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톨로지 - 창조는 편집이다 -
에디톨로지
- 창조는 편집이다 -
* Editology : 에디톨로지는 그냥 섞는 게 아니다. 그럴듯하게 짜깁기 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편집의 단위, 편집의 차원을 창조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 김정운 지음
0 문화심리학자, 여러 가지 문제 연구소장
0 고려대 심리학과 졸,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교 심리학과 졸업 및 박사 학위
0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교 전임강사 및 명지대 교수 역임
0 2014 현재 일본 교토 사가 예술대학 단기 대학부 재학 중
0 저서 : 노는 만큼 성공한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남자의 물건
0 번역 : 애무, 보다의 심리학
0 조선일보 ‘김정운의 감언이성-아니면 말고’ 월간 중앙 ‘김정운의 창조학교’
연재 중
■ 프롤로그 : 편집된 세상을 에디톨로지로 읽는다
영어나 유럽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주변부 지식인’으로 살면 가끔 참 억울한 일이 생긴다. 내가 이야기할 때는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다가, 서구의 유명한 어느 누군가가 이야기하면 바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경우다. 나는 다음 두 가지 사건이 참 서러웠다.
첫 번째는 독일 통일과 관련된 일이다. 나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순간을 현장에서 직접 경험했다. 통일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누구보다 잘 안다. 독일 통일은 너무나 황당한 사건이었다. 동구권과 소비에트의 몰락이라는 그 엄청난 사건은 사실 아주 우습게 시작되었다.
귄터 샤보브스키라는 동독 공산당 대변인이 여행자유화에 관한 임시 법안을 발표할 때였다. 독일어에 서툴렀던 외국 기자가 언제부터 그 법안이 유효하냐고 묻자. 샤보브스키는 아무 생각 없이 “바로”, “즉시”라고 대답했다. 아주 사소한 말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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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기자회견장에 있던 기자들은 “지금부터, 즉시 서독여행이 가능하다!” 라는 기사를 송고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동베를린 주민들은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관문인 ‘체크포인트 찰리’로 몰려나왔다.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던 경비병들은 결국 주민들의 요구에 굳게 닫힌 철문을 열어주고 뒤로 물러났다. 베를린 장벽은 이렇게 황당한 말실수로 무너진 것이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없었더라면 훨씬 격렬하고 잔혹하게 무너졌을 것이다.
독일 통일 후 20년 가까이 나는 가는 곳마다 이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다들 그냥 재미있으라고 하는 농담으로 들었다. 그런데 2009년 10월,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에서 “베를린 장벽은 기자들의 질문으로 무너졌다”라는 기사가 독일 통일 20주년 특집으로 나왔다.
내가 매번 설명하던 그 내용이었다. 그러자 한국 신문에서도 바로 그 기사를 받아 여기저기서 보도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권위 있는 신문이 한 번 보도하자 ‘바로 역사적 사실’이 되어버렸다. 내 입장이 되어보라. 정말 환장한다.
두 번째는 스티브 잡스에 대해서다. 나는 오래전부터 “창조는 편집이다!”라고 주장해왔다. 21세기 가장 창조적인 인물로 손꼽히는 스티브 잡스의 탁월한 능력은 따지고 보면 ‘편집 능력’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 주장에 대해 지금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2011년 스티브 잡스가 죽자 ‘아웃라이어’ ‘블링크’ 같은 책으로 유명한 말콤 글래드웰이라는 미국 작가가 ‘편집’이야말로 스티브 잡스식 창조성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스티브 잡스의 천재성은 디자인이나 비전이 아닌, 기존의 작품을 개량해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내는 편집능력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아, 이건 독일 통일이 경우보다 훨씬 더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에디톨로지(editology)!’ 먼 훗날 전 세계적으로 통할 수 있도록 영어로 만들었다. ‘창조는 곧 편집’이라는 의미다. 내가 주장하는 에디톨로지 즉 ‘편집학’은 글래드웰 같은 작가가 어설프게 주장하는 ‘에디팅(editing)’과는 차원이 다르다.
에디톨로지는 그냥 섞는 게 아니다. 그럴듯하게 짜깁기하는 것도 물론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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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편집의 단위’, ‘편집의 차원’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가는 인식의 패러다임 구성에 관한 설명이다.
Part 01. 지식과 문화의 에디톨로지
01 왜 에디톨로지인가?
■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언제나 그렇다. 인간은 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본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자극의 ‘선택적 지각’이라고 한다. 세상에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의 자극이 존재한다. 인간의 인지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자극만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 문제는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자극의 내용이 지극히 ‘편파적’이라는 사실이다.
자극을 받아들이는 바로 그 순간부터 창조적 인간과 보통 인간의 차이가 벌어진다. 창조적 인간은 남들이 지나치는 자극을 확 잡아챈다. 위대한 창조는 그렇게 사소하게 시작된다.
정신 질환도 마찬가지다. 우울증 환자는 자신을 둘러싼 자극 가운데 부정적인 자극만 받아들인다. 가끔 인터넷 악플을 보고 죽을 생각까지 했다는 연예인들의 경우가 그렇다. 자신에 관한 긍정적 자극은 건너뛰고, 부정적 자극만 자꾸 보게 되는 것이다. 안 보면 또 불안해진다. 한번 빠져들면 좀처럼 헤어나기 힘든 악순환의 덫이다.
■ 보기는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선택적 자극의 반대편에는 ‘무주의 맹시(無注意盲視)’라는 현상이 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에만 집중하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되는 현상을 뜻한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으로 인지 심리학계의 스타 교수가 된 크리스토퍼 차브리스(Christopher Chabris)와 대니얼 사이먼스(Daniel Simons)가 주장하는 개념이다.
0 실험 내용 : 검은 옷 선수 3명과 노란 옷 선수 3명이 농구공을 주고 받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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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노란 옷 선수들이 패스를 몇 번 하는 지 정확하게 세어 보라고 한다. 이때 공을 주고 받는 선수들 사이로 커다란 고릴라가 화면 오른쪽에서 천천히 나타나 정면을 보고 가슴을 두드리다가 서서히 왼쪽으로 사라진다.
화면이 정지되고 질문을 던진다.
“화면에 나타난 고릴라를 보았는가?”
실험 결과는 놀랍다 절반 이상이 고릴라를 못 보았다고 대답한다.
학교나 기업에서 강의할 때, 나도 동일한 화면을 보여주며 직접 실험해 보았다. 역시 절반 이상이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 실험이 끝나고 화면을 다시 보여주면, 자신이 방금 본 화면과 다른 것이라고 우기기까지 했다.
더 흥미로운 것은 기업의 임원들일수록 고릴라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장사가 잘 될수록, 나이가 들수록, 자기가 원하는 것만 보느라 세상이 어떻게 바뀌는지 모른다는 이야기다.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지식을 구성하는 첫 번째 단계다. 그러나 이 첫 단계부터 ‘선택적 지각’이나 ‘무주의 맹시’와 같은 왜곡된 현상들이 이미 나타난다. 사안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소리다. 받아들인 자극은 정보를 구성하고 , 그 정보는 서로 연합하여 지식으로 발전한다. 메타 지식과 지혜의 차원도, 있다. 이는 앞으로 설명하려는 에디톨로지의 주요 내용이다.
■ 창조는 편집이다
명칭이 낯설면 참 힘들다. 내가 ‘에디톨로지’라는 책을 쓰겠다고 하니 친구들이 “거 싸이언톨로지 같은 신흥종교 하려는 거 아니냐?” 며 놀린다. “니 그라면 교주해도 된다”며 “교주나 교수는 한끝 차이”라는 둥 제멋대로 쉴 새 없이 덧붙인다. 수십 년을 함께 지내온 친구들에게 난 언제나 ‘밥’이며 ‘안주’다.
에디톨로지는 다시 말해 편집학(編輯學)이다. 세상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구성되고,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이 모든 과정을 나는 한 마디로 ‘편집’이라고 정의한다. 신문이나 잡지의 편집자가 원고를 모아 지면에 맞게 재구성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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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 혹은 영화 편집자가 거친 촬영 자료들을 모아 속도나 장면의 길이를 편집하여 관객들에게 전혀 다른 경험을 가능케 하는 것처럼 우리는 세상의 모든 사건과 의미를 각자의 방식으로 편집한다. 이 같은 ‘편집의 방법론’을 통틀어 나는 ‘에디톨로지’라고 명명한다.
지난 10년간 나는 ‘재미는 창조다’라는 주제로 창조의 본질에 관해 주장했다. 재미와 창조는 심리학적으로 동의어다. 이에 관해서는 2005년에 쓴 ‘노는 만큼 성공한다’라는 책에 자세히 써 놓았다. 당시 그 책은 겨우 2만 부 팔렸다. 반면 새벽부터 벌떡벌떡 일어나면 성공한다는, 아주 어설픈 일본 작가의 ‘아침형 인간’은 100만부 이상 팔렸다. 흥분한 우리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아침형 인간을 대통령으로 뽑기도 했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아침형 인간이 성공하는 산업 사회는 오래 전에 끝났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얼리버드(early bird)론’은 콩쥐팥쥐 이야기만큼이나 식상한 전설이 되었다. 더 이상은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설사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 치자. 그럼 일찍 일어나는 벌레는 뭔가. 일찍 잡혀 먹기 밖에 더하겠냐는 거다. 그러는 거 아니다.
모든 창조적 행위는 유희이자 놀이다. 이같이 즐거운 창조의 구체적 방법론이 바로 ‘에디톨로지’다.
세상의 모든 창조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또 다른 편집이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하나도 없다! ‘창조는 편집이다.’
02. 창조의 본질은 낯설게 하기다.
‘지식-정보-자극’, 에디톨로지는 이 세 가지 개념에 대한 새로운 정의에서 출발한다. 먼저 ‘지식(knowledge)’은 정보와 정보의 관계다. 엄청나게 실용적인 정의다.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몇 년을 더 헤매다가 찾아낸, 지식의 본질에 대한 내 나름의 통찰이다. 지식을 이렇게 정의하면 새로운 지식은 아주 간단히 정의된다. 새로운 시작이란 ‘정보와 정보의 관계가 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한 번 구성된 지식은 또 다른 지식과 연결되어 ‘메타지식(meta-knowledge)을 구성한다. 물론 메타의 메타지식, 그 이상의 메타 지식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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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이 정보와 정보의 관계라면, 지식을 구성하는 정보는 또 무엇인가? 정보(information) 는 ‘의미가 부여된 자극’이다. 이미 설명한 대로 인간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자극만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신이 지각한 자극들에 의미를 부여한다. 적극적으로 해석한다는 뜻이다.
해석은 곧 의미부여의 행위다. 이렇게 해석을 통해 의미가 부여된 자극을 정보라고 부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보는 혼자서 해석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반드시 다른 정보와 관련되어 설명된다.
■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은 생각해 낼 수 없다
언제부턴가 ‘창조경제’ ‘창조경영’이라는 용어가 일상화 됐다. 이전과는 다른, 뭔가 혁신적인 것을 만들어내자는 의미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창조경제는 맥락이 틀린 단어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것을 창조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절대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다. ‘창조(creation)’는 신(神)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다.
오늘날 정말 많은 사람들이 창조, 창의성을 말한다. 그러나 그 의미가 매번 다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똑똑한 지식인(?)인 ‘네이버 지식인’에게 물어 보았다. 창의성을 검색하니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는 특성’이라고 나온다. 또다시 물어봐야 한다. 도대체 새로운 것은 무엇인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 상상도 못하는 것?
아, 세상에 그런 것은 없다. 다시 말하지만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생각이라는 우리의 인지 과정 자체가 그렇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 상상도 못하는 것은 절대 생각해낼 수 없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들, 들은 적 있었던 것들만 머릿속에 떠오른다. 아닌가?
우리의 생각은 ‘그림’인가, 아니면 ‘문장’인가? 심리학의 아주 오래된 질문이다. 갑론을박 끝에 심리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대충 이렇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림으로 생각한다. 어려울 때는 문장으로 생각한다. 그림으로 생각하는 것을 ‘심상(image)’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당신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가? 그 생각의 내용은 그림인가, 문장인가?
우선 아버지에 대한 그림이 떠오른다. 아버지를 특징짓는 대표적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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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웃는 얼굴이나 야단치는 모습 같은 이미지, 즉 심상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다. 문장은 그 다음이다. 복잡한 일이 있을 때만 우리는 문장으로 생각한다.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 생각을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 혼잣말을 중얼거릴 때가 있다. 문장으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논리적 사유(思惟)는 언제나 2차적이다.
0 피아제의 지연모방 : 아이가 흉내를 내기는 하되, 한참 지난 후에 하는 것
- 인간은 날 때부터 상대방의 표정이나 몸짓을 그 자리에서 바로 흉내 내는 ‘거울 뉴런’이라는 신경세포를 가지고 태어난다.
- 생후 약 1년이 지나면 아기는 ‘지연모방’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언젠가 보았던 상대의 행동을 머릿속에 사진처럼 저장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생각의 본질이 ‘어디선가 본 것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라면, 창의적 사고란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보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때문에, 창조적 사고는 일상의 당연한 경험들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한다. 이를 가리켜 러시아 형식주의의 대표적 이론가 시클롭스키는 ‘낯설게 하기’라고 정의 한다. 인간의 가장 창조적 작업인 예술의 목적은 일상의 반복과 익숙함을 낯설게 해 새로움을 느끼게 만드는 데 있다는 거다.
우리 삶이 힘든 이유는 똑같은 일이 매번 반복되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아, 남의 돈 따먹기 정말 힘들다’며 출근하고 끝없이 참고 인내해야 하는 삶에는 그 어떤 탈출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적이고 싶다면 무엇보다 이 따분하고 지긋지긋한 삶을 낯설게 해야 한다. 우리 삶에 예술이 필요한 이유다.
■ 창조는 아주 미학적인 개념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창조강박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새로운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일단, 한자로 ‘창조(創造)’라는 표현은 언제부터 쓰인 것일까? 창조는 1867년 일본에서 간행된 ‘게이오재판영일대역사전’에 처음 나타난다. ‘creativity’의 번역이었다. 이후, 일본의 식민지를 거치면서 한국도 창조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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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인, 주요한 등이 만든 최초의 문학동인지 이름도 창조(創造)
- 1960-1970년대에 이르러 미국이나 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기 시작하면서 일본식 조어인 창조보다는 창의(創意)라는 표현을 더 선호하게 됨
- 한국에서 창조보다 창의를 더 선호한 또 하나의 이유는 창조라는 표현이 갖는 종교적 의미 때문, 즉 기독교의 영향
- 90년대에 들어 ‘창조산업’ ‘창조 경제’등의 단어가 문화콘텐츠 산업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기 시작함
서양에서 창조 혹은 창의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한 것
- ‘신의 행위’로서의 창조 혹은 창의는 원시 기독교부터 사용
-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의 창조 혹은 창의는 17세기 에 처음 나타남
당시의 창조 개념은 시(詩)에만 국한된다. 미술이나 조각 같은 여타 예술은 대상을 모방할 뿐이지만, 시인은 시적 상상력을 통해 신의 방식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고 생각
- 예술에 있어서의 창조의 개념은 19세기에 이르러 확실하게 자리를 잡음
19세기 말 인상파로부터 20세기 초반의 피카소, 칸딘스키 등의 추상회화에 이르는 과정에서 수천 년간의 회화 표현 방식이었던 재현의 해체가 시작된다. 더 이상은 외부 대상을 모방하지 않겠다는 구상회화의 포기는 ‘창조적 작업으로서의 예술’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했다.
예술과 연관해 사용되기 시작한 창조의 개념은 20세기 후반에 들어 다양한 영역에서 사용되기 시작한다. 창조적 기업, 창조적 디자인, 창조적 혁신 등과 같은 단어들이 나타나고, 심지어 ‘자기창조’라는 표현이 ‘자아실현’이라는 개념을 대체하기도 한다.
03 지식권력은 이제 더 이상 대학에 있지 않다
“종이로 된 신문 읽는 사람 손들어 봐요!”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물어 보았다. 60명 중 고작 다섯 명이 손들었다. 그것도 아버지가 보는 신문을 곁에서 훔쳐보는 수준이란다. 남의 집 자식들에게 물어볼 일이 아니다. 우리 집에도 대학교 다니는 아들이 하나 있다. 그놈이 신문 읽는 것을 본 기억이 전혀 없다. TV뉴스도 안 본다. 그래도 세상 돌아가는 것은 대충 아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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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현상을 두고, 요즘 애들은 참 문제라며 혀를 찬다면 당신은 정말 늙은 거다. 정보를 얻는 방식이 전혀 달라졌다. 정보의 조합을 통해 얻어지는 지식 또한 전혀 다르다. 이런 방식이라면 그들이 구성해갈 미래 역시 전혀 다른 세상이 될 것이다. 맘에 안 들어도 할 수 없다. 미래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다. 그들이다.
■ 편집자에게 권력이 이동하고 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정보가 공유되고 지식이 구성되는 세상의 변화에 대해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민주주의에는 자유롭고 건강한 언론이 중요하다. …… 뉴스를 모으고 편집하는 조직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나는 미국이 블로거들의 세상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편집자가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에디터 즉, 편집자에게로 권력이 이동하고 있음을 주장하는 거다. 스티브 잡스가 옳다. 더 이상 정보 자체가 권력이 아닌 세상이다. 정보 독점은 이제 불가능하다. 세상의 권력은 정보를 엮어내는 편집자들의 몫이다.
신문사의 젊은 기자들은 한결같이 데스크에 앉아 자신들이 작성한 기사에 연필로 밑줄 그어가며 맞춤법까지 문제 삼는 선배들을 욕한다.
편집의 권력을 일방적으로 행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이 신문 데스크의 그 막강한 권력도 이제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젊고 어설픈 편집자에게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수십만 명의 트위터 팔로워를 가지고 있는 유명인의 영향력은 웬만한 중소 언론 매체의 영향력을 능가한다. 지식 편집의 수단을 쥐고 있는 자에게 권력이 쏠리는 시대가 된 것이다.
정보가 부족한 세상이 아니다. 정보는 넘쳐난다. 정보와 정보를 엮어 어떠한 지식을 편집해낼 수 있느냐가 편집인 세상이다. 편집의 시대에는 지식인이나 천재의 개념도 달라진다. 예전에는 많이, 그리고 정확히 아는 사람이 지식인이었다. 남들이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정보를 외우고 있으면 천재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었다. 이제 지식인은 정보를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검색하면 다 나오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지식인은 정보와 정보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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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잘 엮어내는 사람’이다. 천재는 정보와 정보의 관계를 ‘남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엮어내는 사람’이다.
우리가 인터넷 주소로 매번 처넣어야 하는 ‘www’의 의미야말로 변화하는 지식 편집의 권력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월드 와이드 웹 (world wide web)’이란, 단어 뜻 그대로 세상의 모든 지식이 그물망처럼 얽혀 있다는 뜻이다. 이 그물망에는 계층적으로 체계화 되거나 조직화되어 있는 지식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물 위의 한 ‘노드(node)’ 즉 ‘마디’를 누를 때라야 비로소 권력의 중심이 생겨난다.
■ 황우석 사건의 본질은 지식권력의 이동이다
그물망식 지식 시스템, 즉 ‘네트워크 지식’의 반대편에는 위계가 분명한 ‘계층적 지식’이 존재 한다.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지식 체계다. 대학은 계층적 지식의 생산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곳이다. 대학의 지식권력은 각 전공의 커리큘럼, 논문, 학위, 학회와 같은 제도를 통해 유지된다. 대학의 지식권력은 법적으로 보장받는다. 법으로 규정되는 지식권력의 내용은 아주 구체적이다. 대학을 졸업한 학사의 지식은 대학원을 졸업한 석사의 지식보다 못하다. 법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석사의 지식은 박사의 지식만 못하다. 그래서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과 석사 학위를 가진 사람의 강사료는 법적으로 다르게 책정되어 잇다. 국가나 공공 기관의 프로젝트를 해도 마찬가지다. 석사 인력과 박사 인력의 인건비 책정이 다르다. 심지어 원고료도 차이가 난다.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면 지식권력의 정점에 서게 된다. 세상에 무서울 게 없다. 그래서 ‘교수 세 명 데리고 부산 가기가 양 100마리 몰고 부산 가기보다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 석좌강사 : 박사 학위를 받고도 교수가 되지 못한 사람
- 한국 대학의 지식권력은 대부분 미국 유학 출신 교수에게 있다. 독일이나 여타 지역의 박사는 설 자리가 어렵다.
독일에서의 교수는 제일 폼 난다. 독일 교수는 ‘박사 Dr’와 ‘교수 Prof’를 이름 앞에 꼭 붙인다ㅣ. 석사 학위에 붙이는 디플롬 학위까지 붙이는 경우도 많다. 이럴 경우 , ‘Prof. Dr. Dipl. Psy. 김정운’과 같은 식이 된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붙이는 명칭도 요란하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이런 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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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존경하는 교수이자 박사이며 디플롬 심리학자이신 김정운씨…….” 전화번호부를 물론이고 집의 문패, 기타 주소록에도 이와 같이 써 넣는다.
국제적으로 인정하는 예술 및 인문과학 잡지에 논문을 등재할 경우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수백만 원의 연구 지원금이 나온다. 그 유명한 ‘네이처(Nature)’나 ‘사이언스(Science)’에 논문이 실리면 말 그대로 팔자 고친다.
2000년대 초 ‘네이처’와 ‘사이언스’에 논문을 실어 화제가 된 사람이 있었다. 황우석 교수다. 세계 최고의 두 잡지에 논문을 실은 후, 황우석 교수는 국가적 영웅이 되었다. 국가적으로 보호해야 할 지적 재산이라며 국정원 직원까지 그를 근접 경호했다. 실제 어떤 행사장에 경호원을 대동하고 나타난 그의 모습은 많이 황당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사건이 터졌다. 국제 학술지에 발표된 황우석의 그 논문들이 허위라는 것이었다. 다들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기를 거부했다.
TV프로그램을 제작한 PD는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다.
그러나 황우석은 결국 자신의 논문이 허위였음을 인정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황우석 논문의 문제를 파헤친 곳이 대학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국 사회의 충격은 실로 엄청났다. 다들 그의 논문이 참인지 거짓인지에만 관심을 가졌다. 국가적 자존심의 훼손만 걱정했다. 그러나 황우석 사건의 본질은 따로 있었다. 지식권력이 더 이상 대학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지식권력인 대학의 붕괴는 이미 여러 곳에서 감지되고 있었다. 그 징조들이 황우석 사건을 통해 폭발한 것이다. 여태까지의 지식은 대학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었다. 교수는 지식을 심사하고, 그 결과에 권위를 부여하는 지식권력 시스템의 최정점이었다.
이 같은 국가 공인의 지식권력이 보장하고. 세계적 지식권력에 의해 검증된 국가적 자부심인 황우석의 논문이 정체불명의 하찮은(?) 네티즌들에 의해 처절하게 붕괴된 것이다. 지식 편집의 독점권을 가진 대학의 붕괴가 황우석 사건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아무도 논하지 않는다.
■ 교수들만 모른다. 이제 지식권력은 대학에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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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지식권력의 독점 붕괴에 대한 징후는 또 있었다. ‘미네르바 사건’이다. 2008년 미국 서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해 한국에도 경제 위기가 닥칠 것이라는 경고의 글이 어느 순간부터 인터넷에 나돌기 시작했다. 교수를 비롯한 경제 전문가들은 다들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미네르바의 예언을 더 믿기 시작했다. 희한 하게도 그의 글들은 실제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그의 예언이 현실이 될 때마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 미네르바의 정체 : 이름을 밝히지 않은 대학교수나 유명 경제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추측
결국 ‘허위사실 유포’라는 황당한 죄명으로 미네르바를 잡고 보니 그는 교수도 경제 전문가도 아닌 ‘전문대 출신의 무직자였다.
미네르바는 말했다. ‘자신은 인터넷의 잡다한 지식을 짜깁기 했을 뿐’이라고.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짜깁기가 아니었다. 실제 경제 현실을 적용하여 검증된, 아주 정당한 ‘지식 펴집’이었다. 그 어떤 경제 전문가보다도 훌륭한 지식 편집이었다. 대학에서 인정하는 논문과 학위 시스템에서만 가능했던 지식 편집이 이제는 인터넷 상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에 기존의 지식권력자들은 깊은 충격을 받았다.
대학의 지식권력이 아직까지 유지되는 이유는 오로지 학위 때문이다. 이 쓰라린 현실을 이제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대학 붕괴 이후의 또 다른 세상을 준비할 수 있다. 그러나 지방대에서 교수로 있는 내 친구들은 이러한 내 주장을 너무 한가한 소리라고 비난한다. 지식권력은 서울의 ‘SKY 대학’에만 해당된다는 거다.
실제로 지방대학에서는 지식권력 운운하는 것조차 사치다. 매년 입학철이 되면 지방대 교수 대부분은 입학생을 유치하느라 고등학교 찾아다니기 바쁘다. 수시로 찾아오는 교수들 대문에 수업에 차질을 빚자 지방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정문에 이런 문구를 붙였다고 한다.
‘교수 및 잡상인 출입금지’.
황우석 사건과 미네르바 사건은 지식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종이 위에 쓰인 텍스트 중심의 논문식 지식 편집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A4 용지에 글자 크기를 정하고, 각주·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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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의 작성 요령에 따라 쓰인 텍스트로서의 논문을 심시하고, 폼 나는 가운의 석·박사 학위를 주는 방식으로 유지되는 대학의 지식 편집권력은 이미 끝났다.
이제 전혀 다른 방식의 새로운 자식 구성원리가 지배하고 있다. ‘에데톨로지’에 기초한 ‘하이퍼텍스트(Hypertext)’ 시대, 즉 탈텍스트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04 누구나 천재가 될 수 있다. 쥐 때문이다!
■ 천재의 생각은 날아갔다 다시 돌아오고
‘또라이’는 그냥 쭈욱 날아간다!
인간이 가장 창의적일 때는 멍하니 있을 때다.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멍하니 있을 때, 생각은 아주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가끔 멍하니 앉아 있다가, ‘아니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할 때가 있다. 그러고는 그 생각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거꾸로 짚어나간 경험이 다들 있을 것이다. 생각의 흐름을 찾아냈을 때, 자신이 그 짧은 동안 날아다녔던 생각의 범위에 놀라게 된다. 보통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창조적인 순간이다.
보통 사람들은 어쩌다 겪는 ‘날아가는 생각’이지만 천재에게는 일상이다. 천재와 이야기를 나눠보면 생각이 마구 건너 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무지 쫓아가기가 어렵다.
난 성공의 대부분을 운이라고 생각한다.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했다고 말하지만 , 알고 있는 ‘성공 내러티브’가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 내러티브(Nerrative) : 바탕이 되는 줄거리, 앞 뒤 인과 관계가 드러나게 엮은 허구나 실제 이야기
열심히 해서 성공했다는 식의 내러티브는 낡은 산업시대의 레퍼토리다. 세상에는 ‘죽어라 노력하는 사람’이 정말 많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실패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노력=성공’과는 또 다른 방식의 성공 내러티브가 가능해야 선진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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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다니는 생각은 천재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또라이’의 특징이기도 하다. 천재와 또라이는 종이 한 장 차이다. 천재는 날아다니는 생각을 잡아 처음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또라이는 그렇지 못하다. 생각이 그냥 계속 날아간다. 자신의 생각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마구 날아간다.
오늘날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보통사람들도 천재처럼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신이 일부 천재들에게만 부여한 ‘날아다니는 생각’을 이제 보통 사람들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바로 ‘쥐’ 때문이다. 그건 컴퓨터의 ‘마우스’다.
인간의 의식과 행동은 도구에 의해 매개된다. 숟가락을 들면 ‘뜨게’ 되어 있다. 젓가락을 쥐면 ‘집게’ 되어 있다. 포크를 잡으면 ‘찌르게’ 되어 있고, 나이프를 들면 ‘자르게’ 되어 있다. 평생토록 하루에 세 번씩 ‘뜨고, 집는’행위를 반복하는 사람의 의식과 ‘찌르고, 자르는’ 행위를 반복하는 사람의 의식은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서양인이 동양인에 비해 훨씬 공격적인 이유다.
웃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인간의 생각은 사용하는 도구로 매개된다.
■ 마우스의 발명은 구텐베르크의 인쇄 혁명을 넘어선다!
20세기 말, 마우스의 발명은 구텐베르크의 인쇄 혁명을 뛰어 넘는 엄청난 혁명적 사건이다. 이를 통해 드디어 수천 년간 인간 의식을 옥죄고 있던 ‘텍스트(text)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종이와 텍스트, 그리고 인쇄의 발명은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게 해준 엄청난 발명품이었다. 그러나 한 시대를 열었던 혁명은 그다음 시대로의 이행을 막는 반혁명적 장애물이 된다. 역사의 변증법이다. 종이와 텍스트도 마찬가지다. 인간 의식의 혁명적 발전을 가능케 했지만,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새로운 세계로의 전환을 막는 장애물이 되고 있다.
일단 종이 위에 써야 하는 텍스트이 공간적 범위는 기껏해야 A4 용지의 크기를 벗어나기 어렵다. 또한 좌에서 우로, 위에서 아래로 ‘순서대로’ 써 나가야 한다. 이 같은 텍스트의 2차원적 한계는 종이라는 매체를 버리기 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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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하다. A에서 D로 가려면 반드시 B와 C를 거쳐야 한다. 건너뛰거나 날아갈 수 없다. 논리의 비약은 바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날아다니는 생각을 대상화해 논리적 텍스트로 구현하는 순간, 창조적 내용은 사라지고 만다. 끝없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창조적 사유가 좁디좁은 사각형의 2차원적 공간에 갇혀버린다.
국가 공인의 지식 편집권력 기관인 대학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논문이라는 독특한 지식 편집 시스템을 개발했다. 지식 편집방법으로 각주, 미주, 색인, 참고문헌, 인용의 원칙 등을 개발해 지금까지 그 독점적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학위 논문을 쓸 때, 지도교수의 논문지도란 대부분이 인용부호, 각주, 미주, 그리고 참고문헌과 관련되어 있다.
■ 마우스는 그냥 쥐가 아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사이버tm페이스는 엄청난 속도로 발전했다. 컴퓨터의 용량과 데이터의 처리 속도 또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데 그 컴퓨터와 인간이 만나는 ‘인터페이스’, 즉 키보드는 어찌 그리 원시적이냐고 이어령은 ‘디지로그’에서 묻는다.
150년이 넘도록 매일같이 반복된 인류의 습관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그동안 자판 배열을 바꾸려 했던 수많은 시도는 모두 좌절 되었다. 그런데 이 컴퓨터의 자판의 한계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위대한 발명품이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마우스다. 사람들은 마우스가 스티브 잡스의 발명품인 줄 안다. 아니다. 컴퓨터에 대해 좀 더 안다는 이들은 스티브 잡스가 제록스 사의 팔로 알토 연구센터의 발명품을 훔쳐 왔다고 설명한다. 아니다. 마우스는 1968년 스탠퍼드 연구센터의 연구원이었던 더글러스 엥겔바트(Douglas Endelbart)의 발명품이다. 당시 연구소의 ‘인간지능 확장’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컴퓨터 화면에 ‘커서(cursor)’를 그래픽으로 작동시켜, 생각하는 대로 화면에 변화가 일어나도록 한 것이다.
마우스의 특허권을 가지고 있던 스탠퍼드 연구센터는 마우스의 활용분야에 대해서는 그리 많은 고민을 하지 않았다. 수년 후 고작 4만 달러를 받고 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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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사에 마우스 특허권을 넘겨버린다. 잡스가 위대한 것은 아무도 몰랐던 그 엄청난 발명품의 진가를 알아보았다는 거다.
마우스를 이용한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를 통해 이제 보통 사람들도 천재처럼 날아다니는 생각을 잡아낼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관심을 ‘클릭’하면 바로 ‘링크’된다. 귀찮게 논문의 각주 미주의 번호를 일일이 찾아 읽지 않아도 된다. 클릭하면 다 나온다. 드디어 하이퍼텍스트의 시대, 즉 탈텍스트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전적으로 마우스 덕분이다.
■ 클릭이 터치로 바뀌면서 디지털 기기는 인간적이 된다
터치다. 만지는 거다! 애플 아이팟의 성공은 만지는 데 있었다. 아이팟 1세대는 기계식 ‘스크롤 휠’을 달고 나왔다. 예쁘기는 했지만 그리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지는 못했다. 2002년에 ‘터치 휠’을 달고 나온 아이팟 2세대부터 열풍이 시작되었다. 그때까지 세상의 모든 디지털 기기는 버튼을 눌러야 했다 그런데 만지고 문지르는 디지털 기기가 나온 것이다. 손가락으로 살짝 문지르기만 해도 아이팟은 바로 반응했다. 드디어 ‘인간의 얼굴을 한 디지털 기기’가 탄생한 거다.
터치휠을 달고 나온 아이팟 2세대 이후 10년 동안, 애플은 수없이 많은 기기를 매년 새로 발표했다. 모델도 바뀌고, 기능도 바뀌었다. 그러나 최신 아이폰, 아이패드에 이르기 까지 변하지 않는 기능이 하나 있다. 터치다.
물론 삼성이나 LG의 스마트 기기도 터치로 작동한다. 그러나 손가락으로 눌러서 반응하는 ‘감압식(減壓式) 터치’와 살짝 문지르면 반응하는 ‘정전식(靜電式) 터치’는 근본적으로 다른 경험이다. 찔러야 겨우 반응이 오는 ‘40대 피부’와 살짝 닿기만 해도 바로 반응이 오는 ‘20대 피부’의 차이라고나 할까. 최근에는 감압식과 정전식의 장점만을 편집한 입력 방식이 대세다.
마우스를 사용하는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를 제일 먼저 개발했지만, 빌 게이츠의 윈도우에 형편없이 무너졌던 스티브 잡스는 터치라는 개념을 통해 디지털 시장을 다시 완벽하게 지배하게 된다.
만지고 만져지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다. 그래서 아무도 만져주는 사람 없고, 만질 사람도 없는 이 땅의 중년 사내들이 요즘 시간만 나면 스마트폰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그렇게들 사랑스럽게 문지르고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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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김용옥의 크로스 텍스트와 이어령의 하이퍼텍스트
자라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지적 충격을 받는다. ‘아, 나도 한 번 저 사람처럼 글 쓰고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다. 지식욕도 일종의 허영이다. 한번 폼 나고 싶은 거다 사람은 남들에게 폼 나 보이고 싶을 때 성장한다.
어릴 때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나이 들면서는 대중에게 폼 나 보이려고 한다. 그리고 애나 어른이나 남자는 항상 여자에게 폼 나 보이고 싶어 한다.
헤겔의 ‘인정투쟁’의 핵심은 나도 한번 폼 나고 싶다는 심리학적 동기다. 내 지적 성장과정에서는 이어령 선생과 도올 김용옥 교수가 그렇게 폼 나 보일 수 없었다. 나도 그들처럼 글 쓰고 말하고 싶었다.
■ 김용옥은 학문적 텍스트에
‘나’라는 주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1984년, 반정부 시위로 제적당했던 사람들을 일괄 구제해 준다며 군사정권이 유화정책을 폈다. 그 덕에 나 역시 채 1년도 못 다니고 제적당했던 고려대학교에 다시 들어갈 수 있었다. 해직되었던 사학과의 강만길 교수, 이상신 교수 등도 제적된 학생들과 함께 복직되었다. 그들은 전설이었다. 학생들은 공부하고 싶어 했고 선생들은 가르치고 싶어 했다.
해직 교수들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아주 특이한 교수의 이름이 학생들 사이에 회자되었다. 철학과 김용옥 교수였다. 지금과는 달리 아주 촌스러운 ‘하이카라 스타일’이었다. 검은색, 흰색 한복을 번갈아 입고 나타났다. 가끔은 이소룡 영화에 나오는 중국옷을 입고 나타나기도 했다.
그는 수업 시간에 욕설이나 성적 표현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썼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여성들의 ‘주관적인 성적 수치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표현들이었다.
김용옥은 학문적 텍스트에 ‘나’라는 주어를 처음 쓴 사람이었다. 그때까지 인문·사회과학 텍스트에 ‘나’라는 주어를 쓰는 경우는 없었다. 내 기억으로는 김용옥이 처음이다.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연과학이 학문의 전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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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겨진 후, 인식 주체인 ‘나’는 학문적 글쓰기에서 사라졌다. 자연과학적 지식의 핵심은 ‘주체가 배제된 객관성’이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의 기초는 실험의 결과로 다음의 네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1. 객관성 : 누가 실험해도 같은 결론에 이르러야 한다.
2. 신뢰성 : 반복해도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한다.
3. 타당성 : 측정하고자 하는 것을 제대로 측정했는가.
4. 표준화 및 비교 가능성 : 결과를 일반화 할 수 있는가.
과학적 주장이란 그 누구도 주관적 의견을 제시하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자연과학적 과학성이 어느 순간부터 인문, 사회과학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그 후로는 아무도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학문의 주어가 생략되어 버린 것이다.
서구 객관성의 신화에 억눌린 대부분의 교수들은 자기 이야기 하기를 주저했다. 유학을 다녀온 이들은 아예 자기 생각이 없는 듯했다. 스스로 생각해서 이론을 수립하는 것은 미국이나 유럽의 위대한 학자나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주변부 열등감에 주눅들어 보였다. 그러나 김용옥을 달랐다.
그는 ‘내 이야기’를 했다. 그가 쓴 글의 주어는 대부분 ‘나’였다. 그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이 내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내용도 엄청 났다. ‘논어’, ‘맹자’, ‘주역’을 말하다가 느닷없이 가다머(H. G. Gadamer)나 슐라이어마허(F. Schleiermacher)의 해석학을 설명했다. 고루한 논어 맹자 이야기가 그렇게도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라웠다.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에 그런 접점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 크로스 텍스트는 텍스트를 떠나지 못한다
김용옥에게는 동양고전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해석의 근거가 되는 텍스트가 무한하다는 거다. 죽을 때까지 한 이야기를 또 할 수 있다. 개신교의 목사, 천주교의 신부, 불교의 스님들이 평생 한 이야기를 하고 또 할 수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해석의 근거가 되는 텍스트가 확실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텍스트를 둘러싼 콘텍스트가 항상 변한다. 같은 이야기도 콘텍스트가 바뀌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맥락에 따라 다르게 편집된다는 말이다. 해석학의 본질은 ‘에디톨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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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 한다. 모두 내 머릿속에서 나와야 한다. 같은 이야기를 한두 번 반복하면 ‘자기표절’이라고 욕먹는다. 억울하다. 다 그놈의 청문회 때문이다. 어설픈 교수들이 정치하겠다고 나서니 자기표절이라는 말도 안 되는 단어가 나오는 거다. 세상에 자기 생각을 표절하지 않으면 도대체 누굴 표절하라는 것인가?
난 그래서 앞뒤 꽉 막힌 ‘한글전용론자’들이 몹시 원망스럽다. 한글의 의미론적 배후에는 죄다 한자가 숨어 있다. 그것을 부정하면 안 된다. 더욱이 21세기는 동양이 대세다. 실용적으로만 생각해도 한자는 필수다. 영어는 유치원 때부터 배우면서 왜 한자는 필수로 배우지 않는 것일까? 한반도의 문화사적 이해가 배제된 어설픈 민족주의는 정말 위험하다. 한국 사람이 동양 고전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정말 큰 비극이다.
■ 이어령의 하이퍼텍스트
유학을 다녀온 인문, 사회과학 분야의 교수들에게는 누구나 자기 전공이 있다. 흥미롭게도 다 위대한 서구 학자를 전공했다. 헤겔, 마르크스, 하버마스나 비고츠키 등등, 가만히 보면 이상하다. 그럼 헤겔은 누구 전공인가? 마르크스나 하버마스는 대체 누구를 전공했단 말인가?
자기 텍스트를 써야 제대로 학문을 하는 거다. 오늘날 인문학 위기를 말하는 이유는 한국의 콘텍스트에 맞는 텍스트 구성의 전통이 없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의 텍스트로 서양의 학문을 하니 도무지 상대가 안 되는 거다.
언젠가 하버마스가 한국에 와서 강연한 적이 있다. 하버마스를 전공한 국내 학자들이 모두 모였다. 그러나 정작 하버마스는 뜬금없는 이야기만 하다 갔다. 그 내용은 이렇게 요약된다. “한국에도 위대한 정신, 문화적 전통이 있다. 그 콘텍스트에 근거한 이론이 구성되어야 한다.”
옳은 소리다. 깜냥도 안 되는 미국 대학의 경영학과 교수들이 수십만 달러씩을 받고 한국 사회에 대해 아는 체하며 훈수를 두는 것보다 훨씬 정직한 태도다. 외국의 석학이라면 어설픈 ‘선수’들 모셔와 영양가 떨어지는 이야기를 듣는데 그 엄청난 돈을 지불하는 신문사나 기업을 보면 아주 속이 터진다. 한국의 지적 콘텍스트를 처절하게 고민하는 내 원고료는, 죽어라 하고 수십 매 써봐야 몇십만 원이 안 된다. 그것도 많이 주는 것이라며 생색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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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도 하이퍼텍스트적 방법론을 통해 자신의 텍스트를 끊임없이 재구성해 온 사람이 있다. 바로 이어령 선생이다.
- 하이퍼텍스트 : 컴퓨터를 통하여 저장된 정보를 학습자 자신의 필요와 관심 및 인지 스타일에 따라 자유롭게 검색하도록 도와주는 텍스트의 전개 원리
‘IT혁명’이라며 다들 ‘디지털’을 이야기하고 흥분할 때 이어령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결합인 ‘디지로그’를 이야기 했다. 디지털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다. 나는 학생들에게 그의 디지로그 개념을 ‘비데와 휴지’로 설명한다. 비데가 나왔다고 화장실에 휴지가 사라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휴지는 더 고급이 되어야 한다. 어설픈 싸구려 휴지를 쓰면 그 부위에 부푸러기가 낀다. 엄청 가렵다.
김용옥의 크로스 텍스트와 이어령의 하이퍼텍스트, 이 둘의 공통점은 바로 자기 이야기를 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김용옥은 고전 텍스트의 권위라는 프리미엄을 포기하지 않는다. 여전히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의 교차적 해석학에 머물고 있다. 이어령은 다르다. 텍스트의 끝없는 해체와 재구성이라는 모험을 시도한다. 어떻게든 자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이어령의 마이크’를 뺏을 사람이 없다.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그는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끝이 없다. 혼자만 이야기한다. 재발 좀 귀 기울여 한 번 들어보라는 거다. 그는 그래도 된다. 우리가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의심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하라
솔직히 나는 누군가에게 지적 열등감을 느껴본 적이 거의 없다. 아무리 유명한 학자를 만나도, 속으로 ‘그 정도 생각은 나도 한다’며 항상 건방을 떨었다. 그러나 이어령 선생만 만나고 나면 열등감에 풀이 죽는다. 팔십 노인에게 당할 재간이 도무지 없다. 매번 좌절이다. 도대체 그런 새로운 이야기가 어떻게 가능하냐고 물었다. 이어령은 아주 단순하다고 했다. 그는 기호학적 개념인 선택과 결합의 구조를 설명했다.
이어령은 의문 없이 외우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한다. 그가 천자문을
배우며 품었던 의심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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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하늘 천天, 땅 지地, 검을 현玄, 누를 황黃의 순서로 외운다. 그러나 이 天 , 地 , 玄, 黃의 구조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일단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고 할 때, 왜 하늘을 검다고 하는가에 관해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다 하늘이 파란 것을 안다. 그런데 왜 하늘은 검고……’라고 천자문을 외우는가. 도대체 이것이 말이 되는가.
이어령의 질문은 계속된다. 왜 천지현황의 순서인가를 의심해야 한다는 거다. 왜 ‘천현지황’이라 하지 않는가. 천과 지를 함께 묶고 현과 황을 차례로 묶어내는 이 결합 구조에 대해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의심을 할 수 없으면 새로운 생각은 아예 불가능하다.
이어령은 자신의 하이퍼텍스트적 방법론의 핵심은 텍스트를 해체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남들이 책, 즉 텍스트를 받들고만 있을 때, 자신은 이 텍스트를 해체하는 일부터 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그런 생각 때문에 이어령은 어릴 때부터 항상 건방진 놈, 잘난 체하는 놈, 얄미운 놈이라고 욕을 먹고 자랐다. 항상 미움을 받았다. 변변한 불알친구 하나 없다. 자신은 그저 이해 안 되는 것을 질문했을 뿐이었는데 다들 그렇게 미워했다는 거다. 단지 텍스트만 해체했을 뿐인데, 그토록 힘들고 외롭게 살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문학을 한 것이라고 이어령은 고백한다. 자신이 만약 사회 규범이나 도덕을 해체하고, 경제 시스템을 해체하는 정치가나 혁명가가 되었더라면 돌을 맞아 죽어도 벌써 죽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지금도 그는 자신의 서재에서, 세상에서 가장 큰 책상 앞에 앉아, 앞뒤로 놓인 여섯 대의 컴퓨터로 텍스트의 구조를 파괴하고 재창조 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혼자서.
06 노트와 카드의 차이는 엄청나다
독일에서 13년을 유학했지만, 학문적으로 영혼이 흔들릴 만큼 감동적인 경험은 별로 없었다. 애당초 유학을 간 의도 자체가 그리 순수한 학문적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내내, 운동권 언저리를 떠나지 못하다가 아무 생각 없이 졸업했다. 다들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난 정말 노동운동 체질이 아니었다.
대낮에는 교문 앞 전경들에게, 교내 토론에서는 목소리를 높였지만 난 철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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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인주의자였다. 시간이 나면 혼자 뒹굴며 클래식 음악을 들었다. 밤이면 여학생 뒤꽁무니를 쫓아다녔다. 친구들은 날 ‘프티부르주아’라고 욕했다. 당시 프티부르주아는 가장 심한 욕이었다. 이미 마음의 결정을 끝낸 친구들은 나를 압박해 왔다.
결국 유학을 가기로 했다. 그러나 미국으로 갈 수는 없었다. 대학 시절 내내, 미 제국주의를 비판했는데 어찌 미국에 갈 수 있을까. 그때 ‘우리 기쁜 젊은 날’은 다 이런 식이었다.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은 그 시절 이야기를 이렇게 담담히 꺼낼 수 있지만, 당시에는 너무나 괴롭고 힘들었다. 독일 유학에는 아주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난 내 아버지를 참 좋아한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목사 아들’이 그렇듯, 난 아버지의 그늘이 죽기보다 싫었다. ‘목사 아들’처럼 자존심 상하는 일은 없었다. 아무튼 여러 가지 이유로 당시 독일 유학은 내게 아주 탁월한(?) 도피였다.
■ “네 이론은 뭔가?”
독일 지도 교수는 다짜고짜 이렇게 물었다.
“네 이론은 뭔가?”
면담 신청을 하고, 몇 달을 기다려 겨우 만난 지도교수가 내게 물었다. 내가 펼쳐 놓은 논문 계획서는 읽어보지도 않았다. ‘내 이론이라니?’ 그때까지 나는 단 한 번도 내 이론을 생각해본 적도, 내 이론을 만들 생각도 없었다. 한국에서 겨우 학부를 마쳤을 뿐이었다. 그것도 매일같이 데모, 수업 거부, 시험 거부로 이어진 대학 생활이었다. 내 이론은 무슨!
이론은 학생이 감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 데 지도 교수는 이제 막 독일에 정착한 내게, 내 이론이 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없다고 했다. 당신의 이론을 배우러 왔다고 했다. 그러자 나가라고 한다. 석사·박사 논문을 쓰겠다는 학생이 어찌 자기 생각이 없을 수가 있느냐는 거다. 남의 이론을 요약하는 것으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고 했다. 스스로 제시하고 싶은 이론의 방향을 생각해서 다시 오라고 했다.
주체적 시선으로 공부하고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학문적 문제의식이 있느냐
는 질문이기도 했다. 내 주체적 관점이 분명해야 남의 이론을 흉내 내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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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다는 이야기다. 공부하는 방법부터 바꿔야 했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그저 대가의 이론을 이해하고 외우는 것만으로 내 이론 구성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 한국 학생들은 노트를, 독일 학생들은 카드를 쓴다
도서관에서 독일 학생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보니 아주 특이한 현상이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 작은 카드에 무엇인가를 정리하고 있었다. 학교 앞 노점상들도 다양한 크기의 카드를 팔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카드를 정리하는, 알파벳이 순서대로 적힌 다양한 모양의 상자도 팔고 있었다. 나무, 가죽, 플리스틱 등 모양과 종류도 다양했다.
독일인들은 정리에 대한 집단 강박이 있다. 어디든 정리가 안 되어 있으면 너무 불안해한다. 거의 공포 수준이다. 사람이 다치면 달려가 “Alles in Ordnung?”라고 물어본다. 의역하면 “괜찮습니까?” 란 뜻이다. 그러나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모든 것이 다 정리되어 있습니까?”가 된다. ‘괜찮은 상태’란 ‘정리가 제대로 된 상태’를 말한다. 독일 사람들은 죽어라 정리만 한다. 공장에서도, 사무실에서도, 가정에서도 정리는 의무다. 정리가 ‘정상’과 ‘또라이’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독일 학생들의 책상위에는 자신이 공부하며 요약한 카드와 그 카드를 정리하는 카드박스가 꼭 놓여 있다. 나는 한국에서의 습관대로 노트를 썼다. 내 한국식 학습 방법의 문제는 바로 노트에 있었다. ‘노트’와 ‘카드’ 이 둘 사이에는 아주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편집 가능성(editability)’이다. 카드는 자기 필요에 따라 다양한 편집이 가능한 반면, 노트는 편집이 불가능하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독일 학생들에 비해 훨씬 더 많이 공부한다. 정리하고 외우는 양을 따지면, 카드로 공부하는 독일 학생들의 학습량은 노트로 공부하는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상대도 안 된다. 독일 역사, 유럽 문화 전반에 관해서도 한국 학생들의 훨씬 더 많이 안다. 그러나 한국 학생들이 따라갈 수 없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자기 생각이다. 독일 학생들은 모은 카드를 자신의 생각에 따라 다시 편집한다. 편집할 수 있기 때문에 카드를 쓰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학생들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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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목록을 별도로 만들 방법이 없다. 노트를 재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남의 이론을 익히고 외울 뿐이다.
■ 다음 카페와 네이버 지식인의 결정적 차이
‘다음(Daum)’ 이라는 포털 사이트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제각기 다음에 카페를 꾸미고,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떼로 모여 놀기 시작했다. ‘재미 공동체’의 시작이다. 그러나 다음의 시대는 거기까지였다.
네이버는 온라인에서 사람들이 막연히 원하는 것을 구체화했다. 왜 사람들이 카페를 만들고 모이려 하는지, 그 무의식적 동기를 시스템적으로 구현했다. 지식을 찾고, 제공하고, 공유하는 ‘지식 검색’이다. 네이버의 지식 검색은 무한한 편집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아울러 ‘블로그’를 통해 사람들은 전문가의 영역이었던 데이터베이스를 각자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독일 학생들의 카드 편집과 같은 주체적 지식을 편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꼭 엄청난 이론이 아니어도 아무 상관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관해 포스팅하고, 비슷한 관심을 가진 이들과 지식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한 블로거들의 세상이 열린 것이다. ‘재미 공동체(다음)’에서 ‘지식 공동체(네이버)’로의 이동이다.
07 편집 가능성이 있어야 좋은 지식이다
‘권력’도 지식이다. 대통령이 새로 선출되면 각 부처의 장을 새로 임명한다. 단순히 부처의 장을 바꾸는 데 멈추지 않는다. 아예 없던 부처가 생기고, 멀쩡하던 조직이 사라지기도 한다. 심심해서 그러는 게 아니다. 권력을 잡은 사람은 이전의 권력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일하고 싶어 한다. 자신이 아는 방식으로 권력을 재편하는 것이다. 자신의 지식에 따라 조직을 편집한다는 이야기다.
■ 계층적 지식과 네트워크적 지식
‘기업’도 지식이다. 기업의 각 세부 조직은 시장에 대응하는 경영자의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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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반영된 결과다. 조직 개편은 그 지식의 재구조화다. 같은 분야의 기업이라도 그 기업의 조직도를 보면 경영자가 시장을 파악하는 지식이 한눈에 들어온다. 예를 들어 기업금융을 주로 하는 은행과 가계금융을 주로 하는 은행의 조직은 다르다. 분위기도 사뭇 다르다. 시장에 대응하는 기업의 경영 지식이 조직도에 그대로 반영된 결과다.
정부나 기업의 조직이 전제하고 있는 이 같은 지식은 계층구조를 가진 권력 지향적 지식이다. ‘트리(tree)’식 계층구조로 되어 있는 지식체계, 즉 ‘계층적 지식’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하다. 우리가 이제까지 학교에서 배웠던 지식이 대부분 계층적 지식이기 때문이다.
- 린네의 생물분류체계 : 계, 문, 강, 목, 과, 속, 종처럼 순차적으로 분류
- 세계 최초의 백과사전을 제작한 디드로(D. Diderot ) : 프랜시스 베이컨의 분류에 따라 인간의 지식을 분류 - 기억에는 역사를, 이성에는 철학과 과학을, 상상력에는 시와 예술을 대응하여 분류
- 계층적 지식은 인류가 문자를 처음 사용할 때부터 존재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의 가계도. 신약성서를 펼치면 ‘누가 누구를 낳고……’가 무한히 반복되는 예수의 족보 역시 트리식 계층적 분류 방식이다.
트리식으로 구조화 되어 있는 계층적 지식에는 항상 권력 체계가 반영되어 있다. 과장 보다는 부장이 힘이 세고, 학장 보다는 총장이 힘이 세다. 아는 것이 힘이 아니다. 힘이 있는 만큼 아는 것이 많아진다.
그러나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수천 년간 지탱해온 권력적 지식 구조는 그 기초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트리식 분류에 따른 계층적 지식과는 전혀 다른 지식 체계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지식이다. ‘날아다니는 생각’을 마우스와 터치로 잡아내는 하이퍼텍스트의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지식체계가 출현한 것이다.
■ 네트워크적 지식의 탄생, 폭소노미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상호작용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오프라인에서의 만남은 정서 공유를 통한 상호작용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가장 큰 동기는 관심의 공유, 즉 지식과 정보의 공유다. 쉽게 말해, 공부하고 싶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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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school)’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스콜레(scole)’다. 스콜레는 ‘여가를 즐기는 것’ ‘교양을 쌓는 것’등을 뜻한다. 그러니까 공부한다는 것은 본래 ‘삶을 즐기기 위한 기술을 배우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가장 행복한 것은 공부하는 거다. 노후의 가장 훌륭한 대책도 뭔가를 배우는 거다. 그러나 근대 이전에는 국가와 신에게 봉사하기 위한 공부가 전부였고, 근대 이후에는 ‘남의 돈 따먹기’를 준비하는 것이 공부의 목적이 되어버렸다.
포털 사이트는 지식 공동체를 시스템적으로 구현해 놓은 곳이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을 포털 사이트 곳곳에 올려놓는다.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올려놓으면, 그 자료를 퍼가는 이들로부터 감사와 찬사를 받는다. 새로운 형태의 인정투쟁이다. 가끔은 ‘파워불로거’가 되어 온라인 상의 ‘지식권력자’가 되기도 한다.
블로거들은 이런 ‘지식 공유의 장’을 무한정 제공하는 네이버 같은 포털 사이트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포털 사이트는 각 불로거들이 올려놓은 온갖 종류의 지식을 분류하고 체계화한다. 마치 미국의 심리학 교과서가 한국 심리학자들에게 지식 권력의 표준이 되는 것처럼, 포털사이트에서 체계화된 지식은 새로운 권력이 된다.
0 폭소노미(folksonomy)
- ‘folk’ ‘order’ ‘nomous’의 합성어로 ‘사람들에 의한 분류법’이란 뜻으로 소수 전문가들에 의한 분류법을 뜻하는 탁소노미(taxonomy)에 빗댄 표현
- 블로거들이 붙여 놓은 태그(tag)들을 분류한 것
0 기존의 지식이 트리식 계층구조라면 폭소노미의 지식은 탈(脫) 중심화된, 상호텍스트 구조로 편집 , 한마디로 네트워크적이다.
그렇다고 트리식 계층구조의 지식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 사회에서 권력이 평등하게 분배된 완전 평등 사회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한 권력도 없다.
권력 구조는 바뀌고, 지배의 양상 또한 변하게 되어 있다. 네트워크 지식의 등장은 계층적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권력 구조의 변화를 가속화한다. 계층적 지식이 지금까지처럼 그렇게 완고하게 버틸 수는 없다. 지식권력의 변화는 순식간에, 자주, 그리고 매우 혁명적으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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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지식권력은 편집 가능성에서 나온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인류는 계층적 지식과 네트워크적 지식이 공존하는 이제까지 전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방식의 지식 편집 구조를 경험하게 된다. 변혁의 시작은 ‘검색(search)’이었다. 트리식 계층구조를 위로부터 일일이 헤집고 찾아들어가지 않아도, 그저 간단한 단어의 입력만으로 원하는 지식을 죄다 건져 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포털사이트에 들어가 검색하는 것만으로 새로운 지식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검색된 지식들을 편집해 새로운 지식의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
정보와 정보의 새로운 편집을 가능케 하는 창조적 발견은 절대 논리적 사유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논리적 사유의 전형적 형태인 연역법과 귀납법은 순환논리다. 연역법은 그 현상이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귀납법은 그 현상이 ‘실제로’ 그렇다는 것만을 이야기할 뿐이다.
미국의 논리학자 퍼어스(C. S. Peirce)는 창조적 사유를 가능케 하는 제3의 추리법을 주장한다. 유추법이다. ‘혹시 그런 게 아닐까?’하는 ‘아마도(may be)’의 창조적 추론을 뜻한다. 검색이 발견으로 이어지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아마도’의 이 같은 질문 때문이다.
검색과 발견을 통한 지식의 ‘에디톨로지’가 미래의 지식권력을 결정한다. 계층적 지식과 네트워크적 지식의 편집 가능성이 지식의 효용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애플이 구글을 이기기 어렵다는 예언은 바로 이 편집 가능성 때문이다. 단지 스티브 잡스가 죽어서가 아니다. 잡스가 고집한 애플 생태계의 폐쇄적인 구조로는 데이터의 축적과 편집 가능성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 검증 가능성 - 반증 가능성 - 편집 가능성
과학 비과학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검증 가능성’을 주장한다.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이론만이 과학적 지식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포퍼(Karl R. Popper)는 인간의 경험은 시공간적으로 한계가 있기에 모든 것을 다 경험할 수는 없다며 논리실증주의의 검증 가능성을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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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퍼는 과학적 지식과 비과학적 지식의 기준으로 ‘반증 가능성’을 내세운다. ‘백조는 희다’는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백조를 검증할 수는 없지만 검은 백조 한 마리만 발견되어도 그 가설은 틀린 것이 된다. 모든 지식은 이렇게 반증의 사례가 발견될 때 까지만 한시적으로 옳은 것이고, 과학적 지식은 이렇듯 반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21세기에는 지식의 옳고 그름을 다지는 것 자체가 그리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증명해야 하고, 확인해야할 ‘객관적 세계’에 관한 신념 자체가 폐기된 지 오래 되었기 때문이다. 지식의 옳고 그름보다는 ‘좋은 지식’과 ‘좋지 않은 지식’으로 구분하는 것이 더 구체적이고 실용적이다.
좋은 지식의 기준은 ‘편집 가능성’에 있다. 현재진행형의 세계와 상호 작용하며 변화를 가능케 하는 주체적 행위가 가능한 지식이 좋은 지식이다. 편집 가능성이 있는 지식이 좋은 지식인 것이다.
08 예능 프로그램은 자막으로 완성된다
한때 ‘명작 스캔들’이라는 KBS 교양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다. 음악, 미술의 명작들을 대중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재미있게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PD들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료 영상을 준비해왔다. 그 영상을 보고 스튜디오의 전문가들이 서로 자신의 생각을 나누는 프로그램이었다. 취지도 좋았고, 내용도 아주 훌륭했다. 타 방송사 PD들이 모두 부러워했다. 해외에서 상도 받았다. 그러나 시청률은 매번 바닥이었다. 개편 철만 되면 프로그램 폐지 이야기가 나왔다. 결국 1년을 조금 넘기고 ‘명작 스캔들’은 폐지되었다.
스튜디오에 초청된 전문가들이 굳은 표정으로 어려운 단어만 늘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 모든 전문가들은 자신의 전문 영역을 일반인들이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하면 밥줄이 끊긴다고 생각한다. 좀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달라고 하면 전문가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하고 ‘돌팔이’ 소리를 듣는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예술의 존엄을 훼손하는 ‘명작 스캔들’ 따위에는 출연하지 않겠다는 ‘나름 전문가’도 실제 있었다.
■ TV 예능 프로그램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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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예능’이라는 용어가 아주 익숙해졌다.TV 프로그램의 한 분야를 뜻한다. 사실 2000년대로 들어서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예능 프로그램이란 아주 낯선 용어였다. 그 이전의 TV 프로그램은 대충 드라마, 쇼, 오락, 시사교양 등으로 나뉘었다. 예능이라는 용어는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쇼나 오락 대신 예능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쓴다.
예능은 원래 예술적 능력을 지칭하거나 연극, 영화, 음악 등의 영역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단어다. 그런데 요즘은 거의 ‘재미있는 TV 프로그램’의 뜻으로만 쓰인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예능은 상당히 헷갈리는 용어다. 도무지 기준도 애매하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예능 프로그램이고 어디부터가 예능 프로그램이 아닌 것일까?
‘자막’이다. TV 자막의 유무가 예능과 여타 프로그램을 구별 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물론 내 생각이다.
사실 기원을 따져 보자면 자막은 철저히 교양적이다. 뉴스 등의 중요한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 청각 장애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도입된 보조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자막이 쇼, 오락프로그램에 마구 등장하기 시작했다. 시사교양의 자막과는 그 형식과 내용이 전혀 달랐다. 시사교양의 자막은 등장인물의 말하는 내용과 100% 일치한다. 그러나 예능 프로그램에 새롭게 등장한 자막은 다르다. 출연자가 말하는 내용도 있지만, 그 외의 내용도 있다 .
자막은 그 상황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일 때도 있고, 의성이나 의태어일 수도 있다. 요즘은 화려한 ‘CG(computer graphics)’가 자막의 중요한 요소로 사용된다. 출연자의 얼굴에 땀이나 눈물을 그려 넣기도 하고,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거나 머리 위로 비가 쏟아지기도 한다. 이같이 화려한 자막을 통해 시청자는 자막이 없을 때와는 질적으로 다른 정서적 경험을 체험하게 된다.
이와 함께 수십 대의 카메라가 녹화한 화면을 오직 하나의 화면으로 편집해 내야 하는 PD나 영화감독은 이 시대 최고의 편집자다. 뛰어난 에디톨로지적 능력을 발휘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예능 프로그램의 시청자들은 출연자의 멘트뿐만 아니라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자막을 정신없이 좇아가야 한다. 수많은 목소리가 뒤섞이는 PD의 편집 화면은 시청자로 하여금 TV 안으로 빠져들도록 만든다. 예능 프로그램의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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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는 소설, 음악, 영상의 재미가 포괄적으로 편집된, 총체적 경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이나 독일의 TV에서 이런 식의 자막은 거의 볼 수 없다.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 독일의 쇼 프로그램을 보면 엄청나게 지루하다. 오페라를 보다가 무반주의 소프라노 아리아를 듣는 기분이다.
최근에는 스마트폰을 통한 ‘VOD(video on demand 맞춤 영상 정보 서비스)’까지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보려고 시간 맞춰 TV 앞에 앉아 있을 필요도 없어졌다. 스마트폰만 켜면 다 볼 수 있다. 그래서 지하철이나 버스만 타면 죄다 스마트폰에 머리를 박고 쪼그리고 있는 거다. 전 국민이 거의 영상 중독이다.
■ 자막의 시작은 만화의 말풍선이다
예능 프로그램식 자막 편집은 한국과 일본에서 주로 나타난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예능 프로그램의 자막은 일본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현상이다. ‘예능(藝能)’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렇다. 일본에서는 쇼나 오락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을 통틀어 ‘게노우진 藝能人’이라 부른다. 일본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는 게노우진의 숫자는 엄청나다.
일본 예능 프로그램의 자막이 화려해진 까닭은 자막의 기원이 일본 만화 즉 ‘망가(漫畵)’의 말풍선이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 만화가 가장 먼저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선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그러나 최근 몇십 년 동안은 일본 만화가 대세라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이젠 ‘망가’라는 일본식 고유명사가 글로벌한 일반명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최근 만들어지는 드라마, 영화중에는 일본 망가를 원작으로 하는 것들도 셀 수 없이 많다. 심지어 할리우드 영화조차 이제 일본 망가를 베낀다.
일본 망가가 영상적 편집 방식을 만화에 도입했다고 한다면, 요즘의 예능 프로그램은 만화적 편집 방식을 TV 화면으로 끌고 들어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영상과 만화, 텍스트의 에디톨로지가 21세기 대중매체의 특징이다. 도무지 경계가 없다. 이는 만화나 예능 프로그램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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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연기력이 형편없는 배우도
영화에 출연할 수 있는 이유
예전에는 누가 주연배우인가가 영화를 선택하는 데 가장 중요했다. 감독이 누구인가에 관해 사람들은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은 다르다. 감독이 누군지가 훨씬 중요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감독했다면 일단 믿고 본다. 감독의 역량이 영화의 수준을 결정한다는 것을 대중들도 알게 된 것이다.
영화감독이 영화의 주체, 즉 영화의 창조자임을 분명하게 하기 때문이다. 소설 창작의 주체가 소설가이듯, 영화 창작의 주인은 감독이다. 배우나 스토리 작가가 아니다. 감독이 영화의 실체를 구성하는 편집권을 전적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본질은 에디톨로지다.
■ 몽타주 기법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영화는 없다
영화는 편집의 예술이다. ‘몽타주(montage) 기법’ 때문이다. 서로 다른 맥락의 화면을 이어붙이는 방법을 뜻하는 몽타주 기법은 미술에서 나타난 ‘콜라주(collage) 기법’의 연장선에 있다.
미술에서의 몽타주 기법은 서로 관계없는 여러 장면, 사진 등을 한 화면에 담아 새로운 정서적 경험을 가능케 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 같은 몽타주 기법이 시간의 흐름을 잡아내는 영화에 적용되면서 인류는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처음 영화가 발명되자 사람들은 경악했다. 흐르는 시간을 화면에서 반복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 어제 일어난 일을 오늘 화면에서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감격했다. 그러나 그 감동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무 스토리 없는 화면은 곧바로 지루해졌다.
영화 제작자들은 연신 하품을 해대는 관객들을 사로잡는 획기적인 방법을 찾아냈다. 각기 다른 카메라로 잡은 화면을 이어 붙여 하나의 연속적인 화면으로 편집하면 새로운 정서적 경험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몽타주 기법은 불연속적인 정보, 서로 모순되거나 부자연스러운 정보를 의도적으로 제시해서 관객의 적극적 해석을 유도하는 상호작용적 방법론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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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할 수 있다. 영화가 재미있는 이유는 관객의 몰입을 이끌어내는 몽타주 기법과 같은 상호작용적 방법론이 극대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영화는 영화음악이라는 또 다른 편집 수단을 가지고 있다. 화면과 음악의 에디톨로지다. 영화음악이 없었다면 영화는 오늘날처럼 주류 문화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에서 음악이 빠졌다고 생각해 보라.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감동의 양이 절반 이하로 확 줄어든다. 그래서 영화는 영화관에서 봐야 하는 거다. 화면이 커서가 아니다. 영화관을 꽉 채우는 영화음악 때문이다. 음악은 공간이 악기다. 어느 공간에서 연주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음악이 된다. 사실 화면에서 진행되는 스토리에 몰두하느라 관객들은 배경음악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바로 그 때문에 영화음악이 중요한 거다.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강력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영화는 배경음악으로 완성된다. 바로 이 부분이 눈에 띄지 않는 감독의 에디톨로지적 역량이다.
화면과 화면의 편집을 통한 몽타주 기법, 그리고 화면과 음악의 편집을 통한 총체적 에디톨로지로서의 영화는 지금도 여전히 진화하고 있다. 앞으로 가상현실과 영화, 게임 등이 편집되면 또 어떤 에디톨로지의 세계가 펼쳐질까 아주 궁금해진다. 그래서 아주 오래 살고 싶은 거다. 어쩌면 난 안 죽을 수도 있다.
10 클래식을 좋아한다면
절대 카라얀을 욕하면 안 된다
오늘날 시는 죽었다. 시인을 자처하는 이들은 있어도, 시를 읽는 이들은 없다. 아주 가끔 시가 쓰일 때는 있다. 말랑말랑한 연애시를 트위터로 날려 ‘리트윗’이나 잔뜩 받기 위해서다. 슬퍼할 일은 아니다. 시대가 바뀌면 시대정신을 노래하던 매체도 바뀐다. 시를 쓰고 읽어야 할 젊은이들은 이제 랩을 노래한다. 21세기의 랩은 20세기의 시다. 시만이 아니다. 소설도 죽어간다. 클래식 음악도 죽어간다. 베를린 필하모니나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에 한번 가보라. 거의 노인정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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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서구에서 클래식 음악의 희망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클래식 음악 시장의 주도권은 이미 동양으로 넘어왔다. 유명콩쿠르 입상자는 아시아계가 대부분이다. 유럽 음악대학 클래식 전공자의 절반 이상도 아시아계다. 그래서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 등이 뻔질나게 도쿄, 상하이, 베이징, 서울을 들락거리는 거다. 과거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유럽의 클래식 음악 시장이 다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일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없었더라면 서구 클래식의 몰락은 훨씬 더 일찍 시작되었을 것이다.
■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시간의 편집자다
사실 오케스트라가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갖춘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바로크시대 이후에 오케스트라의 기본 형태를 갖추기 시작해서 18세기 후반인 모차르트, 베토벤 시대에 이르러 2관 편성 이상의 대형 오케스트라를 이루게 된다.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듯 베를리오즈를 ‘근대 오케스트레이션의 아버지’론 본다면, 오케스트라는 19세기 중반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역시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초기의 지휘자는 지팡이로 바닥을 치는 식의 기본 박자만 잡아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작곡자가 대부분 지휘자를 겸했기 때문에 지휘자의 곡 해석이 필요한 경우도 별로 없었다. 오늘날과 같이 ‘마에스트로’라고 불리며 음악을 해석하여 재생산하는 적극적인 역할의 지휘자는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가능해 졌다. 우리가 기억하는 유명한 지휘자 이름이 모두 20세기 이후의 인물인 것도 그 때문이다.
오늘날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전근대적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직업이다. 지휘자의 지휘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연주자는 없다.
오케스트라단원은 아무리 잘해서 수석 단원이 되어도 지휘자가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한다. 오직 지휘자의 뜻에만 따라야 한다. 제멋대로 했다가는 바로 아웃이다.
관객은 음악을 들으면 저절로 몸을 움직이게 되어 있는 본능을 누르고 지휘자의 뒤통수만 바라봐야 한다. 지휘자만 혼자 신난다. 춤추고, 발을 구르고,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온갖 폼 나는 동작을 혼자만 취한다. 클래식이 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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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휘자만 홀로 폼 나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탱크, 비행기를 맘대로 움직이는 별 네 개짜리 참모총장이 하나도 안 부럽다.
지휘자는 ‘지휘봉’이라 불리는 막대기 하나만으로 오케스트라의 각 악기들이 내는 소리의 강약과 연주 속도를 조절한다. 특히 연주 속도는 지휘자의 곡 해석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영역이다. 같은 곡이라도 지휘자가 누구냐에 따라 음악이 달라진다. 같은 곡이라도 다른 속도로 지휘한다는 말이다. 결국 지휘자는 ‘시간의 편집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지휘의 에디톨로지를 아무도 상상치 못한, 다른 차원으로 변화시킨 이가 바로 카라얀이다. 지휘의 에디톨로지를 시간의 편집에서 이미지의 편집으로, 혁명적 전환을 가능케 한 것이다.
■ 최초의 뮤직비디오 제작은 카라얀이었다
음악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찌감치 눈치챈 카라얀은 음악과 영상의 편집을 시도한다. 사람들은 카라얀이 세계 최초의 뮤직비디오 제작자라는 사실을 잘 모른다. 뿐만 아니다. 스스로 예술 감독, 영상 감독을 자처한다. 1965년 예술 감독으로 오페라 ‘라보엠’을 찍은 후, 1967년에는 오페라 ‘카르멘’의 연주를 본인이 직접 감독한다.
당시 기껏해야 공연 실황으로 연주되던 클래식 공연을 카라얀은 다양한 영화적 기법을 동원해 최초의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 이후 본격 등장한 베를린 필 하모니 뮤직비디오는 거의 ‘카라얀 감독, 카라얀 각본, 카라연 주연’이었다. 그의 지나친 나르시시즘은 욕먹어 마땅하다. 그렇다고 해서 ‘눈으로 보는 음악을’ 창조해낸 카라얀의 업적을 폄하해서는 안 된다. 대중음악 뮤직비디오는 카라얀의 뮤직비디오가 제작된 후 한참 뒤에 만들어졌다.
카라얀은 ‘음악과 영상의 편집’이라는 21세기 에디톨로지의 선구자다. 클래식 음악의 영역으로만 그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가 엄청나게 예쁜 부인을 포르쉐에 태우고, 베를린에서 잘츠부르크까지 무지막지한 속도로 달렸다고 배 아파해서는 안 된다. 그가 없었다면 클래식은 그야말로 늙은이들의 음악으로 20세기 중반에 사라졌을 확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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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만들어낸 그 폼 나는 영상들이 클래식에 대한 대중적 환상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클래식이 오늘날까지 우아하게 버틸 수 있는 것이다.
카라얀은 클래식의 황제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 그 숱한 음악가들이 그 덕분에 오늘날까지 폼 나게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순전히 내 생각이다.
Part 02 관점과 장소의 에디톨로지
01 관점의 발견과 서구 합리성의 신화
스티브 잡스가 인문학과 기술의 만남을 이야기하니, 곳곳에서 인문학 열풍이다. 모두들 동서양의 고전을 펼치며, 오래된 지혜에서 길을 찾아보려고 한다.
인문학을 공부 한다는 것은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을 배우는 일이다. 세상을 ‘좌’아니면 ‘우’로만 보고, 내 편이 아니면 바로 적이 되어버리는 형편없는 시대이기에 인문학을 다시 공부해야 한다. 인문학은 나와 다른 시선에 관한 관용과 이해를 전제로 한다. 세상을 보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다양한 관점을 인정하는 일이다.
잡스가 강조하는 인문학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방식으로 기술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제까지 기술이란 효율성과 같은 경제적 가치로만 평가되었다. 이젠 아니다. 애플 기기의 ‘디자인’은 미학적 가치가 디지털 기기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두드려야 하는 키보드가 아니라 ‘터치’로 연결되는 디지털 세상은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그 딱딱한 기계의 세상이 아니다.
■ 다들 관점을 바꾸라고 한다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항상 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자기계발서의 대부분은 ‘관점을 바꿔라!’로 요약할 수 있다. 세상과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
꿔야 성공할 수 있다는 거다. 도대체 관점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자꾸 바꾸라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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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을 찾아봤다. 관점은 ‘보고 생각하는 위치’란다. 보는 위치와 보는 방법이 바뀌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는 이야기다. 똑같이 삼각형으로 늘어선 삼각형들의 군락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삼각편대가 오른쪽으로 가는 것으로 본다. 왼쪽으로도 다른 방향으로도 갈 수 있다. 그렇게 관점의 다른 차원을 발견해야 성공할 수 있고 행복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른쪽으로 가는 것으로만 본다. 왜 그럴까? 우리는 책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기 때문이다. 인간 문화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순서가 대부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받아들이도록 구성되어 있다.
나는 요즘 일본에 산다. 지난 십 몇 년간 국내에서 하도 정신없이 살다보니, 심리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가는 곳마다 자꾸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거다. 짜증이 난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과부하가 걸렸다는 의미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번 아웃(burn-out)’이라고 한다. 에너지가 다 소진되었다는 뜻이다. 좀 차분히 공부하며 지내야 할 것 같아 안식년을 진청했다.
일본으로 바로 건너왔다. 나라현립대학의 객원교수로, 아주 한적한 시골인 ‘나라’에서 혼자 지낸다. 우리나라의 부여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정말 심심하다. 아무것도 없다. 사슴만 잔뜩이다.
아침이면 자전거를 타고 아주 작고 예쁜 나라현립도서관에 간다. 앞에 장바구니가 달린, 일본 아줌마들이 타는 자전거다. 그런데 하루에 한두 번 꼭 위험한 순간이 생긴다.
길을 건널 때다. 오른쪽으로 먼저 봐야 하는데, 꼭 왼쪽을 먼저 본다. 일본은 운전석이 우측에 있고, 자동차들은 좌측으로 달린다. 그러니까 내가 길을 건너려면 오른쪽부터 봐야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처럼 항상 왼쪽부터 본다. 느닷없이 오른쪽에서 “끼익”하는 브레이크 소리가 들린다. 이땐 낭만이고 뭐고 정신이 쏙 빠진다. 벌써 몇 번째다.
위에서 삼각형 군락의 움직임을 한국 사람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간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은데 비해 일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일본 책의 구성이 대부분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그토록 순종적인 거다. 위에서 시키면 아주 착하게 따라한다. 시키면 칼로 배도 가르고, 옥쇄(玉碎)도 하고 가미카제도 한다.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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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때, 위에서 아래로 끊임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읽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순전히 내 가설이다. 그러나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은 아니다. 심리학 실험에 그런 사례가 있다.
관점이 다르다는 것은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순서가 다르다는 뜻이다 문화가 다르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향과 순서에 차이가 있다는 의미다.
문제는 단순히 관점을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문화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문화가 다른데, 어찌 몇 주 혹은 몇 달 애쓴다고 관점이 바뀔 수 있을까. 그래서 어설픈 자기계발서는 읽고 나면 허탈하다. 읽을 때 뿐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관점을 영어로 찾아봤다
관점은 영어로 ‘퍼스펙티브(perspective)’다 어떤 개념이든 문화적 배경을 갖게 되어 있다. 보다 깊이 이해하려면 그 어원을 살펴봐야 한다. ‘퍼스펙티브’는 ‘원근법’ 혹은 ‘투시법’과 그 어원이 같다. 이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사실이다. 관점을 바꾼다는 것은 단순히 세상을 보는 위치를 바꾼다는 의미가 아니다. 관점, 즉 원근법을 바꾼다는 것은 ‘세상을 구성하는 방식을 바꾼다는 뜻이다.
근대 이후, 세계 거의 모든 나라들이 서유럽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몰락했던 이유는 다들 이야기하듯 과학기술의 발전이 늦었기 때문이다. 기차, 배, 대포, 총 만드는 능력이 뒤쳐져서다. 그러나 이렇게 간단히 설명하고 끝내면 안 된다. 도대체 동양은 왜 과학기술의 발전이 늦었냐는 거다.
과학적 사고의 부재 때문이다. 과학적 사고의 기초는 ‘객관성’과 ‘합리성’이다. 객관성과 합리성은 원근법이라는 아주 구체적인 세계의 구성 원리의 전제가 된다.
서구 원근법의 전제는 두 가지다. 첫째, 세상을 보는 눈은 하나여야 한다. 소실점에 대칭되는 위치의 시선이다. 바로 이때부터 서구 ‘객관성의 신화’가 시작된다.
둘째, 3차원 세상은 소실점으로부터 떨어진 거리에 비례하여, 2차원의 평면에 그대로 옮길 수 있어야 한다. 합리성의 시작이다. 하나뿐인 소실점으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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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 떨어져 있는 물체는 ‘거리의 비례’에 따라 객관적 좌표가 정해진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합리적 기준이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이 서구 객관성과 합리성의 신화에는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 소실점, 즉 객관성과 합리성의 기준이 철저하게 ‘자의적’이고 ‘권력적’이라는 사실이다. 소실점을 누가 찍느냐에 따라 2차원에 투사된 결과물은 전혀 다른 것이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도무지 이 소실점의 위치를 의심하지 않는다. 아니, 의심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교육받는다.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원근법의 소실점은 철저히 권력적이다. 서구의 과학적 사고는 바로 이 권력을 아주 은밀하게 은폐하는 데서 출발한다.
02 우리는 윈도(창문)로
세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고 믿는다
원근법은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유리로 된 창문’의 발견과 기원이 같다. ‘환기를 목적으로 하는 창문’ 혹은 ‘외부의 빛을 내부로 끌어들이기 위한 창문’과 ‘밖을 내다보기 위한 창문’의 철학적 근거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은 창밖의 3차원 세계를 유리벽이라는 2차원의 세계로 환원시킨다. 동시에 3차원적 경험을 그대로 간직한다.
‘객관적으로 본다’와 ‘창문으로 세상을 본다’는 같은 의미다.
원근법의 발견은 객관성의 발견이 아니다. ‘주체’의 발견이다. 인식하는 주체, 즉 ‘주관성’의 발견이라는 뜻이다. 객관성과 합리성으로 요약할 수 있는 원근법이 동시에 주체의 발견을 포함한다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다. 서로 모순관계인 객관성과 주관성이 함께 구현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한 개의 축이 생기려면 반드시 다른 쪽의 축이 생겨야 한다. 서로 모순되는 양극단의 성립과정을 서양철학에서는 ‘변증법’으로 설명하고 동양철학에서는 ‘음양의 원리’로 설명한다.
원근법 회화에서 소실점의 위치는 화가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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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관찰자들에게, 자신이 선택한 지점이 소실점을 맞춰야 한다고 우기는 태도는 지극히 권력적이다. 문제는 이처럼 ‘권력이 은폐된 소실점’을 사람들은 여전히 객관적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03 원근법은 통제 강박이다
■ 시간과 공간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문화가 생겼다
좌표가 잡히지 않는 공간은 공포다. 도무지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디로 흐르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은 더 큰 공포다. 공간은 발이라도 붙어 있지만, 시간은 그저 붕 떠 있다. 그래서 존재의 본질은 ‘불안’이다.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이다.
하이데거의 ‘세계-내(內)-존재’란 시간과 공간에 아무 대책 없이 ‘내던져짐’을 의미한다. 내던져짐을 한자로 말하면 ‘피투성 被投性’이다. ‘아무 곳도 아니고, 아무 곳에도 없다’라고 하는 불안의 존재는 피투성이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전혀 가늠할 수 없는 이 불안을 견디지 못해 인간은 ‘여기와 지금(here and now)’이라고 하는, 존재의 확인을 위한 좌표를 정하기 시작한다.
시간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시간을 분절화 한다. 하루를 24시간으로, 그리고 일주일, 한 달, 그리고 1년, 이렇게 반복되도록 했다. 반복되는 것은 하나도 안 무섭다. 다시 돌아오기 때문이다.
반면 공간에 대한 공포는 시간에 비해 훨씬 구체적이며 감각적이다.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내다보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무한한 공간에 대해 공포를 느낀다. 그래서 땅의 지도를 그리고 하늘의 별자리를 그리게 된다.
‘공간에 질서 세우기’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지도의 원형은 문양(文樣)이다. 지도를 갖기 훨씬 전, 인류는 자기 소유의 대상에 문양을 넣었다. 선사시대 인류의 생활용품에 새겨진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문양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발견된다.
도대체 고대 인류는 왜 사물마다 문양을 그려 넣은 것일까? 대상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세계 어느 곳에서 발견되든, 문양은 언제나 대칭적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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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적이다. 내 소유의 물건은 내 통제하에 있다는 권력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기하학적 문양이 구체적 대상을 묘사한 문양에 비해 훨씬 먼저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구체적 대상이 그려진 문양의 등장은 인류 문명의 발달이 한참 더 진행된 다음에야 나타났다. 원시 인류의 모든 문양에서 대칭성과 기하학적 특징이 먼저 나타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재현 가능성’ 때문이다. 비대칭적인 것들은 재현하기 어렵다. 동물이나 식물을 흉내 낸 구체적인 문양도 재현하기 어렵다.
재현 가능성이란 반복 가능하다는 뜻이고, 반복 가능성은 곧 통제 가능하다는 뜻이다. 규칙과 질서를 부여해 무한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려는 인간의 시도는 시간과 공간, 두 영역 모두에 해당된다.
■ 권력은 원근법으로 공간을 편집한다
인류가 만든 가장 문양적인 정원은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이다. 그 화려하고 엄청난 규모의 정원은 왜 만들었을까?
단순히 절대권력의 과시를 위해서가 아니다. 언제 그 절대 권력에서 쫓겨날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만들었다. 작은 도자기나 천에 문양을 만들어 ‘소심’하게 권력을 확인했던 고대인들과는 달리, 절대 권력은 자신의 눈이 닿는 공간의 끝까지 규칙적이고 대칭적인 문양을 그려 넣었다.
절대 권력의 정원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원근법적 원리까지 적용하여 자신의 성이 소실점의 정 반대편에 위치하도록 했다 대칭과 균형의 정점에 자신의 시점을 위치하도록 한 것이다. 자신의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이 자기 권력 안에 있음을 확인하려는 시도다.
프랑스 절대 왕정은 무너졌지만 권력은 계속된다. 프랑스 혁명과 반혁명, 승전과 패전의 기억을 위해 권력은 수도인 파리 한복판에 개선문을 세우고, 그 개선문을 중심으로 파리 시내 공간을 재편한다. 특히 나폴레옹 3세 때 이뤄진 오스망 남작의 도시계획은 근대 권력의 공간적 완성이다.
오스망 남작은 철저하게 원근법적 원리에 의해 도시를 재편집했다. 개선문을 중심으로 대로를 내고, 길 양쪽에는 가로수를 심었다. 시선을 가리는 것들은 모두 제거했다. 또 다시 있을지도 모르는 혁명과 바리케이트를 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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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쇄하려고 골목길을 없애고 대로를 냈다고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그런 목적은 2차적이다. 공간 편집을 통한 권력의 시선 확보가 오스망식 도시개혁의 목적이었다.
■ 관점은 하나만 있어야 한다는 모더니티의 강박
그림을 보는 시선이 하나여야 한다는 서양의 원근법은 근대 이후 글로벌 스탠다드로 자리 잡았다. 모든 현대식 교육은 이 원근법에 맞추어 이뤄진다. 그러나 세상을 보는 방식이 오직 한 가지일 수는 없다. 3차원을 2차원으로 표현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르네상스식 원근법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동양 회화에서는 전혀 다른 형태의 원근법을 볼 수 있다 .‘역원근법’이다. 선원근법에 따르면 가까운 물체는 크게 멀리 있는 물체는 작게 그려야 한다. 그러나 역원근법은 말 그대로 정반대다. 책을 비롯한 선비들의 문방사우를 그린 책가도(冊架圖) 같은 그림들을 보면 앞쪽이 작고, 뒤쪽이 크다.
서양의 선원근법과 ‘책가도’에 나타난 역원근법의 차이는 단순한 회화기법의 차이가 아니다. 인식론의 차이다.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상대방의 시선, 혹은 제3의 시선이 더 중요하다. 역원근법은 지금 그림을 보고 있는 내 반대편의 시선에서 그림을 그렸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내게 가까울수록 작아지고, 내 반대편에 있는 타인의 시선에 가까울수록 커진다는 것이다.
동양 회화에 나타나는 관점은 제3의 초월적 시선을 전제로 한다. 많은 경우, 하늘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조감도(鳥瞰圖)’의 형태를 취한다. 조감도는 한자 뜻 그대로 ‘새가 내려다보는’ 관점이다. 대게 이 관점은 하나로 통일되지 않는다. 다양한 관점이 섞이게 된다.
서구의 원근법에 관해 독보적인 연구 성과를 보여주는 독일 출신의 미국 미술사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는 르네상스 이후의 선원근법이란 하나의 ‘상징형식’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다양한 재현 방식 중의 하나라는 거다. 어떤 규칙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세계는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재현할 수 있다. 서구의 원근법만이 유일하게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라 주장하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다.
르네상스 선원근법의 확립 이후, 서구에서 구성된 모더니티의 핵심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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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의 통일’에 대한 강박이다. 이는 객관성, 합리성, 표준, 통일성의 철학으로 전개해나간 근대 서구 사상사의 핵심이기도 하다. 근대에 들어오면 서구의 이 같은 세계관은 권력과 맞물리며 ‘식민지주의’라는 구체적 형태로 나타난다. 뿐만 아니다. 시선 자체가 권력이 된다.
04 권력은 선글라스를 쓴다
■ 시선은 철저하게 권력적이다
근대성, 즉 모더니티는 권력의 시선을 숨긴다. 원으로 둘러싸인 죄수들의 모든 방을 간수가 한가운데서 감시할 수 있게 되어 있는 푸코의 원형감옥 파놉티콘은 이 모더니티의 ‘간지(奸智 간사한 지혜)’를 잘 설명해 준다. 죄수들은 간수가 도대체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니 항상 자신이 관찰 당하고 있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당연히 감옥 안의 규율을 스스로 알아서 다 지킬 수밖에 없다.
시험 볼 때 교실 뒤편에서 교사가 뒷짐 지고 서 있는 것도 마찬가지 원리다. 학생들은 시험 시간 내내 교사가 자신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다는 공포에 시달리며 답안지를 작성한다. 커닝 따위는 어림도 없다. 스스로 정직하게 답안을 작성하는 편이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그런데 막상 답안지를 내고 돌아서면 감독 교사는 창밖을 보며 딴 생각을 하고 있다. 아, 그때의 그 배신감이란.
시선은 권력이다. 권력을 가진 자만이 소유할 수 있다. 고궁에 들어가 보면 왕의 의자는 항상 높은 곳에 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각종 국가 행사에서 대통령의 의자는 가장 높고, 정 가운데 있다. 원근법의 소실점처럼 모든 절차의 기준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권력자의 위치는 행사장의 모든 상황을 시선으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가장 높은 곳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사람의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는 참석한 모든 사람의 마음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그가 웃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가 박수치면 행복하다. 그의 표정이 싸늘하면 바로 불안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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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생기면 좋은 곳에 별장을 짓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시선을 소유하기 위해서다. 먹고살기 바쁠 때는 시선 자체에 별 관심이 없다. 그러나 삶의 여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시선을 구매한다. 오늘날 ‘조망권(眺望權)’이라는 애매한 권리가 법적 다툼이 되는 이유는 권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별장도 없고, 풍광 좋은 조망도 소유할 수 없는 사람들은 주말마다 산에 오른다. 단순히 건강에만 좋으라고 산에 오르는 게 아니다. 그저 건강만 생각한다면 산 중턱까지 오르락내리락 하지, 뭐하러 매번 죽어라 정상까지 오르겠는가? 실제로 눈 덮인 얼음 바위산을 오르다가 죽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조지 말로리(George Mallory)라는 유명한 영국 산악인은 이렇게 말했다. “산이 거기 있으니까!” 젠장, 난 그따위 하나마나 한 소리 하는 이들이 제일 싫다.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그냥 오르게 아니다. 시선을 소유하고 싶어서다. 누구도 가질 수 없는 그 절대적 시선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다. 더 정확히 설명하면, 세상을 전부 소유하는 것 같은 그 시선에 대한 욕망 때문에 산에 오르는 거다. 물론 이는 ‘세속적 권력’과는 질적으로 다른 ‘미학적 권력’이다. 칸트는 이를 ‘장엄의 미학’이라고 정의한다.
5·16을 대표하는 아주 인상적인 사진이 있다. 권총을 허리에 찬 박종규 소령, 수류탄을 가슴에 매단 차지철 대위를 양 옆에 세우고, 검은 선글라스를 쓴 채 뒷짐을 진 박정희 장군의 모습이다. 50년이 넘은 지금도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사진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도대체 왜 그렇게 멋있어 보였을까?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선글라스 때문이다.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뛰어난 연출이었다. 그 라이방이 주는 메시지는 확실하고 단순했다. 또한 강력했다. ‘나는 너희들을 본다. 그러나 너희들은 나를 볼 수 없다.’
■ 동양에서 모더니티 형성이 늦은 이유
동양은 서양에 비해 근대가 늦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늦은 게 아니다. 달랐을 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동양이 서구 식민지로 몰락했던 구체적 이유는 시선의 일원화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동양에는 서양의 절대 왕정에 비해 훨씬 더 일찍 집중된 권력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상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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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선 원근법과 같이 단 하나이 소실점을 향해 사회의 모든 문화와 가치가 회귀하는 전방위적인 단일 체계는 아니었다.
동양의 시선은 서양 근대의 ‘싱글 퍼스펙티브’ 즉 과학주의나 객관주의와는 전혀 다른 문화심리적 구성 체계에 근거한 ‘멀티플 퍼스펙티브’였다.
서구의 싱글 퍼스펙티브는 주체의 관점이 하나이며, 변함없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 기원은 소실점이 오직 하나뿐인 원근법이다. 관점이 항상 싱글 퍼스펙티브일 수밖에 없는 서구의 원근법에는 주체의 관점이 동시에 다양하게 공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각기 다른 관점들의 차이는 어쩔 수 없이 권력투쟁의 문제로 환원된다.
관점이란 주체와 대상과의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그리고 한시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는 동양의 편재적 관점, 즉 멀티플 퍼스펙티브와는 질적으로 다른 세계관이다.
근현대 세계사는 서구 싱글 퍼스펙티브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그러나 21세기의 환경문제, 빈곤문제와 같은 전 지구적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싱글 퍼스펙티브의 서구 모더니티는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다. 즉 서구 세계관의 한계다.
2015. 1. 8
* 다음에 Part 02 의 05장부터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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