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청춘아 가슴 뛰는 일을 찾아라

보해성산 2012. 4. 11.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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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아 가슴 뛰는 일을 찾아라

             - 신장 134Cm 국제사회복지사의 희망 멘토링 -


■ 김해영

0 국제사회복지사 : (전) 아프리카 보츠와나 굿 호프 직업학교 교장.

                   (현) 남부 아시아 부탄지역 사회개발 프로젝트 팀장

0 134Cm 작은 키, 척추 장애를 딛고 세계를 누비며 낙후 국가 중심의 활동

0 가난한 집 5남매의 맏딸, 초등학교 졸업 후 월급 3만 원에 남의 집 살기

0 직업훈련원 입학 편물 기술 습득, 1985 콜롬비아에서 열린 세계장애인기    능경기대회 기계편물 부문 세계 1위,  일본 편물 회사 한국 지부에 취직

0 1990년부터 아프리카 보츠와나 굿 호프 직업학교 편물교사로 자원봉사활    동 시작 

0 2003. 12  14년 간의 아프리카 생활을 마치고 사회복지학 공부. 2010년    5월 컬럼비아대학교 사회복지학 석사

0 남부아시아 부탄에 직업학교 설립  


* 학취개진(學就開進)의 삶 실천

   배움으로써 어려움을 이기고

   배움으로써 꿈을 찾고

   배움으로써 비전을 세우며

   배움으로써 삶을 나눈다


■ 추천사 1.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인생 - 이어령-


 그녀는 어떤 기회든지 ‘패스’하지 않고 살펴보았으며,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무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어떤 기회이든지 최선의 것이 되도록 만들어 나가려고 노력했고 30년을 그렇게 살았다고 합니다.

 장애를 입은 몸으로 기능대회 국가 대표가 되어 훈련하는 동안 고등학교 검정시험, 대학교 검정시험도 합격했다고 하니 그녀의 의지는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후에 잘 나가던 전문 기술자의 생활을 접고 아프리카의 보츠와나에서 자원봉사자로서 14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 정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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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프리카에서도 직업학교 교장이 되어 다른 나라 사람들을 가르치는 지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미국으로 유학 가서 대학과 대학원을 다녔다고 합니다. 최선을 다한 길이며 올바른 길이며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인생’을 살아온 것입니다. 경쟁만이 살아남는 길이라고 여기는 오늘 이 시대에 오로지 온리 원의 세계를 추구하며 살아온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한국을 거쳐, 일본, 보츠와나, 그리고 미국까지 가는 긴 여정이었습니다. 돌아가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최선을 다 한 길이며 올바른 길이며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인생’을 책으로 출간하게 된 김해영 선생을 진심으로 격려하며 축하를 보냅니다.


추천사 2, 반짝이는 별처럼 희망을 주는 사람

          - 숭실 공생복지재단 명예회장  윤기

추천사 3, 장애와 가난을 긍정과 낙천으로 이겨내다.

          - 인디라이터   명료진    

추천사 4, 정성을 모아 담는 보자기처럼

          - 편물 명장, 초전섬유 퀼트박물관 관장 김순희

추천사 5,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는 의미 있는 삶

          - 컬럼비아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 교수 / 국제 사회 복지대학 연              합회 유엔 대표  모이라 커튼


■ Prologue  당신은 존재 자체만으로 희망입니다

   - 절실함을 지닌 청춘들에게 드립니다. -


 “때로는  존재 자체만으로 기적을 믿게 하고 존재 자체만으로 희망을 품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국제사회복지사 김해영 선생님이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뜨거운 벅수를 부탁드립니다.”

 이금희 아나운서의 마지막 멘트에 이어 방청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2011년 6월 14일, KBS 1 TV의 아침마당 화요초대석 생방송이 끝났다. 나는 두 번째 게스트였다.  


 <열네 살, 월급 3만 원에 남의집살이를 시작했지요.>라는 타이틀로 시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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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닝 토크쇼 시간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무슨 말을 했는지. 지금 분위기가 어떤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박수 소리에 이어 광고가 나갔고 방송은 끝났다.

 바로 방송이 나간 그날부터 전국에서 방송을 보고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전화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삼사일이 지난 뒤에는 뉴욕에서 방송을 보았다는 지인들이 전화를 하고 이메일을 보내왔다. 곧이어 칠레, 남아공, 그리고 보츠와나에서도 방송을 보았다는 연락이 왔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서야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실감하기 시작했다.


 열네 살의 초졸 식모였던  장애인 여성이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석사를 마치기까지의 드라마틱한 인생역정은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했다. 2011년 한 여성지의 7월호에 초여름 제천 산골을 건강하게 걷고 있는 모습과 함께 나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여덟 쪽에 걸쳐 꼼꼼하게 실렸다 작은 자서전이라고 할 만했다.

 방송을 보고, 잡지 기사를 보고 난 뒤 많은 사람들이 연락을 해오고 있다.

 ‘그래 이제는 때가 되었다. 책을 내든지 방송에 나가든지, 이 모든 일은 국제사회복지사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이 일을 하기 위해 그 많은 밤과 날들을 지새우지 않았는가! 내가 헤쳐 나온 일들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할 보석 같은 일들이다. 공짜로 공부한 것을 갚아야 한다.’


 내가 태어났을 때 어른들은 첫 아이가 여자라고 기분 나빠했다. 술에 취한 아버지는 그 갓난아기를 벽으로 밀쳐버렸다. 어머니는 정신 질환을 앓았고, 이후 아버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이는 척추 장애인이 되었고 집안의 불행한 일을 모두 책임졌다. 아이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어린 동생들을 키웠다.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한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공부했다. 이 세상이 학교라고 믿었고,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이 선생이라고 믿었다. 불합리하고 부정의 한 사회와 사람들을 탓하는 대신에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나갔다. 어떤 기회든지 ‘패스’하지 않고 살펴보았으며,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무시’하지 않았다. 그 어떤 기회든지 최선의 것이 되도록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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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하는 데 30년이 걸렸다. 한국을 거쳐 일본, 보츠와나 그리고 미국까지 가는 긴 여정이었다. 돌아간 길이 아니다. 최선을 다한 길이며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인생’을 살아낸 길이다. 나의 인생은 꿈을 따라 흘러왔다.           

                          국제사회복지사   김해영


첫 번째 이야기 學

 독학의 달인, 마침내 컬럼비아대학교에 입성하다.


■ 꿈 앞에 있는 허들, 일단 뛰어 넘자.


 5월의 햇볕이 내리쬐는 컬럼비아대학교 캠퍼스는 푸른 잔디와 잘 어울렸다. 그 위에 사람들의 무리가 한가롭게 앉아 있다. 졸업예정자들이 일주일간 모여서 하는 캡스톤 프로젝트를 마지막으로 사회복지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어딘가로 가서 쉬어야 할 텐데 걸어갈 힘이 없다. 얼마나 숨 가쁘게 마지막 시간을 향해 달려왔는지 모르겠다. 강의실을 나와서 따뜻한 햇살을 따라 걸었다. 잔디밭은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는 학생들을 위해 잠시 숨을 돌리고 가라고 마련된 휴식처처럼 보였다. 평화스럽고 아름다웠다.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가지고 있는 스카프를 펼쳐서 깔고, 그 위에 엎드려 누웠다. 마치 땅속에서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아 이게 자는 거다. 잠자는 것이다……. 잠 속으로 빠져 들어 갔다.

 지난 1년 동안 자면서 걸어 다녔고 걸으면서 잤다. 페이퍼와 리서치, 실습 이 세 가지를 주축으로 매일 반복되는 공부를 하느라 시간 싸움을 벌였다. 시간은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져 있지만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배웠다. 늦깎이 유학생으로 동일한 시간 안에서 그 모든 과제를 해내려면 먹고 자는 시간을 줄여야 했다. 새벽에 서너 시간 잠깐 자며, 도서관에서 틈틈이 잠자며 모든 시간을 공부하는 데만 썼다.

 매일이 오늘이었고, 한 달은 오늘 다음에 왔다. 그리고 이 얼마나 다행인가! 기다리던 그 1년의 오늘이 온 것이다. 자! 이제 끝났다.

 두 시간 정도 깊기 잠을 자고 일어나니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잔디에서 올라오는 보드라운 흙냄새와 뜨거운 태양 빛을 느끼며 몸을 돌려 누웠다.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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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하고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시원한 바람이 얼굴에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2008년 5월에 나약 대학을 무사히 졸업하고 대학원 입학 준비를 했다. 졸업하면서 바로 대학원과정에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시간이 좀 필요했다.

 꿈 앞에는 허들이 놓여 있었다. 이것을 뛰어 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대학원 입학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면서 여러 가지 장애물을 뛰어넘어야 했다.

 첫 번째 허들은 꿈 자체가 지닌 높은 벽이었다. ‘미국의 대학원에서 1년 만에 석사를 마친다’는 것은 시간과 비용을 한꺼번에 줄인다는 뜻이다. 이런 과정에 지원해서 입학 허가를 받는 것은 하루아침에 준비하거나 몇 달 동안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두 번째 허들은 성적과 경험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먼저 1년간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임시 취업 승인을 신청하고 잠시 숨을 돌리면서 차분하게 대학원 입학을 준비했다. 본국에서 유학을 준비하는 것처럼 이 과정도 매우 세밀하고 시간이 많이 걸렸다.

 다행히 어려서부터 차근차근 다져온 실력으로 두 번째 허들을 뛰어 넘을 수 있었다. 실력은 증명되었다. 아프리카에서 14년에 걸쳐 매진했던 자원봉사 경험, 장애와 초등학교 졸업이라는 학력을 극복하고 외국에서 직업학교 교장으로 일했던 경험, 그리고 4년간의 학사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게 바탕이 되었다. 게다가 미국의 대학원을 마치고 전문사회복지사로 일하고자 하는 목표가 뚜렷했다.


 세 번째 허들은 사람들이 가진 ‘안 된다’. ‘불가능하다’는 고정관념이었다.

 “상급과정이 맞나요? 그게 무슨 과정이에요? 석사과정을 하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네 맞아요. 1년 만에 마치게 되는 과정이고요.”

 내 대답을 들은 상대방은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네에, 어떻게 석사과정을 1년 만에 마칠 수 있나요? 2년 아닌가요? 이런 질문이 얼굴에 쓰여 있다. 학교는 어디에 지원했느냐고 물어왔다.

 “내, 다른 두 학교와 함께 컬럼비아 대학원에도 지원서를 넣었습니다.”

 내 말을 듣더니, 아까보다 두 배쯤 더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네에, 컬럼비아 대학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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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 허들 앞에서 망설이고 있을 때 쐐기가 박히는 일이 생겼다. 입학신청 마감을 2주일 앞두고 그동안 학비를 지원해 주시던 분이 전화를 주셨다.

 “해영씨 컬럼비아 대학원은 포기하세요. 신청하느라고 시간만 허비하고 말거예요. 다른 대학원에 입학하도록 기도할게요. 다른 대학원은 충분히 입학 허가를 받을 수 있어요. 컬럼비아는 어렵지 않을까요?”

 나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아주 실제적인 조언들과 현실적인 조건 앞에서 꿈꾸는 자의 용기는 꼬리를 내렸다. 과연 불가능할까? 왜 안 된다는 거야! 이러한 생각은 하지도 못했고. 할 수도 없었다. 다른 대학원에 가면 되고, 또 그것만 해도 얼마나 대견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대학원은 입학 허가를 받을 가능성이 많다고 하니 이만하면 긍정적이다. 꿈꾸던 컬럼비아 대학원에 지원하는 일조차도 믿음이 없으면 안 된다니…… 내 믿음은 바닥났다.


■ 왜 포기합니까? 지원서도 안 넣고 말입니다.


 “아무래도 컬럼비아 대학교는 지원을 포기해야 할 것 같아요.”

 대학원 신청서 접수 마감 열흘 전이었다. 유학 전문 상담가 토머스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유명한 대학교에 지원하려고 했던 것만도 좋았다”고 말했다. 토마스는 당장 만나자고 했다. 대강의 이야기를 들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컬럼비아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충분히 있습니다.”

 세 번째 허들 앞에 주저앉아 있을 때, 이렇게 용기를 북돋워 주는 사람을 만났다. 내가 대학원 그것도 컬럼비아 대학교에 지원서를 넣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모두 ‘안 될 텐데……’ 라거나 ‘불가능해요’ 하는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그러나 토머스는 달랐다. 매우 적극적이었고, 마치 내가 입학 허가를 다 받은 사람처럼 이야기 했다.

 미국에서 자란 토머스는 보기 드물게 선생다운 사람으로 보였다. 그리고 역시, 실리적인 사고를 하는 미국인이랄 수 있었다. 그가 마지막 한마디 펀치를 날렸다.

 “왜 포기합니까? 신청서도 안 넣고 말입니다.”

 이 한 마디는 나 자신을 제대로 일깨웠다. 정신이 번쩍 드는 말이었다.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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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해 보지도 않고 지레짐작으로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의 생각에 전염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어리석은 생각을 깨우치고 대학원 입학지원서를 마무리했다. 지원하는 이유를 적은 에세이를 수십 번 고쳐 쓰고, 전공 관련 사례를 다룬 에세이도 끝냈다. 2009년 1월 15일 오후 4시에 헌터 칼리지와 컬럼비아 대학원 지원 신청을 완료했다. 2주 후에는 롱아일랜드에 위치한 아델파이 대학원에도 입학지원서를 보냈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 독학의 달인, 컬럼비아 대학교에 입학하다.


 2009년 2월 중순에 아델파이 대학원에서 입학허가 이메일이 왔다. 합격이다 기분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조금 더 기다려보고 싶었다. 가고 싶은 컬럼비아 대학교는 2월 말까지 기다려야 결과를 알 수 있다. 2월의 마지막 토요일 늦잠까지 자고 일어나서 졸린 눈으로 습관처럼 이메일을 열었다. 새로운 이메일이 있다.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왔다. 이메일의 내용은 놀랍게도 지원 서류를 넣은 온라인에 들어가 확인하라고 한다.

 떨리고 흥분된 마음으로 로그인 하자 첫 화면에 대학교의 로고가 박힌 영문 편지가 떴다.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3월 말까지 입학을 결정할 것인지 알려 달라고 했다.

 와!! 진짜 합격이다. 합격, 합격.

 옆방의 룸메이트에게 달려갔다. 너무 흥분해서 뭐라 설명이 잘 안 되었다.


 정작 들어가고 싶다고 꿈꾸었던 대학원에 합격이 되었고, 꿈을 이룬 것이 행복하고 좋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조심스러웠다.

 ‘어머, 그래요?’

 ‘뭐, 입학 허가는 다 받을 수 있는 일 아닌가요?’

 ‘설마, 입학하려고.’

 ‘그 비싼 대학교에?’

 사람들의 이러한 반응은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깨닫게 해 주었다. 나는 허들을 뛰어 넘고 있는 중이었다. 정지화면을 잡아보니, 허공에 떠 있었다. 아직 허공에 떠 있는 내 이야기를 믿고 같이 기뻐해줄 사람들이 많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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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깨달은 뒤 나는 컬럼비아 대학교에 합격했다는 말을 삼갔다. 도움을 받는 처지의 늦깎이 유학생이라서 학비와 생활비 일체를 누군가의 도움으로 해결해야 하는 처지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일반 사람들도 들어가기 어려운 사립대학에 들어가려고 한다거나 합격했다는 것은 축하 받을 일이 아니라 질투의 대상이 되거나 더 심하게는 비난을 면키 어려운 일일지도 몰랐다.

 어떤 사람은 노골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제 그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게 되면 교만해져서 좋은 일을 하던 것도 때려치우겠네요.”      


 나는 향후에 아프리카나 제3세계에서 일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그런 나라들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좋은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저개발 국가일수록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일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이미 아프리카 생활에서 경험했었다. 내 세울 만한 가족적, 사회적 배경이 없는 장애인인 나에게는 그러한 국제적인 일을 진행하는 데 컬럼비아 대학교만큼 확실한 배경이 없다고 판단했다.

 또 다른 이유는, 머리 터지게 공부하고 깨달아 알아가는 학문 그 자체에 대한 갈증이 남아 있었다.

 3월 말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컬럼비아 대학원에 임시 등록을 마쳤다. 앞으로 1년간의 대학원 학비는 4년간 공부한 경비의 절반에 이른다. 적지 않은 금액이다. 도와주고 후원해 주던 사람들에게 대학원 공부도 잘 마칠 수 있도록 기도와 협력을 부탁했다. 두 달 후에는 신청한 사실조차 잊고 있던 다른 학교에서도 합격 통지가 날아왔지만 나는 이미 컬럼비아 대학교행 버스에 올랐다.

 이 버스를 타려고 5년 전부터 준비했다. 대학 1학년 사회복지학개론 수업 때 컬럼비아 대학교가 언급되었다. 미국 내에서 사회복지학으로는 최고의 역사와 경험과 교수진과 졸업생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래 그럼 대학원 석사는 여기서 해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4년 동안 전공과목들을 들들 볶았다. 최선을 다했다. 그것이 티켓이니까. 내가 도착할 버스를 확실히 기다렸고, 고맙게도 버스는 내 앞에 와서 섰다. 이제 탔다. 자! 가자.   


 다시 생각해보면. 이 버스를 타기까지 30년이 걸렸다. 그동안 여러 나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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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돌았고 혼자 공부하면서 배우느라고 ‘독학의 달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을 지나왔다. 만만한 세월이 아니다. 컬럼비아 대학교 버스가 나를 실어준 것도 고마운 일이지만 그 오랜 세월 동안 넘어지지 않고, 엎어지지 않고 성실하고 꾸준하게 여기까지 온 내가 기특하고 대견했다.


■ 열네 살 식모의 동서양 꼬부랑글씨 정복기


 “I am a girl.”

 “you are a boy.”     

 하얀 교복을 입고 중학교에 입학한 친구 인선이가 마지막으로 가르쳐준 영어 문장이다. 가끔 만나주던 친구는 내가 답답하다고 했다. 내가 중학생과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을 가르쳐 주던 친구는 내게서 차츰 멀어지더니 마침내 나를 떠났다. 대신에 다른 애들이 나타났다. 아침마다 까까머리 남자 중학생들이 무더기로 눈앞을 지나다녔다. 식모로 일하고 있던 집 건너편이 양정 중‧고등학교였다. 그 아이들은 내게 공부를 가르쳐 주진 않았지만 공부하고 싶다는 나의 마음에 기름을 들이부었다.


 두 번째 월급을 탔을 때 서점에 가서 ‘국어완전정복’과 ‘영어완전정복’ 책을 샀다. 혼자서 책을 정복하기로 했다. 읽고 쓰고 외우고……그러나 도저히 혼자서는 공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하고 싶은데 책의 내용이 너무 어려웠을 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국어도 영어도 때려치우고 까까머리 애들을 부러워하며 지냈다.

 식모 일을 하던 집은 큰 한옥에 한의원을 겸하고 있었고 나는 약재방 겸 환자 진찰실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잠을 자려고 누우면 약재 상자에 적혀 있는 글자들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소를 하다가 붓글씨로 ‘千字文’이라고 크게 쓰여 있는 책을 발견했다.

 “할머니 이거 무슨 책이에요?”

 “얘, 그거 한문책이란다. 천자문이라고 읽어.”

 “그럼 할머니 이 책을 공부하면 저 약재방의 한문을 읽을 수 있어요?”

 내 질문에 할머니는 빙그레 웃기만 하셨다.

 책을 펼쳐 보았다. 다행이었다. 각 페이지는 네 글자를 한 글자씩 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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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어 놓았고 글자에 대한 그림 설명과 함께 글자를 쓰는 순서와 뜻, 그리고 네 글자의 의미를 한글로 잘 설명해주고 있었다. 이만하면 혼자 공부해도 될 것 같았다. 그날부터 읽고, 쓰고, 외우고……

 겨울과 봄이 지났을 때는 약 800자가 넘는 한자를 익혔다. 밤마다 내 눈을 괴롭히던 정체 모를 한문 글자보다 더 많은 글자를 알게 되었다. 새로운 글자를 익히는 것이 쉬워졌고 빨리 기억되었다. 새롭게 배운 한문을 신문을 읽으면서 확인해나가는 재미가 제법 쏠쏠해서 아침마다 신문이 오기를 기다렸다.         

 남아 있는 글자 수를 세어볼 쯤에 식모를 그만두었다. 그 집에 오는 반상회보에서 ‘무료 직업학교 훈련생 모집’이라는 광고를 보고 나서다.

 식모로 일했지만 천자문을 익혀서 그 집을 나왔다. 작은 배움은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깨닫게 해주었고, 또 다른 공부방 문을 열고 들어가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되어주었다.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는 데 힘이 되어 주었다.   

 1980년 가을,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한남직업전문학교(현 서울특별시 중부기술교육원) 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곤 6개월 과정의 기계편물 기술을 배웠다. 졸업과 함께 경기도 용인의 편물 하청 공장에 취직을 했다. 식모가 되어 받던 월급보다는 조금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자마자 공부하고 싶다는 의지가 솟아올랐다.

 자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때려치운 영어 공부가 생각났다. 영어의 알파벳을 읽고 쓸 줄은 알았지만 문제는 단어를 읽을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작은 쪽지에 영어 발음 기호표와 영어 단어들을 써서 편물기 옆에 붙여 두고 익혀 나갔다.

 작은 일이 기적을 만든다고 했던가. 눈으로 익힌 영어 단어가 조금씩 입안에 맴돌았다. 어느 날인가부터 영어 단어가 읽혔다. 오, 내가 생각해도 기특했다. 영어가 적혀 있는 간판들을 보며 영어를 읽는 재미로 버스를 탔다.


 정규 학교를 다니지 못했기에 더 간절했고 더 배우려고 노력했다. 하루 열두 시간에서 열네 시간씩 이어지는 단순노동자 생활은 무척 힘들었다. 더욱이 신체적 장애가 있어 그러한 노동을 감당하기가 더 힘들었다.

 책을 들고 무언가 배우고 있을 때만 털실 먼지 날리는 공장생활과 중노동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배움은 암담한 현실을 견뎌나가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나로 하여금 내가 새로운 지식이나 교양을 가진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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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자각을 갖게 해주었다.

 영어 발음을 익히고, 단어를 암기하려고 노력하는 동안, 내가 생활하는 환경이 바뀌어 갔다. 기술자로서의 위치도 바뀌어 갔다. 기초 영어를 독학하고 있을 때, 앞날에 무슨 일을 할지, 어느 나라로 가서 살지 전혀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냥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는 그 자체가 좋았다.         

■ 사서오경을 읽고, 새로운 세상에 들어서다.


 직업훈련 교육을 마치고 지방의 소도시 공장에 취직해서 기능사로 일하고 있었다. 월급도 식모로 일하며 받던 두 배쯤 되었다. 월급 받으면 제일 먼저 서점으로 달려갔다. 책을 사서 읽는 기쁨을 키워가던 어느 날 자취방에 손님이 찾아왔다.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 부인이었다. 여동생이 월부 책장사를 하는데 ‘책 좀 사 달라’고 부탁했다. 한두 권 사면 되는 줄 알고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며칠 후 월부 책장사 언니가 카탈로그를 들고 왔다. 나는 한문이 잔뜩 쓰인 사진 속 책을 가리켰다. ‘사서오경전집’이라고 적혀 있었다.

 주문을 하고 한 달쯤 지나서 책이 배달되어 왔다. 그 무렵 읽고 있던 ‘제 3의 물결’과 같은 두께의 책들 열세 권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논어, 맹자, 중용 이었다.

 그 중에 한 권을 펼쳤다. 읽기도 전에 지레 기가 질렸지만, 그래도 내 책이니까 하며 천천히 넘겨보았다.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한 말들이 이어졌다. 일별하며 읽던 중에 아주 짧은 글에 눈이 갔다.

 ‘잘못한 것을 알고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이 더 큰 잘못이다.’

 마음에 든다. 정말 맞는 말이다. 혼자 읽고 감탄하고 있는데 책 구입을 부탁했던 사모님이 찾아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때 목사님도 나와 같은 책을 샀는데 사모님은 걱정이 되셨던 모양이다.

 나는 그 책들이 전하는 심오한 뜻까지 깨닫는 것은 어려웠지만 적어도 이해하고 깨달은 것은 실행하려고 노력했다. 어딜 가든지 그 책들 중 한 권이 내 손에 들려 있었다. 나는 한문으로 읽은 뒤 한글역을 읽으면서 한 줄 한 줄 이해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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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서오경을 한 권씩 읽어갈 때마다 내가 살고 있는 환경은 바뀌어 갔다. 이 책들이 내게 준 가장 큰 교훈은 어머니와 형제들과의 올바른 관계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그 책을 읽은 것은 집을 떠나와 혼자 살기 시작한 지 3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고, 어찌하여 부자가 되거나 인생이 개벽을 한다 해도 한 사람이 올바른 삶을 사는지의 여부는 그의 부모와 형제 그리고 가족관계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과 함께 기술을 배워 직장생활을 하면서 자신감도 얻게 되었다.


 기회를 보다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것은 내 삶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일들이 전환되었음을 의미했다. 진정으로 가족구성원이 된 기분을 느끼기도 했지만 한창 자라나는 4명의 동생들을 위해 희생할 의지도 있어야 했다. 동생들의 학비를 내고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며 소녀 가장의 역할을 자연스럽게 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로 떠날 때까지 약 6년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번 돈은 대부분 동생들의 교육비와 생활비로 사용되었다.

 아버지의 술주정 때문에 장애인이 된 것, 어머니의 심한 학대를 견디며 어린 시절을 보낸 것, 또 동생들과도 소원하게 자란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가족들을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에 가라앉아 있는 슬픔, 증오, 미움 등의 감정들은 책을 읽어나가면서, 또 나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면서 자연스럽게 치유되어갔다. 오히려 ‘내가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하는 심정으로 그 시절을 보냈다.


 나중에 아프리카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학교의 책임자가 되어 다른 나라 사람들을 지도하는 위치에 오르게 된 것도 사서오경을 읽고 체득한 처세술 덕분이라고 믿는다. 또,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살아도 중심이 흔들리지 않고 인간과 환경을 이해하는 힘을 갖게 된 것도 바로 이 책들 덕분이었다. 다른 그 어떤 책들보다도 큰 영향을 받았다고 믿는다.


■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는 법


 “해영아, 기능 대회에 참가해보자.”

 직업학교에서 내게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1982년 여름에 개최되는 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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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기능경기대회에 나를 추천하려고 하니 참가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모든 일에 성실히 임하는 나를 눈여겨본 편물과 윤은숙 선생님께서 경험 많은 기술자들이 출전하는 그 대회에 나를 추천하신 것이다. 

 이 제안은 단순 편물기술자가 아니라 고급 기술자가 되는 꿈을 꾸도록 내 노력을 촉진했다. 하지만 방법을 찾는 것은 내가 할 일이었다. 방법은 두 가지였다. 더 많은 월급을 받는 것을 포기하는 것과 직장을 자주 바꾸는 것이었다.

 항상 그렇듯이 무언가를 시작할 때는 그 일이 어떻게 되어갈지  잘 모른다. 그저 잘 되어가길 바라고 열심히 해갈뿐이다. 나도 그랬다. 갑자기 배우게 된 기술이었지만 열심히 배웠다. 6개월의 편물 기초과정을 마치고 3급 기능사 자격도 땄다. 이것은 털실과 편물 기계를 가지고 스웨터 한 벌은 짤 수 있는 기술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내 직업교육은 끝났다.

 같이 졸업한 내 친구들은 오래 일할수록 높은 임금을 받게 되는 단순한 편물기술자를 택했다. 나는 그렇게 일하는 것이 내 신체에도 맞지 않고 미래를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전문 기술자가 되는 훈련을 스스로 찾아서 하기 시작했다. 어떤 공장에서는 4개월 동안 털실만 감았다. 어느 직장에서는 8개월 동안 검은색 양모 털실로 수녀님이 입는 스웨터나 카디건을 맞춤 제작하는 일만 했다.

 여대 앞 니트 의상실에서는 일본이나 유럽에서 가지고 온 잡지를 보고 ‘똑같이’ 만들어 달라고 하는 여대생들의 까다로운 주문을 해결해나가면서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기계편물 제품이 만들어지는 공정과 전문 맞춤 의상으로 완성하는 과정까지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는 법이다. 전문 기술을 배우기 위해 나는 기꺼이 돈을 벌고 안정된 직장생활을 누리는 것을 포기했다.


■ 장애인 친구들, 자격지심을 치료해준 주치의


 ‘이상한 사람들이다.’

 휠체어를 타거나 목발을 짚고 다니는 사람들, 농아들을 처음 만나보고 든 생각이다. 나 역시 장애인이었지만, 장애인으로서의 자각이 거의 없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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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이상한 사람들로 다가왔다.

 편물 기술을 전문적으로 익히기 위해 여러 공장을 전전하던 중에 재활원에서 사람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경기도에 위치한 직업 재활학교 명휘원에 생산 사원으로 취직했다. 이곳에서는 기계를 고치는 일부터 실을 감고 물건을 검수하고, 샘플을 만들고, 주문을 하는 등 물건이 만들어지는 전 과정에 관여했다. 실력이 월등해서가 아니라 그곳의 학생들 중에서 가장 건강했기 때문이다.

 재활을 목적으로 직업교육을 받는 장애인 청소년들과 기숙사에서 함께 2년 정도를 지냈다. 공부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일이 익숙해졌을 때, 야간 중학교에 입학했다. 낮에 일하며 밤에 공부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중학교에 꼭 다니고 싶었고 교복도 입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교복 자율화가 되어서 교복을 입지 않게 되었다. 지금도 이 일이 아쉽다. 야간 중학교 생활은 3개월 만에 중퇴하고 말았다.


 재활원의 학생들과 비교하면 나는 거침이 없었다. 마음대로 걸어 다닐 수도 있고 귀도 잘 들리고 두 눈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비록 키가 좀 작았지만 휠체어에 앉아 있는 사람보다는 컸다. 그곳에서 척추장애인은 정상인이었고 친구들도 그렇게 취급했다. 어떤 친구들은 다리에 착용하는 보조 기구 때문에  할 수 없는 힘든 청소나 뛰어다니는 일, 택시를 잡아오는 일 등을 나처럼 펄펄(?) 날아다니는 사람에게 부탁했다.

 ‘아니 이런 사람들이 다 있다니!’

 장애인 친구들의 형편을 알게 될 때마다 속으로 놀랐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야간 중학교 3개월 중퇴’라는 학력에 자부심도 생겼다. 초등학교만이라도 졸업한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진실로 그렇게 믿었다.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는 사실을 슬퍼하는 마음이 사라졌다. 중학교에 못갔다는 자격지심을 스스로 치료하고 그 뿌리까지 뽑아버렸다. 내 주치의는 장애인 친구들이었다.


 앞서 가고 있는 내 또래의 친구들을 바라보며 신세를 한탄하고 있을 때 나보다 더 힘들게 걸어오는 장애인 친구들을 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보다 힘이 있고 건강하고 잘나가는 친구들을 바라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힘든 환경 속에서 삶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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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결심하길 아주 잘했던 것 같다. 행복과 불행의 차이는 고개만 돌리니까 바뀌었다. 생각을 바꾸니까 눈에 보이는 것들이 달라졌고 내 마음도 달라졌다. 이것을 깨닫게 되어 참으로 행복했다.

 이것이 바로 존재의 의미와 참 행복을 찾아가는 철학하는 자의 태도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몇 년 후의 일이다.

 중학교에 못 간 대신에 기술을 배우고 일하기 위해 찾아간 직장인 명휘원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별세계라고 여기고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 장애인들로부터 참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이 학교에서 비로소 진정한 인간관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로가 장애인이었기에 상대방을 비하하지 않고 동등한 마음으로 관계를 맺는 법도 베웠다. 그곳에서 체험한 여러 가지 일들은 중학교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었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기술보다 더 값진 인간의 삶을 배우게 된 것이다.


■ 극심한 고통이 나를 공부하게 만들었다.


 학원 진학 상담자의 반대를 무릅쓰고 중학교 3년 과정을 5개월 만에 그것도 야간 반에서 공부하게 해 달라고 졸랐다.

선생님, 전 내년 5월에 세계장애인기능대회 국가대표가 될 거예요. 초등학교만 졸업한 채로 국가대표가 될 순 없어요. 그 전에 시험을 쳐서 중학교 졸업생이 되고 싶어요. 그리고 저는 올해 전국 기능대회에서 이미 금메달을 땄습니다. 결국 고검 야간반에 입학이 허락되었다. 아직 국가대표 선발전도 치르지 않았으면서 마치 국가대표가 된 것처럼 이야기 했다. 


 ‘초졸 만회를 해야지. 공부하러 가자’고 결심했다. 1983년 전국장애인 기능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땄다. 그리고 이듬해 1984년 인천에서 열린 제19회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도 금메달을 땄다. 거액의 상금도 받았고, 신문에 인터뷰 기사도 나갔다.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과 악수도 했다. 성공이 찾아왔다. 그렇다고 해서 어깨에 힘주고 돌아다닐 처지가 아니었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금메달을 걸어준 그 대회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러나 그 금쪼가리에 연연해 하지말고 더욱 노력하거라.”

 삶의 멘토이자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에서 일하시는 강대근 교수님으로부터 편지가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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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11월에 검정고시 전문학원을 찾아갔다. 이듬해 있을 세계장애인기능대회 선발전에 대비해 낮에는 기술을 연마하고 저녁에는 학원으로 향했다.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1년 과정 반에 끼어들었다. 열세 과목이나 배워야 하는데 교재를 펼치니 벌써 반 이상이나 진도가 나가 있었다. 못 하겠다고 다른 반으로 옮겨 달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 소리를 쳐놓아서 그냥 따라가기로 했다. 분명 수업은 한국어로 하는데 내 귀엔 외국어가 들리는 듯 했다.

 한 달 정도 지나니까 선생님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어느 과목을 가르치고 있는지 귀에 들어왔다.

 학원의 책상과 의자는 성인을 기준으로 만들어진데다 딱딱한 나무의자였다. 체구가 작은 나는 책 몇 권을 깔고 앉아서 수업을 들어야 했다. 이렇게 하면 상체는 높이가 맞지만 하체는 두 다리가 공중에 떠 있는 상태가 된다. 그러니 피로감이 빨리 온다. 수업이 끝나갈 때쯤이면 온몸에 갈빗대가 가라앉는  듯한 통증이 꽉 차올랐다. 더 어렸을 때는 통증이 오면 참고 잠시 쉬는 것으로 통증을 가라앉혔지만, 당시는 야간까지 쉼 없이 활동하던 터라 허리 통증이 매일 천근 무게로 나를 내리눌렀다.

 ‘이렇게 하다 너무 아파서 죽으면 어떡하지?’

 ‘누가 나에게 이 일을 강제로 시키는 것인가?’

 자문은 끝이 없었다.      


 주간에는 훈련원에서 기술을 배우고 야간에는 학원에 가서 검정고시 공부를 하는 것은, 나 자신에게 “어디, 한 번 죽어봐라!”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 극심한 통증이 시작되면 “오늘 살고 죽자.”라고 나 자신에게 말했다.

 지금 공부하고 있는 이 시간만 살고 죽자. 아프다. 그래, 오늘 이 하루만 살고 죽자, 참으로 비장하게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내 인생은 십 대에서 끝나버릴 거야.’라고 스스로 믿을 정도로 허리 통증은 심했다. 엎드려 있거나 누워 있지 않는 한, 오른쪽 허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몸을 움직인 만큼 되돌아와서 나를 괴롭혔다. 걸을 때도 천천히 걷고, 일어날 때도 천천히 일어나는 것으로 갑자기 오는 몸의 통증을 조절해나갔다.

 육체적인 한계를 매일 느끼면서도 일을 하거나 공부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살아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사람으로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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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마땅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인간답게 해결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 일을 마땅히 하고 있다가 그 자리에서 죽게 된다면 참 다행이라 믿었다. 천만다행으로 이보다 더 심하지 않아서 감사할 일이었다. 장애인이라고 하여 나 자신을 불행하다고 여기지 않고 십 대를 보냈다.


 드디어 외국어 같이 들리던 수업의 내용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겁을 냈던 초기의 마음을 접고, 학원을 그만두지 않고 버텨나갔다. 학원 선생님들은 교실 맨 앞쪽에 비스듬히 앉아 수업을 듣는 나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었다. 내 처지를 이해하고 힘든 것을 잘 딛고 일어나 성공하기를 바라는 따뜻한 미소와 눈길이었다.          

 5개월은 빨리 지나갔다. 처음 대하는 다양한 과목들이 대강 어떻다는 정도만 이해했다. 죽을 것 같았던 허리 통증도 지나갔다. 죽지 않고 살아서 시험을 치렀다. 얼마 후 중학교 과정을 마쳤다는 증서를 교육부로부터 받았다. 학력난에 중졸이라고 적었다.


■ 금메달과 산업훈장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


 “Machine Knitting GOLD MEDAL.”

 “Miss Haiyung Kim.”

 시상식 사회자가 내 이름을 크게 호명했다. 곧 스페인어로도 다시 호명되었다.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에서 열린 제2회 세계장애인 기능경기대회 시상식에서 콜롬비아의 대통령이 직접 메달을 목에 걸어 주었다. 시상식장은 축제 분위기였다. 종합 1위를 한 우리 대한민국 대표팀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1980년대에 열린 모든 기능대회는 마치 나를 위해 열렸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1982-1985년, 4년 동안 일곱 번의 기능대회에 출전하여 모두 입상했고 세 개의 금메달을 땄다. 가장 큰 대회는 역시 남미의 콜롬비아에서 열린 대회였다.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비행기를 타고 멀리 날아가서 치른 대회였다.

선수단 도착 환영식은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분주한 디너 행사 중에 조선일보 기자가 와서 사진을 찍으며 인터뷰를 요청했다.

 “앞으로 의상 디자인을 전공해서 니트 연구가가 되고 싶다”는 기사가 금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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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목에 걸고 환하게 웃고 있는 내 사진과 함께 다음 날 조선일보에 조그맣게 실렸다.

 두 달 후에는 정립회관에서 선수단 해단식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선수들은 대한민국 정부에서 주는 훈장을 가슴에 달았다. 금메달리스트는 산업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가 인정되어 ‘철탑산업훈장’을 받았다. 기능인으로서 받은 최고의 영예가 되었다. 처음 기술을 가르쳐주시고 대회 뒷바라지를 해주신 윤은숙 선생님, 공생복지재단 윤기 이사장님 등 많은 분들이 수여식에 참석해 주셨다.


 훈장을 받았다고 내 일신이 개벽하지도 않았고 나는 여전히 기술자였다. 장애인 여자아이였다. 기술을 배운다고 지난 몇 년 동안 공장을 전전하느라 모아 놓은 돈도 없었다. 십 대 청소년이었고, 훈장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지 못하는 어린 나이였다. 한 나라의 대표가 되고 많은 기능대회에 참가하면서 느낀 것은, 어느 경우에도, 불평하거나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감사하며 나아가는 것이 더 현명하고 좋은 자세라는 것이다. 나는 당시 나에게 온 기회와 사람들이 힘을 합쳐 나를 도와주려고 애쓴 사실을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했다.

 살아갈수록 사람이 일생을 통해 한두 가지라도 업적을 이룬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무렵 내 인생에 일어난 ‘계속적인 성공’은 나 혼자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나와 같은 한 사람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고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청소년 때 이룬 업적과 목에 걸게 된 금메달들은 내 것만이 아니었다. 나의 성공은 5남매를 고생하며 키운 어머니와 가난한 중에 자라나는 형제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한 소녀에게 기술을 가르쳐 자립하게 하고 성공하게 한 직업학교의 자랑이 되었다. 나와 같은 장애인이나 형편이 어려운 직업청소년들에게 희망을 주고 노력을 경주하게 하는 힘이 되었다. 19세에 받은 훈장은 나로 하여금 인생을 사는 동안 나라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될 것과 다른 사람에게도 업적을 남기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었다.


■ 학문의 세계에서 경쟁 상대는 바로 나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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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 세계 제패”

 검정고시 전문학원에서 보내온 축전이다. 다음 줄에는 “대검반 학원비 면제”라고 적혀 있다. 무엇인가 잘하면 그 때문에 새로운 기회가 온다는 것을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단지 5개월 정도 학원을 다닌 것뿐인데 그것을 기억하고 다시 와서 공부할 수 있도록, 그것도 공짜로 해주겠다고 하다니, 세계대회에서 금메달을 받은 것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 공부를 공짜로 할 수 있는 기회가 오다니…….

 다음 날 고려학원으로 달려갔다. 낯익은 선생님들은 물론 학원장님까지 축하하며 환영해 주었다. 모두가 한목소리로 “자, 이제 대검도 공부해서 합격해야지.”하며 용기를 북돋워주셨다.

 Made in Chana 를 처음 들었을 때 “뭐든 차이 나”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내 경우는 ‘뭐든 빨리’였다. 그 때문에 ‘뭐든 차이 나’다. 경력과 이력, 그리고 공부하는 데 있어서도 나는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경로를 거쳤다. 십 대에 기능인으로서 경력을 차근히 쌓으면서 단기간에 고검, 대검을 마친 것은 다른 사람들과 차이나는 점이다. 보통 사람들이 6년 동안 다니면서 배울 내용을 도합 12개월간 공부해서 시험을 보아 합격했다. 최소한 5년을 따먹고 들어간 셈이다.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기술을 배우는 내 형편에서 최선을 다해 얻은 결과였다.


 단순하게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기려고 노력하는 자세로는 얻을 수 없는 결과다. 그랬다면, 경쟁자가 없어지면 노력하는 것을 중지할 수도 있고 동기가 없어지면 나태해진다. 그것을 알게 된다면 인생을 배움으로 점철해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기능대회 때 깨달은 것을 공부하는 데 적용했다. 기술자도 결국은 자기 자신이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대입 검정고시반에 등록하고 나서 공부를 하는 일도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원에서 월말 고사를 치렀다. 선생님이 불러서 교무실에 갔더니 반전체에서 1등이라고 하셨다. 60명이나 되는 그 반에서…….

 “잘못 알고 계신 거 아니세요?”

 “아니야 네 이름이 김해영이지? 평균점수 1등이다. 정말 잘했다. 이렇게 하면 다음 달 시험은 합격이다.”

 선생님은 내가 이미 대검 합격이나 한 것처럼 말씀하셨지만 전혀 기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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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않았다. ‘1등을 했다. 동급생들보다 공부를 잘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공부하는 데 있어 내가 생각하는 상대는 같은 반 학생들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부, 학문의 세계에서는 변할 수 없는 진리라고 믿는다.       

 장장 7개월 동안의 검정고시 야간반 수업이 끝났다. 여덟 개 전 과목에서 합격했고 3년 과정을 끝냈다. 대입 검정고시는 고등학교 과정을 끝냈다는 말보다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땄다는 것을 더 강조한 말이다. 그럼, 이제 대학에 지원해도 된다는 말이다.

 이왕 공부를 시작한 것, 다음 목표는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대학에 가자. 12월에 있을 대학입학 학력고사반에 등록했다. 입시반에는 나와 비슷한 나이의 학생들이 있었다. 이제 비로소 제대로 달리기를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흠 늦지 않았어. 대학입학이라는 문을 두드렸다.


■ 실력이란, 세월이 지나며 차근차근 쌓아가는 것


 대학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나처럼 껑충껑충 뛰어서 달려온 실력으로는 대학입학 허가를 받는 것이 무리였다. 그해 본 입학시험은 평균점수를 겨우 넘었다. 대학입학에 계속 도전하기로 마음먹고 있는데 일본에 가는 조건으로 취업의 기회가 왔다. 대학입학과 일본을 놓고 고민하는데, 윤 선생님께서 한마디 하셨다.

 “대학은 언제든 갈 수 있지만, 일본에 가서 기술을 더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오지 않을 것 같구나. 고민하지 말고 먼저 일본을 다녀오거라.”

 잘 판단이 안 설 때면, 현명하신 어른이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재수하려던 계획을 접고 일본으로 갈 준비를 했다. 나에게는 어쩐지 대학이 물 건너가는 느낌이 들었지만. 일단 일본행도 좋은 기회로 생각되었다.

 1987년 4월, 산업연수생이 되어 일본의 지바현으로 갔다. 연수생은 모두 7명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본의 사장과 지바 선생님, 직원들은 의사소통을 위해 한문 필담이 가능한 나를 찾기 시작했다. 천자문을 공부한 덕분에 ‘조그마한 녀석이 신문을 줄줄 읽게 된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식모로 일하며 배운 한문이 일본에서 빛을 발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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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에서 6개월간 고급 기계편물 연수과정을 마쳤다. 컴퓨터 편물기계와 고급 실크를 원사로 해서 니트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마쳤다. 우리를 가르쳤던 지바 가즈에 선생님께서 편물 강사증을 전달해 주셨다. 지바 선생님과의 인연은 이렇게 맺어져서 오래 지속되었다.   그 몇 년 후에 다시 지바로 가서 그분 밑에서 연수를 마치고 편물 사범증을 받을 수 있었다. 지바 선생님과 그 가정을 통해 일본을 배운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일본어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 일본어 학원에 등록했다. 이미 한문을 알고 있었고 일본어로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을 깨우치고 돌아온 참이었다. 그러니 문법과 읽고 쓰는 법을 추가해 배우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맞았다. 수업은 쉬웠고 초급, 중급, 문법반 수업을 두 달 정도 듣고 끝냈다. 회사에는 일본에서 주문서가 오거나 일본 바이어가 수시로 전화를 걸어왔다. 또 필요하면 공항으로 달려 나가서 주문서와 재료를 받아 들고 와야 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어느 날 사장님이 안 계셔서 일본에서 온 급한 용건의 팩스를 잘 처리한 것이 인연이 되어 사장님은 일본으로 나가는 주문물품 전 공정을 검수하게 하셨다.

 이 일에는 김포 공항으로 주문서를 받으러 달려가고, 서울에 오는 일본 바이어들을 관광시키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까지 약 2년간 이 일을 했다.


 당시 한국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심했다. 이런 사회 환경에서 일본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일할 수 있었던 데는 결국 실력이 바탕이 되었다. 실력이란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지나며 차근차근 쌓이는 것이다. 열네 살 때 식모로 일하면서 단지 궁금해서 천자문을 공부했지만 이는 한 때의 노력으로 끝나지 않았다. 한문을 배우는 데 쏟은 시간과 열정의 결실을 한문이란 놈이 정확하게 나에게 되돌려 주었다.


■ 손에서 놓지 않고 읽은 책들, 삶의 좌우명을 일러 주다.


 공장에서 일하는 나를 위해 중학교에 다니는 사촌 언니가 책 몇 권을 싸 주었다. 그 중에는 김구 선생이 쓴 ‘백범일지’가 있었다. 처음 몇 장을 읽기 시작하다가 곧 이 책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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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책이구나, 읽어볼 만하네.’ 혼자 감탄하면서 읽어 내려갔다. 한문투가 있어도 어렵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구절이 발견되면 크게 써서 벽에 붙여 놓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백범일지’를 읽게 된 것과 책을 싸준 사촌에게 감사하고 있다. ‘책에서 건진 한 마디가 삶을 바꾼다’는 말은 진실이다.

 청년 김구가 그의 스승, 고당 선생을 찾아가 물었다.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내 일도 알지 못하는데 너의 일을 어찌 알겠느냐. 처음에 마음먹은 것을 버리지 않고 계속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 목적했던 곳에 이를 것이다.”

고당 선생의 그 말을 적어서 벽에 붙여 놓고 그해를 보냈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 말은 내 삶의 좌우명으로 자리했다. 목표한 것을 포기하지 않고 항상 노력하는 자세를 가지고 습관화시켰기 때문이다.

 ‘백범일지’는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삶의 교훈을 주었고 자서전의 가치를 알게 해 주었다. 이후 역사적으로 훌륭하고 유명한 인물이 직접 쓴 자서전이 있으면 일부러 찾아서 읽었다. 그들이 어느 나라 사람이든 상관없었다. 대표적으로 읽은 토인비, 간디의 자서전은 현실의 고통을 참고 진실하게 살아가라고 말해주는 교과서였다.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나는 마치 그 저자 앞에 앉아 있는 것처럼 전율했다.


 나는 십 대 여공이었지만 손에는 무엇인가 항상 읽을거리가 들려 있었다. 편물 일을 할 때도 생각은 저 너머의 세계 사람들에게로 달려가곤 했다. 사서오경으로부터 시작한 독서는 자서전류의 책, 그리고 철학서적들로 이어졌다. 이십 대로 넘어가면서 나의 독서 영역은 문학, 서양철학, 고전 등으로 넓혀졌다.

 이렇게 책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던 것은 역시, 어린 시절의 추억에 기인한다. 거기에는 어떤 일이 있을까?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한 것이다. 내가 내 인생길을 걸어가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갔는지 정말 궁금했다. 많은 경우, 인생을 살면서 생기는 많은 질문에 대한 답이 책에 있었다. 그 답은 때론 선명하게 나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대학 2학년 때 필수과목으로 영문학 수업을 들었는데 풍차에 달려드는 돈키호테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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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에 뛰어난 미국 학생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고 당당하게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재미있는 이야기의 힘’을 알게 해 준 25년 전에 읽은 돈키호테 덕분이었다. 어려운 시절부터 어떤 환경에서 살든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살아온 덕분이었다.

                  

■ 광야 같은 삶을, 성경으로 헤쳐나가다.


 만 열다섯 살, 기독교인이 된 지도 8개월쯤 지났다. 그동안 교회에서 잘 아는 사람이라고는 교회 목사님, 사모님이 다였다. 그러다 주인이 공장을 때려치우는 바람에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잘 보살펴주시던 사모님께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다고 인사를 드렸다. 사모님은 나를 예배당으로 데리고 가시더니, 성경책을 찾아서 ‘여호수아’ 1장을 펴며 읽어보라고 하셨다. 이날은 내가 처음으로 성경책에 있는 말씀을 만난 날이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라.’

 ‘이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주야로 묵상하라.’

 ‘너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알 듯도 하고……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신앙교육을 잘 받지 못한 것은 기술을 배운다고 여기저기 직장을 옮겨 다니느라 한 교회에 소속되어 지긋이 출석하지 못한 이유도 있다 하지만 어느 교회를 가든지 성도로 보기보다는 장애인으로 분류하고 별다른 일을 맡기지도, 성경공부를 하자고 붙잡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온갖 노력을 기울여 전도한 친구를 데리고 가도 교회 전도사님은 그 친구들에게 더 다정했다. 나한테는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다.


 실제적으로 내 신앙심도 혼자서 길을 찾아나서야 했다. 보다 현실적인 이유는, 성경책보다는 철학관련 서적과 사서오경을 읽는 것이 더 좋았고 재미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십대에 안병욱 교수님의 철학 특강을 들은 적이 있다. 이 때문에 안 교수님의 대부분의 책들과 김형석, 김동길 교수님 등, 당시 청년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던 철학자들의 책을 대부분 구해서 읽었을 정도였다. 그러니 도통 모를 소리투성이에다가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는 성경책의 내용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당시 나는 성경이 참으로 메마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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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없는 책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내쪽에서 그것을 깊이 알려고 하는 노력이 적었다는 뜻이다.

그 후 아프리카에서의 생활에서 나는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하루에 40장씩 30일,

 하루에 3장씩 365일

 예순 여섯 권의 책으로 이루어진 성경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려면 위와 같은 방법이 있다. 아프리카에서 산 지 10년이 지났을 때는 열 번 정도 성경을 통독했다. 성경책은 내가 가는 곳마다 따라 다니고 있다. 많은 책들을 읽었지만 나로서는 그 어떤 책들에도 견줄 수 없는 책이 바로 성경이다. 성경은 메마르고, 재미없고 딱딱하기 그지없는 책이 아니었다. 성경 덕분에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마련한 선교대학 즉 광야에서의 삶을 14년 만에 졸업했다.

 칼라하리사막은 나의 신학교였고 훈련 장소였고 교회였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보호가 임한 자리였다. 교과서로 쓴 책은 달랑 성경 한 권, 14년간의 커리큘럼은 내가 직접 만들었고 시험은 항상 있었다. 교수들은 보츠와나 사람들이었다. 그 땅 사람들이 나에게 참 좋은 친구, 예수가 어떠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이후 아프리카 생활을 접고 미국 뉴욕으로 향할 때도 밑줄과 형광펜 줄이 쫙쫙 그어진 성경책이 나와 동행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주야로 성경에 적힌 말씀을 묵상하며 살았다. 이것을 이해하고 실행하는 데 20년 이상이 걸렸다.


두 번째 이야기 就

부시맨의 고향, 아프리카 보츠와나로 가다.


■ 두 줄의 광고를 보고, 한국에서 아프리카로 향하다.

    

         “아프리카 보츠와나 직업학교에서

        양재 및 편물 교사 단기 자원봉사자 모집“           

              1월 10일 까지 연락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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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기 두 달 전에 보았던 선교단체 회보 한 귀퉁이의 광고 문구가 머릿속을 스쳤다. 갑자기 몇 달 전에 본 광고가 떠오른 것은 전날 밤에 읽은 거창고등학교 학교장의 인터뷰 기사 때문이었다.

 1989년 12월 서울에 있는 모 대학 의상학과에 지원하고 보기좋게 떨어졌다. 나는 시험 결과 발표를 보고 난 뒤 심한 몸살과 과로로 쓰러졌다. 연말이 가고 새해가 왔지만 나는 일어나지 못했다.

 꼼짝도 못하고 엎드린 채 누워 열흘 정도를 지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지내며 손에 잡히는 대로 책들을 읽다가 한 기독교 잡지를 펼쳤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어보는데 거창고교 학교장의 인터뷰 기사가 눈에 띄었다.


거창고등학교 직업선택 십계명

-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     하라.

- 앞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 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말고 가라.

-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기사를 반복해서 읽고 나니 머리가 가벼워지고 앞날에 낀 안개가 걷히는 것 같았다. 꼭 대학교 가야만 인생인가? 그 길만이 내가 가야 할 길인가?

 나를 필요로 하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대학이 아니라 보츠와나의 직업학교가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 나를 필요로 하는 그곳은 월급이 없는 쪽이며 황무지이며, 가장자리이며, 아무도 가지 않으려고 하는 곳이며,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길이며, 장래가 전혀 보장 되지 않는 곳이다. 인생에는 다른 문들도, 기회들도 많다. 하지만 거기로 가면 나는 살아날 것이다.

 그렇게 깨달은 날이 1990년 1월 15일이다. 온 방을 뒤지며 몇 개월 전에 보았던 광고 쪽지를 찾았다. 다행이 전화번호만 적힌 찢어진 종이조각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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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보세요? 아프리카 보츠와나로 갈 편물 단기 교사를 구하십니까?”

 “아, 양재 선생님은 곧 떠나시는데 편물 교사는 자원하는 사람이 없네요.”

그렇게 해서 그해 2월 17일, 눈이 쌓이고 쌓여 온통 새하얀 서울을 뒤로하고 아프리카 보츠와나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이 모든 것은 단 두 줄의 광고와, 열 줄의 금쪽같은 금언을 읽은 뒤 이루어졌다. 이것으로 내 인생은 전환이 이루어졌다.


■ 굿 호프, 황량한 벌판위에 세워진 직업학교


 “왜 이런 곳까지 와 있을까?”

 “우연히 이곳으로 왔을까?”

 어떤 사람들은 내가 보츠와나에서 살게 된 것을 귀양을 떠나온 처지에 비유하기도 했다. 낮에는 뜨거운 태양 빛 아래 거친 모래바람이 불어오고 밤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들이 쏟아져내리는 그곳에서 홀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위와 같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남부 칼라하리사막 입구에 자리한 굿 호프(Good hope) 마을에 안착했다. 굿 호프 직업학교를 설립한 보츠와나 그루터기 선교부는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사람들로서 대부분 일반 기독교 신자들이었다. 자원봉사자로서의 각기 가진 재능과 시간을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에 사용하고 있었다. 선교부는 그 나라의 지역사회개발 사업을 한다는 전문인 ‘자비량 선교’를 전략으로 삼아서 활동하고 있었다.

 일은 크게 사업 파트와 선교 파트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선교 팀에서는 직업학교와 유치원 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었고 비즈니스 팀은 건축회사와 자동차정비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비즈니스 팀에서 나오는 이익으로 직업학교와 유치원을 운영해나가는 방침이었다. 나는 선교 팀에 속한 직업학교의 편물과에서 편물기술을 가르치는 교사로 일을 시작했다.

 편물과, 양재과, 목공과 3개 학과 12명이 첫 학기, 첫 학년 굿 호프 직업학교의 학생들이었다. 주의 깊게 교실을 둘러보니 재미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일본산 지우개와 볼펜, 남아공에서 보내온 교과서, 보츠와나에서 만든 공책, 독일산 공구 그리고 한국인 교사와 보츠와나 청소년들까지……. 이 모든 것들이 있는 아프리카 오지마을이 제법 국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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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츠와나의 주요 산업은 다이아몬드를 캐내는 광업과 목축업이다. 국토의 80%를 칼라하리 사막이 차지하고 있다.   이 광활한 초지에서 풀을 먹고 자라는 소들이 국가의 주요 수입원이다. 보츠와나에서 소를 몇 마리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그 집안의 경제 사정을 말해주는 바로미터다. 보츠와나의 여러 종족 중 79%는 츠와나족이다. 마을 사람들은 주로 목축업을 하며 살고 있다.

 굿 호프는 학교가 문을 열었을 당시에는 전기도, 전화도 가설되어 있지 않았고, 도로포장도 안 된 오지였다. 주변에는 산도 없고 그저 바람 부는 광야가 있을 뿐이었다. 우리나라의 1950-1960년대를 연상하게 하는 곳이었다. 그 벌판 한가운데 덩그렇게 서 있는 하얀색 외벽의 일자 건물이 생소하게 보일 정도였다.


 학교가 개학했을 때는 본관, 기숙사 그리고 교실 총 3개 동의 건물이 있었다. 첫 학기를 시작하면서 학생들과 함께 진행한 일은 식당 건물을 짓는 일이었다. 오전에는 교실에서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교사와 학생들 모두 각자 삽이나 곡괭이 등을 들고 공사장으로 가서 일했다.

 내 일과는 낮에는 가르치고 밤에는 촛불 아래서 다음 날 수업을 위해 영어책을 펼쳐 놓고 공부하는 것이었다. 발전기를 갖춘 학교였지만 목공과와 양재과 수업을 하는 낮 동안만 전기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일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제일 먼저 영어를 공부하며 깨달았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생존영어부터 배워야 했다. 한국인과 보츠와나 사람들은 서로 익숙하지 않은 영어로 대화를 했다. 영어보다 오히려 츠와나어를 배우는 일이 더 쉬웠다. 그 사이에 오간 무수한 시행착오는 장면마다 시트콤이다.

이러한 고생스러움 가운데서도 행복은 있게 마련이었다. 같이 사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서로를 잘 알아가게 되었다. 대화가 통하고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저 눈빛만으로도 무슨 뜻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해마다 이어진 크고 작은 학교 일에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삽을 들기 시작했다.

 첫 해 입학생 중에 10명이 2년 과정을 끝까지 마쳤다. 졸업생 중에 남녀 학생 2명을 선정해서 한국으로 기술연수를 보냈다. 목공과의 사드락은 암사동 직업전문학교로, 편물과의 베로니카는 한남직업전문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이 두 사람이 돌아오면 우리 대신 선생이 되어주길 바라면서 이렇게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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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일은 시간이 지나면서 또렷해진다. 나 또한 어떻게 보츠와나에서 살 수 있었는지, 왜 자원봉사자로서 일생을 헌신하며 살게 되었는지 등을 시간이 흐르면서 깨우쳤다.  비록 많지 않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별로 각광받는 기술을 아니었지만 기술을 가르치면서 우리도 우리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은 보람으로 연결되어 행복감을 더해 주었다. 황량한 벌판이라도 인간이 자리하면 그곳에서 삶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배웠다.


■  You are so beautful! - 내가 예쁘고 아름답다고? 세상에!

 

 “You are so beautful!”  “You are so cute!”

 생전 들어보지도 못하던 찬사를 듣기 시작했다. 내가 예쁘다고? 세상에? 아름답다고? 정말이야?

 이런 믿을 수 없는, 놀랄 만한 말을 학생들은 입에 달고 살았다. 나를 볼 때마다 입고 있는 옷이며, 신발이며 무엇이든 다 예쁘다고 했다. 웃는 것도 예쁘고, 키가 작은 것도 예쁘다고 했다.

 세상에, 예네들 뭐 잘못된 거 아니야? 그 아이들의 눈에는 내가 하안 피부에 까맣고 고운 머릿결을 지닌 한 여성으로 보이고 작은 체구마저 귀여워 보였나보다. 그 아이들의 눈에 내 기울어진 허리가 살짝 저는 다리가 눈에 띄지 않을 리 없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그들은 진심을 다해 말했다. 예쁘다고, 아름답다고, 귀엽다고, 어머, 세상에나!


 아프리카 생활 초기에 나는 비교적 잘 적응했다. 문제는 작은 키로 인해 생겼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하는 곳마다 필요한 것들을 갖다 놓았다. 세면장에서 빨래할 때 밟고 서는 블록 한 장, 싱크대 앞의 붉은 벽돌 한 장, 나만을 위한 교실의 발판, 학생들은 이러한 나를 보고 도우려는 마음이 들었는지 내가 무엇을 하고 있으면 항상 달려들어서 대신 해주곤 했다. 빨랫감을 들고 나가면 여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다 해준 뒤 태양 빛에 바짝 말려진 옷가지들을 말끔히 개켜서 가져왔다.

 동양인 보다 비교적 체구가 큰 보츠와나 학생들은 조그마한 체구의 나를 귀엽게 보아주고 도와주어야 할 대상으로 여긴 듯했다.

 나는 기꺼이 그들의 관심과 도움과 사랑을 받아들였다. 세상에, 이런 사랑과 관심을 받다니. ‘아! 이러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 있구나!’하고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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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에 살면서 신경 쓰지 않아도 된 것은 내가 신체가 불편한 장애인이라는 사실이다. 신경이 쓰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새로운 자각이 생겼으며 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가능해 졌다. 나는 장애인이 아니라 한 여성이자 인간이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작고 불편한 내 신체조차 사랑스럽게 보아주는 보츠와나 사람들과 순진하고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난 보츠와나 청소년들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그렇게 변해갔다. 아름다워져 갔고, 귀여워져 갔다. 한국에서는 가족과 형제들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한 아름답다는 찬사를 아프리카에서 듣게 되었다. 나와 다르면 인정해 주지 않고 상대해주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자라면서 받은 마음의 상처들이 치유되어 갔다. 열등감에 자격지심도 서서히 걷혔다. 


■ 무미건조한 사막에서, 정신적 배고픔을 이겨내려면?


 ‘시키는 것 외에는 절대 안 해.’

‘물어보는 법이 없어.’

 ‘지켜보고 있지 않으면 일 안 해.’ 

 ‘내 것이 아니면 상관도 안 해.’

 ‘물어보면 다 몰라야.’

 ‘경쟁의식이 없어.’

 ‘자기 것만 챙겨.’

 ‘잘못된 것을 고치려고 안 해.’

 ‘무슨 이유가 그리 많아.’


 보츠와나  생활 초기에 학생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서 이런 불평들을 쏟아 냈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정신적인 배고픔이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단순하고 무미건조한 일상’은 육체를 넘어 정신을 갉아먹을 정도로 강도가 셌다.

 “자! 이렇게 있으면 안 된다. 무엇이든 하자!” 하고 자신을 추슬러서 무미건조한 일상을 생산적으로 만들어낼 책임은 바로 나에게 있었다. Here and Now. 즉 지금 현재에 충실할 수 있는 정신으로 무장하고 하루하루 견디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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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문제의 연속이었다. 관리 소홀로 인해 여기저기서 문제가 터졌다. 한국에서 구호 물품을 담은 컨테이너라도 올라치면 몇 달간은 주의해서 관리를 해야 했다. 특히 헌옷들이 대량 들어오면 탐을 내는 여학생들이 많아서 주고 싶어도 주지 못했다. 어떤 때는 이런 것들을 소홀하게 관리하여 부지불식간에 학생들을 도둑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학생들만 탓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보츠와나에서 살아가는 세월이 늘어날수록 내가 철이 들기 시작했다. 현지인들과 학생들을 함께 불평하는 말들이 줄어들었다. 더 나아가 생각으로라도 불평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 대신에 ‘순수해’ ‘단순해’ ‘때 묻지 않았어’ ‘착해’ ‘시키는 일은 잘해’ 처럼 누구든지 한 가지 이상의 장점이 있음을 알고 그것을 찾아 나갔다. 그것을 찾아서 격려해주고 도와주고 용기를 주었다.

 학생들은 2년 동안 기숙사에 있으면서 기술을 배우고 자격시험을 끝으로 학교를 마치고 졸업해 나갔다. 매년 약 30여 명 정도가 국가기술자격증과 학교가 주는 졸업장을 받았다.


 불평하는 대신 감사하는 마음으로 용기와 격려를 해주면서 학교를 운영하니까 나도, 학교도, 학생들도 바뀌어 갔다. 발전해갔다. 인간을 향상시키는 큰 힘은 역시 칭찬이고 격려이며 용기를 주는 한마디 말이었다.

 “아유, 어떻게 거기서 살 수 있었어요?”

 사람들이 정색을 하고 묻는다. 메마른 사막에서 어떤 인간적인 보람이나 행복을 찾을 수 있었는가 묻는 것이리라.

 사람은 제각각의 삶을 사는 존재다. 나의 경우에 사막은 계속 인생을 살아나갈 자신감과 자부심을 가슴속에서 솟아나게 만든 곳이다. 굿 호프에 살면서 굉장히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은 셈이다. 주변의 사람들이 그러하니 나도 그렇게 변해갔다. 사람들의 말에 마음 상해하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것을 셈하지 않아도 되는 굿 호프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사막에서 도를 닦는 생활이었다. 몸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나태와 정신에 너덜너덜하게 붙은 욕심을 떼어내고 보니 아주 단순한 삶이 보였다. 살아가는 일이 제법 간단하고 단순해 졌다.

 만약 사막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 어디에 가더라도 행복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마음도 단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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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교는 절대불가, 아이들의 눈동자에서 꿈을 보다.

한국에서 온 교사들은 해가 갈수록 줄어들었다. 15명, 10명, 5명에서 3명……. 그리고 나 혼자 남았다.

 1990년도 2월에 개교한 굿 호프 직업학교는 1994년 5월에 무기한 휴교를 했다. 학교는 졸업생을 배출한지 겨우 두 해 만에 주저앉았다. 한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보조교사로 신입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베로니카와 사드락, 그리고 고용인과 학생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

 혼자 남아서 학교 건물이라도 지켜야 했다.

 목사도, 전도사도, 남자들도, 여자들도, 아이들도 다 떠났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소지품을 하나하나 정리했다. 이 광야에 누가 오겠는가? 이 벌판에 누가 있어, 무엇이 있어 오겠는가? 모래 먼지만 쌓여가는 교실과 기계와 쓸쓸한 건물들도 희망이 없어 보였다. 한겨울의 바람만이 믿음과 희망을 하루하루 벗겨내고 있었다.


 그날도 짐을 정리하고 난 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어야지’ 하고 거의 떠나기로 결정하고 있었다. 지는 석양을 바라보면서 참으로 한심한 꼴이 되어 교문을 걸어 나갈 명분을 찾고 있었다. 그때 마을 입구부터 걸어온 일행 대여섯 명이 교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누구지? 마을 사람들은 아닌 것 같고.’

 일행들이 가까이 왔다. 양재과와 편물과 2학년 여학생 5명이었다.

 “아이고, 너희들이구나. 잘 있었니? 그런데 이 저녁에 학교에 왜왔어? 너희들은 다 집에 가 있어야 하는데…….”

 “캐서린, 계속 공부하고 싶어요. 7월 이후에 있을 기능검정시험을 쳐야겠어요. 꼭 그 시험을 패스하고 싶어요.”

 “뭐라고?”

 “먹을 음식은 우리가 사 왔어요. 우리가 직접 요리해서 먹을 테니 남은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주세요.”

 5명이 돌아가면서 간곡히 부탁한다. 제발, 제발요.

 3개월 후 보츠와나 기능시험관리공단에서 실시하는 양재, 편물 기능자격시험이 있는데 이 시험을 꼭 보아야 한다며 찾아온 것이다. 가르칠 선생들은 떠났는데, 학생들이 되돌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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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을 심어 주던 사람들은 떠났지만, 뿌려진 꿈의 씨앗은 자라고 있었다. 더

이상 발뺌할 구실이 없었다. 아이들이 돌아와서 가르쳐 달라고 한다. 계속

꿈을 꾸고 있고 배울 것이 있으니 촛불을 밝혀 공부하고 싶다고 한다. 내가

걸어 나가려고 한 대문을 통해 아이들이 걸어 들어왔다. 스스로 찾아서 온

것이다. 마음에 감동이 차오르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있다면 떠

날 이유가 없다. 그래, 한번 살아보자. 이 아이들과 함께 꿈을 만들어 보

자. 삶을 만들어 보자.


 이미 내 머릿속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은 사라졌다. 비전이 생겼

다. 하나씩 해가면 된다. 그저 이 자리에서 살고 있으면 된다. 중요한 것은

이 자리에 살아 있는 것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자리

에 있는 것이다. 선생이라고 믿고 찾아와서 가르쳐달라고 하는 아이들이 있

지 않은가!

 1994년 8월 중순에 사업 파트에서 일하고 있는 팀들과 학교 정상 운영을

위한 회의를 가졌다. 회의를 갖기 며칠 전부터 나는 학교 운영에 필요한 운

영계획서를 만들었다. 재정 확보가 시급했으며 다른 사람들의 협력을 얻어야

했다. 이 사업에 투자된 돈과 사람들의 땀방울과 눈물 그리고 보츠와나 청소

년들의  꿈을 놓고 갈 수는 없다고 강변했다. 학교를 맡아보겠다고 했다. 폐

교라니……. 말도 안 된다. 나를 믿어 달라고 했다.

 보고를 들어본 비즈니스 팀원들은 나에게 학교 일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학

교의 운영위원회를 만들고 5명의 이사들도 지명했다. 이사장은 초기 개척자

중의 한 사람인 김주현씨가 맡아 주었다. 나는 굿  호프 직업학교의 4대 교

감으로 선임되었고 그 이듬해에 교장으로 정식 위임되었다.


 나는 학교 운영에 필요한 모든 지식을 스스로 찾아내고 스스로 공부해 나

갔다. 물론 운영위원회 이사들의 적극적인 협력과 신뢰가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학교와 관계된 외부 일은 이사회에서 처리해 주었다.

 학교의 내부 일은 스스로 만들어갔다. 사람들에게 지시하고, 수표에 사인하

고, 월급을 주고, 건물의 보수할 곳을 찾고, 화장실 증축 공사를 감독하고

부식을 사 오고, 운영위원회에 보고하고, 계획서를 만들고, 목공, 양재, 편물

과의 실습재료도 사 오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설교도 하고, 지역의 기관장회

의에도 참석하고, 오가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타자도 치고, 회계 장부도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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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영수증도 챙기고, 학생들을 병원으로 데리고 가고, 교안도 짜고, 일지

도 적고……사환에서부터 비서, 교사, 그리고 책임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

교 일에 내 손과 발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학생 수는 15명, 교사가 3명, 고용인이 2명 그리고 정부가 지원해 주는 자

원봉사자 2명이 전부였지만 학교는 학교였다.                        

 운영 이사들은 나를 위해 경영학을 가르쳐 주고 교육비를 내 주는 셈이 되었다. 굿 호프 직업학교는 경영과 교육을 배우는 나의 실습장이 되었다. 영문이 가득히 적인 공문서가 날아오면 서류들을 읽기도 전에 한숨부터 나왔다. 몸과 마음은 이 피할 수 없는 일 앞에서 극도로 긴장했지만 문제는 회피할 길도 나를 대신해줄 사람도 없다는 것이었다. 한 장의 영문 편지를 작성하려면 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 길게는 일주일 이상이나 고민을 해야 했다. 현지인 교사와 학생들에게 무엇이든지 물어 배워야 했다. 책임자로서 창피한 마음을 갖기보다 나로서는 참으로 진지해지지 않을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 마음 거리를 좁히는 방법은 무수한 시행착오


 책임자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주의 깊게 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앞서 일하고 간  사람들이 남겨준 교훈을 살펴보는 일이었다. 이것을 뒤집어서 접근해 보면 내가 어떻게 학교를 운영해야 할지 답이 찾아졌다.

 학교의 주체는 보츠와나 사람들이다.

 ‘현지인이 하게 하고, 일과 사람이면 사람을 우선하고, 그리고 모든 일과 사람들에게 감사하라.’

 가장 중요한 점은 인간생활의 가장 보편타당한 진리를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한국적인 것을 요구하지도, 보츠와나 것이라고 하여 무조건 따라 하지도, 또 기독교 정신을 가지고 학교를 설립해 운영한다고 해서 아직 준비도 안 된 학생들에게 신앙생활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원칙을 정하고 마음을 올곧게 먹었다고 해도 그것이 다 잘 적용된 것은 아니다. 실제 생활에서 거듭된 실수와 고집, 다툼,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깨달아가야 했다.


일보다 사람의 마음을 조율하자면 일이 더디 진행되거나 때론 내 생각대로 안 될 때가 더 많다. 어떨 때는 상대방에게 맞추다가 일을 못하게 되어 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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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크게 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일이 어그러지는 것은 동고동락하는 사람의 마음을 잃어버리는 손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바꾸기도 힘들고 내 생각을 고치기도 버거우면 궁극에는 ‘아, 이 얼마나 감사한가’하는 마음을 가졌다. 이 사람이 나와 함께 있어주다니, 그 사람이 그렇게 해주었는데 하며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대했다. 말 안 해도 사람은 감정으로 느끼게 되어 있으니 나중에는 참으로 진실하며 믿을 만한 관계가 만들어지고 좋은 사업 파트너가 되어갔다. 사람들 사이에서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면 반드시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그런 인간관계가 계속 이어지게 되어 그 인생도 성공하게 되리라 믿는다.


 보츠와나에서의 처음 1년은 한국에 두고 온 친구가 마음을 붙잡아서 울며 보낸 날이 많았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의 마음 거리는 수만 리인데 대양 너머에 있는 그 사람과의 마음 거리는 1미터도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이러했던 마음 거리가 바뀌고 아프리카에 머물며 자리 잡기까지는 대략 7-8년이 걸렸다. 때때로 나무와 꽃에, 건물을 짓고 공사하는 일에. 새로 온 사람들과 지내는 일에, 이렇게 각기 다른 일에 마음을 잡혀서 살다 보니 어느 새 아프리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람이 옆에 있으면 말로 다 쏟아놓을 것도 상대가 없으니 입에 담고 있게 되고 혼자 속으로 이해하고 가슴에 묻었다. 각종 언어를 공부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 시간을 아껴서 노력해보았지만 너른 지평선과 뜨거운 바람과 쏟아지는 별무리를 대하고 보면 그런 욕심도 사라지고 말았다.

 깊은 고난과 어려움과 슬픔과 인내해야 할 난관이 닥쳐도 넉넉히 넘어갈 여유도 생겨서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또, 사람들과 비교하거나 사람들 때문에 불평하고 시기하거나 미워해야 할 일들이 많지 않아서 굿 호프에서 살았던 시간들은 무엇보다도 인생의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내 마음을 잘 지켜낸 시간들이다. 부시맨들과 함께 마음의 시대를 만들어갔다.


■ 나 이런 사람이야, 한 사람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


 열다섯 살에서 스물두 살 사이의, 중학교 2년 과정을 마치고 온 남녀 신입생 30여 명이 강당에서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있다.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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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으냐고 물었다. 학생들은 호기심을 내보였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저와 같은 사람이 여러분하고 살고 있는지? 이곳은 한국에서 온 많은 선교사들이 지은 학교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또 다른 일을 하러 갔습니다. 여러분에게 희망과 꿈을 주기에 제가 부족해 보이겠지만 저는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키도 작고 영어도 잘 못 하고, 더욱이 여러분처럼 건강해서 많은 일을 단번에 잘 해낼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다만 아직까지 여기 이렇게 있는 것으로 보아 꼭 제가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5남매의 장녀, 여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입게 된 신체장애, 가난하고 병든 어머니, 매 맞고 자란 어린 시절, 자살한 아버지, 십대 때의 가출, 식모생활 그리고 훈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일과 기술을 배운 일 등을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그렇게 배운 기술로 기능대회에서 세 개의 금메달을 딴 일과 일본에서 교육을 더 받은 일, 중‧고등학교 과정을 야간 학원에서 공부하여 패스한 일, 좋은 직장에서 대우 받으며 잘 살다가 나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이곳으로 자원해 온 일을 요약해 들려주었다.

 앞에 걸려 있는 칠판의 반밖에 미치지 않는 이 조그만 선생은 이제 더 이상 지난 며칠간 학생들이 교내를 오가며 장난을 걸고 농담을 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아이들이 내려다보던 작은 선생은 신입생들의 마음을 근사하게 잡아버렸다.

 ‘저 아이들 중에 내가 앉아 있구나!’ 나 또한 감동한  눈빛과 기대를 가지고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이렇게 사는 목적과 이유가 너무나 뚜렷해졌다. 열악한 환경의 아이들에게 굳센 의지로 어려움을 잘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주어야 한다. 오랜 세월 동안 억눌리고 피해를 받아 열등감이 심한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의지와 신념을 심어주는 일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 있을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갖는 일은 그들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갖고 힘을 키워 인간다운 삶을 사는 일은 신앙이 없는 인간에게 더 필요한 것이다. 학생들은 두려움도 장난기도 없이 학교의 공동체 생활에 잘 적응해 나갔다. 나는 평안한 사랑을 학생들로부터 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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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인, 여성, 장애인, 가장 낮은 곳에서 꿈을 찾다.

                  

 “여성 중에 흑인, 흑인 중에 장애인 여성은 우리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숨죽이며 살고 있어요.”

 보츠와나 지청에서 만난 사회복지사는 이렇게 말했다.

 직업학교에서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일한 분야가 있다. 그 마을에 살고 있는 장애인들을 위한 여러 가지 일과 에이즈 예방위원회 멤버가 된 일이다. 굿 호프 지청에 소속된 이 두 위원회의 활동을 통해 보츠와나의 장애인과 복지 그리고 에이즈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잘 이해하게 되었다.


 굿 호프 지역, 2000년도 한해 에이즈 발병 135명 중 20% 사망. 그 지역에 등록된 고아 2796명은 에이즈에 밀려 장애인이나 정신지체 등의 의료 지원이나 교육혜택은 전무한 실정이다.

 그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외국에서 온 젊은 장애인 여성이 학교의 대표로 일하니 정부의 공무원들, 특히 사회복지사들은 꼭 나를 찾아왔다. 항상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들을 데리고서. 일반 청소년들을 위한 직업교육을 하고 있지만, 장애인인 나 자신의 처지를 보아서도 보츠와나에 있는 장애인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여야 마땅했다. 물론 교사들과 학생들을 같이 채근하면서 해야 할 일이었다. 장애를 가진 사람은 혼자서는 그 장애를 넘을 수 없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넘어주어야 한다.


 보츠와나에서 장애인이나 에이즈 관련 병으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일상생활에서 만나면서 살았다. 사회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살고 있는 그들은 학교에 찾아와서 무엇인가 부탁하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현지인들 중에서 무엇보다도 나를 사랑해주고 믿어준 사람들은 내가 만난 장애인들이라고 믿는다. 아프리카의 흑인, 장애인 여성들의 삶을 보고 듣고 경험하면서 다시 한 번 왜 내가 그곳에서 살아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힘이 되어줄 누군가가 필요한 사람에게 힘이 되어주고, 도움이 필요할 때 망설이지 않고 달려갈 수 있는 그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면, 그 사람이 내가 되었으면 하고 꿈꾸었다. 소망하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더 보람 있는 인생이 어디 있을까! 보츠와나에는 다이아몬드가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가장 낮은 자리에 있었다. 키가 작아서 다이아몬드가 잘 찾아졌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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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널려 있는 술집, 거기 밖에 갈 곳 없는 청소년들


 지부꾸, 카슬, 비어……. 우리나라 막걸리처럼 생긴 지부꾸는 돈이 없는 실업자나 서민들이 남녀노소 구분 없이 즐겨 마시는 아프리카 전통 술이다. 선더롬바, 히말라야바는 보츠와나의 마을마다 널려 있는 술집 이름들이다. 주변에 조금 더 규모가 작은 술집들이 두 배 정도는 더 있다. 

 부시맨의 땅이며 문명의 발전이 더딘 칼라하리 사막 입구에도 인생의 하루를 유혹하는 술집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다. 주말이면 도시, 시골, 부시 숲, 칼라하리사막 등 지역에 관계없이 사람들이 몰려 시끌벅적한 곳이면 어디에서나 술집이 차려진다.

 마을이나 동네가 떠나갈 듯이 틀어 놓은 음악소리에 맞추어 지부꾸나 비어, 위스키 등을 한 잔 또는 한 병씩 들고 온몸을 흔들며 춤을 추는 젊은 남녀 무리들로 술집은 성황이다. 월급을 탄 노동자들은 먼동이 터오면 주머니를 털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피곤한 몸을 누이러 집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모습은 특별한 기술과 직업이 없는 사람들에게서, 시골로 내려갈수록 더 많이 볼 수 있다.


 문제는 여기 밖에 갈 곳이 없는 청소년들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약30% 정도가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아주 소수가 직업학교에 가고 나머지는 파트타임으로 일한 푼돈으로 여기를 찾는다.     

 열두서너 살에 첫 아기를 낳고, 인생을 거부하기조차 너무 어린 ‘어린 어른’들은 세상이 어떤지 알지도 못한다. 이들을 위해 이 작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술을 못 마시게 하거나 술을 이 세상으로부터 없애버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보츠와나의 청소년들이 술을 마시지 않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술집을 기웃거리지 않게끔 건전한 문화를 소개하고 그들의 미래를 밝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일을 하면 어떨까?

 술집밖에 갈 곳 없는 청소년들의 일부를 불러다가 직업교육을 한 지 10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벌써 학교를 졸업해 나간 학생들이 250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 나라 어디를 가든지 학교 이름을 대면 알아주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만큼 마음속 보람도 커졌다. 이 보람은 역시 사람들, 우리가 가르친 학생들이 가져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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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츠와나의 실상을 알리고 도움의 손길을 청하다.


 “누나, 나는 누나처럼 그렇게 오랫동안 일할 마음은 없어. 지금 사람이 필요하다니까 1년 정도만 가서 도와줄게.”

 국제전화 너머로 남동생의 결단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고마워. 1년이든 뭐든. 일단 아프리카로 온다니 됐다. 바로 표 끊어서 와.”

 혼자 남은 학교에서 책임자가 되어 일하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한국에 있는 미혼의 남동생을 불러들인 것이었다. 남동생은 직업학교에서 목공과를 마치고, 그 무렵에는 가구 공장에서 기술자로 일하고 있었다.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남동생에게 보츠와나 학교에 와서 목공과를 맡아서 아이들을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내가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겠느냐. 못 하겠다.”며 발을 뺐다.

 “그럼 운전이라도 해줘. 뭐 1년 정도만.”

 이렇게 남동생은 나를 도와주러 보츠와나에 왔다가 한국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아프리카에서 살고 있다. 맥가이버를 능가하는 남동생의 일솜씨 덕분에 학교 운영은 탄력을 받았다.


 그 다음에 한 일은 ‘기금모금 활동’이다.

 92년부터 2년마다 한국, 일본, 미국으로 모금활동 여행을 떠났다. 일본에서는 편물기계28대를 기증받기도 했고, 1998년 12월에는 두 달 동안 미국의 여섯 개 주요 도시에서 스물다섯 군데의 교회집회에 참석했다. 선교부의 협력으로 예정된 교회를 방문해서 아프리카에서 나의 비전을 어떻게 펼쳐가고 있는지 이야기했다. 상상할 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늦은 밤에나, 그 어떤 때에도,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바로 꿈꾸는 자의 삶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밖에 할 것이 없었다. 초등학교를 마쳤을 뿐인 장애인 여성이 아프리카에서 살다 온 이야기를 사람들은 진정으로 공감하며 들었다.

 두 달간의 미주 방문은 성공적이었다. 학교의 대강당을 건축할 기금이 모금되었고,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처음 만난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었다. 그래도 역시 가장 큰 선물은 사람이었다. 뉴욕에 어학연수를 위해 와 있던 대학생이 단기자원봉사자가 되어 보츠와나로 왔다. 공대생이었던 이 청년에게는 학생들의 수학 수업과 학교 행정 일을 맡겼다. 또 해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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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제대한 막내 남동생도 직업학교에서 자원봉사 하기 위해 합류했다. 막내는 약 2년 동안 태권도 교사와 학생주임으로 일했다.


■ 청소년 시절의 꿈, 아프리카에서 싹이 나서 자라다.


 나는 ‘어른이 되면 이렇게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소원했다. 불우했던 나를 거두어 주고 가르쳐준 어른들이 고마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십 대 청소년 시절에 꿈꾸었던 일의 싹이 아프리카에서 움트고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쳐야할 과정을 통과하면서 꽃봉오리가 되어 피어올랐다. 꿈이 자라는 것을 보려면 역시 세월이 필요하다. 꿈은 노력과 긴 시간을 두 바퀴로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삶의 터전을 한국에서 아프리카로 옮겼다. 사정은 180도로 달라졌다. 한국에서 살았다면 one of them. 즉 그 많은 편물기술자 중 한 명으로 끝났을지도 모를 인생이 전환된 것이다. 그 땅에서 only one.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생전 기대해보지도 못한 ‘You are so beautiful.’ 이란 말을 듣게 된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적어도 내가 보츠와나에 있는 동안은, 기계편물 기술 분야에서 유일한 전문가라고 할 수 있었다. 모두가 떠난 자리에서 직업학교의 교장으로 일할 수 있었던 데는 이러한 자부심이 큰 역할을 했다. 자신 안에 있는 힘을 믿어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다. 나는 장애인이라고,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결코 위축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돕는’일을 배워나갔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도록 했다.

 일반적으로 학교 공부를 마치고 해야 할 일을 나는 뒤집어서 배운 셈이다. 14년 동안 현장에서 일한 경험을 들고 있던 미국 대학과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나서야 들고 있던 ‘서 말의 구슬’을 다 꿰었다. 내가 정말로 원하고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게 된 데는 30년이 걸렸다.


 굿 호프 직업학교는 그동안 기능검정공단과 상공부의 협력으로 그 나라에서도 크게 인정받는 직업교육기관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학교 건물 건축 당시 열악했던 형편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시설이 미비한 부분이 많았다. 정부의 기준에 맞는 시설로의 전환이 필요해졌다. 즉 대대적인 시설 투자가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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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아울러서 교육을 담당하고 있던 교사들도 일정 수준의 정부 교육을 거쳐 직업훈련 교사증을 받아야 하는 등, 여러 가지로 개발과 투자를 계속해 나가야 했다.               

 학교는 전환기에 서 있었다. 무엇보다도 학교의 책임자인 내가 먼저 전문적인 교육을 받아야할 필요성이 생겼다. 이렇게 해서 나의 유학은 정해졌고 길이 열렸다.


 한국에서의 삶이 아프리카로 가는 길을 열어 주었고, 아프리카에서의 삶이 미국으로 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당연히 미국에서의 삶이 나를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고 있는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을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 것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현명한 삶의 자세임을 절감한다.


                           2012. 4. 9. 

 

學就開進 의 學과 就편을 다 읽었습니다. 다음에 開와 進 편이 이어집니다.

                              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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