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라도 멀지 않다(2)
집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라도 멀지 않다(2)
■ 원철 스님 산문집
3. 길을 잃으면 길을 알게 된다
■ 그림자, 거품도 모으는 게 인간사다
아침 죽을 먹은 후 마루 위에서 댓돌의 신발을 추스르는 중이었다. “노 픽쳐(No picture)!”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여러 스님네들의 시선은 일제히 샛문 쪽을 향했다. 카메라 몇 대가 우리를 향해 연신 셔터를 누르던 중이었다. 어색한 침묵의 순간이 지났고 이내 주변은 평정됐다. 두어 시간이 지난 후 “차 한 잔”달라는 전화가 왔다. 평소 알고 지내던 사진작가였다. 무박 이일로 출사를 나왔다고 했다. 대뜸 “찍을 게 없다.”는 푸념을 했다. 고즈넉한 자연 풍광과 어우러진 옛 정취를 찾아다니지만 어디건 전깃줄, 소화전, 스피커, 현수막 때문에 ‘그림’이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순간 달포 전에 다녀갔던 불교 미술사를 연구하는 소장학자에게 부탁받은 일이 떠올랐다.
법주사 마애불은 ‘일어나려는 순간’을 새긴 것이라고 했다. 발가락에 힘을 주면서 자연스럽게 허리가 가늘어지는 자태가 여느 마애불과는 다른, 동적(動的)인 모습이 압권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마애불 전면에 놓인 단(壇, 탁자)이 발 부분을 가리고 있어서 그 장면을 찍을 수가 없다는 안타까움을 토로한 후 돌아갔다.
몇 년 전에 의욕적(?)으로 설치했다는 화강암 탁자의 틈과 4개의 다리 사이를 비집고 억지 감상을 하다가 마침내 돌 탁자를 옮기기로 했다. 다 옮기고 돌아보니 그 옛날 노천 법당의 분위기가 제대로 살아났다. 가려지기 전 마애불의 자연스러운 본래 모습을 만나는 기쁨을 누렸다. 연꽃무늬가 새겨진 직사각형 바닥돌과의 조화로움은 불상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특히 힘을 잔뜩 주고 있는 엄지발가락과 날렵한 허리선을 중심으로 여러 장 반복해 사진을 찍었다.
- 1 -
금강경엔 ‘모든 존재는 이슬과 같고 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는 구절이 있다. 찰나에 생겼다가 사라지는 게 주변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순간 속에서 영원을 포착했다. 특히 사진이 그랬다. 성철 스님은 사진집인 ‘포영집(泡影集)’을 남겼다. 그림자(影)와 거품(泡)을 모아둔다(集)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래도 때때로 모아야 하는 게 인간사다.
■ 주전자가 찻주전자가 되듯 번뇌도 깨달음이 된다
그 차인을 만난 것은 몇 년 전이다. 그 뒤 매년 이맘 때 즈음이면 잊지 않고 일부러 찾아와 손수 법제한 차를 한 봉지 갖다 준다. 올해도 그 마음은 변함없었다. 하지만 서로 자꾸 길이 어긋나 이번에는 우편물을 통해 받았다.
그가 보낸 차는 특이하게도 뜨거운 물을 부으면 누워 있던 찻잎이 수직으로 일어선다. 맛과 향도 그만이지만 눈 맛이 일품인 까닭에 언제나 투명한 유리 다관에 넣고 우려내면서 그 모양새를 즐기곤 한다.
절기로 곡우 전에 나온다는 우전차(雨前茶)는 햇차를 상징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언젠가 지인이 중국을 다녀오면서 ‘명전차(明前茶)이니 맛보라’고 하면서 주고 갔다. 곡우보다 한 절기 앞선 청명 무렵에 나온 차라는 것이다. 햇차는 ‘우전차’라는 등식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하긴 따뜻한 운남성은 곡우 보름전인 청명 무렵이면 햇차가 나올 만도 하다.
지구 온난화 때문인지 한반도 동쪽은 양산 통도사가 한계선이던 차가 요즈음은 물로 유명한 경주 기림사까지 올라왔다.
대구 팔공산에도 한 독지가가 10여 년 전 ‘3만 그루의 차나무를 심었는데 올해 첫 수확을 했다고 한다. 겨울마다 비닐하우스와 방풍망을 설치하고 바닥에 왕겨를 뿌리는 등 인위적인 노력이 더해지긴 했지만 말이다.
‘초엽 따서 상전께 주고, 중엽 따서 부모께 주고, 말엽 따서 남편께 주고, 늙은 잎은 차약 찧어 아이 아플 때 먹인다.’
구전되는 민요에서 보듯 차는 새잎보다는 오래된 잎이 약효가 더 뛰어나다. 지리산 언저리에 살고 있는 도반 스님 방에는 찧어 놓은 차약 두 덩어리를 축구공만 한 크기로 매달아 놓았다 수십 년 지나면 오래된 보이차만큼 그
- 2 -
값어치가 만만찮게 될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마을의 ‘주전자’는 절집에 오면 ‘차관’이 된다. 막걸리를 담는 게 아니라 백차인 청정수를 올리는 데 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다관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어쨌거나 같은 그릇이지만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주전자가 되기도 하고 차관이 되기도 한다. 주전자가 차관이 되는 것처럼 번뇌가 바로 깨달음으로 바뀌는 것이니, 범부의 모습으로 성인이 되는 것 역시 어려운 일만은 아닌 것이다.
■ 해와 달의 길이 따로 있으리오?
성철 스님이 파계사에서 철조망을 치고 동구불출(洞口不出, 암자 밖으로 나서지 않음)하며 10년을 머물렀다. 물론 참선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간에 전해져 오는 것은 대장경을 두루 열람하신 것으로 알려진다. 또 장경각(개인 도서관)이라고 불릴 만큼 누구보다도 많은 경전을 소유했고 열심히 읽었다. 불교 경전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 서적은 말할 것도 없고 주변 학문에도 밝아 설법할 때마다 종횡무진으로 인용했다. 그런데 늘 후학들에게 “정진 할 때는 책을 보지 말라”고하셨다.
도대체 ‘이 모순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는 것이 때론 화두 아닌 화두가 되기도 했다.
이런 논리는 ‘강을 건넌 후 뗏목을 버려야 한다’는 초기불교의 뗏목론에서 시작하여 중국으로 오면서 ‘고기를 잡으면 통발은 필요없다’는 장자의 ‘득어망전(得魚忘筌)’에 바탕하는 통발론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팔만대장경은 고름 닦는 종이에 불과하다’는 선종 휴지론의 연장 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경전으로 인하여 깨달음의 지남(指南, 이끌어 가르침)을 얻은 수행자가 있는가 하면 대장경으로 인하여 허송세월을 보낸 스님들도 많았다. 따라서 전자는 긍정론적 시각을 가지게 되고 후자는 부정론을 펴게 된다. 결국 경전 자체의 허물이라기보다는 당사자의 수행결과에 경전이 어떤 역할을 했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다.
뗏목론과 통발론 그리고 휴지론이 “참으로 옳은가?”를 묻는 후학의 질문에, 파릉 선사는 “닭은 추우면 나무로 올라가고, 오리는 추우면 물로 내려가느니
- 3 -
라(鷄寒上樹 鴨寒下水)”고 말했고 낙포선사는 “해와 달이 허공에 오가는데 누가 따로따로 길이 있다고 하리오.”라고 대답했다.
여전히 그 말씀도 보통 사람들에게 난해하고 또 알쏭달쏭한 시어(詩語)이지만 그래도 곰곰이 헤아려보면 그 속에 해답이 있을 것도 같다.
■ ‘공부의 신’을 만나다
영어의 상용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한국의 불교문화 역시 이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지관 대종사는 노구를 이끌고 영역(英譯) 사업을 발원한 것이다. 이런 흐름을 비교적 빨리 간파한 곳이 티베트 불교계였다. 영어 시대를 이미 오래전에 예언한 것이다. 티베트 망명정부가 살아남은 것도 결국 구성원들의 ‘유창한 영어 실력’의 결과였다. 일찍부터 그들은 세계 곳곳에 문화원을 세웠다. 그 덕분에 지구촌에서 가장 잘 알려진, 그리고 영향력 있는 교단이 되었다. 얼마 전에 달라이 라마가 백악관에서 오바마 대통령을 만난 사진이 크게 언론을 장식했다.
그 옛날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교문화를 전파하고자 건너 온 승려들은 당연히 중국어 때문에 애를 먹었다. 인도 말과 중국어를 동시에 구사하는 선생을 만나기란 모래톱에서 바늘을 찾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었다.
구나발타라 스님 역시 그랬다. 5세기 즈음 인도에서 중국으로 왔으나 서툰 중국어가 더 이상 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은 기도였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하던 어느 날 밤, 흰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 머리를 통째로 바꾸어 주는 꿈을 꾸었다. 그 이후부터 중국어가 유창해졌다. 그야말로 ‘공부의 신’을 만난 셈이었다.
중국어건 영어건 아무리 잘한다 할지라도 모국어가 아닌 이상 언어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일정한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왕도가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편법으로 누구든지 ‘한 방에’ 끝낼 수 있는 지름길 내지는 요행수를 찾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의 희망이 모여 있는 종교적 전각들이 더러 있다. 일본에는 입시철마다 공부를 잘하게 해달라고 비는 신사가 곳곳에 있고 우리나라에도 수험 기도에 영험이 있다는 몇몇 사찰들이 입소문을 타고 있기도 하다.
- 4 -
0 영어 하면 떠오르는 원명 스님
- 10년 동안 참선을 위해 선방을 전전하던 어느 날 난데없이 학교에서 배우던 영어가 생각나기 시작 - 화두 자리를 대신하여 영어가 머릿속을 가득 채움 - 해제하고 딱 석 달만 영어 공부를 하기로 작정하고 상경 - 실력이 일취월장 - 그 뒤 스님은 우리나라 불교문화를 외국에 알리는데 평생을 헌신
0 말콤 글래드웰 의 ‘아웃 라이어’에 나오는 ‘일만 시간의 법칙’
-자기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을 10년 동안 하루 3시간 이상 꾸준히 노력하면 전문가가 된다는 설
■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자서전
몇 년 전 난생 처음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을 때 그 당황스러움은 아직까지 기억에 생생하다. 해인사에서 오랫동안 관여했던 월간지에서 ‘전관예우’를 한답시고 이루어진 인물 취재였다. 사진 찍던 사람이 도리어 찍히는 듯한 기분인지라 내심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옛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응했다. 그 과정에서 나름대로 요령을 부렸다. 편집자의 수고를 덜어준다는 핑계 아닌 핑계를 대면서 서면 질문지를 받아 스스로 모범 답안을 작성했던 것이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살아온 날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길지도 않은 세월의 흔적 속에서 외형이나마 그럴 듯한 행적을 중심으로 정리했다. 결국 평범한 필자가 어느새 ‘꽤 괜찮은 인물’로 그려져 있는지라 스스로 실소를 금치 못했다.
얼마 전 유수사찰 사보(寺報)에서 두 번째 인터뷰 요청이 왔다.
얼굴이 두꺼워졌는지 내공이 쌓였는지 알 수 없지만 몇 년 사이 나도 모르게 조금 용감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두 번의 인터뷰 기사를 합친다면 나의 부분적 자서전은 될 듯하다.
사실 자서전은 아무리 솔직하게 쓴다고 해도 현재 남아 있는 기억에 의해 다시 구성된 허구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기억 자체가 탈락과 변형 과정을 거친 결과물인 까닭이다. 그래서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낸다고 해도 그게 오히려 역으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내용으로 바뀌어 버리는 근원적인 한계를 지닌다. 아예 의도적으로 버리고 싶은 과거
- 5 -
위에 부풀려 포장한 업적을 덧씌우면서 사실과 다른 자기를 재창조하기도 한다. 또 살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뿐인데 마치 그렇게 살기 위해 살아온 것처럼 결과론적 해석을 내 놓는 함정 속으로 스스로를 빠뜨리기도 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자서전은 십중팔구 외면 받기 쉬운 위험한 장르이기도 하다.
성직자들만큼 고백을 좋아하는 부류도 드물다. 그렇지만 대부분 남의 고백만 해당된다. 정작 자기 고백은 대부분 소홀하다. 그 이유는 늘 상대방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을 살아온 탓이다. 그리고 그들은 항상 자기보다 똑똑한 남을 가르치려고 든다. 중세도 그랬고 요즘도 마찬가지다. 사실 황금사슬이든 오랏줄이든 얽매여 있는 것은 매한가지다. 종교에 얽매여 있는 것이나 세상일에 얽매여 있는 것이나 얽매인 것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사실 제대로 된 고백이란 솔직함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생각에 힘을 뺄 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종교인 자서전 중에서 솔직함으로 가장 유명하다. 달라이 라마의 자서전 ‘티벳! 나의 조국이여’는 망명객의 진솔한 아픔이 녹아있다. 문선명 목사의 자서전은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솔직함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읽지 말자’고 외치는 안티 그룹도 있었다. 어쨌거나 누구든지 고백을 통해 자신의 삶을 만인에게 헌상하는 것은 참으로 용기 있는 일이다. 그래서 불완전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도리어 감동을 주기에 일부 자서전은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얼마 전 조계종 법전 스님의 자서전 ‘누구 없는가’가 나왔다. 출간을 위해 나도 곁에서 미력이나마 보탰다.
문선왕(공자)은 술이부작(述而不作)을 말했다. 늘 있는 것을 그대로 기록할 뿐 새롭게 지어낸 것은 없었다고 했다. 아난존자는 항상 ‘이와 같이 들었다’는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경전의 서두를 장식했다. 자서전 펴내는 일을 도우면서 ‘술이부작’과 ‘여시아문’이란 말을 유달리 강조했던 두 성현의 속내까지 이심전심으로 읽혀졌다.
결론적으로 자서전이란 어떤 이에게는 물고기를 잡고 난 뒤의 통발 같은, 혹은 강을 건넌 뒤 돌아보지 말아야 할 뗏목처럼 쓸데없는 허망한 책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래도 또 다른 사람에게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역할은 할 터이다.
- 6 -
■ 칭짱 열차의 철길 그리고 오체투지의 흙길
티베트로 가는 칭짱 열차의 시발점은 칭하이(靑海) 성 시닝(西寧)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멀기에 24시간 동안 기차를 타야 한다는 것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서울과 부산 사이를 3시간에 달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우리에게 호기심 반 긴장감 반을 불러일으켰다. 침대칸에 여장을 풀고 잠을 청했지만 쉬 눈이 감기지 않았다. 비몽사몽간에 열차는 나그네들의 잠을 깨우지 않을 만큼 조용히 밤새 편안하게 달려 주었다. 창 밖에는 추석이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조금 이지러진 보름달이 허공에 매달린 채 계속 열차를 따라왔다.
티베트 불교의 중심지 라싸는 이런 통과의례를 갈 수 있는 ‘높은(?) 곳’이었다. 이른 아침에 들른 시내 중심가의 조캉사원 앞에선 수많은 남녀노소가 0.5평의 자기 방석 위에서 온몸을 바닥에 내던지며 절을 하는 오체투지의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렇게 절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경이로움이었다. 사원의 참배코스인 둘레길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온 몸으로 절하며 돌고 있는 순례객을 만나는 일도 다반사였다. 티베트에서 오체투지는 별스러울 것도 없는 수행법이다.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 살면서 절 수행을 통해 녹록치 않은 현실을 이겨냈고, 때론 시절이 만들어 낸 정치적 모순을 향해, 침묵의 시위 아닌 시위를 해왔던 것이다. 그것은 티베트 불교가 가진 또 다른 힘이요, 내재된 생명력이었다.
몇 년 전에 봤던 작품이 뇌리를 스쳐갔다. 절을 하며 기어가는 순례자와 달리는 열차의 모습을 동시에 포착한 외신 기자의 사진 한 컷이었다. 새로 만든 철도 위로 번쩍이는 기차가 위용을 자랑하는데, 철길과 나란히 뻗은 길을 다라 오체투지로 성지 순례에 나선 남루한 참배객의 모습이 그림처럼 정지된 사진이었다. 정치와 종교, 기술과 신앙이라는 두 명제가 모순과 조화를 이룬, 21세기 삶의 양면을 한 장으로 압축한 명작이었다.
정치 경제의 쇠바퀴가 아무리 빠른 속도로 구른다 할지라도 그것이 티베트의 현안을 일거에 해결하지는 못할 것이다. 느리디 느린 오체투지 기도 역시 그들이 원하는 바를 찰나에 얻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칭짱 열차는 오늘도 씩씩하게 달린다.
더불어 먼지 폴폴 날리는 길 위의 오체투지 행렬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 7 -
■ 맺힌 것은 풀고 풀린 것은 묶다
늘 이맘때(음력 4월 15일) 즈음이면 절집 안은 90일의 여름 안거가 시작된다. 이를 결제(結制)라고 부른다. 석 달 동안 산문 밖 출입을 삼가고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하도록 만든 특별기간이기도 하다. 함걸 선사는 “자기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4면 8방에 밝은 바람이 흐르도록 만들어라.”고 하여 외적인 고요함과 내적인 치열함이 함께하는 결제를 주문했다.
하안거 역사는 2600여 년 동안 유장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이어져 오늘에 이르렀다. 하지만 시작은 사소했다. 그것은 인도 지방의 우기라는 독특한 기후 때문이다. 당시에는 가지려고 해도 가질 수 없는 ‘그늘’ 조차도 오래 머물게 되면 혹여 그것에 대한 미련과 애착심이 생길까 봐 같은 나무 밑에서 사흘 이상 머물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철저한 무소유와 무주(無住, 잠시 머묾)를 실천했지만 석 달 동안 내리는 폭우 앞에선 어찌할 수가 없었다. 거친 비를 피해 자연스럽게 넓은 동굴 안이나 큰 지붕 밑으로 모여들었다.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리면서 상대적으로 ‘편안한 머물기(安居)’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본래 떠돌이였지만 할 수 없이 한시적인 붙박이가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중국, 일본, 한국 등 동양 3국은 함께 모여 수행하는 곳을 총림(叢林)이라고 불렀다. 대중(함께 수행하는 스님들)이 풀과 나무처럼 빽빽하게 서 있는 까닭에 내키는 대로 어지럽게 자라지 못하도록 서로 붙들어 주는 공간인 까닭이다.
머묾이라는 결제와 떠남이라는 해제(解制)는 수행승의 몸과 마음을 조화롭게 만들었다. 머물 때는 모두가 푸른 산처럼 꿋꿋한 자태로 살았지만 떠날 때는 한결같이 자유로운 흰구름이 될 수 있었다 .때로는 하늘 높이 우뚝 서기도 했고, 때로는 바다 밑에 깊이깊이 잠기기도 했다. 그 잠김을 통해 속살이 여물어야 다시 솟아오를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긴장과 느슨함으로 맺힌 것이 있으면 풀었고, 마냥 풀어진 것이 있으면 다시 야무지게 묶었다. 물이 흐리기만 한다면 피곤함이 묻어날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고여 있기만 한다면 답답함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흐를 곳에서는 흘러야 하고 머물 곳에서는 머물러야 하는 것이 물의 순리인 것처럼 인간사 역시 그랬다. 따지고 보면 인생이란 것도 이동과 머묾의 반복이다.
- 8 -
머묾은 정체를 의미하고 그렇다고 해서 지나친 이동은 불안정을 내포한다. 어쨌거나 농경 시절에는 이동하는 성격을 ‘역마살’이라 하여 부정적으로 불렀지만 현대 IT시대엔 그것이 또 다른 경쟁력이 되었다. 노마드(nomad 떠돌이)가 칭송되고 붙박이는 알게 모르게 ‘도태’라는 뉘앙스가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동과 머묾이 적절한 조화가 이루어 졌을 때 이동은 이동대로 머묾은 머묾대로 같이 빛나게 된다.
알고 보면 이 세상 전체가 80년 평생을 머물러야 하는 거대한 총림이요 또 수도원이다. 서로 의지하며 또 참지 않고서는 함께 살 수 없는 땅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살기 위해선 붙박이건 떠돌이건 서로 배려하고 양보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했다. 그것은 나와 남에 대한 부끄러움을 아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 까닭에 법연 선사는 이런 소박한 구절을 남겼다.
“20년 동안 죽을힘을 다해 공부해 보니 이제 겨우 내 부끄러운 줄 알겠다.”
■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이여, 마음 세계에도 등을 비춰라
조계사 일주문 앞에는 예년처럼 ‘부처님 오신 날’을 봉축하는 등을 조심조심 내걸고 있었다. 극락전 앞에, 가신 이들을 위해 낮게 달아 놓은 하얀 영가등과 대웅전 앞마당 회화나무에 높이 걸린 형형색색의 다섯 가지 오방색 등이 묘한 대비를 이루면서 복잡한 현재의 우리 심정을 그대로 대변해 주었다. 등이야 해마다 같은 등이지만 바라보는 이의 느낌은 시절의 형편 따라 달라 보이기 마련이다. 그동안 많은 등을 보고 듣고 또 만났다. 그래서 등은 이 세상 사람들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임을 알았다.
남포등 이야기는 불일암 후박나무 밑에 잠든 법정 스님의 글에 나온다. 남포는 원래 램프를 동아시아 식으로 표기한 말이다. 그런데 스님은 그 등을 굳이 ‘호야등’이라고 표현했다. 이 한마디 단어 속에서도 나름의 개성이 알게 모르게 드러난다. 스님은 해인사 시절 밤새 등을 켜놓고 책을 읽었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경전을 번역하였고 또 윤문하는 일까지 돕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큰절에서는 아홉시만 되면 무조건 불을 꺼야 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럼에도 그때 이미 ‘큰 그릇임’을 알아본 산중 어른인 자운 대율사의 배려로 밤새도록 불을 밝힐 수 있었다.
- 9 -
하지만 가난한 산중이라 법정 스님 역시 초와 기름이 넉넉할 리 없다 그래서 그 어른은 시자를 시켜 양초와 등유가 떨어지지 않도록 늘 챙겨 보내곤 했다. 전기 없던 시절의 훈훈함이다.
“아궁이에 불이 타는 동안 등잔에 기름을 채우고 램프의 등피를 닦아 둔다.” 등피인 유리를 닦으며 마음을 함께 닦았을 것이고, 기름을 채우면서 젊은 날 괴팍했던 당신을 이해해 주고 알아주었던 그 어른을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남포등은 법정 스님에게는 추억의 등이었다.
등은 예나 지금이나 한밤중에 들어야 제격이다. 깜깜한 산길이라면 더욱 빛날 것이다. 하지만 알렉산더 대왕과 또 다른 의미에서 단짝이었던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한낮에 등불 들기를 즐겼다. 온 시내를 쏘다니면서 입으로 연신 ‘어둡구나! 어둡구나!’를 외치며 천천히 걷곤 했다. 그건 어떤 눈먼 사람이 밤에 등불을 들고 서 있는 것보다도 더 의아함을 자아내는 행동이었다. 자기는 빛을 볼 수도 없으면서 등불을 든 그에게 지나가던 호기심 많은 사람이 이유를 물었다.
“혹여 남들이 나를 보고서 부딪히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돌아온 답변은 참으로 허를 찌른다. 오히려 눈뜬 이를 위한 ‘배려의 등’이었던 것이다.
반대로 디오게네스는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 때문에 한낮에 등을 들었다. 그건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세계의 반쪽에만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훈계하려는 선지식의 대중을 향한 사랑이었다. 사실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래서 정말 어두운 줄조차 모르는 내면의 마음 세계도 함께 비쳐 보라는 자비심의 또 다른 표현이었던 것이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이렇게 혼잣말을 해 본다.
자등명(自燈明 )하라.
자기를 등불로 삼을 지어다.
■ 굽은 대로, 곧은 대로, 먼저 앞으로 나아가라
대만의 중대선사(中台禪寺)에 들렀다. 산(山)이라는 글자 모양의 디자인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본관의 널따란 로비에는 최신형 대형 건물에 어울리는 현
- 10 -
대식 조각 작품인 무쇠로 만든 사천왕이 듬직하게 네 모서리를 지키며 당당하게 서 있었다.
개인적으로 시원찮은 건강 탓인지는 몰라도 사천왕과 호법선신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품고 있는지라 그윽한 눈길로 부분 부분 샅샅이 살폈다. 우람한 근육질과 부리부리한 눈매는 남성미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호소력이 짙은 중저음이었다. “행복해지려거든 많이 보라.”고 눈이 유난히 큰 광목(廣目)천왕이 일러주었다. 또 곁에 있던 귀가 큰 다문(多聞) 천왕은 “행복해 지려거든 많이 들으라.”고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낮은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어쨌거나 많이 보고 많이 들으면 사람이 바뀐다. 세계관이 바뀌고 인생관이 달라지면 행복관 역시 좀 더 성숙되기 마련이다. 이를 중국 속담은 ‘만 권의 책을 읽고 만리 길을 여행하라’고 한마디로 일렀다. 그 말에서 한 단계 더 진화한 것이 조선선비 어유봉의 말이다. ‘산을 거니는 것은 독서와 같다(遊山如讀書)’고 하여 여행이 곧 독서라는 입장을 피력했다.
중국 민가에 대한 기행문을 쓴 윤태옥씨는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길에서 하는 독서다. 독서는 지식이고 여행은 사색이다. 독서로 혜안(慧眼)을 얻고 여행에서 개안(開眼)한다’ 라고 했다.
불광산사에는 ‘곡직향전(曲直向前)’을 세련된 디자인 글씨체로 내걸었다. 굽으면 굽은 대로 곧으면 곧은 대로 먼저 앞으로 나아가고 볼 일이다. 굽은 것과 곧은 것을 비교만 하다보면 가야하는 길조차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의 길은 곧은길인데 내 길은 왜 이렇게 굽었는가를 반문하다보면 애당초 첫걸음조차 더뎌지면서 갈 길은 더욱 멀어지기만 할 것이다. 설사 굽은 길이라고 하더라도 늘 굽을 수만은 없다. 마찬가지로 곧은 길 역시 늘 곧을 수만 없다. 모든 길이란 늘 곧고 굽은 것을 함께 갖기 마련이다. 그것은 본래 길이라고 하는 것의 양면성이다.
굽은 길을 두려워한다면 절대로 곧은길을 만날 수 없다. 혹여 곧은길이라고 마냥 안심한다면 굽은 길을 만나 낭패를 보기 마련이다.
■ 아무리 좋은 일도 일 없는 것만 못하다
따끈한 방 안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며칠을 뒹굴었다. 이 맛에 토굴살이
- 11 -
를 하는 모양이다. 누구도 간섭하는 이 없고 또 굳이 찾아서 해야 할 일도 없다. 그저 머물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다. 결국 사흘을 넘기지 못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자체도 일이라고 느끼는 시점이 그 무렵인 까닭이다. 그것이 권태로워 또 몸을 움직일 만한 일거리를 찾는다.
두리번거리면서 뭔가 소일거리를 찾는데 굽기야 눈길은 마당의 정원수에 꽂혔다. 가지치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 삐죽삐죽 삐어져 나온 것이 거슬렸다.
가지치기 작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마와 등줄기에 땀이 흥건하다. 잠시 마루에 앉아 쉬었다. 내가 자른 나무를 거리를 두고 바라보니 이건 가지치기를 한 것이 아니라 거의 맨손으로 뜯어 놓은 것 같다. 들쭉날쭉 제멋대로다.
- 종로의 가로수 은행나무 : 나무의 모양과는 상관없이 가로등 때문에 간판 때문에 전깃줄 대문에 제멋대로 잘라져 흉한 꼴로....
- 조계사 마당의 회화나무 : 제멋대로 마음껏 자란 가지를 펴고....
- 어떤 나무는 가지를 치지 않아 너무 많이 달린 열매 때문에 가지가 찢어지고, 한겨울 제법 고상한 이름의 설해목은 소복하게 쌓인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가지가 찢어지는 고통을 당한다.
그래서 가지치기가 필요한데 그걸 잘 구별하는 일이 쉽지 않다.
어쨌거나 삶에도 가지치기가 필요하다. 나무 가지를 잘라내듯 우리의 삶에도 가지치기는 있어야 한다. 어떤 작가는 감나무는 스스로 가지치기를 한다고 노래했다. 나무도 자기 욕심을 다룰 줄 아는 까닭이다. 스스로 가지치기를 하지 않는다면 결국 남에 의해 가지치기를 당하기 마련인 것이 세상일이다. 우리의 인생도 그러하다. 나와 내 주변을 스스로 가지치기하지 못한다면 결국 모두의 불편함으로 이어지고 이는 강제된 가지치기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산중 생활은 역시 겨울이 제맛이다. 오가는 사람조차 없는 겨울 산에서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로지 나의 내면세계를 향한 치열함을 유지할 수 있어서다. 겨울 산사는 일 없는 것을 으뜸으로 삼아야 제격이다. 단순해진 겨울산은 군더더기가 없다. 모든 나무들의 가지치기가 끝난 탓이다. 수행이란 스스로를 가지치기하는 일이다. 끝을 모르는 번뇌의 생각줄기를 잘라 주
- 12 -
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남은 잎사귀까지 털어버려야 한다. 모든 것을 떨군 나무와 윤곽이 드러난 산줄기의 모습을 가만히 음미하면서,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아는 안목을 즐기는 일은 한겨울에만 누릴 수 있는 또 다른 멋과 여유이기도 하다.
눈서리 내린 강산에 나뭇잎을 비워버렸는데
상락강산수엽공(霜落江山樹葉空)
천길 바위 곁 긴 대나무엔 밤바람이 일어나네
천암수죽야생풍(千巖修竹夜生風)
■ 감출수록 드러나는 운둔의 반전
해인사 홍류동천 십리길을 천천히 걸었다. 감추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하면서 길은 이어졌다.
올레길이니 둘레길이니 하면서 지역마다 여러 가지 이름으로 걷는 길이 유행처럼 만들어질 무렵 ‘홍류동길’도 ‘소리길’이 된 것이다. 눈이 맑았던 시절에는 봄 진달래, 가을 단풍을 감상하며 ‘홍류(紅流)’라는 이름을 붙였다. 소리길은 눈은 물론 귀까지 호사롭기를 원했다. 그래서 물소리 바람소리가 함께하는 길이라는 의미까지 살렸다.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지면서 눈과 귀를 동시에 만족하게 하는 아름다운 이름의 명품길이 다시 탄생한 것이다.
그 길의 중간쯤에 있는 농산정은 신라 말기에 은둔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감춰지길 희망했던 고운 최치원 선생이 칩거한 곳이다. ‘주역’에는 ‘천지의 기운이 막히면 현인들은 숨는다’고 했다. 속마음은 세상이 꼴 보기 싫어 숨지만 밖으로는 천지의 기운이 막힌 까닭에 은거할 수밖에 없다는 명분을 제공해 주었다.
고운이 여러 은둔처를 찾다가 마침내 이 자리로 낙점한 까닭은 그의 형인 현준(賢俊) 대사가 마침 해인사에 머물고 있었고 형의 도반이었던 정현 스님과도 도담(道談)을 나눌만한 허물없는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농산정 인근 맞은편 언덕에는 지금도 ‘짧은 은둔’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해 몇 채의 기와집이 ‘민박’ 간판을 달고 있다. 정감록은 이 지역을 피신하기 좋
- 13 -
은 십승지에 포함했다. 세계문화유산이 된 팔만대장경이 6백여 년 전 해인사로 옮겨진 것도 결국 자연재해가 미치지 않는 명당인 까닭이다.
농산정 앞에서 ‘세상 다투는 소리 귀에 닿을까 두려워 흐르는 물로 만겹의 산을 쌓았네’라고 읊었던 시인을 향해 일제강점기의 예운 이동식 거사는 “이미 흐르는 물로써 세상의 때를 씻었으니 만 겹 산으로 다시 귀를 막을 필요는 없다.”고 훈수하면서 제야고수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이동식 거사는 농산정뿐만 아니라 홍류동천을 중심으로 가야한 19명소에 대한 연작시를 남겼다. 오래전 나는 습작 삼아 열아홉 편의 한시를 한글로 번역했다. 그런데 소리길이 생기면서 모퉁이마다 그 시가 한글 안내판 구실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앞에서 한자 한자 소리 내어 읽으면서 “좋다!”하고 맞장구를 쳐주는 누군가를 만날 때면 역자로서 흐뭇한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감춘 것은 당사자의 의지이지만 알려지는 것 제삼자의 뜻이다. 숨은 것을 들추고자 하는 것이 누구의 허물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황 선생은 안동 골짜기 계곡으로 숨으면서 ‘퇴계(退溪)’라고 이름했고, 성철 스님은 가야산 백련암으로 몸을 옮기면서 ‘퇴옹(退翁)’으로 자청했다. 신비주의를 의도한 은둔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신비주의적 은둔이 되었다. 은둔이 역설적으로 세세생생 당신들을 드러나게 한 것이다.
이 역시 은둔이 가진 또 다른 반전 아니겠는가?
■ 문자만 뒤따라가면 결국 넘어진다
책이란 수집이 아니라 읽을 때 생명이 살아난다. 그래서 가장 좋은 책은 자기 손때가 반질반질 묻은 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특히 경전류는 삶의 길을 알려주는 길라잡이다. 하지만 인생길 안내 책자 속에 모든 내용을 담아 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록 너머에 있는 것은 현장에서 온몸으로 부딪쳐야만 비로소 체득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기록할 수 없는 내용이 더 많다는 사실을 일찍이 선지식들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고 이름 붙였다.
문자만 뒤따라가다 보면 결국 글자에 걸려 넘어지기 마련이다.
당나라 때 만 권 책을 읽었다는 이발 거사는 ‘작은 겨자씨 속에 큰 산이 들어간다’는 화엄경의 구절에 막혔다. 그래서 찾아간 귀종 선사에게 “수박만
- 14 -
한 그 머릿속에 만 권 책이 어디에 들어 있느냐.”는 꾸중을 듣고서야 자신의 속살림을 다시금 살피게 된다. 또 읽던 대로 백날 읽어 봐야 아무 이익이 없다. 그래서 ‘법화경’을 삼천 번 읽었노라고 주변에 자랑하던 법달 화상은 혜능 선사에게 “경을 읽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경에게 읽힘을 당한 것.”이라는 핀잔을 들어야만 했다.
■ 사람이 길을 넓히지 길이 사람을 넓힐 수는 없다
구월 국화는 구월에 핀다고 했다. 꽃은 제철이 올 때까지 조바심을 내지 않는다. 하지만 성급한 마음으로 구월을 맞았다.
법명으로만 불렀던 지인은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을 경주 최씨라고 소개했다. 이어 시조인 최치원 할아버지의 사당 안내를 부탁했다. 함께 가야산 어귀에 자리 잡은 유적지를 찾았다. 적당한 크기의 막돌로 자연스럽게 잇댄, 폭이 좁다는 느낌이 드는 긴 계단은 가팔랐다. 끝나는 자리의 삼문(三門)은 여느 때처럼 굳게 자물쇠로 채워져 있었다. 현판인 홍도문(弘道門)만 없는 인기척을 대신할 뿐이다. 벽처럼 막아선 그 문 앞에서 고개를 돌려 건너편을 바라보니 어느새 하늘은 가을 색이다. 물 빛, 산 빛도 마찬가지다.
‘홍도(弘道, 도를 넓히다)’라는 두 글자는 오랜 세월 동안 머리한 쪽을 차지하고 있던 화두였다. 20여 년 전, 팔공산 은해사에 머물 때 첫 책을 세상에 내 놓았다. 송나라 시대를 풍미했던 기라성 같은 선사(禪師) 100여 명의 전기를 정리한 ‘선림승보전’이다.
무명의 저자가 상업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전문서적을 낸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언론사는 신간 안내 코너에 작게나마 언급해 주었고, 출판사는 역자에 대한 예의(?)로 광고까지 실어 주었다.
그 광고의 머리글이 ‘사람이 도(道)를 넓혀갑니다.’였다.
번역자가 봐도 그 책의 성격을 한 마디로 압축한 절창인지라 울림이 적지 않았다.
여러 경로를 거쳐 확인된 ‘사람이 도를 넓혀갑니다’의 출전은 선어록이 아니라 ‘논어’였다. 다시 말하면 공자님 말씀이다.
빌 게이츠도 “하늘 아래 정말 새것은 없다. 단지 새로운 조합만이 있을 뿐
- 15 -
이다.”라는 말로써 힘을 더해준다. 이제 자리를 박차고 달려가 잠겨 있던 홍도문을 힘껏 밀친다면 곧바로 열릴 것 같다.
긴 의심이 풀린 기쁨에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늘 펼쳐져 있는 습자지 위에 오랜만에 붓을 적셔 괴발개발 연습 삼아 ‘홍도(弘道)’라는 글자의 앞뒤에 있는 여덟 글자를 주문처럼 한 자 한자 정성스럽게 써 내렸다. 서툰 목수는 언제나 일한 티를 내기 마련이다. 그 와중에 튄 먹물 두 방울이 바짓가랑이에 훈장처럼 사이좋게 매달려 있는 게 아닌가!
“인능홍도(人能弘道), 비도홍인(非道弘人)이라 .
사람이 길을 넓히는 것이지 길이 사람을 넓힐 수는 없다.”
4. 쉬고 또 쉬면 쇠나무에도 꽃이 핀다.
■ 쉬고 또 쉬니 쇠로 된 나무에도 꽃이 피다
모두가 고전의 힘으로 더위를 이기고자 하는지 뜨거운 여름에도 인문학의 독서열풍은 여전하다. 시대를 초월하여 삶의 나침반이 되어 주는 책의 생명력은 손에서 손으로 이어지는 유통에서 나온다. 유통의 힘은 공감이다. 때로는 심금을 울리기도 하고 때로는 정수리에 지혜의 칼을 사정없이 들이댄다. 가끔은 앉은 자리에서 뒷목덜미마저 서늘케 하는 피서처를 만든다. 정조대왕은 독서로 더위를 이겼고, 이덕무 선비는 추위마저 독서로 이겨 냈다고 했다. 어쨌거나 9월에도 늦더위가 이어지고 여전히 ‘휴(休)’를 화두 삼아 살아야 할 것 같다.
‘워크홀릭’즉 ‘일 중독‘이 자랑스러운 훈장이었던 시절에는 설사 시간이 주어져도 놀 줄 몰랐다. 심지어 휴일에도 출근을 해야 마음이 편한 시절이기도 했다. 휴일도 출근으로 쉬는 셈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제대로 쉴 줄 모른다는 사실이다. 일은 구체적인 모양이 있지만 쉬는 것은 제대로 모양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제대로 쉬는 것인지를 알지 못했던 무명(無明)의 시절이기도 했다.
그리 열심히 살긴 했는데 주체적인 삶이 아니라 떠밀려 살아왔다는 느낌이
늘 삶의 언저리에서 함께 했다. 이제 ‘잘 쉬어야 일도 잘한다’는 가치화된 시절이다.
- 16 -
‘휴’의 시대에 가장 잘 어울리는 선시 한 구절이 혀끝에 감겼다. 판본에 따라 몇 글자가 바뀐 것도 있지만 그 의미 자체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휴거헐거(休去歇去)하니 철목개화(鐵木開花)니라. 쉬고 또 쉰다면 쇠로 된 나무에도 꽃이 피는구나.”
휴식 없이 무리하게 일만 하면 몸이 피곤해지기 마련이다. 몸이 피로하면 당연히 감각기관이 무뎌진다. 감각기관이 무뎌지면 그야말로 목석이 된다. 목석은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현장에서 위기 대처능력이 떨어지고 이것이 사고나 산업재해로 연결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잘 쉬어 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 천 년 전에 이미 이렇게 멋진 시로 표현된 것이다.
성철 스님은 이것을 이어받아 “휴거힐거라, 문수요 보현이라.” 고 했다. 쉬고 또 쉬어야 문수보살도 되고 보현보살도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내가 제대로 쉴 수 있을 때 비로소 주변이 보인다. 쉬고 또 쉬라는 말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1. 몸도 쉬고 마음도 쉬어라.
2. 마음을 쉬어라. 그리고 마음을 쉬었다는 그 생각마저 쉬어라.
‘쉬고 또 쉬어라’는 말은 정말 바쁜 사람들에게 절실하게 와 닿는다. ‘휴’와는 달리 ‘헐(歇, 쉬다 )’이란 말은 글자가 어렵기도 하고 우리말 발음도 별로 매끄럽지 못하다. 그래서 반복을 꺼리는 문사들도 ‘휴헐’대신에 ‘휴휴’를 즐겨 사용했다.
-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 두 번째 고향인 부여에 ‘휴휴당’이란 휴식공간을 만듦, 작고 소박한 집, ‘쉼도 그곳에서는 쉬어간다’는 글을 남김
- 재야 객필 칼럼니스트 조용헌 : 장성 축령산에 ‘휴휴산방’이라는 작은 글방 마련, 황토, 돌, 나무 만 사용, 지붕은 빗소리를 듣기 위해 양철로 지었음
- 범어사 휴휴정사 : ‘휴휴’라는 말이 가장 오래전부터 사용된 곳?
■ ‘무소유’라는 시대의 화두를 남긴 법정 스님
법정 스님은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후반까지 젊은 시절 10여년을 해인사에서 보냈다. 어느 날 장경각을 참배하고 가파른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오는데 시골 아주머니가 “팔만대장경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방금 보
- 17 -
고 오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더니 시답잖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 그 빨래판 같이 생긴 것 말이에요?”라고 대꾸했다. 아닌게 아니라 나무로 만들어진 경판은 한문 글자를 가지런히 양각으로 새겨 놓아 생간 표면의 요철로, 아낙네들이 빨래판으로 사용하기에 적격이었다. 게다가 크기까지 적당했다. 문무대왕 비석의 일부도 글자가 새겨진 까닭으로 인해 여염집 우물가에서 한동안 빨래판으로 사용되었다. 10여 년 전에 우연히 이를 발견하고서 제자리에 갖다 놓은 일도 있었으니 ‘국보 빨래판’ 사건은 이래저래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어쨌거나 그 일을 겪고 난 뒤 법정 스님은 ‘소통 언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교과서적인 ‘도인의 길’을 포기하고 한문 경전의 한글 번역과 함께 대중언어를 사용한 글쓰기를 시작했다. 한 수행자의 평생 노선이 이렇게 사소하다면 사소한 동기로 정해질 수 있는 일이었다. 그때 만난 성철 스님은 해인사를 떠난 이후에도 인연은 계속 이어졌고, 몇 년에 한 번씩 찾아뵙곤 했다.
외람된 표현이지만 두 스님 모두 성격이 유별나고 또 다소 괴팍스러운 구석이 있는지라 서로 잘 맞았을 것 같다. 어느 해 여름, 법정 스님은 정성스럽게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삼천배라는 숫자 채우기에 급급한 대학생 불교 연합회 수련팀을 보고서 내심 못마땅했는지 ‘굴신(屈身)운동’이라고 투덜거렸다. 그러자 이를 전해 들은 어느 다혈질 스님이 “그러면 염불은 입 개폐(開閉) 운동입니까?”라는 명언으로 항의 아닌 항의를 했다는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 오기도 한다.
성철 스님이 늘 ‘밥값 했다’고 자부한 ‘본지풍광’과 ‘선문정로’도 법정 스님의 손길로 마무리된 책이다. 1980년대 당시 시자(侍者)였던 원택 스님이 초고를 들고서 불일암을 찾았다. 한글 윤문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법정 스님의 윤문 원칙인 ‘토씨 한 개라도 저자의 사상이 반영된 것’이라는 전제 아래 두 스님은 머리를 맞대고서 조심스럽게 최소한의 손질만 해나갔다. 작업이 며칠째 이어지는 동안 암자는 이미 ‘문학도의 성지’가 되어 날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 바람에 일의 흐름이 자꾸만 끊겼다. 물론 법정 스님도 당신 나름대로 접대 방법을 동원하면서 작업에 몰두하려고 애를 썼다. 그 방에는 봉창문이 있었는데 그 문만 살짝 열고 얼굴만 보여주며 ‘현품 대조 됐소.’하고는 에둘러 돌려보내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해인 수녀님이 올린
- 18 -
추모편지에서 ‘만난 지 오래됐다’는 의미로 사용한 ‘현품 대조한 지 꽤나 오
래 되었다’는 문장은 그 표현의 기발함으로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두 스님이 역주와 윤문의 직책을 맡은 덕분에 이 책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 지쳐서 돌아오니 뜰 안에 매화가 피었네
내 전생에는 밝은 달이었지 (전신응시명월 前身應是明月)
몇 생이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 (기생수도매화 幾生修到梅花)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가 퇴계 이황은 매화를 무척 좋아했다고 전한다. 매화를 주제로 한 시가 백여 편에 이르며, 단양군수로 부임했을 때 기생 두향이 연모의 증표로 준 청매화를 21년 동안 애지중지 키울 정도였다. 물론 둘 사이의 애틋한 로맨스가 바탕에 깔려 있다. 그리고 좌탈(坐脫, 앉은 채로 죽음)하면서 남긴 마지막 유언은 “매화에 물 주어라.”라고 하였다니 수행자로서뿐만 아니라 가히 매화 마니아로서도 전혀 손색없는 어른이었다. 그래서 몇 생을 거듭하더라도 언젠가 매화로 환생하길 발원했던 것이다.
조선 중기 문인 신흠은 그의 저서 ‘야언(野言)’에서 “매화는 평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매일생한불매향 梅一生寒不賣香)”는 명언을 남겼다.
황벽 선사는 여기에 더하여 “뼛속을 사무치는 추위없이(불시일번한철골 不是一翻寒徹骨), 매화향기가 코끝 찌름을 얻을 수 없다(쟁득매화박비향 爭得梅花撲鼻香)”고 했다.
남송 유학자인 나대경이 지은 ‘학림옥로’ 권6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비구니의 오도송이 기록되어 있다.
봄(깨달음)을 찾아 밖으로 헤매다가 결국 찾지 못하고 지쳐서 돌아오니 집안의 뜰에 핀 매화를 보고서 비로소 봄이 왔음을 알았다는 내용이다. 깨달음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갖추어져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매화를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종일토록 봄을 찾아 헤맸건만 봄은 보지 못하고
짚신이 닳도록 산위의 구름만 밟고 다녔네.
지쳐서 돌아와 뜰 안에서 웃고 있는 매화향기 맡으니
봄은 여기 매화가지 위에 이미 무르익어 있는 것을.”
- 19 -
혜능 행자가 홍인으로부터 가사를 전해 받고 도망칠 때 등장하는 대유령 역시 중원에서 매화꽃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이곳은 강서성과 광동성을 연결하는 교통 요충지이다. 당나라 현종은 장구령은 보내 대유령 길을 만들도록 했다.
하지만 대문호인 그는 길을 만드는 토목공사에 그치지 않고 인근에 많은 매화를 심어 서정적인 분위기까지 함께 만들었다. 오가는 길손들에게 여수를 달래게 하였고, 아름다운 매화꽃은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거기에 걸맞게 고개 이름을 매령(梅嶺)이라고 했다. 뒤에 송나라 문종은 채정을 보내 그 길을 다시 손보도록 했고 매관(梅關)이란 표석을 세웠다.
매화는 눈과 함께 어우러질 때 최고로 친다. 그래서 설중매(雪中梅)라고 했다. 누구는 눈 속에서 매화가 피었다고 하고, 누구는 매화가 이미 피어 있는데 그 위로 눈이 내렸다고도 한다. 앞뒤 관계가 어찌 되었건 태고 보우 선사의 선시 설매헌(雪梅軒)은 설중매의 눈과 꽃이 둘이 아닌 경지를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섣달 눈이 허공에 가득 내리는데 (납설만공래 臘雪滿空來)
추위에도 매화꽃이 활짝 피었네 (한매화정개 寒梅花正開)
흰 눈송이 조각조각 흩어져 날리니 (편편편편편편 片片片片片片)
눈인지 매화인지 분간하기 어렵네 (입매화진불변 入梅花眞不辨)
■ 12월엔 돌도 쉬고 나무도 쉬고 산도 쉰다
괜히 마음이 바쁘다. 12월인 까닭이다. 딱히 밀린 일도, 해야 할 일도 없는 것 같은데 그냥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느낌이다. 이래저래 한 해를 마무리 하는 때이니, 몸이 바쁘지 않으면 마음이라도 바빠야 할 것 같다. 알고 보면 이것도 습관이다. 바빠서 바쁜 게 아니라 뭔가 바빠야 할 것 같은 시절인 탓이다.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지인들의 송년 모임 몇 건은 폭설 때문에 길이 막혀서, 혹은 교통이 불편한 산골에 산다는 핑계를 대면서 사양했다. 달력에 표기된 공식 일정이 아니라면 두분불출을 다짐하며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는다. 겨울 살림살이를 위해 김장을 했다. 인근 고랭지 밭에서 배추를 트럭으로 실어왔다. 어차피 내다 팔 것이 아닌 까닭에 크게 인위적인 손길을 보태지 않고 가능한 한 노지에서 가꾸는지라 배추 포기도 아담한 게 대부분이
- 20 -
다. 심지어 땅바닥에 퍼져 아예 꽃배추가 된 녀석도 적지 않다. 제대로 모양을 만들기 위해 허리에 매어둔 짚이 속이 차기도 전에 흘러내린 까닭이다. 자연산이라 모양은 별로 볼품이 없지만 어디에 내 놓더라도 맛과 향은 절대로 빠지지 않는다.
배추걷이가 끝난 휑한 산밭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한 해를 마무리 한다. 배추로서는 아름다운 마무리이겠지만 김치로서는 새로운 시작인 셈이다.
수백 년 세월 그 자리를 지켜온 마당 한편의 화강암 수곽은 12월이 되면서 물을 담는 본래의 역할을 끝내고 바닥을 드러낸 채 제 몸을 말리고 있다. 겨울 내내 비스듬히 해바라기를 하면서 지낼 것이다. 얼마 전까지 철철 물이넘쳐 가끔 새들도 와서 목을 축이고 잠자리가 꼬리를 담갔다 사라지곤 했다 지금 그 자리에는 고양이가 지나가면서 울음으로 적막을 깨뜨릴 뿐 한 해가 저물어가는 고요함으로 가득하다. 설사 생명 없는 돌이라 할지라도 휴식은 필요한 법이다. 그런 쉼이 해마다 있었기에 그 자리를 오늘까지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12월엔 돌도 쉬고 나무도 쉬고 산도 쉰다. 사람도 매듭을 지어야 한다. 쉼을 통한 매듭은 한 켜의 나이테가 되고 한 해의 연륜이 되면 또 한 살의 나이가 된다. 겨울 시간이라고 흐르지 않을 리 없지만 섣달은 흐르는 걸 절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런 정지된 느낌이 세밑 무렵의 또 다른 산중의 맛이다. 그래서 옛 사람은 이런 시를 남겼나 보다.
산속이라 달력이 없어 (산중무일력 山中無日曆)
추위가 지나가도 연월일을 모르겠네. (한진부지년 寒盡不知年)
■ 해야 할 일이 있기에 하고 싶은 일도 생긴다
언제부턴가 장거리 운전이 힘에 부친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시간과 공간이 장애를 받지 않는 혼자만의 자유로움이 좋아 ‘질주 본능’을 구가하며 달리는 것이 행복했다. 요즘은 여러 가지 이유로 불편하게 여겨 기피했던 대중교통을 장거리 이동시에는 자연스럽게 이용하게 된다.
그것은 또 다른 행복감을 준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목적지로 데려다준다. 그 사이에 졸리면 눈을 감기도 하고, 무료하면 신문을 뒤적인다. 그것
- 21 -
마저도 시들해지면 텅 빈 눈빛으로 창밖을 가만히 바라볼 수도 있다. 이제 세월 탓인지 여유로운 이동이 더 좋다.
모내기가 한창인 차창 밖을 보고 있는데 ‘우우우웅’하고 고요를 깨뜨리는 핸드폰의 진동음 신호가 들렸다. 화면에는 발신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고 ‘행복하세요’라는 문자만 계속 뜬다. 등록되지 않은 낯선 번호였다. 받아도 별로 행복할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수초 간 지속된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받았다. 전화번호가 바뀐 지인, 하지만 다소 부담스런 이였다. 열차 안이라고 양해를 구한 후 용건을 확인하고 전화를 끊었다.
‘행복하세요’라고 축원하는 것은 설사 입에 발린 상업적인 건조한 말이라고 할지라도 어쨌거나 아름다운 일이다.
한 때는 ‘부자 되세요’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부(富)가 행복의 전제조건이라고 믿는 이들이 대부분인 까닭에 공감어가 된 것이다. ‘마음살림(김석종 저)’에 나오는 수산스님의 행복론은 그것과 달랐다. ‘입으로는 말을 줄이고 위장에는 밥을 줄이고 마음에는 욕심을 줄이라’고 하셨다.
한마디로 결국 욕심을 줄이라는 말씀이었다. 욕심이란 성취하면 할수록 더 큰 욕심으로 확장되기 마련이다. 본래 욕심이란 놈은 만족이 없기 때문에 욕심이란 단어로 굳어진 것이다. 알고 보면 작은 것에도 만족할 줄 아는 ‘소욕지족(少欲之足)’의 지혜가 행복의 기술이다. 더 바랄 게 없다는 천상세계의 ‘도솔지족천(兜率知足天)’은 무엇이건 바라는 것은 다 갖추어진 곳이 아니라 반대로 모든 욕심을 비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일 게다.
부자란 것은 모든 것이 갖추어진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필요한 것이 별로 없는 사람도 부자이긴 마찬가지다. 그 명칭은 해인사에서 암자 이름이 되었다. 지족암이다.
신문을 펼쳤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제목에 눈길이 멈추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해야 할 일’은 알겠는데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얶던 일’은 도대체 뭐였지? 그리고 냉정하게 살펴보건대 해야 할 그 일이 하고 싶은 그 일을 방해한 적이 있었던가? 괜히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나누는 순간 그것이 불행의 시작은 아닐까? 자문자답이 이어졌다.
쓸데없이 한 생각 일으키면 만 갈래의 다른 생각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
- 22 -
야말로 한 줄기 물이 만 갈래 파도를 만든 격이다. 몸뚱이를 가지고 살고 있는 이상, 해야 할 일을 안 할 것도 아니면서 괜히 하고 싶은 일만 찾다보면 해야 할 일 조차도 게을리하게 되어 결국 불행을 자초하기 마련인 것이다. 지금 그 자리가 딱 제 자리라고 여긴다면 그것도 행복의 한 방편은 되겠다.
■ 명사십리에서 해당화를 만나다
참으로 오랜만에 양손에 신발을 들고서 맨발로 낙산 해변을 가만히 걸었다. 어스름 녘에 만난 ‘철 이른’ 바다는 생각보다 훨씬 한적했다. 걸어도 걸어도 끝자락은 여전히 아득했다. 모호하게 긴 거리는 대충 십리라고 하면 무난하다. 그래서 선인들은 ‘명사십리’라는 이름 붙이길 좋아했나 보다. 육지 쪽의 맨 모래땅이 주는 퍽퍽함 보다는 물가의 젖은 모래가 오히려 더 걸을만했다. 어둠 속에서 경계선이 없는 동일한 모래밭인데 느낌은 달랐다. 물먹은 자국이 희미한 경계선 역할을 대신해준 까닭이다.
이 땅의 해안가에 살았던 주민들은 가늘고 고운 눈부신 모래를 명사(明沙)라고 불렀다. 실크로드의 분기점인 둔황 사람들은 ‘밍사(鳴砂)’라고 표기했다. 바람에 이는 모래 소리가 울음처럼 들렸던 까닭이다. 유목민은 소리에 더욱 민감하고 농경민은 빛깔에 더 예민했던 모양이다. 서역 지방의 밍사산에 올랐던 박남준 시인은 ‘인생이 이렇게 발목이 푹푹 빠져드는 길이라면 일찍이 그만둬야 하는 일 아니냐……. 세상에 지친 이들이 여기 올라 모든 울음을 묻고 갔으리’라고 노래했다.
‘소리 나는 모래밭(鳴砂)’을 겪어보지 못한 주변인에게도 그 괴로움을 실감나게 묘사한 절창이다. 반대로 원산의 ‘오리지널’ 명사십리에서 짚신을 들고 걸었던 만해 한용운 스님은 “자연스러운 쾌감을 얻었다. 가늘고 보드라운 모래는 밟기에는 너무도 다정스러워 맨발이 둘 뿐이라는 것이 매우 유감이었다(원문에는 ‘사실이 부족하였다’라고 돼 있음).” 라고 하여 명사를 밟는 느낌까지 즐겼다. 모래밭의 두 얼굴인 셈이다.
흰모래에 붉은 해당화를 만났다. 척박한 모래땅 위에서도 당당한 그 모습은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어제 낮 홍련암 가는 길에서 마주쳤을 때는 주변의 풀 그리고 나무들과 어우러져 진홍빛이 그다지 도드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 23 -
더불어 염분을 좋아하면서도 또 지나친 소금기의 흡수를 막기 위해 줄기와 잎에 가시와 털을 만들어 낼 줄 아는 절제의 미학도 아울러 갖추었다. 무엇이든지 모자라는 것도 문제지만 넘치는 것도 그 못지않다. 과유불급은 해당화에도 해당되었다.
전언에 따르면 해방 전 선교장에 살던 집안이 금강산을 거쳐 원산의 명사십리로 가족 여행을 갔을 때 안주인이 캐 온 꽃이라고 했다.
긴 백사장에서 유장한 가문의 역사를 읽었고, 모래밭에 뿌리를 내리려고 애쓰는 해당화를 보며 종부(宗婦)로 시집왔을 당시 자신의 모습과 이미지가 겹쳐졌을 것이다. 많은 식솔들이 때로는 가시처럼 마음의 생채기를 남겼지만 그럼에도 솜털 같은 따스함과 부드러움으로 모든 걸 덮어 가며 집안을 건사해야 했던 삶이 그 꽃을 옮겨 심도록 했을 것이라는 상상력에 공감했다.
내친김에 금강산 가는 길을 올라가면서 서산대사의 선시를 가만히 읊조린다.
금강산 구름이
명사십리에 비 되어 내리고
해당화마저 지고 나니
길 위에는 우리 서너 명뿐.
■ 산속 절에서 바다를 보다
긴 가뭄 끝에 장대비가 세차게 내린다. 바닥을 드러낸 전국 수원지의 물 걱정도 한 시름 덜게 됐다. 어제 삼경엔 빗소리와 함께 잠을 청했고 오늘 새벽은 추녀의 낙숫물 소리에 잠을 깼다. 대낮까지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비를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스스로 너무 처져버린 느낌이 싫어서 찻상을 당기고는 물을 끓였다. 끓는 물은 올라가면서 소리를 내고 비는 내려오면서 소리를 낸다. 두 소리가 방문을 경계로 묘하게 어우러진다.
고개를 돌려 건너 수정봉을 쳐다보니 안개구름이 느슨하게 가로로 비스듬히 걸려 있다. 수정봉은 그 이름만으로도 이미 물 기운을 가득 담았다. 거기에 더하여 산봉우리 정상에는 돌거북 형상을 한 바위가 한 자리를 차지했다. 산이지만 물기둥이라고 여긴 까닭이다. 주로 목조건물로 이루어진 절집은 늘
- 24 -
화재 방지를 위한 비책까지 염두에 둬야 했다. 그래서 불기운을 누르기 위한 비보를 항상 주변에 만들었다. 수정봉을 떠받치면서 절 마당 끝에 절벽처럼 서 있는 산호대는 아예 바닷물을 빌려오는 역할까지 맡았다. 불그스름한 산호 빛깔만으로는 정체성과 능력이 의심스럽다고 여겼는지 ‘산호대’라는 글씨를 손 타지 않을 정도의 높이에 눈에 거슬리지 않을 만큼 정성껏 새겨 그 영험을 더했다.
산호는 산은 말할 것도 없고 더 높은 곳인 하늘까지 올라가는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산호나무(prijta)는 도리천(忉利天)에 있다. 물론 그 모양이 산호처럼 생겼던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
비가 내려 온 도량에 물이 그득하다. 산에서도 잠시나마 바다의 잔영을 본다. 티베트 사람들은 사막과 고산으로 둘러싸인 해발 3천 미터 고원지대에 있는 그 호수를 ‘청해(淸海, 칭하이)’라고 불렀다. 달라이 라마의 함자인 ‘달라이(Dalai)’도 대해(大海)라는 의미라고 하지 않았던가.
한반도 영남내륙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해인사(海印寺)는 아예 이름 첫 자에 ‘바다 해(海)’자를 붙여 놓았다.
■ 안과 밖의 경계, 석문(石門)에서 근심을 버리다
산과 물을 경계선으로 삼던 시절에는 자연의 석문(石門) 역시 주변 암자의 권역임을 알려주는 경계석 구실을 했다. 상환암과 상고암은 암자 이름을 붙인 석문이 일주문을 대신하고 있다.
석문이라는 이름을 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먼저 바위 사이로 길이 열려 있어 통로 기능을 해야 한다. 또 자연스럽게 지붕 구실을 해야 하는 바위도 덧씌워져야 한다. 그래야 뭔가 문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마지막으로 석문을 경계로 하여 앞뒤 풍광의 차별성까지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라고 하겠다. 상환석문이 그랬다.
숨이 턱턱 막히도록 경사진 길을 힘겹게 오른 후 한숨을 돌릴 무렵 만난 석문이다. 돌의 규모도 장대하거니와 몇 개의 바위가 어우러져 지붕과 기둥 모양을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 25 -
통로도 저쪽이 훤히 보이는 곧은 길이 아니라 굽어 있는 까닭에 그 앞에 서면 시각과 생각마저 잠시 끊긴다. 그리고 석문길치고는 제법 긴 편이라 여운마저 남긴다. 더불어 ‘중석문(中石門)’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족보(?)까지 구비했다.
이 석문을 통과하면 곧장 평탄한 오솔길을 따라 양편으로 산죽(山竹)이 펼쳐지는 평원이 나온다. 편안하고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 기쁨을 준다. 석문 아래쪽 숨 가쁜 길과 위쪽의 느긋한 길이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인해 이 석문길을 즐겨 찾는다. 무릉도원 입구의 동굴문도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크기에 불과했지만 인간 세상과 신선 세계를 이어주는 대문 구실을 했다고 한다. 속리산에는 여덟 개의 석문이 있다.
법주사의 일주문 밖으로는 오월의 신록이 눈부시게 빛나고 문 안쪽으로는 성인의 탄생을 축하하는 형형색색의 연등이 가득하다. 해남 대흥사의 초의 선사는 연등에 불을 켜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해는 대낮에 빛나지만
긴 밤의 어둠을 깰 수 없고
달은 밤에 빛나지만
밤의 어둠을 다 몰아내지 못한다.
어두운 밤의 어둠을 몰아내고
긴 밤의 어둠을 깰 수 있는 것은
오직 등불만이 가능하니
등불을 밝히는 의미가 참으로 심원합니다.
■ 하늘이건 땅이건 내가 걸으면 길이 된다
강변길에도 도심 공원에도 동네 뒷동산에도 모두가 걷겠다고 아침 일찍, 또는 일과를 마친 저녁 무렵 너도나도 집을 나선다. 그야말로 ‘걸어야 산다’고 외치면서 비장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고 손을 크게 흔들면서 걷는 ‘빠른 걸음걸이’가 이 시대의 또 다른 풍속도를 만들어 가고 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걷겠다는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그동안 ‘빨리빨리’를 외치며 차에게 일방적으로 양보했던 길들이 ‘느리게’를 외치는 사람
- 26 -
들 품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사람과 차의 중간인 자전거 길까지도 합세하고 있다. 걷기 동호회가 늘어나면서 전국적으로 걷기 좋은 길은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 않고 적지 않은 사람을 불러 모으고 있고, 지방 자치단체마다 나름대로 옛길을 복원하여 지역홍보에 어김없이 등장시키고 있다. 탈 것이 없던 시절에는 모두가 걸어 다녔다. 마차는 출세한 사람들이나 탈 수 있는 귀한물건이었다. 과거 길에 오르는 젊은이들은 짚신 몇 켤레씩 준비하며 돌아올 때는 꼭 말을 타고 오리라고 스스로에게 맹세했을 것이다. 문경새재 길은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걷기 좋은 길이다.
0 제주도의 올레길 : 인기 있는 걷기 좋은 길
0 성지 순례길
- 티베트의 성지로 향하는 오체투지길
- 3보 1배로 참배 오는 중국의 4대 불교 성지 : 오대산, 구화산, 낙가산, 아 미산
- 일본의 1200년 역사를 가진 순례길 오헨로 : 45일 동안 88개 사찰을 찾 는 시코쿠의 1400Km 걷는 길
- 산티아고 가는 길 : ‘성인 야곱의 열반지’를 찾아가는 길. 800여 Km를 한 달 동안 걷는 성지 순례길
옛 인도의 성인 기야다 존자에게 어떤 왕이 물었다. 그는 왕의 신분이었지만 예의를 갖추기 위해 마차를 타지 않고 먼 길을 일부러 걸어서 왔다.
“저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십시오.”
“오실 때도 길이 좋았으니 가실 때도 길이 좋을 것입니다.”
올 때의 마음처럼 돌아가서도 그 마음을 잃지 말고 진리를 구하듯 정치를 하라는 의미였다.
길은 도(道)다. 걷는 것이 바로 도를 닦는 수행이다. 시간 날 때마다 열심히 ‘나는 누구인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걷는다면 몸도 생기가 돌지만 정신 역시 살아날 것이다.
■ 마곡사에서 만난 무릉도원
무르익은 봄날에 찾아가는 마곡사의 환상적인 봄 길은 갖가지 꽃과 여리디
- 27 -
여린 잎으로 꾸며 놓은 무릉도원이었다. 예부터 호서지방에서는 ‘춘마곡(春麻谷)’이라고 했다. 봄에는 마곡사의 경치가 인근에서 으뜸이란 뜻이다.
꽃구경은 겨울이 고단한 현실을 떠나 봄이라는 희망의 무릉도원을 찾아 나서는 일이었다. 전란과 가난으로 어려웠던 시절 ‘정감록’은 나름대로 유토피아인 십승지를 열거하여 평민들을 위로했다. 공주 땅의 유구천과 마곡천 사이에 자리한 마곡사 지역도 포함됐다. 산과 물이 서로 휘돌아 에스(S)자로 감기는 길지인 연유다. 지역 어르신들에 의하면 그 이름에 걸맞게 한국전쟁이 지나간 줄도 몰랐다고 한다.
백범 김구 선생은 평생 가장 큰 신세를 진 곳으로 마곡사를 꼽았다. 난세를 피해 몸을 의탁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얼마 동안 승복을 입고 생활했다. 큰절은 물론 인근 백련암에도 선생의 체취가 남아 있다. 출가 당시 삭발하는 심경을 백범일지에 몇 줄의 기록으로 남겼고, 후학들은 그 자리를 기념하는 표식을 세웠다. 해방 후 당신이 이절을 다시 찾았을 때, 큰 법당 기둥에 세로로 쓴 ‘돌아와 세상을 보니 흡사 꿈속의 일과 같구나(거래관세간 유여몽중사 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라는 글귀를 바라보며 한동안 감회에 젖었다고 했다.
유럽의 산티아고 가는 길과 오헨로 길처럼 마곡사의 ‘백범 명상길’은 십승지 순례길이다. 그곳에는 건축가 승효상 선생의 덜어 냄과 비움을 추구하는 건축 철학과 공(空)이라는 불교 정신을 한 몸에 버무린 나지막한 현대 건축물이 자리하고 있다. 걷다가 지치면 몸을 누이고 또 마음을 비우고 덜어 낼 수 있는 곳이다. 여러 채의 건물이 각각 외따로 떨어진, 그러면서 은근히 하나로 묶여진 공간이기도 하다 은둔 객이 되어 꽃 지고 잎 나는 자리에서 계곡물 소리를 오래도록 들었다. 세상의 화려함과 번거로움 그리고 내 마음속의 전란을 피해 제주도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처럼 나도 이 길을 천천히 걸었다. 언젠가 50대 가장이 “젊을 때는 가을이 좋더니 이제는 꽃 피는 화사한 봄이 더 좋습니다.”라고 한 말이 문득 생각났다. 백번 공감하며 혼자서 또 고개를 끄덕였다.
■ 천하 사람을 위한 그늘이 되다
- 28 -
덥다. 그늘을 찾는다. 처마 끝이 만들어 낸 직선의 지붕 그늘도 좋지만 나무가 만들어준 원만한 곡선의 그늘은 더 고맙다.
동네 어귀 느티나무처럼 한 그루가 만들어 내는 도도한 그늘은 격이 있고, 소나무 군락처럼 여러 그루가 동시에 만들어 내는 빽빽한 숲 그늘은 깊은 맛이 있다.
한 그루 그늘이 잠시 쉬기 위한 공간이라면, 숲 그늘은 아예 몸과 마음을 내려놓게 만들고 또 모든 걸 잊어버리게 한다. 이즈음은 치유와 명상의 기능까지 떠안았다. 잠깐 구경삼아 쉬려 왔던 숲 그늘에 반해 그 자리에 완전히 눌러앉은 이들도 더러더러 있기 마련이다. 혹여 유명인사라면 그 숲은 그대로 스토리텔링이 더해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역사가 된다.
‘제왕운기’를 남긴 고려 말의 대학자 이승휴는 당시 ‘호모노마드(homo -nomad, 옮겨 다니는 사람)’였다. 그래서 ‘동안(動安)거사’라고 불렀다. 안주하는 삶보다는 차라리 움직이는(動) 것을 더 편안히(安)여긴 까닭이다. 세상에 원칙(道)이 있다고 생각되면 벼슬자리에 나아갔고, 원칙이 무너졌다고 판단되면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굳은 심지는 옳은 것을 옳다고 했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했다. 그 결과는 파직과 좌천으로 인한 이동이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강원도 삼척 천은사의 소나무 그늘 자리를 만난 이후엔 망설임 없이 그대로 눌러 앉았다. 후학들이 위패까지 모셔놓은 숲 속 동안사(動安祠)는 7백여 년 이상 누릴만한 편안한 휴식처였다.
불볕더위는 무분별한 산림훼손과 이산화탄소의 과다한 배출이 겹친 결과라고 했다.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탄소량을 증가 시키는 공범이 될 수밖에 없다. 그 부채의식의 틈을 비집고 어김없이 ‘녹색성장’ 참여를 독려하는 공익광고가 끼여든다. KTX동대구역 계단을 오를 때마다 ‘당신은 오늘 나무 8그루를 심었습니다’라는 글귀에 꽂힌다. 서울에서 대구까지 승용차로 올 때보다 기차로 오는 것이 탄소를 그만큼 덜 배출했다는 의미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의 무정차 통과차로에 붙은 ‘하이패스는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과 같습니다’라는 안내문도 지구온난화의 책임을 조금이라도 덜어보려는 운전자를 위로해 준다. 추운 겨울에 실내온도를 2도 낮출 경우 연간 탄소 감축량은 소나무 7억 그루를 심는 효과와 맞먹는다는 신문기사 앞에는 입이 딱 벌어진다.
- 29 -
산문 안의 경치를 가꾸면서 모범적으로 나무 심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임제 선사는 “천하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시원한 그늘이 되리라(여천하인작음량 與天下人作陰凉)”는 한 그루의 말씀까지 덤으로 심었다.
■ 어제의 해가 오늘 새해로 뜨다
경청도부 선사는 어떤 납자와 이런 선문답을 남겼다.
“어떤 것이 불법입니까?”
“새해 아침 복을 여니 만물 모두가 새롭다.”
벽에 달린 새 달력을 다시 한 장 넘겼다. 물론 2월에 있는 구정 연휴 날짜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세간 사람들은 그날 모두가 때때옷 입고 세뱃돈 받고 차례 지내고 성묘하면서 제대로 된 명절이라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사실 신정이라고 해봐야 동해바다나 명산에 올라 ‘해맞이’를 마치고 나면 끝이다. 그냥 뜨뜻미지근하게 하루가 흘러간다. 그러나 구정은 다르다.
신정이건 구정이건 신년의 상징 코드는 새로움이다. 사실 어제와 오늘이 다를 것도 없는데, 뭔가 좀 새롭고자 하는 몸부림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듯하다. 그래서 공자는 ‘일 년의 계획은 정초에 있다’고 했다.
몇 년 전에 ‘밀레니엄’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유난을 떨던 기억이 새롭다. 뭔가 신세계가 펼쳐지거나 혹은 어떤 큰 일이 빌어날 줄 알았는데, 그해도 그렇고 그런 한 해로 끝났다. 아무 것도 아닌 ‘말장난’임을 깨치는 데 열두 달이 걸렸다. 역시 하늘 아래 새 것이란 없었다. 단기(檀紀)도 불기(佛紀)도 아닌 오직 서기(西紀)적 시간관의 허상임을 덤으로 알게 되었다.
예전에는 섣달 그믐날 밤은 눈썹이 희어질까봐 잠을 자지 않았고 집 안 곳곳에 밤새 불을 밝혔다. 결국 묵은해와 새해는 단절이 아니라 계속 이어짐을 성성적적하게 살피면서 보내고 맞이했던 것이다. 붉은 팥죽, 통알삼배, 정초기도, 입춘 부적 등 모든 것들이 탐진치(貪嗔痴,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 삼독(三毒)의 타파를 통하여 ‘묵은 범부’에서 ‘새 부처’로 나아가고자 하는 중생들의 발원이 담긴 또 다른 수행방편인 것이다.
조선시대 계종학명 선사가 신년을 맞이하며 남긴 선시는 이 모든 자질구레
- 30 -
한 주절거림에 찬물을 확 끼얹는다. 그리고 ‘제발 헛소리들 그만하라’는 매몰찬 일갈을 했다.
묵은해니 새해니 분별하지 말게.
겨울 가고 봄이 오니 해 바뀐 듯 하지만
보게나, 저 하늘이 무엇이 달라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망도시종분양두 妄道始終分兩頭 동경춘도사년류 冬經春到似年流
시간장천하이상 試看長天何二相 부생자작몽중유 浮生自作夢中有
- 끝 -
2015. 2.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