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행복해질 용기

보해성산 2015. 9. 1.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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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질 용기

- 일, 사랑, 관계, 병, 죽음을 대하는 아들러의 명쾌한 가르침 -

■ 기시미 이치로 지음

0 1956년 일본 교토 출생, 교토대학교 문학연구과 박사과정, 철학과 병행해 서 아들러 심리학 연구

0 일본 아들러 심리학회가 인정한 카운슬러 고문

0 저서

미움 받을 용기 /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 버텨내는 용기 / 아들러에게 인간관계를 묻다, 등

* 아들러

0 오스트리아 정신과 의사, 처음에는 프로이트 연구로 영향을 받음

0 그 후 독자적인 개인 심리학 수립

■ 이용택 옮김

0 한국 외국어 대학교에서 일본어 전공, 출판사 기획 편집 업무

0 번역 전문가(일어)

0 옮긴 책

서른, 사람을 얻어야 할 시간 / 심야 라디오 / 철학 용어 사전 / 7분 몰입 / 후회 없는 죽음을 위해 꼭 알아야 할 것, 등

■ 프롤로그

◈ 산다는 건 괴롭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Platon)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태어난다는 것부터가 애초부터 괴로운 일이다.”라고 말했다. 고대 그리스인에게는 처음으로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고, 그 다음으로 행복한 일이 태어나자마자 죽는 것이었다.

산다는 것이 오로지 괴로운 일의 연속은 아닐 것이다. 공기의 저항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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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 새가 하늘을 날 수 있듯이, 인생에서 경험하는 괴롭고 힘든 수많은 사건이 있어야만 인생을 꿋꿋이 살아나갈 수 있고, 또 그 괴로움을 지렛대로 삼아 삶의 기쁨도 느낄 수 있다.

◈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얼마 전에 인터넷으로 사람들을 만나 동반 자살을 시도했다가 홀로 살아 남은 어느 대학생이 있었다. 그에게 자살하려고 한 이유를 묻자, 그는 앞으로 40년 동안이나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는 것이 괴로웠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 대학생은 아마 졸업하고 취직을 한 후 결혼을 한다는 평범한 인생을 설계했을 것이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속속들이 알게 된다면 산다는 것은 지루함의 연속일 뿐이다. 그래서 인생의 허무함에 사로잡힌 사람은 통속적이고 평범한 행복에서 등을 돌리기 마련이다.

◈ 통속적인 행복을 넘어

내가 스물다섯 살이었을 때 어머니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 당시 나는 철학을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 평생 돈과는 인연이 없는 삶을 살 것이라는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학원에 들어가려던 해에 어머니가 뇌경색을 쓰러지시는 바람에 나는 어머니를 간병하기 위해 대학원 진학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려왔던 인생 설계가 와르르 무너져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반신불수로 의식을 잃은 채 병상에만 누워 계신 어머니를 바라보며, 대체 사람이 살아가는 의미가 무엇인지 날마다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처럼 의식을 잃은 상태라면, 건강조차 행복과는 상관없는 게 아닐까 싶었다.

◈ 지금 이 순간부터 행복해 질 수 있다.

그로부터 10년 후, 나는 처음으로 아들러(Alfred Adler)심리학에 관한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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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듣게 되었다. 강사였던 오스카 크리스텐스는 “오늘 이 강의를 듣고 있는 여러분은 지금 이 순간부터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러 심리학 강의를 듣지 못한 사람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놀라는 한편 반발심도 생겼다.

줄곧 고민해왔어도 답을 찾지 못했는데, 행복해지는 방법을 그토록 간단히 단정 지어도 괜찮은가 싶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어떤 음식을 어떤 사람이 맛있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은 맛없다고 하는 것은 주관적인 취향의 차이다. 하지만 어떤 음식이 몸에 유용한지 혹은 유해한지 묻는다면 주관적인 느낌으로는 대답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관적인 마음먹기만으로는 인생이 행복해지느냐 불행해지느냐를 결정할 수 없다.

행복해지기 위해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하나의 지침을 아들러 심리학은 분명히 제시해 줄 수 있다.

◈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

아들러는 인간의 모든 고민이 대인관계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대인관계의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행복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 <행복해질 용기>에서는 대인관계에 관해 자세하게 논하고자 한다.

불교의 가르침에서는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네 가지 고통으로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든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생로병사에 직면했을 때야말로 행복의 진가가 발휘된다.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결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다. 로병사(老病死)는 늘 생(生)과 함께 한다. 젊은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 아들러가 전하는 단순한 행복론

프랑스 출판인인 베르나르 그라세(Bernard Grosser)는 “천재적인 재능이란 새로운 자명성(自明性)을 창출하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예전부터 존재했음에도 아무도 그 존재를 깨닫지 못했던 것을 새롭게 발견하고 말로 표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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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이 천재적인 재능이라는 말이다. 말로 표현되는 순간에 그것이 당연한 말처럼 느껴지면서 사람들의 상식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행복론도 상식적이면서 매우 단순한 이야기다. 단순하게 행복해질 수 있는 힌트를 이 책에서 얻어 갈 수 있다면 저자로서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 행복해질 용기를 위한 아들러 심리학

■ 시대를 앞서간 아들러 심리학

오스트리아의 정신 의사였던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1870 - 1937)는 프로이트가 운영하던 ‘빈 정신분석협회’의 핵심 멤버로 활약 하다가 프로이트와 학설상 대립하면서 협회를 탈퇴했고 ‘전체론’ ‘목적론’등을 중심으로 하는 독자적인 이론체계를 구축한 후 이를 ‘개인심리학’이라고 명명했다. 일본에서는 그의 이름을 따서 ‘아들러 심리학’이라 부른다.

- 서구에서는 아들러의 이름이 프로이트나 융과 함께 언급될 정도로 명성이 높지만 일본에서는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놀랍게도 현재 널리 쓰이고 있는 ‘열등감’이라는 단어를, 오늘날에 쓰이는 의미로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이 아들러이다.

아들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내 이름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이름이 잊혀도 상관없다. 그것이야말로 심리학 분야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이 나의 이론을 상식처럼 여기고 행동하게 되었다는 의미일 테니까."

아들러는 어렸을 적에 구루병에 걸려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병약했던 데다 어린 남동생의 죽음까지 곁에서 지켜보면서, 일찍이 죽음에 관한 문제에 관심이 생겨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유대인이었던 아들러는 가족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1912년 빈 대학교에 무급강사 자격을 신청했지만, 2년 반이라는 오랜 심사 끝에 빈 대학교에서는 아들러의 신청을 기각했다.

아들러가 의사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돈을 벌거나 명성을 얻기 위해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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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었다. 그는 돈이나 명성보다는 세상을 변화시켜 인류에 이바지하고 싶어서였다. 아들러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이유는 일찍이 사회주의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러가 대학교를 졸업한 지 2년 만에 결혼한 라이사와도 사회주의 공부 모임에서 만났다. 아들러는 가난한 환자에게 값비싼 진료비를 받지 않았고, 환자 앞에서 거만한 태도나 무례한 언동도 보이지 않았다. 하루도 쉬지 않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진료와 연구에 힘썼고, 진료를 끝낸 밤에는 카페에서 늦은 시간까지 친구들과 토론을 즐겼다. 나는 아들러의 삶이 아테네 거리에서 청년들과 대화를 나누던 소크라테스와 사뭇 닮았다고 늘 생각한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44세였던 아들러는 징병될 나이가 아니었음에도 군의관으로 참전 했다. 전쟁의 처참한 현실을 체험한 아들러는 타인을 적으로 보지 않고, 필요하다면 자신을 바치면서까지 도와주어야 하는 상대로 여기는 ‘공동체 감각’이라는 사상에 도달했다.

사회주의에 관심이 많던 아들러는 당초 정치 개혁으로 사회를 바꾸어 나갈 것을 목표로 삼았지만 결국 정치 현실을 자각하고 정치가 아니라 ‘육아’와 ‘교육’으로 개인, 더 나아가 인류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황폐해진 빈에서 청소년의 비행과 범죄가 사회문제로 떠오르던 와중에, 아들러는 자신의 신념을 토대로 빈 시 당국과 협의해서 아동상담소를 설립했다. 아동 상담소는

1. 아이와 부모를 치료하는 장소 2. 교사, 카운슬러, 의사 등 전문직 종사자들의 교육장소 3. 카운슬링을 공개적 영역으로 이끌어 내는 계기 마련 4.특히 교사에게 관심이 많았고 ‘육아’와 ‘교육’은 아들러 심리학의 핵심이 됨

이후 나치즘이 유대인을 박해하면서 그는 미국으로 자리를 옮겨 열정적으로 강의를 하러 다녔고, 당시 출판한 책들은 큰 호평을 받았다.

“아이들이 손을 무릎위에 모으고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얌전히 앉아 있어야 하는 학교는 더 이상 학교가 아니다.”라고 말한 아들러는 미국 유럽 등지로 강연을 하러 다니다가 스코틀랜드 애버딘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향년 67세였다.

아들러 자신은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전에 생애를 마쳤지만 수많은 아들러파 학자들은 수용소로 끌려갔다. 이로 인해 아들러 심리학은 아우슈비츠에서 한 번 맥이 끊겼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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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난 후 아들러의 제자였던 드라이커스(Rudolf Dreikurs)가 시카고를 중심으로 그의 심리학을 보급하는데 공헌 했다.

아들러의 행복에 대한 네 가지 관점

1. 대인관계론

인간(人間)은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人) 사이(間)에서’ 살아간다.

우리의 말과 행동은 아무도 없는 진공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주하는 상대방과의 관계 속에서 말과 행동의 의미를 살펴봐야 한다. “인간의 모든 고민은 대인관계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행복에 관해 생각할 때 인간관계를 고찰하는 일은 빼놓을 수 없다.

2.전체론

아들러는 자신이 창시한 독자적인 이론을 ‘개인심리학’이라고 불렀는데, 그 원어에서 사용되는 ‘개인(Individual)’은 ‘분할할 수 없는’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개인심리학은 분할되지 않는 통일된 전체로서의 개인을 고찰하는 심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들러는 인간을 정신과 신체, 감정과 이성,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는 다양한 형태의 이원론에 반대했다.

아들러는 전체로서의 ‘나 자신’이 어떤 행위를 선택하는 것이므로 그 선택을 ‘나 자신’이 오롯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들러는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마음속의 갈등 탓이라거나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다는 핑계를 대면서 얼렁뚱땅 넘기려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3. 목적론

아들러는 분할 할 수 없는 전체로서의 개인이 자신의 목적을 세우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행동한다고 생각했다.

- 감정에 강요당해 어쩔 수 없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 경우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행동은 스스로 결정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려는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 지금 자신이 불행한 이유는 과거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 불행의 원인이 과거에 있다면, 앞으로도 영원히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 한, 과거에 존재하는 원인을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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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자신을 바꾸려는 결심이 필요하다. 불행해지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행복하지는 않더라도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분명히 있다.

4. 라이프스타일

이 세상은 위험한 요소로 가득하므로 방심하다 보면 자신을 위기에 빠뜨리는 무서운 사람, 아들러의 말을 빌리면 ‘적’을 만날 수 있다. 반대로 필요하다면 자신을 바치면서까지 도와주고 싶어지는 ‘동료’도 만날 수 있다.

남을 ‘적’으로 여길 것인지 ‘동료’로 여길 것인지에 따라 인생과 세상이 완전히 달라지며, 인생의 과제를 해결하는 방법 또한 달라진다.

그리고 자신이 직면하는 문제를 어떤 식으로 해결하거나 혹은 해결하지 않을 것인지에 관한 자세는 보통 ‘성격’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그런데 성격이라는 단어 자체에서 연상되듯, 성격은 ‘타고난’것이라거나 바꾸기 힘들다는 고정관념이 있다. 아들러는 절대 그렇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성격’이라는 말 대신 ‘라이프스타일’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아들러는 “라이프스타일을 스스로 선택한다”라고 하며, 이것이 아들러 심리학의 기본이다.

■ 라이프스타일을 왜 바꿔야 하는가?

사람은 어차피 각자 다르기 때문에 어떤 라이프스타일을 갖고 살아가든 상관없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행복해지고 싶다면 어떤 라이프스타일이든 괜찮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앞에서도 살펴봤듯이 사람은 행복해지기를 갈망하면서도 행복을 실현하는 수단을 선택할 때 잘못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런 라이프스타일을 불행의 원인으로 삼을 수 없다. 왜냐하면 라이프스타일도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이 복잡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인생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스스로 인생을 복잡하게 만들어서 행복한 삶을 방해한다. 인생에 대한 ‘의미부여(라이프스타일)’를 바꾸면 세상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단순해진다.”

‘의미부여’라는 것은 인생이나 세상 혹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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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은 같은 경험을 하더라도 그 경험에 완전히 동일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괴롭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을 테고, 괴롭더라도 그 경험에서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주변에는 무서운 사람들로 가득하다고 여기기도 하지만, 자신이 주변 사람들에게서 보호받고 있다고 느끼기도 한다. 이처럼 사람에 따라 의미 부여의 방법은 다양하다.

세상이나 자신에 대한 의미 부여가 바뀌면 세상과 마주하는 법은 물론 행동까지 바뀐다. 어떤 식으로 의미 부여를 바꾸어야 행복해질지, 의미부여를 바꿈으로써 세상이나 타인과의 관계가 어떻게 바뀔지는 앞으로 차근차근 살펴보기로 하자.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지금’ 깨달았다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는 그 라이프스타일을 깨달은 본인의 책임이다.”

아들러의 말을 또 하나 인용해보겠다.

“라이프스타일을 고치라고 설득할 수는 있지만, 고치겠다는 결심을 하느냐 마느냐는 개인의 선택이다.” 여기에 행복해지기 위한 힌트가 숨어 있다.

◉ 제2장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자신과 마주하기

■ 행복과 라이프스타일

행복과 라이프스타이은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라이프스타일이 바뀌면 무엇이 행복이라고 볼 것인지도 달라진다. 엄밀히 말하면 무엇이 행복을 가능케 하는 수단이라고 볼 것인지가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 혹은 관련을 맺는 사람들이 달라져도, 지금까지와 똑같은 패턴이나 라이프스타일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그것을 선택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판단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라는 것은 대인관계를 뜻하고, 그 대인관계 안에서 일정한 행동 패턴이 생겨나며, 그것을 라이프스타일이라고 부른다.

■ 자기 자신이 마음에 드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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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슬링을 받으러 온 사람에게 “자기 자신이 마음에 드십니까?”라고 물으면 거의 예외 없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지금 사용하는 휴대전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최신의 고성능 기종으로 쉽게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또 다른 자신을 돈으로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대체 불가능한 자기 자신과 부대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아들러는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다”라고 말했다. 이는 ‘지금의 마음에 들지 않아도 참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지금의 자신을 다른 자신으로 바꿀 수 없다면 이런 자신에게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자신을 달라보이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짚어두고 싶다. 자기 자신을 좋아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 자기 자신을 좋아핮 않기로 스스로 결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가 아니라, ‘나 자신을 좋아하지 않기로 스스로 결정했기 때문에 이런저런 단점이 눈에 띈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자기 자신을 좋아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일까? 극단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단적으로 말하면 남들과 관계를 맺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남들과 부대끼다 보면 상대방에게서 미움을 받는 상황도 종종 벌어진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미움을 받느니 차라리 다음부터 관계를 맺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나타난다. 그런 사람은 상대방에게서 미움을 받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자기 자신이 미움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아내서 스스로 정당화한다. 자기 자신의 단점은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자신에게는 이런이런 단점이 있기 때문에 아무도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심정을 털어 놓을 수 없다고 핑계를 댄다.

■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을 좋아하게 될까?

이처럼 자기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좋아하지 않기로 한 결심을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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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라이프스타일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스스로 결정했기 때문에 스스로 그 결정을 뒤집을 수도 있다.

둘째, 지금까지의 라이프스타일과는 다른 라이프스타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냥 막연히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이 마음에 안 든다고 생각하는데 그치지 않고 지금 자신과는 다른 라이프스타일을 적극적으로 선택한다면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더라도 단순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분명히 발견하게 된다.

■ 자신을 측정하는 두 가지 기준

사람에게는 자신을 측정하는 기준이 대략적으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공부’다. 공부는 평생을 따라다닌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성적이라는 기준에 구애받지 않고 지낸다. 그러나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입시공부, 취업공부를 해야 하는데다, 취업한 후에도 업무 능력에 따라 자신을 평가하기 때문에 꾸준히 공부해야 한다.

또 하나의 기준은 ‘인맥과 사교성’이다.

이 두 가지 기준 가운데 어느 한 쪽이 자신감이 있다면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또한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공부는 잘하는데 친구가 많지 않고 성격이 밝지 못하다듣지. 공부는 못해도 친구가 많다면 괜찮다고 할 수 도 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배신하고 떠날 수도 있다.

■ 지금까지의 자기 자신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본다

라이프스타일을 바꾼다고 해도 지금까지 소극적이었던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활달하고 밝은 사람이 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신의 성격을 어둡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는 것은 가능하다. 초등학생 시절에 나는 남에게서 심한 말을 듣고 속상했던 일이 가끔 있었는데, 적어도 나 자신은 고의로 남들에게 상처 주는 말을 내뱉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주변의 ‘밝은’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별 생각도 없이 남에게 상처 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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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하지만, 나는 언제나 남의 기분을 헤아리고 신경 쓰며 내 말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를 늘 걱정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두운 성격’이 아니라, ‘남을 배려하는 성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스스로를 좋게 이야기하는 것이 약간 낯간지럽기도 하지만.

스스로도 자기 자신을 좋아하지 못하는데, 남들이 자기 자신을 좋아해줄 리는 만무하다. 물론 스스로는 자기 자신을 좋아한다고 해서 남들까지 그런 자신을 좋아해줄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자기 자신을 좋아하게 된다면 남들도 그런 자신을 좋아하게 될 가능성은 분명 높아진다. 자기 자신을 좋아하지 않고서는 대인관계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본들 남들과의 교제를 진전시킬 수 없을 것이다.

■ 남들의 평가에 구애받지 않는다

사람의 가치는 남들의 평가에 의존하지 않는다. 나쁜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나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남들의 평가에 연연하는 것은 남들의 편견에 자기 자신을 끼워 맞추려는 행위다. 이는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내팽개치고 남들의 기대에 맞춰 살아가려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게다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기대에 무리하게 맞추려다보면 당연히 탈이 날 수밖에 없다. 끊임없이 남들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는 삶은 불행의 연속일 뿐이다.

■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상대방과 마주 한다

자신을 실제보다 더 좋게 꾸미려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잘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지금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사람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남들의 평가를 두려워한다면,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 것이다.

‘자신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지 못한다면 대체 누가 자신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유대교의 격언이 있다. 인생의 주인공은 나 자신이다. 결코 다른 사람의 인생무대에 서는 조연배우가 아니다. 남들의 평가를 두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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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하고 그 평가에 맞추려는 행동은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주인공에게 걸맞지 않다.

■ 자신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렸을 때 부모에게서 좋은 말만 들으며 자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이의 장점보다는 아이의 단점이나 문제 행동이 쉽게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자식 문제로 상담하러 오는 부모는 아이의 단점과 결점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이야기하지만, 아이의 장점에 관해서 물어보면 그때까지와는 다르게 말문이 막혀버리기 일쑤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도 자신의 단점에 관해서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지만, 자신의 장점은 좀처럼 떠올리지 못한다. 이는 부모의 영향도 크지만 일반적으로 잘난 체하는 행동이 사회적으로 꺼려하는 경향 때문이다.

책을 읽기 위해 펼쳤다가 이내 덮어버리는 사람은 ‘끈기 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 책이 지금의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과감히 책을 덮어버릴 용기가 있어야만 쓸데없는 책을 읽느라 낭비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그러므로 주변 사람에게는 ‘끈기 없는 사람’으로 보일지라도, 스스로는 ‘결단력 있는 사람’으로 여겨도 괜찮다. 또한 자신을 겁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실 ‘겁쟁이’가 아니라 ‘신중한 성격’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자신을 집중력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사실 ‘집중력 없는 사람’이 아니라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겨도 좋다.

고등학교 시절에 나는 키가 작아서 고민이었다. 친구에게 그런 고민을 털어놓으니 친구는 그저 “흥, 그게 뭐?” 하고 웃어넘겼다.

친구는 나의 푸념을 그런 식으로 시큰둥하게 넘겼지만, 그와 동시에 이렇게도 말했다.

“너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능력이 있어.”

물론 이는 겉모습이 아닌 나의 인품에 관한 이야기였고, 내가 스스로 생각해봐도 나는 남들에게 스트레스를 줬던 적이 별로 없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친구의 말을 듣고 ‘나도 완전히 쓸모없는 인간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나를 색다른 시선으로 봐주니, 신기하게도 작은 키가 무슨 대수인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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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에게 부정적인 견해를 품는 이유는 남들과 적극적으로 대인관계를 맺지 않으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꿈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새로이 발견하는 것은 대인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일이다.

■ 속성 부여를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부모는 자식에게 줄곧 단점만 지적하지 않는다. 나도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로부터 “너는 똑똑한 아이야”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이런 말을 듣고 기분 나빠할 이유는 없지만, 문제는 부모가 자식에게 ‘너는 이런 아이야’ 하고 자식의 성질을 결정지어버릴 때 이것이 사실상 ‘명령’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이다. “넌 착한 아이야”라고 말할 때, 이 말은 ‘너는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해’라는 명령인 셈이다.

부모를 비롯한 제3자로부터 듣는 속성 부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다른 누군가가 무슨 말을 하든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여겨도 괜찮다. 남들의 기대에 맞추거나 그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부모의 의향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결혼을 단념하거나 부모가 정해주는 사람과 결혼하기로 결정을 바꾼다면 장래에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 그럼에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철회하면서까지 부모의 말을 따르겠다는 결심을 한다면, 그런 행동에는 일정한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 목적은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행여 앞으로 인생이 잘 풀리지 않았을 때 그 책임을 부모에게 전가하기 위해서일 수 있다.

부모를 비롯한 제3자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미움을 사게 되고 마찰이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자유롭게 살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다. 반대로 말해 누군가가 자신을 미워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자유롭게 살고 있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 마음속의 목소리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는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 라는 목소리는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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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부모가 실제로 입 밖으로 내는 목소리였지만, 어느샌가 그 목소리는 아이의 마음속에 둥지를 틀게 된다.

아이 스스로가 부모의 기대를 거역하지 않는 착한 아이가 되고자 하는 것은 처음에는 부모의 요청에 부응하려는 행동이었겠지만 어느샌가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내적 규범으로 변해 자신을 옭아맨다.

부모는 자녀가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는 행동을 하면 아이가 반항한다고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그것은 ‘반항’이 아니라 ‘주장’이다. 젊은 사람은 주장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 ‘사회’라는 압력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명령은 사실 부모뿐 아니라 ‘사회’나 ‘세상’으로부터도 받는다. 특히 젊은 사람은 사회라는 커다란 벽 앞에서 무언의 압력에 시달리며 어찌할 줄 모른다.

과거에는 ‘개인은 사회를 위해 존재한다’고 여겼던 시절도 있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도적(盜賊)인 프로크루스테스는 납치해온 나그네를 자신의 침대에 눕혀서 만약 나그네의 키가 침대보다 짧으면 침대 길이에 맞추어 몸을 늘려서 죽였고. 나그네의 키가 침대보다 길면 침대에서 삐져나온 신체 부분을 잘라서 죽였다고 한다. 이는 자신이 정한 틀에 남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아집을 비유하는데 자주 인용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개인은 사회를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에 찬성하는 사람도 적어졌고,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아들러도 개인을 사회라는 ‘침대’에 억지로 눕히려는 것에 반대했다.

사회가 내뿜는 무언의 압력에 의해 지금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가치는 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해도 괜찮을까요?”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괜찮은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인생이니까 남이 상관할 바 아닙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남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살아가서는 안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 지금 이대로의 당신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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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지금 이대로의 자기 모습을 지키겠다고 결심한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지킨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남들의 평가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노력한다는 뜻이다.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며 자신을 실제 이상으로 잘 보이려고 할 필요도 없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 속 자신을 보여주겠다는 결심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에 따른 용기가 필요하다. 남들의 시선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 주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주변의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진다.

공부나 업무에 관해서도 실제로 필요한 사항을 잘 배웠는지가 중요하지, 남들에게 어떻게 비칠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공부나 업무를 잘한다는 이미지가 앞서면 남들의 기대가 커지고, 그 기대에 부응하기가 더욱 힘들어질 뿐이다.

시험 성적이 떨어지면 남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기가 싫어서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좋은 성적을 내겠다고 다짐하는 긍정적인 사람도 있겠지만, 반대로 남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지 않기 위해서 애초에 아무런 성적도 나오지 않도록 아예 시험 자체를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이보다 한심한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 정말 이대로가 좋은가?

둘째, 개인은 사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에 적응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사람은 아들러의 말마따나 사회적 혹은 대인관계적인 상황에서만 개인으로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애초에 남들과의 관계를 떠나서 살 수는 없다.

이번 장에서 논의했던 라이프스타일도 만약 우리가 홀로 살아간다면 필요 없는 개념이다. 언어 역시 사람이 사회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필요한 도구다.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 또는 하고 싶은 일이나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언어가 필요한 셈이다. 라이프스타일도 선천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존재가 아니라, 누구를 대하느냐에 따라 미묘하게 바뀌며 경우에 따라서는 180도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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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속감은 기본적인 욕구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소속감이다. 소속감은 자신이 사회, 직장, 학교, 가정 등 어떤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감각, ‘자신이 여기 있어서도 괜찮다’는 감각이다.

이 소속감을 얻는 것이 인간의 행동 목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에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기 위해 굳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남들의 말이 약간 이상하게 생각되더라도 침묵을 지키는 사람도 있다. 반면 자신이 소속되고 싶은 공동체 안에서 문제 행동을 하면서 주목을 받는 방식으로 소속감을 얻으려는 사람도 있다.

■ 자신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

아들러는 “자신에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때만 용기를 얻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용기란 대인관계와 마주하는 용기다.

그러나 반대로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은 대인관계를 피하기 위해 자신에게는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자신을 좋아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작용과 대인관계에 뛰어들어야겠다는 결심은 깊은 관련이 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진정한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런 자신에서부터 출발할 필요가 있다. 있는 그대로의 진정한 자신을 찾는 일은 도달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 자신의 가치는 남에게 공헌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앞에서 자기 자신을 좋아하려면 단점을 장점으로 봐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는 자신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방법인데, 이보다 더욱 적극적인 방법도 있다. 어떨 때 자기 자신이 좋았는지 생각해 보자. 그것은 아마 자신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낄 때가 아닐까 싶다.

반대로 자신이 싫어지는 때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남을 방해하게 될 때, 혹은 자신만 없으면 남들이 모두 즐겁고 사이좋게 살아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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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고 느낄 때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신이 남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낄만한 일을 찾으려고 한다. 자신이 어떤 형태로든 남에게 공헌한다고 느끼면 자신에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고, 스스로를 좋아할 수 있게 된다.

앞서 소속감에 관해 살펴보았는데, 소속감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나 주변 사람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공헌함으로써 자신이 ‘이곳에 있어도 괜찮다’는 입지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남에게 무언가를 주거나 공헌할 때 자신을 뒷전으로 미루고 자기 희생을 한다고 생각하기보다 남을 위해 행동하는 일 자체가 자신에게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 자기희생을 하는 것만이 남에게 공헌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남을 위해 행동해본 적이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 공헌은 자기 완결적

하지만 남을 위하는 행동 자체로 뿌듯함을 느끼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남에게 자발적으로 도움을 주려는 사람보다, 칭찬받고 싶다는 마음으로 도움을 주려는 사람이 많다. 이는 어렸을 때부터 받아온 상벌 교육 때문이 아닐까 싶다. 특히, 어렸을 때부터 과한 칭찬을 받으며 자란 영향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내가 이만큼 해줬으니 그만한 대가를 받아야지’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난 듯하다. 칭찬의 말을 기대하면서 남을 도와준다는 것은 왠지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남들에게서 칭찬받기를 기대하지 않는 사람의 행위는 그 자체로 완결된다. 그 행위로 남들에게서 고맙다는 말을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다. 남들이 알아주거나 고맙다는 말을 해주지 않아도 그 행위 자체에 가치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대가나 감사를 기대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아무도 지켜봐 주거나 알아주지 않더라도 기쁨을 느끼는 사람도 분명히 존재한다.

남들의 각별한 관심이 없더라도 남들에게 공헌하고 있다고 스스로 느낀다면 소속감은 덤으로 얻을 수 있게 되고, 소속감으로 충만한 자기 자신도 좋아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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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아도 자신이 남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자기 자신을 좋아할 수 있는 힘이 된다.

■ 특별한 일이 아니더라도

여기서 조심해야 할 점 두 가지

첫째, 방금 남들의 관심이나 인정은 필요 없다고 말했는데, 이는 다른 사람 혹은 더 넓혀서 사회와의 연결 고리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굳이 인정을 바라지 않더라도 사람은 남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한, 어떠한 형태로든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에게서도 인정받지 않고 고립된 채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둘째, 특별한 일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남들에게 공헌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식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삶의 큰 위안이 된다. 자식이 아무리 부모의 속을 썩이더라도, 혹은 자식이 큰 병에 걸리더라도, 자식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부모에게 공헌하고 있는 셈이다.

자식뿐만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제3장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남들과 마주하기

■ 남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돌이켜보면, ‘나’라는 도구는 다른 도구로 대체하지 못하며 앞으로도 쭉 ‘나’라는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좋아하지 못하면 행복해질 수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자기 자신이 마음이 들지 않는 사람이 많으며, 그 이유는 남들과의 관계를 피하고 싶기 때문이라는 점도 살펴보았다.

남들이 틈만 나면 자신을 괴롭히고 상처 주는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 남들을 위해 행동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자기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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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좋아하게 될 수도 없고, 소속감을 얻을 수도 없다.

그 때문에 아들러는 남들을 ‘동료’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들러는 ‘공동체 감각’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는데, 이를 쉽게 말하면 ‘모든 사람은 동료이며, 그런 사람들이 서로 이어져 있다’라는 뜻이다.

■ 자기중심성에서 탈피하기

제2장에서 남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꾸며서는 안 된다는 점을 설명했는데, 나는 이 점을 주장하기 위해 ‘남들 역시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살아가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다른 사람의 기대를 배반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도 역시 나의 기대를 배반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불만을 터뜨리거나 화를 낼 일이 아니다.

아들러는 다른 사람을 동료라고 생각하지 못한다면 남들에게 그릇된 기대를 하게 된다고 여겼다. 내가 이만큼 해줬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그만큼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이런 기대가 높아지면, 내가 아무것도 해주지 않더라도 남들은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 대인관계에서 어떤 어려운 점이 있는지는 뒤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결론적으로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실망하게 될 것이라는 점만 지적해 두겠다. 남들에게서 받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고, 남들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해주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며,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 남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표현하기

내가 남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듯, 남들도 나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각자가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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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생각대로만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남들이 해 주기를 바라는 일, 하지 않기를 바라는 일도 당연히 있다.

그럴 때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자신과 똑같은 권리를 갖고 있는 남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명령해서는 안 된다. 명령은 상대방이 거부할 여지를 주지 않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하세요’라는 말투는 확실히 명령이고, ‘~해 주세요’라는 말도 조금 부드럽긴 하지만 상대방이 거부할 여지가 없기 때문에 명령이라는 점에서는 변함없다.

그러므로 부탁하는 말투를 사용해야 한다. 부탁은 명령과 달리 상대방에게 거부할 여지를 남겨두는 말투다. 예를 들면 ‘~해 주시면 안 될까요?’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는 말투다. 부탁을 받으면 명령을 받을 때와 달리 대부분 흔쾌히 승낙한다.

■ 말로 도움을 청한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나’의 생각과 느낌 혹은 ‘내’가 해주기를 바라는 일과 하지 않기를 바라는 일 등을 알아차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남의 생각을 헤아리는 배려가 미덕이라지만 그것은 이상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확실히 말로 도움을 청해야 한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하라며 거절당하는 한이 있을지언정.

■ 홀로 살아갈 수는 없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남들에게 전혀 도움을 받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남들을 도와주는 데는 당당하게 적극적으로 나서면서도, 자신의 힘만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일에서 남들의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면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람은 남들의 도움 없이 혼자의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따라서 도움이 필요하다면 서슴없이 청하는 편이 좋다.

‘인간(人間)’이라는 한자에서 불 수 있듯이 인간은 애초부터 ‘사람人 사이間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며, 다른 사람과 유대 관계가 끊어지면 살아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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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남들의 평가를 두려워하는 문제에 관해 살펴봤는데, 남들의 평가를 신경 쓴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삶에 남들이 관여하고 있다는 의미다.

■ 세상은 위험한 곳인가?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알게 되는 사건, 사고를 일반화해서 ‘세상은 매우 위험하고 남들은 모두 나의 적이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은 어차피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위험한 면도 분명히 있겠지만,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큰 봉변을 당할 것이라는 생각은 지나친 걱정이다.

세상이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위험이 발생했을 때는 자신을 지켜주려는 사람이 평소보다 훨씬 많이 나타난다는 사실에 더 주의를 기울였으면 한다.

■ 나는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이는 자신뿐 아니라 남들도 마찬가지다. 가끔 상대방이 자신을 적대시하는 것처럼 보여도, 기본적으로는 누구나 남들과의 관계를 떠나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한다.

앞서 살펴봤듯이, 아무리 자신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남들의 도움을 받고 있고,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남들에게 무언가 도움을 주고 있다. 이에 그치지 말고 사람의 관계가 상호적인 관계인 이상, 가능하다면 적극적으로 남들에게 무언가를 해주겠다고 마음먹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다. 자신은 혼자서 완결되는 존재가 아니라 남들에게 그 존재를 빚지고 있으며, 이것은 남들도 마찬가지다.

‘남들이 나에게 무언가를 해줄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남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인가?’를 생각했으면 한다.

■ 인생의 과제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꼭 해결해야 하는 불가피한 과제가 있다. 이 과제는 오직 대인관계로만 풀 수 있다.

아들러는 이를 직업의 과제, 교제의 과제, 사랑의 과제 등으로 칭했고,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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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통틀어서 ‘인생의 과제’라고 불렀다.

이 중에서 교제의 과제는 직업의 과제나 사랑의 과제까지 포함한다. 직업의 과제든 사랑의 과제든 기본적으로 모두 대인관계이기 때문이다.

보통 한사람이 모든 일을 혼자서 해내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분업이 필요하다. 분업은 다른 사람들과의 협력이 꼭 필요하므로 대인관계 없이는 해낼 수 없다. 혼자서 하는 일도 있겠지만, 한 업무의 모든 과정을 오로지 한 사람만이 해야 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0 아들러가 소개한 30세 남성의 사례 : 늘 최후의 최후까지 인생의 과제에서 도망가려는 사람

- 첫 번째 과제인 직업의 과제 : 업무상 실패의 두려움으로, 밤과 낮도 없이 긴장 속에서 일함

- 두 번째 과제인 교제의 과제 : 친구는 있었지만 친구를 의심, 우정에 금이 가고, 대화를 나누는 친구는 많았지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는 없었음, 그래서 외출을 삼가고 침묵으로 일관

아들러는 그가 강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남들이나 새로운 상황을 자신에게 비우호적인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적진 한가운데 떨어진 격’이라고 설명했다.

■ 열등감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 남성은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하지만, 그와 동시에 실패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려는 행동이 방해를 받는다. 마치 구렁텅이 앞에 서 있는 듯이 늘 긴장 속에 살아간다.”

그는 일단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방법으로 과제를 회피하려 했다. 나가지 않으면 다른 사람과 부딪힐 필요도 없고, 대인관계에서 갈등을 겪을 일도 없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게 되면 갑자기 긴장해버리게 되고, 생각대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절박감을 느끼게 되어버린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늘 침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리의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호감을 가질 수 없다.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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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업무 면에서나 교우 면에서 늘 긴장하는 이유는 지금까지의 설명처럼 열등감 때문이 아니다. 열등감을 직업의 과제와 교제의 과제에서 도망치려는 핑계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친구를 강하게 의심했기 때문에 우정에 금이 간 것이 아니라, 우정에 금이 가도록 하기 위해 친구를 의심한 것이다. 내향적이고 이야기할 때 얼굴이 빨개지는 것도 대화를 제대로 하지 않기 위한 핑계라고 할 수 있다.

■ 열등 콤플렉스란?

그는 세 번째 과제인 사랑의 과제에도 직면했다. ‘그는 이성에게 다가가기를 망설였다. 연애와 결혼을 희망했지만 강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두려워한 나머지 연애와 결혼 계획에 마주하지 못했다.’

이것이 아들러가 말한 ‘망설이는 태도’다.

여기에서 아들러는 ‘강한 열등감’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 ‘열등 콤플렉스’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심해야 할 부분은 ‘열등감’과 ‘열등 콤플렉스’는 의미가 다르다는 점이다. 열등감은 자신이 뒤떨어진다는 사실을 느끼는 것이다. 한편 열등 콤플렉스는 ‘A이므로 (혹은 A가 아니므로) B를 할 수 없다는 논리를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A는 남들이 봤을 때나 스스로 생각했을 때나 그런 이유가 있으면 어쩔 수 없다고 여길 만한 그럴듯한 핑계다.

분명히 달성하기 어려운 일도 있겠지만, 그 일에 착수하기도 전에 실패했을 때를 먼저 생각하고 제자리걸음을 하며 망설이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 그런 사람이 ‘네, 하지만……’이라고 말하는 것은 할지 안 할지 모르겠다는 뜻이 아니라, 대부분 처음부터 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는 핑계를 나중에 얼마든지 생각해 낸다.

‘네, 하지만……’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식하고, 핑계찾기를 멈춰야만 사람은 바뀔 수 있다.

■ 과제를 회피하는 사람의 과거

‘조심스럽다’는 자질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지나치게 조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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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우면 실패를 두려워하게 되고 과제에 도전하기보다는 도피하는 길을 택하게 된다.

이처럼 과제를 마주하는 데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은 대부분 다른 사람 자신보다 사랑받은 경험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아들러는 지적했다.

자신이 관심의 중심에 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스스로도 자신에게만 관심을 기울인다. 이것은 너무 자기중심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남들이 얼마나 자신에게 주목할지, 자신에게 무엇을 해줄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행여 자신에게 각별한 주목을 주지 않거나 자신이 원하는 방식의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의 동료가 아니라 적으로 여기게 된다.

■ 타자에 대한 관심

아들러의 치료 방침은 매우 간결하다. 그 남성이 현재 갖고 있는 자신에 대한 관심을 타자에 대한 관심으로 돌리는 것이다.

아들러 심리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공동체 감각’은 타자에 대한 관심 그 자체다.

따라서 남을 동료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공동체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동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공헌하거나 협력하려는 것이다.

인생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타자에 대한 관심이 발달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생의 과제는 곧 대인관계인데, 대인관계에 무언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발생했을 때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남들이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준다고 생각한다면 인생의 과제는 결코 해결되지 못하고, 인생도 점차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 의존적인 아이

아이는 태어나서 얼마 동안은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야만 살 수 있지만 언젠가는 독립해야만 한다. 부모도 아이의 자립을 도와주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아이에게 과도한 애정을 쏟는 부모는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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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못 하게 막으며 자립을 방해하기도 한다. 남을 도와주거나 남과 협력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고, 오히려 그런 행동을 막으며 모든 응석을 받아준다. 아이가 스스로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도 부모가 아이 대신에 행동하고 생각하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키워진 아이는 자연히 응석받이 특유의 라이프스타일을 발달시키게 된다.

의존적인 아이는 성인이 되어도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므로, 자신이 중심에 서지 못하는 상황이나 그것을 방해하는 사람을 ‘적’으로 간주한다.

이렇게 해서 응석받이 아이는 다른 사람과 관련을 맺으려고 하지 않고 대인관계라는 인생의 과제에서 멀어지게 된다. 다른 사람을 적으로 여긴다면 남들이 도와줄 생각 역시 들지 않을 것이고, 남들이 도와주면서 사회에 공헌한다는 느낌도 맛보지 못하며, 자기 자신도 좋아할 수 없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꼈을 때만 스스로를 좋아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겉으로 보이는 인과율

인생의 과제에서 도망치기 위해서는 핑계가 필요하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핑계가 신경증이고, 그 외에도 커다란 재해, 사건, 사고 등이 핑계로 자주 사용된다. 이 모든 핑계를 아우르는 결과로서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경우도 있다. 분명히 이러한 심각한 사건들은 사람의 마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지만, 반드시 깊은 상처를 남긴다고는 할 수 없다.

인생의 과제와 맞서는 사람은 커다란 재해나 사건과 맞닥뜨려도 충격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인생의 과제를 회피하려는 사람은 직면하는 과제가 잘 풀리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핑계로 트라우마를 사용한다.

남편과의 관계가 삐걱대는 이유가 어렸을 적에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을 텔레비전에서 본적이 있다. 어렸을 적 아버지와의 관계가 이후의 인생에서 대인관계에 영향을 전혀 끼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부부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은 지금이라도 충분히 할 수 있기 때문에 부부 관계가 삐걱대는 이유를 과거의 사건에서 끄집어내려는 것은 왠지 아귀가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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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러는 이것을 ‘겉으로 보이는 인과율’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이는 현재의 사건 혹은 상황이 어떤 원인에 의해 생겼다고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겉으로 보이는’ 이라는 말은 실제로 인과관계가 없는데도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아들러는 어떤 경험에 의해 지금의 자신이 결정된다는 의미의 결정론을 부정한다. 아들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경험은 그 자체로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에 의한 쇼크(이른바 트라우마)에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 속에서 목적에 맞는 것을 찾아낸다. 자신의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인과율’은 인생의 과제를 회피하려는 사람도 자주 사용한다. 인생의 모든 과제는 어느 하나 빼놓을 수 없이 골고루 중요한데도, 일중독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업무에만 모든 열정을 쏟아 붓느라 가정을 돌보지 않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실패한 결혼생활을 구실로 삼아 바쁜 업무에서 탈출 하려는 사람도 있다. 업무가 바빴기 때문에 가정에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다는 하소연이다.

인생에는 연애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과의 대인관계도 존재하므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 외에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다른 관계를 경시한다면 어느샌가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2015. 8. 30

* 다음에 이어집니다.

행복해질 용기(2)

- 일, 사랑, 관계, 병, 죽음을 대하는 아들러의 명쾌한 가르침 -

◉ 제3장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남들과 마주하기

■기시미 이치로 지음, 이용택 옮김

■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 제3장의 30여개 단락 중 16번째 단락부터 시작됩니다.

열등감은 실제로 남들보다 뒤떨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뒤떨어진다고 여기는 느낌이다. 따라서 본인은 열등감이 매우 신경 쓰이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가 왜 그렇게 열등감에 괴로워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있다면 누군가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많이 사랑한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을 위협하는 중대한 사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다른 사람의 호의나 사랑을 받고 싶다면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남들이 자신에게 호감을 가져 주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생떼를 부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관심과 애정을 갖지 않는 사람을 비난하기라도 한다면 처음부터 대인관계 속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인생이 불행하다고 느낄지라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남들에게서 일방적으로 받기만을 원하는 사람이 행복해지기는 요원한 일이다.

■ 연애와 결혼

독일의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상대방만 있으면 연애를 성취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되었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사랑은 쉽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상대방만 있으면 연애를 성취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프롬의 말처럼 사랑하는 것도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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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시작이지 결코 끝이 아니다. 수많은 소설, 영화, 드라마는 남녀가 결

혼하면서 끝나지만, 결혼은 해피앤드가 아니라 어쩌면 불행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다행이 결혼 상대를 만났다 하더라도 결혼 후에는 연애할 때 못지않게 힘이 들기도 한다. 연애가 이벤트라면 결혼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당장의 생활에 신경 쓰지 않고 사귀던 시절과는 달리, 둘이서 한 공간에서 생활하게 되면 항상 즐거운 일만 일어나지는 않는다.

연애와 결혼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다른 대인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만약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갖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연애와 결혼에서도 벽에 부딪히고 만다.

남들에게 관심을 갖고 남들을 동료로 인정하며 남들에게 공헌한다는 의미에서의 공동체 감각은 어느 날 갑자기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만약 지금까지 자기중심적인 라이프스타일을 갖고 있었다면, 누군가와 연애 관계를 맺었다고 해서 하룻밤 사이에 연애에 걸맞는 라이프스타일로 바꾸기도 힘들다.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베풀겠다는 마음 없이 오로지 받기만을 기대하는 사람은 다른 대인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랑과 결혼에 실패할 확률이 크다. 그런 사람의 연애와 결혼이 어떤 결과를 맞이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이 세상에서 사람에게 억지로 강요할 수 없는 일이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존경’과 ‘사랑’이다. 당연히 ‘나를 사랑하라, 나를 존경하라’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그것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존경받을 수도, 사랑받을 수도 없다.

아들러는 “사랑과 결혼의 문제는 완전한 평등을 토대로 삼을 때만 만족스럽게 해결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 대등한 관계

아들러는 모든 관계가 대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른과 아이의 관계 역시 대등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놀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른과 아이가 똑같은 입장이라는 뜻은 아니다. 지식, 경험, 책임의 양을 생각한다면 어른과 아이가 똑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아들러는 어른과 아이는 똑같지는 않지만 대등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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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남녀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오늘날에는 남녀가 대등하지 않다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남성의 경우에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여성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주말마다 재미있는 데이트 장소에 데려가겠다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이 지내게 해주겠다고 호언하는 남성의 발언은 자신이 여성보다 우위에 서기를 바란다는 점을 은근히 드러낸다.

아들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남성이나 여성 가운데 어느 한쪽이 결혼 후에 상대방을 지배하려고 든다면 결과는 치명적일 것이다.”

남성이 여성을 지켜야 한다거나 여성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도 조심할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이 힘을 합쳐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지, 누군가가 상대방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런 생각은 두 사람이 대등한 커플이라면 결코 나올 수 없다.

■ 공감한다는 것

결혼을 위한 또 한 가지 올바른 준비는 공감 능력을 높이는 일이다. 아들러는 이를 두고 자신을 타인과 동일시하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아들러는 가정생활에 적절한 준비를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유에 관해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고, 다른 사람의 귀로 듣고,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 느끼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척도로 다른 사람을 본다면 자신과 상대방의 차이를 깨닫지 못한다. 그 때문에 상대방에 대해서 오해하게 되고, 그 오해가 두 사람의 관계에 상처를 입힌다. 친하다고 해서 혹은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해서 상대방을 모두 이해할 수는 있는 것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자신이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데 있다. 상대방이 자신과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도 않고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 것이 문제다.

■ 파트너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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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러는 누구나 어렸을 때부터 마음속에 이상적인 파트너를 만들어 낸다고 말했다.

남성의 경우 어머니가 이상형이며, 어머니와 매우 닮은 여성을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어렸을 때 어머니와 불행한 긴장관계에 놓여 있었다면 어머니와 정반대의 여성을 찾으려고 한다. 지배적인 어머니 밑에서 억압당하며 자라면, 여성에 대한 공포를 느껴서 연애나 결혼은 물론 여성과의 접촉마저 완전히 피하려는 현상도 나타난다. 따라서 억압당하며 자란 남성은 어머니와 달리 연약하고 순종적인 여성이 이상형이 된다.

아이를 꾸짖으며 키우는 부모는 아이가 스스로 책임을 져야하는 상황에서까지 아이의 과제에 개입해서 아이를 의존적으로 만드는 경우가 있다. 어머니가 아이를 의존적으로 키운다면 아이의 ‘마더 콤플렉스’를 발달시킬 수 있다고 아들러는 지적했다. 여성이 파트너를 선택할 때도 부모의 영향을 당연히 받는다. 앞에서 어머니의 영향으로 열등감을 갖게 되는 남성의 예를 들었는데, 여성도 비슷한 열등감을 지닐 수 있다. 게다가 사회에서는 남성이 여성보다 우위에 있다고 인식되기 때문에 여성은 자신의 열등감을 남성보다 훨씬 많이 보상받기를 원한다고 아들러는 지적했다.

■ 남녀는 대등하다

아들러가 1930년대에 쓴 책에는 “부부는 분업을 하고,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쓰여 있다. 남성은 바깥일에 전념하고 여성은 집안일에 전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뜻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남녀의 역할 분담을 고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남녀가 각자 자신에게 맞는 역할을 자유롭게 골라서 하면 된다고 본다. 다만, 앞에서 어른과 아이는 똑같지는 않지만 대등하다고 말했듯이, 남녀도 똑같지는 않지만 대등하다. 아들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의 분업은 남녀의 분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분업은 ‘편견이 전혀 없는 기준’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이 기준은 사회와 시대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 결혼을 위한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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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는지 알기 위해서 독일에서는 다음과 같은 테스트를 한다고 아들러는 보고했다.

남녀에게 손잡이가 두 개 달린 톱을 건네고, 서로 양끝을 맞잡도록 한다. 가족과 친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녀는 나무의 그루터기를 자른다. 상대방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서로 톱을 잡아당기기만 할 뿐 그루터기는 잘리지 않을 것이다. 또한 한 사람이 주도권을 쥐고 혼자서만 자른다면 둘이 협력해서 자를 때보다 시간이 두 배는 걸릴 것이다.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고 상대방의 움직임에 맞춰야만 제 시간에 그루터기를 자를 수 있다.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테스트라고 할 수 있다.

아들러는 “아무런 이유 없이 데이트 시간에 늦는 애인을 믿지 말라”라고 말했다. 이는 다른 인생의 과제와 마찬가지로, 과제를 앞에 두고 ‘망설이는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갖는 것이 두려워서 결혼을 피하는 사람, 출산으로 몸매가 망가지는 게 싫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태어난 아이를 애완동물처럼 여기고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아이를 낳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 역시 결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하는 사람, 직업이 없는 사람도 결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보았다.

실패를 거듭하면서 서로의 라이프스타일을 알아내고, 서로가 대등하다고 인식하면서 결혼생활에 맞닥뜨리는 문제에 대처해나가는 노력을 한다면 결혼이란 과제를 적절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서로 공감할 수 있다면 라이프스타일의 차이는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남의 과제에 간섭하지 않는다

결혼은 두 사람이 결정하는 일이다. 하지만 주변에서 그 결혼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결혼의 결말이 최종적으로 누구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혹은 누가 최종적으로 결혼의 책임을 지는지 생각한다면 결혼이 누구의 과제인지는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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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서 공부는 공부하는 사람 본인의 과제이지, 다른 사람의 과제가 아니다. 결혼도 마찬가지로 결혼하는 당사자 두 사람의 과제이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가 반대해도 두 사람이 스스로 결혼에 관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비록 부모가 반대 하더라도 부모의 뜻에 따라서는 안 된다. 결혼에 반대한 부모가 자식의 인생을 책임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기서는 결혼을 예로 들었지만, 일반적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남의 과제에 일체 간섭해서는 안 된다. 대인관계에서의 갈등은 쓸데없이 남의 과제에 간섭할 때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부탁을 받지 않는 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남의 과제를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다면 먼저 “내가 도와줄 게 없을까?”하고 물어보고, 도움을 사양한다면 그냥 옆에서 지켜보는 게 현명하다.

■ 열등감의 극복

이제부터는 ‘직업의 과제’에 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우리는 일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개인의 차원에서뿐 아니라 인류의 존속을 위해서도 모든 사람은 일을 하며 사회에 공헌해야 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필요한 것들을 모두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게으름이 미덕이고 근면이 악덕이라 하겠지만, 이 세상에는 일하지 않고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일하고 서로 협력하며 사회에 공헌해야 한다.

아들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누군가가 신발을 만든다면 그는 남에게 유용한 사람이다. 사회에 도움이 된다는 감각을 얻을 수 있고, 이런 감각이야말로 열등감을 완화할 수 있다.”

사실 모든 일은 꼭 자신이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널려 있다. 자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자부심을 느끼려면 자신이 이 일을 함으로써 남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의식을 지니는 것이 중요하다.

■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

고대 로마의 시인인 베르길리우스는 “사람들이 모든 일을 해내는 것은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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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단순히 하면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들러는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위험에 관해 설명하기 위해 베르길리우스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자신을 과소평가하면 ‘더 이상 따라갈 수 없다’고 믿어버리게 된다. 그러면 그것이 평생의 고정관념으로 작용해 더는 발전할 수 없게 되고, 늘 제자리걸음만 하게 된다. 그러나 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버리면 발전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경쟁하지 않는다

아들러는 또한 “다른 사람이 너보다 잘한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 없어”라고 말했다. 현대사회에서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경쟁하는 것이 당연한 듯 여겨지지만, 아들러는 경쟁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경쟁은 다른 사람을 동료로 볼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남들을 동료로 보지 않으면 남들과 협력하고 남들에게 공헌하기가 힘들어진다.

경쟁에 몰린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은 적일 뿐이고, 이 세상은 위험으로 가득하다. 정말로 뛰어난 사람은 자신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다. 자명한 사실은 따로 증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굳이 증명해야만 하는 사람은 ‘내가 과연 뛰어난 사람일까?’하는 의문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을 끌어 내리고 자기만 행복해질 수는 없다는 생각이 아들러의 기본적인 개념이다. 나만 이기면 괜찮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우월함을 남에게 과시하거나, 결과만을 중요시 하는 것이 문제다.

■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노력이 필요 없다

‘일’은 영어로 ‘Calling’, 독일어로 ‘Beruf’라고 하는데, 이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천직’이라는 뜻이다. 외부에서 강요받거나 남들과 경쟁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인간의 내면에서 촉발되었다는 뜻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당신의 밤 가운데 가장 고요한 시간에 시를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시오”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이 물음에 대해 ‘시를 쓰지 않고는 못 배깁니다’라는 대답을 할 수 있다면 “시를 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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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필연성에 따라 생활 계획을 세우시오”라고 말했다. 공명심이나 명예심으로 시를 쓴다는 것은 릴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면서, 남들에게 어떻게 공헌할 수 있는지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실패하면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하는 걱정도 하지 않는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실제로 결과를 내지 못한 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데 ……” 하며 미래의 가능성만 이야기 한다. 평가를 두려워하고 회피하기 위해 결과를 내지 않겠다는 것은 자신에게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하는 행동이다. 타인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과제가 주어졌을 때 할 수 있는 일부터 조금씩 시작한다.

아들러는 이를 ‘불완전한 용기’ ‘실패할 용기’라고 불렀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실패를 두려워한 나머지 과제를 아예 수행하지 않는 것보다는 조금씩이라도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실패는 직업의 과제뿐 아니라 다른 대인과계의 과제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실패와 좌절감은 인생을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겪는 일이다. 사람은 실패를 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배울 수 없으며, 교우관계에서든 연애관계에서든 자신의 생각이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않거나 오해받거나 때로는 말다툼을 하게 되는 경험이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

■ 기 싸움을 그만 둔다

경쟁하지 않으려면 기 싸움도 그만 두어야 한다. 물론 자신은 기 싸움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상대방이 싸움을 걸어올 수도 있다. 이 기 싸움에서 이기더라도 이로 인해 상대방과의 관계가 끝나버리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기 싸움에서의 초점은 누가 더 옳으냐를 떠나, 그들을 둘러싼 대인관계로 이동한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은 애초에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다. 어떤 주장을 하더라도 그것이 틀렸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인정하면 될 뿐인데,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을 패배로 간주하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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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앞서 결국에는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려도 자신에게 불리한 결단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기 싸움을 그만두지 못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며 상대방을 이겨 먹으려고 한다면 상대방은 복수를 시작하게 된다. 복수의 단계에 들어가면 화가 나기에 앞서 왜 이런 사태에까지 이르렀나 싶어 씁쓸함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분노

대화가 잘될 때는 상대방이 가깝게 느껴지지만, 반대로 싸움을 해서 감정적이 될 때는 상대방이 멀게 느껴진다. 그럴 때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상대방과의 심리적 거리가 멀어지면 옳은 주장일수록 상대방의 주장을 인정하고 싶지 않게 되고 , 결국 받아들이기 힘들다.

아들러는 분노는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감정이라고 말했다. 무언가를 상대방에게 주장하고 관철시키려면 관계를 개선하고 거리를 좁힐 필요가 있다. 분노는 그런 의미에서는 유용하지 않다.

■ 책임을 다한다는 것

인생의 과제에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 될 수 있으면 회피하려는 사람이 많은 듯하다. 그러나 인생의 과제는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인생의 과제에 직면했을 때 그 과제에서 도망치지 말고, ‘내가 해결하겠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인생이 생각대로 되지 않고 도망치고 싶더라도, 자신의 인생이므로 주어진 인생의 과제를 풀 사람은 자기 자신 밖에 없다. 그것이 각자가 받아들여야 하는 ‘책임’이다. 책임은 영어로 ‘Responsibility’라고 하는데, 이는 ‘응답하는 능력’이라는 속뜻을 지닌다. 그렇다면 여러 가지 핑계를 내세우며 인생의 과제에서 도망치려 하지 말고 ‘내가 해결하겠다’고 말하는 응답이 책임을 다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과제를 회피하기 위해 지금의 처지를 남 탓으로 돌리거나 과거의 이런 저런 사건 탓으로 돌리는 등 여러 가지 핑계를 내세우지 말고, 자신의 인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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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을 가져야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 직면하더라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주장에 따르는 책임은 남에게서 미움받을 각오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남들의 평가에 신경 쓰지 않고 미움받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자유롭게 살기 위한 핵심요소다.

견해가 다르면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이것이 자유롭게 살고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자유롭게 살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라고도 할 수 있다.

‘분위기 파악을 해라’라는 말을 자주 듣는데, 이 말은 결국 자신의 생각이 있어도 입 밖으로 꺼내지 말고 그 자리의 흐름에 맡기라는 뜻이므로 무책임한 말일 수 있다. 분위기 파악을 하라는 하라고 하는 이유는 협조성만 중시 되기 때문이다. 침묵하라는 압력이 가해져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되면 용기를 갖고 자신의 주장을 꺼내야 한다. 그러면 당연히 그 자리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는 해치겠지만,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거나 간접적으로 주장한다면 자신의 생각을 아무도 알 수 없다.

◉ 나이 듦을 행복하게 마주하기

■ 나이 듦을 자각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

젊었을 때는 늙는 다는 것이 자신과 상관없는 일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젊은 사람이라도 병에 걸리거나 장애가 생기면 신체 능력이 상실되면서 급격한 노화를 경험하기도 한다.

나는 쉰 살 때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다. 심근경색은 심장 혈관이 노화하면서 발생하는 병이다. 심근경색에 의해 괴사된 심장근육은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이런 삼각한 병에 걸리지는 않더라도 사람은 언젠가는 노화가 시작된다. 다만, 신체의 노화와 무관하게 자신이 나이 들었다고 느끼는 때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이가 약해지고, 노안 과 건망증의 빈도가 늘어나며, 기억능력의 쇠퇴 등 노화를 자각하면 자신을 과소평가하게 되고, 강한 열등감에 생긴다고 아들러는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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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다시 소속감에 관해

일을 하던 사람이라면 나이가 들어서 정년퇴직을 맞이하게 된다. 정년이 정해지지 않는 일이라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 늦든 빠르든 결국에는 능력의 저하를 자각하는 시점에서 업무의 내용과 양을 변경할 수밖에 없다.

노년의 문제는 능력 쇠퇴 자체에 있지 않다.

직책의 높고 낮음이 인간으로서의 높고 낮음으로 간주되는 사회에서는 업무를 내려놨을 때, 자신이 더 이상 가치가 없다고 느껴지고, 실의에 빠진 나날을 보내게 된다.

아들러는 이때 노인이 아직도 가치가 있고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이의 말을 모두 받아주는 온화한 노인이 되거나 매섭고 신랄한 비평가가 된다고 한다.

소속감은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데, 오랫동안 일을 해온 사람에게는 퇴직하고 직장을 떠날 대가 인생의 커다란 위기라고 할 수 있다.

‘무소속의 시간’이 “인간을 인간으로서 소생시키고, 더 크게 성장시키는 시간(시로야마 사부로의 <무소속의 시간으로 산다>에서)”이라고 생각하는 데까지는 꽤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 젊었을 때와는 다른 공헌

아들러가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다” 라고 말했고. 고대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도 이렇게 말했다.

“지금 청년 같은 체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청년에게 소나 코끼리 같은 체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체력을 잘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또한 나이가 들면서 지력이 약해지지만 젊은 시절에 비하면 인생이나 세상에 관한 이해가 오히려 더욱 깊어진다.

며칠 밤을 새워도 괜찮았던 체력이나 점심 식사를 거를 만큼 높았던 집중력이 사라지고, 젊었을 때는 할 수 있었던 일을 지금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숨만 내쉬고 있다면, 제자리걸음만 하며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이 모든 일을 해 내는 것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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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길리우스의 말처럼 노년의 한계 내에서라도 무언가 일단 시작해야만 비로소 나이를 핑계로 포기하는 일이 사라진다.

■ 라이프스타일의 차이에 의존 한다

모든 사람이 노화를 똑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들러는 갱년기가 결코 위기가 아니라고 말했다.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젊음과 아름다움으로만 가치를 인정받았던 여성은 갱년기가 되면 “사람의 이목을 끌기가 어렵고, 자신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적의를 갖고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 언짢은 기분 때문에 우울증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여성이 젊음과 아름다움으로만 가치를 인정받지 않는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케팔로스 라는 노인이 소크라테스에게 한 말이다.

“소크라테스여, 불행의 원인은 노화가 아니라 사람의 성격입니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노년이 그다지 괴롭지 않습니다. 하지만 괴롭다는 사람은 청년이었을 때도 역시 괴로운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 병에 걸렸을 때

병은 노화와 달리 언제 어디서 걸릴지 모른다. 나이가 젊은데도 병이 들어 요절하는 사람도 있지만, 병은 아무래도 노화와 관련이 깊다.

건강할 때는 자신과 몸이 일체화되어 몸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살지만, 병이 들면 몸에 의식을 집중시키게 된다.

나이가 들면 몸에서 이상 신호가 나타나도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알아차리더라도 오히려 좋은 쪽으로 해석해버릴 수도 있다. 나는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기 전부터 심장이 나빠서 빨리 걸을 수 없었는데도, 운동부족이기 때문에 근력이 떨어져서 걷기가 힘들어졌다고만 생각했다. 혈압도 높고 밤에 잠도 잘 이루지 못했는데도 별일 아니라고 여겼는데, 몸에서 발산되는 경고를 무시하거나 좋은 쪽으로만 해석해버린 셈이다.

어쨌든 평생 한 번도 병에 걸리지 않는 사람은 없다. 몸의 이상 신호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갑작스럽게 병에 걸리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오히려 자신이 건강하다고 생각할 때야 말로 병에 쉽게 걸리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병은 피할 수 없으며, 병에 걸리는 것은 결코 운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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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델란드의 정신병리학자 판덴베르흐는 “정말로 건강한 사람은 병에 걸리기 쉬운 몸을 갖고 있고, 그 사실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병에 걸렸을 때는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다행히 치료가 되더라도 그에 만족하지 말고 또다시 병에 걸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충분히 주의를 해야 한다. 병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병에 걸린 몸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 병에서 회복하기

병이 치료된 후에 이전의 나쁜 생활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으므로 단순히 몸을 의식하지 않게 된 것을 회복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물론 몸을 의식하지 않게 된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이래서는 병에 걸리기 전의 건강한 몸으로 완전히 되돌아갔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완치 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지 말고, 병에 걸린 경험에 의해 이전에는 몰랐던 사실을 깨닫고 음미해보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병에 걸리기 전과는 다른 인생을 산다면, 그것이 바로 진정으로 회복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병에서 회복한다는 것은 이처럼 병에 걸리기 전의 건강한 몸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내가 병에 걸렸던 일 자체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았고 잃어버린 것도 많았지만, 그래도 병에 걸린 덕분에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강하게 느꼈다.

■ 생명 자체의 절대적인 고마움

병에 걸려서야 비로소 건강의 고마움에 관해 이야기 하는 것은 건강을 다시 회복했을 때를 전제로 한다. 소설가 호조 다미오는 한센병에 걸린 주인공을 통해 ‘삶에 대한 사랑’과 ‘생명 자체의 절대적인 고마움’을 이야기 했다. 당시에는 한센병을 치료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없어서 환자는 격리된 채 살아야만 했다. 절망한 주인공은 끈으로 목을 매어 죽으려고 했지만 끈이 풀어지면서 실패했다. 그는 “목을 맨 끈이 느슨해지는 느낌이 들자 왠지 마음이 놓였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또다시 목을 맬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앞으로 병세가 좋아질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 때는 건강의 고마움뿐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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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가 말하는 ‘생명 자체의 절대적인 고마움’도 알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환자의 생각의 나타내는 적절한 표현이다.

■ 시간이 없는 해안

병에 걸려 신체적으로 원래 상태로 돌아갈 수 없을지라도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생각해보자.

첫째, 환자(그리고 가족)는 ‘시간이 없는 해안’에 떠밀려온 존재다. ‘시간이 없는 해안’은 네델란드의 정신병리학자 판덴베르흐의 말이다.

“모든 일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움직이지만, 환자는 시간이 없는 해안에 떠밀려온 존재다.”

병에 걸리면 내일의 업무 약속을 취소해야 하기 때문에 내일은 오늘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다. 당연히 올 것이라고 여겼던 미래가 사라지는 셈이다. 물론 병에 걸리기 전에도 미래가 정말 찾아올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건강할 때는 그 사실을 의식하지 않은 채 지낸다.

인생을 가장 오해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건강한 사람들이 아닐까?

‘내일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살아가는 데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병에 걸려서 시간이 사라지는 경험을 한 사람은 그 후 시간에 관해 이전과는 다른 견해를 갖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병에 걸렸을 때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지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키네시스(운동)와 에네르게이아(상태)’에 관해 다음과 같이 대비하며 논했다.

일반적인 운동(키네시스)에는 시작점과 끝점이 있다. 그 운동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중요하며, 목적지에 이르기까지의 운동은 목적지에 이르기 전까지는 불완전하며 미완성이다.

한편 에네르게이아(상태)는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가 그대로 ‘이루어진 것’과 같은 운동이다. 이 운동은 어딘가에 도달했는지에 상관없이 이미 완성되어 있다.

- 춤 : 지금 춤추는 자체에 의미가 있다. 목적지는 없다.

- 여행 : 목적지로 향하는 과정 모두가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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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삶은 어떤 운동일까?

인생은 시작점(출생)과 끝점(죽음)이 있는 수직선으로 비유되는 경우가 많다. ‘당신은 지금 인생의 어느 지점에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청년은 수직선의 중간에서 왼쪽을 가리킬 것이고 중장년은 수직선의 중간에서 오른쪽을 가리킬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반환점까지는 아직 멀었다’라거나 ‘인생의 반환점을 돌았다’라는 등의 표현은 앞으로도 살날이 많이 남았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우리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한 인생의 반환점이 정확히 어느 지점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병에 걸리면 인생을 이처럼 선분으로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던 미래가 어쩌면 사라지게 될지도 모르는 현실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시작점과 끝점이 있는 운동이 아니라, 춤을 추는 것 같은 에네르게이아의 운동, 즉 어딘가에 도달한다는 목적이 없는 운동이다. 매 순간 ‘지금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삶이다.

삶을 에네르게이아로 본다면 사람은 살아가는 동시에 삶을 이루고 있다. 내일이 기다리고 있지 않더라도 인생은 지금 여기에서 완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을 깨닫는다면 병에서 회복되지 않더라도 혹은 회복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이 없는 해안에 떠밀려온 존재’라는 말은 시간 자체가 사라진다기보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파악하게 된다는 의미라고 이해하면 된다.

■ 존재 자체로 공헌 할 수 있다

아들러는 문제 행동을 일으키는 소년의 사례를 들었다. 소년의 문제행동은 너무 심각해서 소년의 아버지가 소년을 시설에 맡기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러던 소년이 병에 걸려 1년 동안이나 병상에 누워 지내다가, 가까스로 회복하고 학교에 복학했다. 그 후 소년의 성격은 180도 바뀌었다.

소년은 이전까지 자신이 다른 형제보다 부모에게 냉대를 받았다고 느꼈는데, 오래 투병 생활 내내 가족이 자신을 성심껏 돌봐주고 있음을 깨달았다. 자신은 냉대 받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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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에 걸리고 나서야 비로소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었다. 이전까지는 남들을 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가족이 헌신적으로 간병해 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후에는 자신이 사실은 사랑받고 있음을, 남들이 적이 아니고 동료임을 깨달은 것이다.

- 가끔은 꾀병으로 그때의 관심을 지속하려는 아이들이 있기도 하다.

내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기 얼마 전에, 학창시절 친구로부터 대학교수가 되었다는 인사장을 받았다. 한때 나도 대학교수가 되기를 꿈꿨기 때문에 그 인사장을 받은 나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친구의 승진을 순수한 마음으로 기뻐하지 못하고 질투한 것이다.

입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친구가 생각났다. 그래서 인사장에 적힌 이메일 주소로 연락을 취해보았다. 그러자 즉시 답장이 왔고. 그날 바로 재회할 수 있었다. 바빴을 텐데도 나를 걱정해서 한걸음에 달려와 준 것이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이는 병에 걸린 덕에 얻은 소중한 경험이었다.

■ 피할 수 없는 죽음

사람이 살아가면서 절대 피할 수 없는 문제가 죽음이다. 죽음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인간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반드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사실은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 가지 나쁜 것 가운데 가장 무서운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할 때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고, 죽음이 존재할 때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확실히 그럴듯한 말이다. 우리는 ‘남의 죽음’을 볼 수는 있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나의 죽음’을 경험해볼 수 없다. ‘나의 죽음’은 죽어야만 비로소 체험할 수 있으니, 지금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죽음이 무서운 이유는 죽음이 어떤 것인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르는 것에 불안을 느끼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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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의 공포를 극복한다

죽음은 삶의 한가운데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삶의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죽음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오로지 ‘죽음의 공포’라는 형태로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은 반드시 죽음을 맞이한다는 문제는 남는다. 죽음에 맞서지 않기 위해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다른 인생의 과제를 회피하려고 할 때도 같은 태도를 취하려고 할 것이다. 죽음은 그런 의미에서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이 하는 일은 죽음을 무시하는 것이다. 자기는 절대 죽지 않는다고 자기 암시를 하거나,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믿기도 한다. 퀴블러 로스처럼 죽음을 이번 인생에서 다른 인생으로 이행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거나 살아 있을 때와는 다른 형태로 바뀔 뿐(예를 들어 바람으로 바뀐다거나)완전히 무(無)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삶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기분은 충분히 이해한다. 죽어도 무(無)가 되지 않는다고 믿어야만 죽음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고, 남겨진 사람도 죽은 사람과 이별한 슬픔을 치유할 수 있다.

■ 보상받지 못하더라도

나의 어머니는 시어머니를 간병하기 위해 일을 그만 두었고, 자식들을 뒷바라지 하느라 반평생을 바쳤다. 자식들이 장성해서 겨우 자신의 인생을 즐기려던 참에 뇌경색으로 돌아가셨다. 평생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어머니 같은 인생은 과연 어떻게 보상받아야 할까? 스위스의 사상가 힐티(Carl Hilty)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전에 천벌을 받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이 세상에서 모든 계산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죽음 뒤의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추론을 정당화 한다.” 분명히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나는 나쁜 사람이 벌을 받지 않는다거나 착한 사람이 보상을 받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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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는다는 사실이 내세가 존재한다는 증거라는 증명할 수 없는 생각에 희망을 걸고 싶지 않다. 사람이 굳이 보상받기를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면 죽은 후에도 보상받기를 꼭 원할 필요가 없다.

■ 다음 세대에게

“몸이 급속도로 쇠약해지고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죽으면 완전히 소멸한다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다.”

아들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생의 마지막 시험은 나이 들어 죽는 것에 대한 공포다. 다음 세대를 보면서 문화의 발전에 공헌했다고 의식함으로써 자신의 내세를 확신하는 사람은 나이 들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형태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세상에 무언가를 남김으로써 후세에 공헌할 수 있다면 의미가 있다. 이때 나 자신이 죽어서도 남을 수 있느냐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 어머니 : 자식을 키워서 사회에 유용한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키우는 것

- 키케로 : <노년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극작가 스타티우스의 말을 인용.

“다음 세대에 도움이 되도록 나무를 심는다.”

- 루터 :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 우치무라 간조는 <후세에 물려줄 가장 큰 유산>이라는 책에서 이 세상을 떠날 때 ‘지구’를 사랑했다는 증거를 남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후세에 남겨줄 수 있는 유산이 있다. 이 유산은 이익만 있고 손해는 없다. 그것은 바로 용감하고 고상한 생애다.

■ ‘잘 산다’는 말의 구체적 내용

결국 죽음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죽음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지금의 삶이 달라지지 않는다. 살아가는 한, 죽음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어떻게 살아가야할지를 고민하는 것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하나의 길이다.

죽음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데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도 스스로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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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없다면, 그런 문제에 관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

아들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생은 유한하지만,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데는 충분히 길다.”

이처럼 중요한 것은 ‘잘 사는’ 일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은 아들러의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될 때는 나의 가치가 공동체에 유익할 때 뿐이다.”

행운만 바라면서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움직여준다고 생각하는 의존적인 아이의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한 채 성장한 어른은 냉정한 현실에 부딪혀 좌절하기 십상이다. 인생에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목적은 따로 있다. 바로 인생의 과제를 회피하기 위해서다.

잘 사는 데만 전념한다면 앞으로의 일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죽으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죽음을 지나치게 의식한다면 삶을 알차게 살아갈 수 없다.

◉ 제5장 일상 속에서 행복 찾기

■ 문득 발을 멈추고

제4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키네시스(운동)와 에네르게이아(상태)를 구별했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출퇴근이나 통학의 움직임은 시작점과 끝점이 있고 되도록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키네시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출퇴근이나 통학이라는 반복적인 일상생활 속에서도 에네르게이아로서의 삶이 존재한다.

출근 전철 안에서도 마치 여행을 떠나온 사람처럼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가끔씩 마음을 빼앗겨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효율이 요구되는 일상생활도 단순한 반복이 아닐 수 있다.

오늘날은 앞이 보이지 않는 세상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것은 분명 불안한 일이다. 하지만 오늘 하루가 지금 이곳에서 완성된다고 하면 앞날을 생각하며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된다. 물론 내일을 오늘의 연장선으로 생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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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그런 삶이야말로 에네르게이아로서의 삶이 아닐까싶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에 중학생이 되었을 때를 생각하곤 했다. 중학생이 되자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일만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미래를 고민할 시간에 그 순간순간을 더욱 즐겼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후회가 든다. 진학하기 위해서는 시험을 봐야 하겠지만, 매 순간의 삶은 미래에 이어지는 인생의 준비기간이 아니다.

‘지금은 가짜 인생이지만 이것만 이루면 진짜 인생이 시작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리허설이 아닌 ‘진짜 인생’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 영원을 응시하며

이처럼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며 살 수 있다면 이따금 찾아오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게 된다. 무엇이 좋은 기회인지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다. 별 뜻 없이 한 말이 남에게는 인생의 전기가 되기도 한다.

한편,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며 사는 동시에 ‘영원한 시간이 있는 것처럼’ 일에 몰두할 필요도 있다. 철학자인 모리 아리마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황해서는 안 된다. 릴케가 말했듯이 앞으로 무한한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고 침착해야 한다. 그래야 양질의 일을 낳을 수 있다.”

아들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신감을 갖고 인생의 과제와 대결하려는 사람은 초조해하지 않는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일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인생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생의 과제에 임하지 않겠다는 핑계로 이용할 수 있다.

아들러의 말을 뒤집어 말하면,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초조해하고, 그 초조함을 설명하기 위해 시간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핑계로 내세운다.

■ 이중의 삶

이중의 삶은 현실이 어떻든 간에 ‘이상을 잃지 않는 것’과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을 양립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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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 우리를 좌절로 몰아넣을 위험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경쟁을 통해 살아남아야 하는 오늘날의 현실을 바라보면 ‘남을 동료로 파악하고 공헌하라’는 아들러의 말은 현실성이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상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이상인 것이다. 앞을 응시해야만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동요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다.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사건과 맞닥뜨려도, 넓은 눈으로 보면 그 사건은 인생의 커다란 에피소드이기는 하지만 치명적이지는 않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인생에서는 분명히 길을 잃고 헤매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상을 ‘길잡이 별’로 삼는다면 금세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사건이 이상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에서 일어나는 셈이 되고, 일시적으로 쓰러질지언정 절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 목표에 초점을 맞춘다

목표만 달성되면 된다고 생각하고 달성에 이르는 과정을 즐기지 않는 경우도 있다. 대학교에 합격하거나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결혼에 성공하기만 하면 이후의 행복이 보장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대학교나 좋은 직장, 결혼은 인생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이지, 결코 골인 지점이 아니다.

궁극적인 목표에 초점을 맞춘다면 늘 하나의 길만 고집하지 않고, 필요하다면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때까지 들인 시간과 노력과 돈이 너무 많으면 길을 바꾸는 데 큰 용기가 필요하다.

실제로 첫 결심을 뒤집어야 할 때가 종종 있다.

그리고 목표 달성에 효과적인 일만 하는 것도 문제다. 수험생이라고 해서 공부 외에 다른 일을 전혀 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이다.

기계는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면 그만이다. 왜냐하면 기계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만’ 만들어져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인간도 특정한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움직인다는 의미에서 기계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목적 달성에 이르기까지 그저 목적에 유용한 일만 하지 않고, 언뜻 쓸데없어 보이는 일도 할 수 있다는 점이 인간과 기계의 차이다. 효율적으로만 살아가는 것은 인간의 삶과는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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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쉽지 않다

인생을 살면서 직면하는 과제는 무엇 하나 쉬운 일이 없다. 그러나 어렵다고 해서 혹은 실패가 두렵다고 해서 과제를 회피하고, 회피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생의 어려운 점을 찾아내서 핑계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인생의 과제를 회피하기 위한 구실로 찾아낸 인생의 어려운 점은 사실 본질적으로 어렵지 않다.

인생은 분명히 괴롭다. 이 세상은 완전하지 않고 부조리로 가득하다.

아들러는 이 세상이 장밋빛이라는 것도, 반대로 세상을 비관적인 말로 묘사하는 것에도 반대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지구상에서 유유자적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인생의 쾌적함뿐 아니라 불쾌함까지 자신에게 속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인생에는 쾌적함뿐 아니라 불쾌함도 존재하는데, 아들러는 ‘지구상에서 유유자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그 사실을 확신한다고 말한다. ‘지구상에서 유유자적하며 살아간다’라는 말은 아들러가 즐겨 사용했는데, 이와 반대되는 표현은 ‘적진 한가운데 떨어졌다’이다.

“분명히 세상에는 악, 어려움, 편견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세상이며, 이로운 점이나 불리한 점이나 모두 우리 몫이다.”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고, 인생에서는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지만,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늘 생각한다. 따라서 괴로움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살아 있을 가치는 있다.

■ 지금 이곳에서 행복해질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역사>에는 아테네의 정치가 솔론과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의 대화가 실려 있다. 크로이소스는 솔론에게 물었다. “지식을 탐구하며 세상을 돌아다녔던 당신은 누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사실 크로이소스는 자신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대답을 듣기 위해 솔론에게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하지만 솔론은 평범한 시민의 예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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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이소스는 솔론에게 또 이렇게 물었다.

“내 행복은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 라고. 솔론은 이렇게 대답했다.

“어떤 행운이라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습니다. 오늘 행복하다고 해서 내일도 행복하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일은 우연일 뿐입니다.”

그 후 페르시아군의 침략으로 크로이소스는 포로로 신세로 전락했다. 그는 높이 쌓인 장작위에서 화형에 처해지면서 솔론의 말을 떠올렸다.

“인생을 살아가는 한 그 누구도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과연 인생을 살아가는 한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을까? 나는 이 물음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싶다. 인생의 마지막 날을 기다리지 말고, 또한 내일을 오늘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오늘 하루를 만족스럽게 산다면 지금 이곳에서 행복해질 수 있다.

■ 놀이도 인생의 과제

인생은 괴로움의 연속이 아니다. 즐거운 놀이도 인생의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업무가 생산적이라면, 놀이는 비생산적이다. 그러나 생산적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고, 비생산적이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즐겁게 놀 수 있는 사람만이 다른 인생의 과제도 즐겁게 해낼 수 있다.

에네르게이아(상태, 14, 15, 19쪽 참조)로서의 삶은 매 순간이 소중하지만, 그렇게 살기 위해 늘 숨이 막힐 정도의 긴장 상태에 있을 필요는 없다. 구약성경 <전도서>에서는 인생의 모든 일에 다 때가 있다고 한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고,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 있다.

“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일이 무엇이랴(전도서 3장 12절).”

■ 결국 자신이 하기 나름

다른 사람이 인생의 과제에 맞서도록 도와주는 일을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용기 부여’라고 말한다. 그 사람의 장점이나 남들에게 공헌해준 사실을 칭찬하는 방식으로 용기를 부여해줄 수 있지만, 당사자가 인생의 과제에 맞서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 누구도 그 사람을 도와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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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슬링은 카운슬러와 내담자가 지도를 보면서 함께 여행을 다니는 것과 같다. 어느 정도까지는 함께 갈 수 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내담자가 홀로 가야 한다. 그 뒤로 카운슬러는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카운슬링을 꼭 받지 않더라도, 지금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이라도 바꾸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그 순간부터 이미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루르드 샘으로 기적의 물을 찾아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치유는 시작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삶의 자세가 달라지면 당연히 수반되는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은 독자 여러분 가운데, 이 책을 읽기 전에 행복에 관하여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에 대한 고찰은 이것으로 줄이겠다. 이후에는 여러분이 어떤 결심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 루르드 샘 : 루르드는 프랑스 남쪽 피레네 산맥 기슭에 있는 작은 마을로, 19차례에 걸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난 뒤로 세상에 알려졌다. 성모 마리아를 만난 한 성녀가 손으로 판 곳에서 물이 스며 나와 샘이 되었는데, 이 샘물이 치유능력을 지녔다고 여겨진다.

2015. 9. 6.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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