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영원에서 영원으로(2)

보해성산 2012. 11. 5.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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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에서 영원으로(2)

- 불필 스님 회고록 -

제5장 석남사 - 가지산 호랑이를 은사로 모시다 -

■ 하필과 불필

큰스님께서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씀을 몇 번이나 하셨는데도 ‘내일이 없다’는 급한 마음으로 정진을 거듭하다가 상기가 나는 일이 되풀이 됐다. 앉지도 서지도 못할 만큼 상기가 심해져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정도가 되자 큰스님을 찾아가 여쭈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정진해야 합니까?“

“한 길로만 가면 결국 성불할 수 있는기라. 서서히 해라.”

그때까지 큰스님은 단 한 번도 출가하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는데 그날 처음으로 출가에 대해 언급하셨다.

“장기전으로 가려면 머리를 깎아야제. 출가해라.”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붓과 종이를 꺼내셨다.

불필(不必)과 백졸(百拙). 나와 옥자에게 내린 법명이었다.

‘하심할 수 있는 이름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해왔던 옥자는 ‘백졸’이라는 이름을 받고 좋아했다. 백졸은 백가지, 즉 만사에 못난 사람이 될 때 만능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옥자가 법명을 받고 기뻐하자 큰스님께서는 이름에 대한 게송을 써 주셨다.

깊은 산속 높은 곳에 머무르니

나이 육십에 이르러 자유자재 함이라

이름이 사람들의 오르내림을 벗어나야

금일에 이르러 이제 백졸승이 됨이라.

住在千峰最上層 (주재천봉최상층) 年將耳順任騰騰 (연장이순임등등)

免敎名字掛人齒 (면교명자괘인치) 今朝甘作百拙僧 (금조감작백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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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필이라는 이름을 받고 “하필 왜 불필입니끼?” 하고 여쭈니, 큰스님께서는 “하필(何必 : 어찌하여 꼭 그렇게. 다른 방도도 있는데 왜?)을 알면 불필(不必)의 뜻을 안다”고 하셨다. 세간에서는 나의 이름을 두고 흔히 ‘필요 없다’는 뜻으로 나름대로 해석해, 부처님의 아드님이신 라훌라(장애)에 비견하곤 한다. 부처님께서는 출가하기 전 아드님이 태어나자 출가하는 데 장애가 된다고 하여 그렇게 이름을 지으셨다고 들었다.

그것도 맞겠다 싶어서 토를 달지 않고 살아왔다. 그러나 불필이라는 이름을 내리신 큰스님믜 뜻은, 세상에 아무 쓸모없는(不必)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도를 이룰 수 있다는 의미에서 주신 것일 것이다. 그리고 이름에 포함되어 있는 더 깊은 선지(禪旨)는 내가 공부를 다 해 마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성철 큰스님께서 나에게 물으셨다.

“도인 중에는 미친 도인, 숨어 사는 도인, 중생 제도하는 도인이 있다. 또 ‘내 떡 사소’하는 도인이 있는기라. 니는 어떤 도인이 되고 싶노?”

“저는 숨어 사는 도인이 되고 싶습니다.”

“숨어 사는 도인은 언젠가는 남의 눈에 띄니 중근기(中根機)인기라. 중생을 제도하는 도인은 명리승(名利僧)이고, ‘내 떡 사소’하는 도인은 공부도 하지 않고 자기도 속이니 제일 하근기인기라. 제일 상근기는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는 사람인기라.”

“중국 당나라 때 스님인 한산은 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비승비속(非僧非俗)인 채로 천태산 국청사 시풍현에 있는 한암(寒岩)의 깊은 굴속에 살았는기라. 국청사에 와서 습득과 함께 미친짓을 부렸지만 그 행위가 불도의 이치에 맞았다캐. 또 시를 잘하였제. 어느 날 그 주의 지사가 성인인 줄 알고 의복과 음식을 올리며 절하자 큰 소리로 ‘이 도적놈아! 물러가라!’ 하고는 도망쳐 달아나서는 다시 세상에 보이지 않았다캐. 세상에서는 한산을 문수보살. 습득을 보현보살의 화현이라고도 해. 그 후 한산이 숲 속의 석벽이나 마을 인가의 벽에 적은 300여 수의 시와 습득의 시 약간을 얻어 모아 한 권의 책을 만들었는데 그기 ‘한산시’야. 두 사람은 바보처럼 살면서 누구보다 자유자재한 도인이었는기라. 도를 공부하는 사람은 저 한산, 습득처럼 그렇게 살아야 하는기라.”

그 후로 한산시를 좋아하여 지금 머물고 있는 심검당의 주련(柱聯)에 그의 시를 새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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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巖我卜居(중암아복거) 鳥道絶人跡(조도절인적)

층층 바위틈이 내가 사는 곳

다만 새 드나들고 인적은 끊어졌다.

庭際何所有(정제하소유) 白雲抱幽石(백운포유석)

좁은 바위뜰 가에 무엇이 있나.

그윽이 돌을 안은 흰 구름만 감돌 뿐

住茲凡幾年(주자범기년) 屢見春冬易(누견춘동이)

내 여기 깃든 지 무릇 몇 해인고

봄, 겨울 바뀜을 여러 차례 보았네.

寄語鍾鼎家(기어종정가) 虛名定無益(허명정무익)

그대 부자들에게 내 한 말 부치나니

헛된 이름이란 진정 헛것뿐이니라.

■ 정진도량으로 찾아가다

‘불필’이라는 법명을 받고 석남사로 가서 인홍스님께 인사를 드린 뒤 “큰스님께 법명을 받고 출가하러 왔습니다.”라고 말씀드리자. “내가 꿈에 안약을 두 개 받았다.”고 하면서 좋아하셨다.

경남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에 있는 석남사는 구산선문(九山禪門)중 하나인 가지선문(迦智山門)을 개창한 신라 도의국사가 824년에 창건한 유서 깊은 절이다. 인홍스님은 이곳에서 퇴락한 사찰을 중창하고 비구니 회상을 열었다. 또한 후학들을 교육하면서 오늘 날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비구니 종립선원(宗立禪院)으로 자리매김 시키셨으니 이를 통해 한국불교사에서 인홍스님께서 차지하는 위상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스물한 살이던 1957년 가을, 인홍스님을 은사로, 자운 율사스님을 계사(戒師)로 석남사 대웅전에서 사미니계를 받으면서 나는 본격적인 출가의 길로 들어섰다.

인홍스님께서 석남사 회상을 열면서 대중들에게 가장 강조한 철칙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였다. 이 만고의 규범을 세운 백장회해(百丈懷海) 스님은 중국 당나라 때의 선사로, 선종 독자의 ‘백장청규(百丈淸規)’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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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장선사는 날마다 밭을 일구고 나무를 하며 쉬는 법이 없었다. 나이 구십이 넘어도 일을 하자 제자들이 일하는 도구를 전부 숨겨버리자 그날은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굶었다. 그래서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만고의 철칙이 세워졌으며 이것이 수도생활의 근본이 되었다.

석남사가 시골에 묻혀 있는 절인데다가, 당시는 경제가 어려웠던 시절이라 허물어져가는 법당을 보수하고 비새는 지붕의 기와를 가는 것도 모두 대중들의 힘으로 했다.

어느 날 경상남도 교육감이 석남사에 참배를 왔다가, 처다만 봐도 위험한 대웅전 지붕 위에 주지 인홍스님이 올라가 있고 대중들이 황토를 둥글게 뭉쳐서 지붕위로 줄지어 나르는 것을 보고는 “대단하십니다.”하고 인사를 했다. 인홍스님이 그 말을 듣고 일언지하 이렇게 대답하셨다.

“출가자가 기와집에 살면 기와를 만질 줄 알아야 살 자격이 있는 거지요.”

수처(隨處)에 작주(作主)하고 입처(立處)에 개진(皆眞)이라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을 때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석남사 회상에서 인홍스님은 그것을 몸소 실천하며 가르치셨다. 나는 1961년 3월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비구니계를 받을 때까지 일과 수행을 함께 했다.

석남사에서 강원을 보내기 시작한 것은 석남사 회상을 연지 10여 년 후의 일이었다. 그것도 운문사에 묘엄스님이 강사로 오자 “묘엄스님 같으면 맡길만하다” 하시고 강원에 보내기 시작했다. 훗날 묘엄스님은 수원 봉녕사를 중창하고 강원을 세워 강주(講主)를 지내셨다. 묘엄스님은 성철 큰스님께서 다음과 같은 약속을 받고 출가했다. 묘엄스님이 ‘회색고무신’에서 하신 말씀이다.

“스님이 아시는 것 다 나에게 가르쳐 주시면 중이 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스님께서는 아는 것을 다 가르쳐주기로 약속하셨지요. 지금 생각하니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1945년 단오날, 묘엄스님은 윤필암에서 성철 큰스님으로부터 묘엄(妙嚴)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때 큰스님께서는 사미니 계첩과 ‘팔경계법(八警戒法)을 손수 정성스레 만들어 주셨는데, 그 계첩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묘엄스님이 참으로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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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 대중이 놀란 큰스님들의 법거량

한국 비구니의 역사는 한국불교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한국의 비구니는신라에 불교를 처음 들여온 아도화상이 머물렀던 집의 주인인 모례(毛禮)의 누이 사씨(史氏)에게서 시작된다. 고려불교에서는 비구니들의 활발한 수행 모습을 찾아볼 수 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침체기를 겪는다. 그 후 미약하게나마 상궁들의 지원에 힘입어 명맥을 이어오다가 근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비구니계에서도 고승들의 활동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율사 자운스님은 비구니가 비구니계단에서 계를 받은 뒤 비구니계단에서 다시 계를 받는 이부승수계(二部僧授戒) 의식을 확립하셨고, 이것이 오늘 날에 이르고 있다. 자운스님의 비구니계단 복원과 함께 청담스님, 향곡스님, 성철스님 등이 비구니들을 제접(提接)해 주고 법을 인가해 줌으로써, 비구니 교단을 되살리고 선풍(禪風)을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하셨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전국비구니회의 초대 총재를 역임한 인홍스님은 비구니계의 큰 대들보이셨다.

공부를 하기로 마음 먹고 내가 처음 절에 간다고 했을 때 큰스님께서는 인홍스님이 수장으로 있던 홍제사로 가라고 하셨고, 훗날 결국 나는 인홍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정신적 스승이자 법사로 큰스님을 섬기며 그 법을 따랐던 인홍스님이 큰스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49년 겨울, 부산 묘관음사에서 였다. 서른 네 살에 오대산 월정사 자장암에서 출가해 한암스님 휘하에서 공부를 한 인홍스님은 큰스님을 봡고 수행의 전기를 맞았다.

당시 인홍스님은 묘관음사 인근의 마을에 방을 얻어 놓고 정진했다. 비구 스님과 함께 머무를 수 없는 계율 때문이었다. 인홍스님은 묘관음사에서 일정 시간 정진하고 탁발 걸식해 가며 수행을 거듭했는데, 장일스님, 성우스님 묘찬스님 등이 당시 도반이었다.

어느 날 아침 정진을 하고 나서 묘관음사 연못가를 포행하며 화두를 들고 있던 인홍스님에게 큰스님이 공부의 경계를 물었는데 대답하지 못하자 못으로 밀어 넣었다고 한다. 말없는 경책이었던 것이다. 인홍스님은 당황하지 않고 얼음이 살짝 얼어 있던 연못을 빠져 나왔다. 그때의 일을 두고 인홍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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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연못에서 빠져 나왔지만 이미 옷은 물에 푹 젖어 얼음이 쩍쩍 달라붙었지. 바닷바람이 오죽 차야지. 그러나 나는 방으로 들어 갈 수가 없었다. 그대로 서서 정진하며 옷을 다 말렸지. 그때 내 정신이 돌아왔다. ‘조금 아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것조차 버릴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살아오면서 그때 발심했던 마음을 철두철미 잊지 않고 살았다.

묘관음사에서 큰스님을 뵙고 큰 경책을 받은 인홍스님은 그 후 마산 성주사에서 40여 명의 대중과 함께 대중 결사를 시도했다. 성철 큰스님을 비롯한 청담스님, 자운스님 등이 주도해서 했던 봉암사 결사를 그대로 따라 실현한 것이다. 내가 처음 뵈었던 홍제사에서도 성주사에서 결사했던 것과 똑 같은 방식으로 대중을 이끌고 계셨다.

인홍스님은 성주사 결사 때 행했던 포살(布薩)과 대중들이 함께 하는 육체노동인 운력(運力), 발우공양 등을 실천하면서 수행의 길에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석남사를 이끄셨다. 신도들에게 시주를 받아가며 먹고 살기 급급하던 시절, 철저한 수행에 비구니 위상 정립의 관건이 있다고 보고 끊임없이 정진을 독려한 선각자였다.

이러한 인홍스님의 철저한 신념을 아시는 큰스님께서도 출가의 뜻을 비치는 사람들을 인홍스님에게로 보내셨다.

◉ 인홍스님의 석남사 운영

- 새벽예불 : 능엄주(楞嚴呪) 독송

- 저녁예불 : 대참회 108배

- 매달 보름과 그믐에는 대중 앞에서 자신의 허물을 참회하는 포살 실행

* 학인들에게는

- 아침 : 영가스님의 ‘증도가’와 승찬스님의 ‘신심명’ 독송

- 삭발할 때, 불명 받을 때, 화두를 받을 때는 3천배 하기

- 순치황제의 출가시와 ‘초발심 자경문’을 철저히 익힘

* 성철 큰스님의 ‘납자에게 주는 10가지 당부 (納子十偈)’를 읽게 함

1. 무상(無常)

한 조각 그믐달 겨울 숲 비추니 / 몇 개의 백골들은 숲 사이에 흩어져 있네.

옛날의 풍류는 어디에 있는가 / 덧없이 윤회의 괴로움만 더해 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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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안빈)安貧)

누더기 더벅머리로 올연히 앉았으니 / 부귀니 영예니 구름 밖의 꿈이로다.

쌀독에 양식은 하나 없지만 / 만고의 광명은 대천세계 비추네.

*올연(兀然) : 홀로 우뚝한 모양

3. 정근(精勤)

물 긷고 나무하는 일은 옛 스님 가풍이요 / 텃밭 매고 주먹밥은 참 사는 소식이라. / 한 밤에 송곳 찾아도 오히려 부끄러워 / 깨닫지 못함을 한숨 지며 눈물로 적시네.

4. 정절(貞節)

몸 망쳐 도를 없애는 데는 여색이 으뜸이라 / 천 번 만 번 얽어 묶어 화탕지옥 들어가네. / 차라리 독사를 가까이 할지언정 멀리 둘지니 / 한 생각 잘못 들어 무량고통 생기도다.

5. 신독(愼獨 :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도록 언행을 삼감))

어둔 방에 혼자서 보는 이 없다 말라 / 천신의 눈은 번개 같아 털끝도 못 속인다. / 합장하고 정성껏 받들어 모시다가도 / 갑자기 성을 내어 자취를 없애니라.

6. 하심(下心)

법계가 모두 비로자나 부처님인데 / 어느 누가 현우(賢愚)와 귀천을 말하는가. / 모두를 부처님처럼 애경하면 / 언제나 적광정을 장엄하리라.

7. 이타(利他)

슬프다 뜬구름 같은 이 세상의 어리석은 중생이여 / 가시덤불 심어 놓고 천도복숭아 바라도다 / 나를 위해 해침은 죽는 길이고 / 남을 위해 손해 봄이 사는 길이네.

8. 자성(自省)

내 옳은 것 찾아봐도 없을 때라야 / 사해가 모두 편안하게 될 것이니라 / 내 잘못만 찾아서 언제나 참회하면 / 나를 향한 모욕도 갚기 힘든 은혜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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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회두(回頭 : 배교했다가 다시 돌아옴)

꿈속의 쌀 한 톨 탐착하다가 / 금대(金臺)의 만겁 식량을 잃어버렸네. / 무상은 찰나라 헤아리기도 힘든데 / 한 생각 돌이켜서 용맹정진 않을건가.

10. 인과(因果)

콩 심어 콩 나고 그림자는 형상 따라 / 삼세의 지은 인과는 거울에 비치는 듯 / 나를 돌아보며 부지런히 성찰한다면 / 하늘이나 다른 사람을 어찌 원망하리오.

나에게 극악하게 하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선지식이니 고통 주고 모욕 주는 은혜는 목숨 다해도 갚을 수 없으리라.

세상사를 한 눈에 꿰뚫어 보시고 한 말씀인데 무엇을 덧붙이랴. 승속을 막론하고 마음을 닦는 사람들에게는 그대로 참 법문이다. 출가해서 석남사 법당에서 대중들과 이 글을 읽으며 신심 내어 공부한 것이 엊그제 같다.

■ 100명이 함께하는 발우공양

생전에 ‘기지산 호랑이’라고 불렸던 인홍스님은 자주 이렇게 말씀하셨다.

“스님의 의미하는 승(僧) 자를 해체하여 보아라. 사람인(人) 변에 일찍 증(曾)이니 보통 사람보다 모든 면에서 먼저 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의 제자는 일체중생의 사표가 되어야 한다. 청빈으로 수도 생활의 생명을 삼고, 일체중생을 위하여 기도하며 끝없이 하심하고 봉사해야 한다.:

은사 스님은 음식을 먹는 자세 하나도 엄격하게 가르쳤다. 반드시 대중이 한 방에 모여 발우공양을 했고 이를 어기면 용납하지 않았다. 일이 너무 많아 대중들이 가끔 뒷방에서 상을 차려 놓고 공양을 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날벼락이 떨어졌다.

“승려의 위의(威儀)는 승려 자신이 세워야 하는 법이다. 부처님 제자인 출가자들이 그렇게 세인들처럼 먹어서야 되겠느냐?”

어두운 방에 혼자 있을지라도 큰 손님 앞에 있는 것처럼 생활하라고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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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예불이 끝난 후 절 6백 배 혹은 천 배를 마치면 6시에 가사와 장삼을 수하고 대중법공양(아침 발우공양)이 시작되었다.

죽비 1성에 합장하고 부처님을 생각하는 희발게로 시작하여 발우를 펴면서 하는 전발게, 발우를 거두면서 하는 수발게, 죽비 3성에 법공양을 마치는 순간까지 엄숙하게 진행된다.

은사스님의 호통은 먹는 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계율을 어겼을 때의 엄벌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언젠가 석남사로 출가한 사람에게 속가의 남자가 찾아왔다. 찾아오지 못하게 하라고 한두 번 타일렀으나 남자가 계속 찾아오자 학인의 가사를 벗겨 찢어버리고 속가의 옷을 입혀 쫓아버렸다.

또 한 번은 아침 예불에 나오지 않은 사람을 방으로 찾아가 양동이의 물을 끼얹었던 일도 있었고, 공부하다가 조는 사람을 쫓아내기도 하는 등 숱한 일화가 있다.

아마 석남사만큼 긴 시간 동안 대중공사가 진행되는 곳은 없을 것이다. 대중이 무엇을 잘못하면 예전에 눈여겨보았던 허물 하나하나를 들춰내면서 경책하는 것이다. 걸음걸이 한 번 잘못한 것까지 들춰내는 자리가 대중공사 현장이다. 이러한 혹독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뭇 사람들의 사표인 사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스님의 소신이었다. 은사 스님의 그러한 철저함이 없었더라면 석남사는 비구니계의 모범 사찰로 자리 잡지 못했을 것이다. 이후 석남사는 규율이 엄격하고 일은 고되지만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소문이 퍼져 많은 사람들이 출가하기를 원하는 도량이 되었다.

석남사는 불보(佛寶) 사찰인 통도사가 본찰이다. 은사 스님은 통도사에 머무르시던 큰스님들께도 가르침을 받으며 석남사를 이끄셨다.

은사 스님은 큰스님들을 초청해서 학인들을 공부시켰다. 학인들이 청담스님의 금강경, 운허스님의 능엄경, 향곡스님, 자운스님의 법문, 일타스님의 보살계 법문 등 기라성 같은 큰스님들의 법문을 들으며 정신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던 것도, 후학들을 폭넓게 공부시키려했던 은사 스님의 소신과 철학 때문이었다. 지도자의 뚜렷한 소신이 한 사찰을 공부하는 도량으로 만드는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은사 스님을 통해 배웠다.

젊어서는 어른은 다 그런 줄 알았다. 내가 육십이 넘고 칠십이 넘어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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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 스님의 지도자로서의 면목은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훌륭하셨음을 알겠다. 큰 어른이었다. 그 신심과 원력을 누가 따라간단 말인가?

■ 3천배 수행으로 친구의 불치병을 치유하다

스물다섯일 때인 1964년 3월에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율사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받았다. 통도사 금강계단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단(壇)으로 그곳에서 계를 받는 것은 부처님 앞에서 계율을 지킬 것을 맹세한다는 의미가 있다.

비구니계를 받고 도를 묻기 위해 스승을 찾아 돌아다니는 운수납자(雲水衲子)의 길로 나섰다.

한 곳에 오래 있으면 가족적인 분위기가 되어 정진에 이익이 없다는 생각이 든 어느 날. 새벽 예불을 마친 뒤 걸망을 졌다. 석남사 일주문을 나와 언양까지 30리 길을 걸어 나오니 세상 모든 곳이 정진도량처럼 느껴졌다.

몇 년 동안 대승사 윤필암과 묘적암, 해인사 국일암과 극락전, 지리산 대원사 도솔암 등으 두루 다니며 수행에 전념했다. 자유로운 운수납자의 특권을 마음껏 누린 때였다.

지리산 도솔암에서 혜춘스님, 철마스님, 백졸스님과 함께 수행하고 있을 때다. 도솔암은 묵곡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암자이다. 세속 일은 전생처럼 까마득히 잊었건만 고향 가까운 암자에 있다 보니 한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때부터 아주 친하게 지냈는데 늘 몸이 아픈 친구였다.

“병은 다 나았을까? 어떻게 살고 있을까?”

수소문 끝에 연락을 하고 그를 도솔암으로 불렀다 10년 만의 만남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의학적으로 치료할 수 없는 지병을 앓고 있었다.

그녀를 부른 데는 내심 3천배 기도를 시켜볼 생각이 있었다.

반가움에 손을 잡고 그녀에게 간곡하게 권했다. ‘절을 한 번 해봐요’ 나는 그녀가 절을 하면서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면 아무리 불치의 병이라도 나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런 생각은 출가해 공부하면서 확신한 것인데 여기에는 큰스님의 영향이 컸다. 큰스님께서 신도들에게 3천 배를 처음 시키기 시작한 것은 안정사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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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굴에 계실 때였다. 수많은 불자들이 전국에 소문난 도인을 찾아 천제굴로 왔을 때, 불자들에게 가르침을 베푼 곳이기도 하다. 전쟁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사람들이 찾아와 인생을 물었을 때 큰스님은 불공의 참의미를 가르치셨다.

함께 사는 시자들에게는 신도들을 위해 아무개 잘되게 해달라는 축원을 하지 못하게 했다. 자신의 죄업을 참회하고 수행하는 것으로 불공을 해야지 복을 달라는 것으로 불공을 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셨다. 중생이 본래 부처님을 자각하고 모든 대상을 부처님으로, 부모로, 스승으로 섬기는 것이 참된 불공이라 하셨다.

“죄업이 멸하면 그 자리에서 복이 생기는기라. 그러니 참회 정진으로 복을 구해야지. 무량겁토록 참회해야 한다.”

큰스님은 업장을 참회하여 복과 지혜를 더해가는 것으로 절을 하게 했다. 사미, 사미니들에게도 화두를 받기 전에 반드시 절을 하게 했다. 화두를 받으러 오면 “하루 네 시간 이상 자지 말고 3만 배를 하고 오너라” 하셨다.

법문 노트에 있는 큰스님의 말씀이다.

“수도의 목적은 이타에 있다. 이타심이 없으면 이는 소승외도(小乘外道)이니, 심리적, 물질적으로 항상 남에게 봉사한다. 자기 수도를 위하여 힘이 미치는 대로 남에게 봉사하되 추호의 보수도 받아서는 안 된다.”

천 마디의 말 보다 한 마디의 실행!

실행 없는 헛소리는 천 번 먼 번 해도 소용이 없다. 아는 것이 천하를 덮더라도 실천이 없는 사람은 한 털끝의 가치도 없는 쓸데없는 물건이 되는 것이다. 참으로 아는 사람은 말이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고인을 말하였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나니, 말하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다.”

또 말했다.

“옳은 말 천 마디 하는 것이 아무 말 없는 것만 못하다.”

그러니 오직 실행만 있을 뿐이다.

석남사에서는 무엇을 새로 시작할 때는 3천 배를 하고 시작했다. 아침 공양 끝에 “제가 오늘 무슨 일을 해야 하는데 오늘 3천 배를 하고 시작하겠습니다.” 혹은 “며칠 간 1080배, 3천 배를 하겠습니다.”하고 대중들에게 고한다. 모두에게 고했기 때문에 끝을 내지 않을 수 없고, 한편 그 이야기를 들은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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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들은 마음으로 그 기도를 지켜주게 된다.

출가 초기에 인간에게는 무한한 능력이 있다는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그것을 시험해 보고자 백졸스님과 나는 석남사에서 만 배를 한 적이 있다. 처음 108배를 할 때는 힘들지만 1080배를 하고 나면 108배는 아무 것도 아니다. 3천 배 하는 것이 힘들지만 만 배를 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렇듯 모든 것은 마음의 힘으로 된다. 나는 만 배를 마치면서 인간에게는 퍼내도 퍼내도 다 쓸 수 없는 무한한 능력이 있음을 깨달았다.

내 경험도 경험이지만 큰스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절을 시켜서 병을 낫게 하는 등 기적을 이루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에 그 친구가 생각났을 것이다.

절을 권하는 내게 그 친구는 한번 해보겠다고 하면서 고마워했다. 인적이 드물고 조용한 도솔암은 절을 하기에 안선맞춤인 곳이었다.

“100일 동안 하루 천 배씩 기도해 봐요.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도솔암에서 100일 기도를 마치고 친구는 신심이 나는지 기도를 더 해보겠다고 했다. 나는 안거가 끝나서 그곳을 떠나 다른 절로 공부하러 가야 했기 때문에 친구를 도솔암에서 가까운 응석사로 보냈다.

그곳에서 친구는 100일 동안 하루 3천 배 기도를 했다. 나중에 들으니 기도 중에 온 몸에서 흰 벌레가 거미줄처럼 죽죽 빠져나가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응석사에서 백일기도를 한 후 그녀의 불치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불교가 무엇인지 불보살이 어떤 분인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오직 병을 낫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해서 부처님의 가피(加被)를 입은 것이다. 몇 년 후 석남사에 있을 때 친구가 건강한 모습으로 찾아와서는 “부처님의 가피를 깊이 깨달았습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그 후 그 친구는 결혼 해 미국으로 이민 가서 살고 있다.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발심해서 출가한 분이 여럿 있지만 아마 가장 대표적인 분이 혜춘스님과 철마스님일 것이다. 두 분 모두 자식을 두고 발심 출가 하셨다.

혜춘스님은 함흥여고를 졸업하고 한국 전쟁 때 남쪽으로 내려와 네 자녀를 둔 어머니였다. 당시 시아버지는 충남지사였고, 아버지는 변호사였다.

범어사 대성암에서 정진하실 때 서울대를 졸업한 아들이 찾아와 인사를 드리자 “누구십니까?”하고 물었다고 한다. 당시 부산일보에서는 ‘여성과 그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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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라는 제목으로 이 일을 보도하여 독자들의 가슴을 시리게 했다. 지금 네 남매는 모두 명문대를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다. 스님의 사력을 다한 정진과 기도의 가피로 가까운 인연들이 모두 훌륭하게 성장한 것이다. 혜춘스님은 인홍스님보다 10여 년 정도 아래였으나 돈독한 도반으로 지내셨다.

나의 사형인 철마스님은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마산 성주사로 출가해 뼈를 깎는 노력으로 정진에만 매진하신 분이다. 어린 두 아들에게 새어머니를 얻어주고 출가하여 성주사 멸빈암에서 일주일 동안 먹지도 눕지도 않으며 오직 생사를 건 용맹정진을 하셨다.

철마스님은 발우 한 벌과 좌복 하나로 평생을 수행자답게 사셨다. 기도와 예불에 빠지는 법이 없었고, 평소 낮에 자리 펴고 눕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절대 상대방의 허물을 말하거나 탓하지 않는 인욕보살(忍辱菩薩)이었다.

40년 정진 끝에 석남사 청화당에서 돌아가시자 두 아들과의 인연으로 대웅전 마당과 청화당 앞은 화환으로 가득했다. 스님의 치열하고 수승한 수행의 결실이었다.

■ 절구통 수좌가 졸지 않는 비결

운수납자로 수행하던 시절, 행자의 신분으로 정진했던 태백산 홍제사를 다시 찾았다. 단발머리 행자로 있으면서 졸음을 쫓으려고 눈 속을 거닐고 달빛 서린 눈밭에서 정진했던 곳을 삭발하고 찾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몇몇 스님들이 열심히 정진하고 있는 그곳에서 함께 수행하던 어느 날 백졸스님과 산행을 하던 길에 홍제사 위쪽 산기슭에 있는 사자암에 들렀다. 법전스님이 그곳에 계셨다. 법전스님은 안정사 천제굴에서 큰스님을 은법사로 도림(道林)이라는 법호를 받고 태백산으로 들어와 농사를 지으며 정진하고 계셨다.

산에서 해온 통나무로 벽을 대고 널빤지로 지붕을 덮어 허름한 토굴을 짓고, 사자암이란 이름을 지어 놓으셨다. 이름처럼 마치 사자라도 나올 것처럼 적적하고 깊은 산중이었다.

법전스님이 안정사 천제굴에서 큰스님을 극진히 시봉한 이야기는 지금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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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몸이 약했던 큰스님을 위해 항상 한약을 달여드렸는데 얼마나 정성을 다했는지 언제나 같은 농도 같은 양으로 약을 드시게 했다. 그 후 다른 상좌들의 약 시봉을 받을 대마다 법전수좌 발뒤꿈치만큼이라도 따라가라고 하실 만큼 흡족해 하셨다.

법전스님은 그 이후 도솔암, 백련암 등지에서 농사와 정진을 함께 하며 살다가 김천 수도암에서 15년 동안 머무르셨다. 그곳에서 퇴락한 가람을 중수하고 선원을 열어 후학들을 지도하셨고, 이후 해인사 큰스님 곁으로 오셨다. 큰스님께서 입적하시고 10년 후에 종정 자리에 오르셨으니 한 평생 얼마나 철두철미 정진에만 힘쓰셨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해인사에 돌아오셨을 때 선방에 앉으면, 미동도 하지 않는 법전스님을 두고 대중들은 바위덩어리가 앉아 있는 것 같다고도 했고, 소뿔처럼 단단해 보인다고도 했다. 한 번 놓아두면 움직이지 않는 절구통 같다고 해서 ‘절구통 수좌’라고도 불렀는데 언제인가는 내가 이렇게 여쭤본 적이 있다.

“스님은 어째 그렇게 한 번도 졸지 않으십니까?”

법전스님께서는 예의 특유한 화법으로 짧게 대답하셨다.

“적게 먹어요.”

일주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하는 해인사 전통의 용맹정진 때도 유일하게 졸지 않는 사람이 법전스님이었다고 한다. 해인사에 사시는 수십 년 동안 선방에서 법전스님이 조는 모습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함께 정진해 본 수좌들의 이야기다.

“화두 떨어지면 죽는다고 생각하면 졸 수 있는가?”

졸지 않는 비결을 묻는 후학들에게 들려준 말씀이라고 한다.

나는 지금도 일 년에 몇 차례 퇴설당으로 스님을 찾아뵙고 안부를 여쭙는다. 건강에도 어찌나 철두철미한지 세수 아흔이 가까운데도 정정하시다. 지금도 항상 제 시간에 108배를 하시고, 공양하는 시간, 산책하는 시간에 일분 일 초도 틀림이 없으시다.

■ 어머니, 일휴(一休)스님이 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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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엄마는 모두 바보다!’

나의 어머니를 보고 느낀 생각이다. 3년 만에 도를 깨치고 돌아오겠다던 나의 말을 믿고 기다리던 어머니는 10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딸을 찾아 석남사로 오셨다. 출가를 하고 부터는 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않았는데, 어머니도 내심 짐작은 하셨을 것이다. 어머니는 겉으로는 얌전해 보여도 자존심이 강하고 머리도 명석한 분이셨다.

당시 어머니는 시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홀로 고향집을 지키면서 혹시나 딸이 돌아올까 하는 기대만으로 기다리고 있었으니 비련의 여인이 따로 없었다. 사십 대에 딸을 절로 보내고 오십 대 후반에 이른 어머니에게는 벌써 노년의 체취가 묻어났다. 소쩍새처럼 그리움을 노래해도 받아줄 사람 하나 없던 세월이 너무나 쓸쓸했을 나의 어머니, 그러나 나는 10년 만에 찾아온 어머니를 지나가는 행인보다 더 무심히 대했다.

“세속은 윤회의 길이요, 출가는 해탈의 길이니 해탈을 위하여 세속을 단연히 끊어버려야 한다.”

생명처럼 지니고 다닌 법문 노트의 말씀이 삶 자체가 되어 있을 때이니 이미 혈육관계를 떠나 있었다. 출가 전에도 내게 모든 것을 걸고 의지하며 사는 어머니를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면 이렇게 잡으려고 애쓸까’ 하면서도 곁을 주지 않았는데, 출가해서는 오죽했겠는가. 내가 냉정하게 대하자 어머니는 “독사보다 더 지독하다”고 하시곤 발길을 돌리셨다.

어머니도 출가할 인연이었을 것이다. 다시 석남사를 찾았다가 은사스님의 윤회와 인과에 대한 법문을 듣고는 출가를 결심했다.

그때는 은사 스님의 어머니인 백월 노스님도 출가하셔서 석남사에 계실 무렵이었다.

쉰일곱이던 1965년 봄, 어머니는 석남사에서 정자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셨다. 은사스님의 은사이셨던 정자스님은 이미 돌아가신 분이었는데, 이처럼 돌아가신 분을 은사로 삼아 계를 받는 것을 ‘위패 상좌’라고 한다. 그렇게 어머니는 은사 스님과는 사형사제 관계가 되었고 나에게는 사숙님이 되었다. 자운스님으로부터 일휴(一休)라는 법명을 받고 수계를 받은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일휴스님으로 사셨다.

어머니에게 계를 주신 자운스님은 성철 큰스님과는 돈독한 도반이었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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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의 계사이기도 했으니 나는 자운스님과 인연이 싶은 셈이다.

또한 비구니계에 끼친 자운스님의 은혜는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큰데 특히 이부승수계식 확립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당시는 동남아 불교는 물론 티베트 불교에서도 비구니 수계제도가 확립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세계 여성 불교사적으로 획기적인 일이었다.

일휴스님은 출가해서도 나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고 당신보다 나를 더 아끼는 모습을 보이셨다.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다 그럴 테니 일휴스님이라고 다르겠는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어머니라는 존재구나 싶었다. 며칠째 비가 계속 내리던 하안거 중 심검당에서 정진하던 어느 날이었다. 아침 일찍 일휴스님의 시자가 찾아와 일휴스님이 급히 찾는다고 해서 갔더니 조용히 말씀하셨다.

“오늘은 내가 갈란다.”

노인의 말씀이지만 몇 번 되풀이하셨던 터라, 다른 스님들과 함께 두어 시간 동안 즐겁게 이야기하며 놀아드렸다. 마침 그날이 중복이었다. 중복에 석남사 스님들은 옥류동 계곡에서 물맞이(목욕)를 하고 찰 떡국을 하거나 감자전을 구워 먹으며 더위를 식힌다.

다른 스님들이 옥류동을 나간 사이에도 백졸스님과 나는 일휴스님 곁을 지켰다.

백졸스님과 늦게 옥류동에 올라가 대중 스님들과 저녁을 먹고 바위 위에서 쉬고 있는데 시자가 달려왔다. ‘가셨구나’ 하는 느낌을 받으면서 서둘러 내려와 보니, 저녁 공양에 찰 떡국 한 술 잡수시고 두 술째 뜨다가 그대로 앉아 숨을 거두셨다고 한다. 출가하신지 16년째 되던 해 음력 6월6일 이었다.

사흘 후 장작더미에 불이 훨훨 타고 육신은 한 줌 재가 되었다. 다시 그 재를 동서남북으로 뿌리니 사람의 한 생이 허무하였다.

“허망한 세상의 영화에도 끄달리지 않고 오직 생사해탈의 영원한 열반의 세계로 드옵소서” 하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나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본디 허망한 것이 인생인데 슬픔으로 생사해탈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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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수행 - 영원한 대자유인의 길을 찾아서

■ 10년의 침묵을 깨고 사자후를 토하시다

아마 석남사 대중만큼 성철 큰스님에게 박대를 받고 쫓겨난 대중은 드물 것이다. 큰스님께서 1955년부터 10여 년 동안 성전암에 칩거하여 철조망을 두르고 계실 때 석남사 대중들은 안거가 끝나기 전날 큰스님의 법문을 듣기 위해 운문재를 넘곤 했다.

교통편도 마땅치 않을 때여서 몇 시간씩 걷는 것은 기본이었다. 가는 도중에 도시락을 싸고 떡을 해서 걸망에 넣고 운문재를 넘었다. 버스를 타고 대구에서 내려 성전암까지 걸어가면 저녁나절이 되었다. 철통같이 둘러쳐진 철조망에 구멍을 내어 겨우 들어가서 숨소리를 죽이고 큰방에 앉아 있으면 큰스님이 나오셔서는 주장자로 내쫓으셨다.

물 한 모금 얻어먹지 못하고 쫓겨난 생각은 잊어버리고, 안거가 끝나면 또 우리들은 네 시간 동안 걷고 걸어서 운문재를 넘었다.

대구에서 30리를 걸어 성전암에 도착하면 다시 쫓겨나는 일을 10년 동안 반복했고, 그것은 어느새 석남사의 전통처럼 되어버렸다.

그렇게 쫓겨나도 은사스님은 법문을 들으러 가는 일을 한 번도 멈추지 않으셨다. 한 번 믿은 스승이었기에 일편단심 신심으로 제자들을 이끌고 찾아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큰스님의 서릿발 같은 주장자는 신명을 바쳐 스스로 공부하라는 자비의 현현이었다.

눈보라 속에서 신발이 없어도 발 시린 것도 모르고 한 마디라도 더 듣고 발심해서 공부하려 했던 우리들에게, 김용사와 해인사에서 큰스님께서 토하신 우레와 같은 사자후는 영혼을 적셔주는 무량설법이었다.

큰스님이 팔공산 파계사 성전암에서 10년간의 동구불출을 마친 것이 1965년이다. 그해 여름 큰스님은 경북 문경의 김용사로 옮겨서 하안거를 지내셨고, 같은 해 겨울 동안거 기간에 대중을 향해 사자후를 토하셨다. 큰스님의 초전법륜(初轉法輪)이었다.

은사스님은 석남사 소임자 몇 사람만 절을 지키라 하고 대중 모두에게 법회에 참석할 것을 명하셨다. 우리는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점촌까지 온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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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리 길을 걸어서 김용사에 도착했고 양진암과 대성암에서 20일간 머물면서 큰스님의 사자후를 들었다.

나중에 ‘운달산 법회’로 알려진 이 대중 법회는 큰스님의 존재를 광범위한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엄격한 수행과 괄괄한 기백으로 소문나 있던 큰스님의 논리정연하고 해박한 법문은 스님들뿐 아니라 재가불자와 학자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을 주면서 대단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큰스님은 운달산 법회를 마친 뒤 자운스님의 권유로 1966년 해인사 백련암으로 옮겨와 동안거를 지내셨다.

1967년 해인총림 방장에 취임한 큰스님은 동안거를 맞아 100일에 걸친 법문을 시작했다. 매일 두 시간에 걸친 설법을 통해 불교 전반에 걸쳐 두루 설명하셨는데, 큰스님의 불교철학, 선사상이 총정리 된 불교 교리서 ‘백일법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큰스님의 백일법문이 늘 새롭게 읽히는 것은 동서고금을 오가는 해박한 지식과 적절한 비유가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노자, 공자, 맹자, 장자 등 동양사상의 대가들 이야기에서부터 서양물리학과 수학에 이르기까지 인용이 매우 다양하며 일관성이 있다. 그리고 그런 인용들은 경전의 가르침과 연결되어 궁극적으로는 불교적으로 해석된다.

후일 ‘백일법문’은 책으로 출간 돼 사람들에게 수행의 길잡이가 되었고 영문으로도 번역되었다. 많은 스님들이 이 ‘백일법문’을 교과서로 삼아 법문을 한다고 들었고, 녹음된 법문을 정리하여 책으로 펴낸 원택스님은 대중들이 ‘유익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인사를 여러 차례 받았다고 한다. 큰스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이 책이 다시 주목받고 있으니 이는 큰스님의 법신이 현존하고 있음일 것이다.

30대 초반 시절 나의 공부를 도탑게 해주었던 김용사 법회와 해인사 백일 법문은 내 심층 저곳에 저장되어, 세세생생 수행을 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 사력을 다한 심검당 3년 결사

해인사에서 우레와 같은 백일법문을 들은 지 1년 만에 석남사에서 3년 결사가 시작되었다. 결사란 정기적인 수행인 안거와는 달라 어떤 목적을 이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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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까지 오랜 기간 수행하며 정진하는 것을 말한다.

“스스로 공부해야지 무슨 법문을 듣는다고 찾아옵니까? 석남사도 인자 웬만큼 정리되었으니까 3년 결사 한 번 해보시오.”

비바람 새는 석남사 법당을 정리하고 선방을 열어 대중과 함께 정진한 지 10여 년이 흘렀을 때 큰스님이 대중들과 함께 법문을 듣기 위해 찾아간 은사스님에게 하신 말씀이다.

큰스님은 석남사 누각인 침계루(枕溪樓)와 선방인 심검당(尋劒堂)을 지었을 때도 손수 이름을 지어주셨다.

1969년 음력 10월 15일, 몇 해 전 새로 단장한 심검당에서 동안거와 함께 3년 결사가 시작되었다. 내 나이 서른 셋, 출가한 지 13년이 되었을 때였다. 결사 대중은 은사스님을 비롯해 모두 열세 명이었다.

결사를 시작하는 대중들에게 성철 큰스님은 다음과 같이 법문하셨다.

“사력을 다한 노력으로 열심히 공부하라. 그렇지 않고 방일(放逸)하면 미래겁이 다하여도 공부는 성취하지 못한다. 정진은 일상과 몽중, 숙면에 일여가 되어야 한다. 잠시라도 화두가 끊어짐이 있어서는 안 된다.”

큰스님은 결사 대중들에게 결사 기간 동안 지켜야 할 수좌 5계를 주셨다.

하루 네 시간 이상 자지 않는다.

벙어리처럼 지내며 잡담하지 않는다.

문맹같이 일체 문자를 보지 않는다.

포식, 간식을 하지 않는다.

적당한 노동을 한다.

우리는 빈틈없이 이 규칙을 지키며 하루 3천 배와 능엄주 한 편을 독송하고, 공양하는 시간 외에는 좌복을 떠나지 않았다. 성인은 모든 고통을 이겨내고 자기 육신을 이긴 사람이다. 고행이 있는 곳에 정법이 있고 고행으로 천대 생활을 하는 것이 수행자의 근본 생활 아닌가.

이순을 넘긴 은사스님이 머무르는 조실방에는 “누워 편안할 때 지옥고 받는 중생을 생각하라‘는 글귀가 붙어 있었다. 자신의 수행에 대한 엄격한 매질이었으며 한시도 놓을 수 없는 화두일념을 향한 경책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석남사 대중들은 다 벙어리인가’ 할 만큼 말이 없던 도량이 결사로 인해 더 조용해졌다. 새벽 3시에 일어나 3백 배 절과 능엄주 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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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시작해서 5시에 방선을 하면 함께 선체조를 했고, 아침 공양 시간에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석남사 큰 방인 강선당까지 호롱불을 들고 내려가 다른 대중들과 함께 발우 공양을 했다.

나중에 들으니 공양주 한 사람은 공양하고 대중들이 심검당으로 올라갈 때면 부엌문을 열고 그 모습을 향해 합장하곤 했다고 한다. 후학들에게는 심검당이 언젠가는 저렇게 공부해 보리라 발심하게 하는 곳이 되었다.

결사가 끝날 무렵 마지막 100일을 앞두고 결사 대중 모두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용맹정진은 24시간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100일 동안 눕지 않고, 기대지 않으며 잠시라도 화두에 끊어짐이 있어서는 안 된다. 노력하고 또 노력하라. 노력 없는 성공은 없다.”

큰스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결사 대중들은 화두 하나만 생각했다. 용맹정진은 화두와 내가 하나가 되어서 듣고 보는 것조차 없어야 한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피를 말리며 정진했던 시간들이다.

이불은 물론이고 잠깐이라도 등을 대면 자기도 모르게 잠들 수 있는 의자마저 다락으로 치워버렸다. 하루 3백 배 절을 하는 것조차 생략하고 공양 시간과 양치질 하는 시간 외에는 오로지 정진이었다.

100일 동안 묵언을 하면서 단 한 순간도 눕지 않고 정진한다는 것은 진정 죽을 각오로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도 그때 함께 애를 쓰셨던 스님들이 생각난다. 이렇듯 나이가 들어보니 그때 그분들이 얼마나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셨는지 알겠다.

은사스님이 돌아가시고 스님의 서고를 정리하다가 큰스님의 친필 편지를 발견했다. 우리도 처음 보는 편지였는데 날짜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 언제 무슨 일로 받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3년 결사 즈음에 받으신 것이 아닌가 싶어 여기에 기록해 둔다.

현세는 잠깐이요 미래는 영원하다.

잠깐인 현세의 환몽에 사로잡혀

미래의 영원한 행복을 잃게 되면

이보다 더 애통한 일은 없다.

만사를 다 버리고 오직 정진에만 힘쓸지어다.

화두를 깨치면 미래겁이 다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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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자재한 대 행복을 얻나니라

깨치지 못하고 무한히 연속되는 생사고를 받을 적에

후회한들 무슨 소용 있으리오.

신명을 돌보지 말고 부지런히 참구하라.

■ 용맹정진, 의자에 기대서도 안 된다

이불도 의자도 없이 100일 동안 서서 살다시피 하며 행선을 하다 보니, 피곤하면 눈에서 잠이 오는 것이 아니라 다리가 졸리는 느낌이었다.

“성인들은 다 자기 육신을 이긴 사람들이다!”

서서 살다시피 한 후회 없는 정진이 있었기에 큰스님께서 자주 하셨던 저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다. 죽을 힘을 다해 애쓰지 않으면 천 년이 가도 자기 공부를 이룰 수 없다. ‘노력이 없는 성공은 없다’란 말은 만고의 진리다.

3년 결사를 끝낸 1972년 봄, 심검당에 두 그루의 보리수를 심었다. 그 중 한 그루가 40여 년이 지난 지금 크고 무성하게 자라 봄이면 꽃향기가 가득하고 여름이면 더위를 식혀준다. 가을에는 열매가 영글어 보리수 염주로 스님네를 반긴다.

■ 화합을 위한 소임살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감사해야 행복하다. 인생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는 마음 한가운데 감사라는 밑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으면 불행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마음이 물결처럼 출렁이며 불안할 때 가만히 마음의 흐름을 살펴보면 감사하는 마음이 적거나 감사함을 잊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좋은 일에만 감사하지 말고 힘든 일, 고통스러운 일에도 감사해야 지혜로운 사람이다. 번뇌 속에서 깨달음을 이룬다. 힘든 가운데 사람이 성숙하고 발전하기 때문에 오히려 고통스러운 일을 감사해야 한다. 누가 뭐라 해도 감사해버리고 나면 일체 시비가 붙을 것이 없다. 세상일이 다 이 시비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처음 절에 간다고 했을 때 큰스님께서는 ‘항상 대중속에서 감사하고 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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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하시며 모든 일에 감사하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게 하는 글을 주셨다.

실상은 때가 없어 항상 청정하니

귀하거나 천하거나 늙었거나 젊었거나

어린아이거나 다 부처님 같이 섬기되

아주 나쁜 사람을 지극히 존경하고

원한이 깊은 원수를 깊이 사랑하고 또 보호하라.

나를 헐뜯고 욕되게 하는 것은 참 법문이요.

침해하는 것은 큰 불사니

말없이 항상 기쁜 마음으로

모든 일에 감사하라.

감사하는 마음을 주력(呪力, 진언)처럼 외우고 다니라는 뜻에서 우리는 이글을 감사 주력이라고 불렀고 대중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감사하는 생각을 진언처럼 외웠다.

“감사하는 생활을 수행자의 일상처럼 해야 한다. 감사해야 대중이 화합해서 잘 살게 된다.”

큰스님의 가르침처럼 많게는 몇 백 명에서 적게는 몇 십 명까지 많은 대중들이 모여 사는 도량에서 화합이 되지 않으면 발전이 있을 수 없다.

주지 등 행정직은 꿈에도 생각지 않고 공부만 하는 못난 중으로 살겠다는 다짐을 하며 살아왔지만 출가한 지 20여 년쯤 되었을 무렵 석남사 총무 소임을 맡았다. 절에서 총무는 주지를 대행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대중과 함께 하는 단체 생활에서 화합은 전체 규율을 지켜야 하는 승가의 필수 덕목이다. 그러므로 소임을 맡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절 안에서 행자와 학인들의 교육을 책임지는 교무 소임을 거쳐 총무 살림을 했다.

정진과 소임은 둘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1년 동안 최선을 다했다. 주지 살림을 살아야 하는 은사스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석남사 불사가 한창인 때라 정말 힘든 기간이기도 했다.

한참 불사를 돕고 있던 어느 날, 스님께서 함께 외출을 하자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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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있던 이후락 씨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석남사가 있는 울산이 이후락 씨의 고향이었으며 그의 부인이 가끔 석남사를 찾는 인연이 있었다. 그때까지는 십시일반 신도님들의 보시로 불사를 해왔고, 어느 개인을 찾아가 부탁하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이어서 발걸음이 무거웠을 것이다.

이후락씨의 집에 도착하니 만나기로 한 그의 부인이 부재중이었다. 조용하 앉아 기다리는 스님의 모습에서 지도자로서의 고뇌가 느껴졌다. 한 시간이 지나자 그의 부인이 나타났다. 기다리시게 해서 미안하다는 부인에게 은사 스님이 호통을 치셨다.

“어디 이렇게 신도가 스님을 기다리게 합니까?”

한참이나 야단을 치는 모습이 대중공사에서 제자인 우리들을 야단치시는 모습처럼 당당했다. 찾아간 일을 전하고 돌아오는데 그의 부인이 미안하다고 하면서 비행기 표를 예약해 주셨다.

얼마 후 이후락 씨를 두 번째 만나던 날도 스님을 모시고 갔는데, 집무실에서 그를 만나고 나온 스님이 돌아오는 길에 말씀하셨다.

“무엇을 도와주었으면 좋겠느냐고 묻길래 경전 번역하는 일을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온 대중이 나와서 일을 하고 있고, 일하는 사람들의 노임을 제때 주지 못해 소임자가 자리를 피하는 일이 있을 만큼 어려운 시기였기에 당연히 불사 이야기를 하셨을 줄 알았다.

“기왕 하는 부탁인데 더 중요한 일을 말해야 할 것 같아서 그랬다. 석남사 불사야 부처님 일인데 어떻게든 되지 않겠느냐?”

그후 이후락씨는 역경 사업을 범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하도록 도와주었다. 문교부에서 역경 사업에 국고를 지원하는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고, 역경원이 34년 동안 대장경 번역 작업을 계속해서 2000년 9월 드디어 한글 대장경 전 318권을 완간했다. 당시 조계종 종정이던 효봉스님은 은사스님에게 표창장을 수여하면서 ‘참으로 출격장부(出格丈夫 격식에서 해탈하여 어디에도 얽매임이 없는 사람)다’ 라고 하셨다.

돈을 얻으러 갔어도 굽히지 않고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심보다 대의와 공심이 앞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대의와 공심을 배우려 노력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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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오면서 작게나마 그런 가르침들이 풀려나왔다고 생각한다. 어느 스승을 만나 무엇을 배우고 실천하느냐가 그렇게 중요한 것 같다.

일을 다 마친 후, 소임을 물려주고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운수납자의 길을 떠나기 위해 걸망을 꾸렸다. 스님네의 사계절에 걸망 하나 말고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사람은 무장해제 되었을 때 참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은사스님께서 대한불교조계종 종회의원을 역임하실 때의 일이다. 종회 회원이신 천성산 내원사 주지 수옥스님, 지리산 대원사 주지 법일스님, 석남사 주지 은사스님 이렇게 세 분이 내원사에서 만나 이른 아침부터 종회 일로 한양 길을 떠나셨다.

내원사 길은 소금강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산길이고, 길게 뻗은 계곡으로 흐르는 물은 내원사의 자랑이다. 그런데 인적 드문 산길에서 세 분이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시자로 뒤를 따라가던 나는 ‘저분들은 내가 있는 것도 모르나봐’ 하면서 미소 짓고 있는데 갑자기 은사스님이 “내가 대장이다”하시면서 “5분간 돌아가면서 대장이 돼라”고 명령을 하셨다. 대장의 명령대로 법문을 하라고 하면 법문을 하고, 노래를 하라고 하면 노래를 해야 하는 대장놀이가 시작되었다.

5분 동안 세 분의 장기가 다 나왔다. 세 분이 돌아가면서 시도 읊고 노래도 하고 법문을 하는 모습은 평상시에는 볼 수 없었던 동심의 세계 그대로였다.

*수옥스님 : 비구니계 3대 강백 중 한 분, 천성산 내원사를 크게 일으킴. 조 계종 종회의원. 학식과 덕을 겸비함

* 법일스님 : 일제강점기 은행원 출신으로 출가. 한국 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원사를 일으켜 세움. 조계종 종회의원

제7장 해인사 - 지혜와 자비의 도량에서 -

■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큰스님의 편지

심검당 3년 결사가 끝난 해(1972년)부터 시작해서 2-3년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석남사로 출가했다. 그 즈음인 서른 여섯에 첫 상좌를 받은 나는 20여 년 동안 스물네 명의 상좌가 생겼고, 상좌의 상좌인 손상좌까지 합쳐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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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덧 70여 명의 권속을 거느리게 되었다. 대부분의 상좌들이 성철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발심 출가했다. 큰스님의 법이 퍼져나갈 때 상좌들이 몰려온 셈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어떻게 하면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그렇게 출가들을 할까요?”

대답은 간단하다. 선근(善根)이 있어야 한다. 좋은 과보를 받을 만한 선근이 먼 생으로부터 있었기에 자기 길을 찾고 돌아설 수 있는 것이다. 중 노릇은 억지로는 안 된다. 오리는 물에서 살아야 하고 꿩은 산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처럼 먼 생으로부터 익혀온 업에 따라 자기 길을 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출가하라’는 소리를 잘 하지 않는다. 스스로 발심해야 그간 살아오던 환경을 버릴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이것이 진발심(眞發心)이다.

나는 상좌가 들어오면 불명을 받을 때와 삭발을 할 때 3천 배를 하게 하고 큰스님의 지도 아래 공부하게 했다.

그간 절을 짓는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않고 있었는데 상좌들이 많이 생기다보니 함께 공부할 곳이 마땅치 않아 해인사에 금강굴을 짓게 되었다. 해인사에서 소임을 보고 있던 천제스님과 의논해 금강굴을 짓고 난 후 큰스님이 아실까 두려워 3년 동안 인사를 드리지 못했다. 못난 중으로 숨어서 공부만 하겠다는 약속에 상반되는 일을 했기 때문에 갈 수가 없었다

금강굴을 짓고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큰스님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호되게 꾸짖는 경책의 편지를 받은 것이다.

금생에 마음을 밝히지 못하면

한 방울 물도 소화하기 어려우니라.

공부에 손해되는 일은 일체 하지 않아야 한다.

만사가 인연따라 되는 것이니

모든 일은 인연에 맡겨두고

쓸데없는 신경은 필요 없다.

나와 남을 위한 일 착하다 해도

모두 생사윤회의 원인이 되나니

원컨대 소나무 바람 칡넝쿨 달빛 아래에

샘이 없는 조사선을 깊이 관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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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사 수행의 가풍은 그대로 금강굴로 이어졌다. 금강굴에서는 행자가 들어오면 하루 3천 배 기도를 100일 동안 하게 한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출가 공부하겠다는 신심의 입지를 세워주기 위해서다.

“금강굴에 오는 사람은 자질을 본다지요?” 하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사람을 차별해서가 아니다. 부처님의 제자는 천상천하에 제일가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어찌 자질을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뚜렷한 목표의식을 보는 것이다. 목표 없이 그저 막연하게 청빈한 삶이 수도생활이라 생각하고 시작하면 백이면 백 중도에서 무너지고 만다.

100일 기도를 회향한 행자들은 그 힘으로 절집 생활을 자연스럽게 익힌다. 처음에는 비질도 못해 허둥대지만 절 안의 소소한 일들을 익히며 세속의 습관을 떨쳐내고 가장 아랫사람의 위치에서 자신을 낮추면서 청복(淸福)을 쌓는다. 그동안 익은 습관을 하루아침에 떨쳐내고 절집 생활에 적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3천 배 백일기도를 회향한 힘으로 이겨내는 것이다.

* 금강굴의 생활

03시 새벽예불 - 능엄경 독송 - 각자 일과로 하는 절 - 06시 아침 공양 - 07시 큰방에서 입선 - 10시 사시예불(巳時禮佛) - 13시 큰방 입선 - 운력 등... - 17시 저녁공양 19시 저녁 예불 후 각자의 시간 - 21시 소등

금강굴의 생활은 자급자족이다. 봄에는 대중 스님들이 밭에 나가 감자와 콩 등 채소를 심고 여름에는 풀을 뽑는다. 하안거가 끝날 무렵이면 무, 배추 등 가을 김장 채소를 심는다. 가을밭에서 자라는 배추와 무는 꽃밭의 꽃보다 아름답다.

스승의 역할이 어렵지 않느냐고 묻는데 내가 키우는 게 아니고 스스로 열심히 걸어가니까 그들 때문에 힘든 것은 없다. 나는 제자들에게 간간히 말한다.

“네 스스로 걸어가라.”

절집은 대장간 같은 곳이다. 수천 도의 뜨거운 불길로 철을 녹이는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 단단한 수행자로 거듭나는 곳이다.

■ 출가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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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덮고도 남는 복이 있어야 출가의 길을 걸을 수 있다고 한다. 살아보니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니다. 미국에 다니러 갔을 때 길 안내를 하던 사람이 곁에 있던 자신의 형수에게 “형수요, 저 스님 와 출가했는지 물어봐주소!” 했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대답했다.

“나 자신을 너무나 사랑해서, 귀히 여겨서 출가했다고 전하세요.”

우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주인공인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출가할 수 없다. 영원한 자유를 성취하는 것이 나를 가장 귀히 여기는 길이라고 생각했기에 이 길을 선택했고, 한평생 일말의 후회도 없이 살아왔다.

출가자들은 생사해탈 영원한 대자유를 그리며 그야말로 청운의 꿈을 안은채 집을 나온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집을 나오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자신의 의지를 확고히 하고 왔어도 집에서 부모들 ,특히 어머니들이 자식을 데려가겠다고 야단을 떠는 경우가 종종 있다.

봉은사 다래헌에 계시던 법정스님이 출가하고 싶다고 찾아온 한 여교사를 “석남사에 가면 불필스님이 계시니 그리로 찾아가라”하면서 내게로 보내신 적이 있다. 살펴보니 출가에 대한 의욕도 있고 성정이 맑은데다 자신감까지 있어보였다. 살아온 과정 이야기를 듣고는 ‘중노릇 잘 하겠구니’ 싶어 행자로 받아들였다.

100일 정도 6백 배를 시키며 데리고 있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찾아와서는 높은 목소리로 딸을 데려가겠다고 했다.

“여기는 수행하는 곳이니 큰 소리 내지 말고 당신 딸만 데려가세요. 내가 불러서 온 게 아니고 스스로 알아서 왔으니 조용히 데리고 가세요.”

내가 순순히 나오자 좀 놀랐던 모양이다. 워낙 딸의 출가를 반대해서 법정스님도 두 손을 든 사람인데 안 된다고 떠들어봐야 소용없을 것 같았다. 절 집에 인연이 있으면 누가 뭐래도 있게 되는 것이다. 가는 사람 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분은 지극히 배타적인 종교관을 갖고 있었는데 돌아갈 때는 결국 목에 염주를 걸고 불교에 귀의했다.

한 번은 점잖게 생긴 할아버지 한 분이 금강굴을 찾아오셔서는 손녀딸을 내 놓으라고 한 적이 있었다.

“내 놓지 않으면 국보위에 유괴죄로 고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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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위에 물어보지 마시고 손녀한테 먼저 물어보세요. 그리고 설득해서 데려가세요.”

물론 손녀는 산을 내려가지 않겠다고 했고 할아버지는 그대로 돌아가셨다.

“너 국보위에 끌려가지 않으려면 수행 잘해라.”

할아버지의 국보위 발언 때문에 상좌와 함께 한참을 웃었다.

그런가 하면 기품있게 출가를 잘 받아들여준 부모도 있다. 소아과 의사로 인술을 펼치다가 출가한 선호의 아버지는 대학병원 의사이자 교수였는데, 내가 본 부모 중에서 가장 신사다운 분이셨다. 의사인 딸이 출가하자 찾아와서는 “하고 싶은 의대 공부도 했고, 졸업해서는 의사 노릇도 해봤고, 이제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을 찾아가겠다고 하니 밀어주고 싶습니다. 부모로서 할 일은 다한 것 같습니다” 라고 하셨다.

부모가 자식의 출가를 환영하며 직접 데리고 와서 출가시킨 경우도 있다. 상좌 지광은 딸의 출가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부모님이 직접 나에게 데리고 왔다. 지광의 아버지는 창원의 한 고등학교 이사장이었는데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발심해 딸의 출가를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지광의 남동생도 출가 했으니, 아들 딸 모두 부처님의 제자가 된 것이다. 지광의 고모, 외삼촌, 이모도 출가해서 한 집안에 스님이 다섯 명이나 나왔으니 집안 자체가 절집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대란과 대성은 친구 사이로 큰스님 앞에서 함께 출가한 경우다. 그들은 부산여중고와 성균관대 동창으로 대안은 나의 상좌, 대성은 법용스님의 상좌가 되었다. 외동딸을 데리고 모녀가 함께 출가한 경우도 있다. 내 첫 상좌 도륭네의 경우는 세 자매가 출가했다.

어느덧 나도 큰스님이 내게 해주셨던 말을 그대로 하고 있다. “초심을 잃지 말고 죽을 때까지 열심히 정진해라. 이 공부는 숨어 사는 공부다. 얼굴 내놓고 살려면 세간에 있지 왜 산중에 들어왔나. 절대 나서지 마라.”

지금 보면 나의 상좌들은 모두 바보 같다. 항상 남한테 지고 산다. 어떤 때는 내가 잘못 가르쳤나 하는 생각도 든다. 강원이나 다른 곳에서는 조금 바보스럽다 싶으면 “금강굴 출신인가?” 하고 묻는다고 한다. 휩쓸리지 않고 규율에 맞추어 살다 보니 너무 보수적이고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나 보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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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출가자는 수행 없이는 당당할 수 없으니 현실 앞에서는 답답해도 정진은 잘하는 수행자가 되게 하고 싶다.

■ 절하다 죽는 사람은 없다

나를 보고 절을 시키는 선수라고 하는 분들이 더러 있다. 남녀노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나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에게 절 수행을 권하다 보니 그런 소리를 듣는 듯하다.

신심과 원력을 바탕으로 수행해야 수승한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내가 무한한 능력을 가진 부처님을 믿는 마음을 신심이라 한다. 그리고 수행을 해서 얻어진 그 힘으로 일체중생을 이롭게 해야 되겠다는 서원을 원력이라 한다. 절 수행도 이 두 가지 신심과 원력을 가지고 해야 수승한 지혜를 얻을 수 있고, 지혜를 얻어야 그것을 삶에 응용해서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다.

큰스님께서 신도들에게 절을 처음 시킨 곳은 1950년대 초반 안정사 천제굴이다. 그 후로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절은 백련암의 수행 가풍이 되었고, 큰스님께서 돌아가신 지 20년이 지난 지금가지 백련암에는 3천 배, 만 배 등 절 수행하는 사람들의 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절하다가 죽은 사람 없다. 누구든 참회의 절을 해야 한다.”

큰스님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들은 말이다. 큰스님께서는 절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체중생을 위해 참회하라고 하셨다.

기도 가운데 제일 큰 기도가 절이다. 절을 해보면 밑바닥부터 낱낱이 자기가 지은 허물이 드러나 참회가 안 될 수 없다. 그리고 무릎과 머리와 마음이 땅에 닿으면 무한한 힘과 지혜가 생긴다. 108배, 1080배, 3천 배, 만 배 모두 고비가 있다. 스님네 다리라고 쇠다리가 아니다. 나와의 약속이고 부처님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이겨내는 것이다. 만 배를 해보면 3천 배는 그냥 지나가고 7천 배쯤에서 죽겠다는 소리가 나온다. 그래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골인 지점에 와 있다.

큰스님의 말씀이다. 모든 죄악과 실패는 게으름으로부터 비롯된다. 해야지 할 때 바로 하고, 일어나야지 할 때 바로 일어나야 한다. 모든 일은 미루지 않으면 순조롭다. ‘오늘은 쉬고 내일 하지’ 하면 그것은 자신한테 지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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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것만 다스리면 3천 배고 만 배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자신으로부터 이루어진다. 내가 마음먹고 실천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3천 배, 만 배를 하고 나면 자신감이 생기고, 거기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가피가 생긴다.

큰스님은 처음 3천 배를 시킬 때 움직이지 않고 선 자리에서 단번에 3천 배를 하게 하셨다. 물을 마시거나 앉아서 쉬거나 화장실에 가는 등의 일은 일체 하지 못한 채 절을 하게 했다. 그만큼 정성을 들여 집중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 가족이 함께 하는 기도

많은 어머니들이 자식을 위해 기도한다. 입시철이 되면 절하는 사람이 더 늘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부모와 자식의 인연은 천생만생의 인연 속에서 부모도 되고 자식도 되었으니, 큰 바닷물보다 많은 어머니의 젖을 먹었고 태산보다 높은 뼈를 버렸다. 그만큼 자식과 부모간의 인연은 지중하다.

돈을 들여 과외를 시킨다고 부모 노릇을 다 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돈주머니 역할만 하면 아이들은 갈지자로 걸으면서 살게 된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이 본능적으로 빛을 향하는 것처럼, 부모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따라 하게 된다. 부모를 따라 절을 한 아이들은 심성이 저절로 반듯해서 빗나가기 쉬운 사춘기도 수월하게 넘기고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할 일도 적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부모를 믿으니까 잘 이끌어주기만 하면 된다. 많이 말하지 말고 하루 한 마디씩만 하는 게 좋다. 자식의 눈빛만 보아도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회초리와 칭찬을 균형있게 주어야 지혜로운 부모가 된다.

자식에게 부모는 영원한 선생님이다. 낮은 곳으로 흘러 흘러서 만물을 이롭게 하는 물처럼, 부모는 낮은 곳에 서야 한다. ‘네가 잘 성장해서 남을 이롭게 하는 사람이 되거라’ 하고 기도해야 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지극정성으로 기도해서 만들어보든가 욕심을 버리든가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절대가 아닌 상대로 보면 결국 욕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자식을 대할 때 ‘우리집 부처님’하라. 부처로 보면 섬기게 되니 꾸짖을 수 있겠는가. ‘너는 왜 그러니?’ 할 때는 ‘그런 나는?’ 하고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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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돌아봐야 한다. 반성해야 할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그리고 자식이 무사한 것에 대해 삼사해야 한다. 억지로라도 감사하게 되면 나중에는 자연히 감사하게 된다.

큰스님께서는 “사람 사람이 금덩어리 아님이 없는데,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똥덩어리로 착각하고 산다. 수행을 해서 눈을 뜨면 자신이 본래 금덩어리인 줄 안다.”

수행을 하다 보면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하늘을 마음껏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솔개의 수명은 80년이다. 그런데 솔개가 40년쯤 되면 산정에 올라가 반년에 걸쳐 고행을 한다고 한다. 길어져 쓸모없게 된 부리는 바위에 쪼아 부수고 무딘 발톱도 새로 난 부리로 뽑아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거워진 깃털마저 뽐아 정리한 후, 새로운 부리와 발톱과 깃털로 새롭게 40년을 산다고 한다.

짐승도 지혜가 있어 낡은 것을 스스로 부수고 새롭게 태어나는데, 하물며 사람이 자신이 낡은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그럭저럭 무딘 채 살아가서는 되겠는가. 사람은 자신을 변화시킬 줄 알아야 한다. 기도는 낡고 잘못 살아온 자신을 바로 보게 하고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 지금 바로 시작하라!

제8장 영원한 시간들

■ 열반의 종소리

가야산 단풍이 빨갛게 타오르던 1993년 늦가을 창밖이 환해질 무렵이었다. 큰스님께서 해인사 퇴설당에서 11월 4일(음 9. 19) 열반에 드셨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에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레나 되는데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生平欺誑男女群(생평기광남녀군) 彌天罪業過須彌(미천죄업과수미)

活陷阿鼻恨萬端(활함아비한만단) 一輪吐紅掛碧山(일륜토홍괘벽산)

“참선 잘 하그래이” 하시고는 앞의 열반송을 남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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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지켜보던 문도 스님 중 원융스님이 “스님이 가시면 누구를 의지해야 합니까?”라고 여쭈니 “‘선문정로’가 있다”고 하셨다.

법랍 58세, 세수 82세로 열반의 종소리와 함께 가야산 해인사는 큰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영결식은 1993년 11월 10일.

큰스님이 열반하시고 영단도 채 만들기 전부터 문상객이 모여 들었다. 처음에는 가야산에 올랐던 등산객들이 문상하겠다며 모여들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인근 지역의 신도들이 모여들었다. 오후 부터는 추모 기사가 신문 지면을 덮기 시작했다. 그날 밤과 다음 날부터는 기자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전국의 비구니 스님들이 찾아와, 가신 큰스님을 위해 정성을 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애도했다. 산중의 대중스님들은 영정을 모신 궁현당에서 ‘금강경’을 독송했다. 조문 오신 스님들과 신도님들은 큰스님을 그리는 한마음으로 해인사를 가득 메웠다.

아침부터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큰스님의 마지막을 애도하기 위하여 신도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오전 11시 해인사 구광루 앞마당에서 다섯 번의 범종 소리와 함께 시작한 영결식은 두 시간 만에 끝났다. 큰스님께서 58년간의 수행처인 산문을 떠날 시간이 되었다. 스님의 법구(法軀)는 노란 국화로 뒤덮인 법구차에 모셔졌다. 다비장으로 가는 법구를 대열을 지어 따라갔다. 인로왕번(引路王幡 : 운구 행렬을 이끄는 깃발)을 따라 큰스님의 영정이 앞서고 그 뒤를 문도 스님 과 여러 스님들, 신도들이 1000여개가 넘는 만장을 들고 따랐다. 산길을 가득 메운 신도들은 하나같이 오열했고 주변의 언덕 나무 사이까지 사람들로 가득해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다비장 한가운데 있는 연화대는 거대한 연꽃봉오리로 장엄되었다. 비구니 스님들이 열과 정성을 다해 연꽃 모양의 종잇조각으로 연화대를 장식해 놓은 것이다. 법구를 연화대의 거푸집에 밀어 넣고, 맏상좌인 천제스님과 원택 스님이 마지막으로 장작을 집어 거푸집 입구를 막았다.

스님들의 염불의식이 끝나고 종단의 대표스님들과 문도의 대표스님들이 솜방망이에 불을 붙였다 이어서 ‘거화’라는 구령에 맞추어 일제히 연화대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동시에 다비를 지켜보던 스님들이 외쳤다.

“스님! 집에 불 들어갑니다. 나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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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집에 불 들어갑니다. 나오십시오.”

“스님! 집에 불 들어갑니다. 나오십시오.”

큰스님의 다비장 연화대에서 하늘로 치솟는 불꽃은 붉은 빛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다. 스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열반송 그대로였다.

큰스님 의 영결식도 다비장으로 가는 행렬도 염불 소리도 점점 사라지고, 가을의 아름답던 단풍들은 그 빛을 잃은 듯, 그날따라 온 산중의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앞의 글은 원택스님이 쓴 ‘성철스님 시봉이야기’에서 빌렸다. 내가 큰스님의 영결식과 다비장에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큰스님이 가신 후 ‘불필(不必)’이라는 이름에 대한 기사를 종종 보게 되어서, 영결식이 끝날 때까지 나는 한 번도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는 큰스님에게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하면서도 또한 가장 멀리 있어야 하는 존재였다.

“생사의 바다에서 마음의 눈을 바로 떠서, 영원한 대자유인으로서 스님을 다시 만날 것입니다. 스님 뵙고 싶습니다. 어디에 계십니까?”

수많은 이들이 슬퍼하던 7일 상중에 퇴설당과 백련암 뒷산에 일곱 차례나 방광이 일어나서 그 이적에 사대부중은 모두 놀라워하고 감격했다. 다비식에는 30여 만 명이 운집하여 30리 밖까지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그 장엄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다비 후 100여 과의 사리를 모아 사십구제가 치러지는 동안 사리친견법회를 열자 종교를 초월한 100만 명의 대중이 모여들어 찬탄했으니 불교사에 드물고 드문 일이었다.

■ 나의 원력은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큰스님께서 돌아가시고 많은 사람들이 물었다.

“큰스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이러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큰스님께서 젊은 날에 쓴 발원문을 떠올린다. 이 발원문에 큰스님이 살아오신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나는 이 발원문을 심검당 처소에 걸어놓고 수시로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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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시여, 나는 굳고 단단한 강철 같은 마음으로 세세생생 무루선으 닦고자 발원합니다. 크나큰 지혜와 공덕, 대 용맹심으로 겹겹이 쌓인 번뇌를 순식간에 없애고자 합니다.

다리를 들어 결코 여자의 그림자도 밟지 않을 것이며,

어찌 자비 중생으로 중생의 살점을 입에 대겠습니까.

청정한 신도들의 시주는 화살과 같이 피할 것이며

부귀와 영화는 원수같이 볼 것입니다.

일거에 단단히 얽힌 번뇌의 고리를 끊어

훌쩍 비로의 정상을 뛰어넘어 갈 것입니다.

청정하게 장엄된 보리 대도량에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항상 자제하여

항하사 모래알 수와 같은 법계, 한량없는 국토에

천 가지 유형, 만 가지 모습으로 시현하여 중생의 부름에 응할 것입니다.

높이 금강의 보왕검을 들어,

향상일로 비밀 미묘한 여래의 법장을 열어

일체 중생을 남김없이 제도하고

영원히 그들로 하여금 부처님 법의 바다에서 맑은 평온을 누리도록 하겠습니다.

허공을 부순다 할지라도 나의 원력은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움직이거나 옮기지 않을 것입니다.

시방삼세에서 더할 나위 없이 존귀하신 분이시여 특별한 대자대비의 은밀하신 가피를 내리어, 일체 모든 장애를 소멸시키시고

빠르게 대원력을 원만 성취토록 하여 주소서.

-소림 산문의 후손 성철은 합장 예배하고 삼가 아뢰다 -

큰스님께서는 이런 원을 세워 놓고 철두철미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발원문 그대로 일평생을 사신 분이다.

큰스님께서 조계종 종정이자 해인사 방장으로 계실 때였다. 맏상좌인 천제스님이 주지를 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치자, “내가 방장이고 너는 내 상좌다. 방장이 자기 상좌를 주지로 만들면 대중들이 내 말을 듣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말씀 앞에서 천제스님은 주지에 대한 꿈을 아예 접었다고 한다.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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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스님의 행자시절 10년의 수행 노트에는 큰스님의 철저함을 엿볼 수 있는 가르침이 이렇게 적혀있다.

어려움 가운데 가장 큰 어려움은 알고도 모르는 체 함이요. 용맹 가운데 가장 큰 용맹은 옳고도 지는 것이다.

공부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은 남의 허물을 대신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은 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사람이다.

공양을 드실 때에도 김 한 장, 당근 한 조각, 밥 한 공기.

콩도 크고 작은 게 있으니 달아서 음식을 만들라.

평생 무염식 실천.

새 좌복과, 가벼운 이불을 지어드렸더니 “가져가라!” 꾸중하심

메모는 빈 종이나 일력 뒷장에, 긴 글을 쓰실 때 어쩌다 원고지에 씀

버리는 물건도 일일이 점검, 면봉도 쓰지 못할 때까지 사용. 이쑤시게는 깎아서 몇 차례 사용.

인도 성지 순례 때 상아 불상을 사 드렸더니 동물의 뼈라고 받지 않으심

보살 한 사람이 수박을 먹고 붉은 색이 도는 조각을 버렸더니 다시 주워 먹게 함

여신도들이 화려한 옷에 귀걸이 목걸이를 주렁주렁 달고 오자 “중 꼬시러 오나?” 하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백련암에는 먹물 옷을 입은 사람만 드나들 수 있었다.

언젠가는 친필을 하나 얻고 싶어서 “저도 하나 주세요”하고 말씀드렸더니 “남이 가지지 않는 걸 가지면 안 된다” 하시곤 주지 않으셨다. 그래서 내게는 큰스님의 친필 하나 없다.

장경각 공사로 큰스님께서 금강굴로 오시게 되었는데 그 6개월 정도가 큰스님과 한 공간에 머문 전부였다. 그 6개월도 큰스님이 나를 찾지 않으면 그 방에 갈 수 없었다.

■ 시공을 떠난 곳 겁외사

큰스님의 고가(古家)는 허물어진 지 오래되고 집터만 보존되어 왔는데, 열반하신 지 3년 후인 1996년 9월 19일 생가를 복원하는 기공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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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들과 신도님들, 산청 군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다.

해인사에 사리탑을 세우는 일은 원택스님이 맡았고, 생가를 복원하는 일은 내가 인연이 있는 곳이기에 원을 세워보았다.

옛 집터를 찾으니 고가가 허물어진 것은 물론이고 아름답던 경호강변의 숲이 남강댐 건설로 강바닥으로 변해 있었다. 봄이면 진달래가 피던 앞산과 뒷산은 새로 뚫린 고속도로 때문에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상전벽해라는 말 그대로였다. 고향을 떠난 지 수십 년이 되었으니 무슨 말을 하겠는가.

큰스님의 고향, 내 고향이기도 한 곳에 와보니 불법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떠올라 심히 부끄러웠다. 집도 절도 없는 곳에서 우두커니 서서 생각해보니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열두 평짜리 컨테이너에서 묵으면서 나무 한 그루 없는 땡볕에서 일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내 앞으로 해놓으신 문전옥답 2000평을 메우는 데는 자갈과 모래 수천 대가 들어갔다.

나는 일을 시작하면 누가 뭐래도 끝을 내는 성격이다. 돌을 쌓을 때는 돌만 생각하고, 조경할 때는 나무만 보인다. 담을 쌓을 때는 우리나라의 좋은 담이 모두 있다는 희원(熙園)에도 가 보았다.

일은 할 때 해야 한다. 본디 내 일처리 방식이 급행열차 아닌가. 무엇이든 결정한 것은 해놓고 손을 터는 사람이다 보니 생가 복원공사를 3년 만에 마쳤다. 한 비구 스님이 와보고는 “보통 사람은 10년을 해도 못했을 일을 3년 만에 마치다니 대단하십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생가 터는 옛 모습그 대로 한가운데에 안채가 있고 동쪽에는 사랑채 서쪽에는 유물 전시관인 포영각, 앞쪽 중앙에는 솟을 대문을 중심으로 담장이 이어져 있다. 안채는 할아버지의 호를 따서 ‘율은고가(栗隱古家)’라 이름 지었고 사랑채는 ‘율은제’라 했다.

불가에서 겁(劫)이란 길고 긴 시간을 말한다. 100년에 한 번 선녀가 내려와 사방 40리 되는 바위를 옷자락으로 스쳐서 모두 닳아 없어지는 시간을 일겁(一劫)이라 하는 데, 그것이 얼마나 될지는 상상하기 어렵다. 겁외(劫外)란 그 지나간 시간 밖이라는 뜻이니 시공을 초월한 절대적인 세계를 의미한다.

겁외사에는 대웅전 중앙에 부처님을 모시고 서쪽에는 큰스님의 영정을 모셨으며 앞마당 중앙에는 큰스님의 존상을 모셨다. 동쪽에는 선방인 쌍금당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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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채인 정오당, 정문에는 벽해루를 지었다.

모든 불사를 회향하기 한 달 전 산청, 함양, 진주, 합천 문화원장님들과 교수님들을 모시고 생가에서 고유제를 지냈다. 100여 명의 선비님들이 함께 하셨는데 그분들은 “불필스님은 할아버지께도 효도하고 성철스님께도 효도를 다했으니 김대건 신부보다 훌륭하다”고 격찬을 해 주셨다.

겁외사에 큰스님의 유물들이 들어올 때 ‘여긴 내가 살 곳이 아니다’라는 판단이 섰다. 큰스님의 상좌가 절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바로 원택스님에게 연락해 회향 전에 인수하라고 했더니 “그렇게 힘들게 해놓으셨는데 어떻게 받습니까” 하면서 사양하였다. 거듭 세 차례나 사양하기에 “그러면 겁외사를 큰스님 딸의 절로 남게 할 겁니까?” 했더니 그제야 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2001년 3월 30일 봄날이었다.

종정스님과 사대부중, 그 밖의 귀빈들을 모시고 회향식을 진행하는 데 난데없이 폭설이 내려 주위의 경치는 일시에 설경으로 변했다. 모두 서설이라고 입을 모았다.

■ 1997년 음력 3월 꽃피는 봄날

큰스님의 열반을 보면서 일체를 버리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공부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후 심검당으로 돌아왔다. 젊은 시절 어른 스님들, 그리고 도반들과 용맹정진 했던 그때로부터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심검당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어느 덧 구순을 바라보는 은사 스님께 심검당에서 정진하겠다고 말씀드리자 이렇게 말씀하시며 반겨주었다.

“너는 가야산 호랑이는 안 되어도, 가지산 호랑이는 되어야지, 정진 잘해라.”

그 이후 나는 매년 하안거와 동안거를 심검당에서 나고 있다. 안거 때면 항상 별당에 들러 은사 스님께 인사를 드렸다.

1996년 음력 섣달 그믐날 아침, 그날따라 기운이 없어 보이셨다

“생사가 둘이 아니니 몸과 마음이 편할 때 떠나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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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씀을 듣고 법회, 현묵. 법용, 도문 스님들을 불렀다. 주지인 혜정스님도 연락을 받고 왔다. 다 모인 자리에서 은사 스님이 말씀하셨다.

“준비해라. 오래 살았다.”

세상과의 인연이 다하고 있음을 느끼신 것이었다.

1997년 음력 3월 8일 꽃피는 봄날이었다.

스님께서는 상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열반에 드셨다. 세수 90. 법랍 56세였다.

삼세제불(三世諸佛) 가신 길을 나도 가야지

구순생애 사바의 길, 몽환(夢幻) 아님이 없다.

일엽편주 두둥실 떠나는 곳

공중에 둥근달 밝을 뿐이네.

은사 스님께서 이 열반송을 남기고 가신지 어언 15년이 흘렀다.

나의 스승! 자신에게는 누구보다 엄격했고, 정진과 계율에는 누구보다 철저했던 분, 비구니의 존재가 미비하던 시절, 그 위상을 세우고 출가 정신을 확고히 세우기 위해 부단히 애쓰며 후학들의 교육을 위해 헌신했던 분. 항상 검약하는 무소유의 수행자로서 유품이라고는 평생 모시던 불상과 경책, 그리고 목에 걸고 계시던 염주가 전부였던 분.

1957년 후학 양성을 위해 회상을 연 후 석남사 도량으로 출가한 상좌의 손상좌, 증손자는 모두 300여 명이고 심검당, 정수원, 금당을 거쳐 간 운수 납자는 1,500명에 이른다. 그리고 은사 스님은 석남사 창건 이래 비구니로서는 가장 큰 중창불사를 하시고 가장 많은 후학을 길러내신 분으로 한국불교사에 기록되고 있다.

■ 영원에서 영원으로

나는 겨울 산이 좋다.

아침에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불면 대나무와 잡목이 흔들려 천지를 뒤흔드는 것 같다. 그 밑으로 햇살이 비치면서 산 밑에 깔린 산죽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 저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오는 그 싸늘한 겨울 햇살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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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성할 때까지 평생 좌복에 앉아 있다가 죽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평소 큰스님께서 자주 하셨던 말씀이다. 걸어다닐 수 있을 만큼 건강이 허락하는 동안은 심검당에서 안거를 날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조용히 마치고 싶다.

삼십대 젊은 시절, 큰스님과 함께 퇴설당 뜰에서 멀리 남산을 바라보며 내가 말씀드린 적이 있다.

“다른 생엔 대장부로 태어나 해인사 방장이 되겠습니다.”

“한 총림의 방장이 되려면 보통 공부해가지고는 안 되는기라.”

꾸중을 하지 않고 격려해 주셨던 큰스님의 그 말씀을 늘 가슴에 간직하며 살아왔다. 남은 생, 남은 시간 그리고 세세생생 사력을 다해 영원한 대자유인이 되는 길을 찾아갈 것이다.

■ 여기에 큰스님의 시비를 세웁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생전에 큰스님이 가장 좋아한 말씀이었다. 열반하시기 전에 시비(詩碑)하나를 세워드리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못 세운 시비를 세우는 마음으로 이 책의 말미에 이 글을 실어 본다.

큰스님은 1981년 대한불교 조계종 제7대 종정에 추대된 뒤, 첫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한글 법어를 내놓으셨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는 1982년 부처님 오신 날의 법어이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습니다.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설사 허공이 무너지고 땅이 없어져도 자기는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유형 무형 할 것 없이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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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입니다. 그러므로 반짝이는 별, 춤추는 나비 등등이 모두 자기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만약 자기 밖에서 자기를 구하면, 이는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함과 같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영원하므로 종말이 없습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세상의 종말을 걱정하며 두려워하여 헤매고 있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본래 순금입니다. 욕심이 마음의 눈을 가려 순금을 잡철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나만을 위하는 생각은 버리고 힘을 다하여 남을 도웁시다. 욕심이 자취를 감추면 마음의 눈이 열려서 순금인 자기를 바로 보게 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아무리 헐벗고 굶주린 상대라도 그것은 겉보기일 뿐, 본모습은 거룩하고 숭고합니다. 겉모습만 보고 불쌍히 여기면, 이는 상대를 크게 모욕하는 것입니다. 모든 상대를 존경하며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현대는 물질만능에 휘말리어 자기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큰 바다와 같고 물질은 거품과 같습니다. 바다를 봐야지 거품은 따라가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이렇듯 크나큰 진리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다 함께 길이길이 축복합시다.

- 2012년 10월의 마지막 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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