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할(喝)

보해성산 2013. 6. 8. 12:00
반응형

할(喝)

* 할(喝 꾸짖을 갈, 목멜 애)

- 선승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배우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소리

■ 최인호 지음

0 45년 서울 생. 서울고 2년 때인 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가작

0 연세대 4학년 때인 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0 타인의 방, 별들의 고향, 잃어버린 왕국, 길 없는 길, 상도, 해신, 유림, 제 4의 제국, 인생 등

0 현대문학상, 이상 문학상, 가톨릭문학상, 불교문학상, 동리분학상 등

■ 머리글

2012년은 우리나라가 낳은 최고의 불교 중흥조 경허 대선사가 열반에 드신지 정확히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경허 선사는 조선 후기에 꺼져가는 불교의 불꽃을 다시 살려 일으킨 스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걸림이 없는 무애행 때문에 그의 생애는 다소 오해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에 나는 지난 날 ‘길 없는 길’을 통해 경허를 만나게 되었던 인연으로 열반 100주년을 맞아 경허의 법제자들을 다시 한 번 살려 봄으로써 ‘윗물이 맑으면, 아랫물도 맑다’는 진리를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가만히 열어보는 심정으로 밝혀보았다. 하오니 조용히 들어와 제자들에게 때리고 “할(喝)”하는 경허의 여전한 고함소리를 엿들었으면 한다. 돈수 돈수(頓首 頓首).

2013년 5월 부처님 오신 날에 최인호

*돈수(頓首) : 상대방을 공경하는 태도로 머리가 땅에 닿도록 하는 절

제1장 부처를 버려라

- 한 점 바람으로 사라진 방랑승, 경허 -

■ 너는 그러할 수 있는가

- 1 -

그 무렵 해인사에서 방장으로 주석하던 경허는 눈 덮인 산길에서 이상한 광경 하나를 보게 된다. 당시 경허는 눈길에 미끄러지지 말라고 짚신에 새끼를 칭칭 꼬아 묶은 뒤 주장자를 들고 산길을 오르고 있었는데 길가 한 섶에 뭔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상하다 싶어 다가가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더니 눈을 온통 뒤집어 쓴 사람이었다. 경허는 무슨 일인가 눈발을 헤쳐보니 길을 지나다 눈발을 맞고 추위와 싸우다 지쳐 동사 직전에 놓여 있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그길로 경허는 얼어 죽어가는 여인을 업고 산길을 올랐다.

당시 경허가 머무르던 조실은 오늘날에도 해인사에 남아 있는 퇴설당, 경허는 그 여인을 업고 퇴설당 안으로 들어갔다. 이 모습을 본 사람은 단 한 사람 경허의 수제자 만공이었다.

문제는 그 죽어가던 여인을 기사회생시킨 것에 있지 않았다. 여인이 되살아난 뒤부터 큰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인은 정상적이 아닌 정신이 돌아버린 미친 여인이었다. 아마도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떠돌아다니며 밥술이나 얻어먹는 거렁뱅이 광녀임이 분명했던 것이다.

난처해진 것은 그의 제자 만공, 만공은 이 놀라운 일을 사내(寺內)의 대중들에게 알리지 않으려고 문밖에서 꼭 지키고 있다가 누가 조실 스님인 경허를 만나러 오면 “스님께서 지금 주무십니다.”하고 물리거나 “스님께서 지금 아프십니다.”하고 막았으며 끼니때면 광녀분의 공양까지 방 안에 들여놓곤 했다.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열흘 가까이 …….

열흘 이상 조실스님이 보이지 않자 사내대중들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떼를 지어 퇴설당 안으로 들이닥칠 기세였다.

하는 수 없이 만공은 조실 방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스님, 스님.”

그러나 안에서는 대답 소리가 없었다. 한참을 부르던 만공은 그래도 안에서 반응이 없자 궁금증이 일었다. 그래서 신발을 벗고 문을 열고 퇴설당 안으로 들어갔다.

당우(堂宇) 안에는 뒤엉켜 있는 한 쌍의 남녀 모습이 보였다. 석양 무렵이라 어슴푸레한 저녁 빛으로 자세히 살펴볼 수 없어 몇 발짝 다가가 보았더니 경허는 자신의 팔을 광녀에게 베개 삼아 내 주고 자신은 그 여인의 치마

- 2 -

폭에 다리를 척 걸친 재 코를 골면서 잠을 자고 있었다. 여인도 경허의 팔을 베고 편안히 잠들어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만공은 살며시 방을 나오려는데 새삼스레 방 안을 진동하는 고약한 냄새에 신경이 쓰였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하여 행여 깰세라 조심스레 다가가 살피던 만공은 그 고약한 냄새가 바로 그 미친 여인의 몸에서부터 풍겨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얼굴은 코와 눈을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썩어 있었고 손가락도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미친 여인은 한센병(나병) 환자였던 것이다.

코는 떨어져 나가 구멍만 뚫렸으며 걸친 옷은 고름에 절어 올이 안 보일 정도인 데다가 머리카락도 모두 빠져 민 대머리의 괴물이었다. 살이 썩어가는 고약한 악취에 만공은 도저히 코를 들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스승 경허는 어떻게 이런 여인과 열흘 이상을 한 방에서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살을 맞댈 수 있단 말인가?

그날 밤 달빛이 충만한 겨울 하늘엔 은하가 길게 흘러내리고, 만공은 그 여인을 아랫마을로 내려 보냈다.

스승 경허는 저 썩어가는 육체를 지닌 여인을 열흘 동안이나 곁에 두고 살을 맞대었다. 너는 그러할 수 있겠는가. 스승 경허는 제 정신이 아닌 미친 저 여인을 열흘 동안 밥을 먹여주고 함께 다정히 말을 나누었다. 너는 그러할 수 있겠는가. 스승 경허는 코가 떨어져 나가고 눈썹이 없고 입마저 헐어버린 나병에 걸린 여인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그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질하여 단정히 빗겨주곤 했다. 너는 그러할 수 있겠는가. 스승 경허는 동냥질하며 이 동리에서 저 동리로 떠돌아다니는 거렁뱅이 여인이 눈에 덮여 죽어가게 되자 그 여인을 업고 방 안에 들여다가 체온으로 녹여 살려주었다. 너는 그러할 수 있겠는가. 스승 경허는 고름이 흘러내리는 여인의 몸을 혀로 핥았으며 오물로 뒤범벅되어 있는 여인의 몸을 서로 맞대어 살을 나누었다. 너는 또한 그러할 수 있겠는가.

스승 경허는 그 여인을 하나의 인간으로 바라본 것이다. 스승 경허는 그 여인에게서 법신(法身)을 본 것이다.

이 때의 심정을 만공은 훗날 다음과 같이 술회한 적이 있었다.

“나도 경허 스님처럼 여인을 데리고 하룻밤만이라도 잠을 잘 수 있을까 생각했다. 도저히 나는 그렇게는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나는 몹시 부끄러워졌으며 스승을 뛰어 넘을 수 없다는 절망감을 느끼기도 했다.”

- 3 -

해인사 시절, 승려로서의 마지막 시절인 52세 무렵에 일으킨 이해할 수 없는 나병 환자 여인과의 무애행을 고비로 경허는 서서히 변해가기 시작한다. 확인된 바는 없지만 경허는 여인으로부터 나병은 아니었지만 고질적인 피부병을 옮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 찾아간 의원으로부터 ‘닭똥에 소주를 달여 개고기와 곁들여 먹으면 효과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의 마지막 해인사 시절은 주량과 육량이 무서운 속도로 늘어갔다. 아예 바랑 속에 술병과 개다리를 넣고 다녔다고 한다.

■ 부처가 되려거든 부처를 버려라

연암산 천장사에 객승 하나가 이제 막 들어서고 있었다.

“객승 문안드리오.”

엄동설한에 눈에 덮인 암자가 쩌렁하고 흔들릴 만큼 큰 목소리였다. 이곳에서 어머니 김 씨를 모시고 보임하고 있던 만공은 온 산이 떠나갈 듯한 호령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낯익고 반가운 목소리였던 것이다. 당장에 문을 열고 바라보니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스승인 경허.

그는 봉두난발에 승복인지, 속복인지 알 수 없는 괴상한 옷차림에 술 취한 모습이었다. 늙고 병들었다는 이 무렵 자신의 표현이 과장만은 아니었는지 골수에 깊은 병이 들어 있는 신색이었다.

경허를 본 순간 만공은 맨발로 뛰어 나가 스승을 맞아들였다.

경허가 천장사에 머무른 것은 열흘 남짓이었다.

그 기간에 만공은 스승 경허로부터 깨달음을 인가받고 전법게를 내려 받았다. 만공이 경허 앞에 무릎을 꿇고 공부한 사실을 낱낱이 아뢰자 경허는 기꺼이 제자 만공의 깨달음을 인정하고 전법게를 내렸다.

경허가 만공에게 내린 전법게는 오늘까지 남아 전해지고 있다.

스승 경허로부터 법을 전해 받은 만공은 경허가 쓰는 담뱃대와 쌈지가 너무 낡아 그것이 마음에 걸려 가슴 아팠다고 한다. 그래서 경허가 모르게 시자들을 시켜 장터에 나가 질 좋은 담뱃대와 쌈지를 사오라고 한 후, 며칠 뒤 스승에게 그것을 선물하자 경허는 마치 어린애처럼 좋아했다고 한다.

그날 만공이 바쳐 올린 그 담뱃대와 쌈지는 먼 훗날 보다 큰 역할을 하게 된다.

- 4 -

그로부터 8년 후 경허는 낯선 북방의 갑산(甲山)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 ,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의 유언을 남기는 것이다. 경허는 임종 앞에서 머리맡에서 담뱃대와 쌈지를 꺼내 보이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내가 죽으며 이 물건들을 꼭 내 시신과 함께 묻어주시오.”

집 주인인 담여 김탁은 경허의 유언대로 열반 후 그의 시신과 함께 담뱃대와 쌈지를 묻었으며, 만공과 혜월이 스승 경허가 열반했다는 풍문을 전해 듣고 갑산까지 찾아가 가매장한 묘를 파헤치고 보니 과연 그 속에 만공이 헤어질 때 사준 담뱃대와 쌈지가 나왔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서야 만공은 그 시신이 분명히 유랑하다가 객지에서 열반하신 스승 경허의 진신임을 확인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 담뱃대와 쌈지가 없었더라면 죽은 지 일 년여가 지나 부패한 시신이 과연 스승 경허의 시신임을 입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경허가 천장사에 머무른 것은 열흘 남짓, 올 때에 소식 없이 온 경허는 갈 때도 소리없이 떠나버린다.

경허가 찾아간 곳은 금강산. 금강산을 돌아본 경허는 연작시 ‘금강산 유산가(金剛山遊山歌)를 짓는다. 이 시는 무려 175편의 연작으로 이어지고 있다. 금강산 1만 2천의 바위봉처럼 끊임없이 이어진 이 장시를 보면 경허의 뛰어난 문재를 엿볼 수 있다.

경허는 다시 금강산 명구(金剛山名句)란 시를 두 편 짓고 있는데 그 시를 보면 경허가 느낀 심정을 알 수 있다.

푸른 산 푸른 절벽의 굽이길 구름 속에 가렸는데

누구로 하여금 능히 지팡이를 멈추게 하는 시객이 되어줄 것인가

용의 조화인 듯 눈처럼 시원하게 날아 내리는 폭포수와

예리한 창끝처럼 깎아지른 듯 하늘 위에 솟은 봉우리들

금강산의 흰 새들은 몇 천 년이나 묵은 학이로구나

바위 사이 푸른 나무 삼백 가지 늘어진 노송

중들은 모를테지 이 즐거운 봄의 졸음 맛을

문득 무심히 기우는 달빛 아래 종이 울리네.

- 5 -

綠蒼壁路入雲中 誰使能詩客駐節 (誰 누구 수)

龍造化呑飛雲瀑 釗精神削揷千峰 (呑 삼킬 탄, 釗 쇠 쇠, 힘쓸 소 山禽白畿千年鶴 巖樹靑三百丈松 削 깎을 삭, 칼집 초)

僧不知吾春睡困 怱無心打月邊鐘

금강산을 순례하는 도중에 지은 이 시를 보면 경허가 이미 자신을 중(僧)이라기 보다 시객(詩客)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경허는 ‘중들은 모를테지 이 즐거운 봄의 졸음 맛을’ 하고 표현함으로써 이미 자신은 중의 경지를 뛰어 넘어 ‘중도 아니고 속도 아닌 비승비속(非僧非俗)’의 떠돌이 시객임을 분명히 못박고 있는 것이다.

경허는 금강산 이후에도 그 이전만큼이나 많은 시를 남겼다. 그러나 그의 시들은 금강산 순례를 고비로 확연히 구분을 이룬다. 금강산 이전의 시는 거의 전부가 선시(禪詩)들이다. 시의 형식을 빌려 깨우침을 노래하고 인간의 본성을 꿰뚫고 있으므로 하나하나 비수처럼 예리하다. 그러므로 금강산 이전의 시들은 시라기 보다 촌철들이다.

그러나 금강산 이후의 시들에는 그런 비수가 없다. 경허의 선기도 엿보이지 않는다. 이미 스승이기를, 중이기를, 경허이기를 포기하고 다만 이름 없는 병든 늙은이이기만을 고집하는 경허였으므로 금강산 이후의 시들은 마침내 서정시로 승화하고 있다.

경허는 드디어 중에서 시인으로 변신하고 있는 것이다. 서슬이 퍼런 선기마저 사라져버렸으므로 금강산 이후의 시에서는 이미 불(佛)도 부처도 보이지 않는다.

한 지팡이로 구름 위에 솟아 서너 걸음 걸어보니

푸른 산 흰 돌 사이마다 기이한 꽃들

만약 화공으로 하여금 이 경치는 그릴 수 있겠지만

저 숲속에서 우는 새소리는 어찌할 것인가

산과 구름 함께 희니

구름과 산 모양을 가려낼 수 없구나

구름은 흘러 돌아가고 산만 홀로 남았으니

아름다운 일만이천봉.

- 6 -

一杖穿雲三步立 山靑石白間間花

若使畵工模此景 其於林下鳥聲何

山與雲俱白 雲山不辨客

雲歸山獨立 一萬二千峰

경허가 금강산을 유력(遊歷)하고 떠난 것은 가을 무렵이었다.

금강산을 떠난 경허가 그 다음에 이른 곳은 석왕사(釋王寺). 함경남도 안변군 문산면 설봉산에 있는 사찰로 당시에는 31본산 중의 하나였으며 48개의 말사를 거느리고 있던 대가람 중의 하나였다. 이 석왕사야말로 경허가 승려의 신분으로서 공적인 불사를 마지막으로 행했던 뜻깊은 사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해를 따라 바다를 구경하면서 북상하여 석왕사에 이른 경허는 그곳에서 법회를 증명할 임무를 맡은 법사인 증사(證師)로 초대받는다. 석왕사에는 오백 나한이 있었는데 그 나한들의 몸에 새로이 칠을 한 개분불사를 증명해 주는 법사로 초대받았던 것이다.

석왕사의 오백 나한은 유래가 깊은 성상으로, 조선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인연에서부터 출발한다.

청년 시절 설봉산의 귀주사에서 무술을 연마하고 심신 단련과 독서로 소일하던 이성계는 어느 날 꿈을 꾼다. 꿈의 내용인즉 쇠 지팡이로 자신의 머리와 허리와 팔 세 곳을 꿰었고, 또한 거울이 깨지고 꽃이 떨어지는 꿈이었다.

꿈을 깬 이성계는 토굴에서 수도하고 있던 무학을 찾아가 해몽을 부탁한다. 무학은 이성계의 꿈 이야기를 듣고 벌떡 일어나 이성계 앞에 큰절을 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쇠 단장 셋이 몸 세 곳을 찔렀으니 임금 왕(王)자요. 꽃이 떨어지면 열매가 맺힐 것이요, 거울이 깨짐은 소리가 있을 징조입니다. 이는 그대가 장차 왕위에 오를 꿈이나이다.”

이 말을 들은 이성계는 훗날 이 토굴 자리에 자신이 왕이 될 것을 기도하기 위해 절을 지었는데 그 이름을 석왕사라 했다. 뿐만 아니라 이성계는 이곳에 대장경 한 부를 옮겼으며 왕업을 이루기 위한 기도처로 응진전을 세워 오백 나한을 봉안했던 것이다. 왕이 된 후에는 직접 이곳으로 찾아와 동구에는 소나무를, 뜰에는 배나무를 심었으며 그 뒤 왕명으로 이곳의 소나무를 베는 것을 금했고, 이곳에서 나는 배는 해마다 임금에게 진상하도록 했던 것이다.

- 7 -

그 오백 나한들의 몸에 칠해져 있던 물감이 벗겨지고 낡아 지워지곤 했으므로 이를 새로 칠한 불사에 경허가 증사로 초대받은 것이었다.

이것이 경허가 승려로서 행한 마지막 공식행사였다.

석왕사에서 또다시 간다 온다 하는 인사말 하나 없이 훌쩍 도망쳐 나운 경허는 이로부터 완전히 자신의 이름을 던져버린다. 자신의 법명인 ‘깨우친 소’ 성우(惺牛)도 던져버리고 자신의 법호인 ‘빈 거울’ 경허(鏡虛)도 던져 버린다. 이제부터 경허는 깨우친 소도, 빈 거울도 아닌 다만 병든 늙은이일 뿐이었다.

경허가 이처럼 말년에 이르러 승려로서의 직분도 버리고 마침내 늙고 병든 저잣거리의 중생으로 돌아간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중으로 머물러 있음은 중에 얽매여 있음인 것이다 부처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부처에 머물러 있음은 부처에 얽매여 있음인 것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도 죽여야 하듯 일체의 머무름도, 일체의 걸림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

걸림(碍 = 礙 거리낄 애, 푸른 돌 의)

마음에 있어 걸림은 마음의 동맥경화를 초래한다. 흐르지 않고 괸 물이 썩어버리듯 마음의 흐름을 방해하는 머무름과 걸림은 마음을 썩게 하여 방일(放逸)과 게으름, 그리고 집착을 초래한다. 마음의 장애물을 뛰어 넘어야만 비로소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대자유인이 될 것이다.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사람을 무애인(無碍人)이라고 부른다. 부처의 덕호(德號)가 바로 무애인이며 부처의 지혜를 이름 하여 어떤 것에도 거리낌이 없어 모든 사리를 통달했다 하여 ‘무애지(無碍智)’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무애야말로 진리의 최고 구경(究竟)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경허를 이름 하여 무애인이라 부르고 그의 파탈 행동을 무애행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 자취를 감추는 것이 본래부터 본분인 것을

영변의 신시장에서 공술을 한 잔 얻어 마시고 한 껏 기분이 좋아 자신을 영웅호걸이라 자화자찬하고는 괴로운 영화 명예 다 떨쳐버리고 구름과 학을 벗 삼아 남은 생을 보내리라 노래했던 경허는 그로부터 일 년간 다시 종적이 묘연해진다. 북방의 낯선 타향을 유랑하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데 그

- 8 -

의 족적은 남아 전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경허가 다시 희미하게나마 발자취를 드러낸 것은 그로부터 일 년 뒤, 1905년 을사년, 그의 나이 57세 때의 일이었다. 경허는 당시 함경도 갑산과 평안도 강계 지방을 유랑하고 있었는데 강계 땅 장평동, 현지 사람들이 장뚜루벌이라고 부르는 낯선 곳에서 있었던 일이다.

강계군 종남면 한전동에 사는 선비 담여 김탁은 개인적인 볼일로 자신의 고향 마을에서 10여리 떨어진 장뚜루벌에 잠시 머물러 있었다. 거리에서 흥분한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터져 흐르고 있었다.

“죽여라 죽여!” 하는 고함소리와 함께 여러 사람이 모여 한 사람을 집중적으로 폭행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김탁은 무슨 일인가 거리로 나가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구경을 하고 있었고 한가운데 대여섯 명의 청년들이 한 사람을 집단폭행하고 있었다.

속인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스님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초로의 늙은이를 둘러싸고 젊은 청년들은 주먹으로, 발길질로 패면서 고함을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김탁은 달려들어 싸움을 뜯어말리고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흥분한 청년 중 한 명이 나서서 말했다.

자신의 아내가 우물가에서 물을 길어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 늙은이가 달려들어 입을 맞추고 희롱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늙은이는 죽어도 그만입니다. 미친 영감입니다.”

사정을 들어보니 과연 동리청년들이 그 늙은 영감을 폭행할 이유가 충분히 있었으며 동리 사람들도 이를 뜯어 말리지 않고 방관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김탁은 간신히 그 노인을 봉변으로부터 구해냈다. 사정하다시피 해서 그 노인을 구해낸 김탁은 안전한 곳에 이르러서야 노인에게 말했다.

“어디 사는 누구십니까?”

그때였다. 갑자기 노인이 목청을 돋우어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 미친놈아, 할 일이 없으면 그대로 길이나 가든지 싸움이나 구경하든지 할 일이지. 괘씸하구나 이놈!”

김탁은 고맙다는 인사를 듣기는커녕 욕설을 듣게 되니 기가 막히기도 하고

- 9 -

울화가 치밀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늙은이가 이상하게 느껴져 다시금 눈여겨 바라보았다.

비록 옷은 낡고 누추했으며 괴상한 복색이었으나 범상치 않은 풍채요, 안광이 무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일개 시골 선비이긴 했지만 훗날 3 ‧ 1 만세사건이 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임시정부 요인 중 한 사람으로 독립운동에 참가하리만치 기개가 곧고 혜안이 있었던 김탁은 순간 이 늙은이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렇습니까? 아이고 이거 제가 어른을 몰라 뵈어 죄송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저희 집 누처로 함께 가실 수 있겠습니까?”

정중한 김탁의 청에 늙은이도 함께 누그러져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진작부터 그럴 일이지.”

“어디 사는 누구십니까?”

김탁의 질문에 늙은이는 다만 이렇게 대답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어디 사는가는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고, 다만 내 이름은 박(朴)씨에다가 난(蘭)자, 주(舟)자라 부르고 있소이다.”

박난주. 이름을 풀어 말하면 난초로 만든 배. 경허는 도대체 어디에서 그 기발한 새 이름을 생각해낸 것일까. 아마도 겉으로는 비록 그렇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기특한 세 살 연하의 시골 선비 김탁이야말로 자신의 노후를 기탁할 수 있는 은인이라는 것을 꿰뚫어 본 경허는 그 길 위에서 문득 새 이름을 생각해 낸 것이 아닐까.

어쨌든 경허는 그때부터 박씨 성을 가진 난주라는 새 인물로 되살아나게 된다. 경허라는 이름을 버리고 박난주라는 새 이름으로 바꾼 경허는 이로부터 때로는 박진사로 불린다.

경허는 말년의 벗인 담여 김탁의 집에 머무르면서 방 하나를 빌려 그곳에서 작은 서당 하나를 개설한다. 그리고 얼마 후 경허가 명선생이라는 소문이 번져나가 글방은 가르침을 받으려는 학생들로 넘치기 시작한다. 그래서 김탁의 집을 나와 갑산 웅이방(熊耳方) 도하동에 도하방이라는 서당을 정식으로 개설한다.

그는 자신을 구해준 담여 김탁을 비롯하여 그의 아내인 박씨와 각별한 우정을 맺게 된다. 김탁의 집은 쓰러져가는 국운을 걱정하고 비분강개하는 시골 선비들이 모여들어 토론하는 사랑방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경허는 그들

- 10 -

과 어울려 유발거사(有髮居士)로서 친분을 맺는다.

■ 수월, 스승 경허의 짚신을 삼다

한 가족처럼 함께 지냈으면서도 김탁의 가족은 물론 김탁의 집에 모였던 선비들은 경허의 과거 전력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경허는 자신을 다만 박난주라는 유생으로만 밝혀 소개했을 뿐 그 이상에 대해서는 일체 입을 다물고 묵언으로 일관했다. 해박한 지식과 거침없는 문장, 범상치 않은 몸가짐으로 보아 사람들은 그를 뛰어난 도인으로 미뤄 짐작하고 있었지만 경허 자신은 이에 대해 가타부타 일절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아이들에겐 자상한 접장이요, 선비들에겐 다정한 술친구일 뿐이었다.

이러한 경허의 비밀이 드러나게 된 것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엉뚱한 곳에서부터였다. 만약 이때 경허의 비밀이 밝혀지지 않았다면 그는 북방의 산촌에 뼈를 묻고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게 되었을 것이다.

경허의 정체가 드러나게 된 것은 경허의 맏제자 수월 때문이었다. 수월은 원래 경허의 형인 태허의 제자였으나 경허로부터 법을 받아 천수주(千手呪)를 외어 불망염지(不忘念智)를 얻은 법제자였다. 경허로부터 천수경에 나오는 ‘수월’이라는 법명을 얻게 되었는데 나이는 경허보다 여섯 살 아래 밖에 되지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수월은 경허의 맏상좌였다.

수월은 오대산 월정사에 머무르다가 경허가 자취를 감추었을 무렵 묘향산 보현사에 딸린 중비로암에 머무르고 있었다. 보현사는 당시 21개 군의 사찰을 관장하던 평안도 지방의 최대 가람중 하나였다.

수월은 여기서 3년을 머무르다가 우연의 일치로 경허의 발길을 따라 강계를 거쳐 북상하고 있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수월은 보현사를 떠나 갑산, 강계를 거쳐 만주 비장으로 가 백두산 근처의 어느 농가에 머슴으로 머무르면서 3년간 소를 먹여 주었다고 하는데 수월이 스승 경허를 만난 것은 보현사를 나와 백두산으로 가는 도중에 있었던 일이었다.

경허는 갑산에 도하방이란 서숙을 열고 낮으로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으로는 북방의 선비들과 술을 마시며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곳을 지나던 수월은 우연히 그 소문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 11 -

수월은 곧바로 도하리의 글방으로 찾아갔다. 섬돌 위에 놓인 짚신을 보자 수월은 그 짚신이 바로 스승 경허의 신발임을 곧바로 알아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월 역시 경허로부터 짚신 삼는 법을 배웠으며, 먼 훗날 만주 나자구에 화엄사라는 암자를 짓고 고개를 넘는 길손들에게 무상으로 짚신을 엮어 헤어진 신발을 벗게 하고 새 짚신을 살아 신기면서 말년을 보냈던 수월이고 보면 남보다 훨씬 발이 커 자신의 발에 맞는 짚신을 스스로 삼아 신고 다니는 경허의 짚신을 보자마자 단번에 스승이 틀림없음을 직감해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6-7년 동안이나 종적이 묘연하던 스승 경허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법제자인 혜월, 만공 등과 만나면 종무소식이던 스승 경허에 대해 걱정들을 많이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스승을 이런 낯선 북방의 한촌에서 만나게 되다니. 그래서 수월은 반가운 나머지 큰소리로 방 안에 있는 경허를 불렀다.

“스님 안녕하십니까?”

“스님 안녕하십니까?”

“스님, 접니다. 수월입니다.”

“스님 여여(如如)하십니까?”

수월의 문안 인사에도 끝내 방문을 열리지 않았으며 다만 다음과 같은 매몰찬 대답만 들려왔을 뿐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난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소. 난 그대가 생각하는 스님이 아니고 다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접장일 뿐이오. 또한 그대가 부른 경허라는 이름도 나는 모르오. 내 이름은 박난주라 하오. 그대가 뜬소문만 믿고 사람을 잘못 찾은 듯 싶소. 그러니 쓸데없이 머무르지 말고 가실 길이나 계속 가시오.”

수월은 스승의 속마음을 알고 더 이상 경허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는 다만 그 자리에 앉아 스승 경허를 위해 짚신을 수 켤레나 삼기 시작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때 수월을 도하리 글방까지 안내하고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기발한 문답을 처음부터 끝가지 들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김탁의 부인 박 씨였다. 박 씨는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문답을 통해 어렴풋이나마 경허의 실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 12 -

어두워질 때까지 수월은 스승 경허를 위해 짚신을 수 켤레 삼았는데 다 삼기를 기다려 박 씨 부인은 수월을 자신의 집으로 모시고 갔다고 한다. 수월은 삼은 짚신을 문지방에 대롱대롱 매어 놓고 끝내 열리지 않는 글방 문 앞에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다.

“큰스님, 찾아왔다 그냥 갑니다. 부디 여여하시고, 부디 성성(惺惺)하십시오.”

그러고 나서 수월은 무릎을 꿇고 스승과 제자로서의 큰절 삼배를 했는데 끝내 방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며 방문도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박 씨 부인은 마침내 수월의 입을 통해 박난주라는 이름을 쓰는 유생의 놀라운 과거를 전해 듣게 되는 것이었다. 수월이 하룻밤 묵었을 때 집주인 담여 김탁도 그와 함께 하루를 꼬박 새웠는데 수월의 입을 통해서야 김탁은 경허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었다.

“부디 경허 스님께는 아는 체를 말아 주십시오. 스님이 원하시는 대로 유생 박난주로만. 지금껏 대해오셨듯 알아주십시오. 다만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은 만약에 스님께서 돌아가시게 되면 필히 이곳으로 편지를 보내 스님의 입적 소식을 알려 주십시오.”

주소는 만공이 머무르고 있는 정혜사. 그리고 그날 밤 수월은 만공에게 보내는 편지 한 장을 썼다.

그리고 자신이 쓴 편지를 김탁에게 부쳐 달라고 말하고 간밤에 당부했던 대로 스승 경허가 열반에 들면 필히 정혜사의 만공 스님에게 그 사실을 알려 달라고 재삼 부탁하고는 자신도 백두산으로 향해 정처 없는 길을 떠난다.

■ 빈 거울은 거울이 아니고, 깨친 소는 소가 아니네

경허가 입적하자 김탁은 예를 갖추어 장례식을 지냈다. 김탁은 갑산의 난덕산에 경허의 시신을 유교식으로 모셨다. 그는 경허의 유언대로 시신을 입관할 때 관 속에 담뱃대와 쌈지를 함께 넣어 매장했다. 그리고 그동안 경허가 쓰던 글방을 폐쇄하는 한편 그 방에서 나온 유품들을 자신이 소중히 간직했다. 이때 만약 김탁이 경허의 유품들과 주옥같은 시를 보관하지 않았더라면 경허가 노년에 객지에서 쓴 100편 가까운 시들은 햇빛을 보지 못하고 그대

- 13 -

로 사장되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일 것이다.

그러고 나서 김탁은 지난 겨울 우연히 지나다 들른 수월의 당부를 떠올렸다. 혹시 스승 경허가 입적하게 되면 필히 사장을 보내 그 사실을 알려 달라는 주소를 떠올린 것이다.

그 당시 정혜사에는 만공과 혜월 두 수법제자가 머무르고 있었다. 이미 수월이 쓴 편지를 통하여 스승 경허가 갑산에서 머리를 기른 유생의 속복 차림으로 글방을 차리고 훈몽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던 만공과 혜월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스승 경허의 열반 소식은 아주 늦게 전해 받게 되는 것이다. 만공과 혜월이 스승 경허가 써 놓은 게송을 접한 것은 경허가 입적한 다음해인 계축년 7월 25일로 알려져 있다.

스승 경허의 천화 소식을 들은 만공과 혜월은 곧바로 경허의 시신을 다비하기 위해 갑산으로 출발한다. 글방에 도착하여 김탁을 만나 대충 이야기를 전해 듣고 스승이 남긴 유품을 본 후 두 제자는 돌아가신 사람이 틀림없는 스승 경허임을 확인한다. 그러고 나서 두 제자는 난덕산 밑 경허가 매장된 무덤을 찾아갔다.

경허는 유생 박난주로 세속 생활을 했으므로 유교식으로 매장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만공과 혜월은 풀이 자란 봉분을 무너뜨리고 땅을 파 경허가 들어 있는 관을 꺼냈다. 그 안에는 만공이 천장암에서 헤어질 때 스승 경허에게 선물로 드린 담뱃대와 담배쌈지가 관에서 고스란히 나왔다. 이로써 관에 들어 있는 시신이 경허가 틀림없음이 명백한 증거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경허의 시신이 분명하게 밝혀지자, 만공과 혜월은 다비를 올려 이번에는 불교식으로 경허의 시신을 화장하기 시작했다.

경허는 이처럼 죽은 후에도 독특한 장례법으로 두 번 죽는다. 그의 일생이 승려와 선비의 유생으로 두 번 나뉘어 두 개의 생을 산 것이라면 그의 죽음도 한 번은 유교식으로, 또 한 번은 불교식으로 화장되어 죽는 두 번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경허의 다비는 날이 저물었을 때야 끝이 났다. 경허는 타오르는 불 속에서 한 줌의 재로 남았다. 물에서 나온 것은 물로 돌아가고, 불에서 나온 것은 불로 돌아가고, 흙에서 나온 것은 흙으로 돌아가 경허는 깨끗한 무(無) 그 자체가 되었다.

- 14 -

원래는 잿더미를 뒤져 남은 뼈를 습골하여 굵은 뼛조각을 모아 부도를 만

들어 후세를 위해 남길 법도 하련만 만공과 혜월은 이를 철저히 무시했다.

비록 경허의 입을 통해 직접적인 유언을 듣지 못했다 하더라도 만공과 혜월

은 죽은 후에 사리를 줍거나 뼛조각을 모아 부도라도 만들려는 짓거리에 대

해 스승 경허가 얼마나 싫어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l

만공과 혜월은 뼛조각을 남김없이 주워 쇄골하여 골분으로 만들었다. 그리

고 두 수법제자는 평소에 경허가 즐겨 다니던 갑산의 강과 산, 절을 찾아다

니며 뼛가루를 흩뿌려 산골하기 시작했다.

불어 오는 북방의 거센 바람은 경허의 골분을 백억계의 만물로 돌아가도록

했다.

이때 만공은 스승 경허를 기리면서 추모 시 한 수를 짓는다.

제목을 ‘경허법사영찬(鏡虛法師影贊)’이라고 붙인 그 노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빈 거울에는 본래 거울이 없고

깨친 소는 일찍이 소가 아니다

거울도 없고 소도 아닌 곳곳 길머리에

살아 있는 눈 자유로운 술 더불어 색이로다.

鏡虛本無鏡 惺牛僧非牛

非無處處路 活眼酒與色

빈 거울인 경허는 경허의 법호, 깨친 소는 경허의 법명.

만공이 노래한 것처럼 빈 거울이라 하지만 경허는 거울이 아니며, 깨친 소

라 하지만 경허는 소가 아니다. 이처럼 경허는 거울도 아니고 소도 아니며

길도 아닌 ‘길 없는 길’을 살아 있는 눈으로 살다가 가버린 것이다.

- 15 -

제2장 온 곳이 없으니 간 곳도 없다

- 자비의 향기로 남은 선승, 수월

■ 천수경을 외어 수월 법호를 얻다

경허의 세 수법제자 중 가장 맏이는 수월(水月) 선사다. 그래서 흔히 삼월

(三月)이라 불리는 수월, 혜월, 만공 세 명의 달 중 가장 맏이인 수월을 상현

달이라 부르고, 혜월을 하현달, 만공을 부름달인 만월이라 부르고 있다.

실제로 1912년께 수월, 혜월, 만공 세 명의 수법제자들은 한 곳에 모여 다

음과 같은 약속을 했다고 전해진다.

수월은 북쪽으로 가서 달이 되고, 혜월은 남쪽으로 가서 달이 되고, 만공은

가운데에 남아 달이 되기로 약속했다. 이 약속은 지켜져서 맏이인 수월은 강

계군을 거쳐 만주 지방으로 가서 백두산 근처에 머물며 화엄사란 암자를 짓

고 있다가 입적하여 상현달이 되었으며, 혜월은 통도사, 내원사, 범어사, 선

암사 등 남쪽 지방을 유람하다가 부산 선암사 바위 밑에서 솔방울이 가득

찬 자루를 메고 선채 그대로 열반하여 하현달이 되었다. 만공도 약속대로 가

운데인 수덕사에 남아 월륜(月輪)이 되었는데, 이로써 이 세 명의 달이 이뤄

내는 달빛으로 우리나라 전역에 단 하루도 달빛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게

되었음이다.

경허의 수법제자인 세 명의 월륜 중 가장 맏이인 수월은 1855년생, 혜월은

1862년생, 만공은 1871년 생이다. 맏이인 수월과 막내인 만공의 나이 차이

는 16세에 이르고 있다. 스승 경허가 1849년생이니 맏제자인 수월과 나이가

불과 6년 차밖에 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월은 생년으로만 보면 경허의 제

자라기보다 경허와 함께 불도를 수행하는 벗인 도반(道伴)처럼 보이고 있다.

경허의 맏제자였으면서도, 또한 구한말 가장 뛰어난 선승이었으면서도 수월

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극미하다. 그런 의미에서 풍부한 일화를 남긴 스승

경허보다 맏제자인 수월은 신비로운 전설이 되었다. 흔히 불가에서는 수월을

수수께끼의 선사라고 부르고 있다.

실제로 수월은 처음부터 출가하려고 입산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29세에

- 16 -

이르러 천장암으로 찾아가 처음에는 암자에서 땔감이나 허드렛일을 도와주

는 일꾼인 부목(負木)으로 있었다. 그러다가 당시 천장암에서 주지스님으로

있던 경허의 형인 태허의 눈에 띄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러므로 엄

격히 따지면 수월은 경허의 제자라기보다 태허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

이다.

처음부터 출가하여 득도하지 않고 땔감이나 하는 부목으로 입산했던 수월

의 행적을 보아 그의 평생은 철저히 ‘나’를 버린 남에 대한 헌신이요 봉사였

다.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행장도 따지고 보면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

려는 그의 겸손과 봉사정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음관(音觀)이었는데 그가 수월이란 법호를 스승 경허로부터

얻은 데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

수월은 천수경 외기를 즐겨했다. 그는 낯이나 밤이나 항상 천수경을 외고

다녔는데, 스승 경허로부터 짚신 삼기를 배워 짚신을 삼거나 땔감을 하면서

도 한시도 천수경을 외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수월은 무슨 고상한 경전을 읽고 이를 외어 따지기보다 자나 깨나 앉으나

누우나 서나, 항상 단 한 가지 천수경을 외고 다녔다. 그런 의미에서 천수경

은 수월의 화두요 공안이었던 셈이다. 화두가 오직 정신을 집중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라면 수월이 오매불망 외고 다니던 천수경 또한 그가 결택한

훌륭한 화두가 아닐 것인가.

천수경이라 함은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과 27개의 얼굴을 가진 관세음보

살에게 드리는 계청(啓請)으로 대자대비한 관세음에게 지송(持誦)하면 특히

지옥의 고통을 해탈케 하여 모든 원을 성취하게 해주고 모든 죄업이 소멸된

다는 송주(誦呪)인 것이다. ‘천수(千手)’는 자비의 관대함을, ‘천안(天眼)’은

지혜의 원만 자재함을 나타내며 천 개의 눈으로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보고

그 손으로 구제한다는 염원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수월이 천수경의 독경을 통해 염지(念智)를 얻은 것은 33세 때 천정암에서

였다고 한다. 눈 덮인 한겨울이었는데 천수경을 외다 수월은 마침내 천수관

음으로부터 자비의 손 하나와 지혜의 눈 하나를 얻어 부처가 되었다.

수월이 평생을 통해 외고 독송하고 다녔던 천수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원 이름은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계청’이라는 긴

- 17 -

이름인데, 이 이름의 뜻은‘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진 관세음보살님의

자비와 공덕은 광대무변하시고 원만구족하여 걸림이 없고 자유자재한 큰 힘

으로 일체중생의 고뇌를 건져주시는 다라니’란 것인데 이를 줄여 ‘천수경’이

라고만 부르고 있는 것이다.

* 다라니 : 범문을 번역하지 않고 음 그대로 외는 일. 그 글 자체에 무궁한

뜻이 있어 외는 것만으로도 한없는 기억력을 얻고, 모든 재액에서 벗어나는

등 많은 공덕을 받는다는 주문.

어쨌든 수월이 이 천수경을 통해 견성하게 되자 천장암에 머무르고 있던

그의 스승 경허는 이를 기뻐하면서 그에게 ‘수월(水月)’이라는 법호를 내려주

게 되었던 것이다.

수월이란 법호는 천수경에 나오는 보살 중의 하나로 밝은 달이 바다 위를

환하게 비추었을 때 한 연꽃이 바다 위에 떠 있고 그 연꽃 위에 화신하여

나타나 서 계신 관세음보살의 32가지 모습 중의 한 모습을 수월관음이라 부

르는데, 스승 경허는 제자 음관(音觀)이 눈 덮인 천장암에서 자나 깨나 큰

소리로 천수경을 외다가 마침내 깨우쳐 부처를 이루게 되자 이를 기뻐하면

서 바로 천수경에 나오는 ‘수월관음’의 이름에서 수월만을 따 그에게 법호를

내려준 것이었다. 이로써 부목 음관은 마침내 수월선사가 되었다.

■ 숨을수록 향은 더욱 짙게 번지니

경허의 수법제자가 되었으면서도 경허와의 선화는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수월은 스승경허에게 결정적인 보은을 하게 되는데 이는

훗날의 일이고 수월은 깨치기 전이나 깨친 후나 변함없이 땔감을 맡아 하는

부목에 지나지 않았다.

훗날 수월은 천장암을 벗어나 오대산 월정사 상원암에서 오랫동안 주석하

고 있었는데 여러 대중이 그를 조실로 모시려 했으나 사양했고 항상 땔감을

하고, 장작을 패고, 잡초를 뽑는 부목의 역할을 벗어나본 적이 없을 정도였

다. 그는 항상 일을 하는 한편 입으로는 천수경을 외고 다녔으며 입으로 중

얼거리지 않을 때에는 마음속으로도 이를 외고 다녔다고 한다.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숨어 살기를 좋아하던 수월은 더 이상 오대산에 머물

러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아도 이름 있는 큰 절보다 주로 남방

- 18 -

의 작은 암자들만 일부러 골라 돌아 다녔지만 향목(香木)은 첩첩산중에 숨어

도 향 냄새를 풍기게 마련으로 수많은 신도들과 수좌들이 몰려오고 다투어

수월을 조실이나 방장으로 모시려 했으므로 오대산 상원사까지 도망쳐 온

셈이었는데 또다시 수월의 소문이 널리 퍼져 사람들이 몰려오자 수월은 아

예 인적도 없는 곳으로 도망쳐버리리라고 결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월은 간다 온다 말도 없이 상원사를 떠나버린다.

수월은 경허의 수법제자들인 만공과 혜월, 이른바 삼월이 모여 함께 나누었

던 약속을 떠올린다. 그것은 수월이 북쪽으로 가서 상현달이 되고, 혜월은

남으로 가서 하현달이 되기로 한 약속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출가하고 천수경을 통해 깨우침을 얻었던 천장암

에 들르기로 결심한다. 이번 북행길이 그의 마지막 행각임을 미리 짐작이나

했음일까.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함을 예견이나 했음일까. 이때 수월은 만공

과 함께 저녁 공양을 나눈다. 공양을 다 끝내고 수월은 갑자기 숭늉이 가득

들어 있는 물그릇을 들어 보이며 만공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이 숭늉 그릇을 숭늉그릇이라 하지도 말고, 숭늉그릇이 아니라 하지도 말

고 한마디로 똑바로 말하여보시오.”

그러자 만공은 숭늉그릇을 받아 들고는 문을 열어젖히고 문밖으로 던져버

린 후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러자 수월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참 잘했소.”

그러고 나서 수월은 걸망을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난 가네, 잘 있게나.”

수월은 밥 한 그릇 먹은 후 떠나고 만공은 잘 가라는 전송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음이다. 그 길로 수월은 북으로 북으로 길을

떠난다.

당시 북간도에는 밤이 되면 마적이나 비적 떼들이 몰려와 약탈을 자행하곤

했으므로 밤이 되면 대문을 굳게 잠그고 바깥나들이를 삼가고 있었다고 한

다. 그 대신 마당과 거리에는 밤이 되면 반드시 사나운 개들을 풀어 놓고 낯

선 외지인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풀어 놓은 개는 만주 지방

에만 있는 특수한 개로, 크기는 보통 송아지만 한데 사납기가 이를 데 없었

다고 한다. 그러나 수월이 그러한 북간도의 풍습을 알 리가 없었다. 구름에

- 19 -

달 가듯 가는 북국의 나그네인 수월에게는 뚜렷이 가는 목적지도 없으면서

낮과 밤을 구별하지 않고 해가 있으면 햇빛을 따라, 달이 뜨면 달빛을 따라

북쪽으로 북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북간도가 어떤 곳이고, 만주 개

들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면 밤길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선 동네로

저벅저벅 들어설 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윽고 개 한 마리가 낯선 외지인의 침입을 냄새 맡고 허공을 향해 울부짖

는다. 그러자 개 울음소리는 옆집 개로 이어지고 연쇄적으로 온 동네 개들로

번져나가 온 마을이 피에 굶주린 개들의 울음소리로 살기가 감돌기 시작한

다. 이쯤 되면 마을 사람들은 낯선 나그네가 마을로 들어왔음을 알게 된다.

미리 동장을 통해 개를 묶어 두라는 전갈을 받지 못했으므로 주민들은 개들

의 모가지에서 쇠사슬을 풀어버린다.

각 집에서 풀려나온 수십 마리의 개들이 예고도 없이 동네로 들어 온 나그

네를 향해 달려간다. 마을 사람들은 촉각을 세우면서 숨을 죽인다. 그들은

울부짖는 개들의 소리 속에서 사람의 비명이 섞이거나 아니면 개 떼들과 싸

우는 마적들의 총소리가 들려올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으로 몸을 떨고 있다.

그러나…….

갑자기 문 밖이 조용해진다. 총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것을

보니 마적 떼가 아닌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면 어째서 사람의 비명과 물어

뜯는 개들이 사납게 울부짖는 소리가 갑자기 멈춰버린 것일까. 개들이 헛것

을 본 것일까.

마을 사람들은 조심스레 굳게 걸었던 문을 열고 한 사람씩 밖으로 나와 본

다. 그들은 모두 거리로 나와 개들이 달려간 쪽으로 천천히 다가가 본다.

그때 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상한 광경과 맞닥뜨리게 된다. 길거리 한

복판에 누더기를 입은 작은 체구의 스님 하나가 지팡이격인 주장자를 들고

서 있고 수십 마리의 개들이 그 스님 앞에 무릎을 꿇고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었다. 스님은 뭐라고 수십 마리의 개들을 향해 설법을 하고 있었고 개

들은 큰 귀를 쫑긋거리면서 그 설법을 듣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개들은 꼬

리까지 흔들면서 이 낯선 스님을 반기고 있었던 것이다.

수월이 이처럼 사나운 개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스승 경허가

독사나 호랑이들과 대화를 나누었던 법력을 이어받은 것에 지나지 않을 것

- 20 -

이다. 경허는 사나운 독사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독사들이 나타나 몸

위를 기어 다니며 실컷 놀다가 가도록 내버려두곤 했었다.

경허가 호랑이와 대화를 나누고 그들을 제도한 이야기는 하나의 전설로 남

아 있다. 일찍이 경허의 명성이 전국으로 번져나가 방방곡곡을 뒤흔들 무렵

송광사에서 경허를 청했다. 송광사에서 새로운 불상 하나를 조성하여 그 불

상의 안정(眼睛)에 점을 찍는 점안식을 거행하는데 당대 제일의 선승으로 알

려진 경허를 초청한 것이다.

송광사는 고려 시대부터 보조 국사를 비롯한 16명의 국사들을 배출하여 승

보(僧寶) 사찰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한 국찰이었다. 그러므로 경허에 대해 마

음속으로는 우러러보면서도 다른 마음으로는 은근히 깔보고 비웃는 분위기

가 깃들여 있음이었다.

경허가 나타난 것은 의식 시간이 훨씬 지난 오후 무렵. 그가 나타났을 때

이미 그는 술에 얼큰히 취해 있었다. 경허는 성큼성큼 법당 안으로 들어서서

법상위에 올라가 앉았다. 그러고 나서 큰 소리로 공양주를 불렀다. 승려들의

식사를 담당하고 있던 스님이 놀라 경허 앞으로 다가가자 경허는 메고 온

바랑에서 난데없이 술병 하나와 돼지 다리 한 개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그것

을 공양 스님에게 내밀면서 다음과 같이 소리쳐 말했다.

“이 돼지 다리를 얼른 삶고, 이 술을 따끈히 데워 오라구.”

그렇지 않아도 혈기에 찬 젊은 승려들은 송광사의 자부심을 내세워 경허를

점안식의 증사로 초청하는 일에 반대해왔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 신성한 법

당 안에서 돼지 다리를 삶고 술을 데워오라니.

이날 밤 젊은 승려들은 점안식이고 뭐고 그 미친 술주정뱅이 경허를 내 쫓

아야 한다고 몽둥이를 들고 몰려들기 시작했다. 노장 스님이 나서서 간신히

만류하여 겨우 무사히 하루가 지난 다음날은 마침내 점안식이 거행되는 날

이었다. 경허는 이른 아침 주장자를 들고 법당 밖 냇가의 널따란 바위 위로

올라가 앉았다. 바위 위에 앉은 경허는 눈을 지그시 감고 좌선의 제세를 취

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경허는 돌로 빚은 석불처럼 그 바위 위에서 꼼짝

도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절 뒤편의 숲으로부터 난데없는 짐승의

포효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숲으로부터 대여섯 마리의 호랑이들이

떼 지어 나타나 어슬렁어슬렁 경허가 앉아 있는 바위 앞으로 다가가기 시작

- 21 -

했다. 수많은 승려들은 넋을 잃고 이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었는데 호랑이들

은 경허가 앉아 있는 바위 위까지 올라갔으며, 몸집이 커서 오르지 못한 호

랑이들은 바위 밑에 서서 경허를 우러러보고 있었다. 이윽고 앞선 한 마리의

호랑이가 엎드려 절을 하는 것처럼 무릎을 꿇자 나머지 다른 호랑이들도 무

릎을 꿇고 앉았다고 한다. 마치 무언의 법문이라도 듣는 것처럼.

한참 만에 눈을 뜬 경허는 호랑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소리쳐 말했다고 한

다.

“이제 다들 물러가서 해탈의 문에 들도록 하여라.”

그러고 나서 경허는 옷깃을 사려 여미고 법당 안으로 들어가 불상의 눈에

동자를 그려 넣었다고 하는데 경허가 송광사 뒤편의 조계산 호랑이들을 불

러 모아 이들에게 법문을 내리고, 마침내 이들을 제도하여 해탈의 문에 들도

록 했다는 이야기는 어쩌면 과장된 허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심의 세계

로 들어선 경허라면 어찌 호랑이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일화가 한갓 전설일

수만 있겠는가.

경허의 맏제자 수월도 호랑이보다 무서운 수십 마리의 만주 개들을 무심으

로 제도하고 무언으로 설법하여 해탈의 경지에 들게 하지 않았던가. 어쨌든,

수월의 이런 일들은 북간도에서는 하나의 신화로 남아 아직까지 전해져 내

려오고 있음이다.

수월은 나중에는 승복을 벗어버리고 백두산 근처의 어느 농가에서 머슴 노

릇을 하며 3년 동안이나 소를 먹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나중에는 동녕현을

거쳐 왕청현 나자구라는 곳에 스스로 화엄사란 작은 암자를 짓고 주석했는

데, 이는 말이 암자지 작은 오막살이에 지나지 않았다. 이 오막살이는 마을

과 마을을 이어주는 고갯마루 위에 세워져 있었는데 수월은 그 오막살이에

서 홀로 지내면서 아침에 눈뜨고 일어나면 예불을 마치고 짚신을 수십 켤레

삼아 집 앞 처마에 매달아 놓곤 했다. 뿐만 아니라 수월은 수십 명이 먹을

밥을 미리 해놓고 그것을 일일이 밥그릇에 담아 부엌에 가지런히 놓아두곤

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길손들은 오막살이 앞에 이르러 떨어진 짚신을 벗고 새

짚신으로 갈아 신고 부엌으로 들어가 자기 집인 양 차려져 있는 밥을 한 그

릇 뚝딱 해치우고 마당에서 장작을 패고 있는 수월과 가벼운 눈인사나 나누

고는 헤어지곤 했다.

- 22 -

베푸는 사람이나 그것을 받는 사람이나 자연스럽게 주고, 받고 있었기 때문

에 굳이 인사치레를 하거나 생색내지 않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가 수월

의 오막살이 법당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에게 베푼다는 생각조차 없이, 그러한 마음도 없이 남에게 베푸는 행위

야말로 인간 최고의 덕목이 아닐 것인가. 수월이 하루에도 수십 켤레 짚신을

삼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스승 경허로부터 배운 기술 덕이었다.

■ 수월과 효봉

수월이 뿌린 향기를 맡고 북만주의 오막살이까지 찾아온 제자가 한 사람

있었다. 그의 이름은 효봉(曉峰 1888-1966) 비교적 최근에 입적한 효봉 선

사의 일생은 그의 스승 수월의 그것처럼 파란만장하여 마치 한 편의 드라마

를 보는 것과 같다.

효봉은 1888년 5월 28일 평안남도 양덕군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이 씨였

으며 이름은 찬형(燦亨)이었다.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알려졌으며 열두 살

때까지 선비인 할아버지로부터 사서삼경을 배워 통달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평양 제일의 명문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현해탄을 건너 와세다 대학에서 법

학을 전공했다. 그러고 나서 10년간 서울과 함흥의 지방법원, 평양의 복심법

원에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판사직에 종사했다.

1923년 서른여섯 살 때 효봉은 한 피고인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게 된다. 그

가 사형선고를 내린 피고인이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오늘날 남아 전해지지

는 않지만 명백한 자료와 증거에 의해 판사의 직분상 사형을 선고한 이후

효봉은 심한 갈등과 자기 회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죽음을 선고할 수 있는가. 인간이 타인의 생명을 좌우하

고 타인의 운명을 조종할 수 있는가. 비록 내가 판사라 하더라도 법의 힘을

빌려 사람을 죽이도록 명할 수 있음인가. 내게 무슨 권리가 있음인가. 그보

다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배워온 육법전서가 과연 진리일 수 있음인가. 그것

은 하나의 규범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 어딘가에는 법을 초월한 더 나은

법이 있을 것이다. 이 길은 내가 갈 길이 아니다. 내가 갈 길은 따로 있을

것이다.

순간 효봉은 아내와 세 자녀를 버리고 판사직에 사표도 던지지 않은 채 그

즉시 출가를 단행하는 것이다.

- 23 -

판사직을 하루아침에 버리고 아내와 세 자녀까지 버린 효봉은 그 즉시 입

고 있던 옷을 벗어 남대문 거리에서 엿판과 한복 두 벌로 바꾼 후 엿장사를

하면서 전국을 3년 동안이나 방랑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3년 동안이나 방황하던 효봉은 마침내 1925년 여름, 금강산에 이른다. 금

강산의 유점사에 들러 공부할 만한 스승을 찾으니 신계사 보운암의 ‘금강산

도인’이라 불리는 석두(石頭)스님을 찾아가라는 말을 듣고 그 즉시 신계사로

찾아간다. 큰 방에 세 명의 스님이 앉아 있었는데 효봉은 엿판을 문 밖에

내려놓고 방안으로 들어가 큰 절을 했다.

“그대가 무슨 일로 왔는고?”

풍채 좋은 스님 하나가 효봉에게 물었다.

“석두 스님을 찾아뵈러 왔습니다.”

그러지 풍채 좋은 석두가 다시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유점사에서 왔습니다.”

효봉의 입에서 이 대답이 떨어지자 석두의 입에서 무섭게 고함소리 하나가

터져 흘렀다.

“몇 걸음에 왔는고?”

그러자 효봉은 벌떡 일어나 큰 방을 한 바퀴 빙 돌고 앉으며 말했다.

“이렇게 해서 왔습니다.”

효봉이 대답하자 석두는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10년 공부한 수좌보다 네가 훨씬 낫다.”

이날 효봉은 엿장수에서 비로소 머리를 깎고 계를 받은 스님이 되었다. 판

사에서 엿장수로, 엿장수에서 스님으로, 실로 놀라운 대변신이었다.

38세의 늦은 나이로 출가를 단행한 효봉은 일 년 정도 신계사에서 은사 스

님인 석두를 모시고 시자 생활을 하다가 그 다음해 겨울, 마침내 북간도 지

방으로 수월 화상을 친견하기 위해 행각을 떠났다.

효봉이 북간도의 나자구로 수월을 찾아간 것은 1926년, 그의 나이 39세 때

의 일이었다.

스승 하나만을 찾아 물어물어 북간도로 찾아간 효봉은 마침내 오막살이 앞

마당에서 장작을 패고 있는 수월을 만난다. 효봉이 그가 수월 화상임을 알고

- 24 -

엎드려 큰 절을 올리자 수월은 효봉에게 다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공양하여라. 배고프면 공양이나 하여라.”

이때 수월의 나이는 71세. 몰려드는 신도들과 제자들을 피해 북간도로 떠

나 숨어버린 수월이었지만 마침내 자기를 찾아온 효봉에게 밥을 먹게 함으

로써 마지막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효봉이 수월의 법하에서 머무른 시기는 정확히 전해져 내려온 것은 없다.

또한 효봉이 수월과 나누었던 법어도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없다. 그러나 분

명히 미뤄 짐작할 수 있는 것은 효봉은 수월에게서 짚신을 삼아 나그네의

다 떨어진 짚신을 갈아주는 일을 배웠을 것이며, 고갯마루를 오가는 수많은

배고픈 길손들을 위해 밥을 해서 나눠 먹이는 자비행을 배웠을 것이다. 효봉

은 수월에게서 고상한 법어나 무슨 거룩한 법문은 한마디도 듣지 못했을 것

이다.

그 차디찬 북국의 오막살이에서 겨울을 난 효봉은 마침내 수월의 곁을 떠

난다. 떠나는 마지막 제자 효봉을 자리에 앉도록 한 수월은 자신이 밤새 삼

은 짚신을 갈아 신기고, 떠나는 제자에게 정성으로 밥을 지어 배불리 먹이고

는 고갯마루를 내려가는 제자를 본체만체 칠십이 넘은 나이로 장작만을 패

면서 입으로는 끊임없이 천수경을 외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 제자 효봉이 떠난 지 1년여 뒤인 1928년, 수월은 73세의

나이로 입적하게 된다.

그의 마지막 제자 효봉은 그로부터 3년 뒤 금강산 법기암이라는 토굴로 들

어가 무서운 정진을 거듭한 후 마침내 1년 뒤인 1932년 여름, 활연대오 하

였다.

효봉이 남긴 마지막 한 토막의 이야기.

효봉이 금강산 여여원에 있을 때였다. 좌정하던 중 효봉은 돌연 돌아앉았

다. 문밖에 갓 결혼한 신부를 동반한 자신의 아들이 신혼여행으로 금강산에

와 절을 구경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으므로.

이것이 효봉이 좌정 중에 돌아앉은 유일한 파행이었다.

- 25 -

제3장 일체의 법은 본래 그 실체가 없다

- 무소유로 일관한 천진불, 혜월

■ 귀신도 속이지 못할 천진한 어린아이

수월이 경허의 맏제자라면 혜월은 경허의 두 번째 제자다. 혜월은 수월보다

일곱 살 연하였으며 수월을 한 마디로 겸손한 자비의 화신이라 표현한다면

혜월은 한 마디로 ‘천진불(天眞佛)’이라고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혜월은 항

상 어린애와 같았으며 철없는 아이와도 같았다.

그가 훗날 선암사에 머무르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시내에 볼일을 보

기 위해 산을 내려가던 혜월은 지친 발걸음을 쉬어가기 위해 산 밑 오막살

이에 들르기로 했다. 산 밑에는 과부 혼자 살고 있는 오막살이가 있었는데.

이 오막살이는 절에 오르는 길목에 있고 절에 딸린 밭을 빌려 과부가 부쳐

먹고 살면서 이따금 절의 허드렛일도 돌봐주곤 하여서 절 식구들과는 무관

하지 않은 사이였다.

툇마루에 앉아 쉬던 혜월은 무심코 방문을 열어 보았다. 그러자 심상치 않

은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대낮인데도 방 안에는 이불이 깔려 있고 벌거벗은

부목과 과부가 나란히 누워 있는 장면과 맞닥뜨리게 된 것이었다.

그 부목은 선암사에서 고용하고 있는 일꾼으로 몸이 건장하고 일도 열심히

해 혜월의 신임을 독차지 하고 있었고, 그날 아침에는 소를 끌고 장에 가서

물건을 사오기 위해 일찌감치 절을 나섰었다. 물건을 사러 새벽 일찍 절을

나선 부목이 과부의 집 안방에 벌거벗은 채 누워 있고 과부도 평소에는 밭

에 앉아 김을 매고 있을 대낮에 이처럼 벌거벗고 누워 있다니.

이 모습을 보고 놀란 혜월은 다음과 같이 물었다.

“자네는 소를 끌고 장을 보러 나갔는데 장에는 안 가고 왜 여기에 있는

가?” 그러자 부목은 엉겁결에 거짓말을 했다.

“장을 보러 가다가 갑자기 배가 아파 이 집에 들렀습니다. 스님, 배가 너무

아파 꼼짝도 할 수 없어 이렇게 벌거벗고 누워 있습니다.“

“그러면 자네는 그렇다 하고 과부댁은 왜 밭에 나가지 않고 대낮에 방문을

닫고 누워 있는가?”

과부도 할 수 없이 대답했다.

- 26 -

“저도 배가 아파 누워 있는 것입니다. 스님.”

“야단났군.”

혜월은 볼일로 시내 나가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헐레벌떡 다시 절에 돌아와

공양주에게 죽을 쑤게 하고 그 죽을 직접 들고 산길을 반쯤 내려기는데 아

파서 과부와 함께 누워 있던 부목이 소를 몰고 늠름하게 올라오고 있는 것

이 아닌가. 부목은 오히려 혜월에게 묻는다.

“큰 스님 어디 가십니까?”

“자네와 과부가 아프다기에 죽을 쑤어 가는 길일세. 자네 배는 다 나았나?”

부목은 순간 할 말을 잊었다.

(………)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믿어버리는 천진불 혜월. 그 자신 한 번도

남에게 거짓말을 해 본 적이 없으며 도대체 거짓말이라는 낱말의 의미조차

모르는 무구(無垢)의 성인. 그 사람의 이름이 바로 혜월인 것이다. 혜월을 속

인 부목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참회한 후 출가했다던가. 거짓말을 모

르는 천진불 혜월, 이 세상에 거짓말이라는 단어가 있는 줄조차 모르는 그,

거짓말을 모르니 마음에 한줌의 어둠도 없이 항상 깨끗이 닦아 놓은 거울

과 같은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사물과 있는 그대로의 사람들을 있는 그대

로 받아들이던 무심도인 혜월. 거짓말은 남을 속이기 위함인데 거짓말을 모

르고, 그 거짓말조차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마침내 거짓말을 무색하게

하여, 다음과 같은 말이 말이 혜월에게 따라다니게 되었음이다.

‘귀신도 천진불 혜월은 속이지 못한다.’

■ 일체의 법을 알려면 마음속에 아무것도 가리려 하지 말라

귀신도 속이지 못하는 천진한 어린아이 혜월은 1862년 6월 19일 충남 예

산군 덕산면 신평리에서 출생했다. 이때가 조선 25대 임금 철종 14년 이었

다. 속성은 평산 신씨, 11세의 나이로 덕숭산 정혜사에 출가 입산했다. 어린

나이에 출가한 것은 찢어지게 가난했던 속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너무

나 가난하여 한 식구의 입이라도 덜어야 한다는 가족들의 성화로 영문도 모

르는 채 절에 맡겨져 그대로 득도하게 되었다.

11세의 어린 나이로 동진(童眞) 출가한 혜월은 그 후 1937년 76세의 나이

- 27 -

로 죽을 때까지 11세 나이 그대로의 천진을 고스란히 지켜나간 동승 그대로

였다. 마음만 11세 때 출가한 동심 그대로 지켜나갔을 뿐 아니라 혜월은 글

도 배우지 않았다. 혜월은 경허의 둘째 수법제자로 찬란한 광채를 뿜고 있었

지만 글을 전혀 모르던 까막눈이었다. 부처를 이루는데 문자가 아무런 소용

이 없다는 산증거로 혜월이 자주 등장하곤 하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 비롯되

는 것이다.

11세의 어린 나이로 동진 출가한 혜월은 마침내 15세가 되던 해 정혜사에

머무르고 있던 혜안 스님을 은사로 하여 머리를 깎고 계를 받는다. 그는 줄

곧 대중의 밥을 지어주는 공양주 노릇을 하면서 중노릇을 하고 있을 뿐이었

다. 무지렁이인 그가 발심하여 정진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

다.

혜월이 24세 되던 해, 그의 스승 경허가 정혜사로 찾아와 한바탕 법문을

했다. 혜월은 대중에 섞여 그의 법문을 들었으나 경허의 법문이 몹시 난해했

으므로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스승 경허는 법문 중에 임제의 다음과 같은 선화를 인용하여 말했다.

“임제 스님은 상단하여 이르셨다. ‘여기 빨간 몸덩어리 안에 한 차별 없는

참사람 이 있어 항상 여러분의 눈, 귀, 코, 입 등을 통해 들어오고 나가고 있

다. 아직 보지 못한 사람은 똑똑히 보아라.”

단순하고 어린애 같은 혜월은 경허의 말 한 마디에 크게 깨우친 바가 있었

다. 그는 경허의 어려운 법문을 도저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역력히 홀로

빛나고 형체도 없는 붉은 사람‘ 하나가 몸속에 들어 있어 눈과 귀와 코와

입을 통해 무시로 들락날락하고 있다는 경허의 말 한마디가 그의 마음에 벼

락을 내리친 것이었다.

그가 누구인가. 내 몸속에 들어 있어 나와는 상관없이 수시로 드나들고 있

는 형체도 없는 붉은 사람,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지게를 지거나, 밥을 짓거나, 밭을 갈거나 항상 자신의 코와 입을 들락날락

하는 참사람을 찾아 헤매던 혜월은 일주일째 되던 날 홀로 앉아 짚신을 삼

다가 크게 깨달아 대오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른바 임제가 말했던 대로 시

도 때도 없이 몸뚱이 안에 들어 있어 눈과 귀와 코와 입을 통해 보고 듣고

말하면서 들락날락하고 있는 참사람의 정체가 누구인지 발견해 냈던 것이다.

- 28 -

크게 깨달은 혜월은 당장에 일어나 은사 스님인 혜안을 찾아가 자신이 느

낀 경계를 말했으나 혜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경허 큰스님을 찾아가서

네가 느낀 바 경계를 말하도록 하여라.”

그 즉시 혜월은 정혜사를 나와 개심사로 떠나갔다. 당시 경허는 개심사에

주석하고 있었다. 그때 경허는 문을 열어 놓은 채 방 안에 앉아 졸고 있고

그를 찾아간 혜월은 문밖에 서 있었는데, 그는 경허를 만나자마자 소리쳐 말

했다.

“스님, 관음보살이 북으로 향한 뜻이 무슨 뜻이옵니까?”

그러자 경허는 졸고 있던 눈을 뜨지도 않은 채 받아 말했다.

“그것 말고 또.”

그러면서 경허가 눈을 뜨고 문밖을 보자 부엌지기 혜월이 아무런 대답 없

이 주먹 하나를 높이 들고 문밖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경허는 다음

과 같이 말했다.

“들어와 앉아라.”

혜월을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앉게 함으로써 마침내 혜월은 경허의 수법제

자가 된 것이다.

천진불 혜월은 ‘청빈의 혜월’로도 불리고 있다. 정혜사에 있을 무렵 하루는

도둑이 들었다. 양식을 훔쳐내 지고 가려던 도둑은 가마니가 무거워 홀로 지

게를 지려 했으나 힘에 부쳐 쩔쩔 맸다. 이때 누군가 밤도둑의 지겟짐을 들

어 올려 슬며시 밀어주는 것이 아닌가. 놀란 도둑이 돌아보니 혜월. 그는 놀

란 도둑에게 소리를 내지 말라고 입가에 손을 대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

다.

“쉬잇, 아무 소리도 하지 말고 조용히 내려가게. 양식이 떨어지면 또 찾아

오시게나.”

평생 동안 어린애였으며 어른이기를 거부한 천진불 혜월은 실제로 어린애

들을 자신의 스승으로 삼고 그들의 천진을 엿보면서 세속에 물들지 않았었

다.

■ 사람을 죽이는 칼, 사람을 살리는 칼

- 29 -

경허의 맏제자 수월이 무릇 동물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어 그 사나운 만주

의 개들과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개들을 제도했던 것처럼 혜월도 동물과 즐

겨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한여름이 되면 깊은 산 속의 절에는 여러 가지 짐승이 많이 몰려들게 마련

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뱀이나 구렁이 같은 파충류들은 언제나 집 근처를 맴

돌고 있다. 비만 오면 뱀과 구렁이들은 절 마당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여 비가

개면 온 마당에서 마치 운동화라도 여는 것처럼 득실거리게 마련이었는데

혜월이 그들 앞에 나타나 “사람들이 너희들을 싫어하니 사람들의 눈에 띄기

전에 자리를 피해 도망가라.”고 타이르면 거짓말처럼 뱀과 구렁이들은 풀숲

으로 스스르 사라져버리곤 했다.

이처럼 모든 동물을 사랑하고 모든 동물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혜월

이 그 많은 동물 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동물은 단연 소였다. 혜월은 묶인 소

만 보면 풀어주곤 핶다. 혜월이 가장 싫어한 것은 소를 매어 두는 것이었다.

그래서 혜월은 길을 가다가도 매인 소를 보면 다짜고짜 풀어 놓곤 했다. 그

래서 절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은 혜월이 동네 앞을 지난다는 소리가 들리

면 다투어 뛰어나가 먼저 소부터 감시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혜월이 소를 사랑했다면 모든 소들도 혜월을 사랑했다. 이상하게도 마을에

서 소를 잃어버렸다 하면 그 소는 제 발로 어슬렁어슬렁 혜월이 머무르고

있는 절로 찾아오는 것이어서 소를 잃어버린 마을 사람들은 소를 찾으러 절

로 달려오곤 했는데, 절에만 오면 잃어버린 소를 찾을 수 있었다고 전해지

고 있다.

혜월과 소에 얽힌 유명한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혜월이 말년에 부산 선암사

에 머무르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경허의 세 제자 중 ‘수월이 있는 곳에 두타 수행이 있고, 만공이 있는 곳에

중창 불사가 있고, 혜월이 있는 곳에 사전(寺田) 개간이 있다’는 소문처럼 혜

월은 절 살림에 도움이 될까 하여 밭을 개간하고 스스로 나가 농사일에 부

지런히 정진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농사일이 크게 되니까 자연 소가 필요하

게 되어 혜월이 직접 소시장에 나가 ‘얼룩이’라고 불리는 소 한 필을 사와

기르기 시작했다. 이 얼룩소에 쏟는 혜월의 정은 남다른 것이었다. 손수 먹

이를 끓여주기도 하고, 또 깨끗이 몸을 닦아주기도 했다. 농사 일을 많이 한

- 30 -

날이나 먼 시장에서 장을 보아 짐을 많이 싣고 온 날이면 혜월은 밤늦게

까지 소의 등을 쓰다듬으며 수고했다고 위로하곤 했다. 몇 해를 두고 계속되

는 혜월의 정성이 지극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얼룩소도 혜월의 말씨를 알아

듣게 되었으며 서로 눈빛만 봐도 마음이 통하는 깊은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

다.

그러던 어느 봄날 그 얼룩소가 감쪽같이 없어졌다. 소도둑이 들어 밤새 소

를 몰래 끌고 간 것이다. 온 사내 대중들이 소를 찾으려고 아직 날이 밝지

않은, 마을로 내려가는 여명의 새벽길을 달려가기 시작했는데, 혜월은 방을

나와 뒷짐을 지고 뒷산으로 산보나 하듯 올라가고 있었다.

산정에 오른 혜월은 주위에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두 손을 입가에

대고 소리쳤다.

“얼룩아, 얼룩아아!”

이때 마친 소도둑은 비탈길을 내려가고 있었는데 멀리서 자기를 부르는 혜

월의 목소리를 듣자 끌려가던 얼룩소가 제자리에 멈춰서서 이에 화답하듯

소리쳐 울었다.

“음매애 음매애!”

소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티고, 도둑은 끌고 가려고 고삐를 잡아끌고, 혜

월은 소리쳐 얼룩소를 부르고, 얼룩소는 이에 울면서 화답하고, 그러는 사이

에 날이 밝고 행자들이 그 소도둑을 잡게 되었다.

소도둑을 붙잡아 절로 끌고 온 행자들은 다투어 도둑을 때리기 시작했다.

혜월은 행자들을 꾸짖으며 그 도둑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밤새 소를 끌고 가느라 한 잠도 못자고 얼마나 수고하셨는가. 자, 어서

빨리 일어나 돌아가시게.”

그러면서 도둑의 손에 용돈까지 쥐어 주었다.

혜월이 부산 선암사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하루는 혜월이 법문을

하다말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게는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은 보물이 하나 있다,”

수수께끼와 같은 말이었으므로 이를 들은 사람들이 물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칼이다.”

“어째서 칼이 최고의 보물이라는 말씀이십니까?”

- 31 -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사람을 살릴 수도 있는 칼이기 때문이다.”

부산 선암사에 있는 혜월 선사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천하의 명검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곧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당시 부산에 있던 헌병 대장은 칼에 미친 사람이었다. 그는 직접 허리에

칼을 차고 다니기도 했고 검술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가 이 소문을 듣고 지

방의 군수를 졸라 선암사에 함께 찾아갔다.

헌병대장이 말했다.

“소문에 듣자하니 스님께서는 천하의 명검을 갖고 계시다던데, 부산 지방에

그 소문이 자자하게 퍼져 있습니다.”

“아, 그 칼 말씀이로군요.”

“그 칼을 제게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혜월이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지요. 보여드리고 말구요.”

“저를 따라 오시지요.”

헌병 대장은 마침내 천하의 명검을 볼 수 있다는 흥분으로 혜월의 뒤를 따

라 섬돌 계단을 걸어 축대 위까지 올라갔는데, 갑자기 앞서 걷던 혜월이 돌

아서면서 그의 빰을 후려쳐 축대 밑으로 떨어뜨렸다.

무방비 상태로 당한 헌병대장은 그대로 섬돌 아래로 비명을 지르면서 굴러

떨어졌다. 졸지에 수모를 당한 헌병대장은 벌떡 일어서서 허리에 찬 칼을 빼

들어 혜월을 베려고 했다. 그러나 먼저 혜월이 다가가 넘어진 헌병대장을 부

축해 일으켜 세워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이 내가 갖고 있는 당신이 보고 싶어 하던 명검이오. 내가 당신을 때

려 계단 아래로 떨어뜨린 손은 당신을 죽이는 칼이며, 당신을 부축하여 일으

켜 세운 손은 당신을 살리는 칼이오.”

이에 크게 느낀바 있어 헌병대장은 혜월에게 세 번 큰 절을 하고 돌아갔다

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사람의 손 끝에 들린 붓이 인간의 희망과 절제와 평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면 그 붓은 사람을 살리는 칼이며, 그 붓이 인간의 분열과 퇴폐와 파괴와 부

도덕을 찬양하고 있다면 그는 이미 자신도 모르게 사람을 죽이는 칼을 휘두

르고 있는 것이다.

- 32 -

두 개의 칼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모두 하나의 칼에서 비롯되는 것이

다. 그 칼이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에 달

린 것이다. 천진불 혜월은 그 위대한 교훈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가르쳐주

고 있는 것이다.

■ 남쪽의 하현달이 되다

혜월은 38년 동안 출가 입산했던 덕숭산 정혜사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줄

곧 한 곳에서만 머무르고 있었다.

혜월이 정혜사를 떠난 것은 1913년, 그의 나이 51세 때의 일이었다.

일찍이 혜월은 수월, 만공과 더불어 언젠가 때가 오면 수월은 북으로 가 상

현달이 되고 혜월은 남으로 가 하현달이 되겠노라 약속한 적이 있었는데,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천진불 혜월은 51세의 나이로 물병 하나와 주장자 하나

를 들고 남방 유랑길에 나선 것이었다.

그가 51세의 나이가 될 때까지 정혜사에서 기다렸던 것은 스승 경허가

그 이전 해에 열반에 들어 더 이상 수법제자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없어 홀

가분해졌기 때문이었다. 혜월은 스승 경허가 열반하자 그의 뼈를 일일이 추

려 다비를 하여 제자로서의 의무를 다하고는 마침내 그 이듬해 2월, 약속대

로 거의 40년 동안 머무르던 정혜사를 버리고 남방으로 운수행각을 떠나는

것이었다. 혜월의 선풍은 남방으로 유랑을 떠난 이후부터 남방에서 크게 떨

치기 시작했다.

그는 통도사, 내원사, 미타암, 범어사, 선암사, 안양암, 파계사, 선암사 등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바람을 크게 일으켰다.

그는 평생 동안 손에서 괭이와 지게와 죽비를 놓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괭

이로는 땅을 가꾸어 농사를 하고, 지게로는 산에 가서 나무를 져 온다. 또

한편으로는 죽비를 들고 젊은 수도자들을 가르치고 깨우치는 데 게을리 하

지 않았다. 혜월은 하루에 두 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았다는데 그중에서 그

가 가장 열심히 했던 것은 땅을 파고 농사를 짓는 일이었다.

혜월은 항상 가는 곳마다 거친 땅을 일궈 논밭을 만들어 놓곤 했다. 그래서

혜월을 ‘개간선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고 말한 백장 스

- 33 -

님의 규범대로 혜월은 항상 손에서 괭이를 놓지 않았는데, 그가 말년에 머무

르던 부산 선암사에서 있었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남아 전해지고 있다.

그는 선암사에 머무르고 있을 때 손수 황무지를 개간하여 2천 평의 논을

만든 적이 있었다. 이 옥토를 마을 사람 중의 한 노인이 노리고 있었다. 그

는 혜월의 천진함을 이용하여 싸게 사기 위해 밤마다 절로 찾아와 논을 팔

라고 졸라댔다.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혜월은 마침내 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주막으로 따라가 술과 고기가 차려진 숭상 앞에서 계약을 하고 말았다. 혜월

은 교활한 마을 사람의 꾐에 빠져 세 마지기 논을 두 마지기 값으로 팔아

넘기곤 논 값을 가지고 밤늦게야 절로 돌아왔다. 혜월은 들고 온 논 값을 제

자들에게 내 놓으면서 “옛다, 여기 돈 있다.”

원래 혜월은 돈에 대해서는 백치였다.

“이게 웬 돈입니까?”

“내가 논을 팔았다. 마을 사람 박 아무개가 밥술이라도 먹겠다고 졸라대

팔아 주어 버렸다.”

느닷없는 혜월의 말에 제자들은 논 값을 헤아려 셈을 해보니 그 마을 사람

이 혜월을 속인 것을 알게 되었다.

“스님, 스님은 속으셨습니다. 논을 세 마지기인데 이 돈은 두 마지기 값밖

에 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일제히 힐난하자 혜월은 마침내 소리쳐 말했다.

“이놈들아 그게 무슨 소리냐? 저 논 세 마지기는 아직 그대로 절 앞에 있

고 여기에는 두 마지기 논 값이 있으니 다섯 마지기 논으로 불어났는데 도

대체 무슨 소리냐?”

그리고는 한 마디 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놈들아 장사는 나처럼 해야 한다.”

혜월의 독특한 산술법은 나 하나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 손해지만 나와 너

가 없는 대승적 입장에서 보면 그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다. 이런 계산

법은 내 것인 논이 남의 것으로 넘어 갔다는 소유의 개념이 없을 때만 가능

한 산술법인 것이다.

1937년 어느봄날, 혜월의 나이 76세 되던 어느 날, 갑자기 그는 자신의

제자였던 운봉을 불렀다.

“큰스님 부르셨습니까?”

- 34 -

운봉이 다가와 묻자 대뜸 혜월은 말했다.

“이제 난 가야겠다.”

그러자 제자가 말했다.

“한 말씀을 하시고 가셔야지요.”

혜월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일체의 법은

본래 그 실체가 없다.

모양이란 원래 허망한 것

이것을 알면 이것이 견성이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본무진실상(本無眞實相)

어상의무상(於相義無相) 즉(卽) 명위견성(名爲見性)

이 시 한 수가 혜월이 남긴 단 하나의 문자로 된 법문이라고 전해지고 있

다. 그렇다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던 혜월의 무식은 위장이었던가.

그로부터 며칠 뒤 혜월은 동승 때부터 그토록 좋아하던 솔방울을 줍기 위

해 선암사 뒷산을 올랐다. 산을 뒤져 솔방울을 줍고 따고 하여 자루 하나에

잔뜩 솔방울을 채우고서 산을 내려오던 혜월은 밑바위 앞에 이르러 소나무

지게를 붙들고 그대로 서버렸다. 잠시 쉬어 가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대로

그는 영원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솔방울이 들어 있는 자루를 어깨에 멘

채 그대로 서서 열반에 들어간 것이었다.

마침 그 옆을 지나던 여자 신도 하나가 너무나 반가워 혜월의 곁으로 뛰어

가 “스님!”하고 부르면서 혜월을 몸을 흔들었을 때 이미 그의 몸은 차디차게

굳어 그대로 하나의 석불이 되어 있었다. 이때가 1937년 6월 16일, 그의 나

이 76새 때의 일이었다.

대구 팔공산 파계사에 딸린 작은 암자인 미타암에는 혜월 선사의 탑비가

세워져 있는데 그 비에 새겨진 비문은 다음과 같다.

법호는 혜월, 법명은 혜명(慧明)이며 서기 1862년 6월 19일 충청남도 예산

군 덕산면 신평리에서 출생했다. 속성은 평산 신(申) 씨, 11세에 덕숭산 정

혜사에서 출가 입산하고 15세에 혜안 선사를 은사로 하여 삭발했다. 24세에

- 35 -

경허 선사의 법문을 들은 다음 크게 발심하고 의정(擬精)을 내어 지게를 지

나, 밭을 매나 의정을 보고 의정으로 가며 맹렬한 정진을 계속한 지 7일이

되던 해 마침 미투리를 삼다가 크게 깨졌다.

이후 38년 동안은 덕숭산 정혜사에서 그대로 머물러 계시다가 51세 되던

1913년 2월에 남방을 유랑하면서 이르는 곳마다 크게 선풍을 일으키셨다.

통도사, 내원사, 미타암, 범어사, 선암사, 안양암 등을 두루 돌아다니시면서

도제 양성과 중생 교화에 힘쓰시다가 서기 1937년 6월 16일 부산 선암사

밑 바위 앞에서 솔방울이 가득 찬 자루를 메고 선 채 그대로 열반에 들다.

그때 나이 76세, 중의 나이 승랍으로는 62세, 수법제자는 20인이 있다.

2013. 6. 7 끝

* 다음에는 만공선사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36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