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나는 다만 조금 느릴 뿐이다 (2)

보해성산 2013. 3. 17.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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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만 조금 느릴 뿐이다 (2)

- 어쩌면 누구나 느끼고 경험하고 사랑했을 이야기 -

■ 강세형 지음

제3부 우리는 모두 섬이다

■ 마음이, 너무 바빠서

나, 도대체 왜 이렇게 바쁜 거지?

어느 날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나, 왜 이렇게 바쁘고 피곤한 거지? 백수가? 어딜 꼭 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뭘 시킨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그런데 나는 그래서 더 바빴다.

아무도 내게 무언가를 시키지 않아서.

라디오 일을 할 때도 바쁘긴 했다. 매일 생방송, 매일 데드라인, 매일 원고, 하지만 그래서 쉬는 날에는, 마냥 쉴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자다 깨다 뒹굴거려도 ‘일주일 내내 열심히 일했잖아, 난 좀 쉬어야 돼.’ 일을 하다 한 두 시간쯤 딴 짓을 해도 어차피 마감 전까지 일을 끝내야 하는 건 오로지 내 몫이니까 ‘이따 빨리 하지 뭐.’ 잠들기 전 이런저런 망상들로 뒤척일 때도 어차피 내 잠 줄여 하는 망상이니 ‘내일 좀 피곤하고 말지.’

하지만 백수가 되고 나니, 조금만 늦잠을 자도 ‘해가 뜨기도 전에 지는 이런 상황은 뭔가.’ 어느 노래 가사가 절로 떠올라 내가 잉여가 된 듯한 느낌이 들고, 운동도 못하고 글도 한 줄 못쓰고 그렇다고 영화나 책도 많이 보지 못한 날엔 ‘하루 종일 나 뭐한 거지.’ 자괴감이 들고, 집이 조금이라도 지저분하거나 설거지감이 쌓여 있으면 ‘놀면서 뭐하냐.’ 자꾸만 나에게 짜증이 났다. 그렇게 또 언짢아지면 언짢은 기분에 아무것도 못하게 되고, 그럼 나는 점점 더 내가 싫어지고.

하지만 그렇게 피곤하게, 어쩌면 라디오 일을 할 때보다도 더 바쁜 마음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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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지내고 있는데도, 막상 써 놓은 글을 보면 라디오 때에 비해선 턱도 없었다. 그래서 더 조급증이 났다. 나는 왜 이렇게 게으른 거지? 하루에 A4 30장씩도 쓰고 그랬잖아. 아무리 조금 다른 글을 쓰고 있다 하더라도 이건 아니야. 내가 너무 무능하고 게으른 인간인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후배 S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랜 꿈이었던 소설에 한 번쯤은 모든 것을 걸어보고 싶다며, 회사를 그만둔 S. 그 후 S는 기회 닿는 대로 여기저기 공모전에도 응모하며 습작을 하고 있었는데, 몇 편 완성된 단편들을 모니터해줄 수 있겠냐고 내게 연락을 해왔다. S의 소설은 기대 이상이었다.

하지만 S의 소설이 번번이 공모전에 낙방하는 이유는 왠지 알 것도 같았다. 아직 우둘투둘한 느낌, 뭐랄까. 처음부터 조금씩 한 단어 한 문장씩 완벽하게 만들어가는 작법을 가진 작가가 아니라, 일단 한 번에 끝까지 가능한 빠르게 초안을 써놓은 다음 수없이 고치고 다듬는 작법을 가진 작가의 초고를 보는 느낌이랄까?

“어떻게 알았지? 진짜 나 그렇게 쓰는데, 일단 끝까지 한 방에. 어떤 건 하루 8시간씩 이틀 만에 쓴 것도 있어요.”

S는 자신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속내를 털어놨다.

“마음이 너무 급해요.”

왜 아니겠는가. 서른 넘어 잘 다니던 회사 그만두고 소설 쓴다고 들어 않았는데 왜 눈치가 안 보이겠냔 말이다. 공모전에도 번번이 떨어지고, 그래서 조급한 마음에 더 빨리 쓰게 되고, 그러다 보니 우둘투둘해지고…….

S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어떤 소설가가 진행하는 팟캐스트 방송이 떠올랐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던 소설가. 예술대 제자들인 만큼 창작열이 대단들해서 어찌나 많은 작품들을 부지런히 써대는지 놀랍고 기특했단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 또한 있었단다. 많이는 써도, 많이 관찰하고 있진 않은 것 같다는 아쉬움. 소설가는 말했다. 글을 씀에 있어, 한 대상을 집요할 만큼 오래 관찰하고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작업이라고. 그래서 자신은 시인이란 ‘많이 보고 적게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시인만큼은 아니어도 소설이나 다른 산문을 쓰는 작가들에게도, 관찰하고 사색하는 시간은 무척 중요하다고.

관찰하고 사색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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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것을 잊고 있었다.

마음이 너무 바빠서.

침대에 누웠다. 책도 없이, 음악도 없이, 휴대폰도 없이, 불을 끄고 가만히 누웠다. 고요했다. 너무나 고요했다. 내 방이 원래 이렇게 고요했던가. 잠시의 어색함 뒤에 가만히 내 마음을 따라다녀 봤다. 최근에 본 영화와 책에서부터 멏 년 전 친구가 했던 말. 그 친구와 함께했던 어느 여름의 기억, 그러다 또 최근의 고민거리들까지. 두서없이 내 안에 맴도는 기억, 내 안에 맴도는 생각 , 내 안에 맴도는 이야기들을 가만히 따라다니는 일, 무척 오랜만이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머리가 이프지 않았다. 두통 없이 아침을 맞이한 것이 얼마 만인가 싶었다. 눈을 뜨자마자 켜곤했던 TV뉴스 채널도 오늘은 켜지 않았다. 고요함을 조금 더 만끽하고 싶었다. 고요한 아침, 고요하게 샤워를 하고 고요하게 밥을 차리고, 고요하게 식사를 마치고, 창밖을 멍하니 한참이나 내다보기도 하고, 음악 없이 고요히 산책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곤 집에 돌아와, 글을 썼다.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러곤 또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 후배 S에게 문자를 보냈다.

‘우리 너무 조급해 하지 말자.

조급하다의 반대말이 게으르다는 아닌 것 같아.’

■ 착한 사람들에 의한 착한 세상

시간이 맞아 아무 정보 없이 보게 된 영화였다. 대충의 스토리는커녕, 어느 나라 영화인지 , 감독은 누구인지. 어떤 배우가 나오는지. 장르는 무엇인지,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 보게 된 영화.

판타지적 요소는 눈꼽만큼도 없었다. 비현실적이다 싶을 만큼 잘생긴 배우들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고, 현실에선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엄청난 부자가주인공인 영화도 아니었다. 타임머신 타고 시간을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아니요. 먼 미래에 대한 공상 혹은 까마득한 과거에 대한 전설도 아니요, 괴물이나 영웅이 나오는 영화도 아니었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평범한 외모의 주인공들부터가 무척 현실적이었다. 배배 꼬인 구성도 아니어서 작은 항구마을을 배경으로 시간의 순서대로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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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는 차근차근 흘러갔고, 손에 땀을 쥐게 할 만큼의 긴장감 넘치는 사건 또한 없었다.

현란한 화면구성, 관객들의 심장을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 하는 위기 탈출의 반복, 그리고 마지막엔 탄성을 자아낼 정도의 허를 찌르는 반전! 따위에 익숙해져 있어서였을까. 이쯤에선 뭔가 나오지 않을까, 나름 긴장을 준비하며 다음 장면 넘겨짚기를 몇 번, 하지만 그때마다 맥이 쫙쫙 빠졌다. 반전은 없었으니까. 그러니.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작품!’ 이라 평해야 할 것 같았지만, 참 희한한 일이었다. 앤딩크레딧까지 다 올라간 다음 극장 안에 불이 켜졌을 때.

‘뭐야, 판타지잖아?’

영화가 너무, 착했다.

주인공 부부뿐 아니라, 조연들도 다. 모두, 너무, 착했다. 이웃의 어려움을 모른척하는 사람도 없고, 환자의 사적인 부탁까지도 무시하는 의사도 없고, 출세에 눈이 멀어 상관의 지시라면 무조건 따르는 경찰도 없고, 나의 불행을 이용해 내게 잘해주는 사람을 어떻게든 더 벗겨 먹으려는 사람도 없고, 결정적으로 이 착한 사람들이 결국 어떻게 되느냐?

다 잘됐다. 그렇다고 또 엄청난 변화의 해피엔딩도 아니고 어제의 조용한 항구마을, 평온한 일상으로 영화는 끝났다. 그리고 나는 이런 생각을 한 거다.

‘판타지였어, 이 영화.’

그리고 상영관을 나와서야 보게된 이 영화의 포스터.

그 포스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그린 감성적인‘ 동화’.

판타지, 동화.

영화 속에서 의사가 말했다.

“그래도 종종 기적이라는 게 있기도 합니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주인공 아줌마가 답했다.

“내 주변엔 없어요.”

하지만 아줌마에게 기적이 일어난다.

어제처럼 오늘도

평범하고 착한 주변 사람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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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해할 일 없이, 분노해야할 일 없이 평온하게 지낼 수 있는 기적이.

우리가 살고 있는 영화 밖 현실의 세상에선

그것이야말로 진짜 기적 같은 일일지도 모르니까.

착한 사람들에 의한 착한 세상

그리하여 그 착함으로 인해 그 어떤 불이익도 받지 않는 세상.

어쨌든 우리는,

그런 세상을 그런 영화를 ‘판타지 동화’라 부르고 있었으니까.

* 판타지(fantasy) : 뜻이나 형식상의 구애를 받지 않는 자유로운 감성과 생 각의 흐름(상상)에 따라 이루어진 악곡 도는 소설

■ 투자 회수가치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즐거웠다. 안 그래도 새벽별 보고 등교해야 하는 고등학생이었지만, 다른 친구들보다 더 일찍 눈을 떠 더 일찍 학교에 갔다. 아직 조용한 교실 문을 열면 나보다 먼저와 점심 도시락을 아침으로 까먹고 있던 친구, 그 옆에 앉으면 나도 배가 고파져 숟가락을 들었고 그렇게 밥을 먹으며 우리는, 서로의 노트를 바꿔 봤다. 친구는 만화를 그렸다. 나는 소설을 썼다. 밤사이 각자의 독서실과 집에서 그리고 쓴 만화와 소설을 바꿔 보는 일. 그것이 우리 아침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고3이 됐다. 친구는 제법 공부를 잘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친구는 더 이상 만화를 그릴 수 없었다. 친구는 좋은 대학, 만화와 전혀 관련 없는 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좋은 회사에 취업했다. 그리고 몇 년 후, “나, 회사 그만 뒀어.” 친구는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만화를 배우러.

참 많은 말이 있었다. 이제 와서 만화 공부를 해서 뭐하겠다는 건데? 만화가가 된다 한들 밥 먹고 살기 힘든 직업 아니니? 엄청 성공하지 않으면 힘들 텐데 너한테 그런 재능이 있니? 갔다 와서 만화가가 못 되고 나이만 먹고 결혼 시기도 놓치고, 그래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 다 나를 아끼고 걱정해줘서 하는 말이라는 거 아는데, 나 신나. 하루 종일 두근두근 그 어느 때보다 설레. 그럼 되는 거 아닐까? 그럼 해도 되는 거, 아닐까?”

그러게 말이다. 친구는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동안 자신이 모은 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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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고 일본으로 갔다. 내 힘으로 내 즐거움을 위해 꼬박 4년을 투자해 공부한 친구. 친구가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서른이 넘은 나이였다. 그리고 친구는 지금, 만화를 그리고 있지 않다.

언젠가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생각보다 소설은 아예 안 보는 사람들도 많아. 기발한 아이디어? 음, 신선하네. 그런데 뭐? 그래서 어쩌라고? 내 삶엔 아무런 도움도 안 되니까. 그 시간에 그냥 실용서를 보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의외로 참 많아.”

어쩌면 같은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경제적인 이득 혹은 손에 잡히는 성과 따위는 불투명했던 만화 공부를 왜 했는지 모르겠다.

둘 모두 ‘투자 회수 가치’에 대한 얘기인 것 같으니까.

시간과 노력 그리고 돈이 들어가는 일, 그러니까 투자에 앞서 회수 가치를 따져봐야 하는데 그들의 눈에는 친구의 투자. 늦은 나이에 번듯한 직장을 그만두고 만화 공부를 했던 것은, 회수 가치가 전혀 없는 종목에 투자해 결국 손해만 본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을 더 ‘가치 있게’ 생각하느냐는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는 거 아닐까?

나는 소설을 읽지 않는 사람을 어리석다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독서투자에 있어, 소설보다 실용서가 더 회수 가치 높은 종목이라 여기는 거니까. 반면 나는 소설의 회수 가치를 더 높게 여기는 거고.

만화에 대한 친구의 투자 마인드 또한 마찬가지였던 거다.

“나 신나. 그 어느 때보다 설레. 그럼 되는 거 아닐까?”

지금 나를 설레게 하는 것. 그것이 친구에게는 그 무엇보다 매력적인 회수 가치였던 거다. 경제적 이득, 현실적 안정보다도 훨씬 더 매력적인 회수가치.

“그때 만화 공부를 안 했더라면, 그게 더 후회가 됐겠지. 나를 설레게 하는 일에 모든 것을 투자해 부딪쳐봤다는 것. 그거면 충분한 거 아닐까? 비록 재능의 한계를 느끼고 실패했다 하더라도.”

내 인생에서 무엇을 더 가치 있는 투자, 회수율 높은 투자로 생각하는가는 어차피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는 거니까.

■ 우리는 모두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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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로 이사와 처음 한강시민공원으로 자전거를 끌고 나갔을 때, 나는 새삼스런 깨달음 하나를 안고 집에 돌아왔다.

맞다. 여의‘도(島)’도 섬이었지.

자전거 길이 샛강으로 끊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뱅뱅 섬을 돌 수는 있으나, 저 강 건너로는 갈 수 없다는 것에 나는 무척 놀랐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다른 자전거 길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다른 쪽에 강 건너로 연결된 작은 다리가 있었다.) 10년 넘게 여의도로 출근했는데, 나는 그동안 여의도가 섬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 다리들을 통해 백 번도 넘게, 아니 어쩌면 만 번도 넘게 여의도를 들락거렸을 텐데도, 나는 다리를 건너고 있단 생각은 못했다. 아니 어쩌면, 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날 이후로도 나는 종종 잊었다.

‘No man is island’

‘인간은 섬이 아니다’란 존 본조비의 말로 시작되는 영화가 떠올랐다. 영화속 주인공은 그 말을 비웃으며 첫 내레이션을 시작한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내 생각엔 모든 사람이 섬이다. 게다가 현대는 혼자 살기에 적당한 시대다. 바야흐로 섬의 시대다. 백 년 전엔 타인에게 의존해야 했다. TV, CD, DVD, 커피메이커도 없었다. 멋진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천국의 섬에 사는 것과 같다.’

정말 그랬다. 지금을 살아가는 내가 섬으로 산다는 건, 정말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내가 혼자서도 꽤 잘 노는 오히려 여럿보다 혼자 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생각했기에 정말 쉬웠다. 그나마 출퇴근이 있었던 라디오 일마저 그만두고 혼자 작업을 시작하고부턴, 나는 정말 더 혼자 잘 지냈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운동을 하고, 혼자 글을 쓰고, 혼자 산책을 하고, 혼자 책을 보고 영화를 보고, 그 시간이 길어지자 가끔 지인들을 만나러 여의도를 벗어날 때면 불안하기까지 했다. 어서 나만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단 생각까지 들며.

영화 속 주인공의 마지막 내레이션 이다.

모든 사람은 섬이다. 나는 이 말을 믿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일부의 섬들은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섬들은 바다 밑에선 서로 연결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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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따지고 보면 모든 대륙 또한 섬이다. 바다 위에 띄워진 조금 많이 큰 섬, 우리 모두 그런 섬일지도 모른다. 조금 큰 섬, 조금 작은 섬, 적당한 섬, 크기는 제각각일지 몰라도 다 같은 섬.

다른 곳으로 연결된 다리를 잊으면, 바다 속에 감춰진 연결됨을 잊으면, 끝없이 외로워질 수도 있는 섬. 하지만 다리만 건너면, 그 다리를 찾아내기만 하면, 다시 여럿이 될 수 있는 섬. 우리는 모두 그런 섬일지도 모른다.

그 섬에 갇혔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스스로의 선택이었을 뿐.

내일은 다리를 건너야겠다.

다른 섬의 친구를 만나러.

■ 그리운 칭찬

“선배는 왜 절 혼내기만 하세요? 왜 칭찬은 안 해 주세요?”

너무도 당당한 말투와 표정. 그래서 친구는 더 놀랐단다.

“저는 칭찬 받아야 더 잘하는 스타일인데, 맨날 혼나기만 하니까 실수가 더 많아지는 것 같아요.”

직장 후배에게서 이런 얘길 들었다는 친구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이건, 지 일 못하는 게 다 내 탓이라는 얘기잖아? 아니, 칭찬할 게 있어야 칭찬을 하지! 맨날 사고만 치고, 했던 실수 또 하고! 내 하루 일과가 걔 사고 수습하는 걸로 끝나는데!”

나도 이 얘길 처음 들었을 땐 입이 쫙 벌어졌다. 학교도 아니고 회사에서, 것도 후배들끼리 모여 선배들 뒷담화하는 자리도 아니고, 그냥 대놓고 직속 선배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니.

그런데 몇 년 후, 내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일이…… 재미없어졌어요.”

누구보다 욕심 많고 열심이었던 후배였다. 그래서 처음엔 눈에 띄게 느는 것이 보였고, 그게 예뻐 나도 신이 나 더 많은 걸 가르쳐주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주춤주춤. 그러다 오히려 실수가 잦아지며 뒤로 가기 시작한 거다. 그러니 더 잘할 수 있는 얘가 요즘 왜 이러나, 나는 더 답답했던 건데. “옛날엔 선배가 칭찬도 많이 해주고 그러니까 재밌고 신나서 더 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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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하면 됐는데, 요즘은 맨날 혼나기만 하니까…….”

아예 일이 재미없어져 버렸다며 나에 대한 원망의 빛을 숨기지 못하던 후배.

라디오 일을 그만두고 혼자 작업을 시작하고부터였다. 매일 방송인 리디오 원고는 그날 쓴 원고가 그날 방송을 통해 바로 소개된다. 그리고 그렇게 방송이 되면 어떤 식으로든 피드백이 올 수밖에 없다. 요즘은 문자와 인터넷 메시지 등 청취자들의 실시간 반응이 많아져 방송이 나감과 동시에 청취자들의 메시지가 쏟아진다. 그리고 나는 그것에 몹시 길들여져 있었던 것이다. 나도 모르는 새 그것에, 중독돼 있었던 것이다.

혼자의 작업은 몹시 외롭고 지난했다. 끙끙거리며 한 편을 완성해도 반응은 없다. 특히 내 마음에 흡족한 무언가를 써냈을 때, 나는 몹시 외로워하고 있었다. 보여줄 사람이 없다. 칭찬해주는 사람이 없다. 갑자기 내 글에 자신이 없어진다. 분명 마지막 마침표를 찍었을 때는 의기양양했는데 자꾸만 들여다보고 있자니 자신이 없어진다. 다시 보니 별로인 것 같고.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가 자꾸 의심까지 든다.

그렇게 나는 깨닫게 된 것이다.

아, 칭찬받고 싶다!

사실 아는

그 누구보다도 칭찬받길 원하는, 코앞에서 해주는 낯간지러운 칭찬까지도 꼭 직접 듣길 바라는, 그런 사람이었음을.

이제 좀,

헤픈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다. 그 미안한 마음, 과거의 그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제 헤픈 사람이 되고 싶다. 칭찬에 무척 헤픈 사람.

나도 이제 알게 됐으니까.

입에 발린 말조차도 누군가에겐 이렇게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다는 것. 더 잘해내고 싶다는 마음 또한 갖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나도 이제 알게 됐으니까.

■ 익숙함을 놓아버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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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의 세월을 뒤로 한 채, 만화는 끝이 났다.

벌써 10년이라니.

이 만화와 함께한 10년의 추억을 되돌아보게 되는 애틋함. 이렇게 끝이라니. 이재 더 이상 새로운 에피소드를 만날 수 없다는 섭섭함.

보다, 먼저 든 생각.

이렇게 놓아버리다니! 어떻게 이렇게 놓아버릴 수가 있지?

하지만 도리어 만화가는, 시원해 하고 있었다. ‘만화는 타성으로 하는 게 아니야. 그만둬야 할 때에 깨끗이 그만둬야 한다.’ 그 후기에선 ‘놓아버림’에 대한 아쉬움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다른 세계’에 대한 열망이 보였다. 그래서 이 말 또한 떠올랐다.

‘미친 짓이란,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말이란다.

같은 일을 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 매일 똑같은 삶을 살고 있으면서 다른 삶을 기대하는 것. 내가 손에 쥐고 있는 것,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 내게 편하고 익숙한 것은 모두 놓아버리기 싫은데, 내가 꿈꾸는 것은 지금과 다른 ‘무언가’라면, 미친 거라는 얘기.

그런데 나는 10년 만에 완결된 만화책을 덮으며 제일 먼저 이런 생각을 한 거다. ‘어떻게 놓아버릴 수 있었을까. 10년의 익숙함을.’

나는, 놓아버림이 익숙지 않았던 사람이었나 보다.

하지만 또 부러워는 하겠지?

그 만화가가 또 멋진 ‘새로운’ 만화로 컴백하면 말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는,

익숙함을 벗어던질 수 있는 자만이 품을 수 있다는 걸

이제 깨달을 때도 됐는데 말이다.

■ 규칙놀이

‘등교시 무조건 흰 양말만’ 같은 굳이 저런 규칙을 왜 만들었을까 싶은, 없어도 될 것 같은 규칙, ‘한 여름에도 무조건 넥타이 착용’ 같은 업무능력 저하라는 치명적 단점을 가진, 도리어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것 같은 규칙. 그리고 아직도 세상엔 너무나 많이 남아 있는, 이제는 반드시 없어져야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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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달라져야만 하는 규칙, 이런 규칙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단 무조건 사수하고 보려는 사람들을 볼 때면,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규칙놀이에, 깊이 빠져계시는구나.’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았다. 규칙놀이가 삶의 의미가 되어버린 것만 같은 사람들. 그래서 그 규칙의 부당함을 얘기하려 하면 주먹구구식 비논리로 심지어는 실제 주먹을 사용해서라도 일단 무조건, 이 규칙은 지켜야만 하는 사람들. 그것이 자신의 권위이고, 그것이 곧 자신의 삶이라 믿는 사람들. 어쩌면 이런 이유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1. 지금 내가 가진 것들을 놓고 싶지 않다. 그것이 권력을 휘두르는 권력 자체이든, 그 규칙에서 파생되는 어떠한 이득이든.

2. 변화가 귀찮다. 그 규칙이 내게 별 도움이 안 된다 하더라도, 심지어 내게 손해가 된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으니 어쨌든 변화는 귀찮고 싫다.

보수. 그래도 1번은 목적이 있는 보수다. 그래서 무조건 비난만 할 수도 없는 보수. 그러나 내가 가장 두려웠던 것은 2번. 내가 맹목적 보수가 되는 것이었다. 잘 모르겠지만 변화는 귀찮고 싫어. 나중에 더 좋아진다 해도 어쨌든 지금 당장의 귀찮은 변화는 그냥 딱 싫어.

얼마 전 지인에게서 ‘분노하라’라는 제목의 책을 선물받았다. 반나치 레지스탕스 운동가였고, 세계 인권선언문의 초안 작업에 참여했던 스테판 에셀이93세의 나이로, 그 어느 것에도 분노하지 않는, 그래서 침묵하는 (심지어 투표조차 하지 않는)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분노의 글이었다. 분노 없이 세상은, 절대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93세의 노인이 썼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열정적인 어투로 써내려간 글, 물론 나에게, 그처럼 열정적으로 분노하며 살아갈 용기와 의지, 혹은 부지런함이 있다고는 말할 수, 아니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분노는 하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표현과 행동은 하자. 그래야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더 나은 세상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더 나은 세상이 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사람들을 비난할 자격.

더 나은 세상에 살고 있지 못함을 불평할 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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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또한,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나 보다. 자장면을 짜장면이라 부를 수 있게 됐다. 짜장면 외에도 맨날, 간지럽히다. 끄적거리다 등 39개의 낱말이 복수표준어로 새로이 인정됐다. 그중 내 눈에 확 들어온 건 ‘맨날’. 쓸 때마다 꺼림칙했던 단어 중 하나였다. ‘만날’이라고 쓰면 오타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고, 그렇다고 구어적 느낌을 살려 ‘맨날’로 쓰자니 한글창에 뻘간색 밑줄이 나타난다. 아, 거슬려. 그러면서 괜히 잘난 척, 언어는 불역성과 가역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존재니, 시대가 변하면 언어의 규칙도 달라져야 하는 게 맞는데 어쩌고저쩌고 투덜투덜. 그러니 이제 ‘맨날’도 표준어로 인정됐겠다. 얼씨구나 좋다. 춤추며 좋아해야 하는 게 맞는데, 나는 ……귀찮아하고 있었다. 그것도 말도 안 되게 사소한 이유로. 지금까지 써둔 원고들, 다시 다 찾아서 고쳐야 하나? 귀찮은데 말까? 그래도 찝찝한데 어떡하지? 그러다, 에잇 진작 인정해주든가 아님 아예 말든가, 아우 귀찮아!

동시에 나는 놀랐다.

이 사소한 변화조차 은근슬쩍 귀찮아하고 있는 내 자신에게.

■ 균열

언제나 그렇듯 사고는,

부지불식간에, 그리고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다.

아주 잠깐의 방심,

눈 깜짝할 새,

생각지도 짐작지도 못하는 새,

냄비가 타올랐다.

고구마가 다 익었을까? 아주 방금 전 냄비 뚜껑을 열고 젓가락으로 고구마를 찔러봤다. 훅 올라온 김에 뿌예진 안경 너머로 젓가락은 잘도 들어갔다. 거의 다 익었다고 생각됐지만, 조금 더 푹 익히면 더 맛있겠지? 냄비 뚜껑을 도로 닫고 욕실로 들어가 시간을 때우기 위해 천천히 이를 닦았다. 그런데 욕실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매캐한 냄새. 서둘러 달려가 가스레인지 불을 껐지만, 이미 부엌은 연기로 가득했다. 이를 닦는 그 잠깐 사이에 물이 바닥나고, 냄비가 타버린 것이었다.

침착하자 냄비에 뜨거운 물을 받았다. 좀 담가뒀다 닦으면 되겠지.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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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았다. 팔만 죽어라 아프고, 그을음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머리를 쓰자. 지식검색이 추천하는 방법들을 써보기 시작했다. 세제 풀어 끓이기, 식초 물에 한 시간 넘게 담가둔 다음 씻어 보기 등. 결국 에이 씨!

괜한 짜증과 후회가 급속도로 밀려왔다.

언제나 사고는 그렇게 찾아온다. 부지불식간에, 그리고 순식간에, 반면 그것을 수습하고 회복하는 데는 너무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요된다. 그래서 참 만만치 않다. 산다는 거 말이다.

어떤 이는 드라마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렸다고 한다.

인간 사회에 벌어지는 드라마라는 것은,

평온하던 삶의 균형이 깨어진 뒤에

그 균형을 회복하려고 투쟁하는 인간의 이야기다.

대부분의 소설과 영화,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부지불식간에 찾아온 사고, 일상의 균열, 그게 시작 후 5분이라면, 그 후 나머지 시간은 몽땅 그것을 수습히는 데 소요된다.

늘 그랬던 것 같다. 누군가가 내 마음에 들어오는 균열, 그것은 내 의지와 에너지를 요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면 나는 이미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 시작은 늘 사고와 같았다. 순식간에 타오른 냄비처럼 부지불식간에 깨져버린 평온.

그런데 회복에는, 왜 이토록 많은 시간과 의지와 에너지가 필요한 것일까?

닦고, 닦고, 또 닦았다.

음식을 해먹을 수 있을 정도까지 닦았을 때는 이미, 나의 팔과 어깨 심지어 등 근육까지 얼얼한 상태였다.

회복은 됐다 하지만 그 냄비가 더 이상, 타버리기 전의 냄비와는 똑같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평온하던 삶의 균형이 깨어진 뒤에 그 균형을 회복하려고 투쟁하는 인간의 이야기. 드라마 속 주인공들 또한 그 끝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사고를 겪기 전의 그와는, 다른 사람.

한번 타버린 냄비는, 돌아갈 수 없는 거다. 타버리기 전의 그 모습 그대로는. 물론 닦아낼 만큼 닦아냈으니 이제 다른 음식을 또 담을 수야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냄비는 이미, 예전의 그 냄비일 수는 없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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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져버린 이야기들

어디라도 적어두지 않으면 곧잘 잊어버리는 일이 잦아지면서, 나는 여기저기 사방에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요리를 하다가 떠오르면 포스트잇에 적어 냉장고에 붙여 놓고, 자다 깨서도 침대 옆에 놓인 메모지와 연필을 집어 들었다. 컴퓨터 메모장과 휴대폰 메모장을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음은 물론이요. 외출 시 내 가방에는 언제나 수첩과 연필이 들어 있다.

그런데 이런 ‘메모의 생활화’에는 맹점이 있다. 안심하게 된다는 맹점, 메모가 ‘완성된 글’인 것도 아닌데, 메모가 ‘완결된 이야기’인 것도 아닌데, 나는 자꾸 안심을 하게 된다. ‘일단 적어 뒀으니까 나중에 쓰지 뭐.’ 안심하고 미룬다. 그러다 잊어버린다. 그러다 잃어버린다. 실수나 우연 또는 까닭을 알 수 없는 악재로, 컴퓨터와 휴대폰의 메모가 날아가 버린 일은 물론, 촘촘히 메모돼 있는 수첩을 통째로 잃어버린 일도 있었다. 무언가 떠올랐을 때, 메모 해두지 않고 썼더라면, 바로바로 글로 썼더라면, 사라지지 않았을 이야기들, 그래서 나는 가끔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이렇게 어딘가로 사라져버리고 말았을까?  

메모뿐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꼭 전했어야 할 이야기들, 나를 위해 꼭 완성했어야 할 이야기들 또한 나는 많이 잃어버렸다. ‘내일 또 볼 텐데, 뭐’, ‘내일 생각해도 늦지 않아.’ 그렇게 나는 누군가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지금,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어

만원 전철에서 여중생을 추행했다는 혐의로 현장에서 체포된 남자는, ‘나는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는다.

혐의를 인정하면 벌금형으로 바로 풀려날 수 있다. 딱지 떼는 것처럼 간단하다. 하지만 혐의를 부인하면 재판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돈도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들고, 유치장 생활도 길어질 것이다. 그러니 그냥 자백해라. 경찰도 검찰도 심지어 당직 변호사까지도 ‘혐의 인정’을 권장한다. 하지만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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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않았는 걸? 남자의 싸움은 그렇게 시작된다.

남자와 같은 날, 같은 혐의로 체포됐던 다른 샐러리맨은 그날 오후 벌금 50만 원을 내고 바로 풀려났다. 하지만 남자는 4개월 가까이 유치장에 갇힌 채 재판을 받았고, 1심 판결을 받는 데만 1년이 걸렸으며, 물론 그동안 남자는 ‘내가 하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았다고 증명하는 일’에 매달리느라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1년 넘게 지난한 싸움을 이어가는 남자가 말했다.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어.”

뇌물수수혐의로 기소됐으나, 긴 싸움 끝에 결국 무죄판결을 받아낸 국내의 한 정치인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한 일을 했다고 증명하라면 오히려 쉬웠을 텐데, 내가 하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았다고 증명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무척 힘겨웠다.

어렵다.

존재하는 것보다 존재하지 않은 일을 증명하는 것.

일어난 일보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증명하는 것.

내가 한 일보다 내가 하지 않은 일을 증명하는 것이 더 어렵다.

그래서 세계인권선언문뿐 아니라 대한민국 헌법에도 이런 원칙이 명시되어 있다. 무죄추정의 원칙. 유죄로 최종 판정되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돼야 한다는 것.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어? 이 말이, 이런 생각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무서운 말인가를 직접 경험해보기 전까진 말이다.

그날도 2시간의 라디오 방송을 별 탈 없이 잘 마쳤다. 그날은 특별히 입담 좋기로 유명한 A가수가 출연해주어 유난히 웃음도 많았던 방송이었다. 나는 그 2시간 동안 한 번도 스튜디오를 벗어난 적이 없다.

그런데 몇 주 후 이상한 괴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날 방송에서 A가수와 친분이 두터운 남자가수 B가 우리 방송과 전화 연결돼, 방송인 줄 모르고, A의 휴대폰으로 걸려온 전화인 줄만 알고, 어떤 여자가수와의 관계를 비방용 용어를 섞어 떠들어댔다는 것이었다.

전화 연결은 없었다. B가수뿐 아니라 그 누구와의 전화 연결도, 그날 방송에선 없었다. 하지만 소문은 무섭게 확산되어 갔고, 심지어 본인이 직접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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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을 들었다는 사람들까지 인터넷에 수없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라디오 스튜디오에선 휴대폰 방송 연결이 불가능하다. 오로지 스튜디오에 있는 일반전화로만 방송 연결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방송 관계자들까지도 물어왔다.

“그 소문 사실이야?”

그 당시 함께 일했던 막내 작가는 친구들에게 헛소문이라고 해명하다 이런 말까지 들었다고 했다. “피디한테 교육받은 말툰데?”

나 또한 한 술자리에서 끝내 내 말을 믿어주려 하지 않는 선배를 만난 적이 있는데, 내가 논리적으로 요목조목 설명하려 들자 나중엔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비추며 이렇게 말했다. “그만하자. 어차피 진실이든 아니든 뭔 상관이야. 그냥 술자리에서 그 얘기로 재미있었으면 됐지.”

결국 남자가수 B는 이 사건을 검찰에 수사의뢰 했고, 조사결과 이 루머는 한 초등학생이 장난으로 인터넷에 올린 글에서 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당시 검찰 발표가 있은 후에도 그 수사 또한 조작이다. 음모다.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몇 년이 지난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검색해보니 아직도 많았다. 그 루머가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그 사건을 겪으며 나는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됐던 것 같다. 그동안 내가 너무도 쉽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어?” 유죄단정까지는 아니어도 유죄추정으로 치부해버렸던 소문들 가운데, 사실이 아니었던 것들도 얼마나 많았을까. 그로 인해 상처받았던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존재하지 않는 것, 일어나지 않은 일, 내가 하지 않은 일을 증명하기 위해 지금도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그런데도 나는 잠시 잊고 있었다.

“열 명의 죄인을 놓친다 하더라도 죄 없는 한 사람을 벌하지 말지어다.”

영화 ‘그래도 난 하지 않았어’의 첫 화두.

■ 우리는 누구나 선택한 삶을 살아간다, 기본적으로는

어느 날, 멍하니 드라마만 보고 있던 내게 불쑥 찾아와 준 말이 있었다.

제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인정할 수 있는 평온을 주옵시고,

제가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옵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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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둘을 분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드라마 스토리와는 아무 상관없이 비지엠(BGM, back ground music 배경음악)처럼 흘러가던 엑스트라들의 기도문이었다. 나는 그 장면을 몇 번이나 돌려 다시 봤다. 그 안에, 내가 지금 찾지 못하고 있던 답이 있었으니까.

세상에는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도 존재한다. 내게 찾아온 불행 앞에서 나는 그것을 배웠다. 하지만 나는 아직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분간할 수 있는 지혜’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만 원망하느라 바빠서. 내게 선택권이 없는 것들만 바라보며 자기 연민 떨어대느라 바빠서.

나는 특정 종교에 대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아니지만, 그 기도문만은 꽤 오랫동안 마음에 품게 될 것 같다.

우리는 누구나 선택한 삶을 살아간다. 기본적으로는.

단, 세상에는 내가 바꿀 수 없는 것, 내게 선택권이 없는 것도 존재한다.

그렇다고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조차 다 바꾸지 못하고 살아가면서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만 원망하며 사는 바보가 되지 않기를.

나는 그런, 조금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제4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 나는 이런 어른과의 만남이 즐겁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우리는 깨닫는다. ‘내가 되고 싶은 나’가 아닌 ‘진짜 나’를.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고, 도전을 하고, 그 도전 앞에서 좌절해보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과 부대끼며 나를 시험받는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알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결국 이런 선택을 하는 사람, 이런 말을 하는 사람,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

그리고 ‘진짜 내 모습’이 어쩌면 내 마음에 안 들 수도 있다. ‘내가 되고 싶은 나’와 너무 달라서 말이다. 그 순간 우리에겐 세 가지 선택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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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나를 받아들이고 그에 순응하는 삶을 살 것인가.

진짜 나를 인정하되 내가 원하는 나를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 진짜 나를 부정하며 ‘아니거든? 나는 이런 사람이거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 마침내 자기 자신까지도 속이는 데 성공하여 계속, ‘나는 이런 사람이야.’ 우기는 삶을 살 것인가.

마지막 선택이 어쩌면, 가장 쉬운 선택인지도 모르겠다. 진짜 나, 그것도 내 맘에 들지 않는 진짜 나를 인정할 수 있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니까. 그래서 나이를 먹어갈수록 많아진다. 자꾸 우기는 사람들 말이다. 이 사람의 성향은 분명 A인데, 입으로는 자꾸만 B라고 우기는 사람.

어른이 된다는 것,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무엇에든 조금씩 능숙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능숙함은 물론 좋은 것에도 발휘되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서도 맘껏 발휘된다. 특히 자기합리화.

■ 뭘 그렇게 놀래

“저희 어머니가 어디 가서 이런 말 절대 하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저 요즘 별 탈 없이 아주 잘 지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싫어한다고요.”

그래서 그는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네가 깜짝 놀랄 만한 얘기를 들려주마. 아마 절대로 기쁘게 듣지는 못할 거다. 네가 들으면 십중팔구 불쾌해질 얘기를 들려주마. 오늘 밤 절대로 두 다리 쭉 뻗고 잠들진 못할 거다. 뭐냐 하면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별 다른 걱정 없다! 나는 사는 게 재미있다! 하루하루 즐거웁다! 매일매일 하루하루 아주 그냥!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의 통쾌함이란!

그의 두 번째 앨범이 나왔다. 애타게 기다렸던 만큼 발매일 눈을 뜨기가 무섭게 구매 완료. 그리고 첫 번째 트랙을 듣자마자.

뭘 그렇게 놀래? 내가 한다면 하는 사람인 거 몰라? 내가 빈말 안 하는 사람인 거 몰라? 잘 들어 미안하지만 네가 보고 있는 것들은 꿈이 아냐. 그리고 잘 봐. 낯설겠지만, 못 믿겠지만, 네가 보고 있는 사람이 진짜 나야.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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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로 해낼 줄은 몰랐었어. 이렇게나 멋지게 해낼 줄은 몰랐었어. 너도 내가 진짜로 해낼 줄은 몰랐겠지만 더 이상 예전에 네가 알던 내가 아니야!

그래 이거야! 오래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지인 E가 이직을 했다. 내가 선택한 이직이라면, 그 이유는 누구에게나 비슷하지 않을까? 더 좋은 근무 환경 혹은 더 좋은 대우, 아니면 내가 더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곳 혹은 내게 또 다른 도전의 기회가 될 수 있는 곳. 그런데 이직 후 만난 E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냥 좀…… 속상한 일이 있어서요.”

전에 다니던 회사, 10년 넘게 함께 일해 온 사람들로부터 좋지 않은 얘길 듣게 됐다는 E, 다른 회사도 겪어보고 싶다고 했을 때도, 그래서 다른 회사를 알아보고 있다고 했을 때도, 그리고 결국 사직서를 냈을 때도. 그들은 말했단다. 이해한다고, 더 나아가 응원한다고. 하지만 막상 E의 다른 회사로의 입사가 결정되자, 그들의 반응은 바뀌었다.

배신이다. 네가 어떻게! 각종 사소한 이유들을 끌어 모아, 그들이 갑자기 E를 비난하기 시작한 이유, 내가 보기엔 결국 하나였다. E가 옮겨간 회사가, 전에 회사보다 나쁘지 않은 회사라는 것.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많이 섭섭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다는 아니지 않아요.‘

E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그래도 그런 일을 겪고 나면 알게 되더라고요. 내 사람과 내 사람이 아닌 사람을.”

“외롭다 생각될 때요? 음……좋은 일, 생겼을 때요.”

언젠가 TV에서 본 누군가의 인터뷰. 그 말에 격하게 공감했던 기억이 난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누군가에게 축하 받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 도리어 참 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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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꿈은 엄두조차 나지 않으니까

"조카랑 얘기하다, 나 깜짝 놀랐어.“

설 연휴 고향에 다녀왔다는 친구가 말했다. 일곱 살 난 조카는 커서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했단다. 노벨상 타서 그 상금으로 효도할 거라며. 그런데 친구는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말해버렸단다. “야, 그건 우리나라가 월드컵 우승하는 것보다도 힘들고, 것도 평생 고생하고 인생 말년에나 받을 수 있을까 말까한 거야.” 그리고 헉 했단다. 내가 지금 어린 조카한테 무슨 말을 하고 있나 싶어서.

설 연휴, 우리 집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초등학생인 큰 조카는 야구 선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언니는 단호했다. “운동시키려면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데! 게다가 나도 회사 그만두고 얘 따라다녀야 하는 건데, 현실적으로 운동해서 성공하는 애들이 몇이나 되겠냐?” 우리 집 조카들은 모두, 의사 아니면 판사란 꿈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세상에 대학이 의대와 법대밖에 없는 건 아니야.” 이런 말을 하는 난, 철없는 소리나 하고 앉아 있는 몽상가 이모, 너흰 이모처럼 살면 안 된다.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

나 또한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가, 대통령도 되고 싶었다가, 올림픽 같은 거 보면 금메달 선수도 되고 싶었다가 또 만화영화 보면 마법사나 공주가 되고 싶었다가, 뭐 그런 게 더 자연스러운 아이의 꿈이 아닐까. 적어도 내가 어렸을 때는 그런 꿈을 말해도 어른들이 비웃거나 제약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즘 초등학생들에겐 야구선수란 꿈도 쉽지 않은 일이 돼버렸나 보다. 하긴 요즘은 의사도 꺼리는 부모들이 있단다. 원래 집에 돈이 많아서 목 좋은 데 크게 병원 내지 않으면 힘들다고, 동네 작은 병원들은 임대료 내기도 힘겨워 문을 닫곤 한다며.

최근엔 상상 가능한 운신의 폭에서 일반 회사 취직, 심지어 대기업 취직까지도 지워져 가고 있단다. 취업이 힘들뿐 아니라, 어떻게 어떻게 취업이 된다 해도 마흔 줄에 쫓겨나기 십상이니까. 그리하여 안정적인 직업의 대표격인 교사, 공무원 시험의 경쟁률은 점점 더 높아만 간다. 내가 아는 대학생 친구들 가운데서도 절반 이상은 그런 시험들을 준비하고 있다. 그것이 꼭 행복한 미래를 가져다줄 거라 믿어서만은 아니다. 그저, 안정적이니까.

다른 꿈은 엄두조차 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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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경제학자가 이런 얘길 했다. 88만원 세대도 이젠 옛날 얘기고 요즘 20대는 ‘5무(無) 세대’ 같다고. 88만원이라도 벌 수 있는 일자리조차, 요즘 20대 한테는 쉽지 않단다. 일이 없으니 소득이 없고, 소득이 없으니 집이 없고, 집이 없으니 결혼도 못하고, 결혼도 없으니 아이까지 없는 세대. 그런데 그 말에 어떤 20대가 이런 답을 했단다.

“아닙니다. 우리는 6무 세대입니다. 우리에겐 희망도 없으니까요.”

그 말에, 내 마음도 따라 철렁했다. 그 말은 20대가 아닌 나에게도 무력감을 안겨줬다. 희망도 품기 힘든 세상에서 어떻게 ‘상상’을 바랄 수 있겠나 싶어서.

하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우리에겐 ‘상상’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물론 더 이상 상상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큰 일이 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상상을 멈추면, 변화도 없다. 지금 현실이 마음에 들든 안 들든 변화는 없다. 그러니까 우린 계속, 상상해야 하는 거 아닐까?

젊은이들의 입에서 ‘희망도 없다’는 말이 흘러나오는 시대, 이런 시대에서 계속 계속 살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적어도 나는 싫다. 달라지길 바란다. 그러니 우린 계속 상상해야 하는 거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변화가 필요한 시대,

‘상상’이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 무모한 도전

배를 지휘하는 콕스만이 다른 팀들이 얼마나 앞서가고 있는가가 보인다. 배의 진행방향과 역으로 앉아 있는 나머지 8명은 콕스의 얼굴을 보며 콕스의 지휘만을 따라 죽을힘을 다해 노를 젓는다.

2천 미터 조정 경기에 참가한 무한도전 팀은 꼴등을 했다. 고작 5개월의 연습량으론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훨씬 더 오랜 기간 훨씬 더 집중력 있게 연습해왔을 다른 팀들의 노력과 경험치를 생각하면 또, 그래야만 했던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들의 레이스를 보며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었다.

꼴등이란 결과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도 아니었고, 체력의 한계를 넘어 노를 젓는 그들의 일그러진 표정이 안쓰러워서도 아니었다. 상대팀들과의 격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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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더 벌어질수록, 꼴등이란 결과가 점점 더 당연해질수록, 빨라지는 배, 좋아지는 기록.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우리 멋지게 들어가자!”

이미 꼴등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콕스가 목이 터져라 팀원들을 북돋았다. 잘한다. 멋지다. 좀 더 속도를 올려서! 파이팅! 다른 팀들은 모두 결승점을 통과한 이후, 홀로 남은 무한도전 팀의 마지막 5백 미터 기록은, 가장 좋았다. 2천 미터 전체 레이스 가운데서도 꼴등이 확정지어진 다음 마지막 5백 미터의 기록이 가장 좋았다.

그리고 그 모습이 나를 울게 했다. ‘아름다운 꼴등’이란 이 식상한 말이 꼴등을 위로하는 의미만은 아니었음을, 그들이 몸소 증명해준 것만 같았다.

나는 언제나 ‘최선’보다는 ‘머리’가 앞선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잘 안 될 것 같은데……. 실패가 빤히 보이거나, 희망이 1%도 안 돼 보이는 길 앞에선 언제나 최선보단 머리가 앞섰던 사람.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걸 인정하지만, 과정만큼 결과도 중요하니까. 그래서 나는 언제나 안전한 길만을 선택하거나, 무모한 도전 앞에서는 지레 머리로만 계산해보고 등을 돌려왔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과연, 내 자신을 감동시킬 만큼 최선을 다해 본 적이 있는가. 나는 과연, 내 자신에게 감동하여 울어본 적이 있는가. 그 결과와 상관없이.

나는 자신 있게 ‘그렇다’ 대답할 수 없었다.

■ 자학과 자뻑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나는 너무 게을러.”

내겐 너무 멋진 한 선배의 입버릇.

“내 주변에서 선배가 제일 열심히 살거든요?”

누구보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잘’ 살고 있는 사람이 왜 자학을 할까?

반대로,

“일을 왜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어. 나 같으면 그렇게 안 할 텐데.”

언제나 남들은 못마땅하고 자기만 으뜸인, 또 다른 한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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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는 인정할 수가 없다.

게으르고 무능한데 말만 많은 사람들의 공통점, 자뻑.

내겐 늘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진짜 잘난 사람들은 자학을 하고

결코 잘나지 못한 사람들은 자뻑에 취해 있는 것.

얼마 전 체호프 희곡집을 다시 읽다 ‘자학’과 관련된 장면을 발견했다. 극중 작가가 세 페이지에 걸쳐 ‘자학’을 하는데 그 끝은 이러했다.

사람들은 내 무덤 옆을 지나가면서 이렇게 말할 겁니다.

“그래 재미있고, 재주도 있고, 괜찮은 작가였지만,

톨스토이에 비하면……. 투르게네프 보다도 못했지.”

안톤 체호프와 같은 대작가도 자학이라니! 왜 꼭 잘난 것들이 자학을 하고 난리야. 그보다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라고!

그런데 책을 덮으며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그래서, 아니 그랬기 때문에, 체호프가 체호프가 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자학은 물론 괴로운 일이다. 너무 자학만 일삼다가는, 정말 ‘자학’만 하다 인생 종칠 수도 있다. 하지만 자학은 자기 발전의 시작이 될 수 도 있다. 내 맘에 안 드는 나, 내 성에 안 차는 나. 그러니 고민한다. 모색한다. 노력한다. 발전한다. 그리고 ‘체호프’가 된다. 이 진행이 가능할 수도 있는 거다.

반대로 자뻑은, 늴니리야 내 마음 편할 수는 있겠지만, 그걸로 끝. 지금의 나도 너무 완벽한데 무슨 고민, 무슨 노력이 더 필요하겠냐 말이다. 게다가 자뻑은 ‘지금 내 마음 편함’의 지속을 위해 쉬운 자기합리화를 부르고, 그 합리화가 거듭되면 정체를 넘어서 퇴보로 간다. 그리고, 그러다 점점 부끄러움이 없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는 날 나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을 만났다.

나보다 많이 배운, 나보다 똑똑한, 나보다 잘 난 삶을 살아온 듯한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부끄러운 행동을 했다.

그리고 TV에 나와 자신의 정당성을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떠들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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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웠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삶, 자학이 없는 삶의 끝은

저런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 부끄러움을 나만 모르고, 남들은 다 아는 그런 삶.

자기의 죄에 대해서 몸부림을 쳐야 한다.

몸부림을 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가장 민감하고 세차고 진지하게 몸부림쳐야 하는 것은 지식인이다.

■ 적어도 나만은 실수하지 않는다 믿는 실수

대학교 1학년 첫 국어학 수업, 교수님은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흰 종이를 나눠주시곤 받아쓰기 시험을 보겠다고 하셨다. 아니 우리가 초등학생도 아니고, 나름 대학 국문과에 입학한 학생들인데 받아쓰기 시험이라니! 모두들 조금 당황해 하는 분위기였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만점자는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빵점자리 답안지도 속출. 그때의 교수님 말씀이 아직도 기억난다.

“국문과는 ‘국어국문학과’의 줄임말이다. 문학뿐 아니라, 어학도 공부하는 학과라는 거다.”

맞춤법, 띄어쓰기도 제대로 못하면서 문학이 어쩌고 어디 가서 국문과 다닌다며 우쭐해하지 말라는 말씀이셨다. 그리고 이제부터 주머니에 빨간 펜 하나씩을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학교 안에 붙어 있는 벽보의 오자를 고치라고 하셨다. 물론 뒷말은 농담으로 하신 말씀이었겠지만, 그 뒤부턴 자꾸만 벽보의 오자들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런 어학 수업들의 영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노래방에 가서도 화면 밑에 흐르는 가사의 오자들을 지적하며 웃었고, 밥집이나 술집에 가서도 메뉴판의 오자들을 화제 삼았으며, 소개팅남의 오자 작렬 문자나 편지는 당연한 퇴짜 이유로 인정, 심지어 “내가 과연 그걸 해낼 수 있을지, 염두가 안 나.” 심각한 고민을 털어 놓고 있는 친구의 말을 자르고 들어가, “엄두.” 사소한 말실수까지도 지적하게 되곤 했다. “야, 나 지금 심각한 얘기 하는데, 그 정도는 넘어가 주면 안 되냐?” “미안, 미안, 너무 거슬려서 나도 모르게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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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다른 사람의 글이나 말을 ‘틀리게’ 지적질 하는 사람들.

한번은 방송에서 ‘야채’란 말이 나간 적이 있는데, 그날 엄청난 청취자 실시간 반응이 쏟아졌다. ‘채소’가 아닌 일본식 한자어 ‘야채’를 썼다는 원성이었다. 하지만 국립국어원에서도 ‘야채’와 ‘채소’를 모두 표준어로 인정하고 있다.

책을 낸 다음에도 나는 지인들이나 독자들에게 ‘오자’를 지적받은 경우가 여러 번 있었는데, 그중 대부분은 틀린 지적이었다.

예를 들어 ‘~~을 바라.’라고 바르게 표현한 부분을 ‘~~을 바래.’라고 고쳐야 한다는 잘못된 주장을 하는 등.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가 틀렸다고는 전혀 의심하지 않은 채, 남들을 지적질하는 사람들. 게다가 누군가 반론을 제기하면, 자신의 정보에 대해 한번쯤은 사실 확인을 해볼 법도 한데, 윽박지르며 무조건 자기가 맞다고 우겨대는 사람들, 참 많다.

유명 작가의 인기 드라마가 한창 방영중인 시간, TV를 봤다.

그런데 이상했다. 주인공들이 한결같이 ‘전화’를 ‘즌화’라고 발음하고 있었다. “저 사람 봐, 또 즌화라고 하잖아! 이상해!” 그때였다. 잠시 화장실에 갔던 후배 K, 대학에서 어학 강의를 하고 있는 K가 돌아와 우리의 대화를 알아채고는 이렇게 말했다. “언니, 전화의 서울 방언이에요. ‘즌화’라고 발음 하는 거.” 순간 정적. 우리의 머리 위로 느낌표가 다다다닥 찍히는 기분이었다. 그 드라마에선 고향이 서울인 인물들만이 ‘즌화’라고 발음하고 있었던 거다.

나름 남들보다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는 분야라고 생각했던 거다. 우리말에 관한 것. 그래서 더 의심하지 않았던 거다. 내가 틀리고, 남들이 맞을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더 쉬웠던 지적질.

아무리 머리 좋은 사람도 세상 모든 것들을 다 알 순 없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정답만을 얘기할 순 없다. 어학만 10년 넘게 공부하고 사전편찬실에서 일하며 대학 강의를 하고 있는 후배 K 또한 아직도 모르는 게 많다고 한다. 우리말에 대해서. 그럼에도 우리는 실수를 한다.

세상에 완전무결한,

모든 분야에서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걸 알지만,

적어도 ‘나만은 실수하지 않는다’ 믿는 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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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고 있는 것은 모두 ‘정답’ 이라 믿는 실수

특히 남들보다 내가 더 잘 안다는,

내가 더 잘났다는 우월감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바보짓을 하게 된다.

내가 틀렸다고는 한 치도 의심하지 않은 채,

도리어 ‘맞는 얘기’를 하고 있는 타인을 향해

손가락질 하며 배를 잡고 웃어대는, 진짜 바보짓을.

■ 통각역치

‘선배 이번 주에도 산에 가요?’

선배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따라 나선 산행.

선배의 산행 친구들과 여럿이 담소를 나누며 산에 오르는 일은 제법 즐거웠다. 초보인 나에 대한 배려로 쉬운 코스를 오른 덕에 그리 힘들지도 않았고, 조금 숨이 차다 싶으면 “과일 먹을까?” 누군가의 가방에서 복숭아가 나왔고, 조금 덥다 싶으면 누군가 얼음물을 건네줬고, 체력이 부친다 싶으니 간단한 도시락이 펼쳐졌다. 아무것도 준비 못 한 내가 미안할 정도로 산을 잘 아는, 초보의 페이스까지도 너무나 잘 아는 일행들 덕에 쉬다 오르다, 그렇게 어느덧 정상.

“너 제법 복이 있는데? 이렇게 시야 좋은 날도 드문데.”

선배의 말처럼 탁 트인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는 파란 하늘, 흰 구름 그리고 바람.

“ 이 바람 맛에 산에 오르는 거지.”

옆에서 들려오는 말에 절로 끄덕여지는 고개. 그렇게 얼마나 바람 맛을 보고 있었을까. 내 옆으로 다가온 선배가 불쑥, 물었다. 선배 특유의 그 무심한 말투로. “무슨 일, 있었니?” 역시 선배는 알고 있었나 보다.

꽤 오래전, 무척 힘겨웠을 때가 있었다. 미친 사람처럼 아파하고 슬퍼하던 그때의 나를 지켜봐주고 다독여 줬던 선배. 그리고 지금의 내가 몇 년 전의 나보다 덜 아프고 덜 슬픈 것도 아닌데, 지금 나는 미친 사람 노릇은 하고 있지 않았다.

어쩌면 미친 사람처럼 아픈 티를 낼 수 있는 것도 젊음의 특권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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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통해 알게 돼서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선배의 말에서 ‘역치(자극에 대해 반응을 일으키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극 강도)’라는 단어가 떠 올랐다.

같은 노동을 계속하다 보면 굳은살이 박여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되는 것처럼, 마음의 고통도 거듭되면 어느 새 굳은살이 박인 듯 마음 또한 딱딱하게 통각 불감증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힘든 일을 많이 겪을수록, 고통의 크기가 클수록,

마음의 통각역치가 점점 올라가 웬만한 일에는 무던해지는 것.

통각불감증.

언젠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에,

성숙해지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아팠으면 좋겠다는 글.

나를 성숙시킬 만큼 큰 아픔은 이제 그만 왔으면 좋겠다는 글.

그런데 나는 또 성숙해지고 만 것일까?

분명 아프고 슬픈 일이 일어났는데도

나는 미친 사람 노릇을 하지 않았다.

■ 위악

언젠가 팀원들에게 이런 얘길 들은 적이 있다. 1년 넘게 함께 일하면서 그들이 내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싫어. 안 돼. 하지 마. 별로야. 빨리 해. 집에 가자.” 등등이었다고. 무론 나도 알고 있었다. 내가 친절하거나 살가운 사람은 아니라는 것. 하지만 나는 그들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들 또한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 우리가 웃으며 이런 말도 나눌 수 있는 거라고, 하지만 당연히 입 밖으로 뱉어본 적은 없다. “내가 너희들 좋아하는 거 알지?”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좋은 사람이고 싶기’는커녕 모든 상황에서 별로 안 좋은 사람인 척하고 싶어하는 사람.

어느 날, 밤 꿈을 꿨다. “싫어. 안 돼. 하지마. 별로야. 빨리 해. 집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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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일하는 동안 내게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이런 것들뿐이라며 나의 살갑지 못함을 놀려대던 그때의 팀원들이 우르르 등장하는 꿈이었다. 우리는 우연히 만났다. 나는 너무 반가웠다. 그래서 그들의 손을 잡고 펄쩍펄쩍 뛰며 나의 반가움을 표시하려 했다. 그런데 그들이 너무 당황해하며 한 발짝 물러났다. 이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러지“ 왜 이렇게 반가운 ‘척’이야? 도리어 경계하는 눈빛으로 나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던 그들의 모습.

그리고 꿈에서 깼다.

그리고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를 수도 있겠구나

그들을 만나면, 내가 정말 반가워한다는 것.

내가 그들을 정말 좋아했고, 지금도 늘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

어쩌면 그들은 ‘정말’ 모를 수도 있겠구나.

나는 여전히 이런 사람들은 싫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은,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은 사람.

어떤 상황에서도 본인만은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 하는 사람.

하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나쁜 건,

‘위악’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데 안 좋은 척, 안 나쁜데 나쁜 척, 약하면서 독한 척.

결국 나는 상대에게

더 어려운 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안 좋아하는 척해도, 사실은 좋아하는 걸 알아주길.

내가 나쁜 척해도, 사실은 안 나쁜 사람이란 걸 알아주길.

내가 독한 척해도, 사실은 안 독한 사람인 걸 알아주길.

그게 왠지 더 ‘간지’ 나는 것 같아서.

실은 그게 정말 ‘촌스러운 것’인 줄도 모르고.

모두에게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

(사실은 그건 불가능하다, 고 여전히 난 생각한다.)

하지만 부러 ‘위악’을 떨 필요는 없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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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계속 위악을 떨다보면,

나는 정말 ‘나쁜 사람’ 이 되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사실은 좋은 사람이지만 나쁜 척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나쁜 사람’

모두에게, 아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까지.

2013. 3. 14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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