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아름다운 우리 수필(2)

보해성산 2018. 9. 27.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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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 수필(2)

■ 이태동 엮음

제3부 삶

■ 페이터의 산문

이양하

만일 나의 애독하는 서적을 제한하여 이삼권 내지사오 권만을 들라면, 나는 그 중의 하나로 옛날 로마의 철학자,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暝想錄)을 들기를 주저하지 아니하겠다. 혹은 설움으로, 혹은 분노로, 혹은 욕정으로 마음이 흔들리거나, 또는 모든 일이 뜻 같지 아니하여 세상이 귀찮고, 아름다운 친구의 이야기까지 번거롭게 들릴 때, 나는 흔히 이 견인주의자(堅忍主義者者 : 굳은 의지로 참고 견딜 줄 아는 사람) 황제를 생각하고, 어떤 때는 직접 조용히 그의 명상록을 펴 본다. 그리하면 그것은 대강의 경우에 있어, 어느 정도의 마음의 평정을 회복해 주고, 당면한 고통과 침울을 많이 완화해주고 진무해준다. 이러한 위안의 힘이 어디서 오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모르거니와, 그것은 “모든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 가는 네 마음에 달렸다.” “행복한 생활이란 많은 물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라.” “모든 것을 사리(捨離 : 버리고 떠남)하라, 그리고 물러가 네 자신 가운데 침잠하라.”……이러한 현명한 교훈에서만 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도리어 그 가운데 읽을 수 있는 외로운 마음, 끊임없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가 생활의 필요조건이 되어 있는 마음, 행복을 단념하고 오로지 마음의 평정만을 구하는 마음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번역해 본 것은 직접 명상록에서 번역한 것이 아니요. 월터 페이터(영국의 예술 비평가, 작가)가 그의 <쾌락주의자 메이어리스>의 일장(一章)에 있어서, 황제의 연설이라 하여, 명상록에서 임의로 취재(取材 : 문학작품이나 가사 따위를 쓰는데 필요한 자료나 재료를 찾아내어 수집하거나 조사하여 얻음)한데다가 자기 자신의 상상과 문식(文飾 : 어구나 문장을 수식하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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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아름답게 꾸밈, 실수나 잘못을 변명하여 꾸며 댐)을 가하여 써 놓은 몇 구절을 번역한 것이다. 페이터는 다 아는 바와 같이, 세기말의 영국의 유명한 심미비평가로, 아름다운 것을 관조하고 아름다운 글을 쓰는 데 일생을 바친 사람이다.

나는 그의 <문예부흥의 찬란한 문체도 좋아하나, 이 몇 구절의 간소하고 장중한 문체도 거기 못지아니하게 좋아한다. 그리고 황제의 생각도 페이터의 붓을 빌어 잃은 것이 없을 뿐 아니라, 한층 아름다운 표현을 얻었다. 할 수 있지 아니한가 한다.

참다운 지혜로 마음을 가다듬은 사람은, 저 인구에 회자하는 호머의 시구 하나로도, 이 세상의 비애와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나뭇잎과도 흡사한 것, 가을바람이 땅에 낡은 잎을 뿌리면, 봄은 다시 새로운 잎으로 숲을 덮는다.

잎, 잎. 조그만 잎, 너의 어린애도, 너의 아유자(阿諛者 남에게 잘 보이려고 알랑거리는 사람), 너의 원수도, 너를 저주하여 지옥에 떨어뜨리려 하는 자나, 이 세상에 있어 너를 헐고 비웃는 자나, 또는 사후에 큰 이름을 남길자나, 모두 다 한 가지로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잎, 그들은 참으로 호머가 말한 바와 같이 봄철을 타고난 것으로 얼마 아니 하여서는 바람에 불리어 흩어지고, 나무에는 다시 새로운 잎이 돋아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공통한 것이라고는 다만 그들의 목숨이 짧다는 것뿐이다.

세상은 한 큰 도시, 너는 이 도시의 한 시민으로 이때까지 살아왔다. 아, 온 날을 세지 말며, 그날의 짧음을 한탄하지 말라. 너를 여기서 내보내는 것은, 부정(不正)한 판관이나 폭군이 아니요, 너를 여기 데려온 자연이다. 그러니 가라. 배우가 그를 고용한 감독이 명령하는 대로 무대에서 나가듯이, 아직 5막을 다 끝내지 못하였다고 하려느냐? 그러나, 인생에 있어서는 3막으로 극 전체가 끝나는 수가 있다. 그것은 작자(作者)가 상관할 일이요, 내기 간섭할 일이 아니다. 기쁨을 가지고 물러가라 너를 물러가게 하는 것도 혹은 선의에서 나오는 일인지도 모를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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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 예찬

민태원 소설가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살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巨船)의 기관과 같이 힘 있다.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바로 이것이다.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속에 든 칼이다. 청춘의 끓는 피가 아니라면 인간이 얼마나 쓸쓸하랴? 얼음에 싸인 만물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따뜻한 봄바람이다. 풀밭에 속잎 나고, 가지에 싹이 트고,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의 천지는 얼마나 기쁘며 얼마나 아름다우냐! 이것을 얼음 속에서 불러내는 것이 따뜻한 봄바람이다. 인생에 따뜻한 봄바람을 불어 보내는 것은 청춘의 피가 뜨거운지라, 인간의 동산에는 사랑의 풀이 돋고, 이상의 꽃이 피고, 희망의 놀이 뜨고, 열락의 새가 운다.

사랑의 풀이 없으면 인간은 사막이다. 오아시스도 없는 사막이다. 보이는 끝끝까지 찾아다녀도, 목숨이 있는 때까지 방황하여도 보이는 것은 거친 모래뿐이다. 이상의 꽃이 없으면 쓸쓸한 인간에 남는 것은 영락(零落)과 부패뿐이다. 낙원을 장식하는 천자만홍(千紫萬紅)이 어디 있으며, 인생을 풍부하게 하는 온갖 과실이 어디 있으랴?

이상! 우리의 청춘이 가장 많이 품고 있는 이상! 이것이야말로 무한한 가치를 가진 것이다. 사람은 크고 작든 간에 이상이 있음으로써 용감하고 굳세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이상! 빛나는 귀중한 이상! 그것은 청춘의 누리는 바 특권이다. 그들은 순진한지라 죄악에 병들지 아니하고, 그들은 앞이 긴지라 착목(着目)하는 곳이 원대하고, 그들은 피가 더운지라 실현에 대한 자신과 용기가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상의 보배를 능히 품으며 그들의 이상은 아름답고 소담스러운 열매를 맺어, 우리의 인생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다.

보라! 청춘을! 그들의 몸이 얼마나 튼튼하며, 그들의 피부가 얼마나 생생하며, 그들의 눈에 무엇이 타오르고 있는가? 우리 눈이 그것을 보는 때에, 우리의 귀는 생의 찬미를 듣는다. 그것은 웅대한 관현악이며, 미묘한 교향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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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뼈 끝에 스며들어가는 열락이 소리다.

이것은 피어나기 전인 유소년에게서 구하지 못할 바이며, 시들어가는 노년에게서 구하지 못할 바이며, 오직 우리 청춘에게서만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청춘은 인생의 황금시대다. 우리는 이 황금시대의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기 위햐여, 이 황금시대를 영원히 붙잡아 두기 위하여 힘차게 노래하며 힘차게 약동하자.

■ 나의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개의 은유

이어령

<어머니와 책>

나의 서재에는 수천 수만 권의 책이 꽂혀 있다. 그러나 언제나 나에게 있어 진짜 책은 딱 한 권이다.

이 한 권의 책, 원형의 책, 영원히 다 읽지 못하는 책, 그것은 나의 어머니다. 그것은 비유로서의 책이 아니다. 실제로 활자가 찍히고 손에 들어 펴볼 수도 있고 읽고 나면 책꽂이에 꽂아둘 수도 있는 그런 책이다.

나는 글자를 알기도 전에 책을 먼저 알았다. 어머니는 내가 잠들기 전 늘 머리맡에서 책을 읽고 계셨고 어느 책들은 소리 내어 읽어주시기도 했다.

특히 감기에 걸려 신열이 높아지는 그런 시간에 어머니는 소설책을 읽어주신다. 나는 아련한 한약 냄새 속에서 암굴왕, 무쇠탈, 흑두건, 그리고 이름조차 기억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들었다.

겨울에는 지붕 위를 지나가는 밤바람 소리를 들으며, 여름에는 장맛비 소리를 들으며, 나는 어머니의 하dis 손과 하얀 책의 세계를 방문한다.

어머니와 책의 세계는 꼭 의사가 주사를 놓고 버리고 간 상자와 같은 것이었다. 주삿바늘은 늘 나를 두렵게 했지만, 그 주사약의 앰풀을 담았던 상자 속의 반짝이는 은지나 흰 종이솜은 포근하고 아름다웠다.

조금 자라서 글자를 익하고 스스로 책을 읽게 되고 몽당연필로 무엇인가 글을 쓰기 시작한 뒤에도, 나에게는 언제나 어머니의 손에 들려 있던 책 한 권이 있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담긴 근원적인 그 책 한 권은 지금도 나를 따라다닌다.

어머니는 내 환상의 도서관이었으며 최초의 시요, 드라마였으며 끝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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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길고 긴 이야기책이었다.

<어머니와 나들이>

어머니는 최초의 외출, 집을 떠나고 마을을 떠나고 그리고 고향을 떠나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그냥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것, 집으로 돌아오고 마을로 돌아오고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법도 가르쳐 주셨다.

그것이 우리말 가운데 가장 미묘하고 아름다운 ‘나들이’다. 나들이는 나가면서 동시에 들어오는 모순을 함께 써버린 아름다운 우리말이다.

이 나들이의 절정은 십리 쯤 떨어진 외갓집을 찾아갈 때다. 그곳으로 가려면 장승이 서 있는 서낭당 고개를 넘어야 한다.

(여기가 바로 나의 에세이<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의 마지막 장에 나오는 바로 그 서낭당 고개다)

설화산 뒤편의 이 작은 분지에는 유난히 대추나무와 감나무가 많았고 그 나무가 우거진 곳에 외가가 있었다. 긴 돌담을 돌아 솟을 대문과 십장생도가 그려진 어머니의 장롱 속 같은 안채로 들어가면 정말 믿기지 않도록 늙으신 외할머니가 살고 계셨다.

미숫가루라도 외가에서 먹는 것은 집의 것과는 다른 맛이 난다.

외갓집은 공간만이 아니라 그 시간도 달랐다. 벽 시계는 모양도 시간마다치는 종소리도 우리 집 시계와는 달랐다. 종소리는 깊은 우물물 속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소리를 냈고, 문자판에는 알 수 없는 글자들과 십이간지의 동물들이 그려져 있었다.

어머니의 어머니가 살고 계시는 이 외갓집은 기왓골의 이끼처럼 훨씬 오랜시간으로, 이곳에 오면 어머니는 나처럼 작은 신발을 신은 아이가 되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떠날 때가 되면 어머니와 할머니는 서로 우신다. 외할머니는 긴 돌담을 돌아 우리가 서낭당 고개를 넘어갈 때까지 서 계시고 뒤돌아보기만 하면 빨리 가라고 손짓을 하신다.

떠나는 것과 돌아오는 것, 만남과 헤어짐……, 번쩍이는 비늘을 세우고 먼 이국의 바다로 헤엄쳐 나갔다가 다시 모천(母川)으로 회귀하는 연어 떼처럼, 어머니는 나에게 떠나는 법과 돌아오는 법을 가르쳐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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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뒤주>

바깥 하늘이 눈부시게 개일 때일수록 대청마루는 어둡다. 그 그늘진 곳에 게목나무(정자나무)의 묵직한 뒤주가 있고, 그 위에는 모란꽃 무늬를 그린 청화백자 같은 것이 놓여 있다.

나보다 키가 커서 그 뒤주 속을 들여다보려면 까치발을 떼야만 한다. 네 기둥과 두꺼운 나무판자로 짜여진 뒤주 모양은 어머니가 안방에 앉아 계신 것처럼 늘 마음을 든든하게 한다.

끼니때가 되면 이 뒤주에서 ‘수복강녕’이라고 손수 붓글씨로 쓰신 복 바가지로 어머니는 하얀 쌀을 퍼내신다. 대식구가 먹어야 하는 그 양식은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화수분 단지처럼 그 뒤주 속에서 어머니의 바가지 속으로 넘쳐 나온다. 많을 때에는 족히 30명이 넘는 식솔을 거느리시는 어머니는 이 뒤주처럼 묵직하고 당당하시다.

그러나 어머니는 밖에 나가실 때마다 끼니때가 아닌데도 꼭 뒤주 문을 여신다. 그리고는 엎드려서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신다. 왜 그러시는지를 몰라 하루는 어머니께 여쭈어보았다.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쌀 위에 글씨를 써 놓으면 남들이 양식을 퍼내 갈 수가 없게 된단다. 글씨 자국이 지워질 테니 말이다. 양식이 아쉬운 사람이 있으면 그냥 도와주어야지 훔쳐가게 해서는 안 되는 거야. 양식이 아까워서가 아니란다. 뒤주를 자물쇠로 잠그면 남을 의심하는 것이니 그들이 상처를 받게 되고, 그렇다고 그냥 놔 두고 집을 비우면 나쁜 짓을 할 생각이 없었던 사람들도 나쁜 짓을 하게 되는 거지. 쌀을 퍼간 사람보다 그런 틈을 준 사람이 더 죄를 짓는 거란다.

<어머니의 금계랍>

나는 막내였다. 늦게까지 어머니의 품에서 떠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젖에 금계랍(金鷄蠟)을 바르셨다고 한다. 금계랍은 하루거리(학질)에 먹는 키니네다. 그 맛이 얼마나 쓴 것인지 나는 잘 안다.

우리가 성장한다는 것은 어머니의 몸으로부터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의식이기도 하다. 그것이 나에게는 금계랍의 맛일 것이다.

테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 아픔을 겪어야 한다. 모태로부터 태어나는 순간 어머니와 연결된 그 탯줄을 끊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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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귤>

수술을 받기 위해서 어머니는 서울로 가셨다. 이른바 대동아 전쟁이 한창 고비였던 때라 마취제도 변변히 없는 가운데 수술을 받으셨다고 한다. 그런 경황에서도 어머니는 나에게 예쁜 필통과 귤을 보내주셨다. 필통은 입원 전에 손수 사신 것이지만, 귤은 병문안 온 손님들이 어렵게 구해서 가져온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귀한 것이라고 머리맡에 놓고 보시다가 끝내 잡숫지를 않으시고 나에게 보내주신 것이다.

그 노란 귤과 함께 어머니는 하얀 상자 속의 유골로 돌아오셨다. 물론 그 귤은 어머니도 나도 누구도 먹을 수 없는 열매였다. 그것은 먹는 열매가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태양이었고 그리움의 달이었다. 그 향기로운 몇 알의 귤은 어머니와 함께 묻혀졌다.

<어머니와 바다>

살아 있는 것 같으면서도 죽어 있는 것, 꽉차 있으면서 텅 비어 있는 것, 이것이 바다의 역설이다.

돌아가신 어머니, 그러나 늘 내 눈앞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시는 어머니, 살아 있는 어떤 사람보다도 가깝게 계신 어머니 기쁠 때 제일 먼저 달려가 자랑하는 어머니, 슬플 때, 고통스러울 때 아직도 응석을 부릴 수 있는 어머니, 그러나 언제나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딱딱한 흙의 저편 밖에서만 존재하고 있는 어머니, 이 ‘현존하는 거대한 부재’, 그 바다가 바로 나에게 있어서는 어머니인 것이다.

나는 오늘도 이 갈증의 바다 앞에 서 있다.

■ 움직이는 고향

허세욱 시인, 수필가

어머님이 홀로 되신 지 어언 2년이 다가온다. 그러니까 내 마음의 포근한 고향도 때마다 봇짐을 싸듯이 자리를 옮기기 2년이 가까워온다.

고향이 고향으로 불리는 내력은 많다. 누구는 자기가 출생한 곳을, 누구는 선영이 있는 곳을, 누구는 호적상의 본적을, 누구는 친족의 집단취락을 말하지만, 나에겐 부모가 계신 곳, 어머니가 계신 곳을 말한다. 어머니가 담그신 청국장 시루가 아랫목을 좌정한, 그런 발효된 메주 냄새 속에서 나는 고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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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씬하게 느낀다. 본적은 있어도 고향이 없는 것은 메주 냄새에 밴 어머니의 퀴퀴한 안방이 없기 때문이다.

칠십 평생을 시골 지주 며느리요. 4대 봉사의 종부였던 어머님이 아버님을 여윈 뒤 홀연 정착을 마다하시고 무거운 노구를 이끌고 여기저기 자식 집을 찾아 때 아닌 유랑을 한다. 실향민도 피난민도 아니면서, 자그마한 가방을 드시고, 그것도 겨우 천 원짜리 거무죽죽한 가방을.

어쩌다가 나는 그 보퉁이의 내역이 궁금해서 어머니 몰래 가방을 풀어 보았다. 치마 저고리 한두 벌에 속옷 몇 벌, 그리고 언젠가 내가 구해드린 강위산(强胃酸) 약병, 눈에 익은 귤과 사과, 부스러기 된 과자, 껌, 사탕, 땟국이 절반 쯤 밴 수건에 빗과 손거울이 한 쪽으로 구겨져 있었다. 젊은이 같으면 큰 자개장에 걸어둘 옷이 여기에 뭉쳐 있고, 울긋불긋 경대에 즐비할 세면도구가 여기에 끼어 있고, 분합에나 넣어야 할 상용 약들이 여기서 구르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간식으로 드린 과일과 과자를 여기에 모아두신 것을 보 았을 때 갑자기 축축해지는 눈언저리가 무겁다.

그리고 가장자리 주머니엔 언젠가 해드린 금비녀가 헝겊 조각에 말리어 있고, 새 며느리가 지어드렸을 새 버선이 셀로판 종이에 싼 채로 있고, 똘똘 말아둔 몇 장의 지폐도 보였다. 말하자면 옷장도 경대도 분합도 모두 여기 다목적 가방에 담겨 있는 셈이다. 어쩌면 어머님의 동산(動産)전부가 아닐까?

기실 그 비닐 가방 속 동산의 용처는 꼭 어머님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귤, 껌, 사탕 따위는 각지에 흩어져 사는 손자 손녀들에게 줄 선물로 충용될 것이 뻔했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어머님은 상부(喪夫)한 뒤 이 집의 대가모(大家母)에서 손자들의 보모로 전업된 셈이다. 일은 훨씬 번거롭고 정은 보다 분산되어야 했다. 갈 곳은 많아도 마음은 늘 공허했고, 한가한 시간은 많아도 늘 초조했다. 그때마다 어머님은 저 봇짐을 싸들고 피곤한 여로에 훌쩍 오르셨으리라.

어제 아침 전주 막내 동생 집으로 떠나는 어머님은 여느 때처럼 그 비닐 가방을 들고 떠나셨다. 말이야 서울이 갑갑해서 견딜 수 없다지만 기실 백일이 갓 넘은 손녀의 재롱을 보고 싶어서였고 그보다는 선산 가까운 데서 축축한 진흙을 밟고 싶어서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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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새봄이 깊어갔다. 라디오에선 <고향의 봄>이 물결치지만 왠지 내가 뛰놀던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가 한창일 고향집에 대한 절실한 그리움을 잃어가고 있는 거다. 가만히 생각하면, 지금 그곳엔 백양목 흰 두루마리 아버님도 세상을 뜨셨고, 메주를 끓이시던 어머님도 고향 아닌 타관에 계시기 때문이다.

이십 년 전만 해도 우리 몸을 감싸고 있는 의류들이 거의 어머님의 손때 묻은 목면질(木棉質) 그런 것이었다. 적어도 우리 알몸에 닿는 내의만이라도. 지금 우리 몸뚱이에 걸쳐진 의류 한 오라기의 실도 어머님이 주신 것은 없었다. 지금 우리 몸뚱이에 어머님의 손때가 무용해지듯이, 고향도 저만큼 먼 거리에서 때로는 그립고 때로는 아예 잊혀지고 있다.

그래도 나에겐 고향이 있다. 그런데 어머님 내심에 움직이고 있는 고향의 소재(所在)처럼, 나도 고향의 소재가 안개처럼 몽롱해지고 더러는 어머님의 소재를 따라 옮겨지고 있다. 어머님의 꾀죄죄한 봇짐을 따라 나의 목마른 향수는 .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 안산처럼 내 곁에 앉아 있어도 꼬까옷 동년(童年)을 재현시켜주던 어머님이 자꾸만 먼 길을 떠나시니 고향은 더구나 아물아물 멀어지고 여기저기로 움직인다.

■ 거꾸로 보기

법정

침묵의 숲이 잔기침을 하면서 한 꺼풀씩 깨어나고 있다. 뒤꼍 고목나무에서 먹이를 찾느라고 쪼아대는 딱따구리 소리가 자주 들리고, 산비둘기들의 구우구우거리는 소리가 서럽게 서럽게 들려오고 있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숲을 찾아오는 저 휘파람새, 할미새가 뜰에 내려와 까불까불 가벼운 몸짓으로 인사를 한다. 저 아래 골짝에서부터 안개처럼 뽀얗게 새 움이 터서 밀물처럼 산허리로 올라오고 있다. 머지않아 숲에는 수런수런 신록의 문이 열리리라 그때는 나도 숲에 들어가 한 그루 정정한 나무가 되고 싶다. 나무들처럼 새 움을 틔우고 가지를 뻗으면서 연둣빛 물감을 풀어내고 싶다. 가리워둔 속뜰을 꽃처럼 활짝 열어 보이고 싶다.

허허, 이 봄날이 나를 흔들려고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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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는 항시 듣던 소리를 즐거워하고 눈은 새로운 것을 보고자 한다는 말은 그럴 법하다. 음악을 듣더라도 귀에 익은 곡만을 즐겨 듣고, 새 것을 찾아 눈은 구경거리의 발길을 멈추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 귀는 좀 보수적이고 눈은 제법 진보적인 셈.

그날도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서까래 끝에 열린 하늘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모로 돌아누워 산봉우리에 눈을 주었다. 갑자기 산이 달리 보였다. 하, 이것 봐라 하고 나는 벌떡 일어나, 이번에는 가랑이 사이로 산을 내려다보았다. 우리들이 어린 시절 둥무들과 어울려 놀이를 하던 그런 모습으로. 그건 새로운 발견이었다. 하늘은 호수가 되고, 산은 호수에 잠긴 그림자가 되었다. 바로 보면 굴곡이 심한 산의 능선이 거꾸로 보니 훨씬 유장하게 보였다. 그리고 숲의 빛깔은 원색이 낱낱이 분해되어 멀고 가까움이 선명하게 드러나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랐다. 나는 하도 신기해서 일어서서 바로 보다가 다시 거꾸로 보기를 되풀이 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람을 대하거나 사물을 보고 인식하는 것은 틀에 박힌 고정관념 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알아버린 대상에서는 새로운 모습을 찾아내기 어렵다. 아무개 하면, 자신의 인식 속에 들어와 이미 굳어버린 그렇고 그런 존재로밖에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건 얼마나 그릇된 오해인가. 사람이나 사물은 끝없이 형성되고 변모하는 것인데.

그러나, 보는 각도를 달리함으로써 그 사람이나 사물이 지닌 새로운 면을, 아름다운 비밀을 찾아낼 수가 있다.

■ 우리들의 얼굴

법정

사람의 얼굴에서 신(神)의 모습을 본다는 말도 있지만, 사람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노라면 문득 안쓰럽고 가엾은 연민의 정을 느낄 때가 있다.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처지로 보아 몹시 미운 놈일지라도 한참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으면, 미운 생각은 어디로 사라지고 측은하고 가엾은 생각만 남는다. 아무리 의젓하고 뻣뻣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돌려세워보면 그 뒤뜰에는 우수의 그늘이, 인간적인 비애가 서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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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은 가려진 내면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환한 얼굴과 싱그러운 미소로써 기쁨에 넘치는 속뜰을 드러내고, 그늘진 표정과 쓸쓸한 눈매로써 우수에 잠긴 속마음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얼굴은 얼의 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낙원이 아닌 사바세계, 사바세계란 그 어원은 범어(梵語)에서 온 말인데 ‘참고 견디면서 살아가는 세상’이란 뜻이다. 참고 견디면서 살아온데 길이 든 우리는 또 참고 견디면서 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숨 쉬고 먹고 자고 배설하는 것만으로 만족한다면 짐승이나 다를 게 없다. 보다 높은 가치를 찾아 삶의 의미를 순간순간 다지고 드러냄으로써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는 것이다. 그러니 산다는 것은 순간마다 새롭게 피어남이다. 이 탄생의 과정이 멎을 때 잿빛 늙음과 질병과 죽음이 문을 두드린다.

먼저 살다 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하나같이, 인생은 짧다고 한다. 어물어물하고 있을 때 인생은 곧 끝나버린다는 것. 후딱 지나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곧 끝나버린다는 말이다.

12세기 선승(禪僧) 원오(圜悟) 극근(克勤)은 그의 어록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생야전기현(生也全機現) 사야 전기현(死也全機現)”

살 때는 삶에 철저하여 그 전부를 살아야 하고, 죽을 때는 죽음에 철저하여 그 전부를 죽어야 한다. 삶에 철저할 때는 털끝만치도 죽음 같은 걸 생각할 필요가 없다. 또한 죽음에 당해서는 조금도 생에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된다. 살 때에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러서도 죽지 못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림자다.

역사상 독재자들의 얼굴에는 누구누구 할 것 없이 웃음이 없다. 무섭도록 굳어 있기만 하다. 그의 내면이 겹겹으로 닫혀 있기 때문이리라.

자기 얼굴은 자기가 만든다고 했다. 자기가 만든다는 말은 동시에 자기에게 책임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링컨의 절친한 친구 한 사람이 링컨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새로운 각료로 기용해보라고 어떤 사람을 천거했다. 링컨은 친구가 소개해 보낸 사람을 만났지만 그를 기용하지는 않았다. 며칠 후 친구가 대통령을 찾아와, 자기가 소개한 사람의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아 거절한 거냐고 물었다. 이때 링컨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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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네.”

“여보게, 얼굴이야 부모가 만들어 준 것인데 그의 책임은 아니지 않는가.”

친구의 항의를 듣고 링컨은 이렇게 말한다.

“어릴 적에는 부모가 만들어 준 얼굴로 통하지만, 인간이 마흔을 넘어서면 자기 얼굴에 대해서 자기 자신이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네.”

그렇다 우리는 아무리 재미없는 세상에서라도 우리들의 얼굴을 만들 책임이 있다.

■ 편지

김후란 시인

편지는 받을 때 희망이요. 읽고 나면 실망이라고 한다. 펼치기까지의 기대가 컸던 탓으로 오히려 읽고 나서의 허전함이 실망을 안겨 준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렇게만 정의할 수는 없을 것이나, 어쨌든 편지란 보내는 이에 따라서 또 담겨진 사연에 따라서 유열(愉悅)과 비감(悲感)의 촉발제라 여겨진다.

편지를 기다리는 재미도 줄었다. 전화탓이다. 전화가 통할 수 있는 한 우리는 주저없이 전화 다이얼을 돌리는 것이다. 쾌적한 신호가 가고 응답이 있으면 일은 간결하게 처리되어진다. 듣고 싶은 목소리일 때 퉁겨나듯 탄력 있는 호흡의 일치를 느끼고 행복한 일순간을 맛보기도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화가 끝나고 나서의 허전함이 너무 클 때가 있다. 허공에 멈춘 빈 손을 내려다보며 못 견디게 쓸쓸해지는 것이다.

편지는 막상 얼굴을 마주하고는 도저히 표현이 안 되던 밀도감 짙은 심중의 한 오라기까지도 전달할 수 있는 데에 글의 위력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밤 새워 편지를 쓸 수 있으며 받은 편지를 소중히 간직하기도 한다.

사랑이 담긴 편지에도 사랑의 유형 나름일 것이며 연인 사이, 부모와 자식 사이, 혹은 사제지간이나 친구 사이 등 주고 받는 대상과 사연에 따라 빛깔과 내음과 열도나 순도가 다를 것이다. 스테판 츠바이크의 <모르는 여인의 편지>처럼 일방적인 사랑의 아픔을 생의 마지막 순간에 불길처럼 태워보낸 무서운 편지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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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이의 가슴에 칼을 꽂거나 상처를 입히는 편지, 기대어 오는 마음을 차갑게 잘라내는 거절의 편지, 허망한 위선의 편지, 슬픔을 전하는 안타까운 편지, 쓰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고통의 용광로에 던져진 듯 괴로운 편지도 이 세상엔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전화의 혜택을 모르던 시절 외롭고 고된 출가외인 규수들은 육친에의 정을 그리움이 사무친 묵필로 적어 눈물로 얼룩지워 보내곤 했다. 멋을 아는 풍류객은 시조 한 수를 읊어 편지를 대신하기도 하였다.

편지는 미사여구를 빌어서 장식한 남의 목소리보다는 문맥이 선명하고 직정(直情 생각한 대로 꾸밈없이 그대로 드러냄)적인 표현이 좋다. 그 위에 적절한 예의와 성의가 담겨 있다면 그 편지는 일단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편지는 말없는 웅변, 한 마디로 열 가슴을 열어 보인다. 쓰기에 따라서는 읽는 사람의 영혼까지도 쓸어안을 농밀한 편지가 될 수도 있다. 훈훈한 정에 끌려 혼자 서 있어도 혼자가 아님을 절감케 하기도 한다.

세상이야 어떻게 변하든 편지를 주고받는다는 건 아름다운 인간사의 하나라고 하고 싶다. 쓸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쓰는 게 좋을 것이다.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의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유대감, 편지를 쓰면서 상대방을 생각하고 있었을 시간의 소중함, 그런 사사로운 감각 같은 것이 진정 우리 생활엔 있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 온갖 테마로 엮어진 갖가지 편지 중에도 가장 절실한 건 아마도 써놓고 보내지 못하는 편지일 것이다.

쓰고도 보내지 못하는 편지, 영원히 보낼 수 없는 편지, 그런 편지를 밤이 깊도록 쓰고 앉은 외로움 가슴의 사연일 것이다.

■ 귀한 만남

김후란

바닷가를 거닐다가 눈에 띈 영롱한 조개껍질을 집어 든다. 다시 보면 발길에 채이도록 흔한 조개껍질에 불과할 수도 있으나, 그 중에서도 유독 내 눈을 끌어당긴 한 순간의 인연이 귀해서 집에까지 가져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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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절을 찾아갔다가 뒤뜰에 뒹구는 기왓장 조각을 발견하고 옛스런 무늬에서 그 옛날의 숨결을 느낀다.

몇백 년간 절 지붕에 얹혀 있다가 새 기와에 밀려 버림받은 기왓장, 그 한 조각에서 기와 굽던 이와 나의 만남이 이뤄진 사실도 생각하면 신기한 것이다.

한 번은 친구와 더불어 햇볕이 따가운 강가를 거닐었다. 가느다란 강물은 맑았으나 모래밭을 끼고 도는 게 아니라 빽빽하게 들어찬 돌밭을 안고 흘렀다.

그런데 우연히, 참으로 우연히 한 개의 돌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걸 보았다. 손바닥만 하고 납작하게 생긴 돌에 농무(農舞)를 추고 있는 사람 모습이 박혀 있었다. 나는 그 돌을 집었다.

들여다볼수록 무늬는 살아서 춤을 춘다. 농악 소리가 울리고 상모 끝에 길게 늘어진 끈이 빙글빙글 돈다. 이 돌이야 전문적이 수석 수집가에겐 어떻게 인정을 받을지 모르지만 무늬는 일품이다.

나는 이 한 개의 돌을, 아니 그 속에 살고 있는 농무 추는 사람과의 만남을 위해서 나도 모르게 돌밭 강가까지 끌려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돌아다보면 나의 경우도 잊을 수 없는 몇몇 사람과의 뜻 깊은 만남이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소리로 부딪쳐왔다. 나 또한 그들에게 크든 작든 어떤 영향을 미쳤을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인간생활이란 그렇게 서로 영향하는 사람끼리 성장의 계기가 되어주고 혹은 상처를 입히면서 살기 마련인 것 같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이란 반드시 기쁨으로만 연결되지 않는 게 인간관계임을 뼈저리게 느낄 때가 있다.

‘만남’에는 또 안젠가 ‘헤어짐’이 있기 때문이다. ‘약속과 파이는 깨어지기 위해서 만들어진다’는 속담이 있지만 만남이야말로 헤어지기 위해서 있었던 것처럼 반드시 이별의 쓴 잔을 마시게 한다. 그렇게 만나고 헤어지고 하면서 단련되어 가는 게 인간사이다. 마치 불에 달군 쇠가 망치로 두드려 맞으면서 더욱 야무진 쇠붙이 물건이 되어지듯이.

그렇더라도 만남은 매번 새롭고 매번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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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잘못 만나 자기 자신이 진훍탕으로 끌려 가는 수도 있다. 가난 때문에 타락하는 경우보다는 나쁜 교우(交友)로 인해 일생을 잘못된 길에서 헤매는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은 인간관계의 무서운 인연을 말해준다.

만나지 않았어야 하는 만남을 거부하고 그 운명의 잔을 쏟아버리는 용기야 말로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고통 중에도 가장 잔혹하고 살점을 도려내는 아픔이긴 하지만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시련이라 할 것이다.

■ 진정한 행복

장영희 서강대 교수

가끔, 무심히 들은 한마디 말, 우연히 펼친 책에서 얼핏 본 문장하나, 별 생각 없이 들은 노래하나가 마음에 큰 진동을 줄 때가 있다. 아니, 아예 삶의 행로를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어느 잡지에서 목포의 어느 카바레 악단에서 트럼펫연주를 하고 있는 유 선생이라는 사람이 쓴 수기를 읽었다. 그는 청소년 시절부터 절도, 강간 등, 각종 범죄를 짓고 10여 년간 감옥을 들락거리다가 어느 날 아홉 번째 다시 감옥으로 후송되는 경찰차의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밖은 이미 어두웠고, 그는 창밖으로 이제 앞으로 몇 년 동안 보지 못할 휘황찬란한 네온사인들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때 마침 라디오에서 김세화의 <눈물로 쓴 편지>가 흘러나왔다.

“눈물로 쓴 편지는 읽을 수가 없어요. 눈물은 보이지 않으니까요. 눈물로 쓴 편지는 고칠 수가 없어요…….”

순간 애잔한 그 노랫소리가 그의 영혼의 지축을 흔들었다. 마치 신의 계시처럼, 자신이 너무나 삶을 낭비하고 있다는 회한의 눈물이 쏟아졌다. 후송차에서 내릴 때 그는 새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는 모범수가 되어 각종 갱생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여러 가지 악기를 배웠고, 지금은 행복한 가장으로 쉬는 날이면 아들과 함께 양로원이나 고아원을 찾아다니며 연주회를 가진다. 유선생은 “그 노래를 부른 가수는 꿈에도 모르겠지만, 그 노래는 영원히 내 영혼의 구원자 였다. 그 노래를 듣지 못했다면 아마 나는 아직 감옥에 있거나 아니면 이 세상에 해만 끼치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라고 수기를 맺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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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있는 것은 우리는 눈을 뜨고 있는 동안 내내 행복을 추구하지만, 막상 우리가 원하던 행복을 획득하면 그 행복을 느끼는 것은 한 순간이라는 것이다. 일단 그 행복에 익숙해지면 그것은 더 이상 행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복에 관한한 우리는 지독한 변덕꾸러기이고 절대적 행복, 영원한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

제4부 생활

■ 딸깍발이

이희승

‘딸깍발이’란 것은 ‘남산골 샌님’의 별명이다. 왜 그런 별호가 생겼느냐 하면 남산골 샌님은 지나 마르나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마른 날은 나막신 굽이 굳은 땅에 부딪쳐서 딸깍딸깍 소리가 유난하였기 때문이다. 요새 청년들은 아마 그런 광경을 못 구경하였을 것이니, 좀 상상하기에 곤란할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일제 시대에 일인들이 ‘게다’를 끌고 콘크리트 길바닥을 걸어다니던 꼴을 기억하고 있다면 ‘딸깍발이’라는 명칭이 붙게 된 까닭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남산골 샌님이 마른 나막신 소리를 내는 것은 그다지 얘깃거리가 될 것도 없다. 그 소리와 아울러 그 모양이 퍽 초라하고, 궁상이 다닥다닥 달려 있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인생으로서 헌 고비가 겨워서 머리가 희끗희끗할 지경에 이르기 까지 변변하지 못한 벼슬이나마 한 자리 얻어하지 못하고 다른 일 특히 생업에는 아주 손방(아주 할 줄 모르는 솜씨)이어서, 아예 손을 댈 생각조차 아니 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극도로 궁핍한 구렁텅이에 빠져서, 글자 그대로 삼순구식(三旬九食)의 비참한 생활을 해가는 것이다. 그 꼬락서니라든지 차림차림이야 여간 장관이 아니다.

두 볼이 야윌 대로 야위어서, 담배 모금이나 세차게 빨 때에는, 양 볼의 가죽이 입 안에서 서로 맞닿을 지경이요. 콧날은 날카롭게 오똑 서서 꾀와 이지만이 내발릴 대로 발려 있고. 사철 없이 말간 콧물이 방울방울 맺혀 떨어진다. 그래도 두 눈은 개가 풀리지 않고, 영채가 돌아서 무력이라든지 낙심의 빛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아래 윗입술이 쪼그라질 정도로 굳게 다문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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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그 의지력을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다. 많지 않은 아랫수염이 뾰족하니 앞으로 향하여 휘어 뻗혔으며, 이마는 대개 툭 소스라쳐 나오는 편보다, 메뚜기 이마로 좀 편편하게 버스러진 것이 흔히 볼 수 있는 타입이다.

이러한 화상이 꿰맬 대로 꿰맨 망건을 도토리같이 눌러쓰고, 대우가 조글조글한 헌 갓을 좀 뒤로 젖혀 쓰는 것이 버릇이다. 서리가 올 무렵까지 베중의 적삼이거나 복(伏)이 들도록 솜바지 저고리의 거죽을 벗겨서 여름살이를 삼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그리고 자락이 모지라지고, 때가 꾀죄죄하게 흐르는 도포나 중치막을 입은 후, 술이 다 떨어지고 몇 동강을 이은 띠를 흉복통에 눌러 띠고, 나막신을 신었을망정, 행전은 잊어버리는 일 없이 치고 나선다. 걸음을 걸어도 일인(日人)들 모양으로 경망스럽게 벌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느럭느럭 갈짓자 걸음으로, 뼈대만 헝성한 호리호리한 체격일망정, 그래도 두 어깨를 턱 젖혀서 가슴을 뻐기고, 고개를 휘번덕거리는새레 곁눈질 하나 하는 법 없이 눈을 내리깔고 코끝만 보고 걸어가는 모습, 이 모든 특징이 ‘딸깍발이’란 속에 전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샌님들은 그다지 출입하는 일이 없다. 사랑이 있든지 없든지, 방 하나를 따로 차지하고 들어앉아서, 폐포파립(弊袍破笠)이나마 의관을 정제하고, 대개는 꿇어앉아서 사서오경을 비롯한 유교전적을 얼음에 박밀듯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내리 외는 것이 날마다 그의 과업이다. 이런 친구들은 집안 살림살이와는 아랑곳없다. 가다가 굴뚝 연기를 내는 것도 안으로서 그 부인이 전당을 잡히든지 빚을 내듣지 이웃에서 꾸어 오든지 하여 겨우 연명이나 하는 것이다. 그러노라니, 쇠털같이 허구한 날 그 실내(室內)의 고심이야 형용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런 샌님의 생각으로는 청렴개결(淸廉介潔)을 생명으로 삼는 선비로서 재물을 알아서는 안 된다. 어찌 감히 이해를 따지고 가릴 것이냐. 오직 예의와 염치가 있을 뿐이다. 인(仁)과 의(義) 속에 살다가 인과 의를 위하여 죽는 것이 떳떳하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배울 것이요. 악비(岳飛)와 문천상(文天祥)을 본받을 것이다. 이리하여, 마음에 음사(淫邪)를 생각하지 않고, 입으로 재물을 말하지 않는다. 어디 가서 취대(取貸)하여 올 주변도 못 되지마는. 애초에 그럴 생각은 염두에 두는 일이 없다.

실상 그들은 가명인(假明人)이 아니었다. 우리나라를 소중화로 만든 것은 어줍지 않은 관료들의 죄요. 그들의 허물이 아니었다. 그들은 너무 강직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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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목이 부러져도 굴하지 않는 기개, 사육신도 이 샌님의 부류요, 삼학사도 ‘딸깍발이’의 전형인 것이다. 올라가서는 포은 선생도 그요, 근세로는 민충정(閔忠正)도 그다. 국호와 왕위 계승에 있어서 명, 청의 응낙을 얻어야 했고, 역서(曆書)의 연호를 그들의 것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역대 임금의 시호를 제대로 올리고, 행정면에 있어서 내정의 간섭을 받지 않은 것은 그래도 이 샌님 혼(魂)의 덕택일 것이다.

국사에 통탄한 사태가 벌어졌을 적에, 직업인으로써 지존에게 직소(直訴)를 한 것도 이 샌님의 족속인 유림에서가 아니고 무엇인가. 임란 당년에 국가의 운명이 단석(旦夕)에 박도 되었을 때,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의 두목들도 다 이 ‘딸깍발이’기백의 구현인 것이 의심 없다.

구한국 말년에 단발령이 내려졌을 적에 각지의 유림들이 맹렬하게 반대의 상서를 올리어서.

“이 목은 잘릴지언정 이 머리는 깎을 수 없다”고 부르짖고 일어선 일이 있었으니, 그 일 자체는 미혹하기 짝이 없었지만 죽음도 개의하지 않고 덤비는 그 의기야말로 본받음직 하지 않은 바도 아니다.

현대인은 너무 약다. 전체를 위하여 약은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 자기 본위로만 약다. 백년대계를 위하여 영리한 것이 아니라, 당장 눈앞의 일, 코앞의 일에만 아름아름하는 고식지계(姑息之計)에 현명하다. 염결(廉潔)에 밝은 것이 아니라, 극단의 이기주의에 밝다. 이것은 실상은 현명한 것이 아니요. 우매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제 꾀에 제가 빠져서 속아 넘어갈 현명이라고나 할까. 우리 현대인도 ‘딸각발이’ 정신을 좀 배우자.

첫째 그 의기(義氣)를 배울 것이요. 둘째, 그 강직을 배우자. 그 지나치게 청렴한 미덕은 오히려 분간을 하여가며 배워야 할 것이다.

■ 생활인의 철학

김진섭

철학을 철학자의 전유물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일도 무리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철학은 오늘날 그 본래의 사명 - 사람에게 인생의 의지와 인생의 지식을 교시(敎示)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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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의도를 거의 방기하여 버렸고 철학자는 속세와 절연하고 관외(關外)에 은둔하여 고일(高逸)한 고독경(孤獨境)에서 오로지 자기의 담론에만 경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철학과 철학자가 생활의 지각을 완전히 상실하여버렸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러므로 생활 속에서 부단히 인생의 예지(叡智)를 추구하는 현대 중국의 ‘양식의 철학자’ 임어당(林語堂)이 일찍이 ‘내가 임마누엘 칸트를 읽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석 장 이상 더 읽을 수 있었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논리적 사고가 과도의 발달을 성수(成遂)하고, 전문적 어법이 극도로 분화한 필연의 결과로서, 철학이 정치 경제보다도 훨씬 후면에 퇴거(退去)하여, 평상인은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철학의 측면을 통과하고 있는 현대문명의 기묘한 현상을 지적한 것으로서 사실상 오늘이 있어서는 교육이 있는 사람들도, 대개는 철학이 있으나 없으나 별로 상관이 없는 대표적 과제가 되어 있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철학자에게 철학이 필요한 것과 같이 속인(俗人)에게도 철학은 필요하다. 왜냐하면, 한 가지 물건을 사는 데에 그 사람의 취미가 나타나는 것이 친구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도 그 사람의 세계관, 즉 철학은 개재되어야 할 것이요, 자기의 직업을 결정하는 경우에도 그 근본적 계기가 되는 것은 물론 그 사람의 인생관이 아니어서는 아니 되겠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들의 결혼이라는 것을 한 번 생각해볼 때, 한 남자로서 혹은 여자로서 상대자를 물색함이 있어서 실로 철학은 우리들의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는 훨씬 지배적이고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됨을 알 수 있을 것이요 우리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생활을 설계하느냐 하는 것도 결국은 넓은 의미에서 우리들이 부지중에 채택한 철학에 의지하여 실행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흔히 철학자에게서 생활에 대한 예지의 부족을 인식하고 크게 놀라는 반면에는, 농어산촌의 백성 또는 일개의 부녀자에게 철학적인 달관을 발견하여 깊이 머리를 숙이는 일이 불소함을 알고 있다. 생활인으로서의 나에게는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생활 체험에서 우러난 소박하고 진실한 안식(眼識)이 고명한 철학의 난해한 글보다는 훨씬 맛이 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의 좋은 경구는 한권의 담론서(談論書)보다 나은 것이다. 그리하여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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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 인생의 지식인 철학의 진의를 전승하는 현철(賢哲)이 존재한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래서 이러한 무명의 현철은 사실상 많은 생활인의 머릿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생활의 예지 - 이것이 곧 생활인의 귀중한 철학이다.

■ 꽃 떨어져도 봄은 그대로

김태길 서울대 명예교수 수필가

좋은 글은 읽는 이에게 감동을 준다. 글재주와 짜임새에 있어서 나무랄 것이 없더라도, 감동을 주지 못한다면 좋은 글이 아니다.

글이 감동을 주는 요인에도 여러 가지 경우가 있다. 표현의 절묘함이 감동을 주기도 하고, 작품 속을 흐르는 정서가 감동을 일으키기도 하며 세상을 보는 작가의 안목이 감동을 부르기도 한다.

한당(閑堂)의 수필 <봄을 보내며>는 특별히 문장이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그 가운데 깊은 정서가 흐르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감명 깊게 읽히는 것은, 그 가운데 심오한 삶의 지혜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한당은 이 작품에서 청대 말기의 중국 학자 유월(兪樾)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유월이 과거에 응시했을 때 ‘꽃은 떨어져도 봄은 그대로 있다(花落春仍在, *仍인할 잉)’로 시작하는 오언시를 지어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이야기다.

유월은 벼슬길에 오른지 오래지 않아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을 당했다. 소주와 항주 등지의 서원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고전 연구에 몰두한 결과 백가지를 헤아리는 많은 저서를 냈다. 그러다가 나이 70을 넘어서 왕념손(王念孫)과 왕안지(王引之) 부자의 학문에 심취하게 되어, 그때까지의 자기의 연구가 방법론적으로 큰 결함을 안고 있음을 깨닫는다.

유월은 왕씨 부자의 방법을 따라서 학문 연구를 다시 시작하기에는 자기가 너무 늙었다고 한탄해 마지 않았다. 이 정경을 목격한 그의 친구 한 사람이 ‘꽃은 떨어져도 봄은 그대로 있다’는 유월 자신의 시를 상기하라고 일렀다. 이 말에 용기를 얻어서 유월은 학문 연구의 새 출발을 하였고, 15년 동안 각고 면려하여 후세에 남을 큰 업적을 쌓기에 성공하였다.

한당이 소개한 유월의 이야기는 이젠 너무 늙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큰 용기를 준다. 고희를 넘어서 새로 시작한 일이 큰 열매를 얻었다는 선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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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있다는 사실은 노년에게도 크나큰 가능성이 남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꽃은 떨어져도 봄은 그대로 있다’는 시구의 정신을 넓게 해석할 때, 실의에 빠진 모든 사람들은 새출발의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항상 존재한다는 원리를 깨달을 것이다.

■ 고독

박이문

고독은 남들의 나에 대한 무관심을 의식할 때 생기는 경험이다. 사람으로서 나는 사회적 동물이다. 따라서 나는 남들과 이해관계를 맺고 상호 보존의 관계를 지니며 산다. 그러나 남들의 도움을 꼭 필요로 하는 극한 상황에서 나는 흔히 남들의 무관심을 발견한다. 나는 내가 혼자라는 것, 사회적 동물이면서도 근본적으로 하나의 개체로서 혼자 존재해야 하는 실존적 존재, 비사회적인 존재임을 의식한다. 남은 차다. 사회는 냉혹하다. 나는 혼자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군중 속에서 고독을 느낀다. 광장의 고독이 있다. 나를 대신하는 어떤 이가 있을 수 없다. 나를 대신해서 나의 기쁨이나 고통을 느껴줄 사람은 없다. 나를 대신해서 살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아무도 나 대신 죽어줄 수는 없다. 우리는 누구나 혼자 와서 혼자 살다가 혼자 기뻐하고 혼자 괴로워하다가 혼자 죽는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따라야 하는가 아닌가의 문제는 하느님이 그를 대신해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만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따를까 아니면 아들을 살릴까를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예수는 자신의 신념을 버릴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인가를 혼자서, 오직 혼자서만 선택해야 한다. 아무리 괴롭더라도 배우자를, 학교를 선택해야 하며, 우리들의 병사는 아무리 괴롭더라도 조국을 등질 것인가 아니면 적군의 손에 죽을 것인가를 결정해야만 한다. 고독한 결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고독은 우리가 그냥 사물이 아니라 의식의 자유를 가진 존재임을 드러낸다. 자유롭기 때문에, 아무리 도피하려 해도 도피할 수 없는 자유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선택해야하고, 그렇기 때문에 괴롭고 그 괴로움은 절대로 나의 것, 오로지 나만의 결정에 달려 있기 때문에 나는 궁극적으로 고독을 느껴야 한다. 이처럼 고독은 자유와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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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를 갖고 있다. 고독과 자유는 인간의 이른바 실존적 상황의 두 가지 측면에 불과하다.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나, 나의 삶, 나의 행동, 나의 영광과 수치, 고독 속에서 나는 나의 유일성, 유일한 존재로서의 나를 발견한다. 고독 속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적나라한 자아, 모든 껍데기를 훌훌 벗은 벌거숭이 자아와 처음으로 직면한다. 고독은 자아를 밝혀주는 조명이다. 내가 누구를 대신해 줄 수 없듯이 아무도 나를 대신해 줄 수 없다.

고독은 자아의 진정한 모습, 인간의 근본적인 존재를 발견케 한다. 고독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진정한 의미에서 의식할 수 없다. 고독의 아픔을 체험하지 않고 우리는 자유를 동물 아닌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의식할 수 없다. 그래서 고독은 우리의 삶을 깊게 해준다.

사람의 고귀함은 고독을 거치지 않고서는 생겨나지 않는다. 고독 속에서 자라고 피어나지 않은 인간의 열매는 고귀한 것이 될 수 없다. 고독은 문자 그대로 외롭지만 고독을 모르는 마음 고독을 모르는 군중은 더욱 하전하며 더욱 외로울 것이다.

■ 서재를 정리하며

이태동

나는 날 때부터 정리벽이 부족한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어려서부터 책 수집하기를 무척 좋아했지만 목록에 따라 정확히 분류하지 못하고 서가에 아무렇게나 꽂아 놓는다. 그래서 글을 쓰다가 어떤 책이 필요해서 찾을 때는 서재의 사방을 뒤지는 버릇을 지니고 있다.

지난 밤 어떤 글귀가 떠올라 그것을 확인하려고 서재에서 책을 찾다가 못 찾고 지치기만 했다. 그래서 나는 책들을 순서에 따라 정리하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꽂아둔 게으른 자신에 대해 슬퍼하면서, 무질서하게 꽂아놓은 책들을 서가에서 서재 바닥으로 쓸어 내렸다. 그리고 밤늦도록 정리하기 시작했다.

책 정리는 처음 생각보다 훨씬 즐겁고 흥미로웠다. 분류한 목록의 순서에 따라 다시 책을 꽂아 놓기 위해 흩어진 책들을 한 권씩 먼지 묻은 손에 들고 책이름을 들여다 볼 때마다 그 책들을 수집할 때에 있었던 먼 과거의 일들이 물 위에 뜬 꽃잎처럼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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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가에게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은 “파도처럼 밀려드는 추억의 밀물을 막는 둑”이라고 말하지만, 흩어진 책들은 그야말로 추억 그 자체였다. 고서(古書)들은 묵은 사진첩처럼 낡은 것이었지만 그것들 한권 한 권은 그것대로의 온갖 추억의 무게를 무겁게 싣고 있었다.

나는 책을 수집할 때 반드시 새 책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어떤 책이 절판되었을 때 구입하기가 어렵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이 깨끗이 사용한 책을 구하는 것이 훨씬 흥미롭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과거에 그 책을 읽었다고 생각하면, 책을 읽는 데 동반자를 얻었다는 느낌이 들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재산을 그와 함께 나누어 가진다는 생각도 든다. 특히 이미 누가 사용했던 책을 읽으면, 그 사람이 그 책을 구입할 때의 감정과 무슨 이유로 헌책방에다 팔았을까 하고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또 내가 수집한 책을 더 이상 가질 수 없을 때 책이 맞이하게 될 운명을 생각해 보는 것 또한 흥미로운 일이다. 아마 나는 장서를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운명에 놓이면 대학도서관에 맡길 것이다. 다음 세대가 내가 수집한 책을 읽을 때, 그 책들에 담긴 추억을 결코 읽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그만큼 그 책의 생명을 연장시켜 준다고 생각하면 자못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책을 수집하는 일은 책을 쓴 사람들의 가장 위대하고 값진 고통을 함께 하는 것이다. 어떤 책을 다 읽지 못해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바친 숭고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쓴 저자의 서문만이라도 읽는다면, 그 책값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는 없지만 20세기 초까지 서양에 있었던 절판이 된 고서 경매시장에서 가장 높은 가격으로 책을 입찰하던 광경을 그려보면 감격해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 트럭 아저씨

박완서

매일 아침 하던, 등산이라기보다는 산길 걷기 정도의 가벼운 산행을 첫눈이 온 이후부터는 그만 두었다. 산에 온 눈은 오래 간다. 내가 다시 산에 갈 수 있기까지는 두 달도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걷기는 내가 잘할 수 있는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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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한 운동이지만 눈길에선 엉금엉금 간다. 어머니가 눈길에서 미끄러져 크게 다치신 후 7,8년간이나 바깥출입을 못하시다 돌아가신 뒤 생긴 눈 공포증이다. 부족한 다리운동은 볼일 보러 다닐 때 웬만한 거리는 걷거나 지하철 타느라 오르락내리락하면서도 벌충할 수 있지만 흙을 밟는 쾌감을 느낄 수 있는 맨 땅은 이 산골마을에도 남아 있지 않다. 대문 밖 골목길까지 포장되어 있다. 그래서 아침마다 안마당을 몇 바퀴 돌면서 해 뜨기를 기다린다. 아차산에는 서울 사람들이 새해맞이 일출을 보러 오는 명당자리가 정해져 있을 정도나까 그 품에 안긴 아치울도 동쪽을 향해 부챗살 모양으로 열려 있다. 겨울마당은 황량하고 땅은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그러나 걸어보면 그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씨와 뿌리들의 소요가 분명하게 느껴질 정도의 탄력을 지녔다.

오늘 아침에는 우리 마당에서 느긋하게 겨울 휴식을 취하고 있는 나무들과 화초가 몇 가지가 되나 세어보면서 걸어 다녔다. 놀랍게도 백 가지가 넘었다. 백 평도 안 되는 마당의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잔디밭을 빼면 나무나 화초가 차지할 수 있는 땅은 넉넉잡아도 40평 미만일 것이다. 그 안에서 백가지 이상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니 물론 헤아려보는 사이에 부풀리고 싶은 욕심까지 생겨 제비꽃이나 할미꽃, 구절초처럼 심은 바 없이 절로 번식하는 들꽃까지도 계산에 넣긴 했지만 그 다양한 종류가 생각할수록 신기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 것들이다. 이 나이에도 가슴이 울렁거릴 만한 놀랍고 아름다운 것들이 내 앞에 줄 서 있다는 건 얼마나 큰 복인가.

마당이 있는 집에 산다고 하면 다들 채소를 심어 먹을 수 있어서 좋겠다고 부러워한다. 나도 첫해에는 열무하고 고추를 심었다. 그러나 매일 하루 두 번씩 오는 채소장수 아저씨가 단골이 되면서 채소 농사가 시들해졌고 작년부터는 아예 안하게 되었다. 트럭에다 각종 야채와 과일을 싣고 다니는 순박하고 건강한 아저씨는 싱싱한 채소를 아주 싸게 판다. 그를 기다렸다가 뭐라도 팔아주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을 아는지 아저씨도 손이 크다. 너무 많이 줘서 왜 이렇게 싸요? 소리가 절로 나올 때도 있다. 그러면 아저씨는 물건을 사면서 싸다고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웃는다.

뿌리째 뽑아 손에 흙을 묻혀가며 푸성귀를 손질 하노라면 같은 흙을 묻혔다는 걸로 그걸 씨뿌리고 가꾼 사람들과 연대감을 느끼게 될 뿐 아니라 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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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낳아 자란 그 옛날의 시골 계집애와 현재의 나와의 지속성까지를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아주 기분좋고 으쓱한 느낌이다. 어쩌다 슈퍼에서 깨끗이 손질해서 스티로폴 용기에 담고 랩을 씌운 야채를 보면 컨베이어 밸트를 타고 나온 공산품 같지 푸성귀 같지가 않다.

일요일은 꼬박꼬박 쉬지만 평일에는 하루도 장사를 거른 적이 없는 아저씨가 지난여름엔 일주일 넘게 안 나타난 적이 있는데 소문에 의하면 해외여행을 갔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여비가 많이 드는 남미 어디라나. 그런 말을 퍼뜨린 이는 조금은 아니꼽다는 투로 말했지만 어중이떠중이가 다 해외여행을 떠나는 이 풍요한 나라의 휴가철, 그 아저씨야말로 마땅히 휴가를 즐길 수 있는 어중이떠중이 아닌 적격자가 아니었을까.

트럭 아저씨는 나를 쭉 할머니라 불렀는데 어느 날 새삼스럽게 존경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선생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작가라는 걸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피하고 싶은 못난 버릇이 있는데 그에게 직업이 탄로난 건 싫지가 않았다.

■ 설

전숙희 수필가

설이 가까워 오면, 어머니는 가족들의 새 옷을 준비하고 정초 음식 처리기를 서두르셨다. 가으내 다듬이질을 해서 곱게 매만진 명주로 안을 받쳐 아버님의 옷을 지으시고, 색깔 고운 인조견을 떠다가는 우리들의 설빔을 지으셨다. 우리는 그 옆에서, 마름질 하다 남은 헝겊 조각을 얻어 가지는 것이 또한 큰 기쁨이기도 했다. 하루 종일 살림에 지친 어머니는 그래도 밤늦게까지 가는 바늘에 면주실을 꿰어 한 땀 한 땀 새 옷을 지으셨다. 우리는 눈을 비벼가며 들여다보다가 잠이 들었다.

착한 아기 잠 잘 자는 베갯머리에

어머님이 홀로 앉아 꿰매는 바지

꿰매어도 꿰메어도 밤은 안 깊어

잠든 아기는 어머니가 꿰매주신 바지를 입고 산줄기를 타며 고함도 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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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우리는 설빔을 입고 널 뛰는 꿈도 꾸었다.

설빔이 끝나면 음식으로 접어든다. 역시 즐거운 광경이었다. 어머니는 미리 장만해 둔 엿기름가루로 엿을 고고 식혜를 만드셨다. 아궁이에서는 통장작불이 활활 타고, 쇠솥에선 커피색 엿물이 설설 끓었다. 그러면, 이제 정말 설이 오는구나 하는 실감으로 내 마음은 온통 그 아궁이의 불처럼 행복하게 타 올랐다. 오래오래 달인 엿을 식혀서는 강정을 만들었다. 검은 콩은 볶고 호콩은 까고, 깨도 볶아 놓았다가 둥글둥글하게 콩강정도 만들고 깨강정도 만들었다. 소쿠리에 강정이 수북이 쌓이면서 굳으면 어머니는 곧 안에다 차곡차곡 담으셨다.

수정과를 담그는 일도 쉽진 않다. 우선 감을 깎아 가으내 말려서 곶감을 만들어 두어야 한다. 알맞게 건조한 곶감은 바알갛게 투명하기까지 하고, 혀 끝에 녹는 듯 한 감칠맛이 있다. 이것을 향기로운 새앙물에 띄우고, 한약방에서 구해온 계피를 빻아 뿌리는 것이다.

그러나 정초 음식의 주제(主題)는 역시 흰떡이다. 흰쌀을 물에 담갔다가 잘씻고 일어선 차례로 쪄내고, 앞뜰에 떡판을 놓고는 장정 두어 사람이 철컥철컥 쳤다. 떡판에선 김이 무럭무럭 올랐고, 우리들은 군침이 돌았다. 장정들이 떡을 쳐내면 어머니는 밤을 새워 떡가래를 뽑고, 알맞게 굳으면 이것을 써셨다. 그리고 세배꾼이 오는 대로 맛있는 떡국을 끓이고, 부침개며 나물이며 강정이며 수정과며 한 상씩 차려내셨다.

나는 지금도 설날이 되면, 어머니 옆에서 설빔이 되기를 기다리던 그 초조한 기쁨, 엿을 고고 강정을 만들고 수정과를 담그고 흰떡을 치던 모습, 빈대떡 부치던 냄새, 이런 흐뭇한 기억이 되살아나 향수에 잠긴다.

우리 어머니들은 설빔 하나 만드는 데도, 설 상 하나 차리는데도 이처럼 수많은 절차를 거치고 알뜰한 정성과 사랑을 쏟고 가족을 돌보고 이웃을 대접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들은 어떤가?

오늘의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잃어가고 있다. 마음을 잃어가고 있으므로 생활도 잃어간다. 아침이면 뿔뿔이 흩어지고 저녁에 모여선 빵과 통조림으로 끼니를 때우고, 텔레비전 앞에서 대화 없는 몇 시간을 지내다가 또 뿔뿔이 헤어져 잠자리에 드는 사람도 많다. 편리하지만 참 생활이 없다. 그래서 현대인은 고독한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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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려서 우리 어머니에게서 느끼던 그 ‘어머니’를 오늘의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느끼게 하지는 못한다. 사서 입히고 사서 먹이는 동안에 우리는 정성과 사랑이 식어간 것이다. 뼈저린 고생이 없는 대신, 그 뒤에 오는 샘물 같은 기쁨도 없어졌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고독하게 자라는지도 모른다. ‘편리’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뜨겁게 사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명절이 돌아오면 나의 고독한 눈에, 어머니가, 어머니가 자꾸만 떠오른다.

■ 연처럼

윤형두 출판인, 수필가

줄 끊어진 연이 되고 싶다. 구봉산(九鳳山) 너머에서 불어오는 하늬바람을 타고 높이 높이 날다 줄이 끊어진 연이 되고 싶다.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갈뫼봉 넘어로 날아가버린 가오리연이 되고 싶다.

바다의 해심을 헤엄쳐가는 가오리처럼 현해탄을 지나, 검푸른 파도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태평양 창공을 날아가는 연이 되고 싶다.

장군도의 썰물에 밀려 아기섬 쪽으로 밀려가는 쪽배에 그림자를 늘어뜨리며 서서히 하늘위로 흘러가는 연이 되고 싶다.

나는 소년 시절에 연을 즐겨 띄웠다. 바닷바람이 휘몰아쳐 오는 갯가의 공터와 모래사장과 파란 보리밭 위에서 연퇴김과 연싸움을 즐겼다.

맞바람을 타고 곧장 하늘로 날아올랐다가 연줄을 튀기면 연머리는 대지를 향하여 독수리처럼 세차게 내려오다간, 땅에 닿기 직전에 연줄을 풀어주면 다시 연머리는 하늘로 향한다. 그럴 때 연줄을 잡아당기면 또 연은 창공을 향하여 쏜살같이 치솟는다. 퇴김중의 절묘는 바다위에서 가오리연의 하얀 종이 꼬리가 물을 차고 달아나는 제비처럼 해표(海表)를 슬쩍 건드리곤 물방울을 떨어뜨리며 끄덕끄덕 힘겹게 올라가는 가슴조임에서 맛볼 수 있다.

연 싸움은 동갑짜리 K군과 심하게 하였다. K군의 연은 그의 아버지가 만들어 준 견고하고 큰 정방형의 십자살을 붙인 왕연(王鳶)이었고, 나의 연은 가오리를 닮은 볼품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연을 만들기 위해서 뒷마을 대밭에서 대나무를 얻어다 빠개고 괭이를 친 다음, 몇 번이고 무릎위에 놓고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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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로 훑는다. 등살과 장살을 곱고 매끈하게 다듬은 다음, 등살은 촛불이나 수출로 휜 후 연체(鳶體)에 참종이(鮮紙)를 바르고 양 옆과 가운데에 꼬리를 단다.

K군의 연줄은 고기잡이에 쓰는 질긴 주낙줄에다 유리가루와 사기가루를 민어풀에 섞어 발라서 날을 세운 것이고, 나의 것은 어머니의 반짓고리에서 몰래 가져온 무명실. 그것도 군데군데 이음 매듭이 있는 것이다.

연실을 감는 얼fp도 회전이 빠르고 묘기를 부리기 쉬운 6각이나 8각 얼래를 가진 K군에 비해 나의 것은 고작해야 조선소에서 주운 막대기를 사다리 모양으로 못질한 2각 얼레에 불과했다. 왕연은 문풍지 소리를 내며 얼레에서 풀리는 은빛 연줄을 타고 하늘로 늠름히 오르는데, 가오리연은 광대춤을 추듯 양 날개를 번갈아 치켜들며 서서히 오른다.

가오리연의 가장 긴 꼬리가 뒷동산 대밭에 닿을 쯤이면 왕연은 하느작거리는 나의 연을 기습하기 시작한다.

한두번의 퇴김으로 연줄이 얽히고 얼레가 감겼다 풀렸다 하는 소리가 몇 번 나면 가오리연은 하늘로 우뚝 솟구쳤다간 백학(白鶴)처럼 멀리 사라져 간다.

짧은 겨울 해의 잔광을 받으며 미지의 세계로 날아가버린 연을 생각하며, 허공에서 서서히 땅을 향해 하늘거리며 내려오는 연실을 감는다. 바닷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옆 선창엔 범선의 돛대만이 잔물결에 흔들리고 죽음과 같은 고요와 어둠이 밀물과 같이 밀려온다. 해변에 진남색의 어둠이 깔리면, 붉은 불을 켠 아버지의 혼백이 집에서 뒷솔밭으로 가오리연처럼 사라지더란 마을 사람들의 말이 나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희미하게 꺼져가는 노을을 받으며 사라져간 연, 그것은 나의 무한한 동경의 꿈이었다. 아버지를 잃은 고독과 설움을 잊을 수 있고, 가난 때문에 받은 천대와 수모를 겪지 않아도 될 그런 세계로 날아갈 수 있는 연이 되고 싶었다.

■ 녹슨 은수저

김녹희 수필기

저마다 이야깃거리를 간직하고 있는 살림살이 중에서 요즘 내게 새삼스럽게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 숟가락이 하나 있다.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이 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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긋하게 달려 있는 손잡이에 기쁨 희(喜)자와 빗살무늬의 나뭇잎하나가 조촐하게 그려졌고 둥그런 바닥엔 금으로 상감을 한 커다란 무늬가 있는 은숟가락이 그것이다.

꼭 20년 전 , 남편이 공부를 마치고 해외에서 돌아오던 길로 시댁에 짐을 푼 며느리에게 시어머님이 제일 먼저 해주신 것이 이 은수저였다. 어쩌면 은수저야말로 오랜 타국 생활을 하고 돌아온 반가운 이에게 줄 가장 한국적인 선물이 아닐까. 일본은 식탁에서 젓가락만 사용하고, 중국엔 대나무 젓가락과 함께 도자기로 만든 숟가락이 있기는 하지만 투박하여 수프를 먹을 때 외엔 별로 쓸모가 없어 보이는데, 우리 민족만은 유일하게도 옛적부터 격조 있게 금속으로 만든 수저를 사용해왔으니까. 1세기경에 가야에서는 청동으로 된 수저를 사용했다고 하며, 후에는 황동 수저를 주로 쓰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은으로 만들기 시작했다는데. 나는 새로운 걸 좋아하는 어머님에게서 은숟가락 속에 무늬까지 집어넣은 특이한 수저를 받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무늬는 꽃이나 새 그림도 아니고, 흔히들 쓰는 수(壽), 복(福)도 아닌 참을 인(忍)이었다. 그걸 주시며 어머님은 ‘참을 인’자를 넣은 까닭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하고 싶은 거 다하고, 하고픈 말 다하고, 살 수 있나. ‘참을 인’자 세 개면 살인도 막는다고 했다.”어머님은 ‘참는다’는 것이 결혼한 여자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덧붙이셨다.

그날부터 나는 ‘참을 인’ 수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마르고 말이 없던 나와 어머님은 대조적이었다. 시집오기 전 발레리나가 꿈이어서 그 시절에 유명했던 무용가 최승희의 제자가 되려 했을 만큼 날씬했다는 얘기를 수도 없이 하던 시어머님은 몸이 여장부처럼 크고 뚱뚱했다. 목소리도 컸고 얘기하기도 좋아하며 아주 부지런 하셨다. 무엇을 하자고 마음 먹으면 그 자리에서 시작했고, 얼마나 철두철미하신지 아침 일찍 일어나는 시간, 청소하는 순서, 성경 읽는 시간, 목욕 시간, 식사 시간을 정해서 한 번도 어긋내는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일가들이나 일 도와주는 사람들까지 합해서 스무 명 가까이 되곤 하던 대가족이었는데도 집안에 언제나 흐트러질 수 없는 질서가 있었다.

그런데 어머님을 생각하면 이런 것들보다도 먼저 떠오르는 것이 ‘급한 성격’일 만큼 그분은 불같으셨다. 특히 당신의 의견과 다르거나 누구에게 무얼 가져오라고 시켜서 후딱 대령하지 않는 걸 제일 못 참아해서 그럴 때면 큰소리로 화를 막 내시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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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하면 대식구의 살림을 질서있게 잘하기 위해선 그런 것도 필요했을 텐데 그때 나는 아무 헤아림 없이 어머님을 비판적인 눈으로만 바라보았나 보다. 가뜩이나 참기 싫어하는 며느리에게는 ‘참을 인’자를 새겨주면서 당신은 왜 전혀 아무것도 참지 않는가 하며, 그래서 어머님이 해주신 그 숟가락을 대하면 나도 모르게 반감이 솟아오곤 했다. 후에 시댁에서 분가해 나오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수저를 바꾸어 다른 것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내가 참 이상하게도 나이 들어가자 차츰 어머님의 다른 모습을 깨닫게 되었다.

어머님은 나 외에도 며느리가 넷이나 더 있지만 단 한 번도 며느리들에 대해 남에게 좋지 않게 얘기한 적이 없었다. 특히 일도 할 줄 모르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나를 보며 답답하고 마음에 안 들 때가 오죽 많았을까. 그,래도 어머니는 불평은커녕 오히려 누구에게든지 며느리가 다 잘한다고 하며 칭찬하셨다.

당신 아들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돌아가실 때까지 몇 년을 당뇨로 고생하시던 어머니를 남편은 집이 아주 가까웠지만 바쁘다는 구실로 한 달 넘게 찾아뵙지 못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럴 때도 어머님은 언제나 반갑게, 오랜만에 보게 되는 아들의 손을 잡으며 “오, 너 왔냐?” 하시곤 아들에게 대접할 걸 거져 오게 하셨다.

그저 무심히 보아 넘겼던 이런 모습들이 이제 내가 며느리를 볼 때가 되어서일까. 요즈음 새삼 생각나 가슴에 찌잉하게 박혀든다. 그렇게 철저하고 또 그렇게 불 같으신 분이 어떻게 그처럼 불만의 한마디도 내비치지 않을 수 있었을까……나는 이 다음 내 며느리에게 어떤 모습을 보이게 될까.

문득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인(忍)’자 수저가 생각났다. 나는 부엌 서랍 한구석에서 까맣게 녹슨 채 잡동사니 틈에 아무렇게나 끼어 있던 숟가락을 찾아내어 깨끗이 닦았다.

내가 그렇게 보기 싫어했던 숟가락의 ‘참을 인’자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글자와 함께 어머님의 모습이 가슴을 가득 채워왔다 눈물이 났다. 어머님은 내게 참으라고 하신 게 아니라 자식들에게 당신이 참으신 거로구나…….그 ‘참음’은 바로 ‘큰사랑’이었구나. 하고 ‘참을 인’자 뒤에 가만히 숨어 있는 ‘사랑’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2018.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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