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또 다른 도전 (2)

보해성산 2014. 2. 24.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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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도전 (2)

- 이건희 개혁 20년 -

■ 조일훈 지음

제2부 월드베스트를 향하여

3. TV, 추격자에서 선도자로

■ 한 몸으로 움직여라

이 회장에게 TV는 늘 부담이었다. TV는 삼성전자의 모태사업이자 상징이었지만 일본을 넘어서기가 어려운 분야였다.

1990년대 초, 미국 양판점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아무렇게나 뒹굴던 TV의 모습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세계 톱클래스는 아니었다. 가전회사에서 TV가 차지하는 비중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세탁기나 냉장고를 구입할 때도 무의식적으로 TV 1위 회사 제품을 구입한다. 일본의 소니, 마쓰시타가 가전시장을 제패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이 TV 시장의 선두주자였기 때문이다.

이건희 회장에게 ‘TV 1등’은 자신의 질 경영을 마무리하는 마침표이자 사업보국을 실천하겠다며 삼성전자를 설립했던 창업주 이병철 선대회장의 유지를 달성하는 상징이기도 했다.

윤종용 부회장과 사장단은 하얏트호텔 간담회에서 “삼성 TV는 왜 1등을 못하는 겁니까?” 라는 이 회장의 질책을 듣고 ‘TV 일류화프로젝트 팀’을 만들고 윤 부회장이 팀장을 맡도록 의논했다. 삼성전자 대표이사가 TF 팀장을 맡은 것은 삼성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다.

‘TV 일류화프로젝트 팀’은 즉각 삼성 TV의 현주소 파악에 들어갔다. 일본 경쟁사들과의 ‘비교우위’와 ‘비교 열위’의 요인이 무엇인지 조사했다.

약 6개월에 걸친 검토 끝에 ‘5대 전략 과제’가 도출 되었다. 화질과 감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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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경쟁력을 높이고 개발역량을 확충하는 한편, 세트 패널간 유기적 협력체제를 강화해 나가기로 했다. 여기에 마케팅제고를 위한 투자를 확대하고 시장을 밀착관리하기로 했다.

‘TV 일류화프로젝트 팀’은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2006년 3월, 승지원에서 이건희 회장에게 중간보고를 했다. 이 회장은 이 자리에서 “TV 일류화를 위해서는 전자 관계사 사장들이 매월 모여 한 몸처럼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다. 세트와 패널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나아가 선행기술 개발을 위해 전자와 관계사들이 한 몸이 되지 않으면 TV 일류화는 요원하다는 지적이었다.

주요 의사결정 및 현안 조정을 위한 목적으로 ‘8인 위원회’를 신설했다.

조직 개편도 단행 되었다. 반도체 부문의 시스템LSI 인력 200여 명이 TV사업부로 일원화 되었다. 당시 TV시장의 주도권은 브라운관에서 LCD로 넘어온 상태였다. TV 부문으로 자리를 옮긴 반도체 핵심연구원들은 디지털TV의 핵심 칩을 개발하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상황에서 볼 때는 무척 파격적인 인사였다. 반도체 연구원 한 명만 다른 곳으로 옮겨도 당시 반도체부문 이윤우 사장의 별도 결재를 받아야 할 만큼 반도체에 집중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 브라운관 TV를 포기하다

일류화 TF 결성은 삼성 TV가 글로벌 톱을 차지하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온 것들을 종합하는 전략 속에 가동되었다. 이 회장은 산업 패러다임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시기가 경쟁사들을 따라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보았다. 이 회장은 2007년 7월 괌에 TV 사업담당 중역들을 모아 놓고 독려했다. “아날로그 방식에서는 우리가 출발이 늦어서 졌다. 하지만 이제는 디지털 시대다. 출발선이 같기 때문에 우리도 충분히 1등을 할 수 있다.” 큰 방향을 제시한 후에 개혁과 혁신을 위한 구체적 지시가 따르는 것은 신경영 선언 이후부터 고수한 그의 전매특허였다.

또 하나의 승부수, 그것은 브라운관 TV 사업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윤부근 삼성전자 사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우리는 LCD와 PDP TV도 팔고 있었지만, 돈은 브라운관TV에서 벌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업을 중단하라고 하니 난감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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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점유율도 문제였습니다. 갑자기 단종을 시키면 신흥 시장의 점유율이 곤두박질칠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 공백을 이제 막 태동하는 LCD-PDP 시장에서 메워야 한다는 부담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회장님의 판단이 옳았습니다. 신경영 취지대로 양적 사고에서 벗어나 브라운관 TV를 과감하게 버린 것이 세계 1위 등극을 앞당긴 것입니다.”

■ 37년 만의 세계1위 달성

시장조사기관인 ‘디스플레이서치’는 2007년 초, 2006년 글로벌 시장에서 삼성 LCD TV가 13.5%의 시장 점유율로 세계 1위를 차지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삼성전자가 1969년 흑백 TV를 생산하기 시작한 지 37년 만에 이룬 쾌거였다.

비슷한 시기, 미국 시장조사 전문업체 NPD그룹은 2006년 삼성이 TV 전체, 평판 TV, LCD TV 등 3개 부문에서 시장 점유율 1위를 달성했다고 발표했다. 쟁쟁한 경쟁자들이 버티고 있는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 업계 최초로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한 것이다. 1978년 미국에 수출을 시작한지 29년 만에 달성한 쾌거였다.

■ 진자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삼성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전 세계 경제가 얼어붙었던 2009년 초, 초고가의 LED TV를 앞세워 또 다시 시장을 흔들었다. 이 제품의 판매 가격은 당시 LCD TV 보다 동일급 기준으로 800달러나 비쌌다. LED TV는 경기 불황을 정면 돌파하기 위한 삼성의 승부수였고 위기 속에서 오히려 경쟁사를 따돌릴 기회였다. 삼성의 이같은 판단은 적중했다. 당시 고만고만한 품질의 LCD, PDP TV에 진력을 내던 프리미엄 고객들은 기존 제품을 압도하는 LED TV위 월등한 화질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냈다. LED TV는 형광등을 광원으로 쓴 LCD TV에 비해 전력 소모가 적고, 화질이 우수하며, 두께가 얇다는 점에서 소비자들을 매혹시켰다. 그해 미국 시장에서 삼성 LED TV는 여태껏 한 번도 달성한 적이 없는 90% 대의 압도적 시장 점유율을 차지했다. 글로벌 판매치인 250여 만 대 중 200만 대 이상이 선진시장인 북미와 유럽에 팔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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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하반기 들어서 소니, 파나소닉, 샤프 등이 뒤늦게 LED 제품을 내놓으며 추격에 나섰지만 이미 삼성이 완벽하게 시장을 장악한 상태였다. 소니 최초의 외국인 사령탑 하워드 스트링거 회장은 2009년 12월 4일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삼성이 TV로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가까운 시일 내 TV 시장의 진자(흔들이)는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했지만 실지 失地 회복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2012년 말 기준 삼성전자의 LCD TV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26%(금액기준)대로 7년 연속 세계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인 Gfk와 NPD에 따르면 2006년 이후 삼성전자는 전체 조사 대상국 67개국 가운데 63개국에서 1위를 차지했다. 업계 최고의 브랜드 파워와 차별화된 제품력을 앞세워 철저한 지역맞춤형 마케팅을 펼친 것이 계속 주효하고 있다는 평이다.

세계적인 경기불황 속에서도 삼성 LED TV와 스마트TV의 연이은 성공은

삼성의 기존 포지션이었던 ‘빠른 추격자’에서 ‘시장 선도자’로 자리매김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동시에 아날로그 시대의 추격자 삼성이 디지털 시

대의 패자 覇者로 올라서는 기업 전사 戰史의 한 단락을 장식하게 되었다.

4. 2차 전지의 진격

삼성은 1990년대 초반부터 2차 전지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노트PC, 휴대폰

같은 고기능 전자제품의 고집적화, 경량화 추세를 실현시킬 수 있는 가볍고

오랜 시간 사용이 가능한 휴대용 전원이 각광 받으리라고 내다본 것이다. 실

제 일본 전자업체들은 50여 년 전부터 2차 전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특히 소니는 1990년대 초부터 상용화 기술을 확보하고 있었다.

삼성은 1990년을 전후로 2차 전지를 수종 사업으로 선정했지만 연구 개발

은 삼성전자, 음극재료는 삼성SDI등으로 분산되어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삼

성SDI가 2차 전지 사업을 총괄하는 것으로 결정 됐지만 기술 부분은 걸음마

단계였다.

1993년 3월 일본 출장길에 올랐던 이건희 회장은 현지에서 2차 전지에 대

한 사업 전망을 점검한 뒤 삼성SDI로 팩스 한 장을 보냈다. “전지는 장래

삼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수종 사업이므로 즉시 추진하라.” 그해 4~5월에

는 “2차 전지는 휴대폰 박형, 경량화의 핵심부품으로 연구개발을 집중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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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특히 폴리머 전지를 적극 개발하고, 세계적 수준의 고성능 전지 개발

을 위해 자원을 최우선으로 투입해야 하며 이를 위해 우수 기술을 보유한

인력을 적극 영입해야 한다.”

2002년 5월 “반도체는 두뇌, 디스플레이는 눈, 배터리는 심장에 해당한다.

배터리 사업은 그만큼 중요하다. 배터리 사업을 업그레이드시킬 대안을 마련

했는가?”

이 회장의 주문은 계속 이어졌다. “배터리는 내가 관장하는 사업이다. 기술

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대기술, 중기술, 소기술 세 가지로 분류하여 각 단

계에서 필요한 핵심 인력을 데려와라. 그러나 경쟁 업체들의 신경을 자극해

서는 안 된다. 사장이 직접 나서라.”

■ ‘질 경영’으로 일궈낸 수종 사업

이 같은 노력으로 삼성SDI는 세계에서 가장 얇은 초박형 초고밀도 리튬이

온 전지를 개발한 데 이어 세계 최고 용량 제품인 2,200mAh 원형 전지의

양산을 시작으로 기술 리더십을 발휘해 나갔다. 오늘날 휴대폰이 가볍고 두

께가 얇은 것은 삼성SDI의 이런 노력 덕분이다.

이건희 회장은 2차 전지 사업에서도 철저하게 ‘질 경영’을 주문했다. 2003

년 경쟁사 제품의 리콜 소식이 날아들었을 때 다시 한 번 강력한 지시를 내

렸다. “전지는 삼성뿐만 아니라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도 반드시 일류화를 해

야 한다. 전지의 기본은 안전성 이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안전이다.”

‘K-812’로 명명된 2차 전지 일류화 프로젝트는 2004년부터 2008년까지 4

년 동안 질적 일류화를 달성하고 시장 점유율 20%를 달성한다는 것이다. 질

적 일류화는 이익률뿐 아니라 ‘safety 넘버 1’을 의미했다. 이런 노력으로 삼

성SDI는 2008년 4억 8천개를 판매해 글로벌 점유율 17%로 2위를 기록했으

며 안전성 평가에서도 최고 등급을 받았다. 그리고 2010년에는 19.8%의 점

유율로 드디어 세계 정상에 올랐다.

그해 삼성SDI는 경쟁사들을 물리치고 최고 일류만 고집하는 BMW사에 2차

전지를 납품함으로써 최고의 위상을 확보했다. 당시 ‘K-812’ 프로젝트에 참

여했던 삼성전자 전인상 전무는 “회장님이 2차 전지를 확실한 수종 사업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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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정의하고 인력 확보나 품질 문제에 큰 관심을 가졌기에 짧은 시간에 선

진기업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역사상 TV나 휴대폰을 만드는 전자회사 중에서 같은 그룹 내에 반도체, 디

스플레이, 2차 전지 등 핵심부품을 완벽한 포트폴리오로 구축한 기업은 삼성

이 유일하다. 소니가 한 때 삼성과 LCD 합작사를 설립한 것이나 애플이 삼

성 반도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경쟁사로부터 부품을 구

매하기가 못내 싫겠지만 그들에게는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5, 마천루 신화와 드릴십 제패

삼성 내에서 삼성전자 매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70% 정도이다. 영업이익 기

준으로는 80%에 육박할 때도 있다. 그만큼 절대적 위상을 갖고 있다. 이 회

장의 공식 직함도 ‘삼선전자 회장’이다. 하지만 삼성에는 전자 외에 또 다른

분야에서도 ‘국가대표급’ 기업들이 있다. 세계 최고층 빌딩인 두바이의 ‘부르

즈 할리파’를 만든 삼성물산과 고부가가치 선박인 ‘드릴십 drill ship’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삼성중공업이다.

■ 세상에 삼성을 우뚝 세우다

2004년 12월, 중동 두바이에서 깜짝 놀랄 만한 뉴스가 날아들었다. 두바이

정부가 국가 랜드마크로 건립키로 한 ‘버즈 두바이(이후 부르즈 할리파)’ 시

공을 삼성물산에 맡기기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높고(162층

828m), 가장 큰(연면적 50만 제곱미터) 빌딩을 우리 손으로 만든다는 소식

에 삼성인들은 물론 많은 국민들도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흥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서서히 우려의 목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당시 세계 최고층 빌딩인 대만 ‘타이베이 101(508m)’ 보다 무려

320m나 높게 지어야 하는 만큼 잘못하면 ‘대한민국의 자랑’이 아니라 ‘세계

적인 망신거리’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왔던 것이다.

그럴 만도 했다, 828m의 높이가 짓누르는 엄청난 하중과 상층부로 갈수록

거세지는 ‘칼바람’을 이겨내는 것에서부터 1층에서 꼭대기까지 한 치의 오차

도 없이 똑바르게 세우는 것에 이르기까지 난제가 너무 많았다. 이 중에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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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도 꼬이면 ‘지상 최대의 건설 프로젝트’가 망가지는 건 물론 삼성, 더 나

아가 ‘건설 한국’의 명성에도 먹칠을 할 게 뻔했다.

하지만 당시 삼성물산은 자신만만했다. 전인미답의 길을 성공적으로 개척해

나간 삼성의 DNA를 믿었기 때문이다. 삼성물산은 1990년대 최고층 빌딩이

었던 말레이시아 페트로나스 트윈타워(88층 452m)와 2003년 문을 연 당시

최고층 빌딩인 타이베이 101을 건립 하는 등 초고층 빌딩 역사를 새로 써내

려 간 주역이었다. 세계 최초로 3차원의 자정식 현수교인 영종대교를 만든

곳도, 영국 건설주간지 ‘컨스트럭션 뉴스’가 선정한 ‘경이로운 세계 10대 건

설 프로젝트’로 인천대교를 건립한 업체도 삼성물산이었다.

◉ 무명의 삼성물산이 성장한 과정

- 1990년대 초 까지 최고 실적이 삼성동 32층 글라스타워 건설

- “초고층 빌딩은 도시의 경쟁력이자 삶의 질과 관련된 문제이므로 시장이

커질테니 준비하라”는 이건희 회장의 지시에 따라 초고층 빌딩을 삼성물산

핵심 사업으로 선정하고 기술 확보 및 기술인재 확보에 주력

- 예상은 적중했고 1993년 11월 패트로나스 트윈타워로 포문. 당시 세계

최고층 쌍둥이 빌딩을 일본과 각각 1동씩 건립하기로 계약하고 일본 하지마

건설보다 35일 늦게 시작하고 열흘 먼저 준공

- 외환위기 때의 고강도 구조조정 과정에서도 이 회장은 “초고층 빌딩 노하

우는 하루아침에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렵게 축적한 기술을 왜 버리는

가? 패트로나스 트윈타워 건립 경험을 쌓은 기술 인력을 잘 관리하고 기술

노하우도 체계적으로 축적해야 한다. S급 인재가 필요하다면 더 채용하라”고

지시했다.

필리핀 초고층 빌딩 피비콤타워(55층)와 태국 로열차랑쿰타워(63층), 말레이

시아 암팡타워(50층) 등이 삼성물산의 건설 실적 목록에 올랐다. 미국과 일

본 등지의 톱클래스 인력들도 차례차례 합류하여 초고층 빌딩 관련 전문인

력은 120여명으로 불어났다.

그렇게 5~6년이 흐른 2004년 7월, 부르즈 할리파 입찰에 참여할 즈음 삼

성물산은 이미 세계적인 초고층 빌딩 건설업체로 변신한 상태였다. 공사를

발주한 이마르사의 메트루시 사장은 입찰금액을 더 낮게 써낸 업체가 있었

는데도 삼성물산을 최종 낙점했다. 그는 “비용보다는 삼성의 초고층 빌딩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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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경험을 높이 샀다. 삼성이 없으면 부르즈 할리파도 있을 수 없다”고 말했

다.

2010년 1월, 부르즈 할리파는 온갖 진기록을 지닌 채 웅장한 외부와 화려

한 내부를 세상에 공개했다. 삼성물산은 부르즈 할리파 건설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면서 세계 톱3 초고층건물(부르즈 할리파, 타이베이 101, 페트로나스

트윈타워) 건립에 모두 참여한 건설회사라는 타이틀을 획득했다. 유압으로

거푸집 형틀을 밀어 올리는 기술, 58미터 높이까지 콘크리트를 압송하는 기

술 고강도 콘크리트를 만드는 기술 등을 새롭게 선보이며 글로벌 마천루 시

장의 최강자임을 입증했다.

■ 5년의 기다림, 그 결실을 맺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삼성중공업을 주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밖

으로는 일본 등 해외 조선업체에 치이고 국내에서는 현대 중공업과 대우조

선해양에 밀리는 기업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삼성중공업을 두고 이 회장은

“영양실조에 걸렸다”고 질책하기도 했다. 무언가 돌파구가 절실히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이 회장은 “실패해도 좋으니 마음껏 도전하라”, “양이 아닌 질

로 승부하라”며 임직원들의 도전정신을 주문하고 나섰다.

일반 상선을 주로 만들던 삼성중공업은 ‘드릴십’(깊은 바다에서 원유와 가

스 시추작업을 수행하는 선박 형태의 시추설비)에 승부수를 띄웠다. 드릴십

이 1척당 6억 달러가 넘는 고부가가치 선박이란 점도 매력 포인트였다.

1990년대 중반 ‘반짝’ 하던 드릴십 주문은 1999년 이후 뚝 끊어졌다. 유가

가 안정되자 비용이 많이 드는 심해 시추 수요가 줄어든 탓이었다. 이때부터

2004년까지 5년간 세계시장에서는 드릴십 발주가 전무했다.

하지만 삼성중공업은 드릴십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일감이 끊어진 5년을

드릴십 설계기술을 자체적으로 확보하는 시간으로 돌려놓았다.

삼성 중공업이 공장 자동화에 열을 올린 것도 이 시기였다. “인건비 부담과

안전문제 등을 고려해 삼성중공업도 공장 자동화를 통해 원가경쟁력을 키워

야 한다“는 이 회장의 지적에 따라 자동화 완성 5개년 계획을 세우고 현장

에 맞는 로봇 개발에 들어갔습니다. 결국 5년 만에 45% 안팎이었던 자동화

율을 세계 최고 수준인 65%로 끌어올렸다. 그만큼 생산성은 높아지고 불량

은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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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이 되자 거짓말처럼 드릴십 주문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선주

들의 발주 형태도 과거처럼 단순히 하부 구조 건조만 맡기는 게 아니라 드

릴 시스템의 설계, 구매, 시운전 등 전 과정을 일괄적으로 넘기는 턴키방식

으로 바뀌었다. 일감이 몰렸지만 자동화율을 높여 놓은 덕분에 주문을 척척

받아낼 수 있었다.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한 결과는 ‘시장 싹쓸이’ 였다. 삼성중공업은 1996년

이후 전 세계에서 발주된 드릴십 138척 중 58척(42%)을 수주하며 독보적

2위 자리를 지켜내고 있다.

삼성중공업은 2012년 전 세계 조선업계를 강타한 불황도 비켜갈 수 있었

다.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의 2012년 영업 이익은 전년대비 ‘반 토막’이

났지만 삼성중공업은 오히려 11.4% 증가했다.

■ 마이싱글 vs 매칼프의 법칙

‘메칼프의 법칙 Metcalfe's Law’이라는 것이 있다. 정보기술 개발과 정보화

투자의 논리가 되는 기본 법칙이다. 미국의 통신 장비업체인 3com 창업자

밥 메칼프가 주창한 이론으로 전화, 팩스, 컴퓨터 등 모든 네트워크의 가치

는 사용자 수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법칙이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10명

과 네트워킹이 되고, B라는 사람이 100명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가정할 때

두 사람 간 네트워킹의 차이는 10배지만 실제 네트워킹의 효과는 10의 제곱

인 100배의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법칙은 오프라인이 아닌 정보의

생산-유통 속도가 빠른 온라인에서 훨씬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메칼프의 법칙은 수학적 증명 여부와 별개로 정보화 네트워킹의 중요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일찌감치 주목을 받았다. 이건희 회장은 인터넷이 보편화

되기 훨씬 이전부터 정보화의 중요성을 수차례 강조했다. 그는 개인용 컴퓨

터가 보편화되기 이전부터 “정보화 시대에는 시간과 공간의 장벽이 사라질

것이다. 조직과 조직, 개인과 개인을 연결시켜 주는 정보 네트워크가 기업

경쟁력을 유지하는 관건이 될 것” 이라고 말했다. 조직 구성원이 아무리 많

아도 정보와 지식이 원활하게 흐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삼성은 전자업을 주력으로 하는 만큼 정보화 시스템 구축에도 한 발 앞서

나갔다. 1995년 8월에 도입한 ‘싱글 Single’은 국내 기업 중 가장 앞선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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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싱글은 인터넷 환경에 최적화 되어 있지 않다

는 문제점이 있었다. 결국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상무가 나서서 새로운 정보

신경망 구축을 제안했다. 점차 확산되고 있는 인터넷 기반의 사무환경에 대

비해 전 임직원이 어제 어디서나 접속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업무효율을 극

대화하고 운영비용을 절감하는 데 개발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과정을 거

쳐 2002년 9월 지금의 ‘마이싱글’이 출범했다.

삼성이 마이싱글을 도입한 이유는 단절과 불통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삼성의 인력은 단기간에 두 배 가까이 팽창했다. 여기에 외부 경력직들이 대

거 충원되면서 조직의 일체감도 예전 같지 않다는 평이다. 더욱이 모바일과

SNS가 기존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혁신적으로 바꿔 놓고 있다.

이처럼 급변하는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삼성은 ‘차세대 마이싱

글’을 준비하고 있다. 향후 10년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끌어 나갈

새로운 네트워킹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다.

6. 엔지니어 이건희

“일본 도레이가 듀폰으로부터 나일론 기술을 도입하면서 준 돈이 얼마인지

아세요? 도레이 자본금의 2배였어요. 그리고 자본금만큼 시설을 투자했습니

다. 나일론 기술 하나에 자본금의 3배를 투자한 겁니다. 여기 이 자리에 있

는 사장들 중 기술료를 자본금만큼 주라고 해도 줄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기술료는 깎는 게 어닙니다. 그 가치만큼 제값을 쳐줘야 합니다. 기

술을 도입할 때는 파는 측에서 요구하는 금액을 다 주는 것이 유리합니다.

100만 달러를 요구하면 100만 달러를 다 줘야 그들의 실패 사례가지 덤으

로 배울 수 있어요. 몇 푼 아끼려고 기술료를 반으로 깎으면, 틀림없이 그들

은 10만 덜러 기술밖에 가르쳐 주지 않을 겁니다.”

이 회장은 1993년 신경영 당시 사장단을 모아 놓고 이렇게 기술경영의 중

요성을 설명했다. 기술 확보에 대한 이 회장의 의지가 애착을 넘어 집착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 경영자부터 기술을 알아야 한다

실제로 삼성은 과거 반도체 사업을 하면서 기술료를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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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엔지니어들 사이에서는 정평이 나 있다. 당시 이 회장은 반도체 핵심

기술자를 영입할 때 삼성전자 사장이 받는 급여의 3배를 주기도 했다.

‘기술경영’은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철학의 중요한 주춧돌이다.

그는 관리 중심에 머물러 있던 삼성의 경영 패러다임을 기술 중심으로 돌

려놓기 시작했다. 1993년 3월에는 삼성 경영의 핵심 요소로 ‘인재’와 ‘기술’

을 새로운 경영이념에 명시했다. 이는 과거 60년간 경영의 근간이었던 ‘인

재’에 새로운 근간인 ‘기술’을 더한 것으로, 인재와 더불어 기술이야말로 삼

성 최고의 자산이고 21세기 기업경쟁력의 원천임을 재확인한 것이다.

이 회장은 누구보다 먼저 경영자가 기술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직접

해당분야의 세계 최고급 제품을 사서 뜯어보고 연구해서 자기 제품을 일류

로 만들어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이 회장의 이 같은 인사원칙을 앞세워 이공

계 출신 중역들을 요직에 대거 발탁하는 한편, 인문계 출신 CEO들에게도 기

술적 소양을 쌓을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이런 노력으로 이제까지 기술은 연구소, 생산 현장에만 해당된다는 인식에

서 벗어나 지원 부문 임직원들이 기술자 못지않게 기술 트랜드를 이해하게

되어 더욱 효과적이고 공격적인 지원이 이루어 졌다.

이 회장은 기술 후진국이 선진국을 따라잡으려면 ‘월반 越班’ 식으로 나가

야 한다고 역설했다. 기술 수준이 취약한 상황에서 단계를 착실히 밟아가는

개발 방식으로는 영원히 기술 후진국의 신세를 면치 못한다는 인식이었다.

선진기업에서 이전을 기피하는 기초 기술을 중심으로 자금과 인력을 집중

투자해 기술의 한계와 발전 단계를 일시에 뛰어넘는 ‘월반’ 식 기술 개발은

메모리 반도체에서 실제 적용되었다.

2005년 1월 5~10년 후 미래를 기술로 준비하고 이를 통해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2010년까지 총 47조원을 투자해

차세대 성장 엔진을 육성한다는 내용이었다.

- 연구 인력 30,000명 채용

- 대학과 협력업체 경쟁력 강화에 5조 2천억 지원으로 기술 개발

- 2010년 까지 월드베스트 제품 50개 확보로 매출액 270조원, 브랜드 가치

700억 달러를 목표로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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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볍씨로 밥을 해먹지 말라

삼성의 기술경영을 총괄하는 조직은 1987년 개원한 삼성종합기술원이다.

10~20년 뒤 삼성의 미래 먹을거리를 찾는 곳이다. ‘관리의 삼성’이라는 조

직문화에서는 기능을 유지하기 어려운 조직이다. 삼성종합기술원이 오늘날

삼성의 ‘기술 메카’로 자리잡은 배경에는 이건희 회장의 강력한 지원이 있었

다.

- 1992년 슈퍼컴퓨터 도입 지시 : 설치비용 85억 원, 전산실 구축 비용 15

억 원의 대규모 투자로 시뮬레이션을 통해 반도체 소자의 전자회로 해석에

서 항공기 구조해석까지 수행

- 삼성종합기술원 원장 초빙 과정

1992 기술원 감사 결과 “미래를 내다보지 않고 생산 기술 같은 것에만 골

몰하고 있다. 한마디로 본업을 망각하고 있다.”는 감사 결과 보고를 받고는

제대로 된 리더를 원장으로 물색하라고 지시. 인사팀은 1993년부터 1996년

까지 3년 동안 몇 명의 후보를 추천했지만 이 회장은 “적임자가 아니다”라

고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어렵게 물색한 인물이 삼성종합기술원장을 맡은 임관이다

-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 공대 교수, 일본 도쿄대 초빙교수,

한국 최고의 공학전문가

임관 전 원장은 인간존중의 철학을 갖고 기술을 중시한 다음 창조를 유도

해야 한다는 이 회장의 철학이 마음에 들어 삼성 입사를 결정했다. 미국 한

인 과학자들 사이에서 걸출한 인물이었던 그는 전문성을 말할 것도 없고 ‘된

사람’ 이라 따르는 과학자가 많았다. 그가 삼성으로 옮기면서 후배와 제자

상당수도 함께 삼성으로 이직했다. 임전 원장은 입사 후 이 회장의 전폭적

인 지원을 바탕으로 삼성종합 기술원을 삼성 기술의 메카로 발전시켰다.

이건희 회장은 CEO들이 회사 형편이 어렵다고 기술투자를 줄이는 것을 제

일 싫어했다. 기술에 대한 투지를 줄이는 것은 당장 오늘이 어렵다고 내일

의 희망마저 포기하는 행동이라고 질책했다.

“아무리 배고프다고 볍씨로 밥을 해먹어서는 안 됩니다. 기술 투자는 미래

를 대비하는 씨앗입니다. 적자가 나면 연구개발비부터 깎으려 드는데, 식량

이 떨어졌다고 내년 농사를 위한 종자까지 먹어 치워서야 되겠습니까?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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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에 들이는 돈은 미래를 위한 보험금이라고 여기고 투자를 아끼지 마

세요.”

- 삼성전자의 연구 개발비 : 1987년 매출의 2.2%, 1993년 4.3%, 2011년

4.9%로 증가, 한해 R&D 투자만 10.5조원으로 국내 중견 그룹의 한 해 매

출과 맞먹는 규모

- 삼성의 연구개발 인력 : 1993년 13,000명에서 2012년 73,000명

■ 제조기술의 원천, 금형

이건희 회장은 미래를 준비하는 ‘첨단 기술’뿐 아니라 생산현장의 ‘제조기

술’에 대해서도 해박했다. 대표적 제조기술이 바로 ‘금형’ 분야이다. 일본 전

자회사들이 세계 시장을 석권할 수 있었던 숨은 이유가 바로 뛰어난 금형

기술이었다. 이 회장은 일본 전자회사들이 2차 대전 패배 후 금형 기술을 배

우기 위해 미국으로 연수를 보낸 사실을 주목하고 관련 보고서를 입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 보고서의 골자는 ‘금형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금형에는

돈을 아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 회장은 이때부터 전자부품의 근간을 이루는 정밀기술, 그중에서도 금형

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그러던 1980년대 중반,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태

국과 싱가포르에 공장을 두고 있던 정밀기술의 선두업체였던 일본M사의

CEO가 이 회장을 만나 삼성과의 합작을 제의해온 것이다. 금형기술을 제공

하는 대신 삼성에 부품을 팔겠다는 제안이었다. 이 회장은 ‘굴러들어온 떡’을

놓치지 않았다. 즉각 부속실에 후속 방안을 모색하라고 지시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어렵사리 기술을 익히긴 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이 회장은 1987년에 회장에 취임한 이후 독자적 금형 기술 확보에 본격적으

로 나섰다. 그 대표 사례가 바로 금형 자동화를 위한 CAD·CAM 도입이다.

그는 삼성전자의 제도판을 철거하고 모든 도면에 CAD를 활용하라고 지시했

다. 이 회장은 CAD 도입 이전의 삼성 금형 설계에 대해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데 90미터까지 갔다가 다시 출발선으로 돌아가고, 95미터 지점에서 다

시 돌아가기를 반복하는 비효율의 극치” 라고 지적했다.

삼성전기는 신경영 당시 O고문을 통해 S사의 전문가를 소개받아 오토

CAD 시스템을 도입했다. S사는 금형 CAD에 필요한 데이터는 물론 관련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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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전수해 주고 자사 제품을 삼성에 판매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

었다.

이 회장이 금형의 중요성을 강조하자 전자를 비롯한 계열사들은 금형 핵심

인력을 찾아 나섰다. 당시 한국 기계연구 책임연구원으로 있던 한정빈 현 삼

성테크윈 고문은 한국정밀기술의 대부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당시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세 번이나 한 고문을 찾아가 어렵사리 스카우트했다. 이

후 구미, 광주, 수원 등지에 금형 관련 최신 장비들이 반입되었다.

7. 디자인이 최후의 승부처

2011년 7월, 세계 3대 디자인 공모전 중의 하나인 미국 ‘IDEA’에서 한국

기업들이 주요 상을 휩쓸면서 ‘디자인 코리아’ 열풍이 거세게 불었다. 특히

삼성전자는 총 7개의 상을 받아 최다 수상 기업이 되었다. 이건희 회장이

1996년 신년사를 통해 ‘디자인 혁명의 해’를 선언한 지 15년 만이었다.

삼성의 디자인 파워는 2012년에 더욱 빛났다. 레드닷(독일), IDEA(미국)과

함께 세계 3대 디자인상으로 꼽히는 독일의 ‘iF디자인 어워즈’에서 애플, 소

니, BMW 등 내로라하는 기업들을 모두 제치고 디자인이 가장 뛰어난 글로

벌 기업으로 이름을 올렸다. 출품 업체들 중 최다인 44개의 상을 거머쥔 것

이다. 최근 3년간 수상실적을 종합한 ‘iF 랭킹’에서도 당당히 1위를 차지했

다. 불과 20여 년 전만해도 선진국 제품 디자인을 따라가기 바빴던 ‘디자인

변방’이 수많은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을 극복하고 이룬 값진 성과였다.

■ 남의 것을 도둑질하지 말라

“회장님이 1988년 6월경 임경춘 당시 삼성전기 사장과 함께 일본 S사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이 회사에서 카세트 생산 실무회의를 하는 모습을 지

켜보던 회장님은 회의를 주재하는 직원이 디자이너라는 사실을 알고 상당히

놀랐다고 합니다. 더욱이 S사 사장 가운데 디자이너와 결혼한 사람들이 세

쌍이나 됐다고 합니다. 최고경영자와 디자이너의 위상이 어떤 관계인지를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대목이었죠.”

반면 당시 삼성 디자이너는 상품 기획부서의 허드렛일을 맡아하던 말단 중

의 말단이었다. 회사는 생산 기술과 마케팅을 위주로 돌아갔고 디자이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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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품 개발과정 마지막에야 겨우 참여해 의견을 개진하는 수중에 그쳤다. 결

국 이 사람 저 사람이 간섭하면서 디자이너가 처음에 머릿속에 그렸던 아이

디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일쑤였다. 이 회장은 1993년 신경영 당시 이

같은 현실을 강하게 질타하고 나섰다.

“왜 소니는 멀리서 봐도 소니고, 파나소닉은 멀리서 봐도 파나소닉인데 삼

성 제품은 아직도 이름을 보고 확인해야 하는가? 그 동안 몇 번이나 이야기

했는데도 여전히 답이 없다. 상품 기획을 하지 않는 것인가? 디자인이 센터

화 되어 있지 않은 건 아닌가? 디자이너를 한낱 ‘쟁이’로 취급하는 것은 아

닌가?

앞으로 펼쳐질 세상에서는 디자인이 가장 중요해진다. 성능과 질 등 이제

생산 기술은 다 비슷해지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제품의 개성을 어떻게 표현

하느냐, 디자인을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이다.”

급기야 1995년 재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터졌다. 삼성의 모 계열사

직원이 경쟁사 제품을 촬영하다가 발각되어 사회 문제로까지 불거진 것이다.

이 회장은 역설적으로 이 사건을 디자인경영을 가속화시키는 촉매제로 활용

했다. 그는 즉각 비서실장을 불러 “남의 것을 베끼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

라. 전무급 이상은 무조건 디자인을 공부시키라”고 지시했다.

이건희 회장은 이듬해인 1996년 ‘디자인 경영의 해’를 선포했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이자, 지적 자산이 기업의 가치를 결정짓는 시대입

니다. 기업도 단순히 제품을 파는 시대를 지나 기업의 철학과 문화를 팔아야

만하는 시대라는 뜻입니다. 디자인과 같은 소프트한 창의력이야말로 기업의

소중한 자산이자 21세기 기업 경영의 최후 승부처가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올해를 그룹 전 제품에 대한 디자인 혁명의 해로 정하고 우리의 철학과 혼

이 깃든 삼성 고유의 디자인 개발에 그룹의 역량을 총집결해 나갑시다.”

삼성은 1997년부터 ‘자랑스런 삼성인 상’에 디자인 부문을 신설한 데 이어

우수 디자이너의 발굴과 육성을 위해 멤버십 프로그램과 디자인 파워 프로

그램 같은 파격적 제도를 도입했다.

■ 소리까지도 디자인하라

이 회장은 이처럼 디자인경영을 주창하면서 ‘삼성의 혼’을 담으라고 주문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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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렇게 해서 나온 원칙이 ‘선 先 디자인 후 後 개발’이었다. 한마디로 디

자인에 제품 개발을 맞추라는 얘기였다. 이러다보니 디자인 인력들의 기는

살았지만 개발 인력들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보르도 TV의 전신인

‘로마TV(오각형 모양의 TV)’의 경우 개발 초기에 엔지니어들의 반발이 적지

않았다. 디자인은 우수하지만 거기에 제품 제작을 맞추기에는 기술적 어려움

이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기는 쪽은 항상 디자인이었다.

디자인 경영의 성과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나타났다. LCD TV 인 R5 모

델은 V자형이 차별화된 디자인으로 일 년 만에 밀리언셀러에 올랐다. 포터

블 DVD 플레이어인 "100은 경쟁사 제품보다 10~15% 높은 가격인데도 불

티나게 팔렸다. 일명 ‘벤츠폰’으로 알려진 휴대폰 E700 모델도 텐 밀리언셀

러 대열에 합류했다.

2005년 4월, 이건희 회장은 삼성전자를 포함한 주요 계열사 사장들을 이탈

리아 밀라노로 불러 모았다. 매년 밀라노에서 개최되는 국제가구박람회는 세

계 디자인 트렌드를 내다볼 수 있는 장이기도 하다. 밀라노에서 열린 디자인

전략회의에서 이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삼성 제품의 디자인 경쟁력은 1.5류다. 제품이 소비자 마음을 사로잡는 시

간은 평균 0.6초다. 이 짧은 순간에 고객을 사로잡지 못하면 경쟁기업과의

전쟁에서 절대 승리할 수 없다. 월드 프리미엄 제품을 만들려면 디자인과 브

랜드 등 소프트 경쟁력을 강화해 기술은 물론 감성의 벽까지 넘어서야 한

다.” ‘제2의 디자인 혁명’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삼성전자는 밀라노 디자인 전략회의 후 디자인 관련 조직을 대폭 보강했다.

디자인 경영센터 내에 ‘선행 디자인 그룹’을 신설했다. 100여명의 조직 구성

원 중 40여 명이 디자인과 전혀 관련 없는 철학, 역사, 화공, 기계공학 전공

자였다. 이 조직을 이끌고 있는 김영준 전무는 “선행 디자인 조직 구성원들

은 10년 뒤의 세상을 그리며 세계 곳곳에서 영감을 얻고 있습니다. 상상력

과 창의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조직 차원의 어떤 간섭도 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

이건희 회장은 직접 디자인 관련 아이디어들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 대표

사례가 사운드 디자이너의 도입이다. “동남아 등 습한 지역에서는 휴대폰 소

리가 다르게 들린다. 유럽도 지역에 따라 선호하는 사운드가 다르다.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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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 디자인에 반영해 보면 어떨까?”라고 한 그의 말이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이 회장은 일류제품 사용자로서 자신의 풍부한 경험을 아이디어로 제

시했다. “얇고 넓게 만들어 보라”는 지시로 탄생한 ‘SCH-X430’ 일명 ‘이건

희 폰’과 2000년 초 독일 출장 중 벤츠 자동차 컬러를 휴대폰에 벤치마킹

해보라는 지시에 의해 출시된 ‘SCH-W450’ 일명 ‘벤츠폰’이 그 좋은 예이다.

이들 제품은 천만 대 이상 팔렸다.

■ 프랭클러의 격찬

삼성전자 서울 서초동 사옥 7층부터 16층에는 디자인경영센터가 자리 잡고

있다. 2009년 서초사옥 입주 때 다른 부서를 제치고 가장 먼저 들어왔다.

디자인 경영이 삼성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건희 회장이 2011년 4월 21일 출근 경영을 시작한 첫날 방문한 곳도 이

곳이었다. 이 회장은 선행 디자인 제품들을 둘러보면서 “옛날하고 많이 바뀌

었구나”라면서 디자인 인력이 모두 몇 명인지 물었다. 이 회장을 수행했던

안용일 상무가 1,100명 수준이라고 대답하자 “3,000명도 부족한 것 아니냐”

고 말했다. 향후 디자인 리더십을 더욱 확고히 할 수 있는 인력 확보 방안을

찾으라는 지시인 동시에, 하드웨어에서 사용자경험UX이나 사용자 환경UI의

디자인 차별성이 부각되는 추세에 맞춰 소프트웨어와의 융·복합 디자인 전략

을 가속화해야 한다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이러한 삼성의 디자인 경영 진화에 대해 프리츠 프랭클러 디자인 어워즈

심사위원장은 “디자인은 사용자들을 대변하는 전략과 개발과정을 조정할 수

있는 내적 역량을 가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삼성이 보유하고 있는 인재와

지식은 모든 소비자들에게 안전과 편리성, 즐거움을 제공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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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사람이 전부다

1. 이건희의 인재철학

2013년 봄, 삼성전자 공동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권오현 부회장, 윤부근,

신종균 사장에게 번갈아가며 물어 보았다. “요즘 이건희 회장을 만나면 주로

어떤 이야기를 합니까?”

그런데 이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좋은 사람 뽑으

라는 말만 합니다.”

이 회장은 ‘사람이 모든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체계를 갖고 있다. 그것은

경영자로서의 관점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세계관이기도 하다. 삼성

전자 인사팀장을 지낸 성인희 삼성정밀화학 사장의 전언이다.

“ 예를 들어 연매출 10조 원짜리 사업을 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할 때 회장

님이 가장 먼저 보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해당 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

들이 있느냐 입니다. 사람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면 결코 사업화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이건희 회장이 1993년 3월 22일 발표한 경영이념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은

인재와 기술이다. 이 회장은 이 두 가지 생산요소를 모두 ‘사람’이라고 보았

다. 기술 역시 사람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실제로 기술을 구상하거나 확보하는 핵심요체는 사람이다.

“결국 새 경영이념을 생각해 보면 ‘사람(인재, 기술)이 최고의 상품(제품,

서비스)을 만들어 인류 사회에 기여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제

품과 서비스가 사람 활동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떠올려보면 경영이념의 마지

막에 남는 것은 사람 그 자체인 것입니다.”

■ 초토화된 ‘관리의 삼성’

이건희 회장의 인재경영을 구성하고 있는 두 가지 축은 인재양성과 열린

채용이다. 그는 ‘기업이 필요로 하는 사람(적재 適材)을 키워 필요한 때(적시

適時)에 필요한 곳(적소 適所)에 쓰는 일이 경영자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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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에 “기업이 인재를 양성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죄악이며 양질의 인재를

활용하지 못하고 내보내는 것은 경영의 큰 손실이다. 부정보다 더 파렴치한

것이 바로 사람을 망치는 것”이라고 강조해 왔다.

“자식이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시키기 힘들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도 우리는 수천 명, 수만 명의 젊고 재기발랄한 사람들을 데려다 놓고

책임감 없이 적당히 가르치고 있다. 그렇게 지도하는 선배 상사 밑에서 자란

사람들이 무얼 할 수 있겠는가. 왜 남의 귀한 자식을 나태하게 만드는가. 그

것은 강도보다 더 나쁜 짓이다.”

이 회장의 이런 생각은 신경영 전년인 1992년 신년사에서 경영자들에게 인

재양성의 책임을 강조한 대목에서도 잘 나타났다. 그는 “경영자 스스로가 알

고知, 실천할 수 있고行, 시킬 줄 알고用, 가르칠 수 있고訓, 평가할 줄 아는

評 종합예술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른바 지-행-용-훈-평의 인사

철학을 제시한 것이다.

◉1992년 신경영 당시 삼성의 인사혁신

- 비서실 인사팀과 재무라인 선발 : 한 번도 인사 경험이 없는 사람, 해외

업무 경험자. 이공계 출신의 세 가지 조건으로 선발

- 지금까지 출세코스를 달려온 관리통의 철저한 배제

- 지금까지의 인사, 재무 팀은 5개월간 21세기 CEO과정 연수

- 본인이 없으면 조직이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과 자만에서 깨어나라

는 메시지

“나는 사람에 대한 욕망이 세계에서 제일 강한 사람입니다. 조금이라도 남

보다 나은 사람, 우수한 사람은 단 한 명이라도 내 놓을 수가 없어요. 돈 몇

푼 나가는 것은 신경도 안 씁니다. 우수한 사람을 더 데리고 더 효율을 내면

됩니다.”

■ 개방형 인사개혁의 충격

이 회장이 비서실 인사팀을 전면 개편한 뒤 삼성의 인사개혁은 거침없이

추진되었다. 삼성이 1995년 7월 국내 최초로 도입한 ‘열린 채용’은 신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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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의 결정판이었다. 학력이나 학벌을 이유로 기회조차 주지 않던 닫힌 제

도와 관행을 모두 철폐하고 능력과 의욕만 있으면 모든 사람에게 문호를 열

어 주는 것이었다. 대졸 신입사원 채용이라는 명칭도 3급 신입사원 채용으로

바꿨다. 입사시험도 단편적 암기 위주의 필기시험 대신 종합적 잠재 능력을

평가하는 삼성 고유의 직무 적성검사 SSAT로 전환했다.

당시 열린 채용 인사를 기안했던 한승환 삼성 SDS전무는 이렇게 말했다.

“인사 제도의 개혁 없이는 질 경영을 구현할 수 없다는 것이 회장님의 고민

이었습니다. 좋은 사람을 선발하려면 기존의 관행이나 불필요한 제도를 모두

없애라는 뜻이었지요. 여기에 잘하는 사람에게는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이 회장은 1995년 5월 아시아 정·재계 지도자들이 노인 닛케이 포럼 기조

연설에서 “21세기는 한 사람의 비범한 천재가 수만 명을 먹여 살리는 시대

가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때부터 삼성은 정기적으로 해외 우수 대학 석·

박사급 유학생을 확보하는 데 나서기 시작했다. 국내 인력뿐만 아니라 해외

인력 활용에도 관심을 기울여 1997년 7월에는 해외 유명 MBA과정을 마친

우수 외국인들로 구성된 삼성미래전략그룹을 출범시켰다.

이 회장은 2,000년 신년사를 통해 “디지털 시대는 총칼이 아닌 사람의 머

리로 싸우는 ‘두뇌전쟁’ 시대이며, 뛰어난 인재가 국가의 경쟁력을 좌우합니

다. 그런 인재들이 창조적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두뇌천국’을 만들

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삼성은 이에 따라 내부 공채기수 중심의 ‘순혈주의’를 과감하게 포기했다.

대신 언제 어디서든 능력과 전문성을 갖춘 사람을 뽑겠다는 ‘혼혈주의’를 인

사의 원칙으로 정했다. 또 경영 전반에 스피드가 강조되면서 ‘선 先 확보, 후

後 양성’식의 ‘양어장’ 방식을 접고 이미 훈련된 인력을 필요할 때 적재적소

에 맞추어 채용하는 ‘낚시형’으로 바꿨다. 이 과정에서 중심축으로 떠오른 정

책이 글로벌 핵심 인재 발굴 및 육성이다.

2. 삼성의 미래를 밝히는 핵심 인재

2001년 가을, 서울 한남동 승지원.

이건희 회장은 리처드 슈말렌지 MIT 경영대학원장을 만났다. 5년, 10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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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어떻게 바뀌고 뭘 준비해야 할지 고심하면서 세계적인 석학들을 돌

아가며 만나던 시절이었다. 이 회장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세계 초일류 기업들은 지금 무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10년 후 세상은

어떻게 바뀔까요? 우리 삼성에게 10년 후 꼭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슈말렌지 MIT 경영대학원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수많은 경영·경제학자들

이 ‘5년 후는 이렇고 10년 후는 이럴 것’이라는 다양한 의견들을 내놓지만

제대로 맞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답은 유일합니다. 바로 사람입니다. 사람을

확보하고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재사업에 대한 사람을 확보하고 키우면

연관 사업을 준비할 수 있어 다가오는 미래를 충분히 대비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건희 회장이 내심 원하던 답이었다. 10년, 20년 뒤 미래를 고민하

던 그는 ‘핵심인력’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핵심 인력은 이 회장의 경영철학

을 지배하는 핵심인자이다. 그는 취임 이후 줄곧 핵심 인력의 중요성을 강조

해 왔다.

이 회장은 1990년대 중반 비서실 인사팀에 ‘핵심인재 확보방안’을 마련하

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핵심 인재를 뽑아올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 문제

였다. 1980년대 초 진대제, 황창규 전 삼성전자 사장 등 한국계 유학생 출

신 몇 명 정도를 뽑아오긴 했지만 세계 일류 IT 기업 등에 근무하는 핵심

인재들을 스카우트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노인식 당시 인사팀장은 매달 핵심 인재 확보 현황을 보고했는데 좀처럼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 회장의 성에 찰 리가 없었다.

참다 못한 그는 2002년 6월 사장단을 긴급 소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렇게 해서 경기도 용인 삼성인력개발원에서 ‘핵심 인력 확보사장단’ 회의가

열렸다. 30여 명의 계열사 사장단들과 비서실 팀장 등 40여 명이 참석한 회

의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한 분위기였다.

두세 명의 계열사 CEO들 뭐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이야기를 중단시킨 뒤

오랫동안 담아두었던 자신이 생각들을 쏟아 냈다.

“내가 10년 동안 이야기했는데도 사장이라는 사람들이 핵심인력의 개념조

차 모른다. 핵심 인력이란 어떤 산업을 글로벌 TOP3 또는 TOP5에 들어가

게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S급 인재를 한 명만 뽑더라도 칭찬할 텐데…

S급은 사장이 직접 발로 뛰어다녀도 찾을까 말까 한데 아랫사람들을 시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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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 왔다 갔다 하며 만나는 정도라니……. S급은 찾는 데만 2~3년이 걸리

고 데려오려면 1~2년이 더 걸린다. 사장이 열 번 이상 찾아가고 가족들의

편의를 다 돌봐주더라도 올까 말까 한 사람이다. 핵심인재 확보 방안을 전면

수정하고 업무의 반 이상을 S급, A급 인재를 뽑는 데 할애하라. 생존이 걸

린 문제다. 이게 안 되면 일류 기업은 불가능하다.”

이 회장은 자신이 생각하는 S급 핵심 인력의 기준을 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S급 인재 10명을 확보하면 회사 한 개 보다 낫다. 현재 명단에 올라온 인

재들은 모두 S급이 아니다. 사장이 나서도 뽑기 쉽지 않다.”

인사팀은 사장단 평가 기준을 바꾸는 등 후속조치 마련에 나섰다.

노인식 당시 인사팀장은 이렇게 말한다.

“그때부터 사장 업무의 30% 이상은 핵심 인력 영입이 차지하게 되었습니

다. 최소 분기에 한 번 이상은 핵심 인물을 만나러 출장을 나갔어요. 회장님

은 이 모든 상황을 모니터링하며 진행 상황을 상세히 챙기셨습니다. 삼성전

자는 핵심 인력을 데려오기 위해 업무용 비행기까지 띄웠지요.”

1~2년이 지나면서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가시적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삼성증권, 삼성중공업 등에서도 사장보다 연봉이 높은 S급 인력이 들어왔다.

제일모직은 밀라노에서 디자이너를, 제일기획은 일본에서 광고 제작 인력 등

을 뽑아왔다. 삼성물산은 이때 미국에서 초고층 빌딩 기술자를 영입했다. 삼

성물산이 두바이에서 초고층 빌딩 부르즈 할리파를 건설할 수 있었던 힘이

기도 하다.

핵심 인력은 S super, A ace, H high 의 3등급으로 분류되어 특별 관리를

받는다. 자신이 핵심인재인지, 몇 등급인지는 알 수 없다.

- S급 : 핵심 사업을 진두지휘하며 첨단기술 또는 글로벌 마케팅 등 특정

분야에 전문성을 갖고 있는 인물

- A급 : 주력 사업의 핵심 추진 인물

- H급 : 잠재력이 뛰어난 인재. 장래 S급이나 A급으로 육성할 인재

■ 가장 큰 자산은 사람이다

이 회장은 핵심 인재를 영입하는 일 못지않게 이들이 삼성 조직에 안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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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도 심혈을 기울일 것을 사장단에 당부한다. 텃세 같은 것은 절대 용납

하지 않는다. 특히 해외 인력에게는 더욱 각별한 관리를 당부했다. 한국에서

의 생활문제, 이질적인 문화에의 적응, 현지 가족들의 반대 등을 충분히 이

해하고 정서적으로 보살펴 주라고 지시했다.

2004년 10월, ‘일본경제신문’의 자매지 ‘니케이비즈테크’는 삼성의 인재경

영에 대한 특집을 게재했다. 이 잡지는 인재경영을 기술경영과 함께 삼성 경

쟁력의 양대 축이라고 소개하며 “삼성이 글로벌 인재 경영의 확대를 통해

더 큰 성장을 추구해 왔으며, 특유의 인재경영을 통해 앞으로도 해외 거대

IT기업을 제쳐나가는 ‘역전의 방정식’을 계속 구사할 수 있을지 관심”이라고

보도했다.

‘역전의 방정식’이라는 표현이 나온 이유는 과거 일본 등의 기술력과 브랜

드 파워에 밀려 헐값의 가전제품을 생산하던 삼성이 21세기 들어 세계적 IT

기업으로 변신하며 세계 유수기업들을 제친 사실을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

된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삼성이 몇 년 뒤에 그들을 제치고 세계 최고의 전

자회사로 등극할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삼성의 임직원 숫자는 2012년 말 42만명으로 신경영 선언 때의 12만 명에

비해 350% 늘어났고, 핵심 인력인 석·박사급 은 1993년 5,800명에서

48,200명으로 무려 830%나 증가하는 등 정예화 되었다. 인력구성의 글로벌

화도 가속되어 1998년 국내 42,000명, 해외 15,000명이었던 인력 분포는

2012년 국내 90,000명, 해외 145,000명으로 완전히 역전되었다.

3. 선견력의 결정판, 지역전문가

삼성이 갖고 있는 수많은 유·무형의 자산 중에서 단기간에 다른 기업들이

도저히 쫓아올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지역 전문가로 대변되는 글로벌 인

력 풀pool이다. 자체 개발이 안 되는 기술은 사오거나 제휴를 맺으면 된다.

경영자나 엔지니어, 마케팅 전문가도 필요하면 스카우트 하면 된다. 그러나

한꺼번에 4,000여 명의 글로벌 인재를 뽑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삼성이 1990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지역전문가 제도는 이건희 회장의 선견

력의 결정판으로 평가받고 있다. 1년간 업무에서 벗어나 외국에서 체류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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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사정을 깊고 넓게 알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제도이다. 이 회장은 취임

이후 바람직한 인재상으로 한 분야에만 정통한 ‘I자형 인재’가 아닌 국제화,

전문화, 다양화의 흐름을 수용할 수 있는 ‘T자형 인재’를 제시했다. 특히 21

세기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하려면 글로벌 인력 양성이 시급하다고 봤다.

삼성이 매년 200여 명씩 세계 각지에 보낸 인력은 지난 23년간 4,700여

명에 달한다. 그 중 80%를 넘는 4,000여 명이 삼성에 잔류해 국제화 첨병

으로 활약하고 있다. 지역 전문가는 100% 능력 위주로 선발된다. 인맥과 학

벌은 통하지 않는다. 외국어 능력과 연수 계획안이 가장 중요하다.

주목되는 점은 당시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지역전

문가 제도가 시행된 1990년에는 삼성의 세계 1위 품목이 거의 없었고 국내

기업의 글로벌화도 초기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해당 회사들 입장에선 지역전문가에게 들어가는 비용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젊은 직원들을 중심으로 선발 하긴 했지만 월급과 체재비, 일을 하지 않는

기회비용까지 합치면 일인당 비용이 2~3억 원 정도로 추산되었다. 가뜩이나

일손이 딸리는 마당에 일 잘하는 사람만 골라서 내보내야 했으니 계열사

사장들이나 임원들은 내심 불만을 가질 법도 했다. 하지만 지역전문가 제도

에 대한 이 회장의 생각은 너무나 확고했다.

이 회장은 1990년에 제도 강행을 지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지역전

문가 출신들이 회사를 떠나도 좋다. 무조건 시행하라. 그 사람들이 삼성을

떠나면 어딜 가겠는가? 스스로 무역회사를 차리거나 다른 수출기업으로 갈

것 아닌가? 그럼 우리나라 전체에 좋은 것 아닌가. 삼성만 생각할 것 없다.”

그렇게 뿌리를 내린 지역전문가 제도는 삼성 글로벌 경영 네트워크 에 말

초혈관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구 소련이나 동남아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혼자 1,000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주재원들의 상당수가 해당 지역의 지역전문가 출신이다.

■ 현지인과 진심으로 함께한다

윤여봉 당시 삼성물산 대리는 중동 지역 전문가를 다녀온 후 ‘중동전문가’

가 되었다. 그는 1994년 지역전문가로 이집트에 파견되었다. 제일 먼저 부

딪힌 문제는 아랍어를 모르는 것보다도 이슬람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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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신심이 돈독한 택시운전사는 기도 시간이 되면 길 옆에 정차하고 기도를

드린 후 다시 운전을 했다.

그는 아랍어 공부와 병행하여 이슬람 서적과 모임들을 통해, 그리고 학교에

서 코란 수업을 신청하여 수강하면서 그들의 삶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이스마엘 Ismail이라는 무슬림 이름을 받고 이슬람에 귀의하게 되었

다. 그 후 이슬람의 문화와 음식을 좋아하게 됨은 물론 메카, 메디나 성지

순례까지 마치고 귀임했다.

회사의 배려로 1999~2005년, 2008~2012년 두 차례 중동 지점에서 근무

한 그는 현지 인맥 형성, 신구 비즈니스 개발 등에 지역전문가 파견 당시 익

혔던 언어 및 지역 전문성을 적극 활용했다.

현재 휴대폰 수출을 맡고 있는 윤여봉 상무는 “지역전문가 파견 기회가 없

었다면 삶의 일부가 된 이슬람으로 귀의하는 일도, 인맥과 지역전문성을 활

용해 중동 영업에서 좋은 성과를 낼 수도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나라의

언어만 배워서는 진정한 글로벌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문화까지 체득해야

글로벌화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어가 하드웨어라면 문화는 소프트웨어

입니다. 지역전문가는 글로벌화를 위한 하드웨어이자 소프트웨어라고 생각합

니다” 라고 말했다.

■ 삼성 안에 자리한 세계

‘일본경제신문’은 2011년 10월 6일자 특집기사에서 지역전문가 제도를 “삼

성 현지 마케팅의 근간이고, 급성장을 지탱하는 원천”이라고 평가하면서 지

역전문가 제도를, 아무리 배우려고 해도 배울 수 없는 시스템이라고 소개했

다.

삼성 지역전문가 제도의 성공은 미래를 내다보고 과감하게 투자를 결정한

이건희 회장의 인재경영 결과물이다. 원천기술 부재와 협소한 시장이라는 한

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카드는 ‘사람에 대한 투자’였다. 그렇게 20년

이상 준비해 온 이 회장의 인재경영은 이제 세계 그 어느 기업도 따라올 수

없는 강력한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이라는 결실로 나타나고 있다.

‘세계속의 삼성’이라고는 하지만 삼성 안에는 ‘세계’가 자리잡고 있다. 2013

년은 역대 최대 규모인 350명의 지역전문가를 선발했다. 그들이 현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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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고 익히는 정보와 지식, 사회제도와 문화 인프라에 대한 학습이 지금 이

순간에도 삼성이 네트워크 속에 켜켜이 쌓여 가고 있다.

4. 여성이 미래다

여성인력 활용 확대는 이 회장이 오래 전부터 강조해온 인재경영의 한 축

이다. 1993년 신경영 당시 “무슨 일을 하든 여성을 무시하면 안 된다. 다른

나라는 남녀 모두에게서 천재가 나오는데 우리는 여자를 빼놓은 바람에 두

바퀴 중 하나가 빠진 외발자전거 격” 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이건희 회장은 중앙일보 이사시절인 1970년대 후반 간부들과의 간담회에서

“편집국에 왜 여기자가 한 명도 없나? 가정에서 신문 구독을 결정하는 사람

은 주부인데…”라며 여기자 채용을 독려했다. 1980년대 초반 전자 백색가전

담당 임원들과의 간담회에서도 “냉장고, 세탁기를 누가 사용하는가? 가정주

부다. 그런데 디자인 설계 과정에서 여성이 한 명도 없는 게 말이 되는가?

도대체 고객을 생각하고 만드는 것인가?”라며 여성 인력 채용을 권장했다.

■ 남녀 차별 철폐의 시작

신경영을 전후해 1992년 4월 여성 전문직제를 도입하고 1차로 비서 전문

직 50명을 공개 채용하는 등, 전문직과 우수한 자질을 보유한 여성 인력을

본격적으로 활용했다. 같은 해 9월에도 소프트웨어 직군에서 100명의 우수

여성 인력을 공개 채용하는 등 여성 전문직제를 확대 실시해 나갔다. 분수령

은 1993년이었다. 그해 하반기 대졸사원 공채에서 국내 최초로 여성전문 인

력 500명 채용을 발표한 것이다. 대학가는 크게 술렁거렸다. 당시 대기업들

이 한 해 뽑는 대졸 여성 직원은 1,500명 안팎이었다. 그 1/3을 삼성이 뽑

겠다고 나서면서 큰 화제가 되었다.

1994년에는 학력, 성별 철폐를 골자로 하는 ‘열린 인사 개혁안’을 내놓았

다. 채용 시 성차별을 완전히 없앴을 뿐만 아니라 월급 체계도 통일한 개혁

안이었다. 당시 여자들은 같은 직급에서 남자의 70~80%를 받던 분위기를

감안하면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1995년에는 여성 지역전문가 5명을 선발해

파견했고 여성 해외주재원도 파견하기 시작했다. 사무직 여사원들에게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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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오던 근무복 제도도 폐지하고 개인의 자율에 맡겼다.

여성 직원들의 유니폼 폐지는 이건희 회장이 특별히 지시한 것이었다.

1995년 2월 미국 LA를 방문 중이던 이 회장은 비서실 인사팀으로부터 여직

원용 유니폼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이 회장은 불문곡직하고 “남녀 구별 없

이 뽑아 놓고 무슨 유니폼인가? 일도 남자와 똑같이 하고 승진도 똑같이 해

야 한다. 여자라고 배척하고 차별하면 내가 직접 책임을 묻겠다. 교육, 훈련,

업무, 승진 모두 똑같이 해야 한다. 출장과 당직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1995년경 삼성 비서실 인사팀에서 싱가포르 등 국민소득이 2만 달러가 넘

는 나라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다. 그 결과 국민소득이 2만 달러가 넘는 대

부분의 나라가 맞벌이 가구 비중이 높았으며, 특히 싱가포르의 경우 95%가

량이 맞벌이 가구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건희 회장은 이 결과 보고서를 보고

서 여성 인력의 경제 활동 참여 없이는 국민 소득 2만 달러 목표 달성이 요

원하다는 생각을 확고히 했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를 늘리면 가계 소득이

두 개가 되어 소비가 활성화 되어 소비가 활성화되고, 기업은 임금과 직무

간 탄력성을 높일 수 있어 국가적으로도 이득이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 여성 인력 30% 채용

삼성은 이에 따라 신규 채용 인력 중 20% 이상을 여성으로 뽑고 육아시설

도 더 늘리는 등의 방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 회장은 만족하지 않았다. 채

용 비율을 30% 이상으로 높이라고 자시했다. 삼성의 ‘여성 인력 30% 채용’

은 이때부터 가이드라인이 되었다. 2013년 4월 현재 삼성 전체의 여성 임원

은 52명이다. 1993년 신경영 당시에는 8명에 불과했다. 또 현재 삼성전자

여성인력 비중은 전체의 40%를 돌파한 상태이다.

이건희 회장은 예나 지금이나 기업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여성의 역할 증

대가 긴요하다고 생각한다. 제조업 중심의 20세기 산업사회가 남성의 특성

인 조직력, 행정력을 중시한 데 비해 지식정보화 사회인 21세기에는 여성들

이 우위에 있는 창의력, 감성, 유연성이 빛을 발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여성

특유의 부드러움, 공감 능력, 섬세함 등이 다가오는 소프트경쟁 시대에 또

다른 경쟁력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직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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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회와 함께

삼성의료원은 미국 백악관이 지정한 환태평양지역 공식 후송병원이다. 미국

대통령이나 부통령 등 고위 인사들 방한 시 치료를 요하는 일이 발생하면

의료서비스를 받는 공식 병원이라는 뜻이다. 1996년 미국 백악관 진료팀이

한국, 일본, 대만 주재 미국 대사관이 추천한 한국 6곳, 일본 7곳, 대만 5

곳 등 20여 개 일류병원들에 대한 철저한 현장조사를 거쳐 아시아에서는 처

음으로 지정된 것이다.

우리나라 주요 대형병원 중 가장 짧은 역사를 가진 병원, 그것도 개원한 지

3년 밖에 안 된 병원이 아시아의 유수한 주요 병원들을 제치고 미국 백악관

의료팀의 낙점을 받은 비결은 첨단의료 장비 등과 같은 외형적 요소 외에도

환자를 위한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이를 실천하는 서비스 정신에

있었다는 평이다.

■ 더 이상 인재들을 잃을 수는 없다

삼성의료원은 이건희 회장의 열정과 관심 속에 개원했다. 병원 부지는 이병

철 선대회장 때 마련되었지만 병원 설계부터 운영, 서비스에까지 이 회장의

손길이 닿지 않은 부문이 없었다. 삼성의 수많은 비즈니스 가운데 병원 건립

에 유독 관심을 쏟은 배경은 무엇일까?

- 이병철 선대회장 : 1986 폐암진단, 일본 등 유명병원 전전, 1987. 11.19

타계

- 장인 홍진기 회장 별세 : 1986

- 계열사 CEO 두 명을 한꺼번에 잃음 : 한 사람은 병원의 초기 오진으로

암세포가 온 몸에 퍼져 사망한 의료사고였고, 한 사람은 고통사고. 두 사람

모두 병원의 초기 대응이 적절하고 선진 의료기술이 있었다면 살릴 수 있었

다는 안타까운 사건

그는 1999년 삼성경영진과의 간담회에서 삼성의료원 건립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회장으로서 신경을 가장 많이 쓰는 데가 반도체와 병원이다. 병원의 역할

은 40대 후반부터 50대 초반까지 한참 일할 나이의 인재들이 암이나 질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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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에서 벗어나 생명을 연장해서 나라에 공헌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중

요한 인재들,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사람의 생명을 우리가 연장시켜야 한

다. 선대 회장께서 폐암으로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우리 그룹은 더 큰

발전을 이뤘을 것이다.”

이건희 회장은 병원 건설 추진 본부장도 직접 뽑았다. 그는 당시 이수빈 비

서실장에게 “소프트를 아는 사람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병원을 건설하는

게 소프트와 무슨 상관관계가 있을까? 비서실은 이 회장의 뜻을 제대로 헤

아리지 못했다. 안팎으로 수소문 했지만 도무지 적임자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삼성항공 기술총괄을 맡던 임동일 전무가 물망에 올랐다.

■ 한국의 병원문화를 선도

이 회장이 임 본부장에게 내린 첫 임무는 “선진 병원을 보고 오라” 였다.

그는 두 달여 동안 40개가 넘는 병원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면서 이 회장이

강조한 ‘소프트’의 뜻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병원 전체를 컴퓨터라고 보면 그 안의 소프트웨어는 전산망이라고 할 수

있어요. 각 단말기에 의사와 간호사가 앉아 있는데 각각 다른 45개 직종 의

사 2,000여 명이 전산망을 통해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이 병원 업무의 본

질이었던 겁니다. 이런 소프트웨어를 잘 만드는 것이 하드웨어인 건물을 짓

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삼성의료원은 한국의 병원 장례문화도 선도했다. 고스톱, 소음, 향 냄새가

일시에 사라졌다. 소음과 냄새를 잡기 위해 영안실 마다 흡음제를 붙이고

분향대에는 특별 환기 시설도 설치했다. 그러자 늘 소란스럽고 어수선했던

영안실 분위기는 차분하고 건강하게 바뀌었다. 산자와 죽은자의 ‘아름다운

이별의 장’으로 거듭 태어났다.

임동일 본부장은 병원 개원을 1994년 10월 1일로 정하고 두 달 여 동안

리허설을 11번이나 진행하면서 미비한 점을 보완해 나갔다. 의사, 간호사,

행정직원, 청소부까지 2,500명이 일사분란하게 체계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

록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병원은 당초 예정보다 4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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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 늦은 11월 9일에 개원할 수 있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시설과 진료 인

프라, 국내최고 수준의 의료진을 확보 했다는 자평이었다.

- 당시 국내 병원 중 최고 높이인 지상 20층 지하 5층에 1,100여 개의 병

상과 28개의 진료과목. 암·심장·신경계 특성화 센터. 처방전산화 시스템. 물

류 자동화 시스템. 세계 최초의 의학영상저장 전송 시스템PACS.

■ 전화 한 통의 위력

개원 뒤에도 병원에 대한 이건희 회장의 관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1994년

어느 날 한 입원 환자의 보호자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삼성이라고

해서 다를 줄 알았는데, 불친절하기는 다른 병원과 마찬가지”라며 병원 측

에 불만을 제기한 사람이었다. 전화기를 든 그는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삼성 회장 이건희입니다. 그동

안 저희(병원)의 불찰로 인해 마음 고생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진심

으로 사과드립니다.”

병원은 발칵 뒤집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삼성의료원의 서비스는 눈에 띄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의사가 중심이었던 한국의 병원문화가 환자 중심으로 재

편되는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병원은 정말 친절해야 합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힘들다면 일의 양을 반

으로 줄이더라도 친절한 태도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다른 병원은 안 그런

데 왜 우리만 친절해야 하는가’라고 불평하는 의사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명심하세요. 오늘날의 삼성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다른 기업이 하지

않는 것을 했기 때문입니다.”

삼성의료원은 ‘병원의 중심은 의사가 아닌 환자’라는 모토로 각종 서비스를

바꿔 나갔다. 도입 당시 모두들 불가능하다고 했던 ‘3무 無 서비스’ (대기시

간, 촌지, 보호자가 필요 없는 서비스)를 정착시켰다. 삼성의료원의 서비스

혁신은 입소문을 타고 밖으로 퍼져 나갔고, 많은 병원들이 그 뒤를 따르게

되었다.

삼성의료원 의사들의 연수 후 진료 체계도 다른 병원으로 확산되었다. 현재

국내 병원 진료 수준은 선진국의 95% 수준까지 높아졌고, 이제는 위암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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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간 이식 같은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도약한 상황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선진 병원에서 삼성의료원을 배우러 오기도 한다. 개원 전 삼성

의료원 장기이식 의사들이 간 이식 기술을 배우러 갔던 미국 최고의 병원,

존스홉킨스 병원이 이제는 삼성의료원으로 고수들을 파견해 미국에서는 생

소한 생체 간 이식 수술법을 배워가고 있다.

또한 삼성의료원은 베트남, 몽골 등은 물론 러시아 연해주, 아프리카 이집

트, 우간다까지 의술을 전수하고 있다. 베트남에 의사를 파견해서 현지에서

심장병 어린이 시술을 시행한 데 그치지 않고 베트남 의사들을 초청해 어린

이 심장병 수술 기술을 가르쳐 베트남 정부로부터 훈장도 받았다. 이제는 그

명성이 높아져 몽골에서는 정부 차원에서 의사들을 삼성의료원에 파견하고

있으며 동남아는 물론 유럽, 미주 지역 의사들까지 비자로 연수를 받으러 오

고 있다.

■ 나의 반려자

이건희 회장은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주로 보냈다. 선진문화를 배우라는 이

병철 선대회장의 뜻이었지만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이 회

장이 반려동물로 개를 가까이 하게 된 배경이다. ‘스피츠’라는 개를 친구삼아

지냈던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뒤 일 년 만에 ‘스피츠’의 죽음을 접했다.

이 회장은 당시의 감정을 “참 허전하고 가슴 아팠다. 아주 의젓하고 당당한

놈이었다” 고 회고 했다.

이 회장은 한 때 진돗개에 빠졌다. 진돗개는 천연기념물 53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보존이 잘 되지 않고 있었다. 세계적으로 개 종류가 200여종인데 진

돗개는 한국 원산지로 등록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 회장은 중앙일보 이사 시절 진도로 내려가 진돗개 30여 마리를 구입해

순종이 나올 때까지 교배시켰다. 그러다 보니 한때 150마리까지 그 수가 늘

어났다. 순종을 찾아 세계견종협회에 등록시키기 위해서였다. 이 회장은 기

어이 암수 한 마리씩 순종을 찾아내어 1979년 세계견종협회에 진돗개를 등

록시켰다.

- 1993년부터 세계 최대 명견 대회인 ‘크러프츠 도그쇼’를 지원

- 애완견에서 안내견, 탐사견 등의 사업으로 확대

- 1989년부터 경비견을 훈련시켜 군, 경에 500여 마리 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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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에는 생명구조견 센터 설립, 인력 구조활동 시작

- 목조 문화재를 손상시키는 흰개미 탐지견 활동

2. 함께 가야 멀리 간다

“왜 불량이 나는가? 불량의 종류가 무엇인가? 두세 번 분석하면 그 근원을

알 수 있다. 결국 조립업체 사람들이 불량품을 만들지 않도록 평소 협력업체

를 교육시키고 자금과 기술력을 제공해 완제품이든 부품이든 수십 개 협력

회사를 높은 차원에까지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이 대기업 조립업체의 개념이

다. (여러분은) 그것을 모르고 있다. 분석만 잘하면 제일 중요한 부품을 만드

는 수십 수백 개의 협력업체를 잘 키울 수 있다.

이것이 구매의 예술화다. 협력업체를 등쳐서 싸게 사는 것이 아니다. 잔재

주 부리는 것, 우리만 덕 보자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 그룹 각계열사도 이익

을 보고 협력업체도 살아갈 수 있도록 기술도 키워주고 자금도 도와줘야 한

다. 이것이 사업부장이 해야 할 알이다.”

이건희 회장이 1993년 3월 일본 도쿄회의에서 사장단들에게 한 말이다.

물론 삼성계열사들이 이 회장의 지시를 지난 20여 년간 충실히 이행했는지

여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때로는 협력업체를 쥐어짰던 경우도 있었을 테고

기술과 자금을 지원하는 데 인색했던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상생경영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결국 판매가격 하락을 생산성

향상, 기술혁신 등으로 돌파하지 않으면 원청업체나 하청업체가 생존을 보장

받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이 회장의 도쿄발언은 삼성이 이 같은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동반성장, 상생의 기치를 선도적으로 펼쳐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구매의 예술화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2010년 9월 중순, 이건희 회장은 삼성전자 경영진으

로부터 협력사 경영 진단 결과를 보고 받는 자리에서 벌컥 화를 냈다.

“내가 30년 동안 상생 경영을 이야기 했는데 이 정도밖에 안 되는가? 제조

업의 관건은 협력사 육성이다. 협력사 사장들이 자신의 재산과 인생을 모두

- 32 -

걸고 전력을 다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야 제대로 된 품질이 나오고 사업

경쟁력이 생긴다. 여기에 삼성의 미래가 달렸다. 당장 협력사와 머리를 맞대

고 현장의 소리를 듣고 개선점을 찾아라.”

2010년 10월 1일 동반성장 대토론회 개최 결과

- 삼성전자 전 사장단과 협력사 대표 220명 참석

- ‘동반성장 데이’ 운영 약속 : 정기적으로 협력사를 방문하여 지원방안 논

의 및 실천

- 소통의 대장정 프로그램 운영

이건희 회장의 동반성장에 대한 철학은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건희 식 용어’는 ‘공존공영’이었다. 이 회장은 삼성전자 업의 특성을 ‘조립

양산업’으로 정의했다. 조립 양산업의 핵심은 얼마나 질 좋은 부품을 공급

받는가에 달려 있다. 완제품 회사인 삼성전자의 경쟁력은 결국 부품회사들이

제공하는 부품의 질에 좌우된다는 것이 그의 냉철한 인식이었다.

삼성은 1998년 이건희 회장의 지시로 ‘중소기업과의 공존공영’을 대외적으

로 선포했다. 협력사 지원활동의 태동이 된 이 선언은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삼성이 생산하던 제품과 부품 중 중소기업으로 생산 이전이 가능한 352개

품목을 넘겨주기로 한 것이다. 중소기업에 기술을 이전하고 다시 제품으로

납품 받기로 한 금액은 무려 1조 5,000억 원이었다.

이 회장은 공존공영을 위해서 구매를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강

조했다. ‘구매의 예술화’는 단순 구매에서 출발한 갑을의 역학관계를 하나의

가족이라는 신뢰관계로 바꾸는 과정이었다. 삼성과 협력사 간 상생 협력을

통해 자본주의의 극치를 이뤄야 한다는 뜻이었다. 당시 이 회장은 이렇게 이

야기했다.

“삼성과 협력사의 관계는 갑과 을이 아닌 ‘부부’다. 어느 한 쪽도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힘을 합치지 않으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부부, 서로

이끌고 밀어주면서 공존공영해야 하는 부부의 모습이 바로 삼성과 중소기업

의 관계다.”

이에 따라 삼성은 거래 대금을 어음 대신 현금으로 결제하고 시설 투자 자

금도 무이자로 지원했다. 수시로 협력사의 만족도를 조사해 그들의 요구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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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경영에 반영했다. 또한 사내외 전문가를 파견해 협력사의 경영 관리와 기

술 개선도 지도했다.

삼성의 상생경영은 갈수록 진화해 나갔다. 이 회장은 1996년 신년사에서

“협력사는 우리와 같은 배를 탄 신경영의 동반자”로 규정했다. 이러한 독려

에 힘입어 삼성에서는 전통적으로 협력사를 지칭하는 ‘거래처’, ‘납품업체’,

‘하청업체’ 등의 용어가 사라졌다. 환갑이 넘어 보이는 중소기업 사장이 새파

랗게 젊은 대기업 사원이나 간부에게 일감을 받기 위해 굽실거리는 모습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 강소기업 육성

삼성은 경제사회 패러다임 변화에 따라 상생 프로그램도 계속 업그레이드

했다. 종전에는 대기업이 1,2차 협력업체와의 동반성장에만 관심을 가지면

되었지만, 이제는 산업 생태계 전반을 고려해야 하는 방향으로 책임의 무게

가 이동하고 있다. 또 협력사의 고충 해결을 위한 단편적 지원 활동을 넘어

자금, 기술, 채용 등 종합적 지원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삼성전자는 이에 따라 은행과 공동으로 펀드를 조성해 협력사의 설비투자,

기술 개발, 운영자금 등 기업 경영에 필요한 자금을 낮은 금리로 대출해 주

는 ‘상생펀드’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삼성은 동반성장 생태계의 건전성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2012년 3월, 계열

사와 1,2차 협력사와 함께 ‘동반성장 협약식’을 가졌다. 삼성 11개 계열사가

1차 협력사 3,270개와 협약을 맺고 1차 협력사가 다시 2차 협력사 1,269개

사와 협약을 체결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이 협약식에서 삼성은 7,700억 원의

자금 지원을 선언했다.

■ 중기 中企 인재교육의 산실

중소기업 인재교육위 산실인 경기도 용인 ‘중소기업인력개발원’을 삼성에서

기증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경기도 용인시에 33,000제곱미터

(약 1만 평) 부지에 자리 잡고 있는 중소기업인력개발원은 대기업이 중소기

업을 위해 건립한 국내 최초의 연수기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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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박상규 중소기업중앙회 회장은 이건희 회장을 만났다. 2시간이 넘

는 대화에서 박 회장은 중소기업들의 인재 양성이 어렵다는 고충을 토로했

고 이 회장은 그 자리에서 연수원을 건립해서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연수원 건립에는 법적으로 걸림돌이 있었다. 수도권 정비계획법에

따라 수도권에 연수 시설을 지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예외 조항 하나를 삽입

하는 데 1년이 걸렸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1994년 11월, 이건희 회장이

참석한 가운데 기공식이 열렸다.

연수원은 1997년 4월 완공되었다. 공사비는 당초 230억 원으로 예상했으

나 300억 원으로 늘어났고, 레포츠 센터 건립비용 200억 원까지 합쳐 총

500억 원이 들어갔다.

이건희 회장은 “교육시설만 지어주는 데 그치지 말고, 교육과정 운영과 운

영 시스템도 가르쳐 주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삼성 인력개발원 내에 교육과

정 개발팀이 생겼으며 3년간 연수원 운영을 대신 해 주었다. 하지만 그 시설

을 찾아가 보면 그 어디에서도 삼성이 기증했다는 표식 하나 찾아볼 수 없

다.

삼성과 중소기업의 인연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삼성은 2004년부터 중소

기업중앙회와 공동으로 정보화 인프라 구축사업을 시작했다. 중소기업이 정

보화 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이었다. 삼성은 자금

지원뿐 아니라 중소기업 간 협력 네트워크 구축, 정보통신 기술 및 전자 상

거래를 통한 공동구매 노하우 등을 전수했다. 2005년에는 대, 중소기업 상

생협력재단 설립을 위해 50억 원을 출연했다. 이 재단은 중소기업 정책개발,

협력사업 개발, 상생협력 박람회 개최, 글로벌 지원센터 건립 등 중소기업의

글로벌화를 돕고 있다.

3. 성장의 과실, 사회와 함께

이 회장은 1980년대 중반 부회장 시절부터 어린이집 설치를 주창했다. 여

성 인력 활용 확대와 저소득층의 빈곤 탈출이 가능하려면 반드시 어린이집

을 늘려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1987년 회장에 취임한 이후에는 재계 차원

에서 전국 각지에 어린이집을 짓자고 제의했지만 다른 기업들이 별다른 관

심을 보이지 않자 삼성이 어린이집을 짓기로 결심했다. 그는 특히 보육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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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사회 저소득층 등 회사 외부로 적극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빈곤으로부터의 탈출

그러나 반대가 심했다. 선대회장이 영입했던 관료 출신의 한 CEO는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데 구태여 우리가 나설 필요가…”라며 완곡한 반대

의사를 피력했다. 비용이 만만치 않은데다가 정부 차원에서 추진해야 할 일

을 민간 기업이 하는 게 맞지 않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은 사장단 전체가 모인 자리에서 서울 달동네를 촬영한

비디오테이프를 틀어준 뒤 일거에 반대를 누그려뜨렸다. 이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달동네 사람들이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탁아소를 지어

야 합니다. 아이들을 맡길 데가 없어 일손 하나가 놀고 있는 것이 안타깝습

니다. 기회와 평등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민주주의가 바로 기회

의 평등이지 결과의 평등은 아니지 않습니까? 일할 수 있는 기회는 같이 주

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탁아소 건립을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삼성은 1989년 송파구 마천동에 1호인 ‘천마 어린이집’,

1990년 7월에는 신길동에 ‘꿈나무 어린이집’, 비슷한 시기에 미아동에 ‘샛별

어린이집’을 차례로 열었다. 개원식에는 이건희 회장이 직접 참석하기도 했

다. 삼성은 어린이집 건립은 부산, 대구 등 전국 각지로 확대해 57개의 어린

이집을 운영하고 있다. 그 중 삼성 임직원들을 위한 직장 어린이 집은 26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어린이집은 31개 이다.

1993년 제2창업 5주년 기념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삼성은 국가의 대표기업이라는 각오로 그에 따르는 책임과 고통을 감내할

것이며, 나는 이러한 다짐의 징표로 지금까지 시행해 온 공익사업의 양과 질

을 더욱 확대하여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 극대화에 힘쓸 것을 약속합니다.”

■ 드림클래스에 영그는 꿈

삼성은 이건희 회장의 사회공헌 철학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1994

년 ‘삼성사회봉사단’을 설립했다. 재계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삼성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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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단이 펼치고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희망의 사다

리’이다. 어린이집→공부방→드림클래스로 이어지는 빈곤탈출 프로그램이다.

앞서 이야기한 어린이집이 빈곤층 유아들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라면 공부

방은 초등학생이 그 대상이다. 삼성은 2008년부터 저소득층 밀집지역을 중

심으로 공부방을 지원하고 있다. 삼성 임직원 9,250여 명이 전국 396개 공

부방과 결연을 맺고 학습지도는 물론 학습기자재를 지원하고 있다.

2011년부터 시작한 ‘드림클래스’는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다.

저소득층 중학생의 방과 후 학습을 지원하는 것이 목적이다. 중학생은 여기

서 영어 및 수학 실력을 키우고 대학생 강사들은 리더십과 봉사정신을 함양

하면서 등록금 지원도 받는다.

연간 10,000여 명이 참여하고 있는데 점차 인원수를 확대할 계획이다.

삼성 계열사들이 진행하는 사회공헌 프로그램

- 삼성토탈 : 급여 1% 기부운동, 임직원 전원 참여, 개인 0.5% 회사 0.5%

지원, 월 평균 3,300만원, 연간 5억 원을 지역사회 봉사 재원으로 활용.

- 삼성의료원의 의료봉사단 , 삼성변호사들의 법률봉사단, 삼성화재의 안내

견, 삼성생명의 탐지견, 삼성증권의 경제증권교실 운영 등

이건희 회장의 1996년 신년사이다.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기업도 사회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

습니다. 사회에 대한 실질적 공헌과 봉사활동을 통하여 사회적 신뢰와 공감

을 획득해 나감으로써 ‘좋은 기업’, ‘사랑받는 기업’ 이미지가 사회 곳곳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 장애인에게 꿈과 희망을

경기도 수원 영통 삼성전자 공장 입구에는 ‘무궁화전자’라는 장애인 전용

공장이 자리 잡고 있다. 대기업이 운영하는 유일한 장애인 전용공장이다 보

니 국내외 귀빈들이 자주 찾는다. 이 ‘무궁화전자’는 이건희 회장의 아이디어

이다. 1990년대 초 이 회장은 “삼성전자에서 장애인 공장을 하나지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가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진 것은 오랜 일본 생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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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얻은 아이디어라는 것이 대체적인 관측이다.

곧 무궁화전자 실무추진팀이 구성되고 마스터 플랜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사업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지역주민들의 반대로 부지를 매입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개월을 허송한 뒤 결국은 삼성전자 소유

의 수원공장 입구 산을 깎아서 짓기로 결정했다. 암반이 많은 터라 발파작업

을 해야 하는 난공사였다. 바로 옆 사원 아파트에 균열이 생기는 등으로 6개

월간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우여곡절을 거쳐 2인 1실 침대와 노래방, 식

당, 물리치료실, 도서실까지 완비한 공장이 4천여평 부지에 들어섰다.

총 234억 원이 투입된 무궁화전자는 1994년 11월 이건희 회장 부부가 참

석한 가운데 준공식을 갖고 가동에 들어갔다. 설립 초기 120여 명의 직원을

선발했는데 주로 중증 장애인들이었다. 주요 생산 품목은 청소기, 가습기 같

은 소형 가전제품이었다.

무궁화전자 건립에는 자립을 중시하는 이건희 식 사회공헌 철학이 담겨 있

다. 물고기를 나눠주는 것보다는 직접 고기를 잡을 수 있는 어구들을 지원해

야만 자생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신념이다.

4. 국민, 정부, 기업 한 배를 타야

단일 공동체 내에서 일류는 동행하는 법이다. 일류 정부와 삼류 기업, 또는

삼류 정부와 일류 기업이 동거하는 경우는 없다.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을 선

언한 이후 정부, 국민, 기업이 한 방향으로 움직여야만 선진국에 진입할 수

있다는 지론을 펼쳐왔다. 이른바 ‘삼위일체론’이다

삼성을 세계적 기업으로 키우려면 경영혁신 못지않게 정부 부문의 선진화

와 국민의식의 전환이 중요하다는 판단에서 였다. 그의 삼위일체론은 곳곳에

서 확인할 수 있다.

이건희 회장은 1994년 우리나라 고속전철 수주를 놓고 프랑스의 TGB, 독

일의 ICE, 일본의 신칸센이 치열하게 경합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많은 것을

느꼈다. 결과는 프랑스의 승리였지만, 이 수주전에서 세 나라는 경제계와 언

론은 물론, 국가의 수반까지도 기업을 지원하면서 총력전을 폈다. 당시 그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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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기업 혼자의 힘만으로는 국제 경쟁력을 갖추기가 어렵게 되었다. 더

구나 우리는 지금 국제화, 개방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어려움을

안고 있다. 일본, 미국의 기업들은 이미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고도 국가 지

원을 등에 업고 있는 마당에 경쟁력이 미미한 한국 기업들이 홀로 선다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결국 국가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들이 보여 준 것처럼 우리

도 국민, 정부, 기업이 하나로 힘을 합쳐 삼위일체를 이루어야 한다.

■ 기업은 이류, 행정은 삼류, 정치는 4류

이건희 회장의 이런 생각은 기업 규제를 권력 유지, 확대의 지렛대로 활용

하려는 정치권의 움직임과 맞물려 기어이 불협화음을 내고 말았다. 이른바

“기업은 이류, 행정은 삼류, 정치는 사류”라고 했던 ‘베이징 발언이었다.

이 회장은 중국 정부의 초청을 받아 베이징을 방문했다. 1994년 11월 경기

도 기흥 삼성반도체공장을 둘러본 중국의 리펑 李鵬 총리는 삼성의 신경영

스토리에 깊은 감명을 받아 장쩌민 江澤民 주석에게 이 회장의 방중을 건의

했다. 이 회장은 1995년 4월 13일 장쩌민 주석, 리펑 총리와의 면담을 끝내

고 한국 특파원들과 만나 중국 수뇌부를 면담한 배경 등에 대하여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비보도를 전제로 “잘못된 행정 규제와

권위의식이 없어지지 않으면 21세기 한국은 일류 국가로 발돋움할 수 없다.

우리나라의 정치는 사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삼류, 기업은 이류다” 라는 내

용의 발언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그의 발언이 알려지자 청와대가 발끈하고 나섰다. 주중 한

국 대사관은 물론 정보기관까지 나서서 진의 파악에 들어갔고 여기저기서

“괘씸하다”, “주제 넘는다”는 비난이 잇따랐다. 급기야 청와대 정무수석이

해명을 요구하고 나섰다. 결국 이 사태는 삼성의 공식 사과로 마무리되긴 했

지만 경제계에서는 “이 회장이 할 말을 했다”는 평이 많았다.

5. 이건희의 눈물, 평창의 웃음

“평창 Pyeong Ch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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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7일 0시 17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 자크 로케 국제 올림픽

위원회 IOC 위원장이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대한민국 평창을 발표하

는 순간, 전국에 환호의 물결이 메아리쳤다. 현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단도

일제히 두 팔을 올리며 기쁨을 만끽했다. 이때 자리에 앉아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던 사람이 텔레비전 화면에 잡혔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었다.

평창 올림픽유치를 위해 지난 10여 년간 쉬지 않고 달려온 여정이 주마등

처럼 스쳐 가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 회장은 발표 행사가 끝난 뒤 자리를 옮

겨서도 한 차례 더 눈물을 보였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알

려진 그가 올림픽 유치 성공을 얼마나 감격스러워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

다.

■ 배려를 넘어 감동으로

평창은 63표를 얻어 뮌헨 25표, 프랑스 안시 7표를 압도적으로 눌렀다. 올

림픽 유치는 정부, 유치위원회, 대한체육회, 강원도 등 유관기관과 IOC위원

인 이건희 회장의 적극적인 유치 활동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이 회장도

평창유치가 확정된 후 소감을 묻는 자리에서 “전부 저보고 했다는데 이건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이 만든 것이다. 평창 유치팀 고생 많았다. 특히 대통

령이 오셔서 전체 분위기를 올려 놓았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합쳐져 이뤄진

것 같다. 나는 작은 부분만 담당했다”며 평창 유치의 공을 다른 사람에게 돌

렸다. 하지만 평창 유치의 숨은 주역은 이 회장이라는 데에는 어느 누구도

의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평창 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진선 전 강원도 지사는 이렇게

술회한다. “이건희 회장은 몸을 돌보지 않고 뛰었습니다. 젊은 선수위원부터

고령의 고참위원까지 남녀노소와 인종, 지역, 종교를 불문하고 전방위 스포

츠 외교를 펼쳐 동료 IOC 위원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지요. 경륜과 영

향력을 겸비한 이회장의 열성적 지원 덕분에 아시아와 중남미, 아프리카 지

역 등의 부동표가 상당 부분 한국 쪽으로 흡수되었고 그것이 올림픽 유치

성공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 스포츠도 넘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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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이 체육계 경기단체장을 맡은 시기는 1982년 대한레슬링협회장

을 맡으면서부터다. 학창 시절 레슬링 선수이기도 했던 그는 각별한 애정으

로 레슬링을 후원하면서 한국 레슬링을 하계올림픽 효자 종목으로 성장시켰

다. 이를 발판으로 국제 스포츠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해 1996년 7월, 애

틀랜타올림픽 IOC 총회에서 IOC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회장은 스포츠 애호가이기도 하다. 어릴 적 자전거를 자주 탔다. 그는

때로는 자전거를 분해 조립하기도 했다. 서울 한남동 그의 자택에는 항상 자

전거가 놓여 있다. 서울 사대부고 시절에는 학교를 대표하는 레슬링 선수였

으며,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 시절에는 역도산과도 교류할 만큼 레슬링에 대

한 관심이 높았다. 이 회장은 1982년부터 1996년까지 레슬링 협회장을 맡

아 사재 15억 원을 들여 경기도 용인에 레슬링 전용 체육관을 건립했고, 협

회에 영구 기증했다. 한국 레슬링은 이 회장의 협회장 시절 황금기를 구가했

다. 올림픽에서 7개, 세계선수권에서 3개의 금메달을 가둬들였다.

한국 탁구가 세계 정상에 오르는 데에도 이 회장의 보이지 않는 지원이 있

었다. (제일모직 탁구단 창단 및 대표선수 훈련의 과학화에 기여 등)

그 외에도 골프, 야구, 럭비, 스키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골프, 야구, 럭비는 삼성의 3대 스포츠로 정해 이들 스포츠 정

신을 기업 경영에 접목시키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모든 것을 치밀하게 사전에 준비한 후 과감하게 돌진하는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정신은 스포츠에 대한 남다른 관점에도 잘 투영되어 있다. 사소한 것

하나 무심히 지나치는 법 없이 전략과 전술을 짜고 겸허함과 용기를 동시에

갖추도록 선수들을 격려하는 모습에서, 숱한 난관을 돌파하며 불가능을 가능

케 했던 삼성의 비약적인 질주가 자연스럽게 오버랩 된다.

■ 신경영과 오케스트라

산이 크면 클수록 그 산을 보는 사람들의 관점도 다양해진다고 합니다. 아

름다운 계곡에서 사랑하는 연인과 멋진 추억을 만든 사람에게는 사랑의 장

소로, 산사태가 나서 집이 휩쓸려 간 사람에게는 비운의 장소로, 양지바른

곳에서 농사지으며 풍족한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은혜의 장소, 척박한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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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서 농사가 잘 안 된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원망의 장소로….

산이 크면 클수록 그 덕을 보는 사람도 많아지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아

집니다. 불평하는 사람이 많다고 산을 깎아낼 것이 아니라 불행의 요소를 줄

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산사태가 나지 않도록 나무를 많이 심고 비옥한

땅을 만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껏 그랬듯이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서

상생에 앞장서고 실천하는 기업이 되길 바랍니다.

20년간 이건희 회장을 지켜본 나는 그를 천재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천재

에 대한 정의는 많지만, 나는 주어진 상황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재창조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선대회장이 이룩한 기업을 그대로 물려받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창조하여 글로벌기업으로 성장시켰으

니 말입니다.

음악적으로 말하자면 “세계를 움직이는 마에스트로!”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 지휘자 금난새 -

이 회장이 모두 찬탄해 마지 않는 성공의 금자탑을 쌓아 놓고도 생존을 위

한 위기의식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현실의 냉혹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삼성은 칠흑 같은 밤바다에 홀로 떠 있다. 삼성을 비춰 주는 등대는

없다. 눈앞에는 불확실성의 파도만 넘실대고 있을 뿐이다. 추격자에서 선도

자로 돌아선 기업은 스스로 등대와 나침반이 되어야만 한다. 모두가 삼성을

쳐다보며 쫓아오고 있다. 아무도 미래 삼성의 성공을 약속해 주지 않는다.

그것이 신경영 20년의 고민이다. 이제 끝없는 항해의 한 여정을 마쳤을 뿐

이다. 내일은 어제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온다. 언제나 그렇다. 우리 중 누구

도 미래를 미리 가 볼 수 없다. 현재 시간보다 0.0001초 후의 극한적인 시

간이라도 말이다.

이건희 회장은 결코 철인이나 선지자가 아니다. 본인 말대로 한 인간으로서

지력과 체력, 정신력을 총동원해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렇게 20년간 때로는

망설이고 때로는 결단하며 분투를 거듭해 왔지만 크로노스적 시간은 아직

한 세대(30년)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앞으로

펼쳐질 10년이 지난 20년보다 훨씬 변화무쌍하고 역동적일 것이라는 점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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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강해지는 바람과 폭풍우 속에서 삼성은 또 다른 항해를 준비해야 한다.

한 줄씩 늘어나는 나이테에 새로운 도전과 혁신의 정신을 새겨야 한다.

1938년 ‘삼성상회’로 출발한 삼성은 이제 겨우 75세이다.

2014년 2. 23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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