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자 기 혁 명

보해성산 2011. 11. 24.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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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의사 박경철의

   자 기 혁 명


■ 박경철

0 외과전문의, 별명 ‘시골의사’

0 냉철한 경제 전문가, 통찰력 넘치는 칼럼니스트, 베스트셀러 작가

0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1,2.  시골의사의 부자 경제학. 시골의사의 주    식투자란 무엇인가.

0 매달 30회 이상 강연. 지난 10년간 Mbn의 ‘경제 나침반 180도’와 ‘생방    송 경제 공감’ 진행자. KBS 2라디오 박경철의 경제 포카스 진행 


* 젊음에겐 철학자의 심장으로 고뇌하고, 시인의 눈으로 비판하며, 혁명가의 열정으로 실천할 특권이 있다. 그것이 자기혁명이며 내가 주인이 되는 삶이다.   


- 프롤로그 -

■ 당신은 지금 당신 삶의 주인공인가!

히포크라테스 잠언집에 이런 말이 있다.

“인생은 짧지만 지식은 길다. 기회는 순식간에 지나가는데, 경험은 믿을 수 없고, 판단은 어렵기만 하다.”

그렇다 인생은 짧다. 우리 삶에서 기회는 순식간에 지나가므로 그것을 경험적으로 알아차리고 움켜쥐기란 너무 어렵다. 그래서 기회를 잡는 것은 때때로 우연이나 행운같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찾아 온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나눈 눈빛과 이 이야기들이 다음 세대들의 준비와 판단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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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내 아이만큼이나 이 땅의 청년들, 그리고 후배들의 미래를 진심으로 축복하고 싶다.

                        2011년 뜨거웠던 여름의 끝자락에서


제1장 나를 찾아가는 시간


◉ 나를 찾아가는 시간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신은 이렇게 말한다.

그가 지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는

네가 무슨 일을 하든 금하지 않겠노라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라. 


여기서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라는 이 마지막 구절은 ‘파우스트’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다. 괴테는 이 책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한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궁극적으로 지향할 수밖에 없는 ‘선(善)’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악마 메피스토는 “너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나는 언제나 악을 원하면서도 언제나 신을 창조하는 일부분”이라고 답하기도 한다. 역시 전율스러운 문장이다.


■ 방황은 노력의 다른 이름이다


주인공 파우스트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섭렵하고 자연의 이치까지 꿰뚫었지만, 지식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절망의 한계에 부딪힌다. 그는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 결국 악마와 계약을 해서 ‘젊음’을 얻고, 자신의 인생에서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순수한 여인의 ‘사랑’까지 얻게 된다.

하지만 행복이란 언젠가 다가올 불행의 전주곡에 불과한 것! 악마는 이 사랑을 비극적 결말로 유도하고, 파우스트는 다시 좌절하게 된다. 이때 사랑 다음으로 그를 유혹한 것은 ‘욕망’이었다. 그는 또다시 악마의 도움으로 이번에는 욕망의 대상인 그리스 최고의 미인 헬레나와 권력을 얻지만, 악마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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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이 파놓은 함정에 다시 빠지고 만다. 이렇듯 탐욕은 늘 비극을 잉태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어리석음과 방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구원을 받게 된다.     

여기서 핵심은 ‘방황은 노력의 증거’라는 것이다. 죄를 짓고, 심지어 악행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결국 인간은 ‘노력하는 한’ 구원의 길(올바른 길)을 찾아가게 되어 있는 존재다.


■ 단순한 욕망의 좌충우돌은 생에 대한 모독이다

사회 전체가 헬레나의 입술을 얻기 위해 악마와 계약한 파우스트 박사의 아바타가 되고 있다. 이것이 방황이 죄악시된 이유다. ‘뭘, 그리 고민하나? 적당히 눈감고 넘어 가면 되지’라는 악마의 목소리에 따르는 것은 방종에 불과하지만.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길을 내려는 방황은 아름다운 것이다. 남이 가는 길을 가면 편안하지만 종속되고, 새로운 길을 가면 험난하지만 독립적으로 서게 된다. 우리는 우주 그 자체이지 결코 종속적인 존재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내게서 출발하고, 그 답 역시 내 안에 있다.


그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고민하며 방황하고 노력하는 것은 바른 길을 찾기 위한 여정이어야 한다. 고민이 없다면 당연히 방황도 없다. 우리가 캄캄한 동굴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면, 때로는 바위에 머리를 부딪히고 때로는 발목을 접질리더라도 출구를 찾으려는 노력을 계속해야만 한다. 물론 그 결과 더 깊숙한 미로 속에 갇힐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무서워 그대로 앉아서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사람은 누구나 태생적으로 한계를 지닌다. 그런 이유로 파우스트 박사처럼 겉보기에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갖춘 듯한 사람도 나름의 고민으로 방황한다. 고민과 방황은 마치 숨 쉬고 밥 먹는 것처럼 우리와 함께한다. 하지만 그래도 계속 방황하며 노력하는 것, 주저앉지 않는 것. 그것이 나의 삶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다.

대신 노력하지 않는 방황이나 방종, 즉 욕망의 좌충우돌은 생에 대한 모독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하며 황무지를 여행하는 것만이 진정한 방황이다. 그 과정에 살이 찢어지고, 고름이 흐르고, 굳은살이 박혀 나무껍질처럼 단단해질 때, 비로소 온전한 내가 세워지는 것이다. 고민을 두려워 말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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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 우리 마지막 순간까지 방황해보자. 


◉ 낯선 것을 통해 본질을 통찰하다


“낯선 것과의 조우를 통해 이성이 시작된다.”

이는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인데 ‘생각’의 본질을 관통하는 선언이다. 우리는 익숙한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습관처럼 반복되는 동작과 행동들은 본능에 의존한 관성일 뿐 생각의 결과로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의식적으로 새로운 환경에 도전하라


새로운 상황에 대한 생각들이 사유되고, 그것들이 의식에 젖어들어 나의 행동이 교정되고 내면화되는 과정이 바로 긍정적 습관화, 소위 긍정적 애티튜드(attitude)의 형성이다. 반면 좁은 범위에서 습관화된 행동과 생각만 반복하게 되면, 우리는 모든 낯섦을 거부한 채 누에처럼 고치를 짓고 거기에 안주하게 된다.

따라서 나의 발전을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새로운 환경에 도전해서 새로운 생각을 많이 이끌어내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태도를 형성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다만 이렇게 해서 새로이 형성된 태도들은 거푸집에 부은 시멘트 반죽과 같아서 습관화하려면 오랜 기간 의식적으로 계속해야 한다. 만약 생각만 가득하거나 설령 새로운 생각을 정리했다 해도 그것을 새로운 습관으로 연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행동으로 연결하지 못한 생각’ 즉 관념에 불과하다


■ 습관을 깨려면 나쁜 습관부터 버려라


우리는 먼 길을 가는 여행자다. 그런데 그 긴 여정을 떠나면서 모래주머니를 주렁주렁 달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다. 잘 돌아보면 우리의 어깨에는 나쁜 습관이라는 모래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당연히 걸음은 무겁고. 몸은 지친다. 이때 아무리 좋은 습관이라는 물을 마셔도 걸음은 점점 무거워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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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길을 떠나는 자가 가장 먼저 할 일은 불필요한 짐을 내려놓는 것이듯, 우리도 나쁜 습관을 하나씩 내려놓아야 한다. 나쁜 습관은 마치 빙의된 귀신과 같아서 우리 몸과 마음에 찰싹 둘러붙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어깨에 올라앉은 오백 명의 귀신과 함께 길을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것을 하나씩 떼어내고 그 자리에 좋은 습관 풍선을 다는 작업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환경과 함께해야 한다.

늘상 습관적으로 살아가고 익숙한 것을 만나고 같은 길만 가면, 귀신은 하나하나 친구를 더 불러들인다. 하지만 새로운 환경에 뛰어들어 의식이 깨어나고 심장이 두근거리면, 귀신은 그 소리에 놀라서 떨어져 나간다. 그것이 긍정적 에티튜드(습관) 형성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문자로 된 것들을 익히고 다른 사람의 표현방식(사유)을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이유다. 나아가서는 소위 ‘문‧사‧철( 文學, 歷史, 哲學)’이라 불리는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요컨대 나의 사유를 두텁게 하고 내공을 쌓기 위해서는 결국 내 삶이 ‘새로운 자극→도전→생각→축적된 사유→태도화→새로운 자극’으로 이어지는 순환고리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 현상을 제치고 본질을 통찰하는 노력


지금 우리의 환경은 익숙한 것은 고사하고 밤거리의 네온사인처럼 새로운 정보가 넘쳐나고, 자고 나면 새로운 것들 투성이인데 무슨 소리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과거 사람들은 여행 기회도 적고 이동 정보량도 적어 세상을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혀야 했지만, 지금은 앉은 자리에서 지구 반대편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세상이다. 새로운 것을 소화하기에도 체할 지경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문제는 본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상은 복잡하지만 본질은 단순하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현상의 포로가 되기 쉽다. 일주일만 뉴스를 멀리 해도 마치 외딴섬에 떨어진 것과 같은 소외감을 느낄 정도니 정보 습득에 대한 두려움을 피할 수가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많은 정보가 실제로 나에게 필요한 것인가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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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은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화살 앞에 맨몸으로 서 있는 것과 같다. 수많은 현상(사건, 정보, 지식)은 안개처럼 겹쳐 본질을 흐리는데, 그 안개 속의 적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면 우리는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과감하게 현상(내가 참이라고 인식하는 것들)을 버리고 본질을 직선으로 관통하려면, 다양한 체험적 지식을 통해 얻은 새로운 생각과 기존의 것을 비교하고 개선하는 긍정적 태도를 꾸준히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테면 바닷물 한 컵과 한 바가지는 바다의 입장에서 보면 똑같이 미미하다. 바닷물의 근본 성질은 얼마나 많은 바닷물을 퍼올렸는가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맛을 보고 짠 맛을 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현상을 제치고 본질을 기반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곧 통찰적 시각이다.


◉ 침묵은 가장 능동적인 대화다


우리는 보통 침묵을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침묵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또 침묵은 우주가 탄생하기 전부터 존재해 왔으므로 현재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의 언어와는 다른 것이기도 하다. 즉 침묵한다는 것은 말하거나 말하지 않는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다른 형태의 아우라(Aura :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예술 이론에서 나온 말로 ‘흉내 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를 뜻함)를 지니는 것이다.  그래서 침묵은 그것이 언어 차원의 문제를 뛰어 넘는 적극적인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냐, 아니냐에 따라 전혀 다른 형태의 힘을 갖기도 한다.

예를 들어 침묵한다는 것은 관찰자가 되겠다는 의미다. 즉 내가 침묵하는 순간 나는 상대의 표현을 관찰하는 자가 되고, 반대로 말하는 순간부터 상대에게 관찰당하는 자가 된다. 물론 대상이 없는 침묵은 나를 관찰하는 적극적인 형태일 것이다. 실제 우리는 많은 수다를 떨며 살아간다. 타인에게 나를 관찰할 무수한 기회를 주는 것이다.                   

  

또 우리의 모든 행동은 시간과 함께하지만 침묵은 반대다. 침묵은 생각을 낳고 생각은 얼마든지 시간을 거꾸로 되돌릴 수 있다. 그러므로 침묵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시간의 포로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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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독일 바덴의 한 마을에서 의사로 일하며 다양한 저술을 남겼던 막스 피카르트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자.


인간은 자신이 나온 침묵의 세계와 자신이 들어갈 또 하나의 침묵의 세계(죽음) 사이에서 살고 있다. 인간의 언어 또한 두 세계 사이에서 살고 있다. 말은 순결함, 소박함, 원초성을 자신이 나온 침묵으로부터 얻는다. 그러나 미미한 지속성, 덧없는 사라짐, 허약함, 말이 자신이 명명하는 사물들과 결코 완전히 일치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은 두 번째 침묵, 곧 죽음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요즘 말 속에는 더 이상 죽음으로부터 나오는 침묵도 없다. 진정한 죽음이 없다. 오늘날 죽음은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가 아니라 다만 수동적인 어떤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애에서 죽음의 체험이 없기 때문에 죽음에 실패한다.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

                - 막스 피카르트 ‘죽음의 세계’-


막스 피카르트에 의하면, 침묵은 말하기 이전의 원형이다. 즉 우리는 침묵의 세계(생명 이전의 세계)에서 왔고, 다른 침묵의 세계(죽음의 세계)로 돌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들은 모두 이 두 침묵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틈새라고 할 수 있다.


■ 침묵은 또 다른 형태의 열정이다


침묵은 단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침묵하는 순간 외부와 나를 분리시키므로, 침묵한다는 것은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것 이상이며 관성에 의한 모든 행위를 멈춘다는 의미다. 그래서 타인에 대해 외부에 대해 침묵한다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열정이다.

우리는 이러한 침묵의 중요성을 잊고 산다. 침묵한다는 것은 시작과 끝을 인식하는 것으로, 사람을 겸허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또한 말로 표현되는 모든 것의 허무를 알아차리고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기만 당하는 나를 보호하는 중요한 장치이기도 하다.

하지만 외부의 강요에 의해 수동적으로 침묵하게 된다면, 그것은 침묵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사상과 철학을 왜곡하고 존재를 훼손하며, 자긍심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진정한 침묵은 누구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맞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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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응시의 힘


침묵은 응시를 낳는데, 응시는 사물을 스쳐 지나치지 않고 가만히 들여다 보는 것이다. 매일 무심히 걷던 산길에서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응시하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그때 그 길은 더 이상 어제의 길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크기는 내가 인식하는 시선의 범위 만큼이다. 산속 바위에 핀 꽃은 내 눈이 그것에 닿지 않는 한 피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왕양명(王陽明)의 시 ‘암중화(巖中花)처럼, 산속에 핀 꽃은 내가 인식하지 않는 한 꽃이 아닌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내가 인식하는 만큼이 내 세상의 크기인 것이다. 그러니 청년이 넓은 세상을 여행하고 도전하는 것은 그만큼 자기 세상의 크기를 넓히는 것이고, 그만큼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일이기도 하다.

김춘수의 시 ‘꽃’에 등장하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라는 구절도 내가 의미를 부여하고 인식할 때만 그것이 비로소 내 것이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가만히 사물이나 현상을 응시하지 않고서는 그것의 의미를 온전히 인식할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끊임없이 인식에 대한 긴장과 이완의 줄타기를 해야 한다. 세상은 내가 초대하는 것이다. 내가 초대하지 않는 한 나만의 세상도 없다.


청년의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때로는 소소한 것을 뛰어 넘어 큰 이상을 품어야 하겠지만, 반대로 나를 돌아보고 목표를 다지고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는 대상을 정확히 바라보고 차분히 응시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결국 침묵의 시간, 사색의 시간을 통해서만 초대할 수 있다. 그래서 청년의 시기에 중요한 것은 술잔을 비우며 뜨거운 열정을 노래하는 것만이 아니다.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 최소한의 침묵과 사색을 통해 나 자신을 관찰하고 바로잡는 시간이 필요하다.


◉ 극도의 몰입, 배움의 즐거움


머리가 좋다는 말은 집중력이 좋다는 말과 거의 동의어이다. 공부법은 곧 집중력에 관한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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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람이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은 다양하다. 누군가는 학교교육에 집중력을 발휘하지만 누군가는 사회활동이나 장사에 자신의 집중력을 발휘한다. 그 때문에 이런 다양한 집중의 대상을 무시하고 단지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에만 집중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다른 모든 분야에서 학생들을 패자로 만들어버릴 위험이 있다.     


■ 교육에 대한 데카르트의 통찰


철학자 데카르트는 학교교육을 통해 익힌 지식과 가르침이 언제나 옳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살아있는 경험을 하기 위해서 긴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여행 과정에서 스스로 깨달은 사실을 곰곰이 되새겨 학문에 대한 네 가지 규칙을 선언했다.


1. 계속 의문을 가져라 : 명확하게 ‘참’이라고 인정하는 것만 받아들이라.

2. 건너뛰지 말고 완전히 이해하라 : 큰 덩어리로 보지 말고 세분하라.

3. 토대가 중요하다 : 단순하고 쉬운 것에서 ⇒ 복잡하고 난해한 것으로 

4. 완전할 때까지 복습하라 : 모든 항목을 열거하고 그것을 재검토하라.


데카르트는 이 학문에 대한 네 가지 규칙과 함께, 사회인의 태도에 대해서도 네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1. 가장 보편적인 가치에 복종하고, 온건하며 신앙을 굳건히 하고 극단적인     의견의 편에 서지마라.

2. 행동을 취하는 순간에는 의연하고 명확한 태도를 취하라. 아무리 의심스     러운 결정이었다 하더라도 일단 결정을 내린 다음에는 확신을 갖고 그에     따르라.

3. 주어진 운명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며, 세상     을 바꾸려는 노력이전에 그릇된 욕망을 다스리는 데 주력하라.

4. 위 세 가지를 실천하는 바탕 위에서 일 할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라.


실제 공부는 미쳐야 이룰 수 있다. 원래 미친다는 것은 정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즉 일상적으로 행하던 다른 무엇인가를 포기한 상태를 말하고 정상적인 수준을 뛰어 넘는 집착이 생겼다는 의미다. 그러니 공부 때문에 다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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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포기하면 할수록 제대로 미쳐가는 것이다. 에디슨이 계란대신 시계를 삶았다거나, 숙선이 고개를 드니 머리가 하얗게 세었더라는 말처럼 시간과 공간의 경계조차 넘는 것이 미치는 경지일 것이다.


공부의 신세계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데카르트가 말한 원칙들을 다시 한 번 새겨보는 것이 좋다. 농담처럼 얘기하는 공자님 말씀이 아직까지 전해지는 이유는 그것이 정답이기 때문이고, 그 자존심 강한 철학자들 사이에서 데카르트가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이유도 그가 말한 것들이 가치 있기 때문이다. “주어진 운명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며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 이전에 자신의 그릇된 욕망을 다스리는 데 주력하라.” 세상에 어느 누가 공부에 대해 이보다  멋진 말을 한 적이 있단 말인가.


◉ 나는 원본인가 이미지인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같은 그림들은 미술이 아니다.”

미술에 문외한인 당신에게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면 당신은 분명 그가 당신을 조롱한다고 여길 것이다. 아무리 미술에 문외한이라도 ‘모나리자’나 ‘천지창조’ 정도는 이미 수십 번도 더 보았을 테고. 그 작품의 위대성 역시 익히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 우리가 진짜 모나리자를 본 적이 있는가. 대부분 원본 그림을 사실에 가깝게 찍은 사진 이미지다.

둘째, 실제 본 적도 없이 모나리자에 감동하는 이유는 수없이 들어온 학습효과 때문이다.

셋째, 루브르 박물관이나 시스티나 성당에 가서 진짜를 보았을 때도, 이미 알려진, 위대하다고 규정된 미술작품을 ‘알현한’ 감동과 흥분일 가능성이 크다.    

이 이야기가 약간 혼란스럽다면 이번에는 ‘빌레도르프의 비너스’나 이집트 기자에 있는 피라미드를 생각해보자.

첫째,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 : 원시시대 ‘다산의 상징’으로 만들어진 거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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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뚱뚱한 여인상으로 후세 사람들이 ‘다산의 상징’이라는 말과 ‘질박미’라는 해석을 붙여 놓았을 뿐이다.

둘째, 기자의 피라미드 : 귀신이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파라오의 거대한 돌무덤으로 후세 사람이 거기에 본래와 다른 미적 의미를 부여했다.

      

어쨌건 예술에는 대중예술과 고급예술, 그리고 대중예술이면서 고급예술임을 가장하는 키치도 있다. 굳이 우리가 이들의 가치를 따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저 대중 예술은 당대의 기쁨과 슬픔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어법으로 드러내는 것이니 대중예술의 존재가 최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고급예술은 당대의 모순을 드러내고 실존의 고민을 고급스러운 예술 양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예술은 ‘흔적’을 등한시하지만, 고급예술은 ‘영원성’을 중시한다. 대중예술은 그 시대에서만 소비되지만, 고급예술은 당대를 넘어서도 유효하고 다음 시대에도 가치가 보존된다.


■ 진실을 무력화 시키는 키치의 비겁성


* 키치(Kitsch) : '싸게 만들다‘라는 독일어 동사 ’페어키첸(Verkitscen)'에서    유래


키치는 사실상 대중예술이면서 스스로를 고급예술인 양 기만하기 때문에 진실하지 못하고 거짓되며, 당대의 모순을 정면에서 응시하기보다는 에둘러 회피하고 오히려 진실을 무력화시키기도 한다. 또 가치를 생산하는 예술가는 스스로를 우아한 예술가인양 위장하며, 그에 중독된 감상자가 스스로 고차원적 정신세계를 공유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키치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세종문화회관의 ‘열주(列柱)’가 그리스 ‘회랑(回廊)’의 그것처럼 감동을 주지 못하고, 국회의사당의 ‘천장돔’이 ‘모스크’의 그것처럼 신성하지 못하듯 키치의 진실도 그러하다.


우리는 매일 열심히 노동을 하지만  그렇게 해서 번 돈은 만져보지도 못한 채 계좌상의 숫자로만 표현되고 신용카드를 긁으면 그 숫자가 빠져 나간다. 이제는 원본이 아닌 숫자가 돈인 것이다. 그리고 그 숫자는 주식이나 부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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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투지되어 저절로 불었다가 가라앉기까지 한다.

대부분 현대인들은 한 장의 설계도에 의존해 세포분열하듯 대량으로 찍어낸 비슷한 모양의 성냥갑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진짜가 사라진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도 복제되고,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도 정밀한 화소의 사진에 의해 대체된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보다 복제품이나 대체물에 기반 해 살아가는 것이다.

그 대체물들 안에 키치가 살아 꿈틀거린다.


정작 예술에서만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삶도 그렇다. 사람들은 삶이 지향하는 가치를 잃어버리고, 수단인 돈과 명예와 권력만이 목표가 되어 버렸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생존이라는 당위를 목적으로 삼은 채 살아가고, 시스템은 민주공화국을 외치고 있지만 이제는 어느새 ‘민주’나 ‘공화국’이라는 말의 의미조차 희미해진 지 오래다. 이런 가치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스스로 질문해야 한다.

나는 원본인가, 이미지인가? 복제물인가. 대체물인가?


■ 창의성은 타고 나는 재능이 아니다


우리는 종종 창의성과 천재성을 오해한다. 여섯 살 때 손가락이 건반 위를 날아다녔다는 모차르트처럼 천재성은 특정 분야에서 일반적인 범주를 뛰어 넘는 능력을 선천적으로 타고 났음을 뜻하는 말이다. 반면에 창의성은 선천적이건 후천적이건 ‘새로운 관계를 지각하거나 비범한 아이디어를 산출하거나 또는 전통적인 사고유형에서 벗어나 새롭게 사고하는 능력’을 의미하는 말이다.

즉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관점에서 보면, 기존의 것을 새롭게 해석하고 실마리를 찾아 조합하고 재창조하는 능력은 창의성에 가깝고, 특정 분야에서 평균 이상의 뛰어난 성과를 거둘 수 있는 타고난 기초능력이 큰 것은 천재성에 가깝다. 창의성은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새로운 물결을 만들고 시대를 선도하는 새로운 시각과 독특한 해석능력을 가리키는 셈이다.      그런 측면에서 예술가의 영감은 창의성과 천재성을 동시에 갖춘 독특한 성격을 띠겠지만, 일반인이 추구하는 창의성은 노력으로 얼마든지 키울 수 있는 개발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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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인 박응현씨는 창의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실패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우리는 어릴 때 수도 없이 넘어지면서 걷는 데 천재가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누구도 넘어지면서 일어나라는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니다. 스스로 하려고 해서 이룬 일이다. 실패를 하고도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은 그 실패마저도 즐겁다. 성공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는 ‘무언가’를 배운 기회였기 때문이다. 에디슨 식으로 말하면, 천재란 2,000번 실패해도 다시 시작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며 창의성은 실패한 뒤에 얻을 수 있는 빛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부분이 꽉 막혀 있다. 입시전쟁, 스팩 경쟁을 치르는 과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은 모두 배척된다. 나와 다른 환경에서 자란 친구와 교유할 수도 없고,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주유할 시간도 없다. 청년은 알바에 시달리고 학생은 시험에 찌드는 상황에서 새로운 환경에 대한 신선한 모험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 사회의 창의성 부재는 바로 이 지점에 가장 큰 걸림돌이기 때문이다.


창의성의 발현은 흉내내기(키치)가 아니라.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추억의 퇴비 속에서 이루어진다. 동물원의 황새가  슬픈 눈으로 사육사에게 먹이를 받아먹는 장면이 아니라, 어린 시절 툇마루에 앉아 생생하게 목격한 황새가 미꾸라지를 잡아먹는 모습에서 창의성은 꿈틀거린다.

‘나는 걷는다’와 같은 뛰어난 여행기를 읽고 자극을 받았다면 실제 내가 그 길을 따라 걸어봄으로써 영감이 얻어지는 것이지, 책 속의 사진 몇 장이 영감과 창의성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창의적 영감은 눈과 피부, 근육과 뼈가 체험하는 현장에서 자극을 받고, 거기서 싹튼 호기심이 가라앉은 나의 의식과 무의식의 손을 흔들어 새로운 조합을 이끌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창의성을 고민한다면 사람을 만나되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고, 땅을 밟되 처음 밟는 땅을 밟고, 책을 읽되 생소한 분야를 읽어야 한다. 생소한 것들이 부단히 나를 자극할 때 그 자극에 의해 지각이 갈라지고 용암이 터져 나온다.


절대 잊지 말자. 우리의 내면에는 모두 창의성의 씨앗이 자라고 있다. 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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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씨를 틔우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과 독서, 공상을 통해 창의성이 자랄 토양을 기름지게 가꿔야 한다. 또 몸으로 실천하는 행동을 통해 싹이 돋아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비록 지금의 시스템이 개인의 창발성을 인정하고 키우는 데 유리한 제도가 아니더라도, 조직 혹은 사회의 이름으로 내가 가진 창의성의 씨앗이 짓눌린다 할지라도 우리 스스로 창의의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그 속에 바로 자아실현의 길이 있다.


◉ 진정한 행복은 과정의 몰입에서 온다


■ 인간의 오늘은 우연성과 필연성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것


오늘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가 과거 어느 날 5분만 일찍 대문을 나섰더라면 지금 이 자리에 없을 수도 있다. 이 시간 어디에선가 일어나는 사고나 사건들 역시 피해자들이 1분만 늦거나 빨리 출발했다면 겪지 않았을 불행일수도 있다. 지금 어깨를 기대고 있는 그 혹은 그녀도 과거 어느 순간에 우리가 만나지 못했다면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났을 것이다.

이런 선택의 갈림길은 우리 무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엄청난 불안감의 한 원인이다.


무의식은 결심과 선택의 지점에서 늘 우리를 딜래마에 빠지게 하는 원인이고, 이로 인해 우리는 선택의 연속인 삶을 늘 두려워하고 자신 없어 한다. 그리고 그런 두려움은 필연에 대한 갈망으로 연결된다. 그것은 삶의 모든 것을 운명의 장난이라고 믿어버리고 싶은 마음인데, 세상의 모든 종교와 사상이 거기서 출발하는 것이다.               


■ 과정에 있을 때만 찾아오는 행복


이렇게 인간의 오늘이 우연성과 필연성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인간이 누리는 행복과 같은 감정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 그 감정들은 필연적인 무엇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 필연 사이에 우연히 끼여 드는 우연성들이 요청되는 것이다. 실제로 행복이란 무엇일가? 원하는 것을 갖게 된 상태를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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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이라 한다면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한 남자들은 모두 행복해야 하는데 왜 그렇지 않을까? 한강변에 50평짜리 아파트를 사기 위해 일생을 분투한 사람의 행복감은 왜 입주 후 환경호르몬의 영향이 채 가시기도 전에 사라지는 것일까? 우리가 행복이라 칭하는 모든 것은 왜 영원하지 않고 한여름 밤의 꿈처럼 소멸해버리는 것인지……. ‘행복’이라는 한 단어를 두고 이런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된다.


필자는 “행복하십니까?” 라는 질문을 받을 때 가장 곤혹스럽다. 행복이라는 감정이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느끼는 것인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갈망을 갖고 있는 순간인지에 대한 답도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을 때 느끼는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고 한다.  자동차, 집, 돈…… 그 모든 것이 막상 손에 들어온 다음에는 뛸 듯했던 처음의 기쁨이 금세 사라지고 새로운 갈망이 시작되기 마련인데, 그것을 보통 권태라 부른다. 그러나 권태가 수반되지 않는 진짜 행복을 얻으려면 시간이 경과해도 처음의 기쁨이 퇴색하지 않는 대상을 획득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권태가 따르지 않는 필연적 행복의 대상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대부분이 오늘도 열심히 추구하고 있는 돈이나 명예 등이 아니라 지식, 사상, 철학, 재능처럼 함께 함으로써 더욱 빛나고 가치가 변하지 않으며 새로운 가치를 끊임없이 창조해내는 것들이다. 행복에 이르는 길은 물질이나 사랑과 같은 갈망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존적 존재로서의 나를 뒷받침해주는 것들을 통해 만날 수 있다. 무엇인가를 성취하려는 목표지향적인 삶을 살다보면 시시포스의 바위처럼 끊임없는 마약 투여를 필요로 하고,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원하는 자극을 통제할 수 없다.

결국 행복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는 셈이다. 이는 매력적인 이성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다. 그 혹은 그녀를 얻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느끼는 가슴 떨림과 심장의 고동은 아프고 매혹적이지만, 막상 서로 사랑을 확인하고 연애를 시작하면 그 감정은 처음과 달라진다. 더구나 서로를 만난 과정 자체가 우연이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간절한 것은 손에 넣지 않는 것’이라는 행복의 공식을 지키려면 물론 그것을 완전히 성취할 수도 없고 그것을 성취하는 공식이 필연적으로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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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필연)이 우연과 결합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즉 “행복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예!”라고 답하기 위해서 어떤 계획된 것의 결과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단지 그 과정을 위해 지금도 애쓰고 있는 중이어야 하는 것이다.


◉ 나의 존재는 무엇으로 증명하는가


‘존재’라는 말은 달리 의문의 여지가 없는 보통명사다. 그런데도 동양이건 서양이건 철학은 늘 이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해온 학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몰론 헤겔 이후 존재에 대한 질문이 무의미해진 측면은 있지만 인류의 사상이 이 존재에 대한 궁금증으로 점철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가 보는 사과라는 존재는 겉으로 보이는 것일 뿐 속성은 각각 다르다. 그 때문에 각각 다른 사과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또 다른 이름을 붙이거나 달다. 시다. 벌레 먹었다. 단단하다. 크다. 작다. 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그 모든 서술이 사과의 존재를 명확하게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존재는 평균 혹은 일반적인 개념이다. 밥. 사과. 사람. 심지어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그 본질을 명확히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 보니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온갖 철학자가 머리를 싸매고 덤볐고 그리스철학에서 근대철학에 이르기까지 철학의 역사는 바로 이 문제와의 씨름으로 점철돼 있다.            


■ 존재, 존재자, 존재적


인간은 사물과 달리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관계 속에 규정된다. 지배를 받거나 질서에 소속되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 경우 불안감과 소외감을 느낀다. 심지어 하루만 전화벨이 울리지 않아도 불안해한다.

이렇게 여러 가지와 관련되어 있는 나를 가리켜 ‘실존’한다고 말한다. 즉 나는 나의 존재와 여러 모로 관계하므로 나는 실존적이다. 이때 나는 스스로에 대해 존재를 물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그것과 관계하는 현존재다. 그리고 나의 존재를 관계하며 소통하고 이해하고 규정하는 것은 실존이다. 물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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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존재에 대해 문제를 삼고 질문을 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다.  
  

■ 관계 속의 나


우리는 늘 ‘누군가’로 규정된 채 살고 있다. 이를테면 가족관계에서는 아버지나 아들딸로, 사회적으로는 국민 혹은 시민으로, 회사에서는 직책으로, 그것도 아니라면 누군가의 친구나 동료로 살아간다. 관계는 우리를 수십, 수백 가지의 속성의 틀로 재단하고 있으며 이것을 피할 도리는 없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자체가 선택이 아니듯, 우리의 삶도 그리 선택적이지 않은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목표들도 어쩌면 이런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피라미드의 좀 더 상위에 서고자 하는 욕망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래서 혹여 우리가 피나는 노력으로 스스로의 성취에 도달했다 해도, 그때부터 우리를 덮치는 것은 고독이다.


인간은 관계에 사로잡혀 질주하며 그 관계 속에서 상대적 서열을 규정하면서 스스로 자위한다. 그러나 그것이 학업이건 돈이건 권력이건, 모든 행위는 서열짓기에 불과하다. 내 서열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나를 규정하는 관계어는 점점 늘어난다. 그리고 그 복잡한 층위의 관계 속에서 점점 나를 잃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나를 잃어간다는 것은 실존적이지 않다는 뜻인데, 원래 실존은 속성에 우선하는 것이다. 진짜 나는 내가 간절하게 원하는 것, 나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 나 자신을 자각하는 것에 숨어 있을 뿐이다.


■ 관계망 속의 내가 아닌 나를 유지하는 법


그렇다면 관계망 속의 내가 아닌 나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그것이 큰 숙제인데, 이렇게 나를 찾아가는 작업은 속성으로부터 나를 자발적으로 소외시키는 것, 즉 사회적 관계가 요구하는 삶만이 아닌 나 자신의 요청과 균형을 맞추며 살아가는 것이 실존인 셈이다.

그러나 이런 실존적 삶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이에 대해 비겁한 굴복을 할 수밖에 없고, 이렇게 속성만 가진 ‘나’는 게임 속의 아바타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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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사회의 질서 속에 놓인 주인공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고민은 내일 일용할 양식에 대한 걱정이나 새로운 자동차 또는 요트에 대한 생각이 아니다. 그들의 망연자실함은 오히려 자기를 잃어버린 데서 오는 절대고독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고독을 느끼는 것은 타인과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여기지만, 진짜 고독은 타인과는 늘 함께하면서 참 나가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데서 오는 것이고, 이것을 가리켜 우울이라고 부른다.


관계 속에서 우리를 규정하는 속성은 거부하면 할수록 강하게 우리를 압박한다. 결국 해법은 속성과 실존적인 고민을 함께 병렬로 처리하는 것이다. 속성이건 실존이건 무엇이 우선하면 어떤가. 우리가 철학자의 논쟁에 놀아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우리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열심히 뛰고 있지만,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을 덮치는 고독과 소외와 갈등 역시 두려워하지 말고 받아내야 한다. 만약 그것이 힘들다면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일어나면 된다. 누군가 말했듯, 넘어짐은 단지 일어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한 것일 뿐이다.


◉ 나의 가치관은 무엇인가


나는 일생 동안 아프리카인의 투쟁에 헌신해 왔다. 나는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에도 맞서 싸웠고 흑인이 지배하는 사회에도 맞서 싸웠다.

나는 모든 사람이 조화롭고 평등한 기회를 갖고 함께 살아가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이상을 간직해왔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목표로 하고 성취하고자 하는 소망이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그런 소망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이 문장은 넬슨 만델라가 자신의 가치관을 묻는 질문에 대답한 말로, 이 짧은 문장 안에 그가 살아온 존경스러운 삶이 모두 압축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삶의 목표와 가치를 명확하게 세우고 오직 그 길로만 걸어간 사람이었다.

필자는 청년들이  진로에 대해 조언을 구할 때 자주 되묻는다.

“당신의 가치관은 무엇입니까?”

놀랍게도 대개의 사람들은 바로 답을 하지 못하거나 머뭇거린다.


■ 가치를 느끼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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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치관’의 사전적 의미 : 생활의 여러 국면과 과정에서 가치판단이나 가치     선택을 할 때 일관되게 작용하는 기준과 그것을 정당화 하는 근거. 혹은     신념의 체계적 형태.


가치관이란 문자 그대로 ‘가치를 보는 기준’이라는 뜻으로, 삶에서 어떤 것이 가치가 있고 어떤 것이 가치가 없는지를 판단하는 나만의 기준이 없는 상황을 가리켜 우리는 보통 ‘가치부재’라고 말한다.

국내 최대 기업의 경영자가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안타까운 선택을 하거나 인기 절정의 연예인이 한순간 생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그 이유는 바로 가치관에 있다.

대상을 탐색하고 과정의 고난을 극복하고 최대의 효율로 달려온 긴 여정의 결과 이룬 성취가 어느 순간 나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게 느껴진다면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가치를 느끼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일찌감치 가치의 잣대를 가진 사람, 뒤늦게 가치를 발견하는 사람, 영원히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 이중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뒤늦게 가치를 발견하는 사람이다. 차라리 영원히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무엇이 내게 주어졌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게 눈을 감을 수 있다.

하지만 가치의 잣대를 가지고 있지만 가치지향적 선택이 아닌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다른 것을 노력해야 하는 사람과, 뒤늦게 가치를 인식하고 자신의 성과를 전면적으로 부인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극도의 불행에 빠진다. 전자의 불행은 지속적이고 일상적이지만, 후지의 불행은 급작스럽게 다가온다. 어느 순간 벼락처럼 뇌를 파고들어 극도의 충격과 허무에 빠지게 된다.


■ 가치관의 형성에는 내외부 요인이 끊임없이 개입한다.


그렇다면 가치관이란 정말 무엇일까? 가치관의 하부구조는 직업관, 국가관, 연애관, 행복관 등 수많은 항목들로 구성되어 있다. 가치관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꽃이 아니다. 이런 개별적인 항목들이 형성한 가치의 평균이자 총합이다. 문제는 이것을 형성해가는 과정이다. 내 가치관의 형성에는 끊임없이 타자가 개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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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관을 예로 들어보면 

386 세대 :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

지금세대 : 글로벌 경쟁에서 승리할 인재 양성

역적이 충신되고 반역이 애국되고......

그래서 국가관은 당대의 눈이 아닌 시대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바람직한 가치관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나의 생각과 나라는 존재자를 정확히 응시하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나를 둘러싼 타자의 시선이 결합되어 실상이 없는 가치관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당시에는 가치지향적인 결정이라 믿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렇지 않음을 발견하게 되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더 두려운 것은 가치부재의 상황이다. 가치에 대한 고민이나 사유없이 단지 목적에만 충실하게 살다보면 언젠가 가치를 보는 눈이 성숙했을 때 나의 모든 삶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게 된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바람직하고 건강한 가치관을 정립하고 삶의 모든 선택을 그것에 의지해 해나가는 것이다.

일관성 있는 가치기준 아래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온전히 노력하며 뚜벅뚜벅 걸어 나간다면 모든 것은 일직선에 놓인다. 이때 걸음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걸어간 길에서 도달한 마지막 지점, 그것이 나의 성취이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목표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라는 표현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받아 들여진다. 가치지향적인 목표를 달성하자면, 내가 가는 모든 과정이 가치에 합당해야 한다. 단지 목표에 빨리 이르기 위해 우회하거나 편법을 동원한다면, 더 상위에 있는 가치의 서슬 퍼런 칼날이 언제든 내리칠 것이기 때문이다.


■ 가치 부재는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오늘날 사회적 성공과 부와 명예를 이룬 많은 사람이 청문회나 기타 상황에서 일거에 무너지는 것은 바로 그들의 삶이 이런 가치 혼재나 가치부재의 바탕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흔히 인생은 성공과 실패의 연속이라고 한다. 하지만 가치의 실패는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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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 결과론으로만 보면, 아흔아홉 번의 성공을 거듭했어도 백 번째의 실패는 완전한 실패다. 그 한 번의 실패로 인생에서 되돌릴 수없는 치명적인 결과를 떠안는 것이다 하지만 과정의 실패는 굳은살이 되어 단단한 발판이 된다.

영화 쿵푸팬더2를 보면 “Inner Peace!” 라는 대사가 반복된다. 내면의 평화, 그것은 가치지향을 가리킨다.  그 길 위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고, 무릎이 까지고 피가 흐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실패는 인생의 긴 여정을 함께 하는 아름다운 동반자다. 허용되는 실패는 가치를 향해가는 길 위에서 다시 일어나기 위해 넘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끊임없이 질문해보자.

나의 가치관은 무엇인가?


◉ 발산하지 말고 응축하라


청춘의 시기에는 열정이 앞서고, 열정은 신중함과 병립할 수 없다. 열정이란 좌고우면 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가서 꽝 하고 부닥치는 충동과 자신감이다. 청년의 시기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적고,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에, 일단 행동이 생각보다 많고 깊은 생각보다는 즉흥적 충동이 앞선다. 이 점은 청년기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약점이기도 하다.

사람은 모두 태어나서 죽는다. 삶의 시작과 끝은 모두 같은 것이다. 하지만 삶에 특별한 흔적을 남긴 사람들은 다르다. 그가 걸어온 길은 다른 사람들에게 떠밀려온 길이 아니고, 그가 생각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주입한 생각이 아니다.

청년기는 뜨거운 시기이며 청춘은 발산하는 것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인생에서 원없이 발산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시기라고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의미있는 삶을 살기 위해 청년기에 필요한 것은 누구나 생각하는 발산이 아닌 응축이다.                        


청년의 가슴에는 창의와 존재의 불덩어리가 돌아다니는데 그 중에서 창의의 불꽃은 새로운 것을 열망하는 뜨거움이다. 청년은 싫증을 빨리 내는데, 그것은 새로움에 대한 갈구와 지루한 것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난다. 이는 변화를 거부하지 않는 혁신의 모습이고 세상의 모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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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된다.

또 다른 불덩어리인 존재의 불꽃은 내가 주인임을 깨닫는 힘이다. 청년기는 굴종하지 않고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려는 의지가 가장 강한 시기다. 이런 의지와 자존심은 청년으로 하여금 도전하게 하는 힘의 근원이다.

청년의 가슴속에서 지펴진 불덩어리는 반드시 창의와 자존으로 피어올라야 한다. 자신의 내면에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불꽃을 자각하지 못하면 창의 대신 순종이, 실존 대신 의존적 미래가 기다린다.


내 안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무엇을 향하는지 모르고, 단지 뜨겁다는 이유로 그 불꽃을 뱉어버린다면, 삶은 탄식과 방황으로 이어진다. 이런 청춘의 방황은 도피에 불과할 뿐, 경험도 추억도 아니다.

창의와 존재의 불꽃은 쉽게 꺼뜨리거나 토해내는 것이 아니다. 내면화해서 응축하고 돌처럼 단단한 여의주를 만들어 가슴 속에 깊이 간직해야 한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거침없이 토해내며 세상을 향해 내달려야 한다.

‘청년기에는 혈기가 차오를 때이므로 욕망을 다스리고, 장년에는 혈기가 가득할 때이므로 싸움을 경계하고, 노년에는 혈기가 쇠퇴할 때이므로 탐욕에 주의하라.’ 공자의 말이다.


우리의 삶에서 20대는 준비, 30대는 질주, 40대는 수확의 시기다. 20대에 준비하지 않으면 30대에 질주할 힘이 없다. 사회에 나가 자신이 준비한 모든 것을 쏟아내기 위해서는 20대에 지구력과 근력을 키워야 한다. 많은 지식을 쌓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깊이 있는 경험을 축적함으로써 질주할 수 있는 몸을 만들어나가는 시기가 바로 20대인 것이다. 20대에 힘을 비축해 두지 않으면 30대에 질주는커녕 출발선에 주저앉기 십상이다.

우리가 인생에서 의미있는 발자국을 남기고자 한다면 반드시 20대를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30대에는 내가 가진 마지막 한방울의 열정까지 모두 토해내며 거침없이 달려야 하는 것이다. 20대의 방황은 30대의 회한을 불러올 뿐, 에너지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청년의 시기에는 무조건 발산하지 말고 스스로를 다스리며 인내심을 길러야 한다. 다른 사람이 가는 길을 무조건 추종하지 말고, 남들이 축제를 벌일 때 오히려 내 밭을 갈아야 한다. 가슴속에 불덩어리를 가볍게 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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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지 말고, 차곡차곡 다스리고 응축해서 여의주를 만들어 입에 물어야 한다. 그리하여 인생의 본격적인 출발선에 섰을 때 그 불꽃을 힘껏 내뿜으며 거침없이 달려나가자.     


제2장 세상과의 대화


◉ 언어는 그 사람을 말해주는 지표다


당나라 때 주요 관직에 있다가 당이 망한 후에도 진(晉)과 한(漢) 등에서 벼슬을 지낸 처세의 달인 풍도(馮道)가 쓴 ‘설시(舌詩)의 한 구절이다.

입은 곧 화에 이르는 문이요   (口是禍之門)

혀는 곧 몸을 베는 칼이니     (舌是斬身刀)

입을 닫고 혀를 깊숙이 감추면 (閉口深藏舌)

가는 곳마다 몸이 편할 것이다. (安身處處牢)

*牢 우리 뢰, 깎을 루, 우리에 넣어 기르는 소 또는 감옥


■ 많은 말에는 반드시 득과 실이 있다


아무리 표현의 시대라고 해도 말에는 질서가 있고 설득의 힘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어떤 말이든 입 밖에 낼 때에는 두 번 생각해야 한다. 누군가 한 마디를 하면 내 머리는 즉각적으로 반응을 하는데, 이는 말은 원래 주고받는 것으로 습관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가면 반드시 실언을 하게 된다. 언어의 순발력은 속도가 아니라 효용성이므로, 생각이 언어로 바뀌어 입으로 나가기 전에 다시 한 번 걸러 주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이런 과정을 답답해하거나 초조해할 필요는 없다. 대화중에 내가 한 번 더 생각하는 동안 상대는 자신의 허점을 곳곳에 흘려놓는다. 언어에는 반드시 득과 실이 있다. 누군가 말을 많이 쏟아내면서 좌중을 압도하고 있다면 그는 그 자리의 좌장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공격의 대상이 된다. 스스로 좌중을 압도했다고 생각하는 만큼 신뢰를 잃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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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덕목을 살펴보자.

첫째, 호흡

      말을 하기 전에 2초간 호흡을 고르면서 내 말의 실수를 제거하라.

둘째, 설득력

       우리는 종종 말을 하는 이유가 타인에게 내 뜻을 전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원래 말의 목적은 설득이다. 즉 말의 대상은 타인이다. 타인은 나만큼 나에게 관대하지 않고 늘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기 때문에 타인이 보는 나의 인상은 순간의 실수로 뒤집힐 수 있다.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에 타인에게 나는 늘 경계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말을 늘어놓는 행위는 상대의 판단에 우호적인 정보를 누적시킬 수도 있지만, 반대로 말하는 과정에서 문득 나타나는 실수는 그동안의 우호적인 정보를 일시에 뒤집을 수 있다. 그러니 말은 함정이 될 수 있다. 말의 신중함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말의 신중함은 사실 후천적으로 기를 수 있다. 그것도 아주 쉽고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 바로 말을  시작하는 타이밍을 늦추는 것이다. 한 번 늦춤으로서 정제되고 한 번 늦춤으로서 신중함을 인식시키고, 한 번 신중함으로써 한 번의 실수를 피할 수 있다.


셋째, 분노를 다루는 것

       나를 분노하게 하는 일에 대해 즉각적으로 화를 내는 것은 분노의 상대를 확실하게 적으로 돌리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누군가 나를 화나게 했을 때 한 번 숨을 고르고 상황을 돌아본 후 다음 국면에서 문제를 다시 생각하는 것은 비겁함이 아니라 용기다. 그래서 말은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대응은 물처럼 돌아갈 줄 알아야 한다.


넷째, 진실성

       말의 앞뒤가 일관되고 논리가 바로 서 있으며 실수는 바로 인정하는 것, 요컨대 말이 진실하려면 겸허하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겸양의 자세로 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다섯째, 평가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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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극히 주의하라. 누군가를 쉽게 평가하는 사람은 가능한 한 멀리하라.

여섯째, 같은 말을 반복하지 말것

     이제 기술적인 문제를 생각해보자. 말을 잘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평소에  많이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다. 대화중 모든 것에 대해 의견을 말하기보다 내가 평소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에서는 듣기만 하고 생각이 정리되어 있는 부분에서만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다. 그러면 타인은 내가 하는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오래 전에 이경규씨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초대받은 적이 있는데 그의 태도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방송에서 그는 늘 웃고 재미있는 말만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사실 그는 꼭 필요한 순간에만 말을 하고 웃었다. 반면 다른 패널들은 녹화 내내 뭔가 재미있는 말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수많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결국 방송에서는 이경규씨의 말만 빛이 났다.    

■ 말은 그 사람의 삶을 보여준다


우리 일상에서의 대화도 마찬가지다. 내가 전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말만 하고, 잘 아는 것만 말하는 것이 좋다. 타인의 기억에는 내 말이 모두 녹음되는 것이 아니라, 인상적인 부분만 편집되어 남는다. 그의 기억에 나를 각인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있는 말을 가려서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기가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노력하면 충분히 바뀔 수 있다.


말은 한 사람이 살아온 흔적이기 때문에 거친 언행을 일삼아온 사람은 아무리 감추어도 그것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고, 송곳은 언젠가 주머니를 뚫고 나오게 되어 있다. 또 말과 행동에는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 거친 언어가 행동을 그렇게 만들기도 하고 폭력적인 행동이 말을 그렇게 만들기도 한다.


서로 존댓말을 쓰는 부부가 서로 다투는 경우는 흔치 않듯, 언어가 존중의 바탕 위에 있는데 행동이 거칠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언어는 이렇듯 우리의 행동을 규정하는 틀이고 생각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그래서 아름답고 우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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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적당하고 정확한 말을 골라서 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타인에게 내 이미지가 단정하고 합리적인 사람으로 남게 된다.

결국 어떤 사람의 언어는 그 사람의 생각을 드러내는 수단이다. 말만큼 나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좋은 방법은 없다. 우리는 많은 말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곧 나의 표상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자.


◉ 진실을 보고 행하는 참지식인이 되자


한나 아렌트는 미국의 교양잡지 ‘뉴요커’의 위탁을 받아 유대인 학살의 주역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범 재판을 참관한 뒤, 아이히만의 죄는 바로 ‘악의 평범성’에서 나왔다고 지적했다.

수십만의 유대인을 가스실에서 학살한 잔혹한 집행인이었던 아이히만은 자신의 행위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수백만 명의 아이와 남녀를 상당한 열정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죽음으로 보내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도리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이다.” 라고 대답함으로써 세상을 경악하게 했다. 하지만 아렌트는 살인자의 가증스러운 답변을 두고 그것은 단지 ‘무지에서 나온 것인 뿐’이라고 차분하게 결론지었다.   

그 덕분에 아렌트는 유대인이면서 유대인의 아픔을 외면한 배신자로 낙인찍혀 유대사회에서 매장되는 고통을 겪었지만, 그녀의 이 보고서는 ‘악마적 행위를 한 사람도 의외로 평범할 수 있다.’라는 그야말로 평범한 진리를 확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아이히만은 스스로 특별한 의사 없이 단지 ‘조국의 명령’이라든가 ‘게르만의 영광’같은 지극히 단조로운 용어의 노예가 된 사람이며, 이런 몰이해와 비판 능력의 부재가 결과적으로 거대한 악의 실체였다고 결론 내린다. 그라고 “악이란 비판적 사유의 부재다.”라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가? 우리 사회는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친미와 반미, 자주와 외세, 냉전과 평화 등 무수한 관용어들에 둘러싸여 있다. 이런 혼란 속에서 ‘말하기의 무능성’에 빠진 누군가는 스스로 내뱉은 말이 어떤 의미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국가와 국민, 애국, 좌빨과 수꼴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생각의 무능성’에 빠진 누군가는, 주류가 내세우는 프레임에 걸려 비판적 분석의 능력을 잃어버렸다. 또 ‘판단의 무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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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빠진 누군가는 조국에 대한 충성이라는 자의적 판단으로 다른 누군가를 적으로 규정하며 모욕하고 공격하기도 한다. 그럼 과연 이들 둥에 누가 악이고 누가 선이라는 것일까.


■ 의견을 가진 모든 시민은 지식인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비판적 분석능력을 잃어버린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악의 전령이 될 수 있다. 지식인이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따위의 관용적 사고에 빠져 진실을 외면한다면, 또 자신의 이해에 따른 주장과 어젠더(agenda, 모여서 서로 의논할 사항이나 주제) 를 대중에게 세뇌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면, 또 자신이 속한 집단의 입장에 따라 혹은 조직의 논리에 따라 뜻을 굽히거나 붓을 꺾는다면, 또 그렇게 감시자의 역할을 포기하고 이해관계에 무릎을 꿇는다면 이제 남은 일은 이 나라 대한민국이 제2, 제3의 아이히만들의 포로가 되어 역사의 후퇴를 기다리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의견을 갖고 있는 모든 시민은 지식인이다. 의견을 말하는 모든 시민은 지식인이다. 하지만 진짜 지식인은 진실을 보고 말할 수 있는 사람에 국한된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모든 청년은 참지식인이어야 한다.


■ 맥락화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사회철학자 칼 폴라니는 일찍이 ‘맥락화의 함정’에 대해 경고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복잡해서 한 가지 틀로 이해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비슷하거나 부분적으로 유사한 것들을 하나로 묶어 그것이 마치 거부할 수 없는 대세인 양 위장해서 대중을 현혹하거나 지배하려 든다는 것이다.


■ 프레임 나를 가두는 감옥


신문을 보면 ‘프레임’ 이라는 말을 자주 보게 된다. 여기서 프레임이란 ‘틀’ 혹은 ‘묶음’이라는 뜻인데.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물이나 현상을 대개 프레임으로 해석하는데, 이것은 곧 현상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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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하는 특정한 맥락이 사회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렇게 맥락화된 사고는 사상의 전면적인 발전을 저해하고 나를 주류의 논리에 종속되도록 만드는 나쁜 습관이다. 즉 프레임은 맥락화의 다른 이름인 셈이다.


대중은 프레임에 걸린 물고기가 되기 쉽고, 한 번 문 프레임의 바늘에서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한다. 또 한 번 프레임에 걸리면 다른 프레임에도 쉽게 걸려든다. 이념 프레임. 시장 프레임, 주류 프레임, 성차별 프레임 등에 갇히게 되면, 수많은 현상을 제대로 해석하기보다는 프레임이 강요하는 틀로만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내가 반대하는 것은 전부 좌빨이거나 꼴통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러니 스스로 사안의 본질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는 한, 이런 프레임들에 갇혀 상대를 무조건 ‘틀렸다’고 규정하며 적으로 삼게 된다. 즉 ‘나’는 없고 그물에 걸려든 가엾은 물고기만 남게 되는 것이다.

사물은 내가 인식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인데, 나의 인식이 정교한 프레임에 걸려 오작동한다면 나에게 사물은 혹은 우주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고 ‘바담풍’이라고 부르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이것이 어떤 현상에 직면해서도 본질을 살펴야 하는 이유다.


◉ 한국 사회에 닥쳐올 새로운 질서


■농경 자본이 지배하던 시대


자본은 영구적인 힘이다. 권력은 역성혁명이나 민주적인 선거에 의해 교체될 수 있지만, 자본은 새로운 승자의 등장과 패자의 퇴장에 의해 주인공이 바뀔 뿐 그 성격은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농경자본의 힘이 거의 5,000년을 유지해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 자본의 세대교체, 농경자본의 퇴조와 산업자본의 등장


그런데 이렇게 5,000여 년간 유지된 주류자본의 패러다임이 해방과 5‧16 군사혁명 전후 20년 사이에 송두리째 바뀌었다. 오랜 세월 주루자본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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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고한 틀을 유지하던 농경자본이 한국전쟁을 계기로 퇴조하고 산업자본이 등장했다.


전후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대규모 원조와 기술공여, 군사혁명 이후 대일 청구권자금과 일본 경제단체연합회의 민간차관 및 정부차관 등 막대한 외국자본이 국내로 쏟아져 들어왔다. 기존의 질서에 익숙해 있던 농경자본은 이런 변화에 둔감한 반면, 일부 직관이 뛰어난 상업자본들은 이로써 산업화 시대가 도래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외국의 자본과 기술을 공여받아 1세대 산업자본을 형성했다.

그 결과 대중의 삶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농경시대에 부를 축적할 수 없었던 대중이 급여생활자가 되면서 조금이나마 부의 축적이 가능해졌고. 그렇게 축적된 작은 부는 절대적 결핍에서 벗어나려는 맹렬한 욕망을 해소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빵, 옷, 집 등 기본적인 필수제품들에 대한 대중의 열망은 그들이 도시로 나가 급여노동자로서 획득한 임금에 의해 충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산업자본에 엄청난 기회가 되었다. 적은 비용으로 생산한 제품은 해외에 수출하고, 임금으로 지급한 돈은 맹렬히 타오르는 내수시장의 파이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주류 자본의 교체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5,000년 역사의 중심이었던 농경자본이 산업자본에 밀려나는 데는 불과 20년, 그야말로 찰나적 순간에 무대의 주인공이 교체된 것이다. 1세대 산업자본의 시대는 그 후 약 30년간 이어진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1세대 산업자본에 위기가 닥친다. 대중이 절대적 결핍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들에게 더 이상 절대적 갈망은 존재하지 않았다.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욕망이 충족되지 않았고, 어느새 질과 수준을 따지게 된 것이다. 대중은 소유하지 못했던 것들을 대부분 소유했고 자본은 그런 대중에게 더 이상 상품을 판매할 수 없었다. 시장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산업자본의 위기가 도래한 것이다. 이때가 1세대 산업자본들이 무너진 시기다. 한 시대의 주인공이었던 섬유, 봉재, 식품 등의 산업자본들이 쓰러지고 30년간 이어온 주도권이 순식간에 깃발을 내렸다.

최종승자는 2세대  산업자본이었다. 1990년대 말 삼성, LG, 현대 등 소위 재벌기업들이 나머지 경쟁자들을 완전히 따돌리고 최종 승자로 등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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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기를 바탕으로 한 성장의 시대’에는 상대적 욕망을 자극해서 가진 것을 버리게 하는 데 주력했는데, 이때 욕망을 자극하는 수단으로 동원된 것이 테크놀리지, 브랜드, 스토리, 컬쳐 등이다. 신기술은 대중의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을 자극했고, 대중은 새로운 제품을 구매하기 위해 끊임없이 가진 것을 폐기했다. 브랜드 전략 역시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상대적 욕망을 자극하는 훌륭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소위 명품 효과다. 그 위에 스토리를 입히거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무언가 특별한 것으로 보이도록 만듦으로써 평범함에 식상한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 공존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대두


하지만 이 시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불과 20~30년 만에 한계를 드러냈는데 그 이유는 대강 이렇다.

첫째, 자본의 양극화다. 대중은 노동의 대가로 획득한 임금을 상대적 욕망을 해소하는 데 주로 사용했는데, 이런 유행과 패턴에 대한 추종은 대중의 자본축적을 방해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소금물을 마신 대중은 멈추지 않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끊임없이 소비를 거듭했고. 이는 과잉소비와 그것에 바탕한 과잉생산으로 이어졌다.

20년간의 이런 어리석은 질주는 파괴적인 결과를 낳고 말았다. 멀리는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부터 1990년대 일본의 버블붕괴, 최근 우리나라의 부채율 급증에 이르기까지, 이는 모두 자본과 산업의 유혹에 무너진 대중의 자기파멸적 소비의 결과다.


둘째, 지구공동체의 문제다. 필요한 만큼 생산하고 소비하며 그만큼 폐기하는 항상성이 무너지고, 불필요한 것을 만들고 멀쩡한 것을 버리는 과잉생산과 과잉소비의 악순환이 이어진 결과 자원의 고갈과 지구 온난화 같은 환경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따라서 미래를 주도할 인재는 기계가 아닌 사람이 만드는 부가가치를 이해하고 새로운 사회변화에 민감하며 그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고 준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히 많은 지식을 암기한 하드디스크형 인재가 아니라, 다양한 지식을 결합하고 창의적인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CPU형 인재로 스스로를 바꿔나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지금 청년에게 주어진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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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PU형 인재

Central Processing Unit 컴퓨터의 두뇌 부분에 해당하는 중앙처리 장치.

다양한 지식을 결합하고 창의적인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재.


◉ 환경은 새로운 패러다임이며 기회다


“에너지의 형태가 바뀌거나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로 에너지가 옮겨갈 때,  전체의 에너지 총량은 항상 변하지 않는다.”라는 ‘에너지보존법칙’에 따르면 모든 에너지는 보존된다. 따라서 이론상으로는 더운물이 식었을 때도 에너지는 보존되므로 다시 뜨거워질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외부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가하지 않는 한 식어버린 물이 다시 뜨거워지는 일은 없다. 에너지는 이렇듯 일방향성, 즉 비가역적 특성을 지닌다.

폐쇄된 특정 시스템(이를테면 지구)은 이런 비가역적 성질 때문에 자연물을 변형시킬 때마다  질서있는 역학적 분자운동에서 무질서한 열운동으로 바뀌면서 시스템의 무질서도가 증가한다. 열역학에서는 이런 상태를 가리켜 “엔트로피가 증가한다‘ 라고 표현한다.


■ 엔트로피 증가에 의한 열역학적 사망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이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주목했다. 그는 지구 역시 지금처럼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면 언젠가는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는 지점에 도달할 것이고, 이 경우 지구는 완전히 무질서상태가 되어 모든 에너지 흐름이 사라져버리고 물리, 화학, 생물학적 과정이 모두 멈출 수밖에 없다고 설파했다. 우리는 이 상태를 가리켜 ‘열역학적 사망’이라고 표현한다.


기존의 산업사회는 이제 거의 한계점에 도달했다 당면한 자원고갈 같은 한정된 자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증가한 무질서도의 증가, 즉 지구온난화와 환경오염 문제 등은 바로 이 ‘엔트로피의 저주’가 코앞에 다가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선택 옵션은 없어 보인다. 지금 바로 우리가 부가가치를 얻는 방식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화석자원을 최소한으로 사용하고, 자원고갈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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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우며 지구온난화 같은 환경 문제를 피할 수 있는 분야로 이전해야 한다. 환경은 단지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청년들이 조만간 맞닥뜨릴 새로운 패러다임 혹은 기회의 문제다.


■ 기계중심에서 사람중심으로의 변화


그렇다면 그런 분야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엔트로피의 저주를 벗어날 수 없는 기계생산 분야가 아니라 레저, 엔터테인먼트, 코스메틱, 교육, 헬스케어, 바이오, 청정에너지 같은 사람중심의 시스템이다 이 분야들은 기계가 아닌 사람을 통해서 부가가치를 얻는다. 과거에는 기계의 효율이 중요했다면 이제는 사람과 사람의 스파크가 바로 부가가치가 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당장 SNS (Social Network Service 온라인상에서 불특정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서비스)를 봐도 금세 알 수 있다. 단지 사람이, 그것도 오프라인이 아닌 플랫폼에서 가상으로 만난 사람들이 엄청난 가치를 만들어 낸다. 그 수가 늘면 늘수록 가치는 증대되고, 거기서 다시 소셜커머스, 소셜 에듀, 소셜 게임, 소셜 도네이션 까지 새로운 분야들이 파생되면서 가공할 부가가치를 생산하고 있다.


마른 풀을 뜯고 있던 누(gnu) 떼의 일부가 강 건너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풀의 냄새를 맡고 달리기 시작하면 수천수만 마리가 그들의 엉덩이만 바라보며 대질주를 시작하듯, 이런 분야에는 폭발적인 잠재력이 숨어 있다. 청년이 미래를 계획할 때는 바로 이렇게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나는 지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제 시작이다. 기계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세상은 사람의 재능과 불꽃, 그 창의성이 빛을 발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그 질주는 오늘 아니면 내일 시작되거나 이미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 행복이 개인의 문제가 아닌 이유


‘행복’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라고 정의되어 있다. 그래도 모호하기는 마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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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다. 충분한 만족과 기쁨의 한계는 개인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 행복에 대한 몇 가지 오해와 진실


인간의 역사를 돌아보면 항상 불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과거의 문헌들은 대부분 말기적 현상을 걱정하고, 대중의 고난을 비참하게 묘사했다. 이런 사료들은 인간의 불행은 곧 재정문제, 즉 절대적 빈곤에서 기인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빈곤이 해소된 상태, 즉 풍요로움이 곧 행복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제러미 벤담을 비롯한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자아실현이 행복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인간이 스스로 완성되는 단계(가치 있는 일을 함으로써 희열을 느끼는 단계)를 중시 했고, 사회의 기능에 주목했다.

인간의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다양해 보인다. 우선 건강, 지위, 놀이, 일, 재산, 가족, 나이 같은 개인적인 요소도 있고, 사회, 국가, 체제와 같은 집단적인 요인도 있다. 하지만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은 상대적인 것들에 의해서는 행복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새뮤얼슨이 제시한 행복의 공식대로라면 가진 것을 대폭 늘린 지금 그만큼 더 행복해야 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는 히말라야 언덕의 작은 나라 부탄이라고 한다.    


일찍이 이 문제를 간파한 케인스는 “가진 것을 늘리려면 가지려는 욕망이 그보다 더 크게 자라야 한다.”고 말했다. 즉 더 가짐으로써 행복해진다는 믿음은 마치 산꼭대기로 바위를 밀어 올려야 했던 시시포스의 형벌과 같은 것이다.

해답은 결국 절충, 즉 욕망의 대상을 전환하는 데 있을 것이다. 더 가지려고 노력하되, 일정 수준 이상에서는 그 대상이 개인이 아닌 사회를 향함으로써 욕망을 선량하게 관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케인스가 ‘내 후대의 경제적 가능성’이라는 통찰력 깊은 에세이를 통해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다.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개인의 경제적 성취와 소수집단의 부만을 대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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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삼을 때 욕망은 날카롭고 사악하며 통제 불가능해지지만, 그 대상이 사회 전체로 넓어지면 욕망은 부드럽고 선량해진다.


결국 이런 욕망의 상대적 통제와 전환만이 행복의 방정식을 완성하는 유일한 해법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개인과 사회가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아름다운 수식이 완성된다면 지금 우리가 대립중인 ‘복지’와 ‘성장’이라는 당대의 명제를 두고 어떤 사회구조를 완성해나가야 하는지 그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셈이다. 


                           2011. 11. 19.     

    

               제3장에서 5장 까지는 2부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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