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끓이며
라면을 끓이며
■ 김훈
0 1948 서울 출생
0 2000년까지 여러 직장 전전
0 소설 ‘칼의 노래’ 산문 ‘풍경과 상처’외 여럿
1부 밥
■ 라면을 끓이며
나는 허름한 식당에 친밀감을 느낀다. 식당의 간판이나 건물 분위기를 밖에서 한번 쓱 훑어보면 그 맛을 짐작할 수 있다. 가게 이름이 촌스럽고 간판이 오래돼서 너덜거리고, 입구가 냄새에 찌들어 있는 식당의 음식은 대체로 먹을 만하다. 이런 느낌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어긋나지는 않는다.
계통이 없는 수많은 메뉴를 유리창에 써붙인 집은 잘하는 집이 아니다. 음식을 잘하는 집은 자신 있는 메뉴 두어 개로 중심을 잡고 거기에 딸린 반찬들을 준비한다. 라면의 계통 안에서도 수많은 변화가 있고, 김밥의 영역 안에서도 다양성이 있는데, 너무 잡스러우면 대개 맛이 없는 식당이다.
삼겹살을 구워서 상추에 싸고 거기에 쌈된장 찍은 마늘을 얹어서 아래턱이 빠지도록 입을 벌리고 욱여넣는 식사법은 한국인이 발명한 종합적인 ‘한입’이다. 생선회도 이렇게 먹는데, 여기에는 깻잎이 추가된다. 이 ‘한입’은 쌀밥, 육류, 야채, 양념, 향신료 모든 것을 한 방에 먹여준다.
나는 무짠지가 우러난 국물에 찬밥을 말아 먹는다. 그 맛은 단순하고 선명해서 음식의 맛이라기보다는 모든 맛이 발생하기 이전의 새벽의 맛이고,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가장 시원적인 맛이다.
퇴계(退溪 1501-1570) 선생은 도산에서 공부할 때 끼니 때마다 반찬은 세 가지만 차려놓고 잡수셨다. 제자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뵈러 갔더니 밥을 내주시는데 반찬은 무와 가지와 미역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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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가지, 미역, 이 세 가지 반찬은 모두 장아찌였거나 나물이었거나 생재료였을 것이다.
나는 성인의 글을 아무리 읽어도 글 따로 마음 따로, 마음 따로 몸 따로여서 글을 읽어서 성인의 뒤를 따라가기는 틀린 것 같은데, 타고난 식성만큼은 성인과 닮아 있음을 다행으로 여긴다.
요즘에 김밥도 퓨전이 나와 있는데, 그 속에 치즈, 샐러드, 불고기, 게살, 소시지 따위를 넣어 뚱뚱하게 만든다. 나는 이런 김밥은 딱 질색이다. 내가 좋아하는 김밥은 그 속에 단무지와 시금치, 또는 우엉 한 줄만 넣은 것이다. 절인 무와 실파, 깻잎, 고구마순처럼 야채만으로 속을 넣은 김밥도 좋다. 이런 김밥은 씹으면 청량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김밥은 자그마해서, 입을 크게 벌리지 않아도 한 입에 쏙 들어가야 한다. 햄버거는 그 두꺼운 볼륨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하마처럼 입을 벌려서 입안으로 밀어 넣어야 하지만, 김밥을 먹는 행위의 즐거움은 재료의 에센스들을 동그랗게 모아 놓은 음식을 입안으로 쏙 집어넣는 그 경쾌함에 있다. 김밥은 과자나 떡 같은 주전부리가 아니라, 당당히 ‘밥’의 계열에 속한다.
고급식당에는 여러 사람이 좋은 옷 입고 와서 식사와 사교를 겸해서 먹지만, 김밥이나 라면을 파는 식당의 손님은 대부분이 지나가다가 배고파서 들어온 사람들이다. 혼자서 온 사람은 거리 쪽을 바라보면서 혼자 먹는 1인용 자리에 앉지만 1인용 자리가 없을 때는 2인용 또는 4인용 테이블에서 모르는 사람과 마주 앉아서 먹어야 한다.
모르는 사람과 마주앉아서 김밥으로 점심을 먹는 일은 쓸쓸 하다. 쓸쓸해하는 나의 존재가 내 앞에서 라면을 먹는 사내를 쓸쓸하게 해주었을 일을 생각하면 더욱 쓸쓸하다. 쓸쓸한 것이 김밥과 함께 목구멍을 넘어간다.
추위와 시장기는 서로를 충동질해서 결핍의 고통을 극대화한다. 추운거리에서 혼자 점심을 먹게 될 때에는 아무래도 김밥보다는 라면을 선택하게 된다. 짙은 김 속에 얼굴을 들이밀고 뜨거운 국물을 마시면, 콱 쏘는 조미료의 기운이 목구멍을 따라가며 전율을 일으키고, 추위에 창자가 녹는다.
맛은 화학적 실체라기보다는 정서적 현상이다. 맛은 우리가 그것을 입안에서 누리고 있을 때만 유효한 현실이다. 그 외 모든 시간 속에서 맛은 그리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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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변해서 사람들의 뼈와 살과 정서의 깊은 곳에서 태아처럼 잠들어 있다. 맛은 추억이나 결핍으로 존재한다.
라면이나 짜장면은 장복을 하게 되면 인이 박인다. 그 안쓰러운 것들을 한동안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지 않아도 공연히 먹고 싶어진다. 인은 혓바닥이 아니라 정서 위에 찍힌 문양과도 같다. 세상은 짜장면처럼 어둡고 퀴퀴하거나, 라면처럼 부박(浮薄 천박하고 경솔함)하리라는 체념의 편안함이 마음의 깊은 곳을 쓰다듬는다.
라면이 처음 나온 것은 1963년이었다. 쌀값이 얼마라는 기사는 일기예보나 증권시세처럼 연일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춘궁기에는 2백만명 이상이 굶주렸다. ‘기아 퇴치’ 또는 ‘절량 농가 근절’이라는 국정지표를 써붙인 현수막이 관공서 건물마다 걸려 있었다.
라면의 탄생은 수천 년 동안 이어진 허기를 달래준, 식량사의 전환으로 꼽힌다. 라면의 제조 기술은 모두 일본에서 배운 것이지만 한국 라면은 1인분의 양이 일본 라면의 1.5배가 넘고 칼로리가 높아서 한 끼의 식사가 될 수 있도록 보강되었다. 라면의 등장은 1차 산업으로 식재료를 증산하지 않더라도 대량 가공과 보관, 유통과 가격정책만으로도 식량난은 완화 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소설가 이문열은 그의 소설 <변경>에서 60년대 초의 라면 맛에 다음과 같이 경의를 표하고 있다.
노랗고 자잘한 기름기로 덮인 국물에 곱슬곱슬한 면발이 담겨 있었는데, 그 가운데 깨어 넣은 생계란이 또 예사 아닌 영양과 품위를 보증하였다.(…) 철은 갑작스레 살아나는 식욕으로, 그러나 아주 공손하게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그때의 주관적인 느낌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맛난 음식을 먹고 있는 듯했다.
이제는 세상을 떠난 문학평론가 김현도 이승에서 어지간히 라면을 잡수셨던 모양이다. 그는 라면에 물을 아주 조금만 붓고 끓여서 떡처럼 만들어 술안주로 먹기까지 했다고 자신의 글에서 밝혔다. 김현은 라면을 먹으면서, 상실된 삶의 두께를 괴로워했다. 그는 전통과 당대가 단절된 틈바구니에서 라면을 먹었다. (김현, <두꺼운 삶과 얇은 삶> 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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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에 갔더니 거기서도 라면은 밥보다도 인기가 높았다. 주말에는 고정 메뉴로 라면을 먹었고 혹한기 기동훈련이나 유격훈련 때의 특식, 국군의 날, 축구시합 뒤풀이의 특식은 모두 라면이었다. 강원도 산골에서 온 어떤 하사관은 내무반 페치카에 라면을 끓여서 곧바로 먹지 않고 십 분쯤 지난 뒤에 먹었다 그 까닭은 물었더니 불어서 양이 많아지기를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군대 생활의 즐거움은 화랑담배와 라면에 있다고, 그는 신병들을 한 줄로 새워놓고 연설했다. 내무반에서 라면을 끓여먹을 수 있는 군번이 못되는 신병들은 분말 수프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밥 먹을 때 국이나 밥에 뿌려서 먹었고, 맹물에 그 가루를 풀어서 국처럼 마시기도 했다.
처음 나왔을 때 라면은 1개에 10원이었는데 지금은 권장 소비자 가격이 800원 정도다. 여기에 가래떡이나 만두 두어 개를 넣어서 끓이고 계란을 한 개 풀면 3500원, 돼지고기 몇 점을 얹으면 4000원이다.
이제 1인당 국민 소득이 3만 달러를 넘어섰고 먹을 것이 넘쳐나지만 라면 시장은 위축되지 않는다. 라면은 한국인의 정서적 토양의 기층에 착근되었다. 외환위기와 대량해고, 청년고용 절벽, 내수침체의 시절에도 국내 라면 시장은 더욱 번성했고 2013년에는 매출액 2조를 넘어섰다. 2013 통계에 따르면 평균 한국인은 1년에 라면 74.1개를 먹는다. 인도네시아는 60개, 베트남은 57개 등이다. 전체 한국인은 1년에 라면 36억 개, 중국인은 462억 개를 먹는다. 이 통계를 보면 한국인은 세계에서 라면을 가장 많이 먹는다.
라면을 좋아하건 푸아그라를 좋아하건, 입맛은 빈부 차이와 관계없다는 말은 사람을 조롱하는 거짓말이다. 누군들 깨끗하고 신선한 음식, 갓 잡아온 것과, 갓 뽑아온 것들, 산과 바다와 흙의 기운을 지닌 풋풋한 것들을 먹고 싶지 않겠는가. 부자들도 라면을 좋아할 수 있고 부자들이 때로는 라면을 먹기도 한다고 해서, 라면 시장의 팽창이 자본주의의 싹쓸이가 몰고 온 인간소외 사태와 관련이 있으리라는 나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증명하기 어려울 뿐이다.
된장이나 간장, 무짠지, 오이지, 고추장아찌는 맛의 심층구조를 갖는다. 시간이 그것들의 맛의 심층을 빚어낸다. 기다림 없이는 짠지다운 짠지를 맛볼 수 없다. 김장이나 오이지를 담그고 나서 우리는 설레는 환상을 참으며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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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숙성을 기다려야 한다. 미리 뚜껑을 열고 들쑤시면 동티가 나서 다 망친다.
된장찌개 국물은 된장과 여러 가지 건더기들의 삼투와 종합으로써 이루어진다. 그 국물은 된장도 아니고 개별적인 건더기도 아닌, 어떤 새로운 창조물이다. 거기에 깊이가 드리워진다.
그 깊이는 인간을 위안하는 힘이 있다. 미역국의 위안은 섬세하고 된장찌개의 위안은 깊디. 이 깊이와 섬세함은 스밈과 우러남에서 온다. 건더기는 국물속으로 우러나고 국물은 건더기 속으로 스민다. 완성된 된장찌개 속에서 건더기가 뭉그러져서는 좋은 찌개가 아니다. 건더기는 그 고유의 맛을 국물에 내어주고 나서도 건더기로서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때 건더기는 국물의 스밈에 의해 새로운 맛의 건더기로 신생(新生)하는 것인데, 이 조화속에서의 독자성은 아름답다.
2,3년 전까지 동네 짬뽕 값은 보통 짬뽕이 5000원, 삼선짬뽕이 6000~7000원이었다. 물론, 가게마다 다소 차이는 있었다. 일 년쯤 지나자 짬뽕 값은 양극화되기 시작했다. 보통 짬뽕은 4000원, 삼선짬뽕은 8000원으로 가격차가 벌어졌다. 그때 나는 짬뽕 값의 하한선이 4000원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몇 달이 지나자 3500원짜리 짬뽕이 나타났고, 짜장면 값의 하한선도 무너졌다. 그때 식당에서 먹는 라면 값은 3000~3500원 정도였다. 1963년에 라면이 등장한 이후로 라면은 짜장면이나 짬뽕보다 싼 음식으로 자리 매겨졌고 그것이 밥의 세계에서 라면의 온당한 자리였다. 짜장면과 짬뽕 값의 하한선이 무너져 내리자 라면 값도 위협받게 되었다. 이제 라면 한 그릇의 값은 어디로 가려는가. 라면 속의 건더기들(어묵, 달걀, 가래떡, 만두)은 이제 사라지려는가.
나는 3500원짜리 짬뽕이 어떤 식재료를 쓰는지 확인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국물은, 3500원짜리나 8000원짜리나 똑같다. 그 국물의 맛은 식재료를 우려낸 맛이 아니라 여러 가지 가루를 섞어서 만든 맛이다. 그 국물은 몸에 스며서 몸을 위로하는 기능이 없었고, 목구멍에 불을 지르는 듯이 날카롭고 사납게 달려든다.
라면의 생산, 유통, 소비 양태는 모든 식품들 중에서 가장 공업적이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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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과수 농업이나 축산업, 양식업은 제1차 산업이라기보다는 공업의 생산방식으로 전환되었다. 조류독감이 돌면 철새들은 약하고 부상당한 것들 몇 마리만 죽지만, 양계장의 닭들은 모두가 동시에 싹 죽는다. 양계장의 닭들은 공업적 틀 안에서 사육되고 그 형질이 유전되어서 생명체로서의 독자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강하거나 약한 차이가 없이, 모두 다 일제히, 이탈자 없이 ‘싹’ 죽는다는 것이다. 나는 이 얘기를 여러 전문가들한테서 들었다. 이제, 닭들은 닭이 아니라, 닭고기를 만드는 생산공정의 한 단계일 뿐이다.
과수원의 포도나무나 사과나무는 인간이 작업하기에 알맞게, 키가 크지 않고 가지가 벌어지지 않도록 어릴 때부터 쇠줄에 결박되어 있다 그 나무들은 나무가 아니라, 사과나 포도를 뽑아내는 기계처럼 보인다.
라면은 닭이나 나무 같은 생명체를 직접 거치지 않고 공장에서 대량생산된다는 점에서, 모든 식품 중에서 가장 공업적이다. 라면 포장지에는 60여종의 첨가물이 적혀 있어서 제조 과정의 공업적 성격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사실, 이 글은 오랜 세월 동안 라면을 끓이고 또 먹어온 나의 라면 조리법을
소개하려고 했는데, 도입부가 좀 길어졌다. 이제부터가 본론이다. 라면 포장지에는 끓는 물에 면과 분말수프를 넣고 나서 4분 30초 정도 더 끓이라고 적혀 있지만 나는 센 불로 3분 이내에 끓여낸다. 가정에서 쓰는 도시가스로는 어렵고, 야외용 휘발유 버너의 불꽃을 최대한 크게 해서 끓이면 면발이 붙지 않고 탱탱한 탄력을 유지한다.
또 물은 550ml(3컵) 정도를 끓이라고 포장지에 적혀 있지만 나는 700ml(4컵) 정도를 끓인다. 물이 넉넉해야 라면이 편안하게 끓는다. 수영장이 넓어야 헤엄치기 편한 것과 같다.
라면을 끓일 때, 가장 중요한 점은 국물과 면의 조화를 이루는 일이다. 그것은 쉽지 않다. 라면 국물은 반 이상은 남기게 돼 있다. 그러나 그 국물이 면에 스며들어 맛을 결정한다.
국물의 맛은 면에 스며들어야 하고, 면의 밀가루 맛은 국물 속으로 베어 나오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고난도 기술이다. 센 불을 쓰면 대체로 실패하지 않는다. 식성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분말 수프를 3분의 2만 넣는다. 나는 라면을 조리할 때 대파를 기본으로 삼고, 분말수프를 보조로 삼는다. 대파는 검지손가락만한 것 10개 정도를 하얀 밑동만을 잘라서 세로로 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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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개 놓았다가 라면이 2분 쯤 끓었을 때 넣는다. 처음부터 대파를 넣고 끓이면 파가 곯고 풀어져서 먹을 수가 없게 된다. 파를 넣은 다음에는 긴 나무 젓가락으로 한 번 휘젓고 빨리 뚜껑을 덮어서 1분~1분 30초쯤 더 끓인다. 파는 라면 국물에 천연의 단맛과 청량감을 불어넣어주고, 그 맛을 면에 스미게 한다. 파가 우러난 국물은 달고도 쌉쌀하다. 파는 라면 맛의 공업적 질감을 순화시킨다.
그 다음에는 달걀을 넣는다. 달걀은 미리 깨서 흰자와 노른자를 섞어 놓아야 한다. 불을 끄고, 끓기가 잦아들고 난 뒤에 달걀을 넣어야 한다. 끓을 때 달걀을 넣으면 달걀이 굳어져서 국물과 섞이지 않고 겉돈다. 달걀을 넣은 다음에 젓가락으로 저으면 달걀이 반쯤 익은 상태에서 국물 속으로 스민다. 이 동작을 신속히 끝내고 뚜껑은 닫아서 30초쯤 기다렸다가 먹는다.
파가 우러난 국물에 달걀이 스며들면 파의 서늘한 청량감이 달걀의 부드러움과 섞여서, 라면은 인간 가까이 다가와 덜 쓸쓸하게 먹을 만하고 견딜 만한 음식이 된다.
나는 라면을 먹을 때 내가 가진 그릇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비싼 도자기 그릇에 담아서, 깨끗하고 날씬한 일회용 나무젓가락으로 먹는다.
라면을 끓일 때, 나는 미군에게 얻어먹던 내 유년의 레이션 맛과 초콜릿의 맛을 생각한다. 라면을 끓일 때 나는 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양계장의 닭들과 사지를 결박당한 과수원의 포도나무 사과나무 배나무들과 양식장에서 들끓는 물고기들을 생각한다. 라면을 끓일 때 나는 사람들이 목구멍을 찌르며 넘어가는 36억 개 라면의 그 분말수프의 맛을 생각한다. 파와 계란의 힘으로, 조금은 순해진 내 라면 국물의 맛을 36억 개의 라면에 전하고 싶다.
■ 광야를 달리는 말
지금은 세상을 떠난 내 아버지, 휘(諱) 광주(光洲 1910-1973)에 대하여 적는다. 나는 터럭을 겨우 쓰고 몸통을 쓰지 못한다. 아버지를 묻던 겨울은 몹시 추웠다. 맞바람이 치던 야산 언덕이었다. 언 땅이 곡괭이를 튕겨내서 모닥불을 질러 땅을 녹이고 파내려갔다. 벌써 40년이 지났다. 그때 나는 육군에서 갓 제대해 밥벌이를 찾아서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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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오래 병석에 누워 계셨고, 가난은 가히 설화적이었다.
땅을 파는 데 한나절이 걸렸다. 관이 구덩이 속으로 내려갈 때 내 어린 여
동생들은 따라 들어갈 것처럼 땅바닥을 구르며 울었다. 불에 타는 듯한, 다급하고도 악착스런 울음이었다. 나는 내 여동생들을 꾸짖어 단속했다.
“요사스럽다. 곡을 금한다.” 내 아버지한테서 배운 말투였다.
지금은 한식날 아버지 무덤에 성묘 가서도 나는 울지 않는다. 내 여동생들도 이제는 다들 늙어서 울지 않는다. 슬픔도 시간 속에서 풍화 되는 것이어서, 40년이 지난 무덤가에서는 사별과 부재의 슬픔이 슬프지 않고, 슬픔조차도 시간 속에서 바래지는 또다른 슬픔이 진실로 슬펐고, 먼 슬픔이 다가와 가까운 슬픔의 자리를 차지했던 것인데, 이 풍화의 슬픔은 본래 그러한 것이어서 울 수 있는 슬픔이 아니다.
우리 남매들이 더 이상 울지 않는 세월에도, 새로 들어온 무덤에서는 사람들이 울었다. 이제는 울지 않는 자들과 새로 울기 시작한 자들의 사이에서 봄마다 풀들은 푸르게 빛났다.
나는 내 아버지와 그의 시대를 긴 글로 써보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나의 시도는 여러 번 실패하였고 지금은 파지(破紙)만 쌓여 있지만, 새가 알을 품듯이 나는 그 생각을 품고 있다.
아버지는 63년을 살고 기세(棄世)하였다. 나는 이제 아버지보다 더 오래 살고 있다. 나는 젊은 날의 내 아버지가 때때로 내 가엾은 아들처럼 느껴진다.
아버지는 1910년에 태어났다. 고조선에서부터 이어진 나라가 그해에 망해서 없어졌다. 나는 1948년에 태어났다. 그해에 한반도 남쪽에서는 대한민국이, 북쪽에서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10년과 1948년, 이 두 해는 우리 부자의 곤고한 삶의 좌표이며 감옥이다. 내가 세 살 때 한국전쟁이 터졌고, 나는 엄마 등에 업혀 피난열차에 실려서 부산으로 갔다. 수많은 피난민의 자식들이 열차 지붕에서 얼어 죽고, 굶어죽고, 바람에 날려가서 죽고, 졸다가 떨어져 죽고, 버려져 죽고, 장티푸스로 죽고, 뇌염으로 죽고 감기에 페니실린 한 대를 못 맞아 죽었는데, 나는 안 죽고 살아서 이 글을 쓴다.
나의 아버지는 열아홉 살에 길림을 거쳐서 상해로 갔고, 중일전쟁 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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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보내고 1945년 11월 귀국하는 임시정부 제1진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상해 임정에서 그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가 임정의 조직 안에 개설된 학교에서 망명 한인들의 자제들에게 한국어, 국사를 가르치고 연극을 지도했다는 사실은 그 당시 망명자들의 기록에 여기저기 나온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는 방종한 삶의 태도 때문에 김구(金九 1876-1949)에게 불려가 가끔 야단도 맞았던 모양이다. 김구에게 야단맞은 일은 내 아버지 평생 자랑거리였다.
아버지는 상해 시절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남겼다.
조국이란 것이 우리에게는 그리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으스러지게 부둥켜안아보고 싶고, 그 품에 안기고 싶은 조국이지만 우리에게 몸부림만 치게 하고 일경(日警)의 칼자루 밑에 찍소리도 못하는 조국.
아, 젊은 내 아버지는 망해버린 조국에 대한 그리움에 흐느끼면서도 조국이라는 사슬에 얽매여 칭칭 감기는 운명을 저주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남긴 이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가엾은 내 아들과 같은 젊은 아버지를 안아주고 싶었다.
내 아버지는 공회전과 원점회귀를 거듭하는 한국 현대사의 황무지에 맨몸을 갈았다. 그는 비명을 지르고 좌충우돌하면서 그 황무지를 지나갔다. 건너가지 못하고 그 돌밭에 몸을 갈면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생업은 신문기자이거나 소설가였는데 밥을 온전히 먹을 수 있는 노동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당대 현실 속에서 자신의 좌표를 설정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하해와 같은 억겁의 술을 마셨다.
내가 중학교를 다닐 무렵에, 아버지는 두어 달에 한 번씩 집에 들어 왔다가 다음날 또 어디론가 나갔다.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가 어디로 다니시는지 묻지 않았고, 엄마는 아예 아버지를 상대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버지를 미워했지만 나는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새벽에 아버지가 돌아오면 나는 아버지가 누운 건넛방 아궁이에 장작을 때서 방을 덥혀드렸고 아버지 방에 들어가 요 밑에 손을 넣어서 바닥이 따스해졌는지 확인했다. 아침에는 냄비를 들고 돈암동 시장에 가서 선지 해장국을 사와서 아버지께 드렸다. 아버지는 내가 사온 해장국에 목이 메는지 잘 드시지 못했고, 엄마는 내가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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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짓을 보면서 “사내놈들은 다 한통속이다. 저놈도 자라면 제 아비처럼 될 놈이다”라면서 울었다. 엄마하고 아버지하고 싸우면 나는 아버지를 그냥 내버려두라고 엄마한테 대들었는데, 엄마는 더 크게 울었다. 가난은 그 끝과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가난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것처럼 누구를 나무랄 수도 없었고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다.
우리가 셋방에서 셋방으로 이사를 할 때도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우리들이 이사 간 집을 알지 못했다. 며칠 뒤 아버지는 복덕방에 가서 새로 이사 온 집을 물어서 찾아오곤 했다.
중학교 때 나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는 소설에 빠져 있었다. 허클베리네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에다 돈은 안 벌어오고 집에도 안 들어오는 사내였다. 다시는 술을 안 먹겠다고 아들한테 맹세해놓고서 그다음 날 대낮부터 또 마시는 사내였다. 어렸을 때 나는 내 아버지가 허클베리 아버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중학교 1학년 때던가. 천지분간 못하는 나는 어느 날 모처럼 집에 온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꼭 허클베리네 아버지 같아요.”
그때 아버지는 술에 취해 있었는데, 내 말이 무엇을 겨누고 있는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아버지가 허공을 올려다보더니 한참 뒤에 말했다.
“광야를 달리는 말이 마구간을 돌아볼 수 있겠느냐?”
아버지에게 말을 달릴 선구자의 광야가 이미 없다는 것을 나는 좀 더 자라서 알았다. 아버지는 광야를 달린 것이 아니고, 달릴 곳 없는 시대의 황무지에서 좌충우돌하면서 몸을 갈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경향신문에 연재소설 <정협지>를 쓰던 기간은 그즈음(1961.6~1963.11)이었다. 1961년에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 소득은 82달러였다. 그때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으로 분류되었다. 1963년까지 1인당 국민 소득은 100달러를 넘지 못했다. <정협지>는 100달라 이하인 시대의 허구적 로망으로 굶주림 속에서 찬란했다. 로망은 아편과 같았고 신기루와 같았다.
<정협지>에 대한 60년대 초반 대중이 열광에는 그 시대의 꿈과 좌절, 고난과 희망이 뒤섞여 있었다. 정(情)은 사랑과 인정이고, 협(俠)은 의로움이다. 정은 상대를 긍정하고 보듬는 삶의 태도이고, 협은 세계의 악과 대결하고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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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의 재난에 개입하는 삶의 원리이다. 정과 협은 악세(惡世)에 신음하는 대중이 갈망하던 세상이 모습일 터인데, 그 서럽고 간절한 꿈은 무협소설의 허구적 로망에 의탁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당신의 쓰신 무협소설이 좀 팔려서 돈이 생기던 시절, 장안의 술값을 혼자서 다 내고 다녔다.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찾으러 거리에 나갔다가 술집에서 아버지를 만난 적도 있었다.
아버지는 홀 전체의 술값을 다 내고 종업원을 불러 2층 술값까지 다 냈다. 1층이고 2층이고 간에 그 술집에 모인 술꾼들은 모두 다 아버지의 친구거나 후배였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언제 좀 저래보나’하면서 부러운 적도 있었다. 그것이 가엾은 아버지의 ‘광야’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던 날은 몹시 추웠다. 초상 때 아버지 친구들이 많이 왔는데 다들 가난한 글쟁이들이라 부의금 봉투는 별로 없고 술만 들입다 퍼마시고 돌아갔다. 술 취해서 정치노선 싸움을 벌이며 술상을 뒤집어엎는 사람도 있었다. 발인날은 더욱 추웠다. 아버지의 관이 내려갈 때 나는 내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지는 않기로 작심했다. 내 아버지가 조국이라는 운명을 저주했듯이 나는 내 아버지의 시대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다짐했다.
■ 바다
<동해>
나는 2012년 초가을부터 2013년 봄까지, 8개월 동안 경북 울진군 죽변면 후정리 바닷가에 머물렀다.
나의 자리는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의 동해연구소였다. 연구소는 나에게 집필실 한 칸과 원룸식 숙소, 그리고 구내식당의 밥을 제공해주었다.
동해의 수평선은 끝없는 일(一)자로 전개되어 있었다. 거기에 아침마다 해가 떠올라서 사람의 마을에 새롭고 낯선 시간들이 퍼져나갔다. 이것이 대체 어찌된 일인가. 어째서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가. 나는 아침마다 몸과 마음이 들떠서 기댈 곳이 없었는데 그 놀란 마음속으로 아침햇살은 사정없이 밀려들어왔다. 그것은 경험되지 않은 순수한 시간이었다. 바다는 수억만 년의 시간을 뒤채이면서, 이제 막 창조된 시원(始原)의 순간처럼 싱싱했고, 날마다 새로운 빛과 파도와 시간과 노을이 가득차서 넘쳐흘렀다. 바다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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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통과해 나가지만 시간의 흔적이 묻어 있지 않았다. 바다는 늘 처음 보는 바다였다.
동해연구소의 젊은 연구원들은 먼바다, 깊은 물속에까지 탐사 장비를 꽂고 전파와 음파를 보내서 바다의 숨소리를 엿듣고 있었다. 깊은 바다의 흔들림, 물살의 흐름, 물의 소리, 캄캄한 바다 밑바닥에 붙어서 사는 생명체들의 비밀을 그들은 탐지하고 있었고, 파도의 모양과 주기를 지속적으로 관찰해서 예측 가능한 법칙성에 접근해 가고 있었다. 나는 그 젊은이들의 연구를 놀라운 마음으로 엿보았다. 지식은 순결하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울진의 아침바다에서 나는 살아온 날들의 기억으로 가득 찬 내 마음의 쓰레기들이 부끄러웠다. 파도와 빛이 스스로 부서져서 끝없이 새롭듯이 내 마음에서 삶의 기억과 흔적들을 지워버리고 새롭게 다가오는 언어들과 더불어 한 줄의 문장을 쓸 수 있을 것인지를, 나는 울진의 아침바다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울진의 바다에 비추어보니, 내 마음의 병명은 종신 변비였다. 바다가 나의 병명을 가르쳐주었다. 나에게 가장 시급한 처방은 마음에 쌓인 평생의 똥을 빼내고 새로워지는 것이리라.
아침마다 죽변항은 고기 잡고, 고기 팔고, 고기 사는 사람들의 살림의 활기로 북적거렸다. 어선들은 위판장 시멘트 바닥에 막 잡아온 생선들을 부렸고, 생선들이 펄떡거릴 때 비늘에서 아침햇살이 튕겼다. 갈매기들이 떨어진 게 다리나 생선 내장부스러기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먹고살기 바쁘기는 사람이나 갈매기나 별 차이 없었다. 노련한 선원들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작업의 손발을 맞추었고, 동료의 작업이 편안하도록 자신의 동작을 받쳐주었다.
죽변항 어선들의 태극기는 남루했다. 어선들의 태극기는 바닷바람에 닳고 햇빛에 바래어서 반 토막이나 3분의 1토막만 남아 바람에 펄럭였다. 어선들의 태극기는 해풍 속에서 풍화되어 갔다. 태극이 모두 없어졌고 괘만 남은 깃발도 있었다.
바람에 시달리면서 태극기는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 어선들의 반 토막 태극기는 살아가는 일의 수고로움과 수고의 경건함을 보여주었다. 남루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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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이 드러나는 방식이며 외양이었다. 반 토막 태극기는 맹렬하게 펄럭였다. 아름다운 태극기였다. 권세 높은 관청 지붕에 높이 솟은 태극기보다 이 닳아빠진 반쪽짜리 태극기는 얼마나 순결한가. 입을 벌려서 직업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 노동의 수고로움 속에서 애국은 저절로 해풍에 펄럭이고 있었다.
죽변항구 뒤쪽 바닷가 언덕에서 신석기 시대의 유적과 어로의 도구들이 출토되었다는 것을 나는 울진에 와서 알았다.
죽변항의 낡은 어선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수천 년 전 이 항구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신석기 사내들과 그들의 고기잡이 도구들을 생각했다. 그들의 돌도끼와 돌칼도 내 마음에 떠올랐다. 박물관에서 본 신석기의 돌도끼는 그 손잡이 부분이 인간의 손바닥에 닳아서 반질반질했다. 그 돌도끼를 쥐고 사냥을 해서 처자식을 벌어먹이던 사내들의 고난과 희망, 사냥에 실패해서 빈손으로 돌아오는 저녁의 슬픔, 비 오는 날 그 신석기 사내들의 몸의 비린내도 내 마음에 떠올랐다. 그 사내들은 바로 내 눈 앞에 있었다.
죽변항에는 볼 것도 많고 먹을 것도 많아서 내 아침산책의 발걸음은 늦어졌다. 식당들은 마당에 줄을 매고 생선을 말리고 있었다. 큰 방석만한 가오리가 햇볕에 말라가고 있었다. 내장을 빼낸 가오리는 대가리에서 척추, 꼬리에 이르는 뼈대의 구조를 드러냈다. 줄에 매달린 가오리는 그 몸통 안에 하늘을 나는 새의 꿈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가오리는 커다란 새의 날개를 펼치고 건조대에 매달려 있었다. 물고기의 지느러미와 새의 날개는 계통발생상의 친연관계에 있고, 물고기가 진화해서 새가 된 것이라고 어렸을 때 생물 시간에 배웠는데, 아직도 하늘을 날지 못하는 가오리는 비상의 꿈을 온 몸으로 펼치면서 햇볕에 말라가고 있었다. 가오리는 뼈를 드러내며 말라가고 그 산맥 같은 뼈 속에 날개의 꿈은 퍼덕거린다.
말라가는 가자미는 내장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인다. 가자미가 바짝 마르면 내장은 푸른색이 짙어진다. 가자미의 내장은 작다. 다 긁어모아도 밤톨 한 개 정도만하다. 그 작은 내장 속에서 모든 생명의 기능이 작동되고 있다.
물곰국은 아침에 먹어야 제맛을 알 수 있다. 아침에 뱃속이 비고 허전해서 축축한 위안이 필요할 때, 딱딱한 음식을 넘기거나 소화시킬 만큼 뱃속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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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 일상으로 옮겨오지 못했을 때, 사람의 마음이 밤에서 낮으로 아직 이행하지 못한 그 어슴푸레한 아침나절에 물곰국은 가문 땅에 단비 내리듯이 썰렁한 창자 속으로 스며든다.
물곰국으로 아침을 먹고 나서, 나는 식당 수족관에 갇힌, 살아 있는 물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물곰은 동작이 느렸고 얼굴 표정은 매우 비논리적이었다. 물곰은 느린 동작으로, 물결이나 바람처럼 흐느적거렸으며 재빨리 방향을 바꾸지 못했다. U턴해서 뒤로 돌아설 때는 회전 반경이 컸다. 오징어나 돔 종류는 수족관에 잡아넣으면 유리벽을 들이받으며 못 견뎌하지만, 물곰은 그 부자유한 공간을 겨우 견디어내고 있었다.
초겨울부터 대게가 잡히기 시작하면 죽변항은 그야말로 살판난다. 아침마다 어선들은 위판장에 수천 마리의 대게를 쏟아놓는다. 대게들은 크기별로 분류되어, 대체로 10열 종대로 100마리씩 묶음이 되어 경매에 부쳐진다. 어부들은 대게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뒤집어놓는다. 뒤집힌 대게는 꼼짝 못하고 다리 10개로 허공을 긁으면서 발버둥친다. 일단 뒤집히고 나면 발버둥쳐봐야 아무 소용이 없지만 , 발버둥질을 그치지 않는다.
대게는 껍데기 안에 살을 지니고 있다. 살은 달고 향기롭다. 대게는 바다 밑바닥에 몸을 붙이고 사는데, 대게의 살에서는 바다 냄새가 나지 않고 꽃의 향기가 난다. 대게의 향기는 전복, 해삼, 멍게, 골뱅이, 오징어의 냄새와는 전혀 다르다. 대게의 살은 다른 동물의 근육처럼 이동하는데 쓰이는 것 같지는 않다. 그 살은 수축이나 이완의 기능이 전혀 없다. 대게는 관절의 힘으로 이동한다.
대게의 살 중에서 집게 다리 속에 저장된 살이 가장 향기롭다. 대게의 다리들 중에서 집게 다리가 가장 고달프고 위태롭다. 집게 다리는 적과 싸우는 무기이고, 이동할 때 방향을 잡는 안테나이며 먹이를 집어 먹는 팔이다. 대게는 집게다리로 먹이를 움켜서 입으로 밀어 넣는다. 사람이 숟가락질로 밥을 떠먹는 동작과 흡사하다.
울진은 맑은 땅이다. 저절로 이루어진 것들의 숨결이 울진에는 보존되어 있다. 아. 봉평신라비(鳳坪新羅碑 국보 242호)의 글씨체는 얼마나 맑고 순결한가. 서예가 하나의 양식으로 고정되기 이전의 맑음과 천진함이 그 글씨체 속에 살아있다. 글씨들은 수줍게 웃고 장난친다. 울진에서는 바다쪽으로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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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열리고 콧구멍도 열려서 들이마실 공기와 빛이 얼마든지 생겨난다.
죽변등대는 내 아침산책의 끝이었다. 등대는 희고 군더더기가 없고 깔끔했다. 죽변 등대는 20초에 한 번씩 섬광을 발한다. 죽변 등대의 섬광은 37Km까지 뻗어나간다. ‘20초 1섬광’은 죽변등대의 개별성이다. 배들은 그 섬광을 보고 죽변의 위치를 알고 자신의 위치를 인식한다.
<서해>
울진에서 일산으로 돌아왔다가 나는 또 도시를 견디지 못하고 서해안으로 옮겨 갔다.
나는 몇 달 전부터 경기만의 작은 섬에 머물고 있다. 경기만의 바다는 밀물 때 가득하고 썰물 때 아득하다. 섬은 육지와 도로로 연결되어서 자동차로 드나들 수 있지만 시야 너머까지 갯벌이 펼쳐져서 뚝방길로 들어오는 자동차의 모습은 외해(外海)로 나가는 선박과 같다.
밀물은 마을 안 방조제 턱밑까지 바싹 달려들고 썰물의 갯벌은 수평선에 포개진다. 빛은 물 위에 내려앉지만 물을 디디지는 않는다. 밀물 때 먼 나라의 빛들은 물에 실려서 섬으로 들어오고, 물이 빠지면 붉은 석양의 조각들이 갯벌위에 떨어져서 퍼덕거린다. 이 섬에서는 빛이 공간속을 드나드는 모습과 바닷물이 시간 속을 드나드는 모습이 닮아 있다. 이 흐름 속에서 시간과 공간, 어둠과 밝음, 채움과 비움처럼 인간이 세계의 골격으로 설정해 놓은 개념들은 스스로 소멸한다.
이 마을의 고기잡이배들은 모두 5톤 미만이다. 2톤짜리 1.5톤짜리도 있다. 2톤짜리 배는 영업용 택시 두 대를 합쳐 놓은 크기다. 항법장치나 통신장비가 없어서 배들은 관제소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 육지에서 발신되는 신호들이 배에 닿지 못하고, 배들은 어부들의 목측으로 이동한다.
저녁 밀물에 배들은 포구로 돌아온다. 고기잡이배들이 포구 선착장에 이마를 대고 있는 모습을 멀리서 보면 수초에 붙은 물고기 같다. 영세성은 소형 어선들의 운명의 표정인데, 이 영세성은 강인함으로 단련되어 있다.
썰물 때, 어선들은 갯벌에 얹혀서 그 신산한 몸통을 햇볕에 말린다. 어선은 그 뼈대를 모두 햇볕에 드러내놓고 빛 속으로 풍화되어 간다. 빛이 어선에 닿으면, 어선 몸통의 물기가 바르면서 바람에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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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선들은 남루하고 지저분하지만, 그 무질서한 갑판 위에 필요 없는 물건은 한 점도 실려 있지 않다. 모든 어로장비와 잡동사니들은 작업의 순서와 인간 육체의 공학적 기능에 맞춰서 다들 제자리에 정확히 배치되어 있다. 어선의 헝클어진 모습은 가지런한 무질서이며 시원적(始原的) 삶의 경건성이다.
보름사리에 썰물은 수평선 너머로 몰려간다. 그때 오래전에 이 바다에서 침몰한 목선들의 형해가 미라처럼 갯벌위에 드러난다. 뻘에 묻혀서 삭아버린 그 어선들은 이제는 아무런 중량감이나 실물감이 없고 다만 어선의 혼백처럼 흔적뿐인데, 그 가벼움에는 더 이상 감당해야 할 무게가 남아 있지 않다.
내가 사는 섬의 앞쪽에는 더 작은 섬들이 있다. 빛이 비스듬히 드나들고 풍경이 넓게 전개되어서 아침에는 서쪽 섬이 멀어 보이고 저녁에는 동쪽 섬이 멀어 보인다. 저녁에 그 작은 섬들에 등불이 반짝여서 거기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등불은 짐승이 숨을 쉬듯이, 바람 속에서 깜박거린다.
젊은이들이 다들 도시로 떠나고 섬에는 노인들만 남아 있다. 아기가 없는 섬에 유모차가 많다. 대처의 젊은 부부들은 아이가 걷기 시작하면 유모차를 버린다. 노인들은 젊은 부부들이 쓰다 버린 유모차를 섬으로 가져와서 걸음걸이 할 때의 의지로 삼는다.
손자가 자라서 유모차를 졸업하자 손자의 유모차를 밀고 다니는 노인들도 있었다. 허리가 굽은 노인은 남성보다 여성쪽이 훨씬 더 많다. 여자들은 생리, 출산, 하혈, 수유, 눈물로 피와 육즙을 모두 빨려서 그렇게 꼬부라진 것이라고 , 젊어서 마누라 속 많이 썩인 늙은 어부가 말해주었다. 어부의 말은 의학적으로 타당하게 들렸다.
섬의 유모차들은 모두 물건을 실을 수 있도록 바구니를 붙였고, 헐거워진 이음새를 고무줄로 고정시켰다. 유모차는 아이와 노인 사이를 건너가면서, 용도 변경에 따른 외양을 갖추고 있었다.
바다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나는 마을로 돌아왔다. 유모차를 밀고 나갔던 노인들도 모두들 마을로 돌아와 있었다. 창문마다 노란불이 켜졌고, 방안에서 저녁 밥상에 둘러 앉은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폐타이어나 플라스틱 함지박에 심은 조롱박이 비닐끈을 타고 올라와서 그 창문에 넝쿨손을 내밀고 있었다. 말리던 생선과 빨래를 모두 거두어들여서 건조대와 빨랫줄은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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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비어 있었다. 바다에 나갔던 새들이 숲으로 돌아갔고,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책상위에는 원고지의 무수한 빈칸이 펼쳐져 있었다.
■ 밥
아, 밥벌이의 지겨움! 우리는 다들 끌어안고 울고 싶다. 배터리가 다 떨어지면 핸드폰은 꼬르륵 소리를 내면서 죽는다. 핸드폰이 죽는 소리는 가볍고 하찮다. 핸드폰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핸드폰이 죽을 때 내는 이 꼬르륵 소리는 대선사들의 오도송(悟道頌)보다도 더 절박하게 삶의 하찮음을 일깨운다. 핸드폰이 꼬르륵 죽어버리면, 나는 문득 이제 그만 살고 싶어진다. 내가 이 세상과 단절되는 소리가 이처럼 사소하다니. 꼬르륵…….
모든 ‘먹는 동작에는 비애가 있다. 모든 포유류는 어금니로 음식을 으깨서 먹게 되어 있다. 지하철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서 짜장면을 먹는 걸인의 동작과 고급 레스토랑에서 냅킨을 두르고 거위간을 먹는 귀부인의 동작은 같다. 그래서 밥의 질감은 운명과도 같은 정서를 형성한다.
전기 밥솥에서 밥이 익어가는 그 평화롭고 비린 향기에 나는 한평생 목이 메었다. 이 비애가 가족들을 한울타리 안으로 불러모으고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아 밥을 벌게 한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 두 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나는 밥이라는 것이다.
밥벌이도 힘들지만, 벌어 놓은 밥을 넘기기도 그에 못지않게 힘들다. 술을 덜 깬 아침에, 골은 깨어지고 속은 뒤집히는데, 다시 거리로 나아가기 위해 김 나는 밥을 마주하고 있으면 밥의 슬픔은 절정을 이룬다. 이것을 넘겨야 다시 이것을 벌 수가 있는데, 속이 쓰려서 이것을 넘길 수가 없다. 이것을 벌기 위하여 이것을 넘길 수가 없도록 몸을 부려야 한다면 대체 나는 왜 이것을 이토록 필사적으로 벌어야 하는가. 그러니 이것을 어찌하면 좋은가. 대책은 없는 것이다.
모든 밥에는 낚싯바늘이 들어 있다. 밥을 삼킬 때 우리는 낚싯바늘을 함께 삼킨다. 그래서 아가미가 꿰어져서 밥쪽으로 끌려간다. 저쪽 물가에 낚싯대를 들고 앉아서 나를 건져올리는 자는 대체 누구인가. 그 자가 바로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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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 빼도 박도 못하고 오도 가도 못한다. 밥 쪽으로 끌려가야만 또다시 밥을 벌 수가 있다.
봄에 새 잎 돋는 나무는 엽록소가 박혀 있어서 씨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으면서 햇빛과 물을 합쳐서 밥을 빚어낸다. 자신의 생명 속에서 스스로 밥을 빚어내는 나무는 얼마나 복 받은 존재인가. 사람의 밥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굴러다닌다. 그래서 내 밥과 너의 밥이 뒤엉켜 있다. 핸드폰이 필요한 것이다. 엽록소가 없기 때문에 핸드폰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다들 핸드폰을 한 개씩 차고 거리로 나아간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 남태평양
나에게 여행은 세계의 내용과 표정을 관찰하는 노동이다. 계절에 실려서 순환하는 풍경들, 노동과 휴식을 반복하면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들, 지나가는 것들의 지나가는 꼴들, 그 느낌과 냄새와 질감을 내 마음 속에 저장하는 것이 내 여행의 목적이다.
다윈(1809-1882)의 행복은 그가 과학자의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1831년 겨울에 젊은 다윈은 비글호를 타고 영국 포츠머스 항을 떠나서 남미 해안, 마젤란 해협, 갈라파고스, 타히티, 뉴질랜드, 호주, 아프리카 남단을 돌면서 자연과 생명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기록했다. 그 여행기가 <비글호의 항해>다. 다윈은 여행에 대한 낭만적 환상이 없었다. 그의 여행은 자유나 일탈이 아니었다. 그는 포괄적인 관찰과 정밀한 과학의 언어로 멸종과 현존 사이의 수억 년을 건너간다.
비글호의 항해는 5년이 걸렸다. 비글호는 전장 27미터, 무게 240톤, 쌍돗대 범선에 대포가 10문 장착되어 있었다. 비글호는 영국 해군의 측량선으로 그 임무는 전 세계를 돌면서 경도를 측정해서 땅과 바다의 올바른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고, 다윈은 박물학자로 그 항해에 동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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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글호의 선장은 로버트 피츠로이(1805-1865)였다. 1831년 겨울에 모항인 포츠머스를 떠나서 장도에 오를 때 다윈은 스물두 살이었고 선장은 스물여섯 살이었다. 피츠로이 선장은 영국 해군사관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장교였다. 피츠로이는 거친 수병들을 지휘해서 통신방비와 항법장치가 없는 범선으로 지구의 모든 바다를 돌면서 임무를 수행했고, 5년 후에 모항으로 돌아왔다. 그들의 젊음은 늘 나를 경악케 한다. 피츠로이 선장은 지구의 모든 바람들의 발생과 전개와 소멸과정, 그 힘의 크기와 질감을 몸으로 확인했던 모양이다. 그는 은퇴 후에 기상학을 연구했고 기압계를 발명해서 인류가 폭풍을 예보하는 길을 열었다. 피츠로이는 물과 바람의 아들이었고 일기예보의 선구자였다. 나는 늘 내 여행이 포츠머스 항구를 떠나던 날의, 저 젊은이들의 항해와 같기를 바랐으나 나에게는 비글호가 없다.
나는 2012년 2월 중순에 7일간 미크로네시아연방의 섬들을 여행했다. 미크로네시아 연방은 괌과 뉴기니 사이의 방대한 해역에 흩어진 6백여 개의 섬과 주민들을 아우르는 연방국가다.
1519년 마젤란은 선원 270명을 태우고 돛폭 끝에 붙은 가죽을 뜯어 먹으며 태평양을 건너갔다.
1521년 3월에 마젤란 함대는 처음으로 미 미크로네시아 해역에 진입했고, 그로부터 3백여 년 뒤에 피츠로이 선장의 비글호는 이 해역의 남쪽을 멀리 돌아갔다. 나는 비행기를 타고 미크로네시아를 다녀왔다.
돌아와서 책상 앞에 앉았다. 연필을 들면 열대의 숲과 바다가 마음속에 펼쳐진다. 숲을 향하여 할 말이 쌓인 것 같아도 말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들끓는 말들은 내 마음의 변방으로 몰려가서 저문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산하의 한·남태평양 해양연구센터(KSORC)는 추크(chuuk)주의 바닷가에 있다. 한국의 젊은 과학자들이 거기서 해양생태환경을 연구하면서 바다 쪽으로 산업의 해역을 넓힐 궁리를 하고 있다. 나는 그 연구소에서 숙식했다.
추크는 225킬로미터의 원형 환초로 둘러싸여서, 대양 속의 호수와 같다. 그 안에 80여 개의 화산섬이 흩어져 있다. 환초 안은 수심이 40미터 정도지만 환초 밖은 1천 미터가 넘게 깊어진다. 섬 둘레의 물가에 잘피 숲이 우거져 있고, 그 수초의 이파리 사이에서 온갖 기묘한 무늬를 가진 작은 물고기 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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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들은 왜 저마다 저러한 무늬를 갖게 되는가”를 과학자들에게 물어보았다. “그것이 종의 특수성이다”라고 과학자들은 대답해 주었다. 그 대답은, 그 질문처럼 답답한 인간의 언어였다.
파브르(1823-1915)는 <식물기>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나에게 더 이상 묻지 말아달라”면서도 이 세상 꽃들의 색깔과 향기의 비밀을 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파브르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죽었다.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도 이 세상 꽃들이 제가끔 저러한 색깔로 태어나는 사태에 대하여 “그것이 종의 특수성”이라는 말 이상의 설명을 할 수가 있었을까. 나는 열대 바닷속의 작은 물고기들을 들여다보면서 죽은 파브르를 걱정했다. 물속으로 들어온 햇빛이 작은 물고기들의 몸통에서 반짝였다.
열대 바다에서, 색(色)은 공(空)으로 소멸하지 않는다. 색들은 생멸을 거듭하면서 공을 가득 채운다. 열대의 바다에서 색과 공은 서로 의지해 있다. 색은 공의 내용이고, 공은 색의 자리이다. 색과 공이 서로 끌어안고 시간 속을 흘러가고 있다. 열대의 바다에서 색과 공은 동행한다.
열대의 바다 밑은 산호의 밀림이다. 산호의 암컷은 보름달이 뜨는 밤에 일제히 산란한다. 물이 알로 뒤덮이면 수컷들이 정액을 쏟아낸다. 수정란은 보름사리의 물결에 실려서 멀리, 먼 대륙의 연안까지 퍼져나간다. 산호를 수정하는 보름밤에 태평양은 안개와 같은 정자와 난자로 물이 흐려지고 그 위에 달무리가 뜬다고, 한·남태평양 해양연구센터의 박홍식 박사는 말했다. 내가 머문 동안은 보름은 아니었다. 나는 연구소 숙사에서 잠들었다. 도마뱀이 천장에 붙어서 끽끽 울었다.
도마뱀이 울 때 옆구리가 벌럭거렸다. 도마뱀은 발가락이 네 개짜리도 있었고, 다섯 개짜리도 있었다. 어떤 도마뱀은 발가락 사이에 물갈퀴가 있는 것도 있었다. 울음소리의 옥타브도 조금씩 달랐다. 새벽의 꿈에 다윈과 파브르, 마젤란과 피츠로이 선장, 그리고 맨발의 원주민들이 물가에 나란히 앉아서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다들 늙어 보였다.
이 해역의 섬들은 모두 화산작용으로 물밑에서 솟아올랐고 산들의 봉우리는 현무암이다. 이 섬들에서 인간의 옛 자취를 증명할 만한 유물은 없지만 노인들은 먼 선조들이 배에 무기를 가득 싣고 보이지 않는 먼 섬으로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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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와 식량을 빼앗아온 일을 자랑으로 구전한다. 세월은 약탈과 살육을 로망으로 바꾸었고 사실과 전설은 이제 구분되지 않는다.
섬의 노인들은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줄 때, 놈, 놈, 놈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놈. 놈, 놈은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라는 말인데, 이 도입부는 한반도에서 태어난 내가 어린 날에 듣던 말과 같았다.
이 환초의 낙원은 2차 대전의 막바지에 지옥으로 돌변했는데 낙원과 지옥은 본래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항해시대 범선을 몰아오는 서양의 사나운 항해가들이 이 바다로 항로를 개척한 이래 스페인, 독일, 일본이 차례로 이 해역에 패권을 건설했고 종전 후에 섬들은 미국의 신탁통치를 받았다. 1986년에 미크로네시아는 섬들의 연방국가로 독립하면서 안보를 미국에 위임했다.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헌법 전문은 그 섬들의 고통과 희망을 선명히 드러내면서도 과도한 국가주의를 노출시키지 않는다.
일본이 1938년에 선포한 대동아공영권의 구획 설정에 따르면 미크로네시아의 추크 섬은 미국의 해·공군과 대치하는 태평양 최남방 전진기지였다. 거기서부터 사이판 - 마리아나 - 유황도 - 도쿄를 잇는 축선이 일본의 태평양 동쪽 방어선이었다.
진주만의 치욕이후 미국은 총동원 체제로 전쟁에 뛰어 들었다. 미해군 수뇌부는 추크 섬을 ‘일본의 진주만’이라고 불렀다. 1944년 2월 17일, 18일 이틀 동안 미해군 58기동함대는 추크 섬의 일본 해군기지를 폭격했다. 작전명은 ‘우박 작전’이었다. 항공모한 다섯 척과 경항모 네 척에서 발진한 전투기 5백 대가 환초 안의 일본군 비행장을 부수고 전함을 침몰시켰다. 일본 전함들은 환초로 둘러싸인 바다를 빠져나갈 수 없었다.
환초 안 바다는, 지킬 때는 편안하나 밀릴 때는 퇴로가 없는 사지였다. 이틀 동안의 폭격에서 일본군 경항모, 구축함, 순양함 등 39척이 침몰했고 일본군 전투기 275대가 파괴되었다. 침몰한 일본 전함의 총 무게는 22만 톤에 달했다. 이 전투에서 미군 전투기 25대가 일본군의 대공포에 추락했다.
1944년 2월의 참패 후에 일본군은 다시 이 섬에 백여 대의 전투기를 옮겨 놓았고, 미군은 4월 29~30일 이틀간의 폭격으로 일본군의 남은 군사시설과 전투기들을 부수었다. 전투가 끝난 뒤 미군은 이 섬에 상륙하지 않고 사이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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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크로네시아 정부는 바다 밑에 수장된 일본 전함들의 이름, 제원, 침몰 위치를 밝혀냈고, 물밑에 가라앉은 거대한 함대의 잔해는 스쿠버다이빙의 세계적 관광 명소가 되었다.
전쟁 후에 일본은 잠수부를 동원해서 녹슨 전함 속에 흩어져 있던 전사자들의 유해를 일부 수습했으나 아직도 물밑에는 녹슨 고철 틈에 백골이 널려 있다고 다이버들은 전하고 있다. 이 백골들의 혼백이 충용한 황군의 넋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깃들어 평안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섬의 원주민 니아고 시삼(77세, 여) 은 그 전쟁의 나날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때 시삼은 아홉 살이었다.
물밑뿐 아니라 섬의 육상에도 전쟁의 잔해는 널려있다. 섬의 고지에는 녹슨 대포와 병영의 건물이 남아 있다.
물고기가 잘피 숲에 모여 살듯이 그들은 숲속이나 병영의 잔해에 깃들여 있었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숲에서는 먹을 것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들의 가난을 무소유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여기 와 보니, 무소유는 소유가 있고 나서야 말할 수 있는 스타일리시한 개념이었다.
추크 섬의 한·남태평양 해양연구센터 인근의 바닷가에는 ‘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비석에는 한국인 3천 여 명이 강제 징용으로 끌려와 희생되었다고 적혀 있다. 이 숫자가 정확한 것인지 ‘희생’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2009년에 발간한 실태조사보고서 (발행인 김용봉)에 따르면, 1939년부터 1941년 사이에 남양군도의 여러 섬으로 송출되어온 한인은 5800여명에 이른다. 남자 혼자 온 사람도 있었지만 유소년을 포함한 가족을 동반한 노무자도 많았다 이들은 모두가 전시동원체제 아래서 조선총독부와 지방행정기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송출된 인력이었다. 초기에는 사탕수수 등 농업 노동에 종사했지만 전쟁의 막바지에는 비행장, 도로, 항만, 참호를 건설하는 노동과 군수품 운반 작업에 동원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 이들의 운명이 어찌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1997년에는 티니안 섬의 밀림에서 한인 유골 5천여구가 발견되었다.
섬의 원주민 디아고 시삼은 아직도 아리랑 선율을 흥얼거릴 수 있다.
한인들은 텃밭을 일구어 한국에서 가져온 호박, 감자, 가지의 씨를 뿌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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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숭아와 맨드라미를 심었다. 일본 군인들이 한인 노무자나 원주민을 때리고 죽이는 모습을 시삼은 수없이 보았다.
한인 주거지로 지목되는 숲 언저리에는 맨드라미가 지지러지게 피어서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추크 섬의 국제공항에 가까운 바닷가에는 일본인들이 세운 전몰자 위령비가 태평양을 바라보고 있다. 전몰이라는 단어가 모호해서 가해와 피해를 구분할 수 없었다.
같은 시기에 일본 도치기 현의 아시오 구리광산에서도 2천 명 이상의 한인이 강제징용 되어 있었다. 이 자리에 일본인들이 세운 기념물의 이름은 순난비(殉難碑)이다. 난세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뜻이다. 기념물들은 희생자들이 죽음을 헌신으로 미화했고, 가해자들은 그 뻔뻔스런 단어 뒤에 숨어 있었다. 고철과 주검과 위령비들이 널려있는 해안에도 맨드라미가 피어 있었다.
■ 갯벌
내륙을 흘러온 큰 강이 하구의 갯벌에 이르러 바다와 합쳐지는 풍경은 소멸이다. 강은 그 흐름을 시간과 공간 속으로 풀어헤쳐버리고 스스로 자진하는데, 저녁 무렵의 만경강 갯벌에서는 그 소멸을 완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멀거나 큰 풍경은 보이지 않는다. 먼 것들은 그 풍경을 바라보는 자를 눈멀게 한다. 기어이 보려는 자의 시선은 아득한 저편 연안에 닿지 못하고 시선은 방향을 잃는다. 시선의 모든 방향이 열려진 공간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기어이 보려 하는 자의 갈등은 몸속에 가득 차오른다. 본다는 것은 아마도 걸리적거림이었던 모양이다. 눈앞에 걸리적거리던 모든 것들이 소멸해서, 아무것도 걸려들지 않는 만경강 저녁 갯벌의 자유는 서늘하다
하구에 이르러 바다에 닿는 강물의 표정은 대도시의 저녁 무렵에 빌딩 너머의 하늘을 적시는 노을과, 저물어 가는 생애의 며칠들을 닮아 있다. 공간 속으로 저무는 것들이 시간 속으로 저문다. 저무는 것들은 가볍다. 저무는 것들은 그 느슨한 헐거움으로 삶의 모든 궤적들을 지워버리고, 신생의 시간과 공간을 펼쳐 놓는다.
김제는 아득하다. 아득한 농경지가 끝나는 해안선이서 다시 아득한 갯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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펼쳐지고 바다는 그 갯벌 너머에서 신기루처럼 반짝인다. 강의 음악은 하구에 이르러 보이지 않는다.
도요새의 무리들이 그 뻘에 당도한다. 이 갯벌은 새들의 고향도 아니고 타향도 아니다. 그것들은 이 갯벌에 며칠을 머물며 두리번거리다가 다시 비행 편대를 갖추어 시베리아로 떠나간다. 한 무리가 떠나고 나면 다른 무리가 도착하는 것이어서 갯벌의 갈대숲은 새들의 날갯짓 소리로 수런거린다. 새들은 덧없는 것들의 영원함을 전하는 기호처럼, 그 아득한 갯벌에 내려앉는다.
대륙간을 날아다니면서도, 그것들은 짐보따리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것들의 자랑은 무일푼의 혈혈단신에 있다. 그것들은 먹을 것과 잠자리를 예비하지 않고, 버리고 떠나고 또 찾아서 날아간다.
■ 국경
나는 2015년 6월 22일부터 27일까지 우리나라의 여러 선후배 동료들과 함께 중앙일보가 주최하는 ‘평화 오디세이아 2015’ 행사에 참가했다.
우리 일행은 단동(丹東)에서 압록강 하구를 돌아보고, 통화(通化), 집안(集安)에서 고구려 초기의 유적지를 답사했다. 자동차 편으로 백두산에 올라가서 북한 쪽 산하와 만주 벌판을 바라보았다. 만주는 넓어서 지평선이 하늘에잠겨 있었고, 백두산 천지의 검은 바위에는 화산이 폭발할 때 끓어오르던 불의 힘이 그대로 남아있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두만강 하구로 이동해서 한반도와 중국, 러시아 국경이 마주치는 훈춘, 방천 지역을 돌아보았다.
광복과 분단 70년이 흐른 뒤에도 우리는 여전히 조국의 강을 건너갈 수 없었고, 달리는 버스 안에서 목을 길게 빼서 건널 수 없는 저편을 바라보았다. 사람과 소와 개와 마을이 너무 가까워서 슬프고 답답했다.
조국의 강은 그 깊은 협곡과 넓은 들을 자유롭게 굽이치고 있었다. 이 무서운 적대관계의 뿌리가 대체 무엇이었길래 70년의 세월이 지나도 남북은 동족과 조국산천의 이름으로도 화해할 수 없는 없는 것인가. 적대관계의 70년은 너무나 길어서 이제 분단은 일상의 질서와 정서로 고착된 것이 아닌가 하는 위기감을 안고 돌아왔다.
철조망이 끝없이 강을 따라왔으나 강물은 합치고 휘돌면서 기어코 제 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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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로 흘러가고 있었다. 큰 강은 스스로 자유로웠고, 역사는 산천 앞에 부끄러웠다. 이 부끄러움 안에서 희망의 어린 싹이 돋아날 수 있기를 나는 강에게 빌었다.
■ 압록강
압록강은 하해와도 같은 서해 물의 23%(280억 톤)을 한강이 16%, 금강이 6%, 황하가 40%를 차지한다.
서해는 한반도와 중국 대륙 사이에서 오목하다. 밀물 때 서해의 힘은 북진한다. 물의 세력은 북쪽으로 갈수록 강력해져서 연안에 넘치고 발해만의 후미진 구석까지 가득찬다. 그때 바다는 부풀어서 대륙을 압박하고 고깃배들은 물의 힘에 올라타서 포구로 돌아온다. 밀물 때 강들은 하구를 열어서 바다를 받는다.
압록강의 하구는 조차(潮差) 4미터의 힘으로 바다를 받아들여서 먼 산골까지 바다의 기별이 닿는다. 강이 바다를 받아들이는 물리 현상을 과학자들은 감조(感潮)라고 한다.
2015년 여름에,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 아는 나이가 되어서 처음으로 압록강 두만강 백두산과 그 언저리를 관능이 작동되는 가시적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세월이 거꾸로 흘렀던지, 분단 70주년에 이르러 대량학살무기를 앞세운 적대관계는 극한으로 치달았고 여전히 갈 수 없는 강 건너 쪽 사람 사는 동네를 나는 겨우 망원경 구멍으로 들여다보았는데, 그 구멍 속의 상념들도 1948년에 38선 이남에서 태어나서 거기서 늙은 자의 자기분열을 넘어서지는 못할 것이다.
개인의 삶이나 나라의 역사가 영광과 자존만으로 성립될 수는 없겠고 치욕과 수난을 또한 감당해야 할 터이다 세계의 질서가 인간의 편인 것도 아니고 강자가 못할 것이 없듯이 약자도 살아남기 위해서 못할 것이 없을진대, 영은문을 향해서 뒤늦게 통곡을 할 필요는 없으리라고 나는 나 자신을 위로했다. 그러나 나의 자위에도 불구하고 단동으로 가는 길 위에서 영은문은 내 마음의 바닥에 남아 있었다.
1879년 무렵에 중국의 힘은 돌이킬 수 없이 무너져 있었다. 그때 개화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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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자들이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는데, 내가 며칠 전에 가보니까 청소년들이 놀러와서 ‘문립독’이 뭐냐고 저희들끼리 물어보고 있었다.
사나운 대륙의 군대들은 모두 선양에서 발전했다. 당나라 군대, 원나라 군대, 금나라 군대, 청나라 군대와 6·25때 ‘항미원조전쟁’에 돌입한 모택동 군대의 주력이 모두 선양에서 발진해서 단동에서 강을 건넜고 의주로를 따라서 남쪽으로 내려왔다. 외국 군대가 물러가면 사대(事大)의 긴 대열이 그 길을 따라서 선양으로 갔다.
저녁 무렵에 단동에 도착했다. 단동의 중심가는 온갖 접객업소들의 네온사인으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호텔 앞 4차선 도로 건너편이 압록강이었다. 강둑에서 젊은 남녀가 오랫동안 키스했다. 남자들이 허연 허벅지를 드러낸 여자를 오토바이 뒷자리에 태우고 저무는 강의 하구 쪽으로 질주했다. 압록강을 거슬러온 밀물이 호텔 앞 둑방에 와서 철썩 거렸다.
단동의 본래 지명은 안동(安東)이었는데, 문화대혁명의 기운이 태동하던 1965년에 모택동 정부는 이 도시의 이름을 단동(丹東)으로 바꾸었다. 동방을 붉게 물들이는 최전선의 도시, 혁명의 수출기지 라는 뜻이었다.
강 건너 신의주는 불빛이 없고 순결한 고구려의 밤이 보존되어 있었다.
23일 오후에 유람선을 타고 압록강 하구를 돌아보았다. 배는 강 건너 신의주 쪽으로 바싹 접근했고 위화도 어귀에서 U턴했다. 북한 여인들이 강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북한 여인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 쪼그려 앉은 자세는 어렸을 때 내 엄마나 이모의 폼과 똑같았다. 빨래를 마친 여인들이 대야를 머리에 이고 마을로 돌아갔다. 멀어서, 북한 여인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멀었지만, 여자라는 느낌은 전해져 왔다.
그 여인들의 마을은 칠을하지 않은 단층 건물들이 회색빛 자연 취락을 이루었고 그 건물 위에 ‘선군 조선의 태양 김정은 장군 만세’라고 선홍색 현수막이 걸려서 회색과 선홍색이 극명한 대비를 보여주었다.
지금 압록강 철교가 끊어진 자리에는 녹아내린 철강재들이 용암이 흘러내리는 모습으로 굳어져 있다. 단교는 ‘고전적 혁명유적지’로 보전되어 있고 30위안의 입장료를 받는 국제관광명소이다. 단교 입구에는 북한으로 진공하는 인민해방군 보병대열의 모습이 부조상으로 조각되어 있다. 보병들이 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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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소총 한 자루 뿐이었다. 그 뒤로는 만주로 진공하던 시절 일본 군대의 토치카가 ‘침략의 증거물’로 보조뇌어 있다. 중국측 설명문에는 “침략자 미군이 중국 정부의 경고를 무시하고 전쟁의 불씨를 압록강까지 몰고 와서 중국 국경에서 총질을 함으로써 중국 인민에게 엄중한 위협을 가했다”고 적혀 있었다.
50년 연말부터 중공군은 30여 개 사단으로 밀고 내려왔다.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 두만강 전선에서 후퇴했다. 동부전선은 장진호 전투에서 수많은 사상자, 동사자를 내면서 흥남철수에 성공했고, 서부전선은 의주로를 따라 밀려 내려와 1월 4일 서울을 다시 내주었다. 후퇴한 부대들이 압록강물을 수통에 담아와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바쳤다. 대통령은 물을 마셨다. 그때, 내 엄마는 두 살 난 나를 포대기로 업고 부산으로 피난 갔다. 아, 젊은 엄마는 어린 우리 삼남매를 끌고 어떻게 눈보라 속에서 부산까지 갔던 것일까.
지금, 끊어진 압록강 철교의 녹슨 철강재들이 여름의 폭양을 받아서 뜨거운 비린내를 풍기고 있었다. 그 단교에서는 강의 로망이나 강의 서정을 생각할 수 없었다. 너는 지금 어떠한 나라, 어떠한 시대에 살고 있느냐. 너의 두 살 때부터 지금까지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는가. 너는 왜 같은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가. 너희들은 왜 70년 전의 싸움을 아직도 싸우고 있는가를 그 끊어진 다리는 가혹하게 묻고 있었다. 강 건너 마을에서 이집 저집 연기가 올랐다. 무엇을 끓이는지 무엇을 태우는지 알 수가 없었다.
■ 집안에서
집안으로 가는 G201 도로 연변에서, 여름의 산맥은 푸르고 힘찼다. 빛나는 산맥들이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지르는 듯 했다.
집안의 민가들은 대체로 비슷한 크기에 동일한 모델로 지어졌고 담장의 높이도 다 똑같아서 사회주의 식으로 설계된 취락의 동질성을 보였고 마을에는 상업광고가 전혀 없었다. 집집마다 담장에 삼족오(三足烏), 봉황새, 연꽃, 구름 같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문양을 그려넣고 있었다. 무덤 속에서 나온 문양들이 사람 사는 마을의 담장을 꾸미고 있으니, 여기는 고구려 초기 400여 년의 강성한 도읍지이다.
고구려 왕들의 존호는 유교적 세계관의 관념에 물들지 않아서, 삶과 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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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는 언어의 건강함을 보여준다. 산상왕(山上王 10대), 동천왕(東川王 11대), 중천왕(中川王 12대), 서천왕(西川王 13대), 봉상왕(烽上王 14대) 들은 죽어서 그 왕이 ane힌 자리의 이름을 존호로 삼아서 후세에 전했다. “11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소수림(小獸林)에 장사지내고 존호를 소수림왕이라고 하였다”는 대목은 내가 읽은 삼국사기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에 속한다. 소수림은 어디인가. ‘작은 짐승들이 모여 사는 숲’이라는 뜻으로 봐서 아마도 국내성 왕궁에 딸린 동물원이 아닐까. 고구려왕들은 죽어서 강가에 묻히거나 ‘작은 짐승들이 사는 숲’에 묻혀서 한 줌의 흙을 국토에 보탰고, 그 묻힌 자리의 지명에 불멸의 지위를 부여했다. 고구려인들의 강토 사랑은 그처럼 구체적이었고 현실적이었다. 왕들은 죽어서 자신의 존호를 국토에 포개었다.
공개토대왕(廣開土大王 19대)의 존호는 왕의 무덤자리가 아니라 그 생애의 자랑과 고난을 압축하고 있는데, ‘광개토’는 한반도의 모든 임금들 중에서 가장 사실적이고, 서사적이고, 압도적이고, 다이내믹하다. 광개토대왕은 39세에 죽었다. 그의 아들 장수왕은 97세 까지 살았고 그중 78년을 왕위에 있었다.
지금 집안 일대에 고구려 유적지는 중국의 이른바 ‘동북공정’의 공략 대상이 되어 있다. 유적지 해설판에 ‘고구려는 당나라의 국내 전쟁으로 멸망하였다“고 기술해서 고구려의 최후를 당나라 변방의 반란 진압 정도로 격하시키고 있다.
장군총은 ‘동양의 피라미드’라는 별명처럼 크고 웅장했다. 장군총이 장수왕의 무덤이라는 설은 물증이나 기록으로 뒷받침되지는 않지만 , 장군총은 광개토대왕비와 가까운 들판에서 고대적인 힘의 단순성을 거대한 규모로 분출하고 있었다.
집안에는 20여 기의 고구려 벽화고분이 산제해 있다. 그 중에서 일반이 관람할 수 있는 곳은 오회분(五會墳) 5호묘 뿐이다. 오회분은 다섯기가 한 곳에 모여 있는 무덤떼를 말한다. 오호묘의 현실 벽면에서 천장에 이르는 공간에는 환상의 나라를 날아다니는 상서로운 짐승들과 악기를 연주하며 하늘로 날아가는 선계의 인간들이 그려져 있다. 거기에는 현실을 넘어서는 공간이 있었고, 그 공간을 흐르는 음악과 율동과 시간이 있었다. 벽화 속에서, 바퀴를 굴리는 남자가 현실과 초현실, 그 양쪽의 시간을 건너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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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과 선양을 다녀온 박제가(朴齊家 1750-1805)는 바퀴에 열광했다. 그의 저서 <북학의>는 첫 페이지부터 바퀴에 대한 예찬으로 시작한다. 그는 바퀴의 문화적 경제적사명의 발견자였다. 그는 바퀴의 이용이 단절된 조선의 현실을 개탄했고, 연결된 도로를 바퀴로 소통함으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진언은 배척되었다. 박제가의 시대에 까지 고구려의 바퀴는 버려져 있었다.
바퀴는 원이다. 원은 한 점에서 동일한 거리에 있는 모든 점들로 이루어진 곡선이다. 이것에 동력을 연결 시켜서 도로위에 서 굴리면 인간은 한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인간의 갈 길은 멀고 멀다. 그림 속의 고구려 바퀴는 아직도 굴러가고 있었다.
■ 두만강에서
25일 오전부터 6인승 승합차로 백두산을 올라갈 때 비가 내렸다. 자작나무 숲이 젖어서 향기가 대기에 낮게 깔렸다. 정상에 올랐을 때 구름이 갈라지고 개벽하듯이 햇살이 내려왔다. 천지는 창세기의 호소처럼 시원(始原)의 힘을 뿜어냈고 젖은 봉우리들이 번쩍거렸다. 그러고는 다시 안개가 몰려와서 천지를 뒤덮었다. 고은 시인이 손나팔을 입에 대고 “안개다! 안개다! 안개가 온다”고 소리소리 질렀다. 그는 목청을 다해서 고함쳤다.
백두산 정상이 안개에 덮이는 기상현상이 그 시인에게는 지체 없이 알려야할 파천황의 긴급 중대 사태인 것이었다.
그의 고함소리에는 주술적 신명이 담겨 있어서, 안개의 접근을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먼 지평선 쪽의 안개를 불러들이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안개다! 안개로구나!” 그 안개 속에서 사람들은 흐린 사진을 찍었다.
백두산에서 두만강 하구까지는 험준한 산악도로를 따라서 달렸다. 도로는 두만강변으로 바싹 접근했다가 다시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강 건너 쪽에서 농부가 강가에 소를 몰고 와서 물을 끼얹어주고 있었다. 소는 쟁기와 멍에가 풀어져 있었다. 일을 시키다가 너무 힘들어 하니까 더위를 식혀주는 모양이었다. 무엇을 줍는지, 아이들이 강가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있었다. 사내들이 시멘트 반죽을 흙손으로 발라서 단층집을 짓고 있었는데, 그 뒤로 비탈밭은 가팔라서 소달구지가 올라갈 수 없을 듯싶었다. 어느 마을에나 상업간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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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없어서 생업이 무엇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날이 저물도록 집들은 불을 켜지 않았다.
북·중 사이의 국경은 한반도의 DMZ처럼 삼엄하지는 않지만 월경 이탈자를 막기 위해 철조망이 쳐져 있고 북한군 병사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나는 ‘통일’보다도 우선 강 건너편에서 보초 서고 있는 북한군 병사의 생애 속에서 인간다운 가치와 소망들이 온전히 구현되기를 바랐다. 생명을 서로 긍정하는,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의 평화는 불가능할 것인지를 나는 강가에서 생각했다.
이 하구에서 한반도와 러시아 중국의 국경이 마주친다. 사람들이 그어 놓은 금 위로 풀들이 우거지고 강물이 흘렀다. 여기가 조선 후기 이래로 두만강 너머로 쫓겨가고 숨어들고 빌어먹으러 가던 한민족의 디아스포라(흩어진 사람들. 유대인을 지칭)의 들판이다. 강물에는 인간의 고난과 설움의 자취가 남아 있지 않고 강은 저 혼자 자유롭고 아름다워서 시인 이용악(1914~1971)은 두만강을 ‘천치(天癡)’의 강이라고 불렀다. 이 강가에서 지금 중국 공안들이 월경한 북한 사람들을 잡으려고 풀섶을 뒤지고 있다. 두만강 하구에서 디아스포라는 진행중이다. 두만강 초소에서 보았던 북한군 병사의 이름을 모르는 채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 공
공놀이의 역사는 오래 되었다. 서양에서는 호머의 글에 편을 갈라서 공을 차는 얘기가 나오니까, 그 이전부터 사람들은 공을 차고 놀았다고 봐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부터 격구라는 공놀이가 있었다. 들판 양쪽에 골문을 세워놓고 말을 탄 선수들이 달리는 말 위에서 긴 장대로 공을 몰아서 상대방의 골문에 넣는 경기였다. 조선 정조 때 간행된 군사훈련 교범인 <무예도보통지>란 책에 이 격구에 관한 기사가 나오는 걸로 봐서 격구는 삼국시대 이래로 민간경기뿐 아니라 군사훈련 목적으로 전승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서양에도 중세 때부터 폴로라는 마상무예가 있었다는데, 격구와 비슷한 것이 아닌가 싶다.
마술에 필드하키를 합친 것 같은 이 경기는 그야말로 장관이었을 것이다.
격구는 전쟁의 냄새가 난다. 격구는 전투행위를 경기로 변형시킨 스포츠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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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말할 수 있다. 축구의 기원이 고대식 전투에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아도 집단적인 공격과 방어, 그리고 팀 전체를 리드해 나가는 조직적인 전술 전략이 작동된다는 점에서 축구는 전쟁을 닮아 있다.
운동경기의 승부욕은 전쟁의 적개심과는 다른 것이겠지만 축구 같은 전 인류적 운동경기에는 그 국가의 정치적 위상과 영욕이 걸려 있다.
축구는 전쟁의 모습을 닮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진영 사이의 적대 행위가 아니다. 그것이 전투가 아니라 경기가 될 수 있는 까닭은 두 진영 사이에 공이 있기 때문이다.
야구공은 축구공과는 좀 다르다. 야구의 공은 늘 수비 쪽의 몫이지만, 타자가 공을 쳐내는 순간, 수세와 공세의 구분이 허물어져버리는 새로운 시간 속에서 그라운드의 판도는 신속히 바뀐다. 이 순간 관중석의 열광은 방망이 한번 휘두르기로 지나간 시간의 궤적을 단절시키고 새로운 시간의 국면을 열어젖히는 혼돈에 대한 열광이다.
배구공은 수공(守攻) 전환의 공이다. 공은 아군을 부수기 위해서만 네트를 넘어온다. 공은 아군의 땅바닥에 사나운 기세로 내리꽂힌다. 이 공세를 받아내는 순간 아군의 수세는 즉각 공세로 바뀐다. 공은 그 무수한 전환을 수용한다.
공은 완벽한 객관물이다. 공은 구형이 아니면 안 된다. 모서리가 없어야 한다. 정육면체의 공은 상상할 수 없다. 둥근 것만이 운동과 각도의 다양성을 한없이 품을 수 있다. 공 속에는 인간의 모순된 열망들이 수용되어 있다. 공은 전쟁과 놀이, 다툼과 공존의 구형이다.
공은 전쟁에서 놀이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찾아낸 놀라운 장난감이다. 공은 아직도 고대와 현대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그래서 그라운드 안의 공차기는 재미있지만 공을 차듯이 전쟁을 하는 현실은 아무런 재미가 없는 것이다. 전쟁은 겨우 이루어진 공의 진화 정도를 훼손하고 있다.
■ 줄
무인등대 사이를 돌아서, 어선들은 포구로 돌아온다. 일출이 가까운 새벽바다의 어둠은 붉다. 그 붉은 어둠의 먼 곳으로부터 어선들은 모습을 드러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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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피곤한 노동의 땟국으로 칠갑이 된 어선들은 찢어진 어기(漁旗)를 펄럭거리며 포구로 돌아오는데, 피곤은 곧 삶인 것이어서, 그래서 그 피곤을 별도로 언급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봉두난발의 사내들은 말없이 뱃전에 걸터앉아 있고, 방파제 위에서 그 사내들의 여자들은 빈약한 어획으로 돌아오는 사내들의 배를 기다리고 있는데, 찢어진 깃발 펄럭이며 돌아오는 새벽 어선의 남루는 아침 바다의 첫 햇살이 비치어 찬란하다.
얼마 전에, 산둥반도 쪽으로 나아가는 병어잡이 원양어선을 얻어 타고 바다로 나간 적이 있었다. 고기 잡는 선원들과 함께 먹고 자면서 그들의 노동을 가까이서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밤에 그물을 놓고, 고기가 들어올 때까지 네댓 시간을 기다렸다가 새벽에 그물을 걷어들였다. 걷어들인 그물을 다시 풀어 놓고 또다시 네댓 시간을 기다린다.
선원들의 휴식 시간은, 고기가 그물에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그 사이사이였다. 그물에 고기가 들지 않으면 선장은 배의 위치를 옮긴다. 한 해역을 포기하고 다른 해역으로 옮길 때는 그물을 들어 올려야 한다. 그물을 놓는 시간은 물때에 따라서 매일 달라진다. 그래서 어부들의 노동과 휴식은 시간에 따라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같이 바뀐다.
나는 배에서 아무 하는 일 없이 공밥을 얻어먹고 빈둥거리고 있었다. 선원들의 노동을 어떻게든지 좀 도와보려고 그들이 밧줄을 당길 때 대열의 꽁무니에서 힘을 보태는 시늉을 해보기도 했지만, 선원들은 나를 쫓아버렸다. 힘이 보태지지도 않거니와, 걸리적거려서 오히려 방해가 되고, 안전사고라도 날까봐서 끼워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파리를 쫓듯 나를 쫓아버렸다. 그러나 나는 염치없게도 그들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아서 그들의 노동을 관찰했다.
그들의 노동은 거의 대부분이 밧줄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닻과 그물과 부표를 내리고 당기는 일이나 부표에 매달려 바다에 뜬 다른 밧줄을 당기는 일들이 모두 당기기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물을 올릴 때 앞에서 끌어당긴 밧줄은 배 뒤쪽으로 전달되어서 배의 고물 쪽에서 동그랗게 사려진다. 사려진 그물은 다음번 투망 때 다시 풀려나간다. 바다위에는 밧줄이 길게길게 퍼져나간다. 그리고 그 밧줄은 갑판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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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새우는 인간의 근육에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근육의 힘이 저 캄캄한 바다 밑까지 뻗어가고 있고, 그 밧줄에 힘센 이두박근의 사내들은 매달려 있다.
인간과 인간이 연결됨으로써 인간은 개별적 존재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을 수행해 낼 수 있다.
암벽등반가들의 밧줄은 수직으로 뻗어나가지만, 선원들의 밧줄은 넓은 바다를 수평으로 뻗어나간다. 밧줄이 물밑에서 인간의 몸을 대신해 준다. 배에 탄 인간은 다만 밧줄을 풀고 당김으로써 고기를 건져 올릴 수 있다.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소방관들의 몸도 소방 호스에 따라 연결되어 있다. 다섯 명이나 여섯 명이 한 조가 되어서 호스를 끌고 불 속으로 들어간다. 연결이 인간에게 없던 힘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뒤를 받쳐주지 않으면, 소방관은 불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항구로 돌아올 때 배는 바다로 나아갈 때처럼 가지런히 사려진 밧줄 뭉치를 싣고 있었다. 노동은 없었던 일처럼 보이지 않았고 선원들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잘 사려진 밧줄이 햇볕에 말라서 반짝거렸다. 고기비늘들이 그 밧줄에 말라붙어 있었다.
■ 목숨 1
사람의 죽음을 가까이서 지켜본 일이 있었다. 연기가 빠져 나가듯이, 생명은 가뭇없이 빠져나갔다. 생명은 본시 연기나 바람 같은 기체가 아니었을까. 생명이 빠져나간 육신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고, 죽어가는 육신의 눈을 떠서 마지막 이승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눈을 감았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이승의 마지막 풍경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아직 살아 있는 나는 죽어가는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마지막 망막에 비친 살아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마지막 망막에 비친 살아있는 나의 모습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죽어가는 그와 마찬가지로, 한 줌의 공기나 바람은 아니었을까. 그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무서웠다.
나는 춥고 어두운 흙구덩이로 들어가야 하는 일이 무섭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의 무사한 하루하루에 안도한다. 행복에 대한 내 빈약한 이야기는 그 무사한 그날그날에 대한 추억이다. 행복이라기보다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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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숨 2
나이를 먹으니까 병원에 갈 일이 점점 많아진다. 눈도 침침하고 허리도 쑤신다. 지난 한 해 동안에도 병원에 가져다 준 돈이 수십만 원이 넘는다. 나는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갈 때마다 소독약 냄새에 진저리를 친다. 소독약은 우월성의 냄새를 풍긴다. 병원은 환자보다 우월하다는 냄새를 소독약은 뿜어낸다. 소독약은 내 몸속의 병을 적대시하고 경멸하는 듯한 냄새를 풍긴다. 병원은 늘 살균되어 있다. 젊은 의사는 나에게 “어디 아프냐” “얼마나 아프냐”고 묻는다. 병은 나 자신의 생명 속에서 발생한 실존적이고도 사적인 현상이다. 내 병은 내 생명현상인 것이다. 나는 나의 병을 나 자신의 몸으로부터 분리시키지 못한다. 나는 나의 병을 객관화하지 못하고 대상화하지 못한다. 그러나 젊은 의사는 기어코 나의 병을 대상화시킨다. 대상화되지 않으면, 의사는 나의 병에 손대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옷을 추켜올리고 의사에게 내 맨 몸을 내맡길 때 나는 내 병을 남에게 맡겨야 하는 이 속수무책을 슬퍼한다. 나는 젊은 의사에게 이 운명의 개별성을 설명할 길이 없다.
얼마 전에 친구가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 친구를 문병 갔다가 우연히 뇌 속을 찍은 MRI사진을 볼 수 있었다. 종양의 사진이었다. 골프공만한 크기의 종양 주변으로 반딧불 같은 새끼 종양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종양들은 뇌 속에서 스스로 발생하고 번식하며 영역을 넓혀간다. 뇌속에서 종양이 커지면 그 주변이 신경을 압박해서 미각중추, 후각중추, 시각중추가 교란된다고 의사는 설명했다. 미각과 후각의 중추가 마비되면 모든 음식은 맛이 바뀐다.
생명 속에는 생명을 부정하고 생명에 반역하는 또다른 생명이 서식하고 팽창한다. 이 반역은 생명현상인 것이다. 나는 그 MRI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생로병사는 생, 로, 병, 사로 따로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덩어리로 포개져서 흘러가는 것임을 알았다. 생(生) 속에 사(死)가 있고 노(老)가 있으며, 병 속에 사가 있는 것이었다. 생로병사는 분리되지 않는다. MRI사진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의학이 생명을 다루는 학문으로서 모든 생명현상 속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개인의 생명과 관련된 국면에서, 그 생명이 끝나는 순간 의술은 거기서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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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죽음과 싸우지 않고, 죽음을 인도하는 것이 의업의 길이며, 그 길은 생로병사에 거역하는 길이 아니라 생로병사와 함께 흘러가는 길이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어른다울 것이다.
2부 돈
■ 세월호
단원고 2학년 여학생 김유민은 배가 가라앉은지 8일 후에 사체로 인양되었다. 라디오 뉴스에서 들었다. 유민이 아버지 김영오씨는 팽목항 시신 검안소에서 딸의 죽음을 확인하고 살았을 적의 몸을 인수했다. 유민이 소지품에서 학생증과 명찰 그리고 물에 젖은 1만 원짜리 지폐 6장이 나왔다. 김영오씨는 젖어서 돌아온 6만 원을 손에 쥐고 펑펑 울었다. (유민 아빠 김영오 <못난 아빠> 중에서)이 6만원은 김영오씨가 수학여행 가는 딸에게 준 용돈이다. 유민이네 집안 사정을 보건대, 6만 원은 유민이가 받은 용돈 중에서 가장 많은 돈이었을 것이다. 이 6만 원은 물에 젖어서 돌아왔다.
아 6만 원, 이 세상에 이 6만 원처럼 슬프고 참혹한 돈이 또 있겠는가. 이 6만 원을 지갑에 넣고 수학여행 가는 유민이는 어떤 설계를 했던 것일까. 열일곱 살 난 여학생은 무엇을 사고 싶었을까. 얼마나 간절한 꿈들이 유민이의 6만 원 속에 담겨 있던 것인가. 유민이가 가지고 싶었던 것들. 아버지, 엄마, 동생에게 사다주려 했던 선물은 무엇이었을까.
6만 원은 유민이의 꿈을 위한 구매력에 쓰이지 못하고 바닷물에 젖어서 아버지에게 되돌아 왔다.
세월호는 화물을 너무 많이 실었고, 선체를 불법으로 증축했고, 배의 균형을 유지시켜주는 평형수를 빼냈고, 갑판 위의 화물을 단단히 묶어놓지 않았기 때문에 배가 흔들릴 때 복원력을 상실하고 한쪽으로 쏠려서 침몰한 것이라고 검찰은 수사결과를 밝혔다. 검찰은 이 부분을 아주 자세히 설명했다. 검찰의 말은 한 마디로, 세월호는 물리법칙을 위반했기 때문에 침몰했다는 것인데, 지구 중력의 자장 안에서 불리법칙을 위반하고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세월호는 가라앉을 만해서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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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의 돈은 오래전부터 가치의 저장이나 측정, 교환, 유통, 지불, 결제의 수단을 넘어서서 인간과 세계를 지배하는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다. 돈의 위상은 법의 보호를 받고 돈의 작동은 시장경제의 축복을 받는다.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채찍’을 휘두르는 이 권력의 지배는 완벽하고도 철저해서 그 지배권으로부터의 이탈은 곧 죽음이다. 그래서 이 나라의 돈은 화폐라기보다는 알파벳 대문자를 써서 ‘DON’으로 표기해야만 그 유일신다운 전능의 위세에 합당할 것이다.
세월호를 침몰시킨 70년 가까운 적폐는 이 ‘DON’과 거기에 붙좇는 정치권력과 행정권력의 연합세력이라는 사실의 흐린 윤곽은 이미 드러나 있다. 그 연합세력이 어떤 인적, 행정적 지휘-복종과 공생의 네트워크를 통해 그 배에 작동되어서 감히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깔아뭉갰던가를 시대사 전체 속에서 밝히는 것이다.
■ 돈 1
아들아, 사내의 삶은 쉽지 않다. 돈과 밥의 두려움을 마땅히 알라. 돈과 밥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지 말고 주접을 떨지 말라. 사내의 삶이란, 어처구니없게도 간단한 것이다. 어려운 말 하지 않겠다. 쉬운 말을 비틀어서 어렵게 하는 자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그걸로 밥을 다 먹는 자들도 있는데, 그 또한 밥에 관한 일인지라 하는 수 없다. 다만 연민스러울 뿐이다.
사내의 한 생애가 무엇인고 하니, 일언이폐지해서, 돈을 벌어 오는 것이다. 알겠느냐? 이 말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이 세상에는 돈보다 더 거룩하고 본질적인 국면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얘야 돈이 없다면 돈 보다 더 큰 일들이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 부(否)라! 돈은 인의예지의 기초다. 물적 토대가 무너지면 그 위에 세워놓은 것들이 대부분 무너진다. 이 사태는 인간의 삶의 적이다. 이것은 유물론이 아니고, 경험칙이다. 이 경험칙은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공히 유효하다. 돈 없이도 혼자서 고상하게 잘난 척하면서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아마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말아라. 추악하고 안쓰럽고 남세스럽다.
우리는 마땅히 돈의 소중함을 알고 돈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 돈을 사랑하고 돈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들만이 마침내 삶의 아름다움을 알고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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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할 수가 있다. 주머니 속에 돈을 지니려면 어떻게 해애 하는가? 그 대답은 자명한 바 있다. 돈을 벌어야 한다. 우리는 기어코 돈을 발어야 하는 것이다 노동의 고난으로 돈을 버는 사내들은 돈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돈은 지엄한 것이다. 아, ‘생의 외경’, 이 외경스러운 도덕은 밥벌이를 통해서 실현할 수 있다.
이 세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든 먹이 속에는 낚싯바늘이 들어 있다. 우리는 먹이를 무는 순간에 낚싯바늘을 동시에 물게 된다. 낚싯바늘을 발라내고 먹이만을 삼킬 수는 없다. 세상은 그렇게 어수룩한 곳이 아니다. 낚싯바늘을 물면 어떻게 되는가. 입천장이 꿰여서 끌려가게 된다. 이 끌려감의 비극성을 또한 알고, 그 비극과 더불어 근면해야 하는 것이 사내의 길이다. 돈과 밥의 지엄함을 알라. 그것을 알면 사내의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아는 것이고, 이걸 모르면 영원한 미성년자다. 돈과 밥을 위해서, 돈과 밥으로 더불어 삶은 정당해야 한다. 알겠느냐? 그러니 돈을 벌어라. 벌어서 나한테 달라는 말이 아니다. 네가 다 써라. 난 나대로 벌겠다.
■ 돈 2
나는 예순이 훨씬 넘도록 나이 먹었지만, 돈을 폭넓고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주희가 쓴 논어 주석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는 아둔함을 부끄럽게 여기지는 않지만, 돈을 종합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고루함을 부끄럽게 여긴다. 돈을 이해하지 못하고서야 내가 속한 이 세계를 이해할 길이 없는 것이다. 한 평생의 월급이 모두 온라인으로 마누라한테 보내지니, 사실 돈을 만져볼 기회도 없었다. 어쩌다가 원고료가 몇 푼 생기면 목마른 벗들을 불러 모아서 술을 마시거나 책을 사거나 모처럼 아버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너네 엄마한테 얘기하지 마라”는 조건으로 마누라 몰래 아이들한테 용돈으로 주어버린다. 이러니 나의 재무구조란 내놓고 말할 것이 못 된다.
버스를 타거나 담배를 사려면 천 원짜리 지폐를 흔히 쓰는데, 그 돈에는 이퇴계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동양의 성인답게 부드럽고도 날카로운 위엄이 있다. 후인들이 그 어른을 흠모하는 마음으로 돈에 초상을 그려놓았겠지만, 그 분은 본래 돈에 별 마음이 없이 안동 청량산 밑에 숨어서 공부만 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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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이었고, 또 세상의 소란이나 명리와는 담을 쌓고 지내신 분이었다. 아마도 그분은 때묻은 돈에 그 얼굴이 그려져서 온 세상을 분주히 흘러다니게 되는 소란을 원치 않으셨을 것이다. 그래서 천 원짜리를 내밀고 담배를 살 때마다 나는 내가 감히 그 그림자 언저리도 밟을 수 없는 그 어른께 민망하였다.
돈에 그려진 퇴계의 초상을 민망히 여길진대, 당신은 큰돈 벌기는 다 틀렸다고 마누라는 결론지었다. 나는 그 결론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그러나 나는 그 초상을 민망히 여길 수 있을 만큼, 천 원이 구매력과 천 원의 실제적 가치를 내 실존 속에서 파악할 수 있다. 내가 지금 고작 천 원에 대한 이해를 자랑이라고 하는 말은 아니다.
나는 천 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퇴계의 초상을 들여다 볼 때마다 기호와 실물 사이에서 길을 읽는다.
얼마 전에 마누라가 신용카드라는 것을 만들어 주었다. 이것은 경이로운 물건이었다. 기계에 넣기만 하면 돈이 촤르르촤르르 쏟아져 나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신용카드를 너무 많이 써서 패가망신하고 있다. 기호와 실물 사이에는 지옥이 있고, 이 지옥에 떨어지면 헤어날 길이 없다. 촤르르촤르르 돈은 쏟아지고, 지옥문은 자꾸 넓어진다. 퇴계 선생께 거듭 죄송하다.
■ 돈 3
원고료로 받은 10만 원짜리 수표 두 장을 마누라 몰래 쓰려고 책갈피 속에 감추어 놓았는데 찾을 수가 없다. <맹자>속에 넣었다가, 아무래도 옛 성인께 죄를 짓는 것 같아서 다른 책으로 바꾸었는데 도무지 이억이 나지 않는다. <맹자> 속에도 없고 <공자>속에도 없고, <장자>속에도 없고 동서고금을 모조리 뒤져도 없다. 수표를 찾으려고 <장자>를 펼쳐보니 “슬프다, 사람의 삶이란 이다지도 아둔한 것인가! 외물에 얽혀 마음과 몸이 다투는구나”라고 적혀 있어 수표 찾기를 단념할까 했으나 또 그다음 페이지에 “무릇 감추어진 것치고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내 언젠가는 기어이 수표 두 장을 찾아내고야 말 터이다.
아 마누라 몰래 감추어든 돈은 얼마나 환상적인가. 감추어 둔 돈이 양성화된 돈보다 화폐단위당 구매력이 더 크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말은 경제이론에도 맞지 않는다. 그러나 감추어둔 돈은 그 용처의 사적인 다양성과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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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성, 그리고 그 만족도가 양성화된 돈에 비교할 수 없이 크고 또 질적으로도 뛰어나다.
돈을 순전히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사적인 주권에 복속되어 있을 때 가장 큰 주관적 효용을 갖는다. 음습한 골짜기를 흘러다니는 돈은 실물을 지배할뿐 아니라 인간의 판단과 가치, 정치적 이해관계까지도 지배한다. 관리에게 돈을 먹이는 일을 ‘인사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 같은 정치 관계의 표현이다. 어느 전직 대통령은 비서관을 불러서 “아무개 재벌총수 요즘 잘 지내는지 궁금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수백 억을 긁어모을 수 있었다. 그 비서관이 재벌 총수에게 전화를 걸어서 “각하께서 당신의 안부를 묻고 계신다”고 말하면 그 재벌 총수는 며칠 후 수백 억을 싸가지고 청와대로 들어와서 “자주 문안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코미디 대본이 아니라, 재판 기록에 나오는 대사다.
떡값이란 말은 돈의 모든 속성을 요약정리한 듯하다. 그 말은 치욕스럽다. 웬 떡들을 그리도 많이 먹는가. 떡값은 직무와 관련이 없는 경우라 하더라도 반드시 직위와는 관련이 있다. 직무는 기능이며 직위는 신분이다. 직무는 용(用)이고 직위는 체(體)인 것이다. 그것은 분리되지 않는다. 체가 없으면 용이 작동되지 않는다. 생각을 해보라. 그가 그런 직위에 있지 않고 나처럼 원고지 칸이나 메우는 포의(布衣)의 서생이거나 혹은 거리의 노숙자였다면 어느 미치광이가 돈을 싸들고 와서 ‘인사’를 드렸겠는가. 구체성과 추상성, 밀실과 광장을 표표히 넘나드는 돈의 복합성이 이 자명한 유죄를 무죄로 만든다. 무죄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다시 수표 두 장을 찾아봐야 겠다.
■ 신호
요즘엔 집배원이 가져다주는 우편물이 대부분 인쇄물이다. 독촉장, 고지서, 안내, 광고, 인사장 들이다. 연하카드조차도 이제는 인쇄된 활자로 쓰여 있다. 어쩌다가 육필로 겉봉을 적은 편지를 받으면 마음이 부르르 떨린다. 육필은 몸의 진동을 느끼게 한다. 그때 떨리는 몸은 나의 몸이기도 하고 편지를 보낸 사람의 몸이기도 하다. 나의 몸과 너의 몸 사이에서 신호들은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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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에는 함경도·평안도의 산악 국경이나 경상도·전라도의 남해안에서부터 서울 남산에 와 닿는 봉수의 연결망이 그려져 있다.
봉수망은 나라를 만들고 나라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일의 눈물겨운 고난을 일깨워준다.
눈 쌓인 시골 간이역에서 철도원들은 깃발을 흔들어 열차를 맞고 또 보낸다. 수신호를 흔들어서 열차를 진입선으로 인도하고 궤도를 수정해 주고 후진을 유도하고 출발과 정지를 알린다. 캄캄한 철길을 따라서 신호들이 길게 이어진다.
신호는 남으로부터 나에게로 오는 것이고, 나에게로부터 남에게로 가는 것이다. 신호는 깜빡이거나 혹은 떨림으로써 해독되기를 갈망하고 있다. 내가 보내는 신호들도 떨리거나 깜빡거리고, 나에게 와 닿는 신호들도 떨리거나 깜빡 거린다. 그래서 인간은 나의 떨림으로 너의 떨림을 해독할 수 있다. 핸드폰을 진동수신으로 바꾸어 놓으면 신호는 부르르 진저리를 치며 내 몸을 울린다. 신호는 떨리는 진저리인 것이다.
새해에는 대동여지도의 봉수 신호나 눈 쌓인 밤의 철길 위로 열차를 맞고 보내는 간이역의 수신호처럼, 간절하고도 아름다운 신호들이 당신들의 가슴에 도착하기를 바란다. 떨리는 신호여, 이 쓰레기 신호의 바다에서 울리고 또 울려라. 젖꼭지마다 진동으로 울려라. 부르르부르르.
■ 서민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서민 흉내를 내고 다녀서 그런지, 구청장이나 군수, 구의원이나 군의원을 하는 사람들도 너도나도 서민 흉내를 내고 있다. 어렸을 적에 못먹고 못살고 지지리도 고생한 궁상을 무슨 훈장이나 되는 것처럼 떠벌리고 다닌다. 서민이란 본래 돈도 ‘빽’도 없이 뼛골이 빠지게 고생해서 겨우겨우 먹고 사는 사람이라는 뜻일 게다.
선거 때가 되니까 이 ‘서민’이 갑자기 ‘성골’대접을 받고 있다. 멀쩡히 잘나가던 사람이 쓰레기 하치장에 가서 썩은 음식물 찌꺼기를 뒤적거리는 시늉도 하고 재래시장 생선가게에 가서 비린내 나는 생선을 맨손으로 주물러 보이기도 한다. 서로 자기만이 진짜 서민이고 상대방은 서민의 탈을 뒤집어쓴 귀족이라고 욕해대고 있다. 쓰레기를 뒤진다고 서민이 아니고 쌍소리를 잘한다고 서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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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이 선이고 귀족이 악인 것도 아니다. 가난뱅이가 선이고 돈 많은 자가 악인인 것도 아니다. 그 반대도 아니다. 부자가 부자의 악덕에서 헤어나기 어렵듯이 가난뱅이에게도 가난뱅이의 악덕은 있다. 또 부자의 미덕이 있듯이, 가난뱅이의 미덕도 있는 것이다. 인간은 전면적으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쌍소리를 찍찍 해대거나 쓰레기통을 쑤시고 다니면서 그것이 마치 귀족적 엄숙주의를 까부수는 발랄함이나 낮은 처지의 삶에 대한 포용력인 것처럼 떠벌리는 꼴은 추악하다. 그렇게 뼛골 속부터 서민이고 서민이 그렇게 좋으면 서민으로 꾸역꾸역 일이나 하고 살면 되지 대통령은 왜 하겠다는 것인가.
역대 대통령의 아들들은 하나같이 돈을 훑어 먹고 고랑을 차고 감방에 들어갔다. 이것은 말하자면 천민들이 하는 짓거리이다. 대통령과 그 주변에, 귀족의 명예심과 강건함이란 약에 쓰려도 없었기 때문에 그 말로가 이처럼 극악한 천민주의의 비열함 속에서 끝나게 된 것이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은 고귀한 것이며 삼엄하게 통제되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명예심이 그들에게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서민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서민을 지옥으로 몰아넣는 것은 바로 그 지도자의 천민 근성이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왜 스스로 높은 귀족의 정신을 보여주지 못하고 쓰레기통 근처를 얼씬 거리면서 쌍소리를 해대는가. 대중의 표를 합산해서 정치권력을 세우는 제도 아래서 선거는 그런 양상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고 해도, 지도자는 대중이 하자는 대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때로는 대중 전체의 뜻을 홀로 거역하면서 그 반대 방향으로 끌고 나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귀족 정신을 모조리 쳐부수어야 서민의 낙원이 세워지는 것은 아니다. 지도자가 귀족의 명예심을 잃을 때 서민의 지옥은 시작된다. ‘서민’은 귀족의 반대말이 아니다.
■ 불자동차
도심을 뒤흔드는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는 다급하고도 간절하다. 질주하는 소방차의 대열을 바라보면서 나는 늘 인간과 세상에 대해서 안도감을 느낀다. 재난에 처한 인간을 향하여 그 재난의 한복판으로 달려드는 건장한 젊은이들이 저렇게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인간다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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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남아 있고, 국가의 기능이 정확하고도 아름답게 작동되고 있다는 신뢰감을 느끼게 한다. 인간만이 인간을 구할 수 있고, 인간만이 인간에게 다가갈 수 있으며, 인간만이 인간을 위로할 수 있다는 그 단순명료한 진실을 나는 질주하는 소방차를 바라보면서 확인한다. 달려가는 소방차의 대열을 향해 나는 늘 내 마음의 기도를 전했다. 살려서 돌아오라. 그리고 살아서 돌아오라.
사이렌소리가 고막을 찌를 때 나는 문득 ‘삶이란 경건한 것이다’ 라는 생각에 잠긴다. 인간은 재난 앞에 경건해야 하고 재난에 처한 인간에 대해서 경건해야 한다고 사이렌 소리는 이 세상을 향해 외친다. 외치면서, 소리의 끝을 길게 끌어가며 내가 덤벼들 수 없는 재난의 복판을 향해 달려간다. 도심을 질주하는 소방차의 대열을 향해, 나는 소방차 만세, 인간 만세를 외치고 싶었다.
지금 소방대원들이 역할은 화재진압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재난구조로 확대되고 있다. 산불, 수재, 해양사고, 교통사고, 붕괴, 매몰, 추락, 응급환자 수송뿐 아니라 아파트 문 열어주기, 미친 개 포획과 한강 철교 행거에 올라가서 자살하겠다고 날뛰는 사람을 달래서 끌고 내려오는 일까지 모두 다 그들의 업무다. 핸드폰이 보급된 후에 산악 안전사고로 목숨을 잃는 일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핸드폰으로 119단추를 누르면 장비를 걸머진 젊은 대원들이 산꼭대기나 계곡으로 즉각 달려오기 때문이다. 그 대원들은 이 사회의 기초를 지키고 버티어주는 안전판이고,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실천하는 보살들이다. 그들은 인간에게 다가오는 인기척이다. 소방차가 도심을 질주할 때 나는 보살이 화염 속의 중생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안다. 보살은 늘 우리 곁에 있다. 어린 아이들이 질주하는 소방차에 열광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그 어린아이들처럼, 우리 사회가 소방대원들의 사명의 고귀함을 인식하고 그들을 응원하고 격려해주기를 바란다.
2015. 11. 16
* 다음에 3, 4, 5부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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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2)
■ 김훈 지음
3부 몸
■ 여자 1
비는 살아 있는 것들 속에 숨어 있던 냄새를 밖으로 우려내서 번지게 한다. 며칠씩 비가 내리는 거리에는 젖은 가로수들의 몸 냄새가 자욱이 배어나오고 마주 스치는 여자들의 지분 냄새는 젖은 공기 속에서 칼끝처럼 날카롭다. 아무런 인연 없이 스쳐지나가는, 오로지 타인일 뿐인 여자들의 향수 냄새는 다만 빗속의 익명성이라야 옳다.
향수는 강력한 휘발성을 가진 물질이다. 립스틱이나 파운데이션이나 파우더 속에도 휘발성 향료는 들어 있다. 휘발성은 색상이나 질감 못지않게 여자들 화장품의 한 중요한 본질인 듯싶다. 색상과 질감조차도 냄새로 변해서 밖으로 휘발되어지기를 기다리는 듯하다. 여자들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팔다리와 옷자락의 깊은 곳으로부터 그 냄새는 세상 밖으로 번져나온다. 그 냄새는 존재의 구획을 일체 무시하고 마구 새어나와 번진다. 여자들은 아무 아무 인연 없는 타인의 감각을 향하여 그렇게 육질화된 냄새를 뿜어낸다. 이 냄새가 수만 년의 문명사 속에 배어들고 절여져서 사람들의 후각은 이제 이 냄새와 더불어 편안한 듯하고 이 냄새는 세련된 문명의 자랑스런 냄새로 대접받고 있다.
화장을 할 때, 여자들은 거울 앞에서 무섭게 집중한다. 여자들이 얼굴에 그려넣고 싶은 것은 존재의 개벽성과 개별화 된 존재의 자유일 것이다. 여기까지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여자들은 그 개별성과 자유를 거느리고 섹스어필까지 가야 한다. 어려운 대목이다.
신라의 유부녀 수로부인의 옷에서는 이상한 향내가 났는데, 그 냄새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이 유부녀가 바닷가를 걸어가면 물속의 용이나 거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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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도 수컷들은 모두 발정해서 쩔쩔맸다. <삼국유사>에 그렇게 적혀있다. 일연은 어쩌자고 역사책 속에 여자의 몸 냄새를 기록했을까. 이 냄새는 천지간에 가득 차는 여자의 관능의 냄새이고, 개별화되지 않은 채로 만유하는 여성성의 냄새로 맡아진다.
그 무렵에 죽은 신라 여자들은 허리춤에 향주머니, 족집게 같은 화장도구를 주렁주렁 매달고 무덤 속에 누워있다. 그걸 차고 무덤 속까지 간다. 백골은 진토 되어도 화장도구는 빛난다. 고분벽화 속에서, 죽은 고구려 여자들의 입술과 두 뺨은 아직도 새빨갛다.
여자들은 저 익명성의 여성성을 자신의 실존에만 개별적 상황으로 바꾸어 놓기 위하여 수만 년의 세월을 거울 속에 집중했다. 그것은 무덤 속에서조차 단념할 수 없는 여자들의 싸움이다.
인간의 내면은 반드시 그 눈빛과 낯빛과 몸가짐에 드러나는 것이라고 유가(儒家)는 가르친다. 이런 가르침은 이제 영험하지 못한 관상술 정도로 폄하되고 있다. 그러나 드러남과 보여짐이 완벽하게 분리될 때, 여자들의 자유의 자리가 확보될 수 있을까. 여자들은 아플 때 아파보일 자유와 지칠 때 지쳐보일 자유와 나이 먹어서 늙어 보일 권리가 없는 것일까. 오십이 넘어서도 아내와 외출을 하려면 화장을 마칠 때까지 삼십 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4세기 신라 무덤 속 여자들의 화장품까지 생각하면서.
■ 여자 2
여자들은 아무데서나 화장을 한다. 비행기 안이건 고속버스 안이건, 호텔 로비에서나 사무실에서나, 하악(下顎 아래턱)을 가차없이 벌려서 벌건 입 속을 드러내놓고 활줄처럼 긴장된 입술 위에 루주를 칠한다. 붓으로 루주를 찍어서 입술의 윤곽선을 먼저 그리고 루주의 빨간 몸통을 밀어 올려서 입술 위에 문지른다. 그러고는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오므려 안쪽으로 끌어당겨 부빈다. 이것은 필시 루주를 입술위에 골고루 펴지게 하려는 마무리 작업일 터인데 그렇게 짐작을 할 뿐, 여자들에게 그 뜻을 물어본 적은 없었다. 위아래 입술 사이에 종이 냅킨을 물고 깨물듯 힘을 주어 입술 도장을 찍어내고 종이에 찍힌 문양을 들여다보기도 하는데, 그 또한 오의(奧義 깊은 뜻)를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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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눈동자는 손거울이 허용하는 작은 공간 너머에 있는 자신의 모습에 닿기 위하여 거울의 변방 구석구석을 핥듯이 정찰한다. 그때 손에 쥔 거울의 각도와 고개의 각도는 눈동자가 인도하는 방향에 따라 민첩하고도 섬세한 변화를 거듭한다. 눈꺼풀의 안쪽 가장자리를 따라서 검은 연필로 그늘을 그려넣는 일은 위태로워 보인다. 눈을 감아야만 눈꺼풀을 고정시킬 수 있는데, 눈을 떠야만 거기에 칠을 할 수 있다. 눈꺼풀에 무수한 경련을 일으켜가며 여자들은 그 지난한 공사를 완성해 낸다.
여자들은 아무데서나 막무가내로 콤팩트를 꺼내든다. 여자들의 혼백은 거울 속으로 무섭게 집중한다. 그때 여자들은 마치 거울 밖 세상을 버리고 거울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다. 화장을 마치고 나면 딸가닥, 콤팩트가 닫히는 금속성 소리와 함께 여자들은 거울 밖 세상으로 돌아온다.
한국 남자들에게는 사물화된 여성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말이 있다 그말은 ‘잘빠졌다’는 말이다. ‘빠지다’는 ‘뽑다’의 자동사형이다. ‘가래떡을 뽑다’ ‘기계에서 제품을 뽑다’ 처럼 공업적 생선과정의 마지막 단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자동차를 새로 구입했을 때도 ‘새 차를 뽑았다’고 말한다. 어디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내들이 눈독을 들이고 힐긋거리는 여자들은 다 잘빠진 여자들이고, 왕관을 쓴 미녀들이나 핸드폰 광고, 구두 광고에 나오는 롱다리의 여자들과 수중발레, 피겨스케이팅에 나오는 여자들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잘빠진 여자들이다. 여자의 몸을 놓고 ‘잘빠졌다’고 말 할 때 그 ‘빠지다’라는 동사의 쓰임새는 놀랍게도 정확하다.
그 정확성은 기계적이고 공업적인 정확성이다. 그리고 ‘잘빠졌다’의 ‘잘’은 여럿이 공유하는 입맛에 맞고, 공유된 욕망을 충족시킬 만하다는 뜻이 터이다. 그러므로 ‘잘빠졌다’는 말의 주어는 여자가 아니라 사물이고 개체가 아니라 익명이며 규격이다. 이 익명성의 규격에 따라 여자들이 사물화될 때 여자들의 아름다움은 점점 더 도발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 ‘잘빠진’ 것이 아름다운 것이므로 여자들은 점점 더 잘빠져 나올 것이다.
‘잘빠졌다’는 말은 공업적인 말이고, 더러운 말이다. 그 더러움은 사물성에서 온다. ‘잘빠졌다’는 말 속에서 잘빠진 여자는 소외된 여자다. 인간과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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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가 서로를 소외시키고 있다. 인간이, 인간이 아닌 것으로 바뀔 때 더러움이 발생한다. 아름다움의 내용을 억압과 사물성이 아니라, 자유로 가득 채우는 여자가 아름답다. 그런 여자가 살아 있는 여자고, 살아가는 여자고 , 삶을 영위하는 여자다. 아들들아 연애를 하려거든 그런 여자하고 해라.
■ 여자 3
유방 성형수술을 받은 여자들에게 집단 부작용이 일어나 우리나라 젊은 여자들의 젖가슴이 크게 망가져버렸다고 말한다. 젖퉁이를 크고 팽팽하게 만드느라고 그 속에 실리콘이라는 이물질을 넣었는데 모양은 도톰해졌지만 좀 지나니까 진물이 흐르고 염증이 깊어져서 아예 젖을 도려내야 할 지경이라는 것이다. TV뉴스를 보면서 아깝고 분한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여자들의 젖가슴이란 그 주인인 각자의 것이고 그 애인의 것이기도 하지만, 신라금관이나 고려청자나 백제 금동향로 보다 더 소중한 겨레의 보물이며 자랑거리다. 여자들은 누구나 다 한 쌍의 젖가슴을 키워내서 품고 있다. 그렇게 때문에 이 젖가슴은 더욱 보편적이고 소중한 일상의 보물이며, 민족적 생명과 에너지의 근본인 것이다. 희소가치가 없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다는 말이다. 더구나 그 속에 살아 있는 생명의 피가 흐르고 젖샘 꽈리에 젖이 고인다고 하니, 죽은 쇠붙이에 불과한 신라금관과는 비교할 수 없다. 거리마다, 공원마다, 지하철마다 이 넘쳐나는 생명의 국보들은 새로운 삶을 위한 충동으로 우리를 설레게 하고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디게 해준다.
여자 젖가슴의 모든 고난은 직립보행에서 비롯된 것이다. 네발로 기어다니는 포유류의 젖은 아래로 늘어져서 편안하다. 이것이 무릇 모든 젖의 자연일 것이다. 두 발로 걷기 시작한 이후로, 여자들의 젖가슴은 어쩔 수 없이 전방을 향하게 됐다. 가엾은 일이다. 크고 무겁고 밀도가 높고 팽팽하고 늘어지지 않는 가슴만이 아름답다고, 남자나 여자나 모두 그렇게 세뇌돼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크고 무거운 것들은 아래로 늘어지게 돼 있다. 늘어지려는 것을 자꾸만 끌어 올리니까 부작용이 생긴다. 생명이나 자연은 인간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이미 스스로 본래 그러한 것처럼 아름답고 편안하다. 그러니 가슴이 좀 늘어지기로 무슨 걱정할 일이 있겠는가.
여자들아, 당신들 가슴에 얼굴을 묻고 젖가슴의 삼각형 대칭 도구나 젖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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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방향을 따져보는 사내들을 애인으로 삼지 말라. 이런 녀석들은 대개가 쓰잘 데 없는 잡놈들인 것이다. 이런 남자들을 믿고 살다가는 한 평생 몸의 감옥, 광고의 감옥, 여성성의 감옥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당신들의 젖가슴은 단지 젖가슴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아름답다. 직립보행의 고난을 떠 안고 있는 그 가슴을 이제 좀 편안하게 해주기 바란다.
■ 여자 4
미스코리아나 슈퍼모델, 슈퍼탤런트 같은 호화판 미인선발대회 말고도 전국에서 매년 1백여 종의 미인대회가 열리고 있다. 여러 고장들이 너도나도 미녀를 뽑아서 전통문화나 특산품 선전에 앞세운다. 마을마다 광고마다 미녀가 넘쳐난다. 다들 희고 긴 다리를 옆으로 모아서 포개고, 큰 입을 활짝 벌려서 웃고 있다. 미녀로 뽑히면 아무런 업적이 없어도 상류 사교계에 끼어들 수가 있고, 아무런 직업경력이 없어도 방송이나 연예 직종의 노른자위로 바로 진출할 수 있으며, 재벌의 부인이나 며느리나 손주며느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뽑힌 미녀들은 웃을 만도 하다. 팔자는 순전히 개인적인 운명이라고 하지만, 미녀들의 이 찬란한 팔자는 유형화되고 집단화되어간다.
구석기 이래로 미녀는 자연스럽게 정복자들의 차지였다. 이 풍속에는 동물생태학적인 타당성이 있다. 거기에 시비를 걸어봐야 다 부질없는 짓이다.
오늘의 미녀는 어떠한가. 인간의 풍속에는 동물생태학의 범주에 속하는 사태가 허다하다. 남성지배와 미녀 우월주의 의 공생 공영 관계도 정확하게 그 범주에 속한다.
텔레비전은 미인대회를 장시간에 걸쳐 생중계하면서 미녀들의 벗은 몸을 앞으로 뒤로,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돌려가면서 자상하게 보여준다. 벗은 미녀들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한 명의 걸출한 영웅을 위해서가 아니라 만인의 즐김을 위해서 온 나라에 두루 보여주는 것이 텔레비전의 민주주의다.
이 아름다움의 본질에 관하여 분석적 사유를 전개하는 일은 고통스럽다. 미녀의 벗은 몸을 부위별로 논하는 것은 점잖은 사람의 글이 아닐 테지만, 심사기기준이라는 것이 부위별로 되어 있으니 도리가 없는 일이다.
심사 기준에 따르면 미녀의 하체는 두 다리를 모으고 섰을 때, 넓적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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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부분의 안쪽이 딱 붙어야 한다. 이 간단한 ‘기준’은 의미심장하다. 거기가 왜 딱 붙어야 하는가. 거기는 숨을 죽이고 텔레비전을 들여다보는 억조창생의 성적긴장이 집중되는 부위다.
하이힐은 발뒤꿈치를 쳐들어 올림으로써 미녀의 엉덩이를 뒤쪽을 빼주고 유방을 앞 쪽으로 내밀어준다. 하이힐은 전방지향적이고 도발적인 유방의 구조역학적 토대다. 유방을 심사할 때 유방의 크기, 위치, 선 이렇게 세 가지의 관측 포인트로 분해된다.
지난주에는 ‘안티미스코리아 페스티벌’ 이라는 페미니스트들의 축제가 있었다. 이 견딜 수 없는 세상, 이 어처구니없는 세상, 이 기막힌 세상을 향하여 그 여자들은 발을 구르며 비명을 질렀고 몸부림쳤다. “못생긴 여자들의 투정이 아니다”라는 말은 남자들 들으라고 하는 말인 듯 싶었다. 그 여자들의 세상 뒤집기는 어렵고 힘들어 보였다. 어떤 남자들은 페미니스트의 반격이 있음으로 해서 미인대회의 즐거움은 배가되었다고 말한다. 전운이 감도는 긴장 속에서 양쪽을 다 즐길 수가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 여자 5
만화가들이 여자 젖가슴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때는 유방의 아랫선에 공을 들인다, 유방의 흐벅진 질량감을 표현하려면 아랫선을 부드럽게 늘어뜨려야 하는데, 이 선이 너무 늘어지면 힘이 빠져서 성적 긴장감이 깨진다. 그러므로 이 선은 그저 맥없이 부드럽기만 해서는 안 된다. 부드럽고 유연하되 위를 향해서 당겨지는 힘이 그 속에 숨어 있어야 한다. 아래로 늘어지는 무게의 풍요로운 충만감과 위를 향해 추켜올려지는 긴장의 팽팽함이 한 줄의 먹 위에 동시에 살아 있어야 이 지난한 선의 아름다움은 겨우 성립된다.
그림이 삶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있겠지만, 삶보다 더 무거울 수는 없을 터이다. 그러니 세월과 더불어 세월의 풍화작용 속을 통과하며 살아가는 여자들의 젖가슴이 어찌 저 베레모 쓴 화백들의 절묘한 손놀림이 빚어내는 그림 속의 젖가슴과 같기를 바랄 수가 있겠는가. 하물며 여자의 여성성과 모성이 치러내야 하는 한평생의 생물학적 산전수전과 백병전 속에서 어찌 그림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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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젖가슴이 온전하기를 바랄 수가 있겠는가. 삶은 풍화이며 견딤이며 또 늙음이다. 살아서 무엇을 이룬다는 일도 그 늙음과 견딤 속에서만 가능하다. 삶은 그림보다 무겁고, 그림보다 절박하고, 그림보다 힘들다. 그리고 삶은 그림보다 초라하다. 그림보다 꾀죄죄하고 그림과는 비교할 수 없이 훼손되어 있는 것이 삶의 올바른 풍경이다.
그런데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성형수술이나 기계장치를 사용해서 그림에 나오는 젖가슴을 만들어 주겠다는 광고들이 연일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래저래 아줌마들은 서럽고 약오르게 되어 있다. 이 사회는 성적 긴장과 유혹을 상실한, 나이든 여자들을 집단적으로 천덕꾸러기로 만들어가고 있다. 여기에는 남자들뿐 아니라, 성적 자의식을 크나큰 재산으로 간직하고 있는 젊은 여성들까지 가세하고 있다. ‘아줌마’는 이 천덕꾸러기들에 대한 사회적 비칭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 사회의 인구구성 안에 아줌마라고 불러야 마땅한 인류학적 여성집단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아줌마라는 유형화된 질감과 ‘티’는 완연하게 존재한다. 아줌마는 성적 긴장의 날이 서 있지 않다. 아줌마는 풀어져 있고 아줌마는 퍼져 있다. 아줌마의 질감은 펑퍼짐하고 뭉툭하고 무디고 질펀하다. 아줌마는 지하철의 좁은 자리에서도 옆 사람을 압박해가면서 엉덩이를 들이밀고, 아줌마는 껌을 씹으면서도 거침없이 소리를 낸다. 한 번의 입동작으로 딱, 딱, 딱 세 번 소리를 낼 수 있는 신기한 아줌마도 있다.
아줌마는 재래시장 좌판에서 봄나물을 살 때, 물건 파는 할머니를 윽박질러서 기어코 한 움큼을 더 집어온다. 아줌마는 고3의 재수 삼수 뒷바라지를 해야 하고 수능 시험 때 절에 가서 빌고 입영열차 플랫폼에서 운다. 아줌마는 마음에 드는 물건이면 진주 목걸이를 세겹까지 목에 걸 수도 있고 크림슨 레드의 짙은 루주를 앞니에까지 흘러내리도록 두껍게 칠할 수도 있다. 아줌마는 하이힐 위로 찐빵처럼 부풀어 오른 발등의 살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줌마들이 어떻다는 말인가. 아줌마의 유형화된 질감과 행태는 그것 때문에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야 할 죄업이 아니다. 오히려 아줌마는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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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과 더불어 늙어가면서 여성 자신을 속박하고 있던 사내들의 성적 시선의 사슬을 끊어버린 자유인의 이름일수도 있다.
얼마 전에 서울 종로구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는 사진작가 오형근씨의 <아줌마 사진전>이 열렸다. 아줌마들의 여러 표정과 질감을 이 전시회에서 만날 수 있었다. 아줌마들의 그 당당함에도 불구하고 아줌마들의 자유는 쓸쓸해 보였다. 아직도 아줌마들의 자유의 표정은 소외된 자유다. 그 자유는 아직도 무언가가 더 채워져야 할 목마른 자유인 것처럼 보인다.
아줌마들이 아줌마를 소외시키는 이 세상의 성적 기만과 허위에 당당하게 맞서 있기를 바란다. 실리콘이 아니라 그 당당함으로 아줌마들의 자유의 내용이 채워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아줌마들의 만원 지하철 안에서 남의 귀밑에다 대고 껌을 짝짝 씹지 말고, 봄나물 한 줌 더 가져가려고 가엾은 노점 할머니들을 서럽게 만들지 말기를 바란다.
■ 손 1
한평생 연필로만 글씨를 쓰다보니, 출판사 편집자들로부터 눈총을 받고 산다. 아무래도 컴퓨터로는 글이 써지지 않는다. 컴퓨터를 배우려고 한 번도 노력해본 적이 없다. 그 물건의 편리함을 모르지는 않지만 누르면 글자가 나오는 그 물건을 볼 때마다 왠지 나하고는 인연이 없는 것 같아서 나는 컴퓨터를 배우기를 포기해버렸다. 팔자에 없는 짓은 원래 하지 않는 게 좋다.
연필로 글을 쓰면 팔목과 어깨가 아프고, 빼고 지우고 다시 끼워 맞추는 일이 힘들다. 그러나 연필로 쓰면, 내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든다. 이 살아있는 육체성의 느낌이 나에게는 소중하다. 나는 이 느낌이 없이는 한 줄도 쓰지 못한다. 이 느낌은 고통스럽고도 행복하다. 몸의 느낌을 스스로 조율하면서 나는 말을 선택하고 음악을 부여하고 지우고 빼고 다시 쓰고 찢어버린다.
내 몸이 허락할 때, 나는 내 맘에 드는 글을 쓸 수가 있고 내 몸이 허락하지 않는 글을 나는 쓸 수가 없다. 지우개는 그래서 내 평생의 필기도구다. 지우개가 없는 글쓰기를 나는 생각할 수 없다. 지워야만 쓸 수 있고, 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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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므로 나는 겨우 두어 줄씩 쓸 수 있다. 그래서 원고를 몇 장 쓰고 나면 내 손은 새까맣게 더러워진다.
아날로그는 이제 낙후된 삶의 방식이다. 아날로그는 다 죽게 되어 있다. 아날로그는 더 이상 디지털 문명의 대안이 될 수가 없다. 아날로그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슬픔과 기쁨, 고난과 희망을 챙겨서 끌고 간다. 디지털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튀어서 간다. 그래서 디지털은 앞서가고 아날로그는 시대의 뒷전으로 밀려난다. 나는 아날로그가 끌고 나가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의 고난과 희망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모든 음악은 인간의 몸의 소리이다. 살아 있는 동안의 시간과 생명이 스스로의 결핍을 힘으로 삼아서 소리를 낸다. 그리고 몸과 악기의 교감의 원리는 오직 아날로그의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악기는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 구멍과 줄과 떨림판과 건반 어디에도 소리의 흔적은 없다. 악기는 소리의 집이지만, 소리는 그 집에서 살지 않는다. 소리는 어디에 있느냐. 소리는 어디에서 태어나 어디에서 죽느냐. 나는 소리의 거처를 알지 못한다. 그 거처를 알지 못하지만, 소리는 악기와 그 악기를 연주하는 인간의 몸 사이에서 아날로그 방식으로 태어나고 죽는다. 문질러야 소리가 나오고 불어야 소리가 나오고 손가락을 놀려서 바람구멍을 막고 열어야 소리는 춤을 춘다. 소리의 춤은 생명과의 직접성에서 발생한다.
톱, 망치, 펜치, 니퍼, 드라이버, 스패너, 대패, 작두, 써레 같은 연장은 악기처럼 몸의 일부다. 연장은 이 세계를 개조하고 거기에 흔적을 남기려는 인간의 열망의 소산이다. 그래서 망치를 들고 못을 박을 때, 나의 몸은 나무에 저항하고 못에 저항한다. 못과 나무도 나의 몸에 저항한다. 망치가 그 양쪽의 저항을 일련의 흐름으로 연결시켜주면서 나의 ‘못박기’ 동작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못박기’는 내 생명의 축제인 것이다.
톱질과 땅파기도 마찬가지다. 그때 망치와 톱과 삽은 내 몸의 일부다. 나는 내 몸과 연장의 교감으로써 이 세계와 교감하고 거기에 맞선다. 이 세계는 망치와 톱에 와 닿는 질감을 통해 내 몸속으로 흘러든다. 세계가 내 몸속으로 흘러드는 느낌은 뻐근하고도 평화롭다. 세계는 내 몸속에 가득 차서 넘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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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나는 세계로부터 소외되지 않는다. 이 친화와 긴장은 팽팽하고 부드럽다. 그래서 가끔씩 마당에 나가서 사과궤짝을 부수어 개집도 만들고 화분도 만든다.
한 그릇의 음식도 상호 교감의 방식으로만 이 세상에 태어난다. 나는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의 착한 마음과 그 놀라운 상상력을 사랑한다. 음식은 재료와 재료 사이의 교감으로 태어난다. 그러므로 된장찌개는 하나의 완벽한 새로운 세계다. 재료들 사이의 교감으로, 지금까지 이 세상에 없었던 ‘국물’이라는 완연한 세계가 입속에서 살아난다.
여자 사랑하기를 좋아하는 내 바람둥이 친구는 “연애란 오직 살을 부비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아, 저렇게 간단한 것을 몰라서 이토록 헤매었다는 말인가 싶었다.
살은 오직 아날로그 방식으로만 작동한다. 나는 살의 아날로그를 자세히 쓸 힘이 없다. 그것은 아직도 내 언어의 힘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살의 아날로그는 언어와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언어의 반대말은 ‘살’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모르기는 해도 살 역시 악기나 연장의 작동원리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두려운 것은 이 ‘살’이 타인의 ‘살’과의 관계속에서 작동한다는 점이다. 그 대목을 나는 내가 힘이 있을 때 한번 써볼 생각이다. 그러나 쓰지 못하면 또 어떠랴. 살은 언어의 영역이 아닌 것을.
나는 손의 힘으로 살아야 할 터인데, 손은 자꾸만 남의 손을 잡으려 한다.
■ 손 2
몸에 대한 이제마(李濟馬 1837~1900)의 글은 형이상학적인지 과학인지 구별하기 힘들다. 그의 모호성과 총체성 때문에 그의 글은 무시되기도 하고 신비화되기도 한다.
머리에는 독단으로 행하는 마음이 있고, 어깨에는 사치한 마음이 있고, 허리에는 나태한 마음이 있고, 엉덩이에는 욕심이 있다. (…)
턱에는 남을 깔보는 마음이 있고 가슴에는 우쭐대는 마음이 있고 배꼽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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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대망상이 있고 뱃속에는 큰소리치려는 마음이 있다. (…)
슬픔과 성냄은 서로 어우러지고, 기쁨과 즐거움은 서로 돕는다. (…) 이렇게 동(動)하는 것은 칼로 장을 베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것은 죽고 사는 일에 관계된 것이니 몰라서는 안 된다. <동의 수세보원>
의학자나 철학자가 아니라 한 생활인으로서 이제마의 글을 읽을 때 그의 글 속에서 몸과 마음의 구획은 허물어진다.
손은 세상과 타인을 움켜잡고 쓰다듬고 깨우고 재우고 변형시킨다. 손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육신이다. 일본 음식점 조리사들이 생선의 각을 뜰 때, 그의 칼은 생선의 해부학적 구조에 밀착되어 있다. 칼은 살과 껍질 사이, 살과 뼈 사이를 바람처럼 넘나들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자연에는 직선이란 없다. 칼은 직선이고, 손으로 칼을 쥔 자의 관념 속에서 자른다는 행위는 직선으로 미리 자리잡고 있기가 십상이다. 그러나 그의 손은 관념 속의 직선을 버리고 재료의 구체성을 따라간다. 그의 손은 관념 속의 직선을 버리고 재료의 구체성을 따라간다. 그의 손은 대결 구도를 이루지 않는다. 그의 손은 재료의 미세한 결과 흐름과 성질에 순응한다.
글을 쓰면서, 연필을 쥔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는 일은 답답하다. 글을 쓸 때, 손은 말을 만지지도 못하고 세상을 만지지도 못한다. 손은 다만 연필을 쥘 수 있을 뿐이다. 글을 쓸 때, 가엾은 손은 만질 수 없는 말들을 불러내서 만질 수 없는 세상을 만지려 한다. 세상은 결국 만져지지 않고, 말과 세상 사이에서 연필을 쥔 손은 무참하다.
이 무참한 손에는 신석기의 추억이 여전히 살아 있다. 돌칼을 쥔 신석기의 사내는 들짐승과 싸울 때 손에 쥔 돌칼을 놓치지 않으려고 돌칼의 손잡이 부분을 잘록하게 갈아 놓았다. 먹이들이 멀리 숨어버린 날들의 추위와 주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은 칼로부터 소외되지 않았다.
모든 연장은 손의 연장(延長)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난다. 연장은 손의 수많은 기능들을 세분해서 극대화한다. 손은 연장을 통해서 세상으로 나아간다. 모든 무기와 악기도 손과 몸의 연장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난다.
손에 연장을 쥐고 일을 해본지가 너무나도 오래되었다. 연장을 쓸 일은 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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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간다. 삶은 규격화되어가고 사물에 대해서 날(刀)의 힘을 작동시키는 기쁨도 점점 사라져간다.
슈퍼마켓의 생선이나 고기는 이미 칼질이 끝나 있고, 망가진 가전제품은 전문가가 아니면 손을 댈 수가 없다. 손은 점점 퇴화되어 가고 있고, 확인될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세상은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 삶은 다만 간접적으로 수용되는 정보일 뿐이다. 손은 이제 백수(白手)다. 이 백수가 되어버린 손에, 구석기의 그리움은 살아 있다.
■ 발 1
우리 집에는 두 살 난 진돗개 수놈이 살고 있다. 어께는 딱 벌어졌고 허리는 늘씬하고 아랫배는 잘록하다. 앞다리는 완강하고 뒷다리는 유연하다. 봄이 되면 매화가 피기도 전에 벌써 이 개는 털갈이를 한다. 묵은 털이 보푸라기처럼 빠져나가고 황금빛 새 털이 새싹처럼 돌아온다. 개의 몸속에 저렇게 찬란하게 반짝이는 황금빛이 숨어 있었다니!
떨어져 나온 털은 솜덩어리처럼 뭉쳐서 마당을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작년에 우리 마을 까치가 버리고 떠난 빈 둥우리 한 개가 나무에서 떨어졌다. 둥우리를 주워다가 그 안쪽을 들여다보니까 온통 우리 집 개털로 꾸며져 있었다. 나는 개털을 보면 우리 집 개털인지 딴 집 개털인지 다 안다.
봄이 되면 우리 동네 까치들은 일제히 새 둥우리를 짓기 시작했다. 쓰던 집을 보수공사하는 놈들도 있다. 그래서 온 동네 까치란 까치는 죄다 우리집 마당으로 와서 개털을 물어간다.
경북 영동의 소백산맥 속에서 자전거를 타고 놀다가 진짜로 개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민주지산이 가까운 도마령 아래 시골마을의 포수 홍민표씨(36세)이다.
그는 사냥을 생계의 일부로 삼는 직업 포수다. 그는 사냥 나갈 때 개 다섯 마리를 데리고 나간다. 이 개는 빛나는 혈통을 자랑하는 사냥개가 아니다. 모두 그가 길들인 잡종견들이다. 그는 자신이 “개를 관리하기는 하지만, 개를 길들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개가 새끼를 낳으면, 이 새끼는 주인이 기르는 것이 아니라 어미가 기른다. 사냥하는 기술과 근성도 모두 어미개가 가르친다. 강아지 때부터 사냥 갈 때 데리고 나가면 이 강아지는 눈덮힌 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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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어미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여겨보고 흉내 내면서 저절로 사냥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제 어미한테서 사냥을 배운 개들이 사람한테 배운 개보다 훨씬 더 민첩하고 근성이 질기다”고 홍민표씨는 말했다.
개들이 오판을 해서 하루종일 헛고생을 할 때도 있다. 노루가 동쪽에 있는데 개들이 서쪽으로 가서 개 뒤를 따라가는 주인은 하루를 공치는 것이다. 홍씨는 그럴 때도 개를 나무라거나 때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개를 때리면 때려도 말 안 듣는 개가 된다”고 그는 말했다. 더구나 새끼들이 보는 앞에서 어미개를 때리면 어미의 권위가 무너져서 새끼들을 사냥개로 길러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산속에서는 사람도 오판할 수가 있고 개도 오판할 수가 있으므로 서로의 오판을 긍정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포수가 꿩을 쏘면 개들은 사냥감을 향해 달려간다. 이때 꿩이 총에 맞지 않았으면 개들은 빈손으로 돌아온다. 빈손으로 돌아온 개들도 쓰다듬어주고 격려해야만, 명중되지 않는 총소리에도 달려나가는 개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개와 사람 사이에도 지켜야 할 신의와 염치와 범절이 있는 것이다. 사람이 개를 마구 대하면 개도 사람을 마구 대한다.
홍씨네 사냥개 발바닥에는 폭신폭신한 고무 같은 쿠션이 붙어 있다. 우리집 진돗개 발바닥과 똑같다. 이 쿠션이 있어서 개들은 겨울에도 발 시려하지 않고 눈 속을 뛰어 다닐 수 있다. 그 쿠션에는 땅 위를 돌아다닌 생애의 고단한 자취가 굳은살로 박여 있었다. 개발바닥의 굳은살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내 발바닥의 굳은살을 만져보았다. 땅 위를 돌아다닌 생애의 고단한 자취가 거기에 굳은살로 박여 있었다.
■ 발 2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는 인간의 몸은 아름답다. 이 장치는 걸어다니는 인간의 발바닥에 바퀴를 달아준다. 바퀴가 돋은 발바닥으로 땅바닥을 밀어서 앞으로 나아갈 때. 인간의 몸통 전체는 좌우로 흔들린다. 이때 상체의 흔들림은 땅바닥을 미는 다리의 동작을 인도하면서 수용한다.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을 앞에서 관찰하면 그들이 나아갈 때 허공을 휘저으며 흔들리는 두 팔은 직립보행 이전의 아득한 원시의 추억을 실현하고 있다. 네 발로 땅 위를 기어다닐 때 앞다리와 뒷다리가 동시에 빚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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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율동과 리듬은 확실히 저러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들을 뒤에서 관찰하면, 그들의 허리, 엉덩이, 다리는 ‘미끄러진다’는 동작 속에서 유연하게 통합된다. 그것은 살아서 미끄러지고 살아서 땅에 저항하고 저항하면서 기뻐하는 엉덩이며 허리이다.
인라인스케이트의 바퀴는 자동차나 자전거의 바퀴와는 비교할 수 없이 원시적이다. 이 바퀴에는 엔진의 힘이 걸려 있지 않고, 힘을 증폭시키거나 분산시키는 기어 또는 트랜스미션 같은 장치가 연결되어 있지 않다. 이 바퀴는 바퀴 그 자체일 뿐이다. 바퀴의 발달사 맨 첫 장에 나오는 둥근 통나무와 같다.
스케이트보드나 ‘싱싱이’(한 발을 보드에 대고 다른 한 발로는 땅을 밀면서 나아가는 탈 것)도 바퀴가 달려 있지만, 이 바퀴는 인간의 발바닥에 직접 붙는 바퀴는 아니다. 인라인스케이트의 바퀴는 몸의 일부가 되어 인간의 걸음을 율동으로 변형시켜준다. 그 변형의 완성은 ‘미끄러짐’이다. 인라인스케이트는 아득한 과거와 아득한 미래를 종합하는 바퀴이며, 가장 원시적이고 가장 첨단적인 바퀴이다.
나는 얼마 전 인라인스케이트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아직도 가랑이가 쩍 벌어지면 수습하지 못하고 주저앉는다. 그래서 내가 타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타는 모습을 보는 걸 더 좋아한다. 그리고 생생한 아이들이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내달리는 모습은 살아 있는 것의 힘과 기쁨을 느끼게 한다.
나는 이번 여름에 기어이 이것을 몸에 착 붙도록 익혀서 소슬한 바람 부는 가을에 바람처럼 이 땅의 표면 위를 미끄러지면서 놀리라.
■ 평발
아들아, 새벽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고 전화 한 번 없는 너를 기다리며 나는 지금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과 분노로 이 글을 쓴다. 이 짧은 글을 마치기 전에 대문에 벨소리가 나고 네가 돌아오기를 나는 바란다. 하루종일 집안일에 시달린 너의 어머니도 아직 잠들지 못하고 있다.
너는 재미도 없고 신명이 날 리도 없는 국어·영어·수학에 주눅들려 노예만도 못한 고등학교 시절과 재수시절을 거쳐서 겨우 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너는 징병 신체검사에서 현역복무 판정을 받았고 이제 입영 명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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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있다.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이나 국회의원, 장관, 그리고 온갖 돈 많고 권세 높은 댁 도련님들이 무슨 사유에서인지 관행적으로 병역을 면제받아왔다는 신문기사를 매일같이 눈독들여 읽고 있는 너의 눈치를 보면서, 사실 나는 네가 그 문제를 나에게 묻지 않기를 바랐다. 아마도 그 참담함은 이 나라의 무수한 힘없는 아버지들의 참담함이었을 터이다.
내가 아들인 너의 눈치를 보면서 전전긍긍하던 어느 날, 너는 결국 너의 그 별것도 아닌 평발 증세를 어머니께 강조하면서 재검받을 방법을 찾아달라고 말했다. 나와 너의 어머니는 다만 무력하게 한숨을 쉴 뿐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가 없었다.
이 나라의 어느 아버지가 징집을 앞 둔 아들에게 이 사태를 납득시킬 수 있겠는가. 병역은 남자로 태어난 국민의 가장 신성하고 도덕적인 의무라고 말한들 이미 더렵혀지고 허물어진 신성 앞에서 그 말이 무슨 씨가 먹힐 것인가.
너에게 할 말은 아니다만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면서 나는 너를 기르던 세월 속에서 내가 치러야 했던 가혹한 노동과 날이 밝도록 일해야 했던 수많은 밤의 고난을 생각했다. 세금을 원천징수 당하고, 34개월의 병역을 치르고, 예비군·민방위 훈련에 참가하고, 교통규칙을 지키고, 전기를 절약하고 쓰레기를 줄이고…… 시간외 노동을 밥먹듯이 하면서도 나라가 시키는 대로 끝까지 머리 숙여 모든 일을 다 해온 세월은, 지금 견딜 수 없이 허망하다.
나라를 지키는 일은, 아버지 세대가 늙으면 아들세대가 물려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 사인(私人)인 아버지가 사인인 아들에게 넘겨주는 의무가 아니다. 그것은 공적(公的) 아버지와 국가와 국민의 이름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 너희들이 그 울분에 찬 새벽 술자리에 공사 간에 어느 아비가 끼어들 수 있겠느냐. 아들아, 나는 겨우 이렇게 말하려 한다.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 못난 나라의 못남 속에서 결국 살아내야 한다는 운명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나라의 쪽박을 깨지 않는 일이라고, 너의 의무는 몇몇 비굴한 이탈자들에 의하여 신성이 모독되었지만, 송두리째 부정당한 것은 아니라고.
너의 어머니에게 다시는 너의 평발을 내밀지 말아라. 아프고 괴롭지만,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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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의 더 큰 운명을 긍정하는 사내가 되거라. 네가 긍정해야 할 나라의 운명은 너와 동년배인 동족 청년과 대치하는 전선으로 가야 하는 일이다. 가서, 대통령보다도 국회의원보다도, 그리고 애국을 말하기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보다도 더 진실한 병장이 되어라.
4부 길
■ 길
길은 생로병사의 모습을 닮아 있다. 진행중인 한 시점이 모든 과정에 닿아 있고, 태어남 안에 이미 죽음과 병듦이 포함되어 있다. 길은 이곳과 저곳을 잇는 통로일 뿐 아니라 여기서부터 저기까지의 모든 구부러짐과 풍경을 거느린다. 길은 명사라기보다는 동사에 가깝다. 소백산맥을 넘어가는 문경새재는 산맥의 모습을 닮아 있고, 섬진강 하류를 따라가는 19번 국도는 물을 닮아 있으며, 구부러진 논두렁길이나, 밭두렁길은 그 흙에 코를 박고 일하는 인간의 노동을 닮아 있다.
길은 산하의 가장 낮고 유순한 지점들만을 골라서 뻗어 나간다. 길은 인간의 자취들 중에서 자연에 가장 가깝다. 길은 자연의 가파른 위엄을 피해간다. 그것이 길의 원리이고, 행(行)함의 원리이다. 산맥을 넘어가는 등산로나 강을 건너가는 나루터가 다 이와 같다.
우리 국토에서 가장 험하고 고달픈 길은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봉수로일 것이다. 이 길은 사람이 다리로 걸어다니는 길이 아니고 육안에서 육안으로 이어지는 ‘눈의 길’이다. 북쪽 국경과 남쪽 바다의 위난의 조짐들이 모두 이 ‘눈의 길’을 따라서 서울 남산으로 모여든다.
봉수대는 가장 높은 곳에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에서 가깝고, 인접 봉수대와 교신이 편리한 야트막한 봉우리에 자리잡는다. 낮게, 멀리 그리고 바르게 보이는 곳이 봉수의 명당이다. 그래서 봉수로의 원리도 육로의 원리와 다르지 않다. 나는 대동여지도의 봉수로를 들여다 볼 때마다 인간이 그 땅에 발붙이고 살아남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바쳐야 하는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침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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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말부터 죽령, 이화령, 대관령에 터널이 뚫렸다. 그리고 더 많은 고개들이 이제 밑창이 뚫어질 판이다. ‘령’의 존엄은 이제 사라져 간다. 자동차들은 고갯마루까지 올라오지 않고 그 아래쪽 터널을 지나서 삽시간에 ‘령’을 통과해버린다. 고갯길 구간의 주유소, 휴게소, 식당, 노점상 들은 모두 문을 닫고 떠났다. 고갯마루에서 한숨 돌리며 우동이나 찰옥수수를 사먹던 휴게소는 이제 폐허로 변했다. 올 여름에도 수백만 인파가 이 터널을 따라서 산맥의 몸통 속을 지나 피서지로 향했다. 그리고 그 터널 위쪽 고갯마루는 인기척 없는 적막강산이 되었다.
차량이 붐비던 대관령구간에는 이제는 ‘대관령 옛길’이라는 표지판이 붙었다. ‘대관령 옛길’에는 인적이 없다. 그 ‘옛길’은 모든 길의 풍광과 구부러짐을 그대로 거느리고 빈 산맥 속으로 뻗어 있었고, 자동차들은 그 아래쪽 터널 속으로 몰려 들어갔다. 이곳과 저곳만이 있고 그 사이의 과정들이 이제는 모두 사라졌다. 사람이 길을 버리니, 길이 또한 사람을 버리는 것이어서, 옛길은 이제 적막하고, 새길은 또 옛길이 되어 간다.
■ 고향 1
지난여름은 무더웠다. 여름의 힘센 햇볕이 산과 들에 깊이 스며서 나무와 곡식을 자라게 했다. 나는 폭양 속에서 자전거를 타고 여러 고장을 여행했다. 가다가 너무 덥고 지치면 개울물에 미역을 감으면서 나아갔다. 시골 농가나 마을회관 마루에서 잠드는 저녁의 잠은 곤하고 깊었다. 그 여행길에서 나는 여러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여러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짧은 글은 2002년 여름에 내가 만난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다.
<고향의 그림자>
만경강은 아직도 자유파행(自由跛行 절뚝거리며 걸음, 일이나 계획 따위가 순조롭지 못하고 이상하게 진행됨)하는 강이다. 강은 댐이나 제방으로 막히지 않아서 아직도 넓은 들을 이리저리 굽이치면서 흐른다. 만경강은 유역을 넓게 적시면서 아득한 갯벌을 펼친다. 이 갯벌은 가을이면 오스트레일리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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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시베리아로 날아가는 도요새들의 중간 기착지이고, 여기서 오랜 세월을 염전에 소금을 일구어 살아온 사람들의 교향이다.
새만금의 물막이 공사가 끝나면 갯벌이 모두 사라져서 소금 일을 하던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염전 일은 힘든 노동이다. 일 년에 여덟 달을 일한다. 봄부터 가을까지, 폭양 속에서 바닷물을 가두고 빼고 저녁이면 염전 바닥에 눈처럼 내려앉은 소금을 긁어모아서 창고로 나른다. 비가 오면 밤에도 염전으로 뛰어나와 소금물을 빼서 물창고에 가둔다.
한평생 염전에서 일해온 만경강 하구 마을의 전철수 씨는 “한여름 일하고 나면 체중이 10킬로그램씩 빠지고, 겨울에는 다시 살이 오른다”고 말했다. 그의 몸은 한평생 여름 햇볕과 소금에 절여져서 가까이 가면 햇볕 냄새가 난다. 살갗 밑에 햇볕이 늘 쌓여 있다.
조개껍데기에 파도의 무늬가 찍히듯이, 염전 바닥 소금 위에는 바람의 무늬가 찍힌다. 그 무늬들이 전철수씨의 얼굴과 손등의 주름살에도 찍혀있다. 이제 염전이 끝장나면, 그가 어디로 갈지는 그 자신도 알지 못한다. 철야공사가 진행되는 방조제 앞에서 그의 고향은 위태로웠다. 그가 어느 객지로 흘러가든, 그의 마음속에서 고향의 무늬는 점점 더 깊게 각인될 것이었다. 포클레인과 트럭들이 하루종일 방조제 공사장을 드나들었다.
<남은 사람들>
전남 장흥군 부산면은 탐진강의 맑은 물줄기가 굽이굽이 감아나가던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집집마다 야트막한 돌담을 쌓았고, 돌담 밑으로 시냇물이 흘렀다. 탐진댐이 들어서면서 일곱 개 마을이 물에 잠기게 되었다. 탐진댐은 내년부터 담수가 시작된다. 오래 살던 사람들은 모두 흩어졌다.
지천리에는 일흔 살이 넘은 마덕림 할머니 혼자 남았다. 댐의 물막이 공사는 할머니 집 마당 바로 앞까지 치받고 올라왔다. 할머니는 “죽어도 여기서 죽겠다. 이놈들아, 나를 들것에 실어서 내가라”고 말했다.
할머니가 시집올 때 심었던 어린 배나무가 이제는 온 마당을 뒤덮고 있다. 할머니의 손때 묻은 항아리와 옹기단지들이 이제는 살림이 줄어들어서 천덕꾸러기로 나뒹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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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떠났는데, 왜 혼자서 안 떠나시나요?”라고 묻자 할머니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왜 안 떠나느냐고? 내 땅이니까 안 떠난다. 알겠냐?”
마을에 물이 차오르면 할머니도 결국은 별 수 없이 마을을 떠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 마지막날까지 평상심으로 살아간다. 위태로운 고향의 마지막 나날들이 할머니에게는 옛날과 조금도 다름없는 평화로운 날들이다. 할머니의 고향은 더 이상 미래의 고향이 아니다. 할머니의 고향은 바스라져가는 고향이다. 그러나 할머니의 하루하루는 수몰선 앞에서 담담하다.
강원도 사북에서 만난 늙은 광부 김모씨(당시 64세)는 중증 진폐환자다. 김씨는 산재병원에 2년째 입원중이다. 김씨는 30년이 넘게 막장에서 일했다. 김씨의 고향은 사북이 아니라 대전이다. 30여 년 전에, 배고픈 젊은이들이 고향을 버리고 탄광지대로 몰려와 광부가 되었다. 그들은 객지에서 죽음에 죽음을 잇대어가면서 객지를 고향으로 만들어 왔다.
김씨의 진폐는 치료될 수 있는 병이 아니다. 김씨 자신도 알고 의사도 알고 간호사도 알고 있다. 치료라기보다는 죽음에 이르는 날들을 요양시키고 관리해 주는 것이 병원의 일이다.
이 산재 병원에 입원한 늙은 진폐환자들 중에는 담배를 피우는 환자들이 많다. 회복의 희망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담배를 피운다. 휴게실에는 담배 연기가 자욱하다. 의사와 간호사들도 환자들이 담배 피우는 줄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것 같았다. 그들에게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희망이나 권위가 이 세상에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폐허가 된 탄광촌에 카지노가 들어섰다. 대박의 꿈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로 카지노는 연일 불야성이다. 마을에는 자동차나 귀금속 장신구를 담보로 금전을 빌려주는 전당포들이 들어섰다. 주말이면 호텔에는 남는 객실이 없고 마을 여관 숙박비는 두 배쯤 뛴다.
김선씨(가명)는 이 늙고 병든 퇴직 광부의 딸이다. 김선씨는 카지노에서 딜러로 일한다. 김선씨 뿐 아니라 이 카지노에서 일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이 지방 광부의 자녀들이다. 젊은이들은 카지노, 호텔로 변해버린 고향을 조금도 어색해 하지 않았다. 김선씨는 “옛 모습이나 지금의 모습이나 양쪽 다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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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늙은 광부가 진폐로 쓰러져 가고 인간의 삶은 이렇게 끝없이 이어져 가고 있었다.
저무는 가을 논길에 경운기 한 대 지나간다. 늙은 남편이 운전을 하고, 수건을 머리에 쓴 늙은 아내는 적재함에 타고 간다. 늙은 부부는 하루종일 같은 밭에서 일해도 말 한마디 주고받지 않는다. 날이 저물면 누가 먼저 가자고 하지 않아도 서로를 보면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안다. 저문 논길에 경운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때도 늙은 부부는 아무 말이 없었다.
■ 고향 2
나의 이른바 고향은 서울 사대문 안이다. 사대문 안에서도 청계천을 기준으로 남촌과 북촌을 갈랐는데, 내 본적지는 대궐 근처인 북촌이었다. 북촌에도 나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넘쳐났지만 북촌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세계와 문명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에 넘쳐 있었고 한양 성곽 밖에서 사는 사람들을 다 싸잡아서 ‘문밖 것들’이라고 통칭했다.
내 어머니는 서울 토박이 여자였다. 어머니는 가난했다. 사실 나는 어머니가 그 결핍과 적막을 어찌 다 감당해내면서 자식들을 기른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어머니는 가난했지만 경우바르고 깔끔한 여자였다. 어머니는 자, 됫박, 저울 같은 도량형기를 존중하고 신성시했다. 쌀 됫박 밑바닥에 양초를 발라서 양을 속이는 쌀장사와 저울 눈금을 속이는 푸줏간을 어머니는 증오했고,동네 여자들과 합세해서 불매운동을 벌였다. 두부 한 모의 규격이 일정치 않아서, 콩값이 오르면 두부모가 작아졌는데, 어머니는 가게에서 두부모의 가로 세로 높이를 따졌다. 내가 심부름으로 석유를 사러 갈 때도 어머니는 주전자나 양철통을 들고 가지 못하게 했고 반드시 한 되들이 정종 됫병을 들려 보냈다. 정종 병은 투명해서 속이 들여다보였고 또 들이가 정해진 병이어서 석유 가게에서 양을 속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거칠고 사납고 과장된 말을 무척 싫어하셨다.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단정하고 순한 서울말을 어머니는 좋아하셨다. 내가 문밖 아이들과 놀다 돌아오면 어머니는 “너 계들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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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릇 따라하지 마, 왜가리 짖어대는 것처럼 말하지 마, 반듯하고 조용히 말해라. 조용히 말해야 남이 듣는다”고 타이르셨다. 어머니는 종결 어미가 불분명한 말을 싫어하셨고 늘 대하는 이웃집 아낙네들에게도 말꼬리가 분명한 존댓말을 쓰셨다. 어머니는 이제 너무 늙고 또 아파서, 당신의 고운 말씨를 모두 잃어버리셨고 한 되와 두 되를 구분하지 못하시지만, 내 가난한 어머니의 고향은 향토가 아니라 척도와 언어였던 모양이다.
내 소년 시절에는 한강에 다리가 두 개 밖에 없었다. 하나는 기차가 다니는 한강철교였고, 또 하나는 자동차, 보행자, 우마차, 자전거가 다니는 한강인도교였다.
지금 한강 다리는 26개이다. 명절이 되면 고향을 가는 사람들은 26개의 다리로 한강을 건너서 가고 또 가고 기어이 간다. 기어이 갔다가 기어이 돌아온다. 고향으로 가는 사람들이 서울을 다 빠져나가면, 내 고향 서울 사대문 안은 문득 넓고 적막하다. 명절이 되어도 갈 곳이 없는 나는 텅 빈 내 고향의 거리를 혼자서 어슬렁거린다. 거기는 이제 누구의 고향도 아니고, 고향으로 갔던 사람들이 다들 돌아와도 그 또한 아무의 고향도 아니다. 거기는 만인의 타향이다.
나는 10년 넘게 일산에 살고 있다. 사대문 안에서 셋방, 시민아파트를 전전하다가 불광동, 연신내를 거쳐서 일산까지 내려왔다.
일산에 와보니 이 또한 아무의 고향도 아니다. 여기는 신도시다.
어느 날 저녁 길거리 카페에서 혼자 술을 마시면서 창밖을 내다보니까 핸드마이크를 어깨에 멘 기독교인이 초저녁 러브호텔 앞에 와서 마이크로 외쳤다. “회개하라. 종말이 가까웠다.”
나는 혼자서 웃었다. 나에게는 혼자서 웃어야 할 일이 많다. 일산으로 이사와서 나는 경기도 일산 사람이 되려고 도서관에 가서 고양과 일산에 관한 역사책, 지리지, 사료집, 고고학적 발굴 보고서, 민속자료 연구서, 무속자료 들을 읽었다. 책을 들고 집으로 돌아온 날 저녁에 나는 또 그 러브호텔의 거리에 앉아서 술을 마시곤 했다.
일산은 넓은 들이다. 곡릉천, 창릉천 두 개울이 흘러서 한강 하구에 닿는데, 신석기 유물들은 대부분 이 두 하천 유역에서 출토되었다니, 이 개울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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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수만 년 터전임을 알 수 있다. 밤이면 교회의 네온사인 십자가들과 러브호텔의 전광판이 뒤섞여 돌아가며 불야성을 이루는 마을 이름들이 <삼국사기> 지리지에 그대로 나온다.
■ 고향 3
한 세대 전까지 서울 사대문 안에서 세거(世居)했던 토박이 어른들의 서울 사랑은 끔찍했다. 그분들은 북한산과 한강으로 기본 구도를 삼는 서울의 웅장한 산하와 그 구석구석의 오밀 조밀한 자연 풍광을 사랑했을 뿐 아니라, 서울의 서울다운 품성과 삶의 질감을 자랑으로 여겼다. 지방 사람들이 ‘서울 깍쟁이’라고 경원했던 서울의 깐깐한 품성이 그분들의 마음바탕이었다. 대도회지의 삶이 요구하는 엄격한 계약정신과 경우바른 시민정신, 그리고 반듯한 준법정신이 그분들의 일상의 생활 감정이었다.
서울 토박이어른들은 일상의 언어에 대해서 민감하고도 섬세하였다. 그분들의 말씨는 언제나 조용조용했다. 과장이나 허황된 비유를 쓰지 않았고, 말투에 경음이나 격음이 섞여들지 않았다. 그분들은 의견이나 소망을 진술하는 언어와 사실을 진술하는 언어를 구별할 줄 알았고, 자신의 직접체험을 말하는 언어와 남으로부터 전해 들은 말을 뒤섞지 않았다. 편차 없는 의사소통이야말로 도회지적 삶의 기본이라는 것을 그분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분들의 일상 언어는 저널리스틱한 언어였다. 같은 서울 안에도 사대문 안과 밖, 그리고 사대문 안에서도 대궐 언저리의 북촌과 남산 둘레의 남촌 사이에도 거주지에 바탕한 정서적 우월감의 다툼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다툼을 바탕으로 정치사회적인 패거리를 만들지는 않았다.
이제, 서울과 서울 사람들의 존재성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 희미하다. 서울이 고향인 사람들은 이 희미한 존재성을 서울의 커다란 합리성이며 보편성이라고 여긴다. 그런 자기위안 속에는 이미 회복할 수 없이 망가져버린 고향에 대한 슬픔이 깔려 있다.
허네 못허네 말도 많았지만, 중앙청을 헐어낸 것은 아무래도 잘한 일이다. 중앙청이 사라진 자리에서, 서울의 심층 구조는 완연히 살아난다. 세종로 네거리에서 바라보면 광화문 -경복궁 - 북악산 - 북한산을 축으로 하는 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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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구도 속에서 보다 작은 존재는 보다 큰 존재 속에 안겨 있다. 그 거대한 구도 속에서 자연과 인위는 친화하고 평화는 아늑하되 나약하지 않으며 기상은 우뚝하되 거칠지 않다. 이 구도는 대도시 서울의 존재의 기본축이다. 거기에는 이 산하에서 영위되는 삶의 영원성이 담겨 있다.
이성계, 정도전 같은 조선 개국의 엘리트들이 설정한 이 기본축은 서울의 과거와 미래를 관통한다.
서울이 아무리 망가져도, 산하가 남아 있는 한 이 정체성은 살아남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
북한산과 한강 사이의 공간에 서울다운 합리성과 보편성을 건설하고, 서울다운 삶의 질감을 이루어내는 일이 서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길이다. 북한산과 한강은 크고 또 넓어서 능히 만인의 고향이 될 만하다.
다들 서울로 모여들어서, 출신지 지역별로 정치적 패거리 작당을 한다면, 서울은 끝끝내 만인의 타향일 뿐이다. 한강은, 아직은 타향을 흐르는 강이다.
■ 쇠
영일만의 새벽은 빛으로 가득찬다.
영일만에서는 시간과 바람이 맑다. 새벽에, 먼 바다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빛들은 이 바다와 육지를 가득 채우고, 형산강 물줄기를 타고 내륙으로 퍼져간다.
서기 158년 신라 임금은 이 바닷가에서 인간세상으로 빛을 맞아들이는 제사를 지냈다. 영일만은 빛이 닿는 포구였다. 그래서 이 바다의 이름은 지금도 영일(迎日 맞이할 영, 해 일)이다.
지금 영일만의 새벽빛들은 포항제철소의 굴뚝에 먼저 와 닿는다. 포항 제철소의 용광로와 공장들은 영일만 해안선을 따라 숲처럼 울창하게 들어서 있다.
2003년 1월 중순 포항제철소를 견학했다. 오랫동안 기자 생활을 했지만 포항제철소는 처음이었다. 포스코 직원은 나의 제철소 방문이 처음이라는 사실에 놀랐고 나는 제철소의 규모와 적막에 놀랐다. 작은 도시 만큼이나 거대한 제철소 공장 단지 안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종업원들이 용광로 주변이나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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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 라인에 도열해서 비지땀을 흘리며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작업공정은 사무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직원들에 의해 원격조종 되었고, 쇳물이 흐르는 공장 안에서는 사람 구경하기가 어려웠다.
돌에 온도를 가하면 돌 속의 쇠는 분리돼 흘러나온다. 그래서 용광로는 여러 원소들을 그 안에 가두고 뒤섞어서 새로운 문명의 소재를 빚어내는 자궁처럼 보인다. 도지기를 굽는 가마는 불의 힘으로 물렁물렁한 흙을 굳게 하는데, 포스코의 용광로는 딱딱한 쇠를 물처럼 흐르게 한다. 도자기 가마 안에서 흙에 고온을 가하면, 수억 년 동안 흙속에 숨어 있던 색깔이 인간 앞에 드러난다. 이것이 고려청자나 조선백자, 또는 막사발의 색깔이다.
그러나 포스코 용광로 안에서 돌은 분해되면서 재로 변한다. 그러니 불의 작용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불이 돌을 녹여서 쇳물을 뽑아내고, 여기서 다시 불이 빠져나가야 쇳물은 쇠가 된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쇠는 그 안에 불의 자취를 지니고 있다. 철제 연장은 신석기 연장이나 청동기 연장보다 발전한 문명이지만 그 안에 불과 바람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돌보다 시원적(始原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비밀은 용광로 안에서 이루어지는데, 용광로의 안쪽을 이루는 내화벽돌은 흙으로 빚어진다. 흙만이 불을 견디고, 흙만이 자궁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철제 마구나 갑옷을 만들던 가야 대장간이나 에밀레종을 만들던 신라 대장간의 작동원리도 포스코 용광로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가야의 대장장이에게 코크스는 없었다. 그러나 가야의 대장장이들도 더 높은 온도를 얻기 위해 성능 좋은 땔감을 찾아서 산속을 헤맸고, 좋은 땔감이 있는 곳으로 대장간을 옮겼다. 가야의 대장장이들도 풍구를 돌려서 화덕에 바람을 넣었으며, 단단하고 매끄러운 쇠를 얻기 위하여 아직 덜 굳은 시뻘건 쇳덩어리를 망치로 두들겼다.
그러니, 포스코의 첨단 컴퓨터 앞에 앉은 일류기술자들과 가야의 대장장이는, 내가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그들은 가장 근원적인 조건들을 끌어모아서 최첨단의 문명을 지향하는 인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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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 않는 모든 것들 위에서 변화를 추구할 때, 우리는 포스코의 용광로 같은 거대한 문명의 자궁을 건설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영일만의 빛이라고 믿는다. 신라 임금이 맞아들인 영일만의 빛은 인간의 내면에서 발원하고 있었다. 신라 임금은 변하지 않는 빛 속에서 새로운 빛을 찾아왔다.
합천의 산골 마을에는 지금도 가야시대의 제철소와 대장간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가야 고분은 온갖 철제 무기들의 박물관이다. 마구와 갑옷이 인간에 장착된 상태로 출토되기도 하고, 통 속에 든 화살이 통째로 나오기도 한 다. 쇠를 들고 싸웠던 가야 사람들은 죽어서도 쇠에 둘러싸여 있다. 쇠는 그들의 자부심이었고 미래를 건설하는 수단이었으며, 세계를 개조하려는 열망의 도구였다. 박물관에 가보면 신라는 금의 나라이고, 가야는 쇠의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이 생각은 잘못된 인상이다. 금은 쇠보다 보존성이 뛰어나서 썩지 않고 무덤 속 세월을 버티어 낸 것이고, 또 박물관 신라실이 번쩍이는 금붙이 중심으로 꾸며졌기 때문일 것이다. 신라나 가야나 모두 나라의 기본 토대는 금이 아니라 쇠였을 것이다.
쇠가 이룩한 토대 위에서야 비로소 금관과 금귀고리, 금 허리띠의 정교함이 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으로는 왕관과 장신구를 만들 수 있고 예술품을 만들 수는 있지만 전쟁을 수행할 수 없고, 황무지를 갈아서 농경지로 바꾸어 놓을 수 없다. 쇠는 전쟁을 수행할 수 있고, 땅을 경작지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쇠는 고대국가들에게 문명의 신바람을 안겨 주었다. 쇠는 전쟁을 전쟁답게 만들었고, 농업생산력을 높여주었다. 쇠는 정치적 토대를 이룩하지만 금은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
가야의 대장간에서는 쇠를 녹여 무기도 만들고 농기구도 만들었다. 무기를 만드는 대장장이가 농기구를 만드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쇠를 녹여서 끝을 뾰족하게 벼리면 창이 되고, 폭을 넓히면 호미가 된다. 무기와 농기구는 세계를 개조하려는 인간의 공통된 열망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다. 무기는 전쟁의 도구이고 농기구는 평화의 도구이다. 이 모순된 운명의 도구들은 같은 화덕에서 태어나고, 쇠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포스코 용광로는 세계를 개조하고 세계를 버티어 내려는 쇠의 꿈을 산업 사회의 일상 속으로 끌어들여 실현시켰다. 이것이 영일만의 새로운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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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는 이제 더 이상 전쟁과 농업의 기본 토대만은 아니다. 쇠는 생활의 일부이며 그 질김이고 표현이다. 철기시대는 계속 진행중이고, 철기 시대는 아직도 완상되지 않았다. 옛 신라가 빛을 받아들였던 바닷가에서 포스코는 계속되는 철기시대를 진행시키고 있다. 포항제철소 부두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기선들이 차례를 기다려서 쇠를 받아가고 있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쇠로 만든 연장들을 좋아했다. 해외여행을 할 때마다 그 지방 철물점에 들러서 마음에 드는 연장들을 사 가지고 왔다. 쇠붙이를 들고 오는 여행객을 김포공항 보안요원들은 면밀히 조사했다. 내가 모은 연장은 펜치, 망치, 대패, 톱, 니퍼, 스패너, 핀셋, 드라이버, 칼 같은 것들이었다. 한때는 이 연장들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여겨져서 그림이나 도자기처럼 벽에 꼭 걸어놓고 쳐다보고 좋아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가 아파서 치과에 갔다가 나는 그 철제 연장들을 보고 경악했다. 치과의사의 연장은 그야말로 쇠의 낙원이며 쇠의 절정이었다.
내가 아끼는 연장들의 날과 끝도 단단하고 날카롭다. 뽀족한 펜치의 끝은 민감하고 섬세하다. 쇠는 단단함으로써 부드럽고, 쇠의 날은 날카로움으로써 섬세하다. 쇠는 양극단의 모순을 함께 지향한다. 철기시대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영일만을 떠나 서울로 오단 날도 바닷가 제철소의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는 동해의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 가마
1993년 겨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한반도의 선사시대부터 원삼국시대에 이르는 토기들을 한 자리에 모아 기획전시회를 열었다. 그 전시회는 무척 재미있었고,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정치적 강역에 따른 유형구분보다는 시대 양식에 따른 유형구분이 덜 피상적이며, 그것보다는 개별적 물건의 표정을 깊이 들여다보는 편이 사물에 가까이 가려는 사람의 태도일 것이다. 굳이 정치적 강역에 따라 토기들을 유형화해서 말한다면, 고구려의 물건들은 실용성 그 자체를 당당하게 미화해 내고 있었고, 신라와 가야의 물건들은 제의적이고 주술적인 인간의 꿈이 물건의 선과 형에 투사되어 있으며, 백제의 물건들은 제의적인 면이 상당히 약화되고 실용성과 제의성 사이에 조화를 이루면서 삶에 대한 경건성을 여유속에 용해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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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앙박물관의 고대 토기 앞에서 머뭇거렸다. 이런 망설임을 스스로 위로하려고 백제 토기를 재현해 내고 있는 토기 가마를 찾아갔다. 충남 부여에있는 ‘백제요’의 가마였다. 거기서 나는 오랫동안 가마의 어두운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가마의 어둠은 물, 불, 바람 그리고 흙 같은 원소들이 서로 자연으로서의 성질들을 삼투시켜가며 그 삼투작용들이 모두 합쳐져서 하나의 새로운 인공 자연을 빚어내는 잉태의 공간이었다. 그 구조는 거대한 여성의 성기와도 같았다. 도공들은 가마에 불을 대는 행위를 ‘가마 익힌다’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그 말은 토기가 흙으로 빚어져서 세상에 태어나는 과정, 곧 토기와의 회임에서 출생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매우 적절히 표현함으로써 토기의 본질을 관통하고 있었다.
흙과 물을 반죽할 때, 그것들은 인간의 손금으로 스밀 듯이 인간의 살에 밀착한다. 반죽은 거의 인간의 살의 연장이다. 사람들은 마음속에 들어 있는 꿈과 아름다운 모양새를 그 반죽을 주물러 실현할 수 있다. 물레의 회전운동은 그 꿈의 실현을 구체적으로 공간화 시켜준다. 물은 흙의 물리적 성질을 변화시키고, 불은 물과 흙, 그 두 쪽을 모두 화학적으로 변화시킨다. 손으로 빚어진 반죽은 그릇이 모양을 갖추었으되, 아직은 그릇이 아니다. 그것은 그릇의 잠재력이며 그릇의 가능성이다.
그러나 불을 만나기 전의 반죽의 아름다움은 몽상 속의 아름다움일 뿐이다. 반죽의 아름다움은 흙의 깊은 안쪽에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가능성들의 아름다움이다. 불이 그 가능성을 발현시킨다. 빚어진 그릇이 구워질 때, 물은 흙을 떠난다.
하나의 토기가 태어날 때 그것들은 물과 불과 흙과 공기의 모든 원소를 편력한다. 그리고 그 하나의 토기는 그 어느 요소도 아닌 새로운 인공의 자연이다. 가마에 불이 꺼지고, 토기들이 쏟아져 나올 때, 완성된 토기는 저마다의 운명의 색깔로 반짝이거나 혹은 조용하다.
■ 까치
중국 여객기가 추락한 김해 돗대산의 현장에는 삶과 죽음이 뒤죽박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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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켜 있었다. 나는 죽음과 구별될 수 없는 일상의 삶에 대해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댈 수가 없었다. 어떠한 관찰자도 그 운명으로부터 예외일 수 없었다.
사흘 뒤에 서울로 돌아왔다. 비행기가 떨어진 김해공항에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다. 비행기가 이륙했을 때, 사고 현장인 신어산 일대가 내려다보였다. 산은 눈부신 신록으로 덮여 있었다.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비는 그치고 신록의 가로수들은 봄빛에 빛났다. 광화문 동십자각 쪽 담장가 높은 가로수 꼭대기에 지난해 여름에 까치가 살고 있었는데, 겨우내 보이지 않아서 둥지를 버리고 딴 곳으로 갔겠거니 했다. 아침 출근길에 버스 안에서 나무 꼭대기를 올려다보니 까치들은 여전히 그 둥지 주변에서 짖어대고 있었다. 나뭇가지를 물어다가 낡은 둥지를 고치고 있었다. 비 갠 날의 눈부신 나무 꼭대기에서, 제 입으로 물어온 건축 재료로 제 집을 짓는 까치는 여객기를 타고 대륙을 횡단하는 인간보다 복 받은 존재처럼 보였다.
까치 둥지는 무슨 공법으로 지었기에 그 높은 꼭대기에 끄떡없이 매달려 있는 것인가. 나는 물론 그 대답을 모른다. 조류학 책을 뒤져보니까, 새들의 둥지는 헐겁고 가벼워서 비바람에 저항하지 않고 나무와 함께 흔들리기 때문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또, 새들이 살고 있는 둥지는 끊임없이 조금씩 보수공사를 하기 때문에 비바람에 대해서 유연한 힘을 유지하지만, 새들이 버리고 떠난 둥지는 힘이 빠져서 비바람에 쉽게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고 적혀 있었다.
김해 사고 현장에서 삶과 죽음을 과학으로 설명할 길은 없어 보였다. 멀쩡히 걸어서 잔해 속을 헤집고 나온 사람 옆자리에서 또 어떤 사람은 불에 타서 재가 되었다. 삶과 죽음은 함께 비애로워 보였다. 다시 그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 왔을 때, 인간을 위로해 주는 것은 광화문 가로수 꼭대기 까치둥지였다. 인간의 비행기가 추락해도 까치둥지는 떨어지지 않았다.
■ 꽃
일년생 화초라도 몇 포기 마당에 심으려 동네 꽃가게에 갔다. 농협이 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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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대형 매장이다. 야생화는 한 포기에 5천 원씩이었고, 수입종이나 개량종은 2천 원씩이었다. 버려진 들판에 피어나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야생의 풀꽃들이 훨씬 더 비싸게 팔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버려진 것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배가 어느 정도 불러진 연후에야, 그리고 화려하고 요란한 것들을 싫증나도록 누린 연후에야, 그 초라한 것들의 아름다움이 비로소 보이게 되는 모양이다.
농협의 꽃 직판장은 꽃을 사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젊은 부부들은 어린 아이를 올려 앉힌 손수레를 밀고 다니면서 꽃을 고르고 있었다. 무슨 꽃을 살 것인지, 머리를 마주대고 소곤거리는 젊은 부부들의 모습은 꽃보다 아름다웠다.
아파트에서는 흙을 구할 길이 없다. 흙 한 줌을 구하려면 차를 몰고 멀리 교외로 나가야 한다. 농협 직판장에서는 꽃을 산 사람들에게 흙을 한 움큼씩 나누어주고 있었다. 꽃을 산 사람들은 화분에 넣을 흙 한 줌을 비닐봉지에 담아서 아파트로 돌아갔다.
꽃을 산 사람들은 제 손에 들린 꽃을 각별한 애정의 눈으로 들여다보면서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 인간들은 애처롭고도, 애처로운 만큼 아름다워 보였다. 꽃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마음은, 그야말로 들판에 피는 야생화처럼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고 때가 되면 무자비하게 짓밟힐 수 있다. 그리고 이 설명할 길 없는 비극 속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꽃을 아름답다고 느끼고, 많은 꽃들 중에서 제집 베란다의 꽃을 더욱 애지중지한다.
그날 하루 종일 마당을 파고 꽃을 심었다. 비료도 주고 물도 주었다. 저녁 무렵에 꽃들은 움츠러들면서 낯선 집에서의 첫날밤을 맞았다.
■ 잎
다시 맞는 봄에 새잎이 돋는다. 봄에는 몇 번의 봄이 더 남아 있는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봄에는 찰나의 덧없음에 미혹되는 한 미물로서 살아간다. 봄에는, 봄을 바라보는 일 이외에는 다른 짓을 할 시간이 없다. 지나가는 것들의 찬란함 앞에서 두 손을 늘 비어있다. 나는 봄마다 속수무책으로 멍하니 바빴고, 올봄에도 역시 그러하다. 혼자서 늙어가는 내 초로의 봄날에 자전거를 타고 섬진강 물가를 달릴 적에, 새잎 돋는 산들이 물에 비치어 자전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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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길을 달렸다. 아, 이 견디기 어려운 세상 속에는 또다른 세상이 있었구나! 이 별 볼 일 없는 생애는 어찌 그리도 고단했던가. 땅 위의 길과 하늘의 길이 결국은 닿아 있었구나. 봄의 섬진강은 그런 미혹들이 바람에 실려서 불어왔다.
꽃은 식물의 성적인 완성이며, 존재의 절정이다. 그래서 꽃은 스스로 자지러진다. 꽃에는 그리움이 없다. 꽃은 스스로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으면서, 그 꽃을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앞에 보이는 대상을 그리워하게 한다.
나뭇잎은 한 조각의 이파리로서 스스로 자족하기보다는 온 산을 뒤덮는 연두의 바다로서 흔들리고 반짝인다. 어린아이나 어린 강아지나 새로 돋아난 어린 잎은 신생의 빛으로 영롱하다. 어린 강아지의 빛과 어린 새잎의 빛이 닮아 있는 현상에서 생의 신비를 느낀다. 봄의 산에는 그 신생의 빛들이 골짜기와 능선마다 피어오르고, 그 빛들이 강물에 비친다.
봄산의 푸르름은 연두에서 초록으로 이르는 빛의 스펙트럼을 이룬다. 봄의 산은 파스텔이다. 빛과 색의 구획선은 서로 스민다.
자작나무숲에 내리는 봄비는 촐싹거리지만, 오리나무 숲에 내리는 봄비는 후두둑거린다. 잎의 크기와 억세기가 다르기 때문에 비를 맞는 소리도 다르다.
다른 모든 숲들이 여름의 강성한 초록으로 옮겨간 늦봄 무렵에 은사시나무 숲은 겨우 깨어난다. 갓 깨어난 은사시나무 숲은 희뿌연 연두의 그림자와도 같다. 자작나무숲의 향기는 비리고, 오리나무숲의 향기는 그윽하고, 은사시나무숲의 향기는 어린애가 토해낸 젖의 곰삭은 향기다. 신선한 요구르트 냄새와 비슷하다. 은사시나무 숲에 바람이 불 때, 이파리들은 바람의 방향에 따라 일제히 나부끼면서 뒤집힌다. 그래서 은사시나무숲의 빛과 색깔은 그 숲을 스치는 바람의 풍향에 따라서 바뀐다. 봄의 숲들은 이 모든 빛과 색과 냄새의 대오를 거느리면서 여름의 강성함을 향해 나아간다. 온 산의 엽록소는 일제히 깨어나서 아우성친다.
■ 바람
가을에는 바람이 소리가 구석구석 들린다. 귀가 밝아지기 때문이 아니라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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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이 맑아지기 때문이다. 바람이 숲을 흔들 때, 소리를 내고 있는 쪽이 바람인지 숲인지 분별하기 어렵다. 이런 분별은 대체로 무가치하다. 그것을 굳이 분별하지 않은 채로, 사람들은 바람이 숲을 흔드는 소리를 바람소리라고 한다. 바람 소리는 바람의 소리가 아니라, 바람이 세상을 스치는 소리다.
맑은 가을날, 소리를 낼 수 없는 이 세상의 사물들이 바람에 스치어 소리를 낸다. 그 난해한 소리를 해독하려는 허영심이 나에게는 있다. 습기가 빠진 바람은 가볍게 바스락거리고 그 마른 바람이 몰려가면서 세상을 스치는 소리는 투명하다.
태풍이 몰고 오는 여름의 바람은 강과 산맥을 휩쓸고 가지만, 그 위력적인 바람은 세상의 깊이를 드러내지 못한다.
가을에는 오리나무숲을 흔드는 바람 소리와 자작나무숲을 흔드는 바람소리가 다르다. 오리나무숲의 바람은 거친 저음으로 폭포처럼 흘러가고 자작나무나 은수원사시나무 숲의 바람은 잘 정돈된 고음으로 흘러간다. 나뭇잎의 크기와 흔들림, 그리고 나뭇가지들이 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강도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여름바람에 끄달리는 숲은 고통 받는 짐승과 같다. 그러나 가을바람에 스치는 숲은 바람과 더불어 편안하게 풍화되어 간다. 메마른 가을의 억새숲을 스치는 바람 소리는 하얗게 바래서 자진하는 억새의 풍화를 완성한다. 누렇게 시든 옥수수밭을 스치는 가을바람 소리는 파도의 소리를 닮아 있다. 풍화란, 세상이 바람 쪽으로 이끌려가면서 닳고 또 무너지고 사위어 가는 모습이다. 이때의 바람은 시간의 본질이다. 가을에, 물기 빠진 나뭇잎들에는 백골과도 같은 잎맥이 드러난다. 잎맥은 식물의 삶의 통로이며 구조이다. 그 통로가 늙은이의 정맥처럼 돌출해서 바람에 스치운다.
겨울의 바람은 날카롭고 우뚝하다. 그 바람은 세한도의 화폭 속을 불어가는 바람이다. 겨울의 바람은 마른 나뭇가지들의 숲을 베고, 도시 빌딩 사이의 좁은 골목을 휘돌고 전깃줄을 울린다. 겨울의 바람은 사람을 낮게 움츠리게 하지만, 가을의 바람은 사람의 눈을 맑게 해서 세상을 보게끔 해준다.
바람 부는 가을 날 , 모든 잎맥이 바람에 스쳐서 떨릴 때, 나는 내 몸속의 바람을 가을의 바람에 포개며 스스로 풍화를 예비한다. 악기가 없더라도 바람에 내맡긴 내 몸이 이미 악기다. - 2015. 11. 24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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