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뒤늦게 만나 사랑하다

보해성산 2019. 8. 2.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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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만나 사랑하다

- 인생을 알고 신앙을 선택한 작가 8인의 가톨릭 입문이야기 -

■ 글쓴이 : 공선옥, 박완서, 박재동, 신달자,

오정희, 전옥주, 최인호, 한수산

* 펴냄 : 생활 성서사

■ 추천의 말

책 제목 <뒤늦게 만나 사랑하다>를 보는 순간 “너무 늦게서야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나이다,”라던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고백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이렇듯 안타까운 고백을 했지만 남은 생애동안 그 누구보다 열렬히 하느님을 사랑한 성인입니다.

이 책을 통해 만나게 되는 여덟 분의 작가들은 삶의 연륜으로나 사회적 위치로나 탄탄히 자리매김한 이들입니다. 나름대로의 삶에 대한 가치관과 고유한 철학을 세우고 그에 따라 걸어가고 있을, 조금은 느즈막한 나이에 어떤 계기로 가톨릭에 입문하게 되었는지……. 호기심과 더불어 왠지 모를 애틋함을 가지고 이 책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에 합당한 삶을 살기로 약속했지만 하느님 앞에서 되돌아보는 삶은 어쩐지 늘 부족하고 부끄럽기만 한 것이 누구나 한결같이 느끼는 공통의 심정일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이러한 모습이그분 보시기에 아름다울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삶과 신앙을 그리고 속내를 어린아이처럼 꾸밈없이 진솔하게 써 내려가고 있어 그 글들이 더 따뜻하고 감동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더불어 생활성서사와 뜻을 함께하여 책의 수익금을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신앙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웃들과 나누기로 했다는 소식에 더욱 마음 흐뭇합니다. 이렇듯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니고 있는 신앙이야말로 교회가 가진 가장 값진 보물일 것입니다.

추기경 김수환

* 이 책은 2007년에 출간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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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선옥 : 눈물로 지은 집

■ 눈물의 힘

나는 눈물의 힘을 믿는다. 내가 누군가를 생각할 때 내게서 눈물이 나온다면, 나는 진심으로 그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다. 아이가 아플 때, 아이가 먼 곳으로 떠났을 때, 아이를 생각하며 흘리는 눈물은 내가 아이를 가슴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다. 아이의 잘못을 야단치고 나서 내가 흘리는 눈물 또한 사랑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을 눈물이리라. 어머니, 아버지, 나의 형제들, 다정했던 친구, 이웃들과 살았던 어떤 한순간들. 사람은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 받고 사랑하기 때문에 살아 갈 힘을 얻는다.

사랑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일까.

믿음이리라. 내가 누군가를 믿어버릴 때, 누군가에 대한 믿음이 생겨날 때 나는 그를 이미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내 자식을 믿지 못하면, 나는 사랑할 수가 없다. 믿지 못하니 사랑을 할 수 없는 생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닐 게다. 그것은 지옥일 게다. 희망이 없는 삶일 게다. 그러니 믿음과 사랑과 희망은 우리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공기와도 같이 소중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 어떤 기운

나는 성당에 나가기 훨씬 이전부터 내 속에서 ‘어떤 기운을 느꼈다. 그 기운은 내 속에 있는 것 같았으나 때로는 내 배후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때로는 내 앞에서 나를 이끌어 주는 것도 같았다. 그 기운의 정체가 무엇인지 나는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언젠가 알게 될 때가 있겠지, 하는 어찌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어떤 믿음이 생겨난 탓도 있었다.

나는 이십대에 인생에서 겪을 수 있는 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것은 바로 이혼이었다. 스물 셋에 결혼하여 스물 넷, 스물일곱에 아이를 낳고 이혼을 한 이십대의 이혼녀인 내게는 아이 둘과 가난뿐이었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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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아이 엄마가 살아가기에는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정말로 막막하였다. 그런데 이상도 하다. 막상 앞뒤가 꽉 막힌 상황에 직면하자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었다. 그전에는 나도 그런 경험을 하였다. 큰 아이를 낳은지 얼마 안 되던 때에 나는 갓난아이를 업고 만화가게를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가게 밑으로 우리 집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큰 만화가게가 떡하니 들어서는 것이었다. 당연히 구멍가게 수준인 우리 가게는 망했다.

나는 또 친정집에 가서 세월을 버텨내야 했다. 아버지의 병이 낫기를……. 그러나 아버지는 나을 수 없는 중증 간경화 환자였다.

돌아보면 내게 그 시절만큼 고통스러웠던 시절도 없었던 듯하다.

언제나 그렇다. 고통의 한가운데 있으면 내가 고통 속에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다가 그 고통의 세월이 지나도 한참 지났을 때에야 아, 그 시절이 내게 고통이었구나.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 나는 어떻게 그 고통의 한가운데를 통과해 냈던 것일까.

■ 그때도 나는 당신이 곁에 있음을 몰랐어요

아버지는 끝내 돌아가시고 어느 새 아이가 둘이나 딸린 ‘어린 이혼녀’가 된 나는 먹고 살 길을 찾아 상경했다. 구로동 봉제 공장을 다녔다. 공장 안에는 탁아소가 있었다. 큰 아이는 데리고 다닐 수 있었는데 문제는 둘째 아이였다. 그런데 마침 집 앞에 ‘요셉 아가방’이라는 아가방이 있었다. 허름한 빈민가의 한 집 문짝위에 ‘요셉 아가방’이라는 문패가 달려 있는 것을 발견하던 날의 기쁨이란! 왜냐하면 나는 이제 막 테어 난 아이하고 살 길이 없어 그 아이를 ‘아동 일시보호소’에 맡겼다가 찾아온 지 며칠 안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잊지 못한다. 홍 가타리나 수녀님, 지금은 어디에 계시는지. 언젠가 남양주 덕소에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 같은데, 가타리나 수녀님이 안 계셨다면 나는 그때 어떻게 그 험한 세월의 강을 건널 수 있었을까.

저녁에 아기를 데리러 가면 (나는 언제나 가장 늦게 오는 엄마였다) 달님처럼 푸근하게 아기를 내어주시던 수녀님. 원래 요셉 아가방도 세 살에서 다섯 살까지만 봐주는 곳이었다. 그러나 수녀님은 내 눈물의 간청을 뿌리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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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하시고 특별히 우리 아기를 받아 주셨던 것이다. 나는 그때 수녀님께 눈물로 간청했다. 지금 생각하면 반은 협박이었다.

“수녀님, 수녀님이 우리 아기 안 받아주시면 나는 또 우리 아기하고 헤어져야 한답니다.”

수녀님도 우셨다. 그렇게 해서 우리 아기는 요셉 아가방에서 2년을 컸다. 그래서인가, 둘째는 길에서 수녀님만 만나면 엄마라고 했다. 좀 커서는 저도 수녀님이 될 거라고 했다.

내가 작가가 되어서 팍팍한 서울을 떠나서 광주로 내려와 살던 어느 해 크리스마스였다.

어린 시절 일 년내 교회 안 다니다가 크리그마스 때만 교회에 갔던 기억이 떠올라서였을까.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성당엘 나갔다. 연극도 보고 노래도 불렀다. 문득, 여기에 있는 사람들하고 내가 서로 잘 알고 친한 사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우리 아이들과 내가 그다지 외롭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당엘 다니면서 아이들을 키우면 아빠가 없어도 아이 키우는 것이 그다지 힘 겨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 외롭고 힘든 내 삶에 성당의 힘을 빌리자. 성당에 나가게 된 건 그렇게 순전히 나의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가타리나 수녀님이 생각났다. 서울을 떠난 후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나의’ 수녀님. 나는 그때서야 깨달았다. 수녀님이 바로 나를 성당에 오게 하신 분이었구나.

■ 모시는 마음

가만 생각해 보면, 아이들이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존재들임과 동시에 아무리 힘들어도 삶을 지탱해 주는 질기고도 강력한 끈이었다. 나는 어쩌면 아이들이 없었으면 아직도 성당 같은 데는 죽어도 다닐 생각도 안 하고 살았을 것이다.

홍 가타리나 수녀님을 만나게 된 동기도 우리 아이 때문이었듯, 내가 내 안의 주님을 알아보고 모시게 해 준 것도 다 아이들이었다.

아이 아빠 없이 혼자서, 가난한 내가 아이 둘을 키운다는 것은 고생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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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기는 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다. 아이들은 커가면 커갈수록 나를 고생하게 하는 존재들이 아니라, 나를 감사하게 하는 존재들이 되어 갔던 것이다.

둘째 아이가 한 때 학교를 안 가서 내 속을 썩였다. 나는 그때 정말 아이 때문이 힘들었다. 저도 힘들고 나도 힘들었던 시기가 지나고 지금 아이는 기숙사 있는 학교를 다닌다. 아이가 내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 말미에 아이는 썼다.

“엄마, 이제 은혜 입는 아이가 아니라 은혜 갚는 딸이 되겠어요.”

나는 그만 눈물을 펑펑 쏟고 말았다.

모든 것이 ‘그렇게 되어 가도록 하시는’ 내 안의 주님, 감사합니다. 나는 드디어 내 안에 주님을 ‘모신’ 것이다.

■ 세례

2004년 춘천의 겨울은 추웠다. 12월 24일 밤 12시, 춘천 죽림동성당에서 나는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기 전, 신부님과 면담 하는데 또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던지, 수녀님과 면담하면서도 눈물이 쏟아지는 건 마찬가지 였다. 그래서 그해 12월 내내 내 눈은 퉁퉁 부어있었지 싶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나는 울고 싶어서라도 성당에 가고 싶어졌다. 사실 내가 언제 그렇게 편한 마음으로 울어 본 적이 있었던가.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편안하고 안심되는 울음을 울어보지 못했다.

세례 받은 날 밤, 날씨는 추웠지만 내 눈물은 나를 따스하게 감싸 주었다. 따스한 눈물이 나를 감싸고 내 아이들을 감싸고 내 집을 감싸고 세상을 감싸는 것만 같았다. 나는 드디어 하느님의 집으로 들어온 것만 같았다. 하느님의 집은 눈물로 지은 집이었다.

■ 에필로그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이란, 가난하지만 영적으로 충만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가난이 육신을 파괴하고 영혼까지 황폐화 시킬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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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도 나도 그토록 공포스러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돈을 더 많이 벌게 해 달라고, 내 자식이 좋은 대학에 합격하고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좋은 배필 만나게 해 달라고. 나는 그런 기도가 무섭다. 그런 기도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세상은 각박해 질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설사 돈을 더 많이 벌게 되었더라도 결코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방에서 돈 돈 돈, 하는 삶을 살아가는데 나만 안 그럴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가 불행해 진다. 불행하다는 사실을 그러나 사람들은 내 호주머니에, 내 은행 계좌에 돈만 들어오면 잊어버린다. 사람들은 모든 상실감, 모든 결핍감을 오직 돈으로 보상받는 것에 만족하는 듯하다.

나는 언젠가 절 가까운 마을에 산 적이 있다. 그 절에는 아득한 젊은 시절부터 불목하니로 늙어온 이처사라 불리는 할아버지도 살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이 처사 할아버지를 잊지 못한다. 그가 가진 것은 모든 게 하나씩이었다. 고무신도 한 켤레, 옷도 한 벌, 모자도 하나, 그가 보물처럼 여기는 금강경 필사본도 한 권, 할아버지의 유일한 취미 생활은 대빗자루를 엮는 것, 할아버지가 내게도 그 커다란 대빗자루를 선물로 줘서 아이들하고 함께 기차놀이 하듯이 집까지 빗자루를 떠 메고 온 적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만든 그 빗자루로 절 마당을 쓸고 절 고양이인 반달이한테 밥을 주고 밭에 가서 일하고 개울가에 가서 조약돌로 고무신을 닦고…… 그랬다.

나는 지금, 절도 주지 스님도 잘 생각나지 않지만 그 할아버지 만은 자주 생각난다.

불행감을 돈으로 보상 받는 삶이 아니라, 돈으로써 행복한 삶이 아니라, 노동과 기도로써 충만한 삶에서 우러난 평화, 그 평화가 나를 위로해 준다. 나는 그 평화에의 갈망이 나를 저절로 하느님 자녀이고자 하게 한다.

그러하니 나는 하느님 앞에서 그 얼마나 가녀린, 어린 사람이란 말인가.

■ 공선옥(마리아 막달레나)

0 전남 곡성 생

0 1991 계간 ‘창작과 비평’에 중편 소설 <씨앗불>로 등단

0 신동엽 창작 기금과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제2회 올해의 예술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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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저서

피어라 수선화, 내 생의 알리바이, 멋진 한 세상,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 수수밭으로 오세요, 붉은 포대기, 유랑가족,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 등

◉ 박완서 : 나는 왜 가톨릭을 믿게 되었나

■ 고단하지만 배울 게 많았던 시집살이

종교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시어머님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부터였다. 나는 26년 5개월 동안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았다. 며느리 보고 돌아가실 때까지 그분은 한 번도 외박이라는 걸 하지 않으셨으니까 26년 5개월은 거의 정확한 숫자일 것이다. 그러나 모시고 살았다는 건 그분의 입장에서 적절하지 않은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남편이 외아들이긴 해도 그분에겐 친동기간과 조카 사촌들도 여럿 있었고, 소문난 음식 솜씨와 구식 예법에 대한 안목 때문에 친족 간의 대소사 때마다 불려 다니실 일이 잦았다. 결혼식만 식장에서 치르고 잔치는 다 집에서 할 때였다. 그때만 해도 장례식은 물론 회갑, 돌, 백날 잔치 등을 음식점에서 치른다는 건 상상 도 못할 때였다.

나도 결혼하고 나니까 결혼식에 참석하고 난 시이모님, 시숙모님이 내가 근친 갔다 올 때까지 머물고 계셔서 귀여움도 듬뿍 받고, 덕담도 많이 들었지만 내심 앞으로 많은 시집살이가 될 것 같은 예감으로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과연 무슨 때가 돌아올 때마다 손님을 치를 일이 잦았고, 시어머님의 친동기간들은 으레 며칠씩 묵어가곤 했지만 시어머님이 며느리 허물을 가리고 칭찬만 하니까 몸은 좀 고단해도 친척 어른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하진 않았다. 친정 쪽도 군식구가 떠날 날이 없는 집이어서 어른을 모시고 살면 으레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당일로 가도 좋을 친척도 붙들어 묵어가도록 하기를 좋아하는 어른이 당신은 어디가서 하루도 주무시고 오시는 일이 없는 것이 조금씩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살림에 서투른 며느리가 못 미더워 그러시는 줄 알고 섭섭한 마음도 있었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보다는 손자들 때문이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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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혼하자마자 애가 들어서서 한 해 걸러 십년 동안에 내리 오 남매를 낳았다. 나라고 소파 수술이라는 걸 왜 생각해 보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차마 못한 건 워낙 겁이 많아서이기도 했지만 시어머님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위로 딸 넷 낳고 막내로 아들을 하나 낳았다. 딸을 내리 둘만 낳아도 시어머니가 미역국도 안 끓여주던 시절, 아들이고 딸이고 가리지 않고 우리 집에 새로 태어난 새로운 생명을 그렇게 기쁘고 극진하게 모시는 시어머님은 지금 생각해도 특별한 분이셨다. 나는 아이를 낳고 젖만 먹였다 뿐, 다섯 아이를 다 그분이 업어 기르셨다. 부리는 사람에게 아이를 맡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기저귀도 손수 빠셨다. 내 귀한 손자 기저귀를 왜 남이 찡그리고 빨게하느냐는 거였다.

실상 그분은 학교 문턱에도 못가 본 분이고 한글도 제대로 못 읽는 분이셨다. 생명에 대한 존중이나 남에 대한 배려는 교양이 아니라 그렇게 타고 나셨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그분의 천성이었다.

그렇게 천사의 마음을 타고난 분이 말년의 3,4년 동안은 노망이 드셔서 가족들을 힘들게 했다. 지금으로 치면 치매라는 건데 나는 치매라는 말이 싫어서 그분에게는 그 말을 쓰기를 삼가왔다.

그런 증세가 점점 심해져서 나중엔 당신의 아들조차 못 알아보시고 툭 하면 “댁은 뉘시유?” 하면서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눈빛이 되곤 하셨다. 마지막까지 알아보고 따른 건 나밖에 없었다.

■ 시어머님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여든이 넘는 장수를 하시는 동안 그 많던 그분의 동기간은 다들 먼저 가버리시고 남편도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집안에 어른이라곤 없었다. 장례절차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고 의논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그때만 해도 병원에 입원했다가도 임종이 가까우면 집으로 모시는 걸 도리로 여길 때였다. 무종교인 집은 우선 장의사 먼저 불렀다. 우리도 그렇게 했고 장의사가 다 알아서 해주긴 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흥정을 해야 했다.

시어머님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나는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분은 종교도 없었고 학교도 안 다녔지만 인간을 아끼고 생명을 존중하는 경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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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신 분이었다. 만일 장례란 누구나 다 그렇게 치르는 거라면 구태여 죄책감을 느낄 것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그전에 가 본 문상중에서 나도 죽으면 저런 대접을 받고 생각이 들 만큼 인상 깊은 장례식은 거의가 천주교 의식의 영결미사였다.

■ 유교는 신앙으로는 조금 부족해서

나는 개성에서 이십여 리 떨어진 산골에서 태어났다. 가난하지만 학문을 즐기고, 체면을 중시하는 선비 집안이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지만 할아버지의 각별한 사랑을 받아 부성애에 대한 결핍감은 모르고 자랐다. 아들 셋을 다 장가들인 후에도 한집안에 거느리고 사셨던 할아버지가 가족을 통솔하는 통치 이념은 철저하게 유교적이었다.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수오지심(羞惡之心)을 사람다움의 근본으로 늘 강조하신 거나, 네가 싫은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마라. 잔칫집이나 친척집에 손님으로 가서 윗자리에 앉지 마라. 일꾼이 게으르게 굴었다고 품삯 깍지 마라 등등 집안에서 흔히 듣던 할아버지의 훈계와 뜻을 같이하는 구절이 성경에서도 제일먼저 마음에 와 닿았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도 우리집 가풍과 비슷한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그 시절의 유학자로는 드물게 아들 딸, 손자와 손녀를 차별하지 않으셨다. 특히 배우고 싶어 하면 손자든 손녀든 차별하지 않고 기특해하시고 밀어주셨다. 손녀 중에서도 내가 유일하게 사랑에서 나보다 큰 동네 머슴애들과 함께 천자문을 익혔을 뿐 아니라 넉넉지도 않은 집안 형편에 걸맞지 않게 초등학교부터 서울서 다닐 수 있었다. 그때의 시대상이나 우리 집 형편으로 봐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그때는 특별히 고마운 줄 모르다가 철들면서 내가 누린 특혜를 신기해하는 느낌은, 신약 성서를 읽으면서 그 시대에 예수님은 여성을 어쩌면 이렇게 차별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신기해 하 는 마음과도 비슷하다.

사람 노릇의 근본을 설한 걸로 보면 유교로도 부족함이 없는데 왜 그리스도를 따로 믿어야 했는지. 종교를 문자 그대로 으뜸가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할 때 유교로도 부족함이 없었지만 신앙으로서는 좀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유교에는 고통 중에 기도하고 매달리고 의논 할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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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인 집안이라고 기도를 안 하는 건 아니다. 6•25 때 북으로 끌려간 오빠의 생사를 모를 때 엄마는 새벽이고, 밤이고 끼니때고 아무 데나 대고 빌고 또 빌었다. 부뚜막에 오빠의 밥그릇에다 밥을 담아 놓고도 빌었고 하늘 보고 북두칠성한테도 빌었다. 까치가 짖으면 고마워서 까치한테도 두 손으 모았고, 까마귀가 짖으면 까마귀한테 삿대질을 하며 저주를 퍼부었다. 체면을 중시하던 분이 이성을 잃으니 미친 사람 같아서 집안 식구들을 불안하게 했다. 전쟁이 끝나고 엄마의 모든 정성은 무위로 돌아갔다. 엄마는 그 후 절에 다니면서 마음을 달래시다가, 말년에는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되셨다.

■ 그리스도의 탄생을 마중 간 밤에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종교를 가져야 되겠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했지만 실지로 세례를 받기까지는 4, 5년이 더 걸렸다. 그때 살던 동네엔 가까이에 성당도 없었고 가톨릭 신자가 되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걸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다. 주일에 명동 성당에 몇 번 가 본적이 있지만 그게 교리 공부 등 신앙생활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마치 기독교 염탐을 다니듯이 전통 있는 개신교 교회도 몇 차례 기웃거려 보았지만 어디서도 마음이 크게 움직이진 않았다. 그러다 단독 주택에서 잠실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새로 생긴 아파트 단지 상가 2층에 성당이 들어섰다.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 아이들은 제각기 약속이 있다고 시내로 놀러 나가고, 텔레비전에서도 젊은이들이 쌍쌍이 혹은 떼를 지어서 시내 환락가에 넘치는 모습을 비춰주고 있었다. 단둘이 남은 우리 부부는 쓸쓸한 소외감을 느꼈다. 내가 먼저랄 것도, 남편이 먼저랄 것도 없이 성당에나 가볼까, 한 것 같다. 바깥 날은 살갗을 저미듯 혹독했다.

젊은이들은 다 명동으로 나간 줄 알았는데 성당에 온 신도들의 연령층도 젊은 부부와 청소년층이 압도적이었다. 남들이 하는 대로 일어섰다 앉았다를 되풀이 하면서 장장 세 시간에 걸친 자정 미사를 보고 구유예배까지 보고 밖으로 나왔다. 그 동안에 날이 바뀐 성탄 새벽을 바라보는 시간의 추위는 어찌나 매서운지 이빨이 다 딱딱 마주칠 정도였다. 우리 부부는 조금이라도 덜 추우려고 꼭 붙어 걸으면서 우리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서로 물으면서 큰 소리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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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같은 성당에서 교리공부를 받기 까지는 같은 단지에 사는 교우의 적극적인 권면이 있어서였지만 막상 세례를 받을 때도 그날 밤처럼 뜨거운 기쁨과 감동이 내 마음 속 깊은 데서 우러난 것 같진 않다.

■ 박완서 (정혜 엘리사벳)

0 1931-2011 경기도 개풍, 서울대 국문학과 입학, 한국전쟁으로 학업중단

0 1970 여성동아에 장편 소설 ‘나목(裸木)’이 당선

0 한국문학 작가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등

0 저서

엄마의 말뚝, 너무도 쓸쓸한 당신, 휘청거리는 오후, 서 있는 여자,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미망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호미 등 다수의 작품

◉ 박재동 - 하느님과 나

■ 울산 그리스도의 교회

“돌아갑시다. 돌아갑시다

재미 있는 시간은 벌써지나고

알대 이대 삼대 사대 돌아갑시다.“

내가 하느님과 예수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약 오십년 전, 그러니까 내가 여섯 살인가 일곱 살인가에 울산 시내에 있는 ‘울산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교회에서였다.

어머니가 교회에 기도를 하러 가시면서 어린 나를 데리고 가셨던 것인데, 그때 아버지께서 중병으로 몸이 너무 안 좋으셔서 나는 어머니가 왜 교회에 나가셨는지, 어머니가 어떤 기도를 하고 계신지 그냥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

우리 교회는 작고 가난한 교회였는데, 그 아래쪽에 울산교회라는 매우 큰 교회가 생겨서 아이들 중에는 그 교회로 가는 아이들이 많이 생겼다. 크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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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 때가 되어 우리 꼬마들은 큰 교회로 가보자고 구경을 갔다. 그 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다는 것이다. 그 시절 우리들에게는 산타 할아버지 라든가 하는 것은 그냥 책 속에서나 볼 수 있던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는 진짜로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보따리를 들고 와서 아이들 이름을 불러내어 포장이 잘된 선물을 꺼내 주는 것이었다. 멀리서 우린 정말 부러워했다.

■ 부산 전포동에서

“예수 사랑한다고 예배당에 갔더니

눈감으라 해놓고 신발 뚱쳐 가더라“

아버지가 간을 다쳐 병원이 있는 대도시 부산으로 우리 식구들이 이사를 와서 살았는데 전포동이라는 곳에서 풀빵 장사와 만화 가게를 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이던 나는 빵도 잘 구웠고 만화도 실컷 보았는데, 친구들이 오면 공짜로 하나씩 주기도 하며 끗발을 부리기도 했다. 그때 우리 집 앞에 동부교회라는 작은 교회가 있었는데 우리 반 아이인 승훈이네 집이었다. 승훈이 아버지가 목사였던 것이다. 승훈이는 마음씨가 고왔고 부모님도 참 좋으신 분이었다. 나는 아이들을 따라 가끔 그 땐 예배당이라고 부른 승훈이네 교회에 갔었다.

교회문 앞은 신발들로 어지러웠고 물자가 부족했던 시절이라 이따금 신발이 없어지는 일이 생겨 앞의 저런 노래가 유행해서 우리는 많이 불렀다.

아무튼 우린 교회에 가면 먹을 것인가 모르겠는데, 뭔가를 준다는 소리를 들어서 갔던 것 같다. 그때 친구 데려오기인 ‘인도’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탄일종이 땡땡땡

은은하게 들린다

저 깊고 깊은 산 속 오막살이에도

탄일종이 울린다“라는 노래 ,

“마음이 갑갑할 땐 언덕에 올라

푸른하늘 바라보자 구름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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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산 너머 하늘 아랜 그 누가 사~나

나도 어서 저 산을 넘고 싶구나“라는 노래들을 배웠다.

그런데 그것도 그렇지만 지금도 잊지 못하는 일은 우리 가게 앞에 아이들이 버리고 간 작은 책자를 본 일이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행적을 아주 간단하게 그린 그림과 함께 인쇄해 놓은 팸플릿 같은 것이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안드레와 토마와 마태를 데리고……그때 어떤 사람이 ‘예수 선생님.’하고 부르면서…….” 이런 구절이 있었는데 그때 “예수 선생님.”이라는 말이 머리를 쳤다. 예수님이 선생님이라! 나는 그때 예수님은 우리와는 너무도 관계가 없이 멀리 떨어져 있는 신과 같은, 혹은 신인 존재로 여기고 있었는데 “예수 선생님”이라는 말 때문에 예수님이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는 듯 친밀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중에 내가 선생이 된 것도 교사였던 아버지의 내림이 있기도 했겠지만 선생이라는 이름이 좋았기 때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 크리스마스 카드 그리기

그러나 하느님에 대해서는 그 후로 별 생각이 없었고 고등학교 때도 마찬가지였다.

크리스마스는 노는 날이라 어떻게 놀까? 내가 다니는 화실에서 파티를 한다든가 크리스마스 카드를 그려서 지하도에서 판다든가 그런 정도였을 뿐 종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 대학교 때

대학교 때는 불교에 매우 심취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공릉동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젊은 남녀가 전도를 하러 다니고 있다가 내 방으로 왔다. 나는 공손히 들어오시라고 했고, 하는 이야기를 잘 들어 주었다.

그날 들은 이야기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날 보고 “참 겸손하십니다.”라고 여러 번 이야기를 했는데, 그 말이 기분 좋게 남아 있다.

■ 하느님을 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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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하고도 나는 별로 하느님을 생각하지도 않고 철학적인 사고로 살았는데 하느님을 부르는 계기가 왔다. 그때 좋아하던 여성과 뭐가 하도 잘 안되고 괴로워서 하느님을 불렀던 것이다.

아무튼 그때 본격적으로 하느님을 찾기 시작했다.

■ 여행을 떠나다

그 후 나는 여행을 떠났다 이런저런 일로 혼탁해진 나를 새로이 하고 싶었다. 나라는 것이 진정한 나 자신이라기보다 주위 사람들과 내게 지대한 영향을 준 친구들이 바라는 그런 존재, 그들이 바라는 것을 충족하려고 하는 그런 존재로 느껴졌기 때문에 진정한 나 자신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정처 없이 길을 떠났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자연스럽게 행선지가 정해졌는데 절에 다니는 친구 하나가 경남 양산시 서창에 잘 아는 큰 스님 한 분이 계시는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 하여 우선 거길 갔다. 스님을 만나 뵙고 같이 단식을 하기도 하고 자주 오는 신도들한테 신이 들어 무당이 된 이야기라든가 전생의 꿈 이야기라든가 신기한 이야기도 많이 들었는데, 큰 스님은 내게 별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냥 손님으로 나를 존중해 주실 뿐이었다. 일주일인지 열흘인지 있다가 다시 길을 떠났다.

나는 매우 혼자임을 즐겼고 또 한편 매우 오만했다.

그러는 동안 사랑에 대한 집착도 많이 사라져 갔고, 그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 받은 것들도 불필요한 것들은 지워 나갔던 것 같다.

■ 서울

서울에서 나는 미술학원 강사를 하다가 휘문고등학교와 중경고등학교에서 미술 교사를 했다. 그 당시 강남 개포동 근처는 한강 개발 중이라 집도 별로 없었고 휘문고 교사 시절에는 아무도 몰래 근처 산골짜기에 판잣집을 지어놓고 혼자 살기도 했다. 좀 괴이한 면이 있었다. 하도 이상한 수업만 해서 쫓겨나 다시 중경고등학교로 옮겼는데 그때는 좀 교육을 제대로 한 것 같다.

그러던 중 거기서 두 선생님을 만났는데 그분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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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고백

선생님 한 분이 열성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나는 그저 멍청하게 듣고 있을 뿐이었다. 요지는 아주 간단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대신 속죄양이 되어 십자가에 피를 흘렸기 때문에 나의 죄는 사해졌다는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믿으라는 것이었다. 정신이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결국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부터 나의 마음, 그러니까 내 영혼의 세계는 확 달리진 것 같다. 아, 이렇게 표현하면 될 것 같다. 내 영혼의 주소가 달라졌다고.

그래서 “입으로 시인해서 구원에 이른다.”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고 그것이 그토록 좋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계셨다는 생각이 든다. 주님은 온유하시고 늘 친구처럼 계시다는 것을 은근히 느끼고 있었다.

하느님도 더 이상 무서운 하느님이 아니라 자상하게 나를 끌어 주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소원을 말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상하게도 믿게 되었다.

■ 세례

나는 그러면서 교회에 나가보기도 하고 또 나가지 않기도 했다. 또 성당에 나가 보기도 했는데 아마도 그건 입으로 시인하기 전인 것 같다. 명동 성당에 교리 공부를 하러 다녔고 갈 때마다 도장을 찍어 주었는데 좀 지루하고 귀찮았다. 그래서 좀 다니다가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힘들 때는 나가 기도를 하기도 했다.

그러던 내가 결혼을 앞두고 성당에 나가 기도를 했다. 뭐라고 기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래서 그런지 천주교 신자인 아내를 만났다. 내 생각으로는 하느님이 맞춰주신 것 같다. 지금 아내는 그때 결혼 조건으로 몇 가지를 요구했는데 첫째가 종교의 자유였다. 불교 신자인 장모님과 힘든 일이 많았던 모양이다. 나는 당연히 오케이 했다. 뿐만 아니라 결국 아내를 따라 성당에 다니게 돠었고 아이들도 다니게 되었고, 우리 어머니도 성당에 나가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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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럭저럭 나는 성당에 나가게 되었는데 세례가 문제였다. 그런데 마침 내가 나가는 성당에 쿵푸를 하는 젊은 신부님이 오셨디. 세례명은 토마스 아퀴나스. 그분이 우리 집을 방문했을 때 내 얘기를 듣고 세례를 주겠다고 하셨다.

세례는 신부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에 신부가 인정할 만하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대신 리포트를 써내라고 하셨다. 당시 내가 쓴 리포트의 내용은 이러했다.

자연인인 사람과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신앙인은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요지, 그러니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하느님과 아들이 본질적으로 동질이라는 것이므로 아들은 성장해서 아버지가 되듯이 사람은 인격을 완성해 나갈 수 있고 아버지의 것은 다 아들의 것이니 모든 좋은 덕성과 능력 또한 사람이 상속을 받을 수 있고, 근본적으로 이 우주와 인생의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 되는 중요한 것이라는 식이었다. 리포트는 무사히 통과되었다. 물론 나의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세례명은 니콜라오로 권해 주셨다. 성 니콜라오는 산타클로스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써 나도 그림과 예술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뭔가 선물을 주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 내 방식의 하느님

나는 사실 불성실한 나이롱 신자이지만 내 나름대로 하느님을 찾고는 있는 편이다. 우선 늘 기도하는 습관은 있다. 나는 나 자신이 너무 어리석어서 도저히 하느님을 찾아 기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참사람이 될 때까지는 자신을 믿지 말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나는 나 자신이 대체로 못 미덥다. 무엇을 결정 하거나 선택하거나 할 때도 그렇고.

나는 농땡이 인 대신, 성당 앞을 지날 때마다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아주 심각할 때는 들어가서 기도를 드리기도 한다. 하지만 보통은 그냥 편하게 인사를 드리는 것이다.

내가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하나만 말하라면 이것이다.

“언제나 기뻐 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 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가끔 제자들의 주례를 설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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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감사하라고 권한다. 감사하는 순간 진짜로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기뻐하라는 것은 우리의 존재가 항상 기뻐할 만한 존재이고 기뻐해야 마땅한 존재라는 뜻인 것 같다.

■ 지금도 늘

이 글을 쓰면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많은 일들이 하느님이 듣고 계시다가 이루어 주시고 또 나를 위해 해 주시고 도와주시고 한 것이었구나 하는 것이 느껴진다. 이 글을 쓰는 자체마저 나 자신을 돌이켜 보게 하시려는 듯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가 무척 많은 어리석음을 범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도 나 때문에 나를 위해서 애써주시는 그 무엇을 느낀다. 아이를 달래는 부모처럼.

■ 박재동(니콜라오)

0 울산 생, 서울대 회화과졸

0 한겨레신문 그림판 8년간 연재 - 시사만화가

0 만화발전을 위한 연대모임 대표, 한국 예술종합학교 교수

0 저서 : 합당 블루스,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만화 내사랑,

목 긴 사나이, 박재동의 실크로드 스케치여행 외 다수

◉ 신달자 오! 주님이라고 나는 불렀다.

■ 처음으로 주님을 부르던 날

“굿을 해 봐.”

A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나는 굿을 해 보기로 했다.

"용한 점쟁이가 있어 도움이 될 거야.“

B가 말했다. 그래서 나는 점쟁이를 찾아가기로 했다.

“아니야 중국에 가면 단번에 살아나는 약이 있다는 군. 집을 팔아서라도 그렇게 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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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가 말했다. 나는 그래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 하고 말고, 그가 살아나는 것이라면 무엇을 못하겠는가. 나는 궂을 했고 점쟁이를 찾아가고 중국으로 사람을 보내고 그들의 말을 다 들었다. 아니 그 외에도 하라는 것들은 참 많기도 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했다. 내가 무엇을 못하겠는가.

그 사람은 내게서 점점 멀어져 가고, 나는 도저히 내 능력으로는 그를 잡을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주저하겠는가.

그를 살리는 일이라면, 그런 방법이 있다면 나는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중환자실 앞에서 남편의 이름으로 된 집을 팔았다.

우리 것이 있는데 왜 이 초라한 몰골로 돈을 빌리겠는가. 그 바보 같은 자존심으로 나는 남편이 자기 몸처럼 아끼던 집을 팔아버린 것이다. 그것도 중환자실 앞에서 바보같이 그냥 넘기듯 싸구려로 계약 서류에 내 심장의 피 같은 붉은 인주를 눌러 버린 것이다.

자기 몸 같은 집을 팔아 자기 몸을 위해 쓰는 것이 타당하다고 나는 그때 생각했다.

다만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만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병원이 해주는 일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찾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가끔 면도날을 깨문 것처럼 입안에 피가 괴어오르는 것을 수십 번도 더 느꼈다. 나는 점점 거칠어졌으며 악바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변화는 없었다. 벌써 20일 째 그는 혼수상태에 있었다.

그날도 저녁 면회를 하고 중환자실 앞에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면회는 늘 그랬다.

얼굴을 만져보고 팔과 다리를 만져보고 손을 잡아보고 꼬집어보아도 그는 잠만 자고 있는 것이다. 병이란 참 잔인하다. 그렇게 아끼던 가족을 두고도 저렇게 잠을 20일 째 자다니…… 나는 경악했다.

집안사람들은 아이들과 살아야 하는데 저 사람은 이제 눈 감아버리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죽게 내버려 두라는 이야기였다. 이제는 쓸모없는 목숨이라고, 사람들의 더는 이제 그에게 돈을 풀지는 말라는 동정어린 충고가 내 옆구리를 푹푹 찔러왔다. 나는 화가 났다. 어떻게 모른 척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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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친구 어머니가 나를 찾아오셨다.

“병원 정문 옆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성당이 있어. 마음이 답답하면 한번 가봐.”

“그곳은 뭐하는 곳인데요?”

“기도하는 곳이야, 도와 달라고 하면 도와줄 거야.”

“얼만데요?”

친구 어머니가 놀라는 표정을 하시다가 곧 웃으시며 말했다. 공짜라고.

“공짜예요?”

나는 물었다. 세상에 나와 보니 어디에도 공짜는 없었는데 성당에 계신다는 예수님은 무엇을 주는데 공짜로 해준단 말인가. 그저 우습기만 했다.

다음 날 저녁 면회를 끝내고 혼자 답답하여 병원 문을 나섰다. 그때 나는 혜화동 성당 앞에 서 있었다. 아, 친구 어머니가 가보라고 했던 그 성당이다. 병원에서 멀지 않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쩌나 들어가 봐? 아니야, 왜?나는 한 순간 갈등하고 있었다. 공짜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상하게도 마음은 그렇게 갈등을 하면서 내 발은 성당 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나도 모를 일이었다.

이거 내가 뭐하는 짓이야. 내가 나에게 말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행동은 순종스러웠다.

맨 끝자리의 의자에 앉아 다시 예수님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내가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 가슴에 쾅 하고 벼락 내리치는 소리가 들리던 그 순간, 이상하다. 내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래 다 안다.”

그분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도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피를 토할 것처럼 외로웠는데……외로웠는데……외로웠는데……나는 부정했다. 별꼴이야. 지가 말 뭘 안단 말이야. 나는 이런 곳에 난생 처음인걸…….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눈물이 울음으로 울음이 통곡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아아, 눈물. 그런 눈물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나는 그야말로 목 놓아 울어보았다. 다행히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울음 끝이 남아 있는 그대로 도망치듯 성당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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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래 다 안다.’

그렇게 예수님은 내게 분명하게 말하고 계셨다.

그러나 병원에 돌아와서 나는 바로 성당을 잊었다. 그 엄청난 경험도 병원의 분위기에 씻겨가 버리는 것이다. 그만큼 중환자실이 있는 병원분위기는 절박했다. 그리고 혼수 23일째의 아침이었다.

지칠 대로 지쳐 나는 마치 기력이 다해 사막에 쓰러진 낙타처럼 병원 바닥에 버려지듯 엎디어 있었다.

“심현성 보호자 오세요!”

나는 심장이 멎는 듯 빠르게 일어섰다. 끝이 왔구나. 그렇게 가버렸구나. 아이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팔순 어머니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리고 아무 것도 생가나지 않았다. 그냥 끝이었다. 보호자를 부르는 것은 늘 뻔한 일이니까. 죽었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나는 간호사가 부르는 창구 앞으로 몸놀림 빠르게 다가섰다.

“병실로 빨리 들어오세요. 환자가 눈을 떴어요.”

나는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살아났다고? 그가 일어났다고? 나는 정신을 잃을 뻔했다. 중환자실 안으로 재빠르게 들어갔다. 글쎄 그 남자가 정말 눈을 뜨고 날 보고 웃고 있는 것이다.

아니 마치 어제 잠자고 아침에 눈 뜬 사람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오 주님!”

나는 그때 주님을 처음 불렀다. 자연스럽게 너무 자연스럽게 오래 주님을 부른 사람처럼.

5개월의 병원생활을 끝내고 돌아와 나는 사실 상상할 수 없는 척박한 생활로 접어들었지만 ‘내가 다 안다.’ 라는 주님의 말씀과 따뜻하기만 한 성모님의 위로가 힘이 되어 결국 나는 세례를 받았다. 1977년 11월 11일이었다.

나는 ‘엘리사벳’으로 다시 태어났고, 그때부터 도저히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시련에 파묻혔지만 그 시련을 견디며 혼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살 수 있었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그 남자를 내가 업고 있었고, 나는 주님 등에 업혀 있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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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마음에 살아 있는 편지 몇 개

살다보면 그렇다. 단 한 번 만났는데도 내 모든 감정의 은밀한 부분까지 자연스럽게 말하게 되는 그런 대상이 있다. 나는 그런 순간에 잠시 사람으로 나와 만나는 성모님이거나 예수님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그런 수녀님이 있었다. 아가타 수녀님이다.

수녀님은 내가 처철하게 내 생을 포기하고 싶어 홀로 떠났던 어느 바닷가의 작은 성당에서 만난 사람이다.

나는 살아오면서 일기를 쓰듯 수녀님에게 부치지 않는 편지를 썼다. 감사할 때. 아플 때. 고달플 때. 약속을 어기고 다시 절망스러울 때 나는 편지를 썼다. 그 편지 중 몇 개를 여기 소개 한다.

■ 편지 하나 : 거짓말쟁이 하느님

……….

어느 순간 하느님이 미워졌습니다. 시련과 고난을 그 사람이 받을 수 있을 만큼 준다는 말은 큰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그 말은 지금 생각해도 틀린 말입니다.

저에겐 능력이 없습니다.

저에겐 인내도 없습니다.

저에겐 의지도 없습니다.

저에겐 아량도 없습니다.

저에겐 극복의 정신도 없습니다.

저에겐 투지도 없습니다.

자는 모든 게 없습니다. 더욱 시련을 승화시키는 믿음의 신앙심도 불쌍하도록 나약합니다.

수녀님.

그런데 하느님은 어째서 저를 잘못 보신 겁니까. 어째서 저를 유능한 의지의 어머니로, 순종의 며느리로, 봉사의 아내로 아량 있는 이웃으로, 믿음이 충실한 신자로 보신 것일까요.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저의 인간됨의 그릇은 너무나 작아서 눈물 한 방울도 담을 수 없습니다. 저는 시련을 견디지 못합니다. 아픔을 참아내지 못합니다. 기다리지 못하며 매사가 다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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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콩알만 한 그릇밖에 없으니 콩알만 한 시련을 주십시오. 자세히 보십시오. 나는 능금이나 수박이나 호박만 한 것을 담을 그릇이 없습니다.

그러니 수녀님.

저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느님을 향한 방종한 태도를 어떻게 용서 받을 수 있을 것인지요.

그렇습니다. 저는 미쳤습니다. 오 천주님. 저는 이처럼 형편없는 여자입니다. 이 기막힌 잘못을 무슨 방법으로 용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며칠 안으로 수녀님을 뵈러 그곳에 갈 생각입니다. 바다와 댓잎소리와 수녀님의 얼굴만 잠시 뵙고 와도 제 어지러운 정서가 질서를 갖게 될 것 같습니다. 수녀님께 용서를 비는 뜻으로 약속하겠습니다. 수녀님.

제게 주어진 여건과 환경을 모두 사랑하겠습니다. 시련과 고난도 아픔도 상처도 고독도 모두 사랑하겠습니다. 그 모두의 모두를 감당하겠습니다. 제발 그만큼의 능력이 제게 있기를 원할 뿐입니다. 저는 주님의 딸이옵고 그분이 시키는대로 하겠습니다.

■ 편지 둘 ; 몸살을 앓으며

아가타 수녀님.

며칠 소식 전하지 못했습니다.

날마다 수녀님께 편지를 쓰는 일이 요즘의 제 행복이기도 하고 기쁨이기도 하고 어떤 생활의 끈이기도 한 것을 수녀님은 잘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수녀님을 만나지 않고 수녀님께 편지 쓰기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전 어떻게 되었을까요.

수녀님.

큰 몸살을 앓았습니다. 열이 높았습니다. 제 몸은 괄게 타고 있는 숯덩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저는 저에게 절망하는 것 중에 하나 몸이 자주 아픈 것도 빼 놓을 수 없는 일입니다. 몸살은 너무나 친숙하여 이젠 피를 나눈 형제 같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수녀님

- 22 -

저의 몸살은 육체의 노동에서보다 정신의 노동에서 더 많이 찾아오는 것임을 저는 압니다. 정신이 기쁘지 않을 때, 정신이 지독하게 고독할 때, 저는 반드시 육체가 앓아버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수녀님.

앓는 중에 누운 채 몇 번 기도를 하였습니다. 몸살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기도는 아닙니다. ‘내 정신이 병중에 있으니 주여 제 정신의 병이 되게 하는 주인을 저에게 보내 주십시오.’ 하고 기도했습니다.

아마 하느님도 한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녀님, 거짓말을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누구도 아닌 하느님께 말입니다.

저도 저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이 고통을 수녀님은 이해해 주십시오.

수녀님

우리 가톨릭은 영혼에 중대한 가치를 두는 종교가 아닙니까. 몸의 살은 썩어 흙이 되고 그 영혼은 하늘에 올라가 다시 영생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 종교의 내세관이 아닙니까.

“올라가라. 올라가라. 내 영혼아! 네 거처는 높은 곳이다. 그러나 더러운 이 육체는 이렇게 아래로 가라앉아 여기서 죽는다.”

셰익스피어가 한 말입니다. 그러나 어느 그리스 철학자는 “영혼은 육체와 분리되자마자 연기처럼 사라진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영혼이란 역시 육체와 그 생명을 같이 한다고 본 견해입니다.

모두 각자 깊은 통찰력으로 분명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수녀님, 육체의 중요성을 더 다급히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인간이라면 육체의 고통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신은 역시 육체에 굴복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수녀님 틀린 말인지요. 육체를 지나치게 평가하고 추종하다보면 영혼이 타락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 편지 셋 : 오직 사랑만이

아가타 수녀님.

- 23 -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기 위해선 한 생애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생을 무엇으로 사느냐를 알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전 너무나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입니다. 사랑이 그 가슴에 살아 있음으로 그다음의 것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문학, 학문, 정치, 교육, 예술, 문화, 그 모든 것은 언제나 두 번째 혹은 세 번째의 순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첫째는 사랑입니다.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수녀님.

만약 사랑에 무관심하고 사랑에 거짓말쟁이면서 이 세상의 권력이나 권위를 가졌다면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그것은 순간의 힘으로 사용될 수 있는 재산은 될 수 있으나 생을 기쁨과 영원으로 이끄는 길은 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수녀님.

사랑이 제일입니다.

사랑 그 이상의 힘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고통으로 뭉쳐져 있지만 결국 사랑은 우리를 구원합니다. 언제나 우리의 더 큰 고통은 사랑을 피하려는 행동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사랑을 처단하려고 한 사람, 사랑을 떠나보내기 위해 작심했던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생명을 처단한 사람이었고, 자신의 행복과 기쁨을 떠나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칼릴 지브란도 말했습니다.

“모든 일은 거기 사랑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공허하다.” 라고요. 저는 그 말을 주님의 말씀과 함께 받아들입니다.

수녀님.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에게 어떤 이익을 주는 경우라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그 사실 속에서 행복을 느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사랑을 작게 받는다는 내 개인적인 계산의 분노 때문에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만 것입니다.

그를 버린 것은 그를 버린 것이 아니라 곧 나를 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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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님.

이 세상에서 사랑이 제일입니다. 저는 그것을 압니다. 저는 그것을 소중한 지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아는 지혜로움 중에서도 제일의 지혜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수녀님.

그런데 세상에는 왜 그런 사람이 많지 않을까요.

왜 돈이 명예가 권력이 더 귀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까요.

묻고 싶습니다. 뇌의 세포, 심장의 박동, 타고나는 기질이 달라서 입니까. 내가 모르는 세상의 큰 이치를 그들이 나보다 먼저 깨우쳤기 때문입니까.

수녀님.

지금 그대로의 수녀님을 지금 그대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수녀님의 미소에는 늘 청정한 남쪽 바닷빛이 출렁이고 댓잎 서걱이는 멜로디가 들릴 듯합니다. 그 미소는 언제나 등잔처럼 제 앞을 밝힐 것입니다.

차가운 마룻바닥 가운데 앉은 작은 난로에 불을 피우는 수녀님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따사로워집니다.

겨울 산길을 가다가 산까지 한 마리 만났거나 빛깔 고운 곤줄박이 새를 만난 산뜻한 기분이 듭니다. 이 세상이 어지럽도록 혼탁한데도 어렵사리 돌아가는 것은 바로 수녀님 같은 분이 세상의 어느 한 가닥을 잘 조종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의 선(善)에 필요한 순수성을 아직도 신앙처럼 지키고 있는 수녀님 같은 분 때문에 세상은 단 한 번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가타 수녀님.

내내 건강하시고 거룩한 기도 속에 부끄러운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19. 7. 30

* 다음에 2부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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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달자(엘리사벳)

0 43년, 경남 거창 생, 숙명여대 동 대학원 국문과 졸, 국문학박사

0 1964년 <여상>의 여류신인문학상 으로 등단

0 현대문학 여성시의 영역을 개척한 중견 시인

0 대한민국 문학상, 시와 시학상, 한국시인 협회상 등

0 저서 : 봉헌 문자, 겨울축제, 아버지의 빛, 외로움을 돌로 쳐라,

오래 말하는 사이, 백치애인, 물 위를 걷는 여자,

너는 이 세 가지를 명심하라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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