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한국의 리더십, 선비를 말하다(2)

보해성산 2011. 5. 31.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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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리더십, 선비를 말하다(2)

                      - 정옥자 역사 에세이 -


■ 역사드라마와 역사의식


역사학자가 역사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평소에 역사드라마를 잘 보지도 않거니와 보고 싶지도 않다. 간혹 글을 쓰려고 일부러 보는 경우가 있는데, 뒤끝이 항상 개운하지 못하고 언짢은 기분이 되고 만다.

그런데 역사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회 과학을 하는 교수님도 거의 같은 기분을 이야기하면서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기분만 나쁜 것이 아니라 화가 치밀어 견디기 어렵다고 개탄하는 것을 보고 나의 역사 드라마 기피증이 역사학자로서의 오만이나 편견 때문만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역사드라마는 성군이 통치한 문물제도의 정비와 문화정치의 지향성 등 치세에 대해서는 너무 소홀하다. 사건의 연속인 난세를 그리기는 쉬운 일이다. 그러나 치세(治世)를 그리기 위해서는 작가나 피디, 그리고 출연자들은 물론 관련자 모두의 뛰어난 역사의식과 세련된 문화 감각이 필요하다. 우리가 치세를 살아보지 못했다고  치세를 그리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치세를 그리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그리는 이상향이 없기 때문이요, 꿈이 없기 때문이다. 난세일수록 치세를 그리워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정서다.

시청자가 좋아하리라 여겨 무엇을 위한 왕권이며 권력인지 분명히 밝히지도 못하면서 사극을 권력 투쟁의 장으로 그리거나 궁중 야사로 격하시키는 행위는 아무리 시청률이 절체절명의 과제라 하더라도 시청자를 우롱하고 방송의 공기(公器)로서의 역할을 망각한 몰지각한 행위다.


전통 사회에서도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왕과 비’의 주제인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은 2세기 반이 지난 숙종 때 가서야 노산군이 단종으로 복원(1698)되고 격살 당한 김종서가 영조 때에 복권(1746) 되었으니 무려 3세기나 걸렸다.

한 번 왜곡된 사실의 제자리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바로 말해 주는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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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이며 몇 백 년이 걸려서라도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고 올바른 역사의식 고취에 애썼던 조선 왕조 생명력의 원천을 확인하게 하는 대목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역사드라마가 제자리를 찾아 국민의 역사의식 제고에 한몫하고 희망을 심어 주어야 한다는 거창한 역할까지 담당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 역사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오도하는 행위는 삼가야 할 것이다. 역사드라마도 갈등과 투쟁의 이데올로기에서 탈피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  역사드라마의 위험성     


바야흐로 우리는 역사 드라마의 전성시대에 살고 있다. 몇 년 전부터 한국 고대 영웅들을 주제로 한 고대사 드라마들이 방송 3사를 완전히 장악했다.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 등...... 이렇게 고대사에 관심이 커지는 현상에 대해 역사학자로서 일말의 우려가 앞서는 것은 그 드라마들이 담고 있는 메시지의 위험성 때문일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삼국시대 이전 시기는 통일국가로 가는 이행기로 삼국 사이의 경쟁은 물론이려니와 중원에 이미 통일 국가를 세우고 앞서 가는 중국과의 투쟁 시대이자 패권시대임이 틀림없다. 이는 근대 이후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와 꼭 닮아 있어서 양자의 동질성을 확인하게 된다. 한 마디로 고대와 근현대는 패권의 시대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지금 불고 있는 역사드라마의 열풍은 우선 영화 ‘왕의 남자’의 성공에서 시작된 역사 영상물에 거는 기대의 산물로 볼 수 있다. ‘왕의 남자’는 실록에 나오는 광대 공길에 대한 단 한 줄의 기록을 바탕으로 연산군의 놀이 탐닉과 남색 성향이라는 역사적 개연성을 살려 대부분을 역사적 상상력으로 포장한 팩션(faction = fact + fiction)을 만들어 냈다.

이제 역사 영상물은 실증된 역사적 사실 위에 상상력에 의한 허구를 입히는 작업이라는 이전의 작업 형태를 뛰어넘었다. 역사적 사실의 실증보다 역사적 개연성을 얼마나 살리느냐가 문제의 핵심이 되었다. 사실(fact)이냐 허구(faction)냐를 따지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한 단계로 가고 있다.

그러니 자료의 부족으로 끊임없이 수정되고 다시 쓰여야 할 정도로 실증이 어려운 고대사를 드라마로 만드는 작업은 무한한 상상력을 가동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일 수 있을 것이다. 고대사의 영웅들을 주제로 한 역사 드라마들은 구체적으로는 중국의 동북공정에서 촉발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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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는 우리 땅’이라는 공통분모 위에서 그 땅을 호령하던 영웅들의 무용담을 펼쳐 보임으로써 한반도 내에서조차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의 답답한 현실에서 시청자들에게 심리적 탈출구를 열어 주는 효과는 있을 것이다.

이 드라마들이 가진 또 하나의 기조는 ‘민족주의’ 다. 민족주의는 애국심은 자극하지만 투쟁성과 배타성을 가져 온다. 그리고 고대사의 왜곡은 일본의 교과서 왜곡이나 중국의 동북공정을 정당화하는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다.


역사는 미래를 위한 것이다. 역사 영상물들이 역사적 사실 고증에서 자유로워지면 질수록 거기 담아내는 이데올로기나 메시지는 더욱 전진적이어야 한다. 우리의 책무는 제국주의를 극복하고 평화의 시대를 열어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역사드라마가 일시적 위안물로 전락하는 것을 경계한다. 패권주의와 영토 팽창주의, 호전성을 넘어 평화주의 휴머니즘, 조화의 미학 등 평화를 위한 역사드라마들이 호응 받을 날을 기다린다.


■ 전통적 가치의 추락 현상            


18세기 말 조선 사회의 격변기에 처해 있던 정조는 “문체는 세도(世道:세상을 다스리는 도리)를 반영한다”며 문체반정을 시도했다. 당대의 소설류인 패관 소품과 새롭게 등장한 신체문(新體文)의 영향으로 문체가 타락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순정한 문체로의 반정을 꾀하며 세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 한 것이다.

지금 우리는 문체보다 앞서 말의 왜곡과 그에 따른 전통적 가치의 추락 현상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 사회는 전통 시대에서 근대로의 자연스러운 진입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전통이 왜곡되거나 평가 절하되어 자기 비하 의식까지 형성되었다. 그 결과 우리의 정체성마저 손상받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현상은 여러 측면에서 확인되지만 중요한 전통용어가 왜곡되어 사용되는 것도 그 징후 중 하나다.

전통 시대 핵심 가치였던 의리(義理)는 깡패 용어로, 명분(名分)은 핑계로 전락한 느낌이 짙다. 사기(士氣)는 군대 용어로 전환되고, 시비(是非)는 싸움으로 변질 됐으며, 선생(先生)은 길 가는 사람의 호칭이 되어 버렸다.


조선 시대는 의리와 명분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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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살기 위해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인 의리와 이름에 걸맞는 분수라 할 명분은 모든 일의 기준이자 잣대였다. 의리를 모르는 사람은 사람의 범주에서 탈락시켜 금수로 간주되었다. 사람이면 의리를 알아야 하고 또 그것을 실천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또 명분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면 사대부 사회에서 살아남기 어려웠다.

‘왕의 남자’의 주인공인 광대 공길이 연산군에게 ‘군군(君君) 신신(臣臣)’을 역설한 사실이 실록에 있다. 우리가 조선 시대의 천인 신분으로 알고 있는 광대도 임금과 신하의 명분을 따지고 바른 말을 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전통은 지금 우리의 삶에 맥맥하게 살아남아 있음에도 가끔 핑곗거리를 찾으면서 “무슨 명분을 만들어 보라”는 말을 한다.

사기는 원래 선비의 기개를 뜻한다. 선비의 시대인 조선 시대에 선비의 기개는 나라를 지키는 원기(元氣)라고도 했을 만큼 중요하게 여겼다. 사기가 떨어지면 나라의 기운이 스러지는 것으로 인식될 정도였다. 현대 사회에서 사기를 지식인의 기개로 쓰는 일은 거의 없다. 다만 군대에서 사기는 중요한 용어로 쓰이고 있으니, 이는 가치의 전도라기보다는 쓰임새의 전환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시비는 잘잘못을 가리는 행위다. 시비를 잘 가려야 사리에 밝은 사람으로  평가받고 경우가 밝은 사람으로 대접 받았다. 잘잘못을 판단하는 잣대는 올바르고 분명한 가치관에서 비롯되므로 결국 인간의 품질 문제로 귀착되었다. 이제 시비는 싸움으로 변질되었으니 “웬 시비야?”하면 이는 “왜 싸움을 거느냐?”로 되었다.

선생은 전통 시대 존경스러운 스승에게만 쓰던 용어다. 인생의 사표가 되고 학문적 정통성의 매개가 되어 줄 뿐 아니라 학문적 난제를 깨우쳐 준 스승만이 선생으로 존칭되었다. 평생 선생 없이 홀로 선 학자도 많고 운이 좋을 경우 선생을 둘씩 섬긴 사람도 있었다. 천자문이나 기본 교과서를 가르친 이는 선생의 반열에 든 경우가 드물다. 학문적 도통(道統)에 관련되고 혼자서는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학문적 성장 과정의 과제를 깨우쳐 준 사람이 선생이기 때문에 하루 사사하고 선생으로 받든 예도 있다.


이제 선생은 길 가는 사람 누구에게나 쓰는 통칭어가 되었다. 대학에서는 교수님이라 부르지 않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기분 나빠하는 교수도 있다니 선생이란 칭호의 추락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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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현상이 우리 사회의 혼란을 부추기는 요인 중의 하나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용어를 제대로 사용하는 기틀부터 세우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정체성을 세우고 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키우는데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모름지기 말은 정확하고 정직하게 해야 함은 물론이려니와 용어 역시 제자리를 찾아 써야 작금의 혼란이 조금이나마 극복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정명(正名:이름을 바르게 함) 사상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 조선의 왕릉, 동구릉에 대한 단상         


1950년대 말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은 십리 정도 걸어 다니는 것은 보통이었다. 떡장거리(회기동)에서 버스를 내려 이문동을 거쳐 천장산을 관통하는 고갯길 동쪽 자락에 조선 21대 경종의 의릉이 있었다. 능 앞엔 재실이 있고 그 앞에 낙락장송 대여섯 그루가 능지기처럼 서 있는 곳 그곳에서 나는 여름날에 땀을 들이고 겨울엔 양지바른 잔디에서 해바라기를 했다.

훗날 문화재 위원이 되어 의릉을 다시 찾았다. 고갯길은 간데없이 집들이 꽉 들어차고 산천이 변한 것이야 어쩌랴만, 능 앞에 연못을 파고 향나무를 심어 일본식 정원과 같은 모양새에 바비큐 흔적까지 발견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곳에 옛 권력기관이 자리 잡고 있다가 나간 직후였다.

우리는 조선 왕조와 그 문화에 대해 평가 절하 하는 경향이 있다. 식민 사관에 의해 지속적으로 세뇌 받은 결과였다. 그러한 왕조의 왕이 잠들어 있는 능을 존중할 필요가 없고 좀 훼손한들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권력은 유한하고 사람들의 생각은 변한다는데 생각이 못 미쳤는지도 모른다. 조선 왕조에 대해 이야기하면 왕조를 재건하려는 복벽주의(復辟主義)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조선 왕조는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가장 가까운 전통시대다. 일제에 의해 단절되어 상당 부분 식민 사관에 의해 왜곡되어 있지만 싫든 좋든 우리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이 시대에 대한 올바른 연구와 해석, 평가 작업은 전통의 재구성과 거기 따른 우리의 정체성과 직결되어 있다. 그 왕조의 유산인 왕릉과 같은 문화재도 그런 측면에서 의미 있는 것이지 왕조에 대한 향수나 복벽주의 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궁궐이 왕의 양택이라면 왕릉은 왕의 음택이다. 양택이든 음택이든 왕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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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간 흔적이므로 그 시대 연구에 중요한 자료임이 틀림없다. 양택인 궁궐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관심과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음택인 왕릉은 별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사실 왕릉만큼 그 시대를 총체적으로 보여 주는 문화재도 드물다. 왕릉의 주인인 왕들의 일대기는 정치사요, 그 조성 경위는 당시의 토목 공사 수준과 조경·건축 기술을 보여 준다. 또 왕릉의 자연환경과 입지 조건은 전통 지리학의 실체와 ‘풍수’라고  하여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추구하던 친환경의 자연관을 확인할 수 있는 자취다. 나아가 거기 설비되어 있는 곡장·병풍석·난간석·문인석·무인석·망주석·장명등·혼유석 등 석물들은 우리 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 진경문화(眞景文化)의 전조(前兆)    


어느 해 학생들과 봄 답사를 다녀왔다. 아직은 이른 봄 꽃 피는 계절도 아니고 단풍지는 가을이 아니라서 울긋불긋 수놓은 듯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이른 봄의 강산은 그 나름의 아름다움과 청량감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나는 삼천리금수강산이라는 말이 과연 언제부터 생겨났는지 오랫동안 궁금했다. 그 고민은 최근의 진경시대 연구에서 풀렸다. 왜란과 호란을 겪은 조선 후기 사회가 그 전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상처받은 자부심을 회복하기 위해 택한 방법의 하나가 산천경개를 찾아 나선 길 밟기였다. 거기서 생겨난 국토에 대한 사랑이 진경산수화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러한 문화 현상은 조선이 양란의 후유증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도덕적 문화국가로서의 방향성을 세우고 국민적 자부심을 고취한 결과였다. 내 문화가 최고라는 문화 자존의 의식은 문화와 예술, 도자기나 목가구, 건축 등 여러 문물에  조선 고유의 색체를 이루어 냈다.

진경산수화는 우리의 아름다운 산하를 바위산의 표현에 맞는 필법을 구사해 그려낸 사생화인바, 그림 속에는 반드시 인물까지 배치해 조선의 의관 문물을 표현했다. 이러한 경향은 한 단계 발전해 진경 풍속화로 진전되었다. 이제 아름다운 산이나 시내뿐만 아니라 웃통을 벗어버리고 망치질 하는 대장장이,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씨름하는 씨름꾼들, 단옷날 냇물에서 머리감는 여인네들을 바위 뒤에서 훔쳐보는 중, 달밤에 만나 사랑을 속삭이는 남녀 등 그전 같으면 촌스럽다고 여겼음 직한 그림의 소재들이 화원 화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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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손에서 자랑스러운 우리의 생활문화로 그려졌던 것이다. 조선 전기에 중국의 화보를 모방해 산천도 중국 산천이요, 사람도 중국사람, 모자도 중국 것을 그렸던 구태를 완전히 벗어났던 것이다.

최근 우리사회에도 이와 비슷한 진경 문화의 전조들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답사 동아리들의 활약은 눈부신 바 있었다. 아름다운 풍광뿐만 아니라 문화유산과 문화 유적지에 대한 주제별 답사를 통해 우리 전통문화의 정수에 접할 기회를 마련했다. 이는 문화 유산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났고 그 애정과 애착은 자기 문회에 대한 자긍심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1세기에 걸쳐 제국주의에 오염된 우리의 의식 구조를 바꾸어 놓고 전통문화에 대한 편견을 걷어 내는 구실을 했다.


영화든 소설이든 연극이든 예술 작품이든 모방의 시대가 가고 창조의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6·25 직후의 빈곤한 삶도 아름답고 감동적인 영화의 소재가 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가난 열등감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징조다. 이는 조선 후기 사회가 1세기에 걸쳐 이루어 낸 것을 우리가 반 세기 만에 이룩한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 주체도 통치자들보다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라 생각된다.

모방과 밖으로만 향하던 지난 세월을 반성하고 민족 정체성을 분명히 하여 새로운 창조의 시대를 여는 길만이 생존의 길이다. 앞으로 다가오는 미래에는 무력이나 경제력보다 문화 능력과 도덕성의 비중이 높아질 것이다. 전통 시대에서 이룩한 문화 능력을 발굴해 미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자양분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지금의 제반 문화 현상은 조선 후기 18세기 진경문화의 전조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3백 년마다 문예부흥을 이루어 왔다. 15세기 세종대에 건실한 문화를 이루었고, 18세기 영·정조대에 진경 문화를, 그로부터 3백 년이 지난 지금 문예부흥이 일어날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느낌이다. 우리 모두 그 싹을 고이 키워 우람한 나무로 자라도록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다.


■ 한류의 역사 문화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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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상하이에선 온돌이 유행이라고 한다. 가장 추운 1월의 평균 기온이 3.3도 정도여서, 상하이 사람들은 옷을 여러 겹 껴입거나 두꺼운 이불을 덮고 그럭저럭 겨울을 넘겼다. 상하이에 사는 외국인들은 전기난로에 의지해 겨울을 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습기 진 추위를 견디는 것은 아주 고약한 일이었다. 그런데 최근 10년간 상하이에 진출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상하이의 아파트를 온돌로 꾸며 사는 것을 보고 중국인들이나 외국인들이 온돌의 매력에 푹 빠져 온돌을 활용하는 예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한류인 셈이다.

축구만 해도 1880년대 육영공원에서 교사로 있던 서양 선교사들이 양반 자제들에게 좋은 운동이라고 권하자 그렇게 힘든 일을 왜 하느냐고 반문하면서 데리고 온 시종들에게 대신하라고 시켰다는 웃지 못할 실화가 전한다. 이런 문화 전통을 가진 우리나라가 이제는 축구 4강까지 오르고 ‘붉은 악마’라는 독특한 응원 문화까지 만들어 냈다. 


최근 어느 학술 발표회에서 일본의 한 학자가 발표한 ‘겨울연가로 열린 세계와 닫힌 세계’라는 연구주제에서 일본인이 열광하는 이유로 한국 문화의 특징인 지성, 예절, 로멘티시즘이 깔렸다고 지적했다. 이는 정이나 신체에 기반을 두는 일본의 드라마나 소설과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양질의 로멘티시즘은 남녀 간의 사랑의 한계를 넘어 변함없는 감정을 보여 주면서 강고하고 변하지 않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런 특징들은 다름 아닌 조선 시대 소설이나 시에 나타나는 특색과 가까운데, 김시습의 ‘금오신화’ 김만중의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그리고 ‘춘향전’ ‘심청전’ 등이 하나같이 지성과 예절, 퇴색하지 않는 로멘티시즘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성이란 뛰어나고 질 좋은 로멘티시즘일 뿐이라고 결론지으며 그 전통을 이은 ‘겨울연가’가 성공을 거둔 이유를 전통문화에서 찾았다. 한국인들에게는 너무 자연스럽고 익숙하여 보이지 않는 부분을 외국인이기 때문에 볼 수 있었지 않나 싶다.


이에 비해 신한류로 규정되는 ‘대장금’은 시간적·공간적 양 측면에서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중국의 10-20대 젊은이들, 일본의 40-50대 여성 등 특정 국가의 특정 세대를 중심으로 유행했던 이전의 한류 드라마나 음악·영화와 달리 ‘대장금’은 동아시아 전역에서 세대에 상관없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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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고 있으며 그 바깥 세계로까지 뻗어 나갈 기세다. 미국의 아시아계 사람들에게도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는 보도다. ‘대장금’은 전통문화에 기반을 둔 역사 드라마로, 동아시아 사람들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한국의 전통 음식과 옷, 전통 의술 등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점은 세계성의 확보를 뜻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일본에서의 한류는 이번이 세 번째 큰 파도다. 첫 번째는 4-5세기경 백제 문화의 전파다. 백제는 중국 남조와 활발한 교류를 통해 선진 문화를 받아들여 세련되고 수준 높은 문화를 발전시켰다. 또한 서해를 중심으로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중계 무역의 기지가 되었다. 일본 말에 ‘구다라나이’의 직역은 ‘백제 것이 아니다’라는 것으로 ‘시시하다’, ‘재미없다’,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말의 원류가 형성된 고대 동아시아에서 백제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두 번째 한류는 조선시대 통신사다. 임진왜란 후 열두 차례 통신사가 파견되었는데, 3백-5백 명이 5개월에서 2년에 걸쳐 도일했던 통신사행은 뒤에 갈수록 정치·외교적 측면보다 문화 교류의 성격이 커졌다. 통신사 행렬이 지나가는 곳마다 일본 학자들의 방문이 줄을 이었으며 시문·서예에 대한 요구가 폭주했다. 방일 3-4개월 동안 1천 여명의 일본 문인·학자들과 만나고 2천여 편의 시를 써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일본에 불었던 대단한 한류 열풍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은 임진, 병자 두 번의 전쟁 후유증을 극복하여 국가 재건에 성공했고 동아시아 문화 중심국임을 자처하고 있었다. 17세기 국가 재건기를 거치면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 변방의식을 탈피했고 그 자부심을 토대로 ‘진경문화’라는 조선 고유문화를 창달했으며 문화국가로서 확고한 위상을 정립해 일본에도 문화전파의 사도로 활약한 것이다. 그리하여 2세기 이상 동아시아를 평화 체제로 이끄는 데 한몫을 담당했다.

전통 시대에 이어 세 번째 부는 지금의 한류는 대중문화의 형태를 띠고 있다. 한류의 중심부에 있는 영화나 드라마는 과학 기술 없이는 불가능한 분야다. 이는 우리가 서양을 배우기 시작한 지 1세기가 지난 지금에 와서야 모방의 단계에서 창조의 단계로 진입한 것으로 이해된다.

서양 것을 흉내 내는 과정을 거쳐 진지하게 학습하고 도전한 결과, 창조 단계로 진입해 빠른 결과성을 가진 대중문화에서 우선으로 결실을 보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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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지금까지는 대중문화에 머물렀지만, 앞으로는 고차원의 철학과 메시지, 역사의식 등 고급문화를 담아내야 하는 고민이 요청되는 시점이다.

창조의 새 물결이 출렁거리고 있다. 지식 기반 사회였던 전통시대 조선은 평화 이념에 충실했고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인 의리에 강하면서도 인정을 배제하지 않아 이성과 감성이 잘 조화된 균형 잡힌 인간형을 추구했다. 이러한 선조들의 전통 문화는 고급문화 창조의 토대가 될 수 있다. 거기에 일제 강점의 망국경험과 6·25 전쟁으로 말미암은 동족상잔의 아픔 등 현대사에서 체험한 고통과 아픔을 역사의식으로 승화시킨 한국적 특수성이 가미될 때 한류는 세계적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한한 소재를 발굴,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도래한 현대의 지식기반 사회에서 우리의 역사 전통은 든든한 뿌리가 되어 줄 것이다.


■ 해피 엔딩의 미학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아름답게 떠오르는 추억은 유년의 뜰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그중에서도 어른들에게 떼를 쓰다시피 하여 즐겨 듣던 옛날이야기들은 아직도 그 줄거리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이야기들 대부분이 조선 후기 야담 아니면 ‘춘향전’이니 ‘흥부전’이니 ‘장화홍련전’이니 ‘심청전’이니 하여 조선 후기 소설들을 요약한 것이었다. 그 옛날이야기들이야말로 내 유년의 뜰을 풍요롭게 가꾼 영양제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의 특징은 하나같이 해피 엔딩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달콤한 해피 엔딩에 대한 환상은 상급학교에 가면서 무참하게 깨져 나갔다. 현대 소설들은 해피 엔딩하는 일이 드물고 더구나 서구의 문학 작품들은 비극적인 결말로 가득했다.

‘폭풍의 언덕’ ‘제인 에어’ 등 브론테 자매의 소설들을 읽었을 때는 그 비장미에 고통스러웠고 그리스 신화의 비극에 뿌리를 둔  서구 문학의 특징은 불행한 결말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대학의 문학 평론 강의에서 우리 고전 소설의 특징으로 권선징악(勸善懲惡)과 해피 엔딩을 들고, 이야말로 전근대적이고 유치하다는 해석에는 아연했다.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하는 권선징악, 서로 돕고 살아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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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부상조의 정신은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인간 사회에서 변치 않는 미덕이라고 믿고 있던 나에게 충격이었다. 서구적 잣대를 어디에나 들이대며 스스로를 비하하던 풍조가 급기야 문학 평론의 장에도 파고들었던 것이다.

더구나 ‘고통스러운 바다’ 고해(苦海)로 표현되는 세상살이에서 끊임없이 덮쳐 오는 파도처럼 환난과 걱정꺼리를 이겨내고 끝내 유종의 미를 거두거나 가정의 평화를 이루어 낸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그 나름의 영웅들이므로 행복한 결말은 당연한 보상이 아닌가 싶은데 유치하다니…….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그 시대를 상징하는 캐릭터들이고 그 작품들이 가진 의미도 그 시대를 표현하는 것일지니 결국 현대 문학 입장에서 바라본 조선 시대는 유치하다는 것인가 하는 엉뚱한 생각마저 들었다.


이 세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는 유교적 세계관 속에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꿈꾸던 조선 후기에 농촌 공동체 사회를 배경으로 권선징악과 해피 엔딩을 특징으로 하는 문학 작품들이 많이 나온 것은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조선 후기 사회는 평화와 안정의 기조 위에 모든 구성원들은 비록 신분적 차별은 있지만 크게 볼 때는 더불어 함께하는 대동 사회를 꿈꾸었다. 평화는 국가 간은 물론 개인의 삶에도 최고 가치가 되었다. 문학 작품들이 한결같이 행복한 결말을 선택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서구의 비극이 교훈을 위해서 생겨났다면 권선징악의 해피 엔딩을 특징으로 하는 우리 고전 소설 역시 교훈적 의미가 강하다. 똑같이 교훈적이면서도 이렇게 다른 것은 결국 문화의 차이이자 세계관이나 가치관의 차이일 터이다. 서구의 비극이 원죄 의식과 천국은 저세상에만 있다고 믿는 기독교적 세계관의 표출이라면, 이 세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보는 유교의 현세적 입장이 해피 엔딩의 동인이 아닐까?

이제 세계는 평화와 안정을 갈구하고 있다. 전쟁으로 지고 새는 제국주의를 역겨워하고 경쟁의 논리에도 지쳐 있다. 평화의 시대를 위해 재미는 덜하더라도 해피 엔딩의 읽을거리와 영상물들이 쏟아져 나오기를 고대한다. 비록 촌스럽더라도 아들 딸 낳고 잘 살다가 죽었다는 행복한 결말의 드라마를 보고 긴 안도의 한숨을 쉬고 미소 지으며 잠자리에 들고 싶다.


■ 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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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고창신(法古創新)’은 18세기 선각자 박지원(1737-1805)이 한 말이다. 18세기는 조선이 고유문화를 창달하여 문화 국가로서 전성기를 구가한 시대다. 조선은 중기에 양난을 겪고 17세기에 전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국가 체제를 재건했다. 지식에 기반을 둔 문화국가인 조선은 명이 멸망하고 청이 무력으로 중원을 장악한 현실에서 유교 문화의 중심은 조선이라는 인식 아래 동아시아의 문화 중심국이라는 기치를 높이 세웠다.

평화적인 국제질서를 무너뜨린 청나라에 복수설치하겠다는 대청복수론인 북벌론을 국가 대의로 설정하여 국민 단합을 꾀하였다. 현실적인 위협 대상인 청에 대한 것이기에 위험을 무릅쓴 것이었지만, 상처받은 국민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주적인 청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적극적인 국가 방위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유교 문명의 중심은 조선으로 이동하였다는 조선 후기 사회의 조선 중화사상은 조선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각성시키고 그 결과는 조선 고유문화의 창달로 결실을 보았으니 18세기 진경 문화의 성취가 그것이다. 숙종-영조-정조로 이어지는 군사(君師)들은 스승이자 임금인 특별한 존재로서 그 문화를 이끈 견인차의 구실을 충실히 하였다.

달도 차면 기울고 꽃도 만개하면 시들듯이 이 문화의 중심에 있던 박지원은 선조들의 신념이었던 북벌론에 이의를 제기하고 북학론을 제창하고 나섰다. 청은 더는 적대시할 대상이 아니라 배워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조선 고유문화 창달기의 끝자락에서 이제는 세계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청나라에 연행사로 다녀온 후의 선각자다운 주장이었다.

박지원이 논어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을 몰라서 ‘법고창신’이란 말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옛것을 익히고 나아가 새로운 것을 안다는 ‘온고이지신’보다 적극적인 의미의 ‘법고창신’이라는 말에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자 하는 의도가 감지된다. 또한 전자가 옛 것을 알아야 새로운 것에 대한 분별력이 생긴다는 의미라면 후자는 옛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 역사와 정체성 그리고 자부심         


일제 강점기에 우리 선조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우리말과 우리 역사는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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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魂)이고 나라는 백(魄)이라고 혼백(魂魄)의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비록 일시적으로 ‘백’이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혼’만 살아 있으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고 역설했다. 말은 일상생활에 늘 쓰는 것이므로 일제도 어쩔 수 없었지만, 역사만은 식민 사관을 조작해 우리 역사를 만신창이로 만들기에 혈안이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역사를 우리 스스로 비하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던 선조는 우리 역사를 혼의 일부로 끝까지 놓지 않았으며 결국 광복을 쟁취했다.


일제가 퍼트린 식민 사관 중 하나가 당쟁론이다. 조선 왕조가 당쟁만 하다가 망했다는 것이다. 지금 학계는 당쟁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다 짚어 내고 그 역사성을 시간에 따라 밝혀냈다. 그럼에도 나이 든 분들은 식민 사관의 당쟁론을 배웠고 그대로 기억하면서 우리역사에 대해 지겹다는 혐오감을 갖고 있다.

이는 일차적으로 그 세대 역사 교육의 문제지만 일회성의 학교 교육에만 안주하고 평생 교육과 독서에 힘쓰지 않은 개인에게도 책임이 있다. 장관까지 지낸 분의 입에서 ‘이조(이씨들의 왕조라는 말로 백성과 조선 왕실을 이간시키기 위해 일제가 만든 용어)’라는 말이 거침없이 나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최근 필자는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에 초빙되어 4주 동안 강의하고 마지막 한 주 동안 토론했다. 주제는 ‘법고창신의 길, 지식 기반 문화국가 조선’이었다. 이 강의에서 제국주의적 시각으로 난도질당한 조선 왕조를 문치주의(文治主義)라는 시각에서 지식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던 문화 국가로 그 역사성을 재조명 했다.

그런데 청중들의 반응은 충격이었다. 제일 추운 때 연휴가 겹친 토요일 오후3시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2시간가량 진행된 강의에서 좌석이 꽉 차고 강당 밖의 영상으로 보는 좌석도 모자라서 서서 듣는 이들까지 있었다고 한다. 한 달 이상 혹한의 말씨에도 이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시는 분들의 관심은 매우 뜨거웠다. 평생교육에 대한 열기를 절감했다.

사회 교육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고조되고 있는데 학교 교육은 오히려 위축되고 있다면 말이 안 된다. 선조가 ‘혼’의 일부라고 했던 우리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면 결국 얼빠진 한국인을 양산하는 셈이다. 제대로 된 역사 교과서를 만들어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 주어야 하는 이때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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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교과를 축소한다면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다. 한국인으로서 정체성과 자부심 없이 무엇으로 정신 무장을 하고 어떻게 세계화의 거센 파도를 넘을 수 있겠는가?      


■ 정적의 약방문도 믿는 정치


예송 논쟁에서 남인의 영수인 미수 허목과 산림 출신의 우암 송시열은 개인의 영역을 넘어 붕당의 대표로서 치열한 정치 투쟁을 했다.

이들의 치열성은 어찌 보면 자신과 상대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것을 증빙할 만한 사건을 들어보자.

송시열이 중병에 걸려 백약이 무효하다는 소문이 났다. 이에 도가적 양생술을 익힌 바 있는 허목은 약방문을 써 보냈다. 당시 식자들은 대부분 기본적인 약 처방을 교양으로 했지만 허목 같이 깊은 경지에 이른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그 약방문에 비상이 들어 있었다. 비상이 맹독임을 누가 모르랴? 주변의 만류에도 송시열은 허목을 믿고 그 약방문을 사용한 약을 먹고 병이 나았다. 병세가 위중할수록 소량의 비상이 특효약임은 상식이지만, 정적의 약 처방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평소 상대에 대한 신뢰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울러 송시열의 그릇을 알아볼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목숨까지도 믿음에 거는 사회, 그러한 인물을 길러낸 사회, 신뢰에 기반을 둔 정치 등 오늘날의 우리가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이 그때엔 가능했던 것이다. 송시열은 결국 1689년 기사환국 때 83세의 고령으로 사약을 받고 삶을 마감했다. 비록 그는 정쟁으로 희생되었지만 그의 담대한 기상과 신념의 정치는 큰 발자취를 남겼다.        


■ 실학이란 무엇인가?


실학(實學)이라는 말은 전통시대 동양 각국에서 사용된 보편적인 용어다. 나라마다 시대마다 절실하게 요청되는 학문이 있는바, 이를 실학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선 고려 말 폐단을 드러낸 불교에 대응해 새로운 시대의 학문으로 부상하고 있던 성리학을 실학이라 했다.

조선 초에는 창업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외교 관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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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화하기 위해 문장력이 절실하게 요청되었으므로 사장지학(詞章之學)이 실학으로 인식되었다. 조선 중기에 이르면 화려한 문사를 나열하는 사장지학이 허학(虛學)으로 간주되면서 경전의 원리를 파악하여 실천하려는 경학이 실학이 되었다. 일면 도학(道學)으로 불리는 의리지학(義理之學)이 그 핵심으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원칙을 탐구하는 것이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여당의 역할을 하게 된 서인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조선 성리학의 강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안으로는 예치(禮治), 밖으로는 북벌론(北伐論)을 내세우고 의리지학을 강화하는 노선으로 나아갔다. 예를 세워 사회정의를 구현하겠다는 것이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치욕을 안겨 준 청나라를 쳐서 복수설치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야당의 역할을 한 근기 남인은 허목을 중심으로 원시 유학인 육경학(六經學)을 중심 연구 테마로 설정하고 여기에서 자신들의 학문적 연원을 찾아 정체성을 세우려는 경향을 보였다. 이 고학적(古學的) 학풍은 조선 성리학의 정통성을 확보해 가고 있는 서인에 대한 비판이자 학문적 탈출구의 모색이었다.

이 두 노선은 예가 정치 문제화된 예송에서 분명하게 그 차이를 드러냈다. 서인은 조선의 예제(禮制)에 근거하여 신권 강화의 태도를 보인 반면, 남인은 고례(古禮)에 입각한 왕권 강화의 태도를 보였다.


18세기 진경 문화로 불리는 조선 고유문화의 창출은 조선 성리학을 시대사상으로 하여 조선이 문화 중심국이라는 조선 중화주의를 뿌리로 했다. 17세기 명·청의 교체로 국제 질서가 뒤바뀐 상황에서 조선이야말로 명의 유교 문화를 계승한 동아시아 정통 문화국이라 자부하면서 변방의식을 탈피한 결과였다.

허목을 사숙한 이익은 농촌에서 생활하면서 토지 개혁론 및 지방 행정 제도에 대한 비판을 기저로 한 학파를 형성했다. 남인학파로서 중농학파로 불리기도 하는 이 학단(學團)은 경세치용 학파로 불리기도 한다.

조선 중화 사상이 시대정신의 몫을 다하자 이에 대한 반성이 일어났다. 이미 문화 국가로 탈바꿈한 청의 문물을 배워서 문화 자존 의식에 묻혀 있는 조선 사회의 낙후성을 벗어나고자 하는 북학 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집권 여당인 노론의 젊은이들로 구성된 북학파는 부조(父祖)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북벌론을 뒤집는 급진적 성격으로 공업과 상업의 진흥 등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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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과 관련된 현안에 관심을 보이면서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자 했다. 홍대용, 박지원 등이 중심이 된 노론 북학파는 이용후생 학파로 불리기도 한다.

19세기 초 학문적 성숙을 한 북학이 본격화하여 김정희를 중심으로 실사구시 학파가 성립되었다. ‘실사(實事)에서 진리를 구한다’는 명제 아래 금석학이라는 방법론으로 고증학을 발달시켰다. 이들에 이르러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이 제기되었다. 한학(漢學)으로 대변되는 신학문, 즉 고증학과 송학(宋學)으로 대변되는 조선 성리학의 의리지학은 동전의 안팎같이 분리할 수 없으므로 함께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은 바로 이런 새 학문의 경향을 통틀어서 범주화한 것이다. 암울한 일제 강점기에 우리 역사에서 무엇인가 이끌어 내어 조명하고자 했던 국학 연구자들에 의해 실학은 역사적 실체로서 자리매김했지만, 조선 성리학과 결별한 학파로 오해되어 실학 연구에 지장을 가져왔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실학’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 대한제국에 대한 재조명


대한민국의 국호가 대한제국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학문적 설명이 없어도 그 유사성만으로 충분하다. ‘제(帝)’ 자를 ‘민(民)’자로 바꾸어 군주 주권의 제국에서 국민 주권의 민국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간단한 작업이지만 민주주의의 뜻까지 담아 놓았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만든 나라이름이다. 광복 후 온갖 어려움 끝에 1948년 정부를 수립하고 대한민국의 국호를 계승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지난 시절 식민 사관으로 점철된 역사 이해에서 대한제국은 터무니없이 평가 절하되었고, 고종 황제는 나라를 잃은 무능한 지도자로만 단죄되었다. 그러나 최근 여러 자료가 발굴되면서 대한 제국과 고종 황제에 대한 재평가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국내 자료로는 의궤(儀軌) 자료, 예를 들면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된 고종대례의궤 등을 통해 대한 제국의 실상에 더욱 가깝게 접근하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국외 자료로는 고종 황제가 세계 열강과 연결해 문제 해결을 도모한 자료, 예를 들면 1905년 을사늑약의 부당함은 알리려 독일 황제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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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낸 친서의 발굴을 들 수 있다.

1873년 친정을 시작한 고종은 대원군의 쇄국 정책이 시의성을 상실했다고 판단해 개화 정책으로 선회했다. 여기에는 명성황후도 한 몫을 했다. 이후 개화 정권은 개항을 단행하고 근대 문물의 수용을 위해 1880년대 개화 정책을 폈다. 이른바 개화파가 추진했다고 알려진 초기 개화 운동의 배후에는 고종 황제와  명성 황후가 있었다.

당시 개화파들은 대부분 20대였고 김옥균만 30대였다. 아무리 격변기였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연소했고, 예민한 개화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지위에 있지도 않았으니, 고종이나 명성 황후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초기 개화 운동은 일본 공사가 막후에서 작용한 1884년의 갑신정변으로 좌절되었다.


일본은 조선을 도모하기 위해 우선 청나라와 조선을 떼어 놓아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독립’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부추겼다. 그리고 열강의 침탈과 일본의 책동에 맞서 이이제이(以夷制夷)방식의 외교력을 발휘하던 명성 황후를 시해했다.

이러한 국가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조선의 국력을 마지막으로 응집해 탄생시킨 것이 대한 제국이다. 국격을 높여 난국을 헤쳐 나가자는 것이었다. 연호를 광무(光武0로 한 것도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문(文)을 우선하는 정치를 지향하던 나라가 이제 바야흐로 무(武)의 가치를 인정하고 무를 빛내겠다는 연호를 채택한 것이다.

대한 제국에 대한 재조명은 이제 시작 단계다. 앞으로의 연구는 제국이라 칭하게 된 사상적인 배경 연구로, 조선 후기 조선 중화사상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 또한 대한 제국이 내세운 구본신참(舊本新參 : 옛 것을 근본으로 삼고 새것을 참고한다.)의 이념을 공감하던 대한 제국의 지적 기반에 대한 연구도 심층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 참을 수 없는 역사의 가벼움


기원전 전한 시대에 살다 간 사마천은 불후의 역사서 ‘사기’를 남겼다. 그가 이 책을 쓴 결정적 계기는 흉노와의 전쟁 끝에 투항한 장군 이릉을 변호하다 무망죄(誣罔罪)로 판결되어 죽음 대신 남자로서 최고의 치욕이라고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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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형(宮刑)을 선택하여 살아남은 사건이었다.

그는 비분과 고통 속에서 ‘울분의 서’로 불리는 ‘사기’를 저술했다. 130권에 이르는 방대한 이 저술은 중국 고대 문명사일뿐만 아니라 당대의 세계사다. 본기와 열전을 중심축으로 하는 기전체라는 역사 서술 방법을 창안하고 공자가 서술한 역사서 ‘춘추’의 정신을 춘추필법으로 이어받았다. 이는 궁형의 치욕을 씻어 내는 자기 승화의 제의이자 아버지 사마담의 유업을 계승하는 작업이었다.

시시비비 정신과 정통론은 춘추필법의 핵심이다.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잘못된 것은 잘못 되었다고 가름하는 역사의식과 어떤 국가나 정권, 개인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따지는 역사적 평가 작업을 의미한다. 역사는 윤리서의 구실까지 떠맡았고 ‘역사에 남을 인물’ 이라든가 ‘청사에 길이 빛난다’는 말은 칭찬이고 ‘훗날 역사가 평가해 줄 것’이라는 말로 민감하고 골치 아픈 일을 역사에 떠넘기는 일까지 흔해졌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벌어지는 역사 논쟁은 한계 수위를 넘고 있다. 과거의 문제만 해도 그렇다. 사실 확인과 당사자는 물론, 그 후손에 대한 적절한 보상과 배려는 당연한 일이지만 지나치게 성급한 조치들은 부작용을 낳는다. 더구나 정치적 목적이 깔렸다는 의심을 받는다면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왜곡되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될 공산이 크다. 조선 시대에도 양란의 충신열사에 대한 국가적 현창 사업에 2세기가 걸렸다.

친일파 문제는 더욱 정밀한 조사 과정과 분류 작업이 전제되어야 한다. 나라를 송두리째 내어주거나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내모는 등 적극적으로 친일한 부일파(附日波),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친일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생존형 친일파, 겉으로는 친일로 가장하면서 실제로는 독립운동을 하거나 독립운동 자금을 댄 양친일·음독립파, 자기도 모르게 일제 논리에 말려들거나 식민 사관에 물든 소극적 친일파 등을 가려내는 작업이 선행되고 그에 따른 응분의 처사를 하지 않는 한 ‘억울하다’ 또는 ‘지나치다’라는 뒷말은 끊이지 않을 것 같다.


좌우 이념 싸움에서 역사는 도구로 전락했다. 좌파적 시각이든 우파적 시각이든 균형 감각을 잃고 편협하기는 마찬가지지만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관련되어 있어 중요한 문제임이 틀림없다. 모든 역사적 사실에는 빛과 그림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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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기 마련인데 흑백 논리가 역사적 평가까지 오염시키는 것이다.

태평양 전쟁 등에 대한 자기반성을 자학 사관이라며 합리화 또는 미화하여 군사 대국을 꿈꾸는 일본과 동북공정을 통해 역사 제국주의를 자행하고 있는 중국의 틈새에서, 자기 역사에 대한 지나친  부정과 긍정 사이에서 분열에 빠진 우리의 실정은 딱하기 그지없다.

역사는 동네북이 아니다. 뼈를 깎는 자기성찰이 없는 역사 정리 작업이나 역사 논쟁은 공허하다. 역사는 자기를 비춰보는 거울이라고 했다. 역사라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역사 앞에서 우리는 모두 정직하고 겸손해졌으면 싶다. 그리고 다시는 참을 수 없는 역사의 가벼움에 허무한 마음마저 드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2006년 12월)


제3장 왜 지금 ‘정조학’인가?


■ 한국 근현대사 백 년의 도전과 성취            


1. 백 년의 출발과 조선의 전통

1910년 망국의 비극을 겪은 지 정확히 백 년 후인 오늘의 대한민국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기간 안에 압축적 경제 성장을 달성해 세계 10대 경제 강국이 되었다. 그리고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한지 몇십 년도 안 되어 자유민주주의의 내실을 다지고 있으며, 선진 일류 국가를 향한 문화강국으로의 도약을 꾀하고 있다. 통일 민족 국가 건설이라는 꿈도 그리 멀지않은 미래의 현실로 목전에 두고 있다.

‘기적의 역사’로도 부르는 근현대 백 년의 역사를 우리는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필자는 백 년 전 식민지로 전락하기 전의 조선이 어떠한 국가 였는가를 통찰하는 것이 역사 인식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출발점이라는 인식하에 이를 전제로 삼고자 한다.

조선은 한 마디로 문화 국가, 평화 국가였다. 조선은 국가 운영 방식을 성리학적 이념에 입각한 문치주의로 설정하고 법에 의한 강제보다는 교화를 통한 자율성을 높이는 덕치를 이상으로 했다. 그 결과 제국주의 시대에 문약하다는 비판도 받고 있지만 동서고금에 장수한 나라는 모두 무력에 의존한 나라가 아니라 문화 능력으로 통치했음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조선이 5백 년 이상 존속할 수 있었던 그 생명력의 원천은 바로 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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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적 통치를 배제하고 명분으로 국민을 설득하는 친화적 정치, 즉 왕도를 지향했던 점에 있었다.      

또한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이 외교 관계를 맺지 않은 17세기에 중계 무역을 통한 국부의 축적으로 탄탄한 국력을 다지게 되었고, 평화적 국제 관계와 조선 문화에 대한 자부심 회복, 조선 중화주의라는 변방의식 탈피는 18세기 문예 부흥기를 가능케 했다.

서세동점에 편승해 무력으로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조선이 일본보다 문화적으로 앞서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 민족 문화를 철저하게 짓밟고 말살시키는 정책을 폈다. 국사에서의 식민주의 사관 주입과 국어 말살 정책이 대표적인 예다.

이에 우리 민족은 백(魄 = 국가)은 비록 존재하지 않을지언정 혼(魂 = 정신)은 지켜 내야 한다는 견지에서 일본의 식민주의 사학에 맞서 민족주의 사학을 제창해 저항했다. 이리하여 우리에게 광복은 단순히 국가의 광복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 문화 전체의 광복을 의미했다.


■ 대한 제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리고 대한민국


대한민국의 국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왔다. 1919년 나라가 망한 지 9년 만에 일어난 대대적인 민족 독립운동인 3·1 독립운동은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대한 제국의 국호에서 제국을 민국으로, 군주 주권에서 국민 주권으로 바꾼 것이다.

조선 말기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탄생한 대한 제국은 구본신참(舊本新參)과 민국(民國) 건설을 통치이념으로 했다.

결국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임시정부 그리고 대한 제국에 닿아 있는 것이다.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한 것 자체가 정통성을 획득한 계기가 된 것이다. 북한이 차선으로 조선을 국호로 삼은 것과 대비된다. 결국 대한 제국과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금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대한민국은 대한제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가 정신을 계승해 1948년 비록 분단 상태에서였지만 영토와 국민을 통할하고 주권을 수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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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실상부한 민주국가로서 탄생했다. 이는 일제의 강점으로 국권을 상실한 지 38년 만에 이룩한 우리 민족의 금자탑이었다. 이제 비로소 국가가 국민을 인도하고 국민이 국가의 방향과 성격, 내용을 만들어 가는 국민 주권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3. 근현대사 백 년의 성취

첫째, 대한민국은 국가 안보에서 평화주의를 지향했다.

둘째,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운 정치적 민주화와 산업화에 성공했다.

셋째, 우리는 근현대 백 년의 역사를 통해 사회의 상대적 평등화와 교육을 통한 발전 욕구를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이제 숨 가쁘게 달려온 지난 백 년의 역사를 보며 우리는 국민 통합을 이룩함으로써 국민적인 잠재력을 한 단계 고양해 고품격 사회로 나가야 한다. 여기에는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원천이 되어야 하고 그 역사는 피침과 저항, 분단의 근현대사 인식을 넘어 전통 시대, 문화의 시대, 평화의 시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앞으로 근대 이전의 평화의 시대에 문화 중심국으로 우뚝 선 조선 시대를 법고창신 하여 세계 평화와 문화 운동을 주도해야 할 것이다.     (2010. 2.)


■ 당쟁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조선 왕조는 사색 당쟁을 하다가 망했다는 말을 들어 왔다. 또한 조선 전기는 사화로 점철되고 조선 후기는 당쟁으로 얼룩진 시대이므로 조선은 권력 투쟁만 하다가 결국 망국의 운명을 맞이했다고도 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오늘날의 정치판에 까지 이어져 여러 가지 폐단을 일으키고 있다고 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조선이 멸망한 원인을 찾아내려는 자기반성 차원에서 내부적으로 제기되었다기보다 오히려 조선을 강제 합병한 일본이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 왕조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형성되었다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식민 사관에 입각한 조선사 연구의 이론 중 가장 정교하게 왜곡된 부분이 바로 이 당쟁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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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쟁도 일정한 역사적 산물이다. 전기의 사화(士禍)가 국가에 공훈을 세운 정치적 구파인 훈구파가 비판 세력으로 성장하는 성리학자 집단인 사림파를 숙청하는 사건이 주기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라면, 후기의 당쟁은 선조대 이후 정치권의 대세가 된 사림들이 붕당을 형성하고 각기 다른 이념적 노선을 설정함으로써 붕당 간에 치열한 정쟁이 전개된 것이다.

16세기 후반 사림은 전국적으로 성장해 포화 상태가 되자 퇴계 이황을 중심으로 한 영남학파와 율곡 이이를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가 형성되고 곧이어 정치 세력화했으니 전자가 동인 후자가 서인이 되었다. 정권을 잡은 동인은 다시 대서인 정책의 차이로 온건파인 남인과 강경파인 북인으로 분립했는데, 남인은 퇴계학파이고 북인은 남명 조식 계열과 화담 서경덕 계열이 연합한 붕당이었다.


바로 이 3당 체제에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사림은 전쟁 극복의 주체가 되었다. 중앙에 진출해 있던 사대부들은 대명 외교를 통해 구원군의 파병을 성사 시켰고, 지방에 잔류한 사림들은 의병을 조직하여 왜군의 전열을 교란시켰다. 또한 이순신 같은 장수를 등용해 적재적소에 활용한 것도 사림 관료들이었다.

전후 논공행상 과정에서 전란 중 뚜렷한 역할을 하지 못한 훈구파는 자연 도태되었다. 이에 사림이 장악해 가는데, 3당 중 가장 많은 의병장을 배출한 북인이 정권을 잡아 광해군의 북인 정권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북인은 전란의 후유증을 극복하는 방법에서 남인이나 서인과 달리 왕궁의 재건을 우선하는 등 왕실 우선의 태도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여진과의 외교 문제에서도 사림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더구나 적자인 영창대군의 존재가 광해군의 정통성 문제에 걸림돌이 되자,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고 인목대비의 소생인 어린 동생 영창 대군을 살해함으로써 강상 윤리를 파기했다. 성리학의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사림정권의 지향성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에 1623년 서인이 주동이 되고 남인이 협조하여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무자격 왕을 신하들이 밀어내고 왕실에서 적격자를 물색해 대통을 잇도록 함으로써 정치를 바른 곳으로 돌이켜 놓는 정변이 반정이니, 전기의 중종반정과 함께 조선 왕조의 특수성을 반영한 사건이 반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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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서인이 여당 역할을 하고 남인이 야당 역할을 한 양당 정치가 이루어지면서 붕당 정치가 전개되었다. 50여 년간 지속된 양당 연합 구도는 1674년 갑인예송으로 서인이 패배하고 남인이 집권함으로써 무너지고, 이후 잦은 정권교체가 일어나니 이른바 환국기다. 환국(換局)은 정권이 바뀌는 것으로, 남인과 서인은 일진일퇴 하면서 전권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결국 당쟁을 통한 이념 대립은 학파의 학문 경향과 맞물리면서 전개 되었고, 상호 비판을 통해 정화작용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당쟁이 이익 집단 간의 밥그릇 싸움이라는 현대적 해석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부분이다. 환국의 와중에서 1683년경 서인이 대남인 정책의 차이로 강경파인 노론과 온건파인 소론으로 분당되었다.

16세기 말 북인, 남인, 서인의 3당은 인조반정으로 북인이 몰락하여 서인과 남인의 양당체제가 되었고, 1세기 후에 노론, 소론, 남인의 3당 체제가 되어 비로소 사색의 이름이 생겨났으나, 1694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도태되자 다시 노론과 소론의 양당 체제가 되었다. 결국 17세기 붕당 정치는 양당체제였을 뿐이다. 사색이 동시다발로 당쟁을 했다는 것은 조선 정치사에 대한 이해 부족에 기인하는 비역사적 주장에 불과하다.


17세기 조선 역사에서 순기능을 다한 붕당 정치가 환국기를 거치면서 과열되자 그 대안으로 탕평 정치가 모색되니, 18세기 이후는 왕이 전권을 행사하는 탕평정치 시대가 도래하고 붕당 정치는 종결을 고하게 된다. 따라서 당쟁은 조선의 지식인인 선비들의 정치 세력화하는 과정에 나타난 역사적 산물일 뿐이다. 오히려 붕당정치는 상호 비판과 견제를 통해 조선 후기 정치판을 정화하는 순기능을 했고 입헌군주제의 한 원형으로서 기능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월사 이정구와 그의 시대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는 사림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학자다. 그는 1564년(명종 19년)에 태어나 1635(인조 13년) 별세했다. 이 시기는 조선 왕조의 변화 과정에서 볼 때 정치권이 물갈이 되면서 사림이 정치 주체가 되어 조선 전기에 누적된 문제점을 개혁해 가는 과도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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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을 갖고 있었다.

문학사적으로는 성리학이 조선 사회에 토착화되고 학문적 성장을 이룸에 따라 조선 문사들의 일대 과제인 도문일치론(道文一致論 :道와 文은 동전의 양면처럼 일치 되어야 한다는 논리) 이 탄력을 받으면서 궤도에 오른 시기이기도 하다. 목릉성세(穆陵盛世)로 일컬어지는 선조대의 사대문장가들이 바로 도문일치의 이상적 경지를 이룩한 문인들이자 학자들이다.

월상계택(月象谿澤)으로 불리는 이들은 월사 이정구, 상촌(象村) 신흠(申欽), 계곡(谿谷) 장유(張維), 택당(澤堂) 이식(李植)등 네 사람의 호 첫 자를 따서 호칭한 것으로, 월사 이정구는 그 첫 번째 꼽히는 인물이다.   

이정구가 활동을 시작한 선조대는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에 대체하여 사림이 정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던 정권 교체기였다. 조선 왕조가 2백 년 이상  지나 지배층의 물갈이가 시대적 요청으로 떠올랐고, 조선 전기 체제의 개혁이 요구되었다.

선조는 명종의 조카로 총명함과 학구적인 태도를 인정받아 명종의 사랑을 받다가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다. 중종의 손자이자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로 사가(私家)에서 성장하면서 성리학자인 한윤명(韓胤明) 등에게 배워 그 이전 역대 어느 왕보다 성리학적 소양이 깊었다.


임금이 된 후에도 선조 자신이 학문에 열중하여 매일 경연에 나아가 경사(經史:경학과 역사)를 토론하고 독서에 열중하여 제자백가서에 통달했는데, 특히 주역을 좋아했다고 한다. 학문의 진작을 위해 유선록, 근사록, 심경, 소학, 등 성리학서와, 윤리와 기강을 세우기 위해 삼강행실을 짓도록 했다.

이러한 조선의 정권 교체기에 국제정세가 변화해 일어난 동아시아의 세계대전이 1592년부터 7년 동안 계속된 임진왜란이다. 조선 왕조 최대 시련이었다. 일본은 이때에 이르러서야 전국적인 통일 국가를 이루고 그 막대한 군사력을 밖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마침 당시 동아시아의 주도국이던 명나라가 쇠미기로 들어서 환관의 발호와 부정부패로 내부적 붕괴 요인을 가중시키고, 이를 틈탄 만주의 여진족이 일어나는 등 국제정세가 급변하고 있었다.

이 전쟁은 7년이나 계속되면서 조선이 전쟁터화하여 막대한 피해를 보았지만, 당시의 유엔군인 명나라 원병과 이순신의 해전 승리, 당시의 국민군인 의병의 게릴라전 성공으로 승전하였다.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으로 위기에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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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던 조선은 정부와 국민 상하가 단결하여 왜적을 물리쳐 국가적 위기를 타개했던 것이다.

정치판은 자연히 물갈이 되었다. 전쟁 전까지 정치적 경제적 기득권 세력으로 사림의 개혁 요구를 완강하게 막고 있던 구 정치 세력인 훈구파가 완전히 몰락했던 것이다.


위기가 기회라는 말은 월사 이정구 에게도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그는 국가 비상시국에 탁월한 문장력과 중국어 실력을 갖춰 중국통으로 인정받으며 한 시대의 중요한 문제들을 풀어 나갔다.

임진왜란 중 나이 겨우 서른에 중요한 외교문서를 전담하다시피 했고, 그 후에는 대명 외교의 선봉에 섰다. 1598년 명나라 병부 주사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을 꼬드겨 명을 침범하려 한다고 무고한 사건을 해결한 것도 그였다. 그는 탁월한 문장력으로 조선국변무주문(朝鮮國辨誣奏文)을 지어 명나라에 가서 능통한 중국어 실력으로 무고임을 밝혀 정응태를 파직시켰다.

결국 1601년 (선조 34) 에는 문한의 최고 영예직인 문형(文衡)의 자리에 올랐다. 문형이란 글을 저울에 단다는 뜻으로 양관(홍문과, 예문관)대제학의 속칭이다. 광해군 때도 문형을 두 차례나 역임하면서 대명 외교의 최고 적임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열 정승이 한 대제학만 못하다’는 말이 의미하듯이 조선 왕조는 문치주의 이념을 실현하는 최고직인 대제학을 관직 중의 으뜸으로 쳤고 이 직책은 청직 중의 꽃이었다. 따라서 양관 대제학인 문형을 많이 배출한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자 가문을 격상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었다. 조선 후기에 이러한 상징으로 ‘연이광김(延李光金)’이라는 명문 의식은 그러한 기초 위에 생겨났다. 연안 이씨와 광산 김씨가 많은 문형을 배출함으로써 생긴 용어다. 전자는 6명, 후자는 7명의 문형을 배출했지만 먼저 문형을 배출하기 시작하여 문학가로서의 명성을 키우기 시작한 것은 연안 이씨다


이정구의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보만당(保晩堂)·응암(凝菴)이며 본관은 연안, 당색은 서인,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두 번씩이나 예조 판서와 대제학을 역임하고 병조 판서와 형조 판서도 역임해 다방면에 걸쳐 능력을 인정받아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인조반정후 1624년 일어난 이괄의 난에는 왕을 공주에 호종했고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왕을 강화도에 호종하여 화친론에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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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에서 의병운동이 갖는 역사적 의의


1. 시대 배경과 임진왜란

조선 왕조는 5백 년 이상 지속된 나라로 세계에 그 유래가 없을 만큼 장수한 국가다. 그 비결은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겠지만, 가장 원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요인은 성리학을 국학으로 삼아 그 이념을 국가 사회에 실현한 성리학적 명분 사회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성리학적 통치 철학은 힘에 의한 폭력적 지배가 아니라 명분과 의리를 밝혀 국민을 설득 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또한 통치 방식은 패도(覇道)정치가 아니라 왕도(王道)정치를 지향했고, 법치보다는 덕치를 우선했다. 왕도 정치와 덕치의 장에서는 강제적 법의 남용을 억제하고 인간의 자율성을 높이기 위해 교화를 통한 인간화 작업을 중요시했다. 그 자율성의 기준은 의리와 명분이었다.


성종대부터 새로운 정치 세력인 사림을 중앙 정계에 등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훈구파를 견제하려는 국왕의 고육지책이었고 연산군, 명종기의 정치 혼란은 새로운 정치 세력인 사림의 성장을 기다리던 시기이기도 했다.

조선 전기의 사화는 새로운 학문인 성리학을 전공으로 하는 지식인 군단인 사림이 중앙 정계에 등장해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를 비판하면서 물갈이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훈구파에게 숙청당하는 과정이었다. 이때 왕은 권력의 중심축 역할을 했다. 대략 30년 간격으로 사림의 부침이 계속되었는데, 패배한 사림의 잔존 인물들이 그들의 근거지인 향촌 사회로 낙향 해 제자를 키우는 인재 양성 기간과 일치한다.

때로는 과격성과 조급성, 학문적 미숙성으로 사화를 계속 당하면서도 사림은 지속적인 성장을 하여 16세기 말 선조 대에는 전국적으로 포화 상태에 이른다. 이즈음 이들의 주 전공인 성리학은 토착화에 성공하고 그 이론적 뒷받침을 얻어 자신감을 획득한 사림은 정권의 핵심부에 진입하였다. 이들이 정계에 포진하게 된 이면에는 사가(私家)에서 성장해 성리학자에게 교육받은 선조의 역할이 컸다.    


이렇게 조선 사회가 탈바꿈하기 위해 물갈이를 진행 중인 시점에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에 변화가 진행되었다. 일본은 뒤늦게 통일 국가를 이루고 그 여세를 몰아 국외로 눈을 돌렸다. 통일 과정에서 팽창한 군사력을 밖으로 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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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가 있었고 오랜 숙원이던 대륙을 도모하려는 목적이었다. 명나라가 부정부패로 내부적인 쇠퇴 조짐을 보인 것이 실마리를 제공했던 것이다.

임진왜란은 조선 사회의 하부 구조를 흔들어 놓긴 했지만, 그 시대정신까지 바꾸어 놓진 못했다. 승전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우선 국민병이라 할 수 있는 의병의 게릴라전이 큰 성과를 거두었다. 또 정계에 진출해 있던 사림이 주축이 되어 당시의 UN군이라 할 수 있는 명나라의 원군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해군의 눈부신 활약 등이 상호 보합하여 왜군을 국토에서 완전히 축출했다. 침략한 적을 영역 밖으로 몰아냈으니 승전이었다.

임진왜란의 여파로 동양 3국은 막대한 피해를 보고 이후 전란의 후유증 극복에 나섰지만 명나라는 그 틈을 타 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 후금에게 패망했고, 명·청(후금)이 교체되는 국제질서의 재편이 이루어졌다.


2. 의병 활동의 의의

임진왜란 승전의 세 가지 요소, 즉 의병 활동, 명군의 파병, 이순신의 해전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의병 활동이다. 조선 왕조의 의병은 이름 그대로 의로움을 위해 자발적으로 일어선 병사다. 조선 왕조의 국학인 성리학이 국가 사회에 시대정신으로 전파시킨 의리 정신의 발로로 볼 수 있다.

의병은 국가 보위는 물론이려니와 향토방위군 성격까지 갖고 있다. 의병은 백성이 주류이므로 국민군의 성격이지만 의병장은 대부분 지방에서 학문에 전념하며 은거하던 선비들이다. 지방 지식인의 바탕을 이루던 사림이 중앙 정계에 진출해 사림파를 이루어 기성 정치 집단인 훈구파에 대한 비판 세력 역할을 하는 한편, 지방에는 이들의 동료 붕우들인 사림이 지방 문화와 교육을 담당해 지역 유지로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 사림 중 명망 있는 선비가 의병장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중앙 관계에 진출해 있던 사림파 관료들과 긴밀하게 연결해 구국 항일 투쟁을 벌이니 이것이 임진왜란 전사에 큰 공을 세운 의병 활동이다.


선비의 처신 중 기본적인 것이 과거를 통해 관계에 진출해 사대부의 길을 걷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산림의 길이 있다. 수십 년씩 산림에 은거하며 책을 읽고 제자를 키워 학계와 정계의 영수가 되는 길이다. 17세기 양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조선 후기 사회를 재건하는 데 이들 산림이 이룬 공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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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대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선택은 은일의 길이다. 자신의 뜻을 펼 수 없는 혼란스러운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시골에 묻혀 지내며 때를 기다리는 것이니 난세의 선택이기도 하다. 

위와 같은 선택은 치세든 난세든 국가가 존망의 위기 상황이 아닐 때의 선택이고, 적의 침략으로 전쟁에 돌입했거나 나라가 망하는 위기에 접하면 더욱 강경한 처신법들이 있었다. 우선 자결이고 다음은 망명, 그리고 은거다. 그러나 가장 적극적인 방법이 거의소청(擧義掃淸 : 의로움을 들어 적을 물리친다)이라는 의병이다.

선비들이 신봉하던 성리학적 의리론에 입각해 있지만 이는 선공후사의 선비 정신과도 관련 있다. 위기 상황에서 사적인 일보다는 공적인 일을 우선시하는 선비 정신이 의병 활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 청백리의 현대적 의의


1. 청백리의 의미

조선 왕조는 5백 년 이상의 수명을 누렸다. 중국 역대 왕조의 수명을 평균치로 따지면 150여 년에 불과하다. 송나라만이 북송과 남송을 합쳐 3백 년이 넘을 뿐이다. 그렇다면 조선 왕조의 장수 비결은 무엇일까? 공교롭게도 조선은 입국 체제나 학문의 핵심적인 부분을 모두 송나라를 모델로 하고 있다. 문치주의를 채택하고 성리학을 국학으로 삼았으며 왕도 정치를 표방했다.

특히 성리학을 주 전공으로 한 조선 지식인들은 선비(士)로 자리매김하고 선비 정신을 함양한 관료 예비군이었다. 선비란 신분적으로는 양인이고 경제적으로는 중소 지주층이다. 성리학을 전공하여 그 이념을 실천하는 학인으로서, 사(士)단계에서 수기(修己)하여 대부(大夫)의 단계에서 치인(治人)하는 수기치인을 근본으로 하여 학자 관료인 사대부가 되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사대부의 이상적인 역할 모델이 청백리(淸白吏)가 되는 것이었다.


청백리는 탐관오리의 반대어다 오늘날과 같이 총체적 부패가 만연한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탐관오리는 그야말로 친숙한 존재지만, 청백리는 아득한 옛날에 존재했으나 이제는 그 의미마저 형해화(形骸化)되었거나 골동품쯤으로 퇴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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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도 시대의 산물이다. 청렴결백한 관리라는 글자 그대로 청백리는 관료제 사회의 산물이므로 귀족제 사회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 그래서 귀족-관료제 사회라 할 수 있는 고려 시대에 청백리의 전 형태인 양리(良吏)가 배출되고 고려사에 ‘양리전’으로 정리되어 있다. 따라서 청백리의 전형적인 인간형들은 과거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조선 시대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청백리에 녹선(錄選)하는 일이 국가 차원에서 추진되었다.

청백리는 선비가 학문과 인격을 도야하여 남을 다스리는 대부(大夫), 즉 관리가 되는 수기치인이 기본이 되는 조선 시대 선비 정신의 산물이다. 인격을 도야하는 수기의 단계에서 선비 정신의 핵심으로 강조되는 것이 청빈(淸貧)과 검약(儉約)이기 때문에 그것을 몸에 익힌 선비가 관리가 되어 학행일치 원칙을 지켜 실천할 때 청백리가 탄생할 것임은 당연한 귀결이다.


아울러 선비의 실천 덕목들인 자기를 이겨 내고 남과의 화합을 중요시하는 예(禮)로 돌아가려는 극기복례(克己復禮), 자신에게 박하고 타인에게 후하게 대우하는 박기후인(薄己厚人), 공적인 일을 먼저 하고 사적인 일을 뒤에 하는 선공후사(先公後私) 등을 병행할 때 그 결과는 청백리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지향은 신유학이라는 성리학을 국학으로 삼고 그 이념을 추구하던 조선 사회의 기본 성격에 기인한다.

따라서 청백리는 국가적 포장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높이 평가되며 존경의 표상이었다. 청백리에 녹선되면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가문의 영광이요, 자손까지 국가의 특전을 받았다. 반면 탐관오리의 다른 명칭인 장리(贓吏)의 명단에 이름이 오르면 장죄를 범했다고 하여 본인이 처벌 받는 것은 물론 그 자손까지 벼슬길이 막혀 신분 하락의 불이익을 당했다.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청검(淸儉)의 덕을 숭상한다면 아랫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다투어 숭모할 것이다. 전날의 청백리자손을 마땅히 먼저 녹용토록 하여라.”         

이렇게 하는 데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만고불변의 원칙을 적용한 것이다.

현재 각종 기록에서 확인된 청백리의 수는 160여 명이다. 장관급인 판서가 30명 이상으로 가장 많은데, 그 중에서도 인사 담당인 이조 판서가 제일 많다. 이는 청백리의 성격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어떤 직책보다 유혹이 많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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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 공세가 심했을 자리에 있으면서 세도가의 청탁 인사나 뇌물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그 자리를 깨끗하고 공평무사하게 지켜 낸 고위직 관리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그 외에 영의정 13명, 좌의정 7명, 우의정 3명 순으로 오늘날의 총리, 부총리, 장관과 같은 고위직에 있던 인사들이 높이 평가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의정부와 6조, 서울의 2품 이상 당상관 및 사헌부와 사간원의 장이 천거해 피천인이 되고 최종적으로 국가에서 뽑아 명단에 올리는 것이 일반적인 절차였다. 또한 ‘살아서는 염근리(廉謹吏)로 별도로 포상하고 죽은 후에 청백리로 그 자손을 녹용한다’는 기록도 보이지만 조선 전기에는 구별이 없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차별성이 생긴 것이다.

다산 정약용(1762-1836) ‘목민심서’ 율기(律己 : 자신을 단속함) 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청렴함은 수령의 본무이고 만 가지 선행의 근본이자 여러 가지 덕행의 뿌리다. 청렴하지 못하면서 지방 수령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관리 중에서도 백성이 가장 가깝게 접촉하는 지방 관청의 책임자야말로 청렴이 기본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조선 시대는 선비의 시대이고 선비의 지향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맑음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맑을 청(淸)자야말로 조선 선비들이 가장 사랑하던 글자다. 청백리를 비롯해 청빈(淸貧)이 있다. 이제 청빈은 미덕이 아니라 청백리와 함께 궁상맞음의 대명사가 되어버렸지만 과소비 문제가 심각한 현시점에서 한번 되짚어 보아야할 대상이 되었다. 그 외에도

- 청의(淸議) : 선비들의 여론

- 청직(淸職) : 글로서 벼슬하는 문한관(文翰官)

- 청류(淸流) : 깨끗함을 자부하는 무리

- 청광(淸狂) : 병적으로 지나치게 결벽한 것을 일컫는 것 등이 있다.


2. 선비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조선 시대 지식인은 선비로 이해되고 있다. 선비는 오늘날의 왜소한 지식인과 곧잘 비교된다. 특히 꼿꼿한 지조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두려워하지 않던 강인한 기개, 옳은 일을 위해서는 사약(賜藥) 등 죽음도 불사하던 불요불굴의 정신력, 항상 깨어 있는 청정한 마음가짐으로 특징지어진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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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모습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선비 정신은 맑음의 미학에 기초한다.

선비는 자신의 삶이 중요하듯이 타인의 삶도 중요하므로 자신과 타인이 다 함께 이 세상에서 사이좋게 생을 실현하고자 하는 이상을 갖고 그러한 인식을 확대함으로써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했다. 여기에서 하늘이란 오늘날 말하는 절대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를 말하며 사람이 자연의 질서 속에 조화되어 하나로 된 경지를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이상 사회인 대동사회(大同社會)를 이 세상에 실현할 수 있다는 확신을 하고  그 전위가 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던 이상주의자들이었다.


선비정신은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정신과도 통한다. ‘옛 것을 제대로 알고서 새로운 것을 안다’는 기본적인 태도야말로 안정성의 기초다. 인류의 삶이란 시행착오의 연속선상에서 전개되고 있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나간 일을 제대로 알아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것은 역사에 대한 중시로 나타났다. 경경위사(經經緯史) 정신의 강조가 그것이다. 경전의 진리는 영원히 불변하는 것으로 전제해 날줄로 인식하고, 시간에 따른 변화 양상을 역사로 인식해 씨줄로 생각했다. 예컨대, 진선미(眞善美)라든가 효도와 같은 인류 보편적인 진리는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변함없는 것이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철학(경학)과 역사를 상호 보완하여 인간사를 파악하는 경경위사 정신이야말로 동양 사회가 면면하게 지켜온 인문 정신이며 동양의 정신문화를 고양시킨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시대가 열릴 때마다. 이 정신은 조금씩 논리를 보강하면서 새시대의 대응 논리로 기능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만 살펴 보더라도 18세기 박지원에 의해 제창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논리라든가, 19세기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갑오경장 이후의 구본신참(舊本新參)의 논리가 모두 그러한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서세 동점에 대응한 이러한 모색마저 20세기 제국주의의 틀 속에 함몰되고 근대화의 거센 물결에 휩쓸려 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 동양 사회는 1세기 이상 서구 이념의 각축장이 되어 표류했다.

그 길고도 긴 터널에서 동양 사회가 빠져 나오려는 현시점에서 우리가 다시 살려 내야 하는 정신 중 하나가 경경위사 정신일진대, 식민지화 이전 시대였던 조선 시대 역사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그 시대사상이었던 유학, 구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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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으로 말하면 성리학에 대한 성찰이 요구된다.


■ 규장각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조선 초기에 이미 역대 왕의 어제·어필·어진 등을 보관하는 장소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으니, 세조 때 양성지에 의해서 였다. 그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실현되지 못하다가 숙종대에 이르러 비로소 왕실 업무를 담당하던 종부사(宗簿司)에 소각(小閣)을 별건하여 역대 왕들의 글이나 글씨, 초상화를 봉안했다. 이때 숙종의 친필로 ‘奎章閣’이라는 편액을 써서 걸었다.

숙종대에 이르러 규장각이 작은 건물로나마 설치된 것은 이때 전기의 미비점이 정리되는 일련의 사실과 맞물려 있다. 단종의 묘호 문제, 사육신의 재평가 문제 등 전기에 미처 정리하지 못한 일들이 숙종대에 이루어지는 것은 이 시기부터 조선 왕조가 지향한 성리학적 명분 사회가 확고한 기틀을 다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게 단초를 연 규장각은 18세기 후반 정조대에 와서 확대 재편되어 국가의 문화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핵심기관으로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정조는 기존의 여러 정부 기구에서 자신의 권력기반이 될 만한 기능을 모두 포함할 수 있는 연구소이자 친위 기구로 규장각을 재편했다. 왕실 도서관이자 문화정책 수립 기능도 갖고 있었다. 조선 사회의 전환기에 체제와 질서를 유지하면서 변화하는 사회적 요구에 부응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도 기존의 정부 기관 외에 별도의 핵심 기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가 탁월한 추진력을 갖추고 시대적 과제를 수행할 수 있었던 동인은 당대의 어느 학자와 비교하더라도 손색없는 학문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조선의 문치주의는 이 시대에 와서 활짝 꽃피면서 인문적 소양과 학문적 능력을 갖추지 않고는 제왕으로서 자격 미달자로 낙인찍혀 신하들을 설득할 수도 없거니와 존경받을 수 없는 지적 풍토가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 시대에 이룩한 문화중심국으로서의 자부심을 지키는 한편, 선진 문명을 일구어 내던 청나라의 문물을 도입해 상호 보완 하는 방식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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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설립 초기에는 정치 기구로서의 성격이 강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문화 정책의 중심 기관으로 기능했다. 홍문관과 예문관 등에서 근무하는 문한관(文翰官)을 청직(淸職 : 글로서 업무를 보는 중요한 직책)이라 하여 조선 시대 관료의 꽃이라 했는데, 규장각은 이 양관의 기능 이외에 승정원의 비서실 기능, 춘추관의 역사 기록 기능, 사간원의 언론 기능, 종부사의 왕실 관련 업무까지 아우르면서 ‘청화지직(淸華之職)’이라 불릴 정도로 관료 기구의 핵심이 되었다.

규장각은 홍문관에서 관장하던 경연의 임무를 이관받아 정조가 주체가 되는 학문 토론의 장을 마련하는가 하면, 정책 입안은 물론 정책 개발을 위한 참고도서를 수집해 소장하고 서적 간행까지 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규장각 관리인 각신(閣臣)을 청직으로 격상시켜 친위 세력을 형성한 것이다.

규장각에는 연구에 참고하기 위해 1781년 (정조 5) 당시 중국 서적 2만 책과 한국 서적 1만 책 등 모두 3만 책을 수집, 소장하고 있었고 그 후 지속적으로 많은 도서를 간행해 보관했다.

1781년에는 규장각의 출판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지어 국립 출판 기관이던 교서관을 이속시켜 책을 찍어 내고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던 귀중 도서와 왕실 관계 문서들을 보관하게 했다. 1866년 병인양요로 6천여 권이 소실되고 3백여 책의 어람용 의궤(儀軌 : 국가 의전에 관한 기록과 그림)류는 약탈당했다.

외각(外閣)이라 약칭하던 외규장각에서 쓰던 목판 1민 7천여 장이 고종 때 경복궁이 중건된 후 규장각 도서 일부와 함께 이곳으로 옮겨져 있다가 1975년 서울대 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이들 목판은 오랜 세월동안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관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2000년 봄 규장각에서 대대적인 청소작업을 했다.


*객래불기(客來不起) : ‘손님이 오더라도 일어나지 말라’는 뜻으로 공부하는 곳으로서의 규장각의 엄격한 규율과 특권이다. 규장각 기둥에 있는 현판으로 지금도 있다.         


19세기 조선이 사양길에 접어들자 규장각도 국가의 흥망성쇠와 부침을 같이 하면서 1910년 일제의 강점과 함께 폐지되고 규장각 도서는 조선 총독부로 넘어갔다. 이때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들고 규장각의 봉모당에 있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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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자료들을 분할하여 장서각을 세웠다. 그 옆 낙선재에 살던 왕실 분들을 위로 한다는 구실이었다. 역대 왕의 유품인 왕실 관계 중요 자료들이 여기에 많이 포함되었고, 현재는 정신문화연구원의 장서각에 보관되어 있다.

규장각 도서는 다시 경성 제국대학으로 이관되고, 광복 후 1946년 서울대학교부속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서울대에서 오랫동안 도서관 부속실로 존재하다가 현재의 건물을 짓고 규장각으로 딴 살림을 차려 독립 기관이 된 것은 1992년이다. 10년이 지나자 공간이 부족해 증축을 서둘러 현재 본 건물 1,400여 평에 증축 건물 1,800여 평을 더하고 ‘규장각연구원’으로 확대 통합해 명실 공히 국학 연구의 산실이 되었다.


*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된 자료

0 고도서 18만 책, 고문서 5만 장, 목판 1만 8천장, 현판 76점 등 26만 점

0 시각자료로서의 고지도 : 18세기 중흥기의 진경산수 화법으로 그린 살아    숨 쉬는 지도, 상당 수

0 중국 본 서적 6만여 권

0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 등 6종 7,076책이 국보,     8종 28책이 보물로 지정      

0 서울대 규장각은 1999년부터 소장자료의 전산화 작업 중


규장각이야말로 DMZ(비무장 지대) 의 생태 보존 실태와 함께 세계화 시킬 수 있는 우리나라의 보물이다. 가장 학구적이고 미래 지향적이며 세계를 향한 창구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규장각 자료의 정보화는 앞으로 우리문화의 장기적인 발전에 기초가 될 것이다. 이는 18세기 르네상스 이후 실로 3백년 만에 도래하는 21세기 문화의 세기를 준비하는 작업이다.

또 일제의 압제와 냉전 시대에 잃어버린 우리민족의 정체성 찾기 움직임과 맞물려 의미심장하다.

앞으로 우리의 학문 후속 세대들이 꺾꽂이가 되어 휘청거리지 않게 키우기 위해 지금까지의 학문 체계를 재점검하여 규장각을 중심으로 통합적이고 원대한 학문체계를 설계해야 할 것이다.

19세기 말 서세동점(西勢東漸)하던 세계질서 재편기에 서양 과학문명의 충격 속에 기존의 조선 문화를 지키면서 우수한 서양 기술을 수용하려던 지성계의 한 흐름인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 드디어 결실을 보게 되었다고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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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된다. 동도(東道)의 정수인 규장각에 있는 국학 자료를 서기(西器)로 규정할 수 있는 컴퓨터를 매개로 하여 전산화함으로써 동도서기론이 실현되는 것으로 평가해도 좋을 듯 싶다. 이는 또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길이기도 하다.

서울대 규장각은 도서 보관 기능에서 탈피하여 연구기관으로 도약하는 단계에 있다. 도서관 기능은 물론이요. 박물관 기능을 아우르고 있으며 연구 기능까지 수행하는 국내 최고의 국학 연구 기관이다. 규장각을 통해 우리는 조선시대 문화 정치의 현주소를 확인할 수 있고 바람직한 문화 국가의 청사진을 그리는 기초를 만들어 갈 수 있다. 현재의 난국을 돌파하는 지혜의 원천이며 문화 운동의 전초 기지가 될 것임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결론적으로 규장각은 일제 식민 사관에 의해 왜곡되고 평가 절하된 조선 문화의 높은 수준과 선조의 치열한 삶의 자세 등을 실증하는 물적 증거다. 1세기에 걸쳐 제국주의로 손상된 전통문화의 복원과 그에 입각한 정체성 정립을 통해 상처받은 국민적 자부심을 회복하려는 오늘의 시점에서 규장각은 여러 가지 문제를 푸는 열쇠를 간직하고 있는 민족문화의 보고다. 나아가 21세기 우리 사회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비의(秘意)가 잠재해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왜 지금 ‘정조학’인가?


앞으로 다가올 지식에 기반을 둔 문화의 시대에 역사는 문화 콘텐츠에서 중요한 저장고 역할을 할 것이다. 특히 후기의 정조 대왕은 전기의 세종 대왕과 함께 조선 시대 가장 주목 받는 지도자로 조명받고 있다. 이 시점에서 그동안 정조에 대한 연구 동향을 살피고 그 문제점을 짚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조선 시대 연구가 활기를 띠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조선 전기 역사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조선 후기 역사에 대해서는 부정적 편견을 버리지 못했으니, 조선 후기 역사는 학계의 천덕꾸러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식민 사관에서 비롯되었다. 일제는 조선을 침탈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식민 사학의 논리 틀을 만들어 냈다. 일제 식민 사학자들은 조선이라는 엄연한 국호가 있음에도 이씨 왕조, 약자로 이조라 불러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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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을 희석하고 백성과의 이간을 획책했다. 나아가 양란 후 무너져 내리는 사회라는 부정확한 역사 인식을 만들어 조선 후기 사회를 깎아 내렸다.

식민 사관의 이론 중 사대주의론, 당쟁론, 문화적 독창성 결여론, 정체성 론 등이 모두 조선 시대에 해당하고, 특히 조선 후기 역사를 평가 절하하는 도구가 되었다. 전통 시대 외교 관계는 중국에 대한 무조건적 굴종이었다는 사대주의론, 조선은 당쟁만 하다가 망했다는 당쟁론, 조선 문화는 독창성과 고유성이 없는 중국 문화의 아류라는 문화적 비독창성론과  동양 사회 전체, 그중 하나인 우리나라, 그리고 현재에서 가장 가까운 전통 시대인 조선 왕조는 왕조의 교체에도 정체되어 있었다는 정체성론등이 우리의 역사 인식, 특히 조선 시대 연구에 걸림돌이 되었다.

따라서 조선 왕조는 별 볼 일 없는 문약한 나라였다는 선입견이 널리 퍼져 우리 스스로 멸시하고 때로는 왕조 연구 자체를 복벽주의로 깎아내리기도 했다. 이 흐름은 민중사관으로 또 한 번 뒤틀림을 당했다. 민주화의 열풍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민중사관에서 지배층 연구는 비판의 대상이 되리라는 섣부른 판단과 시대 분위기 속에서 조선 왕조 연구, 그중에서도 고급문화를 담고 있는 왕실 문화 연구와 그 담지자(膽智者)인 제왕의 연구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문치주의 그리고 농경사회로서 지식기반 국가였던 조선은 대포와 군함을 앞세운 서구 제국주의 열강과 그에 편승한 일제는 치명적이었다.

무력을 앞세운 제국주의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이라는 정글의 논리로 유교문화권인 동양 세계를 강타했다. 평화 공존의 세계관 속에 지식과 논리로 다스려지던 조선 왕조는 이질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에 의해 무장 해제 당했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해 망국 백성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모든 가치를 던져 버려야 했다.

의리와 명분을 중히 여기던 공간에 공리주의가 판을 치니 가치관의 혼란이 극도에 달했다. 나라가 망한 원인을 유교로 치부하는 극단적인 자기부정에까지 이르렀다. 유교적 교양이 상식화된 사회에서 유교를 부정하는 것은 자기 부정이자 자학이었다.

그로부터 1세기, 우리는 광복과 산업화, 민주화를 거쳐 경제대국으로 성장했고, 서구 중심의 후미진 변방 국가에서 세계 중심국가로 발돋움하고 있다. 이제 세계인은 투쟁적 제국주의에서 공존적 평화주의를 갈구한다. 이 변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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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 우리는 과연 어디에서 참고자료를 찾을 것인가? 그동안 횡적으로 외국에서 역할 모델을 찾아왔고 그것이 한계에 달했다면 이젠 종적으로 우리 역사에서 역할 모델을 찾아 법고창신 할 차례다.

그래서 문화국가인조선 왕조가 연구 대상으로 시의성을 갖는 것이고, 그 시대의 상징적 지도자로서 전기의 세종 대왕과 후기의 정조 대왕이 주목 받는 것이다.

앞으로 ‘정조학’이 활기를 띠고 역사학계뿐 아니라 정치학 등 여러 분야에서 후속 연구가 나오길 기대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와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첫째, 식민 사관의 조선 왕조 폄하 의식과 민중 사관의 지배층 연구 기피 인식을 걷어 내야 하겠다. 이런 걸림돌을 배제하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정조 연구는 각론에만 머물고 전체를 통관하기 어렵다.

둘째, 조선왕조에 대한 연구 업적이 보다 심화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전체에 대한 조망과 시대구분 속에서 정조라는 왕을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다. 18세기 영·정조 시대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고 학계의 합의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한편에선 문예 부흥기로, 또는 진경 시대로 규정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선 실학의 시대라 하여 각기 자기 주장만 해서 혼란을 일으키는 현 상태에선 ‘정조학’이 설 자리가 위태롭다.

셋째, 역사학계도 ‘평전’ 장르에 대한 자기 확장이 필요한 시점이다.

결국 역사학의 최종 목표는 인간학이고 이를 통한 통찰력과 지혜를 얻어 내는 것일진대, 평전 분야는 그 목적에 들어맞는다고 본다. 동양의 전통 역사학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 서술 방법은 사마천의 사기에서 비롯된 기전체(紀傳體)였다. 기전체는 통치자의 일대기인 본기(本紀)와 기타 인간들을 여러 유형으로 분류하여 라이프 스토리를 엮은 전기(傳記)를 중요한 뼈대로 한다.

넷째, 역사학 분야에서 문장가의 배출이 시급하다. 평전은 유려한 문장력이 없으면 실패하기 십상이다. 역사적 전문성과 문학적 표현 능력이 겸비되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 나아가 아무리 역사적 사실을 많이 알고 있고 역사에 전문성이 뛰어나도 좋은 문장으로 표현하지 못하면 사람들의 공감을 얻기 어렵다.

다섯째, 전통 시대 역사 자료의 표기 글자인 한문을 제대로 읽어 역주 작업을 해낼 수 있는 인적 자원 확보 문제다. 우리는 한동안 이상한 국수주의에 빠져 한자 교육을 소홀히 했다. 그리하여 전통을 읽어낼 수 있는 인재 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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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실패했다.

전통시대 한문 사용은 한자 유교 문화권에서 보편성 확보와 선진 문화 수입의 문제였다고 본다. 앞으로 한자 교육은 전통 해독의 능력을 넘어 동북아 시대 소통 문자로서의 기능까지 아우를 전망이다. 이는 ‘정조학’에 국한되는 문제만이 아니라, 정통시대를 대상으로 하는 전학문적인 문제지만 ‘정조학’에서도 필수다.

여섯째, 정조 관련 자료의 정전 작업과 역주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정조실록, 일성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외에 홍재전서, 내각일력, 등의 역주 작업이 필요하다 이 중에서도 정조실록과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 그리고 규장각 내각의 일기인 내각일력의 역주 작업은 필수다. 정조실록은 번역되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무료로 온라인 서비스를 하고 있지만 오역 등 문제가 있다. 홍재전서는 고전번역원에서 번역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조선의 왕 27명 중에서 사대부를 능가하는 문집을 남긴 왕은 정조가 유일하다. 180권 100책 10갑의 방대한 문집을 역주하는 작업은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부지하세월 될 공산이 크다.

내각일력은 창덕궁에 있던 규장각 내각의 일지로, 정조와 그의 분신인 규장각 연구에 반드시 필요한 자료임에도 아직 적극 조명되지 못했다. 이 책이 번역되면 ‘정조학’은 본 궤도에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정조 시대 문화 정치의 실체가 어땠는지를 백일하에 드러낼 자료다.           

   

                          2011. 5. 27. 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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