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위하여

보해성산 2013. 9. 6.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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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

위하여

■ 신봉승 지음

0 1933년 강릉 출생, 강릉사범,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동 대학원

0 현대문학에 시, 문학평론으로 등단

0 한양대, 동국대, 경희대 강사

0 한국 시나리오 작가협회 회장. 대종상, 청룡상 심사위원장. 아시아 영화제 각본상. 서울시 문화상. 위암 장지연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보관문화훈장 등

0 조선왕조 오백년 전48권. 소설 한명회 전7권. 이동인의 나라 등의 역사 소설. 조선도 몰랐던 조선, 조선 정치의 꽃 정쟁, 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 양식과 오만, 역사 그리고 도전, 국보가 된 조선의 막사발, 일본을 탐하다, 역사란 무엇인가 등의 에세이

작가의 말 - 행간으로 읽는 역사

역사를 학문으로만 풀어 가면 풀리는 일보다 꼬이는 일이 더 많아진다. 그러므로 나는 외출에서 돌아온 아버지나 삼촌이 집밖의 사정을 소상히 알려주면서 웅덩이에 빠지거나, 돌덩이에 걸려서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이런저런 주의를 주는 이치가 곧 역사라고 믿어온 터이다.

아버지나 삼촌이 밖에서 익혀 온 지식에는 거짓이나 가식이 없다. 임의로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 있었던 일을 자식들에게 알리는 일이어서 지키면 지킬수록 이로워진다. 그러나 그런 이로운 말을 들은 자식이나 조카들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전할 때는 실제의 내용들이 많이 변질되고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맞물리게 된다. 본인들이 실제로 겪어 보지 않은 남의 경험을 입에 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겪는 갖가지 혼란들이 역사학자들에게까지 물이 들어 보수와 진보로 나뉘는 행태는 참으로 딱하다. 대한민국 현대사 60년에 무슨 싸울 명분이 있는가. 실제로 겪고 본 세대가 눈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40대 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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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교수들이 이념 문제로 아옹다옹하는 것은 애초에 역사학을 공부하면 안 될 사람들의 아귀다툼이나 다름이 없다.

나는 역사를 학문으로 읽은 일이 없다. 오직 역사 드라마를 재미있게 쓰기 위해 역사책을 살피고 뒤졌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세월이 40여 년이나 쌓이면서 ‘역사는 행간(行間)으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터득하였다. 역사를 행간으로 읽으면 현실의 일을 역사와 비교하게 되고, 또 그 해답도 역사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긴 세월 동안 내 글이나 책을 읽어 준 많은 독자들에게 술잔을 올리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위하여!

2013년 5월. 여든한 번째 생일에. 죽당(竹堂) 신봉승(辛奉承)

Chapter 1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 종명시(終命詩)

사람의 한평생을 더러는 길다고 하고, 더러는 짧다고 푸념하지만 그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한 반성이 거의 없는 것은 온전한 삶이 흔치 않았다는 말과 일치한다.

고위 공직으로 임명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사청문회’라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가장 실소하게 되는 대목이 병역에 관한 것이고, 그 다음이 위장전입으로 나타난다. 참으로 이상한 공통점은 그분들의 자제가 지금은 멀쩡한데도 당시에는 이상한 병에 걸려 병역을 면제 받았다는 것이다. 또한 아이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 위장 전출입을 하고, 다운계약서를 만들어 세금을 탈루한 것이 총리, 장관, 법관을 비롯한 대부분의 공직자에게 모두 해당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삶을 살아온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허물을 안고 공직에 있다가 물러나는 것이 자랑이 되고 긍지가 되는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다.

아무리 각박한 삶을 살았더라도 옛 지식인들은 자신의 삶이 마감될 즈음이면 겸손하면도 당당한 종명시를 지어서 자신의 후회 없는 삶을 뒤돌아보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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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또 뒤따르는 후학들이나 남아 있을 가족들에게는 귀감으로 삼게 하였다.

종명시에는 쓰이는 어휘나, 표현하는 방식은 달랐지만 그 안에 담긴 주제나 내용은 대개가 비슷하다.

‘하늘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고 책 속의 말씀에 어긋남이 없었다.’

비록 평범하고 겸손하게 쓴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행실에 대한 수치스러움이 있고서는 감히 입에 담기 어려운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선현들은 책에 적힌 기막힌 내용은 오래 기억하고 또 그것을 실행하는 것을 긍지로 삼았지만, 요즘의 독서 풍속은 대충 읽고 버리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경향이어서 “책 속의 가르침에 어긋남이 없었다.”라고 말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바로 그 점이 사람들의 오만을 자라게 한다. 그같이 오만하고 방자한 사람에게는 또 다른 종명시를 읽게 할 필요가 있겠다. 특히 나와 같은 문필가들에게는 참으로 금쪽같은 가르침이 담겨 있다.

“한 편의 아름다운 글을 쓰려고 애쓰기보다는 내 삶을 아름다운 작품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면암 최익현(崔益鉉) 선생의 종명시다.

‘평생을 읽은 책이 노나라의 ’춘추‘라네.’

노나라의 춘추는 역사책이다. 평생 동안 역사인식이 깨어 있었기에 자식 노릇, 아비 노릇, 신하 노릇, 제자 노릇, 스승 노릇을 하자 없이 할 수 있었다는 자부심이 풍겨나는 대목이어서 후학들을 숙연하게 한다.

또 매천 황현(黃玹)선생의 종명시에 적힌 마지막 구절은 후학들을 다독이면서도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지식인 노릇하기 참으로 어려워라.”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말과 행실이 다른 사람이 너무 많다. 개인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친구를 버리는 일은 다반사가 되었고, 심지어 일구이언으로 거느린 가솔들까지 괴롭히는 일을 저지르면서도 실익에만 매달린다. 그러나 우리 주위의 잘난 사람들에게도 죽음은 찾아온다.

그런 사람들에게 마지막 남길 양식을 옛 어른들의 종명시에서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 소통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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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군 세종은 약관이나 다름없는 22세의 젊은 나이로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거느려야 하는 신하들은 당대의 석하이자 명현들로,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우의정 박은, 병조판서 조말생, 집현전 부제학 정인지 등 모두 당대의 고매한 인품들이었다. 게다가 아버지(태종)와 같은 연치였으니 ‘가라, 오라’라는 식의 왕명만으로는 다스릴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약관의 세종은 아버지 연치의 신하를 거느리면서도 자신이 생각한 ‘치도의 이념’을 완벽한 소통으로 이루어 냈다. 위대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때를 같이하여 당연한 질문이 나왔다.

“젊은 세종대왕의 그 같은 완벽한 리더십은 대체 누구의 가르침으로 배운 것입니까?”

“무시무시한 독서량입니다. 책 속의 가르침을 어긋남이 없이 실천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군 세종대왕의 독서량을 거론할 때면 ‘책을 묶은 가죽끈이 닳아서 끊어지곤 하였다’라는 구절을 상기하게 된다. 책을 묶은 가죽끈이 닳아서 끊어질 정도라면 같은 책을 몇 번이나 읽어야 될까.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는 어렵지 않다. 구한말의 큰 선비 화서 이항로 선생의 진솔한 고백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중용(中庸)을 외기를 만 번까지 하였는데, 살아서 다시 한번 왼다면 무엇을 깨닫게 될지 심히 걱정된다.”

화서 이항로 선생의 삶은 평생을 위정척사(衛正斥邪)의 화신으로 일관하였고, 자신뿐만이 아니라 면암 최익현, 의암 유인석과 같은 문도들에게까지도 그와 같은 실천의지를 궁구실행하게 하여 오직 나라 구하는 일에 목숨을 던지게 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많은 식자들은 설령 만 권의 책은 섭렵하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드는 명구를 골라 삶의 도반으로 삼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 경우라면 나도 마음에 다짐하면서 평생의 지팡이가 되는 명구가 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를 내지 않아야 참 군자일 것이니라.’

(인불지이불온 불역군자호 人不知而不慍 不易君子乎)

누구나 한 번은 읽었을 ‘논어’ 첫 절의 마지막 구절이다.

군자의 길은 바로 자신과 소통하는 길이다. 자신의 참마음과 소통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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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다면 남을 상대로 한 소통이 쉽게 이루어질 까닭이 없다. 모든 소통의 원리는 책 속에 있다. 책 속에 소통의 길이 있음은 이미 실증으로 드러나 있다. 반대로 독서량이 부족한 사람은 참 소통의 뜻을 모르기 십상이다. 책 속에 소통으로 가는 길이 있다 특히 역사책이 그렇다.

말로만 소통 소통 하지 말고, 막혔던 길이 어떻게 뚫렸는가를 살펴 거기에 소통의 방법과 길이 있음을 명심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고전의 꽃

나이 탓인가. 근자에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대학’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우리네 사는 형편이 야박해지면서 고금의 경서(經書)보다는 시의에 맞는 책을 읽는 경우가 많은 것을 탓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른다운 생각이나 제대로 된 행실이 필요한 때라 그동안 여러 번 읽었던 ‘대학’을 다시 펼쳐들게 되었는데 그러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새록새록 든다. 물론 세상 돌아가는 일이 어처구니없는 판국이어서 구절구절이 모두 새롭게 다가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천하가 모두 주지하는 바와 같이 ‘대학’의 중요성은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를 적어 놓은 글이요. 사람다움의 본문이 비켜지면 정치가 바로 되어 백성들의 삶이 편안해진다는 사실을 지루할 정도로 되풀이해서 강조하고 있다.

옛날의 공직자들과 지금의 공직자를 비교해 보면 옛 공직자의 모습이 성현의 경지라면 지금의 공직자는 그분들의 발바닥에도 미치지 못한다 해도 탓할 사람이 없을 것이 분명하다.

옛 사람들은 공직에 나가려면 과거에 등과하여야 되고, 과거에 등과하기 위해서는 사서오경에 통달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갖추어야 할 기본 도리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등과가 보장되고, 그게 공직에 나가는 기본 조건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전의 정승(총리) 판서(장관)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문학과 철학적인 소양을 기본으로 갖추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더 쉽게 말하자면 율곡 이이 선생이 병조판서요. 퇴계 이황이 이조판서이고, 정암 조광조 선생이 대사헌(검찰총장) 이다. 뿐만이 아니다. 오리 이원익 선생이나 우암 송시열 선생이 영의정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보면, 지금의 장관이나 총리의 인품, 학문 그리고 아는 것을 실천해 보이는 모범이 그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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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발바닥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 엄연한 사실이 그들 스스로에 의해 연일 드러나고 있는 판국이니 말해 무엇하랴.

오늘 아침에도 나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구절을 음미하면서 근자 우리 주변의 한심한 작태를 다시 곱씹게 되었다.

‘근본이 흐트러져 있는데, 말단이 다스려지는 일이 없다.’

(기본난이미치자부의 基本亂而未治者否矣)

아, 과연 명문이다. 근본을 모른다고 스스로 인정할 고위 공직자가 있을 까닭이 없다. 사람마다 근본이 무엇인지, 또 근본을 지키는 것이 공직의 기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데 문제가 있다. 더 딱한 것은 스스로 기본을 어기는 행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잘못된 행실을 아예 모르거나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태반이고, 또 그 태반의 반이 고위 공직에 몸담고 있는 현실이 우리를 더 비참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대학’은 분량이 많거나 두꺼운 책이 아니다. 원문으로 읽자면 한학에 상당한 조예가 있어야 하겠지만, 번역본을 읽는다 해도 감동의 폭은 원문에 비해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이제와 새삼스럽게 고전을 읽자고 주변을 들썩이는 일은 환영받을 일이 못되는 줄 안다. 그러면서도 80줄에 들어서서 다시 읽는 ‘대학’을 거론하는 것은 우리들 지식인 사회가 아직은 기본에 충실하지 못하는 미망에 허덕이고 있다는 자격지심에서 헤어날 길이 없기 때문이다.

■ 인재의 등용

조선시대의 인재는 과거에 급제하여야만 등용된다. 우선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사서오경’에 통달해야 하지만, 그 전에 천자문, 소학, 통감 등과 같은 기초학문을 탄탄하게 익혀야 하는데, 그 또한 사람이 되는 길을 강론한 책들이다. 어려서 익혀야 하는 기초 학문에서부터 동양지식인 최고의 경전이랄 수 있는 ‘사서오경’에 통달하게 되는 모든 과정이 곧 인성을 바르게 하는 일이며, 가정을 바르게 하는 길이며, 또 정치를 바르게 하는 교범이다. 그러므로 모든 공직자는 사람의 도리를 갖추어야 하는 기본인 ‘사람의 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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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지는 일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벼락치기 수험 준비는 있을 수 없었기에 과장에 나가서도 과거에 등과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는 ‘사서오경’의 내용을 숙지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현실 정치에 맞도록 깊이 있는 문학적인 문장으로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처지를 살펴보면 공직에 나가기 위해서는 행정고시, 사법고시, 외무고시 등에 합격해야만 사무관으로 입사할 수 있다. 그러나 행정고시는 행정 일반에 대한 공부만 하면 되고, 사법고시는 법률에 관한 공부를 외무고시는 우선 외국어 구사 능력이 우수하면 되는 까닭으로 인간의 품격이나 학문의 깊이를 평가할 수 없다.

동양 고전의 핵심이랄 수 있는 ‘사서오경’에 통달한다는 것은 철학적인 기초지식을 통하여 삶 전체를 풍요롭게 하면서 관직에 임하게 함으로써 공정한 판단과 실행을 이끌어 낸다. 그러나 오늘의 공직자가 거쳐야 하는 행정, 외무, 사법 등의 고시는 사람보다 지식을 우선으로 판단함으로써 요행을 바라게 하니 어찌 나무랄 수가 있으랴.

■ 세월은 늙지도 않고

세월은 무수한 어제를 거느리고 흘러가지만 늙지 않는 게 너무도 신기하다. 거기에 휩쓸리며 즐기고 고통 받던 다양한 사람들은 모두 늙어서 백발이 되고, 또 죽어 가는데 그 모든 것을 아우르고 흘러가는 세월은 어찌하여 늙지 않는지, 내 능력으로는 그 엄연한 일을 가늠할 길이 없다.

늙지 않는 세월에 휩쓸리면서 흘러가는 사람들이 나이 들고 병들어 가는 이치를 구태여 학문적인 방법으로 정리해야 할 까닭도 없다. 다만 한 가지 어떻게 살면서 흘러가는 것이 아름다운 삶이 될 것인지를 나름대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것이 늙지 않고 흘러가는 세월에 대한 보답이라고 한다면 어떨지 모르겠다.

며칠 전, 어느 단체의 초청으로 강연을 하게 되었다. 무슨 포럼이라기에 별 준비 없이 강연장으로 들어서다가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2백여 명의 청중들이었는데 얼핏 살펴보니 전직 국회의장이 두 분, 장관을 지낸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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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세 분, 대학 총장님 한 분, 그리고 나머지 대부분은 자신이 기업을 경영하는 CEO들이었다.

어차피 역사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조선시대의 여러 가지 형상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말 그대로 떡이 될 때까지 까뭉개고, 짓밟지 않고서는 이 나라 지식인들에게 경각의 종소리를 울려줄 방법이 없다는 생각으로 국회의장, 장관, 교수들의 무지한 행태를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후려치고 나면, 장내의 분위기는 긴장감으로 숙연해진다.

왜 국사를 읽지 않는가. 태, 정, 태, 세, 문, 단, 세……‘를 욀 정도로 국사를 이해하고, 신숙주를 배신자로 몰아가면서 끝까지 ’이조 5백 년‘이라고 떠벌리는 장관 국회의원들이 어디 한두 사람인가. 더 놀랍고 참담한 것은 그런 수준의 사람들이 국사를 알고 있노라고 떠벌리면, 그 부하들은 윗사람의 그릇된 역사인식을 알면서도 따라가야 하는 것이 우리 문화의 저변이요, 흐름이다.

선정(善政)이란 무엇인가. 역사를 적은 책에 무엇이 선정이고, 무엇이 악정이라고 정의해 둔 곳을 눈 닦고 찾아도 없다. 바로 그것을 판단하게 하는 것이 역사의 ‘행간(行間) 읽기’다. 역사를 문자로만 읽는다면 내 지식으로는 역사학자를 따를 수 없다. 그러나 ‘행간’으로 읽은 역사는 문자로 읽은 역사보다는 몇 갑절 실용성 있게 마련이어서 현실의 문제와 비교하게 되고, 그 해답을 역사적 사실에서 찾아내면 오늘의 여러 가지 혼란을 해결하는 방법이 모두 역사책에 함축적으로 적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청중들의 감동이 더해지는 대목이 바로 이 지점이다. 해결책은 이미 역사책에 소상하게 적혀 있는데도 그 역사책을 읽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아무 소용도 되지 않는 잡서를 뒤적이면서 나라를 경영할 수 있다고 보는가. 아니면 대통령의 눈치나 살피는 것이 정치인가. 왜 우리에게는 자신의 주장을 펼치다가 사표를 던지고 물러나는 공직자가 눈 닦고 찾아도 없는가.

조선시대에는 장마가 지고 가뭄이 들어도 정승판서들이 덕망이 모자란다 하여 스스로 물러나질 않았던가. 역사는 미래의 일을 적은 것이 아니라 과거의 일을 적었기에 우리 자신의 거울이다. 그러므로 거울을 때가 묻지 않게 간직해야 한다고 강권하면서 강연을 마무리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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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 따로, 말 따로의 현상

민주주의는 법대로 다스려지는 것을 원칙으로 성립하기에 ‘법치주의’라고도 한다. 새로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누구나 취임선서를 하면서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엄숙한 목소리로 약속한다. 그러나 막상 직무를 시작하면 법 위에 군림하는 것을 능사로 삼으면서도 법을 지키는 일에 늘 소극적이어서 국민들의 빈축을 사곤 했다.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권한의 몽둥이를 멋대로 휘두르면서도 범법자에 대한 처단은 언제나 관대함을 과장하면서 뒤로 물러서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 겉으로 표시하지는 않았지만 범법한 집단이나 개인 혹은 그 척분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아니 민주적 방식을 빙자하여 자신의 관대함을 과시하려는 인기 전술에 편승한 결과나 다름없다.

범법자를 법 절차에 따라 가차 없이 다스리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며 도리라는 사실을 대통령이나 장관, 법관들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지키지 아니하고 방임하는 것을 시민의 인권과 자유를 보장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더 나아가서는 정치 주변의 부정이나 비리에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것을 출세를 위한 은연중의 미덕으로 삼아 온 경찰이나 검찰이 ‘관행’이라는 이름의 적폐를 감당하지 못할 만큼 쌓아 올리게 했다.

어느 해던가. 우리 한국의 시위 전문가들이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원정하여 한미 FTA의 성립을 반대하는 가두시위에 나섰던 일이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폴리스 라인을 넘어서지는 않았다. 넘어서면 즉각 구속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다. 그러나 서울에서의 그들의 행태는 아무 제약도 받지 않고 폴리스 라인을 넘나들었고, 오히려 이를 제지하는 경찰관을 매질하는 불법을 저질러도 잠시 연행되었다가 풀려나면 그뿐이다. 남의 나라 법은 지킬 줄 알면서도 제나라의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의 당돌하고 오만한 행태를 다스리지 못하고서야 어찌 법치주의 국가라 하랴.

어디 그뿐이던가. 근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대기업의 부당 상속과 탈세에 대한 처분, 입법부의 수장인 국회의장과 관련된 돈 봉투사건 등 헤아릴 수 없는 경제사범들이 모두 불구속 수사를 받다가 유야뮤야 되는가 싶었는데, 국민들의 호된 지탄을 받고서야 법정에 세우게 되었고, 마침내 유죄판결을 내려서 이름 있는 재벌 총수도 실정법 위반으로 옥살이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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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래에 없었던 법 집행이라고 국민들이 수긍하기는 하였는데,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면서 퇴임 사면이라는 허울을 붙여 석방시키는 지경이 되고 보면 아무리 못된 짓을 하여도 잠깐만 고생하면 풀려난다는 것이 권력 주변에 팽배해 있는 한심한 작태다.

법치는 말로 되는 것이 아니다. 고위공직자나 재벌이라 하더라도 법의 집행만은 가차 없어야 한다. 돈이 있으면 무죄가 되고, 돈이 없으면 유죄가 된다는 항간의 말이 결국 법치의 문란함을 이르는 것이요. 그것이 권력에 대한 불신임으로 나타난다면 법원을 무용하게 만들고, 정부의 신임을 잃게 한다.

법의 바른 집행이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 살기 좋은 국가를 만든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권력의 몽둥이를 들려주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는 일이나 다름없다.

■ 배려의 문화

나라마다 그 나라 사람들의 장점과 단점이 있게 마련이다. 구태여 단점을 들추어내어 배울 필요는 없겠지만, 장점을 찾아서 자신의 경우와 비교해 보는 것이 살아가는 지혜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일본 사람들의 장점을 입에 담으면 별로 환영받지 못한다. 36년 동안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피해 의식도 있지만, 일본 정치인들의 천박한 언동 때문일 때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배울 만한 장점이 있다면 일단 거론해 두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일본 문화의 특징 중 하나가 ‘배려의 문화’라고 말하는 이가 적지 않다. ‘배려’에는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한다는 의미가 포함된다. 다fms 말로는 남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이 생활 속에 용해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들이 쓰는 말에도 그런 법도는 잘 나타나 있다.

일본 말에는 ‘메이와쿠’라는 단어가 있다. 영어나 우리나라 말로는 그 본뜻을 설명하기가 도무지 쉽지 않다. 이를테면 ‘메이와쿠오 가케루’라고 표기한다면 “남에게 폐를 끼친다.”라는 단순한 뜻이 되지만, 일본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그야말로 엄중히 지켜야 하는 법도가 된다.

남을 배려하는 일본 사람들의 생활습관은 이론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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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이나 법도와도 같다. 모든 일본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이 ‘도오조’라는 말과 ‘도오모’라는 단어다. ‘도오조’라는 말은 상대를 배려하여 ‘먼저 인사하시라’는 뜻이 되고 ‘도오모’라는 말은 상대의 양해를 고맙게 받아들이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이 두 마디는 모든 경우, 모든 장소에서 습관적으로 사용되는 배려의 문화를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도오모’와 ‘도오조’의 두 마디만 잘 사용하면 일본 땅 어디에서든 예절을 갖춘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일본 열도를 강타한 ‘동북관동대진재’로 일본 사람들이 겪은 고통은 참으로 헤아릴 길이 없다. 진도 9의 강진으로 일본 열도가 요동치고, 쓰나미로 인해 멀쩡했던 도시가 순식간에 뻘밭으로 돌변하는 참혹한 광경을 TV화면으로 지켜보았다.

설상가상이라고 했던가. 후쿠시마 원전 폭발로 인한 피해도 헤아릴 길 없이 커지고 있다. 간 나오토 일본국 수상은 일본의 “동북 지역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라고까지 극한의 말을 입에 담기도 했다.

피해 지역인 센다이 지역 인근의 초등학교가 피난처로 지정되었다. 집을 잃고, 가산을 잃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학교 강당에 수용되었고, 그 수가 무려 1천 명을 상회하는 것이 보통인데도 아우성치는 소란도 없고, 선후를 다투는 흉한 꼴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수용소가 된 초등학교의 조촐한 졸업식이 거행되기도 하였다.

그쪽에서 보면 당연한 광경일 수 있지만, 우리 쪽에서 보면 감동을 동반하게 하는 모습이어서 아름답기 그지없다.

■ 이건희 회장님의 한 마디

지난 해 삼성전자가 올린 매출 총액은 165조원에 이르고 금년에도 25조원을 설비투자 하겠다고 선언하는 것만으로 일본의 전자업계가 ‘닭 쫓던 개 울 쳐다 본다’라는 속담에 비유되고도 남는다. 우리로서는 삼성전자나 LG전자가 이루어 놓은 세계적인 성공에 대하여 아낌없는 찬사와 박수를 보낸다 해도 아까울 것이 없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참담해지는 심중을 가늠할 수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근자 재벌 2,3세들이 커피, 빵, 두부 심지어 떡볶이, 콩나물에 이르는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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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권까지 넘보다가 사회여론의 호된 지탄을 받고서야 거기서 손을 떼겠다는 식의 몰염치를 보면서 재벌가의 가정교육은 물론 그 집안의 도덕성까지 의심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이병철, 정주영, 구자경 등의 창업 1세대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기업을 일으켜 국가에 공헌하였고, 그들의 2세들인 이건희, 정몽구, 구본무 회장 등은 선대의 기업정신을 세계화하는 데 성공한 눈부신 존재들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뒤를 이어받을 직계 2세들의 치졸한 행태를 방치하는 등 가족 경영은 왜 그 모양들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몇 해 전,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이 “기업은 일류인데, 정치는 삼류”라고 했다가 정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곤혹을 치렀던 일이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의 처지에서 보면 삼성전자나 LG전자의 위세는 전 세계가 인정하는 초일류 기업으로 우뚝 섰고, 우리 정치는 하수구의 밑바닥처럼 썩어서 악취가 진동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치가 그 모양이니 나라인들 온전할 까닭이 있던가. 사회는 사회대로, 학교는 학교대로, 재벌의 2,3세들은 골목상권까지 싹쓸이 하려는 몰염치가 기승을 부릴 정도에 이르렀다면 그 해결책을 강구하는 것이 도리다.

우리 재벌들이 경영하는 기업의 매출 실적은 가위 천문학적인 수치를 넘어가는 초 세계적인 추세인데 반해 그 기업이 국가나 사회에 공헌하는 지수가 참담할 정도로 한심한 것은 기업 경영이나 집안 경영에 도덕적인 척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경주 최 부잣집의 내력인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말라’라는 도덕률이 안으로는 건전한 가업을 존속하게 하였고, 밖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존경을 받는 계기가 되었음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정말로 꿈같은 이야기지만, 삼성 그룹의 이건희 회장이 두 따님의 손을 꼭 잡고 전용기에서 내려 기자들 앞으로 다가선다. 오늘따라 이건희 회장은 온 얼굴에 환한 웃음을 담으며 덕담을 한다고 치자.

“우리 삼성은 국가의 혜택을 많이 입으면서 자랐습니다. 이제 우리 삼성 그룹은 국가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찾아 미력을 다하는 것으로 그동안 국가로부터 받은 은혜에 보답하기로 하였습니다. 많이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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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한마디 하기가 그렇게도 어려운 것인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기업 그 자체에 국가 정체성이 살아서 꿈틀거리지 아니하고는 세계를 경영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 소프트웨어의 위력

구글이 모터롤러를 125억 달러(13조 5천억 원) 에 인수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러 매스컴의 화두로 떠올랐다. 그 막대한 가격의 형성은 모터롤러가 소유한 2만 4천여 개에 달하는 특허의 가치라는 사실은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의 가치를 지배하는 시대가 왔음을 만천하에 재확인하게 한 셈이다.

이 사건은 또 다른 소프트웨어의 전문업체가 하드웨어 업체를 인수할 수도 있다는 큰 변화를 예고한 셈이기도 하다 물론 소프트웨어의 가치가 하드웨어의 가치를 선도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눈앞에 있는 실익 때문에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도 위기감을 느꼈음인지 소프트웨어의 전문 인력을 초빙하거나 양성할 것을 지시한 것은 바로 그 점의 심각성을 의미한다.

영혼이 육체를 지배하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지만 사람들은 눈앞의 실익 때문에 강인한 육체로 영혼을 지배할 궁리를 했던 역설적인 실태를 무수히 보아 왔던 터이다. 가령, 디지털 카메라 시대가 다가오면서 화소는 날로 높아지고, 심지어 스마트폰으로 촬영된 영상이 필름을 사용하던 유명 카메라의 영상보다 더 정밀하고 선명해졌다면 필름을 만들어서 세계를 지배하였던 133년 역사의 ‘이스트만 코닥’도 소프트웨어의 새 파트너를 찾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결국 코닥에서 필름의 생산 중단을 선언했다는 사실은 나와 같이 필름 카메라 세대에게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고도 남는 일이다.

생각을 바꾸고, 일하는 형태를 바꾸는 것이 내일을 향한 진로라는 사실을 구글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꾸준히 실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제는 삼성도 세계의 스마트폰 시대를 이끌어 가게 되었다. 내 집 가족 여섯 사람이 서로 신성불가침의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스마트폰의 수요가 세계 인구와 같아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구글의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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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는 남의 산의 돌이 아니다.

육체의 시대를 넘어서 영혼의 시대가 닥쳐 온 것은 우리의 사고 영역을 재편해야 된다는 신호나 다름이 없다.

■ SNS의 힘과 소통

안철수, 박원순 쇼크로 대변되는 것만 같았던 이른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의 위력이 반세기에 걸친 우리나라의 정당 문화를 쑥밭으로 만들어 놓는데도 구태에 안주하는 정치 지도자들은 주변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선거 유세장에 수많은 청중이 동원되자면 그 머릿수에 돈을 곱해야 되던 시절이 있었다. 대통령 선거 때마다 장춘당 공원을 가득 메운 10만 군중들은 모두 돈을 주고 동원한 사람들이었다. 또 그들이 타고 온 버스도 돈을 내지 않고는 움직일 수가 없다. 선거 비용이 천문학적인 수를 헤아리게 되고, 그 돈을 마련하자면 기업의 등을 치지 않을 수가 없다. 실제로 자동차로 돈을 실어 날랐다가 혼난 사람들을 보지 않았던가. 그런 사실이 엊그제 같은데,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동원하는 새로운 군중의 위력은 놀랍고 탐나는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소통의 길을 능란하게 활용하지 못하면 발만 동동거리다가 생존의 길이 막히고 만다. 이 엄연한 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니 답답한 마음을 가늠할 길이 없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대충 읽으면 인터넷이라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이 된 듯 한 착각에 빠지게 되지만, 실제로 인터넷을 즐기면서 새로운 정보를 구하고 소통하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은 뜻밖으로 많지 않다.

인터넷이라는 것이 없는 게 없는 잡화상이어서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그런데도 나이 든 사람들은 그 효용성을 알지 못한다. 인터넷에 익숙한 사람들이 들으면 놀랄만한 일이지만 실제로 우리나라 기성세대의 인터넷 이용률은 한심할 정도로 낮은 처지인데, 이번에는 한 술 더 떠서 오픈 프라이머리(완전개방국민경선)라는 모바일 선거가 민주통합당 당 대표 선거에서 정당 생활을 한 경험이 없는 문성근 씨를 일약 2등으로 밀어 올릴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였다.

인터넷이라는 게 SNS에 비한다면 한 물 간 유물이 되어 가는 판국인데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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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정치인이나 국회의원들의 경우는 그 낡아가는 인터넷을 얼마나 활용하고 있을까. 모두가 여러 사람의 보좌관을 거느리고 있는 처지라 컴퓨터 자체에 접근하지 않아도 아무 불편한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면 눈 뜬 소경이나 다름없다.

얼마 전 트위터에 올라온 글 한 편을 읽어본다.

‘다양한 분야의 연예인들을 만나 봤지만 노래 못하는 가수도 연기 못하는 배우도 스타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코미디 못하는 코미디언은 절대 못 뜬다. 그들은 정말 그 분야의 실력자들이다. 그런데 정치는? 잘하긴커녕 사람 같은 놈도 드물다. (11월 18일 via twtkr)

은근한 비유도 좋지만 드러나는 노여움은 채찍과도 같다. 이렇듯 부담 없이 읽으면서도 현실 비판이 칼날이 번득이는 글이 하루에도 수천 건씩 올라오는가 하면 터무니없는 독설이 난무하는 판국이라 갈피를 잡기 어려우면서도 소통의 즐거움은 끝이 없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는 새로운 소통의 광장으로 등장했다. 거기에는 길고 장황한 글이 없다. 설혹 거친 글이 섞였다고 하더라도 대두되는 여론이라면 소통하지 않을 수가 없다. 4월의 총선이나 12월의 대선은 2040이 문제가 아니라 2030의 문제이며, 더 나아가서는 2020의 문제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첨단의 소통 방법을 일상으로 활용하지 않으면 낙오하기 마련이다. 꼭 정치가에게만 들으라는 충고가 아니라, 나이 드신 어른들에게도 일러 주고 싶은 충고다.

■ 세종대왕의 술 이야기

공적인 경우만을 살핀다면 세종은 위대함을 넘어서는 지도자이자 통치자가 되어 마땅하지만, 사적인 면에서는 세종만큼 불행한 사람을 찾기도 어렵다. 그 불행의 첫째가 두 맏며느리를 내쳐야 했던 일이다. 세종의 맏며느리라면 당연히 다음 대의 보위를 이었던 문종의 아내들이다.

문종이 술과 색을 멀리하고 오직 서책만 벗을 삼았던 탓으로 아내가 있는 거처를 찾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첫 세자빈인 휘빈 김씨는 독수공방의 적적함을 달래지 못하여 지아비를 끌어들이기 위해 방술서에 매달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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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세자의 신발을 태운 재를 술에 타서 마시게 하면 그가 빈궁을 찾을 것이라는 속설을 따랐다가 발각되어 세자빈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두 번째 빈궁으로 간택이 된 순빈 봉씨는 독수공방의 외로움을 동성연애로 달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거느리고 있던 소쌍이라는 계집아이와 동성연애에 빠져들었다가 발각되어 시어머님 소헌왕후의 문초를 받고 역시 빈궁 자리에서 쫓겨나게 된다. 반가에서도 맏며느리를 두 번씩이나 쫓아낸다면 구설에 오르기가 십상인데, 항차 다음 대의 보위를 이어 갈 세자의 지어미를 두 번이나 내쳐야 했고, 그것도 입에 올리기 민망한 까닭을 표명해야 했던 성군 세종 내외의 고통은 어찌 헤아릴 수가 있으랴.

고통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애지중지하던 따님인 정소공주가 죽었을 때는 염을 미루면서까지 공주의 시신을 안은 채, 피눈물 나는 제문을 지어 지켜보는 사람들의 애간장을 녹여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세종의 정감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꼭 혈연만을 중히 여긴 것이 아니라 신하들에 대한 사적인 배려도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세종 시대 중기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도 남을 주호(酒豪)들이 있었다. 윤회(尹淮), 신장(申檣), 남수문(南秀文) 등이 그들이다. 세 사람 모두 학덕과 문명을 떨치던 집현전의 학사들이었지만, 이들이 모여 앉으면 누구라 할 것 없이 두주를 불사하였는데, 시(詩)와 경서(經書)를 입에 담으면 해가 지는 것을 몰랐고, 재담을 시작하면 낮밤이 바뀌는 줄도 몰랐다 하여 당대 사람들은 이를 3주호라고 불렀다.

세종대왕은 이들을 한 자리에 부르고 술 때문에 일찍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니, 과음을 삼가기를 간곡히 타이르고 특히 윤회와 신장에게는 한자리에서 세 잔 이상은 마시지 말도록 엄명을 내렸다. 그 후 윤회와 신장은 세종대왕의 하교를 받들어 어떠한 경우에도 세 잔 이상은 마시지 않았으나, 양푼과 같은 아주 큰 그릇으로 세 잔을 마셨던 탓에 주량은 오히려 전보다 늘어나게 되었다. 세종대왕은 이 말을 전해 듣고 술을 덜 마시게 한 것이 더 마시게 하는 결과가 되었다고 탄식하였다.

신장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정승 허조는 ‘술이 신장을 망쳤도다!“라고 한탄하였고, 얼마 뒤 남수문마저 세상을 버리자 성군 세종대왕은 술의 해독을 명료하게 열거하면서 다음과 같은 경계의 윤음을 내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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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의 해독은 매우 크다. 어찌 특히 곡식을 썩히고 재물을 허비하는 일뿐이겠는가. 술은 안으로 마음과 의지를 손상시키고, 겉으로는 사람의 위엄과 품위를 잃게 한다. 혹은 술 때문에 부모를 봉양하는 일마저 저버리게 되고, 혹은 남녀의 분별을 문란하게 하니 그 해독이 크면 나라를 잃고 집안을 망치게 만들며, 그 해독이 작으면 성품을 거칠게 하고 생명을 잃게 만든다. 술이 강상을 더럽히고 문란하게 만들어 풍속을 퇴폐하게 하는 것은 이루다 일일이 그 예를 들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참으로 기막힌 말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곡식을 썩힌 물을 마시면서 강상을 더럽히고 문란하게 한다는 비유는 가슴에 간직해야 할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 서울의 표준 시간

요즘 세간의 화두는 단연 세종대왕이다. 어디를 가나 정치 지도자들이 세종대왕의 리더십을 배운다면 나라의 미래가 달라질 것이라는 화두가 난무하고 있다. 참으로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실상은 한글을 창제하였다는 식의 표피적인 세종대왕만 거론될 뿐 그 분의 참모습은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 원인을 밝히는 일도 어렵지가 않다. 역사를 문자로만 읽는 편견에 매몰되면 흐름으로서의 역사를 알아낼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은 리더십을 공부하는 보전(寶典)이지만, 그 또한 행간을 읽지 않고는 담겨진 깊은 뜻을 헤아리기가 어렵다 그 중의 하나가 세종이 지녔던 국가 자주성의 확립이다. 국가 자주성이라는 말은 얼핏 당연한 것 같지만 당시의 사정은 그렇지가 못했다. 그때의 조선은 명나라의 속방이나 다름이 없었기에 사사건건 명나라의 눈치를 살펴야 했고, 그들의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렇기로 한양에 살면서 연경(명나라 수도)의 시간에 의지하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이에 세종대왕은 당 시대 최고의 과학자들인 이순지(李純之), 김담(金淡) 등

을 불러 우리에게 맞는 일력과 월력을 계산하여 농업에 도움이 되게 하라

명하였다. 국가 자주성의 발현이 아닐 수 없다. 명나라의 시간이라는 것은

곧 북경의 시간을 말한다. 북경의 시간은 한양보다 2시간 늦다. 한양에 살

면서 북경의 시간에 매이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일뿐더러 자칫 농사를

망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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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원나라의 ‘수지역법’ 명나라의 ‘통궤역법’ 아라비아의 ‘회회역경통경’

까지를 참고하여 한양을 기준으로 하는 우리 역법을 만들게 함으로써 비로

소 우리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세종시대에 아라비아의 역법을 상고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한양에 아라비

아 사람들 수백 명이 귀화하여 살고 있었고, 그들을 아끼고 사랑한 세종의

따뜻한 마음 씀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천문서적 ‘칠정산내외편’의 완성은

15세기 조선 천문학의 수준을 가늠하는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조선시대는 탄젠트, 코사인이 없었지만 서울대학교 수학과 교수들은 탄젠트

코사인 루트를 응용하여 ‘칠정산내외편’ 의 내용을 점검하였다. 그랬더니 1

년이 365일 점찍고 2425 등 소수점 이하 6자리까지 나왔다고 한다. 참으로

놀라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물론 후일 제정되는 ‘훈민정음’과 함께 국가 자주정신을 함양한 위업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아직도 우리는 일본의 수도 도쿄

의 시간을 표준시간 으로 쓰고 있다. 어처구니가 없고 심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세종대왕의 위대한 지도력을 상찬하려고 애쓰면서도 그분이 가다듬어 놓은

자주정신을 받들지 못하는 것은 역사를 문자로만 읽으려는 잘못된 생각, 그

러면서도 한 번만 읽고 집어던지는 짧은 생각이 쌓이면서 우리의 역사인식

을 병들게 하고 있다.

세종은 위대한 지도자다. 왜 우리는 세종의 리더십을 배워야 하는가. 온전

한 독립국가의 처지도 아니면서 ‘칠정산내외편’과 같은 천문서적을 간행하면

서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을 함양한 것은 ‘훈민정음’ 창제에 못지않은 성과나

다름없다.

생각해 보면 안다. 중국의 속방이나 다름없는 처지에서 한글 창제를 이루어

낸다. 국가의 존엄성을 과시하는 일이면서도 그 ‘서문’에는 독립성이나 자존

심을 쟁취하기 위한 구절은 눈 닦고 찾아도 없다.

“나라의 말씀이 중국과 달라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아니하니, 어리석은 백성

들은 말하고 싶어도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

겨 새로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편하게 쓰게 할 따름

이니라.“

이 알토란 같은 글이 중국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까닭이 없다. 민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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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을 위해 우리만을 글을 만들면서도 주변 국가와의 마찰을 용인하지

않는 세종의 리더십은 그래서 귀감이 된다.

Chaoter 2 보람찬 교육을 위하여

■ 아름다운 사교육

우리의 선현들은 어려서 서당에 다니면서 문자와 학문을 익혔다. 같은 서당

에서 공부하는 생도들도 다양하여 네 살짜리 코흘리개가 있는가 하면 서른

살을 넘긴 가장들도 있었다. 또 배우는 내용도 다양하여 천자문을 익히는 아

이들부터 논어나 대학과 같은 고전을 읽는 어른까지 함께 섞여 있었다.

너댓 살 되는 꼬마가 천자문이나 명심보감을 떼면 그 댁 부형들은 큰 함지

박에 떡을 쪄 와서 선생님과 동료 학생을 위하여 한턱을 쓰게 된다. 이른바

‘책 떼기’ 라는 자축행사다. 스승님에게는 성의를 다해 주신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며 형들 뻘인 장년의 학생들에게는 어린 자식을 위해 여러 가지 도움을

준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다. 요즘의 학교나 학원에 비한다면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아름다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서당에서 할 수 있는 글공부를 마친 사람들은 보다 큰 학문을 성취한 스승

을 찾아 나선다. 일테면 문묘에 위패가 봉안된 조선 시대 열네 분과 같이 학

문과 덕망을 고루 갖춘 스승들을 말이다. 그 스승들은 ‘기호학파’니 ‘영남학

파’니 하여 당대의 문벌을 이끄는 국가의 동량이면서 또 자신의 뒤를 이어

줄 새로운 동량을 발탁하여 기르는 것을 큰 보람으로 삼았다.

이들 성현들을 찾아 배우기를 청하는 제자들은 ‘사서오경’ 정도는 모두 욀

수 있는 학문들이다. 이들이 더 배울 학문은 없다. 그러나 학문의 행간에 담

긴 스승들의 지고한 인품과 실천 의지를 배우는 것이다. 큰 스승 밑에 큰 제

자가 태어난다는 진리는 얼마든지 입증해 보일 수 있다. 예로부터 한 인재가

두각을 나타내면 우선 “누구의 문하던고?”라고 묻는 것은 그 때문이다.

1880년 12월 12일, 조선 왕조는 지난 5백 년 동안 유지해 온 의정부와 육

조를 선진국형의 정부 조직인 ‘통리기무아문’으로 개편하면서 정부 조직을

혁명적으로 개혁한다. 정부의 우두머리는 총리로 하고, 사대사, 교린사, 군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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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통상사 등 13개 부서로 나누어지는 현대적 정부 조직에 ‘어학사(語學司)’

가 포함되는 것으로 교육제도의 근대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기에 이른다. 이른

바 공교육의 길을 열게 된 셈이다.

그 공교육이라는 것도 잠시뿐, 곧 모든 관행과 제도가 일본식으로 바뀌면서

우리가 간직한 아름다웠던 사교육이 점차 쇠락하고 배제되면서 식민지 교육

으로서의 성패에만 매달리게 되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여러 방책이나

잔재가 아직도 남아서 교육행정을 지배하고 있다면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서양식 교육제도나 방법을 그대로 들여와 시행한 탓으로 우리

의 아름다운 제도나 사상들이 무너지면서 사라져 가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른바 문벌(門閥)의 기둥(어른)이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

스승을 신뢰하고 학생들이 서로 상부상조하는 서당에서의 교육은 철저한

사교육이면서도 문자와 행실을 동일시하는 아름다운 사교육이었다.

■ 유소년 교육

유소년들의 교육이 나라의 명운을 좌우한다. 어려서 몸에 익힌 예절은 평생

의 일을 가늠하게 한다. 조선 예학의 스승이자 기둥인 사계 김장생(金長生)

은 교육의 기본을 명쾌하게 서술하였다.

“법으로 규제하면 피동적인 국민이 되고, 예를 가르치면 스스로 알아서

행동하는 상식적인 국민이 된다.“

참으로 일목요연하고 효용적인 교육론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조선 시대

의 유소년들은 ‘천자문’을 통해 천리(天理)를 익히고, ‘명심보감’이나 ‘격몽요

결’을 통해서는 가정과 인성을 익힌다. 그리고 ‘소학’과 같은 명저를 통해서

는 사람의 도리를 깨우치게 하고, 통감을 통해서 역사를 배우게 한다. 놀랍

고 현명한 커리큘럼이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과정은 사람이 바르게 살아가

는데 가장 필요한 것들을 망라해 놓은 ‘사서오경’과 직결된다.

참된 유소년 교육의 결과가 조선왕조와 같은 훌륭한 도덕 국가를 만들어

내는 기초가 되었던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데도 21세기를 살아가면서

도 훌륭한 유소년을 길러 내는 커리큘럼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학

습 과정보다 외국의 교육 이론에 의지한 탓이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일본 제국은 조선의 유소년들을 일본국 황국신민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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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는 프로젝트를 치밀하고도 정밀한 커리큘럼을 만들어 시행하면서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고, 일본 군가를 가르치고 부르게 하여 자라면 씩씩한 군인이

되어 국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는 다짐을 하게 하였다. 이른바 일

본 제국의 유소년 교육에 흠뻑 젖어들었던 경험이 내게는 있다.

1945년 8월, 일본 제국이 무조건 항복을 하였을 때 나는 열세 살로 초등학

교 6학년 소년이었다. 그로부터 60년 이상을 세월이 흐르면서 6‧25, 4‧19, 5‧

16등을 체험하며 우리 시대를 의미 깊게 살아왔지만, 내가 소년 시절에 외

치고 불렀던 일본 군가 20편 정도는 지금도 자구 한 자도 틀리지 않고 부를

수가 있다. 내 기억력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다. 유소년 시절에 접촉하였던

지식의 편린들은 평생 동안 잊혀지지 않고 기억된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

뿐이다.

유소년 교육의 방향은 국가 정체성을 기본으로 하는 국가 발전의 방향과

같아야 한다. 이 땅의 모든 유소년들에게 우리 조상들의 삶을 헤아리게 하

고, 민족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을 제시하면서 거기에 부응할 수 있는 인재를

길러 내는 커리큘럼을 개발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다. 그런데도 ‘학생

인권‘ 운운하는 지엽 말단에만 매달려 있는 것은 국가의 미래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다는 지탄을 받아도 변명할 여지조차 없을 것이리라.

말로만 ‘교육백년지대계'를 외치는 동안 유소년들은 자라서 몽매하고 무지

한 어른이 되는데도 구경만 할 것인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 우리에게 없는 것

일본의 세계적인 기업 ‘소프트뱅크’는 제일교포 손정의 씨가 설립한 회사로

갖가지 신화를 만들어 가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첨단 기업이다. 천문학적인

운영 경비가 필요하다는 일본의 프로 야구팀인 ‘소프트뱅크’도 이 기업을 모

체로 운영되고 있다.

불과 32년 전인 1981년, 손정의 씨는 회사를 설립하면서 두 사람의 사원으

로 시작했다. 지금은 전 세계에 800여 개의 인터넷 회사를 소유한 그야말로

전설적인 회사가 되었다.

그 주인공인 손정의 씨가 처음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많은 기자들이 당

신의 멘토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뜻밖에도 그는 ‘사카모토 료마’라고 대답하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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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료마는 29세의 청년으로 메이지 유신을 설계하고 성공하게 한

신화적인 인물이지만, 불행하게도 메이지 유신을 보지 못하고 31세 때 암살

로 목숨을 잃었다. 그 사카모토 료마의 불꽃과 같은 의지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시바 료타로의 소설 ‘용마가 간다’가 스테디셀러가 되면서다. 다fms 말로

설명하면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서야 ‘사카모토 료마’는 국가 정체성의

확립을 위해 온몸을 던진 젊음의 표상으로 회자되었다는 뜻이다.

이를 우리와 비교하여 설명하면 일본은 스스로 ‘근대화’ 과정을 겪은 반면,

한국은 ‘근대화’ 과정을 경험하지 못하였기에 국가 발전의 동력을 갖추지 못

한다는 뜻이 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일본은 젊은 선각의 지식인들이 나

서서 나라의 낡은 틀을 목숨을 걸고 타파하면서 ‘메이지유신’이라는 근대화

과정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낙후되었던 문

물을 개혁하는 데 매진해 세계문명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른바 세계화

과정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우리 대한제국의 양반들은 기득권을 포기하는 게

아쉽고 싫어서 죽기로 기를 쓰면서 근대화를 반대하고, 방해하다가 결국은

후진성을 자초하면서 그토록 아끼던 기득권마저 모두 잃고 말았다. 그 비극

은 지금의 반면교사가 되고도 남는다.

생각해 보라. 일본 제국은 조선을 침략하여 총 한 발 쏘지 않고 식민지로

삼는 것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분통 터지는 수치스러움이

지만, 근대화 경험을 하지 못한 데서 기인되는 문물의 낙후와 정신적인 해이

가 원인이었다면, 불과 120년 전의 일인데도 소름끼치는 수치스러움이 아닐

수 없다.

나라의 정신적 근대화가 있었던 경우와 없었던 경우가 이같이 명확한데도

우리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어 주고 근대화 정신을 일깨우는 교

육을 할 줄 모른다. 근대화가 생략된 나라는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체험하였음에도 지금 이 나라에는 정당은 있어도 국가는 없다. 정치를 한다

는 사람들이 정당의 이해에는 목숨을 걸 줄 아는데, 국가의 미래에 이바지

하겠다는 각오는 눈 닦고 찾아도 없다.

아무리 급해도 국가의 근대화 과정은 생략될 수가 없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전체 교육과정을 다시 짜는 한

이 있어도 유소년들에게 ‘근대화 과정’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 모든 일에 우

선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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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교육개혁의 중심 과제가 되어야 한다면 국가가 나서서 개혁할 수밖

에 없다

■ 4평짜리 서당

부산 바로 건너편인 일본국 본주의 야마구치 현 서쪽 바닷가에 하기 시라

는 인구 4만 3천 명 정도의 작은 시골 도시가 있다. 140년 전의 지도 한 장

을 들고도 옛 거리를 산책할 수 있을 정도로 이른바 성밑 거리가 잘 보존

되어 있는 이 작은 시골 마을은 일본국 근대화의 상징인 ‘메이지유신’이 태

동된 곳이며, 근현대 일본국 총리대신을 여덟 명이나 배출한 유서 깊은 고장

이다.

이 같은 하기 시의 영광은 130여 년 전, 28세의 선각자 요시타 쇼인이 다

다미 여덟 장(약 4평) 크기의 좁은 공간에 학숙을 열고, 13명의 제자들에게

일본국의 미래에 대한 꿈을 심어준 데서 비롯되었다.

그 꿈은 도전 정신이었으며, 호연지기를 일깨우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 당

시의 공교육기관인 명륜관에서의 교육 내용이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젊은이

들에게 번주(지방을 다스리는 장관)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공맹

의 도리를 가르친 데 반해 요시타 쇼인은 “번은 곧 없어질 것이며, 일본이라

는 새로운 국가가 탄생한다. 우리는 모든 힘과 정열을 일본이라는 새 나라에

쏟아부어야 한다.”라고 가르쳤다. 수구의 집단인 번이나 막부 쪽에서 본다

면 혹세무민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요시타 쇼인은 31세의 아까운 나이

로 사형을 당한다. 비록 스승은 불우한 삶을 마쳤다 하더라도 그로부터 불타

는 호연지기의 기세를 이어받은 그의 제자들이 ‘메이지유신’이라는 대업을

이루어 내는 데 선봉에 섰고, 새로운 일본국 근대정부를 수립하는 데 결정적

인 공헌을 하면서 아시아 제패에 앞장서게 된다.

유신에 성공한 일본 정부가 근대적 국가로 탈바꿈하면서 13명의 제자들 중

총리대신이 3명, 대신(장관)이 6명 배출되었다.

그로부터 다시 1백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또 다섯 사람의 총리대신이 이

지역에서 배출되었다면 요시타 쇼인이라는 젊은 선각자가 생각한 국가의 미

래, 다시 말하면 정신적 근대화의 요체가 무엇인지 곱씹어 보지 않을 수 없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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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가을 무렵, 나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학장인 정종섭 교수가 주도하는 거연학사의 멤버들과 함께 하기 시의 여러 유적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요시타 쇼인이 세웠던 ‘송하촌숙’은 그대로 있었고, 나는 그 현장에서 우리의 젊은 법조인들에게 선각의 불꽃 요시타 쇼인의 가르침을 가감 없이 입에 담았다.

“죽어서 불후(不朽)가 되려거든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라. 나라의 대업(大業)을 이루려거든 오래 살아서 뜻을 이루라!”

얼마나 멋진 가르침인가. 젊은이들에게 꿈을 심어 주어야 하는 철학적 인생론은 지식만을 전하는 학문으로 다듬어지는 것이 아니라 ‘호연지기’를 심어 주는데서 시작된다.

“조선을 책해 인질과 조공을 바치게 하고, 북쪽으로 만주 땅을 분할 하고, 남쪽으로는 대만과 필리핀 제도를 손에 넣어 점점 진취 자세를 보여야 한다.”

바로 여기에 정한론의 실체가 있다. ‘조선을 책해 인질과 조공을 바치게 하고....’ 읽으면 읽을수록 소름끼치게 하는 구절이다. 일본 근대화의 핵심에 ‘정한론’이 있고,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젊은 문도들에 의해 마침내 스승의 뜻이 이루어진다.

요시타 쇼인, 4평의 좁은 서당에서 2년 남짓 강의하고서도 불과 10년 뒤에 ‘메이지유신’을 이루고 일본국을 이끌어 갈 불세출의 인재들을 길러낼 수 있었던 사람.....

25세로 유신의 현장에서 죽은 구사카 겐스이. 29세에 젊음을 마감한 기병대장 다카스기 신사쿠,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카오루 등 모두 그의 제자였다.

지금도 하기 시에 있는 명륜소학교에서는 아침 조회 시간에 단상에 오른 교장선생님의 선창으로 ‘쇼인 선생님의 말씀’ 이라는 구호를 큰 소리로 외치며 내일의 일본을 이끌어 갈 소년들에게 호연지기의 꿈을 심어 주고 있다. 이러한 내 설명에 ‘거연학사’의 젊은 판사, 검사, 변호사들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서리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 참 선생님들의 사명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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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무 살에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몇 해 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한 일이 있다. 그런 까닭으로 사범학교 재학 중에는 ‘교육학’을 공부하였고, 현직에 나가서는 외국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귀국한 석학들에게 이른바 ‘새 교육’이라는 현장의 이론을 숱하게 학습한 경험이 있다. 물론 그때는 그게 최선일 줄로 알았고, 미국과 같은 선진국의 교육 이론이나 제도를 본받아야 되는 것이 우리나라 교육의 진로라는 사실을 철통같이 믿었다.

교직을 떠나 드라마를 쓰게 되어 역사책을 읽어야 했고, 우리 고전에 심취하게 되면서 교직에 있었던 시절에 알게 된 교육 이론이 우리 청소년들의 성장에 실익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런 세월이 반세기나 흘렀는데도 지금 교육인적자원부에서 추진하는 일들은 내가 교직에 있던 시절보다 퇴보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고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우리는 우리 전통에 뿌리를 둔 우리 나름의 교육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는 것일까. 젊고 새로운 인재들이 교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돌아오면서도 우리 고유의 교육시스템을 개발하여 시행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교육학을 공부했다고 상찬해 줄 수가 없다. 교직에 봉사했던 경험자로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국적 없는 교육 정책들이 난무하는 것은 국가 정체성을 위협하는 일과 조금도 다름이 없어서다.

교육개혁에 대한 대책의 일환으로 발표된 학교 폭력 근절 대책도 정부마다 목소리를 높였지만 제대로 해결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998년 김대중 정부는 ‘자녀 안심하고 학교보내기 운동’을 벌였지만 그 때 뿐이었고, 2005년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경찰관이 학교에 상주하는 ‘스쿨 폴리스 제도’를 시행했었지만 역시 전시 행정에 불과하였다.

이처럼 ‘학교 폭력 종합 대책’이라는 것이 수박 겉핥기요 지엽 말단의 대책이 되는 이유는 너무 간단하다. 학교 폭력의 근본 대책은 선생님들에게 교권을 확립해 주지 않고는 어떤 경우에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옛날 서당의 선생님들에게 주어진 절대 권한(교권)은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는 부형들도 간섭하지 못할 정도로 보장되어 있었다. 바로 그 엄격한 훈도로 건전한 사회 지도층이 양성되었던 것이다.

선생님들에게 교권을 확립하는 방법은 학생인권조례와 같은 터무니없는 지

침을 철회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사실을 정말로 모르는가. 아니면 어느 특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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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력이나 단체의 눈치를 살피는 일인가.

새로운 시대의 인간상을 확립해 가기 위해서는 참 선생님의 양성이 시급하다. 육, 해, 공군 사관학교를 두어 국토방의의 역군을 길러내는 것은 국가의 임무이자 사명이다. 이렇듯 교육대학도 삼군사관학교 수준으로 끌어 올리고, 국토방위에 임하는 국군 장교와 같은 사명감 있는 참 선생님을 길러 내야지만 만연된 학교 폭력을 근본적으로 고쳐 나갈 수 있다.

■ 초등학교에서의 한자 교육

2009년 2월,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의 진태하 이사장이 생존해 있는 역대 국무총리 21명 중 20명을 찾아가 초등학교에서의 한자교육이 시급하다는 사실을 설득하였고, 대통령에게 건의 하는 문건에 서명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전직 국무총리 20명 전원이 친필 서명을 하였다. 내친김이라는 말이 있듯 이번에는 전직 교육부 장관 40여명에게도 똑같은 취지를 설명하였다. 물러난 장관들도 빠짐없이 서명하여 초등학교에서의 한자 교육 필요성에 아낌없는 지지를 보냈다.

역대 모든 국무총리와 교육부 장관들 60여 명이 찬성했다면 국론이나 다름없지만, 여기에는 강력한 의문이 따르게 된다. 그분들은 현직에 계실 때 왜 입 다물고 있었으며 하다못해 연구용역이라도 발주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다. 아마도 고위 공직에 있는 사람들이 행정편의주의와 안일무사함에 젖어 있었음을 입증하는 일이기도 하다.

진태하 이사장의 집념은 다시 이어진다. 이번에는 초등학교에 자녀를 보낸 부형들의 의사를 물었다. 놀랍게도 89%가 찬성했다. 이것이야말로 국론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침내 이 같은 국민적 요구를 반영하는 건의서가 청와대에 제출되었다. 이런 정도의 공식 문건이면 대통령의 의사가 피력되어야 마땅한데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는 사실은 놀랍기 그지없다. 묵살이라면 치자(治者)의 도리를 망각한 것이 되고, 그에 대한 언급으로 한글 교육만을 주장하는 다른 단체의 반발로 찬반 여론이 두 패로 갈라지면서 마치 그 대립을 국론의 분열로 생각하였다면 정치 감각이나 역량이 모두 부족한 대통령임을 스스로 보여 준 꼴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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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는 진정서나 건의서를 상소문이라고 했다. 승정원에서는 올라온 상소문을 추리거나 요약할 수가 없다. 원문 그대로 임금에게 올려야 하고, 임금은 읽은 상소문에 대해 반드시 비답을 내려야 한다. 그것이 임금의 책무다. 헌종은 19세의 기생 초월이 올린 상소문에 비답을 내리면서 그 뜻이 갸륵하다 하여 기적에서 삭제하라는 파격의 성은을 내렸다는 기록도 있다. 아무리 절대 권력을 가진 군주라 하더라도 백성의 뜻을 존중하고 상찬하는 것이 선정임을 우리 역사는 세세히 적어서 전하고 있는 것이다.

청와대의 비서실에는 국민이 올린 건의서를 아예 해당부서로 이첩하는 것으로 대통령의 눈을 가리고, 또 대통령의 노고를 덜겠다는 얄팍한 충성심으로 긴 문건을 요약하여 올린다고 들었다. 문건의 실체가 구두로 보고하는 것보다 몇 배 더 설득력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도 그같이 터무니없는 일이 되풀이 되는 것은 역사인식의 부족을 드러내는 것이요. 소통방해를 자초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 인문학만이 살길이다

지난해, 일본은 두 사람의 노벨 화학상 수상자를 배출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모두 18명의 노벨 물리, 화학상수상자를 보유하여 최첨단 과학국임을 과시하였다. 일본의 GNP가 3만 5천 달러를 웃돌고 우리는 2만 달러를 조금 넘어서는 수준이다. 이 대비를 경제학적 논리만으로 따진다면 당연히 우리나라도 9명 정도의 노벨 물리학상이나 화학상 수상자를 내야 옳지만, 아직 한 사람의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뒷받침하는 학문 분야는 아직 황무지나 다름이 없다. 우리 지도자들이 염불처럼 입에 담고 있는 경제적인 발상으로 모두가 눈앞에 보이는 수치에만 매달려 있을 뿐, 기초과학 분야에 투자하면서 인재 교육의 전문화를 넓혀야 한다는 인문학적인 발상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미래를 눈에 보이는 수치에만 매달리는 일, 다시 말하여 경제적인 논리에만 의지하면 일시적인 효력은 있을지 몰라도 거시적인 효과는 기대할 수 없다. 아니 기대보다는 실패를 자초하기 쉽다. 지난 10년 동안 동양 3국은 인공위성 발사로 우주과학의 수준을 과시하였다. 중국은 65회 성공하면서 우주인을 태운 인공위성까지 쏘아 올렸고, 일본은 47회 성공하였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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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우리는 세 번 만에 성공하면서도 러시아와의 기술 협력으로 성공하였다. 한국이 인공위성을 단독으로 발사하자면 족히 12-13년은 더 걸릴 것이라는 것이 세계의 통설이라면 조금은 자존심 상해야 마땅하다.

기초과학을 튼튼히 하기 위해 인문학적인 사고로 끊임없이 투자해야 하는 것이 국가의 미래를 보장한다는 사실은 이미 학문의 수준을 넘어 실천의지가 승부처가 된다. 정부에서는 카이스트 등 과학기술 분야에 엄청나게 투자하고 있다는 식의 변명으로 일관하지만, 교수들의 연구비로 지급되는 액수는 아이들 장난 수준에 불과하다고 물리학 엘리트 교수들은 탄식한다.

경제학적인 논리나 수치는 때로 환상의 빛이 되어 미래로 이어질 것처럼 보이고, 때로는 우열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지만, 인문학적인 논리가 그 과정을 받쳐주지 못한다면 나타나 있는 수치가 아무리 거창하고 찬란해도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아직도 늦지 않았다. 인문학적인 사고와 판단이 우리의 앞날을 정하는 단 하나의 척도라는 사실을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정치 지도자들이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 스승은 사라지고, 학통도 무너지고

학문이 문도들에게 전해지는 과정에서 학파가 형성되기도 한다. 일테면 퇴계를 정점으로 하는 문도들을 ‘영남학파’라고 하고 율곡의 문도들을 일컬어 ‘기호학파’라고 하는 등 스승의 학통을 계승하는 인재의 요람임을 내외에 과시한다. 그 스승의 학문과 인품이 문도들에게 전수되고 지켜지면서 한 사회의 경향이나 틀을 짜게 된다. 아름답고 보람 있는 이 거대한 흐름은 결국 나라의 학문, 나라의 지식, 나라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 도도한 강물로 흘러가게 된다.

우리가 사는 요즘이 깊이가 없고 메마르다 못해 천박해지기까지 하는 것은 고매한 스승이 주도하는 학통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대학이라는 곳에 하늘과 같은 스승의 존재가 보이지 않으면 장래를 책임지고 갈 제자가 생겨나기 어렵다. 그것은 곧 지식인 사회가 무너지는 것으로 연결된다.

심심하면 터져 나오는 국회 본회의장에서 벌어지는 난장판을 지켜보노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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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 사회의 가치 기준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해머가 등장하여 벽을 뚫고, 전기톱이 문짝을 뜯었으며, 소화분말이 난무하였고, 국회의원들은 쇠사슬로 자신의 몸을 묶는 등 목불인견의 추태를 보였다.

그들이 누구인가. 더러는 장, 차관을 지낸 사람이며, 더러는 판검사를 지낸 사람이며, 또 더러는 대학 강단에 섰던 교수들이다.

외국의 언론들은 한국 국회의 고질병이 도졌다고 비아냥거리기 일쑤다. 아무 부끄럼 없이 자신의 몸뚱이를 함부로 내굴리는 현역 의원들은 누구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누구에게서 지식인의 도리를 배웠기에 그리도 후안무치한지 묻고 싶다. 또 그 정도로 품위 없는 행태로 나라 망신을 시켰으면 한 두 사람 쯤 국회의원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참 지식인의 도리일 것인데도 다음날부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또 희희낙락하는 후안무치를 이해할 수가 없다.

요즘은 존경할 만한 큰 스승은 눈 닦고 찾아도 없다. 학문도 학문이려니와 인품을 겸하여 갖추고, 자신의 학문을 실천으로 옮기는 큰 스승이 없고 보면 지식인 사회의 가치관이 무너지는 것이 당연하다. 장관자리라거나 감투자리라도 생길 기미가 보이면 학문도 제자도 헌신짝처럼 버리는 사이비 스승들이 태반이라, 제자들이 역사인식을 가다듬을 겨를이 없다는 뜻이다.

참 스승의 문하에서 제대로 된 제자가 나오는 것은 스승의 인품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평생 초야에 은거한 남명 조식(曺植)은 “선비의 큰 절개는 오직 출처(들어가고 나가는 일) 하나에 달려있다.”라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는 벼슬에 나갈 때가 아니라고 생각되면, 군왕의 명이 있다 해도 응하지 말 것을 가르쳤고, 본인도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이 같은 스승의 귀감이 있었기에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곽재우, 정인홍 등 솔선수범하는 문도들이 의병장이 되어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하였다. 지식인의 참모습이 아닐 수 없다.

또 화서 이항로 선생의 가르침인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정신을 이어받은 최익현, 유인석 등은 오직 그 일념 하나만으로 평생을 실천궁행하지 않았던가.

면암 최익현은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백성들보다 한 발 앞서 나가는 구국의 결단을 몸소 실천해 보이면서 적지 대마도에서 단식으로 순국하였고, 유인석 선생도 왜적을 무찌르는 항일 운동으로 삶의 마지막을 스승을 위해 보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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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들에게는 오직 공익만 있었을 뿐, 사욕은 눈을 닦고 찾아도 없었다. 오직 나라의 정체성과 역사인식의 발현에서 비롯된 정의로움이 삶의 표준이었다. 전기톱으로 본회의장의 문짝을 뜯어내고, 의장석을 향해 최루탄을 던진 사람의 스승은 과연 누구일까.

참 스승은 사라지고 학통이 무너진 오늘, 우리 처지가 날로 적막해진다고 한들 옛날의 대쪽 같은 스승들이 살아올 까닭이 없다. 그런 판국이면 참 스승의 가르침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의 참담함을 위로할 방법도 없다.

■ 악명의 통치라도

우리 역사상 가장 창조적이며 위대했던 시대인 세종 시대는 성군 세종대왕의 식견과 표준이 조화를 이루었던 찬란하고 아름다운 창조의 시대였다. 그러므로 ‘식견과 표준의 조화’가 세종대왕의 리더십이 된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그러한 리더십은 아버지 태종 이방원이 만들어 준 토대 위에서 꽃피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태종 이방원은 빛나는 다음 시대를 열기 위한 일이라면 어떠한 악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미 세자의 지위에 있었던 큰 아들 양녕대군을 물리치고, 셋째 아들 충녕대군을 후계자로 발탁한다. 장자 상속이 되지 않았던 조선왕조 초기에는 ‘여진족의 후예’라는 극렬한 악성 루머에 시달리다가, 이제 겨우 장자로 보위를 이어가게 되었음에도 태종은 장자인 양녕대군을 폐하여 궐 밖으로 내친다. 오직 정의롭고 평화로운 다음 시대를 열어가기 위한 불굴의 용단이 아니고는 불가능하였던 결단이다. 그리고 자신의 뒤를 이어갈 세종 시대에 방해가 될 만한 세력들을 찾아서 남김없이 극형으로 처단하였다.

민무구, 민무질 등 처남 네 사람에게 사약을 내려 죽게 한 것은 범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일로 왕비 원경왕후가 분노한다. 그러나 태종은 ‘폐비’ 할 것을 입에 담으면서까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뿐만이 아니다. 임금의 장인인 국구 심온에게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왕명을 내려서 죽게 하였고,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던 평생의 동지 이숙번을 귀양보내면서는 “내가 죽은 지 백년이 넘지 않으면 이숙번에게 도성의 땅을 밟지 못하게 하라.”라고 단호하게 명했을 정도다.

태종 이방원은 다음 시대의 주인인 세종의 치세에 아무 하자가 없을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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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확신이 들었을 때, 아들 세종을 불러서 말한다.

“천하의 모든 악명은 이 아비가 짊어지고 갈 것이니, 주상은 만세에 성군(聖君)의 이름을 남기도록 하라”

지도자의 자질이 무엇인가를 명쾌하게 보여 주는 대목이지만, 역사를 행간으로 읽지 않고서는 이 같은 문장을 구사할 수가 없다. 리더십은 이론이 아니라 그대로 실천임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역대 우리 대통령들의 자질 중에서 무엇이 부족했던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지금의 대통령은 물론, 나라의 미래를 걱정할 줄 아는 지도자라면 앞으로 등장할 새 대통령이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들 줄 아는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모든 악명을 자신이 짊어지더라도 다음번 대통령의 짐을 덜어주고 길을 열어 줄 줄 아는 대통령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그것이 나라의 명운을 살피는 진정한 리더십이 아니겠는가.

■ 역사의 기록과 보존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하면서 개인적인 용도로 국가 문서를 사가로 반출하였다가 여론의 뭇매를 당하면서 반환한 사건이 있었다. 대통령의 역사 인식을 살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되기는 하지만, 나라의 기강이 이런 지경으로까지 무너지는 것은 공직자들의 후안무치가 어느 수준에까지 도달해 있는지를 살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나라에 정도(正道)가 서 있을 때 녹을 받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나라에 정도가 서 있지 않을 때 녹을 받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비록 오래된 기록이라 하여도 오늘 우리의 처지를 되새겨 보게하는 공자의 명언이다. 나라의 정도를 세워 가야 할 고위 공직자들이 불요불급한 일에 매달리면서도 꼬박꼬박 국록을 챙겨가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는 것이 작금의 우리 현실이기 때문이다.

조선왕조가 5백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단일 왕조의 기틀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국가 기강이 무너지지 않았고, 젊은 언관들이 직언하는 용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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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자의 사명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일련의 일들을 적어서 후세에 전할 줄 알았음도 오래 상기해 두어야 할 덕목이다. 그 기록을 담당했던 사람들은 역사학자가 아닌 5품이나 4품 정도의 하급 지위 공직자였다. 그들을 사관(士官)이라고 부르는 것은 춘추필법으로 비유하였기 때문이다.

역사는 적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은 문서를 그대로 후세에 전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조선왕조가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세계적인 문건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사관들이 역사를 기록만 한 것이 아니라 당 시대에 있었던 모든 일을 오직 정직하게 적는 것을 사명감으로 삼았기에 금욕적 방법이라고 평가하게 된다. 게다가 원전 그대로를 오늘에 이르기까지 보전하였다는 사실에 더 주목하여야 한다. 역사는 기록 못지않게 보전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적은 문건이 자연재해나 인위적으로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고(史庫)를 산중에 두었다는 점, 임금도 열람할 수 없게 하는 등의 조처는 조선왕조의 역사 인식을 평가하는 기준으로도 손색이 없다.

절대 권력자인 임금이라고 하더라도 사관들의 철저한 감시를 받을 수밖에 없다. 태종이 사냥을 가면서 “오늘 사냥은 사사로운 일이니 사관은 따르지 말라.”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태종실록에는 그 말이 그대로 적혀 있다. 또 그날 사냥터에서 태종이 말에서 떨어지는 낙상을 하였는데, 좌우를 둘러보며 “이 일은 사관이 알지 못하도록 하라.”라고 엄명을 내렸다. 물론 그 현장에는 사관이 없었지만 ‘태종실록’에는 그 사실이 적혀있다. 이러한 것을 사관의 임무이기에 앞서 그 시대의 역사인식으로 평가하는 것이 정도다.

“사초는 모든 군신의 선악을 기록하여 후세에 가르쳐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 내용이 지극히 중요하여 다른 문서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 보관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료 관원 중에 이 사실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자는 한 등급 강등, 친척과 친구의 청을 듣고 기록을 없애거나 훔친 자. 내용을 도려내거나 긁어 없애거나 먹으로 지우는 자. 사초의 내용을 외부 사람에게 누설하는 자는 참수해야 합니다.”

-세종 31년 3월 2일 자 세종실록

“역사는 직필을 귀하게 여깁니다. 지금 춘추관의 사초를 거두어 놓고 각자의 이름을 사초에 쓰도록 했는데, 사초는 국사의 일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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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의 선악도 모두 기록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초에 이름을 쓰게 하면 사람들이 무두 두려워하여 직필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 예종 1년 4월 11일 자 예종실록

성군 세종도 부왕 태종의 실록을 보고 싶어 했다. 골육상잔과 처남 그리고 사돈까지 목숨을 끊게 한 부왕이었다. 세종은 신하들에게 부왕의 실록을 읽고 싶다는 간절한 소회를 토로하면서 아울러 절대로 고치지 않겠노라고 다짐까지 하였는데, 이에 대한 좌의정 맹사성의 대답은 참으로 곱씹어 볼 만하다.

“전하께서 만일 이 실록을 보신다면 후세 임금이 반드시 이를 본받아 실록을 고칠 것이며, 사관도 군왕이 볼 것을 의심하여 사실을 다 기록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그 진실함을 전하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은 장관들이 모여 공식 회의를 하고서도 누가 무엇이라 발언했는지 기록한 ‘국무회의록’을 남기지 않는다. 역대의 대통령을 비롯한 오늘의 공직자에게서 역사 인식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자신들의 기록을 남기지 않는 과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개선책을 강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직무유기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 ‘20 - 50 클럽’의 내실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세계의 선진국들의 모임인 ‘20-50 클럽’에 일곱 번째로 가입하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이 들린다. ‘20-50 클럽’은 국민소득 2만 달러, 인구 5천만 명이라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가입되는 선진국 클럽이다. 지금까지 여기에 가입된 국가인 미국, 일본, 독일,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캐나다 등은 ‘G7’이라 하여 세계 최상급 경제대국의 권위를 누렸다. 그런데 마침내 우리 한국이 이 대열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진실로 가슴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을 겪으면서 세계 각국의 원조 없이는 살아갈 수 없었던 최빈국의 처지를 경험하였고. 분단국가의 비극을 뛰어넘는 성과이기에 그 기쁨은 배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을 짓누르는 불안과 답답함이 있는 것은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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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서도 뿌리치지 못했던 천박하고도 고질적인 병폐를 가시지 못하고 있어서다. 재물이 넉넉한 만큼 마음가짐이 너그러워야 한다는 것이 우리네 선현들의 가르침이지만, 가진 자의 오만은 더욱 살기가 돌아서 돈 많은 재벌들에게는 아예 국가 정체성이라는 개념은 눈 닦고 찾아도 보이질 않는다. 뒷골목의 상권까지 싹쓸이하여 자식들의 부를 챙기려는 행위는 천박하다는 말이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또 마땅히 군자라고 불리어야 할 지식인들은 권력에 아부하고, 눈앞의 실익 때문에 인생을 망치면서 감옥에 드나드는 판국인데 그들이 바로 권력의 실세요, 척분이요, 차관이요, 국회의원의 신분인 것이 하루도 가르지 않고 TV 화면을 장식하는 마당이라, 세계가 우리의 형편없이 전도된 가치 기준을 먼저 알고 있는 판국이다. 그래서 설혹 우리가 선진국의 대열로 들어서더라도 그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을까 걱정스럽거니와 경제 규모에 합당한 예우는 고사하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도 가늠하기가 어렵다. 그런 불길한 예견이 이미 사례에도 허다하게 나타나고 있음은 참담하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지식인이 나서지 않고서는 이 야바위판 같은 현실이 고쳐지지 않을 것인데도 지식인 사회도 같은 물줄기에 휩싸이면서 흘러가고 있어 안타깝고 놀라운 뿐이다. 대학총장님이 청와대의 비서로 가는 것은 자신이 가르친 학생들을 배신하는 행위다. 또 현직 교수들이 정부의 눈치를 살피면서 공직으로 옮겨갈 궁리를 하는 것도 볼썽사나운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이 아무렇지 않게 통용된다. 그러므로 학생들이 정의로운 길을 잃고 방황하는 현실을 탓할 수가 없다.

■ 대학생의 자살

지식은 문자가 아니라서 실천하는 용기가 있어야 실행되고, 꽃이 핀다. 이 엄연한 틀에서 벗어나면 지식이 공염불이 되고 마침내는 사는 일에 방해가 된다. 책을 서툴게 읽으면 삶의 도움을 구하기보다 자신의 실패를 묵인하게 된다는 사실이 참으로 중요하다. 그러므로 카이스트 학생들의 자살은 그 첫 번째 책임이 본인에게 있고, 그다음은 그렇게 나약하고 공리적인 자식들을 길러낸 부모들에게 있으며, 오직 공부만 가르치는 학교 교육에도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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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은 무엇을 먹고 사는가. 꿈을 먹고 산다. 그 꿈의 실체가 바로 호연지기다. 가정에서 혹은 학교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자신의 뜻을 펼쳐 나갈 수 있는 동력이 꿈이며 호연지기다. 이 간단한 이치가 젊은 청춘들의 사고를 지배하지 못한다면 어떤 학문으로도 그들의 자기 학대를 막을 수가 없다.

조선 시대의 교육은 문자를 익히는 일보다 행실을 아름답게 하는 데 우선을 두었다. 그 모든 것이 어머니의 지혜에서 시작된다. 조선 시대의 어머니들은 지금의 어머니들보다 학문이 깊지 않았어도 자식을 훈도하는 일에는 완벽에 가까운 식견을 갖추고 있었다. 바로 된 사람의 행실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귀애하는 자식들의 가슴에 꿈과 호연지기를 심어 주는 일을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겼다.

“예로써 가르치면 나라가 평온해지고, 법으로 가르치면 나라가 시끄러워진다.”

이 평범한 가르침을 고리타분한 옛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나라 지식인 사회에 근원적인 문제가 있음을 뜻하고 그 위험함이 마침내 대학생들의 자살 사건으로 이어지게 하였다. 비근한 예가 되겠지만,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그 자식의 스승을 원색적인 어휘로 비난하고,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 돈 봉투를 주었는데도 성적은 올라가지 않는다는 식의 몰상식을 태연히 발설하는 어머니가 있다. 그 어머니들이 모두 대학을 졸업한 지식인 여성이라면 가정에서의 교육은 입에 담기 참담한 것은 물론 그런 행태는 그 자식들의 꿈을 빼앗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언론이나 여론은 왜 핵심에서 벗어난 일들을 문제 삼는가. 지금의 유소년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으면서 왜 카이스트의 교육 방식만 트집 잡는가.

우리 아둔한 매스컴들은 언제나 사태의 핵심을 짚지 못하고 지엽 말단의 에피소드를 흥미롭게 기사화 하는 것으로 독자들을 오도하고 있다. 이런 풍조가 바로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자식의 스승을 욕보이는 행태와 무엇이 다른가.

지금 우리나라에는 가정은 있는데 법도가 없다. 그런 가정들이 즐비하고서는 사회의 기강이 온전할 수가 없다. 근본이 잘못되어 있는데도 구멍 난 곳만 땜질 하는 것이 우리 교육의 실상이요, 정치의 실상이라고 생각한다면 젊은 대학생들의 자살 충동을 막아낼 방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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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코 말하거니와 엄격한 아버지가 있어야 집안의 내력이 유지되고, 지혜로운 어머니가 있어야만 집안의 격조가 갖추어진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배우는 가치관과 사회에 나와서 쓰이는 가치관, 그리고 공직에 나가서의 가치관은 일치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 현실은 가정에서의 가치관과 사회에서의 가치관이 다르고, 출세한 사람들의 가치관이 또 다르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 근본을 고치지 않고서는 모든 개선책이 공염불로 헛돌고 말 것이 분명하다.

카이스트 학생들에게 지식의 요건은 갖추어져 있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꿈이요, 호연지기다. 바로 거기에서 젊음의 꽃이 피고 꿈이 여문다는 엄연한 이치는 상식이어야 마땅하지만, 그것을 일깨우고 간직하게 하는 우리의 교육 시스템은 무너진 지 이미 오래다.

나무의 곁가지만 볼 것이 아니라 뿌리를 살펴보는 지혜만이 대학생들의 자살을 막을 수 있을 줄로 안다.

■ 홍명보의 리더십

런던 올림픽에서 축구 4강의 신화를 이룬 홍명보 감독의 리더십은 단순히 젊은 선수들을 발탁하여 정신과 기량을 담금질 한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진 선수단 밖에서의 봉사 정신이 그 배경이었음을 말할 나위가 없다. 홍명보 감독은 자신의 이름을 딴 자선단체를 운영하고 있고, 그 수익금은 해마다 장애인 소년들을 위한 기부금으로 승화되고 있다. 어느 눈 오던 날, 빨간 산타클로스 옷을 입은 국가 대표급 선수들이 아무 보상도 받지 않고 얼어붙은 그라운드를 누비던 아름다운 광경은 홍명보 간독이 이루어 낸 실천궁행의 귀감으로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홍명보 호는 거의 4년여의 시간을 어린 선수들과 함께 하나의 가족처럼 끈끈한 유대를 이루어 내는 데 성공한다. 이것이 바로 개인이 아닌 팀을 강조하는 홍명보 특유의 ‘팀 정신’을 이루어 내는 원천이자 저력이었다.

세상에 그냥 만들어지는 것은 없다. 꾸준함과 인내심이 없고서는 어떤 성공도 불가능하지만, 그 성과를 보장받는 것이 바로 실천하는 리더십이다. 아무리 많이 배운 학문도 실천궁행이 따르지 않는다면 겉치레에 불과하고 그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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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는 무너져 내리는 사상누각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아무리 좋은 정책도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변변치 못하면 사상누각을 쌓는 일이나 다름없다. 국민소득이 겨우 10달러 정도에 불과했던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인 조선 왕조가 장장 5백 년 동안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배우고 익힌 바를 실천궁행으로 이어 간 지식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리 이원익, 백사 이항복, 면암 최익현과 같은 지조 있는 지식인들은 자신이 살던 시대의 권문세도의 불법과 맞서면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배운 그대로 행동하다가 불행을 자초한 분들이지만, 그 향기로운 삶은 지금가지도 국민들의 가슴에 불꽃으로 살아 있는 별이나 다름이 없다.

홍명보 감독의 실천궁행이 빚어낸 리더십이 성공한 것은 역사의 흐름을 거역하지 않은 사람됨이 어린 선수들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는 국민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지도자의 등장이 절실하다.

자신만의 실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국회의원이나, 고위 공직자, 혹은 기업의 총수나 오너들이 명령이 아닌 설득과 소통의 방법으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소임을 완수하는 것이 리더십의 핵이라면 홍명보 감독의 지도력은 그 표준이 되고도 남는다.

우리 곁을 난무하는 수많은 우두머리들에게 홍명보 감독의 리더십을 배우라고 권하고 싶다. 그 첫 번째 조건이 홍명보 감독이 지닌 지도자의 실천하는 매뉴얼이다.

리더십의 본질은 화려한 수식어가 아니라 확실한 실천궁행으로 이루어 진다는 사실을 홍명보 감독은 충실하게 보여 주었다.

홍명보의 리더십을 배워야 하는 이유이다.

2013. 9. 1.

* 다음에 Chapter 3, 4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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