0 그런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라는 일신교들 가운데 가장 침략행위와 궁합이 잘 맞는 것이 ‘사랑의 종교’라는 기독교이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서양의 세계 침략에서 하나의 무기, 혹은 구실로 사용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복자들도 단순히 무력으로 제압하고 살해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보급하는 것으로 미개한 사람들에게 ‘신의 구원’을 가져다준다며 정복의 명분으로 종교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악용한 이 방식을 예수가 보았다면 통탄할 일이죠.
일신교의 힘은 강해서 기독교, 이슬람교는 결과적으로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받아들여졌고, 유대교도 전 세계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결과 세계의 역사, 특히 전쟁 역사의 대부분은 이 종교 삼형제의 집안싸움이라는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인류를 구원할 종교가 싸움의 원천이라는 점에서 인간 세계의 복잡함을 실감하게 됩니다.
■ 다시 종교로 돌아서는 현대인
0 세계사를 살펴볼 때 역시 의문으로 남는 것은, ‘인류는 왜 이렇게까지 유난스럽게 영적인 존재를 믿어왔을까?’ 하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근대적인 이성주의가 침투해 무턱대고 미신에 현혹되는 경향은 과거에 비해 한결 덜해졌습니다. 그래도 유령이나 귀신의 존재를 믿는다거나 어떤 방향이 나쁘다. 불길하다 하는 식의 미신적인 요소는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리고 생활 속에 살아있습니다.
0 ‘자신을 위대한 무언가에 바침으로써 안정을 얻는다’는 역설적인 회로가 바로 종교와 신앙의 근본입니다. 그것도 단순히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아(ego)를 버리고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사람의 생활이, 인간의 지혜가 미치지 않는 자연이라는 위대한 힘을 두려워했고 그 두려움이 바로 이러한 신앙이 생겨난 배경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신앙은, 자신을 그런 위대한 힘의 일방적인 피해자 입장에서 그 힘의 은혜에 관여하는 적극적인 존재로 바꾼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근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그런 고대인을 미개하다며 경멸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근대의 인류가 지구 환경을 무참히 파괴함으로써 인간뿐 아니라 모
- 28 -
든 생물들이 생명에 위협을 받게 된 지금 오히려 그런 위대한 힘에 대한 겸손한 자세가 재인식되고 있습니다.
0 역사를 돌아보면, 인간이 문명을 이루고 역사를 만들기 시작한 때로부터 불과 4,5천 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또한 근대 합리주의가 등장한지도 불과 몇백 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람의 마음이 다시 종교로 돌아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흐름인지도 모릅니다.
■ 종교의 시대보다 ‘신화의 시대’로 돌아가라
0 제국주의가 기독교를 이용했다고 했는데, 사실 기독교가 탄생하기 이전의 세계에서는 종교에 의한 분규는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무력으로 주권을 빼앗지만 신앙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인과 이교도간의 결혼을 장려했으며 문제 발단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신앙은 지금처럼 배타적이지 않았습니다.
로마제국도 이민족의 종교에는 전혀 관계하지 않았고 로마의 신화는 그리스 신화의 신들과 일체화를 꾀하는 형태로 흡수되었습니다.
0 신화의 세계는 전체적으로 신과 인간이 서로 돕는 평온한 세계입니다. 신화 세계가 인간에 공통하는 욕구의 현상으로, 신과 인간이 공생하는 평온한 세계라면 지금 종교에 대한 욕구가 높아지고 있는 것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세계가 기독교나 이슬람교 같은 일신교적인 세계가 아니라 많은 신들을 포함하는 신화의 세계에 있지 않을까요?
■ 참을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불안이 종교를 소생시킨다.
0 지금 새삼 종교라니,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현대는 종교에 의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티베트 문제만 해도 달라이 라마라는 종교적인 중심이 있기 때문에 독립을 외치는 목소리가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중동전쟁도 종교적인 불관용이 장애가 되어 싸움을 종결 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 29 -
0 세계의 움직임과 종교는 왜 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을까요? 애초의 문제는 인간이 자기 속의 회로로는 자신을 안정시키기 어려워 타인의 승인을 필요로 하게 된 데 있습니다. 인간이 가진 존재로서의 불안 그것을 보충하는 존재로서의 ‘신’을 아주 오랜 옛날부터 필요로 해왔다는 것이 그것을 말해 줍니다. 한때 인류는 자신들이 만들어 낸 ‘과학’이 ‘신’을 대신해 자신들을 안정시켜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졌는데, 최근에는 그 과학이 지구환경을 치명적으로 위협하는 부메랑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 결과, 과학과 이성에 대한 신앙이 흔들리게 된 겁니다.
■ 암흑이 아니었다! - 재인식 되는 중세
■ ‘성(性)의 단속센터’로서의 중세 가톨릭교회
0 ‘서양 중세의 남과여’라는 책에 6세기부터 12세기에 걸쳐 편집된 ‘속지 규정서’에는 성행위에 대한 금지규정이 실려 있는데. 이 내용이 정말 놀랍습니다. 성행위의 상대는 결혼한 아내를 대상으로, 생리 중, 임신 중, 수유 중의 성 행위는 안 되고,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에도 안 됩니다. 또한 일요일, 금요일, 토요일에도 안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쯤 되면 ‘도대체 되는 날이 언제야!’하는 반문이 튀어나올 정도입니다.
이러한 수많은 허들을 넘고 겨우 마지막 질문인 “자녀를 갖고 싶나요?”에 이르러서 “네”라고 대답하면 그제야 겨우 “그럼 좋습니다!”하고 마지못해 허락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섹스를 하는데 있어 지켜야 할 금지 사항이 줄줄이 나와 있습니다. 애무는 안 됩니다. 깊은 키스도 안 됩니다. 오럴 섹스도 안 됩니다. 이상한 체위도 안 됩니다. 한 번뿐입니다. 즐기지 않도록 하세요.....
0 금지 사항이 너무도 많아서 이 계율을 정확히 지키면 도대체 섹스가 가능한 날이 1년에 며칠이나 될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실제로 이에 대해 조사한 학자가 있습니다. 장 루이 프랑드랭이라는 프랑스 학자인데 그의 연구에 의하면 1년에 44번, 즉 한 달에 서너 번 정도였다고 합니다.
- 30 -
이렇게 중세 교회는 섹스에 대해 허락하는 기간과 구체적인 방식까지 상세히 규정하는 것으로 사람들을 관리했는데, 그 까다로움은 도가 지나칠 정도였습니다.
■ 성직자가 가장 선정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
- ‘고해’라는 제도 -
0 성행위 외에 당시 사람들을 심하게 구속한 것이 ‘고해(告解)’의 의무였습니다. 고해는 자신이 범한 죄를 사제를 통해 신에게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행위입니다.
원래 고해는 평생에 한 번만 하는 것으로 교회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인데 실제로는 자신이 범한 죄가 주위에 알려져 있을 때만 하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고해를 하는 사람은 평생 낙인이 찍혀 고통을 당했습니다.
0 그런데 1215년 제4회 라테라노 공회에서 이 고해를 1년에 한 번 하는 것이 성인 남녀에게 의무화 되었습니다. 1215년에 의무화된 것은 이 비밀 형태의 고해입니다. 평생 한 번 할까 말까했던 고해를 1년에 한 번 이상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고해의 내용도 자연히 일상적인 것이 됩니다. 성적인 금지사항이 많았던 당시에 그런 유의 죄를 범했다는 고백이 많았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고해에는 비밀형식이었던 만큼 재미있는 일화도 많습니다.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지만 14세기 이탈리아 작가 보카치오(1313-1375)의 ‘데카메론’을 보면 사제가 고해를 듣고 흥분한 나머지 그 여성을 겁탈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중세의 교회는 ‘신에 대한 죄’라는 개념을 이용해 사람들의 성생활에 개입하고 최종적으로는 성을 단속하는 센터와 같은 존재가 되어갔습니다. 또한 그것으로 사람들이 범한 죄를 고백하게 하는 묘한 시스템을 만들어 ‘중세 세계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 육체를 지배함으로써 인간을 원하는 방향으로 통제했던 중세 기독교회
- 31 -
0 기독교에서는 아담과 이브가 지혜의 나무 열매를 먹고 난 뒤 알몸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다는 ‘원죄’의 사고방식과 함께 예수의 몸을 성스러운 것으로 숭배하는 사상이 있습니다. 후자의 전형이 미사에서 사제로부터 예수의 몸인 빵을, 그리고 예수의 피인 와인을 받는 ‘성체배령’이라는 의식에서 나타납니다.
당시 성직자들에게 ‘인생은 끝없는 금욕의 연속이었습니다. 깨끗한 것은 영혼일 뿐, 욕망과 분리할 수 없는 육체는 그 영혼의 작용을 방해하는 꺼림칙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육체는 영혼의 불쾌한 옷”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육체는 불길하고 꺼림칙하기 때문에 성스러운 교회가 그것을 조절해 신의 마음에 들게 해야 한다는 것이 중세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0 19세기 후반 프레드리히 니체(1844-1900)는 육체는 대지와 연결된 것으로 육체야말로 위대한 이성이라며 육체의 복권을 주장합니다. “신은 죽었다”라는 그의 말은 유명한데, 그가 이 말을 하기까지 중세의 육체 멸시에 바탕을 둔 도덕관은 중세 세계가 끝난 후에도 프로테스탄트에 의해 이어져 절대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장악한 육체에 대한 규정은 성행위에 그치지 않습니다. 식사예의, 조리법, 신에게 기도할 때 손 모으는 법과 자세까지, 이렇게 육체를 지배하는 것이 마음을 지배하는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 르네상스의 발단이 된 십자군 전쟁
0 십자군이 활약한 것은 11세기 말부터 2백여 년간으로, 이 사이에 이슬람으로부터의 ‘성지(예루살렘) 탈환’이라는 슬로건 하에 많은 유럽인들이 아라비아 세계로 파병되었습니다. 그들에 의해 유럽에 아라비아 문화가 일시에 몰려들어왔고, 그것이 르네상스의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0 고대 그리스 로마적인 이상으로 돌아가는 ‘고대의 재생’이 르네상스의 의미이자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대 그리스 로마적인 위대한 지혜가 당시의 유럽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고대세계의 뛰어난 지혜를 모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그곳을 중심으로 키워진 문화와 선현의 지혜를
- 32 -
정리한 다양한 서적은 유럽교회가 아닌 이슬람 문화권에 의해 계승되었기 때문이죠. 고대의 지혜가 십자군 운동을 계기로 아라비아의 문헌의 번역이라는 형태로 역수입된 것이 바로 12세기였습니다.
■ 중세 유럽을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은 연금술
0 아라비아로부터 유럽으로 들어온 것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유산만이 아닙니다. 이 시기에 유럽세계 전체를 완전히 뒤바꾸어놓는 굉장한 것이 들어옵니다. 바로 ‘연금술’입니다. 연금술에 대한 책은 아라비아에서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에 전해졌습니다.
금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연금술은 인간을 자극해 아라비아 세계에서도 많은 사람들을 욕망의 포로로 만들었습니다.
0 유럽에서 연금술에 가장 열광적으로 빠져든 사람은 금욕을 최우선으로 해야 할 수도사들이었습니다. 프란시스코회나 도미니카회도 결국에는 연금술에 관여한 수도사들에게 이단의 죄를 묻는 등 본격적으로 연금술을 금지하게 됩니다.
연금술은 그 기술로 금을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그 과정에서 다양한 물질이 혼합되고, 그 화학 변화들이 관찰되고 기록되면서 과학적 지식이 축적되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근대 과학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0 중세부터 근대로의 이행은 교회의 절대적인 지배가 1천 년 동안이나 계속되다가 갑자기 이탈리아 르네상스라는 커다란 꽃이 만개한 것으로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12세기경부터 각지에서 조금씩 작은 꽃들이 피기 시작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라는 커다란 꽃이 활짝 피어난 것입니다.
3. 이슬람에 대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던 것들
■ ‘이슬람=테러’라는 공포의 이미지가 만들어진 이유
0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일어난 동시다발 테러, 21세기가 시작되는 해
- 33 -
에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은 세계인들에게 새롭게 시작되는 1세기도 종교적인 충돌이 한층 격화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심어주었습니다. 비극적인 9·11의 영상이 전 세계에 보도되었고 그 영상을 본 많은 사람들은 ‘광신적인 이슬람교도에 의한 자폭테러’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0 무슬림은 꾸란을 매일 반복 소리 내어 읽어 어릴 때부터 그 가르침을 익힙니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음독에 의해 배운 것은 평생 지워지지 않습니다. 외울 수 있을 때까지 소리 내어 읽는 음독의 위력은 그야말로 대단하죠.
‘꾸란=신의 말씀’을 어릴 때부터 외우고 몸에 익히도록 하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무슬림은 모두 공격적이고 세계평화에 위협적’이라는 선입관은, 역사를 살펴보면 오히려 그들은 기독교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용적이고 평화 지향적이라는 것입니다.
■ 세계 문화의 최첨단을 이룩했던 이슬람 세계
0 근대 이전에는 서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세계보다 이슬람 세계가 압도적으로 뛰어난 문화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이슬람문화의 우위는 그리스 로마가 그 문명적 우위를 상실한 후부터 서양에 근대 문명이 생겨나기까지 약 1천년 가까이 지속되었습니다. 이슬람이 세계사에 등장하는 것은 대략 7세기경으로, 그 이후는 급속하게 힘을 키워 8세기에는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까지 포괄하는 광대한 이슬람제국을 건설합니다.
0 그동안(중세) 이슬람제국은 고대 지중해 문화, 그리tm 로마 문화,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에 축적된 지혜를 전부 흡수하여 발전시켰습니다. 사실상 유럽의 근대과학도 이슬람 문화의 유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슬람세계의 서적과 함께 유럽으로 빠르게 보급되어 근대화를 도운 것은 ‘아라비아 숫자’입니다. 그때까지 유럽에서 사용되던 로마숫자는 읽기와 쓰기가 불편하고 ‘0’이 없다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습니다.
0 ‘o'은 원래 인도의 발명품인데 그것이 먼저 이슬람권에 전해졌고, 다시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럽 근대 과학의 발전은 이슬람의 아라비아 숫자 없이는 성립할 수 없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
- 34 -
다. 흔히 르네상스의 3대 발명품으로 활판 인쇄, 나침반, 화약을 드는데, 나침반화 화약은 원래 중국의 발명품입니다. 그것이 이슬람 세계를 거쳐 유럽에 전해졌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유럽의 ‘발명품’이 아닌 유럽의 ‘개량품’이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활판인쇄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럽의 요한 구텐베르크(1397-1468)처럼 누가 언제 발명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가 발명하기 훨씬 이전부터 동양에서는 이미 활판인쇄가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이와 같이 세계사를 보면 선진적인 문화와 문명이 유럽이 아닌 동양의 이슬람 세계에 있었던 시대가 상당히 큰 무게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 무슬림에게 이슬람교는 공동체 그 자체다.
0 이슬람교는 세계적인 종교입니다. ‘이슬람 바로알기’에 의하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이슬람교도를 가진 나라는 중동이 아니라 인도네시아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슬람교에 대해 막연히 ‘중동의 아랍인이 믿는 종교’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데, 사실은 인종과 관계없이 전 세계에 두루 퍼져 있습니다.
0 이슬람교의 교의적인 차이는 그리스도를 신의 아들로 인정하느냐 아니냐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신의 아들이 아니라 모세처럼 성서에 등장하는 여러 예언자 가운데 하나이고, 무함마드가 최후이자 최고의 예언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이슬람교입니다. 원래 ‘알라’는 특정한 신의 이름이 아니라 영어로 말하면 ‘God' 즉 ’신‘이라는 의미의 일반명사입니다.
이슬람교와 기독교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에 의한 지배의 범위에 대한 차이입니다. 성스러운 세계와 속세로 나누었을 때 기독교는 성스러운 세계만을 담당하고, 속세 즉 경제활동이나 정치활동은 다른 권력이 담당합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교회가 모든 것을 지배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정신의 지배에서 오는 ‘모든 것’으로, 교황이 함께 존재했음을 봐도 알 수 있듯이 경제나 국정의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세속 권력인 왕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교회는 사회, 경제,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에는 그러한 기본 방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슬람은 다릅니다. 무슬림에게 있어 이슬람교는 정신을 구원하는 의미에서의 종교에 그치지 않고 ‘공동체 그 자체’입니다. 무슬림들에게는 종
- 35 -
교활동, 경제활동, 정치활동 모든 것이 이슬람교의 가르침에 따르는 형태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성스러운 세계와 속세를 나눈다는 발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슬람교의 세계는 일종의 가정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족은 생활을 함께하는 공동체로 경제, 교육, 그 외의 복잡한 역할을 하는 한 덩어리죠. 무슬림은 그 가족과 비슷한 하나의 커다란 ‘이슬람 공동체’라는 발상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슬람 공동체는 국가나 인종에 한정되지 않는 거대한 가정입니다.
0 무슬림에게는 ‘라마단’이라는 단식월이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는 ‘해’가 떠 있을 동안은 단식을 하는데 전 세계의 무슬림이 일제히 하는 행사입니다. ‘자신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전 세계의 모든 무슬림들이 똑같이 고통을 견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으로 그들의 일체감은 더욱 커지고 ‘가족성’은 강화됩니다. 인간은 기쁨보다는 고통을 나누는 것으로 그 유대가 더욱 공고해 집니다. 나라와 인종, 언어가 달라도 무슬림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공통의 계율을 통해 ‘공통의 정신’을 갖는 가족으로서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훨씬 이상으로 강한 연결고리가 됩니다.
■ 전 세계로 확산되는 이슬람세계
0 현재 이슬람교도는 13억 명, 기독교도는 17억 명이지만, 서구열강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민중저항의 하나로 무슬림은 확산 일로에 있습니다. 원래 동남아시아는 이슬람제국의 범주는 아니었습니다. 이 지역에 이슬람교가 확산된 배경에는 이슬람 상인의 활약이 있습니다.
0 무슬림은 무슬림 간의 평등을 우선시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상업세계에도 적용되는데, 장사를 하는 데 있어 매우 큰 이점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래서 13세기 이후 동남아시아의 상인들을 중심으로 무슬림으로 개종하는 사람이 급속히 증가해 현재와 같은 이슬람 국가로 발전했습니다. 현재는 인도네시아에 1억8천만 명, 파키스탄에 1억 3천만 명, 방글라데시에 1억 2천만 명, 인도에 1억 1천만 명의 이슬람교도가 있습니다. 이 숫자만 해도 5억 명이 넘
- 36 -
으니 대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형제 싸움
0 예루살렘은 단순한 영토 싸움으로 정리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종교상의 이유에서 절대 포기란 것이 인정될 수 없는 지역인 것이지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각각의 성지인 예루살렘은 일신교 3형제가 직접 대결하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이 ‘형제싸움’이 세계를 혼란으로 몰아넣는 싸움의 커다란 ‘불씨’가 되고 있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종교적인 나라입니다.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도 임신중절 문제가 종종 거론되곤 할 정도인데. 그것은 그들에게 신앙에 관한 문제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서는 대통령과 부통령이 성서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이 취임을 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문제인데, 아직껏 그런 기회가 없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0 국가의 정치적인 리더가 왜 성서에 손을 얹을까? 그것은 나라가 정한 법률에서 보장한 종교의 자유와 정확히 모순됩니다. 하지만 국민은 이 점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은 확고부동한 프로테스탄트 국가입니다.
이렇게 종교라는 관점에서 세계사를 보면 종교적 대립이 전쟁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장애가 되어 분쟁이 해결되지 않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 세계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될지, 그것은 종교 문제와 별개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 끝 -
2010. 11. 11.
- 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