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여덟 단어 (2)

보해성산 2013. 7. 7.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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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단어 (2)

■ 박웅현 지음

5강 현재(現在) - 개처럼 살자

저도 완벽하지 않지만 광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직업, 인문을 이야기하는 책을 냈다는 이유로 강의를 자주 하게 되는 편입니다. 그중에서도 지방에서 강의 요청을 받으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가려고 합니다. 얼마 전 울산에서 금요일, 토요일 이틀에 걸쳐 두 번의 강의를 하고 식사를 하는 데 그 자리에 계시던 한 분이 “서울만 사람 사는 게 아니거든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에 매우 동의합니다. 그래서 저는 서울이 아닌 곳을 우선 순위에 두려고 합니다. 서울 분들은 저보다 훌륭한 다른 분들의 강의를 자주 들을 수 있으니 그렇게 억울하지 않을 겁니다.

현재를 말하기 전에 강의 이야기를 먼저 꺼낸 이유는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박경철, 안철수 두 사람의 ‘청춘 콘서트’를 기억하실 겁니다. 멘토들의 강연 열풍을 불러일으킨 장본인들이죠. 이분들이 콘서트를 계획한 밑바탕에는 ‘서울만 사람 사는 게 아니거든예’가 깔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힘들어 하는 청춘들을 위해, 서울의 청춘만이 아닌 전국의 청춘을 위해 여름방학 석 달 동안 전국 25곳을 돌겠다는 담대한 계획을 세우고 실천했습니다. 그리고 영광스럽게 저도 그중 한 자리에 초대되었습니다.

안면이 있었던 박경철 씨가 콘서트에 각 도시마다 게스트를 초청하는데 저에게 한 번 와줄 수 있겠냐는 제안을 했습니다. 저는 흔쾌히 가겠다고 했고요.

■ 답은 내 앞에 있다

박경철 씨와는 TV프로그램 진행자와 게스트로 처음 만났습니다. 그분이 인터뷰어고 제가 인터뷰이었죠. 독서량이 워낙 많은 분이라 진행도 매끄럽게잘 하시고, 이야기도 잘 통해서 아주 즐겁게 촬영을 했습니다. 그때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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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박 CD님은 계획이 뭡니까?” 였습니다. 저는 “없습니다. 개처럼 삽니다”라고 대답했어요. 부연 설명을 부탁해서 “개는 밥을 먹으면서 어제의 공놀이를 후회하지 않고 잠을 자면서 내일의 꼬리치기를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라고 덧붙였죠.

저는 개를 길러봐서 잘 압니다. 오랫동안 데리고 있다가 묻어준, 그 개를 키울 때 퇴근해서 집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반갑다고 제 얼굴을 핥고 나서야 짓기를 멈췄습니다. 그때 보면 핥는 일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것처럼 최선을 다해요. 그리고 밥을 주면, 이 세상에서 밥을 처음 먹어보는 것처럼 먹죠. 잠 잘 때도 그냥 잡니다. 공놀이 할 때는 그 공이 우주예요. 하나하나를 온전하게 즐기면서 집중하죠.

밀란 쿤데라도 똑같은 걸 느꼈는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카레닌이라는 개를 이야기하면서 ‘개들은 원형의 시간을 살고 있다. 행복은 원형의 시간 속에 있다’라는 말을 합니다.

직선의 시간은 행복을 정확히 알 수 없어요.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개들은 원형의 시간을 살아요. 잘 때는 죽은 듯이 자고, 먹을 때는 맛있게, 산책을 나가면 온 세상을 가진 듯 뛰고, 일상의 모든 일이 감동입니다.

그 원형의 시간 속에서 행복을 보는 겁니다. 순간에 집중하면서 사는 개. 개처럼 살자. ‘Seize the Moment, Carpe diem (순간을 잡아라. 현재를 즐겨라)’의 박웅현 식 표현이자, 제 삶의 목표입니다.

참고로 이 말은 ‘현재를 살아라. 순간의 쾌락을 즐겨라’가 아니라 ‘순간에 최선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다른 책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한형조의 ‘붓다의 치명적 농담’을 보면 어느 선사에게 누가 묻습니다.

“스님도 도를 닦고 있습니까?”

“닦고 있지.”

“ 어떻게 하시는데요?”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

“에이 그거야 아무나 하는 것 아닙니까? 도 닦는 게 그거면, 아무나 도를 닦고 있다고 하겠군요.”

“그렇지 않아. 그들은 밥 먹을 때 밥은 안 먹고 이런 저런 잡 생각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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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고, 잠 잘 때 잠은 안 자고 걱정에 시달리고 있지.”

현재에 집중하라는 말입니다.

■ 만물은 준비되어 있으니 나만 성의를 다하면 된다

萬物 皆備於我矣 만물 개비어아의

反身而誠 樂莫大焉 반신이성 낙막대언

‘맹자’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맹자를 완독한 적도 없는 제가 아는 척 할 수 있는 작은 지식이지만 제게 선명한 도끼의 흔적을 남긴 구절이기 때문에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해석을 해보면 이런 의미입니다.

‘만물의 이치가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으니, 나를 돌아보고 지금 하는 일에 성의를 다한다면 그 즐거움이 더 없이 클 것이다.’

見 강의 때 말씀드린 것을 기억하십니까? 제가 냈던 아이디어들이 전부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주변에 다 준비가 되어 있었던 거죠. 말하자면 제가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던 행동을 돌아보고, 그 행동이 왜 일어났는지 성의를 다해 생각해보면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을 깨닫고 다시 생각해보니 정말 대단한 문장이었습니다.

마흔의 박웅현 이야기를 해드릴까요? 우리는 마흔을 ‘불혹’이라고 하잖아요? 불혹(不惑), 흔들림이 없다는 뜻입니다. 마흔이 되기 전에는 실제로 그 나이가 되면 정말 흔들리지 않을까 궁금했어요. 그래서 마흔이 되면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를 다시 읽겠다고 다짐했죠. 소설은 폴 고갱을 모델로 한 화가가 주인공인데, 그는 마흔에 가정과 사회생활을 정리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저는 20대에 이 책을 읽으면서 마흔을 마지막으로 봤습니다. 마흔에 인생의 다른 문을 열지 않으면 그때부터 책임이라는 중압감이 나를 짓눌러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추측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마흔이 되면 다시 이 책을 다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리고 정말 마흔이 되어 이 책을 다시 읽었어요. 그런데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다른 선택을 못 하겠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마침 그 책을 읽는 순간 우리 가족이 미사리 조정 경기장 잔디밭에 있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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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그때 딸아이가 열 살이었고, 자전거를 타고 있었고. 앞에서 말한 제 얼굴을 핥던 그 개가 자전거를 쫓아다니고 있었죠. 행복한 가정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어요. 그런데 책을 덮고 그 모습을 보면서 혼자 생각했어요.

‘이거 버릴 수 있어? 옆에 앉아 있는 아내와 자전거를 타고 있는 딸, 저 개와 함께하는 이 생활을 버릴 수 있어? 이걸 다 버리고 마다가스카르로 갈 수 있어?’

저는 제 삶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삶이 멋져 보였습니다. 서른 평 아파트에서 5시에 일어나 출근했다가 풀리지 않는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퇴근해 소주 한잔 마시고 집으로 가는 삶이 맞는 건가 싶었습니다. 내 인생을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늘 고민했죠. 저의 마흔이 그렇게 흔들림으로 가득 찼어요. 그러니 불혹이 어떻게 오겠습니까?

불혹은 그 만혹의 시기로부터 꼭 10년 후에 찾아왔습니다. 제 나이 오십에 드디어 불혹을 맞은 것이죠. 저는 이제 크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제 인생을 인정하고 긍정하기 시작했어요. 단, 여기서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삶의 부정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의 긍정과 내 삶의 긍정을 의미합니다.

비로소 나의 현재에 대한 존중이 생긴 겁니다.

■ 내 답이 옳다

완벽한 선택이란 없습니다. 옳은 선택은 없는 겁니다. 선택을 하고 옳게 만드는 과정이 있을 뿐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고 그걸 옳게 만드는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건 뭐냐. 바로 돌아보지 않는 자세입니다. 만약 그 남자와 결혼을 결정했어요. 그래 놓고 다른 남자가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혹은 결혼하지 않고 달리 살았다면, 하고 생각하면 별것 아닌 일로 부부 싸움이 시작되겠죠. 그건 미련한 짓이잖아요? 유학 생활을 하면서 회사에 있었으면 이 고생 안 할 텐데, 하고 후회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죠. 그러니까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그 선택을 옳게 만들려면 지금 있는 상황에서 무엇이 최선인지 생각하고 실천하는 게 제일 좋은 답이에요.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에 나오는 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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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내가 차지한 이 공간적 지점에, 시간 속의 이 정확한 순간에 자리 잡고 있다. 나는 이 지점이 결정적이지 않은 것을 허락할 수 없다.’

‘삶은 현재 순간들의 지속적인 일어남이다.’

‘그대 온 행복을 순간 속에서 찾아라.’

‘결코 미래 속에서 답을 찾으려 하지 말라. 모든 행복은 우연히 마주치는 것이다.’

‘우리는 순간에 찍히는 사진과 같은 생을 벗어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때로는 오직 그 순간에만 마음을 쏟아야 한다.’

샤르트르의 이야기도 한 마디 들어보죠.

‘인생은 잘 짜인 이야기보다는 그 하나하나가 관능적인 기쁨인, 내일 없는 작은 조각들의 광채다.’

맞습니다. 우린 순간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어떤 순간이 보배로운 순간인지 모릅니다. 그러니 그 순간을 우리가 보배롭게 보면 됩니다. ‘후회는 또 다른 잘못의 시작일 뿐’이라고 나폴레옹이 말했답니다.

‘살아 있다는 그 단순한 놀라움과 존재한다는 그 황홀함에 취하여’

제 책상 뒤에 크게 붙여 놓은 글로 김화영(작가, 41년 생, 행복의 충격, 다다를 수 없는 나라, 프랑스의 현대소설 등)의 글입니다. 살아 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는 몰라요. 죽기 직전에야 압니다. 지금 살아 있다는 놀라움, 존재하는 황홀함, 이 순간에 취해 있어야 합니다.

‘책은 도끼다’가 출간 되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인문학 관련 고정 코너를 진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한 번은 청취자로부터 “인문학을 하면 밥이 나오나요?”라는 짓궂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잠깐 생각하다가 답을 했죠. “인문학을 해서 밥이 나오는 경우도 있고 안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인문학을 하면 밥이 맛있어집니다.”라고

이건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인데요. 어느 날 아침에 수영을 다녀와서 밥을 먹는데 스마트폰으로 신문기사를 읽고 있었어요. 아내는 옛날에는 신문 보면서 밥을 먹더니 이제는 스마트폰이냐며, 기껏 차려줬는데 제대로 먹지 않는다고 잔소리를 했습니다. 듣는 둥 마는 둥, 먹는 둥 마는 둥 몇 개만 더 보고, 하다가 문득 이러지 말자 싶었습니다. 그래서 휴대폰을 내려놓고 된장찌

개를 떠서 입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좀 전에 먹었던 찌개와 맛이 전혀 달라요. 밥을 먹는데, 쌀알이 하나하나 터지는 느낌이 얼마나 좋은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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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 식사에서 저는 된장찌개를, 밥과 반찬의 진짜 맛을 온전히 즐길 수 있었습니다. 개처럼 먹었죠. 먹는 것에만 집중하면서. 똑 같은 순간인데 스마트폰을 보면서 먹을 때와 밥에 집중해서 먹을 때가 전혀 다릅니다. 법정스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풍부하게 소유하는 게 아니고 풍요롭게 존재하는 거예요. 그날 아침은 어떤 순간보다 풍요로웠습니다.

■ 삶은 순간의 합이다

답이 내 앞에 있다는 사실, 현재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 행복합니다. 봄이 어디 있는지 짚신이 닳도록 돌아다녔건만 정작 봄은 우리 집 매화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다지 않습니까? 우리 집 앞 언덕길에 특별할 것 없는 가로수들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가로수들이죠.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무것인 게 인생이라고 말씀드렸었죠?

며칠 전에 아내와 차를 타고 그 언덕길을 내려가는데 아내가 말해요. “어? 여기 가로수도 단풍이 참 예쁘다.” 순간 또 깨달을 거죠. 아, 여기에 있는 작은 가을을 나는 왜 가을이라고 치지 않았을까? 왜 그 너그러운 가을이 내장산에만 온다고 생각했을까? 여기에도, 내 집 앞에도 성큼 가을이 와 있었구나. 현재에 대한 존중. 내 눈앞에 있는 것들에 대한 존중, 결국 見과 일맥상통하는데, 그냥 흘려 보내지 말고 존중해서 잘 보아야 합니다.

“머물러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파우스트의 한 구절이에요. 자신이 갖고 있는 욕망의 크기를 아는 파우스트는 스스로 결코 만족을 모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메피스토펠레스와 내기를 하죠. 악마의 힘을 빌리는 대가로 만약 자신의 삶에 만족해 “머물러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라고 외치면 영혼을 가져가도 좋다고 합니다.

매 순간이 머물러라 아름답구나. 라는 것은 밥이 진짜 맛있구나. 해가 뜨는 게 기적 같구나 라면서 사는 개와 같은 삶의 태도이죠.

저는 딸을 키우면서 늘 아내에게 삶을 경주로 보지 말자고 말했습니다. 삶은 순간의 합이지 결코 경주가 될 수 없어요. 딸아이가 중3이었을 때 20일 동안 세 식구 같이 유럽 여행을 떠나자고 했더니 아내가 저한테 미쳤다고 하더군요. 20일이면 영어 수업, 수학 수업 몇 시간을 빠져야 하는지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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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 그 20일 때문에 아이가 뒤처질 수 있다고 걱정을 하더라고요. 아내의 이야기는 만약 대학이라는 점을 찍어 달린다면 맞는 말일 겁니다. 하지만 삶이 순간의 합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기억에 남을 만한 순간을 아이한테 얼마나 만들어 주느냐가 학원에서 보내는 20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설득을 해서 여행을 갔는데, 그 사이 아이의 키가 4Cm가 자랐더라고요. 기적이죠. 물론 잊지 못할 좋은 기억도 많이 담아 왔고요.

여러분은 어떤가요? 삶을 달리기만 하나요?

만약 삶은 순간의 합이라는 말에 동의 하신다면, 찬란한 순간을 잡으세요. 나의 선택을 옳게 만드세요. 여러분의 현재를 믿으세요. 순간순간 의미를 부여하면 내 삶은 의미 있는 삶이 되는 겁니다. 순간에 이름을 붙여주고 의미를 불어넣으면 모든 순간이 나에게 다가와 내 인생의 꽃이 되어줄 겁니다.

당신의 현재에 답이 있고, 그 답을 옳게 만들면서 산다면 김화영의 말대로 ‘티 없는 희열’을 매 순간 느낄 겁니다. 티 없는 희열로 빛나는 관능적인 기쁨에 들뜨는, 예외 없는 작은 조각들의 광채가 온전히 여러분의 인생을 빛내기를 바랍니다.

6강 권위(權威)

- 동의되지 않은 권위에 굴복하지 말고, 불합리한 권위에 복종하지 말자

우리는 왜 어떤 직함 앞에서 약해질까요? 판사, 의사, 변호사, 교수……. 그리고 우리는 왜 대학 이름 앞에서 약해질까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 그리고 우리는 왜 어떤 회사 이름 앞에서 약해져야 하는 걸까요? 삼성전자, 조선일보 …….

솔직해집시다. 누구든 한 번쯤 이런 것들 앞에서 약해진 자신을 발견한 적이 있을 겁니다. 오늘은 도대체 왜 ‘권위’ 앞에서 주눅드는지 그 이유에 대해 이야기 해 보려고 합니다.

어떤 직군, 직함 등 그 앞에서 우리가 약해지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다른 나라보다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문턱증후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문턱증후군, 즉 그 문턱만 들어서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믿음에서 시작되는 잘못된 증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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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너무 무조건적으로 어떤 권위를 인정하거나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서울대학교가 마치 대학의 전부인 양 교내 신문사 이름이 ‘대학신문’인 것도, 청와대를 BH(Blue House)니 높으신 분들 이름을 JP니 YS니, 회장 이름마저 OJ, KM 이렇게 범인들이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될 이름처럼 취급하는 것,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는 어디서건 꼬물꼬물 흘러 나오는 그 얇은 권위의식이 싫습니다.

■ 문턱증후군

판사증후군, 대학증후군, 이 이야기는 우리 생각 저변에 ‘아, 저 학교 간 사람은 다 똑똑해. 의사가 된 사람은 다 존경할 만해’라는 식의 생각이 깔려 있다는 거죠. 이런 단순 도식이 있을 수 있나요? 아니 인생이 이렇게 단순한가요? 인생은, 사람은, 절대 단순하지 않아요. 판사 중에 후진 판사는 정말 후져요. 의사 중에 무식한 의사도 많고요. 뉴스 사회면에 나오지 않습니까? 자신이 돈을 벌어다 주는 데 아내가 집 열쇠, 차 열쇠, 병원 열쇠 가져 오지 않았다고 아내를 때리는 의사 이야기요. 이건 무식한 사람이잖아요. 법조계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살펴보세요. 떡검, 개인 사찰 등의 뉴스 기사가 많습니다. 이런 일련의 일들이 정상적이고 올바른 사람들이 하는 걸까요? 이런 검사, 판사보다 평범한 직업이라도 열심히,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이 훨씬 멋진 게 아닐까요? 멋지고 말고의 문제는 직업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떻게 서울대 학생들이 다 똑똑하겠어요? 그런데 우리 머릿속에는 이미 서울대 학생이라면 다 똑똑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있어요. 십대 후반부터 이런 시선을 받고 어른이 된 사람들은 스포일드 어덜트(Spoiled Adult)가 될 가능성이 커요. 스포일드 어덜트,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없고 인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을 말하죠. 위에서 말씀드린 사람을 패는 의사, 정직하지 못한 검사 등이 다 그런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제 강의를 들으러 오신,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대부분 저에 대한 호감이 있을 텐데 감사한 일이고, 저도 잘 하고 싶어요. 여러분께 좋은 샘플이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무조건적으로 저를 믿지 마세요. 책 한 권 읽고 사람을 알 수는 없습니다. 한 분야에서 오래도록 일했고, 인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니지만 주머니에 손 넣고 계단을 오르다가 넘어져서 머리에 반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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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기도 해요. 박웅현이라는 사람이 생각보다 후진 사람일지도 몰라요. 내가 옳다는 게 다 옳지 않아요. 어떤 부분에서는 잘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잘못도 해요. 또 어떤 부분은 신뢰할 만하지만 어떤 부분은 허술하기도 해요. 그러니 이걸 나눠 볼 줄 알아야 하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 완벽하게 불완전한 사람들입니다. 문턱증후군 때문에 문턱을 넘은 일부 사람들은 완전할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믿지 마세요. 회장님이 전지전능 하지 않아요. 물론 존경스러울 수도 있지만 모든 말이 옳고, 살수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에요. 판사도, 검사도, 의사도, 서울대생도, 회장도 나보다 낫지만 또 한 편 나보다 못한 부분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우리는 어떤 문턱을 넘은 사람들을 볼 때 나보다 나은 부분만 봅니다. 그래서 그들 또한 자기 자신이 진짜로 뭇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해요. 언젠가 이름난 진보인사가 이런 말을 했어요.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뭘로 보고 말이야?” 저는 그 소리가 충격적이었고 매우 실망스러웠습니다. 본인은 국회의원 문턱을 넘었다는 거죠. 국회의원을 뭘로 보긴 뭘로 봅니까? 국회의원은 국회의원일 뿐입니다. 국회의원이라도 인격이 못난 사람들은 누구보다 후지고, 훌륭한 사람들은 누구보다 훌륭해요.

드라마를 볼 때도 피식 코웃음을 치게 되는 장면을 종종 보는데요. 드라마에서 회장님 댁 참 자주 나옵니다. 으리으리한 저택 거실에서 엄마와 아들이 이야기하다가, 누가 오는 기척이 나면 엄마가 확인을 하고 “얘 회장님 오셨다.” 이러고 남편을 맞아요. 이게 문제입니다. 회사에서나 회장이지 집에 오면 남편이고 아버지입니다. 그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집에서도, 화장실에서도 회장인가요?

비틀스 멤버들 중 폴 매카트니 에게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에게는 엄청난 유산이 있다. 그 유산에 주눅들지 않느냐?” 라고요. 이 물음에 폴 매카트니가 한 말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잘 압니다. 그래서 나는 안전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매카트니라는 스타 입장에서도 그리고 ‘나’라는 입장에서도, 이런 대중적인 스타로서의 매카트니와 나를 분리시킬 필요가 있어요. 스타로서의 업적에 대해서는 기쁘고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때로는 감격합니다. 하지만 집으로 가면 ”난 내 이름을 딴 행성도 있지“라고 생각하지는 않죠. 난 여전히 리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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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버스를 타고 다니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매카트니라는 스타와 자기 자신을 이렇게 분리시켜 말했습니다. 대중적인 스타로서의 매카트니는 자기 이름을 딴 별도 가진 사람이지만, 일상의 매카트니는 평범한 사람이죠. 사람들은 그걸 분리 못 하고 자기자신의 신화를 믿기 시작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권위의식을 잘 고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스스로 없애나가야 합니다.

엘리베이터에서 사장님이나 회장님 만나면 당당하게 인사도 하세요. 어쩔 줄 모르고 구석에 서 있지 말고, 이야기를 나누면 되는 거죠. 어떤 상황에서도 비굴하게 굴복하지 마세요. 똑똑한 젊은 사람들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인생이 너무 슬퍼지는 것 같아요.

빌 게이츠 스피치를 듣고 온 사람한테 들은 이야기입니다. 워낙 인기 있는 강연이다 보니 사람들이 1시간 30분씩 줄을 서서 기다렸답니다. 뒷목이 볕에 탈 정도였다고 해요. 그런데 그가 서 있던 줄 저 앞에 어느 회사 부장이 서 있었대요. 그래서 그 부장 강연 들으러 왔나보다 했는데, 강연시간 5분 전에 그 회사 회장이 오고 그 부장이 자리를 비켜주더랍니다. 그 부장이 미리 와서 회장 대신 줄을 서 있던 거죠. 그런데 그 부장이 돌아나오는 길에 자기 머리를 치길래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일어서서 나가는 모습을 회장님께 보이지 말아야 했는데 실수 했다며 속상해 하더랍니다. 회장님이 부담스러우시면 안 되니까요. 무섭지 않은가요? 실제로 대한민국에 이런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고 있어요.

제가 다니고 있는 광고회사 TBWA의 월드 와일드 CEO가 ‘장 마리드루’라는 사람이에요. 업계사람들 모두가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회사를 찾아와서 전사팀장 회의에서 잠깐 스피치를 했어요. 그때 손을 흔들면서 회의실로 들어와 편안하게 이야기 하는 중에 두 가지 인상적인 말을 했어요.

“다른 문화를 접할 때 우리에겐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호기심과 존중, 그리고 윗사람이 될수록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재능을 사는 일입니다. 프랑스 속담에 ‘재능은 다른 사람들의 재능을 발견하는 것이다’ 라는 말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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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기득권 세력은 고분고분한 사람을 원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도발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될 테니까요. 때문에 권위를 보이면서 복종하고 따라오라고 무언의 협박을 하죠. 우리는 그런 가짜 권위들을 검증하는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우리를 무서워하게 해야 해요. 무조건 복종하는 사람들을 무서워하진 않아요. 회장님에게도 건의할 수 있는 거예요. 아닌 건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어요. 상대 눈치를 보는 가장 큰 이유는 돈을 주는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일 텐데, 우리는 공짜로 일을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쪽의 시혜를 받는 게 아니란 말이죠. 정당하게 일을 하고,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받는 것이니 할 말은 해야 하는 겁니다.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이 먹어 윗것이 되었을 때 권위를 부리지 않는 태도도 중요합니다. 권위는 우러나와야 하는 거예요. 내가 이야기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상대가 인격적으로 감화가 돼서 알아줘야 하는 거예요. 그게 권위입니다.

■ 영어 강박증

한번은 대중 강연을 갔을 때인데 객석에 3천여 명이 앉아 있고 세 명의 강사가 강연을 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외국인이었어요. 모든 청중이 한국 사람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한국말 강연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외국인의 강연은 통역사가 통역을 해주었고요. 강연이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에 아주 똘똘해 보이는 여학생이 손을 들더니 외국인한테 질문을 했어요. 아주 유창한 영어로요. 그 외국인도 영어로 답해줬고요. 그 여학생은 왜 영어로 질문을 해야 했을까요? 3천 명의 청중이 모두 영어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통역사가 없는 것도 아닌데요. 여기는 대한민국입니다. 대한민국 사람이 강의를 들으러 가서 영어를 몰라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야 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영어 권위가 기승을 부립니다.

1930년생인 우리 어머니는 그 시절에 대학까지 나온 지식인이시지만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어머니는 외계인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영어 때문에 말이죠. 주차장에 가면 IN, OUT이라고 써 있어요. 영어를 모르는 사람은 어쩌라고요? 이런 불친절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도 자기나라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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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삿짐 센터 차에 ‘Move Management Specialist' 라고 쓰여 있고, 유치원 버스에 ’Great Teacher, Smiling Kids, Nice School'이라고 써 있더군요. 아파트의 이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랑빌, 쌍떼빌, 브라운스톤, 자이, 힐스테이트, 시어머니들이 집을 못 찾게 하기 위한 며느리들의 음모라지만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예요. 대우, 대림, 삼성, 현대 아파트는 어디 갔을까요? 한국통신은 이제 KT예요. 한국전력이라는 이 멋진 이름 대신 우리는 ‘캡코(KEPCO)’라고 부르죠. 남양알로에라는 브랜드 가치가 있는 이름이 ‘유니베라(UNIEVERA)’가 됐고, 새마을 금고는 ‘MG’, 주택공사가 ‘LH’입니다. 농촌진흥청 사이트에 제일 좋은 과일을 기른 농부에게 주는 상 이름이 탑 푸르트(Top Fruit) 인 걸 확인하는 순간, ‘아, 이건 영어에 대한 강박이다’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CF 감독 김규환 씨와 호주로 촬영을 갔어요. 촬영장에 외국인 모델들이 캐스팅을 위해 찾아왔어요. 180Cm가 넘는 금발의 아가씨들이 쭉 서 있으니까 이쪽에서 기가 죽었죠. 그런데 김 감독은 “어, 그래 이 친구 괜찮네”라면서 한국어로 의견을 말하고 통역을 시켰어요. 그 눈빛에 모델들이 압도돼서 떨더라고요.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나요? 외국인이라고, 외국인 모델과 일을 한다고 해서 모든 말을 꼭 영어로 할 필요가 있을까요?

오해마세요 저는 영어 공부를 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영어 앞에 주눅들지 말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나의 필요에 의해 영어를 공부하되, 한국 사람으로서 영어를 모른다고 창피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영어 권위에도 저항할 필요가 있어요. 영어는 수단일 뿐이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영어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제가 전에 썼던 ‘언문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를 보여 드릴게요.

언문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새삼스레 국어순화운동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多있다. We하여, e편한 세상, 따위의 말을 만들어서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세상 더 복잡하게 만드는 일이 우리 광고인이 하는 일의 일부임을 생각해 볼 때, 국어순화운동 같은 것은 후안무치의 짓일 뿐이다. 혹, 내가 그 정도 뻔뻔스럽다 해도 그래서 국어순화운동을 한다고 해도, 국어가 순화될 가능성은 우리 정치가 순화될 가능성만큼이나 희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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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언어는 살아 있는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쓰는 말이 표준어가 된다는 점에서 언어는 집단의 습관일 뿐이다. 집단의 습관이 ‘안냐세염! 따랑해, 당신은 내꼬얌!“ 이라면그냥 그런 것이다. 그렇게 언어는 변해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새로운 언어들이 교과서에 실리고 ’안녕하세요‘ ’사랑해‘ ’내거예요‘는 하염없이 고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얼짱‘인 ’샘‘에 대한 짝사랑을 ’엠창까고‘ 회사에서 직원들은 밥 맛없는 ’찌질이‘ ’국잼‘의 ’꼬진 업무지시를 ‘깡’으로 ‘씹을’것이다. 바야흐로 채팅용어는 표준어를 향한 장정을 시작했다.

그들은 이제 집에서 KT전화, 밖에서는 KTF 혹은 SKT, LGT의 자동전화로 삼성 SDI가 생산한 모니터를 통해 본 TV드라마 에 대해 수다를 떨 것이다. 그리고 ‘CJ’가 만든 ‘팻다운' 음료를 마시고 또 언젠가는 ’KT&G 가 생산한 담배에 대한 유혹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엄마와 함께 ‘이마트’나 ‘코스트코’에서 ‘쇼핑’할 것이고 또 가끔은 ‘케이블’ 방송 ‘홈쇼핑 채널’을 이용하기도 할 것이다. ‘빕스’ ‘스카이락’ ‘아웃백스테이크’ ‘TGIF’‘씨즐러’ 베이건스 등에서 친구를 만나 ‘테크노 마트에 있는 ’CGV‘나 ’코엑스에 있는 ‘메가박스'에서 ’러브엑추얼리‘나 ’올드 보이‘ 같은 영화를 볼 것이다.

우리 시대는 지금 영어를 편식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언어습관은 ‘햄버거’와 ‘치킨’을 좋아하다 체형이 망가지는 아이들을 닮아가고 있다. 주기적으로 단 것을 먹어야 하는 당뇨병 환자처럼 주기적으로 영어를 쓰지 않고는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두 세 장 짜리 ‘애드브리프’를 쓰는데 박경리의 ‘토지’ 21권에 쓰인 것보다 훨씬 많은 영어 단어를 쓰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말의 건강을 잃어가고 있다.

“고려청자 매병을 바라보고 있으면 고요의 아름다움 속에 한가닥 부푼 정이 엷은 즐거움마저 풍겨준다. 부드럽고 흠흠한 병 어깨의 곡선이 허리로 흘러서 다시 굽다리로 벌어진 안정된 자세도 빈틈이 없지만, 그 위에 기품있게 마감된 작은 입의 조형효과는 이 병의 아름다움을 거의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해준다.”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서서’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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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읽다 보면 문장에 기름기가 흐르기 위해서 반드시 영어라는 ‘버터’가 필요한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느낄 수는 있되,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하긴, 그 아쉬움 자체가 사치인지도 모른다. 내 직업이 이미 ‘카피라이터’이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데 무엇을 더 기대하겠는가?

누군가 말했다. ‘언문’의 시대는 끝났다고……. 쓸 데 없는 생각일랑 빨리 접어버리고, 'KTF' ‘MNP’ ‘캠페인’의 'TV-CM' 'PPM'에나 빨리 들어가야겠다.

광고회사에 다니는 분들이라면 이해하실 텐데. 제 직업은 아주 철저한 ‘을’입니다. 그래서 그 ‘갑을관계’를 견디지 못하고 능력 있는 많은 후배들이 업계를 떠났습니다. 실제로 상도의에 어긋나는 비합리적인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5시에 회의 약속을 잡아 놓으면 한 시간은 기다리고 있어야 광고주가 나타난다든지, 최선의 노력을 다해 만들어 가지고 온 프리젠테이션을 무성의하게 듣는다든지 별별 일이 다 있죠.

광고회사에는 갑도 있지만 을도 있습니다. 이렇게 분류하는 게 우습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굳이 나눈다면 우리와 일을 함께하는 프로덕션 스테프들이 을의 입장이 되겠죠. 저는 그분들을 대할 때 조심스러운 태도를 갖추려고 노력합니다. 정말 노력해요. 하지만 나도 모르게 풀어질 때도 있어요. 광고주나 어느 회장을 만날 때 권위에 기죽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도 어느 새 긴장하고 있고, 프로덕션 사람들을 만나면 저도 모르게 앉는 자세부터 편안해 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신경을 쓰고 긴장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팀원들에게도 “갑을 만날 때에는 을처럼 대하고 을을 만날 때 갑처럼 대하라”라는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이건 일을 할 때 아주 중요한 덕목입니다.

저는 틈만 나면 후배들에게 강요된 권위에 저항하고 동의된 권위에 굴복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도 자신한테 강요되는 권위, 긴 복도, 복잡한 의전, 회장님, 판사라는 껍데기뿐인 직업과 직함에 저항하세요. 그런데 판사가 정말 속까지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고 판단이 되면 그 권위에 굴복해야죠. 회장님이 회사를 일군 역사를 보니 존경할 만하다 생각되면 굴복하고, 다음 날 회사 안건에 대한 회장님 판단이 옳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도 인정하세요. 우리는 그게 안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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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불완전한데 말이죠.

■ 인생을 가장 멋지게 사는 방법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국기행’에 나오는 말입니다.

“영국인들은 외부의 법규는 모름지기 개인 내부의 입법자에게 비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게 오늘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바깥에 있는 권위는 내 안의 입법자로부터 비준을 받아야 합니다. 비준을 받지 않은 채 무조건 따라서는 안 되죠.

리들리 스콧 감독의 ‘킹덤 오브 헤븐’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올랜드 블룸이 주인공 ‘빌리안’입니다. 그는 원래 대장장이였지만 전쟁에서 훌륭한 전사로 싸웠어요. 전쟁이 끝나고 다시 자신의 삶을 향해 돌아가죠. 그런데 국왕이 십자군 원정을 떠나는 길에 그를 찾아와 ‘예루살렘을 지켰던 빌리안’을 찾아왔다고 말합니다. ‘전사 빌리안’이 필요하다는 이야깁니다. 그 말에 빌리안은 자신은 대장장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왕은 다시 말합니다. “나는 영국의 국왕이다.” 빌리안이 뭐라고 답했을까요? 상대가 왕이니 무릎을 꿇었을까요? 아니오. 그는 곧은 시선으로 왕을 보고 대답합니다.

“……전 대장장이입니다.”

전사 빌리안이 아닌 대장장이 이고자 한 자신의 의지를 짧은 말로 왕의 앞에서 보인 겁니다. 왕은 그의 대답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고 바로 말을 달려 갈 길을 갑니다.

제가 굴복하지 말고 저항하라고 한 대상은 충분히 힘이 센 사람들입니다. 나의 저항으로 상처받을 그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강하게 하셔도 됩니다. 우리가 걱정하고 약해져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는 사람들, 사회의 약자들, 그러한 이들을 무서워하세요. 그 사람들은 무조건적으로 존중하세요. 저기 높은 빌딩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보다 그런 분들을 더 귀하게 여기세요. 그렇게 하면 나도 존중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윗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관철시켜 나가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젊음을 대하는 자세 중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봅니다. 노래 가사에도 있죠. 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고요.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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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강 소통 (疏通) - 마음을 움직이는 말이 힘

처음 소통이라는 단어를 환기하게 된 계기는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의 책 ‘CEO에게 필요한 8가지 덕목’에 대한 서평을 통해서였습니다. 서평에는 피터 드러커가 주장하는 8가지 항목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첫째, ‘무엇을 하고 싶나’보다 ‘무엇을 해야 하나’ 묻는다.

둘째, 무엇이 기업을 위한 길인가 생각한다.

셋째, 계획표에 따라 행동한다.

넷째, 기꺼이 책임을 떠맡고 결정을 내린다.

다섯째,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만든다.

여섯째,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일곱째, 생산적 미팅 시스템을 구축한다.

여덟째, 항상 ‘우리’라고 말한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대부분의 덕목은 이해가 됐으나 다섯째에서 언급한 커뮤니케이션만큼은 선뜻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CEO라는 최고의 결정권자에게 소통이 그렇게 필요할까 싶더군요. 그런데 오랫동안 회사생활을 하고, 윗사람이 되어보니 소통은 불필요한 노동을 없애주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소통을 잘하면 그것만으로 일을 덜 하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 팀이 회의를 한다고 가정을 해보죠. 아이디어를 내야 하는 광고 업무는 소통이 되지 않는다면 손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저는 늘 회의실에 100년 차가 들어간다고 말을 합니다. 보편타당한 경력의 그만그만한 몇 명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 25년차 카피라이터인 저와 17년차 아트디렉터와 15년차 후배 카피라이터 등 그 공간에 있는 사람들의 경력을 합치면 100년 차 경력의 광고인이 들어간다고요.

그런데 만약 100년 차가 회의실에 들어갔는데 가고자 하는 방향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면 100년 차의 전력은 분산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팀 이야기에서 조금 확대해볼까요? 3천 명의 직원이 있는 기업의 CEO가 있다고 합시다. 그 CEO가 직원들에게 일의 목적과 비전을 새워주고, 성취감을 안겨 회사의 발전으로 이어지게 하는 미션을 성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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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해 가장 필요한 게 뭘까요? 바로 소통입니다. 자기 뜻을 정확히 이야기하고 소통하지 않으면 3천 명과 한 방향을 볼 수 없어요.

물론 이 소통은 꼭 회사나 단체에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개인 생활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죠. 부부관계, 친구관계, 육아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소통이 잘 되지 않으면 관계의 난맥상이 생길 것이고 그로 인해 기본 생활이 힘들어 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은 지혜롭게 난관을 헤쳐나가고, 누군가는 헤쳐나가지 못하는 일이 생기는 겁니다. 이렇게 중요한 덕목인데 한편으로는 소통이 잘되지 않는 경우를 봅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 소통이 안 되는 세 가지 문제

0 첫 번째, 서로 다르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개와 남자의 공통점입니다.

털이 많다. / 먹이를 일일이 챙겨줘야 한다. / 시간 내서 놀아 줘야 한다. / 복잡한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 버릇을 잘못 들이면 평생 고생한다.

다음은 남자가 개보다 편한 점입니다.

돈을 번다. /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출입제한을 받지 않는다. / 약간의 난이도가 있는 심부름을 시킬 수 있다. / 혼자 두고 놀러 다녀도 상관 없다. / 생리적 욕구도 해결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가 남자보다 좋은 이유입니다.

두 마리를 함께 키워도 뒤탈이 없다. / 강아지의 부모가 간섭하지 않는다. / 이유 없이 외박하고 돌아와도 꼬리 치면서 반겨준다.

이번에는 남자분들이 공감할 만한 고양이와 여자의 공통점입니다.

세수를 잘한다. / 배고프면 혼자 챙겨 먹는다. / 낮보다 밤을 더 좋아한다. / 열 받으면 할퀸다. / 하루에 열두 번 삐친다. / 변덕이 팥죽 끓듯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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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자가 고양이보다 편한 점입니다.

밥을 할 줄 안다. / 데리고 다니면 재채기 하는 사람 없다. / 나의 분신을 만들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양이가 여자보다 좋은 이유는,

목만 쓰다듬어 주면 행복해 한다. / 무섭고 징그러운 쥐를 잡아준다. / 꼬리만 밟지 않으면 조용하다. / 여자는 종일 잔소리를 하지만 고양이는 종종 애교를 부려 심심하지 않다. / 처갓집 개도 나를 무시하는데 고양이의 어미는 나를 무시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 사이는 개와 고양이만큼 다릅니다. 개와 고양이도 남자와 여자만큼 다르고 말이죠. 연인들이 다툴 때 말이 안 통한다는 말을 하는데, 다르다는 걸 인정하면 소통이 조금 쉬워집니다.

쇼핑을 하러 갑니다. 마음에 드는 머플러를 발견했어요. 저한테 이리 대고 저리 대봐요. 괜찮다고까지 말해요. 그리고 아내는 바로 다른 매장으로 가버려요. 그래서 내가 마음에 드는 거 아니었냐고 묻죠. 그럼 마음에 들었대요. 아니, 그런데 왜 사지 않죠? 저는 쇼핑만 하러 가면 공황장애가 오고 에너지가 뚝 떨어져요. 그래서 빨리 밖으로 나갈 방법만 찾느라. 한 번 보고 마음에 들면 바로 사려고 해요. 반면에 아내는 하나부터 열까지 ‘생각’해서 ‘비교’하죠.

관찰력이 좋으신 분들은 아실 텐데 백화점에 가면 남성복과 여성복 매장의 품목 진열이 다릅니다. 여성복 매장의 액세서리는 피팅룸 근처에 있어요. 여자들은 옷을 입어보고 나오면서 액세서리가 그 옷에 어울리는지 아닌지 확인하고 구입을 하죠. 반면 남성복 매장의 남자 액세서리는 계산대 앞에 있어요. 바지를 계산하려고 섰는데 계산대 바로 앞에 밸트가 있어요. 그럼 집어드는 겁니다.

좀 비약해서 대부분의 남자들은 오래된 친구들과 술 먹는 데 서른 단어면 충분합니다. 잘 사냐. 미친놈. 먹자, 마셔. 이런 몇 가지 단어만 반복하면 됩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쓰는 단어는 감히 제가 아는 숫자들로 생각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아내가 전화할 때 보면 40분을 이야기하고 나서 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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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때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자고 해요. 여태 한 이야기는 뭘까 싶죠. 20년 지기들과 단어 서른 개로 대화하는 남자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0 두 번째,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다

이처럼 소통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나와 다른 상대를 배려하는 게 필요합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같은 말이라도 공간이 다르면 다르게 이해가 됩니다. 그러니 다른 공간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배려가 필요하죠.

제 경험인데 ‘샤니(SHANY)’라는 브랜드를 아십니까? 어릴 적 즐겨 먻던 빵 브랜드입니다. 지금은 식품전문그룹 SPC로 바뀌었는데, 샤니의 슬로건이 뭐냐면 ‘We bake goodness’입니다. ‘우리는 좋은 것을 굽는다’는 뜻이죠. 소통을 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단, 이걸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에 한해서.

어느 날 법성포에 갔다가 터미널에 들렸는데 매점 한 가운데 위에 커다랗게 ‘We bake goodness.’가 딱 써 있는 거예요. 주위에는 아직도 터미널을 ‘차부’라고 부르는 주름 가득한 할머니들이 보따리를 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중앙에 써 있는 영어를 보고 조금 섬뜩했습니다.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면 욕일수도 있는 거 아닌가?

겨울에 코엑스(COEX)에 갔더니, 남자 화장실에 ‘동파방지 관계로 누수함’ 이렇게 쓰여 있었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동파를 막기 위해 남자 소변기에 물을 틀어 놓았으니 잠그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코엑스 남자 화장실을 가장 많이 이용하는 10대, 20대 중 몇 명이 그 뜻을 한 번에 명확히 알 수 있을까요? 전하고자 하는 의미가 ‘잠그면 얼 수 있으니 잠그지 마세요’ 라면. 단순 명료하게 ‘잠그지 마세요’라고 표현 하는 게 낫다고 봅니다. 좀 더 설명을 하고 싶다면 ‘물이 어는 것을 막기 위해 물을 틀어 놓았으니 잠그지 마세요’ 라고 해도 되고요. ‘동파방지 관계로 누수함’은 쓴 사람의 세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말입니다. 읽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이고 그래서 소통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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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세 번째,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도무지 모른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래놓고 자기 말만 합니다. 한 친구가 있는데, 가끔 동네에서 만나 술 한 잔을 하곤 했어요. 그날도 주거니 받거니 소주를 한 잔 하는 데 이 친구가 문득 자기 친구의 아내 이야기를 꺼냅니다.

“웅현아, 내가 그 친구 집에 갔는데 그 와이프가 끝내준다.”

“그래? 뭐가?”

“뭐냐면, 진짜 잘해. 그렇게 잘하는 사람 처음 봤어.”

“그래서 뭘 잘하는데?”

“정말 잘해. 끝내줘.”

“그러니까 뭐가 끝내 주냐고?”

한 30분 정도 그 이유를 집요하게 묻고 나서야 왜 그 사람이 끝내주는지 알게 됐습니다. 친구의 말을 종합해 보면 새벽 한 시에 친구들이 불시에 그 집에 들이닥쳤는데도 그 아내가 술상도 봐주고 남편 친구들이 불편하지 않게 잘 대해줬나 봅니다.

처음부터 생각을 정리해서 자신이 ‘왜’ 그 친구의 아내에게 감동받았는지 설명해줬다면 그 이유를 듣는데 30분이나 걸리지 않았겠죠. 술자리에서 돌아오는 길에 만약 이게 회의였다면 30분은 그냥 죽은 시간이 됐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제대로 소통이 되지 않으면 우리의 시간까지 갉아먹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어요. 조금만 노력하면 불필요한 시간의 낭비를 없앨 수 있는데 말입니다.

■ 소통을 위한자세

0 첫 번째, 다름을 인정하다

첫 번째 문제는 서로 다르다는 걸 인정하지 않아서생기는 소통의 난맥상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역지사지(易地思之)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하는 게 제일 쉽고 좋은 방법입니다.

법륜 스님의 ‘엄마 수업’이라는 책에 인상적인 내용이 있었는데, 아이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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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단치지 말고 내 자신이 아이였을 때에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엄마들은 아이가 1등이 되길 원하고 우등생이 되기를 원하는데 본인은 그랬나요? 엄마 본인은 그러지 못했으면서 왜 아이한테는 강요를 하는 걸까요? 그걸 사랑이라고 말하는데 사랑이 아니에요. 집착일 뿐이죠. 아이 입장이 돼서 봐줘야 해요.

또 그 책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이들을 키울 때 내가 자랄 때는 어땠는지 생각해보고 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아이에게 해주라고요. 거기에 덧붙여서 내가 자랄 때와 아이가 자라는 지금이 다르다는 걸 알라고요. 정말 공감 가는 이야기예요. 내가 자랄 때 안 그랬으니까 너도 그러면 안 된다는 건 사실 말이 안 됩니다. 시대가 달라졌잖아요? 요즘 우리 딸이 카페에 가서 공부를 하는데, 아내가 면박을 줍니다. “아니 왜 조용한 집을 놔두고 밖에 나가서 공부를 해? 시끄러운 데서 무슨 공부가 돼?” 제가 그 말을 듣고 머리가 띵해 졌어요. 30년 전에 제가 어머니한테 들었던 말과 다르지 않았거든요. 아니, 무슨 노래를 들으면서 공부를 해? 아마 아내도 학창 시절에 들었을 거예요. 마찬가지로 싫었을 거고요. 그런데 그 순간에는 역지사지가 안 되는 거죠.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을 바탕으로 한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은 이겁니다.

Sender(발송인, 송신자) → Message(메모, 말씀) → Receiver(수신자)

그러나 커뮤니케이션이란 메시지를 받는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에 따라 달라져야 하는 거죠. 그러니까 소통을 위해서는 화살표 방향이 바뀌어야 하는 거예요.

Sender ← Message ← Receicer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더 강하죠.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까 소통이 어려워집니다.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는 의제설정이 가능한 윗사람들만 말하는 풍토가 생겨난 것이고요. 오죽하면 회식을 ‘사역’이라고 하겠습니까?

대화는 돌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술자리 대화는 흐르게 되어 있는데, 그 흐름을 막아 버리는 게 팀장 혹은 윗것들 아닙니까? 팀장들을 대상으로 하는 어느 강의에서도 인기 잇는 팀장이 되고 싶으면 카페나 술집에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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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말라고 이야기했어요. 어떻게 해서든 아랫사람들이 편하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게 윗사람들이 할 일이에요.

그래야 서로 소통이 되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요즘 영화는 뭐가 재미있니? 어제 드라마는 어땠어? 그래? 그렇구나. 하고 맞장구쳐주는 노력이 필요해요. 그렇게 말이 오고 가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막힘없이 소통이 가능한 사이가 되는 게 아닐까요?

0 두 번째, 문맥을 생각하자

소통을 방해하는 두 번째 문제는 상대에 대한 배려심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문맥의 문제이기도 한데, 같은 말이라도 상대에 따라 문맥이 전혀 달라지기 때문이에요. 문맥을 잘 파악하는 건 지혜이고 센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남자들이 취약하고, 여자들은 매우 뛰어납니다. 남자들이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로 뛰어나죠.

남자의 장점, 물론 있죠. 대부분의 남자들이 가진 하나 밖에 안 보는 단순 무식함, 추진력, 돌파력, 좋습니다. 그런데 여자들처럼 이렇게 문맥을 파악하는 힘은 덜합니다.

여자들의 장점은 특히 소통을 제대로 하는 데 꼭 필요합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해서 욕을 먹을 수 있고 똑같은 이야기를 해서 칭찬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날을 잘못하면 단순히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교양이 없는 걸로 비칠 수 있어요. 만날 때 어떤 대화를 나눠야 하는지에 대한 파악능력, 이것은 눈치가 아니라 교양에 가깝습니다.

고려 성종 때의 외교가이자 문신이었던 서희(徐熙)의 담판 역시 문맥을 짚을 줄 아는 지혜가 있었기에 가능했어요. 처음부터 요(遼)의 거란족은 우리를 칠 마음이 없었어요. 송(宋)을 치고 싶었죠. 그런데 송을 칠 때 우리가 움직일까봐 80만 대군을 몰고 일단 우리나라로 내려온 거예요. 그러니까 요나라 장수 소손녕의 목적은 우리를 치는 게 아니라 송을 정벌할 때 우리의 움직임을 묶어두려는 거였죠. 그래서 대군을 이끌고 내려와 왜 송하고만 친하게 지내냐고 괜한 시비를 걸잖아요. 그때 전체적인 문맥을 제대로 파악한 서희는 너희와 친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가운에 여진족이 있어서 그렇다고 답하죠. 그 말을 들은 소손녕은 여진족을 치워주고 서희는 강동 6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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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어 와요. 서희가 역사 속 협상의 귀재로 알려질 수 있었던 건 문맥을 제대로 파악했기 때문이었어요. 소통의 지혜가 있었던 거죠.

0 세 번째, 생각을 디자인하자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은 주술 구조를 제대로 갖추고 문맥을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처럼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말에 담긴 힘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생각을 디자인 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찰스 바클리라는 농구 선수를 기억하시나요? 마이클 조던, 매직 존슨 등과 함께 NBA 최고의 황금기였던 90년대를 주름 잡았던 선수인데요.

언젠가 NBA 대표팀과 당시 내전이 있던 유고슬라비아가 친선 경기를 가졌던 적이 있어요. 당연히 NBA 대표팀이 이기는 게임인데, 그래도 친선경기니까 넘어지면 서로 일으켜주고 공을 놓치면 허허 웃으면서, 반쯤 져주면서 게임을 했죠. 그런데 바클리는 난리를 쳤어요. 욕하고 몸싸움도 격하게 하고 상대 선수를 넘어뜨리는 등 있는 힘을 다해서 싸웠어요. 어디까지나 친선경기였고 그것도 내전을 겪고 있는 나라의 선수들과의 경기였는데 말이죠. 경기가 끝나고 기자가 질문했어요.

“당신은 온유함의 미덕을 믿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클리는 0.1초의 고민도 없이 대답합니다. 그리고 저도 0.1초의 고민도 없이 바클리를 이해하게 됐습니다.

“온유함이 세계 평화를 가져올지 모르지만 나에게 공을 가져오진 않습니다.”

미국 서부에 있는 어떤 여고 농구팀이 장애인 학교 농구팀이랑 게임을 했는데 100대 0으로 이겼습니다. 게임이 끝나고 너무 가혹했다는 이유로 코치가 잘렸고요. 이틀 후에 한 신문에서 코치를 인터뷰했죠. 코치가 답하길, “상대를 존중했기에 최선을 다했다”라고 했습니다. 장애인 팀이라고 봐주는 게 능사는 아니죠. 자칫하면 그게 도리어 예의가 아닐 수 있는 거니까요. 배려가 아니라 값싼 동정이라 느껴질 수 있으니까요. 그들도 어디까지나 스포츠맨으로 임하는 경기이기 때문에 코치의 선택은 ‘존중’의 차원이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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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의미를 풀어서 설명하지 않아도 저 짧은 문장 하나로 다 말하고 있습니다. 이게 디자인 된 말의 힘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바클리의 말과 같은 경험은 우리도 했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히딩크 감독이 했던 말, 기억하실 겁니다.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감히 말하는데 우리나라 방송에서 나온 운동선수 인터뷰 중 가장 멋진 말이었어요. 아직까지 우리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잖아요? 그즈음 아직 선수였던 홍명보 감독도 한 마디 했었죠.

“국민이 무엇을 원하고 있건 우리는 그것보다 더 큰 꿈을 꾸고 있다.”

참 멋지지 않습니까? 잘하긴 했으나 만족스럽지는 않다. 우리는 남은 경기도 이기고 싶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말보다 훨씬 가슴을 치고 마음을 움직이죠. 머릿속에 오래 남기도 하고요. 어릴 때부터 훈련 받지는 않았지만 지금부터라도 이렇게 하고자 하는 말을 디자인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언어의 집을 지어 줘야 해요.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 40대까지 알코올 중독, 대통령이 되기까지 미국을 벗어나 본적이 없는 사람, 그가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 기자가 당신의 음주 경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어요.

“나는 실수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조지 부시가 대통령 후보였던 선거 때에 기막힌 문장이 또 하나 나왔는데 앨 고어와 조지 부시를 두고 어떤 상원의원이 누군가는 양보해야 한다는 말을 이렇게 표현했어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 사람의 대통령과 한 사람의 영웅이다.”

이런 말이 설득력이 있는 겁니다. 무턱대고, 네가 양보해. 하는 것보다 훨씬 마음을 움직이죠.

문민정부 시절, 정치를 모르는 적십자 총재였던 분이 국무총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분이 기자들과의 술자리에서 “정치판은 개판인데 왜 들어가려고 하느냐더라. 그런데 내가 들어와 보니 진짜 개판이더라.” 라는 요지의 이야기를 했어요. 다음 날 야당에서 난리가 났죠. 정치판을 개판으로 알고 있는 국무총리와 국론을 논할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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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 런던의 리빙스턴이라는 시장이 임기 중에 그만 뒀대요. 그래서 기자가 그 이유를 물었죠. 사실 이 사람이 그만뒀던 이유도 정치판이 엉망이었기 때문이에요. 단, 리빙스턴 시장은 누구처럼 말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죠.

“정치는 어른들이 할 짓이 아닙니다.”

또 하나, 프랑스에서 있었던 이슬람교와 기독교 간의 갈등 상황 중에 이슬람을 비하하는 풍자만화를 본 이슬람교구장이 한 말이에요. 어떤 대응보다 힘있는 말입니다.

“길거리에서 개가 짓는다고 대꾸하지 않는다.”

이 세 가지를 정리하면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할지 먼저 헤아릴 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자신의 생각을 잘 정리해 말함과 동시에 어떤 문맥으로 해야 하는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는 거예요. 여기에 힘을 싣기 위해 지혜롭게, 생각을 디자인해서 말하는 것이 필요하고요.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소통을 잘하고 싶으면 몇 가지 노력이 필요합니다. 역지사지, 문맥파악, 생각을 정리해서 말하는 습관, 스케치를 할 때 데생이 필요하듯 자기 생각을 데생해야 해요. 연습하고 말을 만들어 보는 거죠.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정리해 보고, 어떻게 하면 내 말이 설득력 있을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소통은 사회생활은 물론이고 개인 생활에서도 매우 큰 차이를 만들어 내요.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 싶다면 소통을 잘 하면 돼요.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오해가 생겨서 싸움이 되고 일이 꼬여 걷잡을 수 없게 되면 그냥 포기해버리는 집들은 대부분 소통이 안 되는 집이에요.

■ 소통을 잘 할 수 있는 방법

마지막으로 소통을 잘 할 수 있는 훈련 방법 두 가지만 말씀드려보겠습니다. 할리우드에는 ‘7 Words Rule’이라는 게 있습니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시나리오를 가져오니까. 투자를 받고 싶으면 시나리오를 단 일곱 단어로 설명해 보라는 건데, ‘결혼을 했는데 마누라가 조폭이네? 조폭 마누라’ 이런 식으로 그림이 확 그려지도록 설명하라는 이야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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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걸 광고 만들 때 사용합니다. 처음에는 어렵죠. 다 괜찮은 것 같고, 30분 정도 설명해서 이해시킬 수 있어요. 그러면 계속해서 딱 한 마디로 알아들을 수 있는 지점까지 좁혀나가죠. 이걸 생각의 증류라고 해요. 현상은 복잡하고 본질은 단순한 이 세상에서 단순한 본질을 뽑아내기 위한 증류 과정은 제가 일하는 업계에서 필수적인 일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생각의 증류과정을 거쳐 이야기를 해보세요. 소통의 폭이 훨씬 넓어질 겁니다.

여러분은 누구나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졌어요. 소통을 잘하면 주변 사람들이 움직입니다.

공책을 가져가 찢는 친구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일곱에 피 말리는 전쟁을 경험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스스로 뛰어내리게 하사 경쟁자를 물리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 중앙일보. ‘고1의 반란.......내신전쟁 불만 폭발’ 2005. 5. 3 중에서 -

한 고등학생이 내신제에 대해서 쓴 글입니다. 저는 한 번 읽고 아직까지 기억하게 됐어요. 사람을 움직이고 싶고, 주변에 영향을 주고 싶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습관을 가지세요. 그렇다면 여러분의 소통은 아주 성공적일 겁니다.

8강 인생 (人生)

- 급한 물에 떠내려가다 닿은 곳에 싹 틔우는 땅버들 씨앗처럼 -

제가 가장 무서워하는 단어는 ‘인생’입니다. 마지막 시간의 주제로 ‘인생’을 선택하면서 고민도 많았습니다.

인생은 자존, 본질, 고전, 견(見), 현재, 권위, 소통이라는 싱싱한 재료를 담아낼 아름다운 그릇입니다. 이 아름다운 ‘인생’이란 단어가 무서우리만큼 크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 단어 하나만 잘 알아도 세상을 제대로 살아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재료들을 어떻게 이 그릇 안에 잘 정리해줄지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정리하는 자리이니만큼 그간 했던 이야기의 반복도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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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의 소설 ‘촐라체’에 ‘길고 위험이 넘치는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시간을 살아가야 할 이제 겨우 스물한 살의 청년’ 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전인미답,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걸어가야 하는 위험한 나이 20대, 그리고 30대, 40대, 50대. 아마도 인생은 젊음이건 아니건 누구에게나 전인미답이 아닐까요? 그래서 늘 위험하지만 또 한편으로 매 순간이 흥미진진한 것이 바로 인생일 겁니다.

고미숙의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에는 ‘지구는 탄생 이래 한 번도 같은 날씨를 반복한 적이 없었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봄에는 꽃이 피고, 여름은 눈부시고, 가을은 낙엽이 떨어지고, 겨울이면 눈이 오는 사계절을 매년 겪지만 그 어느 하루도 같은 날씨인 적은 없었습니다. 무심했지만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에요.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앞에 마땅히 주어진 전인미답의 길을 즐겨야 합니다. 어차피 가야 할 길 앞에서 망설이거나 두려워하기보다 설렘과 기대를 품고 걸어야 해요.

그렇다면 전인미답의 길을 즐기기 위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우리들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실수에 휘둘리지 않는 겁니다. 전인미답이잖아요. 실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본 적이 없는 길입니다. 가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완벽하겠습니까? 길을 걸으며 당연히 실수할 겁니다. 그러나 실수를 못 견디고 좌절하지 마세요. 나만 그런게 아닙니다. 우리는 때로 바깥에 선을 그려놓고 누구누구의 인생은 이런 실수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겠지만 전혀 아니에요. 전인미답, 누구의 인생이나 같습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는 행운이라고 굳게 믿고, 나쁜 일이 있거나 실수를 저지르면 병가지상사를 떠올리세요. 못된 성격 때문에 그런지 모르겠지만 연초 인사 중에 “좋은 일만 생기세요” 라는 말을 들으면 좀 어이가 없어요. 어떻게 좋은 일만 생길 수 있겠어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하나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몇 해 전 촬영 차 고창 선운산에 가게 됐습니다. 그 길에 부지런을 좀 떨어서 아침 일찍 절에 다녀왔는데 산책 삼아 들른 절에서 커다란 돌에 새겨진 보석 같은 글귀를 발견했습니다. ‘보왕삼매론’이라는 이라는 건데요. 우선 쭉 한 번 소개하겠습니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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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공부하는 데 마음이 장애가 없기를 바라지 마라.

수행하는 데 마가 없기를 바라지 마라.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마라.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마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에 주기를 바라지 마라.

공덕을 베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마라.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마라.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마라.

- 보왕삼매론 -

중국 명나라 때 묘협이라는 스님이 불자들에게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할지에 대해 쓴 글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몸에 병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병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자기가 정한 대로 설정해 놓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생은 마음대로 만질 수 있는 게 아니죠.

인생은 개인의 노력과 재능이라는 씨줄과, 시대의 흐름과 시대정신 그리고 운이라는 날줄이 합쳐서 직조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의 의지와 노력과 재능이라는 씨줄만 놓고 미래를 기다립니다. 치고 들어오는 날줄의 모양새는 생각도 안 하고 말입니다. 이 씨줄과 날줄의 비유는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인 이 책에 나온 ‘인생을 내 마음대로 계획하기에는 시대라는 날줄이 너무나 험했다’라는 문장을 읽고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제발 꿈 좀 꾸지마라

그런데 말입니다. 태어나는 시점을 우리 마음대로 선택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럴 수 있다면 누구나 내 씨줄을 잘 받쳐줄 만한 날줄의 시대를 골라 태어나겠죠. 그러나 그럴 수 없으니 험하면 험한 대로 순하면 순한 대로 날줄을 잡고 튼튼하게 직조해야 합니다.

이런 삶의 태도를 직업정신으로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요리사입니다. 어느 저녁 만찬에 초대된 적이 있습니다. 만찬의 요리사는 프랑스인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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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메뉴는 프랑스식 코스 요리였어요. 전채 요리가 나오고 메인 요리가 나왔는데, 리조또 위에 살짝 구운 제주 은갈치를 올린 것이었습니다. 아주 맛있더군요. 식사를 하면서 들으니, 프랑스 요리사가 메뉴를 구상하기 전 한국의 식재료 중 좋은 것이 무엇인지 물었답니다. 고미숙 씨의 ‘나의 운명 사용 설명서’에 ‘훌륭한 요리사는 자기 눈앞에 있는 신선한 재료가 무엇인지 먼저 본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와 같은 맥락인 것이죠.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를 예로 든 김에 고미숙 씨를 통해 알게 된 것을 한 가지 더 언급하자면, 프랑스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가 원주민을 연구해서 인류학 논문을 썼는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답니다. 원주민들에 있어 가장 존경 받는 사람을 관찰해 보니, 힘이 세거나 모든 걸 가진 사람이 아니라 어떤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잘 활용해서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가장 존경 받았답니다. 첫 강의 ‘자존’에서 이야기한 물살을 이용했던 이순신 같은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니까 요즘처럼 날줄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시절에는 이런 삶의 태도가 절실합니다. ‘급한 물에 떠내려가다 닿은 곳에 싹 틔우는 땅버들 씨앗, 그렇게 시작해보거라’라는 고은 시인의 시처럼 살아야 합니다.

모든 인생은 의도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남들의 영웅담은 내 이야기가 될 수 없죠.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영웅담을 들어 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영웅이 되고 싶어지죠. 그런데 그 영웅이 쓴 무기는 이미 없거나,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이에요. 이순신은 물살을 보고 그것을 이용해 한산대첩에서 승리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이순신의 물살이 나타날까요? 인생은 똑같이 반복되지 않습니다. 모든 인생은 전인미답이에요. 인생에 공짜는 없어요. 하지만 어떤 인생이든 어떤 형태가 될지 모르지만 반드시 기회가 찾아옵니다.

원하는 방향으로 인생이 흘러가지 않는다고 해서 지레 포기하고 주저앉을 필요는 없습니다. 씨줄과 날줄이 함께 직조되는 게 인생이니까요. 꿈과 희망의 여지를 남겨둘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이 광고인이 꿈이라고 말하면 일단 그 꿈을 접으라고 합니다. 특히 고등학생의 경우면 너무 빨리 작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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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게 정했다고 말해줍니다. 냉정하게 말해서 그 고등학생이 광고인이 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고등학생 때부터 광고에 목숨 걸겠다고 다짐했다가 광고인이 안 될 경우 밀려오는 좌절감은 어쩔 겁니까? 인생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없는 것이니 스트라이크존을 넓혀놔야 합니다.

제 경우를 예로 들면, 저는 신문 기자, 신문 편집자, 책 만드는 사람, 시나 소설을 쓰는 사람, 르포라이터, 구성 작가, 영화감독, 게임 프로그래머, 그 안에 광고도 포함돼 있었고요. 그렇게 많고 다양한 분야에 도전도 하고 몰입도 하다 광고인이 되었습니다.

“기필(期必)을 버려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살면서 늘 기필코 이루어 내라는 말만 들어본 제게 기필을 버리라는 말은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요, 인생은 기필코 되는 게 아닙니다. 뭔가를 이루려 하지 말고 흘러가세요.

최근엔 젊은 사람들에게 ‘꿈 꾸지 말라’는 강의를 합니다. 제발 꿈 좀 꾸지 말라는 게 제 강의의 주요 포인트예요. 우리 제발 꿈꾸지 말고 삽시다. 꾸려면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지, 그런 작은 꿈을 꾸면서 삽시다. 교수가 되고 말테야. 큰 사람이 될 거야. 꼭 대기업에 취직해 임원이 되겠어. 연봉 3억을 받겠어. 이런 꿈 좀 꾸지 말고 말입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 씨는 자신의 책 ‘밤은 책이다’에서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살고 싶고, 인생 전체는 되는 데로 살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건 말 그대로 지혜입니다. 맞습니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고, 인생은 되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성실하게 산 하루하루의 결과가 인생이 되는 겁니다. 꿈꾸지 말라고 해서, 날줄이 험할 수 있다고 해서 그냥 놀고 먹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물론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그걸 이뤄내 성공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산 사람들보다 행복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는 거죠.

목표를 세우고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나의 그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떨어지는 외모에도 불구하고 표현할 줄 모르는 유머 감각에도 불구하고, 양지바른 땅에 씨앗이 닿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라는 자존을 가지고 나의 장점을 실현해 나간다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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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모두 뇌관이 발견되지 않은 폭탄이고, 뇌관은 바깥이 아닌 바로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이걸 믿으세요. 모든 사람은 때가 되면 엄청난 화력으로 터질만큼 커다란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는 세 가지 팁

마지막 시간이니 제 딸에게 알려준 인생의 세 가지 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인미답의 인생이지만 이걸 알고 간다면 적어도 조금은 수월하지 않을까 해서 아이가 자랄 때 늘 해주던 이야기들인데요. 우선 첫째, 인생에 공짜 없습니다.

나폴레옹이 이야기 했었죠.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불행은 언젠가 내가 잘못 보낸 시간의 결과다.’ 이걸 믿어야 할 것 같습니다. 왜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야 하느냐? 이 하루하루가 쌓여서 언젠가 내 인생으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잘 보낸 시간은 긍정으로 돌아오고 지금 잘 못 보낸 시간은 부정으로 돌아온다는 걸 염두에 두고 하루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不患人之不己知患其無能也 불환인지불기지환기무능야

논어에 나오는 말입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말고, 내가 능력이 없음을 걱정하라는 뜻입니다. 기회는 옵니다.

두 번째, 인생은 마라톤입니다. 이 이야기는 딸 아이가 중학생 때 해줬던 건데, 성적은 상위권이었지만 1등은 아니었던 딸아이가 어느 날 좌절하는 겁니다. 늘 1등을 하는 친구가 있는데, 자기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 친구만큼 잘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딸아이에게 이야기 해줬죠.

“너는 42,195 Km를 달려야 하는 게임을 하고 있지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게 아니야. 네가 지금 열다섯인데 그럼 몇 Km 지점을 달린다고 생각해? 이제 5 Km 정도일 텐데 거기서 그 친구가 너보다 앞서 간다고 해서 승부가 끝난 건 아니지. 그러니까 평상심을 잃지 말고 기죽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걸 해. 더 달리다 보면 네가 앞서가는 레이스가 올지도 모르고, 다시 뒤처질 수도 있고 그러다 앞서 달릴 수도 있어. 그게 마라톤이야. 한 번 이겼다고 자만하지 말고 한 번 졌다고 기죽지 마. 마라톤은 완주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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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언제든지 이길 수 있다. 우린 언제든지 질 수 있다.

경쟁 프레젠테이션에서 진 날 팀원들에게 늘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이길 수 있고 언제든지 질 수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압니다. 이기면 다시는 지지 않을 것 같죠. 한 세 번 정도 이기면 우리 팀은 지는 팀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만한 생각이죠. 반대로 세 번 정도 지면 열패감에 휘둘려서 뭘 해도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어렵지만 늘 잊지 말아야 해요. 언제든지 이기고, 또 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생이라는 마라톤을 달릴 때는 일희일비하며 흔들리지 말고 묵묵히 내가 생각하는 본질이 무엇인지. 내 안에는 실력이 있다는 자존을 가지고 ‘Be Yourself’ 하는 게 제일 잘 사는 방법인 것 같아요.

그리고 마지막, 인생에 정답은 없습니다. 이 말은 딸아이한테는 물론 후배들한테도 자주 하는 이야기입니다. 언제부터인가 후배들이 찾아와서 인생의 선택에 대해 묻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각자의 사정에 맞는 선택이 있겠죠. 하지만 일단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그러면서 살펴보면 대부분 자기 마음속에 답이 있고, 그 이야길 해주기를 기대해요.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상대가 진짜 원하는 답이 뭔지 알게 되면 그 답에 힘을 실어주고, 밀어붙여 줍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죠.

많은 후배들이, 학생들이, 젊은이들이 정답을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생에 정답은 없습니다. 말씀드렸죠. 인생은 전인미답이잖아요. 어찌 알겠어요. 그 사람과 결혼해서 행복할지 아닐지 아무도 모릅니다. 답을 찾지 마세요. 모든 선택에는 정답과 오답이 공존합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선택한 다음에 그걸 정답으로 만들어내는 것이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걸 선택하고 후회하면서 오답으로 만들죠. 후회는 또 다른 잘못의 시작일 뿐이라는 걸 잊고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인생에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정답으로 만들어가는 과정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딸을 가진 아빠 입장에서 여자분들에게 한 말씀 더 드리면 뭔가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가끔은 한심하고 열등하기 짝이 없는 남자들에게 눈 딱 감고 밀고 나가는 힘을 배웠으면 합니다. 어느 모로 보나 우등한 여자들보다 열등한 남자들이 잘 하는 한 가지가 바로 그겁니다. 그런데 그런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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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하고 무식하게 밀고나가는 것이 때로는 깊이를 만들어주고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 줍니다. 정답, 오답에 대한 강박을 갖지 말고, 바보처럼 단순하게, 내 판단을 믿고 가길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되는 대로 삽시다. 되는 대로 살되, 인생에는 공짜가 없으니 본질적으로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살피고, 질 때 지더라도 언제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모든 답이 정답이니 아무거나 선택하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해 현명한 판단을 내리면서, 그것을 옳게 만들면서 삽시다.

모든 인생은 제대로만 된다면 모두 하나의 소설감이다.

헤밍웨이의 말입니다. 모든 인생은 다 이야깃거리가 있고, 모두 한 편의 영화입니다. 그러니까 내 인생이 헤밍웨이의 삶보다 별로라고 생각하지 말자고요. 헤밍웨이의 인생도 멋지지만 내 인생도 멋져요, ‘My Way’ 노래 가사처럼 후회도 약간 있겠죠. 하지만 말할 정도는 아닐 겁니다. 최선을 다했다면 후회하지 말아야죠. 최선을 다한 인생이 아름다운 것이지 아름다운 인생이 따로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행복은 풀과 같습니다. 풀은 사방천지에 다 있어요. 행복도 그렇고요. 풀은 생명력이 무척 강합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죠. 긍정적인 풀의 생명력 덕분에 우리가 살아갈 수 있듯 어떤 조건에서도 행복을 찾아낸다면 살아가는 게 그렇게 힘들지 않을 겁니다. 최근에 읽은 책이라 자꾸 반복하게 되는데 고미숙 씨의 책 속에 이런 구절도 발견했습니다.

‘해방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 그 자리를 해방의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것’

여기에서 ‘해방’을 ‘행복’으로 바꿔보세요. 행복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 이 자리를 행복의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묵묵히 자기를 존중하면서 클래식을 궁금해 하면서 본질을 추구하고 권위에 도전하고 현재를 가치 있게 여기고, 깊이 봐가면서, 지혜롭게 소통하면서 각자의 전인미답의 길을 가자. 이게 제가 여러분께 드리고 싶었던 인생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모든 것이었습니다.

2013. 7. 6.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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