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었으므로 진다
피었으므로 진다
■ 이산하 지음
0 1960 경북 영일 생
0 부산 혜광고, 경희대 국문과, 1982 시인 등단
0 1987 제주 4·3사건 관련 서사시 ‘한라산’ 발표
-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 10년 절필
0 저서
-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 한라산 (시집)
- 적멸보궁 가는 길 (산사기행)
- 체 게바라 시집 (번역), 등
1부 모든 것은 기울어 진다
■ 꽃이 져야 열매를 맺는다 - 미황사
해남 미황사는 전쟁에 패한 장수가 낙향해 복사꽃 그늘 아래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강 건너 논물이 들어가는 것을 물끄러미 마라보고 있는 절이다. 때로는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 쌀 한 톨을 생각하며 잠시 피었다 지는 하얀 벼꽃 같은 절이기도 하다. 벼꽃이 피는 것은 ‘개화(開花)’라 하지 않고 이삭이 나온다 하여 ‘출수(出穗)’라 한다. 그렇다 미황사가 아름다운 것은 절이나 주변 풍광 때문이 아니라 벼꽃 같은 내면의 출수 때문이다.
땅끝마을로 가기 전에 오른발은 일몰의 발자국을 왼발은 일출의 발자국을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란히 찍힌 발자국들을 뒤돌아보며 어깨에 내려앉은 눈을 털고 싶었다. 올 한 해를 내가 얼마나 깊이 살아왔는지, 또 그 깊이가 얼마나 타인들과 더불어 걸으며 찍은 것인지를 발자국에 찍힌 눈을 보며 확인하고 싶었다. 확인은 뼈아픈 자기 성찰의 첫걸음이다.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그가 걸어온 발자국을 보면 알 수 있다. 세상을 지탱한 발의 무게가 힘겨울수록 발자국의 주름살도 골이 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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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의 간명한 모습으로 돌아간 겨울나무들 사이로 눈 대신 바람이 불었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들은 모두 무심한 듯 치밀하다. 눈은 발자국을 남기고, 비는 지우고, 바람은 지워진 상처를 쓰다듬고, 구름은 다시 지상의 척도를 가늠한다. 지상의 나는 나의 척도를 가늠한다. 난 나를 위해 얼마나 나를 비웠는지, 또 세상의 역주행이 계속될 내년 연말에도 여전히 이런 자문을 반복할 지 거듭 나를 가늠한다.
석양이 사라지고 완전히 어두워지자 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띄엄띄엄 솟은 별들은 때로는 나무의 간격처럼, 때로는 목탁소리의 간격처럼 순간순간을 유지하며 빛났다. 문득 저 별들이 수만 년 전의 별빛이란 생각이 들자 내 몸이 분열되어 아득하게 흩어졌다. 지금까지 사라진 실체의 허상에만 집착한 탓이다. 그래도 태양이 소멸되면 8분밖에 햇빛을 볼 수 없지만, 별은 소멸되어도 최소 4년 이상은 별빛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애써 위안했다. 그런데 과연 내가 소멸되면 나의 별빛은 몇 년이나 빛날 수 있을까. 스스로 빛날 수 없는 지구에 잠시 기식하면서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실체는 짧고 허상은 길다 산사의 별빛이 묵언으로 나에게 전한다. 그리고 모든 허상을 쳐라.
산사의 새벽을 알리는 도량석, 어둠을 걷고 빛을 품듯 중생의 미혹과 번뇌를 걷어 깨달음을 얻는 의식이다. 스님들의 법문이 시작되었다.
동방을 씻어내어 맑은 도량 이루고
남방을 씻어내 청량함으로 장엄하고
서방을 씻어내 안락정토 만들고
북방을 씻어내 영원토록 평안한 곳 이룹니다.
도량이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사오니
삼보님과 천룡님네 이 도량에 오시옵소서.
이윽고 도량석이 끝나자 청운당 옆의 범종각에서 스님 한 분이 천천히 종을 울렸다.
보통 범종각에 있는 불전사물(佛殿四物)은 법고와 목어, 운판, 범종을 말한다. 법고는 지상의 생명, 목어는 물속의 생명, 운판은 공중의 생명, 범종은 지하의 중생들에게 들려주는 법문이다. 불전사물의 울림은 속세를 비롯한 산사 대중 모두 이 새벽예불에 참여해 함께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자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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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절의 소리는 침묵과 소리다. 목탁소리와 종소리, 북소리 독경소리, 풍경소리, 그리고 물소리, 바람소리, 빗소리, 새소리 같은 것들이면 충분하다.
새벽예불은 삼배를 올린 다음 청정수와 감로차를 올린다. 청정수가 신심(信心)이라면 감로차는 깨달음이다. 맑은 신심으로 깊이 수행하여 자신을 일깨우겠다는 게송이다. 새벽예불은 그 자체가 하나의 법문이다. 나도 부처가 되겠다는 발원의 시간이자 천지의 뭇 생명들과 더불어 깨달음을 이루자는 약속의 시간이다. 그래서 어느 절이든 새벽 예불이 가장 장엄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지난 가을 청도 운문사 새벽 예불을 참관했던 나로서는 미황사의 새벽예불이 깊이 각인되지는 않았다. 불론 두 예불은 저마다 사찰의 배경도 다르고 특성도 달라서 섣불리 비교할 수 없다. 모든 슬픔은 유일하고 고유하다. 예불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눈이 두 개인 까닭은 초점을 하나로 맞춰 정확히 보라는 것이지, 두 개를 서로 분리하라는 것이 아니다.
‘비교’라는 표현은 예술에서는 그 독성이 더욱 치명적이다. 비교라는 이름으로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세계가 얼마나 조롱받고 멸시받으며 폐기처분 되었던가. 내가 우리 국어사전에서 사장 먼저 추방해야 할 단어로 주저없이 꼽는 것도 바로 이 비교라는 몰개념이다. 비교는 경쟁을 낳고, 경쟁은 전쟁을 낳고, 전쟁은 악마를 낳는다. 그리고 악마는 꼴찌부터 잡아먹는다.
아침 울력(노동) 시간을 알리는 신호가 왔다. 나도 따라 일어났다. 대웅보전 앞으로 가니 수십 개의 빗자루가 계단에 있었다. 오늘 울력은 경내 ‘마당쓸기’인 듯했다. 스님들과 일반 대중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템플스테이’나 ‘7박8일 참선수행 프로그램’에 참여하러 왔는지 외국인들도 여럿 보였다. 모두 일렬횡대로 서서 넒은 대웅보전 마당부터 쓸었다. 내 빗자루에 그동안 쌓인 오만과 독선과 탐욕과 위선 같은 먼지들이 쓸려나가기를 바랐다.
대중들이 함께 일하는 육체노동인 울력은 ‘운력(運力)’에서 비롯됐다. 또 여럿의 힘을 구름처럼 모은다는 뜻에서 ‘운력(雲力 )’이라고도 한다. 일반인에게는 노동이지만 절에서는 수행의 하나다. 땅끝까지 고뇌를 안고 온 사람이나 아이들과 가족여행 온 사람, 멀리 외국에서 템플스테이를 온 사람 등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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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에서 하룻밤이라도 묵는 사람이라면 예외 없는 게 울력이다. 한여름에는 한문학당 어린이들의 고사리손도 동원되었다. 스님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자연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기도 하다.
아침울력 시간에 함께 대웅보전 마당을 쓸었던 초면의 금강스님을 세심당 차실에서 만났다.
금강스님은 1989년, 한때 400여 명의 스님과 12암자를 거느렸던 미황사가 폐허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절로 왔다. 2년 후 절을 떠났다가 다시 2000년에 돌아와 주지를 맡았다.
“처음 여기 왔을 땐 석 달 동안이나 아무도 없이 버려진 절이었어요. 1,300년 전에 지은 거찰이 퇴락해 대웅전과 응진전밖에 없었고, 경내가 모두 잡목과 넝쿨로 뒤덮여 매일 눈만 뜨면 은사 스님과 마당의 나무와 잡초들의 베고 돌을 날랐어요. 황무지 개간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그렇게 마당에 햇빛이 들도록 터를 닦는데만 꼬박 2년이 걸렸지요.”
예불 시간을 빼고 일만 하는 금강스님을 가리켜 주민들은 ‘지게스님’이라고 불렀다. 터를 잡은 뒤 금강스님은 꼼꼼하고 믿음직한 현공스님(현 미황사 회주스님)을 모셔와 미황사 주지스님이 되어 달라고 부탁한 다음, 전국 선방과 백양사로 들어가 수행에 전념했다. 현공스님이 이때부터 금강스님이 닦아 놓은 터에 명부전을 비롯해 삼성각, 만하당, 부도암 등을 하나씩 짓기 시작해 오늘의 아름다운 미황사에 이른 것이다.
2000년부터 금강스님은 한문학당을 비롯해 템플스테이, 7박8일 참선수행, 괘불제, 산사음악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매년 미황사 방문객이 10만 명을 넘는다. 템플스테이에 연간 5천 명이 넘고, 산사음악회와 괘불재에는 2천 여 명이 운집한다.
“절의 주인은 주지가 아니라 절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부처님이 차별 없는 ‘승가 공동체’ 모델을 만드신 것처럼 미황사도 출가자만의 수행공동체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새로운 공동체 모델을 만들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과 인도, 티베트, 일본, 타이, 미얀마 등 세계 웬만한 수행센터는 거의 다녀왔지요. 여건은 천년 이상의 역사 기반이 받쳐주는 한국이 가장 좋아요.” 아마 스님은 ‘소통과 배려’라는 1차 화두 다음에 올 ‘미황사공동체’의 2차 화두를 그리고 있는 듯했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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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는 <화엄경>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미황사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단청이 벗겨졌지만 그대로 둔 대웅보전을 다시 둘러보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주춧돌에 새겨진 거북이와 꽃게, 천장의 일천불 벽화와 금색의 두루미 그림, 범자(梵字) 글씨 같은 것들이다.
비를 맞으며 부도전으로 올라가는 달마산의 고요한 천년 숲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부도전에서 돌아오다 빗길에 미끄러져 절뚝거리며 내려왔다. 미황사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동백숲을 향해 내려갔다. 금강스님이 곱게 꺾어가라고 허락한 한 송이 동백꽃이 눈에 아른거렸다. 2010년 3월 10일 법정스님이 입적 전날, 금강스님은 가수 노영심을 통해 눈 맞은 미황사 동백꽃과 매화를 병원 중환자실에서 폐암으로 투병 중인 법정스님에게 전했다. 자신의 고향인 먼 해남에서 온 붉은 동백꽃을 보며 법정스님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못 가니 그대가 왔구나. 멀리서 오느라 고생 많았다.”
사제지간인 금강스님은 그 며칠 전에도 보고 싶다는 법정스님의 말을 전해 듣자마자 해남에서 서울의 병실까지 달려가 쾌유를 빌며 동백꽃과 매화를 직접 전했다. 금강스님과 꽃을 본 법정스님이 눈물을 흘렸다. 금강스님은 고등학교 때 물리 선생님이 준 <육조단경>이라는 책과 법정스님의 <말과 침묵>을 읽으며 불교의 매력에 깊이 빠졌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식 바로 다음 날 첫차를 타고 해인사로 달려가 정식으로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법정스님이 ‘홀로 감춰두고 싶은 절’이라고 가슴깊이 숨겨놓은 미황사, 난 마지막으로 살을 주고 뼈를 거둬 퇴각한다. 하얀 눈밭에 떨어진 붉은 동백꽃처럼 더 이상의 퇴로는 없다. 퇴로가 차단된 땅끝마을의 미황사는 그러므로 모든 인생의 아름다운 옥쇄다. 열매를 맺기 위해 아름다움을 버리는 꽃의 옥쇄, 미황사는 그런 꽃 같은 절이다.
■ 가장 먼 여행 - 운문사
가장 먼 여행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이르는 여행이다. 그러나 중간에 반드시 가슴을 거쳐야 갈 수가 있다. 앞으로 나의 산사 여행이 계속되는 동안 생각의 무게를 지탱한 머리와 세상의 무게를 지탱한 발 사이에서 난 하염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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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회할 것이다. 그와 더불어 가슴을 통과한다는 것이 얼마나 삼엄하면서도 얼마나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는가를 거듭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평소 내 몸과 마음이 서로 충돌해 분열되면 대체로 몸의 주장을 듣는 편이다. 마음은 문명의 비곗덩어리지만 몸은 자연의 파동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가을 산사를 그리며 대구 팔공산으로 향하던 내 발길이 문득 청도 운문사로 방향을 틀었다. 아마도 몸의 미세한 파동을 확인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물론 파동의 거점은 가슴이다. 그러나 그 거점은 앞으로 바람과 바람 사이의 간격으로 걸을 내 보폭에 따라 수시로 은신처를 바꿀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맞짱’을 뜨던 중 위기에 몰린 왕건이 8명의 장수를 자신으로 위장시킨 다음 도망쳤다는 대구 팔공산, 그 팔공산 자락에는 수많은 절들이 참수된 장수들의 핏자국을 덮고 있다. 봄마다 울창한 오동나무들이 꽃과 향기를 방생하는 동화사를 비롯해 고려대장경을 보관했던 부인사, ‘기도빨’이 좋아 소원하나는 반드시 들어준다는 선본사 갓바위부처,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저술했다는 인각사, 대웅전의 현판 글씨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이라는 은해사 등 그야말로 산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집사촌(集寺村)’이다.
또 국내를 넘어 일본, 중국, 미국 등 세계 각국 관광객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영업 실적’이 가장 우수한 갓바위 부처의 점유권 논쟁도 뜨겁다. 지형적으로 대구, 경산, 영천으로 산의 동맥이 겹쳐진 탓이다.
서울에서 대구로 가 청도 운문사행 시외버스를 탔다. 창밖에는 아침부터 가을비가 귀뚜라미소리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계속 내렸다. 팔공산 동화사의 말사인 운문사로 가기 위해서는 경산을 거쳐야 했다. 경산은 우리 불교계의 거목인 설총, 원효, 일연 스님의 출생지로 유명하지만 정작 그 유명세에 버금갈 고색창연한 사찰이 없다. 그래서 아마도 갓바위부처 영역표시 안내판에서 보듯이 관광도시 세팅에 더욱 적극적인지도 모른다. 경산은 나와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창밖의 자욱한 빗속으로 36년 전의 뜨거운 여름이 아득하게 떠올랐다.
1977년, 부산의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여기 경산의 한 암자로 들어가 책을 읽으며 글을 쓰곤 했다. 암자의 주지 스님은 내 외할머니인 견성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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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이었는데, 오소리도 잡을 골초였다. 외할머니는 저녁예불이 끝나면 배롱나무에 기댄 채 석양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게 일상이었다. 그럴 때면 항상 곰방대에 봉초를 엄지로 꾹꾹 눌러 담아 뻑뻑 빨아 당긴다. 하루는 내가 먼 산을 보며 슬쩍 물었다.
“할무이요, 맨날 뭘 그리 번민하십니까?”
“고걸 알면 내가 와 이카겠노?”
“또 괜히 물었네. 그런데 담배는 말라꼬 그리 피우십니까? 시님이 오소리 잡을 꺼도 아이고…….”
“이 곰방대 하나로 맨날 부처님도 태우고 향도 피우고 을매나 좋노! 안 글나?”
“마 됐심더.”
외할머니와 이렇게 선문답 같은 대화를 나누던 어느 날, 백구두를 신은 한 젊은 객승이 비를 흠뻑 맞으며 암자로 왔다. 그는 오자마자 고열을 앓으며 쓰러졌고 절집 식구들은 미음을 먹이는 등 정성껏 병간을 했다. 며칠 후 깨어난 스님은 곧바로 일주일간 면벽 수행을 했다.
가마솥처럼 달아오른 골방에 웃통만 벗은 그의 등짝에는 모기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 걱정하던 외할머니가 모기장과 모기향을 피웠지만 스님은 치워버렸다. “모기향은 화생방 살생”인 데다 “스님이 궁상맞게 모기장 안에서 도를 닦을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사실 처음 카바레 제비처럼 백구두를 신고 왔을 때부터 난 스님을 가자미 눈으로 보며 ‘괴짜땡초’로 낙인을 찍은 터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스님은 어릴 때 장의사로 염을 하며 살던 술주정꾼에다 폭력까지 행사하던 남편한테 환멸을 느낀 어머니는 읍내 5일장을 보러 갔다가 영영 떠나버렸다. 그때 어린 스님도 함께 갔는데, 어머니가 눈깔사탕을 사주며 이거 먹고 있으면 볼일 금방보고 돌아오겠다고 했다. 그런데 눈깔사탕을 다 먹고 날이 어두워지고 있는데도 금방 오겠다던 어머니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로 어린 아이는 눈깔사탕을 먹지 않았다.
그때 일주간의 면벽 수행을 끝낸 스님이 암자를 떠났고 나도 귀신한테 홀린 듯 졸졸 따라갔다. 우리는 주로 강가에서 저녁노을 아래 밥을 지으며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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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을 했다. 쌀뜨물 같은 그리움이 강물 위로 흘러가다가 하얀 김처럼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어둠이 내리면 강가에 누워 스님은 하모니카를 불고, 난 별들을 헤아렸다. 별과 별 사이로 다리를 놓는 상상을 하면 저절로 시가 써졌다. 스님과 나의 전국 산사여행이다 만행(萬行)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대학에서 세계사와 인도철학을 공부했다는 스님의 법명은 법운(法雲)이었다.
그 법운 스님이 맨 처음 나를 데려간 절이 운문사였다. 그로부터 36년 후, 그러니까 17살에 처음 간 절을 53살이 되어서야 두 번째로 다시 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동안 여러 차례 갈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몸이 아파 가질 못했다.
절 입구 매표소를 지나 커다란 일주문 대신 ‘솔바람길’이라고 쓰인 진입로 이정표가 나오면서 울창한 솔밭이 펼쳐졌다. 고등학교 때도 보았던 나무들로 거의 수령이 100년 이상에 키가 40~50미터나 되는 적송(赤松)들이다. 그런데 곧은 소나무들은 사라지고 대부분 굽은 것들만 더욱 외로운 각도로 휘어진 채 남아 있었다.
계곡의 일부 구간은 기존의 도로가 있는데도 굳이 나무 데크를 설치해 경관을 해쳤다. 비가 온 직후라 솔바람 길은 솔숲과 풀들의 그윽한 향기로 가득 채워졌다. 다만 울창한 소나무들이 뿌리를 제대로 내릴 수 없었는지 마치 곡예를 하듯 뒤틀려 있어서 여간 안타까운 게 아니었다.
오른쪽의 맑은 개천을 끼고 30분 쯤 걸어가자 낮은 기와담장이 나오면서 바로 경내 입구인 범종각 앞에 닿았다. 구름으로 들어가는 산문, 운문사(雲門寺)다. 신라 진흥왕(560년) 때 창건된 운문사는 신라 화랑들의 군사수련장이자 일연 스님이 주지로 5년 동안 머물며 <삼국유사>를 집필한 절로 유명하다. 또 고려 무신정권 때는 공주 ‘망이·망소이의 천민항쟁’에 이은 경상도 ‘김사미 농민항쟁’의 본거지였고, 조선시대에는 활빈당의 거점이기도 했다. 항쟁 지도자였다가 참수된 김사미는 운문사의 사미승 출신이었다. 또 항쟁 실패로 운문산 깊이 피신해 완강히 버틴 ‘운문적(당시 무신정권이 농민군을 부르던 호칭)’의 슬픔과 한은 고려가사 <청산별곡>의 행간 속에 댓잎처럼 서걱대고 있다.
이 운문사는 현재 공주 동학사, 수원 봉녕사, 김천 청암사 등 전국 5대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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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니 전문 강원 가운데 학풍이 가장 엄격한 최대 규모의 비구니 승가대학이다. 사미계를 받아 경쟁률 5:1의 시험에 합격해야 입학할 수 있어서 재수, 삼수생도 많다. 35만원 정도의 입학금만 내면 졸업 때까지 등록금이 전액 무료다. 학제는 일반 대학의 학년이란 호칭 대신 치문반(1년), 사집반(2년, 사교반(3년), 대교반(4년)이라고 부른다. 물론 중도 탈락하지 않고 졸업하면 정식 비구니계를 받는다.
운문사 승가대학에서 공부 이상으로 강조하는 것은 울력이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마라(一日不作 一日不食)”가 수행규범인데, 7세기 중국 선종의 ‘합법적’창시자인 도신선사의 농선결합(農禪結合)에서 비롯된 백장청규의 하나다.
도신선사는 국가권력으로부터 독립하고, 인도불교를 답습한 걸식수행에 몸살을 앓는 백성들의 부담을 덜기 위해 생산공동체를 만들었다. 이때부터 수도승들이 야생차도 재배했고 사찰이 차 문화로 유명하게 된다.
운문사의 울력은 단순히 자급자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번뇌 망상을 끊는 수행과정의 하나다. 운문사에 있는 일반인이라고는 운전사와 부목 4면 뿐, 부엌 살림을 해주는 공양주 보살도 없다. 절 주변에 펼쳐진 넓은 밭의 채소와 작물은 모두 학인들이 직접 가꾼다.
운문사 경내로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만세루 앞의 500살 가까이 된 ‘처진소나무’였다. 이 소나무는 해마다 봄가을에 동곡막걸리 다섯말씩 부어주어 특별관리를 한다.
운문사는 정갈한 평지 사찰이다. 매표소 입구부터 넓은 경내까지 계단이 전혀 없다. 부속 암자로 올라가는 길과 경내 각 건물 계단 외에는 넓은 종이 한 장을 펼쳐 놓은 것처럼 평평하고 매끄럽다. 그래서 휠체어나 유모차들이 많이 보인다.
세상 다 버리고 홀로 숨어 있고 싶은 사리암과 마지막 햇살이 암벽에 간신히 붙어 있는 북대암을 다녀오니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절 입구의 숙소로 돌아와 쉬다가 새벽 2시에 빗속으로 다시 운문사로 올라갔다. 3시의 새벽 예불을 보기 위해서였다. 난 어느 글에서 36년 전, 고등학생 때 본 새벽 예불의 인상을 이렇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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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법당의 붉은 촛불 아래에서 수백 명의 복사꽃 같은 어린 여승들이 합송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고혹적이면서도 장엄했고, 장엄하면서도 도저했고, 도저하면서도 삼엄했고, 삼엄하면서도 처연한 비장미의 절정이었다. 천둥 같은 전율, 벼락같은 충격을 받은 어린 소년은 한순간 심장이 멎었다. 그리고 어느 새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신축 대웅보전 법당으로 흰 고무신을 신은 150여 명의 앳된 여승들이 발소리를 죽이며 모여들었다. 공 합송이 시작되었다. 운문사 새벽 예불을 누구는 신이 허락한 가장 장엄한 소리라 했고, 누구는 교향곡이라 했고, 누구는 그레고리안 성가라 했다. 합송과 독송에 이은 묵상은 새벽 5시쯤 끝났다.
나에게 운문사 가는 길은 가장 먼 여행이다. 그러나 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가지 못했다. 중간의 가슴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내 가슴을 통과한다는 것, 그것은 백척간두에서 허공으로 한 발 내 딛는 그 아찔한 순간의 경지와도 같은 것이다.
■ 영혼의 구슬과 페르시아의 흠 - 관음사
나는 어떤 대상을 볼 때마다 주로 ‘큰 것’보다는 ‘작은 것’을 본다. 작은 것이 큰 것을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20여 년 전에 본 아마존 인디언 부족의 삶을 다룬 외국의 한 다큐도 그랬다. 그 다큐에서 유난히 내 시선을 사로잡는 게 있었다. 어른들과 아이들의 목에 걸린 구슬목걸이였다. 언뜻 다 똑같은 구슬처럼 보였으나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40여 개의 굵은 구슬들 가운데 유독 하나만 모양이 달랐다. 다른 인디언들의 목걸이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구슬이 하나씩 깨어져 있었던 것이다. 실수가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깨어진 구슬을 하나씩 끼워 목걸이를 만든 게 틀림이 없었다. 상처 없는 여러 구슬들 사이에 상처 입은 구슬 하나를 넣어 목걸이를 완성한 것이다.
문득 아름답고 정교한 카펫을 짤 때 일부러 흠집을 하나씩 남겨 놓는다는 아랍의 한 소설이 떠올랐다. 그것을 ‘페르시아의 흠’이라고 했던가.
인디언 목걸이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니 한 다큐 잡지에서 그 깨진 구슬을 인디언들은 ‘영혼의 구슬’로 부른다고 헸다. 깨진 구슬이 없으면 ‘완벽한 목걸이’가 될지는 몰라도 상처입은 ‘영혼의 목걸이’는 될 수 없을 것이다.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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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상처 없는 구슬들을 소수의 상처 입은 구슬이 서로 감싸고 배려함으로써 똑같은 존재로 거듭난다. 영혼을 지닌 것은 완벽할 수 없고 완벽 속에는 영혼이 없는 것이다. 완벽한 세계를 완성으로 보지 않고 ‘인간적인 것’을 완성으로 보는 인디언의 통찰, 처음부터 인디언에게는 완벽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제주의 봄은 노란 복수초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진짜 제주의 봄은 붉은 동백꽃이 지고 노란 유채꽃이 피면서 시작된다. 떨어진 동백꽃 위로 유채꽃이 노랗게 단청을 할 때마다 제주인들의 발걸음은 버려진 무덤인 듯 허청대고 가슴은 무덤 앞의 꽃인 듯 미어진다.
제주시 한라산의 동북쪽 산천단에서 3킬로미터쯤 떨어진 관음사는 도내 40여개의 사찰을 관장하는 본사다. 제주도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시기는 한반도에 귀속되기 전인 탐라국 시대로 이때 해로를 따라 남방불교가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한다. 관음사가 불교전래 초기에 창건돼 발전했을 것으로 보는 것은 제주의 여러 신화, 전설, 민담에 관음사를 제주방언으로 괴남절, 개남절, 동괴남절, 은중절이라고 부르는 것이 민간에 유포되어 전하기 때문이다. 제주시 아라동의 넓은 산야에 방생하는 관음사는 제주 불교의 중심이다.
큰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돌하르방 같은 수많은 현무암 불상들이 나온다. 이들은 돌길 양쪽의 편백나무와 삼나무 밑의 돌담을 따라 멀리 천왕문까지 정좌해 있다. 언뜻 양쪽으로 양머리를 한 스핑크스 조각들이 도열한 이집트 카르낙 신전 입구를 연상시킨다. 어느 절에서도 보지 못한 제주 관음사만의 독특하고 삼엄한 부처터널이다. 방문객들을 좌선으로 맞는 미륵불상들은 108개였고 전부 개인의 시주로 만들었다.
1948년 4월 3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전, 미군정시대)을 기하여 제주도 전역에 소요와 혼란이 발생했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 중산간에 위치한 마을들이 없어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사태의 진전을 ‘4·3사건’이라고 한다.
당시 선량한 제주도민 대다수가 낮에는 토벌대에게 몰리고 밤에는 입산한 무장대에 몰려 소요와 혼란이 발생했고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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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사의 위치가 전략상 요충지였는지, 토벌대와 입산 무장대가 관음사 지역을 중심으로 상호간에 첨예하게 대치했고, 이러한 과정에 관음사는 모든 건물과 시설이 전소되었다. 관음사 도량을 중심으로 사방 주변 일대에 크고 작은 경계참호와 부대숙영 시설을 설치한바, 그 유적들이 보존되어 4·3사태 진전 시 제주의 참극이자 민족의 비극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사천왕문을 지나 대웅전으로 가는 오르막길 양쪽에도 여전히 많은 불상들이 도열해 있다. 여기 있는 불상은 모두 미륵불로 알려져 있으나 종무소의 한 스님에게 확인해 보니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 등 여러 부처들이 함께 모여 있다고 한다. 그런데 관음사의 불상들은 모두 미륵보살처럼 갓을 쓰고 있다. 제주도의 기후 특성상 바람을 피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관음사 전체 규모에 비해 대웅전은 비교적 소박하다. ‘현무암 부처님’의 제주도 관음사는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단지 조선 숙종(1702) 때 제주목사였던 이형상이 제주에 “부조리와 잡신이 많다”며 사당 500채와 사찰 500채를 전부 폐사시켰을 때 같이 폐허가 되었다는 정도의 사실만 전해진다. 그 뒤 1912년 비구니 봉려관(1865~1938) 스님이 다시 창건해 법정암이라고 했다. 원래 제주는 ‘절 오백, 당(堂) 오백’이라 불릴만큼 사찰이 많아 다른 지역에 비해 불교 교세가 아주 강했다. 그럼에도 약 200년 동안 승려도 사찰도 없는 ‘무불(無佛) 시대’로 가장 암울한 시기를 보냈던 것이다.
원래 떠돌이 무당이었던 봉려관은 1901년 비양도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죽을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관음보살의 신력으로 구사일생 살아났다. 그래서 여생을 부처님 품안에서 살기로 한 그녀는 무당에서 비구니로 전업해 절을 지었다. 부민들의 반대로 한동안 한라산으로 피신해야 했던 적도 있다. 몇 년 뒤 신도가 크게 늘어나자 절 이름을 관음사로 바꿨다. 1948 제주 4·3 사건 때 전소되었는데 1968년 중창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관음사에는 ‘현무암 부처님’과 함께 또 하나의 자랑거리가 있다. 바로 ‘왕벚나무원산지’라는 점이다. 실제로 왕벚나무 숲은 사뭇 웅장하고 아름답다. 그 주위를 무려 100살이 넘는 벚나무들이 호위하고 있다. 그러니 일주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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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으로 들어오는 길에는 벚나무가 아니라 삼나무들이 울창하다. 부처의 세계로 가는 길은 벚꽃 같은 한때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사철 푸름이 인도 한다는 것의 은유일지도 모른다.
대웅전을 지나 언덕위로 올라가면 엄청난 크기의 미륵대불이 개금불사 중이어서 이전 모습과 다른 황금색으로 바뀌어가고 있으며, 그 뒤로는 만불상이 미륵대불을 둘러싸고 있다.
한라산을 등진 만불상에는 석가모니를 비롯해 아미타불, 약사여래불, 미륵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등이 도열해 있다. 만 가지 얼굴을 지닌 만불상이라 해서 얼굴, 미소 손의 형태 등 생김새가 모두 다르다고 한다. 그러나 내 눈에는 석공들이 착각했는지, 아니면 불만이 많았는지 복제품 같은 것들도 많이 보였다.
마지막을 고승들의 무덤인 부도밭을 둘러보고 제주를 떠난다.
무릎에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오름들을 재우는 한라산이 오늘은 왠지 ‘영혼의 구슬’이나 ‘페르시아의 흠’처럼 보인다. 삶의 중심보다 가장자리에 더 큰 지혜가 있다는 뜻일까.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내 이마에 ‘천형’처럼 낙인 찍힌 제주 4·3항쟁, ‘한라산 필화사건’이후 끊임없이 ‘진실’만을 말해야 하는 고통과 압박감……. 노란 유채꽃들은 여전히 피어났고, 여전히 아름다웠다. 제주는 우리 현대사의 상처 입은 ‘영혼의 구슬’이다. 그러나 외롭지 않은 ‘구슬목걸이’이다.
■ 불일암은 잠언이다 - 불일암
어릴 적 내가 살던 고향은 지금도 ‘전국 오지기행’ 같은 여행책에 나오는 깡촌이다. 그곳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예쁜 여선생님이 칠판에 분필로 마침표 같은 하얀 점을 하나 찍더니 우리에게 물었다.
“이기 뭐꼬?”
하나같이 검정 고무신을 신은 코흘리개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손을 번쩍번쩍 들며 소리쳤다. “물방울, 흰 눈, 찔레꽃, 쌀, 달걀, 보름달, 눈깔사탕, 벼꽃, 엄마 젖, 이모 젖, 찐빵, 아침이슬, 반딧불!”…….
아마 그때 난 “선생님의 눈동자”라고 대답한 듯하다. 30년 후, 동창회가 열린 그 초등학교 교실에서 난 장난스럽게 그때의 여선생님처럼 칠판에 점을 하나 찍은 다음 친구들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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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 뭐꼬?”
이젠 검은 구두에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아저씨, 아줌마 동창생들이 열심히 풀 뜯다가 뱀을 발견한 염소처럼 당황하는가 싶더니, 이내 여름날 개구리들처럼 이구동성을 나를 타박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저 노마가 시인 같은 거 한다꼬 잠도 안 잔다 캐샀더니 영 미쳐 버렸구마.”
“그러게! 야, 이 바보 시인아. 그거 쩜 아이가 쩜~!”
“이 깡촌에도 시인 하나 탄생했다고 좋아했더니 말짱 꽝이네. 하하하…….”
어릴 때 물방울 꽃과 쌀과 풀과 보름달 같은 것으로 보던 그 풋풋한 눈은 실종되고 이젠 모두 ‘점’이라는 문장부호 하나로 통일되어 버렸다. 제도 교육이 상상력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불일암은 부사와 형용사가 없는 절이다.
내 고교 시절인 1970년대 후반의 송광사 불일암은 점 이전의 물방울 혹은 눈부처 같은 절이었다. 보통 한 절의 주지 스님이 유명해질수록 절의 살림살이도 점, 선, 면으로 세속의 영역을 확장해가기 마련이다. 선은 소유의 경계선을 긋는 토대이고 면은 성채를 지어 군림하는 토대이다. 다행히 법정 스님의 인기가 절정에 달하고 스님이 입적(2010. 3월)한 이후까지도 불일암은 동백꽃이 떨어지는 순간처럼 간명하고 간결하다. 단지 열반 이후 부쩍 늘어난 추모객들의 편의를 위해 대숲 오솔길을 조금 단장해 ‘무소유길’로 이름 붙인 것만 달라졌을 뿐이다. 난 그 ‘무소유길’을 소유욕으로 걷지는 않았는지 거듭 스스로에게 물었다.
순천 송광사 불일암은 법정스님이 17년(1975~1992)동안 은둔하며 수행과 집필을 한 조개산 자락의 작은 암자다. 내가 고교 때 탐독한 <무소유>라는 책도 여기서 쓰였다. 처마에 풍경도 법당 마당에 탑도 전혀 없는 송광사에서 20여분 걸어 뒷산을 넘으면 불일암이 나온다. 향긋한 편백나무와 삼나무, 대숲이 하늘을 가리는 가파른 오솔길에는 ‘무소유길’이라는 안내판이 여러 개 보인다. 길도 비교적 잘 닦여 있다. 모두 예전엔 볼 수 없었던 것으로 법정 스님 입적 이후 쇄도하는 참배객들에 대한 배려였다.
암자는 정갈했다. 부엌에는 밥솥하나, 수저와 그릇 서너 개, 장작개비 몇 개가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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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으로 함께 일하다가 홀연히 사라진 스님을 어느 날 함석헌 선생이 불쑥 찾아왔을 때 고구마밖에 삶아드리지 못했을 만큼 간소한 살림이었다. 작은 마당에는 스님이 손수 심은 나무들과 먼 산을 바라보며 앉았을 ‘빠삐용의자’, 세숫대야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모두 유품이었다.
법정스님은 이 암자에서 수발드는 행자 하나 없이 홀로 수행하며 살았다. 절집 안팎의 청소와 빨래, 밥과 설거지, 군불때기와 40여 평의 텃밭 농사는물론 화장실까지 손수 관리했다.
70년대 고교 시절, 이 불일암에 들러 화장실에 갔을 때 끝내 소변을 보지 못하고 물러나와 절 밖의 대숲에서 해결한 기억이 있다. 화장실이 너무 깨끗하고 정갈해 차마 내 오물로 더럽힐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출입금지’라고 한다.
현재 불일암에는 법정 스님이 평소에 쓰던 수저와 그릇, 지게, 농기구, 굴참나무로 만든 빠삐용의자, 밀짚모자, 고무신, 바람 한 자락 등 유품이 그대로 남아 있다. 법당 문 앞에는 검은 고무신과 하얀 고무신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하얀 고무신은 낡아 헤어진 뒤꿈치를 실로 촘촘히 꿰맨 자국이 햇빛에 도드라졌다. 그리고 흔히 후박나무로 잘못 알려진 향목련(일본목련) 옆에 스님의 유골도 모셔져 있다. 무덤인데도 비석하나 없다. 매화와 산수유가 핀 섬진강과는 달리 아직 매화는 피지 않았지만, 출입문 옆 붉은 동백꽃에서 법정스님의 숨결을 듣는다.
송광사 불일암은 잠언이다.
더 이상 간결할 수 없는 경지다. 떠나기 전 암자 기둥 옆 빈 의자에 내 마음과 얼굴을 비춘다. “빠삐용이 절해고도에 갇힌 건 인생을 낭비한 죄였거든. 이 의자에 앉아 나도 인생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한다며 법정스님이 손수 만든 빠삐용 의자다. 그러나 마음도 얼굴도 비치지 않는다. 인생을 낭비하며 마음에 먼지만 쌓인 모양이다. 설령 비친다 할지라도 잔뜩 때묻은 눈에 보일 리도 없을 것이다.
절 밖으로 나오다가 입구 오른쪽의 동백꽃들을 한참 쳐다보았다. 법정스님이 인혁당 사건으로 처형된 젊은이들을 생각하며 손수 심은 꽃이다. 내 가슴속에서 붉은 동백꽃이 수직으로 내리꽂힌다. 나도 모르게 바닥에 떨어진 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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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하나 주워 되돌아가서 빈 의자 위에 올려놓고 다시 사립문 밖으로 나왔다. 날이 저문다. 나도 부사와 형용사를 거두고 저문다. 모두 저물면서 주어로 돌아간다.
■ 모든 것은 기울어진다 - 수구암
난 아직도 물을 따를 땐 주전자를 따라 몸이 살짝 기운다. 커피를 따를 땐 커피포트의 경도만큼 더욱 기울어진다. ‘뜨거운 물체’에 대한 본능적인 경계심이 균형감각을 불러 오는 것이다. 기우는 것은 리듬이고 리듬은 중력의 살과 뼈 사이를 가로지르는 바람 같은 것이다. 모든 것은 기운다. 사는 것도 숟가락처럼 기울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완전히 기울면 역시 내려놓는 숟가락처럼 바닥과 일치한다. 비로소 수평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기우는 것은 모두 바닥과 일치한다.
그러나 때로는 바닥 자체마저 기우는 것도 있다. 세월호의 ‘급변침’이 그렇다. 복원력 상실을 가져온 것은 바람이 아니라 ‘뜨거운 물체’이다. 그 물체의 정체가 나로 하여금 손에서 숟가락을 떨어뜨리게 한 것이다. 휘어진 숟가락 같은 수구암 가는 길은 그래서 본능적인 경계심을 불러일으킨다.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몸이 기운다. 그만큼 바닥도 기운다.
자웅스님이 지키고 있는 수구암(守口庵)은 파주 보광사의 머리 위에 앉아 있는 작은 암자다. 이름처럼 “입을 닥치고 조심하며 잘 지키라”는 선객의 수행터다. 보광사 주지스님 거처앞쪽으로 난 길은 안내판이 없어 입구를 찾기가 쉽지 않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나 숲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만이 찾을 수 있는 숨은 암자다.
수구암에서는 고개를 들 일도 숙일 일도 없다. 그냥 수평자세로 보기만 하면 된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면 모든 것은 언제나 수평이다. 그 수평자세로 수구암 처마를 본다. 여의주를 입에 문 두 마리 용의 발바닥이 보인다. 용의 발바닥을 보는 것도 처음이고 사람 발바닥처럼 생겼다는 것도 처음 본다. 다만 발가락이 다섯 개가 아니라 세 개다. 과거, 현재, 미래를 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도와 네팔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머리를 가장 먼저 태운 다음 마지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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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발을 태운다. 생각을 지탱한 머리와 세상을 지탱한 발을 비교하며 삶의 무게를 저울질하는 것이리라. 그러다 문득 언제나 더 낮은 곳으로만 방향을 잡는 갠지스 강물을 보며 하염없이 덧없어졌을 것이다. 수구암은 용의 머리가 아니라 용의 발로 지어졌다. 머리는 걷지 않은 곳도 흔적을 남기지만 발은 걸은 만큼만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을 강물이 적신다. 적시지만 결코 동기부여를 하거나 의미를 되새기지 않는다. 그래서 내 몸속의 사막처럼 하염없이 적막하다.
내려오는 길에 보광사 대웅보전 경내를 돌아본다. 신라 진성여왕 때 도선국사가 창건했는데 그 뒤로 여러 번 불타서 무학대사 등이 다시 지었다. 우리나라 천년 고찰들의 공통적인 화력(火歷)이다. 다만 영조가 생모 숙빈 최씨의 묘 소령원의 원찰로 삼으면서 왕실의 발길이 잦았다는 게 다르다. 대웅보전 위쪽의 어실각에 숙빈 최씨의 영정과 신위가 있고, 그 앞쪽에 영조가 심었다는 향나무가 있어 영조의 극진했던 효심이 전해진다. 완고한 신분제사회라 숙빈 최씨는 왕의 어머니가 되고도 ‘후궁’을 면치 못했다.
아들이 왕이 되기 전에 죽어 능(陵)이 되지 못하고 묘(墓)가 되었다. 생모의 미천한 출신성분을 콤플렉스로 여긴 영조는 등극 후 이 보광사의 소령묘를 소령원으로 격상했다.
■ 오리 다리는 짧고 학의 다리는 길다 - 은해사
여러 산사 기행에서 내가 가장 눈여겨보는 것은 그 절의 특색이다. 사람마다 고유의 빛깔과 무늬가 있듯 절도 그렇다. 청도 운문사는 비구니 승가대학으로서의 삼엄한 암향이 감싸고 있다. 해남 미황사는 ‘승가공동체’라는 스님들만의 절담을 넘어 이웃과 소통하는 ‘주민공동체’로서의 무늬가 주지스님 머리 깊이 새겨져 있다. 영주 부석사는 그리워할 대상이 없어도 그리움이 사무치는 절이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각 절의 특색에 따라 내 눈의 초점은 끊임없이 이동한다.
그동안 모든 종교는 진화론을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진화해 왔다. 세속기업으로 변한 종교의 사업 아이템은 마음과 죽음이었다. 교회는 십자가의 숫자만큼 죽음에 등급을 매겨 팔았고, 절은 통과하는 문의 숫자만큼 마음에 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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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매겨 팔았다. 사업은 세상이 불안할수록 호황이었다. 물론 벼룩시장 같은 마을 소식지의 ‘교회급매-신도명단 포함’ ‘사찰급매-신도확보 노하우전수’등의 광고에서 보듯 경쟁에서 도태되는 소규모 자영업자들도 적지 않았다.
연초에 경북 영천의 팔공산 은해사를 두 번째 다녀왔다. 일주문을 지나 300년 동안 조성된 울창한 소나무 숲에 내려앉은 눈을 보며 걸었다. 고관대작도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한다는 하마비(下馬碑) 앞에 이르자 맞은편 만세루 종각의 현판 글씨 ‘보화루’가 보인다. 추사의 글씨인데 그 보화루를 지나면 이 절의 상징인 대웅전이 나온다. 내 눈에서 은해사의 특징으로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초점이 모아졌다. 마침 눈이 내려 사찰 풍광은 백지였다. 은해(銀海)는 ‘은빛 바다’란 뜻이다. 절집 주변에 안개가 자욱하고 구름이 피어날 때면 그 풍광이 마치 은빛 바다 같다고 해서 은해사로 불렀다고 한다.
- 동화사와 더불어 팔공산의 대표적 사찰신라 헌덕왕1년 혜철국사가 창건, 나이가 1207살
- 그 때는 해안사, 조선시대 때 큰 화재 다시 지음. 왕실 내탕금으로 다시 짓고 영조가 “은해사의 부동산을 잘 지키라”는 어명을 직접 써서 보냄
- 1847 또 대형화재, 불상 속에 숨겨둔 영조의 <어제 완문(은해사를 잘 수호하라는 내용)>꺼내 지방토호 군수 등을 찾아가 지원을 받아 3년만에 다시 지음
- 이때 지은 각 건물들의 현판이 추사의 글씨임 : 문루 ‘은해사’, 대웅전, 보화루, 시흘방장, 일로향각, 백흥암의 6폭주련, 불광각의 ‘불광’ 등
불광 편액에 대한 일화 : 불(佛)자의 획 하나가 유독 길게 뻗어 있어 주지 스님이 목판에 새기다가 길게 뻗은 한쪽 다리를 뚝 잘라 옆의 광자와 같게 새겨서 걸었다. 후일 우연히 은해사에 들린 추사가 그걸 보고 아무 말 없이 현판을 떼어내 대웅전 마당에 가서 태워버림. 그 후 추사의 글씨 그대로 새로 새겨 걸음
지금 은해사의 성보 박물관에 들어서면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이 그때 원형대로 다시 새긴 편액이 있다. 팔공산 은해사에 가면 주변 풍광보다도 본사와 백흥암에 있는 추사의 글씨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찰랑거릴 것이다.
백흥암은 비구니 스님들의 출가와 수행, 삶의 의미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길 위에서>의 배경으로 유명해진 암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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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에서 나오니 다시 범종루 쪽으로 눈길이 간다. 종루 아래의 범종과 2충 누대의 운판과 목어, 그리고 커다란 운경이 보인다. 다른 절과 달리 법고(북) 대신 운경이었다. 문득 오래전에 이 은해사의 주지 스님이었던 일타스님이 뇌리를 스쳤다. 일가족 41명이 스님으로 출가한 일타스님이라면 능히 그럴 법도 했다. 동물의 가죽으로 북을 만드는 대신 청동으로 운경을 만든 것이다. 살생을 피한 것이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비구니 선방인 백흥암에 다녀왔다.
저녁 무렵 산문을 나선 후에도 여전히 ‘불광’이란 추사의 글씨와 ‘불(佛)’자의 한 획이 너무 길다고 가차없이 잘라버린 주지 스님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분명히 나무판자가 너무 작았거나 아니면 너무 바빠서 길게 새길 시간이 없었을 거라고 혼자 심각하게 중얼거리며 실실 웃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로 변한다고 했던가. 적절한 비유가 아닌 듯하다. 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늘여버리면 얼마나 괴로울 것이며,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잘라버리면 또 얼마나 슬플 것인가. 장자의 이 철학 우화가 더 적절한 듯하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자르는 데는 너무 인색하고 타인의 생각을 자르는 데는 너무 익숙하다. 더 자를 게 없으면 일부러 만들어서 자르기도 한다.
■ 아파야 새로운 것이 온다 - 각연사
초등학교 때 운동장 철봉에서 아이들이 턱걸이 하는 걸 보는데 어느 날 눈물이 툭 떨어졌다. ‘아-저렇게 버틸 만큼 버티다 결국 모두 바닥으로 떨어지고 마는구나.’ 한 사람도 예외가 없었다. 그게 너무 슬퍼 또 눈물이 떨어졌다. 비도 떨어지고 눈물도 떨어지고, 꽃도 떨어지고, 숟가락도 떨어지고……. 세상은 온통 버티다가 떨어지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더욱 슬픈 것은 다시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또 턱걸이를 한다는 점이다. 그때부터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세상의 철봉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위를 보든 아래를 보든 결국 모두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문득 깨닫는다. 그건 떨어지는 게 아니라고, 그곳이 원래 내 자리라고. 내가 내 생각에 갇힌 탓이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내 생각에 갇혀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낡은 것은 갔지만 새로운 것은 오지 않았다. 새로운 것이 오지 않는 것, 그게 진짜 위기다. 나는 다시 철봉에 오른다.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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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턱걸이처럼 버티는 것이다. 버텨야 새로운 것이 온다. 떨어지는 것은 결론이고 버티는 것은 과정이다. 그래서 결론은 슬픈 것이고 과정은 아픈 것이다. 아파야 낡은 것이 가고, 한 번 더 아파야 새로운 것이 온다.
괴산 각연사 여기는 입구는 있고 출구는 없는 절이다. 바람도 구름도 한 번 들어오면 옥쇄를 하는 천옥(天獄)이다. 허공으로 퇴로가 있으나 바람도 구름도 산을 넘지 않는다. 골짜기는 그만큼 깊고 그윽하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숨은 괴산, 벽초 홍명희가 대하소설 <임꺽정>을 쓴 곳, 명성황후가 일본군을 피해 숨은 절, 연못 속의 돌부처를 보고 지었다는 절. 길을 가다 돌연 스스로 길을 거둬 입구를 봉해버린 절, 다시 생각해보니 출구가 있는 절이다. 입구가 바로 출구였다.
속리산국립공원 북쪽의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각연사는 보개산(750m)과 칠보산(778m) 덕가산(850m)에 포위되어 있다. 새들도 넘어오기 힘든 심산유곡이라 실핏줄 같은 길 하나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방문객도 뜸하고 절 주변에 흔한 식당이나 숙박업소 등도 모두 10리 밖에 있다. 정말 오랜만에 유흥가가 아니라 고요한 절간 같은 절에 온 느낌이다. 이처럼 속세로부터 멀리 달아나 철저하게 자신을 고립시키고 유폐시킨 절이라면 선승들의 수행처로서는 명당이 아닐 수 없다.
민란을 다룬 영화 <군도>에 나오는 군도들처럼 1392년 조선 건국에 저항하는 고려 유민과 승려들이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이 군도 조직들의 두목을 ‘노사장(老師丈)’이라 불렀고, 그 아래 2인자를 ‘유사(有司)’라 불렀다. 영화에도 노사장과 유사가 등장하는데 유사를 ‘땡추가 맡고 있다. 비밀결사의 정신적 지주이자 실무 간부가 승려인 것이다.
그러니까 옛날부터 심산유곡에 대사찰이 많았던 것은 숭유억불 정책의 탓도 있지만, 이처럼 군도와 의적들의 산중요새를 미리 발본한다는 측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 각연사도 충분히 그럴 만한 지형이다. 하지만 한 때 3,000명의 승려들이 상주하며 수행했다는 주지 법공 스님의 설명이 사실이라면 수배자의 은신처로서는 부적합해 보인다.
각연사에는 신라 법흥왕(514-540) 때의 유일대사 창건설과 고려 초의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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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사 창건설이 있다. 어느 날 유일대사가 인근 쌍곡계곡에 절을 지으려고 나무를 깎고 있는데 까마귀가 자꾸 대팻밥을 물고 어디론가 날아갔다. 따라가 보니 까마귀가 대팻밥을 뿌린 연못에 광채가 눈부신 돌부처가 있어 서둘러 연못을 메우고 절을 지었다. 지금의 비로전이 그 연못 터에 있고 불상도 연못속의 그 돌부처다. 절 이름도 연못 속의 돌부처를 보고 깨달았다고 각연사(覺깨달을 각, 淵 연못 연, 寺)라고 했다는 것이다.
* 유일대사 창건설의 허구
- 설화의 배경이 되는 법흥왕 때는 괴산이 신라가 아니라 백제의 영토였다.
- 연못 속의 돌부처도 통일신라 말기의 작품이다.
* 통일대사 창건설
- 대웅전과 비로전의 주초석과 석축 등이 모두 고려 이전에 만들어 진 것
으로 보아 통일대사는 각연사의 창건주가 아니라 리모델링 한 중창주일 것이다.
* 각연사의 창건은 1768(영조 44년) 각연사 대웅전 상량문에 신라 경순왕 (927~935)의 원찰이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통일 신라 말기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에 중창된 대웅전과 비로전에서는 주춧돌과 기둥의 크기로 절집의 높낮이를 맞춘 ‘덤벙주초’양식이 눈에 띈다. 덤벙주초란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덤벙덤벙 받쳐 놓았다고 해서 생긴 말이다. 사방 주초석의 높낮이가 다른데다 기둥을 짜 맞추는 부분도 울퉁불퉁하다. 그래서 제멋대로 생긴 돌에 맞게 나무 기둥을 다듬어 맞춘다. 이를 ‘그랭이질’이라고 부른다.
대웅전을 지나면 대각선 방향으로 보리수 한 그루가 서 있는 팔작지붕의 비로전 건물이 나온다.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불단에는 비로자나 불상이 모셔져 있다. 1,100년이 넘는 세월도 비껴간 듯 보존상태가 양호한 보기 드문 불상이다. 그런데 이유 불문하고 입술을 새빨갛게 칠한 게 여간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비로자나불은 <화엄경>에 나오는 티 없고 맑고 무한한 빛을 발하는 최상급의 부처다. 우리나라에서는 화엄사상이 널리 퍼지면서 이 불상을 법당에 봉안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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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힘을 빼고 불상 하단부로 시선을 돌리자 하대석에 인물상 같은 게 새겨져 있다. 저것이 오래도록 구설수에 오르는 주악상(奏樂像)인 듯했다. 주악상은 날개가 달리거나 휘날리는 옷자락을 입은 천인이 비파, 생황, 피리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다. 오대산 상원사 범종의 비천상이나 연곡사 부도, 쌍봉사 철감선사탑, 등이 대표적이다. 그동안 어려 음악 고고학자들이 이 각연사 비로자나불에도 하대석에 가릉빈가(극락조)라는 주악상이 새겨져 있다고 주장했다. 또 인물상은 맞지만 주악상으로 보는 건 무리라는 주장도 있었다. 풀었던 눈에 다시 힘을 주고 하단부를 뚫어지게 봤지만 파손이 심한 상태여서 판독이 쉽지 않았다.
극락에 사는 상상 속의 새인 가릉빈가는 통일신라 무렵 불교 미술의 단골 소재다.
통일대사 탑비를 찾았다. 탑비의 주인공은 고려 초에 당나라로 유학을 갖다 온 통일 대사다. 태조 왕건의 초청을 받아 불교 교리를 강의하면 그의 설법을 듣기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운집했다고 한다. 그가 죽자 광종은 통일대사란 시호를 내리고 당대의 문장가인 김정언에게 비문을 쓰도록 했다. 탑비의 기본요소인 귀부는 거북머리 대신 용머리를 하고 있다. 깨알같이 새겨진 비석의 글씨는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마모되어 수백자 외에는 해독이 불가능하다.
통일대사 탑비를 본 다음 그의 부도로 향한다. 이 부도는 오랫동안 각연사에서도 망각된 존재였다. 산사태로 사라졌다가 우연히 발견된 부도는 1982년 복원되었다. 그런데 비교적 온전한 부도에는 아무 글씨도 없다. 그러니 무덤(부도)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부도의 생긴 모습이 대략 고려시대 초기의 형태들과 많이 닮았다. 또 국가가 공인한 고승들은 거의 탑비와 무덤이 한 쌍으로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총애까지 받은 통일대사인데 탑비만 있고 무덤이 없다면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닌가. 각연사 스님과 괴산 군청의 공무원들이 산 아래 탑비에 필이 꽂히는 순간 이것은 통일대사의 부도로 확정되어 버린 것이다.
■ 나비는 수평으로 난다 - 원심원사와 석대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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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파주를 지나 연천으로 가는 들판에는 모내기를 마친 어린 벼들이 자라고 있다.
저 논들은 모를 품기 위해 몸의 자세를 낮추고, 양수 같은 논물을 만들었을 것이다. 저 논물처럼 무엇을 받아들이는 것은 모두 수평자세다. 논이 몸을 낮추면 물이 들고 물이 들면 벼가 익고, 벼가 익으면 사람이 고개 숙이고, 사람이 고개 숙이면 세상이 몸을 낮춘다. 그리고 다시 논이 몸을 열고 물을 받아 수평을 이룬다. 수직으로 출렁거리지 않고 수평으로 찰랑거린다. 나비가 날 때의 자세다. 나는 것은 수직이 아니라 수평이다. 오늘 내 눈에는 저 논물이 강물보다 깊다.
연천 동막골 입구에서 왼쪽 아미천을 따라 계곡으로 들어가는 도로 주변으로 여러 개의 확성기가 눈에 들어온다. 군부대 훈련장인 듯했다. 도로 왼쪽으로 그 옛날의 심원사 부도밭이 나타난다. 부도밭은 12기의 승려 사리탑과 2기의 비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비가 앉은 부도밭에는 도당을 비롯해 청심당, 호연당, 연월당, 총음당, 허백당, 소요당, 제월당 경헌, 취운당 학린 등의 이름이 보인다. 서산대사의 법맥을 이은, 조선중기를 배표하는 선승들의 공동묘지다.
* 연천의 동막골은 <웰컴 투 동막골> 연극의 무대이고, 영화의 배경은 삼척 의 동막골임
여기는 원래 해방 이후 북한 땅이었다가 한국전쟁 이후 남한 땅이 되었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토박이 주민들의 국적이 모두 바뀐 것이다.
원심원사 입구에서 보니 폐사지는 흔적도 없고 대웅전과 요사채 등 커다란 건물들로 가득하다. 넓은 공터에는 원목과 대리석, 기와 등의 건축자재와 포크레인과 화물운송 차량이 보였다. 복원 사업은 계속 진행 중이었다. 경내를 둘러본 다음 종무실에 들러 주지 스님을 찾았다. 정오 스님의 거처는 허름한 컨테이너 였다.
“이곳은 경원선이 지나가고 금강산 가는 길목이니 복원하시면서 통일에 대한 염원도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원래 심원사 터는 제주도를 제외하고 한반도의 한가운데에 속합니다. 부근에 ‘한반도의 배꼽’이라는 전곡이 있구요. 멀리 삼국시대에는 한강유역을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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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하기 위해 세 나라가 패권을 다투던 요충지였고. 한국전쟁 때도 격전지 였어요. 8년 전 당시 주지스님인 세민스님이 불사 때 대웅전 앞에서 전국의 1만여 불자들이 참가하는 ‘6·25 전몰장병 호국 위령대제’를 성대하게 치른 것도 이 때문이었지요.”
세민스님은 불교계 ‘염불의 1인자’로 소문났고 해인사 승가대와 교토불교대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계사, 경국사, 선암사, 해인사 주지 등을 역임하고 2012년 원로의원에 선출됐다. 그는 해인사 주지 시절 팔만대장경의 현대적 계승을 목적으로 동판 팔만대장경 조성 사업을 펼쳤다. 특히 2005년부터는 이 원심원사에 주지로 부임해 한국전쟁 당시 소실된 사찰을 복원하는 데 전력을 쏟았다.
“이 절은 한국 제일의 ‘생지장보살’ 성지인 만큼 그 역사도 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원심원사는 한마디로 1,300년의 역사를 가진 역대 고승들의 교육도량이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절이 폐허로 변하고 군사보호구역으로 지정돼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었지요.”
- 휴전 후 절터는 국유지가 되고 육군 5사단 포병대대에 편입
- 1955년 당시 주지인 김상기 스님이 강원도 철원에 심원사라는 절을 지음
- 1977년 영도스님이 국유지로 변한 여의도 면적의 세배가 넘는 250만평의 절터를 5년간의 소송으로 되찾고 절을 복원하기 시작
- 새로 생긴 심원사가 있기 때문에 ‘원래의 심원사’라는 뜻에서 원심원사(元深源寺)로 지음
* 석대암 :신라 때 창건했다는 설이 있음
- 철종 때 왕실의 내탕금(왕실 예산)으로 중건
- 연천군 최고봉인 보개산 지장봉(877m) 8부 능선에 있음
- 임꺽정과 궁예가 활동했다는 곳
힘겹게 오른 석대암에는 차라리 짓지 않았으면 좋을 듯 한 유리건물이 버티고 있고 갑자기 목이 말라 물을 찾는데 암자를 지키던 경담스님이 모퉁이의 우물로 안내한다. 이 우물이 바로 ‘사냥꾼과 금멧돼지’ 설화의 배경인 듯했다.
살을 발라낸 창건설화의 뼈대는 간단하다. 이순석이라는 사냥꾼이 금멧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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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발견해 활을 쏘자 피를 흘리며 달아나던 돼지가 쓰러진 곳이 바로 이 우물이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금멧돼지 대신 왼쪽 어깨에 화살이 박힌 지장보살 석상이 있었고, 황급히 화살을 뽑으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깜짝 놀라 용서를 빈 이순석은 내일도 여기 석상이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 대오각성해 출가하겠다고 약속했다. 역시 다음날도 석상은 화살이 박힌채 그대로였다. 이순석은 곧바로 머리를 깎고 300여 명의 추종자를 이끌고 와 암자를 지었다. 돌로 지은 이 암자의 이름이 석대암이고 법당에 모신 것도 우물 속의 그 지장보살 석상이었다.
이 이야기는 민지의 <보개산 석대기>에 나온다 한마디로 지장보살이 금멧돼지로 변신해 살생하는 인간을 구제한다는 얘기다.
현재 진품 지장보살석상은 엉뚱하게도 철원의 심원사 명주전에 있다 한국 전쟁으로 석대암이 불탔을 때 행방불명되었다가 나타나 그쪽으로 간 것이다. 그래서 여기 원심원사와 석대암 법당에는 모조석상과 진품의 사진만 있으니 그 풍경이 처연하기 이를 데 없다.
저녁 무렵, 난 강원도 철원의 심원사로 갔다. 문제의 진품 지장보살 석상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심원사 대웅전은 텅 비어 있고 바로 옆 명주전은 참배객들로 만원이다. 다시금 시쳇말로 하자면 ‘기도빨’이 대박을 터뜨린 듯하다.
명주전에는 과연 석대암처럼 모조품과 사진이 아닌 진품이 있었다. 높이 63센티미터, 폭 43센티미터 되는 아담한 크기이고, 왼손에 구슬을 받들었다. 사냥꾼 이순석이 쏘았다는 왼쪽 어깨를 자세히 보니 화살 맞은 상처 자국이 뚜렷하다. “좌측 어깨에 길이 한 치 정도의 비낀 흔적이 있으며, 이것은 창건 당시 이순석이 쏜 화살에 맞은 흔적”이라는 고려시대 <보개산 석대기>의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
돌아오는 길
갈 때 본 그 길과 들판이다. 어제보다 논물이 더 깊어졌다. 나비들의 나는 자세도 더 낮아졌다. 모든 것은 결국 낮은 자리로 돌아간다.
■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해 - 길상사
오래전 한동안 절에 머무를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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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약 3평 크기의 원탁 캔버스가 대웅전 법당에 차려졌다. 4명의 스님이 원탁에 빙 둘러앉아 그림을 그렸다. 붉은 적삼을 입은 티베트 승려들이었다. 그림도구는 붓과 물감이 아니라 빨대 같은 대롱과 다양한 색깔의 모래였다. 승려들이 작은 구멍이 뚫린 하얀 마스크를 쓰고 색모래를 대롱에 넣어 입으로 조심스럽게 불었다. 대롱 속의 모래알이 하나둘씩 캔버스로 옮겨졌다. 티베트 불교 미술의 고유한 양식인 ‘모래 만다라’그림이라고 했다. 만다라는 우리나라로 보면 사찰의 석탑과 비슷한 의미라고 한다. 온 정신을 바늘 끝에 집중해 한 땀씩 수를 놓듯 스님들은 들숨과 날숨을 천천히 하며 모래의 양과 색깔을 조절해 불었다.
모래알은 가볍다.
숨결이 조금만 약해도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숨결이 조금만 강해도 이미 자리잡은 모래알들이 흐트러진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거대한 원 속에 사각형과 꽃잎들, 삼각형 등이 그려졌다. 마침내 불교의 세계관과 우주관으로 보이는 장엄한 도형이 완성된 것이다. 내가 일주일 동안 들은 건 잠든 새들의 숨결소리와 대숲 속으로 피한 풍경소리뿐이었다. 그림이 완성되자 법당은 구경하던 스님들의 탄성으로 가득찼다. 곧 티베트 승려들이 함께 기도를 했다. 기도가 끝나자 승려들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원탁 옆에 도열했다. 승려들 가운데 하나가 ‘금강저’라고 하는 50cm정도의 나무막대기를 들고 나와 그림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감탄을 연발하던 스님들이 모두 숨을 죽였다.
그런데 티베트 승려가 잠시 합장하더니 나무 막대기로 ‘모래 만다라’를 빗자루처럼 천천히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원탁 아래로 모래들이 흩어졌다. 얼마 후 아름다운 원탁은 처음처럼 하얀 캔버스로 돌아갔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충격을 불교에서는 ‘무상(無常)’이라 부를 것이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군사문화의 서슬이 시퍼렇던 1960년대 말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3대 최고급 요정이던 대원각 건물이 바로 지금의 길상사다.
그 요정의 주인이던 김영한(불명 길상화)할머니가 <무소유>를 읽고 감명 받아 죽기 전 법정스님에게 기증해 절로 바뀌었고, 사찰 이름도 그녀의 법명을 따서 길상사로 지었다. 그래서 본당을 대웅전이라 하지 않고 김영한의 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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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왕생을 기원하는 의미로 극락전이라 했다. 기생 김영한은 시인 백석(白石, 1912-1996)과 3년간 동거했다가 영원히 헤어져야 했다.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에 당시 김영한과의 애절한 사랑이 잘 나타나 있다. 백석과 이별한 그녀는 그가 보고 싶을 때마다 줄담배를 피웠다. 말년에 폐암으로 고생하다가 죽음이 임박하자 자신이 운영하던 시가 천억 원의 요정을 시주했다. 또 창작과비평사에 2억을 기증해 ‘백석문학상’을 만들기도 했다.
길상사 일주문을 지나자 바로 본당인 극락전이 보인다. 그 오른쪽 범종각 아래에는 관음보살 상이 있다. 석상의 표정과 모습이 색다르다. 천주교 신자인 최종태 조각가의 작품으로 성당의 성모마리아상과 비슷하다.
법정 스님이 세상과 작별한 진영각은 길상사의 가장 안쪽에 있다. 스님의 진영을 비롯해 생전에 썼던 모자, 부채, 염주, 붓 같은 유품과 수십 권의 저서가 전시돼 있다.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소욕지족(小慾知足)의 가르침을 배운다.
혼자 길상사 일주문 밖의 수도원과 성북동 성당 앞을 걷는데, 문득 백석 시인을 못 잊어 평생을 홀로 지내다 83세에 폐암으로 숨진 김영한 할머니의 마지막 인터뷰가 떠올랐다.
어느 기자가 물었다.
“천 억대 재산을 내놓고 후회하지 않으세요?”
김영한 할머니가 대답했다.
“천 억이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해.”
만약 백석 시인이 이 말을 듣고 시로 썼다면, 과연 어떻게 표현했을까.
티베트 승려처럼 완성된 ‘모래만다라’ 그림을 천천히 빗자루로 쓰는 김영한 할머니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2부 모든 것은 사라진다
■ 여시아문과 디아스포라의 불빛 - 산방굴사
* 디아스포라(Diaspora) : 이산하여 다른 나라에 사는 유대인이나 유대인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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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아문(如是我聞)’
모든 불경의 첫 구절은 항상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이와같이 들었다”고 풀면 직역이고 “모든 진실은 있는 그대로에서 비롯된다”고 풀면 의역이다. 성경은 “예수 가라사대”로 시작된다. 불경은 보고 듣는 청자의 객관적 시각이고 성경은 혼자 말하는 화자의 주관적 시각이다. 그러니까 불경은 “내가 잘못 들었을 수도 있다”며 ‘의심할 수 있는 권리’를 남겨 놓은 반면, 성경은 “예수님 말씀은 곧 진리이므로 따라야 한다”는 독단적 명령조여서 그처럼 의심할 권리를 처음부터 봉쇄해버린 것이다. 사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그러한 성경 같은 매체에 ‘생각하고 의심할 권리’를 차압당하며 살아왔다.
서귀포시 안덕면의 산방산 입구에는 여러 개의 절이 모여 있다. 왼쪽은 광명사고 가운데는 산방사, 오른쪽은 보문사다. 또 이번 산사기행의 목적지인 산방굴사(山房窟寺)는 이 세 개의 절 위쪽 소나무가 있는 암벽이다. 산방굴사는 조계종 사찰이지만 보문사는 일붕선교종, 또 바로 옆의 산방사는 태고종 사찰이다 절들이 여럿이 혼자 있다. 목적지는 같으나 가는 길이 서로 다르다. 최적화된 공존 방식이다.
국그릇을 엎어놓은 모양의 산방산에는 한라산 백록담 자리의 봉우리가 뽑
혀 던져졌다는 전설이 있다. 실제로 백록담 둘레와 산방산의 전체 둘레가
똑 같다고 한다. 보문사 위쪽으로 군데군데 낙석 방지용 쇠기둥과 철그물이
쳐진 가파른 계단을 30분 쯤 올라가면 마침내 산방산 중턱에 커다란 바위동
굴이 나오고 그 안에 불상이 보인다. 이곳이 산방굴사다. 동굴 입구에 수령
500년 된 큰 소나무가 당간지주처럼 우뚝 솟아 있다. 풍광이 빼어나 영주십경(瀛州十景)의 하나로 꼽히는 이 절은 고려시대의 시승(詩僧) 혜일스님이 창건했고, 많이 다녀간 시인묵객 가운데서도 제주도에 유배된 추사 김정희와 초의선사가 가장 대표적이다. 그 옛날 추사를 만나러 해남에서 서귀포까지 거친 풍랑속의 배를 타고 와 찻잔과 술잔을 나누며 우정을 키워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미 내 마음의 발길은 초의선사 향훈이 서린 해남 대흥사 일지암의 문지방을 넘는다.
불상 앞 높은 절벽의 천장에서 물방울이 계속 떨어진다. 산방산을 지키는 여신인 ‘산방덕의 눈물’이라고 한다. 참배객들은 약수라며 떠 마시고, 아예 물통에 가득 채워가기도 한다. 전설 속의 산방덕은 산방산이 배출한 빼어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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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모의 여신이다. 한 청년과 열애중이던 산방덕의 미모에 반한 벼슬아치가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청년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워 멀리 귀양을 보내버렸다. 죄악으로 가득 찬 인간 세계를 저주한 산방덕은 다시 산방굴로 들어가 바위로 변해 지금도 울고 있다고 한다. 나도 한 모금 마셨는데 전설탓인지 단맛도 짠맛도 아닌 애틋한 맛이다. “돌 속에 뿌리내린 신기한 나무”라고 쓰인 천선과(天仙果)옆 암벽에는 지네발란과 풍란 등 귀중한 암벽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 산방굴사에서 바라보는 제주도 : 마라도, 용머리 해안과 하멜 기념관, 올레 10코스인 사계해안도로, 형제섬과 송악산, 송악산 해안절벽에는 진주만을 기습하던 일본군 가미가제 출격동굴과 전투기 격납고, 그 너머에는 4·3사건 때의 양민학살 무덤인 ‘백조일손지묘’가 있다.
떠나기 전 가까운 대정에 들러 ‘추사관과 추사적거지’를 찾았다. 추사 김정희는 세도정치의 희생양이 되어 여섯 차례 고문을 받고 36대의 곤장을 맞은 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위리안치 형을 받아 탱자나무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발이 꽁꽁 묶인 귀양살이 8년 3개월 동안 벼루 12개가 구멍이 똟리고, 붓 천 자루가 닳아 없어졌다. 이렇게 완성한 게 추사체이고, <세한도> (국보 180호)다.
돌아오는 길.
저녁이 되자 바다멀리 불빛이 보인다. 내 디아스포라적 감성은 등대처럼 어둠이 내리면 불이 켜진다. 여시아문의 불빛이다.
■ 모든 것이 사라져 간다 - 봉원사
봉원사 경내에 들어서자 해인사의 고사목처럼 쓰러진 채 생명을 유지하는 수백 년 고목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어느 절이나 그렇듯 여기도 허허로운 예전의 절은 간 곳 없다. 꽉 찼다. 나무와 꽃을 베고 건물을 지었다. 바람이 뒷산으로 올라가려면 방향을 여러 번 바꿔야 한다. 비와 눈도 온전히 내리지 못하고 건물에 부딪혀 여러 번 부서져야만 땅에 도달한다. 새소리도 빛처럼 여러 번 굴절된다. 문명은 각을 만들고 자연은 원을 만든다. 대웅전 마당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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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욱한 연잎은 모두 원이다. 원은 수평이고 각은 수직이다. 세상이 수평과 수직의 싸움이듯 우리의 삶도 그렇다. 위로 올라가려는 마음과 아래로 내려가려는 마음이 서로 충돌한다. 연꽃이 수직으로 올라갈수록 연잎은 수평으로 넓게 퍼져 나간다. 그렇게 서로 균형을 유지한다. 그 균형에서 평등이 비롯되어 연밥이 만들어 진다. 그러나 사람은 연밥을 먹고 자꾸만 각을 만든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영산재(靈山齋) 보존 도량으로 유명한 봉원사는 불교 태고종 총본산이다. 태고종에는 결혼해서 가족을 꾸리며 수행하는 대처승이 많다. 여승도 마찬가지다. 일제 강점기 만해 한용운 시인이 대처승이었고,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쓴 조정래 작가의 부친도 대처승이었다. 그런데 해방 이후 대처승제도를 반대하는 조계종에 사찰을 대부분 빼앗기고, 안국동 조계사(당시 태고사)에서도 쫓겨났다. 이 봉원사 역시 땅은 조계종 소유이고 운영권만 태고종이 갖고 있다.
신라시대 도선국사가 창건한 이 절은 그 흔한 창건설화 하나 없이 이름만 몇 번 바뀌었다. 처음엔 반야사였다가. 고려말에는 금화사였고, 지금의 봉원사라는 이름은 1749년 영조가 직접 땅까지 하사해 절을 지은 뒤 붙여준 것이다.
구한말 격동기에 김옥균이 개화의 꿈을 키운 곳이기도 하다. 1884년, 이동인 스님 방에서 박영효, 서광범 등의 급진 개화파와 3일 천하에 그친 갑신정변을 모의한 것이다. 다소 특이한 것은 박영효의 아들이 운허스님(박춘서)이고 또 운허스님의 아들이 송암스님(박희덕)이라는 사실이다. 송암스님은 무형문화재 범패 기능 보유자로 봉원사 영산재를 주관해 오다가 2000년 열반에 들었다.
봉원사 일대는 백제 때부터 명당이었던 모양이다. 옛날 지도에도 지금의 봉원사와 신촌 일대가 ‘백제고도’ ‘고려남경’ 터로 나온다. 조선 건국 때 건국공신 하륜이 여기에 경복궁을 짓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성계는 북악산 아래를 강력히 주장한 정도전의 손을 들어줬다.
대웅전 뒤쪽의 명부전 편액이 정도전의 글씨다 이 밖에 추사 김정희와 청나라 옹방강의 글씨도 있고 화가 장승업의 병풍 그림 <신선도>도 있다.
저녁 무렵, 돌아오는 길의 발걸음이 한없이 무겁다. 박상륭 소설가는 벤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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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로 다시 사라졌고, 기형도 시인은 더 먼 곳으로 사라졌다. 모든 것이 사라져 간다. 곧 사라진다는 그 사실조차도 사라져갈 것이다.
■ 그리워할 대상 없어도 그리움이 사무치는 절 - 부석사
부석사는 그리워할 대상이 없어도 그리움이 사무치는 절이다.
삶이 무겁고 한숨이 깊어지면 새처럼 날아 영주 부석사를 찾을 일이다. 석양빛이 고여 있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졸거나 꿈결처럼 들려오는 풍경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만난 듯 적멸의 한 때를 즐길 수 있다. 태백산맥의 능선 가운데 비스듬히 경사진 봉황산 자락에 자리 잡은 부석사는 동해 낙산사에서 창건 수행을 마친 의상대사가 전국을 돌다 마침내 676년(문무왕 16년), 자신이 깨달은 화엄사상을 펼치기 위해 세운 절이다.
이곳은 태백산맥에서 소백산맥으로 나뉘는 분기점이다. <정감록>에서 ‘난세의 피난처’로 부를 만큼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깊은 오지였다. 원래 ‘부석(浮石)이란 말은 의상대사가 처음 절을 지을 때 이교도들이 반대하자 의상을 연모한 선묘신룡이 갑자기 나타나 바위를 들어 올려 겁을 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바위가 아직도 무량수전 뒤편에 있다. 어느 절인들 창건의 배경을 미화하기 위한 설화 한 두 토막쯤이야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물증‘으로 절의 명찰까지 달아준 예는 그리 많지 않다.
부석사 가는 길엔 새살이 돋는 듯 산야가 온몸을 뒤척인다. 봄기운은 들판보다도 사람의 얼굴에서 먼저 온다. 주름진 이마의 깊은 골에서 파릇한 냉이와 쑥이 돋아나는 듯하다.
천왕문을 거쳐 도량으로 들어서면 고색창연한 범종루와 안양루, 응향각 등 천년 전의 솜씨와 숨결로 빚은 건축물들이 장쾌하게 펼쳐진다. 부석사의 모든 건물들은 뜬 돌, 즉 부석이라는 이름처럼 가파른 산기슭을 따라 축대 위에 아득히 떠 있는 모습이다. 천왕문에서 무량수전에 이르는 9개의 석축이 ‘9품 만다라’를 상징한다는 도륜 스님의 설명을 들으면 무심코 흘렸던 숨결이 새삼 가팔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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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 산수유와 하얀색 매화 사이로 회색선이 그어진다. 회색은 무너지는 색이다. 그러나 다시 보면 무너지는 것을 받쳐주는 색이다. 그러므로 잿빛 승복은 가장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하고, 또 가장 낮은 자세로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은 언젠가는 무너지고, 결국 가장 낮은 자리로 돌아온다.
무량수전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목조건물 가운데 안동 봉정사 극락전 다음으로 오래된 것이다. 네 기둥의 귀솟음과 안허리 곡선이 빚어낸 휘어진 지붕의 선들, 우리네 삶에도 저처럼 어우러지고 휘어지면서 아름다워질 수는 없을까.
석양을 법당 안으로 들일 수 없는 무량수전과 배흘림기둥만을 품은 채 먼 발치에서 서성거리는 석양, 부석처럼 떠 있는 이 안타까운 만남과 헤어짐의 간격을 차마 볼 수 없다는 듯이 비스듬히 돌아앉은 법당의 소조여래좌상……. 그러면서도 언제나 그쯤에서 서로 마주 보며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오히려 더욱 아름다워지고 있는 이 두 관계가 내 가슴을 친다.
안쏠림으로 세워진 무량수전 토방의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멀리 소백산 자락으로 자욱이 물들어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라. 그리고 고개를 돌려 법고 소리를 들으며 무량수전에 고여 있는 빛깔을 한 번 보라 그것은 사람의 것이 아닌, 결코 사람이 가질 수 없는 빛깔이다.
돌아가는 길.
오늘은 언제나 남은 생의 첫날이다. 그 첫날들이 모여 생의 장강을 이룬다. 난 그 강 위에 뜬 가랑잎이다. 가랑잎이 가는 곳은 아무도 모른다. 종소리가 멈췄다. 종소리의 여운으로 그리움이 밀려온다. 저녁노을처럼 밀려온다. 나는 지금 부석사를 내려가고 있지만, 실은 다시 올라가고 있었다.
■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뜨지 않은 별 - 진관사
북한산 자락의 진관사에는 내가 오래전에 숨겨 놓은 별이 하나 있다. 가장 빛나는 별이지만 아직 이름이 없다. 나는 지금 그 별을 찾으러 가고 있다. 28년 전 난 진관사에 갈 때마다 나짐 히크메트가 쓴 <진정한 여행>이라는 제목의 시 한 편을 별에게 들려주었다.
가장 훈훈한 시는 아직 쓰이지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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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가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고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뜨지 않았다.
무엇을 할 것인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고
어느 길로 갈 것인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히크메트는 터키의 시인이다. 모스크바대학으로 유학 가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터키의 맑스주의자로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른 뒤 오랫동안 망명 생활을 했다.
진관사는 오래 전 내가 현상금과 2계급 특진이 걸린 긴급수배자였을 때 가끔 찾은 절이다. 25~28살의 청년, 그때 도망자로서 내 은신처는 주로 은평구 일대였다.
비구니 수행도량인 진관사(주지 계호스님)는 그 자리에 있었지만 예전의 그 절은 아니었다. 가는 길부터가 달랐다. 옛길은 아파트 촌으로 바뀌었고 절 앞 징검다리도 사라졌다. 원래 이 길은 왕들이 오고 간 길이다. 고려시대엔 현종과 선종, 숙종 예종이 조선시대엔 태조와 세종, 문종, 세조, 성종, 연산군 등이 진관사를 오갔다. 1011년 진관사를 창건한 고려 현종은 자신이 대량원군이었던 12살 때부터 천추태후가 사주한 자객들에게 몇 차례 암살될 뻔했다.
이때 북한산 자락에 있던 한 암자의 진관대사가 12살의 대량원군을 불상 수미단 아래 땅굴을 파서 피신시키는 등 보호했다. 3년 뒤 현종으로 등극한 대량원군은 진관사를 크게 지어 생명의 은인인 진관대사에게 선물하고 대사를 국사로 맞았다. 왕실 사찰이 된 것이다. 이후 왕의 목숨을 구한 절이라하여 고려시대 여러 왕들이 진관사를 참배하며 물품을 지원했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수도의 한양 이전과 조선 건국에서 희생된 고려왕실의 영혼을 기리는 국가적 수륙재 개설로 다시 전성기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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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은 성삼문, 이개, 하위지, 신숙주, 박팽년 같은 집현전 학사들이 오고 간 길이기도 했다. 세종대왕은 진관사에 독서당을 세워 그들을 휴가 보냈다. ‘독서휴가’ 어명이었다. 진관사는 자연스럽게 왕실과 사대부, 그리고 서민들까지 애용하는 전 국민적 사찰로 확대 되었다. <천추태후> <세종대왕> <뿌리 깊은 나무> 같은 역사 드라마가 나오기도 했다.
또 세월이 흘러 이 길은 일제강점기 항일투사들이 오고 간 길이기도 했다.
진관사를 떠나기 전 계곡으로 들어가 나무 한 그루로 서서 오랫동안 숲을 바라보았다. 오래된 숲일수록 잎의 비율보다 뿌리나 줄기, 가지의 비율이 훨씬 높다. 나는 결국 내가 진관사에 숨겨 놓은 그 별을 찾지 못했다. 그러므로 내 진정한 여행도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 팔만대장경, 그 장엄한 언어의 숲을 찾아서 - 해인사
이른 새벽 산사에 올랐다.
해인사는 자욱한 안개에 뒤덮여 있었다. 가야산 울창한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둣빛 향기와 새소리가 내 실핏줄까지 새로운 피로 갈아주는 듯했다. 이른 봄, 이른 새벽이 아니면 잠겨볼 수 없는 흥건한 일탈의 바다였다. 나는 혼자 절에 갈 때 거의 일출 전의 새벽이나 일몰 후의 저녁 무렵을 택한다. 그때가 절이 아직 ‘개장’ 전이거나 ‘파장’후라 그나마 ‘절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낮에 절을 찾아본 이라면 누구나 실감하겠지만, ‘영혼주식회가’가 따로 없다. 지겨운 일상을 절에서 다시 보는 것만큼 지겨운 일도 없다.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도 옛날이 아니요.
수만 년을 앞으로 나아가도 항상 지금이다.
산문에 들어서자마자 죽비로 등짝을 한 대 얻어맞는 듯 한 일주문 기둥의 글귀가 나를 단숨에 허기지게 만든다. 게다가 바로 눈앞의 천 년 묵은 고사목은 마치 ‘해인사의 사리’라도 되는 양 우뚝 솟아 있어 초입부터 삼엄하기 이를 데 없다. 그것은 몸으로 서 있는 게 아니라 오로지 혼으로만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인사 와 동갑인 1,200살의 이 나무는 속명이 느티나무이며 고사목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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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법명이다. 신라 때부터 그 장구한 세월을 해인사와 더불어 장좌불와로 수행해 온 몸이다. 그러니 그 앞은 지나간 수많은 고승들이 발걸음이 결코 가볍진 않았으리라. 해인사의 고사목, 그것은 그 자체가 바로 하나의 ‘적멸보궁’인 셈이다.
순천 송광사, 양산 통도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 가운데 하나인 해인사는 다른 절에 비해 유난히 직선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일주문에서 대적광전을 거쳐 법보전까지 일직선으로 뻗은 가람을 축으로 양쪽에 면벽한 불전과 승방의 배치는 경복궁의 배치처럼 서릿발 같은 위엄이 서려있다. 각 당우들도 수행에는 왕도가 따로 없음을 암시하듯 한결같이 대쪽처럼 각을 세우고 있다.
곡선과 다른 이 직각의 날카로운 미학은 마침내 팔만대장경이 있는 장경각에서 절정의 숨결을 빚는다. 모두 4동으로 이루어진 장경각은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죽비처럼 뻗은 기와지붕 능선과 처마 끝을 따라 파놓은 배수로 등의 정교한 배치가 마치 직사각형으로 각을 뜬 듯하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치물을 벨 때처럼 내 몸속으로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칼날이 지나가는 느낌이다.
날아가는 새의 발자국이 허공에 남지 않은 것도 애당초 허공엔 경계가 없기 때문이다. 경계가 없는 곳, 가장 자연의 본질에 닿아 있는 곳, 그 장엄한 언어의 숲이 바로 장경각이다. 숨쉰다고 하지 말 일이다. 내가 숨을 쉬며 살아 있다고는 더욱 하지 말 일이다. 감히 말하건데 팔만대장경 앞에서는 죄인 아닌 사람이 없다. 그 앞에서 피를 토하며 죽을 때까지 절을 한다 해도 경판의 그 ‘절대고독’을 어찌 알 것인가.
장경각 안에는 그 흔한 좀벌레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바닥을 다질 때 소금과 숯에 흙을 섞어 버무렸기 때문이다. 소금으로써 흙의 부패를 막고 숯으로써 공기의 습도를 조절하고 그 둘의 화학적 결함으로써 최적의 무균 상태를 유지한다.
해인사에는 해인사보다 더 오랜 역사를 품은 원당암이 있다. 또 암자들 가운데 가장 높은 위치에서 마치 어미 소가 젖 물린 송아지 내려다보는 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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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암도 있다. 예부터 고승들의 수행터인 이 백련암에는 성철 스님을 비롯한 소암, 환적, 풍계, 성봉, 인파대사 등 역대 산중 어른들이 주석해왔다. 노송이 우거진 수려한 주변 경관이나 신선대, 용각대, 절상대 같은 기암들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어 최상의 절승지란 이름이 제 값어치를 하고도 남는다. 성철 스님의 다비식 광경을 그린 대형 그림까지 감상하고 나니, 저녁예불 소리를 따라 내려오는 길이 그저 하염없이 이어지는 길이기만을 바랄 뿐이다.
해인사에는 ‘두 개의 적멸보궁’이 있다. 하나는 앞쪽의 고사목이고 또 하나는 고려 팔만대장경이다. 고사목이 해인사의 몸을 압축해놓았다면 대장경은 정신을 압축해 놓은 것이다. 그 둘은 전후방에서 몸과 정신의 싸움을 지키고 있다.
해인사를 떠나면서 ‘해인(海印)’이라는 말을 다시 떠올린다. 해인사는 이름 그대로 ‘바다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추는’ 절이다. 바다는 세상에서 가장 큰 거울이다. 하지만 그 바다도 물방울 하나 모자라면 완전한 모습을 비추지는 못한다. 산문을 벗어나 두 손 모으며 뒤돌아서려다가 이내 포기했다. 바다에 비추기엔 내 얼굴이 너무 작았던 탓이다.
2016. 9. 18
* 다음에 2부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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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었으므로 진다(2)
■ 이산하 지음
■ 이 세상에서 가장 여운이 긴 풍경소리 - 정암사
“일백 번 굽이쳐 흐르는 냇물이요, 천 층으로 계단이 된 절벽이로구나.”
강원도 정선의 탄광촌인 사북과 고한으로 가는 길은 깊은 골짜기들 사이로 난 외길이다. 그 길은 정선 아리랑처럼 끝없이 돌고 도는 길이다. 옛날에는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줄을 매어 빨래를 널었다고도 하지만, 정말 우리나라의 골짜기란 골짜기는 다 집합시켜놓은 듯했다. 골짜기들마다 가파른 비탈도 아랑곳없이 임시막사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낡은 집들의 풍경은 멀리서 바라보는 것조차 숨이 탁탁 막혀올 지경이다 게다가 그 위에 흩뿌리는 눈 탓인지 사양길로 추락한 탄광촌의 지난한 삶이 그렇게 처연할 수가 없다. 골짜기를 겨우 벗어나는가 싶더니 또 다른 골짜기가 기다리고 있는 것, 그네들의 인생살이는 그렇게 익숙해져왔을 것이다.
정선의 깊은 골짜기에 있다는 정암사는 고한역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다. 이젠 도박촌으로 변한 탄광촌에서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 이토록 청정한 ‘적멸보궁’이 존재한다는 게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어쩌면 그곳은 이미 황폐해진 도박인생과 막장인생들이 마지막으로 잃어버린 자기를 되찾는 ‘마음의 산소호흡기’ 같은 곳인지도 모른다.
정암사는 석가의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5대 적멸보궁 중 하나다. 신라의 국통이었던 자장스님이 세우고 또 그가 입적할 때까지 머물렀던 절이기도 하다. 강릉 수다사에 머물던 자장스님이 하루는 꿈을 꾸었다. 당나라 오대산에 있을 때 만났던 한 스님이 나타나 “내일 그대를 대송정에서 만날 것이오” 하고는 사라졌다. 이튿날 아침 일찍 대송정으로 가니 문수보살이 나타나 “그럼 태백산 갈반지에서 만날 것이오”하고 또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자장스님이 다시 태백산으로 들어가 갈반지를 찾고 있는데,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가나무 아래 똬리를 틀었다. 스님은 ‘아하, 바로 여기가 그 갈반지로구나’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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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는 그곳에 석남원을 세운 다음 문수보살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 석남원이 바로 지금의 정암사다.
자장스님은 당나라에서 갖고 온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실 탑을 마당에 세웠다. 탑은 세울 때마다 무너졌다. 스님은 식음을 전폐하고 간절히 기도했다. 어느 날 칡넝쿨 세 줄기가 흰 눈 위로 솟아나 뒷산 중턱까지 올라가 멈췄다. 스님이 칡 줄기가 멈춘 그 자리에 다시 수마노탑을 세우니 이번엔 무너지지 않았다. 지금도 나이 드신 분들 가운데는 한자로 칡 ‘갈(葛)’자와 올 ‘ 래(來)’ 자를 써서 정암사를 ‘갈래사’라고 부르는 분들이 적지 않다.
탄허 스님이 현판 글씨를 쓴 일주문을 지나 오른편으로 ‘낮은 돌기와 담’을 따라가 그 끝자락 한 편에 제법 고풍스런 적멸궁(寂滅宮)이 돌아 앉아 있다. 이 낮은 돌기와담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유홍준 교수가 정암사를 여덟 번이나 찾은 후에야 비로소 그 아름다움에 눈을 떴다고 하니 초행인 나로서는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낮은 돌기와 담은 적멸궁 둘레뿐만 아니라 전나무, 산목련, 염주나무 들이 심어진 정암사 경내 곳곳을 감싸고 돌아 둘러보는 이들로 하여금 저도 모르게 바라보는 눈의 높이가 낮아지면 받아들이는 마음의 폭도 넓어진다.
법당에 불상이 없는 정암사 적멸궁은 다른 적멸보궁과는 달리 현판 이름이 세 글자다. ‘보(寶)’자를 일부러 뺀 건지, 아니면 다른 절에서 더 넣은 건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적멸궁과 극락교 사이에는 죽은 가지가 하늘 높이 솟아 있는 가운데 주목 한 그루가 자라는 둥근 석단이 있다. 의상대사의 지팡이에서 자란 영주부석사의 단풍나무나 한암스님의 지팡이에서 자란 오대산 중대의 단풍나무에서 보듯, 여기 자장스님이 꽂아 두었던 지팡이에서 뿌리가 내리고 가지가 돋아 오늘날까지 푸르게 살아 있다는 선장단(禪杖檀)이다. 그나마 자장스님의 숨결을 더듬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자취중 하나라 자꾸만 되돌아보게 된다.
요사채에서 묵은 다음 날 새벽 일찍 수마노탑에 올랐다.
마침내 석회암 벽돌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수마노탑 앞에 이르니 천지가 온통 눈이다. 눈 덮인 태백산의 천의봉 줄기가 서쪽으로 길게 그 기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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뻗어 내리다가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산 중턱에서 문득 멈춰버렸다. 문득 멈춘 그 지점이 바로 부처님의 진신 사리가 안치된 수마노탑의 자리였다.
7층 높이의 수마노탑은 태백산에서 불어오는 거친 눈보라에도 아랑곳없이 깊은 묵언에 잠겨 있는 듯했다. 다만 층층이 모서리마다 달려 있는 풍경들만이 눈처럼 겨울산을 날아다니며 명징한 소리를 전한다. 종소리의 맑은 결이 흐트러질 것을 우려해 시주자들 이름 대신 시 한 수를 새긴 범종이 오늘따라 풍경처럼 유난히 경쾌하게 울린다.
정암사는 예부터 많은 선객들이 모여 수행한 선(禪)사찰로도 유명하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 죄수에게 오판으로 사형선고를 내린 뒤 판사를 그만두고 출가한 효봉스님이 3년 이상 머물며 수행정진한 절이다. 또 해방 이후에도 지월 스님, 서옹스님 등이 거쳐간 절이니 출가수행자들 사이에서는 더욱 각별한 의미로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돌아오는 길에 자장스님이 입적한 조전 터와 그 유골이 모셔져 있다는 석혈, 그리고 최시형을 비롯한 동학 핵심지도자들의 수련장소 겸 피신처로 알려진 적조암에 가려고 종무소에 들렸다. 단 거 안 먹는다던 그 아이가 생긋 웃으며 “ 이 정암사 계곡을 끼고 만항재 쪽으로 오르다보면 양지촌과 평화촌이 나오는데 그 동쪽 기슭에 있어요”하고 약도를 손금 보듯 그려준다.
■ 네 몸속에 절 하나 지어보아라 - 법흥사
고뇌하는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그 고뇌에서 벗어나라.
마을이나 숲이나 골짜기나 평지나
깨달음을 얻은 이가 사는 곳이라면
거기가 어디인들 즐겁지 않겠는가.
발걸음이 무거울 때 <법구경>의 이 구절을 떠올리면 한결 가벼워진다.
영월의 눈 덮인 무릉계곡을 따라 법흥사로 가는 길은 뒤에서 바람이 불면 앞에서 빙판이 발을 걸어버린다.
걷고 또 걷고, 묻고 또 물어서 겨우 몸을 부린 곳이 법흥사였는데, 가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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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날이라고 ‘24시간 철야 기도법회’기간이었다. 더욱이 이 절로 말하자면 기도만 하면 고로쇠나무 수액같은 영험을 맛본다는 신성한 적멸보궁이니만큼, 운집한 참배객들 역시 조금 부풀리자면 사자산 솔방울들보다도 더 많았다. 산을 저렁저렁 울리는 염불 소리와 목탁소리가 신도들의 간절한 염원을 실어 나르는 듯 유장하게 흐른다.
울창한 노송 사이의 오솔길을 따라 툭툭 떨어지는 솔방울을 톡톡 차며 20여분 올라가니 정면 3칸의 작은 규모를 가진 적멸보궁이 나온다.
법당 안은 열기가 후끈거리고 마당에서 삼천배를 올리는 신도들 얼굴에는 매서운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땀이 줄줄 흐른다.
법당의 불단을 보니 불상은 없고 방석만 있는데, 그 뒤로 난 큰 창을 통해 눈 덮힌 아담한 동산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적멸보궁이니 불상이 없는 건 당연한데 그럼 진신사리는 어디에 안치되어 있다는 것일까. 보궁 뒤쪽으로 가보았으나 아직도 이승에서의 번뇌를 끊지 못하고 뒤척이는 망자의 무덤같은 토굴 동산 하나와 사리탑으로 잘못 알려진 한 이름 없는 승려의 부도 1기가 눈밭에 서 있을 뿐이다.
잠시 쉬고 있는 할머니에게 사리가 있는 곳을 넌지시 물었다. “나도 잘 모르오. 얼핏 들으니 어디 탑 같은데 모시지 않고 저 사자산 어딘가에 뿌렸다고 하는 것 같은데…….”
그랬다. 저 온 산이 다 부처의 몸인 것이다. 플 한포기, 나무 하나, 바윗돌 하나, 그 위를 스치는 한 점 바람이나 구름, 금방 녹아 사라지는 눈송이나 빗방울들, 그 모든 것들의 그림자마저도 부처 아닌 것이 없거늘, 그 없는 것 마저도 부처이거늘, 무얼 그리도 목마르게 찾아 헤맸던가.
강원도 영월의 사자산 중턱에 깃든 법흥사는 자장스님이 마지막으로 세운 적멸보궁이다. 그때가 643년이었으니 지금으로부터 천 년하고도 절반에 가까운 역사다. 이렇게 멀고 아득하면 세월이 제 먼지를 터는 데도 무감해진다. 절에 갈 땐, 특히 오래된 절일수록 반드시 그 절이 지금까지 쌓아온 먼지의 무게를 달아보아야 한다. 몇 근이나 되는지, 과연 내 몸속에 쌓인 먼지의 무게보다도 근수가 더 나가는지, 그리고 먼지 속을 잘 꿰뚫어보아야 한다.
절 먼지 속의 심연의 무게와 내 먼지 속의 심연의 무게가 서로 같아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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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공명을 일으킨다. 그 공명현상을 우리는 ‘깨달음’이라 부르고 그 경지를 ‘득음의 경지’라 한다.
내 몸무게를 달아보니
65킬로그램
먼지의 무게가 이만큼이라니
일본 시인 호사이의 하이쿠다. 아직 먼지 속의 심연에는 이르지 못하고 바깥에 머물러 근수만 달고 있다. 그럴지라도 먼지에서 근수는 찾아내지 않았는가! 그럼 우리는 무얼 찾아낼 것인가, 길게 고민하지 말고 우선 내 몸속에 작은 절 하나부터 지어볼 일이다. 그러면 먼지가 쌓일 것이다. 그 속에 내가 있는 것이다. 고개를 쳐들고 다시 사자산을 무심한 듯 노려보니 먼지가 흰 눈처럼 자욱이 쌓여 있다. 저 먼지는 바람이 불어도 날아갈 줄을 모른다. 날아가기엔 이미 너무 무거운 모양이다.
■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달라 - 상원사
적멸보궁 가는 길은 내가 무엇을 찾으면서 가는 길이 아니라 내가 무엇에 들키면서 가는 길이다. 길 위에서 타인의 발자국에게 들키고, 지우지 못한 내 발자국에게 들키고, 뾰족한 돌부리에게 모서리 같은 내 마음이 들키고, 이름 없는 들꽃들의 자유로운 영혼에게 들키고, 허공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 새들에게 들키고, 지푸라기끼리 상처를 핥는 허수아비에게 들키고, 자꾸만 무엇을 찾아 의미를 부여하려는 나 자신에게 들킨다.
이렇게 걷다보니 어느덧 나는 상원사 턱밑에 와 있었다. 이제부터 진짜 들킬 일만 남은 것 같아 등줄기가 서늘해 오기 시작한다.
- 상원사는 적멸보궁의 수호암자인 중대사자암 적멸보궁을 오르는 길목에 있어 참배객이 거쳐가게 되는 길
- 자장스님이 월정사와 함께 선덕여왕 때(645) 세우고 성덕왕(705) 때 중창
- 조선시대 왕실과 가까워지면서 특히 세조 때 크게 번성 : 세조의 모태 신앙이 불교이고, 세조의 병을 상원사의 물이 고쳐주었을 뿐만 아니라 상원사의 고양이가 세조의 생명을 구해 주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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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온 몸에 종창이 생긴 세조가 상원사 계곡으로 가 관대 걸이에 옷을 벗어 걸어 두고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때 어린 동자승 하나가 지나가기에 불러서 등을 씻게 했다. 왕인지 알 턱이 없는 동자승한테 세조가 농담투로 “임금의 옥체를 씻어주었다고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안 되느니라”하고 일렀다 그러자 동자승이 웃으며 “임금님도 이곳에서 분수보살을 친견했다고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안 됩니다”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놀란 세조가 혼미한 정신을 가다듬고 나니 동자승은 보이지 않는데 온몸의 종창이 씻은 듯이 나아있었다.
그 이듬해 세조가 상원사를 다시 찾았다. 세조가 법당으로 들어가려 하자 갑자기 고양이 한 마리가 세조의 옷자락을 물고는 놓지를 않았다. 수상하게 여긴 세조가 법당 안을 샅샅이 뒤지자 불상 아래쪽에 칼을 든 괴한이 숨어 있었다. 고양이 덕분에 목숨을 건진 세조는 전답을 하사했는데 그것이 ‘묘전(猫田)’이다. 그리고 지금도 상원사 청량선원 앞뜰에 그때의 고양이 석상 2기가 나란히 있다.
소림초당 앞 동정각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가장 오래 됐다는 동종이 걸려있다. ‘국보’급의 특별대우인지 문을 닫고 자물통까지 채워놓았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그림이 새겨져 있다. 천녀가 가슴에 공후(箜篌)와 생(笙)을 안고 옷자락을 날리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비천상, 광화문의 세종문화회관의 기둥에 새겨진 비천상이 바로 그것이었다.
상원사의 신라 범종은 세조가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을 수소문해 찾아낸 것으로 안동에 있던 것을 여기로 옮겼다고 한다.
- 상원사는 해방직후 실화로 전소하자 중창
- 한국전쟁 때 국군이 인민군과 빨치산의 근거지를 없앤다며 태우려 하자 한암 스님이 법당에 꼿꼿이 앉아 “이 절과 함께 불에 타서 소신공양을 할 터이니 태우려면 나와 함께 태우시오!”하고 일갈했다. 스님의 결기에 감동한 군인들이 문짝을 뜯어 태워 멀리서 보면 마치 절이 불타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위장을 함으로써 상원사는 소실의 화를 면했다고 한다.
한암 스님은 한국 불교의 초대 종정이었다. 경허, 수월, 만공 스님들과 함께 근세 선불교의 중심 역할, 1920년대 중반에 상원사에 들어간 이후 195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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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적 할 때까지 한 번도 밖으로 나간 일이 없었다.
“내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상춘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다!” 한암 스님이 제자들에게 늘 들려주던 말이다.
상원사에서 나와 중대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은 통나무 계단과 난간에 의지해 오르는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마침내 적멸보궁 마당에 올라서자 긴 터널을 빠져나온 듯 가슴이 탁 트인다. 오대산 비로봉아래 천하명당으로 소문난 곳이 바로 그곳이다. 풍수에 어두운 사람이 보아도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다. 5대 적멸보궁 중에서도 양산 통도사와 이곳이 가장 유면해 불자들의 참배도 가장 많다고 한다. 오대산의 각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중심에 법당이 자리 잡았다.
보궁 뒤편에는 석탑같은 조그만 마애불탑이하나 있을 뿐인데 거기에 5층탑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아마도 이곳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무언의 상징일 듯싶다. 여기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 역시 법흥사처럼 사리가 모셔진 곳이 분명치 않아 더욱 신비감을 나타낸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상왕봉, 기린봉, 호령봉 그리고 비로봉에 쌓인 흰눈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 위로 상원사의 종소리가 새가 알을 품는 자세로 울려오고 있었다.
서역 삼만리, 공후와 생을 가슴에 품은 채 하늘로 날아오르는 천녀의 옷자락이 종소리의 긴 여운 속에서 사라지며 애절하게 외치는 듯했다.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달라고…….
어느새 내 볼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모습 이대로 죽고 싶었다. 작은 적멸이 오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들킬 것도 더 이상 감출 것도 없었다. 돌아가면 며칠 또 앓아누울 것만 같았다.
■ 서럽다. 화두 30년. - 통도사
석가가 살았을 땐 가람도 필요 없었고 경전도 필요 없었다. 그가 머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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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곧 가람이요, 그가 말한 것이 곧 경전이었다. 그의 말은 교(敎)가 되었고 그의 마음은 선(禪)이 되었다. 교는 경전을 통해 법보(法寶)가 되었고 선은 스님을 통해 승보(僧寶)가 되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몸은 사리로 남아 불보(佛寶)가 되었다.
알다시피 석가의 유언은 “오직 법만 따르되 나를 상징하는 것은 아무 것도 만들지 마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상징물이 맹목적인 기복신앙의 대상이 될 것을 우려했음이다. 그럼에도 불교는 가는 절마다 ‘상징의 숲’이 넘친다. 설령 그의 몸에서 사리가 나오지 않았다 할지라도 또 다른 ‘어떤 것’이 분명 대신했을 것이다. 물론 사람의 심리가 어떤 상징을 통하면 그 믿음의 집중도 또한 훨씬 높아진다는 점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짜 사리’가 ‘진짜’ 묻혀 있다는 절이다.
사리가 워낙 오래된 것이다 보니 그동안 어디 한 곳에서 제대로 조용히 쉴 수가 없었다. 더구나 외침이 잦고 침략자들마다 사리의 행방에 혈안이 되어있었으니 어느 노승은 사리 보따리를 안고 첩첩산중의 토굴 속으로 피신해 있을 정도였다. 아마도 사리의 수난에 대해 쓴다면 대하소설은 족히 되고도 남을 것이다. 이 파란만장한 세월을 겪어오면서도 유독 통도사 사리만큼은 그 행방이 일목요연할 뿐 아니라 유통과정에 변질도 생기지 않았음이 여러 문헌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통도사의 적멸보궁을 찾는 많은 참배객들이 좀 더 과학적인 신비감을 갖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적멸보궁은 법당 뒷벽이 뚫려 있었다. 그 뚫린 벽으로 보니 큰 돌이 놓인 넓은 석단이 한눈에 들어왔다. 사리가 있다는 ‘금강계단’이다. 법흥사처럼 적멸보궁 안에서도 금강계단을 보면서 참배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적멸보궁과 함께 국보 290호인 금강계단 앞에서는 인자한 웃음을 띤 노스님 한 분이 아이들의 질문에 열심히 대답하고 있었다.
금강계단은 정식으로 승려가 된 것을 인정하는 마지막 절차로서 앞으로 제켜야할 계율을 내려주는 수계의식 거행 장소다. 이 수계식이 끝나면 비로소 ‘석씨 가문’의 족보에 이름이 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승려들로서는 첫 삭발식 때만큼이나 엄숙하고 긴장되는 순간을 거치는 곳이기도 하다.
용학스님은 약 15년 동안을 영취산 통도사에 머물렀는데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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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 나이 3년 후면 80인데 부처님이 80에 돌아가셨으니 내가 부처님보다 더 살 것도 없고 덜 살 것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3년 후 2월 보름에 돌아가겠네.”
죽을 연도나 달이면 몰라도 날짜까지 미리 지정하니, 3년씩이나 앞당겨 초상을 준비할 수도 없는 제자들로서는 그냥 농담이려니 하고 웃으며 흘려보냈다. 마침내 약속한 그날이 왔다. 스님은 공양도 하고 머리도 깎고 목욕도 하며 하나씩 평상시의 ‘수순’을 착착 밟아가고 있었다.
저녁이 되자 스님이 갑자기 “자, 이제 때가 무르익었으니 열반종을 치시게!” 원래 죽고 난 다음에 치는 게 열반종인데 죽기도 전에 치라니 상좌스님들은 어이가 없었다. 어쨌든 큰스님의 명이거늘 진퇴양난에 빠진 제자들의 고민에도 아랑곳없이 스승의 재촉은 계속됐고 마침내 열반종이 길게 울려 퍼졌다.
곧 통도사의 모든 스님들을 비롯해 천여 대중이 운집했다. 이윽고 용학 스님이 법상으로 천천히 올라가 영취산 자락을 천천히 훑어본 다음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이 부처님이 돌아가신 2월 보름이고 내 나이도 부처님과 똑같은 나이가 되었으니, 이제 더 살 것도 없이 오늘 약속대로 죽을랍니다. 여러 불자님네들, 그동안 신세 많이 지고 갑니다.”
이렇게 짧게 작별인사를 하더니 눈을 감은 채 정말 꿈결같이 바로 열반에 들었다. 이것은 신화나 전설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다. 엄연한 현실이다. 송광사에 주석하고 있는 법흥 스님은 이 “용학스님 같은 분이야말로 칠지보살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금강경의 한 대목이다.
“사랑하라. 그러나 언젠가는 그 모든 것들을 떨쳐버리고 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모든 구름들을 넘어서 가야 한다.”
통도사는 자장스님이 646년(선덕여왕 15년)에 지었다.
통도사는 부속암자가 13곳인데 그중에서 자장암은 자장스님이 ‘자장방’이라는 움집을 짓고 수행하던 곳이다. 이 법당 뒤편 바위에 자장스님이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어 개구리를 살게 했다는 ‘금와공’이 있다. 여기에 살던 개구리 한 쌍이 나중에 금개구리로 변했다. 자장스님의 법력과 신통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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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한다는 이 한 쌍의 개구리는 불심이 지극한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고 해서 ‘금와보살’이라 부른다. 지금도 많은 불자들이 이 금와공을 찾아와 컴컴한 구멍 속을 들여다보며 금개구리를 찾는데 한때 그 구멍 바로 밑에 벌집이 있어서 벌이 드나드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금개구리가 벌로 둔갑한다는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다.
통도사에 가면 자장암 외에 반드시 들러야 할 암자가 하나 있다. 바로 경봉스님이 오랫동안 조실로 있던 극락암이다. 일출을 볼 수 있는 백운암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데, 암자 안으로 들어서면 통도사 8경중의 하나인 ‘극락영지’가 영취산 을 오롯이 비추고 있다. 그 영지 위에는 경봉스님이 놓고 이름도 지었다는 무지개 같은 홍운교 다리가 걸쳐 있어 가야산 봉우리를 비추는 해인사 일주문 앞의 영지와는 또 다른 느낌을 준다. 이 영지는 그림자를 비추는 연못이지만, 다리 위로 사람이 지나갈 때면 어김없이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3부 기울어지다 사라진다
한 해가 저물고 또 한 해가 시작되는 시기가 왜 겨울이겠는가.
왜 겨울 한철에 서로 겹치게 했겠는가.
처음과 끝이 살얼음 같은 생을 사이에 두고 서로 포갠 겨울은
그 자체가 바로 삶의 요약본이다.
비록 그 요약본대로 살 수는 없다 할지라도 요약되지 않는 삶이란 없다.
■ 부처가 얼어 죽으면 경전이 무슨 소용인가 - 봉정암
설악산 봉정암을 다녀오지 않고서는 적멸보궁을 갔다 왔다고 하지 말라.
“내일과 다음 생 중 어떤 게 먼저 찾아올 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설악산 봉정암을 오르는 길에 하필이면 이런 티베트 속담이 머리를 스치는 것은 무슨 조화일까. 봉정암, 이 절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라곤 설악산 소청과 대청봉 사이 해발 1,244미터 지점이며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암자라는 것, 그리고 자장 스님이 창건한 5대 적멸보궁이라는 것 정도다. 산행을 즐기는 편인 나로서는 지리산 종주나 한라산에 비해 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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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으로 오르는 일이 그다지 힘들거나 다를 건 없다. 다만 몇 차례 때를 놓치고 연말이 되어서야 신발끈을 묶었다.
이 ‘연말’은 이름깨나 있다는 산치고 어느 봉우리나 북적거리지 않는 데가 없었다. 바로 일출을 보며 새해를 맞으려는 해돋이 인파였다. 게다가 설악산 대청봉은 동해 일출로 연말이 가장 몸살을 앓는 때가 아닌가. 봉정암은 대청봉 바로 아래 있으니 소청봉까지는 비교적 안전하게 물어서 갈 수 있다는 게 내 속셈이었다.
백담계곡을 이른 새벽에 출발해 오세암을 거쳐 6개의 고개로 넘어가는 빙판길은 아무리 해돋이 안파에 묻혀간다 하더라도 만만찮은 것이었다. 사람들이 많아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으나 그만큼 미끄러워 아이젠을 몇 번씩이나 단단히 고쳐 매곤 했다.
완만한 경사가 이어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바닥과 각도가 좁혀지며 가파른 길이 나타나는데, 마치 이마를 찧을 듯 바짝 다가온다. 여기가 바로 새도 짐승도 쉬어 간다는 ‘깔딱고개’인 모양이다.
앞서 오르던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분이 로프를 잡은 채 돌아서서 빙긋이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많이 힘드시죠?”
“지금 겨울이라서 그렇지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단풍구경 삼아 하루 몇 천 명이 올 때도 있어요. 심지어 70이 넘은 할머니들도 쌀보따리를 지고 많이 올라와요.”
“쌀은 왜요?”
“부처님 드시라구요, 후훗……. 봉정암은 겨울에 자주 폭설이 내려 늦은 봄까지는 길이 끊기고 소식도 두절돼 섬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옛날부터 불자들이 이 절에 올 때만큼은 다른 것보다 먼저 꼭 식량을 챙기게 됐대요. 그것들을 조금씩 모아 놓으면 겨울을 거뜬히 보낼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여길 찾아가는 스님들도 자기 머무를 동안 먹을 양식은 반드시 짊어지고 왔구요. 또 내려갈 때도 이 절에 와 공부할 스님들을 위해 겨울 동안 지필 땔나무를 꼭 마련해 놓고 하산한대요.”
“저는 가져온 게 아무것도 없는데 어쩌지요?”
“이따가 불전에 가서 평소 보이지 않았던 마음이나 몇 되쯤 넣으시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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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겠어요? 후후훗……. 그럼 천천히 오세요.”
그야말로 7시간에 걸친 사투의 연속 끝에 도착한 봉정암은 몇 칸짜리 조그만 암자가 아니었다. 9칸짜리 대법당과 5칸짜리 적멸보궁이며 소법당, 요사채, 그 외 여러 당우(堂宇, 규모가 큰 집과 작은 집을 아울러 이르는 말)들……. 이 높은 구름 속에 이렇게 한 상 거하게 차려져 있으리라곤 상상 도 못했다. 하지만 이것도 모자라 조만간 불사를 또 시작한다고 한다. 단풍철이면 참배객들이 수천 명으로 늘어나 밤을 새울 곳이 없다는 것이다. 또 불자들 사이에는 “설악산 봉정암을 다녀오지 않고서는 5대 적멸보궁을 갔다 왔다고 말하지 마라”는 묵계 같은 것이 있어서 참배객들의 ‘필수코스’란다.
어쩌면 그런 ‘자세’가 이 요새의 절을 이렇게 크게 키웠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우스갯소리인 양 흘려들었던 얘기도 다시 떠오른다. 봉정암에 한 번 다녀오면 지갑째로 시주함에 넣는다는 말이 있다. 워낙 험난한 고생길이라 내 생전에 언제 또 적멸보궁을 참배할 수 있겠느냐며 ‘마지막 시주’인 셈치고 속에 든 것을 다 꺼내 놓게 된다는 뜻이다.
알고 보면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봉정암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라는 데에 있다.
자장스님이 이 높은 곳에 봉정암을 창건한 것은 스님이 중국 청량산에서 진신사리를 갖고 들어온 다음해인 644년이다. 그리고 원효 스님이 667년에 중건했다. 대개가 그렇듯이 여기도 설화만 있을 뿐 그 이상의 설명이 없다. 진신사리는 갖고 왔으나 봉안할 장소가 마땅찮아 금강산으로 들어가 헤메고 있는데 어느 날 오색찬란한 봉황이 나타나 자장스님을 인도하더라는 것이다. 봉황을 따라 온 여기에 초가 암자 하나를 지어 사리를 모시니 그것이 지금의 봉정암이다.
적멸보궁 뒤편의 눈길을 30분 쯤 올라갔을 때 마치 연꽃무늬가 새겨진 평평한 바위를 곧바로 뚫고 솟아난 듯한 5층 사리탑이 보인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이 사리탑 때문에 그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산중 요새까지 찾아온다고 생각하자, 고단한 삶에 허기진 그들의 갈증보다도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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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탑에 자꾸 의미를 부여하려는 삿된 마음이 더 앞선다. 그것이 덧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문득 ‘고삐에 얽매이지 않는 영원한 자유인’이라 해서 ‘콧구멍 없는 소’로 불리는 경허스님의 일화가 떠오른다. 스님이 엄동설한에 깊은 산중의 초가 암자에서 참선에 들어 있었다. 너무 추운 나머지 경전을 찢어 벽에 도배도 하고 구멍난 문도 발랐다. 그것을 목도한 다른 스님들이 아연실색하더니 발끈하며 대들었다.
“아~니 스님! 어떻게 경전을 찢어 도배를 하십니까?”
경허스님은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하면서 태연하게 대답했다.
“부처가 얼어 죽으면 이놈의 경전이 무슨 소용인가?”
“…….”
한동안 눈 속의 사리탑을 보며 이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슬그머니 눈을 떼고 먼 허공으로 시선을 흩뿌려보지만 여전히 마음은 편치 않다. 아마도 내 마음이 단청은 이미 고유한 무늬를 복원할 수 없을 만큼 덧칠로 범벅이 되어 있는지 모른다.
겨울 산사는 허기지도록 적막하다.
바람이 분다. 살을 발라낼 듯한 바람을 타고 온 눈가루마저 입속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대로 뱉어낼 만큼 차고 시리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나를 매혹하는 삶이 있으니, 그것은 백지뿐인 삶. 하산하기 전, 겨울 산사는 나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다.
■ 사찰로 가는 마음, 성찰로 돌아오는 마음 - 송광사
엊저녁부터 내리던 겨울비가 아침까지도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어제 오후 늦게 도착해 송광사의 저녁 예불과 자욱한 비에 젖어가는 겨울 산사의 풍광에 한동안 넋을 놓은 후 밤이 이슥하도록 어두컴컴한 경내를 떠돌았다.
밤 9시쯤 약속이나 한 듯 스님들의 방에 불이 하나 둘 꺼질 때야 여관으로 돌아왔다. 낡은 창틀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밤새 들려와 그렇지 않아도 적막한 긴 겨울밤이 더욱 처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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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아름드리나무들이 겨울비애 촉촉이 젖어가는 송광사 가는 길은 새벽예불을 마치고 내려오는 불자들과 띄엄띄엄 올라가는 우산 쓴 관광객들만 몇몇 보일뿐 아직은 한산한 모습이다. 새들이 잠깐씩 비가 멈춘 틈을 타 분주하게 나뭇가지를 옮겨 다니며 젖은 깃털을 털고 있다. 오르는 길에 먼저 낮은 돌담 위의 부도밭부터 둘러본다.
잘 알려져 있듯이 신라 말 혜린선사가 창건하고 지눌 스님이 중창한 송광사는 우리나라 ‘삼보사찰’ 가운데서도 특히 불교의 승맥을 잇는 ‘승보사찰’이다. 그 면면을 보자면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스님과 15국사, 그리고 서산대사에 이어 최근의 효봉, 구산 스님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정혜결사(定慧結社)정신과 조계총림의 목우가풍(木偶家風)을 빛낸 큰 별들이다. ‘총림(叢林)’이 무엇인가. 풀들이 흐트러지지 않고 가지런히 자라는 것을 ‘총’이라 하고, 나무들이 굽지 않고 곧게 뻗어나가는 것을 ‘림’이라 하지 않는가.
그런 총림의 큰스님들이 남긴 사리와 많은 사연들이 새겨진 비석들을 둘러보노라면, 마치 그들과 마주 앉아 찻잔이라도 나누는 듯한 느낌이 들어 어느 한 귀퉁이에서 슬며시 잠들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지눌스님의 비석에 새겨진 글귀 하나가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소걸음, 호랑이 눈’이란 뜻의 ‘우행호시(牛行虎視)’다.
호랑이는 무엇을 볼 때 온몸 전체를 돌려서 정면으로 직시한다. 소는 길을 갈 때 서두르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 호랑이 눈의 그 ‘통찰’과 소걸음의 그 ‘실천’을 통해서 마침내 목표를 제압하는 것이다. 송광사 스님들은 누구도 이 비석을 비켜갈 수 없다.
일찍이 송광사에서 조계총림을 열어 수많은 선승들을 배출한 구산스님은 돌 위에서 잠자고 미숫가루만 먹으며 수행정진했다고 한다. 어느 날은 호랑이가 나타났는데도 눈 한 하나 깜짝 않고 태연히 참선에만 몰두하니 호랑이가 물러갔다는 얘기도 있다. 스님이 늘 제자들에게 힘주어 하는 말이 있었다.
“자네, 늘 참선하게. 그러면 목에 칼을 들이대도 눈 하나 꿈쩍 안 하게 돼!”
1950년대 중반 불교정화운동이 들불처럼 번질 때 스님은 선방에서 조용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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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검정 고무신을 신고 서울로 향했다. 그러고는 한여름 뙤약볕이 내리쬐는 비구승 대회장에서 혈서를 쓰셨는데, 피에 젖은 종이가 무려 600장이나 되었다. 손가락 몇 개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 자리에 효봉, 성철, 청담, 만암, 동산, 향곡, 인곡, 월하스님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 절이나 부도밭은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길옆에 자리 잡고 있다. 오갈 때마다 거울처럼 비석에 자신의 마음을 비춰보라는 뜻이다. 예전에는 대부분 절 입구에 징검다리로 된 개울이 있어 돌다리 하나를 건널 때마다 물에 비친 자기를 보았다. 다 건널 때까지 자기 마음이 맑게 비치면 비로소 절 안으로 들어가고 계속 흐리게 비치면 물러나는 법이다. 그런데 요즘은 개울을 시멘트다리로 덮어버려 먼지에 자기 얼굴을 비춰보아야 하니, 좋게 보면 수행이 그만큼 더 어려워졌는지도 모른다.
송광사 가는 길에도 그런 다리가 있다. 옛날에는 징검다리였지만 지금은 석조의 홍교 위에정자처럼 어름다운 청량각을 올려놓았다. 이 다리를 통과할 때에는 반드시 위를 잘 쳐다보기 바란다. 큰 대들보에 턱을 걸친 용머리 하나가 큰 입을 벌린 채 지나가는 당신들의 마음을 꿰뚫듯 내려보고 있으니 말이다.
어느 절이나 그 절의 가장 중요한 유전자는 대웅전 배후에 숨어 있다. 예컨대 해인사는 대웅전 뒤의 성채 같은 돌담 위에 팔만대장경이 있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통도사의 금강계단 또한 그렇다. 배후의 유전자는 그만큼 소중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자칫하면 정체성의 대가 끊어지기 때문이다. 일본 놈들이 옛날에 우리나라를 침략할 때마다 해인사에서는 팔만대장경, 통도사에서는 진신사리를 약탈해 가기 위해 수많은 병력을 일부러 동원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들이다. 물론 그때마다 해인사는 승려들과 관군들이 합심해 길목을 터주지 않았고, 통도사의 노스님들은 사리를 보따리에 싸들고 삼십육계를 놨다.
맑은 잿빛 장삼에 붉은 가사를 걸친 승려들의 정연한 이동을 ‘안행(雁行)’이라 한다. 마치 기러기들이 줄지어 날아가는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비유다.
비가 잠시 그친 틈을 타 얼른 조계산 기슭에 숨어 있는 천자산을 다녀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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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참선도량인 천자암 뜨락에는 ‘쌍향수’라는 향나무가 자라고 있다. 지눌 스님이 중국에서 돌아올 당시 자신이 쓰던 지팡이를 심어 놓은 것이란다. 그러나 800년이나 흐른 지금, 이 향나무는 마치 장좌불와로 인고의 세월을 너무 소진이라도 한 듯 청정한 빛은 간데없고 내뿜는 향기마저 엷다. 필경 온몸을 비틀고 비틀어 치약처럼 짜냈을 그 엷은 향기를 맡으면서, 난 자꾸만 벌어지는 나이테의 간격보다도 조용히 깊어지는 가을 강 속의 속살을 먼저 떠올린다.
이제 이 송광사를 떠나야 할 시간, 송광사가 나의 등을 향해 마지막으로 묻고 있다.
“오늘 당신이 의미 없이 산 하루는 어제 죽은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어하던 내일이다. 당신은 그런 오늘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 가장 슬프고 애틋한 절 - 운주사
운주사는 쉽게 들어갈 수는 있어도 쉽게 나올 수는 없는 절이다. 처녀가 가면 처녀를 바쳐야 하고 총각이 가면 동정을 바쳐야 나올 수 있는 절이다. 그만큼 애절하고 신비로운 절이다. 천천히 다가갈수록, 가만히 들여다볼수록 저녁 강물이 가슴속으로 찰랑찰랑 차오른다.
내가 본 수많은 절 중에서 나를 가장 슬프게 한 절이다. 전남 화순의 운주사는 지리산 일대를 돌아 해남 땅끝 마을로 가다 우연히 도둑처럼 슬쩍 스며든 절이다. 마치 넓은 계곡의 야외 조각 전시장에라도 온 듯한 느낌이다. 잔설이 깔린 입구의 풀숲에서부터 평지와 비탈을 가리지 않고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듯한 석탑과 돌부처들이 절 뒷산까지 가득하다.
운주사는 일반 사찰에 대한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대부분의 사찰이 그렇듯 잘 정돈된 건물 배치와 웅장한 풍채는 그 겉모습만으로도 여행객들의 발걸음을 주춤거리게 할 만큼 심리적인 위축감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을 거꾸로 뒤집어 우리는 흔히 ‘엄숙’과 ‘경건’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운주사는 언뜻 보기에 저절로 엄숙해질 만큼 웅장한 모습도, 그렇다고 옷깃을 다시 여미며 경건해질 만한 고색창연한 건물도 보이지 않는다. 그 흔한 당간지주나 열반에 든 고승들의 부도밭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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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산등성이 도처에 드러눕거나 삐죽이 솟아 있는 백정 같은 돌부처들이며, 바위그늘 아래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졸고 있는 듯한 아기부처들이며, 길가 아무데나 퍼질러 앉아 힘없이 허공을 내젖는 늙은 돌부처들이며, 비탈진 골짜기에 비탈만큼 기울어져 있으나 되레 땅이 기운 듯한 표정의 죄수들 같은 돌부처들이며, 심지어 머리에 여성의 성기가 새겨져 있는 목잘린 돌부처 등이 마치 저잣거리의 온갖 시정잡배들을 끌어다 조직한 봉기군이나 되는 양 수시로 돌출해 지나가는 사람을 놀라게 한다.
게다가 모두 한결같이 좌우대칭도 맞지 않을뿐더러 뭉개지고 깨지고 비틀어진 이목구비들이 도무지 어느 한 곳을 뜯어보아도 부처의 위엄이라곤 찾아 볼 데가 없다. 대웅전 뒤의 제법 반듯한 마애불과 석탑 몇 개를 제외하면 서 있는 것들은 모두 불안하기 짝이 없고 그 거처 또한 피난살이처럼 발 닿을 데 없이 무질서해 보인다. 부평초처럼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땅속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운주사는 모든 것들이 신비의 베일에 가려 있다.
도선국사의 운주사 창건설과 그 연대도 시원한 대답을 들을 만큼 분명치 않다. 산 정수리에 나란히 누워 있는 와불이 미완성인 점도 그렇다. 운주사 라는 절 이름도 한글 표기는 ‘운주사’ 하나지만 한자 표기로는 네댓 가지(雲柱寺, 雲住寺, 運舟寺, 運柱寺…….)이상이나 된다.
* 雲 구름 운, 運 돌 운, 돌리다, 운반하다. 住 살 주, 柱 기둥 주, 舟 배 주
아직 풀리지 않은 탑의 여러 문양도 그렇고, 누가 왜 이곳에 천불천탑을 쌓으려 했는지도 알 수 없다. 운주사가 불교사원이 아니라 도교사원이나 밀교 사원이라는 주장, 또 천민과 노비들의 미륵공동체나 해방지구, 민간신앙 기복처, 역모의 땅, 비보사찰이라는 등등의 주장들이 다 제 나름대로 참신한 발상들이 아닐 수 없다.
또 최근에는 고려 삼별초군의 항쟁에 대비한 원나라 ‘몽골족의 군사기지’라는 전혀 뜻밖의 ‘외국인 조성론’까지 나왔다. 실제로 다른 사찰의 탑들과 서로 비교해보더라도 거기 탑들은 세련된 조형미를 갖춘 우아하고 귀족적인 것이라면 운주사 것들은 대부분 자연석으로 된 머슴부처나 거지탑, 동냥치탑 등과 같이 천민적인 탑들뿐이다. 게다가 모두 미완의 탑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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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계곡에 천불천탑을 쌓으려다 새벽닭이 울어 공사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도선국사의 설화에 나오는 대목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운주사는 미완의 도량이요, 아직은 불가사의한 ‘정신유적’이다.
운주사가 세간에 널리 알려진 것은 아마도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이 나온 1980년대 중반부터가 아닌가 싶다. 관군에 참패한 장길산이 노비들과 승주 땅으로 숨어들어 새 세상을 꿈꾸며 천불천탑을 세우려다 실패하는 장면이 소설 4부 ‘역모’부분에 나온다. 그 역모를 꾀하던 미륵의 땅이 바로 여기 운주사다. 운주사를 만남으로써 장길산은 비록 죽었어도 그가 만든 배 만큼은 지금도 세상을 저어갈 수 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운주사 계곡의 허공에 고귀한 슬픔인 듯 맑은 보름달이 둥실 떠 있다. 그 보름달은 이 산야에 떠도는 외로운 영혼들의 투명한 눈물이다. 그 눈물 위로 천불천탑이 비친다. 승려들의 가장 높은 깨달음의 경지인 십우도의 마지막 수행단계는 저잣거리로 내려가 그들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 하나 된 저잣거리를 ‘누군가가’ 이 운주사로 옮겨 재현해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절에 오가는 모든 사람 하나하나가 바로 이 미완의 설익은 풋감 같은 느낌이 자꾸 든다.
운주사의 돌부처들은 대부분 코가 크다. 그러나 또 대부분 흉하게 콧대가 떨어져 나갔거나 코끝이 깨져 있다. 이 돌부처들의 코를 갈아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 탓인지 너도나도 떼어간 모양이다. 아들 낳아 대를 이으려는 그 절박한 심정이야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장대한 코만 보고도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았다는 어느 삼대독자 며느리의 ‘최신버전’도 나와 있으니, 많은 참고가 되었으면 싶다.
■ 피었으므로 진다 - 선운사
선운사란 절은 왠지 갈 때마다 다른 절과는 다르게 마치 감자 삶아 소풍가듯 언제나 부담이 없어 좋다. 아마도 절에 대한 이미지가 “동백꽃은 아직일러 피지 안 했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것만” 남아 있는 미당 서정주의 시나 “바림불어 설운 날”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을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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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 송창식의 노래로 이웃집처럼 친숙해진 탓일 것이다. 물론 그만큼의 선입견을 준 것도 사실이다. 마치 선운사는 동백꽃 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동백꽃을 보기 위해서라면 다른 절이 아니라 ‘고창 선운사’로 간다. 중요한 건 그것이다.
한겨울에 이어 4월 중순에 다시 찾은 선운사의 봄은 그야말로 바닥도 허공도 붉은 동백꽃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다. 대웅전과 영산전 뒤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3천 그루의 동백들이 봄바람이 한 번씩 흔들고 갈 때마다 여기 저기 투두둑 투두둑 둔탁한 소리를 내며 꽃송이째 떨어진다.
그런데 그 동백꽃이 왠지 다르게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벚꽃은 떨어지는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 꽃이고 동백꽃은 이미 떨어진 것이 더 아름다운 꽃이다. 떨어진 꽃들은 떨어진 채 저 홀로 아름답다. 벚꽃이 허공에서 바닥까지 천천히 떨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꽃이라면 동백꽃은 그 과정을 보여주지 않는 꽃이다. 허공에 피어 있거나 바닥에 떨어져 있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수령이 500~600년쯤 되는 선운사의 동백나무는 모두 3천여 그루인데 5천 평에 골고루 심어져 있다. 선운사에 동백꽃이 많은 까닭을 원공스님이 설명한다.
“옛날에 산불이 자주 일어나 절 전체가 여러 차례 소실될 위기를 맞곤 했어요. 실제로 저 만세루 같은 경우는 타고 남은 목재로 지은 것이지요. 그래서 산불이 일어나도 사찰까지 옮겨 붙지 못하도록 묘안을 짜내기를 거듭하던 중 마침내 동백나무숲이라는 결론에 이른 것입니다. 동백나무는 불이 잘 붙지 않기 때문에 방화림으로 최적격일 뿐만 아니라 미학적으로도 아주 훌륭합니다.”
동백기름을 짜내는 동백나무에 불이 잘 붙지 않는다는 것은 처음 듣는 얘기다. 산불이 아니더라도 동백나무는 이미 붉은 꽃들로 충분히 불타고 있으니, 스님 얘기에 덧붙이자면 꽃불로써 열불을 다스리고 있는 셈이다. 문득 경복궁 근정전의 ‘드무’라는 작은 물통이 떠올랐다. 화재를 진화하는 소화기 같은 것이다. 근정전의 크기에 비해 턱없이 작은 이 드무가 도대체 어떻게 화재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인지, 그걸 보면 누구든 실소를 금치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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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그 드무의 실상을 알고 나면 조상들의 재미있는 발상에 또 한번 실소를 금치 못한다. 화재를 일으키는 불귀신이 근정전에 와 불을 놓으려다 드무 속의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놀라 달아난다는 것이다. 자기가 봐도 자기 얼굴이 너무 흉악하게 생겨먹었던 탓이다.
선운사 경내를 둘러본 다음 도솔암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도솔암은 관악산 삼막사 그리고 최북단의 심원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지장보살’이 있는 절이다.
선운사에서 3킬로미터쯤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니, 깎아지른 것 같은 천마봉 절벽이 보이는 가파른 곳에 암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암자 옆의 거대한 암벽에는 마애불이 새겨져 있는데, 그 가슴 한가운데에 사각형으로 땜질한 흔적이 선명하게 보인다. 여기는 동학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전봉준을 비롯한 손화중, 김개남 등의 우두머리들이 동학교도들 앞에서 혈서를 쓰며 맹약한 곳이 바로 이 마애불 앞이다. 그리고 그 맹약문은 저 절벽 같은 마애불의 가슴 한가운데를 깊게 파서 그 안에다 비밀리에 숨겨 놓았다.
하지만 그 비밀문서는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동학도들의 비원만이 서려 있다. 더구나 관군에게 쫓기고 쫓기던 동학군들이 마침내 이 도솔천 계곡에서 옥쇄를 했다하니 저 108계단 위에 있는 내원궁의 지장보살이 성불을 포기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이제 선운사에서 붉은 동백꽃이 상징처럼 된 이유가 어렴풋이나마 드러나는 듯하다. 그것들 가운데 역시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동백꽃처럼 떨어진 동학군들의 비장한 최후가 아닌가 싶다. 동백꽃은 다만 피었으므로 진다.
■ 섬진강에서 화엄사 종소리를 들어 보았는가 - 화엄사
천지간에 꽃입니다. / 눈 가고 마음 가고 / 발길 닿는 곳마다 꽃입니다. //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 지금 꽃이 피고 못 견디겠어요. //
눈을 감습니다. / 아, 눈 감은 데까지 따라오며 / 꽃은 핍니다. //
피할 수 없는 이 화사한 아픔, / 잡히지 않는 이 아련한 그리움 /
참을 수 없이 떨리는 / 이 까닭 없는 분노 //
아아, 생살이 떨어지는 / 이 뜨거운 꽃잎들.
-김용택 <이 꽃잎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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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따뜻한 봄날에 섬진강 주변으로 여행을 떠났다. 돌아와 글이라도 쓸 때면 누구나 먼저 김용택 시인의 시부터 인용하게 된다. 김용택 시인은 이미 섬진강의 주인이나 마찬가지여서 남의 동네가면 촌장한테 인사하듯 시 인용으로 그것을 대신하는 지도 모른다.
어느 화사한 봄날, 나는 문득 배고픈 아이처럼 허겁지겁 배낭을 꾸렸다.
나는 지나는 길에 전주 모악산 자락에 들러 안도현 시인과 만개한 벚꽃나무 그늘에 앉아 점심 겸 대포 한잔을 했다.
고교시절부터 친구인 안도현 시인과는 당시 전국 고교 문단에서 쌍방이 인정한 유일한 라이벌이기도 했는데, 그나마 서로 한 학년 차이로 인해 상장을 아슬아슬하게 분배할 수 있었던 것이 비교적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한번은 재미 삼아 서로의 수상경력을 종합해 보니, 전국 주요 대회의 90퍼센트가 넘어서 그의 표현대로 거의 ‘평정’이었다. 내가 10년간 절필하고 있을 무렵, 이따금 한밤에 술 취한 목소리로 “형, 언제까지 안 쓸 거야. 빨리 시좀 써! 형이 써야 고등학교 때처럼 우리 둘이 이 좆같은 문단을 평정하지!” 라며 다그쳤던 그가, 난 늘 고맙고 그립다.
안도현 시인과 헤어진 나는 불콰해진 얼굴로 곧장 임실의 마암분교로 갔다. 그곳에는 자기가 가르치는 아이들보다도 더 아이 같은 선생님이 한 분 있다. 바로 김용택 시인이다. 그는 네댓 명의 아이들과 운동장에서 흙먼지를 날리며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숲속의 도토리 열매나 강가의 조약돌 같은 인상의 그를 만나면 동심으로 돌아간 듯 나도 모르게 마음이 맑아진다.
“산하, 혈색 좋은 거 보니 한잔하고 왔구나? 도현이 만났어?”
“예, 오는 길에 만나 점심 먹다가…….”
술이라고 입에 대지도 못하는 사람이 술 마신 건 귀신같이 알아맞힌다.
강 가장자리에 그림자가 지고 은어들도 잦아들기 시작할 무렵, 나는 배낭을 챙겨 일어났다. 용택이 형이 먹다가 남은 감자를 배낭 속에 넣어 주었다. 하얀 벚꽃을 밟으며 자박자박 운동장을 걸어 나오는데, 문득 내가 다녔던 영일의 상옥초등학교가 떠올랐다. 졸업 이후 30여 년의 그리움이 쌓이도록 한 번도 찾지 못한 ‘시골 초등학교’지만,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 초등학교 운동장 같은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는 마음에는 늘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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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깊은 골짜기와 백운산 자락을 천천히 흐르는 섬진강은 “첫날밤 새색시의 풀어진 치마끈 같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수줍고도 아련하다. 이미 꽃이 떨어진 산수유, 매화 바로 옆에서 이제 활짝 피는 벚꽃, 배꽃이 강변을 자욱하게 덮고 푸른 보리들이 싱싱하게 자라는 들녘엔 오이 비닐하우스들로 하얀 물결을 이루고 있다. 화사한 벚꽃에 가려 이름조차 희미해져 가는 배꽃은 그 간결함이나 단아함이 벚꽃과 복사꽃의 맨얼굴처럼 보인다. 맨 얼굴에서 흐르는 땀방울은 흐를수록 더욱 투명하다.
화엄사 들어가는 길은 입구에서부터 상춘객들로 방 디딜 틈이 없다. 새들이 지저귀는 계곡은 연한 초록색 나뭇잎들이 봄 햇살을 받아 속살까지 투명하게 보여준다. 나뭇잎의 무늬와 빛깔은 이 무렵이 가장 좋다. 서너 살 된 아이의 가느다란 핏줄이나 아기 새의 깃털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럽기도 하지만, 이때가 수액이 가장 많고 힘차게 흐른다. 얇은 벚나무 껍질에 귀를 바짝 대고 한동안 모든 세상을 잊어보라. 그러면 분명 ‘쿠르르 쿨쿨……똑-또-옥……’하고 나무속으로 수액 올라가는 소리가 웅장하게 들릴 것이다. 그것은 미꾸라지들이 나이아가라 폭포를 거꾸로 타고 오르는 것 못지않게 경이로운 일이다. 만일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당신은 아직 세상을 다 잊지 못한 것이다.
‘화엄(華嚴)’이란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꽃들과 더불어 온갖 이름 없는 꽃들의 장엄을 가리킨다. 그것이 가리키는 화엄세계는 선재동자의 구도행이 보여주듯 출렁이는 강을 따라 잔잔한 바다로 나아가는 수평의 세계다. 그 수평에서 아름다운 꽃들이 수직으로 피어난다. 꽃들의 수직이 아니라 수직으로 상승한 수평이 꽃들을 피우는 것이다. 그래서 꽃이 아름다운 것이다.
신라 화엄사상의 근본 도량인 화엄사는 진흥왕 때 인도 승려 연기조사가 창건하고 조선 불교계의 승병 총수였던 벽암대사가 중창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화엄종의 1대 종주는 의상대사이고 그 원조 사찰은 영주부석사다.
화엄사의 대웅전은 그 건물 배치와 위상이 다소 특이하다. 대웅전은 중심 불전이라 어느 사찰이나 그 규모가 가장 큰데 비하여 화엄사는 각황전이 오히려 더 큰 것이다. 각황전 바로 뒤에는 뚜렷한 봉우리가 솟아 있으나 대웅전 뒤에는 트인 계곡이 있다. 각황전은 2층이나 대웅전은 단층이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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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나 각황전은 마당 한쪽 모서리에 있는 데 비해 대웅전은 마당의 정면에
있다. 규모로 보면 각황전이 중심인 듯하고, 위치로 보면 대웅전이 중심인
듯하다.
어쨌든 뭔가 여러 사연이 있을 듯해 마침 경내를 산책하고 있는 한 노스님에게 설명을 들어보았다.
“화엄사는 원래 대웅전이 없었고 옛 이름이 장륙전인 저 각황전만 있었는데, 고려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이 사찰에도 큰 변화가 온 게지. 말하자면 화엄종에 모시는 비로자나불의 대적광전이 아니라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대웅전이 세워지고 그 앞에 동탑도 하나 새로 생기는 등의 일대 변화 말일세.”
“고려가 들어서기 전에 이 화엄사는 후백제의 사상적 지주 역할을 하며 견훤왕의 절대적인 후원으로 세를 넓혀왔네. 그러니 후일 비록 견훤 왕조가 몰락했다고는 하나 오랫동안 서로 피를 뿌렸던 적국의 사상적 거처를 새로운 왕건 정권이 그대로 두었을 리 없지 않겠는가.”
“그래도 각황전을 없애지 않고 대웅전을 작게 지어 한 절에 두 개의 중심을 지금까지 물려준 것은 바로 화엄의 빛이 아닌가. 허나, 다 부질없는 짓이야. 다 잊어버리고 저 고운 꽃이나 실컷 보고 가시게나.”
임진왜란 다음 해에 왜군이 쳐들어와 화엄사를 잿더미로 만들고 승려들까지 학살한 다음 저 범종을 탈취해가려 한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싣고 가던 배가 섬진강에서도 가장 깊다는 곰소에 빠져버려 강나루를 건너지 못했다.
그 뒤로 강물에 빠진 종의 용두만 보인다고 해서 용두리라고 불리는 그곳은 맑은 날에는 용두가 보이고 흐린 날에는 종이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 종소리가 너무 애절하여 섬진강 물고기와 풀잎마저도 따라 흐느꼈다 하니, 섬진강에서자라고 죽은 사람들의 가슴은 어떠했을 것인가.
봄에 별 이유 없이 자꾸 몸이 마르는 슬픔을 ‘춘수(春瘦)’라 한다. 이 좋은 봄날에 벚꽃이 화끈하게 피고 화끈하게 지던 지리산 화엄사를 다녀온 이후, 난 그 춘수를 지독하게 앓고 있다.
■ 바다처럼 출렁이다 산처럼 무너지다 - 보리암
보리암이 깃든 남해 금산은 붉은 보리수 열매 같은 암자 몇 개를 입에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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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바다를 바라보며 합장하고 있는 형국이다. 상사바위에서 둘러보면 멀리 아이들이 여기저기 흘려놓은 밥알 같은 섬들 사이로 고깃배들이 떠다니고, 해변 마을에서부터 산기슭까지 굽은 길들을 따라 널려 있는 푸른 마늘밭이 이른 봄볕을 받아 더욱 싱그럽다. 나비처럼 생긴 남해 주위로 아득히 펼쳐지는 금오도와 돌산도 너머 지리산 영봉의 하늘 금까지 보일 듯 말 듯하다.
원효대사가 신라 문무왕 때 지었다는 금산의 보리암은 원래 이름이 보광사였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100여 미터 떨어진 큰 바위 밑에서 100일 기도를 한 다음 세상을 얻자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당시에 그런 넓은 비단이 있을 턱이 있겠는가. 그래서 비단 대신 이름으로 산을 덮어 금산이라 했으며 이름도 왕실의 원당으로 삼기 위해 현종이 나중에 보리암으로 바꾸었다.
뒤로는 병풍 같은 산이 엄호를 하고 있고 앞으로는 다도해가 연잎처럼 펼쳐져 있어 천년이란 장구한 세월을 변함없이 지켜온 기도도량으로서의 무게가 산 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아 보인다. 비록 크기는 작으나 위엄이 서린 3층석탑과 바다를 바라보면서도 바다보다도 더 큰 물방울 같은 해수관음상이 흐트러지는 불심의 중심이 되어주고 있다.
해수관음상 바로 앞 3층석탑 주위에 한 젊은 스님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어 가까이 다가갔다. 스님과 몇몇이 나침반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신라 김수로왕의 왕비 허태후가 인도에서 갖고 온 파사석이란 돌로 세운 이 3층석탑은 이상하게도 나침반을 불구로 만들어버리는 재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모리암을 찾는 사람들 가운데는 간혹 나침반을 들고 와서 실험을 하는데 이들도 그랬다. 탑에 올려놓아 보기도 하고 바닥에 내려놓아 보기도 하고 또 공중에 약간 띄워놓아 보기도하지만, 희한하게 정말 나침반이 제 구실을 못 하는 것이다.
망망대해에서 표류하거나 사막과 깊은 정글 같은 데 고립되었을 때 어렴풋이나마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게 해주는 것이 나침반이다. 그러나 나침반은 방향을 찾아주는 것이지 길까지 찾아주는 것은 아니다. 선의 나침반은 화두의 길을 찾기 위해 수행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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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나라 3대 관음 성지에 있는 탑 하나가 그 나침반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여기는 유명한 기도도량이다. 그래서 기도가 문명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보면 간단하고 속편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다른 기도터도 있다는 게 문제로 남는다. 어쨌든 호사가나 풍수학자들의 연구대상으로 입방아에 오르내린지도 오래되었건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답이 없다.
그 나침반이 탑의 불가사의를 떠나 이 보리암에 와서 한순간에 아무 쓸모도 없는 폐품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나의 보리암 여행은 충분히 값진 것이었다.
한 세계의 무너짐은 다른 세계의 무너짐을 견인할 수도 있고 견제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무너진 다음의 일이다. 바닥을 다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그 허허로운 지점 말이다.
이른 봄날, 나침반의 바늘로 기둥을 세운 듯한 남해의 보리암에 와서 나는 바다처럼 출렁이다 산처럼 무너져가고 있었다.
■ 살아 있는 부처의 눈 - 보문사
배를 타고 강화도 보문사로 가는데 또 인디언 이야기가 불쑥 떠오른다. 어느 곳으로 가든 무엇을 보든 요즘의 내 버릇이다. 인디언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풀들은 ‘키 작은 형제’, 나무들은 ‘키 큰 형제’라 부르며, 잎이나 줄기에 귀를 대고 풀과 나무들의 속삭임을 듣는 훈련을 받는다. 먼저 귀 기울이지 않으면 세상과 자연의 어떠한 소리도 들을 수 없다는 어른들의 철저한 교육 때문이다. 이 아이들이 자라면 나중에 풀과 나무들을 어루만지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수액이 올라가는 소리만 듣고도 그들의 건강과 심리상태를 느끼고 알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또 최소한의 삶을 위해 사냥을 할 때도 사냥 가기 전에 먼저 반드시 동물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먹기 전에도 꼭 기도한다.
“우리 작은 형제들이여, 너희들을 죽여야만 해서 미안하구나 지금 우리 아이들이 배가 고파 울고 있단다. 부기 용서해 다오. 잘가거라. 우리 작은 형제들이여.”
인디언 들은 고기는 먹되 영혼은 먹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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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처럼 생존에 꼭 필요한 만큼만 고기를 취한다. 자연이 잠시 빌려준 생명이므로 다시 자연에 반납할 때까지 자연의 일부만 취해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다. 인디언은 동물로부터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를 배우고 동물은 인디언으로부터 ‘공수래 공수거(空壽來空壽去)’를 배운다. 그래서 그들에겐 소유란 개념이 없다. 다만 점유란 개념으로 자연과 더불어 자연을 지킨다. 종족 보존도 세를 불려 권력을 소유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연을 효율적으로 지켜 생명과 교감하고 극대화하기 위한 본능에 불과하다.
“믿을 수 있는 말은 아름답지 못하고 아름다운 말은 믿을 것이 못 된다”라는 노자의 잠언은 인디언 아이들에게는 어릴 적 어머니의 품에서 들었던 자장가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아기가 태어나면 가장 먼저 이름부터 짓듯, 보이는 모든 사물에 대해 이름짓는 것을 부족의 큰 의식으로 생각한다. 그 이름들을 보면 사람을 자연에 비유하고 자연은 사람에게 비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가슴 치고 울음 뚝 그쳐’ ‘하늘 지키는 독수리’ ‘바위 위에 엎드려’ ‘어머니를 부르는 바람소리’ ‘두 주먹 불끈 쥐고 일어나’ ‘산 위에는 구름이’ ‘뒹굴다가 벌떡 솟아나’ ‘바람이 흔드는 숲’ ‘울면서 크게 노래해’ ‘잔잔한 강물 속에는’ ‘흰 눈썹 펄펄 날려’ ‘얼음 밑으로 달리는 고기처럼’ ‘무릎 꿇고 두 손 높이 들어’ ‘날아가는 화살에서 뛰어 내려’ ‘두 번째 붉은 태양 같이’ ‘발목잡고 힘차게 뛰어’ ‘소나기 타고 높이 올라가’ ‘벼랑에 핀 꽃처럼 가슴 졸이며’ ‘자꾸 그림자가 따라와’ ‘따라 오는 그림자를 어쩔 수 없어…….
기억나는 대로 뽑아본 것들인데 마지막 ‘그림자’가 들어가는 이름 두 개는 아마도 형제들의 이름이 아닌가 싶다.
석모도 선착장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보문사로 가는 길은 떠나는 겨울과 오는 봄이 겹쳐지는 풍광이어서 눈 속의 꽃을 볼 때처럼 마음의 그늘부터먼저 뜨거워져 온다.
보문사 입구의 주차장은 밴댕이 젓갈이 가득 쌓인 좌판들과 절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시음용이니 일단 맛이라도 좀 보라며 권하는 강화 인삼막걸리 장사 아주머니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방앗간 그냥 지나치는 참새 없듯이 몇 군데 기웃거리며 넙죽넙죽 받아먹은 인삼 막걸리는 그 걸쭉하면서도 달짝 지근한 맛이 혀를 착착 감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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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서 일주문을 거쳐 절마당까지 가는 길은 숨 고를 곳도 없는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금강산에서 내려온 회정스님이 창건했다는 낙가산 중턱의 보문사는 비록 규모는 크지 않지만, 매년 50만 명이나 찾는 천년고찰이다. 동해 낙산사의 홍련암, 남해 금산의 보리암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3대 기도터인 이 세 절은 모두 바닷가에 있다. 절은 바다를 내려다보며 바다의 일부가 되어 있고, 바다 또한 절을 올려다보며 절의 일부가 되어 있다. 그 절과 바다 사이에 사람이 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또 부처가 있다. 사람들 눈에는 절에 있는 부처만 보이고 사람들 사이에 있는 부처는 보이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절에 있는 박제된 부처만 보려 하고 사람들 사이의 꿈틀거리는 부처는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부처의 눈을 버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부처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앞에는 600년을 산 향나무가 서 있고 안에는 ‘22나한전’이 조성되어 있는 거대한 바위의 천연석굴은 그 경건한 분위기가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 석굴 법당의 나한전은 아주 먼 옛날 바다에 나간 어부의 그물에 물고기 대신 22개의 돌이 걸려 올라왔는데, 그것을 정성껏 모셨더니 나한상으로 변했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또 어느 날 이 절에 든 도둑이 보물을 훔쳐 밤새도록 도망을 쳤는데 결국 아침까지 석굴 근처만 뱅뱅 돌고 있더라는 전설도 있다.
석굴을 나와 마애불이 새겨진 눈썹바위까지 400여 개의 계단을 오르는데 절반도 가기 전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제 막걸리가 다리까지 흘러내려 갔는지. 석굴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숭고한 부처님을 접견하러 가갰다는데도 자꾸 무릎을 망치로 치는 것 같다. 낮술의 위력이 부처의 위력에 딴죽을 거는 모양이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염불소리가 우렁찬 눈썹바위까지 올라가 뒤돌아섰는데, 한마디로 가슴이 탁 트이는 풍광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것이었다.
일찍이 강화팔경으로 유명한 절경이 내 시야 가득히 찰랑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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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이 새겨진 눈썹바위 아래에는 수십 명의 참배객들이 절을 하고 있다.
이 마애불은 1920년대 말 보문사 배선주 주지님과 금강산 표훈사의 이화응 스님이 위험을 무릅쓰고 몇 년에 걸쳐 피땀 흘려 깍은 아주 귀중한 관음보살이다. 불상이 앉은 곳은 멀리서보면 관음보살의 눈동자에 해당하는 곳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관음보살의 눈썹 아래 또 하나의 작은 관음보살이 들어서 있는 셈이다.
돌아오면서 그 유명한 서해 낙조를 만났다.
갯벌과 염전 지대를 거쳐 수평 선 끝까지 길게 드리운 노을자락이 서럽도록 찬란하지만 그러나 슬프다. 천천히 지친 석양을 저으며 둥지로 돌아가는 갈매기들은 더욱 슬프다.
이제 붉은 해는 서해 낙조라 불리는 모든 삶의 후광들을 다 거둬들이고 어부의 제사상에 오른 감홍시처럼 바다 끝에 얌전히 앉아 있다. 빛도 그림자도 없이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옆에 나도 같이 앉아 있고 싶다. 얌전하게.
■ 저녁 산사에서, 묵념 - 낙산사
“무명초가 무성하길 몇 십 년인고?”
“마치 마른풀을 태우듯 남김없이 하옵소서.”
이것은 스님이 되려는 지원생이 처음 머리를 삭발하는 ‘득도식’을 가질 때 자기 머리를 깎아줄 ‘집도승’ 스님과 나누는 ‘짧은 화두 같은 대화다 절과 스님에 따라 질문의 취향이 조금씩 다른데, 양산 통도사의 조실이었던 구하스님 같은 경우는 어린 지망생일수록 향수를 자극하는 질문을 해 여린 가슴을 흔들어 놓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뉴월 절에서 뻐꾸기 우는 소리 듣고……고향생각 부모 생각이 나면 어이할 것인고?”
하필이면 뻐꾸기, 둥지도 없고, 알도 다른 새 둥지에 낳고, 테어날 때부터 어미와 따로 떨어져 사는 새, 그러나 뻐꾸기란 새는 이미 태생적으로 울음소리가 구슬프다. 설사 이런 사연을 모른다 하더라도 비구니를 지망하는 어린 처녀가 그동안 곱게 가꿔온 머리를 싹둑싹둑 깎으며 위의 구하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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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겉으로야 “뻐꾸기 우는 소리가 멈출 때까지 부처님께 일백배 일천배 하겠나이다”하고 미리 준비된 답을 내놓겠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삼키고 또 삼킬 것인가.
지리산 섬진강의 댓잎에 마음을 베이고 와 그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동해 낙산사 홍련암으로 떠났다. 고은 시인이 “동해 낙산사!”라고 특별히 느낌표를 찍어 감탄해야만 제멋이 드러난다는 그 낙산사와 바닷가 절벽에 또 하나의 절벽을 포갠 것 같은 홍련암. 이번 여행은 혼자가 아니라 늘 배꽃처럼 단아한 시인과 함께였다. 대학 동문 작가 모임이 있어 동해를 하루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선후배 작가들은 이미 바다와 술에 취해 있었다.
홍련암 가는 길에 먼저 의상대사가 좌선하고 시인 한용운 스님이 세웠다는 의상대에 올라 끝없이 펼쳐진 푸른 동해바다를 바라보면, 마치 뇌수와 내장이 다 빨려 나가는 것 같다. 도무지 내가 간섭하거나 참견할 틈을 주지 않는 바다다.
600여 년 동안 일출의 장엄함을 지켜왔을 아름드리 ‘관음송’ 소나무 밑동에 한 여자의 이름이 커다랗고 깊게 새겨져 있다. 아침마다 애인에게 장엄한 일출을 선사하겠다는 그 뜻은 가상하지만, 언젠가 그 애인의 얼굴에도 자기 이름을 새겨놓지 않을까 두렵다. 관음송 그 칼자국을 보고 동행한 정호승 시인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혀를 쯧쯧 차고 나는 발로 퍽퍽 찬다. 젊은 부부의 가슴에 안겨 사진을 찍던 아기의 눈이 동그래진다.
의상대 아래로는 아득한 바위 절벽이다. 그 절벽의 바위를 뚫고 나온 푸른 소나무가 푸른 허공에 손을 짚은 채 푸른 바다로 뻗어가고 있다. 위로 솟는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씨앗이다. 그리고 아래로 떨어지는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도 역시 씨앗이다. 다만 열매라는 외피에 감싸여 있을 뿐이다. 우리가 과일을 먹으면서 무의식중에 씨를 발라내는 것은 그 씨의 종족보존을 위한 것이다. 모든 씨앗 속에는 독이 들어있다. 과일을 먹은 새들이 멀리 날아갈 때쯤이면 대부분 설사를 해 자연스럽게 씨가 퍼뜨려진다. 물론 씨를 먹은 바람도 멀리 불어가다 설사를 하기는 마찬가지다.
홍련암 아래쪽은 해변을 따라 아직도 군부대의 초소와 철조망이 쳐져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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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 절에 갈 때마다 숨이 막히게 하는 목의 가시다. 돌아다보면 우리나라의 경치 좋다는 곳은 대부분 군부대가 들어서 있다. 그 수려하고 아름다운 풍광이 총과 탱크에 진압되어 있다. ‘진경산수화’가 아니라 ‘진압산수화’인 것이다. 이 철조망은 언제쯤 걷히려나. 철조망의 가시는 너무 뾰족해서 나비들도 앉지 않는다.
경봉 스님이 쓴 홍련암 편액은 그의 필체가 거의 그렇듯 서법에 얽매이지 않고 뜻을 살려 쓴 호방한 선필(禪筆)이다. 홍련암은 당나라에서 돌아온 의상대사가 신라 문무왕12년(672)에 관음 보살을 친견하고 난 다음 대나무 두 그루가 솟은 곳에 지은 화엄불전이다. 어느 날, 이곳을 참배하던 의상대사가 파랑새 한 마리를 만났다. 그 파랑새가 석굴 속으로 자취를 감추자 이상히 여긴 의상대사가 석굴 앞에서 7일 밤낮으로 기도를 했다. 마침내 7일 후 바다위에 붉은 홍련이 홀연히 솟아났고, 그 홍련 한 가운데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있었기 때문에 이 암자 이름을 홍련암이라 불렀다.
이 동해의 홍련암은 서해 강화도의 보문사. 남해 금산의 보리암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로 잘 알려져 있다.
홍련암은 법당 마룻바닥 밑을 통해 출렁이는 파도를 볼 수 있도록 바닷가 석굴 위에 지어졌다. 물론 의상스님에게 여의주 한 알을 바친 용이 불법을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각별한 배려였다. 지금도 법당 마룻바닥에 뚫어 놓은 엽서 크기만 한 구멍으로 파도를 내려다 볼 수 있다.
통도사의 금와당에서 금개구리를 보듯 홍련암의 석굴에서도 불심이 깊은 이들에게는 파랑새가 보인다는 얘기가 있다. 그래서 이 마룻바닥의 구멍에 불심을 테스트하려는 사람들이나 호기심 많은 관광객들 때문에 몸살을 앓는다.
절에는 소리가 많다. 새벽예불과 저녁예불 종소리, 죽비소리, 목탁소리, 염불소리, 풍경소리, 운고소리, 독경소리, 꽃잎 피는 소리, 그 꽃잎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큰스님의 기침소리……. 모두 큰 고요가 깃든 빛의집, 대적광전(大寂光殿)에 사는 보이지 않는 ‘소리가족’들이다. 이 소리들은 세상의 여느 소리들과 바를 바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세상의 소리로 듣지 않는다. 아니, 소리 그 자체로도 듣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소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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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의 소리는 다만, 적막의 넓이와 깊이를 나타내주는 고요의 척도일 뿐이다. 그 척도의 추가 수평을 이루는 중심에 관음이 있는 것이다.
홍련암을 벗어나 낙산사로 오르는데 거북이 들이 사는 제법 큰 연못 하나가 나왔다. 지난 어느 여름날, 새벽예불 때 친구들과 우연히 낙산사를 산책한 적이 있었는데 어미 거북이들이 아기 거북이들을 데리고 연못의 바위 위로 올라가 목탁소리와 염불소리가 들려오는 법당 쪽을 일제히 보고 있더라는, 얼마 전 한 수녀가 들려 준 바로 그 ‘관음지’였다. 수녀의 얘기가 아니더라도 그런 광경을 목격했다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걸 보면 단순히 우연의 일치만은 아닌 듯싶다. 한 번의 우연은 우연이지만 두 번의 우연은 필연이기 때문이다.
연못을 지나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서자 넓은 평지에 하늘을 찌를 것 같은 거대한 해수관음상이 나왔다. 남해 보리암의 해수관음상과 마찬가지로 바닷가 높은 산에 우뚝 솟아 있어서 그런지 마치 등대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등대는 바다를 비추고 해수관음상은 세상을 비춘다.
해수관음상에서 원통보전으로 가는 길은 좁고 호젓한 소나무 울창한 오솔길이다. 제아무리 뼈에 사무친 원수라 할지라도 이 오솔길을 나란히 걸을 때 만큼은 더 없는 형제가 될 정도로 운치가 뛰어나다.
낙산사에 와서 혼자가 되는 것은 이 길뿐이다. 동해 푸른 바다를 보고 잃어버린 나를 이 오솔길에서 다시 찾는다.
원통보전은 ‘조신의 꿈’을 통해서 애욕의 무상함을 깨우친 설화의 현장이다. 낙산사에서 수행하던 조신스님이 이 고을 태수의 딸을 사모하여 낙산 관음보살에게 인연을 맺게 해 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그 여자가 몇 해 뒤에 다른 남자와 결혼해 버리자 상심한 조신 스님이 그 원통함을 보살 앞에 호소하며 슬퍼하다 잠이 들어버렸다. 꿈속에서 스님은 그녀를 만난다. 그동안 못다한 사랑을 불태우며 아들을 다섯이나 낳아 어렵게 키우지만 차츰 거지가 되어 산야를 떠돌게 된다. 그러다 급기야 아들 하나를 굶겨 죽이는 지경까지 이르고, 결국 네 아이를 둘씩 갈라 부인과 헤어지게 되었다.
꿈에서 깨어난 조신 스님은 자신의 허망한 일생과 더불어 자기 머리가 갑자기 백발로 변해 있음을 알았다. 이광수의 <꿈>이란 소설이 여기서 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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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기도 하지만, 그 일장춘몽이라는 게 조신을 통해 한 인간의 환상이 아닌 벌거벗은 허상을 앞당겨 보여줌으로써 그가 마침내 대오각성해 처음부터 새로이 수행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원통보전 마당의 7층석탑 앞에서 밖으로 내려가는 길은 어릴 때 외할아버지 산소에 갔다 돌아오는 길처럼 아늑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아름답다.
이제 어둠이 내려 사물의 윤곽마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종무소에 들러 내가 오래전에 알았던 스님 한 분이 여기 계신다는 풍문을 듣고 찾아왔다고 하니, 이미 몇 해 전에 입적하셨다고 한다.
아마 그 당시 스님은 광이 나는 백구두를 즐겨 신었는데, 나에게는 그게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그는 내 심한 비아냥도 곧잘 받아주던 소탈한 스님이었다. 무슨 사연인지 술만 마시면 넋 나간 사람처럼 하루 종일 먼 산만 하염없이 보며 울다가 웃다가…….
하여튼 그 시절 머리가 약간 돈 것 같은 이 ‘땡초’하고 난 참 많이도 같이 돌아다녔다. 배가 출출하면 스님의 바랑에서 생쌀을 한 줌씩 꺼내 오물오물 씹는 맛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물론 스님한텐 술안주였지만. 한때 철학에 미쳐 있었다는 이 스님과 어떻게 헤어졌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한 시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낙산사에 와서 그의 부음을 들을 줄이야……. 가슴에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마음이 미어지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오늘은 여기서 묵념.
- 끝 -
2016.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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