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라면 정조처럼(3)
리더라면 정조처럼(3)
■ 김준혁 지음
◉ 6장 포용의 정치를 추구하다
■ 36 창덕궁 내원에서 군 신 동행을 열다
정조는 자신이 흠모했던 세종과 달리 취약한 왕권으로 출발했다. 물론 영조의 보호아래 동궁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대리청정을 거쳐 국왕이 되었지만, 정조는 즉위 초 여러차례 시해 위기를 겪으며 어렵게 국정을 운영했다.
그래서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여 본인이 추구하는 왕도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정책을 만들고 군사론(軍師論)과 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등을 제시하며 신하들에게 우월한 존재임을 전달하려 했지만 결국 군신공치론(君臣共治論)을 바탕으로 사림과 관료들과의 조화를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정조는 군주로서 신하들로부터 초월적 존재이고 싶었으나 한편으로는 군신동락(君臣同樂)이 현실적인 정국 운영에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조는 이전의 국왕들과 차별되는 정치를 했는데 그것이 바로 군주의 공간인 창덕궁 내원을 군신들과 공유하는 내원(內苑)연회 정치였다.
창덕궁의 동산은 궁궐 뒤편에 있다고 후원, 또는 궁궐 북쪽에 있다고 북원이라고도 불렀다.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곳이라 하여 금원이라 했으며 궁궐 안 동산이라 해서 내원이라고도 했다. 또한 궁궐의 동산을 관리하던 관청의 이름이 상림원이었기 때문에 상림원 또는 상림(上林)이라고 했다.
정조가 처음 창덕궁 내원의 옥류천을 신하들과 함께 산책한 것은 1781년(정조 5)9월 3일이다.
정조는 옥류천 산책 직전 자신의 어진을 규장각 신하들과 함께 보았다.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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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는 즉위 후 처음으로 1781년(정조 5)8월 26일,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조선시대 국왕들은 10년에 한 번씩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 원칙이었다. 정조가 처음 초상화를 그린 것은 동궁 시절인 1771년 (영조 47)년이었다. 스무 살의 나이에 처음 초상화를 그린 이후 10년이 지났을 때 정조는 국왕이 되어 있었다. 정조는 이 초상화를 9월 1일 규장각에 봉안하게 했다. 그리고 이틀 뒤인 9월 3일 초상을 신하들과 함께 보기 위해 창덕궁 후원에 있는 규장각을 찾아갔다.
조선 역사상 전례 없는 내원 옥류천 개방은 파격 그 자체였기에 신하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정조와 함께 옥류천 계곡을 산책한 강세황은 이 영광스러운 일을 회고하며 “ … 어찌 우리 임금께서 몸소 이 미천한 신하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뛰어난 경치를 하나하나 일러주시고 온화한 얼굴과 따뜻한 음성으로 한 식구처럼 대하셨는가!…… 내가 어떠한 사람이건대 이와 같은 성스럽고 밝은 세상에서 다시없을 은혜를 받았단 말인가. 멍하니 하늘 상제의 세계에 오른 꿈에서 깨어났다. 대략적어서 우리 자손에게 전하여 보이노라.”라고 <호가유금원기>에 기록했다. 정조는 옥류천을 나와 규장각 앞의 부용지로 가서 신하들과 낛시를 하고 술을 마시며 조선의 미래를 이야기 했다.
정조는 1792년(정조 16)3월 21일, 두 번째로 창덕궁 내원에서 각신 및 각신의 자제들을 초청하여 꽃구경을 하고 부용정에서 낚시를 즐기는 연회를 개최했다. 물론 이 연회 역시 단순히 정조가 규장각 각신들과 함께 꽃구경을 즐기기 위한 행사는 아니었다. 이는 정조가 집권 15년이 지나며 지난 국정에 대한 자신감과 향후 국정에 있어 군신 간의 화합이 필요한 시기라는 판단에 따라 개최한 군신동행(君臣同行)이었다.
그해 2월 정조가 가장 역점을 두었던 통공정책(通共政策)이 실시되었다. 조선 건국 이래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 상인들은 백성들이 먹는 채소의 유통까지도 독점권을 행사하고 있었고, 이로 인한 폐단이 매우 심각했기 때문에 전면적인 개혁요구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 노론들은 대부분 통공정책을 반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조는 이러한 반대를 물리치고 남인 영수 채제공을 내세워 통공 정책을 실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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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791년에 가장 특별한 일은 원자(元子)의 돌잔치였다. 정조는 원자가 탄생 후 아무 탈 없이 성장하여 돌잔치를 하게 되자 후계구도에 대한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즉위 10년(1786)에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죽음으로 후계구도에 대한 불안감이 당쟁의 요인으로 발전하고 왕권의 약화가 예상되던 때에 원자의 탄생과 무탈한 성장은 정조에게 큰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이날 정조는 신하들과 옥류천을 산책하고, ‘수택재’ 연못에 배를 띄워 물고기 잡이까지 했다. 정조가 신하들과 물고기를 같이 잡은 것은 군신동행에 이어 군신이 함께 즐거워 하고자 하는 군신동락이었다.
정조는 물고기를 잡은 것에 대해 큰 의미를 두었다. 이는 규장각 앞 부용지를 만들면서 서벽에 물고기 형상을 새긴 것과 같은 의미이다. 정조는 신하들에게 중국 촉나라의 소열제인 유비와 제갈공명, 조선 효종과 송시열, 관계가 바로 물과 물고기의 관계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정조는 물론 군주이고 물고기는 백성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규장각 주합루 정문 이름을 ‘어수문(漁水門)’이라고 한 것이고, 수택재에서의 물고기 잡이는 ‘군신공치’로 백성들을 위한 올바른 정치를 하자는 다짐이기도 했다.
■ 37 혁신도시 건설로 경제발전 기반을 마련하다
정조가 수원 화성을 만든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국가 개혁을 위한 것이었다. 서울은 주상의 수도로 두고, 수원에는 화성을 건설하여 상왕의 수도로 만들어 이곳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책을 만들고 실험하여 성공시키고자 한 것이다. 성공한 정책은 조선 8도에 보급하여 조선의 백성들 모두를 행복하게 하겠다는 것이 정조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정조는 수원과 서울을 모두 수도로 만드는 양경(兩京)체제를 기획한 것이다.
정조의 화성 건설은 요즘의 개념으로 치자면 철저한 혁신도시 건설이다. 화성 신도시라는 대도시를 만들어 백성들이 자유롭게 상업행위를 할 수 잇는 혁신적 실험을 하고 토지 없는 백성들을 위하여 대규모 국영농장인 둔전을 만들어 안정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업기반을 조성하여 경제를 발전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정조는 수원에 한양의 육의전과 같은 시전을 설치하여 대부상들이 이를 주도하도록 하고 대규모 국영 농장과 저수지를 축조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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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에서의 자유 상업 추진으로 자신감을 얻은 정조와 채제공은 1791년(정조 15)에 독점권을 가진 시전상인들의 ‘금난전권’을 혁파하는 ‘신해통공’을 실시했다. 이로써 조선의 경제 구조에 대대적인 혁신이 이루어졌고 도시 빈민층과 영세상인 및 소생산자가 보호받을 수 있게 되고, 상업의 발전이 축진 되었다.
정조는 상업의 발전만을 기획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백성들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농업이었다. 농업의 발전을 위해 그는 과감한 농업 개혁을 기획했다.
정조는 1789년 7월, 수원부 읍치를 이전하고 수원 지역을 농업 개혁의 시범지역으로 삼고자 했다.
‘농자천하지대본야’라는 말처럼 농업을 기반으로 운영되던 조선사회에서 백성들을 배불리 먹게 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수원지역의 토양이 그리 좋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정조는 수원 백성들에게 대대적인 퇴비 증산을 지시했다. 당시 너무 척박해 백성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던 땅이 3년 동안 퇴비와 함께 섞이니 마침내 최고의 토양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일구어낸 성과에 감탄하기 시작했다. 한번 불붙은 열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화성성역의궤>에도 나오듯이 백성들은 퇴비 만드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즐겁게 농사일에 매진했다. 정조 시대 역시 24년 동안의 재위기간 중 20여 년을 가뭄과 홍수로 인해 백성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이에 정조는 가뭄을 극복하고 농사를 원활하게 짓기 위해 저수지 조성을 제안했다.
그래서 화성 성역이 한창 진행중이던 1795년에 ‘만석거’를 만들었다. 이 만석거는 요즘 수원 사람들이 ‘일왕저수지’라 부르는 곳인데 만석공원 안에 있는 대형저수지를 말한다. 조선시대에 농사를 짓기 위해 인공적으로 조성한 최초의 저수지를 만석거라고 하는 학계의 의견을 보면 정조의 저수지 건설은 혁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만석거를 설치한 그 해에도 조선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전국적인 흉작에도 불구하고 분석거를 중심으로 대규모로 조성된 ‘대유둔’ 만은 대풍작을 이루었다. 정조의 혜안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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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1798년 현륭원 앞에 ‘만년제’라는 저수지를 추가로 만들었다. 그리고 서호(西湖)로 더 잘 얼려진 ‘축만제’까지 만들게 됐다. 정조는 이곳에 단순히 제방을 쌓아 물을 저장한 것이 아니라 물길을 조성하고 그 물길을 따라 논을 배치해 극심한 가뭄에도 논에 물을 쉽게 댈 수 있도록 저수지를 설계했다. 또한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하기 위해 제방 위에 소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어 더위에 지친 백성들의 쉼터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정조의 화성 건설은 농업, 상업, 국방제도의 개혁을 통한 혁신도시의 완성을 위한 것이었다.
■ 38 북벌론을 통해 자주의식을 고양시키다
정조 시대는 북학(北學)의 시대였지만 분명 북벌의 시대이기도 했다. 정조는 조선이 중국에 예속된 국가가 아닌 자주국가로 자리매김하기를 원했다. 조선이 중화(中華)라는 인식, 다시 말해 세계 문화의 중심이라는 의식은 바로 조선이 중국인 청나라를 뛰어 넘을 수 있다는 문화적 자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 같은 문화적 자부심은 바로 병자호란의 치욕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고, 더 이상 청나라에 예속되지 않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지의 발현이기도 햇다. 정조는 자신의 친위도시인 화성을 축성하면서 황제만이 쓸 수 있는 글자인 ‘만(萬)’자와 ‘황(皇)’자를 시설물의 이름으로 사용했다.
- 저수지 이름 : 만석거(萬石渠), 만년제(萬年堤), 축만제(祝萬堤)
- 다리 이름 : 만안교(萬安橋), 황교(皇橋), 대황교(大皇橋)
정조가 이와 같이 황제만이 쓸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하는 정치적 행위를 한 것은 외세의 침탈을 받지 않는 안정된 나라를 만들어 백성들의 삶을 편하게 하는 것 외에 조선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이를 위해 정조는 효종 이후 시들해진 북벌론을 적극 활용했다.
정조시대 북벌론은 정조의 동조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던 남인만이 아니라 북학을 주장하는 노론 청류 계열의 학자들도 북벌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조는 청나라에 대해 북벌론과 북학론 모두를 지니고 있었다.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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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술에 대한 것은 북학을 통해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조선의 문화와 역량이 청나라보다 우월하다고 인식했다.
정조가 즉위초인 1779년(정조 3)에 효종의 영릉을 참배하고 여주에 있는 송시열의 대로사(大老祠)에 배향한 것은 노론 세력을 자극하지 않고 그들과 연대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임과 동시에 한편으로 송시열이 가지고 있던 북벌의 의지를 다시금 계승하고자 하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서 정조는 대로사치제문에 송시열이 북벌을 준비하고 추진했다는 것을 명기했다.
정조의 북벌을 통한 민족의식 의 발현은 역대 충신들에 대한 재평가로 이어졌다. 정조는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전면적인 재평가와 함께 충무공의 사료를 모아 1792년 8월에 <충무공 이순신 전서>편찬 사업을 지시했다.
아울러 정조는 1793(정조 17)직접 충무공의 신도비명을 지어 올려 충무공에 대한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임진왜란 이후부터 이순신에 대한 치제와 사액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남해에서 치른 해전의 승리 주역 중의 한 명일 뿐 임진왜란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조는 이순신의 위상을 극대화했다.
더불어 청나라에 맞서다 순절한 충민공 임경업에 대한 재평가도 이루어졌다. 정조는 임경업에게 시호를 내리고 사당과 사액을 내렸다. 이는 청나라에 대해 항쟁을 추구한 인물에 대한 역사적 복원을 통해 국왕의 자주의지를 백성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의도였다. 이와 더불어 백성들의 영웅이지만 임진왜란 당시 억울하게 죽은 의병장 김덕령 도 복권시켰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민간에서 백성들이 높이 받드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이들 모두 비운에 죽은 인물들이었기에 임경업과 김덕령은 아예 민간 신앙에서 신적인 인물로 승격된 인물들이기도 하다. 즉 백성들 모두가 높이 받드는 인물들을 존숭함으로써 조선의 백성 모두가 자주의식을 갖게 만들고자 했다.
한편 정조는 이순신과 임경업의 후손들로 하여금 대보단에서 비밀리에 진행하는 황단례에 참석하게 함으로써 청나라에 대한 자주 의식을 더욱 강조했다. 양란의 치욕을 극복하고 애국심을 고양하기 위해서는 충신 후예의 참여가 더욱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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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민족 시조에 대한 대대적인 재평가와 치제(致祭)를 실시했다. 단군과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 백제의 시조 온조, 고려 시조 왕건 묘소의 재정비에 대한 법적절차를 새로 제정했다.
정조는 민족의 시조를 높임으로써 조선이 중국과 차별화된 민족이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했다. 단순히 조선의 건국자였던 태조와 태조 이전의 조상들에 치제만이 아니라 민족 시조들의 치제를 새롭게 강조함으로써 백성들 모두가 단군의 후예이자 중국과는 다른 민족임을 인식하도록 한 것이다.
이처럼 정조는 북벌론을 통해 조선의 자주국가 건설을 염원 했다. 청에 대한 복수설치가 처음 노론의 정신적 지주인 송시열로부터 나왔지만 이후 노론은 북벌을 배격했다. 그 대신 정조의 지우를 받던 남인들이 정조의 의중을 이해하고 북벌을 지지했으며, 정조는 즉위 내내 북벌을 통한 국방강화와 병서편찬, 충신 재평가, 민족시조 추숭으로 백성들의 자주의식 고양과 중국과의 차별성을 강조했다.
■ 39 백성들을 존중하고 세심하게 배려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 사회는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국정운영체제와 국가 통치 질서가 해이해지면서 관리들은 점점 백성들을 수탈하는 탐관오리로 변하고, 지방에 있는 양반 사족들의 상당수는 탐관오리와 영합하여 양인(良人)들의 토지를 빼앗고 그들을 자신들의 노비로 삼기 시작했다. 더욱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상공업의 발달이 시작되면서 큰 사업을 하는 상인들의 독과점으로 백성들의 삶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가뭄과 홍수 그리고 전염병이 퍼지면 살아남기 위해 양인의 신분에서 노비로 전락되는 이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새롭게 삶이 격하된 노비와 기존의 노비들이 주인의 강압과 성적 학대 등을 이유로 도망가기 시작했고, 이들을 잡기위한 추노꾼들의 비인간적인 행위는 온 나라의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사회문제를 혁파하여 바로 잡은 이가 바로 정조였다. 정조가 즉위한 후 시행한 가장 빠른 정책이 바로 노비추쇄관을 혁파하고 도망간 노비를 잡지 못하게 한 것이다. 차라리 도망간 노비들에게 자유를 주어 그들이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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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걸식을 하지 않고 새로운 사회에서 정착하고 양인으로서 새로운 출발을 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자신이 거주하는 침실의 동쪽과 서쪽 벽에 재해를 입은 각도의 고을 이름 및 수령의 성명을 세 등급으로 나누어 적어 놓았다. 침실 안 벽면에도 전국의 고을 이름이 적혀 있고, 그 안에 다양한 내용들이 빼곡이 적혀있었다, 잠을 자는 침실마저도 이렇게 만들어 놓았으니 그의 위민에 대한 이야기는 더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조는 각 지역의 세금을 경감하거나 진휼(흉년에 가난한 백성을 도와주는 일)하는 여러 조항에 있어 매번 한 가지라도 일을 행할 때마다 그 위에 직접 기록했다. 모든 것을 정확히 기입하여 재난과 경제적 상황 등을 정확하게 진단하고자 한 것이다.
조선시대 양반 관료들이나 돈이 많은 중인들은 말을 타는 것을 즐겨했다. 그런데 말을 탈 때는 하인들의 등을 밟고 올라타는 것이 기본이었다.
하지만 하인이나 노비들의 등을 밟고 말을 타는 것을 아무도 비참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있을 때, 정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조선의 모든 노비를 없애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정조는 “인간으로 태어나 어찌 귀한 자가 있고 천한 자가 있겠는가? 이 세상에 노비보다 슬픈 존재는 없다. 고로 마땅히 노비는 혁파되어야 한다.”라며 이들에 대한 전면적인 혁파 기획을 세웠다. 정조를 위대한 성인으로 만들고자 없는 말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실제 그의 삶은 노비의 슬픔과 광대들의 고통, 궁녀들의 한을 이해하는 모습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정조는 화성행차 시 화성 행궁에 들어가 정무를 볼 때와 군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찾아가는 연무대를 오를 때 군사들의 등을 밟고 말에서 내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굳이 만들지 않아도 될 하마석을 만든 것이다. 하마석에서 말을 내리고 사열을 받은 이후 하마석에서 말을 올라타는 정조는 그 얼마나 인간적인가.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몸으로 실천한 것이다. 이러한 정신으로 화성은 백성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위민의 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거대한 형태의 문화재, 온갖 차장이 들어간 문화제만이 우리의 자랑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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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오랜 세월 만고풍상을 겪으면서 보잘 것 없는 모습이지만 백성들을 사랑하는 모습이 담긴 문화제야말로 진정 우리의 귀한 문화유산인 것이다.
자신의 백성들과 군사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이를 통해 조선의 모든 백성들을 사랑하고자 했던 정조, 그의 마음이 담긴 화성행궁 봉수당과 연무대 하마석을 보며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과 마음이 모여 진정 아름다운 화성을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 이 하마석이야말로 우리나라의 진정한 보물이다.
■ 40 공자를 내세워 학문의 정통성을 드러내다
정조는 공자의 위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군사(軍師)의 지위를 얻고자 한 정조는 주자 성리학이 만연한 시대에 공자의 학문으로 들어갔다. 사실상 주자성리학은 주자가 공자의 학문을 해석한 것이다. 공자 원류의 학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주자 성리학은 노론 중심으로 집중되었고, 주자가 이야기한 학문 이외에 다른 학문을 꺼내면 사문난적이라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사문난적으로 몰리면 곧 죽음에 이르렀다. 그러니 주자성리학 외에 다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이를 기반으로 노론이 모든 분야를 장악했다. 그래서 정조는 강력한 군권을 행사하기 위해서 주자 성리학 보다 높은 차원에서 공자의 학문을 논의하는 것으로 방향을 정했다. 주자가 아무이 대단하다 하더라도 공자를 능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조는 공자의 영정을 봉안하고 공자의 학문을 체계적으로 교육 할 수 있는 특별한 기관을 만들기로 했다. 그것이 바로 궐리사(闕里祠)다.
*궐리사 : 공자의 고향인 중국의 곡부에 있는 공자의 사당
궐리사는 단순히 공자를 배향하기 위한 유학의 상징으로만 건립된 것이 아니라 바로 탕평을 위한 숨은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정조가 향후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봉안하는 서원 역시 일절 금지하는 강경 조치를 내린 것은 각 당파들이 자신들이야말로 공자의 학문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곧 당파싸움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국가에서 만든 유일한 궐리사를 건립함으로써 화성의 위상을 높일 수도 있었다.
정조는 궐리사를 단순히 공자의 제향과 수원 지역민의 교육만을 위하여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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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탕평정책의 일환으로 건립했다. 공자의 학문적 후예라는 인식을 만들고 이를 통해 군사(君師)로서의 이미지를 확고히 한 것이다. 노론들이 만든 충청도 이성의 궐리사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조정에서 만든 궐리사를 유일한 공자의 궐리사로 인정하게 함으로써 이를 통해 당파의 폐단을 근절하고자 한 것이다. 정조의 이러한 계획과 실천은 훌륭하게 성공했고 오늘날까지 정조의 문화를 통해 탕평정치가 인정받고 있다.
■ 41 전문 기술자들을 존중하다
화성은 그 어떤 문화유산 보다 민본주의 정신에 입각해서 만든 성곽이다. 일반적으로 성곽을 쌓을 때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화성 역시 부상자들이 없을 수 없었는데 그 치료를 조정에서 책임져 주었다. 또한 거기서 그치지 않고 화성을 축성하는 모든 인부들에게 정당한 급료도 지급했다 이로 인해 10년 걸릴 성곽공사를 3년도 채 되지 않아 완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화성 축성과정에서 모든 기술자와 인부들에게 임금을 지불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정조가 특별히 민본주의 정신을 발휘해서 기술자와 일꾼들에게 한겨울에 털모자를 선물한 일은 잘 모를 것이다. 화성은 전국의 모든 고을에서 보낸 성곽의 설계도를 비교해 장점과 단점을 분석했고 더불어 그 분석한 내용을 가지고 정약용이 설계한 기본계획과 연계하여 최종 설계를 한 것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성역소(城役所)라는 축성을 위해 조선 최초로 만든 특별기구에 속한 기술자인 편수들이 지혜를 합친 것이기도 하다.
정조는 기술자들을 대함에 있어 단순한 노동계층이 아닌 그들의 기술과 지혜를 받아 안고자 했다. 그것은 화성의 4대문에 있는 공사 실명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거기에는 감독관인 정부 전 ․ 현직 고위 관리들과 기술자인 편수들의 이름이 나란히 올라와 있다. 정조가 기술자들을 얼마나 높이 대우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정조는 추운 겨울에 기술자와 허드렛일꾼 모두에게 털모자를 하사해 주었다. 겨울은 다른 계절에 비해 활동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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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얼음은 어린이와 연인들을 들뜨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러나 과거 200년 전으로 돌아가면 겨울은 고통의 계절이었다. 솜옷을 입고 따스하게 살아가게 된 것은 채 몇 십 년이 되지 않았다. 고려 말에 문익점에 의해 목화가 보급되었지만 실제로는 귀족들의 전유물이었지 조선조에 이르기 까비 솜옷은 백성들의 옷이 아니었다. 그러니 겨울에 야외에서 일을 하면서 얼마나 추웠겠는가!
조선시대에는 한겨울에 정3품 당상관 이상만이 귀마개를 할 수 있었다. 토끼털로 만든 귀마개는 정3품까지 올라간 나이 많은 관료들의 건강을 지켜주던 유일한 물건이었다. 더불어 털로 만든 모자 역시 이들만이 쓸 수 있는 귀한 물건이었다. 신분 차별이 극심하던 시대였기에 털모자 하나도 아무나 쓸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유득공의 문집을 보면 조선 후기 사회가 급격하게 변화하게 되면서 서울에 있는 정3품 당상관 아래에 있는 일부 관료들이 건방지게 귀마개를 한다고 개탄하는 대목이 나오지만 그래도 일반 평민들은 언감생심 절대로 쓸 수 없는 것이 털모자였다.
털모자만이 아니라 기술자와 막일꾼들에게 솜옷도 하사해 주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조선시대에 솜옷을 입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여름에 입던 삼베옷을 겨울이 되어도 그냥 입는 사람들이 허다한 것이 당시의 실상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무척이나 각박한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사회를 보다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서로를 사랑하는 것 말고는 없을 것이다. 세계문화유산 화성에 대해 건축미의 웅장함 혹은 아름다움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 있는 인간에 대한 진실 된 사랑을 보았으면 한다.
■ 42 중요한 일이 있으면 반 잔 술도 입에 대지 않다
정조는 중요한 일이 있어 절대로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할 상황이면 주변 유혹을 극복하고 술을 마시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고, 중요한 일이 마무리되어 기쁜 자리를 축하해야 할 일이 있을 때 함께 즐거워하며 기쁘게 마시되 난잡하게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조는 기쁜 일이 있으면 신하들과 흠뻑 취하는 술자리를 마련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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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는 1792년(정조 16)3월 2일에 성균관 제술 시험의 합격자들과 희정당에서 연회를 벌였다. 이 자리에서 정조는 합격자들이게 술과 음식을 내려주었다.
사실 전근대 사회에서 술은 일반인들이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것이 못 되었다. 사극을 보면 주막에 가서 마음껏 먹는 장면이 나오지만 이는 실제가 아니다. 술은 곡식으로 만드는 것이었기에 흉년이 들면 곡식 생산량이 줄어 술을 빚을 수가 없고 가난한 자들은 원하는 만큼 먹을 수가 없었다. 오죽 했으면 영조 재위 52년간 경제적 어려움으로 40년이 금주령의 시대였을까.
그래서 조선의 군왕들은 백성들이 마음껏 술을 먹고 기뻐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했다.
정도전이 경복궁의 이름을 지을 때 <시경>에 나오는 구절 중 하나인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덕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 온 것이 바로 그 이유인 것이다. 술이 취하고 군왕의 덕에 배부른 것이 가장 이상적인 사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조는 중요한 일이 있어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아야 할 상황이면 주변 유혹을 극복하고 술을 마시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고 중요한 일이 마무리되어 기쁘게 축하해야 할 일이 있을 때는 함께 즐거워하며 기쁘게 마시되 난잡하게 먹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것이 정조의 음주 철학이자 실천이었다.
◉ 7장 조선의 진경문화 시대를 열다
■ 43 활자 주조 활성화로 문예를 부흥 시키다
리더들이 해야 할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거나 아니면 기반을 만들어 주는 일이다. 사회는 빠르게 변화하는데 그에 대한 정보를 제때 제공하지 않으면 국가든 조직이든 발전 할 수 없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정보의 제공은 문자를 통해 이루어진다. 지금 시대는 문자가 인터넷을 통해 정보로 제공되지만 전근대 봉건시대에는 문자 그 자체가 책으로 전해 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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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문자가 책으로 만들어 지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 형태가 있다.
1. 손으로 직접 쓰는 것(필사본)
2. 활자로 만들어 찍어내는 것
0 활자의 형태
1. 목활자 2. 동활자(금속활자)
돈이 많다는 양반 사대부들도 뛰어난 학자의 문집을 제작하려고 하면 돈이많이 들어가서 주로 관청의 비용으로 목판을 만들었다. 집안사람이 어느 고을의 수령으로 가게 되면 그 고을 비용으로 목판본을 찍어 문집을 만든다. 목판본은 훼손되지 않고 잘 남아 있기 때문에 아주 많은 분량을 찍어서 책을 만들 수 있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략 100질 정도만 제작을 하여 집안사람들 끼리 나누었다. 그 이유는 지식이 여러 사람에게 공유되기를 원하지 않아서이다.
국가에서 중요한 행사를 하게 되면 그 행사의 전말을 의궤라는 책으로 기록한다. 그리고 그 의궤의 그림은 목판에 새겨 인쇄하고 글은 금속활자로 인쇄했다. 여러 질을 인쇄할 수 있지만 9질 이상을 만들지 않았다. 국왕과 5대사고, 그리고 홍문관과 규장각 등 주요 기관에 소장하게 하고 양반 사대부들조차 보지 못하게 했다.
조선시대는 지식을 양반 사대부들이 독점하려고 했다. 기득권들이 지식과 정보가 백성들에게 전파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조는 이러한 시대를 거부했다. 정조 시대는 조선중화주의를 바탕으로 조선 문화의 수준에 자신감을 가졌다. 정조는 자신의 학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강력한 문화정치를 추구했으며, 여기에 청나라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조선 후기의 문예부흥 시대를 열었다.
정조는 지식을 제공해 줄 수 있는 다양한 서적의 신속한 편찬을 위한 기본 작업으로 활자의 주조에 힘을 기울였는데 이는 서지학적 측면에서 중요한 사실로 주목 된다.
- 동궁 시절인 1772(영조 48)에 임진자 15만자 주조
- 즉위 원년인 1777년 정유자 15만 자를 다시 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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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규장각과 초계문신제도 등을 통해 지지 세력을 형성 했으며 학자 군주를 자처하며 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많은 서적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조가 책의 효율적인 편찬을 위해 활자 개량 의지를 보였음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정조가 국왕으로 즉위하고 나서 가장 먼저 만든 것은 바로 1777년 (정조 원년) 정유년 8월 3일에 평안감사 서명응에게 지시하여 만든 금속활자 ‘정유자’이다.
1782년에는 숙종 때 만든 한구자를 바탕으로 재주한구자 8만 여자를 다시 주조하게 했다. 1792년에 나무로 생생자 32만 자, 1796년에 생생자를 바탕으로 금속활자인 정리자 30만자를 주조하였다. 정조 시대는 가히 활자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한 국왕의 재위기간에 이처럼 많은 활자를 만든 일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정조가 만든 활자 중 가장 특별한 것은 목활자인 생생자(生生字)이다. 정조는 1792년(정조 16)에 청나라의 강희자전자를 자본(子本)으로 오늘날 회양목이라고 하는 황양목을 사용해 목활자를 만들었다. 대자(大字) 15만 7,200자 소자(小子) 14만 4,300자를 조성했는데 그중 반은 규장각에서 만들고 나머지는 평양에서 만들었다.
정조는 이러한 활자를 더욱 많이 제작하여 조선의 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하여 1796(정조 20) 12월 15일에 각종 경적 인쇄처의 명칭을 국초와 같이 주자소로 부를 것을 명하여 운영했다. 주자소를 만들어 운영한다는 것은 결국 문화의 시대로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이 정조시대 문예부흥의 기반이 되는 것이다.
■ 44 창조적 사고를 지니고 첨단 기계를 사용하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 인류의 역사를 바꾼다.
정조는 뛰어난 창조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창조적 사고만이 아니라 디자인에 대한 탁월한 감각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정조로 인하여 정조시대 문화가 진일보했고, 그가 만든 유산인 수원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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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화성의 축성을 준비하던 계축년(1793) 12월 8일에 이러한 말을 했다. “대개 누첩(樓堞)의 웅장하고 미려함은 선인들이 적의 기선을 빼앗기 위한 방법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바로 소하(蕭何)가 말한 ‘웅장하고 미려하지 않으면 무게나 위엄이 없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당시에 성곽을 아름답게 만들 생각을 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정조는 200여 년 전에 이미 디자인의 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수원 화성은 1997년에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때 ‘군사시설물인 성곽임에도 너무도 아름답다’란 등재 이유가 기록되었다.
정조는 아름다움만이 아닌 창조적 사고를 통해 수원으로 행차하기 위해 배다리를 만들었다. 여기에 더해 수원 화성을 안전하고 빠르게 축성하기 위해 거중기, 녹로, 유형거 등의 축성도구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이 도구들이 모두 정약용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이런 도구를 만들라고 구상하고 제안한 인물은 바로 정조였다. 그만큼 놀라운 창조적 식견을 가진 인물이었다.
정조는 현륭원 행차를 할 때에는 배다리를 이용 했다. 이들 배들은 임시로 징발되어 배다리로 쓰이다가 행차가 끝나면 군사훈련과 상업선으로 사용되었다.
정조는 한강의 배다리를 설치 할 때와 마찬가지로 화성축성의 기본 설계역시 실학이라 불리었던 과학정신과 능력을 가지고 있던 정약용이 필요했다. 그래서 정약용에게 사람을 보내 화성 축성의 기본 설계를 지시했고 설계에 필요한 책을 내려주었다. 그 책이 바로 <기기도설(奇器圖說)>이다.
정조는 기기도설에 나오는 내용을 분석하고 크레인을 만드는 기술을 터득했다. 그리고 기술자들에게 개발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그때 개발된 거중기로 인해 화성을 축성하는데 무려 4만냥이라는 거금이 절약되었다. 화성 축성의 전체 비용이 87만양이었다. 당시 백성들이 가장 많이 살았던 5칸짜리 초가집이 보통25냥 정도 했으니 4만 냥이라는 금액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이러한 시간과 비용 절감뿐만이 아니라 거중기로 인하여 축성공사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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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 조선의 음악으로 혜경궁의 잔치를 열다
국립국악원에서 해마다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여 재연하는 공연이 있다. 바로 1795년 윤2월에 수원의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개최된 혜경궁 홍씨의 회갑진찬연이다. 이 공연은 <원행을묘정리의궤>라는 기록을 통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재연이 가능하기도 하지만 조선역사상 최고의 공연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예술의 주체들이 참여한 버라이어티한 공연이라는 점도 있다.
정조는 어머니의 회갑잔치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정조는 어머니의 회갑 잔치를 한 번의 거사를 통해 두 가지의 이득을 얻을 수 있다고 했으니 바로 단순한 효심만이 아니라 국가 전체의 부흥을 위한 왕권의 강화로 추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서 가장 독특한 것은 우선 여성을 중심으로 행사가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가부장 적인 형태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조선은 철저한 남성 중심의 사회였다. 남자는 여러 번 결혼을 해도 아무 문제가 없고 여성들은 재가만 하여도 난리가 난다. 남편이 죽으면 반드시 수절하고 따라 죽으면 더 훌륭한 여인이 된다. 양반 사대부 여인들도 고운 옷 입고 맛난 음식 먹으며 명산대찰을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늘 무명옷을 입고 손에서 길쌈을 놓아서는 안 된다. 조선 시대는 여인들에게 시부모와 남편 그리고 자식을 잘 봉양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여인들은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늘 집안의 깊은 곳에서 그늘에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 잔치에서 파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물론 주인공이 혜경궁 홍씨 이기는 하지만 여인들이 봉수당 안을 차지하고 의젓하게 앉아 있었던 것이다. 당시 혜경궁의 회갑잔치를 위해 혜경궁과 관계있는 여인들을 대거 불렀다. 친고모인 조엄의 아내, 자신의 오라버니인 홍낙성의 아내, 동생의 아내 등 일가친척 여성들을 참석케 한 것이다.
결국 남성들은 전각 밖의 무대에 앉았다. 아니 국왕 정조부터 어머니가 계신 봉수당 밖의 월대에 작은 자리를 마련하여 앉아 있으니 혜경궁의 남자 친척이나 고위 관료들이 전각 밖에 앉는 일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즉 여인을 우대하면서 잔치를 치른 이 행사는 조선 역사상 최초의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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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는 여인과 남성이 함께 모여 잔치를 치른 최초의 행사라는 점이다. 조선시대 왕실 행사는 내연과 외연으로 구분된다.
내연은 철저히 여인들의 행사이다. 왕비를 비롯한 후궁과 영의정의 아내인 정경부인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의 아내들이 참석한 행사가 바로 내연이다.
반대로 외연은 철저히 남성 중심의 잔치였다. 국왕과 관료들이 모여서 하는 잔치였고, 다양한 의미의 잔치들이 수시로 벌어졌다.
그런데 문제는 왕실에서 외연과 내연은 철저히 구분되어 여성과 남성이 함께 참석한 잔치는 없었다는 것이다. 남성의 잔치에 여인이 참석할 수 없었고 여성의 잔치에 남성이 참여할 수 없었다.
그렇게 때문에 내연에서 잔치에 사용되는 음식을 나르고 춤을 추는 것을 모두 궁녀들이 하지만 외연에서 음식을 나르고 술을 따르고 춤을 추는 것은 모두 내시와 열 살 미만의 어린 무동 즉 모두 남성이었다.
우리가 보는 드라마나 영화처럼 국왕을 비롯한 공신들 그리고 고위 관료들의 잔치에 여성 궁녀들이 술을 따르고 같이 웃어주고 춤을 추는 일은 그저 공상일 뿐이다. 그런 일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들의 잔치에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이 동원되지만 실제 그 악공들은 모두가 맹인이었다.
그런데 이 행사는 남과 여가 함께하는 행사였다. 여성인 본존이 봉수당에 자리를 잡고 남성들이 무대 양쪽에 자리를 잡고 여성무용수들이 춤을 추고 남성 악공들이 연주를 했다. 내연과 외연의 합연이 시작된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어쩌면 이 행사야말로 근대화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이 속에는 또 다른 비밀이 숨어 있다. 그것은 바로 정조의 검약정신이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서 무용수들은 33명이었다. 정조는 이 무용수들을 모두 서울에서 내려올 경우 상당한 경비가 소요될 것으로 보았다. 최대한 경비를 아끼고자 하는 생각에 서울 무용수는 17명만 내려 보내고 화성행궁 소속의 여령(기생) 16명을 참여 시켰다. 악공 또한 화성에 주둔한 장용연 외영 소속의 악공들로 하여금 연주케 했다. 이는 단순히 경비 절감만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방문화에 대한인정이요 확신이었다. 당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문화 역시 서울 중심이다. 문화예술 전반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어 지방 문화는 발전되지 못하고 서울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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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문화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정조는 당시 화성을 중심으로 새로운 지방 문화를 양성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천년만의 경사라고 강조했던 어머니의 회갑연에서 무용과 음악을 지방의 예인들이게 맡긴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조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여기에 사용된 음악의 반을 조선의 음악으로 대체하고 춤 역시 백성들의 춤을 도입한 것이다. 조선시대 왕실 의례에 있어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은 철저히 중국의 음악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조선의 악기로 조선의 음악을 연주하게 했던 것이다. 당시 김홍도, 신윤복 등의 풍속화 등을 통해 정조시대를 진경시대라고 불렀지만 정조는 음악에 있어서도 진경시대를 만들어 갔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마지막 무대 공연이었던 <선유락>은 고유 왕실의 무용이 아닌 백성들의 놀이문화였다. 정조는 이 공연을 왕실 공연으로 승화시켜 백성들의 문화와 왕실 문화의 교류를 꾀했다. 백성들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결국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진찬연 행사는 단순히 효심을 모여주는 잔치가 아니었다. 이 행사는 근대화의 시작이요, 조선문화의 자부심을 높여주는 행사였다. 진정한 기반으로 새로운 문화와 미래의 좌표를 보여준 백성을 위한 새로운 나라 만들기의 출발이었다.
■ 46 훈민정음을 활성화하다
정조의 놀라운 개혁 정책 중 하나는 바로 훈민정음 활성화다. 요즘말로 하면 한글 보급운동이고 당시 상황으로 이야기하면 언문을 통한 국가정책 홍보였다. 국왕이 관리와 백성들에게 타이르거나 당부하는 말씀을 ‘윤음’이라 했는데, 정조 이전까지는 윤음을 반포할 때 한문으로 작성된 것만을 반포했다. 그러니 한문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조는 윤음과 법령을 반포할 때 훈민정음으로도 써 넣어 일반 백성들이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역시도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기층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훈민정음> 창제 후 <석보상절>, <용비어천가> 등 조선 전기의 한글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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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주로 왕실의 필요성과 의지에 의해 간행했으며 세조는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여러 종류의 불경 언해본을 간행했다. 조선전기 이런 불경의 언해 사업은 주로 왕실이나 종친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훈민정음으로 펴낸 문헌은 세종대부터 성종 즉위대까지는 주로 불경번역이었다. 성종 즉위 후부터 임진왜란 전까지 간경도감에서 불경을 번역했고, 1481년에 두보의 시를 한글로 처음 번역한 <두시언해>가 간행되었다. 더불어 <구급방 언해> <구황촬요언해>등 전염병 예방과 치료, 기근 구제 등 백성들을 위한 한글문헌이 나왔다. 임진왜란(1592)부터 경종조(1724)에 이르는 시기에는 경서언해를 비롯해 의서, 구황서, 왕실용 교화서 등의 한글 문헌이 많이 간행되었다. 그러다가 영조, 정조 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훈민정음으로 번역한 다양한 책들이 간행되었다.
정조가 국방력 강화를 위한 표준 무예를 정립할 수 있는 <무예보도통지>를 간행한 것도 이 무렵이다.
정조는 훈민정음이 천대받던 이전 시대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했다. 백성들이 읽고 쓸 수 있어야 국가가 올바르게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조는 즉위 후 가난으로 버려진 아이들과 전염병으로 부모가 죽어 고아가 된 아이들을 기르기 위한 <자휼전칙>이란 법을 제정했다. 이 법대로 하자면 해당 고을의 수령은 고아가 된 아이들을 10살이 될 때까지 반드시 책임지고 관아에서 생활비를 제공하여 살 수 있게 해야 했다. 정조는 이 법의 존재를 백성들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간행하게 했다. 또한 정조는 죄를 지어 관아에서 심문을 받는 죄수들의 인권을 행각하여 가혹한 체벌을 금지하는 <흠휼전칙>이란 법도 제정했다.
이처럼 정조는 국가의 법률과 정책 그리고 새로운 지식을 제공하는 서적들의 상당수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간행했다. 새로 간행된 <무예도보통지>를 통해 무예에 자질이 있는 백성들은 표준무예를 익힐 수 있었고, 무과에 당당히 합격하여 새로운 신진 무반이 될 수도 있었다. 백성들을 똑똑하게 만드니 자연스럽게 국방력도 강화될 수 있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득권층은 자신들만 문자를 알고 백성들은 무지하게 하려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정조는 그러지 않았다. 백성들이 똑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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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져야 국가가 발전할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당시에 훈민정음을 적극 보급해서 백성들의 지식을 높인 것은 오늘날 최신 정보를 국민들에게 제공하여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처럼 백성들의 지식과 정보가 늘어나니 자연스럽게 문명이 발전하게 되었다.
■ 47 무예를 발전시켜 국방력을 강화하다
<무예도보통지>는 완전히 새로 만들어진 무예서는 아니다. 이 무예서는 따지고 보면 200여 년의 편찬 역사가 있다. 임진왜란 기간인 1598년에 훈련도감 낭청이었던 한교(韓嶠)에 의해 6기의 무예를 담은 <무예제보>가 만들어지고 1759년에 무예에 탁월한 능력을 갖춘 사도세자가 한교가 완성한 6기의 무예에 권법 등 12기의 무예를 추가하여 18기를 완성했다. 이 18기의 무예를 담아 편찬한 무예가 <무예신보>이다.
정조는 사도세자가 편찬한 <무예신보>의 18기에 말을 타고 공격과 방어를 할 수 있는 마상무예 6기를 추가하여 24기의 무예를 완성했다. 이 24가지 무예를 정리한 무예서가 바로 <무예도보통지>이다.
정조의 명으로 <무예도보통지>를 만든 이들은 조선후기 최고의 실학자들로 평가받는 인물들로 그 중심의 인물들이 바로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였다.
이들이 <무예도보통지>를 만들면서 특별하게 정리한 무예가 바로 권법이었다 . <무예도보통지>에 존재하는 24가지에 기예 중 유일하게 맨손으로 하는 무예가 바로 권법이다.
이 권법의 출발은 석굴암 본존불 옆에 있는 금강역사로부터 시작한다. 금강역사의 모습은 권법의 대표적인 자세였다. 이 권법은 손으로 하는 공격과 발로 하는 공격이 모두 존재하여 중국의 권법과도 다른 우리민족 고유의 권법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권법을 신라의 화랑과 낭도들이 익혔을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 권법이 이어져 나타난 현대 무예가 바로 태권도이다.
정조시대 장용영은 단순히 친위군영만을 양성하는 곳이 아니라 조선의 군사력 전체를 향상시키기 위한 군영이었기에 무예서 간행을 상당수 이곳에서 추진했다.
<무예도보통지>는 2017년 10월 27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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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IAC)를 통해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남북이 공동으로 신청해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시켰어야 했는데 아쉽게도 북한의 단독 신청으로 세계기록유산이 되었다. 유네스코에서는 <무예도보통지>가 현대 북한태권도의 원형이 됐고, 김홍도가 삽화를 그렸다고 강조한 점을 받아 들였다. 즉 <무예도보통지>의 권법이 현재 태권도의 원형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니 태권도의 역사는 삼국시대로부터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무(武)란 지과(止戈)의 합성어이다. 결국 무는 창을 내려놓게 하는 것이다.
바로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평화를 위해서 군대가 존재하고 무예훈련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역설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평화라는 것이다.
■ 48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다
200여 년 전 정조는 유교 중심의 사회를 극복하고 서학이라 불린 천주학, 불교, 도교, 양명학까지 모두 수용했다. 조선의 건국이념이 ‘숭유억불’이었는데 불교와 서학을 포용하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정조에게서 배울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정조는 동궁시절부터 주자학과 송시열의 주자 존숭주의 등 노론의 학문분위기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도 내면으로는 노장사상, 양명학, 불교 등을 인정하는 자유로운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당대 주자중심주의 사상에서 볼 때 매우 파격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송시열 등 노론의 사상가들은 주자 이외에 어떠한 인물의 공자에 대한 해석도 인정하지 않았고, 노장 사상이나 불교학, 더욱이 서학에 대해서는 결단코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의 사상계는 주자만이 옳은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에 정조가 양명학, 노장 사상들에 대한 포용을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정조는 자신의 생각만이 옳은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상의 장점을 취하여 이 세상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조는 “유가, 불가, 도가를 세상에서 삼교(三敎)라고 칭한다. 유자는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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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 도가를 허여하지 않지만 그 조예 깊은 곳을 논한다면 모두가 최고의 경지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유교와 불교, 도교에 대한 포용을 통해 정조는 불경의 하나인 <부모은중경>을 간행했다. 이는 당대 사회에서는 획기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부모은중경>의 발행은 세조대에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적이 있지만 당시 세조는 스스로 ‘호불의 왕’이라 칭할 만큼 불교에 깊이 심취해 있었다.
그러나 유학자로서 당대에 학자들을 지도하고 있던 정조가 불경을 간행했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현실적으로 불교를 대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역시 <부모은중경>의 발행이 불교에 심취했다기보다는 그 내용이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게 하는 좋은 내용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정조는 스스로 안변의 석왕사에 비문을 씀으로써 불교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보여주었다. 안변 석왕사는 태조 이성계의 꿈을 무학대사가 풀어준 곳이다. 무학대사는 이성계가 꾼 꿈이 역성혁명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창업하는 것이라고 해석해 주었고 이때부터 이성계는 창업군주로서의 꿈과 의지를 실천했었다. 그러니 석왕사는 단순한 사찰이라고 할 수 없는 조선왕실과 매우 밀접한 곳이었다.
정조는 불교가 갖는 신비로움을 이야기하며 이러한 부처의 은덕이 조선의 건국도 도와주고 자신이 아들을 갖는데도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더해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찰인 용주사를 만들고 용주사의 대웅보전에 안치될 석가모니불상에 대한 기복게(祈福偈)도 직접 작성했다. 조선시대 국왕 중에서 부처를 찬양하는 글을 쓴 이는 정조밖에 없다.
숭불론자인 세종이나 세조도 쓰지 않은 것을 대유학자인 정조가 쓴 것이다. 이는 그만큼 통이 크고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정조는 여기에 더해 무군지교(無君之敎)인 서학마저 포용했다. 서학은 군왕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이자 제사를 금지하는 종교였기 때문에 사악한 학문, 즉‘사학(邪學)으로 평가받았다. 이런 서학을 인정하다니, 이는 정말 파격이 아닐 수 없었다.
1786년 정조는 박제가가 올린 서양선교사 수용론을 배척하지 않았다.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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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이해 모든 관료들에게 자신에 대한 어떤 비방도 용서할 테니 국가 개혁을 할 수 있는 정책을 건의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러한 정조의 의중을 파악한 박제가는 청나라가 서양 선교사들을 파격적으로 등용하여 서양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나라가 발전하고 있음을 역설했다.
1788년(정조 12) 8월 당시 정언이던 이경명이 상소를 하녀 ‘요망한 학설로 종당의 화가 어느 지경에까지 이를지 모를’ 서학을 엄히 다스릴 것을 요구하자 정조는 다음 날 어전회의를 열어 서학의 유포상황에 대하여 논의 했다. 이에 정조는 서학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정학이 바로 서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상황이 확대되지 않도록 조처했다.
정조는 서학이 비록 신앙적으로 문제가 되어도 정학이 바로 서면 모두 해결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그들을 함부로 처벌하는 것은 오히려 백성들을 위하는 길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정조가 이처럼 서학에 대한 대응을 온건하게 한 것은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해 서양 기계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남인을 등용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국정 운영을 추진하고자 함이었다.
정조는 수학, 역상과 관련된 서적의 수입문제를 이가환에게 문의할 정도로 서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 49 진경문화로 새로운 문화시대를 열다
정조시대는 조선중화주의를 바탕으로 조선 문화의 수준에 자신감을 가졌다. 이러한 시대에 왕위에 오른 정조는 자신의 학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강력한 문화정치를 추구했으며, 여기에 청나라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조선 후기의 문예부흥 시대를 열었다. 이 시기는 기존의 시대와 다른 문화적 특성이 한껏 드러나고 있기에 다른 말로 진경시대(眞景時代)라고도 한다. 진경시대라는 것은 조선왕조 후기문화가 절정기의 발전을 이룩했던 시기를 일컫는 문화사적 시대구분 명칭이기도 하다.
정조는 조선 전체가 평화롭고 평등하며 그 어떤 외세의 침입도 받지 않는 자주적인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한 의지의 발현 속에서 조선의 문화와 중국 문화의 차별성을 분명히 두고자 했으며 그 결과 이전 시대의 문화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나는 문화의 장르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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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이 시대에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국학(國學)운동이 일어나고 새로운 역사관 정립과 역사 서술이 시작되었다. 이전 시대까지 조선 역사의 한 부분으로 평가받지 못하던 발해의 역사가 정조의 지시에 의해 규장각 검사관 유득공이 <발해고>를 저술하고, 안정복은 <동사강목>을 저술했다.
또한 정조는 문화의 한 장르였던 조선의 무예도 정립했다. <무예도보통지>를 저술하여 신라시대 황창랑으로부터 시작된 본국검을 비롯한 지상무예 18가지와 마상무예 6가지를 정리하여 우리 역사상 최고의 무예서를 편찬했다.
정조시대 문화예술이 가장 발달한 분야는 회화분야이다. 회화분야에서는 단원 김홍도(1745~1806)와 고송 유수관, 이인문(1745~1824), 긍재 김득신(1764~1822), 초원 김석신(1768~?)등이 출현하여 겸재 정선의 세대를 계승하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내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이들은 모두 화원화가들이었다.
이들이 화원화가라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진경시대 초기문화를 주도하면서 조선의 고유색이 짙은 화풍을 창안해 내던 인물들이 한결같이 조선 성리학 이념에 투철한 사대부 화가들이었다는 사실과 대조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진경 산수화풍을 창안해 낸 겸재 정선과 풍속화풍의 시조인 관아제 조영석이 그런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조선의 고유색 짙은 진경분화는 정조의 치세하에서 대미를 찬란하게 장식하면서 북학문화로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이니, 단원이나 혜원의 풍속화나 화성행궁, 화성 등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정조시대 진경문화는 조선 전체 문화예술의 꽃으로 평가 받는 것이다. 정조를 중심으로 이와같은 진경문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조선의 주체적 문화가 만들어 질 수 있었다.
이후 정조시대의 주체적 진경문화는 19세기에 이르러 세계 최고의 인물 추사 김정희를 탄생시켰다.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여 중국의 문화를 뛰어넘은 그야말로 청출어람의 문화가 탄생한 것이다. 추사의 그림과 글씨 그리고 그의 철학은 이미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이 힘이 바로 정조시대 진경문화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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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필로그
군주민수(君舟民水)
해석을 하자면 아주 간단하다. 임금은 배고 백성은 물이라는 것이다. 즉 백성은 임금을 떠받들지만 임금이 잘못하면 백성들이 임금을 끌어내릴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군주민수를 정확히 이해한 국왕은 동양의 역사에도 수도 없이 있겠지만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조선의 22대 국왕 정조(正祖)가 아닐까 한다. 정조는 항상 백성들을 물로 보고 임금을 배로 보았다. 자신의 싱크탱크인 규장각 각신들과의 대화에서도 국왕과 백성의 관계를 늘 이야기하면서 국왕 스스로 경계를 했다. 정조는 군주민수와 연계하여 독특한 자신이 철학을 내놓고 자신이 국왕이 된지 22년째인 1798년에 이를 자호(自號)로 삼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다.
만천과 민수는 조선팔도에 있는 모든 물길, 즉 백성을 의미하는 것이요, 명월은, 하늘에 떠 있는 밝은 달로 모든 백성들에게 밝게 비추는 달과 같은 왕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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