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 김별아 치유의 산행 -
■ 김별아
0 1993 작품 활동 시작. 2005년 ‘미실’로 제1회 세계문학상 시상
0 여성 작가의 역사 소설의 새장을 염
0 미실, 영영이별 영이별, 논개, 백범, 가미가제 독고다이 등의 소설과 여러 권의 에세이 및 동화
■ 두려움에 정면으로 마주 서기 - 작가의 말
지난봄까지만 해도 내게 산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산행 전날이면 불안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고 산 앞에만 서면 빠짝 긴장해 벌벌 떨었습니다. 하긴 꼬박 40년 동안 동네 뒷산을 오르는 것조차 꺼리던 평지형 인간 주제에 감히 도상 거리만 690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백두대간 남한 구간을 종주하겠다니, 누구라도 웃을 일이 분명했지요.
그런 내가 산에 올라야 하는 까닭은 있고도 없고, 모호하고도 명징했습니다. 그처럼 힘들고 위험하고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쏟아야하는 일을 왜 하냐고 묻는 사람들 앞에서 지금껏 피했던 일과 정면으로 맞서보고 싶다. 아들과 함께 산행하며 돈보다 갚진 추억을 물려주고 싶다. 내가 나고 자란 운명의 삶터를 내발로 밟아보고 싶다 등의 너스레를 떨었지만 결국엔 등산가 조지맬러리의 유명한 금언처럼 “그곳에 그것이 있기 때문(Because it is there)!”이라는 말 밖에 더 내 놓을 말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어떤 말을 청산유수로 늘어놓아도 내가 그토록 진땀을 빼고 눈비를 맞으며 끝도 없는 돌사다리와 산등성이를 헤쳐 가는 결정적인 이유는 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삶을 두려워했습니다. 그것을 견디는 가운데 얻은 크고 작은 상처와 좌절의 기억에 꺼둘려 살았습니다. 그렇다 보니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가시를 곤두세운 채 스스로를 방어하기에 급급해 행복, 희망, 사랑같이 달보드레한 말은 입에 담기조차 어려웠습니다. 나는 한편으로 나를 미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지요. 자연의 생명력, 치유력 따위의 말을 알고는 있었지만 절실히 느끼지 못했던 내가 산을 타는 동안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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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한 발 한 발 산을 오르며 민낯만큼이나 치장하지 않은 솔직한 마음자리를 만날 수 있었고, 높은 봉우리에 올라서서는 깊고 낮은 마음의 바닥을 들여다보았으며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을 지날 때에는 누구도 대신 올라줄 수 없는 산이기에 오직 나를 믿고 밀어갈 수밖에 없다는 다짐도 했습니다.
낮은 산도 높은 산도 마찬가지로 어려웠습니다. 짧은 산행도 긴 산행도 똑같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산에서는 어떤 번민과 고뇌와 갈등이라도 지혜로운 솔로몬의 경구처럼 휙휙 쌩쌩 지나버리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언젠가부터 두렵고 무섭기만 했던 산이 설렘과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지요. 경력 1년의 초보 산꾼이자 얼치기 대간꾼으로서 조심스럽게 고백하자면, 그 놀라운 변화의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그건 바로 내가 사랑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산이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신비로운 비밀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산행기이기도 하고 마음을 따라가는 에세이이기도 하며 오래 묵었던 상처에 대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남들은 기억조차 못할 일에 잠 못 들고 뒤척이는, 이 또한 지나갈 순간에 사로잡힌, 해묵은 상처에 홀로 숨죽여 울고 있는, 나를 닮은 당신께 이 산행의 기록을 바칩니다.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는 시간에도 나는 다시 산을 오르고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 당신과 함께 산을 오를 날이 오기를 희망합니다.
- 2011년 봄, 산길 위에서 - 김별아
예비산행 평지형 인간, 백두대간에 오르다.
뭣 하러 산에 올라요? 결국 내려올 것을.
이는 그리 머지않은 과거의 어느 날, 내가 입을 빼물고 불퉁거리며 했던 말이다. 처음부터 산을 좋아하고 등산을 하며 심신을 단련하는 건강하고 건전한 알피니스트였다면 나는 결코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터무니 없이 무모하게도 불 보듯 훤한 ‘집 떠나면 개고생’ 이미 경험한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미친 짓’에 다름이 아니라는 생고생을(이제 더 이상 젊지도 않은 주제에) 사서 하겠노라고 떨쳐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전형적인 평지형 인간이었다. 산 사람들에게 낙원이자 고향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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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네팔, 거기서도 히말라야 트레킹의 여신으로 꼽히는 안나푸르나를 오르는 관문인 포카라에 일주일 동안 머무르면서 나는 산에 올라보겠노라는 작심 같은 건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아열대·온대·한대를 지나는 동안 다양한 부족의 삶을 가까이서 들여다볼 수 있으며, 장엄한 북부 히말라야의 풍광과 건조하고 황량한 사막의 경치까지 즐길 수 있다는 꼬드김도 한 귀로 열심히 듣는 척하고 한귀로 과감히 흘렸다. 설광에 그을려 새카매진 얼굴로 산을 내려온 여행자들과 매일 저녁 맥주 파티를 하면서 주워듣는 이야기만으로도 고산병에 걸린 듯 머리가 아프고 속이 메슥거렸다. 부쩍 맑아진 눈빛으로 풀어 놓는 그들의 모험담이 헐떡거리며 어딘가로 기어오르는 일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내게는 그저 지독한 고생담에 불과했다. 하긴 동네 뒷산도 제대로 올라본 적 없는 주제에 언감생심 히말라야라니!
그런데 그런 내가 어쩌다가 덜컥 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학부모와 학생 등산대에 끼어 백두대간을 종주하겠노라고 나서게 되었을까? 어쩌자고 자다가 한밤중에 번쩍 눈을 뜰 정도로 부담스러운 일을 누군가의 채근도 없이 하게 된 걸까?
뭣 하러 사랑을 해요? 결국 헤어질 것을.
뭣 하러 살아요? 결국 죽을 것을.
몹시도 넘기 힘겨워 자주자주 멈춰서 팍팍한 허벅지를 두들겨야했던 마흔 살의 고갯마루에서, 나는 문득 산을 오르는 일에 대해 가졌던 냉소와 무지가 실로 삶에 대한 태도와 다를 바 없었음을 깨달았다. 산 정상에서 오두막집이라도 짓고 살 요량이 아니라면 잠시 머물렀다 내려올 것이 뻔한 길을 왜 허위허위 오르느냐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누군가에게 묻던 얼굴로 나 자신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도 사랑을 해야 한단 말인가? 그래도 살아야 한단 말인가?
내려와야 할 것을, 끝내야 할 것을, 죽음으로 모든 것과 이별해야할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산을 오르고, 사랑을 하고, 기어이 살아 낸다. 그 불가사의한 어리석음의 순환 고리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가? 알고 싶었다. 알아야 했다. 그리하여 내 인생에 절대 일어나지 않을 줄만 알았던 중대 사건, 내 돈을 내고 내 손으로 짐을 싸서 내발로 경사를 향해 다가가는 대형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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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 글은 산행기이되 산행기만은 아니다. 산을 오르며 쓴 글이되, 때로 산보다 더 가파르고 굴곡진 삶과 그 굽이굽이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극한으로 치닫는 육체적 고통 속에서 더욱 적나라해지는 나 자신과, 그런 나를 끝끝내 보듬어 지키는 마음의 힘에 대한 성찰의 기록이다.
밤잠을 설치면서까지 엄살스레 근심한 것이 민망하지만, 사실 오늘은 장장 2년 동안의 백두대간 대장정에 오르기 전 가볍게 몸을 풀고 등산대의 친목을 도모하는 예비 산행이다.
가파른 산등성이를 한 발 한 발 올라가며 나를 불면으로 몰아넣고 어둠 속에서 뒤척이게 했던 두려움의 정체에 대해 곱씹는다. 두려움 때문에 지레 포기했던 많은 일을 생각한다. ‘나를 보듬어 지키는 마음의 힘’을 잃거나 훼손당했을 때 우리는 흔히 불안을 느낀다.
그런데 이 두려움의 뿌리를 가만히 톺아보면, 한 가지 치명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모든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자신’이 아닌 ‘타인’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정작 그 일을 계획하고 결정하고 실행했던 ‘나’는 온데간데없고, 나를 염탐하고 감시하고 할기족족 흰 눈으로 내가 실수하기만을 바라고 기다리는 ‘남’들만이 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삶의 주인공인가? 나인가, 남인가?
살아있는 모든 것이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까닭을 대라면, 무엇이라도 나고 살다 죽는 한 살이의 순환주기를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화창한 봄이 있다면 이글거리는 여름이 있고 풍성한 가을이 있다면 스산한 겨울이 있다. 사람의 일생도 이와 마찬가지로 순진한 유년이 있다면 찬란한 젊음이 있고, 수긋한 장년이 있다면 허허넓은 노년이 있다. 한 때 나는 여름에 겨울을 겨울에 여름을 꿈꾸었으나, 이제는 다가온 바로 그 계절에 흠뻑 젖어 즐기는 것만이 숨탄것으로서의 순연한 태도임을 안다.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다. 여름이 지나면 어쨌거나 가을이다. 이에 무엇을 더 덧붙일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느닷없는 결심으로 백두대간을 종주하겠노라고 나선 또 다른 이유는, 문득 살아가는 모든 일에 너무 익숙해졌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불안한 만큼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기회로 가득 찼던 이십 대가 가고, 세상 한구석에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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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만들고자 고군분투하며 경험과 이력을 쌓아가던 삼십 대도 갔다. 이를 악물고 몸부림을 친 만큼 나를 둘러싼 동심원은 조금씩 넓어졌지만, 때로 경험이 편견을 낳고 이력은 오만을 드높인다. 세상에 아무 것도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는 마음은 그런 오만과 편견의 씁쓸한 결과물일 테다.
그리하여 몸보다 마음이 먼저 늙는다. 뇌기능 중에서 전두엽이 관장하던 영역의 세포 활성도가 급격히 저하되기 이전부터 무언가 새로운 일을 도모하고, 융통성 있게 조율하고, 활기차게 실행하려는 의지가 사라져 간다.
산을 오르내리며 나는 나 자신을 생각할 것이다. 뚫어져라 나 자신을 들여다볼 것이다. 나를 지켜온 마음의 힘과, 끊임없이 그것을 시험하는 고통들을 똑바로 바라볼 것이다. 팍팍한 허벅지와 시큰한 무릎을 두들기며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의 한마디를 다시금 떠올린다.
“우리는 평생토록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나의 산행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제1차 산행, 최초의 기억
날짜 : 3월 13일
위치 : 전북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 - 주촌리 - 수정봉(804.7) - 입망치 - 여원재 - 고남산(846.4) - 통안재 - 권포리
거리 : 총 16Km (마루금 14Km + 접근 거리 2Km )
소요 시간 : 9 시간
새벽 3시, 잠들었다 깨어나기에도, 온밤을 새어 기다리기에도 애매한 시간이다. 2년 여정의 백두대간 종주는 아무래도 잠과의 투쟁이 되리라 예감하는 사이, 버스가 새벽 거리를 가로질렀다.
“잠이 부족해도 생각만큼 산행이 힘들지는 않아요. 자연이 주는 뭔가 특별한 기운 때문인지. 수면부족으로 인해 머리가 띵하고 눈이 침침한 증상 같은 건 거의 나타나지 않지요. 걱정 마세요. 익숙해지면 그 새벽을 즐기게 될 거예요.”
1988년 민중사학 건설에 뜻을 함께한 연구자들과 구로역사연구소를 세운바 있는 박준성 선생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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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등산화와 두꺼운 등산 양말 대신 미리 챙겨온 수면 양말과 슬리퍼로 갈아 신은 뒤 버스 좌석에 몸을 깊이 묻고 잠을 청한다. 목적지인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까지는 어림잡아 3시간이 넘게 걸린다고 한다. 등반대를 여러 번 실어 나른 경험이 있는 전세버스 기사 아저씨는 출발하자마자 히터를 빵빵하게 튼다. 답답하다고 투덜거리는 아이들도 있지만 그는 노련하게 추운 것 보다는 차라리 더운 게 낫다고 간단히 대답한다.
전등이 모두 꺼진다. 차창 밖의 어둠과 안의 어둠이 뒤섞인다. 가벼운 흥분으로 재잘재잘 떠들던 아이들도 하나둘씩 입을 다문다. 가늘게 코고는 소리, 불편한 좌석에서 뒤치는 소리를 제외하면 버스는 깊고 어두운 침묵 속에서 둥실둥실 흐르는 배처럼 달린다. 하지만 내게는 아무래도 잠들기엔 낯선 시간이다.
나는 아픈 아이였다. 몸보다 마음이 아팠고, 마음이 아파서 몸이 아팠다. 그래서 동화처럼 아름답고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부드러운 유년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쓸 수 없다. 내가 아픈 아이였음을 스스로 이해하고 인정하게 된 기간도 얼마 되지 않는다. 이전까지는 도무지 내가 왜 삶을 견디고 이겨내지 못하는지 알 수 없어 끊임없이 부대꼈다.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도 나는 행복하지 못했고,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조건조차 흔연히 누리지 못했다.
그런데 문득 어떤 계기와 반성과 통찰의 순간이 왔다. 느닷없이 벼락처럼 왔다. 아등바등 움켜쥐었던 팽팽한 줄을 탁 놓는 순간, 오랜 뒤척임과 부대낌에서 벗어나는 순간 내가 얼마나 사소하고 미미한 존재인가를 인정하고서야 비로소 가장 높아지던 순간. 그제야 나는 스스로를 고백하고 해명할 수 있었다. 내게는 상처가 있다.
나의 지난한 히스토리를 들은 정신과 의사 친구는 당시 받지 못했던 진단을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뒤에야 내려 주었다. 아마도 어린 나는 ‘소아 우울증’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으로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소아 우울증’의 증상을 검색해 보니 기가 막혔다. 학습 장애 부분만 빼고 내 어린 시절은 거의 완벽하게 그 병의 증상들과 일치했다.
‘사소한 일에 울고 짜증냄, 행동이 산만하고 과격해지면서 극단적인 말을 함,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않음, 침통한 표정으로 방에서 혼자 있음,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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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나 대화에서 죽음과 외로움 이 베어나오고.....’ 등
나는 기질적으로 예민하고 선병질적인 아이였다. 짜증과 신경질이 많고 어떤 일에 대한 반응이 불에 덴 듯 격렬해서 별명이 ‘땡삐’였다고 한다. 부모님은 그런 나를 제어하고 제압하지 못했다. 출산한 지 정확히 한 달 만에 교단으로 복직해야 했던 엄마와, 그 시대의 일반적인 남성을 기준으로 나쁘지는 않았지만 지극히 태무심했던 아버지의 첫 아이로 태어난 나는 기억할 수 없는 수많은 날 동안 여러 양육지를 전전해야 했다.
어쨌거나 나는 기질과 환경이 정확히 불행한 방향으로 작용하여 아무도 말릴 수 없고 스스로 조차도 견딜 수 없는 괴팍한 아이가 되었다.
생후 20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한글을 떼었다는 부모님의 전설적인(?!) 증언과 함께 일곱 살 때부터 매일 빼놓지 않고 쓴 일기가 여전히 종이 박스에 가득이다 하지만 지금 그 일기장을 펼쳐보면 어린 내 모습은 무섭고 슬프기만 하다. 일기의 내용은 딱 두 가지였다.
‘죽고 싶다. 혹은 죽이고 싶다.’
나는 외톨이였다. 계집아이들에게 그토록 흔한 단짝은커녕 가까이 지내는 친구 하나 없었고, 우르르 몰려다니며 웃고 떠드는 무리엔 결코 끼지 못했다. 그런데도 우습고 이상한일은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 ‘10년 반장’의 신화가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공부를 좀 하고 엄마가 학교 일에 열성이면 아이들이 알아서 반장감으로 밀어주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나의 어린 시절이 이중적이고 분열적이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학교에서는 모범생, 집에서는 작은 폭군으로 나는 오랫동안 깊이 우울을 앓았다.
한반도의 등줄기인 백두대간의 ‘백두’는 백두산(白頭山)의 ‘백’자와 지리산의 다른 이름인 두류산(頭流山)의 ‘두’자를 합친 것이다. 그러니 한반도의 남쪽에서 출발하는 백두대간의 종주는 지리산 천왕봉에서 시작해야 옳다. 하지만 2월 16일부터 4월 30일까지가 지리산 국립공원 산불방지 입산 통제 기간이라 부득이하게 우리의 산행은 남원시 운봉읍 주촌리로부터 시작한다.
지리산 자락 고기리의 작은 산장에서 된장찌개와 산채 백반으로 아침을 먹고 간단한 시산제(산신제)를 드렸다. 조금은 어색하고 얼마간 비장한 표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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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들과 부모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천지신명과 백두대간 산신령 앞에 제문이 읊어지고 소지가 올려졌다.
백두대간을 오르고 내리며 만날
뭇 생명과 숲, 물, 바람이
저희와 별개가 아니라
서로서로 하나로 기대 있음을 깨우치게 하소서.
어른들은 막걸리로 아이들은 대추와 곶감으로 음복을 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잊혔던 백두대간이라는 개념이 다시 등장한 시기는 1980년대 중반으로 알려져 있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領 : 산이 곧 분수령이다. 따라서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의 원리에 따라 우리 땅을 하나의 대간(大幹)과 하나의 정간(正幹), 13개의 정맥(正脈)으로 인식한 전통 지리관이 오랜 망각의 역사를 뚫고 다시금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의 시작이 그러하듯 사라진 길을 다시 찾기는 쉽지 않았을 테다. 18세기 지리학자인 여암 신경준의 영향을 받은 이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산경표’와 19세기 고산자 김정호기 완성한 ‘대동여지도’를 바탕으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분수령의 연결선인 백두대간 마루금(산마루끼리 연결한 선)을 찾아낸 우직한 산꾼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 이 길을 걷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백두대간이 통과하는 유일한 마을이라는 노치 마을을 지나 가파른 수정봉과 입망치를 거쳐 여원재 부근의 무덤가에서 점심 도시락을 펼칠 때까지 고작 4시간여의 산행 만에 나는 깨닫고야 말았다. 등산은 생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생각을 지우는 것이라는 사실! 산행에서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으리라는 기대는 무지에서 비롯된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
실제로 인간의 뇌파는 크게 알파파와 베타파로 나뉜다. 알파파는 근육이 이완되고 마음이 편안하면서도 의식이 집중되고 있는 상태에서 발생하며, 베타파는 신경이 외부 세계에 초점을 맞추는 활동 중 긴장과 흥분 상태에서 생성된다. 그런데 산을 탈 때 발생하는 뇌파는 운동을 할 때의 베타파가 아니라 명상을 할 때의 알파파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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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은 운동이 아니라 명상이다. 긴장이 아니라 이완이다. 흥분하여 씨근덕거리며 하는 것이 아니라 가만가만히 호흡을 고르며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지워야 하나? 어떤 어둠을 들여다보아야 하나 …….
내 유년기는 심리학자 듀에인 슐츠가 말한 건강한 성격을 위한 첫째 요건, 즉 유아기의 ‘무조건적이고 긍정적인 관심’을 받지 못한 데 대해 분노하고 있었고, 그 분노를 작가 에머슨의 말대로 “한 사람의 힘 전부를 끌어내는 것”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게으름과 무기력함, 신경질과 냉소 등은 억압된 분노가 소극적으로 표출되는 전형적인 방식이자 우울증의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바깥에서 보기에 나는 시쳇말로 ‘엄(마)친(구)딸’이었다. 성적도 대외활동도(남들에게는) 성격마저도 크게 나쁘지 않았다. 일견 착하고 공손하고 규칙을 잘 지키고 양보를 잘 하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야말로 마음속에 들끓는 화를 차곡차곡 쌓아둔 채 꾹꾹 억누르고 있는 사람들의 특성으로 지적된다.
누군가 ‘고난산’ 이라 불러 한바탕 웃음을 불러일으킨 오늘 산행의 최고봉 ‘고남산’을 향했다. 한참 동안 내리막길이 이어지더니 뜬금없이 밧줄이 나타난다. 가파른 바위를 타고 오르려면 밧줄에 온몸을 싣고 단단한 쥘힘에 의지해야 한다. 천근만근 내 몸이 스스로에게 버겁기만 하다. 그러나 내 몸을 목표점까지 끌어 올릴 이는 나뿐이다. 누구에게도 대신 올라 달라고 부탁할 수 없다. 헐떡거리며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옮기는 동안 서서히 생각들이 사라진다. 그 결과 오랫동안 싸안고 다닌 덧짐처럼 지우고픈, 지워야 할 기억들도 하나둘 물밀어들었다 지나간다.
어둠 속에서 아이가 울고 있다. 목이 다 쉬도록 빽빽거리며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이마에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찰싹 달라붙어 있고, 공포로 휘둥그레진 눈에서는 더 이상 눈물마저 나오지 않는다. 닫힌 문을 쿵쿵 두드려보지만 단단히 잠긴 그것은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일하러 나간 엄마를 대신해 나를 돌봐주는 식모 언니는 화가 많이 났나 보다. 칭얼거리며 떼를 쓰는 내게 진절머리를 치며 등 떠밀어 벽장에 가두고는 제 친구들은 만나 놀기 위해 외출했다. 머리 위에 철 지난 외투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다. 무겁게 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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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져 있다. 죽은 짐승의 시체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벽장이 아니라 푸줏간의 냉동 창고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 춥다. 외롭다. 그리고 무섭다.
자라면서 나는 여전히 성실한 반장이자 모범생, 얌전하고 반듯한 아이여야 했다. 남들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가는 일이 지겹고 싫었지만 그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나는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멍청한 짓을 하는 스스로를 혹독하게 벌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착하고 성실하고 반듯한 아이가 될 때까지, 나는 나 자신을 그처럼 끔찍하게 사랑했던 걸까, 아니면 정말로 미워했던 걸까?
미국 전역에서 민감한 사람들을 위한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는 임상심리학자이자 ‘민감한 사람들의 유쾌한 생존법’의 저자인 일레인 아론은 한편으로 수동적인 희생자며 나약하고 성가신 존재로, 다른 한편으로 재능이 많고 신중하며 강한 존재로 평가받는 ‘민감한 사람들’ 에게 다음과 같이 동병상련의 위로를 건넨다.
“나는 스스로 결함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결과 세상으로부터 격리 되었다. 하지만 자신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세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세상의 일부가 되었고, 한 사람의 전문 직업인이 되었으며, 민감성이라는 특별한 재능을 함께 나누면서 커다란 행복을 느끼고 있다.”
돌아오는 버스 안은 떠날 때보다도 더 조용했다. 모두들 첫 산행으로 극도의 피로감에 사로잡힌지라 거의 실신 지경으로 잠에 빠져든다. 차창밖엔 어느듯 어스름한 저녁빛이 몰려온다. 습관처럼 엠피쓰리 플레이어를 귀에 꽂으니 아침에 들었던 밥 딜런이 다시 속삭인다.
이제 나는 골목 한구석에 하염없이 쪼그리고 앉아 있던 그 외로운 아이를 이해한다. 벽장에 갇혀 꺽꺽 목울음을 울었던 작은 아이를 보듬는다. 핏물이 배어나오는 팔뚝을 바라보며 스스로 징벌했던 모진 아이를 용서한다. 비로소내 가련한 삶을 사랑한다. 그래야 더 이상 아이로 머물러 있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리하여 다른 아이 누군가를 껴안아 일으킬 수 있는 씩씩하고 훗훗한 어른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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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고개가 떨어졌다.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깊고 달게 잤다.
제2차 산행 바닥에 대하여
날짜 : 3월 28일
위치 : 전북 남원시 운봉읍 권포리 - 전북 남원시 아영면
코스 : 권포리-통안재-유치재-사치재-새맥이재-781봉-아막성터-복성이재
거리 : 총 16Km (마루금 14Km + 접근거리 2Km)
소요 시간 : 7시간
버스 두 대를 알뜰히 채우는 70여 명의 인원이 함께 등반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약속과 규율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백두대간 동아리 6기의 전체 구호는 ‘까불지 말자!’이다. 시산제가 끝난 뒤 처음 이 구호를 외칠 때는 솔직히 황당하고 어이없었다. 캄캄한 한밤중에, 어스름한 새벽에, 나름대로 중무장을 한 수십 명의 등반대가 “까불지 말자!” 하고 세 번씩 외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 자체가 웃기다 못해 약간은 괴기스러운 지경인데 진지하게 구호를 선창하는 대장 우린 아빠의 모습을 보면 (그야말로 감히) 킥킥거릴 수조차 없다.
사람들은 흔히 자연을 휴식과 안정을 제공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인공적 색채가 가미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빛깔과 맑고 깨끗한 공기와 햇살에서 평화와 안식을 찾는다. 물론 스스로 그러한 자연이야말로 인간이 마지막 순간에 돌아가야 헐벗은 몸과 맘을 누일 유일한 곳이다 하지만 이는 지극히 원칙적이고 관념적인 차원에서 그러할 뿐, 어쩌면 자연을 관상의 대상으로 삼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멀리서 모르는 채로 보면 세상의 무엇이 그리 아름답지 않겠는가? 실로 자연은 무서운 곳이다. 처절한 생존의 본능으로 치열한 쟁투를 벌여야만 살아 남을 수 있는 공간이다. 그곳에서 인간은 턱없이 나약하고 미미한 존재일 뿐이다. 어릴 적 잠시 동안 바닷가의 작은 마을에서 살았던 나는 자연의 아름다움보다 흉포함을 먼저 깨쳤다. 쪽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나간 친구들의 아버지들은 이따금 이정표도 없는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었다. 그들이 원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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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그저 식구들에게 먹일 물고기 몇 마리였을 뿐인데 노한 바다는 그들을 쉬이 놓아 주지 않았다. 바다로 나갔던 배가 돌아오지 않으면 온 동네 사람들이 해변으로 몰려갔다. 사람들의 손에는 무어라도 시끄러운 소리를 낼만한 물건들이 들려 있었다.
빛이라곤 어른들의 손에 들려 있던 너울거리는 횃불이 전부였고, 바다는 그 넓디넓은 미지의 공간은 숨 막히는 암흑이었다. 냄비 바닥이 뚫어져라 숟가락으로 두드리고, 목이 쉬어라 외치고, 비명 같은 꽹과리를 울리며 사람들은 암흑을 향해 울부짖었다. 놓아 달라고, 제발 (한낱 미물일 뿐인 인간의 도전을) 용서해 달라고.
산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한반도의 등줄기 마루금을 따라가는 우리의 여정은 결코 녹록하거나 평탄치 않다. 위험은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다. 잠시만 방심해도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추락하거나 넘어지거나 부딪혀 다칠 수 있다. 지금은 기껏해야 멧돼지나 뱀 정도가 산에서 만날 수 있는 위협적인 동물이지만 옛 사람들은 이에 더해 백수의 왕이라는 호랑이까지 경계해야 했다. 일제강점기에 해수구제(害獸驅除)니 맹수구제(猛獸驅除) 등의 명분으로 씨를 말린 호랑이에 관해서는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 한 마리가 잡혔다는 것이 남한에 남아 있는 마지막 기록이다.
지금 우리가 한가로이 걷는 이 길은 한 때 우리의 조상이 목숨을 걸고 넘나들어야 했던 험로였다. 오죽하면 “1년의 반은 사람이 범을 잡으러 다니고, 나머지 반은 범이 사람을 잡으러 다닌다.”라는 말이 있었겠는가.
위험이 사라지면 좋은 시대인가? 다만 위험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까불지 말자!
지난 산행에는 창선 엄마의 설사와 복통으로 선두와 후미가 한 시간 반이나 차이가 났다. 일찌감치 산행을 끝낸 선두가 하릴없이 후미를 기다리는 일은 정말 지루하다.
하지만 산에서는, 언제까지나 경외의 대상인 자연 앞에서는 선두와 후미의 구분이 헛되다. 오늘의 선두가 다음에도 선두가 되리라는 보장이 없고 언제 어떤 조건에서 최악의 상태를 경험하며 후미로 뒤쳐질지도 모른다. 실제로 창선 엄마도 산행을 시작할 때는 컨디션이 그토록 나빠져 중도 포기를 고민할 정도로 긴박한 상황에 처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1차 산행 후미 대장을 맡았던 채운 아빠의 한 마디가 귓가에 쟁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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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미를 지키며 산이 무섭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내가 저렇게 될 수도 있겠구나. 누구에게도 예외 없는 일이구나 싶더라고요.”
이번 산행은 산이라는 이름을 붙은 곳을 오르는 대신 재로 이어지는 구간을 지나는지라 비교적 완만하지만 얼마간 지루하다. 우리가 앞으로 밟아갈 마루금에는 산 말고도 재와 치(峙) 그리고 여러 개의 령(嶺)이 있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참고삼아 구별해보면, 재와 고개는 우리말 지명으로 예부터 민간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재가 시기적으로 다소 앞서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고개는 이후에 표준어로 정착되었을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에 비해 치는 고개가 통과하는 산지가 다소 험준한 느낌을 주는 곳을 일컫는데, 이는 꼭 해발 고도가 높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지막하지만 지형적으로 우뚝 솟은 듯한 산을 경유하는 경우, 지리산의 정령치나 소백산의 마당치처럼 ‘치’라는 지명이 붙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가 하면 령은 대관령이나 한계령, 추풍령 등의 예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비교적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크고 넓은 길을 의미한다.
오늘 걷는 구간은 언젠가 산불이 났는지 리기다소나무같이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라는 수종이 많이 눈에 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소나무는 이미 6천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자라던 나무로 유럽의 자작나무 문화, 일본의 조엽수림 문화와 함께 우리나라 수종의 특징적인 문화적 키워드로 일컬어지고 있다. 솔은 한 번 베어버리면 다시 움이 나지 않는, 구차하게 살려고 하지 않는 나무라 하여 ‘군자목(君子木)’이라 불리며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토양과 기후는 떡갈나무, 혹은 참나무가 자라기에도 적합한데 산림을 복원하거나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할 때 소나무만 너무 많이 심어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바닥만 보아서는 앞도 뒤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바닥이다
결코 기대하거나 생각지 않아도 살다 보면 어쩌다 ‘바닥’에 닿는 순간이 있다. 아니, 기어코 피하고 싶어 필사적으로 도망쳤는데도 어쩔 수 없이 바닥에 내팽개쳐지고야 마는 때가 있다. 모든 것을 잃은 듯하고 더 이상 아무것도 희망할 수 없을 듯 암울한 상태, 바닥이라는 말에서는 컴컴한 어둠과 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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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한 곰팡이 냄새가 느껴진다. 그것이 바로 상실감과 패배감과 절망의 독한 향취일 것이다.
뜨겁던 20대와 분주하던 30대를 지나 뭔가 어색하고 억울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체념 속에서 마흔으로 접어들 무렵, 나는 문득 ‘바닥을 쳤다’는 느낌을 받은 순간에 다다랐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내가 간절히 바라던 어떤 것들을 이룬(혹은 이루었다고 보이는) 직후에 찾아왔다. 10년 이상의 소위 ‘무명’ 시절을 보낸 뒤 운 좋게 독자들과 소통할 길을 찾을 무렵,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면서 힘겨웠던 육아에서 겨우 벗어날 무렵, 세상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나름 안정되어 오롯이 개인적인 고민에 몰두할 여유가 생겼을 무렵이었다. 이를테면 ‘싸움’이 끝났다고 보이는 순간 새로운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죽고 싶다 사라져버리고 싶다.
아무도 모르게 감쪽같이 꺼져버리고 싶다!
그래서 나는 결국 떠나기로 했다. 왜 떠나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는 함께 가는 아이를 방패삼아 ‘도피유학’을 간다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사실 도피하는 주체는 아이가 아니라 나였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온전히 사랑하며 책임져야 할 아이를 제외한 모두와 절연하다시피 하며, 그렇게 꼬박 3년 동안 머나먼 이방의 땅에 나를 유배시켰다. 철저하고도 처절한 고독 속에서 누구도 대신 견뎌줄 수 없는 나 자신을 견디기 위해.
그곳에서의 생활은 아주 단순했다. 이방의 도시 변두리에 한 칸짜리 작은 방을 얻고 삶의 모든 문제를 유보한 채 고요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이른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중의 하나로 꼽히는 그곳은 기실 ‘지루한 천국’에 다름 아니었다. ‘재미있는 지옥’에서 살다 온 나로서는 그곳의 무미건조하고 지리멸렬한 평화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살금살금 일을 하기 시작했다. 생존을 위한 필수 요건이긴 했지만 그 나라의 언어도 배우고, 조금씩 친구를 사귀고, 열심히 아이와 나 자신을 돌보았다.
그곳으로 떠날 당시만 해도 나의 건강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 그동안 말 그대로 피를 말리며 살아온 탓인지 빈혈이 깊어져 머리가 숭숭 빠지고 손발이 거칠었다. 하지만 주변에 나를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아플 수가 없었다. 아프면 안 되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다시 운동을 시작했고, 이전까지는 먹고 살기 위해 마지못해 했던 요리의 수준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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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매진했다. 먹고 일하고, 아이를 돌보고…… 그 단순하고 소박한 일상 속에서 나는 서서히 회복되었다. 그리고 어느 볕 좋은 날, 피톤치드를 한껏 들이마시며 삼나무가 우거진 동내 공원을 산책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나는 언제나 승리했기에 패배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도 삶과 제대로 맞붙어 겨루어본 적이 없는 게 아닐까?
나 자신에게 진지하고 집요하게 물어보노라니, 나는 생각보다 훨씬 더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갈등하고 방황했던 많은 시간은 정체성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그토록 끈질겼던 죽음에 대한 친화력도 뜨겁게 살고 싶다는 열망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니 바닥을 친 것도 모자라 땅굴을 파 숨어들려는 나 자신을 그대로 버려둘 수 없었다. 스스로의 존엄과 품위를 지키고자 하는 자존감이 어둡고 습한 바닥에서 내 팔목을 잡아 일으켰다. 비록 삶의 어떤 부분에 실패했을지라도 그것이 삶 전체를 패배라고 말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고려의 거승 보조국사 지눌의 법어가 내 굽은 등을 죽비처럼 내려쳤다.
“땅에 넘어진 자, 그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한다! (因地而倒者 因地而起)”
산을 오를 때 겪게 되는 ‘산멀미’를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 생기는 멀미, 코피, 메스꺼움, 구토, 이명 따위의 증세가 나타난다’ 고 정의한다. 그런가 하면 ‘멀미’에 대해서는 ‘차, 배, 비행기 따위의 흔들림을 받아 메스껍고 어지러워지는 증상’, ‘진저리가 나도록 싫은 증세’, 어떤 분위기에 깊이 몰입하거나 흠뻑 취했을 때 느끼는 현기증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이라고 구분해 정의한다.
언젠가 작은 항구에서 똑딱선 위에 좌판을 펼치고 생선회를 떠서 파는 아주머니를 만났다. 야무진 손끝에서 착착 썰려 나오는 살점에 감탄한 나는 하루 종일 출렁거리는 배 위에서 장사를 하다 보면 멀미가 나지 않으시냐고 여쭈었다. 그랬더니 아주머니는 자신도 멀미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겪는 멀미는 뱃멀미가 아니라 육지 멀미. 즉 ‘뭍멀미’라는 것이었다.
“집에 돌아와 잠을 자려고 자리에 누우면 방바닥이 울렁울렁 흔들리고 천장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만 같아요. 가끔은 멀미가 너무 심해서 잠을 못 잘 정도로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세파에 시달리며 살지만, 익숙지 않은 요동을 접하면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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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도 이상 반응을 보이며 흔들리게 된다. 실로 멀미는 물에서도 뭍에서도, 산에서도 삶에서도, 흔들리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겪을 수밖에 없다. 낯선 진동이기에 어지럽고 때로 진저리가 나도록 싫지만, 그 짜릿한 현기증이 새로운 분위기로의 몰입과 도취를 이끌기도 한다.
그처럼 세상 모든 일이 대개 그러하듯 고통과 시련이, 바닥이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다. 바닥에 닿아서야 깨닫는 진실이 있다. 최후미에 서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최악의 컨디션으로 허덕거리던 창선 엄마가 꿈꾸었던 것은 아주 단순하고 간명했다. ‘먹고 소화시킬 수만 있으면 좋겠다’ 와 ‘늦어지더라도 무사히 이 산을 넘을 수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 바닥에서는 누구라도 낮아진다. 낮아져서 평화롭고 겸허해진다. 절대 함부로 까불 수 없게 된다. 그토록 습하고 어두운 바닥을 경험하지 못한 삶이란 얼마나 건조할 것인가? 스페인의 속담은 말한다.
항상 날씨가 좋아서 햇볕만 내리쬐면 언젠가 그 땅은 사막이 되어버린다.
창선 엄마는 당시 몸 상태를 체크하며 산행을 도와주던 성수 아빠께 물었다고 한다.
“어디까지가 제 집착이자 욕심이고 어디까지가 극한 상황의 극복일까요?”
이 질문에 백두대간 종주 팀의 선배인 성수 아빠는 이렇게 대답 하셨단다.
“백두대간 종주는 자신과의 싸움이지요. 호흡에 맞춰 걸음을 걸으면서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어보면 육체의 아픔도 잊을 수 있어요. 극한 상황을 극복해가는 수행의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죠. 우리의 백두대간 산행의 패자는 없습니다. 모두를 승자로 만드는 일이지요.”
모두를 승자로 만드는 일. 세상에 그런 일이 있다면 그건 정말 아름다운 일일 테다. 바닥을 깨닫는 것도.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도, 바닥을 기억하는 것도 그렇게 아름답기 위해서다. 바닥에서도 결코 지지 않고 조금 다른 방식으로 승리하기 위해서다.
그리하여 시인은 바닥이란 없기에 있고, 있기에 없다고 노래한다. 바닥의 바닥에서 더 내려갈 수 없다면 남은 것은 그것을 딛고 일어서 솟구치는 일뿐이다.
바닥에 대하여 - 정호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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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 올 수 있다고
바닥을 딛고
굳세게 일어선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은 말한다
더 이상 바닥은 없다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제3차 산행 자존감, 자신감, 자존심
날짜 : 4월 10일
위치 : 전북 남원시 아영면 - 전북 장수군 번암면
코스 : 복성이재-치재-봉화산(918.8)-광대치-월경산(980.4)-중재-지지계곡
거리 : 총 13Km (마루금 12Km, 접근거리 1Km)
소요 시간 : 8시간
아무리 생각해봐도 신기해 죽겠다. 불과 한 달 전까지 산이라는 말만 들어도 벌벌 떨던 내가 어느새(모양새만은) 알피니스트의 꼴을 얼추 갖추고 있다. 스틱, 아이젠, 스패츠 등 장비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발음하고 고어텍스 재킷에 고어텍스 등산화까지 완전 무장하였다. 생전 들여다볼 일이 없을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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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알았던 5만분의 1지도를 펼쳐 놓고 산행 경로를 분석하는가 하면 심지어 고도표를 읽으며 새로 바꾸는 휴대폰은 고도계가 장착되었다는 레저용 폰으로 결정할까 고민한다. 이전까지는 꿈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한 치 앞도 못 보는 게 인생이다.
그래서 삶이 재미있다.
예측할 수 없고, 때로는 예측해도 소용이 없기에.
산중에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인간 세상 역시 4월에 접어들었음에도 음침하고 살풍경하다. 찌푸린 하늘만큼 나라 안도 흉흉하다. 사고가 사고를 덮고 죽음이 죽음을 덮는다.
서해 2함대에서 해군으로 군 복무를 마친 우린 아빠는 ‘천안함’에서 순직한 수병과 하사관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다. 한국의 남자들은 군인을 보는 관점에 따라 나이가 가늠된다는 속설이 있는데 그는 수병들을 ‘아이들’ 이라고 불렀다. 군인이 아저씨로 보이면 소년, 형님으로 보이면 청소년, 친구로 보이면 20대 초반, 동생으로 보이면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 조카로 보이면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 그리고 40대 중반부터는 군인이 아이로 보인다는데…….
그 ‘아이들’을 맥없이 잃어야 하는 우리의 나이가 부끄럽고 욕되다.
처음 산을 오르기로 결심했을 때 그 오르막과 내리막에서 오롯이 나 자신을 생각하며 나 자신을 들여다볼 것이라고 다짐했다. 나를 지켜온 마음의 힘과, 끊임없이 그것을 시험하는 고통들을 똑바로 바라보리라고.
이와 같이 스스로를 끝끝내 보듬어 지키는 마음의 힘을 ‘자존감’이라고 바꿔 불러본다. 자존감은 아직 우리말 사전에 정식으로 등재되지 않은 단어로 영어의 ‘self-esteem’을 우리말로 풀이한 것이다. 자존감은 흔히 ‘자신감’과 혼동된다. 물론 자존감과 자신감은 서로 밀접한 연관관계를 갖고 있다. 자신의 가치를 알고 존중하며 사랑하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다거나 어떤 일이 꼭 그렇게 되리라고 스스로 그렇게 믿는 자신감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 꼭 자존감이 높다고는 말할 수 없다.
세상은 본디부터 생겨 먹기를 지금 내가 걷는 돌사다리처럼 울퉁불퉁하다.(결코 평등하지 않다.) 사람마다 생김새가 다른 것처럼 가진 재주도 제각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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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잘하는 사람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자신감은 무엇인가를 스스로 해낼 수 있다는 의욕이자 내가 남보다 더 뛰어나다는데 대한 믿음과 긍지다. 남들보다 조금 더 나은 외모, 조금 더 잘하는 공부, 조금 더 빠른 다리…… 이처럼 자신감은 자신과 타인의 관계 속에서 실현되거나 평가되기에 상당 부분 상대적이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도 단위 수학 경시대회를 나가기 전까지 꽤 수학을 잘한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경시대회의 시험지를 받아든 순간, 내 수학 실력이 그저 문과생으로서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았다. 난생 처음 받아보는 형편없는 점수 앞에서 내 자신감은 산산이 부서졌고, 그로부터 나와 수학의 밀월 관계는 영영 회복되지 못했다.
이처럼 자신감은 언제든 얻거나 잃기도 하고 생기거나 없어지기도 하며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허무하게 무너지고 우월한 상대를 만나면 맥없이 오그라들기도 한다.
그러나 자존감은 다르다. 자존감은 외부의 상황이나 비교 대상과 상관없이 자신의 존재 자체에서 비롯하기 때문에 고무줄처럼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다.
자신감이 변하는 존재에 대한 것이라면
자존감은 변치 않는 존재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자존감이 언제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해 연구자들은 공통적으로 어린 시절 최초의 양육자에게서 ‘제대로’ 그리고 ‘충분히’ 받은 사랑을 근거로 삼는다. 자존감은 자신감과 달리 어렸을 때 형성되고 성인이 되어서는 높이기가 어렵기에 (어떤 책에는 8세 이전에 자존감 형성이 끝난다고 말한다.) 잘 생겨서, 공부를 잘해서, 착하게 말을 잘 들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있는 것만으로 족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음을 믿게 하는 관심과 인정의 양육 태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참고로 미국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자존감 공식은
자존감 = 성공(성취, success) / 욕구 (허세, pretensions) 이다. 즉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은 분자를 키우는 방법과 분모를 줄이는 두 가지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차가운 김밥을 뱃속에 우겨 넣고) 치재를 지나 봉화산 정상을 왼편으로 돌 때부터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부랴부랴 판초 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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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꺼내 입고 묵묵히 산행을 계속했다. 870봉과 944봉의 바위 군락 지대를 지나 월경산을 향해 가는 동안 빗방울은 점점 굵어졌다. 비를 맞으며 하는 산행은 처음이다. 우의의 모자를 푹 뒤집어쓰고 미끄러운 길을 조심조심 짚어 가노라니 마음이 차차로 가라앉아 조용해진다.
등산의 기쁨은 내 발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면서 차분히 산봉우리들을 바라보고 산의 향기를 맡고, 산의 맥박에 귀를 기울이는 일에 있다.
그렇게 말씀 하셨던 법정 스님의 다비식이 지난 3월 13일에 있었다. 스님은 입적하시기 전에 간결한 유서를 남기셨다.
그런데 아무리 향기로운 말씀을 남겨도 세속의 욕망에 찌든 사바세계의 중생들은 지지리 말을 듣지 않는다. 그동안 풀어 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며 당신의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책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주기를 부탁한 유언의 대목 때문에 출판 시장이 난리가 났다.
불교에서 말하는 몸(身)과 입(口)과 마음(意)으로 짓는 삼업(三業) 중에 가장 흔하게 자주 짓는 업이 구업(口業)임에, 그 업을 지어 먹고 살아가는 나는 언제나 부끄럽고 두렵다. 그래서 어쩌면 입적 후 이 소동이 벌어지리라는 걸 모르지 않으셨을 법정 스님의 단순하고 명쾌하고 무책임한 내려놓음이 일면 부럽기도 하다.
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설명할 수 없는 기쁨과 해방감으로 가슴이 뿌듯하다. 지방도로 옆 개울에서 물장난을 하는 아이들의 하얀 발을 바라보며 기사님이 일행을 위해 준비해주신 막걸리를 마셨다. 곡주 한 잔이면 세상이 딱 그것을 담은 사발만하게 보인다. 언제 비를 뿌렸냐는 듯 말끔히 갠 하늘과 쏟아지는 봄볕에 덩달아 아롱아롱하다가. 문득 바람결에 실려온 그 말씀을 들은 듯 했다.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자신의 속 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묻고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 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다.
- 법정 ‘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
나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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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산행 가족, 우리가 사랑하는 이상한 사람들
날짜 : 4월 24일
위치 : 전북 장수군 번암면 - 전북 장수군 장계면
코스 : 지지계곡 - 중재 - 백운산(1278.6) - 영취산(1075.6) - 민령 - 깃대 봉(1014.2) - 육십령
거리 : 총 19.8Km (마루금 19Km + 접근거리 0.8Km)
소요 시간 : 10시간
오늘부터는 새벽 3시도 아닌 자정에 버스가 출발한다. 동절기를 제외한 시기에 야간 산행을 강행하는 것은 선배 기수로부터 물려받은 노하우다. 야간 산행은 주간 산행에 비해 시야가 좁고 주변을 살피기 어려워 위험하지만, 접근 거리가 길거나 초반부 코스가 까다로울 경우 쉽게 지치지 않고 진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야음을 틈타 산을 오르면 그야말로 ‘눈에 뵈는 게 없어’ 가파른 줄도 힘든 줄도 모르고 가게 된다. 또한 하절기의 야간 산행은 그늘 없는 산등성으로 쏟아지는 한낮의 땡볕을 피해 산행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그리고 사실 새벽 3시나 자정이나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다.
하지만 밤길을 꼬박 달려 새벽 3시 반에 버스에서 내렸을 때는 하마터면 울뻔 했다. 차 안에서 쪽잠을 잔 터라 온 몸이 뻐근하고 공복에 때 아닌 허기까지 지는 마당에, 결정적으로 산중의 추위는 4월 말이라는 날짜가 무색하리만치 매서웠다. 찬바람이 잠에서 덜 깬 얼굴을 철써덕철써덕 후려치고 가는데 울컥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하겠다고 나선 일, 내 손으로 짐을 싸고 내 발로 찾은 길인데도 그랬다.
“내가 미쳤지. 어쩌자고 이 생고생을 사서 하겠다고 나섰을꼬?”
백운산과 영취산을 지나 육십령에서 마감하는 4차 산행은 소위 ‘슬리퍼 구간’에서 ‘등산화 구간’으로 본격 진입한다고 예고된 10시간 남짓의 난코스인데, 우리 등반대에는 어른들만이 아니라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번 산행의 최연소자는 초등학교 4학년이다.
이마에 헤드랜턴을 매달고 조심조심 어둠을 헤쳐 간다. 비탈길을 오르다 뒤돌아보니 꼬리에 꼬리를 문 불빛의 행렬이 신비롭다. 이 모습이 모두에게 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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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인상적이었는지 아이들이 쓴 산행 후기에 각양각색의 표현으로 등장한다. 중 2 호중이는 반딧불 같다고 했고, 중 1 차민이는 나이트 클럽(가보긴 했는지?) 같다고 했고, 진이는 가난한 광부들이 돈을 벌려고 아침부터 일터로 가는 모습 같다고 표현했다. 사람들이 하나하나 불빛이 되어 흘러간다. 문득 바라본 하늘에는 또글또글한 별빛이 그득하다.
전망대 바위를 지나 백운산까지는 고도표에 나와 있는 것처럼 줄곧 이어지는 오르막길이었다. 추위에 곱은 손을 비비며 어둠을 밟고 오르노라니 왜, 무엇을 위해, 어쩌자고 이 고생을 하느냐는 물음이 좀처럼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아이들이 쓴 산행 후기에도 이 질문은 사라지지 않는 단골손님이다. 중2 우린이는 도대체 산이란 건 왜 있는지 그걸 대체 왜 올라가는지 모르겠으며 등산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뻘 짓’인 것 같다고 했다. 올라갔다 다시 내려와야 하고, 칼로리는 쓰는 만큼 먹어서 살도 안 빠진다는데 ……. 그래서 산행을 마치고 인터넷 카페에 후기를 써 올린 아이들에게는 미끼이거나 당근인 문화상품권을 준다.
나는 도무지 헛수고 같기만 한 일을 왜 하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꺼리며 피했던 일과 한번 정면 승부해 보겠노라고 백두대간 종주에 도전했지만, 아이가 아니었다면 쉽게 용기를 낼 수 없었을 거예요. 나는 아이에게 돈이나 다른 물질적인 갓을 물려줄 이유나 자신이 없어요. 하지만 그 대신 추억을 전해주고 싶어요. 한때 엄마와 함께 백두대간을 탔던 기억이야말로 누구도 쉽게 물려줄 수 없고,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값진 재산이 아니겠어요?”
증여세나 상속세를 걱정할 필요가 없고 누가 훔쳐가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재산 사랑과 추억……. 나는 부자 엄마는 아니지만 결코 가난한 엄마도 아니다.
애초에 이우학교 백두대간 종주 팀은 학부모 동아리로 출범했다. 학부모들의 참여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대안학교의 특성상 학부모들끼리의 교류가 많은데.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찌어찌 의기투합하여 만든 모임이 바로 백두대간 종주팀이다. 그런데 그간 이런저런 우여곡절과 자잘한 사건사고 속에서도 백두대간 종주팀이 해를 거듭하며 점점 번창하게 된 데는 학부모들의 친목 도모를 위해 시작한 모임이 아이들과 함께 등반하는 것으로 내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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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대되었다는 이유가 크다.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40여 차례에 걸쳐 험한 코스를 등반한다는 것은 희귀하고도 특별한 체험이다.
한 때 아이는 내가 아니면 먹고 자고 생존할 수도 없는 존재였다. 그때 나는 내 품에 안겨 땀을 흘리면서 젖을 빨고 새근새근 잠들고 오직 울음으로만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그 어린 생명을 내 피요, 내 뼈요, 내 살이며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그 모든 기억을 아련한 옛 추억으로만 간직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러던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문득 낯설어지고, 통과의례 같은 반항과 저항에 섭섭해 했다. 솔직히 함께 산을 오른다고 아이와 다정하게 손잡고 가슴 뭉클한 가족애를 나눌 기회는 거의 없다. 고1 기영 엄마가 반농 반진으로 “우리 모자는 집에서 버스까지만 같이 백두를 한다!”고 말 할 정도이다. 친구들의 숲에 둘러싸여 묻히면 아이는 엄마를 향해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우리 집만 그런 상황은 아닌 듯, 함께 산을 오르면서도 말 한마디 나누지 않거나 도시락조차 같이 먹지 않는 부모 자식도 눈에 띈다. 생판 남 같다. 아니 남보다도 못하다. 그런데 그럼에도 우리는 왜 같은 산을 함께 오르고 있는 걸까?
“식물이 물과 햇빛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아이도 눈물과 두려움을 견딜 수 있도록 붙잡아 줄 어른이 필요하다.”
심리학자이자 교육학자인 드레이커스는 아이가 성장하는 데 지지대가 되어줄 어른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눈물과 두려움, 슬픔과 불안이란 더 이상 누군가의 부속물이나 장식품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서 나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의 과정에서 통과의례처럼 겪어야 하는 감정이다. 그러하기에 아이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그것을 아예 차단할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아이의 삶과 부모의 삶은 다르다. 아이의 인생길과 부모의 것 또한 다르다. 이 냉정하고도 분명한 현실 앞에 아이와 부모가 모두 슬프고 불안하지만 그것 모두 각자의 몫이다. 절대 남의 인생을 대신 살려고 오지랖을 넓혀서는 안 된다.
‘독이 되는 부모 (Toxic Parents)’ 의 저자인 심리치료 전문의 수잔 포워드는 자녀의 마음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유독한’ 부모의 유형을 ‘신처럼 군림하며 지배하고 통제하는 부모’, ‘의무를 저버린 무능한 부모’, ‘끊임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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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간섭과 감시로 자식을 조종하는 부모’, ‘알코올 중독자인 부모’, ‘잔인한 말로 상처를 주는 부모’, ‘신체적 성적으로 학대하는 부모’ 등으로 분류한다.
너는 실수투성이에 골칫거리야.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제대로 좀 못하겠니, 너는 왜 형(혹은 동생)같지 않니, 너 때문에 술을 마시는 거야. 네가 잘못해서 맞는 거야. 너 때문에 내 인생 망쳤어.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습관적으로, 악의적으로, 교묘히, 부모 자신도 모르게 무심코 하는 말이 아이에게 평생 따라다닐 죄책감과 절망감과 분노와 낮은 자존감의 씨앗이 된다.
이처럼 병든 가족, 역기능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신의 가치를 높게 책정하지 못할뿐더러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니 타인 역시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을 해도 일그러지고 비틀린 방식으로 상대와 자신을 동시에 망친다. 그것밖에는 달리 배운 사랑의 방식이 없기 때문이다. 더 냉정하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랑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아예 모르는 것이다.
나는 아이가 내 상처의 희생양이 될까봐 늘 조심스럽다. 아이를 통해 나의 결핍을 보상받으려 할까 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지배하려 할까 봐, 허튼 욕망으로 아이의 타고난 밑그림을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그림 그리려 할까봐 스스로를 감시하며 주의한다. 나는 그가 나와 다르게 살기를 원한다. 끊임없이 불안하고 무엇으로도 행복하지 않았던 엄마와 다르게 긍정적이고 작은 일에도 행복해하길 바란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그와 나 사이에 거리를 두기로 했다. 대안학교에 보낸 것도, 백두대간을 타는 것도 그런 거리 두기의 작은 시도들이다. 내가 지배와 통제와 억압의 손을 뻗칠 수 없는 곳에서 그가 자기만의 자리를 만들어가길 소원하며.
말이야 비단이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내가 그리 ‘좋은 엄마’는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시시때때로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이고, 그다지도 좋지 않다는 일관되지 않은 양육 태도로 변덕을 부리며, 내 방식을 좆아 오지 않는 아이에게 울화를 터뜨리기도 한다.
그러하기에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가 내게 반항하고 저항하는 것은 한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내게 ‘감히’ 눈을 부릅뜨고 덤벼들며 악다구니를 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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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는 그가 자랑스럽고(?) 사랑스럽다!
각오를 단단히 했던 백운산과 영취산은 오히려 쉽게 넘었는데 목적지에 이르는 마지막 관문인 깃대봉이 문제다. 거의 죽기 살기로 정상에 올라 마지막 간식을 탈탈 털어 먹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스틱으로 겨우 버티며 육십령까지의 긴 내리막길에 올랐다. 그래도 길섶에서 마주치는 제비꽃은 참으로 곱다.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봄볕 아래 나부죽이 엎드려 꽃망울을 티우고 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때론 힘들다 투덜대며 ‘끌고 온’ 엄마를 원망하기도 했던 아들아이가 순간 걸음을 멈추고 제비꽃을 가리킨다.
“엄마, 이 시 들어 봤어?”
제비꽃을 알아도 봄은 오고
제비꽃을 몰라도 봄은 간다
제비꽃에 대해 알기 위해서
따로 책을 뒤적여 공부할 필요는 없지
연인과 들길을 걸을 때 잊지 않는다면
발견할 수 있을 거야
그래, 허리를 낮출 줄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거야 자줏빛이지
자줏빛 툭 한 번 건드려 봐
흔들리지? 그건 관심이 있다는 뜻이야
사랑이란 그런 거야
사랑이란 그런 거야
- 안도현 ‘제비꽃에 대하여’ 중에서 -
국어 시간에 배웠다는 시를 읊는 아이 앞에서 못난 엄마는 새삼스럽게 감동한다. 사랑이란 그런 거야 ……. 내가 모르는 사이에 아이가 이만큼 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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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눈물까지 핑 돈다.
기실 아이가 아니라 나를 위한 산행이었다. 비가 오면 내 아이 남의 아이 가리지 않고 우비를 챙겨 입히고, 넘어질세라 다칠세라 서로를 보듬으며, 나의 아이는 우리의 아이로 점점 자라난다. 슬렁슬렁 넘겨들었던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아프리카의 속담이 새삼스럽다. 가족이라는 좁은 공간의 높은 울타리를 열면 제비꽃이 보인다. 낮고 작아 더 고운 세상이 보인다. 언제 엄마를 위해 시를 읊었나 싶게 친구들이 뵈자마자 쏜살같이 달려가는 아이의 뒷모습도 한 송이 제비꽃 같다. 제비꽃 무더기가 와아아 웃는다.
제5차 산행 거짓 허기
날짜 : 5월 8일
위치 : 전북 무주군 무풍면 - 전북 무주군 안성면
코스 : 빼재(신풍령) - 갈미봉 - 지봉 - 귀봉 - 백암봉(1503m) - 동엽령 (1320m) - 안성탐방센터
거리 : 총 17Km (마루금 12.5Km + 접근거리 4.5Km)
소요 시간 : 12시간
산에서 먹는 아침 혹은 점심식사를 아이들은 ‘꿀맛’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한밤중에 졸린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 비몽사몽간에 체조를 하고 새벽 산행을 시작할 때는 미처 잠에서 덜 깬 위장이 어리둥절하여 배가 고픈지도 어떤지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두어 시간 어둠을 헤치며 산을 오르다 보면 저절로 다리가 허청허청하고 속이 헛헛해지는 순간이 온다. 이런 때가 오기 전에 부지런히 에너지를 보충해 공복을 달래면 좋겠지만, 가뜩이나 낯설고 서러운 새벽길에 배낭을 뒤져 먹을거리를 찾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적당히 시간이 지나 땀을 흘린 뒤에 먹는 아침밥이 얼마나 달고 맛나겠는가? “시장이 반찬”이라는 속담이 틀림없이 들어맞는 순간이다.
“산에서는 배가 고프기 전에 먹고 목마르기 전에 물을 마셔야 합니다. 배고픔과 갈증을 느끼는 순간은 이미 늦은 겁니다. 배가 고프지 않고 목이 마르지 않아도 탈진과 탈수를 막기 위해서는 꼭 그래야 해요!”
산행 초기에 선배 산꾼들에게 들었던 말씀을 잊지 않고 있기에 의식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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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때때로 간식을 챙겨 먹고 물을 마시려 한다. 어쩌면 나는 마음보다 몸을 더 믿는다. 더군다나 나약한 한 마리 짐승으로 대자연 앞에 내동댕이쳐진 상태에서는 의지보다 실상을 믿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배가 고프지 않아도 꾸역꾸역 빵과 비스킷을 씹어 탄수화물을 보충하고, 체질적으로 물을 잘 먹지 않는 편인데도 휴식 때마다 억지로 물과 주스를 마신다.
도시락 메뉴만큼이나 간식거리에 대한 고민도 크다. 오늘 내 배낭 속에 든 간식거리를 공개하자면 과일(씨 없는 포도와 반절한 딸기), 소시지, 사탕, 초콜릿, 빵, 초코바 등이다 인터넷 사이트 전투식랑닷컴과 산악 동호회 카페를 들락거리며 엄선한 메뉴이다.
오늘 산행은 지리산에서 백두산을 향해 가는 방향이 아니라 백두산에서 지리산 쪽을 향해 가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새벽 4시경 무주의 빼재에서 마루금을 밟기 시작하여 오전 10시 반경 오늘 산행에서 가장 높은 해발 1503m의 백암봉에 다다랐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적당히 반복된 구간이라 아주 힘들거나 어렵지는 않았다. 앞으로 한 시간 남짓만 더 가면 목적지인 동엽령에 도착해 하산을 시작하리라는 말을 들으니 긴장이 풀려 마음이 자유롭다.
백암봉 정산에서 뒤처진 후미를 기다리며 간식을 먹는다. 앞으로의 산행이 길지도 않고 사실은 별로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가방을 비운다는 핑계로 남은 것들을 탈탈 털어 우걱우걱 먹어 치운다. 정작 에너지 보충이 필요한 산행 중에는 마음과 몸을 도사리느라 입맛도 없는데, 긴장이 풀리니 손이 자동적으로 입과 비닐봉지 사이를 오간다. 머리로는 멈춰야지 생각하는데 손이 멈추질 않는다.
그래서 산에서 돌아와 체중계 위에 올라보면 놀랍게도 몸무게는 떠나기 전보다 불어 있기 십상이다. 하루에 한두 끼밖에 못 먹고 산을 헤맸다고는 하지만 그 한두 끼가 세 끼 이상을 상쇄할 만한 폭식이었던 것이다. 낯선 곳에서 언제 끼니를 챙겨 먹을 수 있을지를 알 수 없기에 먹을 수 있을 때 한껏 ‘먹어 두는’ 것이다. 나를 살찌운 것은 불안이다. 긴장이다. 내가 제어할 수 없는 낯선 삶의 순간이다.
배가 부른데도 음식에 대한 탐욕을 누르지 못하고, 야식을 먹으면 고스란히 복부지방을 만드는데 쓰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손가락은 이미 ‘24시간 야식’의 전화번호를 누른다. 이 야릇한 식탐을 미국의 심리학자 로저스 굴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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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적 허기’라고 명명했다.
이처럼 몸의 허기를 느끼는 위장에 대비해 정서적 허기를 느끼는 마음속의 빈 공간을 정신과 의사 하지헌은 ‘유령 위장’이라고 부른다. 그는 ‘도시 심리학’에서 이렇게 말한다.
“원래 위장이 비면 뇌의 식욕 중추는 ‘배가 고프다’라고 느껴 음식물을 섭취하고 싶은 욕구와 행동을 조장한다. 그런데 유령 위장은 정서적으로 흔들릴 때, 뭔가 결핍되었다고 느낄 때 ‘고프다’라는 신호를 뇌에 보낸다. 이후의 작동 기재는 진짜 위장이 비었을 때와 같다. 진짜 위장이 비었을 때와 달리 유령 위장은 아무리 먹어도 충족감이 없다.
오늘의 산행 구간이 비교적 쉽고 순탄했다고 희희낙락했던 것은 섣부른 입방정이었다. (아무튼 산행에서 장담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동엽령 삼거리에서 버스가 기다리는 안성탐방센터까지 가는 길은 본래 칠연계곡이라 불리다가 용추사가 자리 잡고 있다 하여 현재 용추계곡이라 불리는 계곡길이다. 모두 10여 Km에 이른다는 용추계곡은 상사바위와 매바위, 심원정 등 빼어난 경치로 유명하다. 조선시대에는 팔정팔담(八亭八潭)이라고 불리며 선비들의 사랑을 받던 8개의 연못과 8개의 정자를 가지고 있었고, 그 아름다움과 신비로움 때문에 이 계곡에 들어서면 누구나 진리를 찾게 된다고 하여 ‘심진동(尋眞洞)’이라고까지 불렸단다.
그런데 이 용추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동안 나는 왜 그동안 많은 대간꾼들이 덕유산을 난코스로 지목했는지 알 것 같았다. 물론 백두대간 중 산이 높은 구간에 속하기도 하지만, 이에 더하여 대간 길보다 접속 구간이 길고 힘들기 때문이다. 산행이 다 끝난 마당에 오로지 버스를 타기 위해 내리막길을 1시간 이상 걷게 되니 아이들도 어른들도 점차 얼굴이 일그러진다. 여러 곳이 ‘너덜겅’이라고 불리는 불규칙한 돌길이고 그나마 곳곳이 끊겨 염소뜀을 해야 한다.
그렇게 용추계곡을 따라 내려오다 보니 선두 그룹이 커다란 나무 한 그루 (아니 두 그루, 아니 한 그루인가?) 앞에 멈춰 서 있다. 어느 이름 모를 선객 혹은 무명 시인이 ‘솔도령과 서어낭자 사랑 이야기’ 라는 연애시까지 코팅해 붙여 놓았다.
우리는 이렇게 백년을 같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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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릴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지만
그래도 모자람이 많아 앞으로도 이렇게 백 년을 같이 하렵니다.
이제 우리 함께 있는 설렘보다 포근하고 편안한 마음이 먼저 합니다.
첫눈 내린 추운 겨울날에도 천둥 번개 치는 소나기 내리는 날에도
항상 우린 감싸 안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
두 그루가 마치 한 그루처럼 서로 끌어안듯 얽혀 있는 ‘연리목’이다. 한 그루는 침엽수의 대표 수종인 소나무이고, 다른 한 그루는 극상림(極相林)의 주요 수종인 서어나무이다.
기나긴 하산을 마치고 목적지에 도착하니 아이들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마음이 고플 때는 그것에 걸맞은 요깃거리가 따로 있을 것이다. 기왕이면 포만감은 주되 덕지덕지한 군살로 남지 않는 산뜻한 영양식이었으면 좋겠다. 한 숟가락씩 먹을 때마다 외로움의 허기가 채워지고 쓸쓸함의 갈증이 가시도록, 천천히 음미하며 오오래 먹을 수 있는 그것! 조심스럽게 그 특별 요리의 재료를 짐작해 본다. 아이스크림보다 더 달콤하고 연리목 보다 더 끈덕진 그것은 단 하나.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듭거듭 굶주려하고 목말라 하는 사랑, 그뿐일 것이다.
제6차 산행 나답다는 것
날짜 : 5월 21일 ~ 22일
위치 : 전북 장수군 장계면 - 경남 거창군 북상면
(첫째 날)
코스 : 육십령 - 할미봉(1026.4m) - 서봉(1492m) - 남덕유산(1507.4) - 삿갓봉 - 삿갓골재대피소 - 황점마을
거리 : 총 16Km (마루금 12.8Km + 접근거리 3.2Km)
소요시간 : 12 - 14시간
(둘째 날)
코스 : 황점마을 - 삿갓골재 대피소 - 무룡산(1491.9m) - 동엽령 - 안성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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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지원센터
거리 : 총 14.5Km (마루금 6.3Km + 접근거리 8.2Km)
소요시간 : 8시간
2주 사이에 산색이 바뀌었다. 연둣빛으로 난만했던 봄빛이 시나브로 잦아들고 짙푸른 여름빛이 하늘과 땅 사이를 꼼꼼히 메워간다. 관중, 노루오줌, 지네고사리, 투구꽃 등 야생초들이 앞 다투어 피어나 초록의 향연에 흥취를 더한다. 폐부 깊이 들이마시는 공기가 맑고 산뜻하고 쨍하다.
이번 산행은 우리 팀이 처음으로 하는 1박 2일의 여정이다. 오늘은 남한의 백두대간 코스 중에서 ‘터프’하기로 유명한 남덕유로 간다. 종주를 마친 선배 대간꾼들이 어려운 구간으로 지목하는 몇몇 험산 중의 하나이다. 남덕유를 넘다가 무릎을 크게 다쳤다는 사람도 있고, 이 구간을 다녀온 뒤 백두대간 종주를 포기했다는 사람도 있다. 이틀 연속으로 산을 타야 하니 준비물이 많아 배낭도 무겁고 체력 소모 역시 만만치 않을 것이다. 각오를 하며 등산화 끈을 단단히 조인다.
새벽 3시 50분쯤 육십령에 도착했다.
시작부터 만만치 않다. 높고 험한 재여서 구름도 쉬어 간다는 육십령은 옛 시절 들끓는 산적들 때문에 60명 이상의 인원이 모여야 함께 뭉쳐서 고개를 넘을 수 있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다행히 육십령의 높이가 이미 730m인지라 1026m의 할미봉까지는 300m 정도만 오르면 된다는 말이 위로가 될락 말락 한다. 할미봉은 그 이름에서 기대하는 온화함이나 예상되는 쇠락함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씩씩한 암봉이다. 할미봉 아래 성터가 있는데 옛날 어느 할머니가 치마폭에 돌을 날라 그 성을 쌓았기에 할미성이라 했고, 그렇다 보니 할미성이 있는 산봉우리는 자연스럽게 할미봉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가파른 오르막길도 문제지만 아슬아슬한 내리막길이 더 문제다. 지원 산행을 나온 4기 선배들은 자신들이 종주할 때만 해도 없던 나무 계단이 정상부에 생겨서 내려가는 게 쉬워졌다고 하지만 계단이 끝난 이후부터는 줄곧 로프를 잡고 낑낑거리면서 줄타기를 해야 했다. ‘난간이 설치된 바윗길을 내려갈 때는 쇠기둥 밑 부분에 발을 걸치고 줄을 가볍게 잡고 내려가며 가급적이면 팔 힘을 아끼는 것이 좋다’는 원칙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몸으로 실현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등산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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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력이겠지만 이런 대목에서는 순발력이 문제가 된다. 그래도 바짝 신경을 쓴 덕택에 모두가 무사히 바윗길을 내려왔다.
덕유산은 명성 그대로 혹독했다. 뜨거운 길은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산등성이에는 몸을 숨길 그늘 한 점 없다. 재잘재잘 잘도 떠들던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 말을 잃었다. 지친 몸에 발걸음이 무거위지면서 선두와 후미의 간격도 크게 벌어졌다. 이번만큼 혼자 걷는 구간이 많은 적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고요 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떠돈다. 오롯이 나 혼자다. 고통도, 갈증도, 두려움이나 외로움까지도 나 혼자 스스로 견뎌야 한다.
오늘은 사월 초파일이다. 천성천하유아독존.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서 오직 나만이 홀로 존귀하다…. 간혹 자기중심주의나 배타주의, 독불장군식의 오만함으로 오독되는 그 오묘한 말씀을 곱씹으며 걷는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오로지 홀로, 높고 귀한 ‘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나’는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닌 ‘나’이다. 나는 부처이면서, 무명의 어리석음을 깨치는 금강의 원리를 물은 인도의 ‘조폭’ 출신 제자 수보리이면서,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인 부처에게 영원의 미소로 화답한 가섭이면서…… 온몸으로 땅을 밀어 사는 지렁이이면서, 집을 짊어지고 정처 없이 떠도는 달팽이이면서, 평생을 우리에 갇혀 사는 돼지이면서……하늘이면서, 땅이면서,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이다. 그리하여 내가 없으면 세상도 없다. ‘나’는 가장 낮으면서 가장 높고, 가장 작으면서 가장 큰 홀연한 존엄이다.
오전 열시 반을 조금 넘어서 드디어 남덕유의 정상에 도착했다. 마지막 고비인 철제 계단을 오를 때는 다리가 후들거려 몇 번을 멈춰 섰다. 산행 시간 6시간 반 경과, 하지만 하산길까지 포함한다면 아직 절반 밖에 오지 못한 셈이다.
한 시간 반이 더 지나 월성치에 도착했을 때 모두들 물이 바닥났다. 나는 컵라면 용 보온병의 더운 물을 조금 남겨 뒤따라온 아들아이에게 먹이고는 가슴이 아팠다. 내 아이를 위해 남긴 물이기에 다른 아이에게 나눠줄 수 없다……. 몸의 고통을 떠나 이번 산행을 통틀어 마음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 나는 엄마라기보다 이기적인 ‘어미’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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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수 직전의 아이들과 월성치를 내려가노라니, 삿갓봉 근처에서 솔희 아빠와 용욱 아빠가 역전의 용사들처럼 허리춤에 생수병을 매달고 역주행을 하고 있다. 월성치에서 아이들이 일행이 아닌 다른 등산객에게까지 물을 구걸하는 모습을 보고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서둘러 삿갓골재대피소까지 뛰어갔다. 오시는 거란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아빠들과 그 덕택에 시원한 물을 마시고 기운을 되찾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노라니 나의 ‘나’는 오그라들고 쪼그라들어 콩알만해졌다.
산을 오르면서 참 여러 모습의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럭저럭 괜찮다고 생각하는 모습도 있지만 오늘처럼 부끄럽고 참담해지는 꼬락서니도 있다. 그러니 간디 선생의 말씀이 꼭 맞다. 성전이니 경전이니 하는 위대한 것들을 아무리 속속들이 내리꿰고 아무리 고상한 말을 줄줄이 지껄일지라도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그 결점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그러하기에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자신을 아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아는 것이다!”
첫날 산행은 결국 14시간 만에 끝났다. 톺아보건대 내 체력이 견딜 수 있는 산행 시간의 한계는 약 8,9시간 정도이고, 나머지는 거의 정신력을 빙자한 무아지경이다. 10시간이 넘어가니 발목이 저절로 팍팍 꺾였다. 이러다가 부상을 당하겠다 싶어 정신을 똑바로 차려보려 애썼지만 주의력과 집중력이 떨어져 마치 만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렸다. 특히 숙소로 마을 회관을 빌린 황점마을까지의 마지막 하산 길은 체력과 인내력과 정신력을 동시에 시험하는 듯했다.
그야말로 이를 악물고 걸었다. 내가 지금 왜 이 짓을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 따위를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으려고 부단히도 애썼다. 내가 걷는 이 길이 바로 나의 길이다.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도 나이고, 무모한 일을 감당하는 것도 나다. 돌아갈 수 없을 바에야 묵묵히 나아갈 수밖에 없는 거라고, 나는 엄살 부리거나 징징댈 수 없는 어른이기에 그저 어금니가 시큰하도록 이를 악물 뿐이었다.
그런데 둘째 날, 산행을 시작하기에 앞서 다시 1시간 반 동안 어제 내려온 길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마루금만 딱 걷고 돌아오면 좋겠으나 산길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 시작하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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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기 위해서도 마무리 품을 팔아야 한다. 둘째 날 산행은 배보다 배꼽이 더 커서 마루금의 거리보다 접근 구간이 더 긴 지경이다. 어제의 노독이 채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불평이 저절로 터져나오지만 어쩔 수 없다.
어쩌면 삶 그 자체를 사는 것보다 삶으로 다가가기 위해 어물거리며 사는 시간이 더 많지 않은가?
어제 물 부족으로 엄청나게 고생을 한 터라 모두들 담을 수 있는 용기를 끌어내어 물을 담았다. 그런데 이건 또 어찌 된 운명의 장난인지, 산행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하도 물 타령을 해댔더니 제대로 물맛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빗방울은 점점 굵어져만 갔다.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삿갓골대피소에서 간단히 간식을 먹고 본격적으로 마루금을 진행하려는 순간 강풍이 불어와 온몸을 때리기 시작했다. 정말 엄청난 바람이었다. 중2 채운이의 표현대로 무슨 재난 체험장에 들어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바람이 우박과 비와 함께 얼굴을 후려쳤다. 평생 맞을 바람을 한꺼번에 맞는 듯 얼얼하고 떨떨했다. (나중에 일기예보를 확인해보니 그날 덕유산에는 강풍주의보가 내려졌다고 한다.)
비옷을 입었지만 이미 재킷과 신발은 물론 속옷까지 흠뻑 젖었다. 때 아닌 추위에 어금니가 덜덜 떨리며 오한이 들었다. 깊이 뒤집어 쓴 모자 밖으로 빗방울이 부딪히는 소리가 귀청을 아프게 때렸다. 몸집이 작은 아이들이 날아갈까 봐 어른들은 아이들 곁에 바짝 붙어 섰다. 무룡산을 어떻게 올랐는지도 모르게 올랐다. 내려와 길에 서서 빗물에 젖은 주먹밥을 씹어 삼켰다. 처음의 계획은 향적봉대피소까지 가서 곤돌라를 타고 무주리조트로 내려가는 것이었는데, 강풍에 곤돌라의 운행이 취소되었다고 한다. 꼼짝없이 비바람을 뚫고 우리의 발을 움직여 걸어 내려가야 한다. 그 내리막길이 바로 5차 산행에서 모두의 무릎을 사정없이 괴롭혔던 동엽령 아래 용추계곡이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 천지는 만물을 기르고 다스림에 있어 억지로 인심을 쓰지 아니한다!
거짓으로 착한 척 인자한 척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연에 맡긴다는 하늘과 땅의 뜻이 무시무시하다.
우린 아빠는 산을 알고 배우는 방법은 무식하게, 아주 무식하게 온몸으로 오르내리는 것이 최고의 지름길이며 정통이라고 했다. 정말 무식하였기에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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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배웠다. 배우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고통의 1박 2일 산행이었다.
온 몸은 만신창이고 어제 오늘의 지독한 기억은 산마루에서 어지러이 몰려다니던 구름떼 같지만, 하늘과 땅의 혹독한 가르침 속에 우리는 비로소 어설픈 등산객이 아닌 ‘대간꾼’이 되어가는 듯했다.
선천성, 혹은 후천성 중증 건망증 환자인 내게도 1박 2일의 남덕유 종주는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모두 성큼 자라난 느낌이다. 피로에 지친 얼굴 위에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하는 빛이 미미하게 떠돈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까지도 하늘과 땅의 가르침을 배우는 일에는 시도 때도 연령제한도 없다.
제7차 산행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날짜 : 6월 6일
위치 : 전남 구례군 산동면 - 전북 남원시 주천면
코스 : 성삼재-묘봉치-만복대(1438.4m)-정령치-고리봉(1305m)-고기리
거리 : 약 12Km
소요시간 : 7시간
성삼재에서 만복대와 정령치 휴게소를 거쳐 고기리까지 가는 오늘의 산행 구간은 백두대간 중 가장 짧은 코스로 알려져 있다. 지난번 덕유산 산행을 하도 호되게 진행했던지라 대원들이 질려 떨어져나갈까 봐 기획을 맡은 호중 아빠가 특별히 배려해 잡은 ‘슬리퍼 구간’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마침내 지리산 자락에 들어섰다. 천왕봉까지 가는 산행은 9월 중에 1박 2일로 계획되어 있지만, 조선의 4대 명산 중 남한에서 유일하게 손꼽히는 지리산에 발을 들여놓는 심경이 예사롭잖다. 육당 최남선은 1946년에 펴낸 책 ‘조선의 상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 : 4대 명산이란 무엇입니까?
답 : 조선의 동서남북 사방에서 경치로서 대표되는 명산을 뽑아서 동에는 금강, 남에는 지리산, 서에는 구월산, 북에는 묘향산을 4대 명산이라고 일컫는 일이 있습니다. 이 4대 명산을 두루 본 다음 마지막으로 묘향산에 들어가 살았던 서산대사라는 이가 4대 명산의 우월을 판정하기를 “금강은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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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장(秀而不壯)하고 지리는 장이불수(壯而不秀)하고 구월은 불수부장(不秀不壯)한데 묘향은 역수역장(亦秀亦壯)하니라!”라고 하였다는 말이 퍼져 있습니다.
지금은 갈 수 없는 땅에 자리한 묘향산이 얼마나 빼어나고 웅장한지 확인할 길이 없으나, 지리산이 웅장하기는 하지만 빼어나지는 않다는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밝힐 방도도 없지만, 남한 최고의 명산이라는 말이 아주 허풍만은 아닌 게다. 지난밤을 거의 새우고 버스 안에서도 잠을 설쳐 비몽사몽간에 시작한 산행임에도, 멀찍이 반야봉과 천왕봉을 바라보며 노고단을 등지고 걷는 동안 머리는 점점 맑아지고 발걸음은 차차 가벼워진다. 구간 중 가장 높은 만복대를 거쳐 정령치까지의 내리막길을 걸을 때 잠시 홀로 조리대가 우거진 숲길을 지나게 되었는데, 앞에 펼쳐진 조붓한 오솔길을 바라보는 마음이 문득 야릇하게 설레어 나도 모르게 뇌까렸다.
아, 행복하다! 살아 있어서 참 다행이구나!
오롯이 혼자만의 행복감을 만끽하며 걷노라니 문득 ‘흙탕물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이라는 불교 우화집에서 읽은 윤회와 관련된 이야기 한 자락이 생각난다.
사람이 죽으면 다음 생이 시작되기 전까지 그 영혼이 잠시 쉬며 머무는 곳이 있다고 한다. 그곳에는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처럼 그늘이 넓은 큰 나무가 있고, 그 나뭇가지에 이승을 떠나 저승에 온 영혼들의 살아생전 사연이 적힌 쪽지가 주렁주렁 걸려 있단다. 그래서 다음 생으로 떠날 채비를 하며 다리쉼을 하는 동안 영혼들은 그 사연들을 읽고 그중 마음에 드는 것으로 후생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부터다. 하나하나 쪽지를 펼쳐 읽노라니 모두가 하나같이 너무나 슬프고 괴롭고 마음이 아파서 영혼은 차마 다음 생으로 ‘갈아타고’ 싶다는 마음을 먹지 못하고, 결국에는 자신이 이미 겪었던 전생을 다시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 달린 소제목은 ‘슬픔의 자리, 행복의 자리’였다.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고통의 바다(苦海)이자 불의 집(火宅)인 삶의 아픔과 뜨거움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결국 슬픔의 자리와 행복의 자리는 따로 있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교훈일 테다. 누구나 자신이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힘들다고 엄살을 부리거나 기구함을 한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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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불행은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측정되지 않는다. 행복 역시 마찬가지다. 행불행은 타인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자신의 생에 행복하고 불행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다.
나는 가장 빠른 시간 내에 가장 치명적으로 불행해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남과 나를 비교하라. 그리고 나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보다 남의 말을 들어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한 마디에 너무 충실한 사람들은 그 말이 본래 인간의 행동과 공동체의 문제를 다룬 ‘정치학’에 담겨 있으며 바람직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거라는 사실은 무시하고, 남의 이목에 과다하게 집착하며 에너지를 쏟는 일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삼는다. 공동체 문화의 긍정성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삿된 흔적만 ‘오지랖 문화’로 남아 있는 한국 사회에서는 더더욱 ‘나’를 찾고 ‘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가 쉽지 않다. 사회학자 강준만은 ‘눈치는 한국인의 숙명’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언제나 남의 눈을 의식하고, 잘살기보다는 잘사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행복하기 보다는 행복해 보여야 한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일까지도 남의 시선과 판단에 기준을 둔다. 어쩌면 우리는사회적 집단적으로 낮은 자존감을 강요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번 산행은 새벽 4시 반에 시작해 오전 11시 반에 끝났다. 계획과 예상대로 식사와 휴식 시간을 포함해 7시간 만에 끝난 셈이다. 오전 중에 산행이 끝나다니! 지난번 14시간 동안 지옥의 행군을 했던 걸 생각하면 감개무량하여 눈물이 찔끔 나고 두 손이 저절로 모아질 지경이다.
차가운 지하수에 소금기가 버석버석한 얼굴과 화끈화끈한 발을 씻고 마당의 평상에 걸터앉으니 시원한 바람 한 줄기에 모든 시름이 씻기는 듯하다. 반주로 마신 막걸리 한 잔에 불콰해진 얼굴을 비비며 반나절 내내 산행을 하고도 힘이 남아돌아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노라니. “아이의 모습이 바로 부처다!”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른다. 사실 산행을 끝내고 나면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다. 산발한 머리에 민낯과 맨발이 차마 드러내기가 미안한 지경이다. 그런데도 쭈쭈바 하나씩을 입에 물고 어른 아이가 어울려 깔깔대고 낄낄댄다. 부끄러울 것도 바보처럼 보일까 봐 걱정할 일도 없다.
우리는 오늘 또 하나의 산을 넘었다. 이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내 딛다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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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갈 수 있는 마지막 마루금까지 닿게 되겠지.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낙천적인 사람이었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난다. 산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참 많은 것을 가르친다. 그것도 거창하고 위세 당당한 강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소리 없이 스며드는 깨우침으로.
나는 오랫동안 마음의 감옥에 갇혀 살았다. 그 시절 나는 세상을 향해 “덤빌 테면 덤벼 봐!”하고 외치는 쌈닭이었다. 누군가 툭 던지는 말에도 파르르 떨며 덤벼들었다. 나름의 논리로 중무장을 하고 싸늘한 독설을 마구 내뱉었다. 끝까지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지 않고 논쟁을 벌여 선후배와 친구들을 울리기까지 하였다. ‘독하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하지만 누구도 나를 ‘강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나의 싸움은 지극히 파괴적이고 자멸적인 것이었기에 처음부터 승패를 따질 필요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만큼 돌려받았다. 아니 그보다 몇 배는 더 스스로를 해치고 상처 입혔다.
그 후로도 나는 많은 실수를 저질렀지만 누군가 말하길 실수를 해서 저지르는 가장 큰 잘못은 그 실수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하였다. 실수를 통해 나는 조금씩 성장하면서 성숙했고 차차로 남의 실수에 대해서도 너그러워지게 되었다.
남들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고 잘 보이려 애써봤자 언제나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굳이 적을 만들 필요는 없지만 필요할 때는 힘껏 싸워야 하기에 적보다 더 많은 우군을 얻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가장 잘 알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임을 잊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나를 괴롭혀 온 두려움과 궁금증이 오로지 내가 스스로 지은 마음의 감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열쇠도 없이 아주 쉽게 감옥에서 나왔다. 그 감옥은 처음부터 잠겨 있지 않았다. 그저 문을 열고 뚜벅뚜벅 걸어 나오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2011. 6. 9 - 제1부, 끝 -
* 제8차 산행부터는 2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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