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질문 (3)
- 백만 장자의 -
마지막 질문 (3)
■ 고 이병철 회장이 묻고 철학자 김용규가 답하는
신과 인간에 대한 근본적 통찰
13. 신앙이 없어도 부귀를 누리고,
악인 중에도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많은데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해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날짜가 가까워지면 전국의 사찰과 교회에는 자녀들의 수능시험을 위한 기도가 이어진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 앞날이 걸린 문제인데 어찌 자비하신 부처님께, 전능하신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인지상정이다. 또 돈 많이 벌어 부자가 되게 해달라거나 장수하게 해달라는 기원은 사찰에서든 교회에서든 1년 내내 그치는 적이 없다. 부적을 사러 점집에 가거나 칠성당과 산신당에 재물을 바치는 일도 그렇다. 다 인지상정이다. 또 ‘대선’이니 ‘총선’이니 하는 선거를 보자. 부처님이나 하나님이 선거에서 이길 수 있게만 해준다면 그들도 당장 거기 찾아가 무릎 꿇고 빌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렇듯 인간이 자손번창, 부귀영화, 무병장수를 바라고 비는 마음에는 종교가 있건 없건 또 선하건 악하건 구분이 없다. 이런 소박하고 당연한 믿음을 ‘기복신앙’이라한다. 그런데 모두가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고 부자가 되고 병마에서 풀려나고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누구는 합격하되 누구는 낙방하고, 누구는 부자가 되지만 누구는 가난하며,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고, 누구는 당선되고 누구는 낙선하게 마련이다.
고 이병철 회장이 던진 이번 질문의 밑바닥에도 바로 이 같은 기복신앙이 깔려 있다. 만일 신이 존재하고 선하다면 신을 믿고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부귀를 누려야 당연하지,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 부귀를 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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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건 어불성설이 아닌가. 그런데도 세상에는 그런 경우가 많으니 도대체 그리하는 신의 뜻이 무엇이냐고 물은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물음이다. 그런 연유로 사실 이 질문은 어제 오늘 생긴 게 아니다.
2600년 전쯤 우상을 섬기느라 신에게서 돌아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내릴 징벌을 경고하는 임무를 맡았던 선지자 예레미야가 신에게 던졌던 질문 역시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예레미야 12:1)였다. 이 말은 자기 백성을 징벌하는 신의 정의로움을 굳게 믿었던 선지자마저 신을 믿지 않고 악한 짓을 하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부귀를 누리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는 의미다.
■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복
구약성서에는 우리말 ‘복(福)’으로 번역된 단어가 놀랍게도 983번이나 언급된다. 이러한 사실은 복이라는 개념이 성서에서 아주 중요한 축을 담당함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 개념을 비교적 등한시해왔다. 목회 현장에서는 특히 다수의 한국 교회가 “예수를 믿으면 복 받는다”라는 말을 가장 빈번히 가르치면서 복을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개념인 ‘구원’과 동일하게 다루는 경향을 감안한다면, 이는 매우 특이한 일이다.
신구약성서를 차례로 보면 복의 개념이 서서히 변천했음을 알 수 있다. ‘창세기’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청세기 1:12, 29)라고 쓰인 것처럼, 복은 ‘생물이 존재하기 위해 꼭 필요한 활력’으로 먼저 규정되었다. 신학자들에 의하면 여기에는 신과의 바르고 좋은 관계에서 나오는 ‘영적인 복’뿐 아니라 자손이 번성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무병장수하고 전쟁에서 이기는 ‘세속적인 복’까지 포함된다. ‘신명기’에 이스라엘이 적군을 물리치는 것(신명기(28:7), ‘열왕기상’에 이스라엘에 천재지변과 질병이 창궐할 때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열왕기상 8:35~40), ‘이사야’에 생업을 위해 물을 공급하고 자손을 번성하게 하는 것(이사야 44:3)이 복으로 언급된 것이 그러한 예다.
잠깐 여기서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이때 받게 되는 세속적인 복들은 반드시 신과의 바르고 좋은 관계, 곧 영적인 복에서 나오는 결과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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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약성서가 교훈하는 복
신약성서를 보면 그 서두부터 다른 누구도 아닌 예수가 직접 기독교인이라면 마땅히 기원해야 하고 누려야 할 ‘여덟 가지 복’을 선포했다(마태복음 5:3~12).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자’가 복을 받는다. 곧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요컨대 예수는 천국의 복, 영적인 복을 가르치고 약속했다. 우리로서는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자손번성, 부귀영화, 무병장수 같은 세속적인 복은 여기 들어 있지 않다.
예민한 문제이니만큼 분명히 해두자. 신을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세속적인 복이 아니라 영적인 복이다. 세속적인 복은 기껏해야 영적인 복의 결과로 뒤따라온다. 이는 곧 신을 믿는 의인이라 해서 모두 선인은 아니지만 의인이 되면 점차 선인이 될 수밖에 없는 이치와 같다. 영적인 복을 받았다고 해서 동시에 세속적인 복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영적인 복을 받으면 점차 세속적인 복도 뒤따라온다는 말이다. 이 말을 사도 요한은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요한3서 1:2)라는 기원으로 표현했다.
기독교인들로서는 무척 아쉽겠지만, 신약성서의 가르침 안에서 세속적인 복은 인간이 먼저 신에게 바라고 기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니 이 회장이나 우리들 생각과는 달리 신을 믿는 선한 사람들이 세속적인 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나 신을 믿지 않는 악한 사람들이 부귀를 누리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니라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다.
■ 이는 다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라
만일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여기 이렇게 따져 묻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태복음 7:7)라고 가르쳤는가? 어디 그뿐인가? “너희가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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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다 받으리라”(마태복음 21:22)나,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오한복음 15:16) 같은 교훈을 했느냐? 그렇다! 예수는 분명히 그렇게 가르쳤다. 그리고 이 말들이 오늘날 기복신앙을 부추기는 목회 현장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기쁜 소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심각한 오해와 왜곡이 은폐되어 있다.
‘마태복음’ 7장 7절에 실린 가르침에는 선행되는 전제가 있다. 예수는 이 전제의 중요성을 분명히 하기 위해 ‘마태복음’ 6장 후반을 다 채울 정도로 장황하게 교훈했다. 그는 우선 공중의 새가 농사하지 않아도 굶주리지 않고, 들의 백합화가 길쌈하지 않아도 솔로몬이 입은 것보다 아름답다는 예를 들면서 우리가 구하기 전에 신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했다. (마태복음 6:7, 32). 그러니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가르쳤다.(마태복음 6:31~33) 그렇다면 ‘마태복음’ 7장 7절의 교훈은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이 아니라 신의 나라와 그의 의를 뜻한다는 게 자명하다. 세속적인 복이 아니라 영적인 복이라는 이야기다. 그렇지 않겠는가? 예수가 같은 자리에서 조금 전에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마태복음 6:31~32)라 해놓고, 곧 이어 먹고 마시고 입을 것들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말했을 리 없지 않은가.
■ 그럼 왜 신을 믿고 기도하라 하는가
여기서 당신은 볼멘소리로 다시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그렇다면 자식들의 수능시험을 위한 기도, 사업성공을 바라는 기도 심지어는 병을 낫게 하기 위한 기도 등 이 모든 세속적 복을 위한 기도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이 아닌가? 어차피 신이 세상만사를 자신의 예정된 섭리대로만 이끌어갈 것 같으면 기도란 것도 결국 필요 없지 않은가?
사실은 당신만이 아니라 나도 종종 그런 의문이 든다. 장담하건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불만을 조금씩은 갖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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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 예를 들면 이렇다.
한 기독교 신자가 신에게 사업성공을 위해 매일 기도하며 열심히 노력했다고 하자. 그가 정말 사업에 성공했을 경우 그 사람은 자신이 부자가 된 것이 신의 섭리라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만하거나 방심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사업에 실패했을 경우에도 그 사람은 지신의 실패가 궁극적으로 선을 이루려는 신의 섭리라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자책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의미로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요강’에서 다음과 같이 교훈했다.
“신으로부터 무엇을 획득하기 위한 기도는 기도하는 자 자신 때문에 인간에게 필요하다. 즉 자신이 자기의 결함을 고찰하고, 기도함으로써 얻기를 소망하는 것을 경건하게 바라도록 자기 마음을 기울이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통해 그는 받기에 적합한 자가 된다.”
요컨대 신을 믿는 사람이라면 기도로 신의 섭리를 바꿀 수야 없지만 자기 자신을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로써 신의 뜻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자가 된다는 말이다.
자, 정리하자. 이 회장은 이렇게 물었다. “신앙이 없어도 부귀를 누리고 악인 중에도 부귀를 누리는 사람이 많은데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대답은 이렇다. 신앙이란 원칙적으로 그리고 일차적으로는 자손번성, 부귀영화, 무병장수 같은 세속적인 복과는 무관하다. 신의 교훈은 세속적인 복에 마음을 두지 말고 영적인 복, 곧 신의 나라와 그의 의에 마음을 쏟으라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고 탐욕스레 살지 말고 신을 바라보고 가치 있게 살라는 말이다. 그리하면 자손번성, 부귀영화, 무병장수 같은 세속적인 복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는 신이 공중의 새를 기르듯 들의 백합화를 입히듯 그렇게 돌볼 것이다.
14.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약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
‘마태복음 19장 16절부터 24절에는 한 편의 콩트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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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예수가 가버나움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의 일이다. 한 청년이 다가와 “선생이여 내가 무슨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물었다. 예수는 계명을 지키라했다. 무슨 계명을 지켜야 하느냐는 물음에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등 ‘모세의 십계명’ 가운데 사람에 관한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청년이 다시 “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사온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물었다. 이에 예수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데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청년은 가진 재물이 많기 때문에 근심하면서 돌아갔다. 이때 예수가 한 말이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이다.
고 이병철 회장이 바로 이 부분을 콕 집어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약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 라고 볼멘소리로 물었다. 오해다! 예수는 그런 뜻으로 말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에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태복음19:21)하는 부분이다. 이 가르침은 모세의 십계명에 들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이웃사랑과도 전혀 다른 새로운 내용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뭐냐고? 바로 신에 대한 사랑이다.
당신은“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하는 것은 이웃사랑이 아니냐. ‘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말이 대체 어디 나오느냐 하고 반박할 수 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위에 열거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등등의 계명은 도덕적 요구다. 이것들을 지키는 데는 신에 대한 사랑이 필수적이지 않다. 도덕적 경건성 만으로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소유를 모두 버리고 예수를 따라나서는 일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자기 삶의 형식을 송두리째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차이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예수가 청년에게 요구한 그 일은 신에 대한 믿음과 그의 나라에 대한 소망, 요컨대 신에 대한 사랑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 경건한 청년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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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년 쯤 지나 한 청년이 다시 예수를 찾았다. 그리고 그는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Francesco d' Assisi 1182~1226)가 그다.
프란체스코는 중부 이탈리아 아시시의 부유한 직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사(騎士)가 될 꿈을 갖고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참가했다가 큰 병을 경험한 후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허물어져 가는 시골 성당에 안치된 예수의 십자가상 밑에서 “프란체스코야, 내 집이 무너지고 있으니 고쳐라”라고 명하는 소리를 듣고 아버지 가게의 돈을 가져다 기부하고 그 성당을 보수했다. 성 다미아노 성당이다.
이후 프란체스코는 예수가 말한 ‘내 집’이 그 성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썩어가던 가톨릭교회를 말하는 것임을 깨닫고 진정한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길을 나선다. 진리는 분명 높은 곳 보다는 낮은 곳에, 풍요보다는 가난에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고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주변에는 그의 이상을 따르는 제자들이 모여 집단을 이루게 되고, 1209년 11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를 만나 청빈을 중심으로 한 수도회칙을 인가 받았다. 그 후 오늘날 보통 프란체스코회로 불리는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를 설립했다.
또한 귀족의 딸로 태어나 프란체스코를 사랑하여 수녀가 된 클라라(1194~1253)에게 권하여 여성을 위한 청빈수도회(클라라회)를 설립하게 하고 속인 남녀를 위한 제3회도 조직했다.
예수가 그랬듯 프란체스코는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했다. 그에게는 가난한 자가 곧 예수였다. 프란체스코는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40)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평생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 그래서였을까? 말년인 1224년 프란체스코의 몸에 성흔(聖痕,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옆구리와 양손, 양발에 생긴 다섯 개의 상처) 이 생겼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문서에 기록된 최초의 성흔 사례다. “또 한 명의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프란체스코는 그로부터 2년 후인 1226년 10월 4일 프란체스코회 발상지인 아시시 근방의 포르티운클라 수도원에서 사망했고, 다시 2년 후인 1228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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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나귀들의 헐떡거림같이
예수를 찾아왔던 청년은 왜 근심하며 맥없이 돌아갔을까? 예수마저 저주할 만큼 까다로운 당시의 계명들을 다 지켜가며 영생을 갈구하던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그건 그가 재물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신이 약속한 영생보다도 예수가 말하는 하늘의 보화보다도 땅위의 재물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청년은 돌아가 예수에게로 다시 오지 못했다. 그것이 예수 그리고 성 프란체스코와 다른 점이다.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을 때 예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천하만국과 그 영광”보다 “천국과 그 영광”을 선택했다(마태복음 4:8~10). “내 집이 무너지고 있으니 고쳐라”라는 말을 들었을 때 프란체스코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살았다.
그러나 재물에 대한 우리의 욕망은 상상을 초월한다. 누구든 살아서 재물을 사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죽을 때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데도 말이다. 기독교에서는 그것이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건 또 무슨 말일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는 도덕적 또는 법률적 죄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에게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영혼이 사망하는 것’을 말한다. 사도 바울이 “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 6:23) 라고 교훈 했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에서 “육체가 떠나면 죽는 것처럼 영혼이 신을 떠나면 죽는다”라고 설명했던 바로 그 죽음이다.
요컨대 죄는 안으로는 ‘버림받음’의 감정, ‘쓸모없음’에 대한 인식, ‘사망의 느낌’으로 나타나고, 밖으로는 자기 자신과 세상을 향해 갖는 ‘탐욕’으로 드러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탐욕을 두 가지로 설명했다. 그 하나는 넓은 의미로 현세욕(現世慾)이고 다른 하나는 좁은 의미로 성욕(性慾)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신에게서 돌아서면 성욕과 현세욕이라는 탐욕의 노예가 되어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탐욕이 죄의 적극적 측면이자 우리가 “죄의 삯”으로 받는 이차적 형벌이다.
■ 잡으면 살 것 같고 놓으면 죽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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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에서 쫓겨난 아담 앞에 무엇이 놓여 있었던가? 가시덩굴과 엉겅퀴가 뒤덮인 저주받은 당, 무의미한 노동, 언젠가는 다가올 죽음이 아니었던가? 마르틴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철학적으로 고발했던 ‘내던져짐’이라는 끔찍한 상황 아니던가?
‘버림받음’의 감정, ‘쓸모없음’에 대한 인식, ‘사망의 느낌’ 속에 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단지 자기 자신을 챙기고 저주받은 땅이라도 움켜쥐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던가! ‘잡으면 살 것 같고 놓으면 죽을 것 같아’ 붙들고 움켜쥐는 것 아니던가! 또 바로 이것이 우리가 가진 참을 수 없는 성욕, 끈질긴 재물욕, 무한한 현세욕의 정체 아닌가! 그리고 또 바로 이것이 인간 실존의 가련함 아닌가! 내 생각은 그렇다.
하지만 기독교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 칼빈, 바르트, 틸리히에 이르는 대부분의 기독교 신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이 가진 ‘버림받음’ 의 감정, ‘쓸모없음’에 대한 인식, ‘사망의 느낌’은 까닭 없이 생긴 게 아니다. 신에게서 돌아섬, 신을 떠남, 존재상실, 가치상실이라는 ‘원초적 분리’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거기서 벗어나는 길은 성욕, 재물욕, 현세욕에 매달리는 일이 아니라 ‘신에게 돌아감’, 곧 ‘존재회복’과 ‘가치회복’뿐이다. 원초적 분리는 오직 원초적 결합에 의해서만 회복된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다.
예수도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한복음 15:4).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복음 15:5)라고 처음부터 끝까지 재결합을 요청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 그럼으로써 다시 신과 결합하는 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맺는 ‘열매’가 구원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징표이자 그에게 주어지는 복이다.
자 이제 이 회장의 질문에 답하자. 어떤 사람이 부자든 가난한 자든 자기 자신과 세상을 향환 탐욕으로 가득하다면 그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천국에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들어간다. 죄인이란 신에게서 돌아섬으로써 자기 자신과 세상을 향한 온갖 탐욕을 자기 지옥으로서 짊어지고 사는 사람이다. 반면 의인은 다시 신에게 향함으로써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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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와 양선(어질고 착함)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향유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데 당신도 느끼다시피 대다수의 부자는 탐욕적이다. 그래서 예수가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라고 교훈한 것이다. 부자들이 모두 악인이기 때문에 한 말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 ‘도피’도 ‘장악’도 아니라는 이야기
이제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우리가 ‘잡으면 살 것 같고 놓으면 죽을 것 같아’ 붙들고 섬기는 우상인 재물의 마성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그것으로부터의 ‘도피’도 아니고 그것의 ‘장악’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한 문제지만 해답은 이미 2000년 전에 주어졌다. 한마디로 예수와 성 프란체스코가 그랬듯 세상보다 신을 더 사랑해야 한다. 땅위의 보물이 아니라 하늘의 보물을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만 자기파괴적 재물욕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한마디로 더 좋은 것을 가져야 손에 쥔 것을 놓을 수 있다.
그래서 예수는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합금 구리 등에 녹이 슬어서 생기는 푸른 빛)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태복음 6:20~21)라는 원칙을 제시했다.
15. 이탈리아 같은 나라는 국민의 99%가 천주교도인데,
사회혼란과 범죄가 왜 그리 많으며,
세계의 모범국이 되지 못하는가?
가톨릭교회의 총본산 바티칸시국을 품고 있는 이탈리아는 알려진 대로 국민의 90% 이상이 가톨릭 신자다.
0 2012 IMF 통계와, 2002년 국제형사경찰기구(ICPO)의 보고에 의하면
- 이탈리아 : 1인당 GDP 33,942달러. 범죄율 3.75%
- 일본 : 84%가 신도(神道)와 불교도, 1인당 GDP 46,972달러. 범죄율 2.30%
- 한국 : 불교,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합계 51%. 1인당 GDP 23,679달러
범죄율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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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밀스가 주장하는 통계도 참고해 보자.
- 미국 : 프로테스탄트 52%, 가톨릭 24%, 범죄율 4.16%
* 강력 범죄가 많음
- 프랑스 : 가톨릭이 85%, 범죄율 6.67%
- 스웨덴 : 프로테스탄트 87%, 범죄율 13.35%
이 회장의 질문과 연관해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종교(특히 기독교)와 국가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느냐 없느냐다.
중세에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정교일치와 성직주의를 통해 국가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이 되면서 노동윤리 대신 소비윤리를 강요하는 후기자본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자리 잡은 오늘날에는 기독교와 국가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 사이에 별다른 상관관계가 없어 보인다.
■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다
우리는 암암리에 기독교가 교인들의 모범적이고 윤리적인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의 가르침이 상당부분 교훈적이며 도덕적이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의 중추인 십계명만 보더라도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같은 도덕적 명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신약성서의 발원이자 기반인 예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복음 7:12)라고, 서양 윤리학의 근간인 황금률까지 제시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막연히 기독교인들이 모여 사는 사회나 국가는 부유하고 범죄율도 낮으리라 여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0 다시 통계를 보면
- 국민의 80%가 기독교도인 서유럽 국가들은 전반적으로 부유하다.
- 전국민이 기독교 신자인 룩셈부르크 : 1인당 GDP 약11만 달러, 세계 1위
- 전국민이 기독교 신자인 볼리비아 : 1인당 GDP 2492달러의 가난한 나라
- 전국민의 90% 이상이 기독교도인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의 범죄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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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전후인 반면, 역시 90% 이상의 국민이 이슬람이거나 불교도인 태국, 배트남, 인도네시아 같은 동남아 국가들의 범죄율은 1% 미만
0 2007. 1. 9일자동아일보 기사
- 교황이 다스리는 바티칸시국은 전 국민이 가톨릭 신자이며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이 흠모하는 모범국가다. 그런데 2006년 바티칸 검찰 총장이 교황청 법원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이 나라의 국민 1인당 범죄율이 이탈리아의 20배 이상이며 가장 빈번히 저질러지는 범죄는 도둑질, 뇌물, 사기, 경찰과 공무원에 대한 모욕의 순이라고 공개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격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많은 공격을 받는다. 기독교인이 도덕적이지 못하고, 기독교 국가들이 모범적이지 않아서다. 이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기독교 신학이 내 놓은 답변을 살펴보고자 한다. 기독교인은 도대체 왜 그런지 말이다.
■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
크게 보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에는 두 가지 메커니즘이 존재한다.
하나는 ‘의롭다 함’이라는 뜻의 칭의고, 다른 하나는 ‘거룩하게 됨’ 이라는 뜻의 성화다. 칭의는 죄인을 의인이 되게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죄 사함’이라고도 한다. 성화는 악인이 선인이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칭의를 “신과의 화해”로, 그리고 성화를 “흠 없고 순결한 생활을 신장”하는 것으로 규정 했다.
칭의와 성화의 이 같은 구분을 ‘왜 기독교인들은 도덕적이지 않을까’ 하는 우리의 테마와 연관 지으면 무척 흥미롭다. 이런 의문들이 자연스레 얻어지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왜 칭의를 받았는데도 성화가 되지 않을까? 기독교인들은 왜 죄 사함을 받았는데도 선행을 하지 않을까? 기독교인들은 왜 신과 화해했는데도 흠 없고 순결한 생활을 하지 않을까? 기독교인들은 왜 종교성을 갖고 있는데도 도덕성이 신장되지 않을까?
그렇다 바로 이것이 앞서 살펴본 통계들에 나타난 기독교인들의 실상이자 기독교가 무신론자들의 공격을 받는 이유다. 도대체 그 까닭이 무엇일까?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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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롭다 함’을 받는 칭의는 신의 입장에서 보면 사랑이고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은총이다. 이때 칭의를 받는 자의 역할은 단지 이 믿을 수 없는 사랑과 은총을 받아들이는 믿음뿐이다.
용납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하는 ‘신의 그 사랑을 용납하는 인간의 용기’가 곧 믿음이다. 오직 이 믿음만으로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는다. 여기서 바울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로마서 5:1)라고 표현한 ‘이신칭의’의 교리가 나왔고, 루터가 외친 “오직 믿음으로”라는 종교개혁의 구호가 탄생했다. 하지만 성화는 다르다.
■ 성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나
성화는 죄 사함과 ‘동시에’ 시작되지만 ‘단 한 번’에 완성되지는 않는다. 자기 자신과 세상을 향한 무한한 탐욕을 버리고 신을 향해 살면서 거룩하게 되는 일은 시간 안에서 점진적으로 전 생애를 두고 이루어진다. 누구든 그리스도를 통한 죄 사함에 의해 ‘단 한 번’에 의인이 되지만 ‘단 한 번’에 온전한 선인이 되지는 못한다.
차제에 여기서 이 회장의 질문에 대해서도 답해보자.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도덕적이지는 않다. 기독교 국가라고 해도 모두 모범국가는 아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성화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성화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성화가 인간의 역할과 책임으로 연결된다는 이야기다. 죄를 사해주는 칭의는 오로지 신의 주권적 사역이다. 따라서 이 일에는 인간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 하지만 성화는 다르다. 성화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신의 사역이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의 일이기도 하다.
가톨릭 신학에 의하면 성화는 100% 신의 사역이고, 동시에 100% 인간의 일이다. 여기서 당신은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뭐라고? 전적으로 신의 일이자 인간의 일이라고?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난감한 물음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은총의 영감’이라는 개념으로 답했다. 신이 은총의 영감을 통해 “우리들의 그릇된 욕구 대신 선한 욕구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우리를 돕는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선의지의 영감’이라고도 부르는 이 은총은 인간의 의지를 움직이기는 하지만 결코 명령이나 강압이 아니고 부드러운 권유로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신의 의지와 일치하도록 이끈다. 그 때문에 인간은 그 사실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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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비가 오면 땅이 젖는다”라는 명제와 “땅이 젖지 않으면 비가 오지 않았다”라는 명제는 같은 말이다. 둘 모두 땅이 젖은 것이 비가 온 결과라는 뜻이다. 마찬가지다! “구원을 받으면 선행을 한다”라는 말과 “선행을 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했다”라는 말은 같은 의미다. 이 말을 예수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태복음 7:16~18)라고 교훈했다.
■ 당신입니다. 주님, 당신이에요!
오늘날 기독교인들과 교회가 당면한 문제는 ‘구원’에서 신의 사랑과 은혜만 너무 강조한 나머지 구원받은 인간의 역할과 책임을 소홀히 하는 데 있다. 기독교인들 상당수는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로마서 3:28)라는 바울의 가르침은 반기지만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야고보서 2:24)라는 야고보의 가르침은 꺼린다. 그 결과 신자들이 얻는 심리적 위안과 신의 사랑과 은혜는 극대화 되었지만, 신자의 비도덕적 행위 억제력은 현저히 약해졌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은 왜 도덕적이지 않을까? 하는 세간의 의문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다.
교회는 칭의와 성화, 믿음과 행함을 ‘구분하되 분리하지 말고’ 균형있게 가르쳐야 한다. 교회가 구원기관으로 일할 때는 구원을 ‘주는’ 기관이 아니라 신의 사랑과 은혜를 확인해 주는 제도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구원을 주는 것은 신이지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가 교육기관으로 일할 때는 선행이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그 열매이자 그에 대한 책무임을 ‘가르쳐야’ 한다. 선행하지 않음은 구원받지 못한 징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기독교인들이 도덕적 삶을 살게 될 것이며 기독교 국가도 모범국가가 될 것이다.
16. 신앙인은 때때로 광인처럼 되는데
공산당원이 공산주의에 미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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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6년 가을걷이가 끝나자 농민과 민중을 중심으로 형성된 제1차 십자군은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했다. 그리고 1099년 6월 7일, 출정 3년여 만에 최후의 목적지인 예루살렘 성에 마침내 도착했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 간구했다. “우리는 신의 자녀입니다. 신의 뜻을 이루고저 왔사오니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트리게 도와주소서.” 신이 그들의 기도를 들어 주어서였을까? 7월 15일에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역사에 남을 만큼 잔혹한 살육이 자행되었다.
원정에 동참했던 대수도원장 기베르 드 노장(1053~1124)은 ‘연대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예루살렘의 큰 거리나 광장 등에는 사람의 머리나 팔, 다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십자군 병사나 기사들은 시체를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했다. 성전이나 회랑은 물론이요, 말 탄 기사가 잡은 고삐까지 피로 물들었다. 이제까지 오랫동안 모독하기를 즐기는 사람들에 의해 더렵혀졌던 이 장소가 그들의 피로 씻겨야 한다는 신의 심판은 정당할 뿐 아니라 찬양할 만하다.”
그렇다! 고 이병철 회장의 말대로 신앙인은 때로 광인같이 된다.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 당시 러시아 인민들은 전제정치와 농노제도에 혹독하게 시달리고 있었다. 러시아 곳곳의 감옥에서 황제의 압제에 저항한 시민들이 죽음을 맞았고 농경지대에서는 소작인들이 봉건영주들의 폭력에 시달리며 노예처럼 부려졌고 인신매매를 당했다. 이런 비참한 상황에서 “인간이 천하고 속박되며 버림받고 경멸당하는 존재가 되는 모든 관계를 철폐하기 위한” 혁명, 곧 인민을 위한 혁명이라는 숭고한 목적이 탄생했다. 목적이 서자 곧바로 합당한 수단이 강구되었고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목적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목적을 위한 수단의 정당화! 그것이 씨앗이 되었고 그 열매는 썼다. 1970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솔제니친이 ‘수용소군도’에서 적나라하게 고발했듯 인민을 위한 혁명에 의해 약 2000만 명에 달하는 인민들이 숙청, 박해, 기아에 희생되었다. 그렇다. 이 회장의 표현대로 공산당원들도 때로는 이렇게 미쳤다. 그래서 이 회장은 신앙인들이 가진 광기와 공산당원들이 보이는 광기가 어떻게 다르냐고 물었다. 매서운 통찰과 날선 판단에서 나온 질문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포함한 역사적 격변기를 살아오면서 직접 보고 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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낀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회장의 물음에는 사실상 그 둘이 조금도 다를 바 없지 않느냐는 냉소가 깔려 있다.
우리는 이제부터 과연 그런지, 만일 그렇다면 왜 그런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이번에도 역시 결론부터 말하자. 이 회장의 말이 옳다. 매우 유감스럽지만 신앙인들과 공산당원들이 때때로 보이는 광기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 원인은 우리의 이성이 가진 특성이자 질병이기도 한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이제 곧 드러나겠지만, 이데올로기는 우리 눈 안에 있는 맹점이다. 태양에 박힌 흑점이다. 한 낮에 드리운 어둠이다.
■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려면
이념을 뜻하는 이데아(idea)와 논리 또는 이성을 뜻하는 로고스(logos)의 합성어인 이데올로기(ideology)를 문자가 지시하는 대로 ‘이념의 논리’라고 해석한다면 이때 말하는 논리가 곧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고 수단이 목적을 왜곡하는 폐쇄적 순환구조’다.
이 말은 비단 종교적, 정치적 이념뿐 아니라 우리가 가진 모든 이념이 이 같은 폐쇄적 순환구조를 가질 때는 언제든지 이데올로기로 변한다는 의미다.
이데올로기라니 얼핏 듣기에 심각하고 다시 들어도 우리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기원전 322)가 ‘정치학’에서 든 예로 설명하자면 이렇다.
돈벌이란 원래 ‘가정에 필요한 것을 제공한다’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
이다. 그렇기 때문에 돈벌이의 정당성은 본래 목적인 가정의 행복에 의해 제
한 받아야 한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그 돈벌이에 정당성을 부여하면
돈벌이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기 매달리게 된다. 수단
에 의해 목적이 왜곡된 것이다. 그러면 결국에는 건강을 해치거나 가족에게
소홀해져 원래 목적인 가정의 행복을 깨트리게 된다. 이처럼 이데올로기는
‘자기폐쇄적’일 뿐 아니라, 원래 목적을 훼손한다는 의미에서 ‘자기파괴적’이
다. 눈치 챘겠지만 이런 일들은 그밖에도 많다.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는데
건강을 해칠 정도로 한다거나, 화초를 위해 물을 주는 것인데 뿌리가 썩을
정도로 너무 많이 주는 경우처럼,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도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난다. 이 같은 사실은 우리 이성이 얼마나 ‘이데올로기’에 빠지기 쉬운지
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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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데올로기, 허위의식, 우상숭배
칼 마르크스(K. Marx 1818~1883)는 ‘자본론’에서 이데올로기를 ‘허위의
식으로 규정하고 그것이 어떻게 우상숭배로 연결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
었다. 그는 돈을 예로 들어 이렇게 설명했다.
0 돈은 상품교환의 매개수단, 돈을 위해 노동을 팔 때 돈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 수단을 목적으로 여기는 것이 허위의식
- 일단 허위의식이 생겨나면 돈은 ‘보이는 신’이 되고 그것의 숭배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된다. 신이 아닌 것을 신으로 여기는 것이 ‘우상숭배’이다
- 마르크스에 의하면 이것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이다.
0 7,8세기 중세 기독교의 성화상숭배(聖畵像崇拜) : 허위의식이자 ‘우상숭배’
- 교회가 예배라는 목적을 위해 성화상공경을 정당화 하자 신도들은 성화
상을 신처럼 숭배하게 됨
- 7세기 후반부터 교회에서 사용하던 성화상과 장식물을 문설주, 식탁, 심지
어 외양간에도 붙여 놓고 악령을 쫓고 병을 치유하며 가축의 출산을 돕고
예언 능력과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음.
마르크스는 돈에 대한 사람들의 우상숭배가 지닌 마성을 ‘요한 계시록’ 13
장 17절에 등장하는 ‘짐승’에 비유해 경고했다.
마르크스가 지적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을 위해 스스로 만든 어떤 것(상품,
돈, 자본)을 ‘마치 신처럼’ 숭배함으로써, 결국 그 ‘짐승’에게 자유를 빼앗기
고 노예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런 종류의 우상숭배를 물신주의
라 부르고, 그것의 자기파괴성을 매우 경계하며 인간성 회복을 주장했다. 이
점에서 마르크스는 기독교와 궤를 같이한다. 마르크스 역시 물신숭배를 반
그리스도적이라 규정하고 자신이 말하는 인간성 회복이 곧 그리스도의 요구
라고 주장했다.
정리하자. 우리는 우리가 ‘하려고 하는’ 모든 일에서 목적과 수단을 포괄적
으로 이해하고 계산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에서 끊임
없는 ‘자기부정’과 ‘자기비판’을 감행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고 수단이 목적을 왜곡하고 있지 않은지 부단히 점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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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야만 아직도 숱한 대심문관들이 도사리고 있는 교회와 사회에서 그리
스도를 위해 인민을 학살하는 광기와 야만성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신앙인은 때때로 광인처럼 되는데, 공산당원이 공산주의에 미치는 것과 어
떻게 다른가?”라는 처연한 질문 앞에 두 번 다시 서지 않게 될 것이다.
17. 천주교와 공산주의는 상극이라고 하는데,
천주교도가 많은 나라들이 왜 공산국이 되었나?
예 : 폴란드 등 동구제국, 니카라과 등
2012년 우리 문화계에는 ‘레 미제라블’ 열풍이 거세게 불었다.
뮤지컬 과 연극 ‘레 미제라블’이 성황리에 공연되었고, 영화 ‘레 미제라블’
이 극장가 흥행 1위를 차지했다. 민음사 출판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
라블’ 도 총 5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과 만만치 않은 가격(6만 천원)에도
단 3주 만에 3만 5000부가 팔려 나갔다.
‘레 미제라블’이 이처럼 성공을 거둔 까닭은 무엇일가? 시대를 초월하는 위
대한 작품의 힘 덕분일 것이다. 가난하고 비천한 한 인간이 어떻게 성자가
되어가는 지를 매혹적이고 강렬한 서사로 그려낸다. 장발장의 이 같은 변모
를 작가는 “이 죄수는 예수로 변모하고 있었다.” 라는 말로 묘사했다.
그뿐 아니다. 이 작품은 통렬한 사회적 메시지도 담고 있다. 위고는 서문에
서 “지상에서 무지와 빈곤이 존재하는 한 이러한 책들도 무익하지는 않으리
라”라고 겸손하게 표현했지만 작품의 메시지가 사회에 던진 파장은 매우 컸
다. 프랑스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렸다는 이 소설은 워털루 전쟁(1815),
왕정복고, 7월혁명(1830), 2월혁명(1848)으로 이어지는 혁명기를 배경으로
빈곤에 시달리고 압제에 찌들던 민중들의 절망과 희망을 절절히 묘사했다.
이를 통해 위고는 인간과 세상을 바꾸는 진정한 힘은 사랑과 자비임을 강력
하게 설파했다.
2012 겨울, 우리나라에 불어닥친 ‘레 미제라블’의 열풍은 빈부격차, 사회
적 불평등 해소를 염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은 언제나 폭동과 혁명을 부른다. 그래서 우리는 지
금부터 이 같은 불평등의 기원과 그에 대한 해법으로 나온 공산주의 사상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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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리를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천주교와 공산주의는 상극이라 하
는데 천주교도가 많은 나라들이 왜 공산국이 되었나?” 라는 고 이병철 회
장의 질문에 대한 답은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얻어질 것이다.
■ 쓰레기가 된 인간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새로운 생산 방식과 그에 따른 새로운 생활양식이
나 사회제도가 정착될 때마다 ‘경제발전’과 ‘질서구축’을 명목으로 유형무형
의 새로운 성곽이 세워졌고.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구별과 차별이 생겨났다. 문명화는 구별화이자 차별화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문명화는 차별화였다. 그리스에서는 헬라인과 바
바리안을 구분해 차별했고 노예제를 운용했다.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노예제
도라는 수면 위에 떠 있는 화려한 궁전이었다. 로마제국 사람들도 대부분 빈
민이어서 구걸과 소작, 날품팔이로 생계를 이어갔으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노예의 피와 땀으로 운영되었다. 제국 인구의 15%에 달하던 노예들은 “신이
혐오하는 저열한 인간이며 주인의 재산”이었다.
좀 더 큰 틀에서 보면 토플러가 ‘제2의 물결’ 이라 부른 ‘산업혁명’이 일어
난 19세기 영국과 유럽 각국에서 그리고 이후 전 세계에서도 문명화는 구별
화이자 차별화였다. 부르주아지(유산계급)와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라는 구
분과 차별이 그것이다. 한마디로 프롤레타리아는 산업혁명이 낳은 하비루,
곧 쓰레기가 된 인간들인데, 그 수가 제1의 물결인 ‘농업혁명’이후 최대 규
모였다. 그리고 이들을 기반으로 혁명이 일어나 공산국가들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졌다.
* 하비루(habiru) : 문명화가 낳은 불가피한 산물로서 “인간 쓰레기 또는 쓰레기가 된 인간들”이라는 뜻
■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이들의 노래
‘공산당 선언이 출간된 1848년은 역사가 다시 한 번 소용돌이친 해였다. 이해에 유럽 대부분의 주요 도시에서 인간 평등을 외치는 혁명이 일어나 여러 왕조가 무너지고 공산당이 설립되었다. 또한 산업혁명의 결과로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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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로 몰려들고 도시빈민층이 형성되었다.
칼 마르크스는 이 ‘비참한 사람들’을 ‘공산당 선언’에서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 라고 불렀다. 프리드리히 엥겔스(F. engels 1920~1895)는 맨체스터에 가서 그들을 직접 보고 “초라한 몰골의 부녀자와 아이들이 떼를 지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데, 그 모습이 쓰레기더미와 진흙탕에서 자라는 돼지만큼이나 더럽다.”라고 묘사했다. 하늘은 공장굴뚝이 내뿜는 오염 물질로 뒤덮였고 거리는 오물로 뒤범벅이었다. 콜레라가 창궐하고 폐결핵이 무섭게 번졌다. 이런 환경에서 부르주아지의 노예가 되어 하루 14시간씩 일하는 노동자들은 빨리 죽어갔다. 1842년 작성된 정부의 어떤 보고서는 맨체스터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17세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그야말로 쓰레기가 된 인간들이었다.
이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 : 불쌍한 사람들)’에 대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누구보다 먼저 현실적이고 과학적인 대책을 강구했다. 그 산물이 바로 ‘공산당선언’이다! 이는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서 젊은 공화주의자들이 바리케이트 위에서 부르던 “두 유 히어 더 피플 싱(Do you hear the people sing)”의 가사인 “다시는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이들의 노래”가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선언이다.
마르크스는 “첫 단계의 공산주의”(엥겔스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생산에 따라 분배한다고 했다. 하지만 “더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각자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 분배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의 이상은 20세기 공산주의자들이 실현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것이었다. 볼셰비키혁명 이후 공산주의는 점차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동의어로 쓰였고, 스탈린 체제부터는 ‘전체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고는 무너졌다. 프롤레타리아, 곧 산업혁명이 낳은 20세기 하비루들의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혁명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기독교의 방법은 달랐다.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기독교의 방법은 ‘혁명’이 아니라 ‘사랑’이다.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사랑에는 두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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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 스스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테복은 22:37~40)라고 간략하고 분명하게 교훈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예수가 말하는 ‘이웃’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거리적으로 가까이 사는 사람일까? 아니면 심정적으로 가깝게 느끼는 사람일까? 아니다. 예수는 그리 말하지 않았다. 누가 이웃인지는 ‘누가복음’에 밝혀져 있다. 한 율법사가 이웃사랑을 가르치는 예수에게 물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누가복음 10:29). 이때 예수는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들려준다.(누가복음 10:30~37)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강탈과 폭행을 당해 죽어가고 있었다. 그 길을 지나던 유대교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보았지만 자리를 피해 지나갔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여겨 상대조차 하지 않는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을 구했다. 이 이야기를 마친 예수가 율법사에게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묻더니 이어서 “자비를 베푼 자니라”라고 교훈했다. 이 말은 예수가 말하는 이웃, 곧 우리가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할 이웃이란 단지 거리적으로 혹은 심정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 고통과 위험에 빠진 성곽 ‘밖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렇다. 기독교는 하비루, 하비루의, 하비루를 위한 종교다.
모태인 유대교부터 그랬다.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인 ‘히브루(hebrew)’의 어원이 바로 하비루이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히브리인은 본디 성곽 ‘밖에 있는 사람’들로서 떠도는 사람들이자 쓰레기가 된 사람들이었다. 아브라함 자신도 유프라테스 강 하류에 자리한 고대도시 우르(Ur)의 성곽 밖에서 태어나 열세 번이나 거쳐를 옮기며 평생을 유목민으로 살았던 하비루였다. 족장이었지만 말년에 아내를 묻을 땅 한 평 없어 헷 족속에게 엎드려 사정해 겨우 동굴이 붙은 텃밭을 사서 장례를 치렀다.(창세기 23:4)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신이 하비루들을 특별히 사랑했다. 예수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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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는 미래의 본보기
이제 우리는 이회장의 질문에 올바로 답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신도 잘 알다시피 폴란드와 니카라과를 비롯한 세계 각국이 공산화된 데는 종교가 아니라 정치, 외교, 군사 같은 외적 요소가 작용한 것이다. 특히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의 세력경쟁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예를 들어 동유럽 국가들은 1940년대 초반까지도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 승리한 소련이 불도저처럼 서쪽으로 밀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등 동유럽 여러 국가에서 공산당 지도자들이 기존의 정부를 무너트린 뒤 소련을 지지하는 공산정권을 세웠다.
서유럽 국가들은 달랐다. 프랑스에도 프랑스 공산당 소속 레지스탕스가, 이탈리아에는 공산당 파르티잔이, 그리스에는 ELS라는 공산당 게릴라가 있었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는 새로운 정권에 의해 쫓겨나거나 민주화가 이뤄질 때까지 쥐 죽은 듯 지내야만 했다. 이 같은 상황은 라틴아메리카, 동남아시아 등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소련은 전 세계 각국에 공산혁명운동을 지원했고, 미국과 해당 지역의 동맹세력 또한 이에 대항하며 자기 세력을 넓혀갔다. 그 결과 어떤 나라는 공산화 되고 어떤 나라는 자유화되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천주교와 공산주의는 상극이라 하는데, 천주교도가 많은 나라들이 왜 공산국가가 되었나?”라는 이 회장의 질문이 애초 잘못되었음을 보여준다. 공산화와 종교는 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그리 정하고 다시 생각해보면 이 질문에는 죽비와 같은 통렬한 질책과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교훈이자 자신들의 본분인 ‘이웃사랑’을 충실히 실행했더라면,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돕고 보살폈다면, ‘레 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을 사랑과 자비로 감화시킨 미리엘 주교처럼 살았더라면, 그래서 가난과 압제에 시달리는 비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했더라면, 그래서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이라는 구별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때도 “천주교도가 많은 나라들이 왜 공산국이 되었나?” 같은 질문이 나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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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가 다시금 기억해야 할 교훈이 있다. 빈곤에 시달리고 압제에 찌든 ‘레 미제라블’의 숫자가 많아지는 곳에서는 언제나 어디서나 “너는 듣고 있느냐 성난 민중의 노래, 다시는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이들이 노래”가 다시 울려 퍼진다는 사실이다. 간헐적이지만 이미 징후는 시작되었다. 2011년 8월, 영국 런던에서는 10~20대 젊은이들이 거리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9월에는 미국 뉴욕 맨해튼 주코티공원에서 “월 스트리트를 점령하라!”, “99%는 위기, 1%는 강도”라는 구호로 시작한 시위가 강풍을 탄 산불처럼 전 세계로 번졌다. 비록 지금은 잠잠해 졌지만 말이다.
“과거의 일들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의 본보기이다. 세상은 언제나 한가지였다. 현재의 일들과 미래에 다가올 일들이 그 언젠가 있었던 일들이다. 같은 것들이 되풀이되고 있는데, 다만 치장을 새롭게 하고 다른 이름으로 다가온다.”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 역사가이자 정치가인 프란체스코 귀치아르다니(1843~1540)가 남긴 말이다. 우리 모두가 새겨들어야 할 말 아닌가!
18. 우리나라는 두 집 건너 교회가 있고,
신자도 많은데 사회범죄와 시련이 왜 그리 많은가?
우리나라에는 교회가 참 많다. 2012년 문화체육관광부 자료에 의하면 118종단에 7만 7966개의 교회가 있다.
교회 신자도 많다. ‘인구총조사’에 10년마다 한 번씩 포함되는 ‘종교 인구조사’에 따르면, 2005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에는 총인구의 22.8%인 1072만 6463명이 불교도이고, 19.3%인 861만 6438명이 프로테스탄트, 10.9%인 514만 6147명이 가톨릭이다.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을 합하면 국민 세 명 중 한 명은 기독교인이라는 뜻이다.
이병철 회장의 질문은 형식은 의문문이지만 내용은 사실상 교회와 교인이 그렇게 많은데 사회는 왜 이 모양인가 하는 힐난이다.
이번 질문에 대해서도 기독교가 내 놓을 수 있는 답은 이렇다 즉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모두 도덕적이지는 않고 한국의 교회들이 모두 모범적인 것도 아니기 때문에 사회범죄와 시련이 많다. 그리고 그것은 성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 답변에는 다음과 같은 단서 아래서만 정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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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마태복음 5:13)라고 가르쳤고, 바닷물은 3% 남짓의 소금만으로도 썩지 않는다는 단서 말이다. 교회와 교인들에게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보다 높은 도덕성과 특별한 사명이 주어졌다는 뜻이다. 이 같은 단서 아래서 이 회장의 질문은 힐난이 아닌 죽비로 받아들여 교회와 교인이 반성하는 계기로 삼는다면 기독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우리는 교회란 본디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보고, 이로써 드러나는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를 뜻하는 그리스어 에클레시아(ekklesia)는 ‘부리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칼레오(kaleo)가 어원이다. 신약성서는 에클레시아 앞에 보통 ‘신이’ 라든지 ‘그리스도 안에’같은 말을 덧붙여 쓴다. 이로써 교회는 ‘신이 부른 사람들의 모임’ 또는 ‘신이 그리스도 안에 부른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는 자신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을 불러 제자로 삼았다(마태복음 4:18~22). 이후 많은 사람이 예수를 머리로 한 이 공동체에 가담했고,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예수가 생을 마감하는 예루살렘까지 동행했다. “약 120명”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도 남아 제자들과 함께 공동체를 형성했다(사도행전 1:11~15).
이것이 기독교 교회의 역사적 시초인데 여기서 교회의 본질과 사명이 뚜렷이 드러난다. 교회는 신이 인간과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 안에 불러낸 사람들의 모임이다. 따라서 구세주 예수의 사명을 이어받았다. 다시 말해 교회는 인간과 세계의 구원이라는 신의 의지이자 약속을 실현해야 하는 예수의 사명을 짊어진다.
이 말은 교회가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예수의 사명을 위해 존재하며,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고, 예수가 하던 일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규정했다(골로새서 1:18).
-가톨릭의 교회관 : 교회를 성도들의 모임이라기보다는 ‘천국의 열쇠를 수여받아 성례전을 시행하는 사제들의 모임’으로 규정했다. 이것이 중세 교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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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를 선언하고 시행하는 최고기관으로서 세상에 군림하도록 한 성직주의라는 부작용을 낳은 텃밭이 되었다.
- 프로테스탄트교회론의 근간 : 성도 모두가 사제라는 이른바 ‘만인사제설’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쁜 소식을 믿는 ‘성도들의 공동체’임으 강조했다.
- 교회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여기서 우리가 진정 물어야 할 것은 - 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교회를 불문하고 - 지금이 교회가 과연 예수가 원했던 공동체인가 하는 문제다.
■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복음서에는 예수가 교회를 직접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 신약성서에는 ‘교회’라는 단어가 모두 114번 나오지만 주로 바울 서신(46번)과 사도행전(23번)에서 보이고, 예수의 가르침과 생애를 담은 복음서에는 마태복음에서만 2번(마태복음 16:18, 18:17) 등장한다. 게다가 앞서 언급한 대로 출처를 의심 받는다. 이에 반해 ‘하나님의 나라’를 뜻하는 ‘바실레이아 토우 테오우’는 복음서에만 100번 넘게 나온다. 하나님의 나라가 복음의 핵심 메시지라는 뜻이다.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의 윤리는 두 가지 사랑을 바탕으로 한다. 앞 장에서도 살펴보았듯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다. 예수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37~40)라고 가르쳤다. 예수가 한 그 밖의 개별적, 윤리적 교훈들도 알고 보면 모두 이 두 가지 사랑의 계명과 연관되어 있다.
정리하자면 교회는 예수를 통해 이 세상에 들어온 ‘하나님의 나라’가 창조한 결과물이자,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전조이며 증거이고, 구현하는 도구이며 가꾸는 사역자다. 거꾸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의 시원이자 교회가 떠맡은 사명이며 도달해야 할 목표이고, 해야 할 사역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의 관계다. 따라서 만일 누군가가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동일시하면 ‘부당한’ 교회찬양론을 주장하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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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의 교회는 죄가 많다
한스 큉은 ‘교회란 무엇인가’에서 기독교인이 ‘“의인이면서 죄인”이듯 교회도 “성도들의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죄인들의 공동체”라고 규정했다. 같은 의미에서 큉은 “현실의 교회는 죄가 많다”고 인정하며 “순결한 창녀”라는 상징어로 표현했다. “거룩함과 죄 많음은 교회의 양면”이라는 뜻이다.
한국 교회도 예외일 수 없다. 한국 교회는 지난 30년 동안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 하지만 빛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림자도 있는 법이다. ‘다시 프로테스탄트’의 저자 양희송은 한국 교회에 짙게 드리운 그림자를 성직주의, 성장주의, 승리주의 세 가지로 요약했다.
중세 가톨릭교회가 성직자들에게 특권을 부여하면서 생긴 ‘성직주의’는 성직자들의 교회세습, 성직매매, 재산축적, 성적문란 등의 부작용을 낳았다. 이에 저항한 루터와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모든 성도가 사제라는 만인사제설을 내세워 교회 안에서 성직주의를 원천봉쇄했다. 그런데 한국 프로테스탄트교회가 목회자 특권을 인정함으로써 성직주의를 되살려 놓았다는 것이 양희송의 주장이다. 그는 이 같은 현상을 ‘개신교 성직주의’라고 불렀는데, 당연히 교회세습, 성직매매, 재산축적, 성적문란 등 중세 가톨릭 성직주의의 부작용이 그대로 되살아났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이룬 놀라운 성장은 “교회 성장을 하나님 나라의 성장으로 간주하고 목사는 교회를 성장시키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성장주의에 힘입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가 스스로 무엇을 하는 곳인지를 정의하지 못하고 사람을 모을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도입하겠다는 의지로” 일구어낸 고속성장은 오히려 스스로 무한증식하는 암세포와 같다는 것이 양희송의 판단이다. 신에게 드리는 예배가 공연 같아지고, 교회행정과 행사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을 닮아가고, 교회는 사교장이 되어 가고 있다.
장승이나 단군상 및 불상 파괴 사건 등으로 드러난, 타 종교에 대해 공격적이고 무례한 프로테스탄트, 정권과 야합하여 정치, 사회, 문화 각 분야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세속적인 프로테스탄트의 모습은 승리주의가 낳은 부작용이라고 양희송은 진단한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교회사에서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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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년 동안 너무도 익숙하게 보아온 가톨릭교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결국 성직주의, 성장주의, 승리주의는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고 서로서로 얽혀 있으며, 그것들에 의해 한국 교회가 본질을 상실하고, 종교개혁 이전의 가톨릭 교회처럼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양희송은 주장한다. 교회는 이제 ‘예수의 몸’이 아니라 ‘예수의 무덤’이 되었다는 노골적 비판도 했다. 그래서 “다시 프로테스탄트” 인 것이다.
그렇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해서라면 교회의 어떠한 사역도 허용된다는 왜곡!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를 화형시키려던 대심문관의 진실임을 이미 보았다. 그런 다음 우리는 그것이 11세기에 신의 이름으로 예루살렘 성을 피로 물들인 십자군의 진실이고, 16세기 유럽의 가톨릭이 중남미 각국에서 행한 숱한 학살이 진실이며, 17세기 이후 프로테스탄트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자행해 온 온갖 만행의 진실이라는 것, 그리고 오늘날에도 교회가 끊임없이 반복하는 서글픈 진실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한국교회의 정직주의, 성장주의, 승리주의도 마찬가지다.
교회는 마땅히 그리스도와 똑같은 방법으로 주어진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웃에게 말로 전할 뿐 아니라 행위를 통해 실현해야 한다. 이때 말하는 이웃은 ‘거리적으로’ 또는 ‘심정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당하는 자, 위험에 빠진 자, 포로 된 자, 병든 자, 억눌린 자, 가난한 자 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가복음 12:31)하는 것이 예수가 교회와 교인들에게 새롭게 내린 계명이다.
■ 교회는 성화를 위해서 존재한다
선교학자이자 ‘흩어지는 교회’의 저자이기도 한 요하네스 호켄다이크는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교회는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과 참모습을 입증해야 한다. 교회는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 또 그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것도 확실하다. 이것은 메시아가 스스로, 또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교회는 남을 위한 존재, 곧 세계를 위한 존재다. 남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 주는 것이 교회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을 태세가 갖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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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져 있을 때에만 교회는 구원 받을 수 있다.”
정리하자. 예수는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를 일일이 언급한 다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40)라고 당부했다. 자 그럼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만일 예수의 당부를 제대로 따르는 기독교인들이 우리나라에 1500만 명쯤 있고 이런 성도가 모인 교회가 8만 개쯤 있다면 어떨까?” 아마도 고 이병철 회장이 힐난했던 것과는 다르게 사회에 만연하던 범죄와 사회적 시련이 확실히 줄어들지 않을까.
19. 로마 교황의 결정엔 잘못이 없다는데,
그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독선이 가능한가?
1998년 3월 16일 로마 바티칸 교황청은 ‘우리는 기억한다 : 대학살에 대한 소감’이라는 문서를 발표했다. 이 문서에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학살당한 유대인을 돕지 못한 가톨릭 교인들의 잘못을 뉘우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교황이 위원회의 책임자 에드워드 카시디 추기경에게 보낸 표지서한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난날의 과오와 비신앙적 행위에 대한 회개를 통해 교회의 자녀들이 마음을 정화할 수 있도록 그들을 격려합니다.”
교황이 “지난날의 과오와 비신앙적 행위에 대한 회개”라는 표현을 쓰며 교회의 잘못을 사과한 것 자체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바티칸의 홍보관이던 아나톨리는 저서 ‘교황이 용서를 구할 때’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0년부터 1996년까지 총 94회에 걸쳐 “역사 속 교회의 잘못을 시인하거나 용서를 구했다”고 지적했다. 역시 유례가 없는 일이다. 신학자들 상당수는 이러한 사실이 요한 바오로 2세가 간접적으로나마 교황무오설‘이 그르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우리말로 교황무류설(敎皇無謬說)이라고도 번역되는 교황무오설(敎皇無誤說)은 교황이 전 세계 가톨릭의 우두머리로서 신앙 및 도덕에 관해 내린 정식 결정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가톨릭의 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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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리에 의해 고 이병철회장이 “로마 교황의 결정엔 잘못이 없다고 하는데, 그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독선이 가능한가?” 라고 질문을 던졌다. 상식적으로 보면 백번 타당한 질문이다. 하지만 바티칸과 가톨릭교회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문제는 교황은 신이 아니며, 교리는 신의 말씀이 아니라는 데 있다. 기독교의 교리란 본디 타 종교들의 사상과 내부 이단들의 주장으로부터 기독교를 구별해 방어하려고 만든 신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설령 신의 말씀은 오류를 범할 수 없다 해도 교리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교황무오설도 예외가 아니다.
20. 신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수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1982년 10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막시밀리아노 콜베(M. Kolbe 1894~1941) 신부를 ‘사랑의 순교자로 기록하고 성인으로 봉하는 시성식을 거행했다.
프란체스코회 사제이자 ‘성모기사회’ 창설자인 콜베 신부는 1941년 2월 17일 유대인을 도왔다는 이유로 나치에 체포되어 5월 28일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런데 두 달 후인 7월 말 죄수 중 한 사람이 수용소에서 탈옥했다. 담당 지휘관 칼 프리슈 중위는 죄수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죄수들 가운데 무작위로 10명을 골라 굶겨 죽이는 아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끌려나온 사람중에 프란치세크 가조우니체라는 폴란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자기에게는 아내와 어린 자녀들이 있다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콜베 신부가 자기는 그보다 나이도 많고 가족도 없으니 자기가 대신 죽겠다며 자원했다. 프리슈 중위가 허락해 콜베신부는 다른 9명의 죄수와 함께 물도 음식도 없는 지하 감옥에 감금되었다. 17일이 지났지만 콜베 신부와 다른 3명은 기적처럼 살아 있었다. 나치는 독극물을 주사해 그들을 모두 살해했다.
1993년 11명의 미국 젊은이가 택사스 주 댈러스의 올세인츠 본당 사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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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코스 신부에게 소송을 걸었다. 코스 신부가 소년 시절의 자기들을 성적으로 학대했다는 이유였다.
코스 신부 외에도 성 학대범은 더 있었다. 항문과 구강을 이용해 소년들을 성폭행한 로버트 피블스 신부, 소녀들을 성폭행한 윌리엄 휴즈 신부가 그들이다. 댈러스 법원은 아동 성학대를 방관한 책임을 물어 교회가 1억 2천만 달러라는 기록적 배상금을 피고인들에게 지불하도록 판결했다. 뒤이은 형사소송에서는 코스에게 종신형 판결을 내리고 수감했다.
수도사 출신의 정신병리학자 리처드 사이프가 쓴 ‘비밀의 세계 : 성욕과 독신 추구’에 따르면 1983년과 1987년 사이 미국에서 평균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사제의 성추행 사건이 터졌으며, 이 나라 188개 교구 가운데 소아성애도착증 문제로 소송이 발생하지 않은 교구가 단 한 곳도 없었다. 1994년 9월에는 한 달 동안 무려 60명의 사제 또는 수사가 아동 성학대죄로 수감되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8년 교황으로선 29년 만에 미국 순방길에 올라 가톨릭 성직자들의 성추문 사건을 사죄했다.
신부란 존재는 콜베의 경우처럼 성스러운 사람일 수도 있고 코스의 경우처럼 타락한 사람일 수도 있는 것이다. 상식적인 이야기 아닌가? 문제는 상식적인 이야기마저 종교와 연관되면 비상식적인 이야기가 된다는 데 있다. 그것이 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키운다.
앞서 언급했듯 20세기의 탁월한 신학자 한스 큉은 교회의 양면성을 ‘순결한 창녀’라는 표현으로 일갈한 바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신부도 순결한 창녀다. 거룩함과 죄 많음이 성직자들의 양면인 것이다. 고 이병철 회장은 신부와 수녀는 어떤 사람이며 왜 독신으로 사느냐고 물었다. 이제부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자.
■ 발을 씻어주는 사람
기독교에서 사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신약성서에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영원히” 제사장이라고 기록되어 있다.(히브리서 7:17). 예수 외에는 신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중개인이 없고, 예수의 십자가 피흘림 외에는 그 어떤 제사도 필요 없다는 뜻이다.
예수는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누가복음 22:27)라고 선언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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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며 제자들에게도 섬기는 자가 되라고 가르쳤다.(누가복음 12:37, 17:8 및 요한복음 12:2)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본을 보이며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한복음 13:14)라고도 교훈했다. 이는 유대교(또는 구약성서)에서 사제가 히에레우스, 곧 ‘신을 섬기는 자’인 것과 달리, 기독교(또는 신약성서)에서 사제는 디아코니아, 즉 신을 섬기는 자일 뿐 아니라 ‘이웃을 섬기는 자’, ‘이웃에게 봉사하는 자’임을 의미한다. 바로 이것이 ‘신부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예수의 답변이기도 하다.
■ 황야의 별과 계시받은 여자
수녀는 가톨릭교회에 속한 여성수도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1947년에 발견된 사해사본을 통해 유대교의 일파에도 수도제도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수도사란 가톨릭이나 동방정교의 수도원에서 기도와 묵상 그리고 고행을 통해 수행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들의 성직의 지위인 사제품을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에 따라 ‘성직수사(또는 수사신부)’와 ‘평수사’ 로 구분된다.
최초의 수도사는 성 안토니우스(St. Antonius 251?~356?)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물려받은 막대한 부를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다음 285년 이집트의 외딴 사막에서 금욕과 수도생활을 했다. 가끔 알렉산드리아로 나와 설교를 했는데, 당대 기독교인들은 물론이고 이교도까지 탄복시켜 ‘황야의 별’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최초의 수녀원은 힐데가르트 폰 빙엔(1098~1179)이 세웠다. 그는 어려서 신의 계시를 받았고 8세에 수도원에 들어가 교육받은 후 10대 중반 베네딕트회 수녀가 되어 38세에 수도원장이 되었다. 이후 그녀는 미술가, 작가, 시인, 작곡가, 철학자, 언어학자, 의사, 약초학자, 카운슬러, 예언자 등으로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중세 여성의 지위는 보잘것없었기 때문에 수녀는 어디까지나 남성 성직자를 보조하는 역할이었고, 모든 수녀원은 수도원의 부속기관이었다.
힐데가르트는 많은 반대와 압력을 이겨내고 1147~1151년 사이에 루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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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베르크에 역사상 최초의 여성들만의 수녀원을 세웠다.
수도사의 생활방식은 수도회에 다라 다양하지만 수사와 수녀를 불문하고 모두 사유재산을 포기하는 청빈(淸貧)과 독신생활을 통한 정결(貞潔), 그리고 신과 수도회의 상급자이게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순명(順命) 등 세 가지 덕목준수를 원칙으로 한다.
‘베네딕투스 회칙’에 따르는 수도원 생활을 살펴보면
- 기상 : 하기에는 01:00, 동기에는 02:30
- 시편 성서 등을 읽고 새벽기도(曉課)로 하루를 시작, 오전 노동
- 최초의 식사 : 하기에는 정오에, 동기에는 14:40분 경
- 하기에는 저녁의 기도인 만과(晩課)직전 두 번째 식사
- 동기에는 식사가 한 번 밖에 없음
- 식사 후 하기에는 낮잠 시간이 있고 오후에는 만과까지 노동
- 노동 시간은 6~8시간인데 농사, 식물재배, 제분, 빵굽기, 취사, 필경, 청 소, 환자간호 등
- 종과(終課) 후 취침
* 수도사들의 생활은 원칙적으로 가도와 금욕생활 그리고 노동의 반복이다.
■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가톨릭 신부와 수녀들이 독신으로 사는 목적은 가정에 얽매이지 않음으로써 신과 이웃을 더욱 절실하게 섬기기 위해서다. 그들이 “나는 여기에만 헌신합니다”라고 종신 서원을 할 때 “여기”란 바로디아코니아, 곧 신과 이웃을 섬기는 일을 말한다. 물론 이 서약은 성서에 근거를 둔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고자 된 자도 있고 천국을 위해 스스로 고자 된 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마태복음 9:12)라는 예수의 가르침이 그것이다.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라는 예수의 표현법이다. 예수는 독신 생활을 명령하거나 강요하지 않고 ‘권유’했다.
그 때문에 초기 기독교 사회에서는 성직자들의 결혼을 금하지 않았고, 중세 교회도 독신으로 지낼 능력이 없는 성직자에게는 교회법으로 결혼을 허용했다. 그런데 교회가 성장하고 교권이 강화됨에 따라 성직주의가 낳는 부작용이 적지 않았다. 가장 큰 고민거리는 성직자들의 성적 문란, 축첩, 교회세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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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독신제도가 가톨릭교회에 도입되었다. 독신제도는 107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교회개혁을 위한 조치로 27개조의 ‘교황칙서’를 내림으로써 처음 출현했고, 1123년 교황 칼리스투스 2세가 개최한 제1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교회법으로 선포되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신부와 수도자들이 독신으로 사는 근거이며 그 근본취지는 교회재산을 사적으로 유용하고 교회재정을 약화하는 원인을 제거하는 데 있었다. 이 제도를 실행함으로써 성직매매의 원인을 제공해온 교회세습은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성직자들 사이에 이미 만연한 성적 문란과 축첩문제는 독신제도가 공포된 후에도 공공연히 이루어져 교회의 고민거리로 남았다.
■ 받을 만하지 못한 자는?
근래 미국과 서구 여러 나라에서 가톨릭교회가 고수하는 독신주의를 두고 논란이 뜨겁다. 독신주의가 낳는 부작용이 도를 넘어선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쉴 사이 없이 폭로되는 성직자들의 성적문란이 이러한 논의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20년 동안 수도사로 살며 성직자들의 성적 습관을 연구해온 리처드 사이프는 ‘비밀의 세계 : 성욕과 독신추구’에서 사제들 가운데 대략 20%가 여성과 성관계를 가진 경험이 있고, 8~10%는 내연의 관계, 20%정도는 동성애 지향적인데 그 중 4%가 어린아이와 관계하고 있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밝혔다. 예수회 출신 조셉 피처 신부는 독일 사제들의 30% 이상이 여성과 성관계를 갖는다고 밝혔다.
이 같은 사실을 당연히 가톨릭교회 전반에 나쁜 영향을 끼쳤다. 독일의 시사지 ‘슈테른’에 실린 여론조사에 따르면 독일 가톨릭 신자들의 20%가 성추행 스캔들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문제를 고려중이며 독일인들 중 단지 17%만이 교회를 권위 있는 기관으로 신뢰한다고 답했다. 가톨릭 사제의 수도 급감하고 있다. 독일의 데페아(DPA) 통신은 “세계적으로 10만~15만 명이 결혼을 하고자 성직을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보자. 독신생활이 예수와 사도들의 권고이지 명령이 아니라면,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부작용이 그토록 심하다면, 가톨릭 교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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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에 대해 조금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참고로 동방정교에서는 사제들의 결혼을 허락하되 결혼한 사제들 가운데서는 고위 성직자를 선출하지 않는다. 또한 독신제도의 근본취지가 중세 교회의 재산보호에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교회세습이 사라져 재산이 체계적으로 관리되는 오늘날에도 과연 이 제도가 필요할까?
무엇보다 사제의 본분이 신과 이웃을 섬기는 일이라면, 성추문이 가톨릭교회를 위협하는 오늘날 독신주의가 과연 이 본분을 지키는데 합당한 제도인지 재고해봐야 하지 않을까? 관건은 사제가 독신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들이 신과 이웃을 예수가 가르친 대로 잘 섬기고 있느냐 아니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21. 천주교의 어떤 단체는 기업주를 착취자로,
근로자를 착취당하는 자로 단정,
기업의 분열과 파괴를 조장하는데,
자본주의 체제와 미덕을 부인하는 것인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1974년 9월 26일 명동성당에서 결성
- 유신헌법 철폐 등을 주장하는 제1 시국선언을 시작으로, 1975년 김지하 시인 양심선언, 1980 광주 항쟁 진상발표, 1981 부산 미 문화원 사건, 1987 박종철 군 고문사건 등과 최근의 제주도 해군기지 반대 까지 많은 영역에서 활동
고 이병철 회장은 이번 질문에서 ‘천주교의 어떤 단체’라고만 언급 했을 뿐 ‘사제단’을 콕 집어 지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러 정황을 살펴보면 그가 지목한 단체는 이 사제단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사제단이 가톨릭교회의 공식 입장을 대변한다고 볼 수 없는데다 가톨릭 역시 기독교 교파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회장의 질문을 “기독교는 자본주의 체제의 미덕을 부인하는가?”로 바꾸어 좀 더 보편적인 차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 뉴욕시의 빵 공급은 누가 책임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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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라는 용어는 19세기 중엽에야 칼 마르크스를 비롯한 사회주의 경제학자들이 처음 만들어 썼다. 자본주의의 정의 안에는 몇 가지 공통 특징이 존재한다. 사유재산제도 인정, 경제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경쟁주의, 이윤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영리주의, 모든 재화가 상품으로 생산되어 시장에서 교환되는 시장경제, 노동력의 상품화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모든 자본주의 체제 안에는 이 같은 특성이 낳는 장단점이 내재되게 마련이다.
1959년 흐루시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미국을 방문해 맨해튼의 한 슈퍼마켓에 들렀을 때 일이다. 그는 모스크바 상점의 텅 빈 매대와는 달리 온갖 신선한 음식으로 가득찬 진열장들을 보고 당시 부통령이던 리처드 닉슨에게 물었다. “뉴욕시의 빵 공급을 누가 책임지고 있습니까? 그 관리의 천재를 한 번 만나보고 싶군요!” 닉슨이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 대답은 질문보다 정확히 183년 전에 애덤 스미스가 이미 해놓았다. “우리가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주인, 술집 주인, 빵집 주인의 박애정신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사리사욕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바로 이것이 일찍이 버나드 맨더빌(B. Mendeville 1670~1733)이 ‘꿀벌의 우화’에서 “사적인 악덕이 공공의 이익”이라는 표현을 통해 예언했던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정체다. 즉 꿀벌들이 그렇듯 개체들은 오직 자신의 본능적 탐욕을 위해 일하지만 그것이 사회 전체의 이익을 가져온다는 원리다. “사적인 악덕이 공공의 이익”을 창출해 내는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이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 낸다. 이 회장이 생각한 ‘자본주의 체제의 미덕’이 바로 이것이었을 텐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게 있다. 세상에는 대가 없는 점심이란 없는 법이다. 자본주의의 치명적 약점도 바로 여기서 나왔다.
■ 지금 즐겨라, 대가는 나중에!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가 가진 단점으로 우선 ‘분배의 불평등에서 기인한 빈부의 격차’를 든다. 이 회장이 지적한 “기업주를 착취자로, 근로자를 착취당하는 자로 단정” 하는 일이 여기서 발생한다. 또 ‘자유경쟁을 바탕으로 한 무계획적 생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공황이나 실업’도 예로 든다. 그렇지만 도덕적 또는 종교적 입장에서 보면 자본주의 체제의 치명적 약점은 이윤획득을 목적으로 한 자유경쟁에서 발생하는 비윤리성에 있다. 영리주의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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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쟁의 바탕에는 맨더빌이 “사적인 악덕”이라 표현하고 스미스가 “사리사욕”이라 이름 붙인 인간의 탐욕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자본주의’라고도 불리는 초기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조건 확립이 우선적으로 국가는 에너지 관련 중공업을 육성하고 도로, 철도, 항만과 각종 통신시설과 교육 등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하부구조를 확립해야 했으며, 산업노동에 필요한 규범으로서 성실, 근면, 절제, 시간엄수 같은 윤리를 요구했다. 이 모든 것이 ‘소명의식’과 ‘금욕주의’로 무장된 프로타스텐티즘 윤리에 의해 고무되고 진척되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20세기 후반부터는 소비가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시키는 유일한 길이 되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요컨대 후기 자본주의는 과잉 생산된 상품을 소비를 통해 해소함으로써 생존하는 자본주의 체제다. 이때부터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소비자로서의 위치를 부여하고 삶의 질을 높인다는 명분 아래 노동시간을 줄이고 여가시간을 늘리는 정책을 시행하며, 신용카드를 발급함으로써 충동적 소비가 가능한 새로운 소비방식을 열어 놓았다. 어느 나라에서든 후기자본주의와 신용카드 제도는 거의 같은 시기에 시작되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곧 ‘지금 즐겨라, 대가는 나중에!’, ‘내일의 쾌락을 오늘!’ 이것이 신용카드에 새겨진 욕망의 철학이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클릭 한 번으로 1억 원 대출!’ 이 카드사와 금융업계의 구호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1929~2007)가 명명한 이른바 ‘소비의 사회’가 열렸는데, 신용 카드를 발급하고 유행과 광고로 탐욕을 부추기는 소비의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의 소비를 감당할 수 없다. 따라서 차츰 모두가 ‘빚을 진 인간’, 곧 이탈리아 출신 사회학자 마우리치오 라자라토가 통렬하게 고발한 ‘부채인간’으로 전락했다.
정리하자. 세상이 온통 거대한 슈퍼마켓이 되어버린 소비사회에서 사람들은 - 자의든 타의든, 의식하든 못하든 - 소비를 부추기는 왜곡된 쾌락원칙에 사로잡혀 열광적이고 만족스러운 상품 소비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오직 그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일하는 노동자로 전락했다. 현대인은 자신의 삶이 가진 의미와 가치를 망각한 채 후기자본주의와 금융자본주의 존속을 위한 존재로 살아간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자체생존을 위해 인간을 ‘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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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의 노예’로, 사회를 ‘생산과 소비의 지옥’으로, 자연을 그에 의해 ‘강탈당하는 피해자’로 몰아가는 메카니즘으로 작동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는 기독교와 충돌한다.
■ 악성변비와 발기불능
신약성서에는 ‘탐욕’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 우리말 성경에 ‘탐심’으로 번역되어 있는 그리스어 플레오넥시아(pleonexia)는 그 뜻이 본래 재물이나 권력 등을 ‘보다 많이 원함’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플레오넥시아를 ‘소유에 대한 저주스런 사랑’으로 이해했고, ‘남의 것을 갖고 싶어하는 해로운 욕망’이라는 뜻으로 썼다.
플레오넥시아는 신약성서에서도 ‘소유에 대한 저주스런 사랑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예컨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누가복음 12:15)라는 예수의 교훈에 복음서 기자 누가는 이 단어를 씀으로써 예수의 뜻을 더욱 분명히 했다. 예수는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말하는 탐욕스러운 부자에게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누가복음 12:20)라고 경고했다. 사도 바울은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로새서 3:5)라고 가르쳤는데, 우상숭배는 신구약성서를 통해 모든 악의 어머니로 여겨진다.
정신분석학의 시조 지그문트 프로이트(S. Freud 1856~1939)는 탐욕을 일종의 병적 증세로 규정하면서 몇 가지 근거를 제시했다. 그중 흥미로운 게 ‘탐욕과 변비의 상관관계’다. 요컨대 소유욕이 강한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똥마저 아끼려 하기 때문에 박성변비에 시달리는데, 그 같은 변비는 소유욕을 버려야만 고쳐진다는 말이다.
독일 태생 정신의학자 에리히 프롬(E. Fromm 1900~1980) 도 ‘존재의 기술’에서 프로이트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소유에 대한 탐욕이란 똥뿐 아니라 죽음과 연결된 열정적 욕망으로 정신병적 증후군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성격이 소유지향적인 사람들은 물건뿐 아니라 힘이나 감정, 생각, 시간 등 소유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지니고 아끼려는 열정에 사로잡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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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심지어 성생활에서도 정액을 아끼기 위해 그 횟수를 조절하는데 남자들 상당수의 발기불능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탐욕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과 현대 정신분석학의 귀결이 잘 맞아떨어진다. 즉 탐욕은 도덕적, 종교적 죄악일 뿐 아니라 정신병리학적 증상이다. 탐욕이 곧 우상숭배(골로새서 3:5)라고 가르친 바울이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에베소서 5:5)라고 탐욕을 심판과 연관 지어 경계한 까닭이 이것이다.
자 여기서 이 회장의 질문에 답하자. 기독교는 물질생활이 풍요를 가져오는 자본주의 체제의 미덕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는 탐욕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체제의 악덕에 저항한다.
22.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2012년 12월 21일(현지시각)은 마야인이 만든 달력의 주기가 끝나는 날이었다. 이 날이 되면 ‘시간’은 없어지고 ‘인류’도 사라지며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간다는 속설이 있어, 실제로 그날 지구촌 곳곳이 ‘지구종말설’로 홍역을 치렀다. 종말 대피처로 알려진
- 프랑스 남부 피레네의 작은 마을 ‘뷔가라슈’ : 마을 뒷산에 있는 UFO 착륙기지에서 종말을 피할 수 있다는 소문에 마을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종말론자와 기자들이 모임
- 브라질 중부 산악지대인 ‘알타 파라이소’
- 세르비아 루탄주 산, 터키의 시린제 마을
- 아르헨티나 우리토르코 산에서는 집단자살 소동
반면 멕시코의 치첸이트사와 메리다 등 마야문명 유적지에서는 각종 기념행사를 열어 관광객을 맞이했다. 마야력이 끝나는 것은 지구의 종말이 아니라 마야인들의 거대한 시간주기가 끝난 것이며 또 다른 새로운 시간주기가 온다고 해석하며 축제 분위기에 들뜬 것이다. 마야 유적지인 과테말라 티칼 국립공원에서, 또 영국 스톤헨지에서도 많은 관광객이 같은 의미로 모여 이른바 ‘지구 종말 파티’를 즐겼다.
마야인의 후손인 산토스 에스테반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많은 사람이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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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가 멸망한다고 말하지만 끝나는 것은 한 시대일 뿐이다.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예상대로 12월 21일에 지구의 종말을 오지 않았다.
지구 종말론을 종합하면 지구 자체가 파괴되어 없어지는 ‘우주적 종말’과 지구의 생태계가 파괴되어 모든 생물이 멸종하는 ‘생태적 종말’로 구분된다.
어떤 경우든 파괴적이고 종국적이며 절망적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말은 다르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그 어떤 경우든 파국과 종국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과 연관되어 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기독교의 종말론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한 말씀(logos)인 예수의 성육신(incarnatio)과 부활(anastasis), 그리고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요한계시록 22:20)라는 말이 뜻하는 재림(parousia)에 의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신학자들마다 주장하는 내용과 강조점이 다르긴 하지만, 종말과 구원은 예수의 성육신과 함께 이미 시작되었고, 부활에 의해 확인 되었으며, 예수가 다시 오는 재림을 통해 완성된다는 것이 기독교 종말론의 핵심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말은 구원의 시작이자 확인이며 완성이다. 그래서 되레 희망적이라는 것이다.
■ 우주의 종말은 언제 오나
구원은 인간구원과 세계구원을 모두 포함하므로 종말 역시 인간의 종말과 세계의 종말 모두를 포함한다. 그렇지만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중요한 신학자들은 주로 인간(개인, 인류)의 종말에 관심을 집중해 왔다. 이는 구원에 대한 관심이 인간구원에 집중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 결과 종말론은 전통적으로 죽음, 심판, 부활, 영생, 천국. 연옥, 지옥, 천년왕국 같은 개념 위주로 전개되었고, 우주적 종말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그렇지만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라는 이 회장의 질문에 답하려는 우리의 입장에서 우선적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당연히 지구의 종말을 포함한 우주적 종말이다. 그래서 이제부터 기독교 종말론의 주류인 인간의 종말이 아닌 우주의 종말에 집중해보려 한다.
과연 우주의 종말은 오는 것일까? 먼저 자연과학자들의 생각부터 들어보자. 오늘날 천체물리학자들은 우주의 종말을 나타내는 말로 ‘대동결’이나 ‘대붕괴’라는 용어를 쓴다. 그런데 이런 우주의 종말은 거의 무한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다음에 일어날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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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우주론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대붕괴가 약 200억 년을 주기로 무한히 반복되리라고 예측하기도 한다.
이 같은 우주종말론은 천문학자가 아닌 우리들에게는 관심의 대당이 아닐뿐더러 우주의 종말이 온다 해도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이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간으로서는 그것에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 그래서 좀 더 관심이 가는 것은 생태적 종말이다.
■ 생태적 종말은 언제 오나
우주적 종말과는 달리 지구 생태계가 파괴되어 인류가 파멸을 맞는 ‘생태적 종말’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가 조바심을 내며 경고하고 있다. 특히 자연의 구조와 기능을 유기적으로 연구하는 생태학자들은 세계의 모든 사람이 지금의 선진국 수준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하려면 그에 걸맞게 요구되는 소비를 감당해야 하고 그러려면 지구가 적어도 대여섯 개는 더 있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고 주장한다. 지금 선진국들이 누리는 물질적 풍요라는 게 결국 지구가 수억 년에 걸쳐 저장해온 화석연료(석탄, 석유, 천연가스)를 불과 100년 남짓한 기간에 집약적으로 뽑아내 이룩한 것이기 때문이다.
- 1850년 지구 인구는 11.7억 명, 1950년에는 24.9억 명, 100년 만에 2배
- 1994년 56.7억 명으로 50년 안되어 2.3배, 2012년 70억 명을 넘어서고 2030년에는 1950년의 4배 예상
- 해마다 3000~3만 종으로 추산되는 생물이 멸종, 100년 이내에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 가운데 절반이 사라질 것으로 예상
- 식량 : 세계인구의 2배 쯤 되는 사람이 먹고 남을 만한 식량이 생산되지 만 세계인구의 3분의 1가량이 식량부족에 시달리고 매일 10만 명가량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
- 생화학무기, 대량살상무기, 핵 위험 증가
- 극지방의 얼음이 녹고, 폭설과 한파, 가뭄과 폭염, 폭풍우와 해일의 증가
생태학자들이 종말의 시기에 대해 설명할 때 자주 사용하는 비유가 있다. 대강 이런 내용이다. 광활한 호수 한편에 조그만 수생식물이 하나 자라나 매일 2배로 늘어난다고 하자. 첫날에는 하나, 다음날에 둘……이런 식으로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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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난다. 그래봐야 호수가 너무 넓어 한동안은 어디 있는지도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날 사람들 눈에 띌 정도가 되어 예컨대 그것이 호수의 1/4을 차지하면 다음 날은 절반, 그 다음 날은 호수 전체가 이 식물로 덮일 것이다.
생태적 종말이 이런 식으로 닥쳐올 것이라는 경고다. 위기가 사람들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때는 이미 늦었다는 뜻이다.
그렇다. 하지만 종말은 언제 오느냐고 ane는 이 회장의 질문에 대해서는 생태학자들도 정확히 언제라고 대답하지 못한다. 단지 이대로 간다면 머지않아 ‘그날’이 올 것이라 경고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태적 종말론은 우주적 종말론처럼 우리에게 무의미하지 않다. 시기적으로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우리가 그것에 개입해 상황을 바꿀 여지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태적 종말을 앞당길 수도 있고 영구히 뒤로 미룰 수도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종말론이란 인간의 개입 가능성 여부에 따라 무의미하기도 하고 중요한 의미를 갖기도 한다는 점이다.
■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신구약성서와 기독교 신학은 우주의 종말이 분명히 온다고 말한다. 구약성서에서 제2이사야는 여호와를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이사야 48:12)라고 선포함으로써 세계에 종말이 있음을 알렸다. 신약성서에는 사도 베드로가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베드로후서 3:12~13)라고 기록했다. ‘요한계시록에는 더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정리하자. 성서와 기독교 신학에 나타난 우주의 종말은 개인의 종말이 그렇듯 분명히 다가올 사건이다. 하지만 파국이나 종국으로서가 아니라 우주의 완성. 곧, ‘새 하늘과 새 땅’으로서 온다. 그렇다면 그것은 언제 오는가? 이 회장의 질문과 연관해 우리가 정작 물어야 할 점은 바로 이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예수가 직접 자세히 대답해 놓았다.
제자 하나가 예수에게 종말이 언제 어떻게 오는지 물었다(마태복음 24:3). 그러자 예수는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에까지 번쩍임과 같이 인자의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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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도 그러하리라”(마태복음 24:27) 하면서 그때에는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이 흔들리리라”(마태복음 24:29)라고 종말이 어떻게 올지를 먼저 대답했다. 그렇지만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태복음 24:36)라며 종말이 언제 올지는 밝히지 않았다.
우리로서는 다소 아쉽다. 하지만 예수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바로 이어서 종말에 관한 매우 의미 있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교훈을 덧붙였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마태복음 24:42)가 그것이다. 이 가르침은 종말의 시기를 아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철학에는 죽음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두고 두 가지 대립되는 주장이 있다. 그 하나는 “가장 무서워해야 할 악, 곧 죽음은 우리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고, 죽음이 찾아왔을 때는 우리도 더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고대의 쾌락주의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금언이 대변하고,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샤르트르가 지지했던 태도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적극 권장했던 태도다.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죽음을 향해 미리 달려감은 비본래적 존재에서처럼 죽음의 넘어설 수 없음을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향해 미리 달려가면서 그것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질 때에만이 우연히 들이닥치는 여러 가능성 속에서 자기를 상실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다.”
내 생각에는 우주적 종말이든 생태적 종말이든 간에 지구의 종말에 대한 우리의 태도 역시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언제 올지 모르는 지구의 종말을 우리의 삶 밖으로 밀어내 아예 망각하고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삶 속으로 끌어들여 매순간 기억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라고 교훈한 예수의 ‘종말론적 태도’는 그중 후자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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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정통 신학에 의하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상징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노력으로 도래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신의 은총과 섭리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그러나 예수의 구원사역이 지닌 본질이 인간과 세계의 변혁이라 할 때, 종말론의 진정한 의미 역시 인간과 세계의 변혁 아닐까? 그렇다면 예수가 종말의 날을 교훈하며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하고 당부한 것은 바로 이 같은 변혁에 동참하라는 요구가 아닐까?
■ 나오는 말
우리가 우주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우리가 신을 안다는 것은 복된 일이다. 그러니 우리의 삶은 마땅히 기쁘고 복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그런 것 같지 않다. 이유야 어디 한둘일까 마는, 내 생각엔 우리가 더는 별을 바라보지 않는 것처럼 신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 근본원인이다. 고대인들은 별을 보고 갈 길을 찾았다. 중세 사람들은 신을 보고 살길을 찾았다.
신이란 무엇이든가?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가 설파했듯이 신은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정점(頂點)이다. 그런데 언제부턴지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신이 죽고 진리가 사라졌다. ‘가치’가 소멸하고 세계는 공허해졌다. 무신론과 허무주의가 횡행하고 삶의 이정표들이 사라졌다. 그래서 우리는 갈 길을 잃었다. 바야흐로 ‘가치상실의 시대’다. 루이스 캐럴(L. Carrol 1832~1898)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는 우리의 딱한 처지를 대변할 만한 흥미로운 대화가 실려 있다.
앨리스 “부탁인데, 내가 어떤 길로 가야할지 가르쳐 줘!”
고양이 “그것은 네가 어디에 가고 싶은지에 달렸지.”
앨리스 “난 어디에 가도 좋아.”
고양이 “그러면, 넌 어떤 길로 가도 좋아.”
그렇다. 이제 우리는 어떤 길로 가도 좋다. 하지만 어디로? 나는 당신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 책 안에서 이미 찾았기를 바란다. 오늘 밤에는 별을 보아야겠다.
2013. 10. 27.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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