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 일기-
백세 일기-
- 매일 잠들기 전 써 내려간 충만한 삶의 순간들 -
■ 김형석 지음
■ 머리말
나는 40이 되면서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30까지는 가정의 보호와 학교 교육 중심으로 성장했다. 40부터는 지금까지 내 삶의 의미와 사회적 가치를 지키면서 연장하고 싶었다. 대학에 있을 때는 보직을 사양했다. 사회참여도 교수다운 일에만 관리해왔다. 내 생애에 이중성이나 변절이 없기를 바랐고 종교적 신앙은 평신도의 위치에 자족했다. 사회적 출세나 명예는 가급적 멀리하려고 노력했다.
일은 왜하는가?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나는 나됨을 찾아 성장하고 새로워지며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일기쓰기’를 한 것이다. 일기는 나를 사랑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1부> 한 번 멋지게 살아보는 건 어떨까
■ 아침 5시 반, 토스트 반 조각
0 이유 : 최근에는 조찬 모임이 많아지는 추세 - 나는 그런 모임에 강사로 초청 받는 일이 있기 때문
0 지난 50년 동안 변화 없는 메뉴 : 우유한 잔, 계란 하나, 토스트 반 조 각, 호박죽 조금, 과일, 커피 반 잔, 90세를 넘기면서 양을 조금씩 줄임.
0 장수하는 사람들은 소식을 한다. 밀가루, 감자, 쌀을 가리지 않는다.
0 여러 가지 음식물에서 다양한 영양소를 섭취한다.
■ 60세에 수영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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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나이들수록 운동은 필수
0 혼자서 할 수 있고 시간의 구속을 받지 않는 운동, 그래서 수영을 선택 했다. 수영은 30분 안팎, 다리 운동은 별도로 한다.
0 수영은 누적된 피로를 풀어주고 새로운 의욕이 솟아나게 한다.90이 넘으 으면 회원자격이 없다고 해서 여직원이 73세로 정정하여 회원증을 만들어 주었다. 지금은 모두 알고 직원들도 묵인해준다.
0 수영 덕택인지 아직 지팡이 없이 걸어 다닌다.
0 운동이 건강을 위해서 필요하듯이 건강은 일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 또순이를 떠나보내다
언제나 잠들기 전에 일기를 쓴다. 제작년과 작년의 일기를 읽은 후에 오늘의 기록을 남긴다. 2년 전 오늘은 또순이(강아지)가 죽은 날이다.
또순이는 노모와 병중의 아내를 보내고 셋째딸이 내 외로움을 달래주려고 보낸 것이다.
10여년이 지나는 동안 ‘또순이’가 나보다 떠 빨리 늙기 시작했다. 얼마뒤 ‘또순이’는 모두가 잠든 밤 계단 밑, 내 방이 보이는 위치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 작년에 165회 강연을 했다
2017년에는 165회의 강연을 했다. 이틀에 한 번 꼴이다. 시간이 허락하면 거의 다 간다. 선약이 있더라도 꼭 도와주고 싶은 때는 날짜나 시간을 바꾸어서라도 간다. 사례비와는 관계가 없다. 아침보다는 저녁이 많고 대체로 70분 길이이다. 적으면 30~40명 최대 3천명이 될 때도 있다. 청중이 200명 정도가 적당하다.
- 강연계 삼총사 : 숭실대 안병욱 교수, 고려대 조동필 교수와 나
옆에 와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사람이 가장 힘들다. 내 실정은 배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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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은 탓이다. 보청기도 아직은 안 끼고 있지만 너무 작은 소리는 좀 곤란하다.
강연할 수 있어서 기쁘다. 어려움은 있어도 그분들과 나누는 사랑 덕에 내 인생에도 보람이 있는 것이다.
■ 연희동 산책길 20년
고향을 떠나 서울에 온지 70여 년이 된다. 아이들과 나눈 얘기다. 태국서 이민온 사람이 태국 태씨가 되고, 처음 정착한 고장의 이름을 따 영등포 김씨로 호적에 등록한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서대문 김씨가 맞겠다면서 웃었다. 나는 더욱 그렇다. 봉원사 아랫동네에서 40년을 살다가 연희동으로 와서도 20여년을 보냈다. 여기서 생애를 마치게 될 것 같다.
연희동을 거처로 선택한 데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집 뒤 야산이 산책로가 되고, 언덕 위여서 하늘이 많이 보였다. 안산과 여의도까지의 전망이 탐나기도 했다. 처음에는 오솔길 전체의 4분의 1쯤 걸었다. 길이 좁고 숲이 우거져 있었다. 한두 해 뒤부터는 산책길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개척했기 때문이다. 내가 산책길의 주인공이 된 셈이다. 그 뒤의 변화는
1. 구청에서 길을 넓히고 철책을 만들었다.
2. 작은 운동장도 생기고 어린이 놀이터도 장만하게 되었다.
3. 층층계단도 만들어지고 나무의자도 놓이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이 산을 누구보다도 사랑하게 되었다. 산과 자연은 사랑하는 사람이 가지게 되는 법이다. 외국에 나가 있는 기간을 빼고는 언제나 산책을 즐겼다. 정신적 생산에도 산책길에서 큰 도움을 얻었다. 산책길에서의 생각은 10여권의 저서가 되었고, 수많은 강연 내용도 그곳에서 정리했다. 그 정신적 혜택을 독자와 청중에게 나누어 주는 행운을 차지해 왔다.
이 산과 자연이 나에게 사계절을 알려주면서 자연애를 깨닫게 했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정어린 인사도 나눈다.
산과 자연은 태양이 떠오를 때와 서산으로 넘어갈 때 가장 아름답다. 인생도 그런 것 같다. 20대 후반에 탈북해 서울에 올 때는 어떤 희망의 약속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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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에 내 삶이 석양을 찾아들 때가 왔다. 아침보다 더 장엄한 빛을 발하는 태양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다.
■ 구름 보는 시간이 늘었다
이전에는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겠다. 요사이는 일기예보와 함께 황사나 미세먼지에 대한 정보가 뒤따른다. 나 같은 늙은이들은 자연히 외출을 줄이고 방에 갇혀 지내는 시간이 길어진다.
그 대신 책상위에 있는 구름 사진 책을 들여다보거나, 넓은 하늘에 찾아왔다가 사라져가는 구름들을 창문을 통해 관상(觀想)하는 시간이 길어져 좋다. 몇 해 전에 ‘앞으로 10년만 더 건강하게 움직일 수 있으면 사진 기술을 배워 구름 사진을 찍고 싶다’는 글을 쓴 일이 있다. 그 글의 독자들이 내 심정에 공감했거나 동정했던 것 같다. 국내외에서 출간된 구름사진 책을 네 권이나 선물로 받았다.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과 더불어 살다가 자연의 품으로 돌아간다. 어떤 사람들은 자연의 작은 부분인 화초를 사랑한다. 그런 사람들은 착한 마음씨를 찾아 누린다. 또 어떤 사람들은 동물을 사랑한다. 그런 사람들은 생명에 대한 정과 사랑을 배운다.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웅장한 산의 기상을 받아들여 강한 의지와 신념을 얻는다.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넓은 마음과 가없는 세상을 꿈꾸게 된다.
자연과 전혀 무관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 대부분이 불행하게도 우리가 모두 걱정하는 사회악을 저지르곤 한다. 그들은 대자연의 질서를 역행하거나 자연과의 사랑을 단절하기 때문이다.
나이 들면서는 여유로울 때면 구름감상에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길을 떠나 지방 산수를 찾기도 했다. 장년기에는 세계 여행중에도 구름보기를 빼먹지 않았다. 그렇게 구름을 친구 삼아서 사는 동안에 나도 모르게 받아들인 교훈이 있다. ‘욕심없는 사람이 행복해진다’는 가르침이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무욕(無慾)의 인생관을 갖춘 사람들이다. 무소유는 그 작은 부분의 하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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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석 교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을 봤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대학 때 제자였던 연극인 오현경도 6~7명의 탑승자 가운데 끼여 있었다. 처음부터 내 얼굴만 열심히 쳐다보고 있엇다. 나는 목례를 하면서 마주 보았다.
그날 행사를 마치고 길가로 나섰을 때였다. 한 제자가 주차장으로 가면서 “선생님 엘리베이터 안에서 오군을 보셨어요?”라고 물었다. 내가 “나를 쳐다보기만 하고 인사는 하지 않더라”고 했더니 그 제자가 말했다. “그래서 그랬구나. 오군이 우리 동창들 있는 곳으로 뛰어 오더니 ‘나 지금 엘리베이터 안에서 김형석 선생님하고 똑같이 생긴 사람을 보았어. 누군지 모르겠는데 50여 년 전의 김 교수님과 똑 같이 생겼데’라면서 흥분해 있더라고요” 라는 얘기였다.
지난 겨울에 어느 지방에 강연을 갔다. 70대 쯤으로 보이는 초로의 부인이 찾아와 “선생님, 제가 김 아무개 목사 아내입니다. 선생님께서 지방까지 오실 리는 없고 아마 동명이인이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뵈오니까, 아직 살아계셨군요. 저는 지금쯤은 하늘나라에 목사님과 함께 계실줄 알았는데”라면서 감격스러운 인사를 했다.
나는 무어라고 말하기가 어색했다. 그래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그렇게 쉽겠어요? 몇 해 더 세상에 남아 있다가 하늘나라로 가야지요?”하면 웃었다.
■ 고유명사부터 잊어버린다.
지난봄이었다. 내가 연세대학교 교수가 된 해에 입학생이었던 제자들과 점심을 같이했다. 헤어지면서 종로2가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한 제자가 뒤따라오더니 “혼자 댁까지 찾아가실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럼 찾아가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라고 했더니 “제 선친께서는 85세 때부터 집을 찾아오지 못하곤 해서 전화번호 명패를 달고 다니셨습니다.”라는 걱정이었다. 90세 전후가 되면 자주 있는 일이다. 노인성 치매의 초기현상인 것이다.
말을 잊어버리는 데도 순서가 있다. 고유명사, 보통명사, 형용사, 부사,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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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으로 기억이 안 난다. 이름이나 전화번호를 먼저 잊어버린다. 형용사를 잊기 때문에 문장 표현이 줄어든다. 동사는 끝까지 잊어버리지 않는다. 배가 고프다든지, 머리가 아프다는 말은 죽을 때까지 뒤따른다. 내 아내는 오랜 병중에 있었다. 최근의 일들은 깡그리 잊어버리면서도 옛날 일은 기억하곤 했다.
그래서 90고개를 넘기면서는 가장 무서운 병이 치매라고 걱정한다. 내가 잘 아는 목사는 “이 다음에 치매에 걸려 ‘하느님이 어디 있어? 누가 보았나?’라고 말할 것 같아 두렵다”고 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 투병하는 아픔보다 치매가 더 걱정이이기도 하다.
이런 일들을 주변에서 종종 보기 때문에 나는 지방에 강연을 가게 될 때에는 누군가와 동행하는 절차를 밟는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다.
■ 여자 친구라는 거짓말을 했어야
스승의 날에 오군 생각이 간절했다. 20년 동안 빼놓지 않고 감사 전화를 걸어주던 제자다. 내가 28세 오군은 18세 때 처음 만난 사제 간이다.
오군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인 충북 청주로 내려가 공무원을 지내기도 하고 문필가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후에는 충북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최근에는 스승의 날에 걸려오는 전화가 대화가 되지 못하고 오군의 일방적 통화로 끝나곤 했다. 나보다도 먼저 귀가 멀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세요?” 하고 확인한 후에 자기 얘기만 한다. 그러고는 “서울 가면 찾아뵙겠습니다.”라는 자기 약속으로 그치곤 했다. 나보다 제자가 더 빨리 늙는 것 같아 안쓰러웠다.
전화가 왔다. 서울로 갈 차가 도착했다는 것이다. 내가 오군의 팔을 붙들고 내려가 차를 탔다. 운전대에 앉아있는 여자를 보고 오 군이 “저분은 우구세요?” 물었다. 내가 대답하려고 할 때 차가 움직였다. 대답을 듣지 못한 오군은 오른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나는 차 안에서 후회를 했다. ‘이 여자분은 내 친구야’했더라면 오 군이 얼마나 기뻐했을까.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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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혼자 되고 있을 때 왜 재혼을 안 하실까 하고 걱정해온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몇 달 후에 따님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그렇게 교수님을 좋아하셨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 세금을 많이 내 흐뭇하다
20년 전 쯤이었을까? 세무사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다. 90이 다 되어 보이는 손기정 옹이 찾아왔다. 어디서 상금을 받았는데 세금 내는 일을 좀 도와달라는 청이었다.
상을 주는 측에서 세금을 처리했을 테니까 신고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더니, “그건 나도 알아. 그래도 내가 받은 돈이니까 내고 싶다”고 해서 계산을 해보였다. 손 옹은 “그것밖에 안 되나. 더 많이 내는 방법을 알아봐줄 수 없겠나”하면서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이었다고 한다. 세무사는 세금을 많이 내는 규정을 맞추어 드렸다. 손옹이 서류를 살펴보고는 흡족해하면서 “나 이게 마지막 내는 세금이야.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혜택을 얼마나 많이 받고 살아 왔는데, 세금이라도 좀 많이 내면 내 마음이 편해서 그래…”하였다는 얘기다.
이번에 나는 평생 어느 때보다 종합소득세를 많이 납부했다. 일을 맡아주었던 세무사는 경력이 20년 되었다는데 100세가 된 나이에 이렇게 일을 많이 하고 세금을 많이 내야 하는 분은 처음 만났다고 할 정도였다.
지난해에는 두 곳에서 억대가 넘는 상금을 받았다. 저서 두세 권이 독자의 호응을 받았기 때문에 인세도 많았다. 강연료까지 다 합치다보니 약 3,000만 원 정도의 많은 세금을 낸 것이다. 내 일을 도와준 세무사가 “어차피 상금은 공익사업에 후원을 하기로 하셨으니 법인의 후원 영수증을 발부받으면 안 내도 되었을 세금이었을 텐데”라고 말했던 모양이다.
■ 할머니들이 무서웠다
심리상담이나 치료를 하는 사람들이 습관 만들기를 권하는 사례가 있다. 선한 습관에 몰입하게 되면 그 습성 때문에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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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30여 년 동안 수영을 즐기는 습관을 쌓아왔다. 지방에 갔다가 서울에 도착하면 피곤을 풀기 위해 집으로 가지 않고 곧장 수영장을 찾았다. 동행했던 사람들은 의아해 한다. 그러나 나는 수영을 통해 모든 피곤과 스트레스를 푼다. 그것이 습관이 되었다. 오늘은 주말이어서 시간을 쪼개 수영을 했다. 심신이 경쾌해진다. 내 친구는 그 습성 때문에 정기적으로 등산을 했다.
그 사람의 얘기다. “저도 사정만 허락되면 옮겨야겠어요. 여기가 비용이 덜 들기도 하고 시간만 맞추면 교통도 편해서 좋은데, 할머니들 천하에 우리 몇 사람이 겨우 끼여 지내니까 안 되겠어요. 요사이는 5~6명 되던 남자 회원이 점점 줄어드니까 오래지 않아 쫓겨날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할머니들의 위세에 눌려 수영하는 재미마저 없어지는 것 같아요.” 사실은 나도 그랬다.
내가 용기를 내서 할머니들 칸으로 갔다. 그런데 나보다 키도 크고 체중도 대단해 보이는 할머니가 준엄하게 말했다. “여기는 여자들이 사용하는 곳입니다.” 할 수 없이 쫓겨났다.
수영장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80대 쯤 되면 가정에서도 남편들은 할머니들의 보호 밑에 살아야 하니까 눈치를 보면서 용돈을 얻어 쓰는 신세가 된다. 연금만 없으면 남편들을 쫓아내고 싶다는 게 일본 여성들의 공론이라고 한다. 이대로 세월이 지나면 세상이 여성사회로 바뀌고 우리 같은 노인네들은 존재 가치가 없는 인생으로 밀려날지도 모르겠다. 어디 호소할 곳도 없고.
■ 여자 친구들이 다 도망갔다
지난달 말 금요일이었다. 차편이 생겨 오래간만에 예술의 전당을 찾아 갔다. 화가 샤갈의 전시회를 보기 위해서다.
샤갈의 그림에는 언제나 이야기가 있고 향수가 넘친다. <비테프스크 위에서> 그림은 더욱 그랬다.
2년 전에 <백년을 살아보니>를 출간했는데 15만부 이상 팔렸다. 내가 감사히 생각하는 것은 50~60대의 장년들이 책을 읽는다는 사실이다. 그 뒷받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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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하고 싶어 다시 <행복연습>이라는 신간을 내놓았다. 내용과 수준은 전작보다 약간 높은 것 같다. 그 출판을 위해 출판사가 베풀어주는 저녁 식사 자리에 도착했다.
조촐한 모임이었다. 10명 정도의 출판사 실무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P상무가 “<백년을 살아보니>가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아서 감사하며 이번 책은 내용이 풍부하고 흥미롭기 때문에 더 많은 독자가 애독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인사를 했다.
나는 “그 말씀은 사실입니다. 출판사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인 나는 얼마나 큰 손해와 타격을 받았는지 모르실 것입니다. 우선 내 나이가 100세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몇 명 안 되던 내 여자 친구들이 1~2년 사이에 다 떠나버리고 말았어요. 이제부터는 혼자 외롭게 고독을 이겨내면서 여러분의 행복을 기원해야 하는 심정과 처지를 모르시지요?” 라고 했다. 모두 웃었다.
식사를 끝내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동행했던 제자가 “선생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백 살 넘은 꼬부랑 할머니들이 지팡이를 짚고 찾아올지 누가 알아요?” 라며 놀려주었다. 나는 웃었다.
■ 나도 늙어가는가
가까이 지내던 동갑내기 목사 생각이 난다. 30여 년 전 일이다. 일요일 아침에 설교를 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인천까지 갔는데, 약속한 교회가 어딘지 모르겠더라는 것이다. 공중전화로 집에 있는 아내에게 물었지만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이 가까운 교회를 찾아가서, 몇몇 감리교회 주소로 전화를 걸어 “오늘누구의 강연 요청이 있었느냐”확인을 하곤 택시를 타고 가느라 고생했다는 얘기였다.
얘기를 들은 나는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괜찮아, 나는 며칠 전에 점심 먹으러 종로에 나갔다가 버스에서 내려 들어갔더니 책방이던데…” 라고 했다.
사실 나는 건망증 이상의 습관이 있다. 건망증은 기억했던 것을 잊었을 때의 상태다. 나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버릇을 갖고 있다. 그중 하나가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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났거나 함께 지낸 사람의 이름이다. 내가 제자들의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졸업생들은 사은회를 겸한 식사를 끝내면서 내 옆까지 다가와 “선생님 제 이름은 박00입니다. 기억해 주세요”라고 부탁한다. “그럴게”하고 대답하지만 집에 돌아와 메모하려고 하면 벌써 깜깜하게 잊곤 한다.
며칠 전의 얘기다. 가까이 있는 교회당 안의 카페에서 약속했던 손님을 만났다. 나는 모 신문사의 기자로 알았기 때문에 쓰고 있던 원고 생각이 떠올라 얘기를 했다. 그 손님이 “제가 뵙기로 한 것은 원고 때문이 아닌데요”라면서 웃었다. 내가 착각을 했던 것이다.
나는 “미안합니다. 나도 요사이는 늙어가는 모양입니다. 건망증이 생겨서…” 라고 했다. 내 말을 들은 두 사람이 마주 보면서 웃었다.
■ 아흔 두 살 할아버지가 반말을 했다
얼마 전 일이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갈 일이 생겼다. 자리를 겨우 잡고 앉아 있는데, 다음 정거장에서 한 노인이 두 손에 지팡이를 짚고 올라 탔다. 목에 작은 손가방을 매달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자리를 양보해야겠기에 “할아버지 여기 앉으세요”하면서 뒷자리로 옮겨 갔다. 할아버지는 앉으면서 “고마워”라고 인사했다.
남산 순환도로에서 내가 내리려고 하는데, 앞자리 할아버지도 지팡이 두 개를 짚으면서 일어서는 것이다. 내가 “조심하세요”라고 붙들어 주면서 함께 내렸다. 허리가 앞으로 많이 굽어 있었다. “이렇게 혼자 다니셔도 괜찮으세요?” 물었더니 “저 골목까지 가면 딸이나 손녀가 마중을 나올 거야”했다. 함께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할아버지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했다. 힐끗 내 얼굴을 쳐다보며 “나 금년에 아흔 둘이야”라며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먼저 옆으로 돌아서면서 “할아버지 조심해서 걸으세요. 즐거운 하루 보내시고요”라고 작별 인사를 햇다. 할아버지는 “도와줘서 고마워”라면서 네발 걸음으로 떠나갔다.
혼자 가면서 생각해 보았다. 나보다 일곱 살이나 아래인 할아버지가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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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아랫사람으로 대한 것이다. 약간 억울하기도 하고 손해를 본 것 같기도 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지팡이가 필요 없는 내가 더 고맙기도 하고.
■ 나는 아직 골동품이 아니다
지난 6일은 금년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 모교인 숭실고등학교 전 교장 최덕현, 현 교장 윤재희와 함께 강원도 양구를 방문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근현대사 박물관 2층에 자리하고 있는 도자기 방으로 갔다.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내가 소장하다 옮겨놓은 고려시대부터 구한말까지 선조들이 애용한 도자기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지훈의 시 <도자기 예찬>도 보였고 품격을 갖춘 김용진의 문인화도 두 점 걸려 있었다.
두 교장에게 간단히 설명을 하고 내가 오래 머리맡에 두고 정들여왔던 조선왕조 초기 아름답고 우아한 백자 앞으로 갔다. 이미 습관이 된 대로 ‘잘 있었지 좀 더 내 서재에 같이 있다가 와도 좋았는데…’라고 말없이 인사를 건넸다.
그때 뭔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도자기가 나에게 소리 없는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저희는 골동품이에요. 한국의 전통을 사랑하는 분들에게 이곳에서 저희 옛날 모습을 보여주면 그것으로 감사해요. 그러나 선생님은 아직 골동품은 아니잖아요. 여기를 찾아오는 손님들은 선생님의 오늘과 내일을 보러오지, 과거의 선생님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니에요’하는 속삭임 같았다.
10여년의 세월이 지나면 이것을 찾아주는 분들은 무엇을 보고 느낄까? 물론 공원 서북쪽에 있는 안병욱과 내 묘소도 찾아줄 것이다. 거기에는 ‘여기 조국과 겨레를 위해 정성을 바친 두 친구가 잠들어 잇다. 그들의 세대는 사라지고 있으나 그 마음은 길이 남을지어다’라는 침묵의 묘비가 설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은 ‘철학의 집’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우리의 과거 보다는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하는 마음을 되찾아주기를 바라게 될 것 같다.
2개월여 만에 다시 찾은 기념과, 여기는 우리 둘의 지난날을 기념하는 시설이지만, 동시에 우리와 마음을 같이하는 이들의 장래를 위해 더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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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뜻을 깨닫게 해주었다. 인생은 과거를 기념하기 위한 골동품이 아니다.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 항상 새로운 출발이어야 한다. 밀알이 더 많은 열매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듯이.
■ 98세처럼 살자
새해 첫날 우리 나이로 100세가 되었다. 감사와 걱정이 함께 찾아든다. 두 자리 숫자(99)가 세자리(100)로 올라가는 과정이 그렇게 힘든 것인가. 나 지신은 괜찮은데 주변에서 가만두지를 않는다.
아침에는 KBS <아침마당>에 출연해 행복이야기를 했다. 지난 31일부터 닷세 동안은 <인간극장>에 내 100세 모습이 소개되기도 한다. 나도 모르게 100세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묻지 않을 수 없다. 80대 중반 부터는 몸이 종합병원이라고 한다. 우선 건강유지가 걱정이다.
언제 어디서부터 온 손님인지 건망증이 찾아왔다. 일이 있어 아래층으로 내려왔는데 왜 왔는지 깜짝 잊어버린다.
연말에 2~3일 동안은 반성과 연구를 해 보았다. 나로서는 마지막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더 늙지 말자. 98세로 돌아가자’는 생각이다.
* 98세에 한 일
1. 두 권의 책을 썼다.
2. 160여 회의 강연을 했다.
3. 보청기도 지팡이도 없이 살았다.
* 100세 새로운 한해를 어떻게 보낼지 계획을 세운다.
1. 계간지 <철학과 현실>에 3년여에 걸쳐 쓴 글들이 출간 될 것이다.
2.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1년 가까이 게재되었던 칼럼과 글들을 책자로 내 기를 원하는 출판사들이 기다리고 있다.
3. 금년 4월까지 계속할 강연회 청탁도 들어와 있다.
그래서 100세가 아닌 제2의 98세가 채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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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손자 결혼식 축의금
미국에 사는 막내딸 아들이 지난 주말 결혼했다. 그녀석이 어릴 때는 내 귀를 만지기를 좋아했다. 그러던 녀석이 의과대학 공부를 마치고 전문의 시험을 통과했다. 병원에 근무하게 되었고, 결혼도 하는 것이다.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어 얼마 안 되는 축의금을 보냈다.
오늘 아침에 막내딸에게 전화가 왔다. 오히려 아버지에게 생활비라도 보내드리고 싶은 마음인데 애들을 위한 사랑의 선물이라서 감사히 받겠다는 정성 담긴 목소리였다.
10년쯤 전이다. 셋째 딸이 전화를 걸어왔다. 두 딸과 의사인 두 사위가 상의를 하였단다. 내가 틀림없이 100세 까지는 살 테니까 노후의 생계문제에 잘 대처해 두라는 조언이었다. 자식들에게 유산을 줄 생각도 하지 말고 꼭 챙겨 쥐고 살라는 것이다. “어머니가 있으면 걱정을 안 해도 되는데 아버지 혼자니까 염려가 된다”고도 했다. 내가 웃으면서 “그렇게 하겠다. 그러나 100세까지야 살겠느냐?” 라고 했더니 그래서 걱정이라는 것이었다. 틀림 없이 100세를 넘긴다는 얘기였다.
작년에는 두세 기관에서 상금을 받았다. 그 돈이면 3~4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번 돈이 아니다. 내가 갖거나 나를 위해 쓰라는 돈이 아니다. 그래서 사회에 환원하기로 했다.
100세 이후 여생에 필요한 생활비는 남겨 두었다. 오래 살기 위해서라도 주어지는 일을 계속 해야겠다. 열심히 벌어서 내 힘으로 살다가 남는 재산이 생기면 필요한 곳에 주고 가려한다.
남은 세월 열심히 일하겠다. 수입이 생기면 나를 위해서는 적게 갖고 이웃을 위해서는 많이 주는 생활을 이어가기로 하자.
■ 철이 덜 들어 젊어 보이나
내 제자이자 후배 교수이던 S가 전화를 걸어왔다. 동기들 몇이서 점심 초대를 한다는 예기다. 약속한 식당에 갔더니 같은 연배의 네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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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교수가 웨이터에게 우리 다섯 사람을 나이 순서대로 서비스해주면 보너스를 주겠다고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웨이터는 둘러보더니 주름살이 만은 친구들부터 차례로 물 잔을 놓았다. 내가 꼴찌가 되었다.
웨이터는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얼굴을 살폈다. 왜 내가 15년이나 아래인 제자들보다 젊게 보였을까. 친구 김태길 교수가 몇 차례 남긴 말이 있다. 철이 늦게 들어서 오래 살 것이라는 얘기다. 신과 대학에 있던 H 교수는 주변에서 철이 덜 들었기 때문에 젊어 보이기도 하지만 장수할 것 같다는 말을 듣곤 했다.
이보다 더한 사건이 벌어진 일도 있었다. 내 딸은 대학생이 된 아들이 보고 싶어서 계획을 세웠다. “여름 방학 때 서울 외할아버지가 하와이로 강연하러 오는데 너도 와서 할아버지와 5일 동안 같이 있지”는 부탁이었다. 나도 그러겠다고 합의를 보았다. 한인 교회 강의도 준비되어 있었다.
비행기로 빅아일랜드라는 섬으로 갔다. 딸과 사위가 먼저 나가고 나는 손주와 함께 뒤따라 걷고 있었다. 환영 나온 교회 사람들이 내 사위에게 가서 인사를 했다. 서울에서 여기까지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셨다는 말이었다. 초청받은 연사는 나인데 내 사위를 나로 착각한 것이다.
내 사위는 부끄럽고 당황스러운 인사를 받았다. 얼굴이 불그레해가지고 어쩔 줄 몰랐다.
2부 석양이 찾아들 때 가장 아름답다
■ 생일 저녁, 밥을 굶어야 했다
초등학교 입학 전후였을 것이다. 늦은 봄 냇가에서 늦도록 놀다가 집으로 들어섰다. 몹시 시장기를 느끼고 있었다. 방문을 열려고 하는데 어머니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와 말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장손의 생일인데 고깃국은 못 끓여도 쌀밥은 했어야죠, 조밥하고 고추장찌개밖에 없지 않아요.”
나는 문 밖에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엄마 나 왔어”하면서 방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거짓말을 했다. “나 오늘 영길이네 집에서 놀았는데, 열길이 엄마가 내 생일이라고 이밥에 고기국도 끓여주어서 밥 많이 먹고 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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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저녁은 안 먹어도 된다며 그렇게 꾸며댔다. 어머니는 “그러면 잘 됐다. 우리는 조밥에 김치만 먹으면 된다”면서 아버지와 식사를 했다.
나는 거짓말의 죗값을 치러야 했다. 배가 고프니까 잠도 오지 않았다. ‘내 생일만 아니었으면 거짓말도 안하고 굶지도 않았을 텐데….’ 오히려 생일이 원망스러웠다.
38선을 넘어 탈북해 서울 중앙중고등학교에 부임한지 1년 쯤 지났을 때였다. 내가 담임하는 반 학생 두세 명이 저녁 시간에 집으로 찾아왔다. 그러면서 “선생님 생일은 잘 모르겠으나 크리스마스가 되어 작은 선물을 가져왔습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작은 상자를 열어보았더니 손목시계가 들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린 제자들이 시계도 없이 가난하게 지내는 내 모습을 보고 돈을 모아 성탄 선물을 했던 것이다. 그런 애정어린 선물을 받은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가급적 많은 사람에게 마음의 선물을 하자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올 해는 100세를 살았는데도 내가 나누어준 사랑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 아내의 사랑
모든 남성은 두 여성의 사랑으로 자라고 행복을 누리면서 살게 된다. 어머니와 아내의 사랑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결혼 전에는 어머니의 보호와 배려가 있었고, 그 후에는 아내의 도움이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 기간에 얻은 교훈은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 받는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그 사랑이 미미한 것 같아도 그것이 타고난 모성애임을 깨닫게 된다.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 어머니가 손님에세 항상 하는 말씀이 있었다. “우리 큰 아들은 나를 닮았으면 키도 크고 건강했을 텐데 저희 아버지를 닮아서 저렇게 태어났어요”라는 변명이다.
내 아내도 그 점은 비슷했다. 학창시절에 만나 오랜 가난과 싸워야 했다. 40대 후반부터는 “우리가 얼마나 가난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내 덕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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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큼 살게 됐잖아요. 다른 여자와 결혼했으면 당신이 행복했겠어요?”라고 했다.
아내가 남겨준 또 한가지 고마운 일이 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아주머니가 보험회사의 모집원이 되면서 간청해 오는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S생명보험에 가입한 것이다. 얼마 안 되는 액수의 종신 보험이었다. 아내가 계속 이 배당금을 받다가 세상을 떠났다. 아내 대신 내가 수혜자가 되었다. 해마다 5월말이면 100만 원씩 받으러 간다. 집에 와서 아내에게 “고마워 용돈을 챙겨줘서”라고 중얼 거린다. 마치 아내가 하늘에서 “내 사랑이 얼마나 고마운지 아셨지요?”라며 웃는 것 같다.
■ 공 좀 찼던 철학교수
러시아 월드컵 경기 때문에 밤잠을 설쳤다. 경기가 있는 줄 알면서 잘 수도 없고 응원을 하고 나면 피곤해진다.
초등학교 때는 동네 아저씨가 만들어준 볏짚 뭉치로 공을 찼다. 그러다가 고무공 차기를 즐기면서 중학생이 되었다, 30여 년의 세월이 지난 뒤였다. 연세대학교의 일곱 개 단과대학 교수들이 친선 축구경기를 갖기로 했다. 불행하게도 우리 문과대학교수 중에는 축구 경험을 갖춘 교수가 거의 없었다. 할 수 없이 내가 앞장서서 팀을 구성하고 시합을 위한 훈련을 맡게 되었다. 나는 선수이면서 주장의 책임을 맡는 처지가 되었다. 어쨌든 첫해의 우승기를 차지하게 되었으니까, 내 노력도 적지 않았던 셈이다.
그런데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1970년도 가을에 열리는 연고전 경기에는 교수 축구팀도 출전하게 되었고 나도 시니어팀의 주전 선수로 뽑힌 것이다.
결과는 연세대학교 교수팀이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나는 오른쪽 공격수로 뛰었다. 우승하고 두 대학의 응원단이 환호성을 울리는 가운데 우승대 앞으로 나서는 나 자신이 자랑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50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내가 왕년에 축구선수였다고 해도 누구도 믿어주지 않는다. 신장 162센티미터와 체중 55킬로그램의 철학교수가 축구선수라니, 나도 믿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동대문 잔디구장에서 활약하던 사진이 남아있어 손주들에게 보여주기도 하며 때로는 고등학생들에게 스스로 자랑해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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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은 간단하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 나도 축구를 전공했다면 박지성 선수만은 못해도 성공하고 돈도 벌었을 것이다” 라고.
■ 1945년 8월 15일에 꾼 꿈
내가 스물다섯 되던 해. 1945년 8월 15일. 날씨는 맑았고 더위도 심하지 않았다. 27~28도 정도였을까.
전날 밤 나는 언제나처럼 비슷한 시간에 잠들었다. 누구의 안내를 받아갔는지는 모른다. 평안남도 진남포 해변가였다. 도시도 인적도 보이자 않는 바닷가에서 마우리(한국말 모의리)선교사를 만났다. 그는 말없이 나를 이끌고 큰 창고 앞으로 갔다. 문을 열고 들여다보았다. 바다에서 건져 올린 시신들이 작은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모두가 일본 사람들의 주검이었다.
정말 충격적인 꿈이었다. 그 놀라운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장면이 너무 선명하게 남았다. 그리고 다시 잠들었는데 새벽녘에 또 꿈을 꾸었다.
오른쪽 산 위로 무척 큰 태양이 넘어가면서 지고 있는데 서쪽이 아닌 동쪽 산이었다. 저렇게 붉고 큰 태양이 어떻게 동쪽 산으로 내려가는지 놀라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한없이 넓은 농토 한 가운데서 소에 연장을 메우고 밭을 갈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옥토였다. 평생을 해도 다 갈지 못할 정도로 넓은 땅이었다. 곧 어둠이 찾아올 것 같은데…. 두 번째 꿈이었다. 식구들이 모여 조반을 먹을 때 꿈 얘기를 했다. 듣고 있던 부친이 내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혹시 오늘 무슨 소식이나 있을지 모르니까 평양까지 가 보고 오도록 해라.”전차를 타고 시청 앞에 갔을 때였다. 낮 12시 정각이었다. 길가에 있는 가게에서 라디오 소리가 들려왔다. 뛰어내려 가게로 갔다. 일본 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국내와 모든 지역에서 전쟁을 끝내고 일본군은 무조건 항복한다” 믿기 힘든 사실이었으나 내 귀로 직접 들었으니까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미국에 항복한 것이다.
20리가 넘는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앞으로 나는 그 넓은 땅을 갈아 밭으로 바꾸어야 겠다고. 지금 돌이켜보면 교육계에서 한평생을 보내라는 뜻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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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에서야 찾아간 고향
여행하는 사람은 저녁때가 되면 집 생각을 한다. 귀소본능이다. 새들은 둥지를 찾아가고 짐승들은 잠들 곳으로 간다. 외국에 가 머무는 사람은 계절이 바뀌면 고향을 생각한다. 나 같은 늙은이는 고향에 가 잠들기를 원한다.
내 모친도 북녘 땅 가까운 곳으로 가기를 바랐다.
나는 70여 년 전에 고향을 떠났다. 탈북 할 때부터 반공 악질분자로 낙인찍혀 있어서 고향을 찾아볼 뜻은 포기하고 지냈다. 그런데 10여 년 전 두 차례 고향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첫 번째는 내가 구호단체 월드비전의 명예이사로 있을 때 평양지부의 초청을 받았다. 그러나 갑자기 독감에 걸려 동행할 수 없게 되었다. 두 번째는 평양 과학기술대학 개교식에 VIP 중 한 사람으로 갈 기회가 생겼는데 평양의 정치적 사정으로 행사가 연기되면서 그것도 놓치게 되었다.
그 대신 꿈을 꾸곤했다. 어찌어찌 북한에 가기는 했으나 고향에는 가지 못한 꿈, 고향 뒷동산까지 올라가서도 간첩으로 몰릴까봐 마을에는 못 내려 간 꿈. 나보다 두 살 아래지만 초등학교 소꼽친구 영길이가 보고 싶어 용기를 내어 마을에 내려갔던 꿈. 마침내 어린 시절로 돌아가 영길이를 만나고 옛날처럼 샛강으로 뛰어가던 꿈,
어느덧 저녁때가 되었다. 영길이네 집 뒤 언덕에 같이 앉았다. 해는 서산에 걸려 있었다. 영길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얼굴은 60대 어른으로 바뀌어 있었다. “형님, 나도 고향을 떠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 사는 평양집도 고향은 아닙니다. 인민공화국 어디에나 사랑이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고향은 사랑이 있는 곳이어야 하는데….” 꿈에서 깨어났다. 옆에 아무도 없었다.
■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내 일생에 걸쳐 가장 행복했던 시기가 있었다면 1961년과 1962년에 걸쳐 미국 대학에 머물렀다가 유럽을 비롯한 세계일주 여행을 한 기간이다. 친구인 안병욱교수와 서울대학교 한우금 교수와 함께였다. 만일 그 1년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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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학문과 사회적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 인생과 하는 일의 소중한 일부를 갖추지 못했을 것 갔다.
세계적인 대학에 머무를 수 있었고 석학들의 강의와 세미나에 동참할 수 있었다. 철학계는 물론 관심을 갖고 있던 파울 탈리히, 카를 바르트, 라인 홀드 니부어 등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들의 강의와 강연에 참여하기도 했다. 유럽 등지의 문화적 유산과 문물도 찾아볼 기회를 얻었다. 여러 날 인도를 방문한 것도 유익했으나 바이블의 고장을 순방하는 기회도 생겼다. 한마디로 내 정신계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를 행복하게 만든 개인적인 사건이 있다. 7년쯤 전이었다. 충북 영동에 강연을 갔다. 청중 몇 백 명이 내 강연에 심취해 주었다. 강연을 끝내고 휴게실에서 혼자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노크소리와 함께 70대 후반의 신사 한 분이 찾아왔다. 그가 말했다. “피곤하실 것 같은데 한 5분만 인사드리고 가겠습니다”라고 했다.
안병욱 교수의 안부를 묻고는 그간 나의 강연 내용과 저서에서 공부를 많이 했다는 말과 함께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냥 인사드리고 싶어서 찾아 뵈었습니다.”
나도 일어서서 따뜻한 인사를 나누었다. 돌아서서 나가던 그가 발걸음을 멈추더니 “안 선생님을 만날 기회가 생기면 꼭 감사 인사를 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그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인사를 받을 때마다 수고의 보람에서 오는 행복을 느끼게 된다.
■ 가장 힘들었던 일은
해방을 북한에서 맞이하고 2년 동안 고향에서 조용히 청소년들을 위한 중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즈음 조선민주당을 이끌어 오던 조만식 선생은 연금되고 함께 중책을 맡았던 김현석은 탈북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노모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 고향에 왔다가 체포되었다. 그가 바로 우리 중학교 이사장이었다.
1947년 8월 광복절 후에 나는 일곱 달 되는 아들애를 업은 아내와 같이 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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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을 단행했다. 모친은 눈물을 훔치면서 말이 없었다. 부친은 맏손자 얼굴이나 한 번 더 보자면서 잠들어 있는 손자의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것이 부친과 손자의 마지막 이별이 될 줄은 몰랐다. 기차로 황해도 사리원을 거쳐 해주까지 왔다. 사건이 벌어졌다. 아내와 나는 용당 바닷가로 가다가 보안서원에게 붙잡혔다. 탈북자 수용소로 끌려갔다.
거기 책임자가 말했다. “지금 막 평양에서 지령이 떨어졌는데 이제부터 잡혀오는 놈들은 무조건 출발했던 거주지로 돌려보내라는 명령이다.”
그는 보안서원을 부르더니 이들을 기차나 버스로 떠나는 것까지 보고 오라고 지시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버스 정류장에서 보안서원을 설득해 보냈다. 그리고 그날 밤 바닷가 갈대밭을 지나 바다를 건넜고 탈북에 성공했다.
■ 최루탄냄새 가득했던 고별 강연
대학교수 생활 30여 년을 끝내면서 가졌던 종강 강연회 때가 생각났다. 33년 전이다. 65세에 정년으로 교단생활을 떠나는 해였다.
그날은 연세대학교가 최악의 시련을 겪고 있었다. 정권에 항거하는 데모가 벌어졌고, 경찰을 비롯한 공권력이 대학 캠퍼스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후배 교수들과 대학원생들은 내 고별 강연을 연기하자고 청해왔다. 나는 개인 사정도 있어 10여명이라도 좋으니 감행하지고 했다. 오래된 약속을 어길 수가 없었다.
그런데 결과는 뜻밖이었다. 가장 넓은 강의실이 가득 찼고 설자리도 없었을 정도였다. 강의실 안은 최루탄 가스가 퍼져 모두가 눈물을 참아야 했다. 강의와 질문 시간까지 끝내고 나니까 90분 정도가 지났다. 두세 군데 신문사 기자들도 동참해 주었다. 끝나면서 학생들 상당수는 다시 데모대로 복귀했다. 주관했던 후배 교수들과 감격스러운 인사를 나누고 최루탄냄새가 자욱한 캠퍼스를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병중의 아내가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말을 못하는 아내가 어떻게 되었는지 몯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훌륭하게 잘 되었다고 설명했다. 아내는 그럴 것이라는 표정이었다.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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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해 같은 시절의 유산
숭실 중학교 3학년을 마칠 때 우리 학교는 폐교 운명에 직면했다. 일제강점기 때 신사 참배를 거부했다며 선교사인 교장이 추방당했다.
나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신사참배를 하며 학교에 머무를 것인가, 거부하고 떠날 것인가. 같은 반 윤동주는 만주 간도로 떠났고, 나는 자퇴했다. 고향 교회의 김철훈 목사와 장로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한 죄로 고문당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신앙적 양심과 애국심을 포기할 수 없어서였다. 나도 그 길을 따라야 한다고 결심한 것이다.
나는 갈 곳이 없었다. 평양부립도서관에서 책을 읽기로 했다. 자전거로 통학하던 때였다. 오전 9시에 도서관에 도착해 오후 5시까지 독서했다. 당시 내모습을 회상할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1년이 지났다. 개학 때 나는 다시 교복을 입고 학교에 찾아갔다. 받아주지 앉는다면 돌아와야 했다. 층층대를 올라 현관문을 열고 들어설 때였다. 복도를 지나가던 김윤기 선생이 “너 형석이구나!”라면서 나를 이끌고 다니며 재입학 절차를 밟아주었다. 마치 ‘우리가 얼마나 너를 기다렸는지 모르지?’라고 나무라는 것 같았다.
그 해에 나는 가장 행복한 학교생활을 했다. 어머니 품을 떠났다가 돌아온 어린애 같은 1년이었다. 내가 나중에 제자들에게 작은 사랑이라도 베풀었다면 그 1년 동안 사랑 있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1년 후에 일제는 우리 학교를 폐교하고 평양 제3중학교로 개편했다. 일본 학생들과 공학하는 황국신민 양성소로 만들었다. 그 1년 동안은 소년 교도소 같은 생활을 했다. 교내에서는 우리말을 하지 못하는 교육을 받아야 했다.
학생들을 어리석은 백성으로 키우려는 식민지 교육을 보면서 나는 교육의 의미를 깨달았다. 한편으론 고마운 일이었다. 사랑이 있는 교육의 의미를 그때 알았다. 힘든 과거가 내게 남긴 유산이다.
그보다 더 감사한 것이 있다. 1년 휴학하는 동안 독서를 통해 오늘의 내가 태어난 것이다. 물론 그때는 몰랐다. 그 독서가 나를 정신적으로 성장하게 하고 철학도로 이끌어 주리라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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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네 살의 기도
나이 때문일까. 요사이는 어디 가서 한 시간 이상 앉아 있는 것이 고역이다. 그래서 교회에 나가는 일도 삼가는 때가 있다. 차라리 강의를 한다면 오랜 습관 때문인지 힘이 덜 든다.
나는 누구보다도 병약하게 태어났다. 어머니는 내가 듣는 앞에서도 “네가 스무 살까지 사는 것을 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당시에는 모두가 가난했으나 내 경우는 가난이 너무 힘든 짐이었다. 친구들을 생각할 때는 부럽기도 했다. 내가 받은 초등학교 교육은 형편없었다. 마쳐봐야 중학교에 갈 자격도 모자라는 시골 교회 학교에서 배웠다. 남들이 다 가는 공립학교에도 가보지 못했다.
그렇게 긴 세월을 보낸 내가 지금은 철학계에서 오랫동안 일 많이 하는 원로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 때문에 지금도 내가 잊지 못하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열네 살에 내가 올린 기도다.
“하느님, 저에게 건강을 주셔서 중학교에도 가고 오래 살게 해 주심다면 제가 저를 위해서는 일하지 않고 하느님의 일을 하겠습니다.”
■ 제2의 고향, 양구
지난 수요일은 모처럼 공식 일정이 없는 날이었다. 오래간만에 강원도 양구에 다녀오기로 했다. 그 전날에는 전국적으로 대설주의보가 내렸는데, 강원도 북쪽으로 접어드니 설경이 장관이었다. 아주 오래전 북한 고향에서 본 설경 같아서 노구임에도 피곤함을 잊을 수 있었다.
양구 갈 때마다 세 곳을 찾아보곤 한다. 처음 들르는 곳은 양구 근현대사 박물관이다. 그 2층에 가면 내가 모아 소장하고 있던 정든 도자기 200여 점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만들어진 시기가 고려시대부터 구한말까지 걸쳐 있는 다양한 토기와 자기들이다. 고가의 관상품은 아니나 우리 선조들이 사용하던 유물이어서 인간미가 풍기는 것들이다.
조지훈 시인이 한국의 백자를 찬양한 시문(時文)이 액자로 걸려 있다.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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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화의 대가였던 김용진의 그림 두 폭도 제자리를 차지했다. 아내가 쓰던 붓글씨 유품도 나를 반겨준다.
다음에 찾아가는 곳은 ‘김형석 ․ 안병욱 철학의 집’이다. 지난겨울에 새로 건축한 기념관이다. 박물관 앞 호수 맞은편에 용머리 공원에 있다. 아래층에는 안 선생의 유품과 서예작품, 저서가 공간을 차지했다. 나와 안 선생은 같은 해에 서로 가까운 고향에서 태어났다. 중 ․ 고등학교를 같이 평양에서 보냈다. 후에는 일본에서 철학공부를 했다. 윤동주 시인은 나와 같은 숭실중학교 동창이면서 안 선생과는 대학 때 친분을 나누기도 했다.
‘철학의 집’은 그 뜻을 잘 아는 양구 유지들이 우리를 위해 장만해준 기념관이다. 옥상 베란다에 올라서면 파로호(破虜湖)가 멀리까지 시야를 넓혀주며 아름다운 숲을 지닌 산들이 평화로운 풍치를 만끽하게 한다.
양구는 내 조국 한반도의 정중앙에 해당한다. 그 위치를 기념하는 천문대가 있고 향토풍을 잘 전해주는 박수근 화백의 생가 자리에는 석조로 된 기념 미술관이 있다. 수녀 이해인 시인의 고향이기도 하다. 시와 그림과 철학이 숨 쉬는 문화의 고향이다.
그리운 고향에 갈 수는 없지만 마음 둘 고향이 있어 감사한 일이다. 안 선생과 나는 정든 북녘 고향을 떠나 70년 동안 여러 곳을 헤매다가 영혼의 고향을 찾아 이곳 양구에 안식하게 된 것이다.
■ 아내의 전시회
50대 때 아내가 친구들과 같이 서예공부를 시작했다. 아내의 소질을 잘 알고 있어서 별로 기대는 갖지 않았다. 1년쯤 지나면 동우회원들의 전시회가 있을 듯싶은데 아무 소식도 없었다. 또 한 해가 지났을 때였다. 뒷집 이한빈 선생 사모가 “교수님은 사모님 전시회에 나오지 않으시나요?” 라고 물었다. 생각해보니까 아내가 자신의 작품이 창피스러워 보이고 싶지 않으니까 숨겨 넘길 심산인 것 같았다.
그날 저녁, 내일은 시간이 있으니까 오후 3시에 광화문 전시장에서 만나 당신 작품도 감상하자고 제안했다. 아내는 알리고 싶지 않았는데 할 수 없다고 단념하는 표정이었다. 전시장에서 작품들을 보다가 내가 저 쪽의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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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먼저 보자고 앞장섰다. 노력은 했으나 역시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래도 “생각한 것보다 좋은 작품인데요. 다른 글씨들은 다 비슷비슷한데 당신 글씨는 개성이 뚜렷해서 생명력이 있어요”라고 칭찬해 주었다.
뜻밖의 칭찬에 아내도 만족한 모양이다. 그날 저녁 식탁에서 아내가 “너희들도 엄마 전시회에 가볼래?”라고 권했다.
■ 도자기 사랑
오래 전 일본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도자기 수장자의 집에 미국 대사관 사람이 방문했다. 기다리고 있던 수장가가 안내를 받으면서 들어오는 손님을 보았더니 아내와 두 어린이가 동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주인은 오늘은 차나 마시면서 담화를 나누다가 가시는 것이 좋겠다면서 도자기 보여주기를 거절했다. 어린이들을 동반했기 때문이다. 골동품이 애들의 장난감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미국보다 오랜 역사를 지닌 골동품 수집가들에게는 그들 나름대로의 예규가 있다. 도자기를 감상할 때는 정좌를 한다. 그리고 한 손으로 물건을 잡는 일은 금물이다. 30센티미터 이상 높이로는 들어 올리지 않는다. 간혹 실수를 하더라도 파손되는 일이 없도록 마룻바닥에 깔개를 준비하기도 한다. 다른 골동품 보다도 도자기에 대한 애호는 극진하다.
임진왜란 때 가지고 간 도자기들을 400여 년간 조심스럽게 애용하고 보관하다가 지금은 거의 국보급 대접을 하면서 박물관에 보존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들이 가장 소중한 애장품으로 여기는 이도(井戶)잔은 예날 우리 선조들이 사발로 쓰던 일상 식기였다. 몇 점 안 되는 그 사발이 지금은 가장 고귀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만큼 그 도자기들을 사랑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 나는 언제쯤 철이 들까
서구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비극(悲劇)을 잘 쓴 두 작가를 기억한다.
처음은 <오이디푸스 왕>을 쓴 소포클레스이다. 오이디푸스 왕은 출생 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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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하는 운명을 갖고 태어난다. 부왕과 왕후는 물론 본인도 그 운명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운명대로 되어 스스로를 저주하면서 자멸의 길을 택한다.
다음 작가는 셰익스피어다. 그는 타고난 성격은 누구도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햄릿>의 주인공 햄릿이 대표적이다. 성격은 제2의 운명이다. 한때 행동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주장했다. 성격을 바꾸기 위해서는 습관을 바꿔야 하고, 습관을 바꾸려면 행동을 바꿔야 한다고. 행동을 바꾸려면 생각을 바꾸는 것으로 시작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하지만 주어진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 더 좋은 사과를 많이 맺을 수는 있으나 사과나무에서 포도가 열릴 수는 없다. 성격은 깔린 철로와 같아서 인간은 그 궤도를 벗어날 수 없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나를 연설대회에 내보낸 적이 있다. 내용은 다 외우고 있었는데 청중 200명 앞에 섰더니 많은 시선에 압도됐다. 결국 연설도 못하고 울먹이다가 내려왔다. 그 다음 부터는 부친이 다시는 연설대회에 내보내지 않았다,
중학생이 되어 다른 사람의 강연이나 연설을 들으면서 몹시 부러워했다. 그것만이 아니다. 나는 어딘가 보자라는 데가 있었다. 중 ․ 고등학교 친구들은 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이름있는 강연자로 꼽히게 되었다.
지금도 나는 1~2년 전에 한 일을 후회하는 때가 있다. 나는 언제쯤 되면 철이 들지 모르겠다며 스스로에게 타이르기도 한다.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이 나를 고마운 스승 중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100세까지 산 것 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은 저마다 한 가지씩 장점을 갖고 있다 나는 철들면서부터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자랐다. 신앙은 누구에게나 내 생애를 다 바쳐서라도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다고 가르친다. 사명의식에 가까운 그 책임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다시 태어나곤 하는지도 모르겠다. 존경하는 윤동주 시인 같은 친구들이 모두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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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스승과 두 친구
지난 주에 책 두 권이 배달되었다, 고려대학교 동문들이 보낸 인촌 김성수 선생에 관한 책과 세 철학자가 남긴 <인생의 열매들>이었다. 나에게는 두 스승과 두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도산 안창호와 인촌 김성수 두 분은 내가 직접 가르침을 받은 은인이다. 17세 때 도산의 마지막 설교를 들었고, 27세부터 7년간 중앙고등학교 교사로 지낼 때는 재단 이사장이던 인촌의 정신적 영향을 받으면서 일했다. 왜 그분들을 잊지 못하는가. 그들의 희생적인 애국심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분의 폭넓은 우정과 사랑이 있는 인간성에 공감했던 것 같다.
내 절친은 안병욱과 김태길이다.
한 번은 서울 대학교에 일이 있어 찾아갔다. 기다리고 있던 김태길 교수가 뜻밖이라는 표정을 꾸미면서 “난 오늘 김 교수는 못 오는 줄 알았어!”라고 했다. “왜?” 했더니 “바람이 몹시 불어서 도중에 날아간 줄 알았지”라고 해서 모두 웃었다. 그러면서 잡은 손이 유달리 따뜻했다. 그 손이 말하는 것 같았다. “너무 오래 못 만났어….”라고.
안병욱 선생도 친구로서 나에게 유언을 남겼다. “김 선생은 우리들보다 정신력이 강하니까 우리가 못한 일들을 잘 마무리 해 줄 거야.”더 이상 건강이 유지되기 어려움을 예감한 듯했다. 안 선생도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 1,2부가 끝났습니다. 다음에 3,4부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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