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

보해성산 2016. 2. 4.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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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

- 파킨슨병을 앓으면서도 유쾌한 심리학자가 인생을 즐기는 법 -

■ 김혜남 정신분석 전문의

0 1959 서울 생

0 고려대 의대졸, 국립서울병원에서 12년 동안 정신분석 전문의

0 2006 한국정신분석학회 학술상

0 경희대 의대, 성균관 의대, 인제대 의대 외래교수, 서울의대 초빙교수

0 김혜남 신경정신과 원장

0 저서 :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 외 5권

0 2001년 43세 때 파킨슨 병 진단

0 처음에는 절망했으나, 그 이후 15년간 진료와 강의, 두 아들 양육, 다섯 권의 저술 등의 활동

■ prologue 내가 15년간 파킨슨병을 앓으며 깨달은 것들

일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고,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는 인생이라고, 그래서 무엇을 하든 겁부터 난다는 환자가 있었다. 그녀가 내게 물었다.

“제가 그 일을 하는 게 맞을까요? 했다가 후회하면 어떡하죠? 만약 일이 잘못되면요? 차라리 안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그녀의 간절한 표정을 뒤로하고 나는 말했다.

“제가 점쟁이도 아닌데 어떻게 알겠어요?”

“그건 알지만 그래도 조언은 해 주실 수는 있잖아요.”

나는 끝내 그녀가 원하는 조언을 해 주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고민을 끝까지 들어 주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어떤 선택을 하든 잘 헤쳐 나갈 테니 용기 내어 딱 한 발짝만 내디뎌 보라고 했다. 잘못된 길이라면 아예 내딛고 싶지 않은 그녀의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이미 몇 번 실패를 경험한 그녀가 많이 지쳐 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계속 결정을 미룬 채 고민을 더 해 봐야 시간만 흘러간다는 것이다. 그게 옳은 선택이든 아니든 이제는 결정을 내리고, 선택한 그 방향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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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한다. 가서 경험을 해 봐야 자신과 맞는지 안 맞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그렇게 꼼짝도 못한 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시기가 있었다. 2001년 마흔 세 살에 파킨슨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난 직후였다.

* 파킨스 병

- 손발이 떨리고 근육이 뻣뻣해지고 몸이 굳는 신경퇴행성 질환

- 걷는 것, 말하는 것, 글씨 쓰고 얼굴 표정 짓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되는 병

- 병에 걸리고 15년이 지나면 사망하거나 심각한 장애가 나타남

- 치매 우울증, 사고력 저하 등을 동반하고, 아직도 마땅한 치료법이 없고, 병의 진행을 더디게 하는 약이 있을 뿐

너무 억울했고 두려워 아무 것도 못하고 병원 침대에 누워 천장만 쳐다봤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절망한 채 누워 있는다고 바뀌는 건 아무 것도 없는데, 게다가 다행히 병이 초기 단계라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많은데, ‘내가 왜 이러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어났고, 하루를 살았고, 또 다음날을 살았다. 그렇게 15년을 살아왔다. 작년 초 갑자기 상태가 악화되어 병원 문을 닫을 때까지 진료와 강의를 하며 모두 다섯 권의 책을 썼고, 엄마로서 며느리로서 해야 할 일들을 하며 충실히 살아왔다. 무엇보다 건강관리에 힘쓴 덕에 아직 치매도 오지 않았고 사고력에도 문제가 없으며 우울증도 경미하다. 물론 몸 상태는 지속적으로 나빠지고 있지만 그 속도가 느린 편이어서 이 책도 쓸 수 있었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먼저 떠나기도 하고 더 큰 일을 당하기도 하면서 살아가는데 내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래서 컨디션이 좋은 날은 좋은 대로, 컨디션이 좋지 않는 날엔 그런대로 하루를 재미있게 보내려고 애쓴다. 가끔 고통이 심할 때는 지치기도 하지만, 괜찮다. 아픈 나의 손을 꼭 잡아 주는 사람들이 내 곁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하고 싶은 게 아직도 참 많다. 병 때문이기는 하지만 의사 일을 관두고 나니 또 다른 세상이 열렸다. 중국어 공부도 제대로 해보고 싶고, 진짜 끝내주는 요리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대접하고 싶고, 서해, 남해, 동해를 한 바퀴 쭉 둘러보고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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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어차피 사는 거 재미있게 살다 가면 좋지 아니한가.

2015년 봄날에 김혜남

Chapter 1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파킨슨 병입니다.”

2001년 2월 사랑의 전화 복지 재단에서 강의가 있던 날 오전 나는 파킨슨 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쇠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지만 그렇다고 강의를 취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겨우 강의를 마치고 나와 택시를 타려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파킨슨병은 도파민이라는 신경 전달 물질을 생산하는 뇌 조직의 손상으로 인해 손발이 떨리고 근육이 뻣뻣해지며, 몸이 굳고, 행동이 느려지고, 말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 등의 증상이 나타나는 신경퇴행성 질환이다. 보통 65세 이후에 나타나는 노인성 질환으로 알려져 있으며 요한 바오로 2세, 무하마드 알리, 로빈 윌리엄스도 이 병을 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마흔세 살에 파킨슨병이라니,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게다가 파킨슨병은 우울증과 치매, 편집증(피해망상)이라는 끔찍한 증상을 동반하는데 나에게 그런 시련이 닥쳤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가장 끔찍한 사실은 파킨슨병은 아직까지 딱히 치료법이 없어 희귀성 질환으로 분류되며 발병하고 15~17년이 지나면 사망이나 심각한 장애가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내 인생이 60세 전에 끝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시부모님 모시고, 초등학생 중학생 두 아들, 그리고 병원을 개업한지 겨우 1년도 채 안 되었는데……. 당시 나는 평상심으로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일단 병원 문을 닫고 집에 있는데 거의 한 달 동안을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나는 그대로인데, 단지 달라진 게 있다면 내 미래가 불확실하고 현재가 조금 불편해진 것밖에 없는데,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야? 왜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느라 현재를 망치고 있는 거지?’

당시 나는 피곤하면 오른쪽 다리를 조금 끌고, 글씨를 쓰는 게 힘들긴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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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환자를 진료하고 일상생활을 하는 데 있어 중간 중간 쉬어준다면 별 문제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일어나 다시 병원에 나가기 시작했다. 환자들을 진료하고, 강의를 나가고, 집안일을 하고 시부모님과 남편과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상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도파민 작용제는 보통 치료효과가 3년 가는데 나는 그 약으로 12년을 버텼다. 2013년 그 다음 단계 약인 레보도파를 쓰기까지 말이다. 또한 나는 그 12년 동안 책을 다섯 권 썼으며, 진료와 강의도 계속했다. 다행이 치매 현상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고 우울증도 심하지 않다. 만약 그때 침대에 계속 누워 병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며 지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테고, 그저 의미 없는 하루하루가 반복되었을 것이다.

■ 딱 한 발짝만 내디뎌 보라

작년 1월 3일 아침 출근하려는데 이건 아니다 싶었다. 병이 조금씩 악화되어 그렇게 미뤄 왔던 치료제인 레보도파를 사용한지 10개월째였는데 더 이상 환자를 진료하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환자들에게 한 달만 쉬어야 할 것 같다고 양해를 구하고 출근을 포기했다. 첫 아이를 유산하고, 두렵게 두 아이를 낳고 키우는 와중에도 결코 포기한 적이 없는 출근을 내려놓은 것이다. 하지만 바람과는 달리 증상은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엔 병원 문을 닫고 체질 개선과 요양을 목적으로 제주도에 내려갔다.

- 레보도파의 약효 지속 시간이 세 시간밖에 안 되어 하루의 반 정도는 누 워서 약 먹을 시간만 기다림

- 땀이 비 오듯 쏟아져 하룻밤에도 옷을 세 번이나 갈아 입을 정도

- 약 기운이 떨어지면 심장 박동 수가 120을 넘고 돌아눕기도 힘듬

- 이불이 무겁고 몸을 밧줄로 꽁꽁 묶어 놓은 듯 한 느낌

- 가장 큰 문제는 화장실 출입으로, 바로 앞에 있는 화장실문을 바라보며 움 직일 수 없어 절망했다. 그러다 화장실 문을 바라보는 대신 내 발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발을 한 발짝 천천히 떼었다. 신기하게도 발이 움직여졌다. 그렇게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가다 보니 어느 새 화장실에 도착해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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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보통 때면 2초 만에 갈 수 있는 화장실을 가는 데 5분 넘게 걸리긴 했지만 도착해서 볼일을 봤으니 그러면 된 것 아닌가.

‘아, 한 발짝이구나.’

내가 가려는 먼 곳을 바라보며 걷는 게 아니라 지금 있는 자리에서 발을 쳐다보며 일단 한 발짝을 떼는 것, 그것이 시작이며 끝이다. 그렇게 한 발짝 한 발짝 내딛는 데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 길이 맞을까 저 길이 맞을까. 우리는 늘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어떤 길로 가는 게 맞을지는 모르지만 내가 걸어간 길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나의 몫이다. 배우자를 찾는다고 했을 때 그가 나와 맞을지는 누구도 모르는 거다. 어쨌든 그와 결혼해서 살아봐야 맞는지 안 맞는지 알 수 있고, 설령 잘 안 맞아도 배우자를 내 남편 혹은 내 아내로 만들어 가는 건 내 몫이다. 물론 선택한 길이 틀릴 수도 있고, 최선을 다했는데도 낭떠러지에 도착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두려워 한 발짝도 떼지 않으면 영영 아무데도 못 가게 된다.

나는 화장실에 가기까지 5분이 걸렸지만 도착한 순간 해냈다는 기쁨에 환호성을 질렀다. 당신이 하버드를 졸업해 빌 게이츠처럼 살아야지, 그 외에 다른 삶은 무가치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게 아니라면 한 발짝을 내디딘 순간 알게 될 것이다. 용기 내기를 참 잘 했다는 것을.

■ 내가 쉽게 절망하지 않는 까닭

작년 여름 공항에서의 일이다. 친정 엄마와 함께 제주도에서 서울로 오는 길이었는데 짐 찾는 곳에서 갑자기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몸이 굳어 멈춰버린 것이다. 속으로 반 발짝, 한 발짝 외치며 발에만 집중해 봤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간신히 벽을 붙잡고 서서 시계를 보니 약 먹을 시간은 앞으로 두 시간이나 남은 상태였다. 사람들은 이미 짐을 찾아 다 빠져나가 버렸고 그곳에는 달랑 엄마와 나 둘뿐이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소변이 마려웠다. 엄마는 내가 안타까운지 어떻게든 부축을 해 주려고 했지만 부축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때 마침 지나가던 청소부 아주머니가 무슨 일이냐며 다가왔다. 아주머니는 얘기를 듣더니 카트를 가져왔다. 바지에 오줌을 싸지 않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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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그 방법밖에 없어 카트에 앉았다. 그리고 화장실로 가 볼일을 본 뒤 어쩔 수 없이 약을 미리 먹었다.

하루 세 번 정량을 지키지 않고 더 먹으면 부작용이 따르지만 그날은 방법이 없었다. 카트가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지금도 아찔하다.

한 발짝 떼는 것으로도 안 되어 기어 다녀야 할 때, 혹은 기어 다닐 수도 없어 꼼짝 없이 누워만 있어야 할 때 그 고통을 견디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다. 누군가는 그랬다. 모든 뼈와 살이 잠자리날개처럼 떨리는데 너무 아프다고, 그냥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이제 그만 아프고 싶다고,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부끄럽지만 나 또한 너무 아파서 단지 고통을 멈추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죽어버릴까 생각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가족들이 모두 잠든 후 새벽녘에 아파서 자지도 못한 채 그 고통을 참아야 할 때면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실제로 자살하려고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떻게든 아픔을 견디다 보면 아픔이 조금은 수그러드는 때가 반드시 오기 때문이다. 고통이 24시간 내내 똑같은 강도로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고통과 고통 사이에 조금은 덜 아픈 시간이 분명 있다. 그래서 나에게 그 시간을 기다리는 것은 언젠가 부터의 희망이었다. 만약 고통과 고통 사이에 휴지기가 없었다면, 약을 먹어도 움직일 수 없었다면 나는 절망의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로마의 사상가 키케로가 말하지 않았던가.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고. 그렇다고 병이 완치되는 기적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병이 조금씩 천천히 진행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조금은 더 남아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막에서도 저를 버리지 않는 풀들이 있고

모든 것이 불타버린 숲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나무가 있다.

화산재에 덮이고 용암에 녹은 산기슭에도

살아서 재를 털며 돌아오는 벌레와 짐승이 있다

내가 나를 버리면 거기에 아무도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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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나 함께 있는 것들이 있다

돌무더기에 덮여 메말라버린 골짜기에

다시 물이 고이고 물줄기를 만들어 흘러간다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는다면

‘폐허 이후’라는 도종환의 시다. 나도 시에 나오는 ‘저를 버리지 않는 풀’이 되고 싶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나무’가 되고 싶다. 이대로 포기해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인생이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어차피 사는 거 재미있게 살다 가면 좋지 아니한가.

■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바로 위 언니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소울메이트(영혼의 동반자, 성격이 잘 맞는 벗)나 다름없던 언니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서 나는 말을 잃었다. 그런데 한 달 뒤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났고 나는 고3이 되었다.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언젠가 언니는 사학자가 되고 나는 의사가 되기로 약속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악착같이 공부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결국 목표했던 의대에 들어갔지만 갑자기 모든 것이 허무해졌다. 누구보다 나의 입학을 축하해 줄 언니는 곁에 없고,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는 사실이 나를 못 견디게 만들었다. 방황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사촌 오빠가 다가왔다.

“혜남아, 인생에는 최선만 있는 건 아니야, 최선이 안 되면 차선이 있다.”

언니와 꿈꾸던 미래가 닫히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은 나에게 많은 위로가 되었다. 어쨌든 아직 끝은 아니니까 나는 또 다시 살아봐야 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살아야 할 인생이라면 잘 살고 싶었다. 그래서 의대에서 예과와 본과를 거치는 6년 동안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다.

인턴 과정도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다. 그러다 보니 나는 당연히 대학 병원에 남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학 병원에서 전문의를 따고 대학교수가 되는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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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를 당연하게 꿈꾼 것이다. 그런데 나는 대학 병원을 나가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대학 병원 대신 국립 정신병원을 선택한 뒤 그곳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눈물이 났다.

하지만 정말 인생은 살아보기 전에는 모르는 것이었다. 국립 정신병원에서 레지던트로 3년을 있으면서 나는 참 다양한 경험을 했다. 정신 치료법으로 약물 치료뿐만 아니라 사이코드라마, 예술치료, 정신분석을 골고루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학병원에 남았다면 결코 해 보지 못했을 소중한 경험들이었다. 특히나 그때만 해도 사이코드라마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보니, 내가 사이코드라마를 치료법으로 사용한 것이 사람들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중에는 레지던트들을 지도 감독하는 일을 하며 내가 더 많이 배웠다. 가르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 논문들과 각종 사례를 공부해야 했기 때문이다.

대학 병원에 남지 못했을 때 나는 또다시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해 절망 했더랬다. 그런데 차선으로 선택한 국립 정신병원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내가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 앞으로 정말 하고 싶은 건 뭔지도 알게 되었다.

■ 나는 참 가진 게 많은 사람이었다

영화 ‘슈퍼맨’에서 주인공을 맡은 크리스토퍼 리브는 당시 신인 배우였지만 영화가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그런데 마흔 두 살에 그는 자신의 애마를 타고 장애물 넘기를 하다 그만 말에서 떨어지면서 목뼈를 다쳤다.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지만 사지 마비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수술을 받고 재활 치료에 들어가서는 발가락 하나를 움직이는 데 성공했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휠체어에 몸을 꽁꽁 묶고 발가락으로 휠체어를 조절하면서 왕성한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휠체어에 앉은 채 영화감독을 하기도 했고 1998년 영화 ‘이창’에 출연하여 얼굴표정 하나만으로 연기를 해 내기도 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삶을 해쳐 나가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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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갖고 있는 것들을 돌아보며, 아직도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아는 겁니다. 내 경우엔 운 좋게도 뇌를 다치지 않아서 여전히 머리를 쓸 수 있다는 것이지요.”

나는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을 때 모든 걸 잃어버렸다고 생각해 세상을 참 많이 원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나는 가진 게 참 많은 사람이었다. 병으로 인해 잃은 것들도 많지만 여전히 할 수 것도 많기 때문이다.

파킨슨병의 대표적인 증상 중에 치매가 있는데 나는 아직 치매가 오지 않았다. 진단받은 지도 벌써 15년인데 아직까지 치매가 오지 않은 건 기적이다. 그래서 이 책을 쓰는 것 또한 기적이다. 지적 능력이 아직 남아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고 보면 남편이 참 고맙다. 치료비가 만만치 않게 들어가는데 남편이 병원을 개업하고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기에 내가 일을 그만둘 수 있었고 마음껏 치료할 수 있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토끼 같은 자식도 둘이나 있다. 일하느라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는데 건강하게 자라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엄마는 또 어떤가. 팔순의 노모에게 보살핌을 받고 있는 50대 딸이 어디 흔한가. 그런데도 엄마는 나에게 미안해하신다. 나를 낳자마자 당신이 큰 병에 걸려 앓아눕는 바람에 나에게 젖을 제대로 못줘서 내가 매일 배고픔에 손가락을 빨았고, 그래서 내 몸이 약해진 거라고, 모두 당신 탓이란다.

제주도에 내려가 머무는 동안에도 참 고마운 분들을 많이 만났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인권운동가로 27년간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던 넬슨 만델라가 말했다.

“감옥에 다녀온 뒤로는 원할 때 산책할 수 있는 일, 가게에 가는 일, 신문을 사는 일, 말하거나 침묵할 수 있는 일 등 어떤 작은 일도 고맙게 생각했다.”

나도 예전에는 감사할 게 이렇게 많은 줄 미처 몰랐다. 가진 것 보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욕심으로 나를 다그치며 앞으로만 달려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보니 나는 참 가진 게 많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파킨슨병을 앓으면서 많은 것을 잃었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도 나는 가진 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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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감사한 일도 너무나 많다. 어쩌면 이 복잡한 세상에서 내가 별 사고 없이 살아 온 것 자체가 감사하고 다행한 일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면 기적이 별 게 아니다. 하루하루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기적일지도 모른다.

■ 파킨슨병이 내게 가르쳐 준 것들

나는 당연히 죽을 때까지 의사로 살 거라고 생각했다. 70~80세가 되어도 의지가 있다면 환자를 면담하고 치료하는 일이 가능할뿐더러, 환자들이 스스로 상처를 극복해 나가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게 참 좋았다. 치료를 하고 있으면 왠지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뿌듯하기도 했다. 그런데 병이 내게 찾아오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파킨슨 병 판정을 받은 지도 벌써 15년, 나에게 파킨슨병은 불청객인데 어느새 사랑방을 딱 차지하고는 도통 갈 생각을 안 하는 손님이다. 게다가 얼마나 까탈스러운지 하루에 삼시 세끼는 반드시 차려 줘야 그나마 잠잠하고 안 그러면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때로 나를 피곤하게 만들고, 속상하게 만들고, 화가 나게 만든다. 하지만 까칠한 손님으로부터 배운 것도 참 많다.

1. 단점을 애써 고치려 하지 말고 그냥 장점에 집중할 것

파킨슨병에 걸리고 나서는 집을 지고 다니는 달팽이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오른쪽 다리가 먼저 약해지기 시작해 그 다리를 끌게 되었는데, 어떻게든 오른쪽 다리에 힘을 주고 움직여 보려고 해도 꿈쩍하지 않았다. 대신 튼튼한 왼쪽 다리에 힘을 줘서 움직이면 오른쪽 다리도 같이 따라갔다. 그때 새삼 깨달았다. 힘이 남아 있는 강한 쪽을 더욱 강화시켜서 움직이면 약한 쪽이 따라간다는 것을. 그러니 못하는 것을 잘하려고 하면 낭비되는 에너지가 너무 많다. 그러니 단점은 그냥 두고 그 시간에 장점을 키워 나가면 많은 걸 얻을 수 있다.

2. ‘마이크로 월드’를 발견하다

본과 3학년 때 집으로 오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낙엽이 지고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나는 바쁘게 살면서 참 많은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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휙휙 지나쳐 갔다. 그런데 병으로 인해 천천 걷거나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지금껏 보지 못했던 세상을 발견했다.

물방울 하나에 소우주가 담겨 있고, 새벽이 밝아오고 해가 뜨기 직전의 하늘이 그렇게 멋있는 줄도 미쳐 몰랐었다. 금붕어를 보고, 막 잠든 아기의 입가에 머무는 미소를 보고, 깜깜한 골목을 비추는 가로등을 보고, 내가 잠깐 잠든 사이 세상을 하얗게 뒤덮어 버린 설경 등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 그렇게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구로야나기 테츠코의 소설 <창가의 토토>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어쩌면 세상에서 진실로 두려운 것은 눈이 있어도 아름다운 것을 볼 줄 모르고, 귀가 있어도 음악을 듣지 못하고, 마음이 있어도 참된 것을 이해하고 감동하지 못하며 가슴의 열정을 불사르지 못하는 사람이 아닐까.”

3. 겸손을 배우다

언젠가부터 환자들이 나를 보고 그랬다. 달라졌다고, 어느 순간부터 내가 한결 편안해보이고 표정도 부드러워졌는데 도대체 그 비결이 뭐냐고. 그러면 나는 웃으며 말한다. “제 병이 제 스승이지요.”

4. 유머의 힘은 역시 세다

사람들은 나의 병에 대해 알고 나면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어떻게 위로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먼저 웃으며 그런다. “제가요, 옛날에는 가진 거라곤 돈하고 미모밖에 없었거든요. 근데 나이가 드니까 병하고 빚밖에 안 남았어요.” 그러면 사람들이 심각한 표정을 풀고 나를 대하는 걸 불편해하지 않는다. 내가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나는 병자다’라며 늘 우울하게 살기는 싫다. 나는 여전히 농담을 즐기고, 사람들과 웃으며 살고 싶다.

그럼에도 15년째 나를 시시때때로 괴롭히는 병 때문에 많이 지친 날에는 암 투병 중인 이해인 수녀의 시 ‘병상 일기’를 보며 힘을 낸다.

오늘은 / 약을 안 먹기로 한다 // 한 번쯤 / 안 먹으면 어때 하고 / 포기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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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 / 혼난 일이 있지만 // 그래도 오늘은 / 환자가 아니고 싶고 / 아무 약도 안 먹겠다는 / 무모한 결심을 해 본다 // 겉으론 태연한 척 하지만 / 약을 안 먹고 사는 이들이 / 요즘은 제일 부럽네 / 병원에 안 가도 되는 이들이 / 정말로 부럽네 // 그러나 이 한 번쯤이 / 너무 오래 가면 안 되겠지 / 오늘 하루만 / 내가 나를 용서하기로 한다 //

■ 나는 가족들에게 유쾌한 짐이 되고 싶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 나는 인턴 때 대학 병원에 있으면서 그 말이 끔찍할 정도로 맞아 떨어지는 상황을 몇 번 마주쳤다. 식물인간이 된 아버지의 병원비용을 대느라 집도 팔고 차도 팔고 빚까지 지게 된 아들이 어느 날 아버지를 붙들고 이럴 바엔 차라리 죽어 주면 안 되겠느냐고 목 놓아 소리치는 모습을 보기도 했고, 가족들이 힘들어 하는 걸 더 이상 못 보겠다며 자기를 죽여 달라는 할머니를 본 적도 있다. 나는 그 모습들을 보며 결심했더랬다. 나는 절대 가족들에게 짐이 되지 않을 것이고, 만약 짐이 되는 상황이 오면 차라라 죽음을 택할 거라고. 그래서 언젠가 남편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움직일 수 없게 되면 시설로 보내 줘. 부탁이야.”

그런데 작년 1월 병원을 그만 두면서 수입이 없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네 권의 책에서 들어오는 인세 말고는 수입이 없다. 늘 돈을 벌지 못하는 날이 올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 입장이 되고 보니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남편이 병원을 운영하고 있어서 먹고 살 걱정은 솔직히 없다. 하지만 스스로 돈을 벌지 못한다는 사실이 내게 주는 위축감을 어쩔 수는 없다. 게다가 나는 파킨슨 환자다.

미래의 내 모습을 그려보면 겁이 나고 우울하다. 만약 치매가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상생활을 수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고 능력 또한 감퇴되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해 버린다면?

그래서였을까. 작년에 병이 악화되어 제주도로 내려가면서 가족들에게 공기 좋은데 가서 치료에만 전념하고 싶다고 했고. 오롯이 혼자 있는 시간을 가져 보고 싶다고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가족들에게 짐이 되는 게 너무 미안하고 싫었다. 하지만 나의 바람과는 달리 병이 악화되면서 6개월 만에 다시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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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도저히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들과 딸이 나를 무척이나 반겨 주었다.

“와! 엄마 왔다!”

얼마 뒤에는 딸이 나에게 그랬다.

“퇴근하고 왔을 때 엄마가 항상 있으니까 너무 든든하고 좋아. 엄마, 이제 어디도 가지 마.”

가족들의 따뜻한 웃음과 위로 덕분이었을까. 끔찍했던 날들이 지나가고 다시 병이 호전되기 시작했다.

나는 요즘 아이들과 참 대화를 많이 한다. 아이들은 무슨 문제가 있으면 나한테 전화해서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나는 하루 동안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 한다. 남편도 하루에 몇 번씩 전화해서 내 안부를 묻고 나는 남편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남편이나 아이들이 내 고통을 덜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옆에 있어줘서 무척 고맙다. 그런데 그들이 나에게 고맙다고 해준다. 그래서 참 좋다. ‘유쾌한 짐’이 되기로 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인 것 같다.

Chapter 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발짝 내딛는다는 것

■ 때론 버티는 것이 답이다

때론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든 날이 있다. 나에게도 그런 날들이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기말고사가 끝나던 2월 10일, 바로 위의 언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대학교 예비 소집에 간다고 밝게 웃으며 집을 나선 언니가 대학교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다 차에 치여 죽은 것이다. 연년생으로 친구보다 더 가깝게 지내던 소울메이트 언니는 그렇게 갑작스럽게 내 곁을 떠났다. 언니가 떠난 뒤 한 달 만에 할머니도 돌아가셨다.

그런데 나는 마음껏 울 수가 없었다. 새벽에 물 마시려고 나왔다가 방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 슬쩍 방문을 열어보면 아버지가 울고 있고, 어머니가 아버지를 위로하고 있었다. 다음 날은 어머니기 울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위로했다.

아버지는 자꾸 언니 생각이 난다며 끝내 강원도 공장으로 내려가 버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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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언니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와 큰언니, 남동생, 여동생 모두 언니 이야기를 꺼내면 너무 마음이 아플까봐 모두 자기 가슴속에만 언니를 묻어 두었다. 집안 분위기가 늘 우울했던 그때, 나에게는 딱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버텨야 해. 나까지 무너지면 안 돼.’

나는 언니를 대신해 두 사람 몫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무너지면 안 되었다. 울어서도 안 되는 거였다. 나마저 무너지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슬픔이 얼마나 더 크겠는가.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부모님 걱정 끼치는 일 없게 한 번에 대학에 붙는 일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게 혼자 언니의 죽음을 견뎌내며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를 이겨야 한다며 의자에다 끈으로 내 몸을 묶어 놓고 공부를 하다가 새벽에 잠시 눈을 붙이면 가위에 눌려 벌떡 일어나는 일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1년 동안 죽을 것 같이 힘든 상황을 견디고 대학에 들어갔을 때 나는 이제 내 인생에 버텨야 할 날들이 다시는 오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나는 또 버티고 있었다. 내 맘 같지 않은 척 직장에서 인정받기까지의 날들을 버텨내고 있었고, 결혼을 깨버리고 싶은 날들을 버텨내고 있었고, 마흔이 넘어서는 병으로부터 버텨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산다는 게 버티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버틴다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그것이 굴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버틴다는 것은 그저 말없이 순종하는 수동적인 상태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에 누워서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게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버틴다는 것은 내적으로는 들끓어 오르는 분노나 모멸감, 부당함 등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하고, 외부에서 주어진 기대행동에 나를 맞추면서도 나 자신을 잃지 않아야 하는 매우 역동적이면서도 힘든 과정이다. 그래서 버틴다는 것은 기다림이라 할 수 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참아내는 것이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오늘 부단한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어떤 것을 이루는 과정에는 견디고 버텨야 하는 시기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버티는 시간 동안 우리는 그 일의 의미와 절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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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깨닫고,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필요한 것들을 재정비하며 결국은 살아남는 법을 익히게 된다. 그러므로 버티어 살아남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폄하할 수 없는, 피땀 어린 노력의 결실이다.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고, 항상 잘나가는 사람들이 자기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고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말해 주고 싶다. 버티는 것이 답답하고 힘들겠지만 버티다 보면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고, 그러니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치지 말라고 말이다. 정말로 때론 버티는 것 자체가 답일 때가 있다.

■ 처음은 누구나 서툴다

1999년은 내가 운전면허를 딴 해다. 남들은 20대에 딴다는 면허를 마흔 넘어 뒤늦게 따면서 참 말도 많이 들었다. “아직까지 차가 없으셨어요?” “장롱 면허라도 있으신 줄 알았어요.” 바로 위 언니가 차 사고로 세상을 떠난 탓인지 나는 오래도록 차를 꺼렸고 운전면허를 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누구나 운전하고 다니니까 나도 운전을 하면 당연히 잘할 줄 알았다.

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 운전을 하고 가는데 차에서 계속 덜덜덜덜 소리가 나고 타이어와 보닛에서 연기가 조금씩 피어올랐다. 나중에 병원에 와서 살펴보니 내가 사이드 브레이크를 채운 채로 운전한 거였다. 뿐만 아니라 오르막 길을 가다가 갑자기 차가 뒤로 밀린다거나, 트렁크를 연 채로 운전을 하거나, 트럭이 내 차를 치고 갈 뻔한 일 등이 연달아 터지자 운전하는 게 두렵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차 뒷유리에 크게 ‘초보 운전’이라고 붙이고 다녔다.

그런데 한 후배의 말을 들으니 요즘은 ‘초보 운전’ 딱지를 잘 붙이지 않는단다. 특히나 여자란 걸 알면 왜 차를 끌고 나와 다른 사람 길을 막느냐고 면박을 주는 남자들이 있고 괜한 해코지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란다. 그러다가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차를 남편에게 반납해 버렸다.

처음은 누구나 서툰 법이다. 잘 모르니까 서툴 수밖에 없고 그래서 초보인 것이다. 그런데 하루는 딸이 또 나를 기가 막히게 만들었다.

“엄마는 잘하는데 나는 못하니까 그게 굉장히 속상해.”

내가 딸보다 사회생활을 30년은 더 했다. 그 오랜 세월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잘하게 된 것인데 감히 나와 비교하려 드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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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지금 못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야. 너는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거잖아. 그런데 어떻게 30년을 건너 뛰어 엄마와 비교하려 드니. 나도 그렇고 아빠도 그렇고 네 나이 때는 너보다 더 못했어.”

그제야 딸이 안심이 된다는 표정을 짓는데 나는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왜 초보가 초보인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초보는 초보다. 실수나 잘못을 할 위험이 큰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불리한 점도 있다지만 그래도 초보 운전 딱지를 붙이면 사람들이 비켜주기도 하고, 거리를 두는 등 초보 운전자를 배려해 준다. 마찬가지로 회사에서 잘 모르니까 가르쳐 달라고 말하며 열정적으로 선배들을 쫓아다니고 배우려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그러면 선배들이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게 되어 있다. 경험상 바짝 긴장해서 열심히 배우려는 후배를 예뻐하지 않을 선배는 없다. 다 이상 아는 척 끙끙대지 말고 초보 티를 내자. 실수 하나 했다고 금방 좌절하고 주눅 들어 있지 말고 딱 한 마디만 하라. “모릅니다. 가르쳐 주세요.” 그리고 지나보니 알겠다. 실수가 맘껏 허용되는 것은 초보 때뿐이다. 그때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듭한 사람일수록 아주 크게 발전한다. 그것이 초보 딱지의 매력이다.

■ 완벽한 때는 결코 오지 않는 법이다

1987년 탈 벤 샤하르는 스물한 살의 나이에 이스라엘 전국 스쿼시 선수권 대회에서 최연소 챔피언이 되었다. 우승한 순간 가슴이 벅찼고 행복했지만 얼마 뒤 행복은 사라져 버렸다. 스쿼시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스포츠도 아니고 선수도 몇천 명밖에 안 되는데, 거기서 1등을 한 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세계 챔피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영국으로 떠났다. 그 결과 1년 만에 청소년 메이저대회의 결승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실수하면 안 된다는 불안감과 긴장감에 시달리다 갑자기 팔다리에 쥐가 나 눈 앞에서 1등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혹사시킨 탓에 스쿼시마저 그만 두어야 했다.

그의 완벽주의 성향은 그가 운동을 그만 두고 하버드 대학에 들어간 다음에도 변하지 않았다. 저서 <완벽의 추구>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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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교재를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읽어야 하고, 모든 리포트와 시험에서 완벽한 접수를 받아야 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매일 밤을 세우다시피 했고, 그래도 실패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리포트를 제출하거나 시험을 치르고 나면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결과 그는 항상 최고점을 받았지만 불행했고 심지어 나중에는 공부 그 자체를 싫어하게 되었다. 모든 걸 완벽하게 하고 싶었지만 어느 순간 몸도 마음도 지친 그는 점점 더 불행해져만 가는 자신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 후 자신의 경험담을 토대로 긍정 심리학을 연구한 그는 현재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가 되어 학생들에게 과거의 자신처럼 불행한 완벽주의자로 살지 말라고 조언한다. 완벽주의를 포기한다고 해서 절대 삶이 무너지지 않으며 , 오히려 삶을 더 즐기면서 살게 된다는 것이 그의 이야기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어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다. 왜냐하면 내일 당장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그 모든 위험성을 예측하고 예방해 놓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준비해도 완벽한 준비란 있을 수 없다. 회사가 원하는 스펙을 다 채우려다 보면 최소한 30대 중반이 넘어야 취업할 수 있을 테고, 아파트를 산 뒤에 결혼하려면 마흔 살이 되기 전에 결혼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완벽한 때를 기다리지 말고, 60%만 채워졌다고 생각되면 길을 나서 보라.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평생 생의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헤맸다. 그러나 인생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완벽한 때는 기다리지 않는다. 내 삶에는 늘 빈 구석이 많았고, 그 빈 구석을 채우는 재미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나는 가고 싶은 길을 갈 것이다. 준비가 좀 덜 되어 있으면 어떤가. 가면서 채우면 되고 그 모든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인 것을.

■ 해봤자 안 될 게 뻔하다는 말부터 버려라

옛날 시골마을에서는 어느 집 자식이 명문대를 들어가거나 사법고시에 붙으면 동네 어귀에 큰 플래카드가 걸리고 잔치가 벌어졌다. ‘개천에서 용 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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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며 모두들 축하해 주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 요즘은 명문대에 들어가는 조건이 할아버지의 경제력, 아빠의 무관심 엄마의 정보력이란다. 아빠만 벌어서는 사교육비 감당이 안 되니 원래 부자인 할아버지가 필요하고 엄마는 입시 정보의 달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웬만한 경제력 가지고는 명문대에 들어갈 수 없고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 성공하기도 힘들다는 소리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더욱 심해져 아무리 노력해도 빈부 격차를 줄이기 힘들고, 어떤 집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이미 그 사람의 미래가 결정되었다고 느낄 때 살날이 창창한 젊은 사람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다.

심리학에서 무기력이란 에너지가 바닥나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며,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스스로의 힘으로 처지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무력감은 생각보다 더 사람을 힘들게 한다. 성폭행을 당하거나 천재지변을 당한 이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그런 수치스럽고 무서운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즉 무력감이었다고 한다.

무기력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안 하면서 외부 상황이 바뀌기만을 바란다. 상황이 확 변해서 무언가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상황을 바꿔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뭔가를 바꿀 수 있을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헛수고 하는 건 아닐까? 맞다 변하는 게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적어도 지금 무기력하게 서 있는 그곳은 탈출할 수 있고, 가능성이 보이는 또 다른 곳에 닿게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세상으로부터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최악의 상황에 놓인다 해도 우리에게는 절대 빼앗길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에 대한 우리 자신의 선택권이다. 즉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나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무기력하게 누워서 천장만 보고 살 건지, 일단 밖에 나가 할 일을 찾아볼 건지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말이다.

막상 밖에 나가보면 할 수 있는 일은 우리의 생각보다 많다.

인생은 때로 우리의 뜻대로 흘러가기도 하지만 때론 우리가 원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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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그 사실은 우리를 슬프게도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시 인생의 키를 잡고 노력을 하다보면 그 결과물을 받게 되는 때가 반드시 온다. 비록 그것이 내가 애초에 바라던 것이 아니었을지라도 말이다. 그러니 노력의 결과가 당장 보이지 않는다고 실망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 원하는 삶을 산다는 것의 진짜 의미

이 지구상에는 명령을 받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동물이 두 종류 있다. 하나는 청개구리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인간이다. 동화에 나오는 청개구리는 엄마 개구리가 동쪽으로 가라고 하면 서쪽으로 가고, 앉으라고 하면 일어선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뭘 하려다가 누가 시키면 갑자기 하기 싫고 ‘내가 하나 봐라’ 심술을 부리며 일부러 안 하려고 든다. 어릴 적 책상에 앉았는데 “공부해라”라는 엄마의 말에 ‘에잇, 안 해’하며 책을 덮어본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잘 알 것이다.

누군가 시키면 하기 싫어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주도권을 갖고 싶어 하는데 명령을 받으면 그 주도권을 남에게 빼앗긴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른바 자율성이다.

자율성은 인간의 중요한 본능적 욕구 중 하나다. 타인의 간섭과 침입을 막고 내 영역을 지켜 인생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처음 하는 의사 표현도 ‘싫어’ 혹은 ‘안 해’다. 그래서 아이를 키우는 과정은 뭐든지 제멋대로 하려는 아이를 사회라는 테두리에 맞추어 나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유롭게 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심지어 학교와 직업도 자유롭게 선택하고, 자유롭게 연애하고, 결혼 여부도 자유롭게 결정하는 등 원하는 대로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 옳다고 배웠다. 그런데 정말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 부모님이 시키고, 학교가 시키고, 사회가 시키고, 사람들이 좋다는 길을 걸으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괜히 내가 원하는 것을 고집했다가 실패자로 낙인찍히면 어쩌나 두려워서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남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내 인생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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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말한다. ‘통제 소재를 내 안으로 가져올 것.’ 저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내가 맞춰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내가 저 일

을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기 싫은 일을 할 때조차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는 거다’, ‘내가 빨리 해 주고 넘어가 버리는 거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즉 내가 그 일의 주체가 되고 주인이 되는 것이다.

대인관계도 마찬가지다.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 있는데 내가 그에게 맞춰 줘야 하는 상황이 되면 누구나 스스로를 비굴하고 초라하게 느낀다. 그럴 때도 ‘그 사람이 원해서 웃는 게 아니라 내가 이 상황을 원만하게 넘기기 위해서 웃어 주자’ 라고 마음먹어 보라. 어떤 상황에서든 주체를 나 자신으로 가져 오라는 말이다. 그래서 회식 자리에서 말도 안 되는 상사의 농담에 죽어도 웃어 주는 짓은 못 하겠다는 환자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까짓것 웃어 주면 어때요. 중요한 건 지금 당신이 인생을 놓고 봤을 때 결코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다는 거예요. 상사 때문에 화를 내고, 상사를 볼 때마다 불편해 하고, 그에 맞춰 주는 사람들에게 분노하는 데 당신의 에너지를 다 써 버리기엔 인생이 너무 아깝지 않나요? 그게 정말로 당신이 원하는 삶은 아닐 것 같은데요.

그 어떤 억울한 일을 당했더라도 그것을 해결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다. 부모도 가족도 배우자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남 탓하기 전에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사실부터 받아들여라. 그래야 남의 역사가 아닌 내 역사를 써 나갈 수 있고, 남의 인생이 아닌 내 인생을 살 수 있다. 하기 싫은 일과 하고 싶은 일, 꼴 보기 싫은 사람과 오래도록 같이 하고 싶은 사람 사이에서 생기는 수많은 일들을 주체적으로 해결하며 조율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인생이 아닐까.

■ 결혼하고 3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깨달은 것들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 이 남자일 것 같아

/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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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많이 먹은 남자 /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 준 남자

문정희 시인이 쓴 ‘남편’이라는 시의 일부분이다. 문득 이 시를 읽으니 남편과 내가 결혼한 지도 벌써 30년이 넘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남편은 정말이지 나와 함께 밥을 가장 많이 먹은 사람이자 나에게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 준 사람이다. 밥을 그렇게나 오랜 세월 같이 먹었는데도 왜 우리는 그렇게 싸우고 또 싸웠던 걸가?

부부 사이의 가장 큰 비극은 서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남편이 나를 아는 줄 알았다. 웬만한 일에는 일희일비하지 않지만 한편으로 내게도 여린 소녀 같은 면이 있다는 것을, 이성적이고 차분한 편이지만 실은 내가 굉장히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남편이 당연히 아는 줄 알았다. 그만큼 오랜 세월을 같이 살아왔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남편은 나를 몰랐다. 내 가슴속에 시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내색을 잘 안 했을 뿐 결혼하고 워킹맘으로 살면서 많이 힘들어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남편은 그냥 내가 원래부터 통이 크고 대범한 여자인 줄 알고 살았단다.

그런데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내 눈에는 남편이 지독한 워커홀릭으로 성공을 위해 가족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알고 보면 남편도 외로운 사람이고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다. 우리는 둘 다 생활에 쫓기면서 너무 지쳐 집에 오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단 쉬고 싶어 했고 상대방이 그 마음을 백분 이해해 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남편은 남편대로, 나는 나대로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고 그것은 점점 서로에게 상처가 되었다.

재미있는 실험이 있다. 결혼한 지 2주된 부부, 2개월 된 부부, 2년 된 부부, 20년 된 부부를 상대로 서로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테스트했다. 그 결과 서로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커플은 결혼한 지 20년 된 부부가 아니라. 2주 된 부부였다. 왜냐하면 2주된 부부는 ‘내 남편 오늘은 직장에서 뭐하나?’, ‘내 아내는 오늘 뭘 했을까?’ 궁금해하고 끊임없이 관심을 갖는다. 관심은 질문으로 이어지고 그에 답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조금 더 알아 간다. 하지만 20년 된 부부는 서로에 대해 묻지 않는다. ‘거봐, 저 사람 저럴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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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다니까’, ‘저 여편네 또 잔소리하네’라고 생각하며 더 이상 궁금해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정작 서로에 대해 모를 수밖에.

그러던 어느 날 또다시 끓어오르는 화를 참고 남편의 이야기를 그냥 듣기만 했다. 그러기를 몇 번, 어느 순간 남편은 이렇게 수다스러운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놓기 시작했다. 놀라운 건 어느 날부터인가 남편이 나의 일상을 물어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밥은 뭐 먹었어? 오늘은 어땠어? 괜찮아?” 그 후 남편과 나는 다시 서로를 알아가는 재미에 빠졌다. 그 사이 변했지만 몰랐던 것들에서부터 오늘 하루 있었던 이야기 그리고 한동안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어릴 적 상처까지, 쌓인 이야기는 많았고 서로에게 하고픈 이야기도 많았다. 그러면서 우리는 알게 되었다. ‘사랑하니까 저 사람은 분명 내가 안 해도 알거야’ 라는 생각은 틀렸다는 것을. 아무리 사랑해도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그러니 상대방에게 나에 대해 자꾸 알려주어야 한다. 하고 싶은 말을 차곡차곡 가슴에 쌓아두는 대신 그 말을 밖으로 꺼내야 한다. 어제와 다른 나에 대해 얘기해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이 나에 대해 알게 된다. 그리고 절대 상대방을 다 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 제2의 인생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독자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중견 기업의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는 그는 올 해 마흔세 살인데 회사에서 작년부터 명예퇴직 신청을 받았고, 올해 또 있을 거라는 얘기가 돌고 있다고 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신청해야 할 것 같은데 퇴직 후를 생각하면 너무 막막하단다. 젊음을 다 바쳐 열심히 일했는데 어렵다고 사람을 바로 내치는 회사가 원망스럽고 이런저런 걱정과 불안으로 불면증에 시달리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려 달라고 했다.

40~50대는 평생직장의 신화를 믿고 회사를 위해 가정까지 희생해 가면서 모든 에너지와 열정을 바친 이들이다. 그런데 실직을 하게 되면 집에서는 무능한 가장이요. 아버지가 되어 설 곳을 잃고, 사회에서는 인생의 패배자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게 된다. 달랑 손에 쥐어진 얼마 안 되는 퇴직금을 들고 가족의 생계와 아이들 교육을 책임져야하는 가장은 불안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살아야 하고, 살아내야 하기 때문에 제2의 인생을 시작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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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메일에 대한 답장을 쓰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러웠다. 섣부른 위로와 희망을 말하는 것이 그에게 얼마나 실례가 될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고민 끝에 그에게 보낸 답장을 다시 정리한 것들이다.

1. 당신은 실패자가 아니다

만약 실직을 하게 되면 당신은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느낄 수 있다. 창피하고 사람들을 만나기가 싫고, 모든 것에 화가 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은 실패자가 아니다. 끝까지 뛰어 봐야 아는 마라톤처럼 인생도 끝까지 살아봐야 아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실직을 당한 것은 무능하거나 모자라서가 아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왔어도 세상은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니 절대 혼자 끙끙 앓으며 해결하려고 애쓰지 마라.

2. 절대 실직했다는 사실을 가족에게 숨기지 마라

부인과 아이들에게 현재 당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알려라. 그리고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 당분간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같이 의논하고 결정하라.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면 그것 또한 가족 모두 같이 하는 것이 좋다.

3. 힘들다고 동네방네 알려라

힘든 건 자꾸 알려야 한다. 그래야 정보가 들어온다. 만약 친구들을 만났는데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고 치자, 그러면 그들은 어디선가 사람 구한다는 말을 들어도 당신에게 알려 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알려야 기회가 생긴다. 병이 생기면 사람들에게 알려야 “그 병에는 이런 게 좋다는데” 하면서 치료법에 대한 정보를 하나라도 더 듣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친구들이 당신을 도울 수 있게,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라.

4. 과거는 잊어라. 그리고 서두르지 마라

갑자기 어두컴컴한 곳에 가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조금 지나면 동공이 확대되면서 어렴풋이 방 안 사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전까지의 사회적 지위나 체면 등은 일단 덮어 두어라. “내가 연봉이 얼마였는지 알아?”. “내가 거기서 어떤 일을 했던 사람인지 알아?”라는 말은 자꾸 해봤자 스스로 자괴감만 더 들 뿐이다. 또 “내가 어떻게 이런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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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하며 이것저것 배제하다보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모든 것이 새로운 시작이라는 각오로 다시 한 번 뛰어 들어야 한다.

인생에서의 성공이란 경쟁에서의 승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자신에게 얼마나 충실했으며 가족과 친구들에게 얼마나 사랑받고 필요한 존재였느냐 하는 데 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품으며 살아가는 모습이야말로 당신이 아이들에게 물려 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이다.

■ 사람을 너무 믿지 마라,

그러나 끝까지 믿어야 할 것도 사람이다

단지 피부색이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수백만 명을 아무렇지 않게 학살하는 동물, 비행기를 몰고 도시 한복판의 빌딩으로 돌진하여 하루아침에 수천 명의 사망자를 내는 동물, 층간 소음 문제로 살인까지 저지르는 동물, 유산과 보험금 타기 위해 친구나 가족의 등에 칼을 꽂을 수 있는 동물, 제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남의 것을 탐내는 탐욕스러운 동물, 남들이 고통스러워하든 말든 나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동물, 높은 지능을 남들을 속이고 파괴하는 데 사용하는 동물……. 바로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무서운 인간의 모습이다. 살아갈수록 인간의 어두운 면을 마주할 기회가 늘어나면서 중년의 나이에 이르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바로 사람이다”라는 말을 하게 된다.

그러면 나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당신이 만약 사람을 믿지 않고 의심하면 배신당할 일은 분명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매일 누군가를 경계하고 의심하는 불안한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다. 믿지 못하면 외로워진다. 그런데 사람을 믿으면 세상은 살만한 곳이 된다. 남에게 속을지언정 불안에 떨며 지내지는 않아도 된다.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나는 사람을 믿는다. 사람을 믿으면 일단 내 마음이 편하다. 의심하느라 촉각을 곤두세우고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 물론 그러다 배신당하면 크게 상처받을 것이다. 하지만 상처가 두려워 사람을 믿지 않으면 행복도 없어져 버린다.

그렇다고 무작정 모든 사람을 믿을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 믿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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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 하는 범위의 문제이며 믿을 수 없는 사람을 가려낼 수 있는 시력을 키우는 것이다. 그러나 속이려 마음만 먹으면 쉽게 속아 넘어가는 게 사람이다., 더구나 사람은 흔들릴 수 있는 존재다. 무엇에든 유혹될 수 있고 욕망에 휩싸여 사리분별을 못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치닫기 쉬운 내적 욕망이나 갈등으로부터 관계를 보호하기 위해 일종의 장치를 해 둘 필요가 있다. 바로 관계에서의 한계 설정 그것이다. 이를테면

- 친구 사이에 돈거래를 하지 않는다.

- 사랑하는 사람의 성격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 친한 친구 사이에도 비밀이 있어야 한다. 부모 자식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각자가 가진 욕심과 욕망이 충돌할 때 한계를 미리 설정해 놓으면 나와 상대를 모두를 보호할 수 있고 관계를 더 안전하게 지속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어쩌면 한계 설정은 끝까지 사람을 믿고 사람과 더불어 살기 위해 해야 할 최소한의 장치인지도 모른다.

■ 내 말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 행운에 대하여

국립 정신병원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매일 점심시간만 되면 전화를 거는 환자가 몇 명 있었다. 밥 먹고 좀 쉬려고 하면 어김없이 전화벨이 울린다. 또 그 환자들이다. “선생님, 오늘 동생하고 싸웠어요. 걔가 날 무시해서 속상해요.” “많이 속상하겠네요 어떻게 해요?” “뭐 그래도 언니인 제가 참아야죠.” “그래요. 잘 생각했어요.” 그럼 한층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끊는다. 혼자 말하고 혼자 대답하고 나보고 고맙단다. 나는 그냥 이야기를 들으며 그저 힘들었겠다. 속상했겠다는 말만 했을 뿐이고 아무 해답을 준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들에겐 자기 말을 들어주고 맞장구쳐 주는 사람이 필요했던 거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누군가 나의 말에 진지하게 귀 기울여 줄 때, 우리는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며 이런 일을 겪는 자신이 결코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한다.

더구나 자신을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이 차가운 지구별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된다. 누군가가 이야기를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여 주고, 손잡아 주면 비록 문제가 해결된 게 아니더라도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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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치료에서 자주 쓰는 말이 있다. “No comment is better then any comment.” 굳이 풀자면 아무 말 안 하고 가만히 들어 주는 것이 그 어떤 말을 해주는 것보다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듣는 작업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중간에 참견이나 비판을 하지 않는 것도 힘들고, 듣는다는 자체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들도 환자를 볼 때 한 시간에 열 명을 보는 게 더 쉽지, 한 명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듣는 게 더 어렵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에게 그런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굉장한 행운아다. 그런 존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기왕이면 당신이 그런 존재가 되어 보면 어떨까?

Chapter 3.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

■ 지금껏 살면서 가장 후회하는 일

나는 인턴 때 대학 동기와 결혼했는데 원치 않게 곧바로 임신을 하게 되었다. 다들 힘든데 임신했다는 이유로 일을 줄여 달라고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중환자실에서 심폐 소생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 잇달아 벌어졌다. 환자 세 명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다 보니 급한 대로 달려가서 심장 맛사지를 했다. 어느 순간 배가 뭉치는 걸 느꼈지만 아이가 무사하기만을 바라며 환자를 살리는 일에 매달렸다. 다행히 환자들이 고비를 넘긴 그날 밤 나는 하혈을 했고 끝내 유산을 하고 말았다. 처음이었더랬다. 의사된 게 너무 후회되었다. 무리하게 심폐소생술만 안 했어도 아이를 잃지 않았을테니까 말이다. 배 속의 아이를 보호하지 못하고 끝내 아이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나는 밀려오는 죄책감으로 한참을 울었다.

그러나 정말 시간이 약인가 보다. 어느 덧 나는 두 아이를 낳았고 아이들을 키우며 의사 생활을 계속했다. 병원 일 하랴. 집안일 하랴. 두 아이 키우랴. 시부모님 모시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는 사이 아이를 키우는 것도, 병원 일을 하는 것도, 집안일을 하는 것도 모두 다 숙제처럼 하기 싫지만 해야만 하는 일들이 되어 버렸다. 한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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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고 웃음을 잃어버렸다. ‘왜 나 혼자 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나’라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남편과 가족들을 원망하고 불공평한 세상을 원망했다.

돌이켜 보면 그때 그렇게라도 버티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내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의무감과 책임감만으로 하기 싫은 숙제를 하듯 살았던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나 후회가 된다. 내가 지금껏 살면서 가장 후회하는 것, 그것은 바로 그때 삶을 즐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기쁨을 즐기기는커녕 행여 아이에게 부족하고 이기적인 엄마가 될까봐 아이를 닦달하고 스스로를 닦달하면서 살았고, 나에게 주어진 능력을 즐기기보다 행여 뒤질세라 쫓기듯이 일을 하고 공부를 했다. 삶을 즐기려고 마음먹었다면 시간을 분배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해 가족에게 도움을 청했을 텐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 시절에 가졌던 죄책감과 피해의식은 나의 기쁨을 앗아가고 나를 피곤하기 만들었으며, 나를 분노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죄책감과 피해의식에 시달릴 시간에 삶을 즐길 아이디어를 내서 그걸 실천에 옮겼더라면 이렇게까지 후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끝없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삶의 즐거움이다.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될 일이다. 그러니 그 어떤 순간에도 삶을 즐겨라. ‘~해야 한다’는 말을 줄이고. ‘~하고 싶다’는 말을 늘려 나가는 것이 그 시작이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못 당하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 그리고 죄책감과 책임감만으로 살아가기엔 인생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 나는 지금도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다

나이 70을 바라보는 뉴질랜드의 시골 할아버지가 있었다. 그의 꿈은 미국 유타주 보너빌에서 열리는 고속 자동차 경주 대회에 나가 시속 200마일(약 322km) 넘게 달려보는 일이었다. 문제는 자신처럼 오래된, 초기 시속이 56마일(약 90km) 밖에 안 되는 1920년산 구형 오토바이를 고집한다는 것이었다. 그 꿈을 위해 이미 판매가 중단되고 고물상에 갔을 법한 구식 오토바이 ‘인디언’을 25년 넘게 밤이나 낮이나 쉬지 않고 개조해 온 할아버지는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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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따르는 옆집 꼬마 친구에게 말한다.

“때로는 평생을 사는 것보다 5분을 빠르게 달리는 것이 더 소중할 때가 있단다.”

협심증으로 쓰러져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한 행보를 재촉한다.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꼬마에게 할아버지는 말한다.

“가고 싶을 때 가지 않으면 가려고 할 때는 갈 수가 없단다. 그리고 너의 꿈을 따르지 않는다면 넌 식물이나 다름없어.”

그래서 그는 경비를 아끼려고 뱃삯 대신 요리를 하고, 차 뒷좌석에서 새우잠을 자면서도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차근차근 보너빌로 향한다. 그런데 정작 보너빌에 도착하자 할아버지가 사전 선수 등록이 안 되어 있다면 경기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여기서 달리기 위해 지구 반 바퀴를 돌아왔다.”는 그의 열정에 반한 이들의 도움으로 꿈에 그리던 시속 200마일에 도전한다. 오토바이 1000cc 이하 급에서 시속 201. 85마일(약 325km)이라는 신기록을 세운 것이다.

2005년 개봉한 영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디언’의 줄거리다. 이 이야기는 놀랍게도 실화다. 영화의 주인공인 버트 먼로가 1967년 68세의 나이에 보너빌에서 세운 기록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는 신화로 남아 있다. 그는 우리에게 꿈을 이루는 나이엔 한계가 없음을 보여준다. 꿈과 도전이 젊은이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요즘 청소년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으면 지체 없이 우선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고,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인지 가장 선호하는 직업은 공무원이란다. 그런데 공무원이 되어 어떻게 살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어떤 의사, 어떤 판검사가 되어 어떤 사람으로 살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취직하고 나면 꿈이 끝나버리는 것이다.

물론 안정된 직장을 구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꿈을 외부적 조건에만 맞추게 되면 우리는 정작 자신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외면하거나 듣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의 시선과 평가에만 목매달게 된다.

모든 게 재미없다고 말하는 당신, 혹시 꿈꾸기를 멈추어버린 것은 어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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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뭐라 하든 정말 하고 싶고 이루고 싶은 꿈이 없어서 삶이 지루한 게 아닐까? 지금 당장 이루지 못할 꿈이라고 냉큼 포기해 버리지 말고, 그 꿈을 간직하고 이루기 위해 애써 보면 어떨가?

꿈을 꾸게 되면 뇌의 기능은 꿈을 이루기 위한 회로로 집중된다. 따라서 이 부분의 뇌가 활성화되고 발달하게 된다.

그러므로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은 과학적으로 일리 있는 말이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괜한 미신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어떤 이유로든 꿈꾸기를 포기해 버리지는 말자 꿈이 멈추지 않으면 정말 사는 게 재미있다.

지금 당장 그 꿈을 이루지 못하면 또 어떤가. 버트 먼로 할아버지처럼 68세에 꿈을 이루면 그 세월 동안 어쨌든 계속 가슴 설렐 것 아닌가. 또 그 꿈을 못 이루면 어떤가. 꿈도 없이 지루하게 사는 것보다는 훨씬 사는 게 재미있는데 말이다. 할아버지처럼 그리고 나처럼.

■ 제발 모든 것을 ‘상처’라고 말하지 마라

얼마 전 어떤 모임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40대 이상의 전문직 종사자들이었다. 모두가 서먹하게 악수를 나누고 인사를 하고 명함을 주고받은 뒤에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약속이라도 한 듯 스마트폰을 꺼내 들여다보는 것이 아닌가. 우린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각자 자신의 세계로 떠나가고 없었다. 가족끼리 외식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제 사람들은 직접 만나고 부딪치는 것보다 스마트폰이라는 기계를 통해 연결되는 것을 더 선호하는 듯 보인다. 더구나 스마트폰을 통해서는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사람들과 대화가 가능하다. 대화창을 몇 개 열어 놓고 올라오는 문자를 읽고 거기에 답을 남기면 그만이니까 이보다 더 편리할 수 없다.

그런데 이처럼 원하기만 하면 수많은 사람들과 언제든 연결될 수 있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외롭다고 말한다.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느낀다. 그런데 외롭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사람을 만나면 피곤하다고만 한다. 왜 그러는 걸까?

현대 사회는 속도와 확산의 시대다. 지구 한 쪽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유행이 수초도 안 걸려 그 반대편에 도착한다. 더불어 사람들의 이동도 잦아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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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에 있어서도 스쳐 지나가는 만남이 많아졌다. 그럴 때는 어떻게든 짧은

시간에 상대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것이 중요해진다. 즉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해 지는 것이다.

그런데 남이 날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해질수록 삶은 매우 불안정해진다.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에 대한 확신이 줄어들고, 자꾸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고, 타인의 요구에 순응해야 할 것 같은 상태에 놓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인의 평가를 두려워하고, 자신을 통제하는 타인에게 분노하며 가까이 하고 싶지 않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 결과 사람들은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된다. 내 짝도 언제 마음이 돌아설 지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헤어질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한다. 그가 떠나도 내 삶에는 아무런 여파가 없도록 말이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깊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상처 없는 삶이란 없다. 그리고 우리는 상처에 직면해 그것을 이겨내려고 애쓰면서 조금씩 단단해져 간다. 굳은살이 박이면 소소한 아픔은 그냥 넘길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굳은살이 있어야 더 큰 상처가 왔을 때도 그걸 이겨나갈 힘이 생긴다. 하지만 상처를 계속 피하게 되면 굳은 살이 생기기는커녕 아주 조금만 찔려도 죽을 것처럼 아파하게 된다. 상처 자체에 취약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상생활 자체가 버거워진다.

그런데 사소한 일까지 모두 상처라고 말하면 우리 삶은 문제 덩어리가 되 버린다. 왜냐하면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누가 나에게 어떤 위해를 가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즉 상대방을 가해자로, 나를 피해자로 만들어 버린다. 그것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것이고, 정신적 치료가 필요한 일이 되어 버린다.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고치고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내 힘으론 해결불가능한 문제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상처는 우리가 무언가를 절실히 원하기 때문에 받는 것이다. 무언가 원하는데 그게 내 바람대로 되지 않을 때 상처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원하는 게 정말 합당한 것인지 부터 생각해 보라.

■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나를 지키는 법

“시어머니 때문에 미치겠어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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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나 같은 시어머니가 어디 있다고.”

가끔 독자들이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해 올 때마다 나는 매우 곤혹스러웠다. 나 또한 고부간의 갈등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시어머니는 남자와 여자가 같은 상에서 밥을 먹는 것을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으신 분이었다. 또 자수성가한 아들이 기특하기만 한데 그 아들의 뒷바라지를 해야 할 며느리가 결혼하고 밖에서 일하는 걸 늘 못마땅해 하셨다. 군의관인 남편 월급만으로는 집안 살림을 꾸릴 수가 없는 형편이었는데도 말이다.

조금이라도 늦게 집에 가면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너무 속상해서 변명이라도 할라치면 어머니는 늘 그러셨다. “내가 그것도 모르는 사람이냐?” “내가 애들도 하나 제대로 못 키우는 사람이냐?” ‘잘난’ 의사며느리가 하는 모든 일이 마음에 안 드셨던 게다.

시어머니가 너무 밉고 화가나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매일 새벽까지 끙끙거리던 어느 날 갑자기 ‘이러다 내가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나는 살기 위해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다음은 많은 시행착오 끝에 찾아낸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나를 지키는 법들이다.

1. 외워 버려라

시어머니는 절대 바뀌실 분이 아니다. ‘우리 시어머니는 원래 저래’하고 인정해 버렸다. 그래서 나는 엄마 때문에 고민하는 환자에게도 똑같은 처방을 내렸다. “어차피 안 고쳐질 텐데 그냥 외워버리세요.” 외우다보면 시어머니가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텐데, 저런 상황에서는 이런 행동을 보이실 텐데 하는 패턴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더 나아가 어떤 말을 하실지 예측이 가능해 진다. 그 경지에 달하면 신기하게도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게 된다. 시어머니가 뭐라고 해도 “아, 예” 하며 은근슬쩍 넘기게 되고, 시어머니가 곧 화를 낼 것 같으면 미리 선수쳐서 다른 이야기를 꺼내 갈등 상황을 피하게도 되었다. 그러니 안 고쳐질 사람인데 계속 얼굴을 보고 살아야 한다면 그냥 외워버려라.

2. ‘~~하는 척’이 필요한 때가 있다‘

사람들은 ‘~하는 척’을 굉장히 싫어한다. 솔직하지 못하고 가식을 떠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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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생각해서다. 왜냐하면 보통 ‘~하는 척’은 내 자존심을 누르고 남들에게 맞춰 주거나 인정받고 싶을 때 하게 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는 척’이 솔직하지 않은 것은 맞다. 그래서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 내 얘기를 듣는 척만 할 뿐 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고 있으면 화가 나고, 힘들어도 괜찮은 척하면 서운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일 때문에 만난 사람들에게까지 내 마음을 솔직하게 내 보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할 필요는 있지만 그 감정을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다 표현할 필요는 없다. 그럴 때 유용한 것이 바로 ‘~하는 척’이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휘둘리는 게 아니라 내가 그렇게 맞춰주는 것이다.

3. 그가 나에게 상처를 주고자 해도 내가 받지 않으면 그만이다

누군가 나를 다짜고짜 비난한다고 해 보자.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비난받는 것만으로도 모멸감을 느끼고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 거린다. 그러면 부당한 비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모욕을 준 상대에게 주먹이라도 날려야 할까? 아니면 그런 말을 들어도 싸다고 도망치는 게 편할까? 로마의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비난에 화를 내는 것은 그 비난을 받을 만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라 했다. 그러므로 주먹을 날리거나 상대에게 똑같이 화를 내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기분 나쁜 일을 당했을 때 우리가 맨 처음 받는 것은 ‘상처’가 아니라 상처받은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므로 ‘느낌’을 상처로 남길지 그냥 상대방에게 돌려주고 머릿속에서 지워 버릴지는 내 선택에 달려 있다.

누군가 상처를 주고자 해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않으면 그만이다.

4. 더 이상 그가 당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당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면 더 이상 고민하지 마라. 자책하지도 마라. 그가 당신을 함부로 한다고 해서 당신이 못난 존재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딱히 잘못을 한 것도 없는데 그가 당신을 괴롭히면 그가 못난 것이다.

당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만들고 싶다면 지금 그와의 관계를 풀기 위해서 너무 애쓰지 말고, 거기에 쓸 에너지를 당신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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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기술을 연마하고, 실력 키우기에 집중해서 그 사람 위로 올라가 버려라.

■ 멍 때리는 시간이 필요한 이유

우리나라 무용 치료의 선구자인 류분순 교수는 한국 임상 예술 학회에서 만났는데 벌써 만난 지 25년이 흘렀다. 네 살 차이를 넘어서 인생의 친구가 되어 서로 참 많은 것들을 나누며 살아왔는데 이제는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좋다. 그런 류 교수와 내가 만나오면서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서로 쉬라는 얘기였다.

“좀 쉬어 가면서 하세요.”

“그러는 교수님도 좀 쉬세요.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요.”

그렇게 둘 다 바쁘게 살았건만 나는 병에 걸리고 그녀는 건강하다. 아마도 그녀는 춤을 추었고 나는 춤을 추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의사와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온 30여 년 동안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다. 남들에게는 휴식과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해 왔지만 정작 나는 늘 바빴고 시간은 부족했다. 그래서 돌봄이 필요한 몸을 노예 부리듯 혹사시켰다. 일하느라 밥을 거르기 일쑤였고 때로는 잠까지 줄였다.

나는 왜 말로는 쉬어야 한다면서도 몸을 혹사시켰던 걸까? 돌이켜보면 나는 그 어떤 일이든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직장에서든 집에서든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없으면 일이 잘 안 돌아가거나 잘못될 거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될 일까지 도맡아 하곤 했다. 정신없이 바쁘게 사는 것을 여기저기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다는 증거라고 생각해 좋아하기까지 했다.

그래서일까, 과거의 나처럼 “바쁘다”는 말을 달고 사는 사람들을 볼 때면 왠지 더 안타깝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일하는 데 길들여진 사람들은 삶에서 쉴 시간을 먼저 만들어 두어야 한다. 일을 하다가도 그 시간이 되면 무조건 휴식을 취하겠다고 작정을 하고 그에 맞는 계획을 미리 세워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1년 계획을 세울 때 휴가 계획을 먼저 세우라고 하자 남편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함부로 자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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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울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당신 없어도 병원 잘 돌아간다니까요.”

밥을 먹으면 소화시킬 시간이 필요하듯 뇌도 쉴 시간이 필요하다. 여태까지 들어온 자극이나 머릿속에 쌓인 정보들이 소화될 시간이 있어야 한다. 뇌는 쉬는 시간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자극과 정보들을 내적으로 재배열하고 통합해 어떤 건 걸러 내고 어떤 건 의미를 두는 등 사고를 형성한다. 그런데 뇌가 쉬지 못하면 끊임없는 자극에 반응하느라 지쳐버린다. 그러므로 어떤 답이 계속해서 떠오르지 않을 때는 그냥 문제를 잊어버리는 것도 방법이다. 뇌가 그 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들을 통합할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몸도 뇌도 때론 쉬어야 한다. 잠시 멈추어 선 그 시간에 우리는 그동안 경험한 것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더 잘 이해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몸은 피곤한데도 계속 쉬지 못하고 있다면 의도적으로 ‘잠시 멈춤’을 스스로에게 허락해 보라. 잠시 멈추는 시간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불안함은 줄어들고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나는 요즘 몸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몸이 보내는 신호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며 몸을 피로하게 만들지 않는다. 피로하면 일단 쉰다. 쉬면서 하늘을 쳐다보고 바람도 느끼고 가볍게 산책을 가기도 한다. 운동도 열심히 한다. 그러면 해야 할 일들 가운데 못하게 되는 일들이 생기는데 그래도 괜찮다. 다른 사람이 나 대신 잡지에 들어갈 원고를 쓸 테고, 다른 사람이 나 대신 나 대신 강의를 할 것이다. 꼭 내가 안 해도 되는 것들이다. 그걸 안 하면 내가 마치 무용지물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 이제는 없다. 그리고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오히려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나에게 멍 때릴 자유를 굉장히 많이 허락할 작정이다.

■ 열등감을 가지고도 즐겁게 사는 비결

한 여자 아이가 있었다. 집에 놀러 온 손님들은 여자아이를 보면 농담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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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담 반으로 그랬다. “이 집은 왜 셋째 딸이 제일 안 예뻐?” 큰언니와 둘째 언니 그리고 여동생은 얼굴도 조막만하고 하얀 피부에 눈도 큰 미인이고, 남동생은 누가 봐도 잘 생겼는데 셋째 딸인 여자아이는 자기가 봐도 그다지 예쁜 구석이 없긴 했다. 남자 아이들한테도 인기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여자 아이는 자기가 제일 못생겼다고 생각했고 더 나아가 자신이 늘 부족하다고 여겼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점점 두려워졌다.

사람들 앞에만 서면 자꾸 떨리고 어쩔 줄 몰랐다. 발표도 잘 못했다. 그래서 반장 같은 걸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여자 아이는 바로 나였다.

어릴 적 나는 정말로 열등감이 많았다. 인간이 살아 나가는데 가장 중요한 건 사랑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여자만 보면 예쁜지 안 예쁜지부터 따지는 세상에서 예쁘지 않다고 평가 받는 것은 여자 아이에게 굉장한 수치심을 불러일으킨다.

어린 시절 여자 아이에게 못생겼다는 열등감은 자존감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자존감은 타인의 시선을 통해 형성된다. 자존감이란 말 그대로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인데 자신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타인의 반응을 보고 알 수 있게 된다.

사실 열등감은 어느 누구에게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을 다 잘하거나 모든 것을 완벽히 갖춘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등감의 뿌리가 너무 크고 깊으면 그 사람의 인생은 어둡고 불행해진다. 열등감이 크고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자신이 못나고 무가치하다고 믿기에 행복해질 수 있는 많은 기회와 가능성을 애당초 포기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열등감이 늘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나는 못생겼고 부족하다는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책을 많이 읽었고 공부도 더 열심히 했다. 남에게 내 부족한 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뭘 하든 더 완벽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못 생기고 뭔가 부족하다는 게 장점은 아니지만, 그것 때문에 존재 자체가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우리 주위에는 못생긴 외모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매력으로 주위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이들이 분명 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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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이다. 또 부족한 면도 있지만 다른 장점이 뛰어나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사람들도 있다. 즉 못생겼고 부족하다는 사실이 인생을 망치는 이유는 될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못생겼고 부족하다고 말 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내 존재 가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으로 자존감이 낮다면 우선 잘못된 시각부터 교정해야 한다. 열등감이 너무 깊어 모든 것이 두렵다고 말하는 환자에게도 그렇게 이야기했다.

“당신이 스스로 바라보는 시각으로 인생은 흘러가게 되어 있어요. 당신이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보면 인생도 그렇게 흘러가고, 당신이 실패자로 보면 인생도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바라보는 시각 말고, 당신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그것부터 결정하세요.”

스스로를 한심하고, 모자라고, 허둥대는 결점투성이로 바라보면 인생도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착하고, 남을 배려하고, 뭐든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고 바라보면 인생도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똑같은 나이인데도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뀌는 것이다.

■ 늘 혼자가 편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혜은 씨의 별명은 ‘언터처블(untouchable)’이다. 자기 일은 깔끔하게 처리해서 업무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절대 손해를 보지 않으려 해서 누군가 가욋일을 시키면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죠?” 라고 따박따박 따졌다. 게다가 자신이 세운 원칙이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좀처럼 양보하는 일이 없어서 동료들과 자주 부딪혔다.

혜은 씨는 독립적인 사람이고 싶어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을 매우 수치스럽게 여겼고 일이 안 풀릴 때조차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밤을 새서라도 혼자 끙끙거리며 문제를 풀어 나갔고 그런 자신에게 자부심을 느꼈다. 게다가 독립성을 미덕으로 꼽는 현대사회는 그녀를 부추긴다. 독립성을 추구하는 분위기에서 타인에게 의존하게 되면 뭔가 미성숙하고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비쳐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타인의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하지만 혜은 씨가 혼동하는 게 하나 있다. 바로 독립과 고립의 차이다.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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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은 스스로 자신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런데 사실 독립은 의존해야 할 때 의존할 수 있는 능력을 전제로 한다. 살다보면 남들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반드시 온다. 그럴 때 독립적인 사람은 당당하게 도움을 청한다. 또 누군가 자신을 필요로 할 때 기꺼이 도움을 준다. 타인의 도움은 잠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고, 자신의 일을 주관하는 사람은 자기라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와달라고 했다가 자칫 인생의 주도권마저 타인에게 내줘야 할까 봐 두려워하는 이는 선뜻 타인에게 도와 달라고 하지 못한다. 그럴 경우 그것은 독립이 아니라 고립이 되어 버린다. 혼자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는 것이다.

나는 혜은 씨가 자기 스스로는 독립적이라고 믿고 있지만 벽을 쌓은 채 자기만의 성에 갇혀 고립을 자처하는 것이 아닌지 우려스럽다. 그리고 성 안에서 혼자 편하고 즐겁게 살면 다행이지만 혹시라도 누군가가 성에 침입할까봐 항상 보초를 서면서 긴장한 채 사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그녀의 지나친 자기 보호 반응은 주변 사람들까지 덩달아 긴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 그녀는 상처 입기 싫어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싶다지만 상대의 입장에서는 아무 잘못도 없이 일방적으로 선긋기를 당하니 기분 나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중에 혹시나 혜은 씨가 도와 달라고 손을 내밀어도 그들이 손을 기꺼이 잡아줄 지 의문스럽다.

늘 혼자가 편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영국의 분석가인 페어베인에 의하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동은 대상 추구의 본능이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거역할 수 없는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 하고 그로부터 보살핌을 받고 싶어 하며, 무엇이든 공유하고 싶어 한다. 좋은 것, 맛있는 것, 재미있는 것은 보면 사람들은 혼자서 그것을 경험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한다. 아마도 재미있는 장면을 보고 엄마를 부르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을 것이다.

혼자여도 좋지만 둘이어서 더 좋고 셋이라서 더 좋을 수도 있다. 사람들과 부대끼고 치이다 어쩔 수없이 마음의 문을 닫아 버렸다면, 그래서 애써 혼자가 편하다고 말하고 있다면 한 번쯤 생각해 보라.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아 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정말 좋은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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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충고를 잘 하지 않는 까닭

나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여자에겐 너무 힘들다며 의대 진학을 반대 하셨다. 하지만 나는 기어이 의대에 들어갔다. 그 일로 나는 집안에서 아버지의 고집을 꺾은 유일한 자식이 되었다. 그런데 의대에 들어간 뒤 또 한 번 아버지와 부딪치게 되었다. 당시는 연극을 한다고 하면 ‘딴따라’라고 얕잡아 보는 분위기였는데 그럼에도 나는 개의치 않고 의대 연극반에 들어갔다

나는 그렇게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걸 했더랬다. 그런 내가 누군가에게 충고를 할 자격이 있을까?

충고는 기본적으로 ‘너는 틀렸다’는 뉘앙스를 품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틀렸더라도 막상 그것을 지적하면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할뿐더러 청개구리처럼 엇나가고 싶어 한다. 나도 충고를 들으면서 엇나가고 싶은 마음을 느꼈었다. 그러니까 내가 충고를 하지 않는 첫 번째 이유는 내가 충고를 들었을 때 싫었기 때문이다. 내가 싫은 건 남도 싫은 법이다. 그리고 아무리 충고를 해 줘도 그 충고가 들리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듣고 싶은 말만 듣고 결국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 충고는 웬만하면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리고 나는 상대방도 틀릴 수 있지만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내 충고가 옳을 수도 있지만 틀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누군가에게 충고를 하고 싶다면 그를 내 생각대로 통제할 수 있을 거라는 환상부터 버려야 한다. 어차피 그는 당신의 충고를 듣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냥 가만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난 후 조심스레 당신의 의견을 말해 주어라. 그리고 결정은 그에게 맡겨라. 그가 설령 잘못된 길을 선택하고, 나중에 그것을 후회할지안정 그것은 그의 몫일 뿐이다.

2016. 2. 1

* 다음에 Chapter 4~5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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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2)

- 파킨슨 병을 앓으면서도 유쾌한 심리학자가 인생을 즐기는 법 -

■ 김혜남 정신분석 전문의

Chapter 4. 아들과 딸에게 보내는 편지

■ 내가 한 일 중에 제일 잘한 일은 너희들을 낳은 일이었다

아들아, 네가 태어난 그때를 떠올려 본다. 너를 낳기 전 주변 사람들이 말했지. 아마 아이를 낳으면 고구마처럼 못생긴 얼굴에 깜짝 놀랄 거라고, 그렇지만 네 꼬물거리는 손가락과 발가락, 오물거리는 입술, 울다가도 말똥말똥 쳐다보는 눈망울이 나는 그렇게 예쁠 수 없었다. 아니 신비로웠다. 내가 낳은 아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정말로 네가 천사는 아닐까 생각했다.

인턴 때 첫 아이를 유산하고 2년이 흘러 너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내 머릿속은 온통 널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눈을 딱 감고 두 달간 휴직을 신청했다. 레지던트 2년차였기에 당연히 주변 시선이 곱지 않았지만 당시 내게 너보다 더 중요한 건 없었다. 다행히 너는 별 탈 없이 자라 주었다.

정신분석 이론 중 ‘애착 이론’이라는 게 있다. 생애 초기에 어머니로부터 받은 적절한 돌봄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본적인 토대를 형성해 준다는 것이다. 즉 배고플 때 먹여주고, 울면 달래주고, 졸릴 때 재워 주는 엄마를 통해 아이는 자신과 타인과 세상에 대한 믿음을 키워 나갈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너에게 그런 엄마가 되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난 그때 스물일곱의 젊은 엄마, 힘든 병원 일을 마치고 퇴근하면 너를 먹이고 씻기고 재우느라 잠도 못 자는 날이 많았고, 동료들은 저 멀리 앞서가는 것 같아 마음은 불안했다.

네가 조금 자라서 다섯 살이 되었을 때 동생이 태어났지 동생은 태어나자마자 심장병 판정을 받았다. 툭하면 아프고 제대로 먹지 못해 작디 작은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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째를 업고 병원에 가기 일쑤였다. 그때 네가 말했지. 엄마가 어느 날 없어지면 동생이 입원한 거라고, 그때 너도 어린아이였는데 얼마나 서운했을까?

네 아빠는 군의관이어서 집을 자주 비웠고 실질적인 가장이었던 나는 병원 일에 치이고 시부모님 모시고 사느라 스트레스가 심했고 그러다보니 알면서도 너에게 소리를 지르고 혼을 냈지. 너무도 부끄러운 기억이다.

그러나 서툰 엄마를 성장시켜 준 것도 너란다. 네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얼굴보기 힘든 남편, 성정이 강한 시부모님 사이에서 더 이상은 못살겠다 싶어 이혼을 결심하고 너에게 말했다. 엄마랑 동생이랑 나가서 살면 어떻겠느냐고, 그러자 네가 물었지.

“엄마, 아빠랑 싸웠어?”

“아니 엄마가 조금 힘들어서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어.” 너는 대답도 안 하고 방으로 쑥 들어가더니 한참 후에 나와 이렇게 말하더구나.

“엄마, 제일 소중한 게 뭔지 알아? 가족이야. 그건 돈 주고도 못 사는 거야.”

그때 나를 붙들어 준 게 바로 너였다. 네가 없었다면 나는 일시적인 스트레스와 짜증을 견디지 못하고 가족의 소중함을 놓치고 말았을 거다.

나를 진정한 엄마로 만들어 준 아들아. 정말 고맙다. 내가 이제까지 제일 잘한 일을 꼽으라면 그건 정신과 의사가 된 것도, 글 쓰는 작가가 된 것도 아니다. 바로 너와 네 동생을 낳은 일이지. 네가 어렸을 때 나는 네 안의 외로움과 동생에 대한 미움을 발견하곤 했다. 엄마인 내가 네게 준 상처의 흔적들인 게지. 하지만 네가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이 세상에 완벽한 부모는 없다는 사실을.

네 외할머니는 나를 낳자마자 6개월간 아프셨다. 날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나는 엄마의 정이 그리웠는지 늦게까지 손가락을 빨고 오줌을 자주 쌌다. 어느 추운 겨울 날 내가 오줌을 싸자 외할아버지는 얇은 내복 바람으로 나를 내쫓으셨단다. 나는 이를 악물고 복수를 다짐하기도 했다.

당시 아버지는 소송에 휘말려 어려웠고, 어머니는 딸이 둘이나 있는데 또 딸을 낳아 시어머니의 눈치를 보던 시절이었다.

그때 내가 태어나 사랑을 받지 못한 건 내 탓이 아니라 그저 운이 없었던 탓이다. 네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도 젊고 서툰 부모였던 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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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어 비로소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나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상처를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 우리는 누구나 부족한 사람이고, 그래서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고받는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면 내 안의 상처 입은 아이를 안아 줄 수 있게 되고, 그러면 그 아이는 멈추었던 성장을 계속하게 되는 거지.

부족한 엄마를 두었건만 다행히 너는 참 괜찮은 청년으로 자라주었다. 타인을 믿고, 세상을 믿는 가슴 따뜻한 사람으로 말이야. 언젠가 엄마의 죄책감을 눈치 챈 네가 말했지.

“괜찮아, 엄마, 엄마는 나름대로 열심히 사느라 그랬던 거잖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 이래서 살맛이 나는 거지. 아들아, 앞으로 너는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나며 상처 주고 또 상처 받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렴. 그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것이 바로 성장이고 이미 그 힘은 네 안에 있다는 걸.

■ 나는 나의 삶을 살테니, 너희는 너희의 삶을 살아라

작년에도 어김없이 반가운 크리스마스카드가 도착했다. 미국 텍사스, 그 먼 곳에서 10년째 거르지 않고 보내오니 참 고마운 일이다. 그녀는 올 해 간호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고 조만간 아이를 가지려고 계획 중이라며 내게 축하해 달라고 했다. 내 마음도 뛸 듯이 기뻤다. 그녀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야

나는 14년 전 진료실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스물네 살의 앳된 아가씨였지만 표정은 70세 할머니처럼 지쳐 보였다. 그녀는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품은 사람처럼 아무 말도 없이 나는 째려보기만 했다. 뭘 물어도 “아뇨”, “다 그렇죠 뭐”하는 냉소적인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어.

끈기를 가지고 기다렸다. 그렇게 1년이 지난 어느 날, 문득 꺼낸 엄마 얘기에 그녀는 갑자기 폭풍 같은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눈물이 어찌나 침통한지 나조차 눈물이 그렁그렁 맺힐 정도였다. 그때부터였다. 그녀가 한 맺힌 어린 시절을 내게 꺼내어 놓기 시작한 것이.

그녀의 엄마는 순수하고 천사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180도 달라졌다. 그녀의 엄마는 교묘하게 딸을 학대하며 혼란 속에 빠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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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좋은 날엔 딸을 사랑한다며 숨 막힐 듯 안아 주었고, 기분이 상하면 갑자기 차갑게 돌변했다.

그녀는 엄마에 대한 분노와 죄책감으로 자신을 가치 없는 인간으로 폄하하며 스스로를 파괴시키기에 이르렀다. 마약중독, 남자와의 불륜, 감옥 출입 등으로 타락의 길을 가던 그녀는 불현듯 더 이상 이렇게 살면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어 치료를 위해 한국에 와서 나를 찾게 되었다.

“저는 엄마의 부속품에 불과해요.” 흐느끼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내가 말했다. “당신은 엄마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힘없는 어린 아이였어요. 하지만 지금 자신을 보세요. 당신은 보란 듯이 잘 살고 싶어 나를 찾아 왔어요. 인생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예요. 당신은 엄마와 달라요. 충분히 사랑받고 행복해질 수 있어요. 그러니 ‘내 인생을 살아가겠다 마음먹어요.’ 엄마의 인생은 엄마의 것이고 당신의 인생은 당신 것이에요. 당신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엄마는 결코 당신의 인생을 망가뜨릴 수 없어요.

엄마 때문에 성격이 비뚤어졌고, 아빠 때문에 사회생활에 문제가 있고. 부모 때문에 실패자가 되었다고 한탄하면서……. 부모가 자기를 망쳐 놓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사랑을 베풀 줄 아는 부모를 만났더라면, 능력 있는 부모를 만났더라면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을 거라 믿는다.

그러나 역사 속 인물들은 정 반대의 사실을 알려 주는구나. 사회적으로 명망 있고 성공한 부모의 자식들은 별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거나 불행한 삶을 산 경우가 많았거든 얼마 전 파블로 피카소의 손녀 마리나가 유산으로 받은 할아버지의 작품 300여 점을 내다 팔겠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다. 마리나는 피카소의 첫 번째 부인이 낳은 아들 파울로의 딸이다. 그런데 파울로는 평생 아버지의 운전기사 노릇을 하며 돈을 구걸하며 살았다고 한다. 마리나에게는 오빠가 하나 있었지만 그는 할아버지 피카소가 죽었을 때 장례식에도 참가하지 못했고 얼마 후 자살하고 말았다.

오빠의 죽음을 계기로 15년 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은 마리나는 피카소의 작품을 팔기로 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피카소의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 사람들은 내가 엄청난 유산을 받았다고 했지만, 그 안에 할아버지의 사랑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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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부모의 자식으로 산다는 것, 그것은 남들이 부러워할지 몰라도 당사자에겐 꽤 버거운 일이다. 부모의 업적과 비교 당할 수밖에 없다는 불안감을늘 안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지. 이는 특히 아들들에게 자주 발견된단다. 남자가 최초로 열등감을 느끼는 때는 어머니를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경쟁할 때다. 이들은 어머니를 독차지 하고 싶지만 자기보다. 훨씬 크고 힘센 아버지를 이길 수가 없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열등감을 느끼는데 이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부르지.

성공한 부모의 자식들은 부모로부터 학대당한 자식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머리위에 드리워진 ‘부모’라는 그림자가 아주 크다고 생각한다. 자기에겐 그늘을 벗어날 힘도 능력도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부모란 아주 커다란 존재도, 완벽한 존재도 아니야. 그들도 실수를 하고, 비겁한 생각을 하기도 하는 불완전한 인간이다. 다만 오랜 시간 노력해서 지금의 성과를 이뤄낸 것뿐이다.

그러니까 완벽한 부모에 대한 환상을 버려라. 그리고 부모로부터 자유로워져라. 부족하고 못난 부모를 탓할 필요도, 부모의 업적에 스스로를 옭아 맬 필요도 없다. 부모는 자식이 걸어가야 할 길의 이정표는 될 수 있어도 목표가 되어선 안 된다.

어른이 된다는 건 과거에 어떤 상처를 입었든지, 자기 인생은 자기 책임이라고 인정하고 더 이상 과거에 휘둘리지 않기로 결심하는 일이다. 그리고 부모에게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다. 자식들이 자라서 행복하게 사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부모들의 목적이자 행복이다. 이는 누가 뭐래도 자명한 사실이란다. 그러니 자식들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묵묵히 걸어가면 그뿐이다. 엄마는 엄마의 인생을, 아빠는 아빠의 인생을 살아갈 테니, 너희는 너희의 삶을 살아가라.

■ 사랑을 할 땐 그 사랑에 미쳐 보아라

“좋은 치료자 백 명보다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을 만나는 게 낫다.”

정신과 의사들끼리 자주 하는 말이다. 우스갯소리냐고? 결코 그렇지 않아 진정한 사랑은 우리를 훨씬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 준단다. 감추고만 싶던 나의 약점과 단점을 알고도 누군가 나를 진심으로 좋아해 주고 받아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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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다고 생각해 보렴. ‘내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구나’ 하는 긍정적인 확신을 갖게 되지 않겠니. 그래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감이 넘치고, 무엇이든 시도해보려고 한다. 지금까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심리적 장벽을 깨부수고 새로운 세계와 조우하며 자아를 확장해 나간다. 사랑 안에서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그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삶에 에너지가 넘치고 얼굴도 예뻐지지.

그래서 나는 사랑이 두렵다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아니, 그 좋은 걸 왜 안하려고 하느냐고.

사랑이 두렵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이란 현실에 뿌리 내린 감정이 아니라 저 하늘에 존재하는 완벽한 환상에 가깝다. 서로를 향한 열정은 결코 수그러드는 법이 없어야 하고 상대는 무결점의 존재여야 하며 끝없이 나를 지켜주어야 한다. 그래서 사랑의 현실을 견디지 못한다. 상대의 작은 실수나 단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딘가에 있을 진정한 사랑을 찾아 쉽게 돌아서는 것이란다. 그러다 새로운 누군가에게서 그 환상을 발견하면 뛸듯이 기뻐하며 그 사람을 이상화하기에 바쁘다. 이제 외롭고 고달픈 여정은 끝났다며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이해해 주고 외로움을 치유해 주리라 기대하지. 그러나 또다시 그의 단점과 실망스러운 행동이 눈에 띄면 그에 대한 환상은 다시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이렇게 소모적인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동안 사랑에 대한 불신은 더욱 깊어지게 된다.

그러나 점점 나이를 먹고 성숙해지면서, 사람들은 자신이 그렇게 이상적이지 않고 타인 또한 결점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생기면서 이상은 현실 가까이로 내려온단다. 즉 세상은 완벽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럴 수도 없지만, 그렇지 않아도 안심과 믿음을 갖는 거다.

어릴 때 너희들은 시도 때도 없이 물었다. 엄마랑 아빠는 어떻게 만났느냐고, 엄마는 아빠의 어떤 점이 좋았느냐고. 아빠는 의과대학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마당발이었다. 주변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지. 똑똑하고 리더십 있고 유머 감각까지 갖춘 너희 아빠를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어. 또 너희 아빠는 누군가 힘들어할 땐 먼저 가서 위로해 주고 고민거리가 있으면 발 벗고 나서서 해결해 주었다.

엄마에겐 그런 모습이 무척이나 멋있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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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성격을 고쳐보겠다고 연극반까지 찾아갈 정도로 내성적이고 수줍었거든.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손 내밀고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그러질 못하니, 아빠의 리더십에 콩깍지가 씔 수밖에.

그런데 엄마가 아빠에게 푹 빠졌던 바로 그 점이 결혼 생활에서 가장 걸림돌이 되더구나. 무슨 일만 생기면 여기저기서 네 아빠를 찾았고, 너희 아빠는 새벽에라도 부리나케 달려갔다. 당연히 집에 일찍 들어오는 일이 없었고, 자연히 집안일은 모두 엄마 어깨에 올려졌다. 신혼 때는 도대체 이 사람에게 가족에 대한 사랑이 있는 걸까 의심마저 들었어. 이 때문에 부부 싸움도 숱하게 했지.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이해가 되더구나. 아빠가 가족에게 사랑을 베푸는 방식이 엄마와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말이야.

- 어린 시절부터 친척 집을 전전할 만큼 가난했던 아빠 / 가부장적인 부모 밑에서 자라면서 생긴 장남으로서의 막중한 책임감 / 성공에 대한 욕망

운명의 짝은 불현듯 나타나는 게 아니라 서서히 만들어지는 거란다. 콩깍지가 걷혀도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의 장점과 단점, 약점과 강점, 모두 총체적으로 받아들이는 거지. 그래서 사랑을 한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다. 나와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아온 사람을 껴안는 거니까.

그러니 사랑이 다가올 땐 거부하지 말고 온몸으로 껴안아라. 사랑을 할 땐 그 사랑에 미쳐보아라.

■ 너희가 직장 생활에서 배워야 할 것은 따로 있다

국립 정신병원에서 전문의 자격을 딴 후의 일이다. 나를 무척이나 미워하고 괴롭히는 상사가 있었다. 나는 레지던트가 끝난 후에도 국립 정신병원에 남아 스태프로 일하고 싶었다. 정신분석이나 사이코드라마 등 열심히 공부한 분야를 제대로 써먹을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든 내가 이 병원에 발붙이지 못하게 만들려고 작정한 사람 같았다. 그와 같은 학교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성적이 나쁜 것도 아니고, 정원이 없는 것도 아닌데. 출신 학교 때문에 무조건 배척하니까 말이다. 게다가 이제 와서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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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다시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답답했다. 내가 노력한다고 풀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내가 뭐가 모자라 이런 대우를 받나 싶어 억울했고, 차라리 때려치울까 몇 번이나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병원에서 일하고 싶었다. 그래서 버티기로 했다. 잡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욕해도 못 들은 척 웃으며 대했다. 스태프가 못 된다 해도 일단 하는 데까지 해 봐야 덜 후회할 것 같았다. 그런데 하늘이 도왔는지. 나를 미워하던 상사가 예기치 않게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게 되었고 다행스럽게 나는 국립 정신병원에서 정식으로 일하게 되었다.

괴롭힘을 당하던 1년은 너무도 힘들었다. 그런데 훗날 돌이켜 보니, 거기서 배운 점도 많다는 걸 깨달았다.

상사와의 갈등은 조직에 들어가 일한다는 것이 나 혼자 잘났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님을 알려 주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굉장히 중요하며 무슨 일을 하든 나를 낮추고 조직에 맞춰가는 적응력도 꼭 필요한 능력임을 깨달았다. 아마 그가 없었다면 나는 내가 대단히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라며 기고만장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언젠가 한 번은 서른 살의 젊은 남자가 엄마의 병원을 찾아왔다.

- 명문대 졸업 / 대기업 취업 1년차 / 퇴사문제로 아버지와 갈등 / 병원을 찾음 / 퇴사 문제로 자기 아버지를 설득해 달라는 것임

- 퇴사의 이유 : 위에서 시키는 일은 전문대만 나와도 할 수 있는 허드렛일 같아서 과장에게 다른 업무 좀 주면 안 되겠냐고 했다가 사수에게 엄청 깨졌어요. 버릇없이 자기를 건너뛰었다나?

1980년대에 태어나 2000년대에 대학교를 다닌 서른 살 젊은이 들은 조직의 질서에 적응하는 걸 어려워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핵가족에서 자랐고 온라인 커뮤니티에 능숙한 그들은 수평적인 인간관계에는 익숙하나 상명하복식의 위계질서에는 서툴다. 또 바늘구멍 같은 입시 경쟁과 취업 경쟁을 일상적으로 경험했기에 협동이나 팀워크보다는 개인의 능력과 성과를 더 중시한다. 따라서 회사 생활을 하다보면 희생하고 양보해야 할 때도 있는데, 그들은 그것을 패배로 받아들인다. 조금의 불합리도 견디지 못하고 주어진 일만 완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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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해내서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엄마가 하나 알려줄 게 있다. 이 세상에 어떤 적응 과정도 100% 자신을 버려야 하는 경우는 없다. 적응이란 일방적으로 환경에 나를 맞추는 게 아니다. 나를 변화시키고 환경도 변화시키면서 내가 점점 확장되어 가는 게 적응이야. 심리학에서는 적응의 과정을 동화와 조절,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간단히 풀면 동화는 자신의 틀에 환경의 변화를 맞추는 것이고 조절은 환경의 변화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다.

신입 사원의 적응 과정은 동화보다 조절의 비율이 훨씬 클 거다. 내 의견을 주장하기보다 선배의 의견을 경청하고, 불합리한 제도라도 일단 따라가 봐야지. 하지만 이 과정을 ‘내가 신입이니까 져 주는 거야’, ‘내가 직급만 높았으면 확 갈아엎었을 텐데’하는 마음으로 억지로 따라가선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해. 순응도 내 사고를 확장시키는 과정이야. 내가 거부했던 문화나 방법들을 시도해보면서 미처 몰랐던 장점을 발견하고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힐 수 있으니까. 엄마가 상사로부터 조직 생활의 쓴 맛을 겪으면서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성장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적응해야 하는 동물이다. 그리고 적응은 곧 성장하고 발달해 나간다는 의미다. 그러니 아들아, 딸아. 너희에게 찾아온 성장의 기회를 차버리지 말아라. 훗날 적응하려고 애쓴 노력이 너희 삶의 레퍼토리를 훨씬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음을 깨닫게 될 테니 말이다.

■ 알을 깨고 나가는 건 원래 신나는 일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헤르만 헤세의 명작 <데미안>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소년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만나 어른으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아름다운 소설이지, 나는 이 소설을 너무도 사랑하지만 이 구절만큼은 아쉬움이 남는단다. 유독 성장통이 도드라져 보이기 때문이야. 모든 성장엔 고통이 따른다. 알을 깨는 고통이지. 그런데 고통뿐일까? 알을 깬다는 건 그 자체로 매우 신나는 일이다. 갑갑하고 좁은 세계를 벗어나 날개를 확 펼치는 일이니까.

엄마는 그걸 대학교 연극반 활동을 통해 깨달았다. 엄마는 고등하교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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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앞에서 책 읽는 것조차 힘들어 할 만큼 내성적이고 수줍음 많은 사람이었다. 그 성격을 고쳐 보겠다고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연극반에 가입했지. 1학년 겨울 방학 때 연극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에서 맏딸 역을 맡게 되었다. 비중도 크지 않았고 무대 위에선 실수 연발이었지만 첫 공연을 끝냈을 때의 희열은 최고였다. 사람들 앞에서 한마디도 못했던 내가 그 많은 관객 앞에서 연기를 해냈다는 성취감이었지. 그때부터 무섭게 연극에 빠져들었단다.

본과 4학년 때는 연극 ‘노비문서’에서 취발이라는 남자 광대 역할을 맡아 탈춤부터 디스코까지 소화해내며 무대를 휘젓고 다녔으니까. 연출을 맡은 전문 연출가에게서 연기를 더 할 생각이 없느냐는 칭찬도 들었단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것은, 연극에 미쳐있던 그 시절에 의과대학 성적도 함께 올랐다는 점이다.

물론 성적이 잘 안 나오면 아버지가 연극을 못하게 할까 봐 더 열심히 한 탓도 있지만 난생 뭔가에 미쳐본 경험이 다른 것을 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훗날 생각해 보니, 배역에 몰입해 성취해 낸 경험이 나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해 주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충분히 도전하고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을 심어 준 거지. 그래서 무엇이든 두려움 없이 시도해 볼 수 있었다.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자부심은 기대와 성공의 비율에 좌우된다고 말했다. 성공의 경험이 쌓일수록 자부심 또한 강화된다는 뜻이다. 또 자부심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든다.

나만 해도 연극을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연기에 소질이 잇는지 아예 몰랐을 테고, 몰입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정신 치료방법으로서의 사이코드라마를 시도할 때 나는 해보기도 전에 못한다고 했을 것이다. 쇠사슬로 발이 묶인 채 자란 코끼리는 충분히 쇠사슬을 끊을 만큼 힘센 코끼리가 되어도 그것을 끊지 못한다고 한다. 어릴 때 쇠사슬을 끊지 못했던 기억이 코끼리를 자포자기 상태로 만든거야. 이처럼 충분히 그 상황을 피할 능력이 있음에도 과거의 실패 때문에 지레 포기하는 것을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한다. 실패의 경험은 점점 더 도전을 어렵게 하고 성취와 멀어지게 만들지. 그런데 이런 상황일수록 작은 도전과 성취가 중요하단다.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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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을 한 번도 해 보진 않은 사람에게 혼자 해외여행을 가라면 무리일 수 있겠지만, 아직 안 가본 가까운 곳을 친구와 함께 가보라고 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시도해 볼 것이다.

작은 도전에 성공을 거두면 다음 도전이 더욱 쉬워진다. 도전도 무기력과 마찬가지로 학습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성공이 쌓일수록 우리는 실패 가능성보다 성공 가능성을 더욱 크게 보고, 실패하더라도 그 역시 성공을 향한 과정이라고 여기며 재도전하게 된다. 그러니 너희들은 결코 실수나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 더불어 앞날이 불안하고 자꾸만 위축될수록 작은 도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다시 말하지만 알을 깨고 나가는 건 무척 신나는 일이다. 몸집이 커져 어느 새 답답해져버린 알을 깨고 나와 세상을 훨훨 날아다니는데 신나지 않을 수 있겠니? 그리고 그렇게 만난 세상은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을 안겨준다. 어찌 보면 삶은 행동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 다시 말해서 경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다. 다양한 경험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다채롭게 만들어 준다. 철학자 파스칼의 잠언대로 우리가 인생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평생이 우리가 우주를 경험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라고 가정하고, 그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것뿐이다.

■ 가까운 사람일수록 해서는 안 될 것들이 있다

“차라리 내가 엄마 환자였으면 좋겠다!”

너희들이 예민한 청소년 시기에 이 말을 자주 했던 거 기억나니? 환자 이야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잘 들어 주던 엄마가 정작 집에 와서는 너희들 이야기엔 귀 기울이지 않고 잔소리만 한다면서 푸념했지. 꼭 요리사가 집에 와서 아무거나 시켜먹는 거랑 똑 같다면서. 참 미안하구나, 가장 아끼고 돌봐야 할 사람들은 너희들이었는데 말이야. 그런데 사람의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고 많은 어른들이 밖에서 이를 소진하고 퇴근한다. 그래서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오히려 소홀히 대하고 말지.

사실 사람들은 가깝지 않을수록 더 친절한 경향이 있다. 상대가 나와 가깝지 않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상대의 마음을 배려하고 원하는 것도 참으면서 의견을 조율한다. 갈등을 만들지 않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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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또 상대에게 기대하는 바가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서로 다르다는 것도 비교적 쉽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실망도 적지. 반대로 가까운 사이일수록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쉽게 상처받고 화를 낸다. 서로를 잘 알기에 오히려 깊은 상처를 줄 수 있고, 내가 상대로부터 무언가를 절실히 원하기 때문에 사소한 일에도 크게 마음이 상하는 거야.

작년에 내 병세가 악화되면서 걷는 것조차 힘들어지고 혼자선 몸을 뒤척이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때 너희 외할머니, 나의 팔순 노모가 내 병수발에 팔을 걷어붙인 거야. 병간호가 쉽지 않은 일이다보니 외할머니도 지쳐가던 어느 날, 약의 부작용으로 줄줄 흐르는 땀을 닦아 주던 외할머니가 문득 나에게 말했다.

“꼬라지가 그게 뭐니.”

무심결에 툭 던져진 그 말, 그 말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내 가슴에 깊은 상처를 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엄마가 나한테 어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어쩌면 엄마는 아이처럼 외할머니에게 매달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원하는 건 뭐든 엄마가 해줘야 한다고 떼쓰는 아이처럼 말이야. 하지만 아무리 친하고 가까운 상대라도 그는 나와 다른 욕구를 지닌, 나와 엄연히 다른 존재란다. 그런데도 둘 사이의 경계를 무시하고 그에게 헛된 기대를 품게 된다.

그가 나만을 위해 존재하길 바라고 내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주길 바라며 끊임없이 솟아나는 욕망과 욕구를 채워주길 기대하는 것이다. 이는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딸아, 언젠가 네가 말했지. 남자 친구 때문에 짜증이 난다고. 남자 친구가 통화중에 “우리 오늘 만날까?”하고 물었는데 네가 “피곤하다”고 답했더니 “그럼 며칠 후에 보지 뭐”라고 해서 서운하다고. 너는 남자 친구가 “내가 거기로 갈께”라고 답해 주기를 바랐다면서. 그래서 너도 모르게 싸움을 붙여 화를 내고 전화를 끊었다고 했다. 그러나 딸아 좋아하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아끼고 쓰다듬지 않고 멋대로 던지면, 그릇처럼 다 깨져 버리니까. 그리고 한 번 깨어진 그릇은 다시 붙이기도 어렵단다.

베이징 사범 대학 교수 위단이 쓴 <논어심득>에는 이런 말이 있다. “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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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피고 나면 시들 일만 남게 되고, 달은 꽉 차게 되면 기울 일밖에 남지 않는다. 활짝 피기전이나 꽉차기 전에는 그래도 마음속에 기대와 동경이 있는 법이다. 친구나 가족의 관계도 모두 이와 같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만 확 트인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가까워진다는 것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게 아니다. 사랑이건 우정이건 두 사람이 친밀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상대가 나와 다른 사람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것이다.

가족은 눈물로 걷는 인생의 길목에서 가장 오래 가장 멀리까지 배웅을 해 주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꼭 가족이 아니어도 언제든 나를 믿고 지지해 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는 불안하고 두려운 인생도 묵묵히 걸어갈 힘을 얻는다. 그런 점에서 친밀함이란 외로운 이 행성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선물이다. 그러니 그것을 방치하지 말고 꾸준히 물을 주고 가꾸어 나가거라. 그 꽃이야말로 우리의 인생을 더욱 아름답고 향기롭게 만들어 주니까.

■ 직장 선후배를 굳이 좋아하려 들지 마라

딸아 얼마 전에 네가 물었지. “엄마, 회사에 죽도록 싫은 사람이 생기면 어떡해야 돼?” 혹시 네가 회사에서 트러블을 겪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어 슬쩍 물으니 웃으면서 친구 얘기라고 하더구나. 네 친구는 성격이 맞지 않은 팀장 때문에 매일 출근하는 게 고역이라고 했다. 조용하고 차분한 친구와 달리 팀장은 말투도 직설적이고, 사람들 앞에서 면박 주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사무실이 떠나가라 큰소리로 호통을 치곤했다. 그때마다 친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지. 그래도 정은 있는 사람이라서 혼낸 뒤엔 기분을 풀어 주겠다며 커피나 밥을 샀다. 그런데 친구는 그 시간이 제일 힘들다고 했다. 그는 듣고 싶지도 않은 자기 사생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친구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꼬치꼬치 캐물었으니까. 또 SNS상에서 친구를 맺고는 은근히 ‘좋아요’ 눌라주길 기대했다. 친구는 부담스러웠지만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상사의 노력을 무시하기도 어려어서 ‘좋아요’ 댓글까지 달곤 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회사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하고만 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회사의 존재 이유는 수익 창출이지 구성원들 사이의 친목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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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도 이미 그런 사람을 만났거나 앞으로 만나게 되겠지. 따라서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선 좋아하지 않은 사람과도 잘 지내고, 싫어하는 사람과도 같이 일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직장 동료 선후배와 가족 같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 타인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유지해 나가는 데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투여된다. 친밀하다는 것은 사로를 잘 알면서도 받아주는 특별한 관계가 된다는 뜻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 줄 용기와 타인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며 관계에서 오는 실망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친밀한 관계에는 평생을 통틀어 가족과 소수의 친구만이 포함되는 게 정상이지. 그런데 모든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다 보면 몸과 마음이 녹초가 되어버림은 물론, 인간관계가 의무이자 책임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인맥관리를 위한 거짓 웃음은 어색함과 불편함을 줄 뿐 결국 아무와도 친해지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회사 내 원만한 인간관계에서 서로에 대한 호감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주고받는 문제이다. 사실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은 주고받음이란다. 내가 하는 만큼 상대가 돌려줄 때에야 기본적으로 관계가 유지될 수 있지. 그러므로 싫은 사람과 일하게 되더라도 그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상대와 공정히 주고 받아야 할 것에 해서만 관심을 기울여라.

지금까지 살아보니 나와 맞지 않은 사람은 열 명 중 두 명 정도이더라. 그리고 나와 맞지 않은 두 명은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결코 가까워지는 법이 없더구나. 그러니 껄끄러운 사람들과의 관계 개선에 너무 에너지를 쏟아붓지 마라. 차라리 그 에너지를 여덟 명과의 즐거운 시간에 투자해라. 결국 인생은 즐거운 시간의 합만큼만 의이 있는 것이니까.

■ 딸아, 아무리 늙어도 섹스는 중요한 거란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 뜨겁게 빛난다. 그의 속삭임이 귓전을 간질이고, 그의 체취는 편안함과 긴장감을 동시에 선물한다. 그의 손길에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는 듯하고, 숨죽이고 있던 몸은 고유의 리듬을 회복하며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낸다. 이제 두 사람은 서로의 경계를 뛰어넘어 하나가 된 듯한 꿈을 꾼다. 이렇듯 섹스는 사랑하는 두 연인을 강력한 힘으로 묶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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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황홀한 시간도 잠시, 시간이 흘러 서로에게 익숙해지면서 열정도 조금씩 시든다. 아내는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지쳐 밤엔 잠자기 바쁘고, 하루 종일 직장 일에 치인 남편도 돌아오면 그대로 곯아떨어진다. 남편은 가끔 분위기를 잡아 보지만 피곤하다는 아내의 말에 이내 자존심이 상하고, 아내는 아내대로 서운함이 쌓여 부부 관계는 점점 더 소원해진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 부부는 서로를 그저 덤덤하게 대할 뿐이다. 시인 도종환은 이런 중년 부부의 모습을 ‘가구’라는 시에서 이렇게 표현했구나.

아내와 나는 가구처럼 자기 자리에 / 놓여 있다 장롱이 그렇듯이 /

오래 묵은 습관들을 담은 채 / 각자 어두워 질 때까지 앉아 일을 하곤 한다 / 어쩌다 내가 아내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 아내의 몸에서는 삐이걱 하는 소리가 난다 / 나는 아내의 몸속에서 무언가를 찾다가 /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 잊어버리고 / 돌아나온다 그러면 아내는 다시 / 아래 위가 꼭 맞는 서랍이 되어 닫힌다 / 아내가 내 몸의 여닫이문을 / 먼저 열어보는 일은 없다. /

나는 늘 머쓱해진 채 아내를 건너다보다 / 돌아앉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 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 그저 아내는 방에 놓여 있고 /나는 내 자리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 / 육중하게 어두워지고 있을 뿐이다

참 슬프지 않니?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가슴 떨리게 만들던 그 사람이 무생물의 장롱처럼 여겨진다니 말이야. 장롱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지만 평소 눈여겨보지 않는 물건이지. 그만큼 아무런 호기심도,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어쩌다 이루어지는 두 사람의 섹스는 무미건조하고 어색할 뿐이다. 마치 삐걱거리는 장롱문을 열다가 아무 것도 찾지 못한 채 머쓱해져서 이내 닫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섹스는 본능의 역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고 여기지. 그러나 성기능도 다른 몸의 기능과 마찬가지로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한다. 사랑의 감정이 시들지 않도록 끊임없이 신경 써서 가꿔야 하듯, 섹스도 그래야 해, 서로의 몸에 관심을 가지고, 서로의 욕구에 귀 기울이고 칭찬하고 격려하면서 따뜻하게 대해줘야 하지, 그래야 훗날 부부 사이의 유대감과 친밀감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섹스란 두 사람이 나누는 신체적 대화다. 이것은 말로는 할 수 없는 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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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환상과 욕망을 나누는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대화다. 그리고 이 대화를 통해 부부는 서로의 몸 뿐 아니라 영혼에 더욱 밀접해진단다. 그러므로 섹스를 포기한다는 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기쁨을 포기하는 것이자 부부만이 나눌 수 있는 강력한 유대감을 내팽개치는 일이야. 그러니 딸아,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이 들어가면서 불꽃같던 열정이 사그라지는 것 같은 날엔 엄마의 말을 꼭 기억했으면 한다. 섹스는 인간에게 주어진 그리고 인간이 즐겨야 할 귀중한 생의 선물이란 것을.

■ 소수의 성공자와 다수의 실패자 사이에서 산다는 것

너도 k아저씨를 알고 있지? 엄마의 대학 동창 k아저씨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스스로 학비를 벌어 의대를 졸업했다. 사업에 대한 아이디어가 뛰어난 그는 몇 년 전 큰 병원을 열어 400명의 직원을 거느린 병원의 원장님이 되었단다. 그런데 얼마 전 동창회에서 그러더구나. 마치 자신이 한 번 타면 내릴 수 없는 호랑이 등에 탄 것 같다고. 환자들에게 최선의 진료를 해주고, 직원들의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애쓰고 있으니 보람은 있겠지만, 언제나 새벽에 퇴근하는 그는 너무 피곤해 보였고 외로워 보였다.

사실 우리 세대의 행복은 성공이었고. 성공은 1등이 되는 거였다. 열심히 노력해도 1등이 아니면 의미가 없었다. 그 결과 이 세상은 소수의 성공자와 다수의 실패자로 나뉘었다. 사람들은 소수에 들지 못할까봐 늘 전전긍긍해야 했지.

그렇게 노력해서 남들이 알아주는 1등이 되어도 불만족스럽긴 마찬가지다. 1등을 하고 그것을 유지하기란 정말이지 쉽지 않다.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은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기 시작한 현대인들이 타인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동안 겪게 되는 고립감을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고독 좀 겪으면 어떠냐고? 남들이 박수쳐주고,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으면 그게 곧 행복이 아니겠느냐고? 그러기엔 현대사회의 1등은 너무나 힘들고 불안하고 외로운 게 아닐까? 엄마는 그런 1등이라면 줘도 갖고 싶지 않을 것 같다. 물론 1등을 해 본 적도 없지만 나는 지금의 나에 만족한다. 내 인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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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가꿔 나가고 있으며, 오늘을 좀 더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만족한다는 데 남들의 시선과 평가가 뭐가 그리 두렵겠는가.

얼마 전 재미있는 기사를 읽었다. 한 기자가 하버드 대학교의 경제학과 교수에게 물었다. 당신의 수제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교수가 침통한 얼굴로 대답했다. 수석으로 졸업하고 천재라고 불리던 학생들은 대부분 감옥에 있고, 사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평범하지만 성실하고 묵묵히 공부하던 보통 학생들이라고.

이런 점에서 엄마는 성공이란 부도 명예도 아닌, 경쟁에서 승자가 되는 일도 아닌, 오로지 자기실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단한 내면세계를 가꾸어 가는 거지. 이것은 누구보다 빨리해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 비교가 불가능하기에 진정한 자기만족도 가능하지.

너희들도 내 나이가 되어보면 알겠지만 누구보다 높은 직위에 있던 사람도, 남부럽지 않을 만큼 돈을 많이 번 사람도 언젠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은퇴해야 할 시점이 온다. 그때 그 사람의 품위를 지켜 주는 것이 바로 자기 실현을 위한 노력 여부란다.

엄마는 1등이 되는 게 좋지 않으냐고 부추기는 세상에 끌려가지 않도록, 너희의 내면을 더욱 단련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명심하렴. 너희의 인생을 멋진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건 그 누구도 아닌 100퍼센트 너희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 언젠가 결혼할 딸에게, 한 여자의 남편이 될 아들에게

엄마가 아빠와 결혼한지도 32년이 흘렀다. 누군가 말했듯 결혼이란 하루에도 몇 번씩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일이 더구나 날카로운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주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낄낄대는 사이가 부부인 거야. 가끔 아빠는 엄마에게 “나는 일하는 마누라를 둔 덕에 따뜻한 밥도 못 얻어먹고 살았다”며 투덜댄다. 그럼 엄마는 그동안의 아빠 잘못을 줄줄이 사탕처럼 쏟아낸다. 심장병 걸린 딸을 혼자 업고 입원시킨 일이며, 돈 한 푼 못 버는 남편 대신 다섯 가족을 먹여 살린 일이며, 시아버지 시어머니 병 수발을 도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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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일까지……. 그렇게 한바탕 쏘아붙이면 아빠는 “차라리 욕을 해라 욕을 해”하고 너털웃음으로 넘겨 버린다. 그런데 엄마는 알고 있단다. 아빠가 일부러 저렇게 지난 이야기를 꺼낸다는 걸. 까맣게 탄 엄마 속이 조금이라도 후련해지라고 일부러 건드린다는 걸. 그러고 보면 남편이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말하지 않아도 내 속을 훤히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니 얼마나 든든하니.

아빠가 바깥일만 챙긴다고 불평해도 실은 엄마의 모든 추억 속엔 아빠가 있다. 너희들이 옹알이를 했을 때, 두 발로 혼자 걸었을 때,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첫 상장을 받아 왔을 때 ……. 그 모든 기쁨을 함께 나눈 사람도 너희 아빠였어. 추억을 공유한다는 건 굉장한 일이다. 지난 시간이 의미 없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우리들의 가슴 속에서 여전히 숨 쉬고 있다는 증거니까. 만약 결혼 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면 추억들은 마치 아무도 모른 채 나 혼자 꺼내보는 서랍 속 일기장 같았을 거야.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하면 많은 걸 희생해야 하고 결과적으로 ‘나’를 잃어버릴 것 같아 결혼을 두려워한다지. 그런데 엄마는 반대라고 생각해. 엄마는 오히려 결혼을 통해 자아를 더 단단하게 정립할 수 있었거든. 엄마로, 의사로, 아내로, 며느리로 1인 4역을 해내느라 당시에는 너무 힘들고 억울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한계에 부딪히면서 나 자신을 제어하는 법을 배우고 더 포용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남들과 부대끼며 사느라 하고 싶은 일을 못한다고 나를 잃어버리는 것 결코 아니란다. 오히려 남들과 더불어 살면서 우리의 자아는 생각지 못했던 방향으로 확장되기도 하면서 성장한다.

이처럼 결혼은 두 사람이 만나 더욱 풍부한 인생을 만들어 가는 거란다.

부부 갈등 문제에서도 가족이라는 이유로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사람을 내 뜻대로 만들겠다고 고집을 피울 때 행복은 뒷문으로 사라진단다. 자기 성격도 쉽게 못 고치는 인간이 어떻게 남의 성격을 바꾸겠니. 여러 커플을 상담해 오면서 깨달은 건데 이런 사람은 만나지 않는 게 좋더구나.

1. 가치관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마라. (예, 소비지향적인 사람과 저축지 향적인 사람 등)

2. 느닷없이 연락이 끊기거나 사라지는 사람은 피하라.

3. 사사건건 확인하고 간섭하는 사람 (의처증이나 의부증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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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32년차 선배로서 너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

1. 쓸데없는 책임감으로 스스로를 괴롭히지 마라.

2. ‘나’만 희생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3. 나중에 후회할 행동이나 말은 하지 말라.

4. 결혼 생활은 힘든 게 당연하다. 연애는 먼 곳에서 산을 구경하는 거라면 결혼은 그 산을 직접 오르는 거다. 멀리서 봤을 땐 몰랐던 상대의 장점과 단점을 속속들이 경험하는 게 결혼 생활이라는 말이다. 게다가 현실의 문제까지 겹쳐지면 더욱 골치 아플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론 참고, 때론 싸우며 현명하게 그 산을 올랐을 때 누릴 수 있는 편안함은 남다르다.

Chapter 5. 삶과 연애하라

■ 나는 요즘 연애 중이다

나는 요즘 연애 중이다. 그것도 다섯 명과 동시에. 아침에 일어나면 스마트폰의 대화창부터 확인한다. 밤새 오간 이야기가 궁금해서다. 자주 만나면서도 늘 소식이 궁금하고, 힘든 일이 있으면 내 일처럼 걱정이 된다.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못한 속내를 털어놓고 서로 위안을 주고받는다. 그들을 생각하면 입가에 웃음이 번지니 연애와 다를 게 없다. 그들은 바로 30년 만에 다시 뭉친 나의 고등학교 친구들이다.

고등학교 시절, 흔히 비슷한 아이들끼리 몰려다지기 마련인데 우리 여섯 명은 성적도 제각각, 형편도 제각각, 성격도 제각각이었다. 키가 고만고만하다는 것과 누워 있길 좋아한다는 점뿐이다. 내 학창시절에는 새 학년이 시작되면 아이들을 키 순서대로 줄을 세워서 번호를 매겨 자리를 배정했다. 친구 없는 낯선 반에서 앞뒤로 앉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학교가 끝나면 매일같이 이집 저집 몰려가 이불에 발을 묻고 드러누워 그 집의 간식을 다 먹어 치우며 수다를 떨었다. 틈만 나면 눕는다고 우리들끼리 ‘눕잡스’란 별명도 붙였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가 신조였는지, 우리는 딱풀로 붙여 놓은 것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

그러던 친구들이 대학에 입학하고 각자의 길을 가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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뜸해졌다. 그리고 아이들을 다 키워 내고 삶에 여유가 생기면서 다시 뭉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그토록 오랜 시간 못 보고 지냈음에도 얼굴도 성격도 무척 비슷하다는 거다. 취미로 찍던 물방울 사진들을 모아 작은 전시회를 열던 날, 나는 가까운 지인들을 불러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6총사가 모여 한참 수다를 떠는데, 지인이 다가와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 자매가 이렇게 많으신 줄 미처 몰랐네요.” 순간 우리는 깔깔 웃음이 터졌다. 올망졸망한 키와 동그란 얼굴에 말투까지. 우리가 꼭 친자매처럼 비슷해 보였던 거다.

정신분석 이론에 따르면, 청소년 시기의 친구는 나를 비춰보는 커다란 스크린 이다. 친구를 통해 정체성을 다듬고, 자아를 계속 구조화해 나간다는 것이다.

작가 생텍쥐페리는 친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좋은 벗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공통된 그 많은 추억, 함께 겪은 그 많은 괴로운 시간, 그 많은 어긋남, 화해, 마음의 격동……. 우정은 이런 것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래된 친구가 더욱 좋은 이유다.

인간의 행복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런던 대학교의 한 연구에서는 원만한 인간관계와 우정을 뽑았다. 나이가 들수록 인간관계가 더 넓어질지는 모른다. 그러나 사회에서 내 속을 털어 놓고 마음 놓고 풀어질 수 있는 사람을 사귀는 일은 매우 드물다. 또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으니 도움이 되는 조언이라도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그러므로 척박한 세상에 나를 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나를 좋아해 주는 친구가 있다는 건 인생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값진 선물 중 하나다.

■ 내가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유

말하기 부끄럽지만, 10대 때는 나이든 사람을 보면 ‘무슨 재미로 이 세상을 사나’ 생각했었다. 표정 없는 지친 얼굴 위에 깊게 패인 잔주름이 고된 세월과 그들의 시름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저렇게 살 바엔 차라리 늙기 전에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새 나도 그만큼 나이를 먹어버렸다. 내 몸과 마음 구석구석에는 세월의 흔적들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다행히 10대 때 품었던 두려움은 괜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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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지금도 산다는 게 너무도 재미있고 흥미롭다. 그래서 만일 10대 때의 나처럼 생각하는 아이를 만난다면 자신 있게 얘기해 주고 싶다. “나이 든다는 것은 그렇게 무섭고 슬픈 일이 아니란다. 그건 나름대로 참 좋은 일이야. 세월은 젊음을 앗아가지만 그만큼의 다른 선물을 주거든.”

물론 탄력 있는 피부와 생기 넘치는 예쁜 얼굴, S라인의 탄탄한 몸매와 초콜릿 복근의 역삼각형 몸매 등 젊음을 숭배하는 현대사회에서 나이 든다는 것은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의 말처럼 ‘젊은이들의 세상에 이민 온 이방인’이 되어 버리는 쓸쓸한 일이다 그럼에도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노(NO)”다. 다시 그 시절의 예민함이나 방황, 열정이 가져다주는 고통을 경험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난 지금이 좋다. 세월을 거치며 단단해진 나 자신이 좋고, 세상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와 웬만한 일들은 수용할 수 있는 여유로움을 얻게 되어 편안하다.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 내 삶에 진정으로 중요한 게 무엇인지 볼 수 있는 눈 또한 세월이 준 소중한 선물이다.

나이 든다는 것은 상실의 연속이다. 건강을 잃고, 직장을 잃고, 경제적인 능력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는 과정이다. 여러 가지 상실 중 가장 견디기 힘든 건 아마도 자존감의 상실일 것이다. 사회에서 주변으로 밀려나고, 더 이상 맡아야 할 역할이 없어진다는 것은 노인들에게 큰 상처를 준다. 그런데 이러한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다시금 자신의 위치를 되찾고자 욕심을 부리게 된다. 조그만 일에도 무시당하는 것 같아 버럭 화를 내고, 버릇없다며 아랫사람들을 야단치기 일쑤고, 세상이 노인을 우습게 알고 공경할 줄 모른다고 불평이 많아진다. 그렇게 스스로를 젊은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에 더 어려운 사람으로 만들고 만다.

나이 들수록 욕심이 많아지는 것은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불안과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러나 노인은 젊음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젊음을 그 안에 간직하고 있다. 노인은 그가 살아왔던 길과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다 경험하고 그 풍경들을 다 기억하고 있으면서, 그 기억들이 몸으로 배어 나와 사계가 어우러진 한 폭의 그림을 이룬다. 이것은 나이 든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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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세월을 살아온 고목이 무성한 잎으로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에게 쉴 곳을 마련해 주듯, 지혜롭게 나이 든 노인들은 과거의 이야기뿐 아니라 미래의 희망도 함께 전달해 젊은이들에게 귀감이 된다. 그리고 주변을 가만히 들러보면 유명한 사람이 아니어도, 눈에 띄는 업적을 이루지 못했어도 살아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주변에 온기를 주는 노인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생의 절반을 훌쩍 넘긴 나는 종종 어떤 할머니가 되고 싶은지 그려본다.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세상의 세세한 부분에 감탄하며 감사히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할머니라면 좋겠다. 생의 불합리와 부조리도 웃어넘기는 여유와 포용력을 가진, 따뜻하고 유쾌한 할머니라면 좋겠다. 손자 손녀가 힘들 때 마음 놓고 푸념할 수 있는 할머니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성장하고 성숙해 나갈 나의 미래가 기대된다.

■ 내 인생의 버킷 리스트 10

‘버킷 리스트(bucket list)’는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들을 적은 목록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말의 어원이 뭘까 찾아보니 중세시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중세 시대에는 교수형을 집행할 때 죄수를 뒤집어 놓은 양동이(bucket)에 올라가게 한 다음 목에 올가미를 씌웠다. 그런 다음 양동이를 걷어차서 사형시켰는데, 거기에서 죽음을 뜻하는 속어 ‘킥 더 버킷(kick thebucket)’이라는 말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버킷 리스트’라는 말이 지금처럼 유명해진 것은 같은 제목의 영화 때문이었다.

- 영화의 주인공 카터 : 대학 시절 역사학 교수를 꿈꾸던 자동차 정비공, 시한부 선고를 받고 대학 신입생 시절 교수가 과제로 내어 준 ‘버킷 리스트’를 떠올리며 적어보다가 버림

- 다른 주인공 에드워드 : 병원을 열여섯 개나 가진 억만 장자, 폐암말기 선고를 받고 카터와 같은 방을 쓰게 됨. 에드워드가 카터가 버린 그것을 발견하고는 그냥 이대로 죽기는 아깝다며 자신과 함께 해보자고 제안

- 두 사람은 스카이 다이빙하기, 문신하기, 세렝게티에서 사냥하기, 머스팅 자동차로 레이싱하기, 인도 타지마할 방문하기, 눈물 날 때까지 크게 웃어보기, 다른 사람에게 도움 되는 일 하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와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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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 등등 버킷 리스트를 하나씩 실행에 옮기면서 잃어버렸던 삶의 열정을 되찾고, 연락을 끊었던 가족을 찾고, 자아를 찾으면서 인생의 의미를 깨달아간다.

“고대 이집트인은 죽음에 대해 멋진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거 아니? 영혼이 하늘에 가면 말이야, 신이 두 가지 질문을 했다네. 대답에 따라서 천국에 갈지 말지가 정해졌다고 하지. 인생의 기쁨을 찾았는가, 자네 인생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했는가. 대답해 보게.”

나는 인생의 기쁨을 찾았을까? 내 인생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했을까?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뒤로도 가끔 그 대사를 떠올리며 버킷 리스트를 작성해 보곤 했다. 최근에 작성한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1. 그림그리기(어릴 적 꿈이 화가였다) 2. 우리나라 바다 한 바퀴 돌기

3. 다른 나라 언어 배우기 4. 맛있는 요리 만들어서 대접하기

5. 나에게 상처 준 사람들에게 욕 실컷 하기 6. 세상의 모든 책 읽어 보기

7. 책 한 권 쓰기 8. 남편과 무인도에 들어가 일주일 지내기

9. 가족들과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기 10. 조용히 온 데로 다시가기

■ 한 번쯤은 공부에 미쳐 보아라

“엄만 어쩌다 아빠랑 결혼했어? 당장 헤어져.”

철없던 사춘기 시절 나는 고지식하고 완고하셨던 아버지가 너무 불합리하고, 아버지에게 늘 순종하는 어머니가 너무 답답해 보여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버지는 엄청나게 고지식하고 원리 원칙을 따지는 분이셨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수학 문제 하나를 물으면 정좌부터 가르친다. 그 다음엔 연필깎고 지우게 준비하고 공책을 똑바로 놓아야 한다. 자세가 올발라야 공부가 된다는 신조를 가지고 계신지라 준비에만 30분이 걸리고, 수학을 가르쳐 주시는 건 그 다음이었다. 그러니 내가 오죽 답답했겠는가.

이렇게 원칙주의자이던 아버지는 책을 무척 좋아하셔서 집에는 언제나 책이 많았다. 당시 100권짜리 세계 문학 전집이 집에 있었는데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그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내가 책을 좋아하는 걸 보신 아버지는 퇴근길에 서점에 들러 자식들을 위한 책을 한 권씩 사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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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이였지만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인간의 본성과 사람의 마음을 어렴풋하게 들여다보았다. 등장인물들의 욕망과 실수, 고통과 구원은 하나같이 너무 강렬해서 무서울 정도였다. 그래도 결말이 궁금해 책을 놓을 수 없었고, 다 읽고 나면 주인공들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아마 나는 책을 통해 억압해 놓았던 욕망과 누가 볼세라 꼭꼭 숨겨 놓았던 판타지를 분출했던 것 같다. 그 덕에 세상과 사람을 보는 눈이 조금은 깊어진 게 아닐는지.

고등학교 때는 공부가 싫었다. 그래서 얼른 대학에 가고 싶었다. 대학교에 입학만 하면 그 지긋지긋한 공부는 안 해도 되는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 웬걸 대학에 들어가니 고등학교 때보다 공부해야 할 게 훨씬 많았다.

수험생 때 보다 더 바쁜 의과대학을 다니면서 생각했다. ‘전문의만 따면 이제 정말 공부는 끝이다. 이제 배운 걸 평생 써먹으면서 살면 된다!’라고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내 평생 공부가 가장 재미있었던 시절은 다름 아닌 전문의를 딴 직후였으니 말이다. 시험도 없으니 공부해야 할 눈앞의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공부에 대한 압박이 사라지자 오히려 공부가 재미있어졌다. 본격적인 인간 심리에 대한 공부는 진작부터 궁금했던 분야여서 그런지 한 번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다행히 나는 너무 늦지 않게 다시 배우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공부를 하며 나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나니 공부의 영역도 점점 더 넓어졌다. 책을 보는 것도, 직장에서 일을 하는 것도, 두 사람이 만나 결혼 생활을 하는 것도, 아이를 키우는 것도,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는 것도, 하물며 옷 입는 것과 화장하는 것도 다 공부였다. 세상과 부딪치고 사람과 부딪치며 내가 어떤 인간인가를 알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법을 배웠고, 나를 조금 더 사랑할 줄 알게 되었으니까. 그렇게 50여 년을 살고 보니 산다는 것 자체가 공부임을 깨달았다.

로마의 정치가 카토는 80세의 나이로 그리스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스의 역사가 플루타르코스 역시 80세에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60을 넘긴 나이에 악기 연주를 배우기 시작했다. 또 90세 나이로 생을 마친 미켈란젤로의 좌우명은 ‘나는 아직도 공부한다’ 였다고 한다. 죽을 때까지 알고 싶고 성장하고 싶은 게 인간이다. 또 즐기려고만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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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면 공부야말로 기력이 달리고 활동 반경이 좁아지는 노년에도 인생을 재미있고 보람차게 살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다. 하지만 이 또한 젊은 시절부터 갈고 닦지 않으면 나이 들어 즐기기가 어렵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호기심을 발동시켜 공부의 세계를 탐험해봐야 한다.

■ 멀리 가고 싶다면 함께 가라

사람은 사람을 떠나 살 수 없는 존재다. 사실 인간처럼 미숙한 존재로 태어나는 동물은 없다. 웬만한 동물들은 태어나자마자 걷거나 아니면 스스로 기어가서 엄마의 젖을 빤다. 그러나 갓난아이는 혼자서는 젖을 찾아 움직이지도 못하고 꼬박 1년을 엄마 품에 안겨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후로도 10년간은 부모의 절대적인 보살핌을 받아야 생존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오랜 기간 타인의 돌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스스로 먹고 살 수 있는 상태가 되기까지 모든 과정이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일어난다. 즉 인간은 원하든 원치 않든 극히 관계 의존적인 동물이며,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을 찾아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때 공감이란 인간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다 왜냐하면 모든 동물이 자기 새끼에게 젖을 먹이지만 아기를 가슴에 안고 아기의 눈을 들여다보며 젖을 먹이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기 때문이다. 엄마는 젖을 먹일 때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행복과 경이감을 아기에게 전달한다. 아기는 엄마의 웃는 얼굴을 보며 따라 웃는다. 이런 애착과 사랑의 교감은 아기로 하여금 관계를 맺고 공감하는 능력을 갖도록 해준다. 만약 이 시기에 발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애착 장애나 자폐증, 성격 장애가 생기기도 한다. 그만큼 공감 능력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빨리 가려면 혼자가라.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빨리 가려면 직선으로 가라.

깊이 가려면 굽이돌아 가라.

외나무가 되려거든 혼자 서라.

푸른 숲이 되려거든 함께 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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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 전해 내려오는 격언이다.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는 환상을 갖기 쉽다. 돈만 있으면 웬만한 일은 해결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머나먼 인생길에서 마지막에 웃는 사람은 다른 이들과 함께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내가 싫은 일은 남에게도 하지 않고, 내게 좋은 일도 남에게 양보해 가며 더불어 나아갈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니 가끔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배려하는 일이 무의미하고 피곤하게 느껴질 때 이 말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사람은 절대 사람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 결국 인생을 완성 시키는 것은 사랑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음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인지 경험한다. 또 누군가를 목숨보다 사랑했던 경험은 이 세상에 ‘나’를 초월한 어떤 가치가 있음을 느끼게 한다. 뿐만 아니라 사랑에 빠졌을 때의 합치감과 시간이 정지된 듯한 느낌은 우리의 한시적인 인생에도 영원성이 있음을 깨닫게 한다. 즉 유한한 삶에서 무한한 가치를 체험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다가 간 흔적을 남기려고 애를 쓴다. 거대한 건물을 짓고 드높은 명예를 위해 목숨도 내놓는다. 그러나 나는 사람이 남길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흔적은 사랑이라고 믿는다. 비록 아플지언정, 사랑은 삶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어 준다. 또한 죽음 앞에서도 허무감에 빠지지 않게 해 준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중국의 현자가 물었다. “학문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을 아는 일이다.”

또다시 질문했다. “선(善)은 무엇입니까?” 현자가 말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다.”

내가 죽는 날을 상상해본다.

내 옆에서 두려움에 벌벌 떠는 나의 손을 꼭 잡아주고 “사랑한다”고 속삭여 줄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내가 “사랑한다”고 말해 줄 사람이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세상에서 누려야 할 사랑의 상처를 충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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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주고받았다는 증거일 테다. 그리고 그 순간은 비루했던 내 인생이 비로소 완성되는 시간일 것이다.

■ 삶과 연애하라

내 재미 목록 중에는 사진도 들어 있다. 원래 사진 찍기를 좋아해서 나는 여행가면 늘 ‘찍사’를 맡았다. 그런데 우연히 찍은 물방울 사진을 크게 확대해 인화해 봤는데 물방울 안에 온 세상이 비춰져 담겨 있음을 발견했다. ‘이렇게 작은 물방울 안에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세상이 있구나.’ 그때부터 나는 물방울 사진 찍기에 취미를 붙였다.

그리고 사진을 찍으면서 또 한 번 깨달았다. 세상은 내가 보고 싶어 하는 만큼 보여준다는 걸, 그러니까 재미있게 살고자 마음먹은 사람에게 이 세상은 재미투성이라는 걸.

나이 먹을수록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는 게 별로 재미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금이 저릴 만큼 재미있는 일이 우리 인생에서 그다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대부분은 평범한 일상이 이어질 뿐이다. 그리고 무엇이든 재미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실은 자신감이 없는 경우가 많다. 해 봤자 두각을 나타내지 못할 거라는 걱정, 잘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시도해 보기를 주저하게 만든다. 그 결과 그들은 어떤 일에서도 쉽사리 호기심을 갖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게 걱정하는 동안 우리는 그날 누릴 수 있는 진짜 재미를 놓쳐 버리고 만다. 우리가 하는 걱정의 40%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일들에 관한 것이며, 22%는 아주 사소한 걱정들이고, 4%는 우리가 전혀 손 쓸 수 없는 일들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나머지 4%만 우리가 정말로 걱정해야 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쓸데없는 96%의 걱정과 불평불만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느라 정작 오늘을 즐겁게 보내지 못하고 만다. 그에 대해 인도의 명상가 오쇼 라즈니쉬는 <장자, 도를 말하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삶은 경험이지 이론이 아니다. 삶에는 해석이 필요없다. 삶은 살아야 하고 경험해야 하고 누려야 하는 것이다. 매 순간 삶이 그대의 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그대는 머리로 궁리하고 있다. 그대는 삶에게 말한다. ‘기다려라.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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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러주겠다. 그러나 먼저 결정 내릴 시간을 달라.’ 삶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평생토록 삶이 그냥 왔다가 간다. 그대는 살아있지도 안고 죽어 있지도 않은 채 다만 고달프게 질질 끌려갈 뿐이다.”

그러니 이제 그만 생각으로 지쳐 버리는 삶에서 벗어나라. 오쇼의 말처럼 삶은 그냥 살아야 하고 경험해야 하고 누려야 하는 것이니까 발이다.

우리가 재미를 발견하려고 노력한다면, 감탄하고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다면 세상엔 즐거울 일투성이며 인생은 더욱 신나고 재미있어진다.

삶이 힘들고 어렵고 좀체 나아질 것 같지 않아 보여도, 어느 때나 즐길 거리는 분명히 있다. 그리고 즐길 거리가 다양한 사람일수록 불가피한 불운과 불행 또한 잘 버틸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중 유태인 수용소에 포로로 잡혀가 매일 수백 명의 유태인들이 소리 없이 불태워지는 광경을 목격해야만 했던, 그리고 정작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몰랐던 빅터 프랭클. 그는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그 경험을 토대로 ‘로고테라피’를 창시했는데 수용소에서의 하루를 다음과 같이 남겼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죽도록 피곤한 몸으로 막사 바닥에 앉아서 수프 그릇을 들고 있는 우리에게 동료 한 사람이 달려왔다. 그리고는 점호 장소로 가서 해가 지는 멋진 풍경을 보라는 것이었다. 밖에 나가서 우리는 서쪽에 빛나고 있는 구름과, 짙은 청색에서 핏빛으로 끊임없이 생과 모양이 변하는 구름으로 살아 숨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진흙 바닥에 패인 웅덩이에 비친 하늘의 빛나는 풍경이 잿빛으로 지어진 우리의 초라한 임시 막사와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감동으로 인해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한치 앞도 모르는 수용소에서조차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듯, 어느 때고 감탄할 만한 일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 로고테라피 : 빅터 프랭클이 창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과 아들러의 개인 심리학에 이은 정신 요법으로 소소한 일상에서 스트레스와 갈등을 겪으며 사는 현대인들의 다친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위로와 응원의 심리학

2016. 2. 9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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