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마지막 질문

보해성산 2013. 9. 30.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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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만장자의 -

마지막 질문

고 이병철 회장이 묻고

철학자 김용규가 답하는

신과 인간에 대한 근본적 통찰

■ 김용규 지음

0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 공부

0 저서

-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철학 카페에서 문학 읽기. 철학 카페에서 시 읽기. 기적의 양피지 캅베드. 설득의 논리학. ‘철학 통조림’시리즈. 데칼로그. 영화관 옆 철학 카페.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알도와 떠도는 사원 (공저) 다니(공저)

■ 들어가는 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흐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차지 아니하도다.” (전도서 1:2~8)

이 글은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 당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웠고 근동에서 가장 부자였던 이스라엘의 제3대 왕 솔로몬(Solomon, ?~기원전 912?)의 말이다.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궁에 살았고, 700명의 아내와 300명의 첩을 거느렸다는, 그런 솔로몬이 마지막으로 남긴 지혜가 바로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도서 1:14)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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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래서였겠다. 삼성그룹을 창건한 고(故) 호암 이병철 회장이 1987년 타계하기 직전 가톨릭교회의 정의채 신부에게 네 쪽짜리 질문서를 보낸 것이! 단아한 필체로 쓴 24개 질문 가운데 첫 번째가 “신(하느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였던 것은 분명 그래서였겠다.

죽음 앞에 선 사람들이 모두 그렇듯 이 회장도 사람이 해 아래서 이룬 모든 일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음을 뼈저리게 느꼈을 터이다. 그러자 문득 다가온 것이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에서 시작하여 ‘종말은 언제 오나’에 이르는 24개의 피할 수 없는 의문이었다.

이 회장이 던진 질문을 계기로 차제에 인간적이고 숙명적인 이 의문들에 대해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게 옳지 않을까?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쓴 까닭이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무신론은 요 몇 년 사이 정녕 유래 없는 수확을 거두었다. 그 결과 이제 ‘무신론자’라는 말은 합리적이고 세련된 지성인을 가리키는 징표가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바람직한 현상일가? 누군가가 자기는 신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로 무신론을 주장하는 것은 종교에 관한 하나의 정당한 입장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종교는 해롭기 때문에 없애야 한다는 종교해악론 내지 종교말살론은 결코 정당하다 할 수 없다. 그 같은 행위는 종교를 가진 다른 사람들의 신념에 대한 공격이자 폭력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는 록음악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록음악은 해로우니 없애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문화는 다양한 토양에서 자라나는 숲이다.

만일 내 말에 동의하기 어렵다면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과학 해악론 내지 말살론을 퍼트리고 있다고 하자.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인류는 고대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당대의 첨단무기로 전쟁과 테러를 자행해왔다. 그리고 첨단무기 생산에는 항상 당대의 첨단과학이 이용되었다. 그것이 돌도끼이든 칼이든 총이든 대포든 생화학무기든, 심지어 인류의 존속까지 위협하는 원자폭탄이든 불문하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은 해로운 것이며 아례 없애버려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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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가?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또 과학이 없어진다고 해서 전쟁과 테러도 함께 없어질까?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그 존재 여부조차 분명하지 않았던 ‘이병철 회장의 24개 질문’이 24년이라는 오랜 잠에서 깨어나 차동엽 신부의 ‘잊혀진 질문’을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전해진 바로는 당시 이회장이 임종을 앞두고 건강상태가 몹시 좋지 않았는데도 손수 40여 개 질문을 만든 다음 그 가운데 24개를 골라 다시 정리했다고 한다. 그것이 박희봉 신부, 정의채 신부, 손병두 전 서강대학교 총장의 손을 거쳐 차동엽 신부에게 전해졌다.

이 회장이 남긴 질문들은 신의 존재여부와 속성, 신과 과학(우주론, 진화론)의 관계, 죄와 구원의 의미, 성경의 본질과 권위, 종교의 의미와 믿음의 실체, 영혼의 존재와 역할, 교리가 가진 문제점, 교회의 사회적 역할과 부작용, 종교인들의 윤리적 문제, 지구의 종말 등 종교적으로도 그렇지만 사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문제를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진지하고 폭 넓게 묻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질문들이 오늘 날 거센 바람을 일으키는 새로운 무신론과 이에 대응해야 하는 기독교 교리의 전반에 대해 진중한 논의를 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마련해 준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이 책을 쓴 또 하나의 까닭인데, 그런 점에서 나는 이 회장에게 감사한다.

이 책이 견지하는 것은 ‘인문학적 관점’ 이다. 이 말은 이 책이 기독교의 특정 종파 내지 교파의 관점이나 신학적 경향이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한 까닭은 인문학이 가진 장점을 살리고 싶어서다. 어떤 종교의 주장을 그 종교의 관점과 언어로 설명하는 말이나 글은 그 종교의 구성원들에게는 은혜롭다. 하지만 자폐적이어서 설득력이 떨어지거나 그 종교 밖의 사람들에게는 거북스럽기 십상이다. 그러나 종교적 담론도 인문학적 관점과 언어로 설명되면 덜 은혜롭긴 해도 거북스러움이 덜하다. 이것이 내가 의도하는 바다.

미리 밝혀둘 사항이 몇 가지 있다. 성서를 비롯한 서구의 저술에 표기된 ‘신’이라는 명사를 가리키는 호칭이 우리나라에선 두 가지다. 가톨릭에서는 ‘하느님’, 프로테스탄트에서는 ‘하나님’이다. 이 책은 인문학적 관점을 견지하므로 모두 ‘신’으로 표기하고 신학자들의 문장을 인용할 때는 원문 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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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구절을 인용할 때는 ‘하나님’으로 통일했다.

이 회장의 원래 질문 24개 가운데 2개는 유사한 것 끼리 묶어서, 이 책에서는 22개의 질문으로 정리했다.

나는 이 책을 바람이 부는 언덕에 꽃씨를 뿌리는 마음으로 썼다. 이 회장이 남긴 질문 하나하나가 답하자면 책 한 권으로 부족할 만큼 크고 무거운데다 그중 상당수는 기독교 밖에서도 그리고 안에서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내용 이어서다. 더러는 길가에, 더러는 돌밭에,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질 테지만, 백만 송이 꽃으로 피어나길 바란다.

2013년 6월 청파동에서 김용규

1. 신(하느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명왕성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분홍코끼리들이 살고 있다.” 누군가 이런 주장을 했다고 하자. 우리가 그것을 믿어야 할까? 그렇지 않다. 그 주장을 한 사람이 명왕성에 사는 분홍코끼리들의 존재를 명백히 증명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이것은 미국의 과학저술가 데이비드 밀스(D. Mills)의 ‘우주에는 신이 없다’에 나오는 이야기다.

밀스는 또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나 로마의 신들보다 기독교의 신을 믿어야 할 이유 같은 것은 없습니다. 제우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가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제우스 신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논리의 법칙에서 입증 책임은 긍정하는 쪽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입증해야 합니다. 반면에 명확한 반증이 없으므로 모든 존재를 믿어야 한다면, 왜곡된 그 ‘논리’ 때문에 명왕성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분홍코끼리들이 살고 있다고 믿어야만 합니다. 현재로선 명왕성을 탐사해보지도 않았고, 코끼리들이 살고 있지 않다는 것도 증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신이 분홍코끼리나 그리스의 신들보다 더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은 다만 기독교의 신을 받아들이도록 반복적으로 세뇌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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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이제부터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존재를 과연 증명할 수 있는가. 할 수 있다면 어떻게 가능한가. 그리고 그 의미는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입증해야합니다.”라는 밀스의 뼈있는 말이 의도하는 바도 이것일 텐데, 그 과정에서 고 이병철 회장이 남긴 질문에 대한 답도 자연스레 얻게 될 것이다.

중세가 낳은 위대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T. Aquinas 1225-1274)는 ‘신학대전’ 이라는 저서에서 ‘어떤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그것이 실제로 있는가’라는 물음 뒤에 따라오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그는 신의 존재 문제를 먼저 다룬 다음 신의 속성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다. 아퀴나스는 신의 존재를 주춧돌 삼아 거대한 신학체계를 세우기 위해 그랬다. 하지만 우리는 거꾸로 신의 속성에 대해 알아본 다음 신의 문제를 다루려 한다. 즉 신이 과연 존재하는가 묻기에 앞서 신이란 무엇인지.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부터 알아보려 한다.

구약성서를 보면 공교롭게도 신은 자기가 무엇인지 어떻게 생겼는지를 도무지 드러내지 않는다. 예컨대 야곱이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라고 청했을 때 신은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라고 되물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창세기 32:29)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 (이사야 45:15) 이라고도 묘사했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신이 자기 정체를 밝힌 곳이 한 군데 있다. 모세가 호렙 산에서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난 신을 만나는 장면을 기록한 ‘출애굽기’3장이다.

여기서 신은 이미 80세가 넘은 노인 모세(Moses 기원전 1350?-기원전 1250?)에게 이집트에 가서 노예로 사는 히브리인들을 구해내라고 명한다.(출애굽기 3:10) 이집트에서 태어나 그곳 왕궁에서 자랐지만 사람을 죽이고 도망쳐 나온 모세는 그 일이 도통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감히 불손한 의도를 감춘 채 신에게 다소 위협적인 질문을 던졌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까” (출애굽기 3:13).

모세가 신이 맡긴 사역을 빌미 삼아 신의 이름을 물은 것이다. 이름을 밝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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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지, 아니면 자기를 이집트로 보내는 명을 거두든지, 거두든지 양자택일하라는 뜻이다. 이 영악한 질문에 대해 신은 “아흐예 아세르 아흐예(ehyeh asher ehyeh)”라고 답했다(출애굽기 3:14).

알고 보면 참으로 놀라운 뜻이 담긴 이 히브리말이 최초의 그리스어 구약성서인 ‘70인역(Septuaginta)’에는 “나는 있는 자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우리말 성경에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애굽기 3:14)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성서에 주로 ‘여호와(Jehovah)’로 표기되는 신의 이름 ‘야훼(YHWH)’와 연관된다. 구약성서학자들에 의하면 야훼는 ‘그는 있다’, ‘그는 존재한다’, 그는 현존한다‘ 이다.

신이 모세에게 자신을 밝힌 ‘나는 존재다’라는 신의 대답에는 ‘너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곧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창세기 3:19) ‘존재물’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아흐예 아세르 아흐예”라는 신의 대답 안에 내포된 가장 중요한 의미다. 이후 히브리 선지자들이 입을 모아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이사야 40:6)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니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이사야 40:8)라고 묘사했던 신과 인간의 구분이 모두 여기서 나왔다.

그렇다! 신을 ‘존재’로 인간을 ‘존재물’로 구분해 파악한 것이 기원전 1300년 경 모세가 이룬 위대한 업적이다. 혹시 당신은 그게 뭐 그리 대단한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 대단함을 알아내려면 먼저 ‘존재’와 ‘존재물’의 차이점에 주목해야 한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신을 이해하는 데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내용이 모두 여기에 담겨 있다. 또한 이 문제는 다음 장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할 때도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뿐 아니라 이병철 회장의 질문에 대한 답과도 연관된다.

■ 신은 바나나도 분홍코끼리도 아니다

존재자, 존재물, 존재는 모두 철학용어다. 철학에는 이에 대한 다양한 주장과 설명이 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우리는 이렇게 쉽게 정리하자.

존재하는 모든 것, 곧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는 모든 대상은 존재자다. 여기에는 전설의 동물인 유니콘이나 페가수스, 그리고 밀스가 말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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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코끼리와 제우스도 포함된다. 그런데 그 가운데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 곧 당신이 지각할 수 있는 사과, 바나나, 나무, 건물, 사람, 책상, 의자 등이 ‘존재물’이다. 나아가 광대한 우주부터 분자나 원자같이 맨눈으로 볼 수 없는 물질까지, 그것이 무엇이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고 있는 한 존재물이다.

그럼 존재란 무엇인가?

서양철학과 신학에서 신을 존재라 규정할 때 그 존재가 뜻하는 것은 ‘모든 존재물이 그로 인해 생겨나서, 그 안에서 존재하다가, 그 안에서 소멸하는 무한한 바탕’을 말한다.

이 말은 ‘존재’가 없이는 그 어떤 ‘존재자’도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또한 존재는 모든 존재물을 규정하고 제약하지만, 자신은 어떤 존재물로부터도 규정당하거나 제약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존재는 심지어 시간과 공간의 제약도 받지 않는다. 곧 영원하고 무한한 ‘무한정자(無限定者)’이자 ‘무규정자(無規定者)’이다. 이 말을 파르메니데스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존재는 생성되지 않고 소멸되지 않으며, 온전한 하나이고 흔들림이 없으며 완결된 것이다. 그것은 과거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미래에 있게 될 곳도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있으며, 전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기독교 신이 말하는 신은 바나나, 나무, 건물, 사람과 같은 하나의 ‘존재물’이 아니고, 유나콘이나 페가수스 그리고 밀스가 말하는 분홍코끼리와 제우스 같은 전설이나 상상 속의 존재자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기독교인들이 믿는 신은 스스로 자기를 ‘존재’라고 밝혔다. 이 때문에 그 신을 믿는 사도, 사도교부, 그리고 지난 2000년 동안 이 신에 대해 탐구하고 언급해온 신학자들은 하나같이 신이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존재물이나 상상 속의 존재자와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을 다양한 방법과 표현으로 누누이 이야기 해왔다.

■ 신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

먼저 신을 ‘거대한 바다’에 비유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에 주목해보자. 참 놀랍고도 생소한 생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암암리에 신을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미켈란젤로(B. Michelangelo, 1475-1564)가 1512년 성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린 ‘천지창조’에 등장하는 근엄하고 건장한 하얀 수염의 노인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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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렇지 않은가? 아마 그럴 것이다. 나 역시 부지불식간에 그렇게 생각할 때가 많다. 이병철 회장이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느냐고 물었던 것도 아마 그래서 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체 안에 전체를 내포하며 무한하고 무규정적 실체의 거대한 바다”와도 같다는 신의 본성을 알고 나면 신을 사람과 같이 어떤 형태가 있는 대상으로 상상하기는 불가능해진다.

그럼 미켈란젤로가 ‘천지창조’에서 신이라고 그린 노인은 도대체 누구인가? 알고 보면 그 노인은 기독교인이 섬기는 야훼‘가 아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왕 제우스다. 깜짝 놀랄 만한 일인데, 미켈란젤로는 대체 왜 그랬을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르네상스(Renaissance)는 ’재탄생‘ 또는 ’부활‘이라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정신을 자기 작품 속에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런 정신은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 양식이 지닌 두드러진 특징 몇 가지를 만들어 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을 연 시인 단테(1265-1321)는 ‘신곡’에서 기독교인들의 신인 야훼를 아무 망설임 없이 그리스, 로마인들의 신인 유피테르(Jupiter)라는 이름으로 바꿔 불렀다. 또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가들은 성서의 이야기를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을 통해 표현했다. 야훼를 제우스의 모습으로, 아담과 예수를 아폴론의 모습으로, 성모 마리아를 아프로디테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 라파엘로는 제자들을 아테네로 보내 그리스 조각들을 스케치해 오게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 같은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용이한 예가 ‘천지창조’가 천장을 장식하고 있는 성 시스티나 성당의 앞면 벽에 그려진 최후의 심판이다. 역시 미켈란젤로의 작품인데, 이 그림의 중앙에는 세상의 마지막 날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예수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기다란 금발에 수염을 기른 모습이 아니다. ‘천지창조’ 중 ‘아담의 창조’부분에 그려진 아담의 모습처럼, 짧은 갈색 머리에 수염 없는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왜일까? 우리에게 익숙한 수염 기른 장년 예수의 모습이 이미 7,8세기 성화에 나타났던 점을 감안하면 매우 특이한 일이다. 이는 미켈란젤로가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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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 조각에 표현된 아폴론의 모습으로 예수를 그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 옆에 앉아 있는 성모의 자태가 매력적인 건 아프로디테의 요염한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다. 좋다! 아무렴 어떤가? 작품일 뿐인데!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르네상스 시대 작가들이 신을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묘사함으로써 일반인들이 기독교의 신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치명적인 걸림돌이 되어 왔다는 점이다.

그러니 우리는 분명히 하고 넘어가자!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요한복음 4장 24절의 기록처럼 기독교에서 섬기는 신은 ‘영(靈)’이다.

영은 ‘바람’ 또는 ‘숨결’과 어원이 같다. 신이 영이라는 말은 신은 모든 것에 침투하는 바람, 때로는 조용한 숨결로, 또 때로는 거센 폭풍으로 모든 것에 침투하여 지배하는 바람이라는 뜻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도무지 그 어떤 감각적 형상도 갖고 있지 않다. 당연히 남성도 여성도 아니고 늙은이나 젊은이도 아니다. 그래서 구약성서에는 신이 인간 앞에 자신을 드러낼 때면 천둥, 바람, 불 같은 것으로 그 위용과 능력을 보여주고(출애굽기 3:2, 신명기 4:12,15 등) 어떤 때는 꿈을 통해(창세기 28:12~16, 37:5-9, 열왕기상 3:5, 다니엘 2:3등), 또 어떤 때는 환상을 통해(에스겔 8:3 등) 자기를 나타내기도 한다. 또 신은 외부에서 들리는 음성이나(사무엘상 3:1 등) 천사를 통해(다니엘 9:20, 10:10~21 등) 자신을 현현한다.

■ 내 손을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여기서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신은 왜, 그토록 간단한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지 않는 것인가? 설령 신 자체는 무형의 존재라 하더라도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그러했듯 모든 사람에게 ‘어떤’ 형상으로 나타나준다면 우리가 ‘신’의 존재를 아무 어려움 없이 믿고 그의 말을 어김없이 따를 텐데 왜 그러지 않는가 하는 의문 말이다.

2000년 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던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을 듣고 “내가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한복음 20:25)라고 외쳤던 도마, 우리가 흔히 “의심 많은 도마(Doubting Thomas)”라고 부르는 그는 도킨스, 해리스 밀스 같은 무신론자들이 그렇듯 무엇이든지 감각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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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증하지 않고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자, 사실 무리 모두의 대변인이기도 하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우리가 원하면 자기 모습을 보여주고 기도와 소원을 들어주며 기적도 행하면서 인간과 세상을 이끌어 간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우리는 당연히 신을 의심 없이 믿고 그의 말을 어김없이 따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신이 ‘존재’하는 것을 우리가 진정 원할까?

만일 그런 날이 온다면 더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염려를 하지 않고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일 신이 그걸 허락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더는 자유인이 아닌, 신의 꼭두각시이자 노예가 될 것이다.

여기서 비로소 드러나는 진실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신을 보지 못하고 만날 수 없기 때문에 그를 믿고 따르거나 그러지 않는 것이 우리의 자유에 속하며, 신이 진정 신이고 인간이 진정 인간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신은 푸른 하늘 어느 한곳에 자신의 거처를 마련해 우리가 늘 볼 수 있도록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어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며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자신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 확인해보려는 도마에게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한복음 20:29)라고 교훈한 까닭이다.

자, 그럼 바울이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디모데전서 6:16)로 표현한 신은 도대체 어떤 모습을 하고 잇ㄴ을까? 사도 요한이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요한1서 4:21)라고 단언한 신을 우리가 어떻게 사고하고 상상해야할까?

■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

성서에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로마서 11:36)라고 기록되었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거대한 바다’에 비유했으며,판넨베르크가 ‘장(Field)으로서의 하나님’이라 묘사한 신의 모습은 우주의 근원을 탐색하는 현대 물리학자들이 ‘퍼텐셜’이라 부르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물리학자들은 아무런 형체가 없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도 인지할 수 없지만, 우주 전체를 구성하는 모든 물질이 그것에 의해 생성되고

유지되며, 매순간 새로워지고 소멸되는 ‘소립자의 장’을 가정해 퍼텐셜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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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렇다고 해도 ‘퍼텐셜’이 곧 기독교에서 섬기는 신인 것은 아니다. 하나의 비유일 뿐이다. 왜냐하면 모든 물질의 근원이라 해도 여전히 세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만일 퍼텐셜을 신이라 하면 신도 세계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 그럴 경우 기독교의 신이 가진 중요한 속성인 세계에 대한 신의 절대적 독립성, 곧 신의 세계초월성이 훼손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퍼텐셜을 가능케 하고 또 포괄하지만 그것을 초월한다.

오늘날 도킨스와 밀스와 스텐저 같은 과학자들이 자연과학적 근거를 동원해 우주에는 신이 없다고 외치며 기독교를 미신으로 몰아가는 것은 이른바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된다. 허수아비 논증이란 상대방의 주장을 자신이 공격하기 쉽게 자의적으로 단순화하거나 왜곡해서 허수아비를 세운 다음 그것을 공격해 허물어뜨리는 방식의 논증인데, 그 내용을 불문하고 논리적 오류에 속한다.

내가 보기에 무신론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의 일부는 기독교 교리와 신학을 상식적 수준에서면 겨우 이해하고 있거나 아예 무지한 탓에 그리고 또 다른 일부는 악의적 의도를 갖고, 고의적으로 왜곡해 공격함으로써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를 숱하게 범하고 있다. 우리는 앞으로 이러한 사례를 자주 살펴볼 것이다.

■ 네가 그분을 파악한다면 그분은 신이 아니다

정리하자. 기독교의 신앙고백 가운데 하나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신의 속성을 “그는 그의 존재와 완전성에서 무한하시고(욥기 11:7~9, 26:14), 가장 순결한 영으로서(요한복음 4:24) 육체와 정열을 지니지 아니하시고, 그 무엇의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지 아니하시기(신명기 4:15, 요한복음 4:24, 누가복음 24:39) 때문에 불가시적이다.(디모데전서 1:17) 그는 또한 변치 아니하시고(야고보서 1:17, 말라기 3:6), 광대하시며(열왕기상 8:27, 예레미야23:23), 영원하시고(시편 90:2, 디모데전서 1:17) 인간이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분”으로 묘사한다.

이제 우리는 이회장의 첫 번째 질문에서 나중의 것, 곤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에 답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모든 존재물을 존재하게 하는 근원으로서, 그것들을 통해 태초부터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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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자신의 존재를 ‘부단히 그리고 분명히’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답이다. 단지 우리가 인식할 수 없을 뿐이다.

왜 인식할 수 없느냐고? 그 이유는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신은 무한하기 때문이고 불가시적이기 때문이며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대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꼽히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가 “네가 신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 뭐 그리 놀라운 일인가? 만일 네가 그분을 파악한다면 그분은 신이 아니다”라고 딱 부러지게 가르친 것은 그래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1323년 교황 요한22세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가톨릭교회는 관례적으로 하는 기적사문(奇蹟査問)을 하지 않았다. 왜 기적사문을 행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교황은 그가 남긴 저작이야말로 분명한 기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기적이 바로 ‘신학대전’이다. 우리 이야기와 연관해 이 책이 중요한 이유는 고 이병철 회장이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고 물었는데, 바로 이 책 안에 그것에 관한 탁월한 사유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 이성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길

‘신학대전’에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다섯 가지 길’이 제시되어 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그 가운데 처음 셋을 ‘우주론적 증명’이라 이름 붙였고, 그 다음 둘을 각각 ‘도덕론적 증명’, ‘목적론적 증명’이라 이름 붙인 다섯 가지 논증이다.

아퀴나스에게 막강한 영향을 끼친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기원전 322)가 밝혀 놓은 이 논증의 원형을 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을 ‘원동자’ 또는 ‘부동의 운동자’라고 불렀다.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다른 것을 움직이는 자’라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운동’이란 장소의 변화뿐 아니라 질적, 양적, 실제적 변화를 동시에 의미하는 말이었다. 따라서 ‘부동의 운동자’라는 표현에는 ‘자기는 변화하지 않으면서 다fms 모든 변화의 근원이 되는 자’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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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이란 없었던 것이 있게 된다는 의미에서 분명 하나의 운동(변화)이다. 그런데 누구든 부모 없이는 태어날 수 없다. 그의 부모와 부모의 부모, 이런 상황이 무한히 소급되면 모든 출생의 최종원인인 그 누군가가 필연적으로 있어야만 한다. 즉 그는 ‘부모 없는 부모’ 이다. 이런 모든 탄생과 변화의 원인이 되는 무형의 원리를 가정해 ‘부동의 운동자’라고 부른다.

제우스나 아폴론 같은 유형의 신 개념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처음으로 ‘부동의 운동자’라는 무형의 자연원리로 바뀐 것인데, 그의 위대한 업적 가운데 하나다.

또 하나의 탁월한 중세 신학자인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가 신이라는 개념에서 시작해 오직 추론에 의해 ‘연역적으로’ 신의 존재를 도출해 낸 증명과는 전혀 다르다. 예컨대 안셀무스가 ‘모놀로기온’에서 실행한 논증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1. 신은 정의상 그 이상 완전한 존재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가장 완전한 존 재다.

2. 가장 완전하다는 것은 그 어떤 결핍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3. 만일 어떤 것인 인간의 정신에만 존재한다면 이는 실제적 존재가 결핍된 것이다.

4. 그러므로 신은 인간의 정신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존재한 다.

■ 경험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길

1916년 발표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 Einstein 1879~1955)의 ‘일반상대성원리’는 그 자체로 완벽하고 아름다운 이론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당장에 참된 과학지식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은 아니다. 이 이론이 공인된 것은 그로부터 3년 후인 1919년 5월 29일 영국의 천문학자 아서 에딩턴(A. Eddington 1882~1944)이 서아프리카 해안의 프린시페 섬에서 개기일식 관측실험을 하고 나서였다. 아인슈타인의 예측대로 ‘빛이 태양과 같은 중력이 큰 행성 가까이를 지나갈 때는 휜다’는 것을 에딩턴이 이 실험으로 증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것이 실제로 존재하느냐 아니냐,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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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속성은 어떠하냐 하는 문제는 사고가 아니라 실험과 관찰로만 증명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경험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럼 ‘신에 대한 경험’은 가능한가? 신학자들의 대답은 단연코 ‘그렇다!’이다. 왜냐하면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이거나 신비적이거나 일상적이거나, 그 어떤 형태로든지 신적인 것에 대한 인간의 경험이 전혀 없었다면 종교란 아예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신에 대한 경험은 모든 종교의 샘솟는 원천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무신론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과학자와 철학자 그리고 일반인들 가운데도 기적, 환상, 환청 같은 종교적 경험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가진 사람이 많다는 점이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종교적 경험 자체를 일종의 심리적 환상으로 보고 그 실재성을 부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설령 그것이 실재한다 하더라도 생활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식으로 그 의미와 가치를 부인하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도킨스와 해리스는 자신들의 저서에서 종교적 경험을 ‘망상’ 내지 ‘정신적 질환’으로 간주해 부정했고, 밀스는 ‘우주에는 신이 없다’에서 종교적 경험의 의미와 가치를 다음과 같이 폄하했다.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병을 앓고 있거나 병원에 입원한 사람의 빠른 회복을 위해 기도한다. 만약 병석에 누워 있던 사람이 건강을 회복하게 되면, 교회는 그것을 과장되게 부풀려 기적을 행하는 그들의 신이 베푼 은혜로 돌린다. 그 사람이 죽게 되면, 이 슬픈 결과가 신의 존재나 기도에 응답하는 신의 능력을 부정하는 증거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 달리 말하면, 신자들은 ‘선택적 관찰’이라고 알려져 있는 오류, 즉 명중한 것은 계산하지만 빗맞은 것은 무시해버리는 지각적 오류를 수용함으로써 응답받은 기도라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이들에게는 기적과 같은 종교적 경험을 근거로 신의 현존을 증명하려는 모든 시도는 불가능하고 불필요할 뿐 아니라 백해무익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신앙생활 안에서 끊임없이 크고 작은 종교적 경험을 하는 기독교인들은 물론, 냉철한 신학자들마저 이 같은 반론이 ‘종교적 경험에 의한 신의 존재증명’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본다.

■ 신앙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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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과학사학자 토머스 쿤(T. Kuhn 1922~1996)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과 견주어보면 이해하기 쉽다. 쿤에 의하면 패러다임이란 본디 그 자체가 ‘신념’이며 ‘가치체계’이며 ‘문제해결 방법’이다. 우리가 대상을 관찰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일종의 색안경이다. 여기서 우리는 패러다임과 그것을 통해 얻은 경험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그 둘은 사실상 서로 뒤엉킨 하나의 혼합물이다. 시쳇말로 ‘그렇게 생각하니 그렇게 보이고, 그렇게 보이니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천동설을 주장한 프톨레마이오스와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가 어느 날 바닷가에 나란히 서서 일출을 보고 있다고 하자. 이때도 프톨레마이오스는 ‘움직이는 해’를 보고, 코페르니쿠스는 ‘움직이는 지구’를 볼 것이라는 이야기다. 쿤이 증명해낸 것은 과학에서도 패러다임이 다르면 경험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종교적 경험도 마찬가지다.

구약시대의 유태인들이 겪은 숱한 전쟁과 고난이 역사가들에게는 이스라엘과 인접 국가 간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사건일 뿐이다. 하지만 선지자들에게는 신이 그 택한 백성을 인도하고 훈련시키고 벌줌으로써 자신이 이끌고 간다는 목표를 이해시키는 과정이자 도구였다. 예컨대 예레미야는 자신들의 신 여호와가 적군 갈대아의 군사 뒤에서 갈대아 군사들을 위해 싸우고 있으며, 그들을 통해 그가 택한 이스라엘을 징벌하는 것이라고 보았다.(예레미야 38:17~18)

이처럼 신실한 기독교인들에게는 우주만물과 일상에서 일어나는 개개의 사건들 모두가 역사를 움직이는 신의 참여와 인도를 표상하는 증거인 동시에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의심할 수 없는 증거다. 그렇다면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는 결국 당신이 어떤 패러다임을 가졌느냐에 달렸다. 만일 당신이 기독교적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이라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날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일 것이다. 아니면 아니다! 바로 이 말을 라틴 신학의 아버지 테르툴리아누스(160~230)는 “믿으면 안다”라고 표현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믿는 것이 아는 것의 출발이다”라고 가르쳤으며, 또 안셀무스는 “믿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라고 교훈했다.

■ 누구에게나 길은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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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 신의 존재증명은 이성의 문제도 경험의 문제도 아니다! 신앙의 문제다! 신앙은 쿤의 패러다임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가 ‘신념’이자 ‘가치체계’이며 동시에 ‘문제해결 방법’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달리 말해,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 하는 선택에 따라 당신의 판단과 삶 그리고 당신이 사는 세계가 완연히 달라진다는 뜻이다.

신은 실제로 존재할까? 내 대답은 이미 들었으니 이제 당신이 대답할 차례다. 영국의 시인 존 옥센함(J. Oxenham)이 남긴 시를 소개하며 당신의 대답을 기다린다.

누구에게나 길은 열려 있다네. / 이 길, 저 길, 그리고 또 다른 길이.

숭고한 영혼은 높은 길 오르고. / 미천한 영혼은 낮은 길을 더듬네.

그리고 다른 영혼들은 / 이리저리 헤매고 있네. / 저 안개 낀 들판 사이를.

누구에게나 길은 열려 있다네. / 높은 길, 낮은 길이.

그대는 골라야 하리. / 그대 영혼이 나아가야 할 길을.

2. 신은 우주만물의 창조주라는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만들어진 신’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의 흥미로운 주장이다. 란돌프 마콘 여자대학 강연을 비롯한 수많은 인터뷰와 강연에서도 똑같이 역설한 바 있는 그의 주장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창조론에 의하면 우주를 창조한 신은 가장 진화된 존재인 창조적 지성이 다.

2. 진화는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 진행되므로 가장 진화된 존재는 우주에서 마지막에 출현할 수밖에 없다.

3. 그러므로 신은 우주를 설계하는 일을 맡을 수 없다.

예리하고 멋진 논증이다. 만일 신이 하나의 존재물이고 진화의 과정 안에 놓여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성서와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신은 ‘창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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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이긴 하지만 ‘진화된 존재’는 아니다.

성서 그 어디에도 신이 진화된 존재라는 기록이 없고 그렇게 해석할 만한 근거도 없다. 또 2000년을 이어온 기독교 신학에서 그 어떤 신학자도 신이 진화하는 존재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진화는 시간 안에 있는 존재물들에게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서와 기독교 신학은 한결 같이 신을 시공을 초월한 존재, 따라서 불변하고 영원한 존재로 파악해 왔다. 이 때문에 도킨스의 한껏 멋져 보이는 논증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결국 도킨스도 밀스가 ‘우주에는 신이 없다’에서 그런 것처럼 임의로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공격하는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를 범한 것이다.

신약시대 이후 가장 뛰어난 기독교인 이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이다. 그의 ‘고백록’은 기독교 문학의 백미이자 서구 고백문학의 전범으로 꼽히는 책인데 이 책에는 1600년이나 묵은 수수께끼가 하나 들어 있다. 그것은 저자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자서전 말미에 왜 뜬금없이 천지창조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묶어 놓았느냐다.

그 오래된 수수께끼의 답은 이렇다. 아우구스티누수는 -마치 씨줄과 날줄이 얽혀 짜인 옷감처럼 - 신의 섭리에 의해 계획되고 이끌려온 자신의 삶이 증명하듯이, 우주 역시 오직 신의 계획에 의해 창조되며 인도된다는 점을 전하려 했던 것이다. 이 같은 생각을 기독교 신학에서는 그리스어로 ‘오이코노미아’라 부르고 우리말로는 ‘구속경륜(救贖經綸)’이라 한다. ‘인간과 세계의 구원에 관한 신의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계획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가 지난 2000년간 견지해 온 우주관이다. 고 이병철 회장은 도대체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이제부터 ‘고백록’에 실린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조론 해석과 현대과학이 우주발생에 관한 표준이론으로 인정하는 ‘빅뱅이론’ 그리고 근대 우주론으로 각광받고 있는 ‘다중우주론’을 비교하면서 그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 우주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138억 년 전 최초의 빅뱅이 있었다.

말 그대로 태초에는 특이점만 있었을 뿐 공간도 시간도 아무 것도 없었다. 빅뱅 폭발과 동시에 시공이 생겨난 것이다. 우주는 그야말로 과학자들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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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무(nothing), 곧 ‘에너지로 충만한 진공’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1979년에 당시 스탠퍼드 대학에 있던 젊은 물리학자 엘런 구스(A. Guth)가 제시한 인플레이션 우주론대로 삽시에 상상할 수조차 없이 빠른 속도로 팽창이 일어났으며 지금도 우주는 여전히 무섭게 팽창하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설명하고 가자.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진공’이란 에너지가 0인 상태다. 그렇다면 과학자들이 무라고 설정한 ‘에너지로 충만한 진공’이란 어불성설이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로서는 이해할 길이 묘연한데, 이에 대해 ‘평행우주’의 저자인 미치오 카쿠가 ‘댐에 고인 물’이라는 좋은 예를 들어 간명하게 설명했다. 요약하면 이렇다.

흐르는 강을 댐으로 막아놓으면 물은 고요히 정지해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사실은 엄청난 에너지로 댐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 카쿠는 이런 상태를 ‘가짜 진공’이라는 용어로 표현했는데, 이것이 곧 과학자들이 말하는 ‘에너지로 충만한 공간’이다. 그러다가 댐이 그 압력을 못 이겨 자체적으로 붕괴되면 압력 분출로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쏟아져 나오면서 물이 주변으로 무섭게 번진다. 마치 빅뱅처럼 말이다. 그리고 점차 물의 압력이 낮아짐으로써 차츰 진공 상태로 돌아간다. 우주도 이렇게 시작되어 팽창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가? 멋진 설명 아닌가? 자, 준비는 끝났다. 우리가 본디 하려던 흥미로운 이야기를 이제 시작하자.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약성서의 첫마디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1)에서 먼저 ‘태초’라는 말에 주목했다. 그리고 이 말을 시간상 ‘아주 오래전’이 아니라 ‘시간의 시작’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고백록’에서 “세계가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시간과 더불어 만들어 졌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런데 약 1600년 전에 살아 허블우주망원경은 보지도 못했고, 기껏해야 신플라톤주의 우주론 밖에 몰랐던 아우구스티누스가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렇게 단언할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은 경험과 관찰이 아니라 사고와 논리였다. 그의 논리는 대강 이렇게 전개 되었다.

시간이란 변화하는 사물과 사건 사이의 관계다. 그러므로 사물이 아직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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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에는 시간도 존재할 수 없다. 이 말을 아우구스티누스는 “피조물이 존재하지 않는 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표현했다. 따라서 창조는 시간 속에서 행해질 수 없고 오히려 시간과 공간이 창조와 함께 그야말로 태초에 ‘무’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다. 어떤가? 놀랍지 않은가? 우주 발생에 대해 고대 신학자가 현대 천체물리학자들과 거의 같은 이론을 제시했다는 것이 실로 믿기 어렵다. 하지만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1)에 나오는 ‘천지’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하늘과 땅’ 즉 지구위에서 바라본 가시적인 하늘과 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유는 창조가 막 시작된 그때에는 다른 천체들과 마찬가지로 지구 역시 아직 생기지도 않았기 때문이라 했다. 역시 논리적이다. 그는 시공조차 아직 열리지 않은 태초에, 신이 창조한 그 천지를 각각 ‘지혜의 하늘’과 ‘형상 없는 땅’이라고 따로 이름 붙였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지혜의 하늘은 우주공간의 어느 한 곳이 아니다. 신이 천사들과 함께하는 완전한 영역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우주와는 전혀 다른 어떤 영역이라는 말이다.

그럼 ‘형상 없는 땅’이란 또 무엇일까?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구약성서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창세기 1:2)라고 표현된 이 형상 없는 땅은 우주의 모든 것을 형성해내는 카오스(chaos) 상태의 ‘원물질’을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질료(hyle)’라고 불렀던 그 원물질이 신으로부터 형상을 얻어 우리가 지각하는 사물과 세계를 형성한다. 하지만 원물질 자체는 아무런 형태도 성질도 없기에 가시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즉 ‘무’는 아니지만 ‘무에 가까운 것’이고 형상을 가진 물질과 무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신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이 불가시적이고 ‘형상 없는 땅’으로부터, 거의 무에 가까운 이 무형적인 것으로부터, 주님은 변화 가능한 만물을 지어내셨으니 이로 말미암아 변화하는 우주가 생기게 되었나이다.”

흥미로운 것은 현대 천체물리학자들 역시 같은 말을 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당신 스스로 판단할 차례다. 고대로부터 철학자들에게는 정신(nous)으로 불렸고 성서와 기독교 신학자들에게는 말씀(logos) 또는 진리로 나타났던 신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우주를 창조했다는 창조론이 옳을까?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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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면 우리가 사는 우주는 1 다음에 0이 500개나 더 붙은 숫자만큼 많은 우주 가운데 하나라는 다중우주론이 옳을까? 아니 바꿔 말하는 게 낫겠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허무맹랑할까? 이에 따라 이 회장의 질문에 대한 답도 정해질 것이다.

3. 생물학자들은 인간도

오랜 진화과정의 산물이라고 하는데

신의 인간창조와 어떻게 다른가?

인간이나 생물도 진화의 산물이 아닌가?

남서쪽에서 불어오는 심한 폭풍 때문에 출항 후 두 번이나 되돌아와야 했던 비글호는 드디어 1831년 12월 27일, 영국 해군 피츠로이 함장의 지휘하에 열 개의 포문을 갖추고 영국의 데먼포트를 출발했다. 1839년 출간된 찰스 다윈(C. Darwin 1809~1882)의 ‘비글호 항해기’의 첫 문장이다. 이 문장과 함께 진화론도 출발했다.

한때 목사가 되려했던 다윈은 속도를 높이려고 배 뒤편에 커다란 삼각돛을 세 개나 추가로 달아 개조한 탐사선 비글호를 타고 남미로 향했다. 그리고 향 후 5년 동안 남미 해안의 여러 섬을 돌며 동식물과 지질을 관찰했다. 예컨대 갈라파고스 군도와 티에라 델 프에고 섬에서 자주 본 새로운 변종(핀치, 거북, 부채선인장 등)을 세밀히 조사했다. 그리고 생물들이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해 왔다는 확신을 얻었다. 또한 이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한 증거자료도 다량 확보했다.

하지만 다윈은 성격이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는 기독교와의 마찰을 염려해 발표를 주저하며 거의 20년을 그냥 흘려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앨프레드 러셀 월리스(1823~1913)라는 과학자가 논문 한 편을 보내왔다. 다윈은 놀랍게도 그가 자기와 똑같은 주장을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1858년 런던의 ‘린네학회’에서 월리스와 공동으로 진화론에 관한 논문 ‘자연선택’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듬해 서둘러 ‘종의 기원’을 출간했다.

1859년 11월 24일 런던의 존 머레이 출판사에서 500여 쪽의 ‘종의 기원’이 출간되었는데, 초판 1250부가 성탄을 앞둔 대림절 시장에서 빵이 팔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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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팔려나갔다. 출판사는 1860년 새해 벽두에 추가로 3000부를 발행했다. 당시로서는 놀라운 성공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축제 전야에 쏘아 올린 축포에 불과했다. 바야흐로 세상을 향한 비글호의 새로운 항해가 시작되고 있었고, 진화론의 시대가 열렸다.

오늘날 다윈의 후계자들은 진화라는 패러다임을 통해 자연, 사회, 문화 그리고 인간 자체를 조명하고 있다. 진화생물학, 진화심리학, 진화경제학, 진화사회학, 진화철학, 다윈의학 등 학자들은 거의 모든 학문에 진화론을 도입했다. 이제 진화론은 자연과 세상을 보는 하나의 눈이 되었으며, 심지어 종교처럼 신봉되고 있다. DNA 나선 구조의 공동 발견자 제임스 왓슨(J. Watson)의 ‘과장된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찰스 다윈은 인류 사상사에서 예수 그리스도나 마호메트보다 훨씬 더 영향력 잇는 인물”이 되어가고 있다.

고 이병철 회장의 세 번째 질문이 우리에게 매우 흥미로운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이 회장은 “생물학자들은 인간도 오랜 진화과정의 산물이라고 하는데, 신의 인간창조와 어떻게 다른가?”라고, 겉으로는 진화론과 창조론의 차이를 물었다. 하지만 그런 다음 곧바로 “인간이나 생물도 진화의 산물이 아닌가?” 라는 질문을 덧붙임으로써 단순히 진화론과 창조론의 차이를 알고 싶어서 물은 게 아니라는 속내를 드러낸다. 이 회장은 내심 진화론이 옳다는 전제 아래서 창조론은 거짓이 아닌지 따져 물은 것이다.

■ 태초의 ‘여섯 날’이 곧 ‘6일’인가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립에서 자주 논란이 되는 화제는 크게 보아 두 가지라 할 수 있다. 하나는 ‘시간의 문제’고 다른 하나는 ‘목적의 문제’다.

창조론에서는 모든 생물은 신이 태초의 ‘여섯 날’ 가운데 어느 특별한 ‘하루에’ 각각 ‘일회적으로’ 창조했다고 한다. 이와 달리 진화론에서는 생물은 자연이 ‘오랜 세월’ 동안 ‘꾸준하게’ 진화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어느 것이 옳을까?

구약성서 ‘창세기’ 1장을 보면 천체들은 첫째 날부터 만들어졌다. 생물이 창조된 것은 셋째 날부터인데 그것도 지구에서 창조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지구는 넷째 날에야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창조된 것은 여섯째 날로 되어 있다. 그런데 천체물리학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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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138억 년 전에 생겨났고, 약 46억 년 전 탄생한 지구에 최초의 생명물질인 DNA, RNA, 단백질 등이 생겨난 것은 진화론에 따르면 약 38억 년 전이다. 진핵생물이 생긴 것은 15억 년 전쯤이고, 인류는 대강 500만 년 전에 유인원으로부터 진화했다.

이제 ‘목적의 문제’를 살펴보자. 창조론은 우주와 그 안에 존재하는 생물이 모두 미리 정해진 신의 섭리에 의해 구원이라는 ‘특별한 목적’을 갖고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진화론은 진화는 자연선택이라는 자체 메커니즘에 의해 ‘자발적’이고 ‘맹목적’으로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성서에 기록된 내용은 시간의 문제에서든 목적의 문제에서든 자연과학이 말하는 내용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당연히 논쟁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약 1600년 전에 살았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나 이미 이 같은 사실을 정확히 간파했다. 그는 ‘고백록’에서 “우리가 아는 날들은 일몰이 없으면 저녁이 없고 일출이 없으면 아침이 없다. 그런데 최초의 사흘은 태양 없이 흘러갔고 태양은 넷째 날에 만들어졌다”라고 지적했다. 이어서 창세기의 하루를 ‘어떤 다른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창세기에 언급된 창조 시기의 날짜는 단지 ‘창조의 순서’를 나타내는 어떤 신비로운 날의 수로서 자연적 의미의 말짜와는 전혀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 정통 기독교 신학은, 창조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어떤 ‘신적 시간’에 그것도 여섯 단계에 걸쳐 순차적으로 진행되었으리라고 주장해 왔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런 해석은 창세기 1장에서 ‘날’을 뜻하는 히브리어 ‘욤’이 ‘하루’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지만 ‘때’ 또는 ‘시기’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는 점과도 맞아 떨어진다.

물론 창조가 정확히 6000년 또는 1만 년 전에, 단 엿새 만에 이루어 졌다고 ‘문자 그대로’ 주장하는 일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보수적 성직자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모든 기독교 신학이 그렇게 편협하고 경직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근본주의자들이 견지하는 성서 문자주의가 정통 기독교 신학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이다. “오직 성서로”를 외치며 성서 해석에 유난히 엄격했던 칼빈마저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한 문자주의를 경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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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은 신의 계시는 계시가 주어질 당시의 문화와 형편에 맞는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점을 참작해 성서를 적절히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마치 훌륭한 연설가가 청중을 미리 알고 자신의 연설을 청중의 눈높이에 맞추듯 신이 계시를 할 때도 계시를 받는 사람들의 이해 수준에 맞추었기 때문이라며 비유를 들어 설명하기도 했다.

성서에서 신이 자신을 팔과 입을 가진 존재물로 묘사한 게 바로 그런 예라고도 했다. 그래서 칼빈은 성서에 나타난 계시는 오늘날 우리의 문화와 사고방식에 맞게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고 교훈했다. 다분히 납득 가는 말이 아닌가?

■ 창조는 끝나지 않았다

기독교 교리의 역사를 조심스레 들여다보면 삼위일체론 논쟁과 그리스도론 논쟁이 여실히 보여주었듯 정통 기독교 신학은 항상 양극단 사이로 난 황금의 중간길을 찾아갔으며, 유연하고 풍성했다. 일반인들의 생각이나 근본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창조가 태초에 ‘일회적으로’ 이뤄진 것이라는 생각도 정통 기독교 신학의 주장이 아니다.

구약시대부터 창조는 일회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시간 속에서 계속되는 ‘신의 역사’의 시작이자 일부로 이해되어 왔다(시편 33, 136. 느헤미야 9. 이사야 40, 45. 욥기 9 등).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느헤미야 9:6)에 나타나듯 신은 피조물을 창조할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보존하고 끊임없이 인도한다는 것이 선지자들의 고백이었다.

신약성서 또한 그러했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를 비롯한 고대와 중세의 위대한 가톨릭신학자들도 성서의 이 가르침을 되풀이 강조했다. “보존은 창조와 구분되는 행동이 아니라 계속되는 창조다” 라는 중세적 표현이 그것을 대변한다.

일반인들의 상식이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정통 기독교 신학의 입장에서 보면 창조와 진화는 도저히 화해하지 못할 만큼 철저히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1997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진화론을 인정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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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11월 24일 ‘종의 기원’이 출간된 후 약 140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는 가톨릭교회가 지동설을 받아들인 것에 비하면 200년 이상 짧은 기간이었다. 지동설은 플라우엔부르크 성당의 참사위원이던 코페르니쿠스(N. Copernicus 1473~1543)가 1543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주장한 이래로 정확히 350년 만인 1893년에야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독교 신학은 지동설보다는 진화론을 받아들이기가 더 쉬웠다는 뜻이다.

이제 곧 보게 되겠지만 ‘약간의 장애물’만 제거하면 창조론은 진화론을 수용할 수 있다. 물론 당신은 이 무슨 엉뚱한 소린가 하고 되물을 수도 있다. 설령 당신이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예를 들어 도킨스의 저서들, 특히 ‘눈먼 시계공’을 읽었다면 말이다.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두 번째 문제, 즉 ‘목적의 문제’로 넘어간다.

■ ‘페일리의 시계’대 ‘눈먼 시계공’

리처드 도킨스가 자주 공격의 표적으로 삼아 덩달아 유명해진 것이 ‘페일리의 시계 유추 논증’이다. 18세기 영국 성공회 부주교였던 윌리엄 페일리(W. Faley 1743~1805)가 ‘자연신학’에서 펼쳐 보인, 대강 이러한 주장을 일컫는 말이다.

만일 누군가가 들길을 산책하다 땅에 떨어진 시계를 보았다 하자. 그러면 그는 그 시계가 자연에 의해 우연히 생겼다고 생각할 수 없고 누군가 지적심성을 가진 존재가 설계해서 만든 것이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너무나 복잡하고 정교하게 그리고 목적에 합당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계는 시계보다 훨씬 더 복잡성, 정밀성, 합목적성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어떤 위대한 설계자가 목적을 갖고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 설계자를 우리가 신이라 한다.

그런데 바로 이때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했다. 다윈은 비글호로 항해하며 수집한 많은 자료를 근거로 당시 영국 지식인들이 특별히 좋아하던 귀납법을 사용해 자연이 어떻게 그토록 적당하고 정밀하게 만들어졌는지 설명해 주었다. 요컨대 새의 날개, 물고기의 지느러미, 인간의 눈과 심장 등이 그렇게 복잡하고 정밀하며 목적에 합당하게 만들어진 것은, 생존경쟁을 하는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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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에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춘 종만 살아남는 방향으로 진화가 ‘충분히 오랫동안’ 진행되었기 때문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도킨스는 ‘눈먼 시계공’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윈이 발견했고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이며 자동적인 과정의 자연선택은 확실히 어떤 용도를 위해 만들어진 모든 생물의 형태와 그들의 존재에 대한 설명이며, 거기에는 미리 계획한 의도 따위는 들어 있지 않다. 자연선택은 마음도 마음의 눈도 갖고 있지 않으며 미래를 내다보면서 계획하지 않는다. 만약 자연의 선택이 자연의 시계공 노릇을 한다면 그것은 ‘눈먼 시계공’이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페일리의 논증보다 훨씬 수긍이 가는 이야기 아닌가? 그렇다 우리는 기꺼이 ‘페일리의 시계’ 대 ‘눈먼 시계공’의 싸움에서 ‘눈먼 시계공’의 손을 들어줄 수 있다. 지적 설계론에 대한 진화론의 승리를 인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도킨스가 이 승리를 마치 창조론에 대한 진화론의 승리인양 선전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지적 설계론이 곧 창조론은 아니기 때문이다.

■ 도킨스가 알아야 할 것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다음과 같이 감격적인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원래 극소수의, 또는 하나의 형상에 몇 가지 능력과 함께 숨결이 불어넣어졌고, 그 뒤 행성이 정해진 중력의 법칙에 따라 자전과 공전을 거듭하는 동안에 그토록 단순했던 것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경이로운 무수한 형상들이 진화해왔고 지금도 그들은 진화하고 있다는 이런 생명관에는 장엄함이 담겨 있다.”

이 말에는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장구한 세월에 걸친 진화의 산물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럼에도 이 말 안에는 인간도 역시 이 장엄한 진화 메커니즘의 산물이라는 들어 있지 않다. 1859년 ‘종의 기원’을 발표할 무렵만 하도 다윈은 인간의 생물학적 위치에 대해 침묵했다.

그러나 12년 후인 1871년에 출간된 ‘인간의 유래’에서는 그간의 오랜 침묵을 깨고 인간마저 진화의 행렬 속으로 과감하게 밀어 넣었다. 그럼으로써 인간을 신의 창조물에서 원숭이의 후손으로 만들었다. 그러자 상황이 ‘종의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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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이 출간되었을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든 설령 ‘종의 기원’에는 동의할 수 있을지라도 ‘인간의 유래’를 받아들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얼핏 보기에는 당연한 일 같지만, 그 이유는 당신의 생각과 조금(?) 다를지 모른다. 무슨 말인지 찬찬히 살펴보자.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다음 구절들을 보면 ‘인간의 유래’가 출간 되었을 당시 기독교인들이 받았을 충격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만은 신께서 / 직접 불어 넣어주셔서, 그대들이 /

언제나 당신을 사랑하게 하셨답니다.

그러므로 만약 최초의 부모의 육신이 /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떠올려보면 /

내가 말한 것으로 미루어 당신은 / 인간의 부활을 확신할 수 있을 거예요.

이 시구들은 우선 인간은 다른 생물들과 달리 신이 직접 영혼을 불어 넣어 창조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구원의 징표임을 함께 알려준다. 요컨대 신이 창조했다는 것은 곧 신이 구원한다는 의미다. 그렇다! ‘인간의 유래’가 출간 되었을 때 기독교인들이 충격을 받은 것은 이 때문이다.

창조가 구원의 시작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교리다. 따라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어떤 기독교인이 신이 자기를 창조했다고 말할 때 그건 결코 인간의 창조에 관한 어떤 새로운 원리를 설명하려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오직 신이 자기를 보살피고 인도하며 결국에는 구원한다는 종교적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고 이병철 회장의 세 번째 질문 가운데 “생물학자들은 인간도 오랜 진화과정의 산물이라고 하는데, 신의 인간창조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기독교의 답을 찾을 수 있다. 신의 피조물로서 인간에게는 그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로마서 8:28)이루게 하신 신의 보살핌과 인도 그리고 궁극적 구원이 약속되어 있지만, 진화의 산물자로서의 인간에게는 그런 게 없다는 것이 다르다.

그런데 다윈은 ‘인간의 유래’에서 인간도 다른 생물처럼 하찮은 동물로부터 우연히 진화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 말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신의 보살핌과 인도 그리고 구원이 없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기독교를 믿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당연히 무신론이 공공연히 활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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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기 시작했다. 독일 철학자 니체(F. Nietzsche 1844~1900)가 ‘즐거운 학문’에서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버렸다! 우리가 신을 죽인 것이다.”라고 외친 것이 바로 이때다.

니체의 선언은 예나 지금이나 매우 충격적이고 도발적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는 그래도 점잖게 표현한 것이다. 오늘날 진화론을 주장하는 다윈의 후계자들에 의하면 신은 죽은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리처드 도킨스는 모든 생물의 창조자는 진화라는 메커니즘이고, 그렇다면 창조론은 ‘날조된’ 거짓이며 신은 ‘만들어 진’ 존재라는 것을 지난 수년 동안 지칠 줄 모르고 외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과연 그럴까? 다시 말해 진화론이 옳다고 해서, 그 사실이 곧바로 무신론으로 이어지고, 또 창조론을 부인하는 근거가 될 수 있을까? 당신 생각은 어떤가? 답하기 전에 신중을 기한다는 뜻에서, 먼저 진화론의 시조이자 도킨스, 히친스, 데닛, 밀스 같은 무신론자의 우상이기도 한 다윈 자신의 대답부터 들어보자. 당신은 그 후에 답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 열렬한 유신론자인 동시에 진화론자인 사람

결론부터 말하자! 정작 다윈은 진화론이 무신론과 연결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무신론자였던 적이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다윈은 청년시절엔 기독교인이었다. 중년에 기독교를 떠났지만 그건 진화론 때문이 아니었다. 1851년 부활절에 사랑하는 딸 애니가 불과 10세의 나이로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매우 신중한 성격이어서 진화론을 내세워 무신론을 선포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말년에는 ‘불가지론자’였다.

‘알 수 없다’는 의미의 ‘불가지론’은 토마스 헉슬리(1825~1895)가 만든 말로 신의 존재 유무는 이성을 통해 증명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자서전’을 쓰고 있던 1879년, 다윈은 자신의 종교적 혼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판단이) 극도로 흔들릴 때도 나는 결코 무신론자인 적은 없습니다. 나는 항상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그리고 늙어감에 따라 점점 더) 불가지론자가 나의 마음상태를 가장 올바로 표현해 주는 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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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다윈이 오늘날 도킨스 같은 과학자들과는 달리 진화론을 근거로 무신론을 선포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데스먼드와 무어가 쓴 ‘다윈 평전’에 의하면 자서전을 쓰는 동안 다윈은 어떤 사람으로부터 “유신론과 진화론은 양립할 수 있는가?”를 묻는 편지를 받았다. 이에 대해 그는 인간은 “열렬한 유신론자인 동시에 진화론자”가 될 수 있다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이것은 그가 지지했던 불가지론 이 어떤 성격이었는가를 짐작하게 하는 좋은 단서다. 창조와 진화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다윈의 이러한 입장을 철학자들은 양립주의‘라고 부른다.

정리하자. 기독교 신학을 꼼꼼히 살펴보면 오리게네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칼빈 같은 위대한 신학자들이 모두 입을 모아 한결같은 주장을 펼쳤다.

창조가 일시적 사건이 아니고, 전체적 혹은 부분적으로는 신이 직접 개입하지도 않았으며,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운행하는 어떤 원리 - 그것을 ‘제2원인’ 내지 ‘우연적 원리’라 하든 ‘자연법’이라 부르든, 아니면 ‘일반섭리’ 라고 이름 짓든 - 에 위임해서 순차적으로 일어나게 했다. 그래서 자연은 신의 직접적 통치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자연법칙이라 부르는 법칙들에 의해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운행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그가 원하는 때마다 자연과 인간에 개입 해 바다를 가르고 해를 멈추고 죽은 자가 살아나게 하는 것 같은 특별섭리를 행하며 이를 통해 태초부터 예정한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간다는 것이 기독교 교리다.

신은 자기가 예정한 목적을 위해 기적을 행할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자연이 신의 예정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신은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럴 경우 자연은 신의 예정목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자연이 자발적이고 우연적으로 진화한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렇다면 드디어 우리는 아무 거리낌 없이 신이 진화를 통해 창조를 한다고, 그리고 창조론은 진화론을 수용할 수 있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또한 다윈이 인간은 “열렬한 유신론자인 동시에 진화론자”가 될 수 있다고 한 말, 굴드가 “다윈주의 과학이 전통적 신앙과도 얼마든지 양립한다”고 주장, 그리고 호트가 “진화가 다윈주의 이전의 세계관이 제공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고 말한 의도를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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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이회장의 질문 가운데 하나인 “인간이나 생물도 진화의 산물이 아닌가?”에 대해서도 답할 수 있다. 그렇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진화의 산물이다. 그리고 동시에 신의 창조물이다!

4. 언젠가 생명의 합성,

무병장수의 시대도 가능할 것 같다.

이처럼 과학이 끝없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

2010년 5월 21일, 전 세계의 시선이 한 과학자의 깜짝 선언에 모였다. 생명을 합성해내겠노라 큰소리쳐왔던 크레이그 벤터(J. C. Venter) 박사가 이끄는 연구팀이 마침내 생명창조에 성공했음을 세상에 공표했기 때문이다.

발표 직후 미국의 ‘사이언스’와 영국의 ‘네이처’같은 과학전문지는 물론 세계 주요 언론이 경악했다. 합성생명의 등장이 과학계와 인류에 가져올 변화를 진단하느라 분주했다. 물론 벤터 연구팀이 합성한 생명체는 장미나 토끼처럼 구체적 형상을 가진 동식물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현미경으로만 관찰되는 ‘미코플라스마 라보라토리엄’, 즉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박테리아 세포였을 뿐이다. 그것도 세포 전체가 아니라 세포 가운데 단지 유전체, 곧 게놈만을 합성했을 뿐이다.

벤터 연구팀은 먼저 자연 상태의 박테리아 게놈을 모방한 ‘합성 게놈’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도록 제어하면서 박테리아 세포에 집어넣어 그것이 ‘자연게놈’처럼 작동하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게 전부다. 그래서 ‘생명창조’라고 부르기에는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생명의 기본 단위가 세포이고 그 핵심이 게놈이라 할 때 벤터 연구팀의 성공은 그 자체로 놀라운 것이며 ‘합성생명’을 향한 의미 있는 발걸음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전자 조작 기술을 통한 지구환경 개선과 인류 무병장수는 생명공학이 간직해온 오랜 꿈이다. 벤터 연구팀의 게놈합성이 그 꿈을 한발짝 앞당겼다고도 볼 수 있다. 벤터는 자신의 업적에 대해 “새로운 산업혁명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잠재력이 큰 연구” 라고 자평했다. 그 성과를 응용하면 이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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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를 잡아먹는 박테리아, 에너지원을 생산하는 박테리아, 약용물질을 만들어 내는 박테리아 등 다양한 종류의 인공 박테리아를 생산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같은 합성생물학의 힘을 빌려 언젠가는 고 이병철 회장이 이미 20여 년 전에 탁월하게 예견해낸 생명합성과 무병장수의시대가 정말 올지도 모른다.

이병철 회장은 이처럼 과학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당신 생각은 어떤가? 합성생명까지 만들기 시작한 마당에 머잖아 그런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가?

이번에도 결론부터 밝히고 가자.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과학의 속성과 신의 본질 사이에 놓인 극복할 수 없는 질적 차이 때문이다. 이제 곧 알게 되겠지만 그것은 한 마디로 ‘유한’과 ‘무한’의 차이이다. 이제부터 함께 살펴보자.

■ 신의 모든 속성은 무한이다

준비 삼아 철학에서 말하는 존재론 이야기를 조금 하고 가자! 파르메니데스로부터 시작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 철학자들과 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중세 신학자들을 거쳐 하이데거, 들뢰즈, 바디우 같은 현대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2500년 이상 내려오는 존재론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게 전개 되어왔다. 그만큼 다양하고 난해하지만 꼭 필요한 것만 골라 아주 쉽고 간단하게 정리해서 이야기해보려 한다.

세상의 모든 존재물은 그 어떤 ‘무엇으로’ 있다. 예컨대 바나나는 ‘바나나로’ 있고 책상은 ‘책상으로’있으며 사람은 ‘사람으로’ 있다.

이때 바나나를 바나나이게 하고 책상을 책상이게 하며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그 어떤 무엇을 철학에서는 그것의 ‘본질(本質)’ 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의 있음을 ‘존재(存在)’라 일컫는다.

그런데 성서와 기독교 신학은 신을 만물의 궁극적 근원으로 규정한다. 사도 바울이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로마서 11:36)라고 교훈한 것도 그래서라고 했다. 그렇다면 신 자신은 그 어떤 것으로도 한정할 수 없는 ‘무한정자’, 그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무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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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만물이 그로부터 나오고 그 안에 존재하다 그에게로 돌아가는 궁극적 근원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만물의 궁극적 근원은 아무런 분리와 구분이 없는 무한한 전체, 일찍이 파르메니데스가 “온전한 하나”라고 불렀던 일자(一者)여야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이 내용을 “엄밀한 의미에서 전체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가 빠져 있다면 빠진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전부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표현했다. 옳은 말 아닌가! 그 때문에 신은 무규정자, 무한정자여야 한다.

■ 누가 신에게 이름을 붙일 수 있겠소

만물의 궁극적 근원으로서 신은 그 어떤 것으로 한정되거나 규정받지 않는 무한정자이자 무규정자, 곧 무한자 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 그 어떤 것으로 그를 한정하고 규정해서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그는 신이 아니다.

아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성서에서 신은 ‘여호와(Jehovah)’가 자신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출애굽기 3:15)라고 밝히지 않았는가? 당신은 나에게 이렇게 따져 물을 수 있다. 그렇다! 신은 분명 그렇게 자기를 계시했다. 그럼에도 그것은 신의 이름이 아니다. 구약성서 학자들은 ‘여호와’를 ‘그는 있다(He is)’ 또는 ‘그는 현존한다(He is present)’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여호와’는 우리가 사용하는 그런 의미의 이름은 아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과 15절에서 신은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존재’를 계시한 것이다.

정리하자 우리의 정신은 한정할 수 있는 것, 규정할 수 있는 것, 다시 말해 ‘본질’에 의해 한정된 것, 곧 유한한 것만 파악할 수 있고 이름도 붙일 수 있다. 우주가 아무리 장구하고 광대하다 해도 그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본질에 의해 규정되고 한정되기 때문에, 우리가 파악할 수 있고 이름 붙일 수 있다. 신은 - 이론적으로든 실험적으로든 - 자연과학의 대상이 아니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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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은 신을 알지 못한다

‘무신예찬’에 실린 ‘신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에서 미국의 저명한 과학사가 마이클 셔머(M. Shermer)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과학이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신은 자연존재일 것이고, 시공간에 존재하며, 자연법칙에 규제되는 실체다. 초자연적인 신은 자연세계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에 과학으로는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과학은 신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 자연과학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을 알지 못한다. 셔머는 무신론을 주장하기 위해 이 말을 했지만, 기독교인들이야말로 셔머와 도킨스처럼 과학을 근거로 무신론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에게 이 말을 가장 하고 싶다.

■ 무한에서 보면 모든 유한은 동등하다

이 회장이 예로 들었던 ‘생명합성’의 문제로 되돌아가보자. 생명합성을 통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존재를 부인하려면 생명과학 기술도 무에서 유를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로마서 4:17) 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기독교에서는 신이‘무로부터’ 창조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과학이 무에서 유를 창출해내는 때가 온다면 우리는 그 일을 해 낸 과학법칙을 신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크레이그 벤터 연구팀이 만든 ‘합성생명’은 무에서 유를 창출한 것이 아니다. 박테리아의 게놈을 모사해 만든 ‘합성게놈’을 박테리아의 세포에 집어넣어 작동하게 했을 뿐이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존재를 부인하기는 어렵다.

17세기의 탁월한 수학자이자 과학자이기도 했던 블레즈 파스칼(B. Pascal 1623~1662)은 ‘팡세’에서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신과 인간의 차이를 무한과 유한에 비유해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누군가가 사물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그가 그런 지식을 가졌다면 좀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한에서는 여전히 멀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의 수명이 10년 연장된다 해도 영원 안에서는 똑같이 미미한 게 아닌가. 무한에서 보면 모든 유한은 동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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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과학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 회장의 물음에 대한 답으로 받아들여도 좋다. 자연과학은 아무리 발달한다 해도 무한한 것, 규정할 수 없는 것을 다룰 수는 없기 때문에 무한의 영역에는 발을 들여 놓지 못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 회장이 기대했던 그런 일은 일어나자 않는다.

5. 신은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1755년 11월 1일 오전 9시 40분,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에 강도 9로 추정되는 지진이 일어났다. 최고 파고 15미터에 달하는 해일을 동반한 이 지진은 주택가를 흔들어 폐허로 변하게 했고 항만을 덮쳐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때마침 그날이 교회가 사람들로 붐비는 만성절(Hallowmas 모든 성인의 영혼에 제사를 지내는 날)이었기에 교회를 습격한 죽음의 사신은 예상보다 더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 갔다. 최소 3만에서 최대 10만 명가량이 목숨을 잃었다. 도시와 항만의 85%가 황폐해졌다. 고통과 불행, 공포와 비참이 삽시에 아름답고 평온하던 도시를 점령했다.

지진은 하필이면 만성절에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프랑스 성직자들은 이 재난이 리스본 주민의 죄 때문이라는 막말을 했다. 이때 볼테르(Voltaire)라는 필명으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프랑수아 마리 이루에(F. M. Arouet 1694~1778)가 타오르는 불처럼 분개했다. 그리고 그 격노를 한 편의 시에 담았다. 그 안에는 “신은 재난을 방지할 수 있는데도 방지하려 하지 않는가, 아니면 방지하고 싶지만 방지할 능력이 없는가?”라고 신을 비난하는 구절이 들어 있다.

알고 보면 이 시구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기원전 341~기원전 270)가 처음 제시한 이래, 지난 2300년 동안 내려오는 딜레마의 한 변형이다. 딜레마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불리한 결론에 다다르게 함으로써 상대를 곤란에 몰아넣는 일종의 역설이다. 고대 사람들에게 쾌락주의를 가르쳤던 이 철학자가 신의 부재를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딜레마는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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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악을 없애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신은 전능한 것이 아니다.

그는 할 수 있지만 하지 않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악의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는 능력도 있고 없애려고도 하는가?

그렇다면 악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그는 능력도 없고 없애려고 하지도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를 신이라 부르나?

그렇다면 고 이병철 회장의 이번 질문 역시 이 딜레마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절대적으로 선하고 강한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면 왜 고통과 불행, 죽음과 같은 악한 일이 일어나는지 묻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실인즉 바로 이것이 무신론자들에게 가장 자주 그리고 맹렬하게 공격받는 ‘기독교 신의 아킬레스건’이다.

신이 정말로 선하고 전능하다면 어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을까? 도대체 기독교인들은 이 같은 악을 허락하는 신을 위해 어떤 변명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이 리스본 지진 소식을 전해 들은 프랑스 성직자들이나 일본 후쿠시마 해일 소식에 기독교를 믿지 않아서라고 비난한 한국의 일부 성직자들처럼 파렴치하지 않다면 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 불가능한 대답의 가능성을 찾아보자.

■ 일원론도 이원론도 아니라는 이야기

일원론은 우주가 궁극적으로 예정조화된 통일체라는 전제를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이란 단지 ‘일시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고, 궁극적 관점 또는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악은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오히려 선으로 나타난다는 주장이다.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가 바로 이 같은 입장을 견지한 대표적 철학자들이다. 만일 이 회장이 스피노자에게 “신은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을 주었는가?” 하고 물었다면 스피노자는 당신의 물음은 단지 당신의 유한성이 가져온 환상에서 나왔으며, 당신의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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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과 불행과 죽음은 무한한 완전성인 우주에 의해 필연적으로 그리 될 수밖에 없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적어도 2000년 동안 서양정신의 중추를 이루어 온 이 유서 깊은 사유를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는 ‘예정조화’라는 용어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스피노자는 악의 존재 자체를 부인했다. 신을 살리고 악을 죽인 것이다. 그래서 유신론자들은 일원론을 선호한다.

이와 달리 이원론은 선과 악은 밤과 낮은 더위와 추위처럼 실제로 대립하면서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창시자의 이름을 따라 조로아스터교라고 불리는 종교의 교설이 이원론의 전형적 예다. 이 종교의 경전인 ‘아베스타’에 의하면 세상은 빛과 선의 신인 ‘아우라 마즈다’와 이에 대항하는 어둠과 악의 신 ‘앙그로 마이뉴’의 대결장이다. 이 싸움은 어느 한쪽이 승리할 때까지 계속되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악은 악한 신에 의해 존재하는 실제다. 그리고 선한 신이 지닌 한계다. 초기 기독교가 사활을 걸고 싸웠던 마니교가 이 같은 이원론을 받아들였다. 이원론을 지지하는 철학자로는 영국의 존 스튜어트, 밀(J. S. Mill 1806~1873)이 대표적이다.

당신이 보기에는 어느 쪽 주장이 더 그럴듯한가? 아마도 각자의 성향에 따라 스피노자가 지지하는 일원론과 밀이 견지하는 이원론 중 어느 하나에 마음이 쏠릴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둘 다 기독교 신학의 전통적 주장에서 벗어난다. 정통 기독교 신학은 신이 선하고 악은 없다는 일원론과 악이 존재하고 신은 무능하다는 이원론 모두를 부인한다. 그리고 그 둘 사이로 난 비좁은 ‘중간길’을 찾는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분명 쉽지 않은 일이지만 도전이 있는 곳에 응전도 있는 법이라 예부터 수많은 신학자가 이 일에 매진했다. 그 가운데 우리의 이야기와 연관해 가장 중요한 세 가지를 살펴보자.

■ 신의 결핍인가, 미성숙의 결과인가

이 회장의 다음 질문이 “신은 왜 악인을 만들었는가?” 인데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정론이 그에 답하는데 매우 적합하다.

차제에 밝혀두자면 우리는 통례를 따라 악을 ‘도덕적 악’과 비도덕적 악‘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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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구분해서 이야기하려 한다. 비도덕적 악이란 질병, 지진, 폭풍, 홍수, 해일, 가뭄 등 인간과는 별개로 자연에 의해 발생하는 악이다. 그래서 보통 ’자연악‘이라고도 부른다. 반면 도덕적 악은 탐욕, 잔인함, 불의, 악의 등과 같이 인간에 의해 일어나는 악이다. 그래서 ’인간악‘이라고도 한다.

아우구스티누의의 신정론에는 떠받치는 기둥이 둘 있다. 하나는 악은 실재가 아니고 선의 결핍으로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마치 빛의 결핍이 어둠인 곳과 같은 논리다. 이 말은 악이 선처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스피노자가 말하는 ‘환상’도 아니라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선의 결핍은 인간이 선자체인 신에게서 돌아서 그를 떠난 죄의 결과로 나타난다는 내용이다. 이는 곧 악의 원인과 책임은 신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만일 이 회장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도 “신은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라고 물었다면 그는 고통과 불행과 죽음은 모두 인간이 신에게서 등을 돌리고 떠난 탓이지 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 창조의 그늘진 쪽

20세기 신정통주의의 문을 연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칼 바르트(K. Barth 1886~1968)가 만들어 사용한 용어 ‘그늘진 쪽’은 기독교 신학에서 전통적으로 악(惡)으로 불린 것에 해당한다. 그런데 바르트에 의하면 ‘그늘진 쪽’은 창조의 밝은 쪽인 선(善)처럼 실제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에 존재하기 때문에, 바르트의 말을 빌리자면 “안전하지만 위험”하다. 그럼에도 그것은 자연의 본질에 속하고, 또 신에게 속한다. 마치 밤이 낮과 마찬가지로 자연과 신에 속하듯 말이다.

요컨대 창조는 밝은 쪽만이 아니라 그늘진 쪽, 선뿐만 아니라 악도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만일 이 회장이 바르트에게도 “신은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라고 물었다면 그는 신의 창조에는 어두움과 밝음, 성공과 좌절, 웃음과 눈물, 젊음과 나이 듦, 얻음과 잃음, 태어남과 곧 또는 나중에 올 죽음이 함께 있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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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이 있다면 악은 어디에서 오는가

신은 자연에게 그 스스로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운행하는 자연법칙을 주었고 인간에게도 그 스스로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결정 해 행동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었는데, 모든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불러오는 자연악과 인간악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질병, 지진, 폭풍, 홍수, 해일, 가뭄 등 ‘자연악’은 자연에 주어진 자연법칙에서, 그리고 탐욕, 잔인함, 불의, 악의 등 인간악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에서 나온다.

이 말은 신은 질병, 지진, 폭풍, 홍수, 해일, 가뭄 같은 일체의 ‘자연악’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으며, 그것들은 오직 자연에 부과된 자연법칙들의 부조화 때문에 일어난다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신은 탐욕, 잔인함, 불의, 악의 등 일체의 ‘인간악’과도 무관하며 ‘우발적이고 자발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로부터 그 모든 도덕적 악이 나온다는 의미다. 요컨대 모든 악은 신과 무관하며 그 원인과 책임은 자연과 인간에게 있다.

이것이 섭리의 이중구조를 통해 구축되는 신정론 이다.

이로써 중세에 유행했던 라틴어 경구 “신이 있다면 악은 아디에서 오는가? 신이 없다면 선은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답이 자명하게 주어진다. 선은 신으로부터 오고 악은 자연과 인간으로부터 온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은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라는 이 회장의 질문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회장은 또다시 이렇게 묻고 싶을 것이기 때문이다.

“좋다! 섭리의 교리대로 악은 신이 직접 만든 것이 아니고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운행되는 자연법칙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낳은 소산이라 하자. 그렇더라도 왜 신은 악이 생겨날 가능성이 있는 자연법칙과 자유의지를 자연과 인간에게 준 것인가? 바꿔 말해 신은 악의 가능성을 처음부터 아예 배제한 자연법칙과 인간의지를 창조할 수는 없었는가?”

■ 어떤가? 바람직하게 생각되는가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이자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 10 ~ 1965. 12)의 고문으로 활약했던 칼 러너(K. Rahner 1904~1984)가 주장했듯 신이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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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자연을 자신의 자동기계로 창조하지 않고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운행되는 원리에 맡겨 미결정적으로 창조한 것은 오직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교리다. 즉 자연과 인간에게 일정한 자유와 우연성을 허락하는 것이 강제하는 것보다는 신의 사랑에 합당하다는 말이다.

존 힉은 지금의 사실적 세계와는 반대로 악(고통, 불행, 죽음 등)의 가능성이 모두 제거된 낙원을 가정하고 과연 그것이 바람직한지 생각해 보라 한다.

힉에 의하면 자연법칙이라는 일반 섭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이 특별섭리에 의해 좌우되는 이런 세계에서 우리의 삶은 “유쾌하지만 목표 없이 쉽게 흘러가버릴 수 있는 하나의 꿈처럼” 된다.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윤리 개념이 분명히 무의미하게” 된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해치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옳지 못한 행동이란 아예 없을 것이며 당연히 옳은 행동 역시 없다. 마찬가지로 어떤 위험이나 어려움이 존재하지 않는 그곳에서는 그것을 이겨내는 용기와 꿋꿋함도 의미가 없다. 또한 관대함, 친절함, 사랑, 신중함, 이타성과 같은 윤리 개념은 생겨나지도 않는다.

결과적으로 이런 세계는 인간의 삶을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게 하며, 그들을 창조하고 사랑하여 선으로 인도하고 구원하려는 신의 의도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힉은 실제적 위험, 어려움, 고통, 실패, 슬픔, 불행, 좌절, 죽음의 가능성 등을 가진 세계가 오히려 인간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신이 도덕적, 종교적으로 고양된 ‘인간을 만드는’ 데 오히려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바로 이것이 신이 자연에는 자연법칙을,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를 부여한 이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악이 허용되는 까닭이다.

2013. 9. 29

* 다음에 여섯 번째 질문부터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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