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탄허록(呑虛錄), 2

보해성산 2012. 6. 25.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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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허록(呑虛錄), 2

제4장 생사 - 태어난 이여, 죽음은 피할 길 없구나.

■ 참선문에 들어서면 알음알이는 벗어던져라.

어떤 사람이 삼(麻)짐을 허리가 부러지게 잔뜩 지고 험한 산길을 걸어가던 중 반짝이는 무언가를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가까이 가 보니 금이었다. 덩어리가 무척 커서 값어치가 어마어마할 듯했다. 뛸 듯이 기뻤지만 순간 고민이 생겼다. 삼짐을 지고 가자니 금덩이를 버려야 하고 금덩이를 지고 가자니 지금가지 힘들게 삼짐을 버려야 했다.

그는 어떻게 할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그래, 금덩이도 중요하지만 몇 천리를 지고 온 전공(前功)이 아까워서라도 삼을 포기할 순 없지.’

이 얼마나 어리석은 노릇인가. 진짜 보배를 만났으면 아무리 공들여 얻은 것이라도 가짜는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작은 집착을 벗어던지지 못해 귀한 보물을 얻지 못한 것이다. 중생의 인생살이가 이와 같다.

참선에서도 법의 큰 보배를 얻으려면 지금까지 짊어지고 온 알음알이, 선입지견을 깨끗이 버려야 한다. 깨달음과 알음알이는 함께 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선 문에 들어와서는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참선 법문에 비하면 모든 교리는 삼짐에 불과하고 참선은 금덩이와 같은 것임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

■ 예(禮), 법(法), 정(情)으로 살아가는 삶

사람이 사는 것을 크게 구분해 보면 예, 법, 정 3가지 형태로 살아간다.

이때 禮는 천리(天理)를 말하는데, 이는 세속의 예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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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예의 삶을 사는 사람을 불가에서는 ‘상근기의 사람’이라고 한다. 이는 대인군자요, 우주와 나, 객관과 주관의 구분을 완전히 잊는 물아양망(物我養望)의 경지에 오른 삶을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법으로 사는 삶이란 물아양망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자리(自利)보다는 이타(利他)에 치중하면서 세속 법규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사는 사람을 말한다. 이를 ‘중근기의 사람’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정으로 사는 사람은 예도 법도 다 모르고 오직 인정(人情)으로만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인데 한마디로 ‘천치’같은 사람들이다.

■ 한 마디 이르면 살고, 그렇지 못하면 죽는다.

도(道)는 진리를 나타내는 대명사다. 한 마디로 길을 가리킨다. 이때 도의 근본이란 ‘바른 것’이다. 따라서 길을 걷되 길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름길이든 외진 길이든 길은 길이다. 그래서 본인은 길이라 여기고 가는데, 그 길이 정도에서 벗어난 곳일 수도 있다.

정도를 걷지 않고 길 밖으로 빠져나가면 결국에는 진흙 구덩이와 가시밭과 어둠 속에서 갈팡질팡 하게 된다. 탈선(脫線)이란 어떤 의미에서든 괴로운 결과를 가져옴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정도를 걷기 위해서는 강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 구경(究竟)의 목적지인 안심입명처(安心立命處)이 이르게 될 것이다.

옛 말씀에 도를 잃으면 德 이라도 갖추어야 하고 덕을 잃으면 仁이라도 베풀 줄 알아야 한다. 인을 잃으면 義라도 지킬 줄 알아야 하고 만일 의를 잃으면 禮라도 차릴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요즘 예마저 잊으니 끝내는 법률학이 나오게 되었다. 자의(自意)에 의한 길을 걷는 나그네가 아니라 요즘 사람은 타의에 의한 방랑자가 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옛날에 남전(南泉) 스님이 뜰에서 풀을 매고 있는데, 도학자 한 사람이 다가와 법을 물었다. 마침 뱀 한 마리가 뜰을 지나갔다. 남전 스님이 뱀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 마디 이르면 살리고 한 마디 이르지 못하면 죽이겠다.”

이 시원찮은 도학자가 그만 쩔쩔매자 남전 스님은 망설임 없이 들고 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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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로 뱀을 죽이고 말았다. 알겠는가? 이 도리를!

대인군자는 숨 한 번 내고 쉼에 전체가 경(經)이다. 천재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끈질긴 집념과 쉼 없는 노력이 원하는 결과를 안겨 줄 뿐이다. 따라서 이것저것을 넘겨볼 것이 아니라 한 가지로 꾸준히 나가야 한다. 집념과 젊음과 용기가 있는 자라면 크게 성취할 수 있다.

■ 참선, 마음공부의 핵심

선(禪)이란 인도 고대 말인 범어에서 따온 말로 ‘생각하여 닦는다(사유수 思惟修)’ 또는 ‘고요히 생각한다(정려 靜慮)’는 뜻이다. 따라서 이러한 공부는 불교인만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고, 편안한 마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불교의 선은 좀 더 깊은 뜻을 갖고 있다. 고요히 생각한다고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닦느냐에 특징이 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을 분류하면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육단심(肉團心), 연려심(緣慮心), 집기심(集起心), 견실심(堅實心)이다 육단심은 우리의 육체적 생각에서 우러나는 마음이고, 연려심은 보고 듣는 데서 분별하여 내는 마음이고, 집기심은 망상을 내는 깊은 속마음이다. 견실심은 본성으로, 이것이 바로 부처님 마음자리다.

선은 근본 자성을 요달(了達)하여 생사를 끊는다. 우리는 아무리 힘이 있고, 건강하고 권세가 막강해도 언젠가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 그것은 마음이 나고, 머물고, 변하고, 없어지는 번뇌 망상에 휘둘리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생로병사도 생기는 것이다.

선은 마음속의 생명을 없애는 것이 근본 목적이다. 하지만 마음의 생멸을 잡아 없애려하면 더 일어난다.

따라서 이때는 ‘나’라는 상(相)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고 잠잠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러다보면 결국에는 ‘나’라는 놈이 없는 줄을 바로 알게 된다. 그때에만 생멸상(生滅相)이 사라지게 된다.

■ 잘못된 수행법

꿈을 꿈이라고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알아듣지 못하거나 꿈에서 깨어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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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한 사람들 중에는 고통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는 방법으로 기도나 염불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기도나 염불을 할 때는 그 뜻을 정확히 알고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생활 속에서 어떻게 실천하는 것이 좋은지 사람들에게 실질적으로 어떤 도움이 되는지 알아야 한다. 또 밖에서 불교를 보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삶을 통해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기도를 잘못하면 마(魔)가 붙기 쉽다. 물론 기도도 ‘마음 밖에 따로 법이 없다(心外無法)는 생각으로 철두철미하게 하면 참선하는 것이나 경전을 읽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서 마음밖에 어떤 대상을 추구한다면 그때부터 문제가 생긴다.

이런 틈을 타서 마가 붙게 되면 무슨 칠성(七星)이 붙었다. 혹은 산신이 붙었다고 한다.

선방에서는 불립문자라 하여 문자를 내세우지 않지만, 경전이나 관련 서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무엇을 세우고 알아야 기도하는 법도 알고 참선하는 법도 알 수 있다. 지혜도 지식을 통한 앎에서 올 때 훨씬 더 확실해진다.

세계의 모든 종교가 다 그렇듯이 합리적으로 말할 수 있는 데까지는 다 말하고 올바른 이치로써 바로 터득해야 올바른 종교적 실행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모두 삿된 길로 떨어질 수 있다.

■ 삶과 죽음의 문제를 자유로이 해결하는 법

불교에서는 마음에 생사가 없음을 깨달음으로써 생사 문제를 해결한다. 덧붙여 설명하면 마음이란 그것이 나온 곳이 없기 때문에 죽음 또한 없다고 보는 것이다. 본디 마음이 나온 곳이 없음을 확연히 간파한 것을 ‘도통(道通) 했다’고 한다.

우리 자신의 어디든 찾아보라. 마음이 있는 곳이 있는지 말이다. 나온 곳이 없으므로 죽는 곳도 없다. 따라서 道 가 철저히 깊은 사람은 이 조그만 몸뚱이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자유롭게 살 수 있다.

어리석은 중생들이나 죽음을 두려워하며 천년만년 살고 싶어 하지. 도인(道人)이나 성인(聖人)은 굳이 오래 살려 하지 않는다. 오래 살고 싶다는 것은 중생들의 어리석은 생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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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에 통한 사람은 몸뚱이를 그림자로 본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을 간밤에 꾼 꿈과 같다고 생각한다. 간밤에 꿈을 꾸고 다닌 사람이 꿈을 꾸고 나면 꿈속에서는 무언가 분명히 있긴 있었으나 헛것임을 알듯이 삶 또한 그렇게 본다.

혹자는 도인도 죽는데 어찌 생사가 없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겉을 보고 하는 소리다. 옷 벗는 모습을 보고 죽었다고 할 수는 없다. 세상 사람들은 이 ‘옷’을 자기 ‘몸’으로 착각한다. 그러다 보니 죽음의 경계에 걸린다. 그러면 도인이나 성인은 무엇을 자기 몸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몸 밖의 몸, 육신 밖의 육체를 지배하는 정신, 좀 어렵게 말하면 시공이 끊어진 자리, 이것을 자기 몸으로 안다.

시공이 끊어진 자리란 죽으나 사나 똑같은 자리, 몸을 벗으나 안 벗으나 똑같은 자리, 우주가 생기기 전 시공이 끊어진 자리, 생사가 붙지 않는 자리를 뜻한다.

■ 고요한 곳에서 도를 닦는 것은 시끄러운데 쓰기 위함이다.

불교인은 아니지만 장자는 다음과 같이 생사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였다.

“죽고 사는 문제가 크다지만 생사가 변하지 아니하며, 비록 천지가 무너져 없어진다 해도 정신을 잃지 않는다.”

중생은 끝까지 몸과 마음이 둘로 보이기 때문에 마음에는 생주이멸(生住移滅)의 사상(四相), 몸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사상, 1년엔 춘하추동의 사시, 세계엔 성주괴공(成住壞空)사상 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인은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닌 줄 철저히 각파했기 때문에 마음의 생주이멸은 묘용(妙用)으로 변하고 몸의 생로병사는 거구착신(去舊着新 : 생사에 자유자재한 것)이 되며 1년의 춘하추동은 일원기(一元氣)로 세계의 성주괴공은 무애삼매(無碍三昧)로 변한다.

우리가 고요한 곳에서 도 닦는 것은 시끄러운데 쓰기 위함이다. 예를 들면 돈벌이 하는 것은 가난한 데 쓰자는 것이요. 깨달음은 얻어서 수많은 중생 구제를 하기 위함이다.

고통스러움은 어떻게 벗느냐 하는 데 있어 성인의 구원을 받는 방법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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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남에게 의지하는 것으로 스스로 벗어나는 것만 못하다. 시끄럽고 고통스러운 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생사의 큰 문제를 자유자재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라 하겠다.

■ 참되게 안다면 실행은 그 앎 가운데 있다.

중국 당나라 때 육조 혜능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차라리 생사 속에 머물러 중생을 교화하면서 도를 닦을지언정 소승(小乘)의 적멸(寂滅)에 파묻혀 자리(自利)만을 구하는 해탈은 하지 않겠다. 그러니 항상 자신의 허물만 보고 남의 허물을 보지 말라.”

훗날 조선시대 선조 때 서산대사는 육조 혜능 스님이 남긴 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전자는 선가(禪家)의 눈이요. 후자는 선가의 발이다.”

도가(道家)에 여동빈(呂洞賓)이라는 유명한 선생이 있었다. 그가 득도 전인 예순네 살 때 일이다. 길을 가다가 점심때가 되어 어느 주막에 들러 점심을 주문하고 잠시 정자나무 밑에 누워 쉬다가 홀연히 잠이 들었다. 꿈에서 7,80년을 살았는데 슬하에 여러 자식을 두고 조정에서는 청요(淸要)의 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헌천동지(헌 : 치켜들 흔 또는 헌자로 手변에 기뻐할 欣. 天動地)하는 부귀공명을 누렸는데 깨어 보니 점심으로 부탁한 황량(黃糧 : 조밥)이 아직 익지 않았다는 것이다.

“10분도 안 된 시간 동안에 한 평도 안 되는 공간에서 7,80년 동안 살았던 그 세계는 도대체 누가 만든 것인가? 그는 이 한 생각을 통찰하며 그 자리에서 무상을 깨닫게 된다. 꿈속에서 1백 년을 산다 해도 꿈속의 일은 역시 꿈인 것이다. 그 일로 인해 세간사를 모두 정리하고 수장자를 짚고 道 를 구하러 나섰다가 신선 종이옹(鐘貳翁)을 만나 수백 년을 사는 선도(仙道)를 성취한다.

말은 행동을 돌아봐야 하고, 행동은 말을 돌아봐야 한다. 눈과 발이 함께해서 지행이 합일되는 길을 밟는다면 정치가와 교육가는 할 일이 없어 팔짱끼고 앉아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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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敎)와 선(禪), 불교를 이끄는 두 개의 바퀴

중국에 훤제(煊帝)라는 왕이 있었다. 하루는 꿈 풀이를 잘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시험해 보려고 한 가지 꿈을 지어 냈다. 만약 해몽가가 꿈 풀이를 억지로 할 것 같으면 혹세무민 죄를 씌워서 목을 칠 작정이었다.

“네가 꿈 풀이를 잘 한다고 하니 묻겠다. 간밤 내 꿈에 궁전 처마의 기왓장 하나가 난조(鸞鳥 : 봉황새 종류)가 되어 날아가는 꿈을 꾸었는데 이것은 무슨 꿈인가?”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해몽가가 대답했다.

“폐하 큰일 났습니다. 지금 궁중에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해몽가가 답변을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폐하 아뢰옵니다.”

“무슨 일이냐?”

“지금 궁중에서 두 사람이 싸우다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훤제는 기가 막혔다. 꾸며 낸 꿈으로 해몽가를 시험해 보려한 것인데 어떻게 꾸며 낸 거짓 꿈까지 이렇게 잘 맞히는가. 훤제는 그만 놀라서 해몽가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계략을 털어놓았다.

“네가 해몽을 잘한다고 해서 한 번 시험해 보기 위해 꿈을 거짓으로 지어낸 것인데 어떻게 귀신같이 그 꿈이 잘 맞을 수 있다는 말이냐?”

그러자 해몽가가 말했다.

“폐하 꿈이란 정신이 노는 것입니다. 꿈속의 꿈만이 꿈이 아닙니다. 폐하가 한 생각을 일으키면 그것 또한 이미 꿈입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꿈이 생겨나고 꿈이 있으면 이 우주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敎는 부처님의 가르침 곧 교리이고, 禪은 부처님의 마음인데, 이것은 배워서 체득되는 것이 아니다 생각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본래 문답이 끊어진 자리인 이 우주가 일어나기 전, 우리 몸뚱이가 생기기 전 그리고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 자리를 말한다.

따라서 거기에 무슨 말을 붙일 것인가. 이것이 본래면목이다. 그러므로 깨달았다는 것은 깨달은 것이 끊어진 자리를 말한다. 만일 거기에 ‘깨달음’이란 말이 붙는다면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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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知)와 각(覺), 앎과 아는 것이 끊어진 자리

‘알다’의 뜻을 지닌 한자 중에 ‘지(知)’ 자가 있다. 여기서 파생되는 단어에는 지식(知識)이 있다. 이 말에는 아는 것이 많다는 뜻이 담겨 잇다. 역사 속에서 아는 것이 많아 후세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들이 있다. 그 중에서 토정 이지함 선생은 당대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후세 사람들에게 회자될 정도로 아는 게 많은 사람이다. 토정 선생이 생전에 자신의 친산(親山)을 미리 정해 놓고 그 속에다 빗돌(碑)을 하나 묻어 놓았다.

그런데 마침 토정선생의 종손자(從孫子)가 삼도감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어느 날 유명하다는 풍수가 찾아와서는 토정 선생이 정해 놓은 친산이 좋지 않다며 종손자인 삼도감사에게 더 좋은 명당이 있다고 했다. 종손자는 풍수가의 말을 믿고, 토정 선생이 잡아 놓은 친산을 파 보았다.

그런데 파고 보니 거기에서 빗돌이 하나 나왔는데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모년 모월 모일 모시에 불초손이 이 묘를 팔 터이니 개봉축하라.”

상황이 이와 같다면 누구라도 깜짝 놀랄 일이 아닌가. 이 빗돌의 명문을 보고 토정의 종손자인 삼도감사는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즉시 자신이 길지라고 잡았던 곳을 다 물리치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선영에 큰 죄를 지었으니 얼굴을 들 수 없다. 앞으로 나는 선영과 함께 할 수 없으니, 후에 내 묘는 머슴들이나 묻히는 선영산소 밑에다 조그마하게 써 달라.”

그리하여 삼도감사의 묘는 토정 선생의 산소 밑에 조그맣게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토정 선생은 미래 자신의 후손이 어떤 일을 벌일지 다 아는 분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이 알고 학식이 높아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앎(知)일 뿐이다. 이렇게 아는 것을 가지고 도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일 아는 것만 가지고 도라 할 것 같으면 토정 선생이 토정 선생으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사람마다 4가지 소원이 있으니

안으로는 신령하고 강하려 하며

밖으로는 부자가 되고 귀인이 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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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사람들은 4가지 소원을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를 소망한다.

그러나 토정 이지함 선생은 달랐다.

부자는 욕심 안 내는 것이 제일 부자요.

귀인은 벼슬 안 하는 것이 제일 귀한 것이요.

강한 것은 다투지 않는 것이 제일 강한 것이요.

신령한 것은 아는 게 없는 것이 제일 신령한 것이다.

그러나 알지도 못하고 신령하지도 못한 것은 어리석은 자가 가지고 있고

다툼질도 하지 않고 강하지도 못한 것은 나약한 놈이 가지고 있고

욕심도 안 내고 부자도 못 되는 것은 빈궁한 인간이 가지고 있고

벼슬도 하지 않고 귀하지도 못한 것은 미천한 놈이 가지고 있으니

벼슬하지 않고도 능히 귀하며

욕심 안 내고도 능히 부하며

다투지 않고도 능히 강하며

아는 것 하나 없고도 능히 신령한 것은

오직 대인이라야 가능하니라.

이처럼 토정 선생에게는 아는 것에 머물지 않고 아는 것이 끊어진 자리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현인(賢人)이라는 평가를 듣는 것이다.

조선 오백년의 유교에서는 정북창(鄭北窓 이름은 정임) 선생을 제일가는 술객(術客)이라 칭한다. 정북창 선생 또한 술객을 넘어선 도의 경지에 이른 분이다. 그가 스무 살이 되어 입산하여 공부하던 때의 일이다.

입산삼일(入山三日)에 지천하사(知天下事)라.

산에 들어간 지 사흘 만에 천하의 일을 알았네.

무소부지(無所不知) 즉 모르는 것 없이 다 알았다는 뜻이다. 심지어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갔는데, 중국 사람을 만나면 중국말을, 소련 사람을 만나면 소련 말을 유창하게 말했다고 한다. 천재 중에 천재인 사람이 정북창 선생이다. 동서고금 어디에서도 유래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마흔 네 살에 요절했다. 정북창 선생은 자신의 만장을 스스로 쓴 사람으로 유명하다. 바로 북창자만(北窓自挽)의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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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천 잔 술을 다 마셔버리고

일평생에 만 권의 책 다 읽었어라.

고상하게 복희씨 이상의 일만 이야기하고

세속의 얘기는 종래로 입에 걸지 않았도다.

안연(공자의 으뜸 제자)은 삼십에 아성(亞聖 :공자의 다음 가는 성인)이라 불렸는데

선생의 삶은 어찌 그리 긴가.

안연은 서른두 살에 일찍 죽었는데 북창 자신은 마흔넷까지나 살았으니 그것으로 족하다는 내용의 만장을 쓴 것이다. 그리고 좌탈(座脫) 즉 앉아서 몸을 벗어버렸다. 그는 불교에도 매우 조예가 깊었다. 그런데도 유교에서는 그를 술객(術客)이라고 한다. 유교에서는 그의 아는 것만 보았지 아는 게 끊어진 자리는 보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각(覺)은 바로 아는 게 끊어진 것이다.

■ 생사일여 관에는 두려움이 없다.

우리나라는 어느 다른 나라보다도 불교의 진수에 있어서, 교리 면으로나 선 사상 면으로나 다 앞서 갖추고 있다.

인도, 동남아 문화권은 거의 다 불교 숭상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가 다 후진국이 되었다. 그래서 아마 ‘불교 숭상국은 후진국이다’하는 소리가 나온 듯한데, 사실 이것은 틀린 말이다. 한 나라가 망하고 흥함은 종교로 인한 국민정신과 정치 지도력에 달려 있는 것이지, 종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불교 숭상국인 일본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떻게 부흥할 수 있었을까? 나라도 작고 자원도 없는 섬나라이면서도 태평양전쟁 때 세계 3대 강국에 들었고, 패망 후에도 4대 강국에 들고 있다.

결국 그들은 불교 정신을 잘 활용한 덕분에 오늘날과 같은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그들은 선검일여(禪劍一呂) 정신을 강조했다 즉 참선하는 정신과 칼 쓰는 정신을 하나로 훈련시켰던 것이다. 禪이란, 잡념이 하나라도 붙어서는 안 된다. 잡념은 망상일 뿐이다. 도를 열 번 통했다 해도 통했다는 생각이 붙으면 이미 도가 아니다. 군인이 칼을 쓸 때에도 앞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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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까 저럴까 주저하는 생각이 있으면 칼을 쓸 수가 없다. 일본 사람들은 불교의 선 정신을 칼 쓰는 데 주입시켰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그들의 군대가 막강할 수 있었고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불교정신을 잘 이용했던 때는 신라시대로, 당시 불국사에선 4천여 명의 사대부중을 함께 모여 지내게 하고, 의상 대사를 모셔다 ‘화엄경’으로 국민정신을 지도했으며, 원효 대사는 천성산(밀양 통도사 내원암)에서 매년 1천여 명씩 제자를 길러 냈다. 그처럼 신라는 불교 정신으로 신라 국민을 지도하여 마침내는 삼국통일을 이룩해 냈다.

그러면 도대체 불교정신에 무엇이 깃들어 있기에 그럴 수 있었을까? 바로 불교의 생사일여관(生死一如觀)이다 죽고 사는 것이 하나, 즉 생사가 둘이 아니라는 정신만큼 강한 것은 없다. 죽고 사는 문제가 하나라면 과연 무엇이 겁이 나겠는가.

이 몸뚱이마저 버릴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강한 것은 없을 것이다. 이 단계는 망상을 끊고 道 자리에 든 것이나 다를 게 없는 경지이기 때문이다.

이제 결론을 내린다면 불교국 일지라도 불교의 정신을 알맞게 잘 응용할 줄 아는 나라는 발전하고 이를 응용하지 못하는 나라는 후진국이 될 수밖에 없다.

동양 사상의 핵심은 이렇다.

“한 근본이 우주 만유요. 우주 만유가 한 근본이다.(一本萬殊 萬殊一本)”

따라서 현실적 조화를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도덕뿐만 아니라 종교적 가르침이 필요하다. 또한 종교적 가르침을 실천할 줄 알 때 생활에서 변화가 온다.

■ 생의 의미와 죽음의 초극

생의 의미와 죽음의 초극은 우리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항상 신비요. 철학이요. 실존이라 하겠다.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제자가 물으니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직 生이라는 것도 잘 모르는데 어찌 죽음까지 다루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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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 사상에서 보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죽음이다. 이 문제를 극복해야만 참다운 인간의 삶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몸을 가지고 사는 생이라는 것은 기껏해야 1백 년. 보통 그 안에 모두 소멸된다. 1백 년도 유지하지 못하면서 온갖 망상이 어찌나 많은지 항하사(恒河沙)의 무한히 많은 수로도 셀 수 없을 정도다.

반면 불교에서 보는 궁극적인 생은 영원무궁한 생이지 1백 년 미만의 생이 아니다. 영원무궁한 생이라는 것은 태어나거나 생겨남이 없는 생(無生의 生)이다. 이것은 언제나 성(性)의 자리에서만 가능하다 시공이 끊어진 그 자리가 바로 무생의 생, 즉 영원한 생이다.

본래 생사는 둘이 없는 자리다. 만약 생겨나는 것이 있으면 죽는 것이 있게 되고 나는 것이 없으면 죽음도 없는 까닭이다.

겁(劫)의 불길이 바다 밑까지 태우고

바람이 고동쳐 산과 산이 맞부딪히더라도

참되고 변함없는 고요한 그 자리

그리고 그 고요한 그 즐거움인 근원의 마음자리가 항상 이와 같다.

육조 혜능 선사는 생사가 본래 없음을 이와 같이 표현했다.

제5장 종교 - 3대 성인이 세상에 온 까닭을 아는가?

■ 자기 자신을 화복하는 길

불교에서는 자기 마음의 근본 자리를 밝히는 것, 이외의 것을 외도(外道)라 하고 사법(邪法)이라 한다. 유교에서는 이단(異端)이라 하고, 도교에서는 방문(榜聞) 즉 정문(正門)의 반대라고 한다.

그렇다면 스스로의 가치는 어떻게 회복해야 할까? 이 가치를 회복한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예수, 공자, 석가다. 이들 3대 성인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멸심(生滅心)에서 본래 끊어진 자리를 본 것이다. 이것을 과덕(果德 : 수행의 결과로 얻어지는 공덕) 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나무 열매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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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마음을 닦을 때 바로 3대 성인이 깨달아 얻은 이 과덕을 가지고 씨앗으로 삼아야 한다. 만일 과덕 밖의 다른 것으로 씨앗을 삼는다면 그것은 미신이요, 외도가 된다.

그러므로 과(果)가 없는 인(因)이 없고 인이 없는 과가 없다.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한 것은 인과동시(因果同時)를 밝힌 것이다. 자연에서 그 예를 찾는다면 모든 초목이 선인(先人 : 꽃)과 후과(後果 : 열매)인 데 비해 오직 연꽃만은 꽃 속에 열매가 맺어 있어 인과동시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성불한 과덕과 일체중생의 망상심(妄想心 : 거짓과 삿됨, 아만과 뽐냄이 합하여 한 덩어리가 된 것)이 둘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마음의 생멸은 본래부터 일어나는 곳이 없는데 일어나는 것으로 망집(妄執 : 망상을 버리지 못하고 집착하는 일) 하여 일체 중생은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사람을 평가할 때 지식을 가지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런데 지식과 지혜는 차이가 있다. 지식이 아무리 높다 해도 지혜는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식은 없어도 지혜는 최고로 발달한 사람이 있다. 물론 둘 다 갖추면 좋으련만 만약 그 중 하나만 선택하라면 지식 보다는 지혜가 훨씬 더 중요하다. 마음을 닦아 깨닫는 데는 지식이 크게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얼마나 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발심하느냐가 마음공부에서는 관건이 된다. 발심하여 한 생각 거두어서 생각이 일어난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우치면 누구나 3대 성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

■ 종교는 바로 내 마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종교심에 대해 청담 스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적이 있다 .

“불교나 기독교나 무엇이든 간에 종교는 내 마음이며, 내 마음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 형상 앞에 예불을 올리고 절을 한다고 구원 받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종교가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바다에 비유하면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인 칠정은 바다의 파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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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다. 파도가 일어나는 데서 청탁이 갈라진다. 맑은 물은 사람에게 이익을 주지만 탁한 물은 배를 엎어서 사람을 죽이는 못된 작용을 한다. 그렇지만 젖(습 濕)는 성질 자체는 변함이 없다. 성인의 마음을 맑은 물이라 한다면 범부의 마음은 탁한 물이다. 그러나 물이 맑다고 더 젖고 흐리다고 해서 덜 젖는 것이 아니다. 물의 ‘젖는’성(性)은 물의 청탁을 떠나서 물이 본래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의 마음이나 범부의 마음이 똑 같다고 하고 그 성 자리의 똑 같은 원리를 깨달을 때 범부가 성인이 되는 것이다. 즉 물이 젖는다는 본래의 성품에서 본다면 하루 종일 바다에 바람이 불어 흙탕물이 튀어도 하나도 손해가 없다는 말이다. 밤낮 젖는 것인데 거기에 청탁이 어디에 붙겠는가. 젖는 성품 자체에는 청탁이 붙지 않는다.

■ 천당 지옥의 유치원 법문이 생긴 까닭은

동양학의 3교인 유불선의 성인이 이 세상에 온 이유는 무엇일까?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고 인품을 과시하기 위해서? 아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마음속에 본래부터 내재해 있는 우주의 근원이요. 시공이 끊어진 자리를 알려 주기 위해서다.

이 과정에서 진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천당지옥의 유치한 법문’이 생기게 된 것이다. 현실 삶에서 천당과 지옥과 같은 인과법칙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3교 성인이 인류에게 가르친 교리는 결코 이것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오직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를 깨달아 이 세계가 있는 그대로 극락임을 알려 주러 온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성인의 가르침이 어떤 특정 종교를 믿으라거나 천당지옥을 믿으라는 것이겠는가. 아니다. 오직 자기 자신이 그 모든 것의 주체임을 확연히 알라는 것이다. 만약 자기 자신의 주체를 부정한다면 뿌리 없는 나무와 같은 것임을 알려 주려 한 것이다.

현미경 아니면 세균을 볼 수 없고 망원경이 아니면 원거리를 볼 수 없듯, 인간의 어리석음은 성인의 경전을 통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경전을 통해 자기의 주체성을 회복하고 그것을 근간으로 삼아 생활해야 한다.

굳이 전문 수행인이 되어 입산수도를 해야만 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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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자신의 근기에 따라 자신에게 맞는 수행법을 선택하여 수시수처에서 공부를 하다 보면 밤새도록 가는 길에 해가 뜰 때가 올 것이다. 비록 처음에는 도에 들어가는 문이 상중하의 구별이 있다 하더라도 들어가고 보면 한 자리요. 한 바탕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옛 성인의 말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발심(發心)은 선후가 있을지라도 도를 깨닫는 데는 앞뒤가 없다.”

■ 시공이 끊어진 자리

“녹야원에서 발제하에 이르기까지 49년간 법을 설했어도 한 글자도 설한바가 없다.”

부처님이 49년 동안 횡야설수야설(橫也說竪也說), 즉 혀가 닳도록 설법을 해놓고도 자신은 단 한 글자도 얘기한 바가 없다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이는 성(性) 의 자리에서 하신 말씀이다.

성의 자리는 다양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 유교에서는 중(中)이라고 한다. 중이라는 것은 복판을 가리키는 중이 아니다. 여기에 앉아서 보면 서쪽이 되고 저기에 앉아서 보면 동쪽이 되고 이쪽에서 앉아서 보면 북쪽이 되고 저쪽에서 앉아서 보면 남쪽이 되는 자리로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중앙, 가운데라는 뜻이 아니다. 중앙의 중이 진중(眞中)이 될 수 없다. 서울이 우리나라의 중앙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충청도에서 보면 동쪽이고 함경도에서 보면 남쪽이고 강원도에서 보면 서쪽인데 어떻게 서울이 중앙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중’이란 시간과 공간이 끊어진 자리다. 이를 중용(中庸)에서는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을 중이다’라고 하고 동시에 “중이란 천하의 근본 우주의 핵심체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 기독교에서 ‘하나님’이라는 것도 시공이 끊어진 자리다. 우주는 시간과 공간을 의미하는데, 시간과 공간이 나기 전, 우주가 생기기 전에 앉으신 분이 누구이겠는가. 그 분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우주 창조주인 하나님인데, 기독교적 표현으로 말한다면 그 분이 시간과 공간을 만든 것이다.

그런데 범부는 性의 자리를 ‘迷’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못난 놈 노릇을 하는 것일 뿐이다. 성인들은 다 똑같은 존재임을 한결같이 가르쳤다. 이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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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예는 기독교 성경 ‘산상수훈’편에 잘 표현되어 있다. 마음을 비우는 자가 복을 받는다고 하지 않는가. 마음을 비우는 자가 바로 성의 자리를 각파하여 시공이 끊어진 자리인 것이다.

■ 우주 만유가 있는 그대로 평등하다.

‘맹자’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물건이 가지런하지 않는 것은 물건의 실정(實情 : 진리의 대명사)이다.”

이는 산은 높고, 물은 깊고, 따오기는 희고, 까마귀는 검고, 조리는 새고, 바가지는 새지 않는 그대로 각각 평등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물질 위에서 평등을 찾으려고 하니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마치 산을 깎아 바다를 메워야 하고, 따오기는 검은 물을 들여서 검게 만들어야 하며, 까마귀는 하얗게 만들어야 하고, 조리는 새니까 꿰매서 새지 않게 해야 하며, 바가지는 새지 않으니 새도록 해야 한다는 식이다. 이런 식이라면 아무리 평등을 찾으려고 해도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종교적인 견지에서 평등을 찾는다면 정신을 제일로 보고 물질을 그 다음으로 보기 때문에, 예컨대 정신이 허공이라면 물질은 삼라만상이다. 허공은 진리를 비유한 것인데, 이렇게 모양이 끊어진 허공 속에서 평등을 찾기 때문에 산은 높은 대로 평등, 바다는 깊은 대로 평등, 따오기는 흰 대로, 까마귀는 검은 대로, 바가지는 새지 않는 대로, 조리는 새는 대로 평등, 즉 우주 만유 전체가 있는 그대로 평등한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평등이다.

종교의 종(宗)을 풀이하면 ‘갓 관’ 밑에 ‘보일 시’ 한 관시(冠示)다. 갓은 제일 꼭대기에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예기(禮記)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갓이 아무리 헌 것이라 하더라도 발에다 쓰는 것이 아니다.”

즉 ‘관시’의 뜻은 제일 꼭대기 도리로서 보이는 것이다. 꼭대기 도리는 예수님이 보이신 성부 자리와 유교에서 보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는 그 性의 자리다. 성이나 도나 교(敎)나 세 글자가 궁극에서는 같은 것이다.

교(敎 )는 글자그대로 선효후문(先孝後文)이다. 효도 효 변에 글월문으로 행동 중에는 효가 으뜸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효는 백행의 근본이기 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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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효도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형제간에 우애가 있고 어른을 공경하며 모든 사람을 사랑하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 근본이 어지러워서 지말(枝末)이 다스려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종교란 우주와 인생의 핵심체인 최고의 진리를 보여서 행동을 먼저하고 학문은 뒤에 해야 한다.

■ 화엄학의 가르침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

기독교의 가장 큰 특성은 신성과 인간성을 구분한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으로 나누어, 하느님은 창조주,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관계를 설정해 놓고 인간과 신성 사이에는 무한한 질적 차이를 두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성 회복이라는 희망을 갖게 해준 것이다. 여기서 기독교의 성부, 성신, 정자의 삼위일체설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 사후에 그 제자들이 진리를 표현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사용한 것이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인류의 구세주일 수 있었는가를 냉철하게 규명해 본다면 바로 삼위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인 성자가 성부 자리, 성신 자리와 일체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모든 인간의 성인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불교에는 삼위일체라는 말은 없지만 이와 유사한 의미를 가진 용어가 많다.

법(法), 보(報), 화(化) 삼신으로 이 셋을 하나로 보는 것이다. 법신이 성부의 자리, 보신은 성신 자리, 화신인 석가모니불이 성자 자리다. 다시 말해서 천강(千江)에 비치는 그림자 달이 화신이라면 달 광명은 보신이며 하늘에 있는 달은 법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49년간 법을 설한 석가모니는 화신인 그림자 몸이다. 교리적으로는 같은 부처지만 최초에 우주관, 인생관을 타파해서 설한 화엄학은 법신의 소설(所說)이요, 무지한 대중을 위해 평생 설하신 화엄학을 부연한 팔만대장경은 화신의 소설이라 할 수 있다.

화엄학에서는 모든 중생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 말세라도 정신을 차리면 도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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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본연의 가르침인 대승 교리로 나가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불교는 그렇지를 못하고 소승적 기복에만 치우쳐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기복으로만 흐른다는 것은 대개 마음이 약한 사람들이 종교를 믿을 때 나오게 되는 현상이다. 이러한 측면은 어느 종교에서나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부활해서 구원할 때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는 하늘에 올라갈 사다리가 없다고 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마음 약한 중생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아이쿠, 내가 영원히 살려면 믿어야 되겠구나.’

예수의 근본정신은 허심자수복(虛心者受福 ), 즉 마음을 비우는 자가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또 “네가 돌이켜서 동자(童子)가 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도 했다.

여기서 동자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동자란 천진난만한 어린애를 말하는데, 어린애의 마음은 바로 성인의 마음과 같기 때문이다.

성인의 마음은 곧 그 순간의 마음, 즉 앞뒤가 다 끊어진 마음을 갖고 사는 사람이다. 도를 통한 사람도 그와 같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 말씀의 근본정신을 모르고 예수가 구원해 준다고 하니 자기 스스로 구원할 생각은 않고 예수만 부르며 의지하려고 한다. 이것 또한 종교의 기복적인 경향이라 하겠다.

불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칠성각에 기도하며 “아들 낳게 해 달라”, “남편 출세시켜 달라”하는 것 등이 모두 기복이다. 그러나 몽매한 중생을 하루아침에 도의 자리에까지 끌어올릴 수가 없으니, 신심을 키우기 위한 방편으로 기복은 어느 종교에서나 의도된다.

다만 문제는 기복에만 치우치고 여기에 머무는 경향이며, 여기서 마땅히 벗어나야 한다. 청정한 자기 마음의 본체를 밝혀 의타(依他)를 정화하고 자기해탈의 이타행(利他行)을 이루는 것이 올바른 깨달음의 길이다.

■ 앞으로 다가올 미래, 종교의 교파를 넘다.

세상이 거칠고 험악해진 것은 불교의 자비, 기독교의 박애, 유교의 인 등과 같은 종교의 덕목들이 현실에서 실천되지 못한 까닭이다. 그리하여 청소년들의 탈선은 날로 흉포화하고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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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화랑의 오계를 연마시키는 화랑의 집이 있고 충무수련원이 일선학교

교육에 연계되어 있으면서도 학생들의 탈선이 많아진 것은 오늘의 도덕 교육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가 치닫고 있는 산업화에 따른 인간의 기계화와 노예화, 물질문명의 풍요 추구에 역점을 두는 가치전도의 인생관 등에서 생명 경시의 풍조가 나타나고 있다.

학교교육만으로 도덕의 덕목을 펼치기 어려운 현상이기 때문에 종교적 차원의 신앙심을 사회 전반에 심어 주는 일이 시급하다. 그래서 오늘의 종교는 내세의 영혼 구원이나 수도를 통한 자기만족을 벗어나 적극적으로 사회교화에 임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종교가 대체로 지향하는 신앙은 자신의 수도를 우선으로 하는 것이지만, 현대 사회처럼 종교윤리가 절실한 때도 일찍이 없었다.

요즘은 세태를 어수선하게 하는 정국의 경색이나 치도(治道)의 기강 문제도 종교적 신앙 차원의 수도가 결핍된 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우주관, 인생관의 핵심이 되어야 할 우주 생성 이전의 본래 자리를 보지 않고 떠들어대는 문화나 정치는 위선이고, 썩은 것일 수밖에 없다.

도가 생활화될 때 인간세계는 그 자체로 시공이 끊어진 극락의 낙원이 된다. 모든 정치나 교육이나 문화는 이 같은 도에 합치되는 마음을 텅 비운 자리에서 추진해야 올바른 가치를 지닐 수 있다.

현재의 종교는 쓸어 없애버려야 한다. 이 말의 의미는 신앙인끼리 괄목상대하고, 네 종교, 내 종파가 옳다며 적대시하며, 이교인(異敎人)이라 해서 동물처럼 취급하는 천박한 종교의 벽은 무너진다는 뜻이다. 장벽이 허물어지면 초종교(超宗敎)가 될 것이다. 김일부 선생은 유불선이 하나가 된다고 했고, 강증산 선생도 그렇게 예언한 바 있는데, 이 예언은 1980년대부터 열리기 시작할 것이다.

지금까지 서로 자기만 옳다고 했던 교파들이 문을 열고 서로의 장점을 찾아 상봉의 기회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 새싹이 나기 위해서는 그 자체는 썩어야 한다. 밝은 면과 좋은 것은 남겠지만, 배타적이고 아집적이고 권력 쟁취의 무대가 된 각 종단이 새로운 출발을 기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요소를 부단히 제거하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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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혼탁한 사회를 정화하기 위해서는 정신기강을 바로잡는 것 외의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다. 종교야말로 썩어가는 사회의 정화를 위한 절실한 소금이며, 인류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근원적인 도를 지켜줄 수 있는 최후의 보루다.

대체로 종교 신앙이란 인간 현실의 지고선(至高善)을 추구하는 정신 수양과 윤리관, 철학관의 확립을 일깨울 뿐만 아니라 최고 수준의 경제적 인간, 최고 이성의 도를 계발하고 실천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12. 6. 24. 다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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