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책은 도끼다
다시, 책은 도끼다
- 박웅현 인문학 강독회 -
■ 박웅현 지음
0 대학에서 신문방송학, 대학원에서 텔레코뮤니케이션 전공
0 제일 기획에서 광고 일을 시작
0 TBWA KOREA에서 크리에이티브 대표cco로 활약
0 대표적 광고카피
- 그녀의 자전거가 내 가슴으로 들어왔다 -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 넥타이와 청바지는 평등하다 - 사람을 향합니다
- 생각이 에너지다 - 진심을 짓는다 - 혁신을 혁신하다
0 저서 :책은 도끼다, 여덟 단어, 인문학으로 광고하다 등
■ 저자의 말 : 천천히
<다시, 책은 도끼다>라는 제목이 시사하듯, 이 책은 전작과 같은 맥락을 유지한다. 두 책 모두, 거칠게 정리하자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일 것이다. 나는 왜 책을 읽느냐가 하나, 나는 어떻게 책을 읽느냐가 둘. 첫 번째 질문에 대한 가장 짧은 은 ‘풍요로운 삶’이 될 것이고, 두 번째 질문에 대한 가장 짧은 답은 ‘천천히’가 될 것이다. 물론 <책은 도끼다>와 <다시, 책은 도끼다> 두 권의 책 공히 두 질문에 대한 답을 모두 담으려 노력하였다. 하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첫 번째 책은 첫 질문에 무게 중심을 두었고, 이 책은 두 번째 질문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
천천히, 이 책을 관통하는 한 단어를 꼽으라면 ‘천천히’가 될 것이다. 요즘같은 광속의 시대에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무엇을 하건 천천히 하려는 자세가 아닐까, 책 읽기도 예외는 아니다. 남보다 더 많이 읽고 남보다 더 빨리 읽으려 애쓰며 우리는 책이 주는 진짜 가치와 즐거움을 놓치고 있다. 천천히 읽어야 친구가 된다. ‘천천히 책을 읽는다’에서 ‘천천히’는 물론 단순히 물리적 시간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읽고 있는 글에 내 감정을 들이 밀어보는 일. 가끔 읽기를 멈추고 한 줄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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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 상황에 나를 적극적으로 대입시켜 보는 일. 그런 노력을 하며 천천히 읽지 않고서는 책의 봉인을 해제할 수 없다고 나는 믿는다.
2016년 초여름, 박웅현
1강. 독서는 나만의 해석이다
若將除去無非草(약장제거무비초) 베어버리자니 풀 아닌 게 없지만
好取看來總是花(호취간래총시화) 두고 보자니 모두가 꽃이더라.
이글은 자연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제가 어줍지 않게 말씀 드린 것들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버리자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눈에 담자고 보면 꽃 같은 것이 바로 좋은 글이 아닌가 싶습니다. <책은 도끼다>도 그렇고 이번 <다시, 책은 도끼다>역시 제가 생산해 낸 새로운 텍스트는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꽃이라고 보지 않고 풀로 본 채 베어버리는 것들을 다시금 꽃이라고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싶었습니다.
오늘 소개할 책은 쇼펜하우어의 <문장론>과 마르셀프루스트의 <독서에 관하여>입니다. 이들에게 무엇이 있을까? 니체를 비롯한 당대의 철학가들이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는데 과연 어떤 것이 쓰여 있을까 ? 버지니아 울프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도대체 이제 나는 뭘 쓰란 말인가?”하고 탄식했다는데 어느 정도이길래 그런 걸까? 이런 호기심 때문에 꼭 알고 싶은 작가들입니다.
이 책들을 다 읽고 나니 마치 이 작가들의 중심으로 들어가기 위한 사전이수과목을 들은 느낌이었습니다. 앞으로 프루스트와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을 때, 이 책을 읽은 것이 도움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열을 한다는 측면에서 두 책을 먼저 만나봤으면 합니다.
독서를 금하노라. 쇼펜하우어의 <문장론>
이 책은 글쓰기와 책 읽기에 대한 책입니다. 자세히 들어가기에 앞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이 책은 <책은 도끼다>와 정반대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책은 도끼다>는 책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우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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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면서 책에 대한 온갖 호들갑을 떠 떨었지요. 저는 책이 얼마나 좋은지에 대한 소개를 했는데 쇼펜하우어는 독서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독서가 해롭다고까지 하죠.
“다독(多讀)은 인간의 정신에서 탄력을 빼앗는 일종의 자해(自害)다. 압력이 너무 높아도 용수철은 탄력을 잃는다.”
완전 반대되는 이야기죠? 그렇다면 이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사람의 정신을 용수철이라고 비유한다면 책으로 자꾸 그것을 눌러 높은 압력을 가할 경우, 용수철이 힘을 못 쓰게 된다는 겁니다. 바깥의 권위에 짓눌리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갖지 못하게 된다는 얘기죠. 주체적인 사색 없이 모든 걸 책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 얘기를 하면서 쇼펜하우어는 세네카의 말을 인용합니다. “사람들은 판단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믿고 싶어한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복잡한 일이 있으면 그에 대해서 누군가 얘기를 해주고 정리해 주길 원하죠. 편하니까요. 정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언론이 무슨 얘기를 하면 따져보지 않고 무조건 믿잖아요.
쇼펜하우어는 이어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지나친 독서는 현실에 대한 감각을 떨어뜨리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처음엔 왜 독서를 하지 말라고 하나 의아했는데 신기하게 이 두 문장을 이어서 읽으니까 동의가 되요. 여러분도 잘 아실 텐데 책만 읽은 사람들의 고리타분함이 있지 않습니까? 이 문장은 그런 책만 읽은 사람들 특유의 답답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책을 읽지 말라고 말하는 거죠.
“진정으로 사색하는 자가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 그 소재를 현실세계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독서는 어디까지나 작가에 의해 가공된, 인공적인 현실이다.”
즉 내가 경험한 것으로부터 나만의 지혜를 찾아야 하는데, 남 얘기나 내가 직접 보지 않은 것에서 내 것을 찾는다는 말입니다. 에펠탑만 멋지다고 여기고, 우리 눈앞의 풍경은 무시하기 쉽습니다. 파리, 뉴욕, 런던과 비교하면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을 홀대해요. 이처럼 독서가 내 주변의 제대로 봐야 할 것들을 보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까닭에 쇼펜하우어는 독서를 반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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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학생이 그렇게나 꿈꾸던 유럽 여행을 갔는데 그곳에 나는 없었다. 그래서 눈먼 여행을 하고 왔다고 말하더군요. 그리고 이유를 생각해보니 자신이 무얼보고 싶은지 어떤 것을 느끼고 싶은지 찾지 못하고 그저 책 속에 나오는, 남들이 느낀 것들만 따라가려고 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급기야 유럽에 관한 책을 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여행을 망쳤다고 말했습니다. 그 친구는 남의 눈을 가지고 여행을 갔던 거죠. 이런 것들이 책 읽기의 병폐가 될 수 있다고 쇼펜하우어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럼 도대체 이 책을 통해 박웅현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하시겠지요. 힌트가 될 만한 구절이 이제 나옵니다.
‘많은 지식을 섭렵해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면 그 가치는 불분명 해지고 양적으로는 조금 부족해 보여도 자신의 주관적인 이성을 통해 여러 번 고찰한 결과라면 매우 소중한 지적 자산이 될 수 있다.’
이 부분이 바로 <책은 도끼다>와 결을 같이하는 부분인데요. 이게 책 읽는 방법이라는 겁니다. 많이 읽는 게 무슨 소용이냐고, 읽고 나서 내 것으로 만들라는 이야기죠 ‘호학심사 심기지의(好學深思心知其意), 즐겨 배우고 깊이 생각해서 마음으로 그 뜻을 안다’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논어>의 첫 구절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도 같은 얘기입니다. 여러분 모두 다 아는 문장입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냐는 뜻이죠. 중요한 것은 시습(時習 ), 즉 배운 것을 때때로 익히려는 노력입니다.
불혹(不惑)이라는 단어에 대해 제가 느끼는 게 그런 겁니다. 이전에도 불혹이라는 단어는 알았죠. 그런데 느끼지는 못했거든요. 그런데 생의 어느 순간을 지나가다보니 불혹이라는 단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분명히 알겠어요. 제가 느끼고 깨닫게 된 불혹은 남의 답에 대한 긍정이자 내 답의 긍정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르게 느꼈을 거예요. 저는 저만 아는 답을 찾은 겁니다.
쇼펜하우어는 독서를 하더라도 그렇게 내것으로 만드는 독서를 하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거죠.
‘알기 위해서는 물론 배워야 한다. 그러나 안다는 것과 여러 조건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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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깨달은 것은 엄연히 자르다. 앎은 깨닫기 위한 조건에 불과하다.’
내가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 ‘학(學)’도 필요하고 ‘호학(好學)’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말아야 해요, 빨리, 더 많이 검색할 줄 알아야 하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검색은 기계들에게 하라고 두고 우리 내부에서는 바깥에서 들어온 정보를 내 것으로 만드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기계의 검색창에서 나오는 의미를 거기서 그치지 않고 “왜?”라는 질문을 늘 갖고 살아야 합니다.
이 문장은 ‘지혜보다 높은 것이 있다. 느끼는 것’이라는 고은 선생의 말씀과도 통합니다. 지식보다 지혜가 좋죠. 그러나 지혜만 있어서 될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지혜를 온전히 느껴야 하는 겁니다.
“읽었으면 느끼고 느꼈으면 행하라.” 저의 메모입니다.
쇼펜하우어의 말도 같아요. 배우는 것. 좋다. 그러나 깨닫기 위한 조건으로 배워야 한다는 겁니다.
‘독서와 학습은 객관적 앎이다. 사색은 주관적 깨달음이다.’
책에 쓰여 있는 것은 객관적인 앎입니다. 사색은 주관적인 깨달음인거죠 이게 지식과 지혜의 차이 같아요.
쇼펜하우어가 또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나만의 고유한 사색에 의해 어떤 진리에 도착했다면, 비록 그 내용이 앞서 다른 책에 기재되었을지라도 타인의 사상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체험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산의 정상일지라도 오르는 사람의 개성과 방법에 의해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우리가 사색을 통해 기대하는 결과는 단순히 산 정상에 도달했다는 물리적 결과만이 아니라 정상에 도달하는 동안 겪었던 체험도 포함되어 있다.’
바로 이런 겁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데 그 생각을 누군가가 앞서 이미 했다. 그러니 내 생각은 소용이 없다가 아니라 내가 이런 문장을 내 삶에서 느끼고 살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가 되어야 해요. 이런 얘기를 뒷받침하기 위해 쇼펜하우어가 괴테의 문장 하나 소개하는 데 그 문장도 참 좋습니다.
‘그대의 조상이 남긴 유물을 그대 스스로의 힘으로 획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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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는 괴테의 이 말을 인용하면서 독서를 통해 깨달음을 얻어 나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먹은 음식이 소화되어 에너지를 만들어야만 인간이 살 수 있듯이 독서를 통해 내용을 기억해야만 정신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계속 먹기만 하고 소화를 시키지 않으면 에너지가 되지 못하는 것과 똑같아요. 책 읽기를 이렇게 했으면 좋겠어요. 한 문단을 읽었으면 내용을 온전히 기억할 수 있을 만큼 제대로 이해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언제까지 읽기를 끝내야지 하고 목표를 정하지 마시고 얼마만큼 내 것으로 만들 것인지에 방점을 찍으셨으면 합니다. 소화불량 걸리지 마시고, 꼭꼭 씹어서 느끼고 행하는 책읽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단호한 언어를 가지려면 확고한 신념이 필요해요. 그러기 위해 책을 ‘제대로’ 읽어야 하고 스스로 ‘사색’도 해야 하고요.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도 같은 문맥입니다.
‘읽기 쉽고 정확하게 이해되는 문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주장하고 싶은 사상을 소유해야 한다.’
너무나 상식적인 얘기입니다. 잠깐 다른 얘기를 하면, 정말 재능이나 실력이 있는 사람들은 설명이 복잡하지 않아요. 처칠이 그랬나요? “5분 얘기 할 것을 50분 얘기하는 것은 너무 쉽다. 어려운 것은 50분 얘기할 것을 5분 만에 얘기하는 것이다.” 이 훈련을 자꾸 해야 합니다. 개인적인 의사소통에서는 물론이고 , 비즈니스에서도 중요합니다.
쇼펜하우어도 단호하게 이런 말을 하네요.
‘문장이 난해하고 불분명하며 모호하다는 것은 그 문장을 조립한 작가 자신이 현재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응석에 불과하다.’
자기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모호하고 분명하지 못하게 정리가 된 거죠. 그래서 학식이 풍부한 사람일수록 쉽게 말하고, 학식이 부족할수록 더욱 어렵게 말한다. 때문에 ‘모든 위대한 작가들은 다량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소량의 언어를 사용했다.’
■ 삶이 바뀌는 책읽기, 프루스트의 <독서에 관하여>
프루스트의 독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죠. 이 사람도 쇼펜하우어와 생각이 비슷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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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작가의 지혜가 끝날 때 우리의 지혜가 시작됨을 느끼고’
책을 다 읽고 덮었어요. 그걸로 끝이 아니라는 거죠. 끝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겁니다. 책을 덮고 더 나아가 느낄 수 있는 독서를 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얘를 들어줘요.
“…(상략) 보는 법을 배우라!” 바로 그 순간 작가는 모습을 감춘다. 바로 이것이 독서의 가치이자 한계이다 시작임에 불과한 것을 마치 규범인 것으로 여기는 것은 독서에 지나치게 큰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다. 독서는 정신적인 삶의 도입부에 있다. 독서는 그러한 삶에 안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엄연히 독서에는 한계가 있지만, 그럼에도 책을 읽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독서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정신과 의사의 역할이 신경쇠약 환자에게 멀쩡한 위와 다리와 뇌를 다시 사용하고픈 의지를 불어 넣은 데 불과한 것처럼 독서는 우리에게 개인적인 활동을 하려는 의지를 불어넣을 뿐이다.
쇼펜하우어의 이야기와 같은 문맥입니다. 의지 불어넣어야죠. 불교의 세계관으로 본다면 ‘심불시불 지불시도(心不是佛 智不是道), 즉 마음은 곧 부처가 아니다. 앎이 곧 도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죠. ‘마음이 있어도 행하지 않으면 부처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책을 통해 알았으면 그것을 내 삶을 변화시키는 연료로 써야 하는 것이고, 삶에서 앎을 행하면서 바꿔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한번 카프카입니다. 책은 그렇게 얼어붙은 정신과 감수성을 깨는 도끼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책은 도끼다’인 겁니다.
알랭 드 보통도 비슷한 얘기를 했어요. “모든 독자는 자기가 읽은 책의 저자다.” 책을 읽으면서 독자로서 나는 내 마음에 투영된 것들을 뽑아내는 겁니다. 내 마음에 없는 게 나한테 들어올 수는 없습니다. 뒤에서 다룰 밀란 쿤데라의 <커튼>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독자는 독서하는 순간 자기 자신에 대한 고유한 독자가 된다. 작가의 작품은 일종의 광학기구에 불과하다. 작가는 이 기구를 독자에게 줌으로써 이 책이 없었다면 아마도 자기 자신 안에서 불 수 없었을 것을 알아볼 수 있도록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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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의 <독서에 관하여>를 100명이 읽으면 100명의 저자가 생겨나요.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내 마음에 드는 이미 있는 걸 노크할 기회가 없었을 텐데 독서라는 행위를 통해서 내 안에 이미 존재하던 생각들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내 삶을 바꿔주는 의미가 있는 독서여야 하는 거죠.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의 권위만 인정하지 말고 그 책이 당신 안에 들어와서 어떻게 해석이 되는지를 살피고 당신에게도 똑같은 권위를 인정해라. 그러니 좋은 책이 무엇인지는 당신이 판단해야 할 문제다. 권장도서 100권 안에 못 들어간 책이라도 당신에게 울림이 있다면 그 책은 권장도서보다 훨씬 중요한 책이다. 프루스트는 독서가 일종의 우정이라는 말을 하는데요.
‘독서는 적어도 마음에서 우러나온 우정이고 그 대상이 죽은 자, 사라진자라는 점은 사심 없음을 증명하며 거의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살아 있는 사람처럼 내 주변에 항상 있지도 않고 약속해서 만날 일도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진정한 우정을 가져다 준다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독서는 대인관계보다 좋습니다. 눈치 볼 이유가 없으니까요.
책을 읽다가 지루하면 책을 그냥 덮어버리잖아요. 저자의 재능도 명성도 개의치 않고 갑작스럽게 원래 있던 자리에 책을 꽂아놓을 수 있어요. 그런데 친구와는 그럴 수 없어요. 함께 얘기하다가 재미없다면서 너 이제 집에나 가라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없잖아요.
프루스트는 러스킨에 대해 “러스킨은 독서란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그 누구보다도 지혜롭고 훌륭한 사람들과의 대화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독서는 대화와는 다르게 혼자인 상태에서, 즉 고독한 상태에서 지적인 자극을 계속해서 즐기고 영혼이 활발히 활동하는 것을 유지시키게 한다면 대화는 그것을 즉각적으로 해산시키는 법이다.” 라고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면서 대화보다 더 좋은 방법이 독서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가끔 ‘서점에 있는 그들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하곤 합니다.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으로 강의를 하지요. “인생을 살면서 꼭 들어봄직한 이야기가 머릿속에 있는 사람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생각을 가장 명료하게 정리한 게 책이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 그 사람을 만나는 거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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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존 러스킨의 주장과 같은 문맥인 거죠. 프루스트의 말과도 같고요.
책이 중요한 이유는 새로운 시선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전까지는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어떤 책을 읽고 나면 그렇게 보게 되는 거죠. 그 시선의 변화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 변화가 나를 풍요롭게 만들어 줍니다. 이와 같은 시선을 확장시키는 의미의 책읽기에 대한 이야기가 <독서에 관하여>에 계속 나옵니다.
샤르댕이라는 화가는 일상을 그린 사람이에요. 부엌 그림 등, 아무 것도 아닌 날들, 특별할 것도 없는 날들을 그렸죠, 그런데 그게 예술이 됐어요.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샤르댕 섹션이 따로 있다고 합니다. 샤르댕이 일상을 그린 다음에서야 우리가 흔히 보는 생수통, 책상, 연필, 안경이 훌륭한 예술 작품의 모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겁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휘슬러가 안개를 그리기 전까지는 런던에는 안개가 없었다고 말했죠. 이게 바로 책 읽는 이유입니다.
프루스트가 말한 예술의 힘도 이것입니다. 뭔가를 묘사하기 위해 꼭 어디를 가야만 하고 거대한 서사를 구성해야만 하는 게 아닌 거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보면 마들렌 하나를 묘사하는 데만도 몇 장이 넘어간다고 하죠. 1분도 안 돼 입속에서 없어질 흔한 과자인 마들렌을 몇 장에 걸쳐서 묘사할 수 있다는 거예요.
평범해 보이는 일상의 풍경이 어느 순간 재치와 의미를 갖게 되고, 마침내 각각의 사물이 긴 잠에서 깨어난 공주처럼 당신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문장 아닙니까? 무심함 때문에 잃어버린 일상의 아름다움을 되찾은 겁니다. 언젠가 프루스트 소설의 제목이 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일까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다. 제 해석이 정확한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일상을 제대로 보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시간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거죠.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말재주와 옷뿐인, 예술가인 체하는 사람들은 자연 속에서만 조화로운 비율을 한 대상을 찾는다. 하지만 진정한 예술가에게는 주변의 모든 것이 호기심을 자극하고 작은 근육 하나조차 의미를 가진다.
주변의 것을 아름답게 보는 시선, 예술의 역할이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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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샤르댕을 통해 복숭아는 여인과 같은 생명력을 띠고, 보잘것없는 도자기는 귀중한 보석과 같은 아름다움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프루스트는 그것이 그림이든 책이든 어떤 형태의 예술이든지 그것을 보고 읽고 듣는 감상자의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자세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읽는 사람 스스로가 판단하게 만들어줘야지, 왜 창작자가 그 몫을 다해 주려고 하냐는 거죠. 러스킨의 작품을 최초로 번역할 정도로 그를 흠모하던 프루스트가 러스킨과 사이가 멀어진 건 이 부분에서의 견해 차이 때문이었어요. 러스킨은 후기에 예술을 윤리학과 사회학적 시각으로 바라봐요. 러스킨은 감상자가 아닌 창조자의 의지에 초점을 맞췄어요. 러스킨은 창조자가 무슨 말을 하느냐에 방점을, 프루스트는 감상자의 해석이 중요하다는 데 방점을 찍습니다.
프루스트는 책을 쓴 작가가 아니라 그것을 읽는 독자의 역할에 큰 비중을 싣는 사람이었어요.
프루스트의 <독서에 관하여>는 매력적인 문장들이 많은데 그중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구절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시인들에게는 다른 사물이 되어보는 시선이 있잖아요.
“밤낮으로 바다의 투덜거림을 들어야 하는 조약돌들”
생각해 보세요. 바닷가의 조약돌들은 계속해서 똑같은 파도 소리를 듣잖아요. 누군가가 ‘식물의 저주’라는 얘기를 했어요. 움직일 수 없어서 평생 똑같은 풍경을 보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에요.
“단 하나의 강과 여름이면 라일락이 핀 숲만을 봐야 하는 언덕 위의 마을과 같은 장소들” 이런 시선이 좋더라고요. 이 문장도 한 번 보실까요?
“독창적인 예술가가 새롭게 태어날 때마다 우리의 세계는 무한대로 증가하면, 수 세기 전에 없어진 하나의 행성에서부터 발산한 빛이 현재의 지구까지 도달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처럼 렘브란트, 혹은 베르메르라는 이름의 행성에서 나온 빛은 그 근원이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우리를 감싸고 있다.”
이 표현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온 문장이기도 합니다. 렘브란트는 400년 전에 죽었는데 거기서 나오는 빛이 우리를 감싸고 있다는 겁니다. 아름다운 표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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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삶에 울림을 주었던 도끼와 같은 책들을 들고 여러분 앞에 다시 서게 된 첫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린 두 권의 책 어떠셨는지요? 다시 한 번 제대로 읽어보시고 그 안에서 새로운 시선을 만나고, 지혜를 얻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고, 실천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시면 다른 건 몰라도 밥이 정말 맛있어질 겁니다.
2강. 관찰과 사유의 힘에 대하여
* 이 장에서 소개하는 책들
- 곽재구 : 곽재구의 포구 기행, 길귀신의 노래
- 김사인 편저 : 시를 어루만지다
- 법인 지음 :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강독에 앞서 우선 시집에서 발견한 한 문장을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새는 울고 꽃은 핀다 / 중요한 건 그것밖에 없다’ (이하 생략)
정현종 시인이 이야기 했죠.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중요한 건 그것뿐입니다.
이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나희덕 시인도 했어요.
‘바람은 마지막 잎새까지 뜯어 달아난다
그러나 세상에 남겨진 자비에 대하여
나는 눈물을 흘리며 감사한다’ (이하 생략)
11월이라는 시입니다. 시인답게 감성적으로 표현했어요. 그런데 문학평론가인 황현상 선생은 11월이란 계절에 대해 조금 더 담백하게 말합니다. <밤이 선생이다>라는 산문집에 나오는 문장인데요.
‘한 시절의 영화는 사라졌어도 세상을 지탱하는 곧은 형식들은 차가운 바람 속에 남아 있다.’
겨울나무를 보고 하는 말입니다. 잎이 무성하게 큰 몸집을 만들었다가 계절이 겨울을 향해 갈수록 조금씩 그 잎들을 내려놓죠. 그러다가 낙엽이 모두 떨어지고 나면, 가지만 곧게 뻗어 있는 모습이 되는데 그걸 보고서 올곧은 형식만은 살아 있다고 표현한 거예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느낀 어느 날 저도 노트에 몇 줄을 적어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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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거기 있는 것들을 주목해 보아
또 하나 삶의 즐거움을 만드는 것,
그것이 나이 들어가는 것이더라.
잘 익어가자.
나무, 풀, 계절의 변화, 늘 거기 있는 겁니다. 가족이나 친구처럼 생각해보면 내 삶의 전부인 사람들, 아침 밥, 새소리, 햇살, 늘 거기 있지만 즐거움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들, 그런 것들이 즐거움의 대상이 되면 행복하겠구나. 그리고 나이 듦이라는 것은 늘 거기 있었지만 미처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들에 시선을 주어 즐거운 것들을 점점 더 많이 만들어 가는 것이어야겠구나. 그게 잘 익어가는 일이겠구나.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주목하는 힘을 길러야겠구나. 이런 생각들을 저는 책을 통해 자주 얻습니다.
■ 이토록 따뜻한 시인의 시선이여
<곽재구의 포구 기행>을 읽다보면 남도 땅에 가고 싶어집니다. 사실 제가 그곳에 안 가본 게 아니거든요. 남도를 좋아해서 강진, 해남, 곡성, 순천, 보성, 벌교, 대흥사, 백련사, 다산초당, 미황사 다 돌아다녔어요. 그런데도 책을 보고 나면 ‘아, 이거 내가 놓쳤구나’해서 다시 한 번 가고 싶어져요.
이 책은 곽재구 선생이 당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쓴 이야기들입니다. 그냥 보면 별것 없는 풍경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우리나라의 여느 지방 풍경이에요. 그런데 시선이 고운 곽재구란 사람이 본 풍경은 다릅니다. 이 책을 읽고 ‘이 사람의 시선은 참 곱구나’하고 느꼈습니다.
함께 소개할 <길귀신이 노래>에 이런 얘기가 나와요. 시인이 어느 봄날, 남도의 반월(半月)이라 불리는 반달마을 입구에 핀 도라지 꽃밭을 보고 있었대요. 그랬더니 경운기를 몰고 지나가던, 이 지역에서 온 듯한 구릿빛 얼굴의 아낙이 멈추어 서서 “꽃이 예쁘오?” 하더랍니다. 그래서 “이쁘오”라고 했대요. 아무 것도 아닌 일이죠. 그런데 그때 시인은 사실은 ‘도라지 꽃도 예쁘지만 댁도 참 예쁘오’라고 말할 뻔했답니다. 그리고 아낙이 사라진 뒤 여운이 남은 길을 원고지 삼아 <바닷가 마을>이란 시를 지었어요. 그리고 말합니다.
대저 시란 무엇인가? 마을 입구에 도라지 꽃이 피고 하늘에는 하얀 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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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고 이역에서 온 아낙네가 땀을 내 일하다 잠시 멈춰 서서 꽃이 참 이쁘오!라고 말하니 그 순간이 바로 시의 순간이 아니겠는가?
저는 책을 읽으면서 좋은 부분이나 감동받은 부분에 구절구절 밑줄을 칩니다. 이건 지난번 <책은 도끼다>에서도 말씀 드렸죠. 그리고 반나절이나 한나절 정도 따로 시간을 내어 줄친 부분들을 타이핑해 놓습니다. 한눈에 보기 좋게 정리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면 줄을 치면서 한 번 더 읽고, 좋아하는 구절을 타이핑하면서 한 번 더 읽게 되어 참 좋습니다. 그리고 가끔 시간이 여유로울 때 타이핑 해둔 파일을 열어 좋아하는 구절들을 찾아 읽기도 하죠. 이런 과정들을 거치면 그 문장들이 제 안으로 들어옵니다.
<곽재구의 포구 기행>을 소개한다면서 <길귀신의 노래>를 먼저 언급한 것은 곽재구 선생의 길을 읽을 때 제가 느끼는 것들을 제일 잘 설명해 주는 에피소드가 아닐까 해서입니다. 이제부터 진짜 <곽재구의 포구 기행>에서 건져 올린 문장들을 소개하기로 하죠.
나란히 누워 서로의 살갗을 부비는 집들, 담장들, 빤히 들여다보이는 이웃들의 꿈, 가난, 숨결들. 시골의 골목길 풍경을 묘사한 문장입니다. 별 볼일 없는 풍경, 그것을 주목하는 힘, 그게 삶의 지혜이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이자, 시인의 재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문장이네요.
그러니까 집 몇 채가 모여 있고 낮은 담들이 이어져 있는 모습입니다. 그 모습을 본 시인의 시선이에요. 따뜻합니다. 시인의 시선에는 집들은 서로 살갗을 부비고 있고, 그 속에 평범한 이웃들의 꿈, 가난하지만 행복한 숨결이 담겨 있는 듯 보이는 거죠. 이런 문장을 보면 어디를 여행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떤 눈을 가지고 여행하느냐가 정말 중요한 것이죠.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하면, 목적지를 가는 데에만 신경을 쓰다보니 과정의 즐거움을 놓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눈앞에 걸어야 할 길과 만나야 할 시간들이 펼쳐져 있는 사실만으로 여행지는 충분히 행복하다.’ 이게 여행의 목적인 거죠.
이번엔 새로운 얘기를 해보도록 하죠. 시인의 시선은 또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것을 만나게 해 줍니다. 제가 새를 좋아하는데요. 저는 그냥 “아, 예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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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저 새 좀 봐”하고 끝나거든요. 담쟁이를 보고도 “와, 예쁘다”하고. 그런데 도종환 시인은 담쟁이로 시를 썼지요. 곽재구 시인은 새를 보고 이런 얘기를 했어요.
‘새들은 길 위의 내게 음악에 대해서 얘기해 준다.’
새들이 지저귀는 걸 듣고 시인은 길 위에 서 있는 자신에게 음악에 대해 얘기해 준다고 여기는 거죠. 이번엔 갈매기에 대한 묘사인데요.
‘갈매기들은 이쁜 소의 눈빛을 하고 있다. 그들이 꾸는 꿈의 정갈함 탓이다.’
중랑천변으로 동부간선도로를 타고 출근하는 길은 차가 센티미터 단위로 움직이는 길이에요. 꽤 짜증이 나는 길이죠. 그 길을 짜증을 내며 가고 있었는데 문득 물새들이 보였어요. 물가에 내려 앉았다가 다시 하늘로 날았다가 하는 모습들을 보여주는데 이게 공연인 거예요 세종문화회관에서 보는 <백조의 호수>에는 ‘사람백조’가 나오잖아요. 그런데 눈앞에 진짜 새들이 춤을 추고 있더군요. 물을 치고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올 때의 날갯짓과 그때 물살이 이는 모습을 천천히 봤어요. 그걸 가만히 보고 있는데 교통체증이 고맙더라고요. 만약 시속 80킬로미터로 달렸다면 그 장면을 보지 못했을 테니까요. 곽재구 시인도 날개가 파란 어떤 새로부터 춤 동작을 본 거죠.
우리가 책을 읽고 우리 속으로 가지고 들어와야 할 것은 이런 시선이 아닐까 합니다.
시인은 우리가 보지 못한 걸 또 발견했습니다.
‘배들의 이름에는 선주들의 꿈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선주들은 자신의 배에 어린 시절 고향 동리의 이름을 새기기도 하고 젊은 날 자신이 사랑했던 연인의 이름이나 술 이름을 적어놓은 로맨티스트도 있다. 먼 이국의 항구 이름을 따오기도 하고……. 그 이름들의 의미를 다 모아놓으면 그것이 그대로 한 포구가 지닌 그리움의 실체가 되리라.
‘짧은 길을 긴 시간을 들여 여행한 사람은 경험상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것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문장입니다. 요즘 보면 다들 어디로 뛰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뛰어 가고만 있는 시대 같아요. 검색을 빨리 할 줄 아는 것을 잘난 능력이라고 여기는 시대, 고속도로를 타고 시속 100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로 가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국도로 내려설 필요가 있습니다. 자전거를 탈 필요가 있고, 걸을 필요가 있고, 멈춰서 있을 필요가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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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길을 긴 시간을 들여서 여행하려고 노력하는 것 많이 보려고 하지 말고 자세히 보려고 하는 것이 중요해요. 책 읽는 것도 마찬가지 같아요.
<생각의 탄생>에 보면 꽃을 그리는 화가 조지아 오키프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관찰에 대해 이런 말을 해요. “꽃을 보려면 시간이 걸려, 친구가 되려면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말이지” 라고요. 마찬가지로 책도, 여행도, 천천히 나의 진짜 친구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시인은 포구의 모든 것을 찬찬히 살핍니다. 바닷가 모래사장을 걸으면서도 마찬가지죠. 선유도라는 섬에 대한 얘기 한 번 보시겠습니까? 소설가 김훈 선생이 “말 좀 솟아올라라”라고 했어요. 자연 풍경을 보면서 말이 돋아났으면 좋겠다고 한 거죠. 우리도 그렇죠. 우리가 느낀 바는 ‘와, 멋지다’라는 문장보다 훨씬 많은데 말로는 그렇게 밖에 표현이 안 돼요. 그래서 저 또한 말이 좀 솟아올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는데요. 시인은 신선이 노닌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섬 선유도 모래사장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신선이 노닌다는 그 섬의 백사장을 처음 본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넓은 원고지를 생각했다. 햇볕이 충분하지 않았지만 모래들은 빛났고 파도소리들은 푸르렀다.’
원고지랍니다. 끝 모르게 펼쳐진 모래사장을 맑고 넒은 원고지라고 본 거죠. 시인은 시심이 일어 모래사장 위에 한 편의 시를 씁니다.
섬과 / 섬 사이로 / 새가 날아갔다 / 보라색의 햇살로 묶은 / 편지 한 통을 물고 / 섬이 섬에게 / 편지를 썼나 보다
이건 김훈 식으로 말하면 자연에 대한 인문적인 말 걸기를 한 거겠죠. 섬이 무슨 편지를 쓰겠어요. 그런데 그걸 보면서 인문적인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성이 더해져 이렇게 표현된 거죠. 이렇게 마주치는 풍경에 인문적인 말 걸기를 하면서 하는 여행은 참 로맨틱하지 않을까요?
삶의 그물을 더 촘촘하고 튼튼하게 해주는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주목하는 힘과 관련된 문장을 보실까요?
‘ 꽤 많은 바닷가를 지나온 적이 있지만 파도소리가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나는 느낌을 받은 것은 처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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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파도소리에서 꽃이 화사하게 피어오르는 모습을 상상했나 봅니다. 부럽지 않습니까? 저는 정말 부러웠습니다. 이렇게 살고 싶은 거죠. 돈을 더 많이 버는 것보다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어떤 파도소리는 꽃이라고 상상할 수 있고, 어떤 파도소리는 음악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은 거죠.
제가 ‘생의 저력이 느껴지는 문장들’이라고 부르는 몇 줄의 문장들을 더 소개할게요. 누군가를 어떻게든 설득해야 할 때 아주 적절한 문장들이에요.
“연륜은 사물의 핵심에 가장 빠르게 도달하는 길의 이름이다.”
“아름다움은 아득히 먼 곳에서 빛나는 별빛 같은 것. 가까이 다가가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
“한국의 나폴리…(중략)…이런 비유 당신도 좋아하나요. 소박하고 따뜻하고 성실한 자신의 무엇인가를 바보스럽게 위축시키는…….”
우리가 무심히 쓰는 말들이죠. 들을 때마다 어딘가 좀 불편한, 한국의 스티브 잡스, 한국의 빌 게이츠, 한국의 누구누구, 이런 표현 속에는 언급하고 있는 그 개인의 존재감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 같아요. 가치 판단의 축을 다른데 놓고 거기에 우리를 끼워 맞추려는 것이지 않습니까? 한국이 나폴 리가 좋나요? 통영은 통영이죠.
다음으로 곽재구 시인의 <길귀신의 노래>를 소개해 드릴 텐데요. 그 책에서 가장 좋았던 구절은 앞서 말씀드렸죠. ‘대저 시란 무엇인가’로 시작하는, 저에게 시적인 순간을 깨닫게 해 주었던 글이요. 그 중 미국 미역취 꽃에 대한 글이 눈에 띄었어요. 냄새가 역하고 번식이 빠르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배스 처럼 자생종 식물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식물인 미국 미역취 꽃을 보고 시인은 이렇게 말해요
‘미국 미역취 꽃에서는 역한 진딧물 냄새 같은 냄새가 스며 나왔다. 처음부터 나는 이 꽃향기가, 이 외로운 이역에서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방편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독하게 마음먹지 않으면 외로움을 물리치고 새로운 땅에서 자립할 수 없을 것이다.’
독특한 사고입니다. 이 문장을 보고 다시 한 번 느꼈어요. 아, 시인이란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아, 시인이란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견 없이 악(惡)이라고 여기는 것에조차 이런 따뜻한 시선을 던지는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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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나 이런 따뜻한 시선이 아래의 귀여운 표현을 낳기도 하는데요. 시골 할머니가 콩을 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해요.
‘콩들은 밥으로 떡으로 갈 것이고 콩깍지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언저리로 갈 것이다.’
아주 귀엽지요. 그리고 다음에 소개할 문장은요. 제 가슴에 확 박혀서 저도 한 줄 쓰게 한 문장입니다.
‘살아 있음이란 내게 햇살을 등에 얹고 흙냄새를 맡으며 터벅터벅 걷는 일입니다.’
이 글을 보고 저는 ‘나이가 한 살 더 든다는 건, 봄을 한 번 더 본다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사는 게 사실 뭐 대단한 게 없어요. 나이 먹는 것도 특별한 게 없고요.’
다음에 소개해드리고자 하는 책은 김사인 선생의 <시를 어루만지다>입니다. 이 책은 시집이 아니고 김사인 선생께서 좋은 시들을 골라 자신의 해석을 덧붙여 묶은 일종의 시 교재 같은 책입니다.
■ 시로부터 위로 받는 삶
이도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 철 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
고맙다 /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김사인, <조용한 일> 전문
특별히 기억이 나는 어느 날이 있는데요. 밤 아홉시가 넘도록 대책 없는 난상토론이 이어진 날이었습니다. 다음날 오전 아홉 시까지 마뜩한 결과가 나와야 하는데 그럴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밤이었죠. 지칠대로 지쳤지요. 답답한 마음에 회의실을 나와 제자리에 털썩 앉았는데, 때마침 이 시가 보였습니다. 딱 제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이도 저도 마땅찮은 저녁이었고, 이른 죽음을 맞은 낙엽이 하나 떨어졌어요. 생각해보니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제 곁에 낙엽 하나가 조용히 앉아 있는 겁니다. 김사인 선생은 그 낙엽에게 고맙다고 한 겁니다. 뭐니 뭐니 해도 이런 게 고마운 거라고,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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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건 그런 것들이라고. 그 시를 다시 천천히 읽으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김사인 선생이 부러웠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낙엽 하나에서 고단한 삶을 위로받고,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는 시선이 부러웠습니다.
강의를 할 때마다 김사인 선생의 <조용한 일>을 많이 인용했습니다. 그랬던 강의 중 어느 한 강의의 내용이 김사인 선생의 귀 들어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어느 날 갑자기 저에게 <시를 어루만지다> 책을 보내주셨거든요. 아무 인연이 없는 분인데요. 받자마자 한 번 읽고 얼마 전에 또 한 번 읽고 뒤늦게 선생님께 답을 드렸습니다.
김사인 선생님께
보내주신 책에 대한 인사가 턱없이 늦었습니다.
선생님의 책에서 제 마음으로 건져 올린 보석 같은 글들입니다.
실력 없는 학생의 뒤늦은 과제처럼 보내드립니다.
작은 보람으로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박웅현 올립니다. 2015, 6, 16.
제가 선생이 보내주신 책을 읽으며 감동 받고 밑줄 친 문장을 타이핑해서 보내드렸거든요. 이렇게 뒤늦은 답을 드린 며칠 후, 감사인 선생께서 직접 전화를 주셨더라고요. 감사의 인사와 안부를 나누고 언제 맥주나 한 잔 하자며 통화를 마쳤습니다. 이런 개인적인 인연이 있습니다.
다음 글은 김사인 선생이 자신의 시 읽는 방법에 대해 쓴 글입니다. 정말 좋습니다. 시를 읽지 않더라도 이렇게 시를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중에서 제일 좋았던 문장을 뽑으면 이렇습니다.
‘사랑이 투입되지 않은 시는 읽힐 수 없다. 마치 전기를 투입하지 않으면 음반을 들을 수 없는 것처럼.’
김사인 선생은 우리나라에 이 좋은 시인과 시들이 한국어의 한 모퉁이에 숨어있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 책은 김사인 선생의 시집이 아니라 김사인 선생이 발견한 시들과 그 시에 대한 선생의 평을 엮은 책입니다. 그럼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서문 격으로 실려 있는 글을 한 번 봐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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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년 동안 대체로 나는, 시 쓰기는 제 할 말을 위해 잘 ‘사용하는’ 또는 ‘부리는’데 있지 않다고 말해왔다. 시 공부는 말과 마음을 잘 ‘섬기는’데에 있고.”
이것이 시인이 시를 대하는 태도였던 거죠. 괜히 찔렸습니다.
“시를 제대로 읽어보려는 사람은 어떻든 시 앞에서 검허하고 공경스러워야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그래야 내 마음의 문이 열리고, 마음이 열려야 한 편의 시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목소리와 빛깔과 냄새들이 나에게 와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읽은 것에 대한 내 자세가 겸허해져야 하는 데 그렇지 않으면 사랑이 투입될 수 없다는 거죠. 아까 말했던 시를 일으켜 세우는 겁니다. 어떤 장면을 봤다면 시에서 말하는 장면 속에 있는 풍경, 그때 들렸을 법한 소리, 그때 시인이 느꼈을 법한 냄새, 그런 걸 같이 보면서 시를 읽어나가야 제대로 읽을 수 있죠. 그래서 시 읽기는 시 쓰기만큼의 진검승부라고 말한 겁니다.
“실물적(實物的) 상상력을 토대로 한 정서적 공감과 일치”
예를 들어서 눈 내리고 있는 포구의 풍경이 시에 그려졌다면 실물적 상상력을 토대로 어떨 것이다.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다면 이런 모습이겠구나. 포구 근처를 지나는 사람들 모습은 어떻겠구나 하고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장면을 떠올려봐야 합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정서적 공감이 필요합니다. 내가 만약에 그 포구에서 일하는 뱃사람이라면 이런 마음이 것 같다. 그들에게 막걸리를 파는 주모라면 이런 생각을 할 것 같다는 정서적 공감이 필요하죠. 이런 공감의 능력은 동물들은 갖지 못한 인간만의 능력입니다.
문학은 실물적 상상을 해야 하고 정서적 공감을 하며, 거기에 내 마음을 일치시키는 능력이 있어야 해요. 하나의 예로서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예컨대 ‘1958년 11월 18일 노량해전에서 왜군을 섬멸했으나, 이순신 장군은 독전하던 중에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란 진술이 있다고 하자. 여기에 양쪽의 병력 상황이나, 사상자 수가 덧붙여 질 수 있을 것이다. 어떻든 이런 진술은 역사학자나 신문 기자의 글 속에 들어 있어서 조금도 어색함이 없는 사실 기술의 문장이다. 그러나 문학에 임하는 상상력은 이러한 표피적 사실 진술에 잘 만족하지 못한다. 그날 새벽 이순신의 조반상 위에는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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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이 올랐는지, 그의 심경이 어떠했을 것인지. 그날의 바다 빛깔은 어땠는지. 옷차림은 어땠을 것인지. 방문을 나서는 그의 수염발이 동짓달의 바닷바람에 어떻게 쓸렸을 것인지, 휘하 병사들 하나하나는 그 심경과 얼굴 표정이 어땠을 것인지 등등 까지를 궁금해 한다.
쉽게 말해 4D 영화입니다. 시를 4D로 읽으라는 거예요. 그리고 궁극에 “시를 읽는 것은 나의 온몸으로 시의 온 몸을 등신대(等身大)로 만나는 것이다”라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 사랑을 투입한 시선
우선 제가 최근 강의 때 자주 인용하는 시 한 편을 보여드릴게요. 아마 김사인 선생이 아니면 건져내지 못했겠죠. 김종삼 시인의 묵화(墨畵)라는 시입니다. 김종삼 시인은 풍경 속에서 인상적인 한 장면을 포착해 내는 능력이 좋으신 분입니다.
물먹는 소 목덜미에 /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 이 하루도 /
함께 지났다고 /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 서로 적막하다고
이것도 사실 아무 것도 아닌 장면이죠. 무심히 넘어갈 장면이에요. 시골 할머니가 하루 일과를 끝냈고, 그 옆에서 소는 물을 먹고 있어요. 그리고 조용히 같이 앓고 있죠. 흔한 풍경입니다. 그런데 그걸 잡아챘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들이 밀었습니다.
이 시를 김사인 선생은 이렇게 풀어냅니다.
‘모래를 씹듯 꾸역꾸역 나날을 넘기는 이의 쓰디씀과 고독함.’
하루하루를 사는 게 그냥 모래를 씹듯이 버거워요. 아침에 또 눈은 떠졌고, 해야 할 일은 또 있는 것뿐입니다. 특별한 낙이 있다거나, 그걸 한다고 해서 무슨 대단한 광명이 찾아오고 그런 것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모래알 씹듯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 사람들의 삶을 얘기 했다는 겁니다.
어느덧 팔순(八旬)이라는 데 마음은 / 아직도 바닷가에서 노는 /어린 아이 같다. // 해가 저무는 줄도 모르고 / 조개껍질이나 줍고 / 게 새끼랑 어울리다 보면. // 갑자기 거센 파도가 덮쳐와 / 이 한 몸 나뭇잎인양 / 쓸어 갈 날 있으련만. //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고 / 놀이에만 몰두하는 // 어린아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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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잔잔한 바다. / 하늘에는 하나 둘 / 별이 돋기 시작한다.
- 김종길, ‘팔순(八旬)이 되는 해에’ 일부
우리가 그렇죠. 파도가 언제 들이 닥칠지 모른 채, 놀이에 몰두하고 있는 아이들 같죠. 마지막 연 보세요. 아직은 파도가 오지 않았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언젠가 우리 모두에게 파도가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걸 모르고 살고 있다는 걸 일깨우는 이런 표현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친구의 성을 빼앗기에 여념이 없던 아이들도 해질 무렵 어머니가 부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기 모래성을 짓밟고 저녁을 먹으러 달려가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이 딱 그런 것 같지 않나요? 내가 더 넓은 땅 있다. 더 넓은 아파트 산다. 돈이 얼마 있다 하다가도 자연이 부르면 뭐 하나 가져갑니까? 다 짓밟고 가는 거죠. 그게 떠오르니 이 시가 더욱 좋아졌습니다. 삶에 대한 시선이 엿보여서요.
■ 벌떡 일어나 살아 움직이는 시
시를 읽기 전에 김화영 선생의 <행복의 충격>중 한 대목을 먼저 소개하려고 합니다. 남 프랑스의 햇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김화영 선생은 그곳의 햇살들을 하나하나 분류했습니다. 이렇게요.
프로방스에 내리는 각종 햇빛의 감도, 부활절 무렵 애무하는 꽃물결처럼 피부를 간질이는 햇빛, 저녁나절 가벼운 바람에 실려와서 당신의 목덜미를 쓸고 가며 벌써 저 앞에 걸어가는 처녀의 갈색 머리털을 번뜩이는 햇빛, 한 여름 심벌즈를 난타하는 듯 금속성을 내며 찌르릉 거리는 햇빛, 가을 철 분수의 물줄기를 타고 천천히 걸어 내려오는 햇빛, 한겨울 론 강 골짜기를 따라 살을 에도록 미스트랄 바람이 불 때도 창밖에서 내다보면 언제나 ‘따뜻한 겨울의 환상’을 주는 노랗고 투명한 햇빛, 베란다의 베고니아 꽃 속에 자란자란 고이는 햇빛, 작은 커피 잔 위로 플라타너스 잎새들 사이로 스며 나와 짤랑짤랑 흔들리며 요령 소리를 내는 은빛 반점의 햇빛.
이걸 읽어드린 이유는 지금 소개해 드릴 시가 비를 분류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전문이 다 좋은데 천천히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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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나 광주에서는 / 비가 온다는 말의 뜻을 / 알 수가 없다 / 비가 온다는 말은 / 장흥이나 강진 그도 아니면 / 구강포 쯤 가야 이해가 된다 / 내리는 비야 내리는 비이지만 비가 / 걸어서 오거나 달려오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 어떨 때 비는 싸우러 오는 병사처럼 / 씩씩거리며 다가오기도 하고 / 또 어떨 때는 그 병사의 아내가 / 지아비를 전쟁터로 보내고 돌아서서 / 골목길을 걸어오는 / 그 터벅거림으로 온다
- 이대흠, <비가 오신다> 일부
장흥, 강진, 구강포 같은 데를 가야지만 비를 알 수 있다면서 비를 분류합니다. 비가 막 우다닥 쏟아질 때도 있고, 구슬프게 조용하게 올 때도 있어요. 시인은 이 차이를 발견했습니다.
이 시에 대한 김사인 선생의 글 또한 참 좋았습니다.
그렇다 도회지라고 비가 없으랴. 험프리 보가트 조(調)로 바바리 깃을 세우고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를 걸어가는, 그것 또한 아주 족보에 없는 비는 아닐 터이다. ‘미련 없이 내뿜는 담배 연기 속에’ 그 여인의 모습을 아련히 떠올리는 <진고개 신사>풍의 가을비와 우수도 그럼직하다. 도시의 소란과 잡담을 일거에 제압하는, 천둥 번개 우당탕 느닷없는 여름 소나기가 또한 통쾌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외에도 <시를 어루만지다>는 제가 발견하지 못한 보석들이 알알이 숨겨져 있는 책입니다. 우리는 왜 책을 읽을까요? 제 생각에는 책 한 권을 읽고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이렇게 우리들의 삶을 위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차피 모래알 씹듯 꾸역꾸역 넘겨야 하는 게 삶입니다. 그 삶 속에서 덜 힘들 수 있는 방법이 책을 읽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 우리는 왜 사유해야 하는가
방금 전 <시를 어루만지다>를 이야기 하면서 시를 빨리 읽으려고 하지 말고 멈춰 서서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어요.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요. 이번에 함께 볼 책은 속도와 성취만을 중시하는 시대에 우리 삶의 태도는 어때야 하는지 되돌아보게 만드는 책입니다. 법인 스님이 쓰신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입니다.
사유라는 건 스마트폰 끄고, 접속을 멈추고 그저 가만히 있는 겁니다. 인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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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아웃풋도 아니고 노풋(no-put)상태로 있는 거죠. 이런 노풋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데 여기저기서 너 노풋하면 지는 거야 하면서 아우성이죠. 법정스님께서 말씀 하셨어요. 지식은 밖에서 들어오지만 지혜는 안에서 우러나온다고요. 사유하는 시간을 갖지 않으면 내 안에서 자생적으로 우러나오는 것들을 못 건져냅니다. 그냥 잠깐이라도 가만히 앉아 있어보세요. 복잡한 생각들이 한결 정리가 돼요. 사유하는 거죠. 사유는 그래서 중요합니다.
‘검색’이라는 단어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검색이라는 단어를 주목한 건, 이 시대가 검색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걸 검색으로 해결해요.
이 책은 제목만으로도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 줍니다. 그런 면에서 많은 분들이 읽었으면 합니다. 저자와의 개인적인 친분 때문이 아니라 우리 삶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죠. 제가 이 책에서 건져 올린 첫 문장입니다.
“우리는 멈출 줄 모르는 속도와 낮출 줄 모르는 성장에 갇혀 ‘정신없이’세상을 살아간다.”
‘정신없이’에 따옴표가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쉽게 말하죠. “너무 정신없어!” 이거 자랑 아닙니다. 큰일 난 겁니다. 왜 정신이 없어요. 정신이 있어야죠. 그런데 요즘 보면 다들 속도, 성장, 이런 것들에 쫓겨서 정신없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거예요. 이걸 반성하자는 게 이 책에서 하고 싶은 얘기의 핵심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같은 문맥인데요. 스스로를 한 번 돌아볼까요?
“오로지 성공하고 출세하기 위해 ‘앞’과 ‘위’만을 바라볼 뿐 우정과 사랑과 진리를 나누기 위해 ‘옆’과 ‘뒤’를 보지 않는다.”
‘목표가 곧 인생의 목적이고 꿈이라고 착각하는 세상’
이런 세상에서 벗어나야 해요 서울대학교가 목표일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인생의 목적이고 꿈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죠. 다음은 스님다운 문장인데요, 문장이 조금 복잡해 보이지만 한 글자 한 글자 잘 들여다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수행은 늘 깨어 있는 삶을 사는 일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늘 자신을 성찰하고 생각을 높이며 끊임없이 성숙시키는 일이다. 성찰은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살피는 것이다. 사색은 사물과 일에서 참되고 깊은 의미를 찾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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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붙잡고 살며 늘 깨어 있는 삶이 수행이라는 거죠. 성찰이라는 것은 내가 누군지, 내 위치가 어디인지를 따지는 것이고, 사색은 곽재구 시인처럼 사물과 일을 자세히 들여다봐서 참되다 싶은 의미를 찾는 일이라는 겁니다.
제가 쓴 이 책의 추천사 일부입니다. 박준형 상계 백병원 정신의학과 교수의 글을 인용한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화려함과 성과를 쌓아가며,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평형수 수위를 낮춰가고 있다. 욕심으로 내 삶을 가득 채운 후 높아져버린 무게 중심으로 뒤뚱거리며 위태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어느 새 위태롭게 높아져버린 내 삶의 무게중심, 다시 안전하게 낮추어야 한다.”
제가 추천사에 인용한 박준현 교수의 글은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직후, 박 교수가 <한국일보>에 기고한 칼럼의 일부입니다. 저는 이 글을 보고 세월호가 우리 모두 안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똑같아요. 배가 한 번 왔다 갔다 할 때마다 돈을 더 벌려면 평형수를 빼면 됩니다. 그 안에 사람을 태우면 되니까요. 지금 우리가 똑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스펙 관리를 하기 위해서, 더 좋은 직장을 위해서 부모와의 대화, 친구와의 좋은 시간, 타인에 대한 배려심, 이런 것들을 다 빼내고 있어요. 그리고 그 자리를 욕망으로 채우죠. 그 배는 겉으로 보면 더 빨리 가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그러나 그 배는 언제라도 가라앉을 수 있는 위험을 안고 가는 거죠.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은 이런 시대에 경종을 울릴 수 있는 책입니다.
행복하게 산다는 건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것들을 온전히 ‘느끼며’사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크고 비싼 집과 재물을 갖고 있고, 권력과 명예를 갖고 살아간다 해도 가치 있고 의미 있는 느낌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다.
곽재구 시인이 그런 것처럼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가족과 친구가 중요하다고 했던 최인철 교수의 말처럼 진짜 가치를 찾아야 하죠. 최인철 교수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사람이 행복감을 느끼는 건 내가 가치 있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 때이다. 그래서 오늘 내가 얼마나 좋은 일을 했는가가 내 행복감이다. 그러니까 아이들에게 시험 점수가 아니라 오늘 어떤 좋은 일을 했어? 몇 번 웃었어? 이런 걸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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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다는 것은 느낄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한 송이 꽃과 바람소리, 물소리에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물소리, 바람소리가 특정한 누구에게만 들리는 걸까요? 아니죠. 느끼려고만 한다면 누구나 보고 들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 늘 거기 있는 것을 주목하는 삶
위의 문맥에서 같이 읽었으면 하는 문장이 있는데, 강의 때에도 자주 쓰는 겁니다.
“달은 어디에나 있지만 보려는 사람에게만 뜬다.”
그렇죠. 달이 안 보이죠. 안 보려고 하니까요. 앞서 곽재구 선생이 봤던 것들은 사실 우리 주변에 다 있어요. 그런데 그걸 내가 보려 했냐는 거죠.
이 세상 어느 것도 ‘있어 온’ 것은 없다. 사랑도 행복도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사랑과 행복은 노력으로 탄생되고 키워지고 헛된 곳에 정신 팔지 않는 주의 집중으로 성숙하고 결실을 맺는 것이다. 삶의 법칙이 이럴진대 많은 사람들이 연인의 과정을 거쳐 부부가 되면 마치 사랑이 완성된 것으로 알고 절제와 균형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 문장을 보고 주변에 자주 얘기해요.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노력의 시작이다. 이것 말고도 이 책에는 좋은 글들이 아주 많습니다.
11월의 저물녘에 / 낡아빠진 경운기 앞에 돗자리를 깔고 / 우리 동네 김씨가 절을 하고 계신다 / 밭에서 딴 사과 네 알 감 다섯 개 / 막걸리와 고추장아찌 한 그릇을 차려놓고 / 조상님께 무릎 꿇듯 큰절을 하신다 / 23년을 고쳐 써온 경운기 한 대 / 야가 그 긴 세월 열 세마지기 논밭을 다 갈고 / 그 많은 짐을 싣고 나랑 같이 늙어왔네 그려 / 덕분에 자식들 학교 보내고 결혼시키고 / 고맙네 먼저 가소 고생 많이 하셨네 / 김씨는 경운기에 막걸리 한 잔을 따라준 뒤 / 폐차장을 향하여 붉은 노을 속으로 떠나간다
박노해 <경운기를 보내며> 전문
이렇게 아름다운 시도 있어요. 읽기만 해도 따뜻한 기분이 들죠. 이런 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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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들이 결국 삶이라는 걸 알려주고, 왜 사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책이라 소개해봤습니다.
어제 집사람과 함께 도산대로 근처에 와서 와인을 한 잔 했습니다. 그런데 창밖에 홍매화가 피어 있는 겁니다. 겨울로 달려가고 있는 이시기에 말입니다. 자세히 보니 비바람에 잎이 얼마 안 남고 쪼그라든 단풍나무였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자동차 선루프 위로 은하수가 흐드러지게 보이는 겁니다. 비오는 밤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봤더니 선루프 위에 떨어진 빗방울이 가로등 불빛을 머금고 빛나는 거였어요. 역시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인생에 이런 순간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3강.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미성의 시간이다
* 이 장에서 소개하는 책들
-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레프 톨스토이 지음, 이상원 옮김
- 미크로메가스 ·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볼테르 지음, 이병애 옮김
“세상사에 시선이 따뜻한 사람이 시인이다. 시를 안 써도 시인이다.”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이 책은 톨스토이가 말년에 지은 잠언집입니다. 인생에 대한 지혜들이 여럿 실려 있죠. 곱씹을수록 무릎을 치게 되는 한 구절 한 구절은 긴 인생을 살아온 대문호가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겨 주고 싶었던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 우리 생의 한가운데를 찾아서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의 좋은 구절들을 소개하기 전에 먼저 작가 톨스토이에 얘기를 좀 해볼까 싶습니다. 저는 톨스토이의 부활을 세 번 읽었는데요. 고등학교 때, 사십대 후반에, 그리고 최근에, 과거는 지나갔고 오지 않은 미래는 예측할 수 없으니 오늘을 살아야 겠구나 하면서 톨스토이의 부활을 다시 읽었습니다.
저에게 부활은 매 순간이 생의 한가운데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던 책이지요. 이 책은 여느 고전처럼 첫 문장이 아주 훌륭합니다. 한 번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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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십만의 인간이 한 곳에 모여 자그마한 땅을 불모지로 만들려고 갖은 애를 썼어도, 그 땅에 아무 것도 자라지 못하게 온통 돌을 깔아버렸어도, 그곳에 싹트는 풀을 모두 뽑아 없앴어도, 검은 석탄과 석유로 그슬려 놓았어도, 나무를 베어 쓰러뜨리고 동물과 새들을 모두 쫓아냈어도, 봄은 역시 이곳 도시에도 찾아들었다.
이게 첫 문장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죠. 200년 전 이야기지만 꼭 지금과 닮았습니다. 아스팔트 깔아놓고, 건물 세워놓고, 시멘트 부어 놓고, 다 막아버리죠. 하지만 기어이 깨진 아스팔트 사이로 풀이 올라오잖아요? 이어지는 문장도 보실까요?
따스한 태양의 입김은 뿌리째 뽑힌 곳이 아니라면 어디에서고 만물을 소생시켜 가로수 길의 잔디밭은 물론 도로의 포석 틈새에도 푸른 봄빛의 싹이 돋고, 자작나무와 포플러와 구름나무도 봄 내음 풍기는 촉촉하고 윤기나는 잎을 내밀고, 피나무도 이제 막 싹을 틔우고 있었다.
식물도 곤충도 새도 어린애들도 모두 명랑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른이 된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 자신뿐 아니라 서로를 속이고 괴롭혔다. 사람들은 이 봄날 아침이 신성하다거나 의미 깊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연과 더불어 아이들도 현재에 충실하죠. 하루하루 즐겁게 살잖아요. 그런데 우리 어른들은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어요. 지금 읽어드린 것들이 <부활>의 시작입니다.
저는 책을 읽을 때 스토리 중심으로 보기보다는 문장을 구석구석 살피며 작가가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 궁금해 하며 읽습니다.
그래서 지금 소개한 첫 문단이 <부활>의 전체적인 이야기 흐름에서 그렇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저에겐 굉장히 중요하게 읽히는 거죠. 그리고 아주 인상 깊었던 것이 다음 구절인데요.
우리는 인간을 그렇게 구분해 단정적으로 봐서는 안 된다. 저 사람은 악인일 때보다 선인일 때가 더 많다든가, 게으를 때보다 부지런할 때가 더 많다든가, 어리석을 때보다 똑똑할 때가 더 많다든가, 또는 그 반대로 말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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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봐야 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어떤 사람을 ‘저 나쁜 놈’ 이라고 하면서 모든 게 나쁜 사람으로 여기잖아요. 10년 전에 나쁜 놈이 지금도 나쁜 놈일 것이라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시간이 흘렀거든요. 사람이 바뀔 수도 있거든요 그런 생각을 해야 한다는 거죠. 그러면서 이런 문장도 씁니다.
‘인간이란 흐르는 강물과 같다.’
사람은 고여 있지 않죠. 나쁜 사람을 만나면 나빠지고, 착한 사람을 만나면 착해지고, 어떨 때는 성질이 급한 사람 같지만, 어떤 때는 그렇지 않죠 마치 물이 흐를 때 개울을 만나면 물소리가 커지고, 폭포를 만나면 험해지고, 평평한 곳에서 조용히 흐르다가 넓은 강에 이르면 서로 엉키고 시끄러워지는 것처럼 말이지요.
■ 톨스토이가 알려주는 삶의 지혜들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는 인간의 내면과 의식을 주의 깊게 들여다 본 노(老) 작가의 삶의 지혜가 가득 들어 있습니다. 잠언집이라 어렵지도 않고, 문맥을 따라갈 필요 없이 공감되는 문장들을 하나하나 잡아가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책이죠. 읽기는 편안하고 살아가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이 참 많습니다. 모든 내용이 다 좋은데 오늘은 그 중에서도 저에게 울림이 있어 따로 타이핑해둔 구절들을 중심으로 소개 하겠습니다.
‘식사를 준비하고 집을 청소하고 빨래를 하는 일상적 노동을 무시하고서는 훌륭한 삶을 살 수 없다.’
여기에 지혜가 다 들어 있죠. 알랭 드 보통은 “우리는 아이를 위해 빵에 버터를 바르고 이부자리를 펴는 것이 경이로운 일임을 잊어버린다”고 말했습니다. 행복은 거기 있는 건데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저 노동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제가 다니는 회사에 대학생 인턴 교육프로그램인 ‘주니어보드’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그곳에서 만난, 지금은 저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제자가 있습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저에게 이런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날을, 특별할 것 없는 날을, 어제도 오늘도 매일 지속되는 날들을 지켜낸다는 게 참 위대하다는 걸 깨닫는 요즘입니다. 오래 그곳에 있어주세요. 선배님, 나의 좋은 스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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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린 나이에 이런 걸 깨닫다니요. 놀랍고 기특해서 저는 이렇게 답을 보냈습니다.
‘나의 제자가 나의 스승이 되어가는구나. 고맙다. 이런 축복.’
‘진정으로 일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은 모두 삶의 모습이 단순하다.’
어떤 일이든 몰입하면 두 가지 좋은 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 사람이 진짜 멋있어 보여요.
그리고 다른 하나의 좋은 점은 괜히 이것저것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져요. 단순하게 살게 되는 거예요. 많은 걸 걱정하고 염려한다고 해서 우리가 고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거든요.
어떤 스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생을 직선으로 놓고 봤을 때 9할은 기존(旣存)이랍니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이에요. 내가 살고 있는 당대, 내가 살고 있는 삶의 조건 등 대부분의 것은 기존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나머지 1할인데, 그 1할의 9할은 기성(旣成)입니다. 이미 이루어졌어요. 저는 오십대이고, 남자로 태어났고, 많은 실패를 했습니다. 결혼하고 자녀가 있고, 이것들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고 나면 남는 것은 1할의 1할입니다. 바로 미성(未成)이죠. 이 미성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의 하루입니다. 이불 개고 일어나, 오늘의 강독을 열심히 하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 집사람과 저녁밥을 맛있게 먹고, 함께 TV도 보고 잘 자는 것, 이것이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의 마지막에 그런 레빈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작가는 왜 레빈의 삶을 마지막에 보여 줬을까요. 그 삶이 제일 아름답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이철수 선생이 말한 본분사(本分事)의 삶이죠.
■ 본분사(本分事)의 삶을 사는 것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삶은 레빈의 삶이라고 보여준 톨스토이답게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에도 노동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제가 평소 스트리트 스마트와 북 스마트 얘기를 종종 하는데요. “책 속에 무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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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어 길은 밖에 있지”라고 일갈했던 김훈 선생의 말처럼 실제로 행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노동도 그런 것 같습니다.
두 손으로 노동할 때 우리는 세상을 공부하게 된다.
채소밭을 가꾸면서 나는 생각한다.
‘왜 진작 이렇게 하지 않아, 지금 같은 행복을 누리지 못했을까?’
이게 제일 행복한 방법이라는 거죠. 직접 내가 물성을 느끼며 만지거나 실제로 경험하면서 느낀 것은 책으로 보거나 머리로만 생각한 것과는 다른 거죠. 저는 그런 삶을 지향하고 싶어요. 비슷한 얘기인데요.
육체노동이 정신적인 삶을 가로막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은 정반대이다. 육체노동을 할 때만이 지적이고 영적인 삶이 가능하다.
그래서 몸을 번잡하게 만들어야 해요. 잘 살려면 몸을 번잡하게 하고 마음을 평화롭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이와는 반대로 마음은 번잡하고 몸은 평화롭죠. 계단 대신 엘리베이터를 타고 소파에 드러누워 TV를 보면서도 마음은 정신이 없죠.
이어서 소개하는 문장들은 행복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행복은 이미 모두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이것도 같은 얘기죠. 우리의 삶 속에 행복이 있다는 걸 기억하라는 겁니다. 이런 얘기도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의 원천은 우리들 가슴에 있다.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어리석다.’
‘자기 안에 없는 행복은 다른 어디에도 없다.
행복은 타인을 사랑하는 능력이다.’
<여덟단어> 100쇄 특별판에 제가 이런 문장을 썼습니다. ‘답은 당신 앞에 있습니다.’ 답은 내 앞에 있어요. 내 앞에 있지 않다면 그건 내 답이 아닌거죠. 하나 더 읽어드릴게요.
현재의 삶은 최고의 축복이다.
우리는 다fms 때, 다른 곳에서 더 큰 축복을 얻게 되리라 기대하면 현재의 기쁨을 무시하고는 한다.
지금 이 순간보다 더 좋은 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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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문장처럼 현재의 삶이 축복인데 우리는 다른 곳, 다른 때에 축복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거기서 우린 행복할까요? 또 다른 곳을 꿈꾸지는 않을까요. 그러면 매번 애써 불행해지고 마는 겁니다. 그러지 말자는 이야기를 톨스토이는 말년에 사람들에게 꼭 해주고 싶었던 거예요.
제가 시 한 편, 읽어드릴게요. 헤르만 헤세가 쓴 <행복>이라는 시입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한 너는 / 행복할 만큼 성숙해 있지 않다. /
가장 사랑하는 것들이 모두 너의 것일지라도 //
잃어버린 것을 애석해하고 목표를 가지고 초조해 하는 한 /
평화가 어떤 것인지 너는 모른다. //
모든 소망을 단념하고 / 목표와 욕망을 잊어버리고 /
행복을 입 밖에 내지 않을 때 //
그때 비로소 세상일의 물결은 / 네 마음을 괴롭히지 않고 /
너의 영혼은 마침내 평화를 찾는다. //
비슷한 얘기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에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무언가를 원하는 사람이 자유로울 수 없거든요. 그래서 카잔차키스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삶, 지금 내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여겨지는 삶을 살고 싶었던 거죠.
2000년도에 코카콜라의 전 CEO 더글라스 대프트가 신년사에서 했던 말입니다.
인생을 공중에서 다섯 개의 공을 돌리는 저글링이라고 상상해 봅시다.
각각의 공에 일, 가족, 건강, 친구, 그리고 영혼(나)라고 이름 붙이고, 이것들을 모두 공중에서 돌리고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머지않아 당신은 일이라는 공은 고무공이어서 바닥에 떨어뜨리더라도 이내 튀어 오른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그러나 다른 네 개의 공들은 유리로 만들어진 공이라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만일 당신이 이중 하나라도 떨어뜨리게 되면 이 공들은 닳고, 상처입고, 긁히고, 깨지고 흩어져버려서 다시는 이전처럼 되돌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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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이 사실을 깨닫고 당신의 인생에서 이 다섯 개의 공들이 균형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 우선 당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훼손하지 마십시오.
- 당신 마음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것들을 당연하게 생가가지 마십시오. 당신의 삶을 대하듯 그것들에 충실하십시오.
- 과거나 미래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삶이 단 하루 뿐인 것처럼 인생 의 모든 나날들을 살아가시시오.
-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 당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두려워하지 말고 받아들이십시오.
- 위험에 부딪히기를 두려워 말고 용기를 배울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 당신의 삶에서 사랑을 지우지 마십시오.
- 시간과 말을 함부로 사용하지 마십시오.
- 인생은 경주가 아니라 그 길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음미하는 여행입니다.
어제는 역사이고, 내일은 미스터리이며, 오늘은 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present)를 선물(present) 이라고 합니다.
이 문장도 보실까요?
‘삶의 아름다움은 미래를 위해 무엇이 좋을지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얘기 중에 영국에 있는 묘비명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기 두 번 행복했던 여자가 누워있다. 그녀는 행복했고, 그리고 그것을 알았다.’ 우린 두 번째를 못하고 있죠 그리고 대신 추억을 더듬으며 행복해 합니다.
‘불행하다고 느껴진다면 바로 자신이 저질렀던 모든 나쁜 행동을 기억하라.’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서 자기 모습을 본다.’
‘모든 생명체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인생을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람이란 흐르는 강물 같아 하루하루가 다르고 새롭다. 어리석었던 사람이 현명하게 되기도 하고 악했던 사람이 착하게 되기도 한다.’
우리는 흘러가는 존재이니 언제든 바뀔 수 있어요. 얼마든지 지혜로워질 수 있고요. 톨스토이는 이렇게 변하는 것, 변해야 하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그대로 두어야 하는 것들이 있다고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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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씨앗을 심었다.
싹트는 것이 궁금하고 걱정된 그 사람은
흙을 파내고 계속 씨앗을 지켜보았다.
상해버린 씨앗은 열매를 맺지 않았다.
바로 이런 것들이죠. 스스로 알아서 자라도록 두어야 하는 것들, 우리가 차분하게 기다려줘야 하는 것들, 그냥 순리대로 가야하는 것들이 있는데 인간 마음대로 그것을 조절하겠다고 개입했다가 결국 죽여버리죠.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 진리는 그저 몸에 살짝 붙어 있는 데 그치지만
스스로 발견한 진리는 몸의 진정한 일부가 된다.
■ 나의 정원은 내가 가꾸어야 한다
볼테르의 <미크로메가스 ·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는 우연히 읽게 됐습니다.
일단 이 책은 재미있습니다. 250여 년 전에 지어진 풍자 소설인데 해학이 가득해요. 캉디드는 프랑스어로 ‘순진한’이라는 뜻인데 이름이 ‘순진한’인 청년 즉 캉디드의 인생에 대항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 전에 함께 실려 있는 또 다른 이야기 <미크로메가스>부터 살펴보도록 하죠.
SF소설의 원류로 여겨진다는 <미크로메가스>는 말 그대로 ‘가장 작고 micro’, ‘가장 크다megis’ 는 뜻을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읽다보면 장자(莊子)적 상상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인류의 뻥꾼’이었던 장자처럼 과장된 표현이 가득해요. 본문을 보면 다른 혹성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요.
“당신의 수명은 얼마나 됩니까?” 시리우스인이 말했다.
“아! 얼마 못 살지요.” 키가 작은 토성인이 말을 받았다.
“우리 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시리우스인이 말했다. “우리는 늘 얼마 못산다고 한탄합니다. 이것이 자연의 보편적인 법칙인가 봅니다.”
“저런! 우리는 태양을 오백 번 공전할 동안 밖에 살지 못합니다.(우리식으로 계산하면 만 오천 년쯤 된다) 태어나는 순간에 죽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걸 아시겠지요. 우리 존재는 한 점이고 우리의 지속은 한 순간이며 우리천체는 원소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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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오천 년이라는 시간에 대해서 하는 말입니다. 이런 상상력 정말 대단하죠. 우리 인간은 길어야 100년을 살까 말까 하는데요. 이런 상상력으로 인간의 욕망과 그 덧없음, 삶과 죽음에 대한 단상을 재미있게 풀어냅니다. 죽음에 대한 얘기도 무척 공감이 돼요.
죽는다는 것은 언젠가 육체를 원소로 돌리고 자연을 다른 형태로 소생시켜야 할 때를 뜻한다.
우리나라 말 중에서 제가 정말 좋아하는 표현 중 하나가 ‘돌아가신다’는 말입니다. 원래 있던 대로 돌아가신대요. 이곳은 잠깐의 방문지인 거죠. 죽는다는 건요, 육체가 하나의 원소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죽으며 제 육신이 썩어가면서 저를 형성했던 것들을 개미가 조금 먹고, 구더기가 조금 먹고, 그것들을 다시 새가 먹고, 그 새를 다른 동물이 먹고 그렇게 순환할 거예요. 육신이 하나의 원소의 형태로 되돌아가서 다른 형태를 소생시키는 거죠. 이게 죽음에 대한 저의 태도인데요. 같은 맥락으로 볼테르가 이런 말을 하는군요.
영원을 살고 난 다음이거나 단 하루를 살고 난 다음이거나 그런 변모의 순간이 찾아오기는 분명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아요, 여러분. 하루만 산다는 하루살이가 불쌍한가요? 그렇다면 400년을 산다는 거북이가 부러운가요? 그런데 하루살이는 진짜 하루만 살까요? 하루살이는 자신이 단지 하루밖에 못 산다고 생각을 할까요? 그런 관점이라면 400년을 사는 거북이가 보기에 100년을 겨우 살까 말까한 우리가 한심하고 불쌍할지도 모르겠군요. 저는 하루살이의 시간, 거북이의 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를 것 같아요.
이번 강독에 톨스토이와 볼테르를 함께 엮은 까닭은 이처럼 삶을 대하는 태도가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제 머릿속에는 한 동네로 분류되어 있는 책들이죠.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에도 볼테르 특유의 풍자적인 문장 속에 돌아볼 만한 지혜들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특히 부자와 지식인, 종교인들을 향한 조롱이 많이 나와요.
성에는 성문이 나 있고 창문이 많이 달린데다 심지어 커다란 홀에 태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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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수공으로 짠 실내 장식물)까지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남작은 틀림없이 베스트팔렌 지방의 권세 있는 영주 중의 한 사람이었다. 영지 사람들은 모두 남작을 영주님이라고 불렀고, 그가 아무리 재미없는 이야기를 해도 모두 크게 웃어주었다.
우리 얘기이기도 하죠. 저는 후배들에게 팀장이 되면 스스로 경계하라고 해요. 팀원들이 웃어주는 게 진짜 웃겨서 웃는 게 아니에요. 예의를 갖춰주는 거예요. 남자 부인을 설명한 문장도 한 번 보실까요?
몸무게가 대략 158킬로그램이나 되는 남작 부인은 그 육중한 몸집만으로도 세인의 칭송을 받았다. 비웃는 게 분명하죠. 그런데 사람들은 그녀를 아름답다고 칭송했다고 표현하고 있어요.
나는 이웃 도시의 멸망을 바라지 않는 도시를 한 번도 보지 못했고, 다른 가문의 말살을 원치 않는 집안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어디서나 약자는 강자를 증오하면서 강자 앞에서 벌벌 떨고, 강자는 약자를 털과 자기 살을 내다 파는 양들처럼 다룹니다. 백만 명의 살인자들이 조직을 이루어 유럽대륙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날뛰며 밥벌이를 위해 훈련받은 대로 살육과 약탈을 저지릅니다.
이게 볼테르 시대에 벌어진 전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50여 년 전의 일들이에요. 그런데 바로 어제 일어난 우리들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는 게 씁쓸하죠.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는 속도감 있게 읽히면서도 여러 가지 생각들을 이끌어내는 책인데요. 이 책의 마지막도 결국 레빈입니다.
이윽고 선한 노인은 캉디드 일행에게 노동에 대해 이런 말을 합니다.
노동을 하면 우리는 세 가지 악에서 멀어질 수 있으니 그 세 가지 악이란 바로 권태, 방탕, 궁핍이라오.
노동을 하면 바삐 움직이게 되니 권태로워지거나 방탕해질 수 없고. 삶의 대가가 있으므로 궁핍해지지 않는다는 거죠. 이 책도 결국 하루하루 충실히 잘 살아나가라는 얘기를 하며 마무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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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쿵 저러쿵 따지지 말고 일합시다. 그것이 인생을 견딜만하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이 문장은 캉디드와 모험을 함께한 마르틴의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의 마지막 문장과 연결됩니다.
‘우리의 정원은 우리가 가꾸어야 한다.’
캉디드의 말처럼 우리의 삶은 우리가 가꿔야 하는 겁니다. 이 책 역시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처럼 기존도, 기성도 아닌 미성인 우리들의 하루하루에 집중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는 것이 삶을 잘 사는 길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지요.
나비
날아다니는
꽃
얼마 전에 나비를 보고 있다가 떠오른 생각입니다. 나비가 나를 위해 날아준 거죠. 이 사실을 발견한 뒤에 행복했습니다. 그다음부터는 나비가 날아다니는 순간을 보면 참 좋습니다. 꽃이 춤을 추는 것 같아서요.
더 많은 나비, 더 큰 나비, 혹은 더 먼 곳에 있는 나비를 꿈꿀 것이 아니라 내 눈앞에서 날아다니고 있는 나비의 자은 날갯짓을 발견하고, 행복할 수 있는 순간이 자주 찾아왔으면 합니다.
2016. 7. 24.
* 다음에 제 4강부터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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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책은 도끼다(2)
- 박웅현 인문학 강독회 -
■ 박웅현 지음
4강. 시대를 바꾼 질문, 시대를 품은 미술
* 이 장에서 소개하는 책들
- <1417년 근대의 탄생>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이혜원 옮김
- <시대를 훔친 미술> 이진숙 지음
이 세계에 들어왔던 것처럼. 당신이 죽음에서 삶으로 왔던 그 똑같은 길을 따라 어떤 감정이나 두려움 없이 다시 삶에서 죽음으로 나아가지, 당신의 죽음은 우주의 질서를 이루는 한 부분이다.
이 문장은 오늘 같이 살펴볼 <1417년, 근대의 탄생>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우리의 죽음을 이렇게 준비하자는 얘기죠.
메멘토모리( Memento nori, 죽음을 기억하라,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옛날 지식인들의 서가에는 늘 해골이 있었잖아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지만 언젠가는 죽으리라는 것을 늘 생각하자는 뜻으로 말이죠.
연말에 저는 음악회에 다녀왔습니다. 브람스의 교향곡 연주회였는데 참 좋았습니다. 평소에 브람스 교향곡을 집중해서 듣기가 쉽지 않은데 안테나를 세우고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기회였죠. 음악회가 끝나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브람스는 어쩌면 불행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앞에는 베토벤이라는 커다란 산맥이 이미 놓여 있지 않았습니까?
- 모차르트(1756~1791), 베토벤(1770~1827),
브람스(1833년 생), 슈만(1810년 생)
브람스가 태어났을 때 베토벤은 이미 9번 교향곡까지 다 작곡한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그 다음에 태어난 브람스는 베토벤의 그것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지 않았을까요? 제 추측이 맞는다고 가정한다면 ‘비슷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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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돼’, ‘새로워야 해’같은 명제들이 그의 발목을 잡았을 테죠. 그러하니 뭔가 다른 걸 만들어내기 위해 자꾸 낮은 화음들을 넣게 되지 않았을까요?
그럼 본격적으로 이번 시간에 다룰 책들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오늘은 역사 얘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역사는 재미있습니다. 외우는 과목일 땐 지루하지만, 흐름을 읽으면 매우 재미있는 학문입니다. 오늘 소개할 1417년, <근대의 탄생>과 <시대를 훔친 미술>, 이 두 권을 책들 역시 역사를 재미있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들입니다.
■ 다시 질문의 세대로
<1417년, 근대의 탄생>은 우리 삶 혹은 요즘 시대에 “왜?”라는 질문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해준 책입니다. 저자 스티븐 그린 블랫은 당대의 뛰어난 필사가이자 인문주의자였던 포조 브라촐리니를 통해 르네상스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스티븐 그린블렛에 따르면 1417년 포조 브라촐리니는 우연한 기회에 독일 남부의 한 수도원의 오랜 서가에서 먼지가 쌓인 책 한권을 발견합니다. 고대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가 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의 필사본이었죠. 저자는 이 책의 발견으로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중세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위험한 사상을 안고 있는 책이었어요.
‘우주는 신의 도움 없이도 움직이고, 사후 세계에 경험하게 된다는 종교적 공포는 인간생활의 적이며, 쾌락과 미덕은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뒤엉켜 있다.’
루크레티우스가 주장한 “우주는 신의 도움 없이도 움직인다”는 얘기를 중세 기독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매우 위험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철저히 숨겨졌습니다. 신본주의 시대에 존재해서는 안 될 책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 책이 포조 브라촐리니에 의해 발견됐고 그가 자신의 작업 동반자 니콜로 니콜리에게 필사를 부탁하면서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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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된 이 책은 당대의 지식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몽테뉴, 마키아벨리, 보티첼리 등이 읽게 됐고 이윽고 시대 변화의 시작점이 되죠. 이후 다윈, 프로이트, 아인슈타인에게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중세는 “왜?”라는 질문이 없던 시대였습니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고,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으면 그만이었습니다. 반면에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왜?” 라는 질문이 존재했죠. 신의 말은 언제나 옳은가? 사후 세계는 존재하는가? 인류는 어디서 시작됐을까? 같은 질문들이요.
책 속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무한한 우주 공간에서 영속적으로 서로 충돌하고 결합하여 “일탈한”결과로서 물질들을 구성한다.’
생명체가 신의 정밀한 계산이나 치밀한 계획에 의해서라기보다, 일탈의 과정을 통해 탄생된다는 얘기입니다.
<1417년, 근대의 탄생>은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는 발화점이 되고, 수많은 사상가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줬던 책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논픽션 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한 책이기도 한데 상의 수상 여부와 관계없이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다시 한 번 “왜?”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었죠.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집필한 루크레티우스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일원이었는데요, 에피쿠로스는 쾌락주의자입니다. 그런데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쾌락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부정적인 의미의 쾌락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쾌락은 사실 왜곡된 개념이라고 합니다. 에피쿠로스가 주장했던 사상을 무시하고 억압해야만 했기 때문에 쾌락을 술이나 마시고 몸을 함부로 다루는 천박한 일로 정의한 거죠. 하지만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쾌락은 불교에서 보는 세계관과 비슷했어요.
에피쿠로스가 말한 쾌락은 ‘현명한 쾌락’이었습니다. 현세, 즉 나중이 아닌 내 눈 앞에 있는 것에 진지한 태도를 가지고 집중하라는 의미의 쾌락이었던 것이죠. 실존주의 철학과 동양철학의 정신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동양사상이 서양으로 유입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들 안에 있었으나 억압받았던 것입니다. 에피쿠로스의 영향을 받은 루크레티우스도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이런 문장을 적었습니다.
“우주에는 창조자도 설계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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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우리들이 들으면 특별한 주장이 아니지만, 아마 이 문장을 필사했던 니콜로 니콜리는 살이 떨렸겠죠. 우주에는 창조자도 설계자도 없다니요, 중세 시대에 이런 얘기를 한다는 건 신성모독이었을 겁니다. 목이 날아갈지도 모를 위험한 말입니다.
그런데 우주에는 창조자도 설계자도 없다는 말을 이미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 했다니 참 놀랍죠. 그리고 그런 사상과 이론이 몇 세기에 걸쳐 완전히 억압당하고 있었다는 것도 대단하고요. 그뿐인가요. 우연한 경로로 신본주의를 부정하는 주장을 담은 책이 발견되어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왔다는 것까지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사물은 일탈의 결과로 태어난다.’
이 얘기도, 창조주는 모든 것 알고 있다는 것과 완전히 배치되는 개념이에요.
‘이미 창조된 것에 고유의 기능이 생긴다.’
어떤 기능을 창조주가 계획해서 넣은 게 아니라, 이미 창조된 것으로부터 어떤 기능이 생긴다는 거죠. 지금의 우리는 이 말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중세 시대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거죠.
‘우리 몸의 기관들은 처음부터 의도한 어떤 특정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살아남으려다 보니까 특정한 기능들이 발달 됐다는 거죠.
‘우주는 인간을 위해서 혹은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다.’
이 주장도 그 시절에는 아주 놀라운 개념이었을 겁니다. 그전까지는 조물주가 인간을 창조하고 우주의 총지배인으로서 우리를 앉혀놓고 “너희 마음대로 써봐”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인류가 중심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 땅은 우리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온 자연의 생명체들과 함께 사는 공간이죠. 개미와 나비와 날아가는 새와 수없이 많은 짐승들과 나무와 풀 모두의 공동소유입니다. 이 지구상에 우리는 짧게 머무르는 겁니다. 고은 선생이 말하죠. 길을 가다가 개미가 지나가는 것은 나에게 이 땅이 우리만의 땅이 아니라는 것을 얘기해주기 위함이라고요.
이미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나왔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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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종의 생명체의 운명이 사물의 회전축이 될 수는 없다.
같은 맥락입니다.
미국의 천체물리학자 칼 세이건은 ‘우주달력’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138억 년 우주의 역사에서 인간이 태어났을 때가 약 7만년 전이라 합니다. 138억년 을 1년으로 치면 인류의 출현은 12월 31일 밤 10시 30분이라는 거죠. 인류 전체가 고작 남은 한 시간 반의 시간을 살고 있어요. 잠깐이죠. 지구가 그런 얘기 한다면서요. “옛날에 공룡이 반장일 때가 더 나았어.” 인간들이 반장을 할 때보다 그때가 나았다는 거예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좋은 얘기들이 담긴 책이 중세 시대에 꽁꽁 숨겨져 있었습니다. 질문을 용납하지 않았던 시대, 신의 권위에 도전하지 말라던 시대, 신은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으니 묻지 말고 신의 뜻을 거저 따르라던 시대가 바로 중세였죠.
‘그 누구도 읽는 내용은 물론, 그 밖의 무엇에 대해서도 절대 질문을 던져서는 안 된다. 기회가 생기도록 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선의의 질문이라 해도 질문은 토론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으며, 토론이 가능해지면 종교의 교리가 의문과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여지를 주기 때문에 질문을 던지지 말라는 거죠. 질문을 던지면 의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깁니다. “진짜 사후세계가 있어?”라는 의심은 그 시절 불경이었으니까요. 신의 뜻은 하나인데 그것에 대해 얘기를 해보자는 것은 중세적 세계관에서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수도원이라는 공동체는 서로 반대되는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며 쉼 없이 광범위한 호기심을 키워갔던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철학 아카데미와는 달라야 한다는 확고한 의식이 깔려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이 발견되어 점점 퍼져 나가면서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줬지요. 그중 도미니쿠스회 소속 수도사였던 조르다노 브루노라는 인물이 있었어요. 이 사람이 꽤 반골이었는지 수도사였음에도 여기저기에서 강한 어조로 얘기를 많이 하고 다녔어요.
“세계는 그 자체로 멋지다.” 브루노는 고뇌, 죄악, 회개에 관하여 무수한 설교가 마치 세상을 촘촘히 뒤덮은 거미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조리 쓸어내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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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종교 지도자들이 하던 설교의 내용들을 세상을 뒤덮고 있는 거미줄로 여기고 이걸 다 걷어내려 했던 사람이래요. 이 사람은 코페르니쿠스를 지지했는데 그의 표현에 다르면 코페르니쿠스는,
너무도 오랜 세월 동안 눈멀고 악의적이며 거만하고 시기심 많은 무지의 동굴아래 파묻혀 있던 고대의 진정한 철학이라는 태양이 떠오르기에 앞서, 새벽을 알리는 자가 되도록 신들이 임명한 사람이다.
지구가 우주의 고정된 중심이 아니라 태양 주변을 도는 행성이라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은 당시 교회와 학계 모두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혔던 충격적인 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브루노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지구도, 태양도 우주의 중심이 아니다. 우주에는 중심이 없다고 말하죠. 그리고 이런 얘기를 합니다.
“신성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이 말은 곧 불성은 우리 안에 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모두가 부처잖아요. “성불하세요”라는 말은 “당신 스스로 신이 되세요”라는 말이잖아요. 내가 신이 될 수 있다는 말이죠. 이것은 불교의 세계관인데, 지구 반대편에서도 그런 얘기를 했던 거예요. 신성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고요.
몽테뉴는 <수상록>에 실린 <잔인함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우리가 다른 생명체들 위에 있다며 스스로에게 부여한 상상 속의 왕권 개념”을 기꺼이 거부했답니다. 그리고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환상을 조롱하며 같은 책에 실린 <레이몽 스봉을 위한 변명>이라는 글에서는 이런 재미있는 문장을 썼죠.
그런즉 새끼 거위 한 마리가 이렇게 말하지 않겠는가? “세상의 모든 것이 나를 염두에 두고 있다. 땅은 내가 걷기 위해 존재하며, 태양은 나를 비추기 위해서 존재하고, 별은 나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존재한다. 바람도 물도 더 나에게 이롭고자 존재하는 것이다. 하늘 아래 그 어떤 것도 나만큼 귀하게 여겨지는 것은 없다. 나는 자연의 총아이다.
■ 예술, 시대를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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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훔친 미술>은 추천을 받아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여러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더라고요. 역사적인 흐름들을 짚어주는 것도 좋고, 그림 애기들이 나와서 더 좋았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또 좋았던 점은 우선 궁금한 것들이 상당부분 해소 됐다는 겁니다. 그간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해하게 됐어요. 저는 네델란드 라는 나라가 늘 신기했거든요. 이상하지 않나요? 정말 작은 나라인데 세계사에서 역할이 꽤 크죠. 뉴욕도 처음에는 네델란드 거였잖아요. 원래 이름이 뉴암스테르담이었죠. 이 작은 나라가 세계사에 당당히 각인 됐다는 게 신기했어요. 그런데 이 책을 보니 이유를 알겠어요.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17세기 역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나라는 네델란드였다. 다른 나라들이 대부분 강력한 절대왕정 아래에 있을 때 네델란드는 보기 드물게 시민이 주도하는 국가였고. 이를 바탕으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절대 권력이 지배하던 다른 나라에서 시민들의 일상은 그려질 가치가 있는 것이 되지 못했다. 반면 신교와 구교의 갈등을 종식하고 모든 다양성의 공존을 인정하는 새로운 문화를 꽃피운 강소국 네델란드에서는 시민들이 사회의 주역이었다.
그림을 하나 볼까요?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의 약혼>입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이런 그림이 불가능 했다는 거죠. 왜 이런 그림이 네델란드에서 시작될 수 있었느냐. 이 그림의 소재는 서민들의 약혼식이거든요.
<시대를 훔친 미술>은 이런 문맥을 따라가면서 그림을 볼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책입니다. 저자 이진숙 씨는, 역사는 개인화, 세속화, 세계화의 방향으로 전개 된다고 말합니다.
■ 인본주의 시대의 예술
<1417년, 근대의 탄생>에 나온 것처럼 중세 시대에는 현재의 삶을 천국에 예비하며 지나가는 통로 정도로 인식했어요. 그렇다보니 현세를 위해 부를 축적한다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가 축적되면서 세상은 살아볼 만한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어요. 더 맛있는 빵도 먹을 수 있고. 여유로운 생활도 할 수 있고. 좋은 술도 마실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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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게 됐죠. 이런 경험들이 쌓이다 보니 지금 여기에서의 삶도 괜찮구나 하면서 세속화되기 시작합니다. 부가 축적되면서 세속화가 진행됐다는 거죠.
<아르놀피니의 약혼>은 최초의 시민 초상화입니다. 미술의 소재가 변화된 겁니다.
책을 보면 이 그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인물 배치에서 성(性) 역할의 분담이 읽혀요. 남자는 창가 쪽에 있으니 바깥일을 하는 거고, 아내는 안쪽에 위치하고 있어요. 침대 머리에 매달린 빗자루는 가사에 힘 쏟을 것을 얘기하고, 체리나무는 계절감에 배척되는 것 같지만 다산의 상징으로 기능한다는 등의 그림에 대한 세밀한 묘사와 설명들이 쭉 나옵니다.
이렇게 역사가 흘러가면서 미술 소재에 변화가 생기고 그림을 보는 방법에도 변화가 생깁니다. 세속화가 진행되고 인본주의가 본격화되면서 비로소 원근법도 주목을 받습니다.
인간이 바라본 자연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미술의 과제가 되었다.
그전까지는 인간이 바라본 자연이 아니라 신의 세계로서의 자연이 중요했는데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갖게 되면서 인간이 바라보는 세계, 우리가 바라보는 것들이 중요해집니다. 그러면서 원근법이 미술 기법으로 출현하죠. 이후 인간이 바라보는 자연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미술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됩니다.
이 책에 따르면 그전까지는 성모마리아가 웃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없었대요. 왜냐하면 성모마리아는 이미 알고 있거든요. 이 귀여운 아이가 서른셋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걸 알아요. 신의 계획에 의해 전부 다 정해져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즐거울 수가 없죠. 그리고 지금 이 아기 예수 의 표정 보세요. 뭔가를 골똘히 바라보고 있어요. 그러면서 신기해 하잖아요. 그전까지는 저런 눈빛이 없었다는 거죠. 왜냐하면 예수는 신의 아들이니 모르는 게 없거든요. 어린 나이지만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 그림이 세상에 나온 겁니다. 사람의 모습을 한 성모와 예수의 그림이 말이죠. 지금 여기의 인간이 중심인 세계관에서 그려진 그림이에요. 평범한 엄마와 아기의 표정이에요. 알고 보니 참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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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이 신의 뜻에 따라 예정되어 있다는 중세의 예정설도 성모 얼굴에서 웃음을 거둬가는 데 한몫했다. 귀여운 아기 예수가 아무리 재롱을 피워도, 그 사랑스러운 아들은 서른세 살이 되면 고통스러운 수난을 겪고 말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과학자 같은 아기 예수의 표정 역시 중세적 관념에서는 절대 탄생할 수 없었다. 중세적 관념에서는 이 세상은 신의 창조물인데, 신이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을 이렇게 호기심을 품고 바라볼 리가 없다. 이는 자연을 호기심과 관찰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 표정이다.
■ 인쇄술, 예술에 영향을 미치다
그다음 얘기는 종교개혁 얘기인데요. 중세 가톨릭이 교황을 중심으로 면죄부를 팔며 독재했던 것이 결국 개혁을 불렀죠. 루터에 의한 종교 개혁 이후 가톨릭 안에서 교황의 권위는 더운 약해졌고, 권위를 잃은 이들이 자신들의 살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반(反) 종교개혁이 시작됩니다. 그러면서 인문적인 교황들이 나타나죠.
이들 인문주의 교황들은 이교도 신상을 더 이상 종교적인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술은 종교로부터 점차 분리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고대 로마의 영광된 시대를 상기시키는 조각품을 교황청에 둠으로써 교황청의 권위를 고대 로마의 영광과 연관시키려는 의도이기도 했다.
그전까지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사상을 가톨릭에서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질문을 던지고 토론을 하다보면 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되니까요. 그런데 이 <아테네 학당>이라는 그림에는 그리스 시대의 현인들이 다 모여 있습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탈레스가 있어요. 이 그림은 지금 바티칸 교황청에 있습니다. 바뀐 거예요. 중세였다면 절대 교황청에 있을 수 없는 그림이었죠.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가 숨겨져왔던 것처럼 말이죠.
더 이상 면죄부를 팔며 기존의 권위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게 된 교황청은 융성했던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힘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이 그림을 제작합니다.
더 깊게는 예술가들의 교황청 점령이라 할 만하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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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유산인 인문학이 세상을 설명하는 데 필수적인 지혜임을 인정한 기독교의 양보이자 피할 수 없는 세속화의 방향을 보여주는 일이다.
서적의 보급은 독서의 형태를 낭독에서 묵독으로 바꾸었으며, 개인적인 독서를 허용했다. 책이 널리 보급되지 않았을 때는 누군가 대중들에게 책을 읽어줬겠죠. 그런데 인쇄술의 발달로 책이 많이 공급되니까 사람들이 각자 묵독을 하기 시작합니다. 묵독을 하면서 자신에게 집중하기 시작했고, 개인화가 진행된 겁니다.
루벤스의 그림은 구텐베르크의 영향이 있기 전입니다. 한 사람이 얘기를 하고 있고 사람들이 전부 그 사람을 바라보고 있죠. 대중들은 설교를 하는 사람을 통해서 신을 보는 겁니다. 그런데 구텐베르크 이후에는 누굴 통해서 신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들의 시선으로 바라본다고 해요.
이제 인간은 신 앞에서 독대하는 개별적인 존재가 된 셈이었다.
- 바로크 미술 :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위해 택한 방법으로 화려한 장식으로 가톨릭의 힘을 보여주기 위한 미술
- 신교는 텍스트를 가지고 사람들을 설득할 때, 가톨릭은 권위를 세우기 위해 화려한 그림과 장식으로 성당을 꾸미기 시작
- 로코코 : 바로크의 화려한 종교적 권위를 돈 있는 개인들이 가져간 것
■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드리는 그 문장
모두들 기성 제도와 관습, 관행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기에 새로워져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이것이 예술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친부살해의 욕망입니다. 자기 아버지를 죽여야 하는 거예요. 자기 아버지를 죽여야 비로소 새로운 가치가 태어나는 거니까요. 신화를 보면 많은 영웅들은 아버지가 없잖아요. 만약에 아버지가 있으면 그 영웅이 아버지 뒤로 서게 되겠죠. 그런 까닭으로 영웅들은 알에서 태어나기도 하고, 새가 물어다 주기도 해요. 미술사나 예술사도 기원을 부정하면서 거듭 나아가야 하는 거죠.
이쪽 면과 저쪽 면을 동시에 그리는 피카소의 입체주의는 20세기 초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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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적 발전과 관련이 있다. 물리학에서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상대적인 해석이 등장하게 된다. 시공간의 결합은 절대적이지 않다.
물리학의 발전과 미술의 교감, 짜릿하지 않습니까? 프로이트와 미술의 관계도 그렇죠.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이라는 책은 당대 미술에 영향을 줍니다. <꿈의 해석> 내용에 충격을 받은 화가들은 자신의 무의식이 그리는 그림이 궁금해졌어요. 나의 무의식이 꿈이 된다니까 무의식이 그리는 그림이 뭔지 알고 싶어진 거예요. 그래서 마약도 하고요. 잠잘 때 그리기도 하고, 왼손으로 그림을 그려보기도 합니다. 추상의 길이 이렇게 열려나가죠. 무엇이든 그냥 오는 건 없어요. 흐름 속에서 문맥을 따라가면서 새로운 것들이 시작되는 거죠.
5강. 희망을 극복한 자유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기행문
* 이 장에서 소개하는 책들
- <스페인 기행> 송병선 옮김, <영국 기행> 이종인 옮김
- <카잔차키스의 천국의 두 나라> 정영문 옮김
- <일본 중국 기행> 이종인 옮김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는 자신이 말한 대로 살았어요. 제가 아는 한은 그래요. <다시, 책은 도끼다>의 핵심인 “읽었으면 느끼고, 느꼈으면 행하라”는 문장이 바로 그의 삶 자체였습니다.
■ 소재가 아닌 통찰에 집중하라
<카잔차키스의 천상의 두 나라>, <영국 기행>, <스페인 기행> 이렇게 그가 쓴 기행문 세편을 골랐습니다. 카잔차키스는 특히 기행문이 뛰어난 작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천상의 두 나라>는 카잔차키스가 일본과 중국을 여행하고 쓴 기행문입니다. 좋은 문장이 많아서 밑줄을 친 부분을 보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일반적인 여행서는 대상에 대한 객관을 담습니다. 기차표가 얼마이고, 맛집이 어디에 있고 하는 식의 객관적인 사실들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카잔차키스의 기행문은 ‘대상에 대한 저자의 사색이 주제가 됩니다. 이 사람 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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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저 올릴 수 없는 것들이죠. 오늘 소개해드릴 기행문들을 읽을 때에는 그것을 발견하려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카잔차키스의 기행문은 ‘어떻게 삶을 대할 것인가?’라는 한 가지 방향으로 흐릅니다. 그는 온 몸이 촉수인 사람으로 살고 싶었습니다. 순간순간 예민하고 싶어 했죠. 그 순간에 온전하고 싶었던 겁니다.
‘나는 그런 영혼이오. 세계를 만지는 촉수가 다섯 개 달린 덧없는 동물.’
세상과 접촉하는 나의 모든 촉수를 예민하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던 문장입니다. 여기서 다섯 개의 촉수는 미각, 촉각, 후각, 청각, 시각의 오감입니다. 이 감각이 얼마나 예민하느냐가 ‘얼마나 좋은 삶을 사느냐의 핵심이라고 본 거예요. 똑 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물 한 잔을 마실 때에도아무 생각 없이 마시는 사람과 아주 예민한 촉수로 느끼면서 먹는 사람은 그 순간 존재하는 방식이 다를 겁니다.
‘나는 부라카의 멜론과 볼가강의 수박과 한 일본 소녀의 차갑고 섬세한 손을 영원히 내 손에 - 영원히, 다시 말해 내 손이 썩을 때까지 - 쥐고 있을 것이다.’
이게 카잔차키스의 삶의 태도입니다. 이 문장을 읽은 다음부터 저는 멜론을 만질 때마다 그냥 만지는 것이 아니고 한 번 더 저만의 느낌을 가져보려고 노력합니다.
내가 이런 촉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요? 어디론가 여행을 가서 그 나라를 내가 촉감으로 느낄 수 있다면 말이죠. 손철주 선생의 <인생이 그림 같다>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시인 황지우 선생이 진흙 공예를 배우면서 이런 얘기를 했답니다. “촉각이 영혼을 발전시킨다는 것을 그때 나는 알았다.” 여기서 발전은 ‘Generate(창출하다. 발전키다. 생산하다. 만들어내다)’입니다. 진흙 공예를 하면서 촉각이 내 영혼을 발전시킨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영혼을 발전시키려면 책을 읽고 공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촉각이 영혼을 발전시킨다고 말하는 황지우 시인의 감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왜 온몸이 촉수인 삶을 살아야 할까요?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어디에도 완벽한 것은 없기 때문인 것 같아요. 현명하게 사는 방법은 그 순간을 온전하게 사는 것뿐이죠. 행복은 저 멀리 있지 않아요. 카잔차키스가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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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했죠. “신은 천둥 벼락 같은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신은 빗방울 같은 모습으로 온다.” 중국 여행을 하면서 카잔차키스는 해가 지고 진한 파란색이 감도는 하늘에 저녁 별이 보기 좋게 반짝이고, 시원한 공기와 뿌리에서부터 꽃을 피우는 철쭉이 있는 고요하고 조용하며 단순한 기쁨이 가득한 밤에 공자의 말을 떠올립니다.
‘행복은 하늘이나 땅의 딸이 아니라 인간의 딸이다.’
행복은 어디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니므로 우리가 찾아내야 한다는 거죠. 그리고 장자 얘기를 하나 인용해요.
‘하늘 아래에는 가을의 작은 나뭇잎 이상 위대한 것은 없다!’
작은 나뭇잎 하나 그게 다입니다. 내 눈앞에 나타난 그게 전부입니다. 그것은 소재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입니다.
■ 삶의 매 순간을 우아하게 보내는 법
현재에 집중하면서 매 순간을 우아하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은 육체와 물질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영혼은 육체에 있습니다. 행복 또한 마찬가지죠. 행복은 물질에 있습니다. 물질이 우리한테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배고프면 아무 생각 안 납니다. 배 부르셔야 하고 잘 주무셔야 해요. 제가 나이 들어 바라는 것은 하나가 잘 잤으면 좋겠습니다. 소화를 잘 시키고 잘 먹었으면 좋겠어요. <그리스인 조르바>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오죠.
‘나는 또 한 번 행복이란 포도주 한 잔, 밤 한 알, 허름한 화덕, 바다소리처럼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것임을 깨달았다. 필요한 건 그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는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뿐이다.
‘육신이 만족하자 영혼은 기쁨으로 전율했다.’
실물적 행복이죠.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살펴볼까요? <천상의 두 나라>에 보면 장자가 이런 말을 했답니다.
‘땅이 내 관이 되고, 하늘이 내 묘비가 될 게야. 해와 달과 별이 내 무덤을 장식할 게야. 그보다 더 아름다운 어떤 것을 더할 수 있는가? 장례식 없이 나를 보내도록 하라. 나는 무덤을 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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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며 무덤 봉분이며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땅이 내 관입니다. 내가 땅 속에 묻히면 그만입니다. 내가 묻힌 그 자리 위에 해와 달과 별이 뜨면 되는 거죠. 그러자 장자의 제자들이 따집니다. ‘하지만 독수리가 시신을 먹어 치울텐데요,’ 그에 대한 장자의 대답입니다.
‘나는 묻지 않으면 독수리가 먹어 치울 것이다. 하지만 나를 묻게 되면 벌레들이 나를 먹어 치울 것이다. 전자보다 후자를 선호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에스키모인들은 부모가 죽으면 눈밭에 버린답니다. 언땅에서는 시신이 썩지 않습니다. 순환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곰에게 먹히는 겁니다. 그들의 문화예요.
시신을 땅에 묻는 건 농경인들의 문화예요. 땅을 일구고 그들은 땅을 가장 신성시하니까요.
카잔차키스는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
‘보고 듣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서둘러서는 안 된다. 서두르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 것도 듣지 못할 것이다.’
자동차 다니는 속도로 보면 보이는 것들이 새삼 다르잖아요. 자전거 탈 때 보이는 장면이 다르고, 걸을 때 보이는 게 다르고, 심지어 서 있을 때 보이는 게 달라요. 한 사물을 오랫동안 바라보면 영혼이 훈련이 된 사람들은 그 한 장면을 보고도 그 장면 속에서 많은 이야기들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반면에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고 여러 나라를 다녔다 할지라도 아무 것도 보지 않은 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작가는 속도에 대한 이야기를 한 다음에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성급함과 초조함과 서두름을 극복했다.’
카잔차키스는 또 이런 얘기를 합니다.
‘예술품의 완전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예술품이 태어난 나무와 물과 언덕 사이에서 그것을 보아야 한다.’
다른 곳을 여행할 때 여행자가 가져야 하는 자세에 대해 한 수 배웠던 문장입니다.
풍경들을 객관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가서 온전히 느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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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들은 자기만의 여행을 할 수 있어요. 자기만의 감성 교감이 중요합니다. 저는 ‘Interaction(상호작용)’이라는 단어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정보나 지식은 내 속에 들어왔을 때만 해석이 됩니다. 교감이죠. 여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에게 똑같은 여행은 없습니다. 같은 곳을 여행했다고 해도 전부 느낀바가 달라요
다음은 내 삶의 자세에 대한 문장입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미소를 지으며 서 있게나.
자신 앞에서는 엄격한 얼굴로 서 있게나.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용감하게 서 있게나.
일상생활에 서는 기분 좋은 얼굴을 하게나.
사람들이 자네를 칭찬 할 때면 무심하게나.
사람들이 자네를 야유할 때면 꼼짝도 하지 말게나.
올해 사보에 이런 문장을 썼습니다. “실패한 곳으로 돌아가고 성공한 곳은 떠나라” 카잔차키스의 말이에요. 카잔차키스의 글은 제 삶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어요. 이제 그 아름다운 문장들을 좀 읽어드릴게요.
‘나는 스위스 알프스에 있는 론 강의 원천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비단 리본만큼 좁다란 파란물이 초록색 빙하 아래로, 마치 어디로 갈지 무엇이 될지 모르는 듯 주춤거리며 나아간다. 그것은 천천히 움직이며 조금씩 커져 다른 물의 띠와 만난다. 그리고 결심한 듯 길을 파 만들면 더 이상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이 나아간다. 이제 그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더 넓어지고 깊어져 마을을 적시고, 방앗간을 돌리고, 멜론 밭을 축이고, 도시를 가르며 지나 흘러 - 이미 그것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 - 바다로 향한다.
■ 영국의 재산, 도전과 모험으로 얻은 자존감
<영국 기행>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천상의 두 나라>에 나옵니다.
영국인들을 봐요. 사고의 위험을 이해하자마자 그들은 가죽 샌드백을 매달아 그것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두꺼운 막대기를 들어 나무 공을 쳤고, 커다란 공을 차기 시작했어요. 그리하여 그들은 생각에서 벗어나 세계를 정복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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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역사적으로 동양 문명이 서양의 그것보다 훨씬 앞서갔죠. 그런데 뒤처지기 시작합니다. 물질에 대한 무시 때문이었어요. 정신과 영혼만 쫓은 거죠. 그런데 영국인들은 육체를 이용해 물질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도를 해나갔죠. 그렇게 외로운 섬나라에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된 거예요.
우선 영국이란 나라에 관한 카잔차키스의 개념 정의 한 마디.
‘이곳은 현대의 과학이 맨 처음 그 토대를 발견했던 땅이다.’
맞죠. 뉴턴과 다윈의 과학적 발견, 산업 혁명, 모두 영국에서 시작됐으니까요. 그러한 성취들을 인정하는 자세로 여행을 시작합니다. 카잔차키스가 영국을 좋아한 이유는 앞에서 언급했듯 이론에 함몰되지 않고 몸으로 움직일 줄 알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다가도 어느 날 돌연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다.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는 호기심과 탐색의 본능이 영국 사람들의 핏속에 흐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가 그들을 바다 밖으로 끌어 낸 것이겠죠.
억누를 길 없이 유혹적인 수평선의 부름을 영국인만큼 가슴 깊이 느끼는 민족도 없다.
수평선 저 밖에 무엇이 있을까? 섬나라 사람들에게 수평선이 가지는 의미는 남다릅니다. 그 부름을 따라 거침없이 나아간 영국 사람들, 지금도 영국은 세계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진 나라입니다. 영어는 전 지구적으로 널리 퍼져 사용되고 있고요.
‘영국인에게는 바다가 가장 훌륭한 묘지이다. <굽이치는 물살마다 영국인이 잠들어 누워 있다.>
도전하고 모험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겠죠.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해서 시련이 없었을까요?
‘그들에게 먼 곳은 유형지나 세상의 끝이라 할 만한 곳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신화가 만들어졌겠죠.
게다가 그들은 어디에 가든, 심지어 세상에서 가장 먼 오지에도 안락하게 정착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어딜 가든, 그 사람이 머무는 자리가 곧 영국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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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스페인이 해상권 장악을 위해 쳐들어 왔을 때 영국은 해적을 고용해 스페인의 무적함대인 아르마 함대를 격파하죠. 그리고 그날 이후 세상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아르마 함대가 격파된 후 당신들은 거대한 해군을 일궈냈소. 교황에 묶였던 사슬과 속박을 잘라내고 종교 영역에서 스스로를 해방 시킨 것도 그때였지. 그때 비로소 영국은 심리적으로 섬이 되었소.
영국이라는 나라의 위상이 달라진 것이 스페인 무적함대 격파 이후라는 이야기죠. 이처럼 그의 기행문을 읽다보면 어느 정도 역사의 맥락도 잡히지요.
그렇게 영국은 세계사의 중심으로 성큼 들어왔습니다. 자존의식이 높아졌겠죠. 그러한 자존감 때문에 영국인들은 자기들 내부의 동의가 서지 않으면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인 것 같아요.
‘영국인들은 외부의 법규는 모름지기 개인 내부의 입법자에게 비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의 많은 젊은 친구들이 꼭 가졌으면 하는 태도예요. 바깥의 권위, 혹은 많은 돈, 학벌에 주눅 들어 무조건 그것들을 받아들이지 말고 자신의 내부에서 검증을 해야 해요. 상호작용입니다. 인류사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나예요.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내 인생이니까 그런 겁니다. 세상의 모든 잘난 것들도 내 안의 입법자와 협의해서 동의가 되면 그때 받아들이는 거예요. 당시 옥스퍼드 최고의 자랑거리였던 철학자 로저 베이컨은 이렇게 말했다죠.
‘그는 <진리를 파악하는 데 방해가 되는 주요 장애물 네 가지> - 허영, 통속적 견해에 대한 신뢰, 당국의 견해에 대한 복종, 그리고 습관 - 를 줄기차게 공격했다.’
영국의 교육제도에 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카잔차키스는 영국의 힘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이튼, 옥스퍼드, 케임브리지를 찾아갑니다. 가서 많은 것들을 느끼고 그 감상들을 글에 담았는데요. 그중에서도 제 기억에 남는 건 그들의 교육은 ‘인간의 증서’를 주기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심한 육체적 단련이나 지나친 정신적 긴장을 주장하여 인간을 영육 간에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진 불구자로 만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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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소속 칼리지들의 주요 목표는 학식이나 지식을 두뇌에 채워 넣는 것만이 아니다. 이곳 졸업생들은 의사나 변호사, 신학자, 물리학자, 운동선수 같은 전문가가 되어서 나가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신체적으로든 어느 한 방면의 전문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는다. 그레이트브리튼 최고의 젊은이들이 고등학교를 마치고 와서 2,3년 머무르면 <조화>를 배운다. 육체, 정신, 심리가 고루 단련된 완벽한 인간이 유일한 목표이다.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서는 전공 분야에 대한 증서를 받지 않는다. 그들이 받는 것은 <인간의 증서>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지나친 정신적 긴장을 통해서 영혼의 불구자로 만들거나 혹은 정신의 함양 없이 신체만 발달시키거나 둘 중 하나죠. 대학은 둘 사이의 균형을 찾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어떻습니까?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교양수업을 다 없애버리잖아요. 역사, 철학, 음악 교육 같은 것들을 다 없애고 있습니다. 대학이 해야 할 일은 취업 공장으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제대로 된 인격체를 길러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기계를 만드는 것이 대학이 역할은 아니죠. 자신의 삶을 더 풍요롭게 살 수 있고, 사회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균형 잡힌 사람을 만드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오래전 카잔차키스가 느끼고 쓴 이 문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영국이니까 당연히 셰익스피어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카잔차키스는 셰익스피어가 문학의 거성이 된 이후의 모습을 좇는 게 아니라, 그의 젊은 시절을 더듬어보려고 해요. 과연 그가 어떤 경험을 바탕으로 그런 글들을 썼는지 생각해보는 거죠. 다시 한번 진짜 기행문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여행지에 가서 사진만 찍고 오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오래전 살았을 역사 속 인물을 떠올려보는 거죠. 그가 보냈을 하루, 그가 짊어졌을 고민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 거예요. 마치 노량해전이 있던 날, 이순신 장군의 심경이 어땠을지를 상상해 보는 것처럼. 카잔차키스는 셰익스피어의 집 정원에 앉아 이런 상상을 합니다.
새벽이면 한 청춘(셰익스피어)이 바로 이 길로 난 정원의 문을 훌쩍 뛰어 넘어 이슬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로 떠나갔었다. 그때 샛별은 그의 머리 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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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얼마나 찬란하게 반짝였을까! 그의 가슴속 종달새는 얼마나 요란하게 우짖었을까! 그것은 그가 여자와 더불어 난생처음 맛보는 절묘하고 소박한 기쁨들이었다. 그 새벽마다. 훗날 그가 읊게 될 구절들이 아직 태어나지 못한 채 그의 내장에서 용솟음쳤을 것이다.
이처럼 <영국 기행>은 영국인들의 도전정신에서부터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까지 카잔차키스가 영국을 여행하며 느꼈던 많은 것들이 담겨 있는 책입니다. 영국 기행을 마치기 전에 좋은 문장 몇 개 더 소개 할게요.
시간은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본연의 의무를 수행한다.
<영국 기행>에 보면 영국인들이 ‘시간을 건축가로 모시는 전통을 따른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바람의 풍화작용을 통해 건물은 차츰 닳고 바래갈 겁니다. 하지만 시간의 흔적을 품어가며 건물의 모양은 점점 완성되어 가죠. 시간을 건축가로 모신다는 말, 참 공감이 되는 문장입니다.
이런 문장도 있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실제 모델인 기오르기스 조르바가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된 내력에 대해 얘기해 부는 부분입니다. 다음에 말하는 것들이 결국은 세계대전을 일으켰다는 거죠.
이 빌어먹을 것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잘 들어봐요. 미성년자 몇 놈이 애국적인 책을 몇 권 읽고 애국자가 되었어요. 그다음에는 사회주의 책들을 읽고 사회주의자가 되었죠. 그다음에는 무정부주의 책을 읽고 무정부주의자가 되어 사람을 죽이기로 했지요. 그런데 누굴 죽이지? 녀석들은 아직 알 수 없었죠.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문장이라서 많이 인용하는 문장이지요.
‘ 나는 이 세상에 왔던 것에 만족합니다. 내가 무수한 고난을 겪었음에,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음에, 만족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서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조건 속에서 힘들게 삽니다. 어떤 잘못된 판단을 해서 실수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내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닌가요? 그렇지 않죠. 실수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겠지만, 실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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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고 해도 결과를 받아들이며 다시 살아가죠.
아모르파티(Amor fati)입니다.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라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문장이에요. 이상 <영국기행>이었습니다.
* Amor fati : 운명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운명마저 사랑하는 사 람이 되어라.
■ 돈키호테처럼, 스페인 기행
이제 <스페인 기행>에 대해 얘기할 순서인데요. ‘돈키호테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만든 문장이 있어 먼저 알려드릴까 합니다.
‘스페인은 여러 국가들의 돈키호테다. 안전과 복지를 우습게 여기면서 절대로 손에 넣을 수 없는 터무니없는 망상을 영원히 좇는다.’
스페인은 아주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오랜 무슬림 지배 때문일 수도 있고 날씨의 영향도 있을 겁니다. 지형적으로 보면 지중해와 지브롤터 해협이 맞닿아 있고, 아프리카와 가까운 유럽이면서 다fms 유럽과 통하는 길은 피레네 산맥으로 막혀 있어요. 다양한 문화를 접해서인지 꽤 자유롭고 열정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죠. 때문에 다른 유럽 도시들에 비해 여행하기가 한결 편안해요. 물건을 사면 기분이다 하면서 덤으로 얹어주고, 식당 같은 데서는 술이라도 한잔 더 따라줄 것 같은 그런 분위기랄까요.
스페인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슬픈 얼굴이 기사>라는 돈키호테의 열정적이면서 긴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실용주의자인 산초의 멍청한 얼굴이다.
카잔차키스는 스페인의 상징으로 ‘돈키호테’를 떠올립니다. 돈키호테는 이 책의 전체를 꿰뚫고 있는 키워드입니다. <스페인 기행>에서는 돈키호테, 산초, 이들을 창조해 낸 세르반테스의 이야기까지 비교적 자세히 다뤄집니다.
여기에서는 스페인이라는 국가의 보편적인 특성이나 역사적인 맥락, 그리고 지형적인 특성을 살펴보고 넘어갈게요.
■ 르네상스는 피레네 산맥 너머로 퍼지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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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가 전 유럽을 휩쓸었지만 스페인은 그 양향을 직접적으로 받지 못했어요. 대신 무슬림의 지배기간이 꽤 길었지요. 그런데 근대에 들어와서 스페인은 걸출한 예술가들을 배출하죠. 피카소, 가우디, 호안미로, 살바도르 달리 같은 사람들이오.
스페인의 남부의 도시 그라나다에서 태어난 철학자 앙헬 가니베트는 이런 말을 했다죠.
‘우리는 두 개의 문을 가진 하나의 집이다. 그 문은 바로 피레네 산맥과 지브롤터 해협이다. 한쪽 문은 유럽을 향해 열려 있고 다른 한 쪽은 아프리카를 향해 열려 있다.’
<스페인 기행>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스페인과 서유럽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가로 놓여 있다. 서유럽은 논리적이며 균형적이다. 심지어 분노가 치밀 때조차 세련되고 우아한 것을 좋아하고, 열정을 논리적이고 냉정한 틀 속에 종속시킨다. 또한 지적 법칙에 의해 훈육되며, 지성이 노력의 절정이라고 외친다. 반면 스페인의 정신은 서유럽과는 정반대다. 그것은 완전히 불균형이고, 거칠며, 격렬하게 움직이고 폭발적이다. 그것은 논리와 고정된 규범을 비웃고, 열정을 영원한 삶과 예술의 유일한 원천으로 주장한다.
스페인의 남자와 여자들에 대한 묘사도 재미있습니다. 스페인 남자들은 돈키호테의 정신이 있어서 모험과 스릴을 즐깁니다. 스페인 여성들은 어떨까요? 남자들이 돈키호테 같은 곳에서는 여자들이 일상생활의 열쇠를 쥐고 삶을 굳건하게 지탱해나가는 것에 익숙해지게 됩니다.
스페인 사람들의 특징을 재미있게 묘사한 문장 하나를 더 볼까요?
스페인 사람들은 ‘차분하게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것’은 자신의 천성에 반하는 매우 불쾌한 일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가 제일 좋아하는 문장입니다.
하느님은 번개와 천둥에 싸여 오시지 않는다. 또한 하느님은 불쌍한 거지처럼 강림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조롱조의 야유를 받고 피를 흘리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찬물을 담아두는 청동 잔이나 지저귀는 새로, 혹은 사랑받는 동쪽의 나이팅게일의 모습으로 이곳에 오신다. 이것이 우리가 늘 준비하고 있어야만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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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지저귀는 소리가 곧 하느님이라는 거죠. 바람 살랑이는 이곳에 하느님이 있다는 거죠. 기적 같은 순간이 일어났을 때에만 하느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장면이 다 하느님의 모습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거대한 무엇을 기대하지 말라는 겁니다.
■ 당신의 찬란한 순간
카잔차키스의 <스페인 기행>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순간이 온전하기 위해서는 그 순간이 완벽해야 한다. 부족함이 없어야 하고 바라는 게 없어야 한다. 모든 희망의 극복이 필요하다.’
‘희망의 극복’이라는 말, 이 또한 카잔차키스입니다. 희망을 극복의 대상으로 봤다는 것은 순간에 온전하겠다는 의지예요.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이 다시 떠오르지 않습니까?
‘나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의 <영국 기행>에서는 셰익스피어에 다한 얘기 중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그 오랜 세월의 몸부림과 분투 끝에 셰익스피어는 마침내 모든 희망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렇게 그는 자유로워졌다.’
이제는 욕망으로 가득했던 젊음의 시간들에서 돌아와 민낯으로 맨몸으로 거울 앞에 선 거죠.
‘찬란한 순간을 기다리지 않는다. 매 순간을 찬란하게 만든다.’
이것도 언젠가 제 노트에 적어 놓은 한 줄입니다. 찬란한 순간은 따로 있지 않습니다. 기다릴게 아니에요. 순간을 찬란하게 만들어야 해요. 지금 이 순간이, 매 순간이 꽃봉오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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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강. 장막을 걷고 소설을 만나는 길
* 이 장에서 소개하는 책
- <커튼> 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 소설 읽기 전, 사전 이수과목
<커튼>은 소설수업의 교재로 사용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소설을 쓰는 사람이라면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소설 읽기를 좋아하거나 소설을 읽으려는 사람들도 꼭 한 번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커튼>은 소설 읽기 전에 들어야 하는 사전 이수과목 같습니다. 이 책을 읽고 소설을 읽으면 훨씬 재미있게 읽히기 때문이죠.
<커튼>은 그 어떤 책들보다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이 많아서 많이 적어놓았던 책입니다.
■ 현실은 커튼 밖에 있다
<커튼>이라는 제목은 이런 뜻이에요. 우리는 커튼 앞의 것들만 봅니다. 영화를 볼 때 어떻게 보세요? 우리의 주인공들은 우여곡절과 갈등을 지나 달콤한 키스를 하는 걸로 엔딩을 맞이하죠. 그렇다고 그동안 서로에게 준 상처, 아픔 같은 이런 것들이 키스 한 번으로 싹 잊힐까요? 현실이라면 일주일 후에 같은 일로 또 다시 싸울거예요. 그런데 그런 모습은 저기 커튼 뒤에 있어요. 보이지 않죠.
이 책은 커튼 뒤, 우리가 읽은 소설 뒤에 숨어 있는, 작가들이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우리가 보지 못한 소설 바깥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 커튼은 찢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다루죠. 소설을 쓸 때 커튼 앞의 모습만이 아니라 그 뒤를 보여줘야 하는 게 아니냐고 생각했던 소설가 들이 있거든요.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세르반테스입니다.
돈키호테도 <커튼>을 읽고 들어가면 분명 다른 지점을 발견해낼 것 같습니다. 여기서 중점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커튼 앞의 모습만이 아닌 뒷모습까지 보여주려고 한 소설이라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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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치통을 과소평가 하는 지식인의 말이다.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야말로 모든 생물을 포괄하는, 훨씬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진실이다.’
밀란 쿤데라의 <불멸>이란 책에 나오는 말인데요, 동의되지 않으시는지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은 나한테 아무 고통이 없을 때 이야기지 치통 때문에 아무 생각이 나지 않으면 그게 도대체 무슨 얘기인 거냐고요. ‘나는 아프다. 고로 존재한다’가 되는 거죠. 이게 인간입니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치통이 있어도 치열하게 생각하며 존재해야 하죠. 예를 들어서 간달프가 죽어가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 섹스를 하고 있을 수는 없어요. 그런 장면이 있다 해도 편집 됩니다. 그런데 세르반테스는 이미 1600년대 초에 그렇지 않은 작품을 쓰고 싶어 했어요. 돈키호테를 간달프라고 생각하고 다음 문장을 한 번 읽어보시죠.
돈키호테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 때문에 질녀가 먹지 못하거나 가정부가 마시지 못하거나 산초의 기분이 유쾌하지 않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주인공은 죽어가고 있는데, 가정부는 먹을 것을 먹어요. 그리고 누군가는 유산을 기대하기 때문에 살짝 웃음을 머금고 있죠. 커튼을 걷어 올렸습니다. 세르반테스의 이 문장을 보고 쿤데라는 이렇게 말하죠.
짧은 순간 동안 이 문장은 삶의 산문성을 가리는 커튼을 살짝 걷어 올린다.
저는 이문장이 핵심적인 제목의 출처라고 여겨집니다. 삶은 산문의 세계인데, 우리가 읽고 있는 건 운문의 세계인 거죠. 우리는 운문의 세계만 보는 거예요. 그것이 낭만, 즉 로멘스죠. 그런데 세르반테스는 그걸 걷어내고 우리가 치통을 느끼도록 두죠.
자 그 커튼 뒤에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낸 돈키호테, 그의 본명은 알론소 키하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사실 기사로서 이름을 날리고 싶어 했던 사람이에요. 책에 나온 문장을 그대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가련한 알론소 키하다는 전설적인 방랑 기사로 이름을 날리고 싶었다. 문학의 전 역사를 통틀어서 보자면 세르반테스는 바로 그와 정반대의 인물을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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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커튼의 앞과 뒤는 키치(kitsch)와 키치가 아닌 세계의 대비입니다. 키치가 뭡니까? 치통이 없는 세계입니다. 키치는 ‘그 후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의 세계예요. 반면에 비(非)키치는 모두 다 드러내는 세계입니다ㅣ.
■ 우리의 삶은 산문의 세계이다
비키치는 산문적인 것, 키치는 운문적인 것입니다. 운문적이라는 말은 걷어낼 것은 걷어내고 커튼 앞에 등장시킨 멋진 부분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치통 때문에 고생하는 모습 또한 빼놓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산문적이라고 얘기하는 거죠. 그렇게 문장을 보시면, 돈키호테의 죽음은 산문적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파토스가 결여되어 있기에 더욱 감동적이다. 돈키호테는 이미 유언장을 구술했으며 이후 사흘간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죽어가고 있었지만 “이 사실 때문에 질녀가 먹지 못하거나 가정부가 마시지 못하거나 산초의 기분이 유쾌하지 않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무언가를 물려받는 다는 사실이 인간은 필연적으로 죽게 되어 있다는 고통스러운 사실을 사라지게하거나 혹은 약화했기 때문이다.”
쿤데라가 <커튼>에서 인용한 <돈키호테>속의 문장을 보면 질녀나 산초가 돈키호테에게 무언가를 물려 받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 사람의 죽음이 덜 슬퍼졌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어요. 쿤데라는 그전까지 이런 모습을 직접적으로 나타낸 소설이 없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쿤데라는 “세르반테스는 소설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고 얘기해요.
“후대에 모범이 되기 위하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모습의 인물들을 묘사했다.
돈키호테에 나오는 인물들은 그들이 아름답고, 멋지고, 영웅적이라는 이유로 찬양받으려는 주인공들이 아니에요. 대신 나 이런 사람이야, 너도 그렇지 하고 이해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서사시의 영웅들은 승리한 순간이나, 혹은 패배했다 해도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위대함을 잃지 않는다. 돈키호테는 패배했다. 그리고 그 어떤 위대함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대로의 인간 삶이 패배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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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때문이다. 삶이라고 부르는 이 피할 수 없는 패배에 직면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소설 기술의 존재 이유가 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늘 멋지게 죽습니다. 인상적인 대사 한 마디를 탁 남기고, 품위를 잃지 않고, 생을 마감해요. 사실 현실에서는 그러기 쉽지 않죠. 드라마에서도 예쁜 여주인공들은 죽는 장면에서조차 화장을 다 하고 있어요. 안 지워요. 아름답게 죽습니다. 하지만 현실과 다fms 모습이죠. 돈키호테에게는 어떠한 위대함도 없었어요. 우리들의 있는 그대로의 삶은 사실 패배에 가까운 모습이잖아요. 아킬레우스가 진짜 우리들 삶의 모습이일까요? 진짜 삶의 모습은 돈키호테 같은 모습 아닌가요? 우리가 죽을 때 여주인공들처럼 죽나요? 우리가 죽을 땐 주름도 있고 이도 다 빠진 모습이고 그럴 텐데요?
그러므로 필연적인 우리 삶의 패배를 이해하자는 겁니다.
전설들로 짜인 마법 커튼이 세상 앞에 걸려 있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떠나보내면서 그 커튼을 찢었다. 아무런 장식 없는 희극적 산문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기사 앞에 세상이 활짝 열렸다.
세르반테스 이전의 소설들은 마치 첫 데이트를 나가는 여자처럼 단장을 하고 가면을 쓴 상태로 독자 앞에 나섭니다. 작가의 해석과 생각이 반영된 상태로요. 이 장면은 로맨틱한 순간이야.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아름답게 그려야 해. 이와 같은 작가의 생각이나 해석에 반기를 들고 싶어 했던 세르반테스, 그리고 뒤에 나올 라블레나 필딩 같은 소설가들은 커튼을 과감히 찢었던 겁니다.
■ 소설에서도 여전한 친부살해의 욕망
<커튼>을 읽으면서 소설을 쓰는 일은 단순히 이야기를 잘 풀어 간다고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세르반테스처럼 우리가 보지 않았던 걸 새롭게 볼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거나, 우리의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거나, 해야 하는 거죠. 이야기라는 수면 밑에 철학적, 사회적, 시대적 담론을 쌓고 그 위에 이야기를 축조하며 글을 짓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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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소개 할 작가들도 세르반테스와 결이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 작가들의 책은 제가 아직 읽지 못한 책이기도 합니다. 헨리 필딩과 라블레라는 소설가들입니다.
필딩은 라블레와 세르반테스의 영향을 받아 소설을 썼습니다. 지난번에 예를 들었던 베토벤과 브람스처럼, 창작자들은 앞선 거장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글쓰는 사람으로서 내가 당대의 헨리 필딩이라면 라블레가 200여 년 전에 쓴 책을 봤을 것이고, 세르반테스가 150여 년 전에 쓴 책을 봤겠죠. 그리고 자기만의 무언가를 썼을 거예요. 필딩은 그러면서 스스로를 ‘문학의 새로운 영역의 창시자’라고 자칭했대요.
여기에서 우리가 독자에게 제시하는 양식(糧食)은 인간 본성이다.
인간 본성이란 말은 참 무서운 단어예요. 그래서 그동안의 소설은 인간 본성이 무엇인지 탐구하겠다는 목적 없이 그저 이야기만 했어요. 재미있는 얘기를 해주는 게 소설의 전부였죠. 그러나 필딩은 소설을 통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얘기를 해주고자 했던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 이전의 소설은 커튼을 드리우고 인간 본성을 드러내는 것과는 거리가 먼 얘기를 했습니다.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주면서 말이죠. 그 커튼을 거두기 위해서 세르반테스나 필딩 같은 소설가들이 노력한 것입니다.
그럼 소설가들이 왜 이런 노력을 할까요? 그 노력의 바탕에는 남이 한 것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싶은 예술가들의 본능이 깔려 있죠. 그 전의 소설 쓰기와 다른 소설 쓰기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친부 살해의 욕망입니다.
■ 예술의 역사는 평평하다
과학의 역사는 진보의 특성을 지닌다.
과학의 역사에서는 뭔가 발명이 되면 그 전과 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 발명을 바탕으로 또 다른 발전이 가능해지지요. 에디슨이 만든 작은 전구의 발명이 오늘날 더욱 발전된 형태의 광학적 장치들을 발명할 수 있게 했습니다. 과학의 역사는 이런 식으로 발전합니다. 그러나 예술의 역사에서는 이 개념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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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개념이 예술에 적용되면 진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완성, 개선, 향상을 함축하지 않으며, 미지의 땅을 탐험하고 그것을 지도에 그려 넣으려고 시도하는 어떤 여행에 가깝다.
소설이나 그림 음악 같은 것들의 역사는 그 음악이 있기 때문에 다음 음악이 순차적으로 나오지 않아요. 그 음악이 있었고, 또 새로운 음악이 나오는 거죠. 수평적입니다. 베토벤이 있어서 브람스가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간 것이 아니잖아요. 베토벤의 땅이 있고, 브람스의 땅이 따로 있죠. 베토벤의 땅에 서 있지 않으려고 브람스가 지신만의 땅을 계속 개척해 나가는 것이 예술의 역사입니다.
예술가들은 이렇게 미지의 땅을 탐험하고 아무도 가지 않는 땅을 가려고 합니다. 친부 살해의 욕망이 바로 이것이죠. 다른 소설가가 이미 이뤄놓은 곳에 가기 싫은 겁니다. 예술의 역사는 계속해서 새로운 땅을 찾아가는 시도들로 이루어집니다.
소설가들의 야심은 이전 선배들보다 나아지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보지 않았던 것을 보고 그들이 말하지 않았던 것을 말하는 데에 있다.
이를테면 과학의 역사는 USB가 발명되면 플로피디스켓은 더 이상 쓰이지 않는 역사예요. 버려지죠. 반면에 예술의 역사에서는 그 어떤 것도 버려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것대로 존재하고, 저것은 저것대로 존재해요. 북극이 발견됐다고 아메리키 대륙의 발견이 무의미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죠.
마차를 생각해 보세요. 요즘 누가 마차를 타요. 없어졌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지금 우리는 아직도 몬테베르디라는 16세기 작곡가도 만나고 스트라빈스키라는 20세기의 작곡가도 만나고 있어요. 이들은 각자 다른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만약 진보의 역사를 잣대로 두고 판단한다면 몬테베르디의 음악은 없어졌어야했죠. 과학이 추구하는 ‘더 나은(better)’의 세계라면 예술이 추구하는 것은 ‘다른(differenr)’의 세계입니다. 남들과 어떻게 다를 것이냐. 과학의 역사와 예술의 역사 사이의 차이도 참 재미있지요?
그렇다면 왜 그렇게 다른 것을 쓰고 싶어 할까요? 그것은 ‘불멸의 욕망’이 아닐까요? 영원히 살고 싶은 거죠. 나는 70년 밖에 살지 못하지만 300년 후에도 누군가가 내 이름을 기억했으면 한다면, 그 유일한 방법은 내가 죽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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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을 뭔가를 만드는 거예요. 창작입니다. 세상을 떠난 지 400년이 지난 셰익스피어를 보세요. 아직 우리 곁에 살아 있잖아요.
■ 밀란 쿤데라와 키치
키치는 앞에서도 언급했는데요, 다시 말하자면 편집입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겠다는 거죠. 로맨티스트는 모두 키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로맨티스트는 어떤 상황이든 낭만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이거든요. 지극히 주관적이죠. 로맨틱한 상황에 방귀 냄새가 나서 되겠어요? 로맨틱한 사람은 그 냄새를 제거하죠. 로맨틱하게 두 사람의 입술이 닿으려고 하는데 그 순간 농담을 던지면 뺨을 때리겠죠. 정신 못 차린다고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치라는 것이 매 순간 좋기만 한 건 아니에요.
쿤데라는 체코 사람이고요. 당시 체코의 상황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도 나왔듯이 프라하의 봄 시절이에요. 소련의 침공을 받은 시절이죠. 그런데 서유럽에서는 소련의 프라하 침공을 반대했어요. 말하자면 우리가 요즘 보스니아나 시리아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체코를 봤죠. 쿤데라는 체코의 지식인이었어요. 그 지식인이 파리로 옵니다. 그런데 프랑스 지식인들은 쿤데라를 한 가지 시선으로만 보려고 합니다. 핍박 받는 나라에서 온 지식인이라고요.
저 사람 얼마나 힘들까. 고국이 핍박당하고 있다니. 프랑스 지식인들은 이런 생각만 하면서 쿤데라를 대한 겁니다. 그러니 ‘박해, 포로 수용소, 자유, 조국으로부터의 추방, 용기, 저항, 전체주의, 경찰에 대한 공포와 같은 거창한 말들’만 왔다 갔다 했지요. 그런데 쿤데라라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이런 거대 담론을 못견디는 사람이에요. 그곳에도 일상적인 삶은 분명 있거든요.
■ 서정을 극복한 플로베르
서정은 주관적 감정입니다. 어떤 상황을 한 사람의 시선에서 본 주관적 감정입니다. 사람마다 모두 다르게 볼 수 있는 상황에서 하나의 안경을 탁 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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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주는 거예요. 여기는 지금 로맨틱한 자리야. 저놈은 나쁜 놈이야. 하고 말이죠. 제가 예전에 <조선일보>에 기고한 칼럼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이런 글을 썼어요.
절세미녀의 똥, 자상한 아버지의 폭력, 7성급 호텔의 쓰레기 냄새, 배은망덕한 사람의 의리, 당신은 이런 문장들에 불편함을 느낀다.
배은망덕한 자는 의리가 없어야 해요. 그런데 배은망덕한 자는 무조건 의리가 없을까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배은망덕한 자는 의리가 없다고 규정하는 것이 서정이에요.
소설가보다 서정을 더 추구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바로 시인입니다.
쿤데라는 서정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소설가를 누구와 견주어 볼까? 서정 시인과 견주어 보자. 헤겔에 의하면 서정시의 내용은 시인 그 자신이다. 서정 시인은 자신의 내면세계에 언어를 부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느끼는 감정과 영혼의 상태를 독자의 심중에서 일깨우려 한다.
시가 시인의 삶과 동떨어진 ‘객관적’인 주제를 다룬다 할지라도 “위대한 서장시인은 아주 빨리 그 주제에서 벗어나 결국에는 자신의 초상을 만들게 될 것이다.”
예술의 형태에서 서정이 가장 중요한 장르가 음악과 시입니다. 음악도 서정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어요. 음악은 훨씬 더 멀리 갈 수 있죠. 언어라는 형식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서정성이 더 극대화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소설은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는 장르입니다.
■ 책을 기대하게 하는 책
마무리하면서 작가나 작품이 아닌 이 책 속에 나온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나이 얘기가 조금 나오는데요. 알랭 드 보통은 <우리는 사랑일까>에서 젊은 여자들이 자기 또래의 남자가 아니라 나이가 많은 남자를 좋아하게 되는 것은 그들에게 서투름이 없기 때문이라는 얘기를 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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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그 남자의 성격적 매력에 끌리는 것이 아니라 나이가 주는 매력에 매혹된다는 거죠. 그만큼의 시절을 살아왔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매력이에요. 비슷한 얘기들이 여기에도 있어요. 젊을 때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때는 사랑을 모르잖아요. 그게 젊음인 거죠.
출생에서 죽음 사이를 잇는 선 위에 관측소를 세운다면 각각의 관측소에서 세상은 다르게 보인다.
열 살에 보는 세상과 스무 살에 보는 세상과 오십이 되어서 보는 세상은 다르다는 거죠.
7강. 소설이 말하는 우리들의 마술 같은 삶
* 이 장에 소개하는 책들
- <콜레라 시대의 사랑>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한밤의 아이들>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8강. 나만을 위한 괴테의 선물, 파우스트
* 이 장에서 소개하는 책
- <파우스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이인웅 옮김
*제 7강, 8강의 내용은 생략합니다.
2016.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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