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지금 외롭다면 잘 되고 있는 것이다(2)

보해성산 2012. 1. 25.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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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외롭다면 잘 되고 있는 것이다(2)


■ 한상복 지음


제3부 외로움 속에서 균형잡기


■ 솔리튜드 훈련


설리는 인사발령 결과를 접한 뒤, 화를 내지 않았고 눈물을 쏟지도 않았다. 급조된 티가 역력한 ‘차세대 미디어 연구팀’. 팀장도 없이 팀원이라고는 설리 하나밖에 없는 유령조직이나 다름없었다. 옛날에는 자료실이었던 곳 일부를 개조해 새 책상 여섯 개와 의자 몇 개를 배치해놓은 게 전부였다.

설리는 맥없이 인사 발령을 받아들인 자신에게, 더 이상은 잘못된 세상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실과 타협한 그녀는 그동안 손가락질해온 기성세대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진실을 비루한 밥벌이와 맞바꾸었다는 점에서.


그녀는 작은 방에서 며칠간 빈둥거리다가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렸다. 아무 일도 없는 고문. 전에는 며칠짜리 소원이었던 빈둥거림이, 직접 당해보니까, 가장 끔찍한 고문임을 알았다.

왜 괴로운지 생각해 보았다. 자신에 대한 남들의 평가는 그들 자유니까 그나마 참을 수 있었다. 정말로 참을 수 없는 것은 자부심이 입은 상처였다. 비록 지금은 많이 흐트러지긴 했지만. 1분 1초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알뜰하게 시간을 관리하며 살아왔다는  그녀의 오랜 자부심.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는데 어쩌다 여기까지 밀려나게 된 것일까.

그녀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생각을 바꿔볼 필요가 있었다. ‘아냐, 비관적인 생각에만 빠져 있어봤자 좋을 게 뭐가 있겠어. 우울해질 뿐이지.’ 자존감을 예리하게 찔러 오는 것이 있었다. 잘났고 유능하다고 믿어온 자신이, 알고 보니 수많은 그저 그런 사람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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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균이 자주 전화를 걸어주는 것이 그나마 무료한 일상을 잠시 잊게 하는 낙이었다.          

“나도 그렇게 쉬어 봤으면 좋겠다. 좋은 기회일 수도 있잖아. 그동안 못 봤던 책도 실컷 볼 수 있고, 그렇게 지내다 보면 몇 달 정도는 아쉬울 정도로 금방 지나가 버릴걸?”

정은은 영화를 추천했다.

“혼자만 있고 할 일은 없다고? 그럼 영화를 봐. 슬픈 것들이 좋지. 눈물 펑펑 쏟고 나면 기분이 얼마나 좋아지는데. 나 같으면 하루에 세 편 정도씩 열심히 봐서 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정은과 함께 영화를 보고 나서 짜증을 부린 적이 있다. 슬픈 장면에서 훌쩍거리다가 클라이맥스에선 통곡을 해버린 정은 때문에 창피해서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슬며시 밖으로 나와야 했다.

정은은 그때 미안하다면서 웃기만 했다.

그거였다. 정은이 가만있어도 사람들이 주변에 몰려들고 좋아해 주는 이유. 공감능력이라고 해야 하나? 고등학교 때만 해도 존재감이 거의 없던 친구였다. 그런데 대학 졸업 후 유학을 다녀오더니 묘하게 바뀌었다. 내보이지는 않지만 은근히 자신감 있게 보이고, ‘참견쟁이’로 불릴 정도로 친구들을 세심하게 챙겨주었다.

설리는 정은이 강해진 이유를 이내 깨달았다. 힘의 근원은 ‘자연스러움’이었다. 정은은 고상한 척하지도 않고 강한 척하지도 않았다. 그냥 물처럼 흐르고 다른 사람들과 섞일 뿐이었다.


며칠 전 부장이 잠깐 들러 슬그머니 책 한권을 놔두고 갔다. 표지만 봐도 하품을 주체할 수 없는 동양철학 책이었다.

설리는 책을 휘리리 넘겨보다가 뒷부분에서 카드 한 장을 발견했다. 카드에는 파란색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부장의 필적이었다.

“외로움은 변화의 용광로일 가능성이 높다. 혼자 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삶의 길이 갈라질 테니까. 변화는 나 아닌 누군가가 되려고 할 때에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일 게다. 그러니까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은 변화가 필요할 때 그 가치를 제대로 발휘하는 자질이기도 하다.”

 

설리는 혼자 있는 시간을 균형 회복의 시간으로 삼아보기로 했다. 그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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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추스르지 못하고 지냈으니까 당분간은 천천히 살면서 취미 생활을 즐겨보기로 했다. 뭘 해볼까.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혼자서 무엇이든 해 본 사람과 혼자서는 무엇 하나 해본 적이 없는 사람. 혼자 잘 지내는 것은 원래 당연한 것이었다. 그랬던 것이 이제는 ‘특별한 능력’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릴케가 ‘말테의 수기’에서 강조했던 말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독한 사람을 내버려둬라. 그 사람은 당신보다 수준이 높은 사람이다.”

솔리는 자신의 일상을 ‘솔리튜드 훈련’이라고 명명했다. 우연히 들렸던 인터넷 카페에서 봤던 표현을 인용한 것이다. 솔리튜드 훈련은 노후를 위한, 그것도 수령자가 가입자 본인인. 세상에서 유일한 대박 보험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 멀어질수록 가까워지는


서양 명문 학교들이 기숙사 시스템인 이유를 아는가.

전국에서 인재를 끌어 모으니까 그럴 것이라고? 틀린 답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명문 학교들은 기숙사 생활을 아예 의무로 정해 놓고 있다. 집이 가까워도 통학할 수 없으며 기숙사에 들어가야만 한다. 이유가 뭘까?

정답은 ‘부모와 떼어놓기 위해서’다. 명문 학교 운영자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학생들이 부모와 멀어질수록 스스로와 가까워진다는 진리를 말이다. 부모에게서 벗어나야 비로소 성숙한 어른이 된다는.


이정은!

엄마가 또 시작이다.

“한심한 것! 다방에서 커피나 타는 인생 살라고, 비싼 돈 들여 유학까지 보내준 줄 알아? 그것도 모자라서, 뭐라고? 어디서 그런 핫바지 같은 녀석을 데려온다고………결혼? 꿈도 꾸지 마. 내가 왜 저런 것을 낳아놨나 몰라. 에그, 내 팔자야!”  

20분 뒤에는 오대리가 도착할 텐데.

“의사 변호사들이 줄을 섰는데, 지가 그걸 마다하고 겨우 다방에 들어가 저러고 자빠졌으니. 이름도 못 들어본 회사 다니는 그런 능력 없는 놈밖에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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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이지. 이 나쁜 년아. 돌아가신 네 아버지한테 창피하지도 않냐!”

엄마의 공격은 언제나 “돌아가신 아버지한테 창피하지도 않냐”로 귀결된다. 옛날에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꼬챙이로 가슴을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그래서 엄마한테 져주곤 했다.  

그러나 유학 가서 배운 첫 번째 교훈이 나를 바꿔 놓았다.

‘남의 기대에 맞춰 살지 말라.’

그렇게 살면 서로가 불행해질 뿐이라는 교훈이었다.

“너 정신 똑바로 차려. 다른 건 몰라도 결혼만은 안 돼. 여자가 남자를 잘못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화가 치솟아서 머리가 어떻게 될 것만 같았다.

“엄마 그냥 있어주면 안 돼요? 속박하려 들지 말고. 난 엄마의 장식물이 아니잖아요. 내 결혼에 대해 엄마가 가진 권리는 찬성 또는 반대지, 허락이나 불허가 아니에요. 부모 허락 받아야 결혼할 수 있는 만 열여섯은 이미 지난 지 오래됐다고요.”

엄마한테 그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이미 뱉어놓은 말. 차라리 잘됐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내 인생의 리모컨은 내가 쥐어야 하니까. 엄마로부터 홀로 서려면 어쩔 수 없이‘거절의 지혜’부터 시작해야 한다.


세상에는 멀어질수록 가까워지는 관계가 있다. 멀어진 뒤에야 기억을 떠올리면서 상대의 깊은 속내를 야금야금 확인하게 되는, 너무 붙어 있어 괴롭기도 한 애증 관계. 멀어진 뒤에야 비로소 진짜 어른으로 성숙해가는 서로를 발견하는 관계. 

때로는 사랑을 지키기 위해 거리를 두어야 할 때가 있다. 그런 사랑은 멀어질수록 깊어진다.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그가 드디어 도착했다.

‘따님을 꼭 행복하게 해주겠습니다.’ 오 대리가 오버해서 이런 소리나 하지 말아야 할 텐데. 내 행복은 내 소관이니까.


■ 솔리튜드의 여왕


그녀는 당당한 사람이다.

평소에는 김밥으로 때우지만 이따금은 점심시간에 식당에 들어가 자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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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한 사람이요”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내키면 고기까지 구워 먹는다. 이상하게도 혼자 점심을 먹을 때는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게 더 하고 싶어진다. 그녀를 힐끔거리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 그러나 남의 시선은 그녀에게 털끝만큼도 상처를 입힐 수 없다.

그녀는 일주일에 한 번은 반드시 거한 혼자만의 점심을 먹는다. 솔리튜드 런치 타임을 갖는 것이다.

처음부터 혼자 점심 먹기에 능숙했던 것은 아니다. 그녀 역시 이전 직장에 다닐 때는 ‘혼자 밥을 먹느니 차라리 굶겠다’는 쪽이었다. 하지만 직장을 옮기고 나서는 남에게 끌려다니기만 하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워졌다고 했다.


그녀는 자기감정에 충실한 사람이다.

영화를 볼 때 가급적이면 혼자 극장에 간다. 웃고 싶을 때 마음껏 웃는다. 남들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특히 모르는 사람한테는 쪽 팔려도 안 죽는다. 혼자 영화 보기의 백미는 슬픈 영화에 있다고 한다. 슬픈 영화를 보면서 실컷 울 수 있다. 통곡을 해도 괜찮다. 자막이 모두 올라간 것을 확인하며 마지막의 여운까지 마음껏 담을 수 있다.


그녀는 이따금 혼자서 미술관에 간다.

전시회에 가서 혼자 즐긴다. 작품을 통해 작가와 둘이서만 대화할 수 있다. ‘나도 가봤어 족’과 같이 갈 경우, 배고프다고 보채는 소리에 솔리튜드의 시간을 방해받게 된다. 게다가 예술은 원래 혼자와의 대화라고도 한다.

감상이란 본질적으로 혼자 느끼는 것이다. 어떤 예술을 만나든 각자의 방식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녀는 혼자서도 잘 떠나는 사람이다.

혼자 떠나는 여행은 적극적이며 활동적인 솔리튜드의 방식이다.

그녀는 마음 여행을 최고로 꼽는 사람이다.

그녀가 문제를 냈다.

“마음이 클까 지구가 클까?”

“난센스 퀴즈야? 면적은 지구가 넓지만, 사람 미음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으니까 전체적으로는 마음이 더 크겠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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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생각도 비슷해. 난 어떤 사람한테 질문을 받고 여행을 생각했는데. 세계 곳곳의 오지까지 돌아본 사람도 자기 마음의 구석구석을 다녀본 사람만큼 성장할 수는 없거든. 그러니까 마음이 더 클 거야.”


그녀는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한 사람이다.

실직 후 괴로워하는 친구에게. 그녀가 “그냥 혼자 지내보라”고 권한 적이 있다. 친구는 앙칼지게 화를 냈다. “혼자 지내면서 도대체 뭘 하라고?”

그녀의 어이없는 대답을 들어보자.

“왜 꼭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버틸 수 있을 때까지는 아무것도 안 해보면 안 돼? 뭘 하는 건 그러면서 생각해도 늦지 않잖아.”

단순함은 자기 생각을 공격하는 ‘자책세포’로부터 마음을 건강하게 지켜내는 힘이다. 그런 힘은 솔리튜드의 시간을 통해 단련된다.

두 달 뒤에 만난 친구가 밝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네 덕분에 마음이 많이 편해졌어. 이제는 뭔가에 도전할 수 있겠다는 용기가 생겼어.”


그녀는 솔리튜드의 여왕이다. 그래서 그녀를 좋아한다. 그녀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니까.


■ 내가 누군 줄 알아?


“여러분. ‘페르소나’라는 말을 들어봤죠? 그리스 고대극 배우들이 쓰던 가면에서 유래한 말이에요. ‘외적 인격’ 또는 ‘가면을 쓴 인격’을 뜻하는데요.”

강의를 시작한지 10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조는 사람이 있다. 특히 남자 간부들은 하품을 하느라 바쁘다. 거절할걸. 괜히 강의를 한다고 나서서 이게 뭐람. 하지만 여기서 굴할 내가 아니다. 내가 누구야, ‘매운 땅꼬마’ 아니겠어.


부장들 몇 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는 게 보인다. 안 되겠다. 스타일을 바꿔봐야지.

“맨 앞줄. 구매 팀 이 과장이죠? 본인이 생각하기에 이 과장은 어떤 사람이죠?”  이 과장이 넋을 놓고 있다가 깜짝 놀라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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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야 과장이고, 남편이고 또 아빠죠.”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졸던 간부들이 눈을 뜨고 무슨 일인가 두리번거린다.

“이런 걸 ‘페르소나’라고 하는 겁니다. 남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는 셈이죠. 그렇지만 페르소나는 나라고 볼 수 없죠. 과장이나 남편, 아빠가 나의 본질은 아닌 거예요. 페르소나를 나라고 착각하면 힘들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면형 우울증’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서비스업 종사자나 연예인 같은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유형이다. 겉으로는 언제나 웃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환하게 웃는 사람도 속으로는 찌푸린 채 울거나 절망에 빠져 있을 때가 있다. 명랑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절망적인 선택을 했을 때, 대다수 사람들이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페르소나 때문이다.

역할 그러니까 남들에게 요구받는 기대에만 빠져 지내느라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한다. 그래서 외롭다. 아무도 자기 본연을 이해해주려 하지 않으며, 역할만 보고 더한 기대만 걸어올  뿐이니까.


“총무 팀 박 대리. 비용 무제한으로 해외여행을 간다면 어디를 가고 싶어요?” 여직원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아이슬란드요. 그런 다음 세계일주 두 바퀴요.”

신이 났다. 웃음. 둘러보니까 조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러면 박 대리. 박 대리는 어떤 사람이죠?”

“그건……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현대인은 나를 내 세운다. 이기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당당해 보이기도 한다. 먹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좋아하는 연예인은 금방 열 손가락 이상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내가 내 안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내세우면서도 외로운 것이다.


회사에 처음 들어왔을 때 이야기를 꺼냈다. 수많은 남자 선배들 사이에서 얼마나 실수를 자주 저지르는 사고뭉치였고 구박덩어리였는지. 어이없는 실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웃음이 번졌다. 졸음에서 깬 간부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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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의미를 찾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끊임없이 물어보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내가 누군 줄 알아?’ 하고 말이다. 답은 그런 물음을 통해 나온다.

취직을 하고서도 내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직장에 적응하느라 바빴고 사법시험 공부를 하는 남자 친구, 그러니까 지금의 남편을 뒷바라지하느라 바쁜 와중에 ‘내가 누군지’ 생각해볼 계기도 없었다.

결혼 생활과 직장 생활을 함께 하는 게 많이 힘들었다.

세상에서 완벽하게 혼자가 되었다. 내 편은 아무도 없었다. 회사는 은근히 퇴사를 권했고. 시어머니는 버티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친정 부모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지막 보루라고 믿었던 남편마저도 그랬다. 그는 고시 공부를 포기하고 취직할 테니까 차라리 그만두라고 했다.

세상과 혼자 맞서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시련이었다.    


“직장인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존재죠. 회사에선 계륵이고 아이 학교에선 죄인 신세죠. 집에서는 가족보다 동거인에 가깝습니다. 차장 시절이었을 거예요. 아이가 한창 사춘기였는데 학교에서 친구들과 문제까지 일으키는 바람에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는지……우울증이 왔고 치료도 받았어요”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서 배운 교훈. ‘나는 절대 꽉 채워지지 않는다.’ 바쁜 와중에도 가끔 느꼈던 공허함은 그런 깨달음을 위한 것이었다.


사람은 계속 바뀌며 진화를 거듭한다. 바뀌는 자신이 더 좋게 느껴진다면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완성되지 않았으며 완성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평생에 걸쳐 다듬어갈 뿐이다.

“수시로 나만의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많이 잊어버리고, 새로운 것들을 불러들이려고요. 사람 관찰이 저의 강점이었고. 그것으로 이사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여러분만의 뭔가가 있을 겁니다.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생각해 보세요.”

사람의 능력은 공적인 자리를 떠났을 때, 즉 혼자 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낸다고 한다. 혼자의 시간은 정리와 반성을 통해 스스로를 되돌아봄으로써 앞으로 나아가는 에너지를 비축하는 시간이다.

누구에게나 ‘나’는 세 개의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는 ‘내가 이미 만난 나’, 두 번째는 ‘곁에 있지만 아직 만나지 못한 나’, 마지막으로 ‘만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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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 두려워서 꼭꼭 숨겨 놓은 나’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나를 만나게 된다. 그런 시간을 통해 성장에서 성숙으로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게 된다.  

“스스로에게 수시로 질문을 던져 보세요. ‘내가 누군 줄 알아?’ 하고요. 남한테는 하지 마세요. 싸움 거는 것 같아서 위험해져요. 자기한테 질문을 더질 때마다. 인생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 Let it be

* 비틀즈의 마지막 앨범 제목. ‘그냥 그대로 두고 순리대로 살라 하네’등    의 뜻


“당신과 떨어져서는 단 하루도 살 수가 없어. 그냥 내 옆에만 있어줘.”

TV드라마에서 남편이 아내를 향해 절규하고 있었다. 그녀는 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돌렸다. 저 드라마 작가는 틀림없이 미혼일 거야. 흔히 사랑의 귀결점을 결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혼을 해보면 안다. 결혼은 사랑과 동떨어진 ‘또 다른 세계’란 것을.

한때 스타 블로거였던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채널 변경 버튼을 돌렸다. 홈쇼핑에서 교육방송으로, 다시 영화로, 연예 정보로 화면이 바뀌었다, 사랑의 환상은 화려한 결혼식의 주인공을 꿈꾸는 것으로 정점을 찍는다. 그 다음에는 매력을 상실한 채 뻔한 일상이 되고 여자는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혼자가 되어버린다. ‘집 밖’이 아닌 ‘집 안’에 버려지는 것이다.

그녀는 인터넷을 외로움의 탈출구로 삼았다. 진부한 일상을 잠시 잊은 채 빠져들 수 있는, 서로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들의 공간 나중에는 경쟁의 장으로 변해버렸지만.

회사에 휴가를 낸 남편은 혼자 보호자용 보조 침대에 잠들어 있었다.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은 길길이 뛰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남편은 매일 밤 입을 꾹 다문 채 이불과 베개를 가지고 거실로 나갔다. 소파에서 쪼그린 채 잠들어 있는 남편이 왜소하고 한심해 보였다.

남편은 계속 쓸데없는 일들을 시도했다. 등산부터 테니스. 볼링, 낚시, 골프, 무선조종까지. 그때마다 그녀가 달려들어 몰아붙였다.

남편이 자기를 방치한 채 도망을 다니는 거라면서.   

“내 인생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밖으로만 나돌면 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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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2-3년 동안은 그녀와 남편의 ‘숨바꼭질 스토리’ 같았다. 집 안에 팽개쳐 놓고 밖으로만 다닐 거라면 결혼은 왜 했는지. 그녀는 서럽기만 했다.        

남편은 어느 순간 이후로 고분고분해졌다. 그녀가 하자는 대로 따라주었다. 자동차도 바꾸고. 실내 인테리어도 다시 하고……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번에는 남편의 무기력이 그녀를 미치게 했다. 심드렁한 표정에 적당주의.

얼마 전 그녀가 불만을 퍼붓자 그가 구시렁거리며 소파에서 돌아누웠다.

“무장해제시켜 아무것도 못 하게 하고, 옆에서 겨우 숨만 쉬는 바보로 만들어 놓고는 이젠 바보라서 화가 난다는 거냐.”

그녀는 남편을 자기 취향으로 바꾸는 데는 성공했다. 그것은 또 한편으로는 남편을 잃은 것이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며 섬세하고 아이디어 넘치는 과거의 남편은 사라졌다.

그녀는 남편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아내를 사랑하지 않음’으로 해석했고 지속적으로 압박해 들어가 마침내 항복을 받아 냈다. 남편은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을 빼고는 그녀 옆에 있어 주었다. 그 이후부터였을 것이다. 남편이 무기력해진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남편이 즐기던 음악이나 등산 같은 것이 쓸데없는 짓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남편은 자기만의 세계에서 상상의 나래를 펴고 독수리처럼 외로움을 사냥했을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아의 노른자’를 감싼 껍질이 깨지지 않도록 품어가면서 말이다.

그녀는 노트북을 당겨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Let it be 


제멋대로인 그 사람 때문에 외롭고 가슴이 아프다고요?

그래도 그 사람을 마음대로 바꾸려 들지 마세요.

그 사람이 당신이 원하는 대로 모든 걸 해주는 사람이 된다면 좋겠죠?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그는 당신 말은 잘 듣는 대신,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될 거예요. 그건 자신감을 잃고 무능해진다는 뜻과 일맥상통해요.

당신은 당신 마음대로 움직여주는 그 사람을 보면서 과연 만족할까요?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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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그렇지 읺을 거라고 생각해요. 무능하게 변한 그 사람을 보면서 후회만 하게 될 거예요.


누구에게나 ‘자아의 노른자’ 라는 것이 있답니다. 사랑하니까 그럴 권리가 있다고 믿어도, 상대의 그 노른자에는 손을 대면 안 돼요. 그건 ‘그 사람을 그 사람이게 하는, 그 사람만의 것’이랍니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게 된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요?

마음에 안 드는 부분만 쏙 바꾸고 싶다고요. 그게 노른자를 건드리는 불행의 시작입니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요,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랑 노른자 속에서 딱 붙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싫은 것을 억지로 파내려다가는 가장 좋아하는 것까지 잃어버리게 된답니다.

            < 중   략 >

남편은 제가 아픈 것도, 인터넷 중독 때문에 몸속에 돌이 생겼다고 주장했어요.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여서 들은 척도 안 했는데, 이제는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블로거들과 자존심 경쟁을 하며 스스로를 그렇게 들볶았으니 무슨 병인들 안 생기겠어요.

이따가 남편이 깨어나면 꼭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고맙다는 말도요. 병원에서 배우네요. 사랑은 믿고 내버려둘수록 더욱 풍요로워진다는 것을요.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원한다면, 그 사람을 병들게 하는 치명적인 것이 아니라면, 제발 그냥 내버려두세요. 그가 외로움 속에서 인간적으로 더욱 성숙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Let it be.


그녀는 컴퓨터의 터치 패드를 조작해 전송 버튼을 누르면서 생각했다.

‘퇴원하고 나서 건강을 좀 회복하면 정말 잘해줘야겠어. 오디오든 등산이든, 하고 싶은 건 뭐든 다 하라고 해야지. 내 눈치 보지 말고 말이다.


■ 1등이라는 멋진 뿔과, 행복이라는 날카로운 이빨


그가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강아지 코코가 꼬리를 흔들며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아내와 딸은 잠든 것 같았다.

“그래도 네가 나를 기다려 주었구나. 잠도 안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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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허리를 굽혀 강아지를 안아 올렸다. 코코는 신이 나서 그의 턱을 핥아 애정을 표시했다. 언젠가부터 그렇게 됐다. 가족 중에서 그가 집에 오기를 진심으로 기다리는 건 강아지 코코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대한민국 1%였다. 어린 시절부터 ‘첫째’ 자리를 놓친 적이 없었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며, 그것만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런 코스를 밟아 한 계단씩 오를 때마다 버거워지고 점점 힘이 빠졌다.

어릴 때는 분명히 그가 단연 최고였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고 취직을 하면서 점차 ‘여럿 중의 하나’가 되었고 나이가 들며 여러 번 승진을 한 뒤에는 ;그냥 아저씨‘가 되어버렸다.


‘집’이라는 단어가 ‘안식처’라는 의미와 분리된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집에 있는 게 편하지 않아서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딸아이 학원 수업이 끝날 즈음에 맞춰 귀가를 한다. 주말에는 집안에서 아내와 부딪히기 싫어 여행을 떠나지만, 온갖 시답잖은 이유로 다투고 만다. 믿었던 딸아이마저 아빠보다는 아빠의 지갑에 관심이 많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감이 커졌다.

도대체 이 불안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각자무치(角者無齒)'라는 말이 있다. 뿔이 멋진 동물에겐 날카로운 이빨이

없다는 뜻이다. 정말 그랬다. 그에게는 ‘1등’ 이라는 멋진 뿔이 있었지만, ‘행

복’이라는 날카로운 이빨은 없었다.

상당수의 성공한 사람들에게 인생이 주는 가장 잔혹한 형벌은 행복이 비집

고 들어올 틈을 완전히 막아놓는다는 점이다. 스스로의 의지에 주변 사람들

의 과잉 기대 심리가 결합되면, 오로지 성공인 것들만 남고 그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들은 철저히 배제된다.

고슴도치 새끼도 고슴도치다. 잘난 부모의 아이에게 마음의 상처가 많은 이

유다. 잘났지만 행복하지는 못한 팔자가 대물림된다.

그는 요즘 들어 자꾸 고슴도치가 되어 가는 것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다.

여유를 잃고 별것이 아닌 일에도 감정이 폭발하기도 한다.


그는 불안의 실체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우리가 준비하지 못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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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그에게 복수해 올 것이라는 두려움…….

아이들 교육에 경쟁적으로 올인하느라 스스로의 미래를 팽개친 잘못, 좋은

세상을 만들어 보려했던 젊은 시절의 이상으로부터 등을 돌려 배신한 잘못,

대한민국 역사상 어느 세대보다 더한 속물로 변해버린 잘못, 내 가족 내 자

식만 챙김으로써 세상을 더욱 망쳐버린 잘못, 기득권에 집착해 후배 세대들

에게 길을 터주지 않은 잘못. ‘안정이 최고’라는 기치로 아이를 오로지 입시

경쟁의 지옥 속으로만 몰아넣은 잘못. 아이가 공부 외에는 아무 것도 도전하

지 못하도록 싹을 잘라버린 잘못, 그래서 공부 외의 모든 것을 부모에게 의

존하려는 세대를 만들어 놓은 잘못.

결정적으로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외로움으로 몰아넣은 잘못, 남들이 부러

워하는 멋진 뿔에만 집착하다가 정작 스스로에게 중요한 것들은 죄다 놓쳐

버린,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

그런 모든 잘못으로부터 복수를 당할 날이 머지않았음을 그는 느끼고 있

다. 그래서 이렇게 불안한 것이다.


■ 결혼하면 우리 집 가훈은

메두사는 원래 매우 아르다운 여인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미모를 사

람들이 추앙하자, 차츰 콧대가 높아지고 교만해졌다. 급기야 “나의 머리카락

이 아테나 여신의 것보다 아름답다”는 말까지 떠들고 다니게 됐다.

그녀는 결국 여신의 저주를 받아 흉측한 괴물로 변했다. 특히 머리카락의

한 올 한 올이 죄다 꿈틀거리는 뱀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저주에서 가장 잔

혹한 부분은, 아무도 더는 메두사를 볼 수 없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녀를

보는 사람은 그 즉시 돌로 변해버렸다. ‘남들의 시선’을 즐겼던 그녀에게서

‘삶의 보람’을 빼앗음으로써, 절망 속에서 마음마저 괴물로 변해버리도록, 그

야말로 악독한 저주를 내린 것이다.

메두사 신화가 상징하는 바는 ‘우월함에 대한 경고’가 아닐까. 아름다움이라

는 우월함으로 사람들의 중심에 설 수 있었지만, 우월함의 자신감이 지나쳐

오만에 이르자 그녀를 몰락시키는 계기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거대 다국적 기업 기술팀과 구매담당자 일행이 회사를 방문하던 날, 오 대

리는 환영 안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일행 중에 중학교 때 한 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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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가 전학 간 최00이 있었다. 그는 그 회사 기술협력 담당 매니저였고 그

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오 대리는 최박사의 중학교 동창이라는 이유로 비상대책 팀의 일원이 되었

다. 비상대책 팀은 다른 방으로 자리를 옮겨 회의를 다시 시작했다.

오 대리는 생각했다. 그런데 걔가 동창이었나? 중간에 전학 가버렸는데……

그때 그 친구는 아이들의 ‘밥’이었다. 그런데 그 ‘밥’이 지금은 ‘갑’중에서도

‘세계적인 수퍼 갑’ 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오 대리는 저녁에 최 박사에게 전화를 했다.

     <   중    략   >   

오 대리는 전화를 끊고 한동안 서 있었다.

겉으로는 아닌 척했지만, 종일 힘들고 외로웠다. 이렇게 스스로가 혐오스럽

기까지 한 날은 처음이었다. 옛날에 오만을 떨며 친구를 우습게보고 괴롭혔

던 잘못이,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야 대가를 치른 것이다.

사람은 제각기 다른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 남이 가진 것을 우습게보면,

일순 위안을 얻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내가 가진 소중한 무언가의

의미를 잃게 된다. 반대로 남이 가진 것을 진심으로 존중하면, 내가 가진 것

까지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오 대리는 결심했다. 정은과 결혼하면 가훈을 크게 써서 붙여 놓아야 겠다

고.  ‘사람 함부로 보지 말자.’


■ ‘추운 숲으로                           


운동은 따지고 보면, 스스로에게 시달림을 주는 것이다.

우리는 운동을 통해 근육을 시달리게 한다. 시달림을 통해 단련이 이뤄지

고, 부단한 단련으로 능력을 키워 한계를 상향 조정한다.

운동은 마음에도 시달림을 주어 각성케 한다.

내가 하는 마라톤이 특히 그렇다. 처음 출전했다가 급격한 체력 저하로 중

도 포기했을 때는 창피해서 죽고만 싶었다. 출전자들은 물론 길거리 관중도

나만 보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내 마음에 시달림을 주었다.

그러나 이제 깨달았다. 남들은 나의 실패에 나만큼 관심이 없다는 것을. 그

러니까 실패를 그렇게 무서워 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패배자라는 낙인은

남들이 찍는 게 아니었다. 언제나 내 스스로 찍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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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달림을 통해 건강하게 살 수 있다. 시달리지 않으면 면역 체계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연적으로 혹은 예방주사를 통해 약간의 균에 어느

정도는 시달려야 비로소 면역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시달림은 인도 불교의 ‘시타바나’라는 단어를 ‘시타림(尸陀林)’으로 음역 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추운 숲’이라는 뜻의 시타바나는 인도인들이 사체

를 버리는 곳으로 당시 사람들은 이곳을 각종 질병이 창궐하는 근원적 공포

의 상징으로 여겼다.

시달림과 고행이라는 말은 동전의 앞뒤 면과 같다. 인도 불교에서는 ‘추운

숲’으로 들어가는 것을 고행이라고 정의 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외로움이나 두려움, 불확실성 같은 것도 그것을 받

아 들여 함께 배우는 지혜를 배울 때, 우리는 비로소 그것들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오늘도 나는 새벽에 일어나 운동화 끈을 조이고, ‘오늘의 시작’이라는 불확

실성 속으로 뛰어 들어간다.


■ 내 존재의 의미     


“7년 동안 유배지에 낙척하여 문을 닫아걸고 움츠리고 지내다 보니, 노비들

조차 나와는 함께 서서 이야기도 하려 하지 않더이다. 그래서 낮 동안 보이

는 것이라고는 구름의 그림자나 하늘의 빛깔뿐이고, 밤새도록 들리는 것이

라고는 벌레 울음소리와 바람에 불리어 나는 대나무 소리뿐입니다.“  

정약용 선생이 친구에게 보냈던 편지의 한 구절이다. 정약용 선생은 마흔

살에 전남 강진으로 유배됐다. 마흔에. 눈앞이 캄캄하지 않았을까. 잘나가던

엘리트 관료에서 하루아침에 대역무도 죄인으로. 어느 누구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천주고 동료들을 밀고함으로써 구차한 목숨을

부지했을 거라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 무기력이 선생에게 남아 있던 마지

막 희망 한 줌마저 꼼꼼하게 앗아 갔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선생의 전성기는 사실 이때부터 시작된다. ‘보이는 것은 구름 그림

자나 하늘 빛깔뿐이고, 밤새도록 들리는 것이라고는 벌레 울음소리와 대나무

소리뿐인 외로움 속에서 18년간 ‘목민심서’를 비롯한 선생의 역작이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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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균아, 우리도 몇 년 후에 마흔이다.

왜 사는지 모르겠다고 했지?

내게도 절망의 시절이 있었지. 삶의 의미를 남김없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벤처 사업이라지만, 너무 어린 나이에 정상에 올랐고 거칠 것이 없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와중에도, 난 그때처럼 불만족스러운 때가 없었다. ‘오만’은 그런 거였다. 성공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그보다 더한 권리가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다음 순서는 몰락이었고, 6년간 쉴 틈도 없이 떨어졌다.


도균아 왜 사는지 모르겠다고 했지?

‘왜 사는가’와 ‘무슨 의미로 사는가’는 사실 같은 질문이다. 그것은 또한 ‘무슨 재미로 사는가’와도 연결되어 있다. 의미와 재미를 합치면 그게 바로 행복이니까.  정해진 답, 모두에게 맞는 정답이란 없다.

그것이 대단한 것일 필요는 없다. 지난날들을 떠올리고 곰곰이 반추해보면 ‘그것’을 찾아낼 수 있다. 사느라 바빠서 미루기만 했던 것, 좋아하지만 실패할까봐 두려워했던 것, 주변 사람들 눈치를 보느라 감춰왔던 것, 나중을 위해 남겨 놓았던 것, 그것을 당장 해 보자는 얘기다.

웃지 말기 바란다. ‘나의 그것’은 ‘목공 일’이었다. 듣는 사람마다 ‘그게 뭐가 대단하다고?’ 식의 반응이어서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다시 말하지만. 정해진 답은 없다. 모두가 다른 존재들이니까. 


목공 일을 하면서 나무로부터 포용력을 배웠다. 나무는 약간 부족해도 이리저리 다듬다 보면 서로를 너그럽게 받아들여 준다. 한 치의 오차라도 발견하면 비로소 떨며 분노를 발산했던 나에게, 나무의 포용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완성한 것은 ‘반성 의자’였다. 아이를 위해서 만들었는데, 집 사람이 아이를 혼낼 때마다 그곳에 앉히는 바람에 반성 의자가 되었다.

나는 지금의 삶이 만족스럽다. 옛날에 비해 물질적으로는 많이 쪼들리지만 외롭지 않아서 좋다. 나한테는 좋아하는 ‘그것’을 하는 내가 있다.

친구, 너한테는 어떤 네가 있는가.

사람이란 죄다 똑똑한 척하지만 어이없을 정도로 한심하고 어리석은 존재들인지도 모르겠다. 남들에게 뭔가를 열심히 주면서 작은 기대를 수줍게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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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반면, 정작 자신에게는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서 엄청난 것을 바란다. 그래서 외로운 것 아닐까.

전에는 나라는 존재의 의미를 남에게서 찾았다. 나보다 잘난 누군가를 보며 이를 악물었고, 나보다 못한 누군가를 보며 안도했다. 그러나 이제는 내 존재의 이유를 나 스스로에게서 찾고 있다. 이 부분이 나를 바꾼, 최고의 발견이 아닌가 싶다.


가장 위대한 콘텐츠는 고생담이다. 고생담이야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산이다. 커다란 성취를 이뤄낸 사람들의 과거를 살펴보면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실패와 고통, 가난, 병마, 거절, 이별, 쓰라린 상처…… 누군가를 감동시키는 힘은 그런 고생담에서 출발한다.

외로움은 나를 발견하게 하고 전념케 하며, 마침내 ‘나만의 삶’이란 걸작의 창조를 이끌어 낸다. 그러니까  친구, 너에게는 이제 좋은 일만 남았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충분히 고생했으니까.  힘내라.


제4부 외로움을 뛰어 넘기


■ 혼자서도 감동을 끌어내는 능력  


남편이 늦는다. 벌써 40분이 넘었는데. 주치의를 만나 무슨 얘기를 이렇게 혼자 하는지.

한때 스타 블로거였던 그녀는 노트북 컴퓨터를 내려놓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비밀번호를 눌러 옷장을 열고, 여행 가방을 끄집어냈다. 조바심이 났다. 1분이라도 빨리 나가고 싶었다.

며칠 있지도 않았는데 몇 달은 지난 것 같은 지루한 병원생활이었다. 그나마 의사와 간호사들이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었다. 간단한 결석 환자인데도 세심하게 마음을 써준 것을 보면,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세면도구와 남편 면도기, 수건, 휴대폰 충전 케이블 등을 비닐봉지에 담아 여행 가방 앞쪽 수납부에 넣고 지퍼를 닫았다.

옷장의 옷가지들을 꺼내려는데 옷장 바닥에 뭔가가 놓여 있었다.

노란색 표지의 에세이였다. 전에 입원했던 누군가가 두고 간 모양이었다. 그녀는 쭈그리고 앉아 몇 장을 넘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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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있었던 일이다.

교사 출신의 새내기 주부가 잡화를 파는 구멍가게를 열었다. 주부는 머리가 좋은 데다 친절하기까지 해서 동네 사람들이 전부 그녀의 가게를 찾았다. 반면 다른 가게들은 매상에 타격을 받아 울상을 짓게 됐다. 남편이 그녀의 의중을 물었다.

“동네 사람들이 우리 가게를 찾아주는 건 고맙지만, 우리 때문에 다른 가게들이 문을 닫아버린다면 그것은 폐를 끼치는 것이 아닐까?”

부부는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가게의 운영 규모를 줄이기로 했다. 몇 가지 품목을 들여 놓지 않고, 그 물건을 찾으면 다른 가게를 소개시켜 주었다. 주부는 손님이 줄어들자 여유로워졌다. 그녀는 한가한 시간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하루에 원고지 두 장 반 분량을 써서 모아 ‘아사히 신문’의 공모전에 보냈다. 소설은 최우수작으로 선정되었고, 지금까지도 걸작으로 꼽히며 널리 사랑받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미우라 아야코, 소설의 제목은 ‘빙점’이다.

남편 미우라 마쓰요는 아내가 소설가의 꿈을 키우도록 신혼 시절부터 지원해 주었고, 아내의 건강이 악화된 뒤로는 구술을 받아 적어 작품 활동을 도왔다. 아야코는 결핵에 척추염을 앓았으며 암 수술을 받기까지 했다.

1999년 아야코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발표한 작품 83권 가운데 70권이 남편의 손을 거쳤다.       

그녀는 책을 덮었다. ‘빙점’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케이블방송에서 드라마로 본 기억이 있었다. 그 원작자가 이런 사람이었다니, 대단한 것을 이뤄낸 사람치고는 소박한 삶이었다. 그녀는 옷소매로 책표지를 정성스럽게 닦으며 생각했다. 평생을 병에 시달린 사람도 이렇게 대단한 일을 해냈는데, 그것도 남편한테 구술을 하면서까지 말이다.      


심심한 것은,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배부른 팔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외로움이고, 두려움이며, 절망이었다. 그녀는 탈출구로 인터넷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잘 극복했고, 도 이런 수술까지 겪으면서 여기까지 왔다.

이겨내고 또 이겨냈다.

그녀는 솔리튜드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도 무한한 변화 가능성과 다양성을 찾아낼 줄 아는 열린 마음, 안목과 상상력, 혼자서도 감동을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솔리튜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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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일찍 그것을 깨달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스스로를 어쩌지 못해, 사람들에게 ‘알아 달라’며 또 ‘어떻게 좀 해 달라’며 매달리고 힘들게 만들지는 않았을 텐데.   

남편이 돌아왔다. 조금 어색했지만 웃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남편을 향해 밝게 웃어 보이면서 결심했다. 이제는 정말 저 사람한테 잘해줄 거야. 이만큼 고생시켰으면 됐지. 더 이상 바랐다가는 내가 지옥에 떨어질 거야.


■ 잘난 남자들의 숙명


엄마야.

놀랐지? 갑자기 엄마의 메일을 받아서.

미안하게도 네 프라이버시를 침범하고 말았단다. 미안해. 아들.

네 방을 청소하는데 컴퓨터가 켜져 있지 뭐니. 끄려다가 아빠가 보내준 메일을 보게 됐어. 미안해.

못 본 척하고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너한테 꼭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메일을 보내는 거야. 네가 아빠와 메일로 자주 소통한 것을 보니까 약간은 질투도 나고, 엄마와도 그런 대화가 가능하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어. 만날 공부하라고만 하는 잔소리꾼 이미지는 싫거든.

친구들보다 키도 작고, 잘생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어서 답답하다고? 루저가 될까봐. 여자 친구가 생기지 않을까봐 걱정이라고?

성적은 네가 얼마나 더 노력하느냐에 따라 바뀔 수 있겠지. 컴퓨터 게임 하는 시간을 반으로 줄이고, 그 시간에 수학 문제를 푼다면 점수가 달라질 거야. 미안해. 또 공부하라는 얘기로 빠졌네.


엄마는 우리 아들의 용모가 평범해서(엄마 기준엔 훤칠하고 멋지기만 하지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 ‘무서운 여자’를 만날 확률이 그만큼 줄어들 테니까 말이야. 무슨 얘기냐고?

언젠가 너도 알겠지만. 키 크고 잘 생기고 심지어 공부까지 잘한 남자의 여자는 거의가 비슷하단다. ‘무서운 여자’라는 거지. 신은 언제나 공평하단다. 다 주는 법이 없으니까.

     < 중   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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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잘난 남자들의 숙명은 그렇게 외로운 여자를 만나 그 여자를 더욱 외롭게 만들게 되어 있다는 것이 이 엄마의 주장이야. 그래서 그 자신도 사랑하는 사람의 외로움 때문에 외롭지.

그러니까 완벽해 보이는 친구들을 부러워만 할 필요는 없어. 완벽이라는 건. 절대 인간의 영역이 아니거든. 아무리 그렇게 보여도 말이지.           

        

옛말에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는 말이 있어. 부잣집에서는 뒤웅박에 쌀을 담고, 가난한 집에서는 여물을 담기 때문에. 여자가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느냐. 아니면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가느냐에 따라 그 여자의 팔자가 결정된다는 뜻이지.

하지만 엄마는 ‘남자 팔자야말로 뒤웅박 팔자’라고 생각해. 어떤 여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볼품없던 남자가 우뚝 서서 뻗어나가기도 하고 승승장구하던 남자가 비루먹은 개처럼 초라해지기도 하니까.

이 점에서 엄마도 ‘큰어머니가 대단한 분’이라는 아빠의 이야기에 공감해. 큰 아버지가 높은 자리에 오르고, 마라톤 5회 완주라는 꿈을 이룬 데는 큰어머니의 격려가 큰 도움이 되었을 거야. 그러니까 ‘땅꼬마’라고 큰어머니의 별명을 함부로 부르면 안 돼. 엄마가 보기에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철탑만 한 여인’이니까.

불운을 뒤집으면 그게 행운이라는 말이 있어.

아들. 킹카가 아니라고 주눅들 필요가 전혀 없어. 오히려 다행이지. ‘무서운 여자’들이 킹카에게 몰려드는 사이. ‘약간 덜 무서운 여자’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엄마는 우리 아들이 ‘덜 무서운 여자’를 만나 일상에서 평화와 안식을 누리며 스스로의 뜻을 펼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상대를 존중해 주는 방법을 알고. 스스로도 존중받게 행동하는 외롭지 않은 여자 말이지.

그럼 엄마는 어느 쪽이냐고? 네 상상에 맡길게.


■ 지금 외롭다면 잘 되고 있는 것이다


캐나다의 문화비평가 마셜 매클루언이 말했다.

“모든 문화와 문명의 형태는 외로움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대상을 찾기 위해 만들어낸 인공 대체물 같은 것이다. 직장이나 취미, 가족, 종교, 심지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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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까지도, 인간은 외로움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런 것들을 발명해 냈다.”

매클루언의 말은 이렇게 수정되어야 한다.

“인간은 외로움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문화와 문명을 만들었지만. 정작 그 문화와 문명의 발전을 이끌어간 것은 ‘외로운 사람들’이었다.”


스위스의 피에르 렌치니크 박사는 세계사 흐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인물 300명을 대상으로 연구를 하다가 묘한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고아였다는 점이다. 부처, 마호메트, 모세, 공자, 카이사르, 루이 14세, 조지 워싱턴, 빅토리아 여왕, 나폴레옹, 골다 메이어(이스라엘 최초 여성 총리), 레닌, 비스마르크, 드골 등이 그랬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루소, 단테, 도스토옙스키 등도 고아였다.

고아(孤兒)란 말 그대로 부모를 여의거나 버림받아 몸 붙일 곳이 없는 아이를 뜻한다. 어린나이에 적나라한 외로움에 무자비하게 노출된 상태. 그들의 어린 시절은 실패와 성실, 불행, 좌절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외로움 앞에 우뚝 섰고. 외로움이라는 에너지를 이용해 스프링처럼 도약하는 데 성공했다.

외로움의 에너지가 그들의 성취에 어떤 ‘결정적 역할’을 했을까.

나는 외로움이 그들의 ‘깊이’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외로움 속에 머물며 더 깊이 내려갈수록 더 많은 ‘이해’를 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이해’란 사람에 대한 것이다. 사람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은 외로움의 삽질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는 삽질로 바닥을 향해 파 들어가면. 그 바닥을 흐르는 따뜻한 물줄기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인간 본연의 깨달음 말이다.

외로움 속에 머물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은 다른 누군가를 닮으려고 하지 않으며, 언제나 자기 본질에 충실하다는 점에서도 두드러진다. 외로움을 자신만의 창조성의 원천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빛이 한 줌도 없는 캄캄한 외로움 속에서도 묵묵히 삽질을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영혼의 깊이가 자발적 외로움의 깊이와 비례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미소 짓는다. 그런 깨달음 자체가 이미 성취이며 커다란 보상임을 알고 있다.

그러니 지금 외롭다면 잘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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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가게 하라


0 부모 노릇 3계


1. 인생을 구분하자. 아이 인생은 아이의 것이다. 자기 인생도 마음대로 못 하면서 어떻게 아이 인생을 좌우하려 하는가. 부모 역할은 조언까지다. 조언은 하되, 결정은 아이 스스로 하게 하라.


2. 헌신과 투자를 구분하라. 헌신은 투자와 달리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구분하지 않은 채 두루뭉수리로 넘어가려 하기 때문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헌신이 아니다.


3. 제대로 헌신하자. 헌신은 아름다운 것이며, 최고 수준의 사랑이다. 대가를 바라는 부모는 존재 자체가 빚쟁이다. 빚쟁이는 일단 피하고 싶은 게 사람 심리다. 아이를 채무자로 만들지 말자. 우리는 최소한 ‘부모’라는 고결한 이름에 먹칠하는 창피한 부모는 되지 말자.


아래층 자전거 아줌마가 말했다.

“나도 들은 건데 아이들의 반항기는 ‘신의 선물’이라는 거야. 신이 가족의 행복을 지키라고 그걸 만들어 놓았다는 거지. 무슨 얘기냐 하면, 아이는 장차 독립해서 자기 의지대로 살아야 하니까 그렇고, 자꾸 거리 두기 연습을  해야 엄마가 사악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뜻에서도 그렇대. 나쁜 엄마들은 아이가 자기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걸 원치 않기 때문에 아이를 독립시키지 않고 나약하면서도 의존적이게 키운다나? 나쁜 년!”

나더러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아서 속으로 뜨끔하다가 “나쁜 년” 소리에 깜짝 놀랐다.

“네? 누가요?” 아줌마가 호탕하게 웃었다.

“누구긴 누구야. 우리 집 딸년 이정은 말이지. 유학까지 보내놨더니 쓸데없는 것들만 배워 와가지고는……사사건건 엄마를 가르치려 든단 말이야. ‘렛 힘 고(Let him go)' 인지 '렛 허 고(Ler her go)’ 인지 뭐가 ‘그냥 가게 하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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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 언니의 말이다.

“아이들은 세 살이 될 때까지 평생 동안 해야 할 모든 효도를 끝낸대.”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우리는 어쩌면 그렇게 진짜 부모가 되어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진짜 부모가 된다는 것은, 다음 세대를 위해 온전히 마음을 쓰며 주는 것만으로도 완결임을 이해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게 헌신이다. 투자가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진짜 부모가 된 사람은 외롭더라도 그것을 알아 달라고 하지 않으며 스스로 녹여 내어 솔리튜드의 경지로 스스로를 이끌어가는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일 게다.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그냥 가게 하라. 아이가 떠나는 것 또한 축복이다. 아이가 나보다 더욱 커지게. 나 또한 더욱 성장할 수 있게.’


■ 유언의 수수께끼


안녕하세요? 선생님이 보내준 메일 잘 읽었습니다.

선생은 ‘선생’이라는 호칭을 정중하게 사양했지만, 박사과정을 마치고 곧 강단에 서게 될 분을 선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실례가 아니겠는지요.

먼저 아버님의 유언에 대해서.

“장례식에선 곡을 하지 말고 당신께서 출연하셨던 코메디 프로그램을 보면서 웃어달라”고 하신 부분.

조금은 연륜이 있는 내가 보기에는 진심으로 느껴집니다. 나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아버님은 생과 이별하는 순간에도 사람들이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던 게 아닐까요. 오히려 마지막까지도 웃음을 끌어내기를 원하셨던 게 아닌가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대단한 프로 의식입니다.


다음은 어머니를 통해 전달하셨다는 글자 ‘숙(熟)’에 대해서.

아버님께서 서예에 조예가 깊으셨는지요? 서예에서는 ‘熟’이라는 표현을 중요하게 씁니다. 이때의 ‘熟’은 필묵 기교의 능력을 표현하는 정도를 말합니다. 특히 ‘원숙(圓熟)’은 변화와 조화 속에서 이뤄지는 절묘한 경지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아버님께서 이 부분을 염두에 두셨다면, 선생이 학문은 물론 인생에서도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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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 원숙의 경지에 이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평생마음에 새기고 살아갈 한 글자’로 교훈을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熟’은 시간과도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견뎌야만 비로소 무르익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오랜 시간을 두고 학문이나 마음을 갈고 닦으라는 메시지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선생의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나의 느낌을 전체적으로 정리하자면.

“웃어달라”는 유언과 글자 ‘熟’을 통해 짐작해본 선생의 아버님은 자기 연민 같은 것을 질색하는 강인한 영혼의 소유자인 듯합니다.

아버님은 선생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크신 분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며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커다란 침묵의 존재랄까요.

나는 ‘웃음’과 ‘熟’에서 아버님이 물려주시고자 한 지혜를 이렇게 뽑아보았습니다.

‘즐거워하면서 너의 길을 꾸준히 가라. 지금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 그런 사람, 단 한 명이라도 만났다면


“길면 10개월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의사는 담담하게 말했다.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데. 그녀는 남편에게 이야기를 듣고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각오했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나야. 주치의의 설명을 듣는 순간, 각오 같은 것은 풀어진 휴지만큼도 소용이 없었다. 내가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기에. 그녀는 오열했다.

그녀는 인터넷에 접속해 요즘 매일 들르는 카페에 글을 작성했다. 외롭고 힘들어하는 누군가를 위해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었다.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기 밖에 없다고는 하지만, 누군가 곁에서 지켜봐주고 이해해준다면 더욱 힘이 나지 않을까.


사랑이란, 같은 곳을 향해 나란히 가는 것이 아닐지도 몰라요.

각자의 길을 가다가 만나서 함께 쉬고, 또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일 가능성이 높아요. 아무리 사랑해도, 서로 다른 일을 하고, 다른 날 다르게 죽잖아요.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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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상대가 바로 지기(知己)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사랑하는 사람과의 완벽한 삶을 꿈꾸지 마세요. 각자의 길을 가는 솔리튜드 연습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받아들이고 더욱 사랑할 수 있어요. 아쉽기 때문에 더 아껴줄 수 있으니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좀 더 여유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에게 여유가 있어야 당신을 더 알아줄 수 있잖아요.

당신을 알아줄 여유가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평생 동안 단 한 명이라도 만났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 위대한 왕따


예수는 평생에 걸쳐 기득권층으로부터 탄압을 받았고, 그를 따르지 않는 유대인 대중으로부터는 손가락질을 당했다. 예수는 언제나 외로움 속을 거닐었다. 광야에서 시험에 들 때도, 십자가를 지고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으며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도 혼자였다.

공자는 평생 동안 군주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며 유랑했다. 그가 정(鄭)나라에 이르렀을 때, 일행을 놓쳐 혼자 길을 잃고 말았다. 제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스승을 찾아다니다가 어느 행인을 붙잡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신들이 찾는 사람을 성문 쪽에서 본 것 같기도 하오. 그런데 그 허기에 지친 모습이 마치 ‘상가 집의 개’와 같았소.”


4대 성인의 공통점은 당시 사회의 아웃사이더였다는 것이다. 아웃사이더란 특정한 사회관계 범위의 밖에 있는 사람을, 주로 그 범위 안에 있는 사람(인사이더)의 입장에서 말할 때 쓰는 용어이다.

아웃사이더는 오랜 전통의 외로운 인간 유형이다. 유사 이래의 모든 주류 세력이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도전하고 비판하려는 아웃사이더를 눈엣가시로 여겨 탄압했다.

대중은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웃사이더를 싫어했다.

대중은 낯설고 불확실한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들을 압제하는 규칙과 제도를 선호했다. 알 수 없는 불안보다는 확실한 굴종이 더 나아보였기 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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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래서 아웃사이더는 ‘왕따’와도 직결된다. 상식을 부인하고 솔직하게 자기 견해를 밝히고 무리를 짓지 않으며. 또한 남다르다는 이유로 고통과 수난을 당해야만 했다. 시대를 앞서 가려는 새로운 시도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르는 것이다.    


역사에 커다란 발자국을 남긴 사람들 가운데는 외로움과 결핍을 창조로 연결시켜낸 외톨이가 유난히 많다. 스피노자부터 갈릴레오, 뉴턴, 베토벤, 프로이트, 피카소까지. 아인슈타인으로부터 현대의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마크 주커버그에 이르기까지. 그 밖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아웃사이더 창조자가 있다. 문득 생각나는 특정 분야의 위대한 누군가를 꼼꼼히 살펴보면, 그로부터 아웃사이더의 행적을 찾아낼 수 있다. 외로움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위대한 창조는 곧 ‘외로움이 주는 최고의 선물’인 것이다.

위대한 창조자들이 창조를 위해 치르는 대가는 ‘혹독한 외로움’이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 그들을 인정해 주지 않아 외롭고 괴롭다. 부모나 형제, 연인, 배우자, 자식들도 이해하지 못하고 보통 사람의 틀에 맞추려고 개입한다. 오죽하면 예수도 그 외로움을 토로했을까. “어디서나 존경받는 예언자들도 제 고향과 제 집에서는 존경받지 못한다.” (마태복은 13장 57절)

모든 아웃사이더가 위대한 성취를 이뤄낸 것은 아니다. ‘혼자 가는 힘’을 제대로 활용했느냐의 여부에 따라 운명이 갈렸다.

그들의 성과가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것은 그들의 스토리에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힘은 감동에서 나온다. 감동의 원천은 오랜 세월을 왕따로 살며 겪은 ‘고통’이다. 고통이 창조의 발원지인 것이다. 그러니까 외로움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은 진짜로 두려운 게 아니다.

오늘 하루가 고통스러웠다면, 나만의 위대한 창조의 발원지에 또 한 발짝 다가섰다는 의미다.


■ 행복과목 개설 청원위원회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3학년 때 우리 반 1등이었던 친구가 예고도 없이 물었다.  

“너는 표정이 참 행복해 보인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 거야? 나도 좀 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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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하는 줄 알았다. 20여 년 만에 만나서 왜 그런 걸 물어보는지 알 수 없었다.

1등 친구에게 물었다.

“행복해진다고? 그게 어떤 거라고 생각하는데?”

친구는 뭔가를 이루면 행복해질 거라고 믿었다. 힘들게 성취했으니까 고생이 끝나고 행복이 시작될 거라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했고, 좋은 직장을 잡았으며, 내 집을 장만했다. 좋은 자동차를 구입했으며 딸을 하나 낳았다. 남부럽지 않은 삶.

그래도 행복하진 않았다.


행복, 즉 ‘happiness’의 어원은 ‘일어나다(happen)’이다. 우발적 사건을 의미하는 ‘헤프닝(happening)’도 같은 맥락이다. 행복은 우연에서 시작된다. 한자어의 ‘행(幸)’ 역시 ‘운이 좋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억지로 그런 우연을 만들어내려고 온갖 수단을 아끼지 않는다.

“행복은 보상이나 성과 같은 게 아냐. 그냥 순간의 만족이나 감동 같은 느낌? 아니면 과거를 돌아보면서 뿌듯하게 느끼는 거? 그런 거야. 일시적인 거라고. 그런 행복을 24시간 또는 그 이상으로 이어갈 수 있다고 믿는 게 이상한 거지.”

그렇지만 행복감을 더 많이. 자주 느끼게 스스로를 훈련할 수는 있다.

상대방의 감정에 민감해지며 그 결과, 남을 존중하며 배려하는 것은 물론 사색과 관찰을 통해 사려 깊은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 외로움 즉 론리니스가 솔리튜드로 진화하면서 기품을 만들어 준다. 사람을 보는 안목을 길러 주며 진정한 감사를 깨닫게 해준다. ‘나에겐 마땅히 그럴 권리가 있다’면서 나서는 법이 없다. 스스로와 화해하며 다른이와 좋은 관계를 이어간다. 그 와중에도 자신의 고유성을 지켜나가는 것, 그것이 행복감을 더 많이 느낄 수 있는 훈련이다.


“스스로가 행복한지 판단할 수 있는 세 가지 잣대가 있는데 들어 볼래?”    “첫 번째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남’의 기준으로 성공과 행복을 판단하려고 한다. 남들이 선망하거나 우러러봐야만 행복한 거라고 믿는다. 그렇게 되기 위해 애를 쓰지만 목표를 이루어도 행복한 느낌 같은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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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무엇인가를 위해 노력하거나 그것에서 성공을 거두었을 때, 진심으로 격려, 또는 축하해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망설일 틈 없이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두 번째 잣대를 충족시킬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 손을 계속 비워놓을 수 있는지 자신한테 물어 보는 거야. 양손에 떡을 쥐려고 하지 않도록 말이야. 양손에 떡을 쥐면 그 후에는 남의 떡을 노려보는 욕심밖에 더 부리겠어? 결핍을 받아들여야 인생에 발전이 있다고 해.”

1등 친구가 아이디어를 냈다.

“우리, 행복을 학교 과목으로 가르치자는 주장을 정부에 제기해볼까? 요즘 애들 불쌍하잖아. 우리 때보다 더한 것 같아. 우리 새끼들을 위해서라도 좋은 일 한 번 해보는 게 어때. 이를테면…… 그래!  ‘행복과목개설 청원위원회’ 같은 걸 만들어서 청원을 넣어보는 거야.”


■ 에필로그 - 알아주는 힘


한 심리학자가 ‘어린 시절의 불행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기 위해 아이들을 대상으로 장기간의 연구에 들어갔다. 학자는 열악한 환경에서자란 아이 20명을 추려내 그들의 인생 이력을 분석했다. 예상대로 대부분이 학습장애와 사회 부적응을 드러냈으며 갈등과 사건의 중심에 서 있었다. 대물림된 불행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학자는 곧 예외를 발견했다. 그 중 72명은 절망에 빠지지 않고 잘 자라나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상류층의 좋은 환경에서 자란 또래들을 뛰어넘을 정도로 훌륭하게 성장해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도 발견할 수 있었다.

“도대체 이런 차이는 어디서 발생한 것일까?”

학자는 심층 면접을 통해 그 해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들 72명에게서 공통점이 발견된 것이다. 그 공통점이란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 주고 받아주는 사람이 인생에 걸쳐 한 명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느꼈어요?”

“이해해 주고 받아주는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얘기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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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죠. 우리는 흔히 ‘기댈 언덕’이라고 하죠. 사람은 자기 마음을 이해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걸 확인 할 때, 절망의 벼랑 끝에서 스스로 기어오르는 괴력을 발휘하지요. 현대 심리학이 행복의 제1 요소로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는가’를 꼽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요.”


“인정해 주는 것과 알아주는 것의 차이를 아나요?”

“국어사전에 나온 건 아니고 그냥 내가 구분해본 건데요. 구분해 놓고 보니까 정말 묘한 차이가 있는 것 같더군요. 인정해준다는 것은 능력이나 조건, 외형 등에 대한 거예요. 또한 상대가 원할 때 인정해 주는 경우가 많지요.”

“알아주는 건. 그런 걸 따지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알아준다는 건 능력이나 조건, 외형 같은 것을 넘어서는 의미라고 봐요. 존재 그 자체. 그러니까 잘났거나 못났거나, 능력이 있거나 없거나, 원하거나 원치 않거나,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준다는 뜻이거든요. 조건 없는 자애로운 사랑을 뜻하는 아가페(agape)와도 비슷하지요.”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 외로움과 불안은 누구도 대신 느껴줄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다. 그래서 사람은 외로움 속에서 홀로 서야만 하며, 외로움에 익숙해지고 마침내는 외로움과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혼자 가는 힘’을 얻게 된다. 혼자서도 마음을 충만하게 채움으로써 ‘온전한 나’가 된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는 나. 스스로를 책임질 줄 아는 나.

그것이 솔리튜드다.


외로운 사람을 돕는 최선은 ‘알아주는 것’이다. 그것은 외로움과 불안을 이해해주고 위로해 주며, 책망하지 않으며 같은 편이 되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알아주는 것은 구원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궁극적으로는 세상의 한 부분을 구원하는 것이다.      

사람은 아무리 깊은 절망에 빠졌더라도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던 한 명이라도 있음을 확인할 때, 고무공처럼 튀어 오르는 탄력을 발휘한다. 알아주는 게 얼마나 고마우면, 예로부터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는다”는 말까지 있을까.

                       2012. 1. 19.      다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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