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

보해성산 2017. 8. 2.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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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

■ 박경철, 노회찬, 이지성 외 지음

◉ 책 머리에 : 내 인생에 의미가 될 그 한권을 찾아서

시골에서 자란 나는 초등학교 때까지 교과서 말고는 책을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 대구로 유학을 가고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도서관 이라는 곳에 처음 가봤다. 학교 도서관에 있던 엄청난 책을 봤을 때의 벅찬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전까지 접하지 못한 세계, 정해진 것만 배워온 억눌림이 갑자기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그때부터 내 인생은 책과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일 누군가 내게 “지금의 당신이 있기까지 무엇으로부터 가장 많은 걸 배웠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말할 것이다.

“학교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저는 책으로부터 세상을 배웠습니다”

공자는 배움을 가리켜 “배우고 제때에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고 말했다. 모르는 것을 알아 깨우치는 즐거움은 세상 그 어떤 유희보다 다 큰 희열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무언가를 배워 익힌다는 것은 즐거움 못지않은 부작용이 있다. 날 때부터 갖고 태어난 사고의 자유와 창의성이 배움으로 인해 일면 사장되는 까닭이다.

책 한 권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고,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다. 하지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통해 나를 가둬 두었던 금기가 깨지고, 고식적인 것에서 벗어 날 수 있으며, 내가 이르지 못한 생각에 접하고,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을 마주할 수 있다고 말이다. 참 인생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만일 “내 인생에 이 책 한 권이 가장 의미가 있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책이 없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남의 꽁무니만 따라가는 ‘누우떼’와 다를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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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에서 인생의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너무 거창하다. 또한 책 한권으로 인생의 목표를 세울 수 있다면 너무 허황하다. 하지만 책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사고의 자유를 얻고, 나아가 발붙인 현실에서 비상할 수 있다. 세상에서 단 한 가지, 독서는 금기 없는 자유로운 세상을 지키는 수문장이기 때문이다. - 시골의사 박경철 -

Part 1. Ego 진정한 나의 발견

■ 누구나 인생의 어느 시점엔 무소속으로 살아가야 한다

◉ 공병호

0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졸, 미국 라이스대학 경제학 박사

0 일본 나고야 대학교 객원 연구원,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

0 자유기업센터와 자유기업원 초대 원장

0 연간 300회 이상의 강연과 다양한 방송활동 및 경영자문

0 ‘공병호의 자기경영 아카데미’ 운영

0 대표작 : 10년 후 한국, 부자의 생각 빈자의 생각,

공병호의 자기경영 노트, 공병호의 초콜릿 등

“당신의 인생에 확신을 심어준 한 권의 책은 무엇입니까?”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찰스 핸디의 <코끼리와 벼룩>을 들고 싶다. 살다보면 누구나 이직이나 전직을 통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시기를 맞게 된다.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나는 2001년 6월부터 실업 상태가 되었다. 13년의 조직 생활을 접고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야 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과제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한창 교육비가 들어가는 아이들이 있었고 창창한 날들이 남아 있었다. 현직에서 물러나게 되면 결국 혼자가 되는 것이다. 누구나 그런 시기를 한번은 경험하게 되지만 그것이 생각보다 일찍 찾아올 경우에는 문제가 그다지 녹록하지 않다. 게다가 일해왔던 분야가 약간의 특수성이 있고 나이에 비해서 승진이 빨랐거나 직책이 높은 경우에는 적당한 자리를 찾기 힘들다.

인생 경영이라는 입장에서 지나온 세월, 앞으로 살아가야 할 세월을 돌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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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총정리를 해본 나는 스스로 삶을 일구는 지식사업가의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 그해 10월, 노트북과 팩스를 구입하고 직접 전화를 받으면서 1인 기업가의 삶을 시작했다. 서재가 곧 사무실이 되었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일을 해서 먹고 살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기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세상살이에서 확실한 것이 얼마나 있겠는가.

12월 무렵에 새로운 삶의 첫 열매를 맺었다. 나의 첫 번째 책인 <공병호의 자기경영노트>가 출간 되었고, 강연회도 꾸준히 늘어났다. 그것은 넘어진 삶을 다시 일으켜 새우는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어차피 조직에 들어가 봐야 10여년 정도인데, 그럴 바에야 인생의 황금기에 속하는 그 시기를 나 자신을 위해 투자하기로 결심했고 새로운 길을 씩씩하게 개척해 나갔다. 앞으로 이와 같은 지식 사업이 더욱 확산될 것이고, 이런 트랜드 속에서 선구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공병호 경영연구소’는 그렇게 출발했다.

그무렵 찰스 핸디의 <코끼리와 벼룩>이라는 책을 만났다.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옳다는 믿음은 있었지만 누군가 나에게 “당신의 선택은 올바른 것입니다”라고 격려해 준다면 얼마나 더 마음이 든든하겠는가. 그런 역할을 해 준 책이 바로 찰스 핸디의 책이다. 저자는 1932년 생으로 나보다 무려 28살이나 나이가 더 많다.

찰스 핸디는 49세가 되던 해에 스스로 안정적인 조직 생활을 접고 자신의 힘으로 일구는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나는 그의 책에서 인상적인 한 구절을 만났다.

“나는 자유를 얻기 위해 안정을 내팽개치고 바로 그 새롭고 무모한 모험의 세계를 선택한 것이다.”

자유, 바로 그 단어를 위해서 나 역시 모험을 무릅쓰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인생에 도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의 책에 흠뻑 빠져 들어갔다. 그는 이미 1981년 무렵에 20세기 말엽이 되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 다른 고객이나 거래처의 일감을 받아 일하는 포트폴리오 인생의 도래가 불가피하가”고 내다보았다.

막 걸음마를 뗀 지식 사업의 길에서 찰스 핸디라는 선구자를 만나 “당신은 올바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라는 격려를 들으니 큰 원군을 얻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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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몇 번이나 정독하면서 위안과 확신을 얻었는지 모른다.

신념과 확신은 행동의 전제조건이다. 특히 불확실한 길을 개척하는 사람일수록 자기 확신이 필요하다. 이런 세상이 전개 될 것이고 그런 환경 속에서 나의 선택이 옳다는 그런 확신 말이다.

나는 남이 이미 지나간 길을 걷고 싶지 않았다. 남이 이미 해 놓은 것을 따라가는 일은 너무나 따분하다. 남이 밟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가는 것, 스스로 새로운 것을 갖고 승부를 결정짓는 세계에 몸담는 것은 무척 흥분되는 일이었다.

찰스 핸디는 책에서 안정 그 자체였던 윈저성의 세인트 조지 하우스 소장

을 그만두기로 결심했을 때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할 줄 아

는 것은 글을 쓰고 강연하는 것뿐이어서 나의 앞날은 막막하고 불확실했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내가 갖고 있는 재능이 나의 미래를 열어줄 것이라

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이따금 의기소침해질 때면 찰스 핸디의 말을 떠올

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우리는 인생의 어느 시점에 도달하면 인생의 무소속

배우로서 벼룩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좋든 싫든 그게 거부할 수 없는 도도

한 추세다.“ 어차피 겪어야 할 문제라면 남보다 좀 더 일찍 매를 맞는 것이

낫다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이후 내 앞에 펼쳐진 삶은 13년의 조직 생활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완전한 자유, 완전한 책임이라는 두 가지 무게를 주는 그런 삶이었다.

자유롭게 자기 시간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 포트폴리오 생활의 큰 축복이다. 휴일의 회사 사정이나 동료들의 필요에 의해 조정했던 나에게 달력을 보며 아무 날에나 내 마음대로 약속 날짜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자신을 제어하는 일이 타인을 이끄는 일보다 훨씬 수월했다. 특히 그것을 준종교적인 차원까지 끌어올리게 되면, 삶 그 자차가 예술이 된다. 하지만 현실을 돌이켜보면 마냥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소득을 발생시키는 일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일은 큰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빠른 시간 내에 경제적인 안정을 찾은 덕분에 나의 길에 더욱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설령 내가 찰스 핸디의 책을 읽지 않았다고 해도 내 삶이 크게 달라지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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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을 것이다. 결국 자신의 삶을 이끄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다만 인생의 가장 불확실한 시기를 헤쳐 나가는 나에게 그 책이 확신과 용기를 주었다는 점에서 나는 그 작가에게 큰 빚을 진 셈이다.

언젠가 우리 모두는 조직을 떠나서 코끼리의 삶을 접고 벼룩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다만 벼룩의 삶을 살기 시작하는 시점이 다를 뿐이다.

2011년 <코끼리와 벼룩>이 출간된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요즘도 가끔 이 책을 꺼내 읽는다. 그때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아직도 저자의 혜안이 빛 바래지 않은 까닭이다. 최근에 찰스 핸디는 <포트폴리오 인생>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 역시 앞의 책의 연장선에서 이해 할 수 있다. 단 한 권의 책에 우리가 지불하는 비용은 만 원 내외다. 그 책이 한 인간의 삶에 주는 가치를 생각하면 너무나 저렴한 비용이 아닌가. 그 시절에 찰스 핸디란 작가를, 그리고 그의 작품 가운데 <코끼리와 벼룩>을 만난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 코끼리와 벼룩 (찰스 핸디 지음)

- 거대 기업인 코끼리에서 벗어나 프리랜서인 벼룩이 되라는 얘기

- 코끼리라는 기업 안에서 벼룩은 시키는 대로 사는 존재

- 이제는 그런 벼룩에서 벗어나 열정, 끈기 창의성을 가진 벼룩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이야기

■ 내가 꿈을 배반하지 않으면 꿈도 나를 배반하지 않는다

◉ 이지성

0 20세부터 작가의 꿈, 29세 까지 가능성 제로라는 냉대

0 2007년 10월 <여자라면 힐러리처럼>으로 베스트셀러작가, <꿈꾸는 다락 방>이 초대형 베스트 셀러가 됨

0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자기계발 작가

0 행복한 달인, 피노키오 상담실 이야기, 수호기사의 편지 등

0 일본, 중국, 대만 등에서 그의 책이 번역 출간

대학교 1학년까지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집, 교회, 학교 밖에 몰랐고 어디를 가든 환영 받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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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면 내 가슴속에는 장미가 천 송이는 피어 있었다. 나는 행복이라는 이름의 장미꽃 향기에 취해서 등교했고, 만나는 사람마다 내 가슴속의 장미를 한 송이씩 꺾어서 선물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행복이 뭔지 몰랐던 것 같다.

열아홉 살의 3월, 그러니까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내 인생에 한 손님이 찾아왔다. 그는 자신을 '바람(hope)'이라고 소개했다. 그러고는 ‘바람(wind)’처럼 떠나갔다.

그로부터 1년 뒤인 어느 봄날 나는 1년 전의 그 손님을 초대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옳았다. 나는 행복하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난 진짜 나 자신이 되고 싶다. 현실이 아니라 꿈을 꾸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가 신중한 얼굴로 말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꿈에 미친 사람과 현실에 미친 사람, 당신 주변에는 후자들만 있다. 당연히 그들은 당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마침내는 당신을 미친 인간 취급을 할 것이다. 그것을 감수할 수 있겠는가?”

“그건 상관하지 말아라.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알았다. 비결을 알려주겠다. 첫째, 바람을 꿈으로 변화시켜라. 둘째, 매일 매 순간 앞으로 나아가라. 절대로 멈추지 마라. 그러면 당신은 언제나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꿈이 현실이 되는 기적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어서 덧붙였다.

“이제 나의 진짜 이름을 알려주겠다. 나는 '꿈(dream)' 이다”

바람(hope)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바람을 꿈으로 전환시킨 나에게 좋은 일이라고는 하나도 생기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따돌림 당했고, 집에서는 불효자식이 되었다. 나는 꿈에 취해 미친듯이 책을 읽고 죽어라고 글을 썼지만, 그 모든 게 사람들의 눈에는 황당하고 어이없게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하긴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글짓기 대회 한 번 나가본 적이 없고, 읽었던 책이라야 고작 드래곤볼 같은 만화책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점점 말을 하지 않았고, 사람들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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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렇게 5년의 세월이 흘렀고, 늦은 나이에

입대해서 이등병이 되었다. 나는 군대에서도 책을 읽고 글을 썼고, 출판사에

투고했다. 그러나 내게 돌아온 것은 거절 통보 뿐이었다.

제대를 하고 보름 만에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다시 본격적인 작가 지망생의 삶이 시작되었다.

오직 책과 글뿐이었다. 학교에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기고 있던 상황이라서

잠을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몇 년간은 하루에 고작 4시간만 자야했다.

작가의 꿈을 정하고, 그 길을 걸은 지 11년째 되던 어느 여름날 나는 80번째 출판사로부터 “죄송하지만 출판하기 어렵겠다. 미안하다.”라는 말을 들었다. 80번째 출판사에 전화를 걸면서 나도 모르게 ‘이번에도 안 되면 살아 있을 이유가 없다. 뛰어내리고 말겠다!’ 라는 무서운 생각을 했다.

어떻게 집까지 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나를 반겨줄이 하나 없는 삭막한 자취집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졌다. 그러고는 죽은 듯 잠들었다.

새뮤얼 스마일즈(1812~1904)는 뇌졸중을 이긴 작가다. 1871년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의 반쪽을 쓰지 못하게 됐고 읽고 쓰는 능력을 상실했다. 그 결과 읽기와 쓰기를 다시 배워야 했다.

스마일즈는 자기개발의 작가답게 그 모든 시련을 이기고 다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고, <검약론>, <의무론>등의 저작을 발표하면서 불멸의 작가가 되었다. 당시 스마일즈에 필적할 만한 작가는 <자유론>을 쓴 존 스튜어트 밀과, <크리스마스 캐럴>을 쓴 천재 소설가 찰스 디킨스 그리고 <종의 기원>을 쓴 찰스 다윈 정도였다.

스마일즈는 본래 의사였다. 그는 20세에 에든버러 의대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의사의 길을 걸었다. 의사 스마일즈의 관심은 언제나 하층민에게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청년 의사 스마일즈의 머릿속은 이 질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무료 진료 활동을 열심히 했다. 허나 육체가 변한다고 해도 삶은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는 교훈만 얻었다.

스마일즈의 관심은 정치로 옮겨졌다. 정치가 변하면 사람들의 삶도 변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의사라는 안정된 직업을 버리고 정치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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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 선거구제, 비밀투표제, 세대주 투표권 보장, 소유재산 과다에 의한 하원의원 피선거권 제한 철폐 등을 주장하는 리즈 의회 개혁 연합의 사무총장 등으로 일하는 등 나름대로 성공한 정치가가 되었으나 약 10년 만에 환멸을 느끼고 정치계를 떠났다. 정치가 변한다고 사람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의사와 정치가의 길을 버린 스마일즈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은 자기계발서 작가였다.

그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의술도, 정치도 아니다 오직 ‘자조(self-help)' 정신이다.", "자조의 정신이 개인을 정당한 방법으로 성공하게 만들고 이는 곧 사회의 개혁으로 연결된다”라고 외치면서 남은 평생을 자기계발 서적을 쓰면서 살았다.

셀 수 없이 많은 자기계발 서적을 읽으면서 나는 ‘생생하게(vivid) 꿈꾸면(dream) 이루어진다(realization)’는 R=VD 공식의 힘을 알게 됐고, 이 공식을 열심히 실천했다.

새뮤얼 스마일즈의 <자조론>을 읽고서 생생하게 꿈꾼다는 말의 이미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80번, 아니 800번의 거절을 당하더라도 웃는 얼굴로 다시 일어나서 어제보다 더 힘차게 더 뜨겁게 미래를 향해 달리는 사람 그게 바로 꿈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나에게 꿈을 이루는 구체적인 행동 방법을 가르쳐 준 책은 새뮤얼 스마일즈의 <자조론>이다.

■ 승자가 아니라고 모든 것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 권기태

0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람

0 서울대 사회학과 재학중에 쓴 단편<입대>로 1988년 ‘대학문학상’수상

0 2006년 첫 장편 <파라다이스 가든>으로 ‘오늘의 작가상“수상

0 1992~2006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2003 이라크 전쟁 때 특파원 활동

0 이라크에서 돌아와 쓴 논픽션 <일 분 후의 삶>이 베스트셀러가 됨

내가 손때 묻혀가며 읽던 잡지 가운데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있다. 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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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때는 이 잡지가 새로 나오자마자 하굣길에 사들고는 활자 하나하나 눈으로 빨아들이는 것처럼 읽었던 기억이 난다.

벌써 20년도 넘은 여러 이야기 가운데 아직도 기억에 남는 건 미국인 복엽기 조종사가 수확이 끝난 빈 벌판에 비상착륙했던 실화다. 동체를 점검해 보니 볼트 하나가 빠져 있었는데 하도 오래된 비행기라 그 부품을 구하기가 난감했다. 그런데 그 농장의 한쪽에 낡은 창고가 있었는데 거기서 나온 농부에게 사정을 이야기 했더니 “아 그거라면 창고에 있어요.”라며 가져왔다. 그 광활한 미국 대륙에서 공로를 이탈한 비행기의 비상착륙에 맞추어 그 볼트가 어찌 거기에 있을 수 있었단 말인가.

내가 일본의 논픽션 작가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 <우주로부터의 귀환>을 손에 집어든 것도 그렇게 “우주 체험 같은 걸 모아놓은 자료가 없을까” 막연하게 생각하던 무렵이었다. 그때는 내가 13년간 다니던 일간지 기자 생활을 접고, 소설과 논픽션을 쓰는 작가로 살려고 모색하던 마흔 살 나던 해 한겨울이었다.

나는 저널리스트로서 보장된 삶을 그해 초 접으면서 작가로서 첫 소설책을 펴냈다. 오랜 전통의 문학상을 타게 됐지만, 독서계에서는 뼈저린 패배를 맛봤다.

결국 나는 몇 달 지쳐 있다가 다음 책은 논픽션을 쓰기로 하고 두 가지 테마를 갖고 동시에 작업해 나가기로 했다. 그 하나가 생사의 기로에 서 보았던 생존자의 깨달음을 담은 책 (일 분 후의 삶>이다. 또 다른 책은 한국에선 처음으로 지구 궤도로 올라가는 우주인이 되기 위해 치열한 경쟁에 나선 후보들의 삶을 다룰 ‘우주인’이었다.

그해 가을 나는 <우주인>이라는 책 제목만 잡아 놓은 채 대전의 항공우주 연구원으로 갔으나 대답을 얻지 못하고 청원의 공군사관학교 영내 항공우주의료원으로 들어가서 후보들의 기기조작 및 실험 능력 테스트도 지켜봤다. 내가 일관되게 밀어붙이면, 항공우주연구원의 과학자들도 내 마음을 알아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어린 시절 과학소설(SF)광이었고, 과학책들을 집중적으로 읽고 토론하는 독서회 회원이기도 했다.

그해 12월 과학자 한 분이 내게 모스크바 근처의 우주인 훈련센터로 같이 가서, 우주인 선발 과정을 취재해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해 왔다. 그때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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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서두르면서 손에 잡은 책이 바로 <우주로부터의 귀환>이다.

그 책은 서가에 책이 넘쳐나 책 앞의 선반턱에 가로로 쌓아 놓았던 책으로 “아니 다치바나 다카시가 이런 책도 썼나? 이 책이 나한테도 있었나?” 하며 몇 년 동안 가려졌던 책이다.

가가린 센터로 함께 갔던 우주인 후보들은 3만 몇 천 명 가운데 뽑힌 사람들로 공군조종사, 경찰, 학생, 연구원 등 다양했다. 그들은 얼핏 봐도 뛰어났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초조해 하고 있었다.

정말 지구 궤도로 올라가는 사람은 단 하나였기 때문이다. 빡빡한 테스트스케줄이 있는데도, 카메라들이 늘 지켜보고 있어서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힘겨워 했다.

버즈 앨드린은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에 착륙한 우주인이었다. 루이 암스트롱에 이어 두번째로 달에 내린 인간이다.

그를 키운 아버지는 박사, 공군 대령 출신에 석유 기업 이사였다. 버즈는 영어를 제외한다면 수학, 과학에서 운동까지 올A의 성적을 거뒀다.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나온 뒤에는 공군 조종사로 한국전에서 적기를 세 대나 격추시켰다.

컬럼비아 대학 석사였던 여배우와 결혼했고, 자기도 MIT에서 박사까지 따냈다. 우주선 컴퓨터가 고장나자 자기가 직접 수동으로 랑데부를 시킨 뒤에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달 착륙에는 두 번째라니 앨드린은 지구로 돌아와서 격리돼 신체검사를 받을 때부터 다른 우주인 둘과 따로 지냈다. 각국마다 벌어진 화려한 군중 환영대회에도 지쳐갔고. 신경과민과 우울증 사이에서 마음이 병들어 갔다. 공군으로 돌아가 장군이 돼보려고 했지만, 자기 증세를 군의관에게 털어 놓은 뒤에는 이것도 포기해야 했다. 결국 아내와도 헤어진 채 은둔의 길을 가게 됐다.

다치바나는 지구를 떠나본 우주인들의 명암에 대해 썼다. 항공 우주 과학에 대한 지식과 우주 창조자로서의 신(神)에 대한 이야기도 나와서, 독자에 따라서는 버거워하면서 읽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미지의 모험에 나선 사람들의 기대와 좌절, 희열과 슬픔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난 며칠 후에 우주인 최종 후보 두 사람이 정해졌다. 널

리 알려진 이소연, 고산 씨다. 나는 두 사람을 만났고, 놀라운 성적들도 알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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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지만 그건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들이 새봄에 가가린 센터로 들어간 뒤 나는 더 이상 ‘우주인’ 논픽션 취재를 밀고 나갈 수 없었다. 러시아에서 자비로 취재하거나, 경비 지원을 받는데도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 가가린 센터는 군사보안 시설이어서 내 취재에는 두 나라 관련 기관들의 합의가 필요했다.

나는 속수무책인 데에 이르자, 오히려 뜻이 더 굳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준비할 수 있는 건 다 해놓기로 했다. 러시아 과학자 치올 콥스키와 코룔로프에 대한 다큐멘터리부터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까지 자료들을 모으고 공부했다. 러시아로 건너간 후보 두 사람이 웹사이트에 띄워 올리는 훈련기를 모두 정리해 두었다.

그후 고산 씨가 소유즈 우주선에 탑승할 정 후보가 되었다. 모스크바의 한국 대사관이 두 후보를 불러들인 다음 그런 발표를 했다. 고산 씨가 임명장을 받는 단상 아래서 이소연 씨가 쏟아지는 눈물을 훔치는 화면을 보았다 나는 여섯 달 전인 초봄에 이소연 씨가 가가린 센터에 입소하러 가기 전날 통화를 헤서, 격려해 줬던 기억이 났다. 고산 씨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이소연 씨를 생각하자 서글퍼졌다. 영원한 두 번째, 엘드린이 생각났다.

얼마 후 항공우주연구원이 “한국 첫 우주인에 대한 논픽션과 백서 작업을 함께할 출판사와 작가를 구한다”는 공고를 냈다. 나는 밤을 새워가며 기획안을 구상하고, 미리 택해둔 출판사를 통해 제안을 보냈다. 초조한 기다림 끝에 예상대로 내게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출판사가 몇 가지 검토 끝에 “여건이 맞지 않아 포기할 수밖에 없다”며 물러선 것이다. 결국 내가 끝까지 밀어붙일 것이냐는 여부만 남게 됐다.

나는 쏟아 부은 노력들이 아쉬워 <우주로부터의 귀환>을 다시 붙잡았다.

처음 읽었을 때는 주목하지 않았던 딕 슬레이턴의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존 글랜에 이어 1962년 미국에서 두 번째로 지구 궤도를 도는 우주인이 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발사를 두 달 앞두고 심장 근육이 가끔 실룩거려서 맥박이 불규칙해지는 증상이 발견 되었다. 그냥 내버려두면 금방 사라지고, 그밖엔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하지만 우주인 낙점에 워낙 완벽을 기하는 환경 때문에 그는 발사를 앞두고 일선에서 불러나야 했다. 그래서 맡게 된 것이 우주인 후보들을 관리하는 우주비행사실 차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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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그는 우주인 후보들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실장이 되었지만 정작 원한 것은 진정한 우주인이었다.

절망적인 상태에서 닉슨 대통령이 소련의 코시긴 수상을 만나 미국과 소련의 우주선 도킹 계획에 합의하는 일이 벌어졌다. 슬레이턴은 유일한 기회를 붙잡기 외해 우주비행사실 실장을 사임하고 한 사람의 평범한 우주 비행사로서 우주 비행 훈련에 참가한다. 결국 그가 우주인으로 낙점받아 도킹 비행에 나선 것은 1975년, 꿈이 꺾인지 13년 만이었고, 우주비행사 훈련을 받기 시작한지 16년 만이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소연 씨가 고산 씨를 대신해서 탑승 우주인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고산 씨의, 낙담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소연 씨는 지난 몇 달간 어떤 세월을 보내야 했겠나. 탑승하지도 못할 우주선의 우주인 첫 후보를 뒷받침하기 위해 승자와 함께 똑같은 훈련을 받는 것은 내면에 서글픔을 감춰야 하는 일이다. 봄이 찾아와서 카자흐스탄의 초원 위로 이소연 씨가 탑승한 우주선이 치솟아 오르는 화면을 보던 때 나는 오랜 인내가 하늘에 긋는 수직선을 보았다. 사람은 마음 가짐에 따라 앨드린이 될 수도, 슬레이턴이 될 수도 있다. 고산 씨 역시 앞으로 마찬가지이며, 우리들도 그러하다. 나는 책이 사람을 바꾼다기 보다 바뀌려고 하는 사람이 책을 찾아낸다고 본다. 더불어 나는 한 권의 책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기를 원치 않는다. 일생을 통해 내가 여러 번 변화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 만 지난 몇 해 동안 내게 가장 힘을 주고, 손때 묻힌 책을 꼽으라면 <우주로부터의 귀환>을 들 것 같다.

■ 우리는 누구나 백조의 흰 날개를 감추고 살아간다

◉ 남미영 (한국 독서개발원 원장)

0 숙명여대, 한국교육개발원에서 교과서, 교육방법, 교육 정책을 연구

0 국내 최초로 독서능력 진단 및 향상 프로그램을 개발한 독서교육학자

0 한국 출판연구소 자문위원, 독서교육 강연

0 저서 : 엄마의 독서학교, 공부 잘하는 아이로 만드는 독서교육 기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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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제1회 해송동화상, 제34회 소천아동문학상 수상, 대표작품으로 <꾸러기 곰돌이> <소년병과 들국화> <할머니 품은 벙어리장갑보다 따뜻해> 등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우리 가정에도 맹폭격을 가했다. 증조할아버지로부터 동생까지 열두 명이나 되던 대가족이 하루아침에 다섯 명만 남겨진 것이었다. 그것도 경제력이 전혀 없는 어머니와 중학생인 고모들, 초등학생인 오빠와 나만 남았다.

피란길에서 돌아온 우리는 거지였다. 어머니와 고모들이 전후 복구 작업을 하는 보국대 식당으로 일하러 가고 나면 오빠와 나는 길에 나가 미군 지프차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큰 길에 미군 지프차가 나타나면 무조건 따라가며 “헬로 기브미, 초코렛또 기브 미!”를 외쳤다.

그러던 어느 날 외할머니가 집에 오셨다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애는 왜 저리 못생겼니? 얼굴은 마상에, 턱은 도라지 캐는 꼬챙이 같이

뾰족한 게, 앞 마빡 뒤 마빡은 짱구지, 코는 양놈들처럼 삐쭉하고 귀는 칼

귀에, 인중마저 짧네……, 에구, 쓸 곳이 하나도 없구나.“

외할머니는 부잣집에서 고이 자란 자기 딸이 남편을 잃고 입에 풀칠도 못하며 사는 것이 심사가 뒤틀려서 건듯하면 우리 식구들을 험담했다. 그중에서도 여덟 살짜리 외손녀가 제일 만만했던지, 선생 사위가 전쟁 통에 죽게 된 것이 다 ‘못생긴 외손녀 때문’이라는 이상한 주장을 펴곤 했다.

외할머니의 말은 어린 나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나는 차츰 말없는 아이가 되어 갔다. 학교에 가서는 수업 시간에 손을 들지 않았고 선생님이 무얼 시켜도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내가 손을 들거나 말을 하면 무언가 세상이 잘못될 것만 같았다.

통신표에는 ‘우수우수’가 있던 자리에 ‘미양미양’이 차지했다.

4학년이 되어 새 담임이 되신 한현석 선생님은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숙제를 내주었다. 책을 읽고 독서 감상문을 써오라는 것이었다. 충청북도 교육청에서 무슨 대회를 하는데 잘된 글을 뽑아 그 대회에 보내겠다고 했다. 선생님은 교무실에 있는 책을 스무 권쯤 가져와서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선생님은 내 앞을 지나쳐 가다가 되돌아와서 나한테도 책을 한 권 내 밀었다.

책은 겉장이 없고 본문도 몇 장인가 떨어져 나간 헌 책이었다. 나는 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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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품에 품고 집으로 오다가 너무나 궁금하여 방천 둑에 앉아서 펴 보았다.

책은 18쪽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던 나는 그 속에서 못 생겼다고 구박을 받고 있는 오리새끼 한 마리를 만났다.

나는 숨이 막혔다. 꼭 나 같은 오리가 책 속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숨을 죽이고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미운 오리가 구박을 받으면 내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미운오리가 머리를 쪼이면 내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 것 같아서 울었다. 외롭고 슬픈 미운 오리가 연못가를 떠날 때는 빨리 안전한 곳으로 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다가 미운 오리가 호수에 비친 자기 모습에서 아름다운 흰 날개를 발견 했을 때는 내 어깻죽지가 간질간질할 정도로 힘이 났다. 그리고 백조가 된 미운 오리가 아름다운 날개를 좍 펼치고 푸른 창공으로 날아오를 때는 가슴이 시원해져 펑펑 울었다.

“얘, 얘, 너도 백조가 될 수 있어!”

맞다 그건 내 이야기였다. 나는 그 감동을 독서 감상문 속에 고스란히 넣어서 선생님에게 드렸다. 선생님은 내가 쓴 공책을 들고 이 교실 저 교실로 다니며 읽어 주셨다. 그러자 다른 반 선생님들이 나를 보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네가 글 잘 쓰는 아이구나“하며 칭찬해 주셨다.

담임선생님은 그 감상문을 무슨 대회에 보내 연필 한 다스와 공책 열 권까지 받아다 주셨다. 그렇게 갑자기 유명해진 나는 책이 주는 위로와 책이 주는 희망의 달콤함을 알게 되었다.

미운 오리 새끼 사건.

그것은 어린 나에게 삶의 칙칙함과 슬픔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책 속에는 나를 위로하는 그 무엇이 들어 있다는 것을 눈치 챈 나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중에 나도 그런 이야기를 쓰겠다고 생각했다. 공책 귀퉁이마다 이야기들을 끼적였다.

5학년이 되었을 때는 주위에 읽을 책이 더 이상 없었다. 학교에 있는 책들을 몇 번씩 읽곤 하던 나는 어느 날 충주에 하나밖에 없는 책방인 보문당으로 진출했다.

학교가 끝나면 책가방을 들고 보문당으로 달려간다. 드르륵 소리가 나는 유리문을 조심스럽게 밀고 들어가면 주인 할아버지가 안경 너머로 말없이 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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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본다. 니는 책 사러온 아이처럼 책 구경을 하다가 아직 안 일은 책을 발견하면 선 채로 읽는다.

그러나 이런 불안한 책읽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충주 군청에서 책을 빌려 볼 수 있다는 소식을 담임 선생님이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그곳으로 책을 읽으러 갔다.

학교만 끝나면 군청으로 달려가 직원 언니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장발장, 엉클 톰스캐빈, 몬테크리스토 백작, 백가면, 철가면, 흑가면, 작은 아씨들, 쌍무지개 뜨는 언덕, 모래알 고금, 진달래와 철쭉, 꼬마 옥이, 허클베리 핀의 모험, 서부전선 이상없다. 대위의 딸, 검정 고양이, 잔다르크, 스파르타쿠스. 알렉산더 대왕 …… 그러면서 6학년이 되었다.

6학년까지 우리 담임이었던 한현석 선생님은 어느 날 장래 갖고 싶은 직업을 써오라고 하셨다. 나는 도서관 사서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후 세월이 흘러갔고 나는 어른이 되었다.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고,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되어 동화작가가 되었고, 숙명여대 국문과를 졸업한 후에 결혼을 하고,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나이는 35세, 직업은 전업주부, 부업은 한국출판문화협회 우수도서 선정 위원.

그 부업은 대학을 졸업하고 졀혼하기 전에 한 1년간 새싹회 윤석중 선생님의 비서역을 한 덕에 얻은 것이었다. 선생님은 그 일자리를 소개해 주면서 말씀하셨다.

“수당은 많지 않지만, 책은 실컷 읽을 수 있을 거야.”

당시 한국출판문화협회는 출판사들이 보내온 도서를 선정위원집으로 배달해 주었다. 일주일에 100권~300권.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그렇게도 되고 싶어했던 ‘재미 있는 책만 실컷 읽어도 돈을 받는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누가 이런 일을 한 것일끼? 전래 동화에서 만났던 도깨비일까? 서양 동화에 나오는 요정일까? 그리스 신화에서 만난 여신일까?

그 후의 내 인생은 책읽기와 관련된 곳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 박사 논문을 쓰기 위해 수많은 책을 읽었다. 한국교육개발원 국어교육연구실의 연구원이 되어서는 국어 교과서 만드느라 수많은 책을 읽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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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재미있는 책만 실컷 읽고도 월급을 받는 직업’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재미있는 책을 실컷 읽을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책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재미있게 책 읽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독서를 하찮은 심심풀이로 생각하는 어른들에게 독서의 위력을 알려주고 싶었다. 나는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다.

삶의 어두운 터널속에서 허우적거리던 나에게 “너도 백조가 될 수 있다”고 속삭여주던 미운 오리새끼에게 감사한다. 나를 책 속으로 안내했던 ‘미운 오리’처럼, 나도 다른 사람들을 책 속으로 안내하는 ‘미운 오리’가 되고 싶다.

■ 행복이란 스스로 자기 ‘답게’살아가려 노력하는 것이다

◉ 박경철 : 외과의사, 경제 전문가

0 현직 외과의사, ‘시골 의사’라는 필명으로 더 잘 알려진 경제전문가

0 에세이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1, 2> <시골의사의 부자 경제학>이 베스트셀러가 됨

0 기명 칼럼이 20개가 넘는 컬럼니스트, 월 30회 넘는 출강

0 방문자 700만 명을 넘긴 블로거

0 KBS 라디오 <박경철의 경제 포커스>. MBN의 <박경철의 공감 80분> 진 행자 등

논어(論語)에 등장하는 별처럼 많은 구절 중에서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구절을 하나 꼽으라면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로 시작하는 ‘학이’편의 첫 구절일 것이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

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이 대목에 대한 해석은 대체로 ‘배우고 제때에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으니 또한 군자답지 아니한가? 정도가 정역이다. 하지만 한문 문화권의 특성상 해석은 조금씩 달라진다.

‘학이시습지’를 두고도 뚜웨이밍을 필두로 도올 김용옥 선생은 學보다 習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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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중을 두어 설명한다. 즉 배우고 때로 익힌다는 말은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 하나가 아니라 분리된 것이며, 배우는 과정과 그것을 체화하는 과정이 한 덩이라가 될 때에야 공부하는 기쁨을 오롯이 느낄 수 있고 바로 그것이 군자의 공부라고 말한다.

‘습(習)’이 없는 공부는 대두병에 걸린 것처럼 머릿속에 지식만 가득 담은 기형적 공부일 뿐 진짜 공부는 ‘배운 것을 실제로 삶에 적용시켜 나가며 행동하는 것’이라는 데 방점을 찍은 것이다.

이 정도도 어찌보면 통례적 해석인데, 나에게 이런 학문적인 해석이 아닌 실용의 관점에서 ‘논어 해석’의 맛에 대해 깊은 자극을 준 선생님이 한 분 있었는데, 다름 아닌 고등학교 한문 선생님이었다. 학력고사 세대였던 나의 고등학교 한문 시간은 영, 수 자습 시간과 다름이 없었다. 학력고사 비중이 고작 4% 밖에 안 되는 한자 책 대신 영어 수학 책을 펴고 있을 때였다.

원래 <논어>가 그렇다. 공자 시대에는 ‘군자’가 되려면 ‘배우고 익히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에 공감해야 했다. 하지만 군자의 길이 그리 쉬웠을까? 배우고 익히며 공부의 즐거움을 깨달아 군자행을 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건만, 공자를 배운 동아시아의 백성들은 왜 그렇게 혹독한 역사를 가졌으며, 그렇게 수없이 많은 참화를 기록하며 처참하게 살아갔을까? 단연코 그것이 아니었다. ‘배우고’ 때로 ‘익히고’ 그것을 즐거워해야 했지만, 공자를 공부한 사람들은 그 공부가 ‘군자의 길’, ‘인의(仁義)의 길’이 아닌 ‘입신양명의 길‘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즉 즐거운 공부가 아니라 해야만 하는 공부였던 것이다.

‘모두가 학문을 하고 모두가 공부만 하면 누가 노래를 하고 누가 집을 짓고 누가 자동차를 움직이는가?’라는 문제는 공자 시대부터 지금까지 풀어야 할 고민이다. 당시 공자는 이것을 인(仁)으로 극복하려고 했다. 하지만 공자의 유세는 실패했고, 아이러니하게도 공자가 실패했기 때문에 공자는 지금도 살아남았다. 그렇다면 3,000년이 지난 지금은 공자가 말한 인으로 극복할 수 있는 세상인가? 아마 공자는 지금도 ‘그렇다’라고 말 할 것이다. 그러고는 ‘배우고 익혀서 즐거운 일을 하라. 즉 누구나 재능이 따로 있고 능력이 다르니 각자의 능력에 맞고 각자의 취향에 어울리는 공부를 하면 그 분야에서

큰 성공을 이룰 수 있다’고 하지 않을까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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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오고 있을 것이라고 믿어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다시 읽는 <논어>는 이렇다. 누구나 스스로를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고, 스스로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매진하라. 그러면 그 공부가 어찌 발전이 없겠는가? 이렇게 윤색되는 것이다.

그럼 같은 맥락에서 그다음 문장은 어떤가?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이 구절은 ‘벗 우(友)’가 아니라 ’벗 붕(朋)‘ 자를 쓴 것이 핵심이다. 붕은 ’동문수학‘ 한 친구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같이 놀던 친구가 아니라 같이 공부하던 친구인 셈이다.

뿐만 아니다. 안연(顔淵) 편에 나오는 ‘君君臣臣父父子子’는 <논어>의 압권이다. 이 말은 ‘본분’ 이라는 말의 이미를 되새김질 하게 한다. 대개 시류가 혼탁한 것은 ‘본분’을 잊어서다 자신이 누구건 무슨 일을 하건 스스로의 본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주 본분을 잊는다. 그것이 넘치면 좌절과 절망이 오고, 그것은 다시 증오를 낳는다. 본분은 행복과도 상통한다. 인간의 행복은 ‘want / have'다. 원하는 것이 많으면(본분에 넘치면) 가진 것이 많아도 부족하고, 가진 것이 적으면 (본분에 맞으면) 행복하다.

공자가 예(禮)와 충(忠)을 중시한 것은 왕조에 충성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수많은 백성들이 전쟁과 도탄에 빠져 비탄한 삶을 살아갈 때, 그것을 막으려고 지배자들의 의무를 촉구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공자의 노력은 맹자의 덕치(德治)에 이르러 ‘역천’의 가능성으로 자라난다.

나는 지금도 다양한 학자들의 <논어>에 대한 해석부터, 최근에 나온 가장 인상적인 책, 리쩌허우의 <논어금독>에 이르기까지 서점에 새로운 <논어>가 등장했다하면 일단 그것을 사서 펼쳐보아야 직성이 풀린다. 그리고 많은 연구자들이 내린 새로운 해석과 내가 엉터리로 엮어서 읽는 <논어>의 차이를 음미하고 교정하고 그렇게 새로운 논어를 매일매일 만들어간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그나마 이렇게 글을 쓰고, 역할을 할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이 되었던 것 같다. 다만 나 역시 30년째 <논어>를 두고 ‘자 왈(子 曰)’을 음송하지만, 역시 안 되는 것은 학(學)과 습(習)이니, 그러고 보면 <논어>의 한 구절이라도 내 삶의 자락에 체화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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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을 잃었다면 처음 그 자리로 돌아가라

◉ 노회찬 : 진보신당 대표

0 부산 출생, 경기고등학교 학생 때 ‘의식화’되어 유신독재 반대데모 주동

0 고려대 정외과 졸, 노동운동에 투신, 청소년 직업학교에서 용접 기술을 배 운 뒤 노동현장에 투입, 1989년 인천 지역 민주노동자 사건으로 구속

0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의원으로 국회에 입성

0 제 13회 전태일 문학상 특별상 수상

0 저서로 <나를 기소하라>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 실록> 등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인생의 항로가 결정된 것은 열여섯 살의 어느 날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평생 걸어가게 될 길이 사실상 결정된 것은 1972년 10월 17일 오후 5시였다. 그때 나는 시내버스 안에서 라디오 뉴스를 듣고 있었다. 뉴스를 전달하는 아나운서는 다급한 목소리로 지금 박정희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하고 10월 유신을 선포했다는 소식을 반복해서 전하고 있었다.

국회해산이라니, 그건 의원 내각제인 나라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닌가. 대통령 중심제인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이 없다는 것은 중학교 3년 내내 배운 사실 아닌가.

결국 대통령이 헌법을 어기고 군대를 동원해 국회를 강제 해산했다는 것인데 그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10월 유신 선포’ 이 충격적인 하루도 이젠 36년 전의 일이 되었다. 그런데 3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이 날짜의 두 신문을 버리지 못하고 무슨 역사의 문건인 듯 보관해 오고 있다.

읽을 책이 변변치 않던 시절, 교과서는 나의 소중한 벗이었다.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될 때면 새 교과서 받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새 교과서를 받아온 날은 누런 재생지를 가위로 오려 책표지를 새로 씌우느라 분주했다. 그리곤 읽기 시작했다. 가장 재미있는 국어 교과서부터 읽기 시작했다. 며칠 내에 다 읽고 나면 산수, 자연, 사회 교과서로 넘어갔다. 나중엔 음악 교과서도 미술교과서도 읽었다. 교과서를 통해 나는 세상의 이치와 나를 둘러싼 자연에 대하여 배웠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무엇이 중요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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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도 중학교 3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린 오천석 선생의 ‘언론의 자유’에 관한 글을 읽었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특히 그 글에서 인용된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의견 때문에 박해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말할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라는 볼테르의 말을 읽고 얼마나 통쾌했는지 모른다.

오랫동안 교과서는 나의 벗이었고 스승이었고 경전이었다. 나는 내가 아는 거의 대부분의 진리를 교과서로부터 배웠다. 교과서들을 징검다리로 삼아 세상으로 건너 다녔고 교과서를 잣대로 내가 만난 세상을 측정하고 교과서를 저울로 해서 내가 겪은 세상의 무게를 재었으며 교과서를 거울삼아 거기에 비친 세상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1972년 10월 17일 교과서가 가르쳐주는 것과 전혀 다른 상황이 국회해산, 10월 유신 선포로 벌어지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을 겪은 소년은 더 이상 소년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10월 유신’으로 나의 소년기는 막을 내렸다. 최고의 진리라 믿었던 교과서가 현실의 권력에 의해 무력화 되는 것을 안타깝게 지켜보면서 나는 갈등과 번민의 새로운 단계에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교과서와 다른 현실을 파헤치기 위해서 교과서가 아닌 책을 접하기 시작했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청계천 헌책방으로 달려가서 월간 사상계를 구해서 다 읽었다. 월간 <다리>, <씨의 소리>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을 읽기 시작했다. 중국 혁명과 러시아 혁명에 관한 책도 뒤적였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명동 흥사단 강당에서 열린 백기완 선생 시국 강연회도 들으러 다녔고 용산의 함석헌 선생 댁을 방문해 궁금한 것을 여쭙곤 했다.

이러는 사이에 교과서 바깥의 현실에 대해 조금씩 눈뜨기 시작했다. 법이 지켜지지 않은 현실을 고발하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던 청계 피복재단사 전태일이 몸을 불사른 소식도 이때 알게 되었다.

1981년 8월 초 나는 수십 권의 책을 지고 전북 고창 참당암으로 향했다. 참담한 심정이었다. 정의는 무너지고 불의가 승리하고 있었다. 광주 민주 항쟁에 독재 정권의 군홧발에 짓밟히는 좌절까지 목격한 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인생의 진로를 결정해야 했다. 전깃불도 안 들어오는 산사 암지에서 한 달을 보내면서 고뇌를 거듭했다. 사방이 막막하고 앞길이 캄캄한데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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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될수록 마음이 점점 평안해 짐을 느꼈다.

정 어려우면 빨리 포기하라고 가르쳤던가? 불의를 보더라도 눈감고, 어려운 이웃을 보더라도 내 이익부터 챙기라고 배운 적이 있던가? 옳은 길보다 편한 길이 더 소중하다고 가르쳤던가? 나는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오랫동안 가르쳐 주신 선생님과 부모님의 평소 말씀에 따르기로 했다. 나의 능력이 닿는 한 학교와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사는 것이 의미 있게 사는 길이라 확신했다. 더 이상 산 속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한 달째 되는 날 짐을 꾸려 하산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전기용접 기능사 자격증을 따고 용접공으로 취업했다.

“실제 공장에서 힘든 용접 일을 하면서도 스스로 구원 받았다는 생각에 힘든 줄 몰랐고 그 일로 감옥에 가서도 마음만은 늘 편안했고 지금도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들라면 저는 서슴없이 현장에서 용접하던 시절을 들고 싶습니다.”

■ 가슴뛰는 삶, 그것에 무섭게 집중하라

◉ 김영세 : 이노디자인 대표

0 서울대 응용미술학과 졸, 미국 일리노이대학 산업디자인학과교수, 1986년 한국인 최초로 실리콘밸리에 디자인회사 설립

0 1999년 서울에 ‘이노디자인 코리아’ 설립, 2004년 베이징에 지사 설립

0 미국 디자이너협회와 비즈니스위크가 공동 주관하는 디자인 공모전에서 금, 은, 동상 석권

0 MP플레이어, ‘아이리버 H10‘모델과 삼성전자의 ’가로본능 위성 DMB폰‘ LG전자 ’스마트 폰‘ 등을 디자인

0 저서로는 <트랜드를 창조하는 자, 이노베이터> <디지털 디자인 A to Z>

<12억 짜리 냅킨 한 장> 등

*이노베이터 : 혁신자, 도입자

세상은 나를 ‘이노베이터(Innovator)’라 칭한다. “디자인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디자이너의 꿈을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올라 일리노이 대학교 교수로서, 여러 디자인 회사에서 디자이너라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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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하다가 1986년 미국 실리콘밸리에 이노디자인을 설립하고 본격적인 디자인 활동을 펼치기 시작한 지 벌써 20년이 지났다.

새로운 디자인을 창출해 나가는 나의 열정의 근원은 열여섯 살의 중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날 디자인 전문지인 <I. D. Magazine>을 우연히 접했던 것이 그 꿈의 시작이었다.

어려서부터 나는 무엇인가를 만들고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덕수초등학교 3학년 때 경복궁에서 열렸던 어린이 미술 대회에서 제법 큰 상을 탔던 것 외에는 별 뾰족하게 남아 있는 기억이 없다.

열 여섯 살,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드디어 ‘그 무엇’의 실체를 만나게 되었다. 어느 날 친구의 집 2층 서재에 올라갔다가 수많은 책 중 하나를 빼어 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I. D>라는 미국의 디자인 전문지였다. 왜 하필 그 잡지를 꺼내 들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때 까지만 해도 생소했던 ‘디자인’이란 단어 때문에 손이 갔던 것이 아닐까.

한 장 한 장 별생각 없이 넘겨보던 손과 눈이 서서히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머리가 아득해지면서 심장이 쿵쾅거리고 목구멍으로 뭔가 차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세상에 이런 게 있었다니!

그래 맞아!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일이고 앞으로 내가 할 일이야! 디자인 이라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물건이 수많은 사람을 즐겁고 유쾌하게 해 줄 수 있다니! 첫 대면에서 나는 디자인이라는 작업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내 삶의 방향을 설정해 준 그때의 감동과 기쁨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우연히 접한 한 권의 책이 나의 삶을 180도로 바꾸어 놓은 셈이다.

그 놀라운 첫 대면은 부모의 반대라는 장벽에도 불구하고 꿈을 좇아 산업디자인과에 진학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I. D>라는 잡지를 통해 ‘디자인’의 세계를 알지 못했다면 부모님의 뜻에 따라 건축학과에 진학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가슴과 머릿속은 온통 디자인으로 가득했기에, 디자인 공부를 할 수 없다면 대학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결국 나는 그해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친구들은 대학에 입학했고, 나는 재수를 하게 되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재수 학원에 등록도 하지 않고 음악다방이나 생맥줏집 같은 데서 대학생이 된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다. 그렇게 방황하던 끝에 일반 재수 학원 보다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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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학원에 보내달라고 부모님을 설득하는 데에 시간과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디자인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이고 사람이란 모름지기 제일 좋아하는 일에 전념할 때 성공할 수 있다고 끊임없이 부모님을 설득한 끝에 겨우 허락을 받아냈다. 드디어 나도 미술학원에 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디자인의 기초가 되는 그림을 배우면서 나는 점점 더 디자인이라는 세계야말로 내가 앞으로 몸담을 신세계라는 확신이 들었다.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분명히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다. 내가 끌려가는 곳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특별한 세계임이 분명했다. 내는 내 예감을 확신했다.

디자인에 대한 열정을 바탕으로 꾸준히 노력한 끝에 나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학과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학을 다니면서 디자인 경쟁력이 곧 국가의 경쟁력 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선진 디자인을 배우려면 짧은 기간 동안이라도 미국으로 가서 공부하는 것이 디자인 역량을 키우는 데 필요하다는 판단이 섰다. 마침 형이 미국에서 공학 박사 학위를 받고 취직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좀 더 쉽게 미국행을 결정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열여섯 살의 운명적인 만남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여행용 골프 가방, 세 발 달린 가스버너, 자동 잠금 장치가 있는 지퍼, 휴대용 전화기와 단말기를 합친 스마트폰을 디자인 하지 못했을 것이며, 그랬다면 미국 산업디자인협회에서 주는 여러 상을 수상하거나, 세계적인 디자인 잡지의 표지에 내 작품이 실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미국 시장에서 최고의 상품으로 선정된 제품을 디자인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순간의 강렬한 체험이 마음속에 늘 살아 있었기에 남다른 의지와 노력으로 미국 디자인 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첨단 산업의 심장부인 실리콘벨리에 뛰어들어 미국 산업 디자인계에도 당당히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나는 열여섯에 다시 태어났다고 말하곤 한다. 디자인으로 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자신의 의도와 신념에 따라 그려내고 실현할 수 있는 21세기를 사는 우리 모두는 디자이너다. 살아가는 모든 것이 디자인이다. 따라서 자신의 꿈과 열정을 얼마나 잘 그려내고 추구하느냐에 따라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의 여부가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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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여라

◉ 심영섭 : 영화평론가

0 ‘심리학과 영화를 두루 섭렵한 사람’ 이라는 의미의 필명

0 서강대 생명공학과, 고려대 심리학과 박사, 한양대 신경정신과에서 인턴, 백병원에서 신경 정신과 레지던트를 마침

0 1998<씨네21> 영화평론가 상 수상, KBS <TV 책을 말하다> 패널

0 대구 사이버대학 상담행동 치료학과 교수

0 저서로 <영화 내 영혼의 순례> < 심영섭의 시네마 싸이콜로지>

<대한민국에서 영화평론가로 산다는 것 등

밑바닥, 더 가질 것도 놓칠 것도 없는 밑바닥을 향한 추락의 즐거움이여. 아직까진 괜찮아, 아직까진 괜찮아가 아니라, “지금부터도 괜찮아”이다.

- 1998년 1월 12일 일기장

1998년 겨울은 내개 혹독했다. 그 전해 나는 이혼을 했고, 아이 하나를 들쳐 업고 집을 나선, 아니 새로운 집을 향해 나선 싱글맘의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 박사과정에 입학했고, 막 임상심리 전문가 자격증을 땄으며, 나의 처지를 십분 이해 해주고 지지해주는 부모님이 있었다.

드디어 심리학과 연관된 모든 의무 과정을 마쳤는데도 ‘나란 사람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지’ 진정 알 수 없는 모순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무렵 이런저런 우울증 때문에 생애 처음 학교를 휴학하고 아이와 함께 그 겨울을 났다.

그러곤 진짜로 길을 떠났다. 그전까지 집에 통금이 있어서 10시만 되면 어머니가 안절부절 마중을 나오던 동내 어귀길. 어머니의 치마가 긴 달빛보다 더 길어보여서 그냥 담아 놓았던 마음들, 그러나 이제는 그 마음을 다 털어내버리기로 했다.

친정 어머니에게 어린 아들을 맡기고 정말 소풍도 관광도 MT도 아닌 ‘여행’을 떠났다. 하루를 인사동 허름한 여관에서 보내고 그날 아침 무작정 청량리역까지 갔다. 그 빼곡한 동네 이름들 가운데 왜 하필 ‘사북’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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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은 생각처럼 멀리 있지 않았다. 그처럼 빨리 도달할 수 있는 곳이 그처럼 멀게 느껴졌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다만 그곳의 햇살은 서울 시청의 시계보다 훨씬 느리게 생을 관조하는 듯 기어가고 있었다.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빈 젖가슴으로 남은 탄광은 여기저기 뻥뻥 토굴이 뚫려 있었지만, 그곳 사람들은 그조차 무덤덤해 했다.

그곳에서 나는 마치 귀신에게 홀린 듯 난생 처음 높이 솟아오른 솟대를 따라 저절로 발길을 돌렸다.

가톨릭 신자였던 내가 점집에 들어간 것도 신기했는데, 나를 쳐다보며 말을 잇는 그녀의 예언은 더욱 기이했다. “선생님은 앞으로 만인을 거느릴 팔자예요. TV에 나가든 강의를 하든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을 좋아하게 될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지쳐있네요. 동자승이 앞에서 이끄는 것도 같고, 내 복채 안 받을 터이니 여기서 그냥 쉬어가요.”

임상심리학도로서 하루에 환자 몇 명을 보는 게 고작인 내가 만인을 거느릴 팔자? 솔직히 믿기 힘든 이야기라 쉬라는 청에도 그냥 그곳을 나왔다. 복채도 내지 않은 이 점괘가, 기이한 예언이, 정확히 내 미래를 맞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평론가로 당선되고 나서도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월정사 꼭대기에는 놀랍게도 부처님을 모시는 절이 있었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방석에는 부처님이 없었다. 텅 빈 방석에 사람들이 그저 머리를 조아리고 고개를 숙이며 합장의 예를 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그림자 예배나 합장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제야 그 옛날 해골의 물을 마신 원효처럼 빈 방석에 털석 주저앉아, 그 빈 방석을 향해 오래오래 엎드려 있었다.

그제야 내 마음의 안개가 걷히면서 신의 섭리처럼 내가 여기에 와야 했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한 줄기 눈물이 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때 내 손에 들린 책이 바로 C. G 융과 그 제자들이 집필한 <인간과 무의식의 상징>이다. 대학원 시절에도 흥미롭게 읽은 책이지만, 정선 여행 이후로 이상하게도 다시 한 번 읽고 싶어졌다. 사실 프로이트의 전집들과 달리, 이 책에는 수많은 도판과 상징, 원시부족의 삶을 담은 사진들이 풍성하다. 사진들이 글보다 먼저 띄어서 호기심에라도 한번 읽고 싶어진다. 알 수 없는 상형문자 같은 도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나는 한 발 한발 노대가와의 만남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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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고통과 신비가 뒤범벅된 그해, 그의 책은 내 삶의 풍요로움의 원천이자, 마음 속 심연의 닻처럼 삶의 방황기에 든든한 북극성이 되어주었다. 뿌연 안개와 같던 표면의 세계가 깨어져 버리고, 여린 새싹같은 새로운 내가 태어나기 시작했다.

일단 나는 ‘뇌’를 공부하리라던 원래의 계획을 접었다. 나 자신이 오랫동안 너무 논리적인 세계에서 마음의 샘물에 물을 주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글이 써지기 시작했다. 영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환자들에게도 더 생생히 귀를 기울였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직관의 문이 하나하나 열린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한꺼번에 활짝 열려 밀물처럼 내 마음에 어떤 정서의 강이 출렁거리며 넘실거렸다는 것이다. 환한 가랑이 사이로 물이 올라오는 것 같은, 그해 겨울은 혹독했지만, 마침내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왔을 때 나는 <씨네21>로부터 영화평론가로 당선되었다는 전갈을 받았다.

버스 안에서 5분 만에 손수 내 이름자를 새로 지어 넣었다. 심리학과 영화를 두루 섭렵했다는 필명, 심영섭이라는 필명을. 그것은 융이 가르쳐준 대로 내 안의 남성에게도 길을 터주는 새로운 작업의 시작이었다.

Part 2. 나를 치유하는 힘

■ 나를 지켜보는 이, 그 한 사람이 살아가는 의미가 된다

◉ 조성기 : 작가

0 전남 고성 생, 서울대 법대 졸

0 1971년 <만화경>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0 1985 오늘의 작가상, 1991 이상문학상

0 작품 : 야훼의 밤, 왕과 개, 통도사 가는 길, 욕망의 오감도, 우리 시대의 사랑, 굴원의 노래, 실직자 욥의 묵시록, 내 영혼의 백야, 우리는 완전히 만나지 않았다. 잃어버린 공간을 찾아서 등 다수

0 현재 숭실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과연 한 권의 책으로 한 사람의 생애가 바뀔 수 있을까. 생애가 바뀌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 책이 생애를 바꾸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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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아오면서 두고두고 마음에 되새겨지는 책이라면 한 사람의 생애를 바꾸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애를 바꾸었다기 보다 생애를 견디게 해주었다고 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에게도 한 권의 책이 있다. 오스트리아 빈 출신인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바로 그 책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병약하여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일이 늘 벅찼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앞산에 놀러갔다가 바위에 머리를 부딪힌 일이 있었고, 중학교 2학년 때는 이틀 동안 혼수상태에서 죽음 직전까지 이르기도 했다. 간신히 깨어나 눈을 떴을 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며 울부짖었고 무슨 주사를 놓았는지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천만 다행으로 사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춘기의 갈등과 입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고등학교 시절을 지내고 대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내 정신은 이미 분열되어 있었고 인생의 허무를 뼈저리게 느낀 사람처럼 죽음의 유혹을 받고 있었다. 몸도 약해질 대로 약해져 학교 공부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없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파고들었다. 하지만 대학교 3학년 무렵 나름대로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았고, 그러자 몸도 기적적으로 강해지기 시작하여 군대도 현역병으로 복무하게 되었다.

하지만 군대 3년 동안 우리가정은 친척 사업에 집을 담보로 보증을 서 주는 바람에 결국 집도 다 날리고 식구들이 길거리로 나 앉을 처지가 되었다.

서울로 올라와 복학을 하여 학교를 다니는 동안 거의 하루에 한 끼 정도 식사를 하고 기숙할 곳도 없어 가건물 같은 데서 자기도 했다.

그 무렵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다시 접하게 되었다. 여기서 ‘다시’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그 책을 군대 시절에 한 번 접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군대 시절에 그 책을 읽었을 때에도 프랭클이 유대인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는 상황과 나 자신이 군대에 수용되어 있는 상황이 비슷하다고 여겨져 공감 되는 바가 많았다.

하지만 집도 절도 없고 먹을 것조차 없는 극한(?) 상황에서 그 책을 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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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감격으로 다가왔다. 그 책이 주는 힘으로, 낙망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견디어 낼 수 있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 책은 나로 하여금 인생을 비굴하게 살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그 책 135페이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이런 모든 것으로 우리는 이 지상에는 두 가지의 인간의 타입이 존재함을 배울 수가 있다. 즉 품위 있는 선의의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인 것이다.

그 책은 품위 없는 인생을 살 뻔한 나를 품위 있는 인생으로 바꾸어준 셈이다.

40대 중반에 또 한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며 50대 중반을 지나온 지금, 인생을 돌아보면 프랭클 박사가 말하고 있는 인생론에 새삼 공감하게 된다.

“산다는 것은 고통을 당하는 것이고, 살아남는다는 것은 고통을 당하는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고통을 당하는 것’이라는 이 사실을 정면으로 받아들일 때 오히려 고난과 고통에 대한 내구력이 생기는 법이다. 내가 직접 고통을 당하지 않을지라도 내 이웃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우리는 일생동안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프랭클은 우리 인간에게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 즉 ‘의미에의 의지’가 있음을 증명해 내었다.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부모와 아내, 두 자식을 모두 잃었다. 인생에 이보다 더한 고통이 있을까. 그러나 프랭클은 그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의미에의 의지’를 발동하여 ‘의미’를 찾고 인생을 견디어 내었다.

인생에 고난과 고통이 심할수록 그 ‘의미’의 등불은 더욱 빛나는 법이다.

프랭클은 인생으로부터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인생에서 우리는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는가가 문제가 아니고, 도리어 인생이 무엇을 우리에게 기대하고 있는가가 문제인 것입니다.”

미국 대통령 케네디가 취임사에서 바로 이 프랭클의 말을 응용하여 ‘인생’을 ‘국가’로 바꾼 사실은 유명한 일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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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리는 그대로다. 받아들이는 우리가 변할 뿐이다

◉ 한필원 : 한남대 건축학부 교수. ATA아시아 건축연구실 대표

0 서울대 건축학과 졸, 같은 대학 석사, 박사 학위

0 건축 설계 실무(성림종합건축사와 공간 종합건축사 사무소에서)

0 1995 중국 청화대 건축학원에서 연구, 2003년 미국 뉴욕주립대학교 방문 교수, 1996년부터 한남대 건축학부 교수

0 저서 : 한국의 전통 마을을 가다 1,2권. 주거의 문화적 의미,

지식의 최전선, 한국 전통 생태학 등

1991년 박사학위를 받은 나는 곧 대학교수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교수 자리를 얻는 것이 어려워졌다. 1990년대가 되자 전과 달리 박사학위가 있어도 대학교수가 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 되었다. 특히 수도권의 대학에 자리를 잡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당시 신임 교수의 명단을 최종 출신학교와 함께 신문에 광고하는 관행이 생겼다. 나를 뽑기로 했다고 알려온 수도권의 학교가 두 곳 있었는데, 막상 신문 광고에는 내 이름이 누락되어 있었다. 광고를 살펴보니 신임 교수는 거의 모두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적어도 1990년대 초의 한국은 자국의 교육을 믿지 못하는 사회였다.

그 후 나는 이런 현실에 실망하여 한동안 학교로 갈 생각을 접고 건축 설계 사무소에서 근무했다.

그러던 중 중국에 갈 기회를 잡아 칭화(淸華)대학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연구 기간이 끝날 무렵 고향 도시의 한남대학교에 부임했다. 학위를 따고 5년 반 만이었다.

나는 연구실을 배정받은 다음 출입문 안쪽에 ‘높은 산을 우러르고 큰 길을 따라가네. 비록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없더라도 마음만은 그것을 향하리. (高山仰止 景行行止 雖不能至 然心鄕往之 고산앙지 경행행지 수불능지 연심향왕지 *仰 우러를 앙, 雖 비록 수) 라는 글을 써 붙였다. 사마천이 공자의 학덕을 흠모한 글이라 한다. 훌륭한 선생이 되겠다는 나름의 다짐이었는데 <논어>를 즐겨 읽던 내게 어울리는 경구였다.

그러나 학교에 자리 잡은 지 얼마 안 되어 내 앞에는 또 하나의 거대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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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이 놓여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대학이 지방에 있다는 이유로 여러 가지 차별이 가해지고 있었다.

나와 학생들에게 공공의 적이라 할 이 거대한 장벽을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말은 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말이 보여주듯, 역사적으로 뿌리 깊은 중앙 집중적 사회에서 그 장벽을 극복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시간이 갈수록 고민은 깊어갔다.

우리 사회가 지방 대학에 부과하는 불이익을 체감하면서 나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도전정신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내 놓은 대답은 연구 공동체를 만들어 현실의 벽을 넘어보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교수만의 힘 학생만의 힘으로는 넘지 못할 장애물이라면 힘을 모아 밀쳐내 보자는 각오였다.

연구실 홈페이지를 구축하고 학교 근처의 작은 원 룸 건물에 연구실 공간을 마련하는 등 준비를 거쳐 교수로 부임한 지 5년 만인 2001년 말 아시아건축 연구실(ATA)이라는 이름의 연구실을 출범시켰다. 당초부터 유명한 학자를 중심으로 한 거창한 연구 조직이나 학파 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연초에는 우공이산(愚公移山), 문계기무(聞鷄起舞), 수적천석(水滴穿石) 같은 사자성어를 내걸고 모두들 최선을 다하여 연구실은 날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정말이지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어려서부터 도덕주의 교육을 받은 나는 너나없이 자유분방한 학생들의 무례함에 하루에도 몇 차례씩 시달렸다. 휴일과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같이 생활하다보니 불편한 일이 자주 발생했다. 현 세대의 개인주의에 길들여진 학생들은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충분히 생각해보기도 전에 쏟아지는 질책을 견디지 못하고 연구실을 떠났다.

버릇없는 학생들, 까다로운 교수, 그들은 다가갈수록 서로에게 상처를 내는 선인장 같은 존재가 되어갔다. 괴로움은 더해가고, 건강도 나빠지고 있었다. 어느 늦은 밤, 학교 근처의 성당 마당에 있는 성모상 발밑에서 한참을 앉아 있다 귀가했다. 또 하루는 갑자기 혈압이 올라 병원으로 달려갔다. 좋은 뜻으로 시작한 일인데도 나는 평생 가장 힘든 시간을 겪고 있었다.

한편 남은 학생들은 좀 이상하게 변해갔다. 너무도 예의 바르게…….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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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출장을 가려고 차를 타고는 백미러를 보니 학생들이 죽 도열해 차를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있었다. 검은 양복만 입었더라면 영락없는 조폭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내가 강조하는 공동체의 도덕성은 이렇게 교조화되고 있었다.

나는 이 뜻밖의 현상 앞에 또 한 번 좌절감을 느꼈다. 이런 몰개성과 소극성은 무례함보다도 연구실의 앞날을 더욱 어둡게 할 것이 분명했다. 우리가 하는 건축·도시 일은 단순 작업이 아니라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생명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의를 강조하면 개성이 사라지고 개성을 존중하면 공동체의 질서가 위협받을 것 같은 상황,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나는 <논어>를 비롯한 동양 고전의 암송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자랐다. 부모님은 동양의 고전 사상을 고결하게 실천하신 분들이었다. 이런 내 언행에 대한 평가 기준도 <논어>였다. 내 말에 대한 부모님의 가장 큰 칭찬은 “공자님도 그런 말을 하셨다”는 것이었다.

언제부턴가 전공과 관련된 책만 읽던 내가 <논어>를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김용옥 선생의 <도올 논어>와 신영복 선생의 <강의>를 읽고서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논어>를 도덕주의적으로만 읽던 내게 두 사람의 강의는 큰 암시를 주었다.

그리고 <논어>가 주는 도덕적 원천은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갑옷과 같이 느껴졌다. <논어> 새로 읽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다시 떠난 <논어>여행에서는 특히 공자가 여러 제자들의 개성을 존중하면서 각자에게 필요한 교육을 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그렇게 <논어> 새로 읽기의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이 친구는 이래서 안 되고 저 친구는 저래서 곤란하다’고 생각해 온 자신을 크게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거운 갑옷이 아니라 새롭고 가벼운 <논어>의 옷을 입은 내가 연구실에 나타나니 무언가 따사로운 기운이 감도는 듯했다. 아마 내 표정부터가 밝았을 것이다. <논어>에서 얻은 새로운 생각으로 연구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찬찬히 바라보니 각자가 가진 커다란 잠재력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 각자에게 맞는 세부 전공을 권하고 우리가 의뢰받은 연구 업무도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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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의 특성과 장점을 면밀히 살펴 고루 배정하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모두 기여할 분야가 있음을 확인한 연구원들은 선생의 경직된 도덕률에 위축된 모습에서 벗어나 조금씩 자신감을 회복해 나갔다.

<논어> 새로 읽기를 통해 나는 개인의 합보다 큰 공동체를 이루는 근본적인 방법을 알게 되었다.

■ 때로는 인생 각본에 없는 일도 받아들여야 한다

◉ 주희진 : 리더십 다양성센터 대표

0 이화여대 경영학과 여성학 전공

0 이화여대, 동덕여대, 연세대 등에서 강의

0 기업, 공직, NPO등 다양한 분야의 리더와 만나 ‘리더십 습관 만들기’ 프 로젝트 지원

0 저서 : 여성팀장 리더십 : 여성과 리더십의 모든 것>,

<평판의 힘 : 남이 써주는 나의이력서>

* NPO : 민간 비영리 단체,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각 분야에서 자발적 으로 활동하는 각종 시민단체

스물아홉 살이라는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될 무렵, 나는 결혼을 했고 박사 과정 입학으로 다시 학생이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늘 함께 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벅찼고 원하는 학업에 전념할 수 있어서 설레었다. 그러나 그 기대와 설렘은 채 여섯 달도 지속되지 않았던 같다. 결혼은 둘이 아닌 가족 대 갸족의 결합이었고, 박사 과정 역시 기대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실망, 허탈함, 배신감, 두려움, 막막함 등의 감정이 시간이 갈수록 분노와 짜증으로 변해갔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우울, 무기력, 자포자기 상태로 나를 몰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서른 즈음의 나는 출근하는 남편에게 손을 흔들어줄 기력조차 없어 하루 종일 누워 있는 날이 반은 되었다. “요즘 왜 그래? 너 많이 변했어”라고 누가 물으면, 내 대답은 “글쎄 잘 모르겠어. 그냥 그래 먹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일도 없어. 그냥 자꾸 몸이 축축 늘어져”였다. 사실 그 대답조차 하기 귀찮아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피했다. 누가 봐도 소금에 푹 절인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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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 같은 모습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결국 어렵게 3학기까지 마친 후 휴학을 해야만 했다.

나는 휴학 후 8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나 자신을 방치하면서 보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신을 내버려둔 그 시간 동안 내 삶은 서서히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으면 되었고, 잘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은 그만두면 되었다. 그렇게 세상은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스물아홉부터 다시 시작된 내 인생은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과도 조화롭게 지내는 법을 배워야 하는 시간이었고, 하기 싫은 일도 참고 해내야만 하는 의무로 가득한 시간이었다. 내가 만들어 두었던 결혼 각본에는 사랑받는 아내만 존재했을 뿐 착한 며느리, 순종족인 동서는 없었다. 내가 만들어 놓은 대학원생의 각본에는 지적 자극으로 가득한 수업 시간만이 있을 뿐 학업 외의 일에 치어 허덕이는 시간은 없었다. 나는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낯선 역할을 결혼과 대학원이라는 틀 속에서 갑자기 해내야만 했던 것이다.

그때 한 선배가 <아담을 기다리며>라는 책을 읽어 보라며 내 손에 쥐어줬다. 감동적인 실화라면서 꼭 읽어보기를 권했다. ‘책을 손에 쥘 힘도 없다’고 생각한 나는 책도 내 곁에 나와 함께 몇 달간 방치해 두었다. 그러다가 “이제 그만 책을 돌려달라”라는 말에 빌려준 사람의 성의를 생각하며 한 번 들춰나 보기로 했다.

그렇게 읽기 시작한 책이었는데 내려놓을 수가 없어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어 버렸다. <아담을 기다리며>는 인생에서 뜻하지 않은 사건과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말해주고 있었다.

또 인생 각본에 없던 일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나면 예상치 못한 선물이 함께 따라온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정해진 삶의 각본은 없으며, 언제든 뜻하지 않게 수정될 수 있다. 즉흥 변주곡처럼 수정되어가는 수정본이 진짜 나의 인생이다.” 비로소 나는 강력한 저항의 힘을 풀고 내 삶의 수정본과 직면하기 시작했다.

<아담을 기다리며>는 하버드 대학 박사 과정에 재학중인 부부가 다운증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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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둘째 아들(아담)를 임신하고 낳고 기르면서 경험한 일상의 이야기를 기록한 실화다.

저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존과 나는 아담이 태어난 후 멋진 꿈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아주 여러 번 경험했다. 아담을 우리의 삶에 받아들이기로 한 선택은 우리가 무척 사랑하는 아들을 갖게 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주었다. 그것은 우리를 모험을 감수하는 사람들로 만들었다. 우리는 이제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감으로써, 꿈이나 직관 혹은 우리의 깊은 원망(願望)에 근거한 결정을 함으로써 잃어버리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아담이 우리에게 온 뒤로 우리는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특이한 사람들과 사귀고 터무니없거나 무모하거나 그냥 멍청해 보이는 프로젝트 들을 만났다. 성공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다. 그러나 늘 즐거운 일이었다.

아담을 받아들이기로 한 후 내 삶의 아담들은 내게 꼭 필요한 때에 다가와 나를 변화시키고 있다. 내게 다가오는 사람과 사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어김없이 ‘새로운 기회’라는 선물도 함께 배달되어 온다.

아담을 만난 후 나는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대학에서 리더십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강의하는 일을 시작했다.

아이가 태어난 후 나와 남편의 삶은 달라졌다. 나도 남편도 둘이 살 때와 다름없이 비슷한 수준의 시간과 에너지를 일에 쏟으며 계속해서 각자의 커리어를 열심히 쌓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부모가 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과 에너지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하루는 여전히 24시간이고 1년도 변함없이 365일인데 우리에게는 더 많은 시간이 생긴 듯하다. 그 시간과 에너지는 나와 남편이 사용하던 시간을 나누고 쪼개서 만들어낸 게 아님이 확실하다.

아이와 함께하는 삶을 시작한 후 우리 부부가 받은 선물은 100가지도 넘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변화는 무신론자에 가깝던 나를 아이가 성모님 앞으로 이끌어주었고 신앙을 체험하게 했다는 것이다. 나는 사랑과 감사. 평화와 공존이라는 큰 선물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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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을 만나려면 반드시 절망을 거쳐야 한다.

◉ 안상헌 : HRD인력 개발전문가

0 평범한 회사생활을 하다가 각고의 노력 끝에 독서전략, 자기개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현재는 인력개발(HRD) 전문강사로 활약

0 저서 : 홍크, 생산적 책읽기 50, 생산적인 삶을 위한 자기발전 노트 50, 자신감, 안상헌의 내 삶을 만들어준 명언 노트 등

1990년대 초반의 대학은 다양한 문화가 충돌하는 곳이었다. 군사 정권은 힘을 잃어가고 있었고 사상계는 봄을 맞이했으며 경제는 활발했다. 덕분에 대학 사회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치들은 서로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을 하늘 위에서 바라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나는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해야할까?’하는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어떤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서야 할지 주저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나의 결정을 도와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은 위치에서 완전히 다른 것을 바라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수업에 들어가야 할지, 집회에 참석해야 할지, 운동장으로 달려가야 할지 모든 것이 나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제법 흐르고 나름대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때 그동안의 생각들을 완전히 흔들어버리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바로 시(詩)를 ‘발견’한 것이다.

‘슬픔이 기쁨에게’라는 제목의 시였다. 나는 곧 시에 빠져들었다. 정호승 시인의 시였다. 그길로 서점으로 달려가 시집을 샀다. 시집의 제목도 <슬픔이 기쁨에게>였다. 그것은 한 마디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동안 배운 논리적인 가치들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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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앉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야겠다.

기쁨은 좋은 것이고 슬픔은 나쁜 것이라고 단순히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 정호승 시인의 시어들은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다른 사람의 슬픔에 대한 무관심이 바로 우리의 기쁨이라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시집에는 맹인, 혼혈아, 이민자, 할머니, 수감자, 피난민 같은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그들의 슬픈 삶이 마치 내 삶처럼 느껴졌다. 내가 걸어온 길이 그들의 삶과 별로 다르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슬픔이 기쁨에게>라는 시집은 내 삶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정신적인 면에서는 새로운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으며, 생활적인 면에서는 글을 쓰기 시작하는 삶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기 때문이다. 좋은 글을 자꾸 읽다 보면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어진다. 제법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런 느낌을 알 것이다.

글이라는 매력에 빠진 나는 밤마다 일기장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습작노트를 가방에 넣고 다니며 어디서든 글을 썼다. 작가의 꿈도 갖게 되었다. 내가 독서광이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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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군대를 갔다. 고립된 군 생활 속에서는 책을 가지고 다닐 수 없었기에 손바닥 보다 작은 스프링 수첩에 시를 옮겨 적어서 외우고 다녔다.

지금도 좋은 글을 만나면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어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읽고 외운다. 수첩에 적는 것에서 진화했다고나 할까? 복학을 하고서도 글쓰기 훈련은 계속되었다. 이렇게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시간이 반복되면서 내가 쓴 글도 제법 쌓여갔다.

언제부턴가 나는 거리에서 과일을 사거나 시장에서 고등어를 살 때 절대 값을 깎지 않게 되었다. 귤 값을 깎으며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귤 한 봉지라고 해봐야 2,000~ 3,000원 아닌가. 깎아봐야 몇 백 원이고 덤으로 한두 개 더 얻어가는 것이 고작이다. 돈 몇 백 원 혹은 귤 몇 개가 내 삶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땅의 자린고비 주부들이 들으면 화낼지 모르겠지만 귤 값 깎아서 부자 된 사람은 없다. 단지 손해 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할 뿐이다.

시장에서 귤을 사면서도 절대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애쓰는 우리의 슬픈 자화상을시는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정호승 시인은 귤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슬픔이 가난한 나그네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디서나 간절히 슬퍼할 수 있고, 어디서나 슬픔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집 담벼락에 홀로 기대어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과연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졸업을 하고 뒤늦게 취업 준비를 하는 사이 시간은 흘러갔고 운이 좋아 취업이라는 것을 했다. 그리고 직장인의 생활에 ane혀 몇 년이 흘러갔다. 물론 글쓰기도 함께였다.

글을 쓸 때마다 예전에 읽었던 책들이 내 마음속에 웅크리고 앉아서 나를 움직이고 있음을 발견하곤 한다. 글을 쓰게 해준 <슬픔이 기쁨에게>가 그렇고, 마음의 깨달음을 얻게 해준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그렇고, 수많은 밤을 새워가며 외웠던 시들이 그렇다. 예전에 읽었던 책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왔던 것이다. - 2017. 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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