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 (2)
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 (2)
■ 진중권 지음
제4부 민주당의 연성 독재
◉ 16 프레임 전쟁 : 중도층의 미신이다
“금태섭 의원의 공천 탈락을 계기로 중도층의 마음이 떠날 것이라는 분삭은 안 해봤나?” <한겨레 성한용 기자의 질문이다. 이 물음에 민주당의 후보 경선을 관리하는 담당자는 이렇게 대꾸했단다. “중도층은 미신이다. 쟁점마다 다른 투표를 하는 스윙보터층(부동층)이 있을 뿐이다. 중도층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지 레이코프의 프레임 이론에 따르면 그렇다. 영향이 별로 없을 것으로 본다.” 요즘 민주당에서 핵심 지지층에만 기대어 마구 폭주하는 근거가 조지 레이코프의 ‘프레임 이론’이었나 보다.
■ 프레임을 선점하라
레이코프에 따르면 이른바 ‘중도층’은 특정 사안에서는 진보를, 다른 사안에서는 보수를 지지하는 ‘이중관념’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선거의 승부는 결국 이 이중관념을 가진 중간층을 누가 사로잡느냐에 달려 있다. 이 대목에서 레이코프는 중도층의 표를 얻겠다고 이념과 정책의 방향을 어설프게 중도로 옮겨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 프리임을 왜곡하라
‘중도는 없다’라는 말은, 한마디로 ‘진보로서 자신의 도덕적 정체성을 뚜렷이 하라’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를 민주당에서는 ‘중도층을 무시하라’라는 뜻으로 해석한 모양이다.
원래 진보에게 도덕성은 ‘생명’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노회찬 전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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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은 거기에 흠 집이 났을 때 생명을 내 놓아야 했다. 하비만 현재의 민주당은 도덕성을 그저 승리에 방해가 되는 ‘걸림돌’정도로 여기는 듯하다.
진보의 기치를 실현하는 데에는 당연히 어려움이 따른다. 바로 그 “어려움”을 극복하라고 레이코프는 섬세한 언어 선택에 기초한 프레임 전략을 제안한 것이다. 그런데 민주당에서는 그의 말을 엉뚱하게 이해한 모양이다. 진보의 가치를 실현하는 싸움을 이제 그들은 ‘소모적 논쟁’이라 부른다. 관철할 진보적 가치를 내버렸으니 섬세한 언어전략 따위가 어디에 필요하겠는가. 그래서 레이코프 이론을 가져다 기껏 ‘촛불세력 대 토착왜구’라는 프레임으로 사회를 갈라치는 일이나 하는 것이리라.
■ 대안적 사실을 창조하라
언제부터인가 민주당은 그릇된 가치를 관철하는 데에 프레임전략을 악용해 왔다. 조국 인사청문회를 보자. 원래 인사청문회는 후보자의 도덕성을 검증하는 제도다. 하지만 민주당에서는 처음부터 사안을 ‘합법-불법’의 문제로 프리이밍(틀짜기)해 들어갔다. 이 전략은 빗나갔고 조국은 낙마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그릇된 프레이밍은 민주당에 ‘법의 한계가 곧 도덕의 한계’라는 야쿠자 윤리를 남겼고 그의 지지자들 또한 당을 따라 ‘불법만 아니면 모든 게 허용된다’라는 왜곡된 도덕을 내면화하게 되었다,
요즘에는 검찰 음모론을 퍼뜨리느라 분주한 모양이다. 이를 주입하는 데에는 사극 프레임까지 동원한다. 조국이 조광조이고 윤석렬이 윤임이란다. 5공 프레임도 사용한다. 청와대의 감찰 무마와 선거 개입에 대한 수사가 “검찰쿠데타”라는 것이다.
■ ‘쿠데타’라는 프레임(구조물의 뼈대)
‘검찰 쿠데타’라는 프레임도 마찬가지다. 이는 원래 ‘검찰이 대통령의 인사권에 개입하려고 조국 일가를 내사’했다는 유시민씨의 주장에서 출발했다. 아무 근거도 없는 이 “추측”이 진실 게임 속에 들어가 절반의 사실 이 되더니 끝없는 반복을 통해 사실로 굳어졌다. 법원에서 허위라고 확인해 주었지만, 지지자들은 머릿속의 ‘대안적 사실’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프레임은 ‘사실’로 깨뜨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법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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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했다면 그건 “판사가 미친 것”이란다.
이 미친 프레임으로 물론 중도층의 마음을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이 갈라치기 전력이 아무 효과도 없는 것은 아니다.
‘올바른 프레임’을 지지해 줄 중도층은 난무하는 진영정치 속에서 설 자리를 잃어간다. 이 경향은 앞으로 더 심해질 것이다. 폐해는 벌써 나타나고 있다. 어느새 한국의 정치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모든 짓이 허용되는 거대한 난장판으로 변했다. 사회의 나머지 영역도 곧 그 뒤를 따를 것이다.
◉ 17 선전선동 :“진리는 국가의 적이다”
■ 진실 없는 설득의 기술
의사와 고르기아스(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 철학자이자 웅변가)거 선거에 출마했다고 하자. 사람들은 과연 누구를 뽑을까 예나 지금이나 대중은 아마 고르기아스를 뽑을 게다. 문제는 이 궤변론자에게는 참된 지식이 없다는 데에 있다. 그런 그가 진실이 없는 설득의 기술만으로 폴리스를 이끈다면, 나라꼴이 어떻게 되겠는가. 허위에 설득당한 대중에 좌우되는 국가는 당연히 궤도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다. 그런 ‘진실 없는 설득’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예가 바로 나치독일이다.
히틀러가 모범으로 삼은 것도 1차 대전 당시 영국의 선전술이었다. 히틀ㄹ러는 선전술의 열세를 패인의 하나로 보고 집권 후 선전술에 국가적 역량을 집중한다. 그 전술이 어찌나 지독했던지 종전 후 연합군 사령부에서 “우리가 독일의 저항의지를 꺾은 것은 군사력이 아니라 그들의 선전기구를 무력화했을 때”라고 회고할 정도였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선전과 선동을 구별한다. 선전은 이성에호소하는 논리적 설득의 방식이고, 선동은 감정에 호소하는 정서적 설득의 방식이다. 반면 나치의 선전에는 이런 구별이 없다. 이성적 논리적 설득을 아예 포기하고 오직 감정적 정서적 선동만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나치에게 선전이란 곧 선동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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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멍청한 이들의 머리에 맞춰라
<나의 투쟁>에서 히틀러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선전은 대중적 형태를 취해야 하며, 그 지적 수준은 가장 멍청한 이들의 머리에 맞추어야 한다.” 나치는 이렇게 정치적 의식이 가장 후진적층위에 눈높이를 맞춘다. 히틀러는 대중이 이성을 가졌다고 보지 않았다. “국민의 대다수는 그 성격이 너무 여성적이어서 그 생각과 행동이 냉철한 이성보다 감성에 좌우된다. 그 감정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다.” 그 단순한 감정이란 물론 호오(好惡) 특히 중오의 감정이다.
진실은 억압돼야 한다. 선동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다른 편에 유리할 경우 진실을 객관적으로 탐구해서는 안 된다.” 괴벨스의 말이다. “충분히 큰 거짓말을 하고 계속 반복하면 사람들은 결국 그것을 믿게 된다. 거짓말은 오직 국가에서 그 거짓말의 경제적 군사적 후과로부터 국민을 차단시키는 동안에만 유지된다. 고로 국가가 권력을 총동원해 이견을 억누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진리는 거짓말의 치명적인 것이며, 따라서 국가의 가장 큰 적이기 때문이다.”
미국 전략사무국(OSS)의 보고서는 나치 선전의 “기본규칙”을 이렇게 요약한다. “절대로 대중의 흥분을 가라앉히지 말 것, 절대로 자신의 결점이나 오류를 인정하지 말 것, 절대로 적에게도 뭔가 좋은 점이 있음을 인정하지 말 것. 절대로 대안의 여지를 남기지 말 것, 절대로 비난을 용인하지 말 것. 한 번에 하나의 적에 집중하여 그에게 잘못된 모든 것의 책임을 뒤집어 씌울 것. 사람들은 작은 거짓말보다 큰 거짓말을 더 잘 믿는다.”그런데 이 상황, 어딘지 낯익지 않은가.
■ 민주당에 민주주의자가 없다
요즌 민주당 정권이 그 짓을 한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비난하는 이를 바로 고발한다. 대안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저쪽 찍을 거야?’ 세상을 진영으로 갈라 친구의 잘못은 덮고 상대는 절대악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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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됐을까? 그새 민주당의 성격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고, 그 철학으로 당이 자유주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게 관리했다. 문재인은 다르다. 그는 실현해야 할 정치적 ‘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운명’에 이끌려 정치무대로 불려나왔다. 젊은 386을 영입해 민주주의 이념 아래 놓았던 두 전직 대통령과 달리, 그는 자기 철학 없이 이미 주류가 된 586에게 옹립당하고 관리당하는 처지에 가깝다.
문제는 나라를 쥐고 흔드는 이들 586세력이 민주주의를 학습한 적이 없다는 데에 있다.
지지자를 설득하는 데에도 이들은 운동권 시절의 전체주의 선동을 사용한다. 새빨간 거짓말, 부분적 거짓말, 맥락을 일탈한 진실 등 다양한 거짓말로 그들은 대중의 의식 속에 정치를 일종의 전쟁으로 각인한다. 세뇌의 결과 지지자들은 “되도록 많은 아군과 되도록 많은 적군의 시체”를 아예 정치의 이상으로 삼게 된다. 전쟁터에서 유일한 정의는 승리다. 승리를 위해 적에게 이로운 진실은 은폐되고, 아군의 범죄는 용사된다. 비판자는 “내부총질러”로 군법회의에 넘겨진다.
문제는 이 낡은 운동권 하위문화가 어느 덧 주류가 된 586을 통해 정부와 공당의 운영원리까지 왜곡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당,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
◉ 18 기억의 정치 : 기억을 지워버린 기억의 연대
지난 5월 7일 이용수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열어 정의기억연대(이하 정의연)를 향해 비난을 쏟아냈고 이에 맞서 윤미향 국회의원 당선자는 ‘할머니의 기자회견에 배후가 있다’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그의 남편은 ‘이용수 할머니가 평소 목돈을 원했다’라는 글을 리트윗하기 까지 했다.+
■ 저 치마저고리 소녀는 누구인가
언론과 야당의 공세에 윤미향 국회의원 당선자는 이렇게 대꾸했다. “가족과 지인들의 숨소리까지 탈탈 털린 조국 전 법무장관이 생각난다. 겁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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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는다. 당당히 맞서겠다.”낯익은 ‘조국 프레임’이다. 이 마법의 프레임은 진상규명의 필요를 졸지에 진영수호의 사명으로 뒤바꿔놓는다. 김두관 의원은 정의연에 의혹을 제기하는 것을 일본 극우를 도와주는 “신(新) 친일행위”로 규정했고, 원내대표를 비롯해 열네 명의 민주당의원이 그의 뒤를 따랐다.
이 프,레임 속에서 이용수 할머니는 졸지에 ‘성지 않은 정신으로 목돈에 눈이 멀어 누군가의 사주로 소동을 일으킨 토착왜구’가 되고 만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이 프레임을 아예 포스터로 제작했다. “정의연을 공격하는 자가 토착왜구다.”이 말이 적힌 저 포스터 속의 치마저고리 소녀는 더 이상 위안부 할머니가 아니다. 매서운 눈으로 횃불을 치켜들고“노 아베”를 외치는 저 소녀는 실은 윤미향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사건의 본질이다.
■ 누구를 위한 운동인가
위안부 운동의 대모 김문숙(93세)씨에 따르면 윤미향 씨가 대표가 된 후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은 모금에 집착했다고 한다. “오로지 돈,돈,돈이다. 수요집회에서 모금을 하고 전 세계에서 기부금을 모으고 있다.”운동의 본말이 전도되어버린 것이다. 일본 최고 재판소에서 최초로 위안부로 인정받은 심미자 할머니도 2004년 이를 지적하면 피해자를 앞세운 정대협의 모금운동을 금지해 달라는 소송을 낸 바 있다.
이용수 할머니의 경우 난방 지원을 못 받아 민주당 대구시당 김우철 사무처정이 깔아준 온수 매트로 겨울을 나야했다. 이용수 할머니는 쉼터의 존재를 알지도 못했단다. 도대체 할머니들 쉬는 곳에서 왜 엉뚱하게 민중당 행사가 열리는가.
소식지 발행은 남편에게, 쉼터 관리는 아버지에게 맡겼다. 회계부실로 현대중공업과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경고를 받았다니, 기부금의 용처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 기억에서 지워진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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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기억의 터’조형물에 새겨진 247명 위안부 피해자 명단에 심미자 운동가의 이름은 빠져 있다. 할머니는 정대협을 향해 “당신들은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역사의 무대에 앵벌이로 팔아 배를 불려온 악당”이라 말한바 있다. 2008년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8년 후 조형물이 세워질 것을 예견하고 ‘내 이름을 빼달라’고 했을 리는 만무한 터, 왜 심 운동가의 이름이 빠졌는지는 정의연만이 안다.
국민의 성금으로 세워진‘기억의 터’조형물에서 심미자 할머니의 이름이 지워진 것은 상징적이다. ‘정의기억연대’에서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로 공인한 할머니의 존재를 한국이라는 국가 공동체의‘기억’에서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이번 이용수 할머니의 폭로는 이것이 심 할머니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심 할머니처럼 이 할머니 역시“원래 그런 분”“사주받은 분”“혹은”“목돈을 원했던 분”으로 신속히 타자화되었다.
할머니들에게 위안부의 이데아를 요구했던 윤미향의 삶은 이상적이지 않았다. 시민의 성금과 국민의 혈세로 운영되는 인권단체를 그는 개인의 자영업으로 만들어 버렸다. 황당한 것은 한국여성단체연합 산하 34개 여성단체에서 이용수 할머니가 아니라 외려 횡령과 배임의 의혹을 받는 윤미향을 지지하고 나섰다는 사실이다. 이 선언을 주도한 핵심인사들 역시 우연히 정의연 이사들이라고 한다.
이들이 할머니의 목소리에 귀를 닫고 윤미향을 옹호한 것은, 그들 또한 윤미향 부류의 운동권 서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이 상상계와 실재계 사이에 드러난 괴리를 애써 덮으려 한다. 자기들이 누리는 기득권을 자신들이 정의로운 일을 한다는 허위허식으로 포장해왔기 때문이다. 누구든 rm 괴리를 드러내는 이들은 ‘토착왜구’로 몰아붙이면 그만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 남은 낡은 운동권서사의 기능이다.
◉ 자유주의 : 민주주의의 자살
■ 민주주의, 자유주의를 죽이다
히틀러는 쿠데타가 아니라 민주적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잡았다. 의회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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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가 되자 그는 다수의 힘으로 민주주의부터 파괴하기 시작했다. 야당은 해산되고 노조는 금지 되었다. 민주주의가 민주적으로 자살해버린 것이다. 개인과 소수에 대한 존중 없이 다수결로만 환원된 민주주의는 이처럼 반대물로 전화하기 마련이다. 그런 민주주의라면 북한에도 있다. 북한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아닌가.
나치가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 자유주의 적 권리를 파괴할 때 거기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이가 바로 카를 슈미트였다. 그는 끝없는 토론으로 미결정의 수렁에 빠진 바이마르 의회주의보다 지도자의 결단으로 신속한 결단을 내리는 파시즘이나 볼셰비즘이 더 우월한 체제라 보았다. 토론을 멈춘 ‘시민’들은 이제 지도자만 맏고 투쟁하는 ‘전사’들로 변한다.. 전사에게 필요한 것은 이성이 아니라 정치신학적 열광뿐. “우리 아돌프, 하고 싶은대로 다 해” 그 결과가 어땠는지 우리는 안다.
■ 적과 아를 갈라라
카를 슈미트가 이 땅에 환생했나? 민주당의 모습이 심상치 않다. 그들은 세상을 적고ㅑㅏ 아로 나누는 것이 정치라고 보는 듯하다. 그 적은 물론 수구세력, 적폐세력이다 민정수석이 SNS에 ‘죽창가’를 올리고, ‘한일전’이 총선 슬로건으로 내걸린다. 적개심으로 뭉친 “토착왜구”를 섬멸하는 민족해방의 전사가 된다. 지지자들은 “토착왜구”를 섬멸하는 민족해방의 전사가 된다. 그들이 윤미향을 못내 놓는 것도 그의 활동을 이 NL 서사의 중요한 일부로 여겼기 때문이리라. 이 전쟁 서사는 의정으로 이어진다.
- 이수진 의원은 ‘친일파 파묘법안’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이러다가는 총 선결과에 따라 매번 시신을 파냈다 묻었다 하는 소동이 벌어질게다. 토착 왜구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다보니 무덤에서 죽은 친일파라도 꺼내 보여줘 야 했던 것이리라.
- 국회운영도 전투적이다. 오랜 관행을 깨고 법사위원장을 가져갔다. 자기 들이 절대다수라서 그렇단다. 그걸 승자의 권리로 보는 것이다.
- 당은 군대 조직 같다. 금태섭 의원은 당과 다른 의견을 냈다고 징계를 받았다. 당대표가 의원들에게 함구령도 내린다.
- 의원들은 176대의 거수기 다수결 무기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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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권분립의 파괴
행정부와 입법부를 장악하고 남은 것은 검찰과 법원, 지기들이 세운 검찰총장을 공공연히 “공수처 수사대상 1호”로 꼽는다.
- 한 어용 교수가 총장에게 거취를 정하라고 재촉한다. 왜? “총선에서 집 권당이 과반이 넘는 일방적 결과”를 낸 것이 이유란다.
- 사법부도 무사하지 못하다. 이수진 의원은 법정에서 제게 불리한 증언을 한 판사를 “탄핵 1순위”로 꼽았다.
- 최강욱 의원은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도록 갚아주겠다.” 승자의 오만이 철철 묻어난다. 그에게 사법부는 선거로 정복한 영토일 뿐 이다.
- 양향자 의원은 “역사왜곡 급지법”을 발의했다. 국가보안법 대신에 민 족보안법이 등장한 것이다.
- 정청래 의원은 악의적 보도를 막아줄 ‘언론 징벌적 손해배상죄’를 도입 하겠단다.
■ 다수결로 환원된 민주주의
그 영향은 시민의 삶에까지 미치고 있다. 한 청년은 대학에 대통령 비판 대자보를 붙였다고 기소당했다. 나 역시 페이스북에 올린글로 친여 시민단체에 고발당했다. 정의연을 비판한 이용수 님은 민주당 지지자에게 모욕당했다. 한 여성은 페이스북에서 유시민을 비판했다가 적발돼 노무현 재단에서 해고당했다. 내가 아는 한 기자는 조정래를 비판한 한 줄의 문장 때문에 원고를 거절당했다.
K방역 세계정복의 ‘국뽕’에 취해 이 나르는 자랑스러운 “문재인 보유국”이 되었다. ‘문광소나타’가 청와대 입장권이 된다. 국민의 스트레스가 풀린다면 욕이라도 달게 먹겠다던 노무현의 나라는 이제 없다. 지나가는 한 마디에 청와대 참모들이 총폭탄이 되어 결사옹위에 나선다. 대통령은 태종이 되고 조국은 조광조가 된다. 물티슈로 세차에 나서는 개인숭배도 자유주의 국가에선 낯선 광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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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는 “김정숙”씨라 했다가 혼났고, 한 개그맨은 대통령을 ‘문재인 씨’라 불렀다고 곤욕을 치렀다.
정치가 ‘피아 구별’로 이해되고 민주주의가 ‘다수결’로 환원될 때 1930년대 독일처럼 민주주의는 반대물로 전화한다.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의 정신 상태와 감정구조가 많은 이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당연하다. 지금 민주당은 김대중 노무현의 자유주의의 정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는 꽤 낯익다. 그것은 운동권 시절 586세대가 공유했던 전체주의 문화의 잔재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30가지 약속을 했다 생각해보니 그중 무려 29가지를 어겼다. 딱하나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그 나라를 우리는 눈앞에서 본다.
◉ 20 원칙이성과 기회이성
그들은 왜 부끄러움을 모르는가
■ 소신파와 완장파
의원을 바라보는 미국의 관념은 ‘자유주의적’이다. 개인을 집단보다 우선시 한다. 반면 의원을 바라보는 한국의 관념은 ‘민주주의적’이다. 거기서는 개인의 소신보다 다수의 집단적 의지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당 대표가 의원들에게 함구령까지 내린다. 대표가 당에 내리는 긴급조치인 셈인데, 올해만 벌써 네 차례 내려졌다. 이는 민주당식 민주ㅠ주의가 자유민주주의보다 인민민주주의에 가ㅓ깝다는 Emnt이리라.
민주당이 요즘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민주당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좋ㄴ재한다. ‘조금박해’라 불리는 조응천, 금태섭, 박용진, 김해영 등의 ‘소신파’가 있는가 하면 이해찬을 필두로 윤호중이나 정청래 같은 ‘완장파’도 있다. 이 두 부류사이에는 별 빛깔없이 거수기 노릇을 하는 대다수의 의원이 존재한다. 이중 헤게모니를 쥔 것은 물론 친문 완장파로, 그들의 견해가 바로 민주당의 ‘당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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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정치는 ‘협상’이 아니라 다수의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전쟁’일 뿐이다. 전형적인 슈미트주의다.
‘완장파’는 원칙이 보편성이나 논리의 일관성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들은 보편성보다 당파성을 중시한다. 자기들의 특수이익이 곧 사회의 보편이ㅏ익이라 굳게 믿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논리적 일관성이 아니라 상황적 효율성. ‘내로남불’은 그들에게 아무문제도 되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어제 한말을 오늘 바꿔버릴 수도 있다. 이를 그들은 외려 실천적 유연성으로 이해한다.
■ 원칙이성과 기회이성
자유주의자들은 이른바 ‘원칙이성’에 따라 사유하고 행동한다. 그들은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보편적 추상적 기준을 갖고 있다. 그들은 이 기준들을 원리, 규범, 규칙, 방법 혹은 신조로 삼아 유사한 모든 경우에 동일하게 적용하고 그로써 문제의 보편적 해결을 추구한다.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거나 기준을 바꾸는 것은 이들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와 달리 전체주의자들은 ‘기회이성’에 따라 사유하고 행동한다. 그들은 보편적 기준 없이 매사 그때 상황의 필요에 따라 판단한다.
지금 민주당을 지배하는 것이 발호 친문 완장파의 기회이성이다. ‘정치개혁’을 한다더니 상황이 급해지니 위성정당을 만든다. 검찰총장에게 ‘산 권력에도 칼을 대라’ 하더니 정작 그 말대로 하니 당정청이 잘려들어 수사를 방해한다. 야당 시절엔 인사청문회 공개를 주장하다가 여당이 되니 천문회 공개법부터 만든다. 이 ‘미봉과 즉흥’속에 보편성이나 일관성이 있을 리 없다.
인사도 마찬가지. 그동안 민주당은 도덕적 사유로 수많은 이를 청문회에서 낙마시켰다. 하지만 그 기준이 조국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불법만 없으면 무방하다.” 기준을 인물에 적용하는 게 아니라 인물에 맞춰 기준을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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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미애 장관은 조국사태가 한창이던 20919년 11월 검찰의 수사, 기소, 주체분리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형사소송법과 검찰청법 위반이다. 제 사람인 서울중앙지검장 결재 없이 최강욱을 기소한 수사팀을 감찰하겠다고도 했다. ‘검찰총장이 검찰사무를 총괄 지휘, 감독한다’라는 검찰청법 12조 위반이다. 2월엔 “내가 책임지겠다”라며 청와대 울산시장 선거개입 공소장을 비공개하기로 했다. 이건 그냥 망발이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뻔뻔함
결국 총장과 장관의 갈등은 두 이성, 즉 ‘원칙이성’과 ‘기회이성’의 충돌인 셈이다. 도처에서 정의와 공정의 확립된 기준이 무너져 내린다. 나라가 친문 완장파의 기회이성으로 통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왜 저토록 뻔뻔한가. 간단하다. 애초 우리와 다른 이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들의 기회이성을 전문용어로 ‘잔머리’라 부른다) 원칙 이성의 소유자는 말이나 기준을 바꿀 때 부끄러움을 느낀다. 반면 보편성이나 일관성에 매이지 않는 머리는 애초에 부끄러움을 느낄 수가 없다. 반성도 모른다. 반성은 자신이 보편적 규범에서 벗어났음을 인지해야 가능한데, 그인지 자체가 안 되기 때문이다.
제5부 대통령이란 무엇인가
◉ 21 원한의 정치 : 짓밟힌 노무현의 꿈
■ 아무도 원망하지 말라
전 노대통령은 이렇게 말한다. “1등만 살아남는 소선구제가 이성적 토론을 불가능하게ㅐ 만드는 지역 대결 구도와 결합해 있는 한 우리 정치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소선거구제 아래서는 “정책 개발보다 다른 지역 정당과 지도자에 대한 증오를 선동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선거운
동 방식이 된다. 모든 정당에서 강경파가 발언권을 장악한다. 대화와 타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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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정치가 발붙이기 어렵다. 국회의원을 대폭 물갈이해도 소용이 없다.” 그는 이를 “대한민국 정치의 근본문제”로 보았다.
권력을 한 번 잡는 것보다 선거구제 개혁이 중요하다던 노무현의 정신은 어디로 갔을까. 민주당은 원내 1당의 지위를 놓치지 않으려 자기들이 도입한 성ㅈ거제도를 스스로 무력화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노무현’이라는 상징자본뿐, ‘노무현 철학’ 따위는 애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선거법 개정도 내켜서 한 일은 아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검찰개혁, 선거법 개정도 ‘공수처’를 도입하는 데에 소수야당의 협조가 필요해 울며 겨자 먹기로 한 것뿐이다.
사실 ‘공수처’는 고위권력층 사이의 파워게임에 관한 문제라 서민의 삶과는 별관계가 없다.
■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
니체는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을 말한다. 주인의 도덕은 능동
적 창조적이다. 주인은 스스로 선함으로써 상대를 악하게 만든다. ‘나는
선하다. 고로 너는 악하다.’ 반면 노예의 도덕은 수동적, 반동적이다. 노
예는 상대의 악을 통해 자신의 선을 확보한다. ‘너는 악하다. 고로 나는 선하다.’니체에 따르면 노예의 도덕은 핍박당한자의 ‘원한’에서 나온다.
민주당은 그동안 자신을 선하게 만들어주는 가치들을 내버리고 줄곧 원한의 정치만 해왔다. ‘저들이 악하므로 나는 무슨 짓을 해도 선하다.’그렇게 선한 자신들을 검찰이 수사한단다.
◉ 22 포스트 노무현
노무현의 시대가 왔는데 노무현이 없다
■ 베반당한 혁명
브레히트는 나치 시절 박해를 피해 해외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고국에 남아 투쟁하다가 처형당하는 동지들을 두고 저 혼자 도망쳐 살아남은 게 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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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웠던 모양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그의 저서에 그 심경을 담았다.
<의심을 찬양함>
이제 지도자가 된 당신은 잊지 말아라,
당산이 옛날에 지도자에게 의심을 품었기에,
당신이 지금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을!
고로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의심하는 것을 허용하라.
혁명은 성공하는 순간 반혁명이 된다. 권력을 잡은 혁명은 그 권력으로 먼저 혁명가들부터 제거하기 때문이다.
1953년 여름 동베를린의 인민들이 공산정권에 맞서 봉기했을 때 브레히트는 이렇게 썼다.
6월17일 인민봉기가 일어난 뒤
작가연맹 서기장은 스탈린가에서
전단을 나누어 주도록 했다.
그 전단에는, 인민들이 어리석게도
정권의 신뢰를 잃어버렸으니
이는 오직 두 배의 노동을 통해서만
되갚을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정권이 인민을 해산해 버리고
인민을 새로 선출하는 것이
더욱 간단하지 않을까?
어디서 본 듯하지 않은가. 이용수 할머니가 정의연의 비리를 폭로하자 정권의 지지자들이 그를 공격하고 나섰다. 1953년 여름 동베를린 거리의 작가연맹처럼 여성단체와 운동권 글쟁이들이 여기저기에 ‘글질’을 해댔다. 그들의 글에는 할머니들이 어리석게도 토착왜구의 꾐에 빠져 운동권의 신뢰를 잃었다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정의연이여, 민주당이여, 차라리 할머니들을 해산하고 할머니들을 새로 뽑는 게 더 간단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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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한 자는 역사를 고쳐쓴다
운동이 할머니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할머니들이 운동을 위해 존재하게 됐다. 대체 무엇을 위한 운동이었을까? 문팬덤이 이 운동의 ‘배신자’ 에게 늘어놓은 악담은 차마 옮겨 적을 수 없을 정도다. 음모론 교주는 이용수 할머니가 누구의 사주를 받았다고 우겼다. 어느 신문은 ‘물에 빠진 할머니를 구해줬더니 보따리(의원직) 내놓으라 한다’는 만평을 실었다. 솔직해서 좋다. 그래 보따리는 원래 민중의 것이 아니라 운동가의 것이었지.
■ 노무현의 마지막 숨결
노무현의 “마지막 숨결”은 친노폐족의 과거를 미화하고 친문주류의 특권을 지키는 데에 활용되었다. 상황은 변하지 않고, 새 출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니, 상황은 더 나빠졌고 새 출발은 불가능해졌다. 노무현은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을 외쳤으나 그들은 반칙과 특권이 세습되는 세상을 만들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두 번 죽었다. 한번은 적의 손에, 한 번은 친구의 손에, 적은 그 육신을 죽였지만, 친구는 그의 정신을 죽였다.
지난 5월 23일 봉하마을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11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포스트 노무현의 시대를 선언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주창했던 깨어있는 시민, 권위주의 청산, 국가 균형발전, 거대 수구언론 타파가 실현되고 있다.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 노무현 없는 포스트 노무현 시대를 열어냈다.”포스트 노무현의 시대에는 그의 말대로 노무현이 없다. 그들에게 영혼까지 살해당했기 때문이다.l
◉ 23 대통령의 철학 : 대통령은 어디로 갔는가
■ 지도자의 연설
전설적인 연설들이 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정부” 미국이라는 국가의 민주적 정체성을 천명한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 “나는 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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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린 시민입니다.”소련으로부터 자유국가를 수호하겠다는 미국의 약속을 전세계에 발신한 케네디의 베를린 장벽 연설. 그리고 “군산복합체”의 위험을 경고한 아이젠하워의 마지막 연설, 이때 그가 경고했던 많은 것이 훗날 현실로 드러난다.
우리에게도 한때 시대정신을 상징하는 연설가들이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수사학의 대가였다. 장인의 좌익 경력이 문제가 됐을 때 그는 이 한마디로 전세를 단숨에 역전시켰다. “그럼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 격식을 깨는 투박하고 솔직한 어법은 청중을 매료시켰고, 거기서는 아직도 인용되는 수많은 명언이 탄생했다. “민주주의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 철학의 빈곤과 야쿠자의 도덕
“문재인 대통령은 철학이 없다. 남이 써준 원고나 읽는 의전 대통령 같은 느낌이다.” 나의 이 말에 청와대 전직 청와대 참모들이 일제히 발끈했다. 내 말을 반박한다며 대통령이 원고를 교정하는 시진을 올렸다. 철학이 부재를 고작 ‘교정의 존재’로 반박하는 걸 보니 참 한심한 참모들이다.
철학의 빈곤은 통치에 반영되기 마련이다. 대통령의 발언에는 정작 국민이 듣고자 했던 이야기가 쏙 빠져 있었다. ‘윤미향의 거취를 어찌할 것인가?’ 여당은 범법만 없으면 문제없다며 판단을 검찰에 넘겼다. 반면 국민 대다수는 생각이 달랐다. 그들의 이용수 님과의 갈등은 차치하고 회계부실, 안성쉼터, 개인 통장 등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윤미향의 의원직에 필요한 도덕적 저격을 잃었다고 보았다.
판단의 기로에서 대통령은 여당 편에 섰다. 그가 따라간 여당의 윤리관념은 ‘법만 지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는 야쿠자 도덕이라는 데에 있다.
대통령은 집권여당이 아니라 국민 전체를 대표해야 한다. 여당이 윤리의 궤도에서 벗어났을 때에는 국민의 편에 서서 공공선을 수호했어야 한다. 하지만 대통령은 윤리적 개입을 포기하고 ‘제 편 지키기’를 택했다.
이번뿐인가? 조국 전 장관도 범법만 아니면 된다는 참모의 건의에 따라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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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을 강행했다. 뒤늦게 조국을 내친 것도 도덕의 명령에 따른 윤리적 행위라기보다는 하락하는 지지율에 대한 물리적 반응에 가까웠다. 더 절망스러운 것은 그 후의 발언이다. 대통령은 낙마한 조국 전 장관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라고 했다. 이게 참모만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 대통령직의 윤리적 기능
“대통령 윤리는 그가 자기를 위해 일하는 이들에게 정해주는 ‘기준’을 통해, 혹은 의회와 법원이 그들에게 정해주는 ‘기준’dfm 통해 가장 잘 알려진다.”(S.C. 길먼) 즉 대통령은 ‘기준’을 정해주는 행위로써 국가 공동체의 성격을 결정한다. 그렇게 중요한 임무를 대통령은 남에게 내준 채 윤리를 포기해버렸다. 대통령직의 윤리적 기능이 망가지자 인사청문회라는 의회의 감시기능마저 무력화 되었다.
당에서 위성정당을 만들어 ‘정치개혁’의 대의를 파괴해도 대통령의 윤리적 개입은 없었다. 이 중대한 사안을 놓고 의원들 사이에 토론도 없었다.
철학의 부재는 심각한 문제로 이어진다. 원래 공화국은 ‘공무(res publica)’를 뜻한다. 그런데 “마음의 빚이 있다”라는 말은 사적 감정 표현으로, 공화국의 대통령이 공식석상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 24 편 가르기 정치 : 지도자란 무엇인가
■ 세 번의 뜨악함
문 대통령에게는 뜨악한 적이 몇 번 있었다.
2017년 4월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당시 그의 경쟁자였던 이재명, 안희정 후보는 문 팬덤에게 극심한 문자 테러를 당했다. 안희정 후보가 “질린다”라고 했을 정도다. 하지만 팬덤이 저지르는 이 패악질을 그는 “경쟁을 더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양념”이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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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세월호 분향소를 방문해 방명록에 “고맙다”라고 적었을 때였다. “얘들아 너희들이 촛불광장 의 별빛이었다. 너희들의 혼이 천만 촛불이 되었다. 미안하다. 고맙다.” 여기서 ‘미안하다’라는 말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고맙다’라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일까? 나는 아직도 이문장의 뜻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결정적 계기는 신년 기자회견이었다. 거기서 그는 조국 전 장관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라고 했다. 기자회견은 공적인지라. 대통령이라면 사감보다 자신이 임명한 법무부 정관을 끝내 거부한 국민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
대통령이 공사를 뚜렷이 구별하지 못한다. 그러니 ‘사람이 먼저’라는 구호가 ‘내 사람이 먼저’로 변질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변질되는 것은 시간문제. 그래서 벌어진 것이 울산시장 선거 개입 사건이다. 만주화 운동을 하고도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친구를 챙기려는 대통령의 갸륵한(?) 마음이 결국 권력형 비리로 이어진 것이다.
■ 대통령의 갈라치기 정치
정부의 공공의대 설치계획에 반대하여 전공의들이 파업에 들어가자, 대통령이 뜬금없이 간호사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논평을 발표했다. “전공의 등 의사들이 떠난 의료현장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간호사분들을 위로하며 그 헌신과 노고에 깊은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드립니다.”그냥 여기까지만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지난 폭염시기, 옥외 선별진료소에서 방호복을 벗지 못하는 의료진들이 쓰러지고 잇다는 안타까움 소식이 국민들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의료진이라고 표현되지만 ei부분 간호사들이었다는 사실을 국민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어이가 없다. 대통령이 의사와 간호사를 노골적으로 갈라친 것이다.
이는 사실도 아니다. 보건복지부가 낸 보도자료에 따르면 2020년 1월 20읿주터 4월 26일까지 방역에 참여한 의료진은 총 3720명으로 그 중 의사는 1723명 간호사외 간호조무사 1534명, 기타인력이 463명이다.
결국 대통령이 진영 논리에 함몰돼 허위사실까지 동원해 의료진을 둘로 갈라친 샘이다. 물론 이는 국민을 통합해야 할 대통령직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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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추상적 수치가 아니다
위기 상황에서는 국민을 위로하고 안심시키고 통합하는 지도자의 메시지가 중요하다. 그런데 메시지의 전형을 보여준 것이 바로 코로나 사태를 맞아 독일 수상 메르켈이 발표한 대국민 담화였다. 거기서 그는 먼저 위기에 대처하는 독일 정부의 원칙부터 천명한다. “정치적 결정을 투명하게 만들어 논의하는 것, 우리의 행동을 되도록 잘 근거 짓고, 이해 가능하게 절 전달하는 것, 그것이 열린 민주주의입니다.”
이 원칙에 따라 그는 시민들의 협조를 구하며 그들에게 임박한 위험을 정확히 알린다.
메르켈의 연설에서 가장 감동적인 대목은 매일 반복되는 확진자와 사망자 수 발표를 듣는 가운데 점점 무뎌져 가는 시민의 감성을 다시 일깨우는 대목이었다. “그것은 그저 통계학상의 추상적 수치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어머니와 할머니, 남편과 아내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개개의 생명과 개개의 인간이 존중받는 공동체입니다.”
■ 국민을 통합하는 지도자의 말
독일의 지도자가 “우리는 공동체”라고 말할 때 우리 지도자들은 코로나 위기를 지지율 끌어올리는 데에 활용하기 바빴다. 이재면 경기도지사는 야밤에 신천지 본부를 급습했고, 박원순 서울 시장은 신천지 교주를 ‘살인죄’로 고발했다. 소수를 타킷으로 찍어 다수의 지지를 획득하는 방식이다. 대통령이 의료진을 갈라진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반면 메르켈 수상은 의료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비교해보라.
“이 자리를 빌려 우리의 병원과 보건기관에서 의사로서 요양사로서 그밖의 다른 일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우리를 위해 이 싸움의 최전선에 있습니다. 제일 먼저 환자를 보고 감염의 정도를 확인하는 것은 바로 당신들입니다. 매일 일어나 다시 일터로 나가 사람들을 돌보는 것도 당신들입니다. 그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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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코로나 방역은 물론 성공적이었다. 문재인 정권의 거의 유일한 업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공의 대부분은 정치권이 아니라 의료진과 질병관리본부에 돌려야 할 게다.
코로나 사태이후 한국에서는 외국인, 종교를 둘러싼 차별과 혐오가 더 심각해졌다고 한다. 정치권의 책임이 크다. 여야 모두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멋하다. 야당은 코로나 19를 ‘우한폐렴’이라 부르며 반중 정서를 자극했다. 여당은 특정 종교에 대한 대중의 혐오를 부추겼고, 몇몇 친여 인사는 ‘대구사태’라는 네이밍으로 지역감정을 조장했다. 이럴 때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바로 대통령의 역할, 하지만 그 대통령마저 국민을 갈라치는 일에 가담했다. 그래서 대통령이게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 25 문재인 정권의 영상전략 : 우상이 된 대통령
■ 거꾸로 가는 남한
‘우상화’라고 하면 북한이 떠오르나, 북한도 이제 유치한 수준의 우상화는 포기한 모양이다. 퇴근 김정은은 ‘수령님은 축지법 쓰신다’라는 것은 한갓 전설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경제 정책의 실패를 인정하기도 하고, 자신의 부족한 능력을 탓하기도 하고 인민들이 당하는 고통이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종교적 우상의 지위에서 스스로 현실의 정치가로 내려오려는 것이다.
wjudcl인 우상화의 바탕에는 농경사회의 정서ㅕ가 깔려있다. 해방 직후엔 남이나 북이나 산업화와 근대화가 되지 않은 상태, 당연히 자신을 개인으로 간주하는 근대적 ‘시민’ 계층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갑자기 근대적 정치체제가 도입되니, 그 운영이 전근대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최근 김정은의 변화는 이제는 북한에서조차 그런 전근대적 선전 방식이 먹히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 NL 정치문화의 잔재
작년 조국 사태가 막 불거졌을 때 소설가 공지영씨가 SNS에 이런 글을 올렸다. “문프께서 그걸 함께할 사람으로 조국이 적임자라 하시니까, 나는 문프께 이 모든 권리를 양도해 드렸고 그분이 나보다 조국을 더 잘 아실테니까.” 지식인까지 자신이 내려야 할 윤리적 판단을 지도자에게 아웃소싱한 것이다. 산업화를 넘어 정보화시대에 이른 지금 이 초고학력 사회에서 왜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거기에는 팬덤 문화 외에 또 다른 요인이 있다. 과거의 운동권 주류였던 NL진영에는 독특한 개인숭배 문화가 있다.
전대협 임종석 ‘의장님’은 행사장에 가마를 타고 입장하셨다. 문 대통령 숭배는 이 운동권 습속이 낳은 일종의 문화지체 현상으로 보인다.
학창시절 그 문화를 당연시했던 이들이 기성세대가 되고, 그들을 지지 기반으로 삼아 586세력이 한국 정치의 주류가 되었다. 그 결과 이 북한식 정치문화가 청산되지 않은 채 남한의 부르주아 정치에까지 투영된 것이다.
■ 노무현과 문재인의 팬덤
언젠가 노 전 대통령이 군부대를 방문했을 때 이등병이 대통령에게 “맞습니다, 맞고요”라는 유행어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요새 이등병이 용감하네”라며 “괜찮습니다, 괜찮고요”라고 대꾸해 주었다. 2004년 자이툰 부대를 방문했을 때에는 “대통령님 한번 안아보고 싶습니다”라고 외치며 튀어나온 병사를 안아주기도 했다. 일개 사병들이 대통령에게 아무 격의를 느끼지 않았다는 얘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치쇼는 하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재임 중 현장 방문을 되도록 삼가려했다.
반면 문재인 대통령은 ‘이미지 쇼’에 매우 능하다. 그 뒤에는 물론 탁현민의 연출 기술이 숨어 있다. 예를 들어 예를 들어 김정숙 여사가 신분을 감추고 몰래 수해복구 현장에서 봉사활동을 한다. 물론 그러다가 들키는 것까지가 연출이다. 대통령은 신임 정은경 본부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려 청주에 있는 질병관리본부를 직접 찾았다. 이 이벤트를 탁현민은 “권위를 낮출수록 권위가 더해지고 감동을 준다”라고 자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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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과 지도자의 결합
그가 자백하듯이 문대통령이 권위를 낮춘다면 그것은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다. 문 팬덤이 자주 사용하는 “뭉클, 울컥”이라는 표현은 이 연출의 정치 미학적 효과를 보여준다. 과도한 이미지 쇼가 때로 문제가 되기도 한다. 코로나 사태의 한가운데에서 연출한 자파구리 쇼는 대중의 질타르 받았다. 송환된 전몰용사들의 유해응 다른 비행기로 옮기는 결례가 빚어지기도 햇다. 전몰용사보다 영상효과가 중요했던 것이다.
독일에 사는 지인에게서 들은 얘기다. 백화점에 고기를 사러 갔는데 매대 앞에 늘어선 줄 속에 메르켈 수상이 서 있었단다. 그런데 누구도 그에게 곁눈 한 번 안 주더라고. 수상이 다른 시민들과 똑같이 직접 카트를 끌고 장을 보는 것이 그들에게는 그냥 ‘일상’이다. 연출은 그게 일상이 아닌 곳에서나 필요한 것이다.
노무현이 주는 감동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병사들의 돌발행동과 그에 대한 노무현의 대응은 인위적으로 연출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반면 문재인의 ‘감동’은 철저히 계산되고 연출된 것이다. 노무현은 권위주의의 타파를 ‘실행’했지만 문재인은 권위주의의 타파를 ‘연출’한다. “뭉클, 울컥”으로 표현되는 친문 대중의 감동은 실은 ‘그렇게 높으신 분이 이렇게 낮은 곳에 임하신’데에 대한 신분제적 감읍에 가깝다.
제6부 진보의 몰락
◉ 26 포스트 - 윤리의 시대
진보는 왜 보수보다 뻔뻔해졌는가
■ 동일자의 영겁회귀
집권 3년이 채 안 됐건만 보이는 풍경이 벌써 낯익다. 언젠가 본 것 같지 않은가. 그렇다 드루킹의 매크로는 그 전엔 십알단의 댓글이었다. 김태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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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벌은 이석수의 파면이었고, 조국의 감찰무마는 우병우의 직권남용이었다. 윤석열의 수난은 채동욱의 수모였고, 윤 총장을 노린 <한겨레>의 저격은 채총장을 날린 <조선일보>의 폭로였다. 청와대의 선거개입은 국정원의 대선공작이었고, 황운하의 충성은 김용판의 충정이었다. 조민의 표창장은 정유라늬 금메달이었고, 고대생들의 항의는 그 전엔 이대생들의 시위였다.
“대리시험이 오픈 북”이라던 유시민은 그 전엔 “주어가 없다”던 나경원이었다. “문프께 모든 권리를 양도해드렸다”는 공지영은 그전엔“나라를 팔아먹어도 1번”이라던 어느 경상도 아낙이었다.
수많은 이들과 촛불을 들고 광화문을 걷고, 탄핵소추가 이루어지던 국회를 에워싸고, 탄핵이 잉용되는 장면을 TV로 지켜볼 때만 해도 희망이 있었다. 그때 탄핵 당한 대통령은 ‘비정상의 정상화’를 외치며 나라를 비정상이 정상 행세를 하는 곳으로 바꿔놓은 바 있다. 그래서 촛불 후보는 장미대선에서 “이게 나라입니까?”를 외쳤고 당선되어서는 ‘적폐청산’의 이름으로 그 비정상을 청산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런데 그렇게 청산된 국가의 국민은 벌써 이렇게 묻고 있다. “이건 나라입니까?”
■ 대한민국 주류의 교체
앞만 보고 걸었는데 사회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사실 탄핵을 기점으로 이 사회에는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큰 변화가 있었다. 그새 한국 사회의 ‘주류’가 보수주의 세력에서 자유주의 세력으로 교체된 것이다. 탄핵 이후 보수는 휘날리는 태극기와 함께 지리멸렬해졌고, 아직도 그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 사이 자유주의 세력은 날로 지배세력을 공고히 했고, 지금도 승리하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그들의 교만한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것처럼 보인다.
과거의 386들은 어느덧 586이 되어 사회의 주류로 똬리를 틀었다. 1990년대 호경기 때 사회에 나온 그들은 아파트를 가진 중상층이 되었다. 반미 전사 이석기는 아들을 ‘철천지원수’미국으로 유학 보냈고, ‘구국의 강철 대오’ 전대협 ‘의장님’의 딸도 미제의 대학에 다닌다. 사노맹의 은수미는 성남 조폭에게 자원봉사(?)를 받았다 하고, 같은 조직에 있던 조국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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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와 함께 강남에 건문 사는 혁명적 꿈을 공유한다. 그런 586세대를 젊은 이들은 이미 새로운 기득권 세력으로 바라본다.
지난 정권에서 낙하산 태워 내려 보낸 수많은 이들의 자리에는 지금 이 정권에서 내려 보낸 수많은 이들이 앉아 있을게다. 진보가 과거의 보수가 되었다는 불편한 진실은 가끔 검찰의 공소장을 통해서나 알려진다.
물론 바뀐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는 비리를 저지른 정치인이 그래도 머리숙여 사과는 햇다. 비록 잘못은 했어도 ‘윤리 기준’은 존중하여 그 기준에서 벗어난 자신을 탓하거나 탓하는 척은 했다. 문재인 정권의 사람들은 다르다. 그들은 잘못을 해놓고 외려 적발한 이들에게 성을 낸다. 그냥 비리만 저지르는 게 아니라 그 행위가 잘못이라 말해주는 ‘윤리 기준’을 건드린다. 아예 기준 자체를 바꿔버림으로써 자신들은 하나도 잘못한 것이 없는 대안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여전히 운동가’라는 이 착란은 ‘나를 지키는 게 곧 운동의 대의를 지키는 것’이라는 독선으로 이어진다. 운동가는 순결하다. 혁명가는 고결하다. 그런 내가 부도덕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도덕이 잘못된 것이다. 고로 도덕부터 청산해야 한다. 그리하여 부도덕한 자들은 도덕적 인간이 되고, 도덕을 지키며 사는 이들은 세상물정 모르는 바보가 된다. 그리고 “내가 조국이다!”라는 슬로건과 더불어 이 뒤틀린 도덕은 만인의 것이 된다. ‘포스트-진리’의 시대는 ‘포스트-윤리’의 시대이기도 하다. 무능하나 순결했던 진보는 어느 새 유능하나 부패한 보수로 변신했다.
◉ 27 오인으로서 정체성 -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왜 그냥 흘려보내지 못할까. 조국도 그렇고, 윤미향도 그렇고, 한명숙의 경우에는 아예 확정된 대법원의 판결까지 뒤집으려 한다. 언제 이런 적이 있었던가. 왜 그럴까. 대통령 특유의 ‘내 식구 철학’, 운동권 출신 참모들의 ‘혁명적 의리론’때문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당정청과 지지층이 한 몸이 되어 보여주는 저 집단적 강박을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다. 그 집착에는 뭔가 다른 원인이 있음에 틀림없다.
■ 거울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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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 ‘거울 단계’ 이론이 도움이 될까. 이 정신분석학자에 따르면 대부분의 동물은 거울 속에 비친 영상을 자신으로 인지하지 못한단다. 다만 침팬지의 경우 자신을 알아보기는 하나, 그게 자신임을 인지하는 순간 바로 거울에 흥미를 잃어버린다. 하지만 인간의 아기는 다르다. 그는 거울에서 자신을 인지할 뿐 아니라 매우 즐거워하며 거기 비친 제 모습에 마냥 빠져든다고 한다. 왜 그럴까.
유아는 불완전한 존재다 지각능력은 파편적이다. 제 눈으로는 제 몸의 부분 부분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거울 속에서 아기는 조각나지 않은 통합된 자기를 본다. 거울상은 유아의 ‘이상적 자아’다. 그것을 보고 아기는 한없이 기뻐한다.
하지만 거울 속의 온전한 자아는 성장을 통해 도달해야 할 목표일뿐, 현실의 아기는 여전히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존재다. 정체성이란 아기처럼 현실적 자아를 자아로 착각하는 오인의 결과로 발생한다.
■ 상상계, 실재계, 상징계
정체성 자체가 근본적 ‘오인’의 산물이기에 동일시를 통해 현실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의 괴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 자아는 실재계, 이상적 자아는 상상계에 속하므로 두 자아 사이에는 언제나 균열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조국 교수가 미디어를 이용해 연출해 온 자아는 상상계에 속하고, 수사를 통해 밝혀진 그의 자아는 실재계에 속한다. 두 자아의 분열이 이처럼 극단으로 치달ㅇ르 수도 있다.
시회에는 상상계에 갇힌 이들에게 그들의 실재계를 냉정히 보여주는 상징계의 질서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언론과 검찰이다. 최근 민주당 지지자들이 ‘떡검’과 ‘기레기(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에 집중 포화를 퍼부어대는 것은 이 두 기관이 그들의 상상계를 무참히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오인을 통해 형성한 정체성, 순결한 개혁투사의 환상을 유지하려면, 실재계를 드러내는 이 두 기관부터 무력화해야 하는 것이다.
■ 제2의 거울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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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의 주류인 586세대가 바로 그런 경우로 보인다. 그들은 상상계 속에서 여전히 과거의 정의로운 민주투사다. 하지만 실재계의 그들이 그렇게 고결할 리는 없다. 그들도 뇌물을 받고, 비리를 덮고, 여론을 조작하고, 상방을 위조하며, 높은 분을 위해 선거개입도 한다. 펀드 투자로 강남에 건물 살 꿈을 꾸고, 남의 자식 보고 북한 가라면서 제 자식은 미국 보낸다.
양정숙을 내친 민주당이 윤미향을 놓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양정숙은 민주당의 주류 586세대의 상상계와는 별 관계가 없다. 윤미향은 다르다. 그는 그들이 공유하는 NL운동권 서사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총선을 아예 ‘한일전’으로 치른 그들이 아닌가. 조국에 이어 윤미향까지 낙마한다면, 그들의 정치적 정체성을 이루는 운동권 서사가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그래서 당 대표가 나서서 소속 의원들에게 함구령까지 내린 것이다.
◉ 28 부친살해의 드라마
이제 우리가 살해당해야 한다
■ 보수의 이야기
과거에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큰 이야기는 박정희 정권이 쓴 반공과 ‘산업화 서사’였다. 1960년대 까지만 북한의 국력이 남한보다 우위에 있었고, 북한은 이를 토대로 적화통일을 추구했다. 끝없는 남침의 위협속에서 시민들은 반공전사와 산업전사로서 ‘싸우면서 일하는 보람’에 살았다. 전쟁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던 시절 정권은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것만으로 쉽게 독재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산업화는 눈부신 업적이었다. 농경사회였던 한국 사회는 단기간에 산업사회로 변모한다. 고도성장은 독재체제에 대한 시민의 염증을 성공적으로 무마했다.
■ 진보의 이야기
산업화 시대의 자식들은 아버지를 살해하려 했다. 못 배운 아버지들이 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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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가르쳐놨더니, 대학에 간 자식들은 반공전사와 산업전사가 되기를 거부하고 민주투사와 통일꾼이 되려했다. 자식 세대의 투쟁이야기 역시 아버지들의 전쟁이야기 못지않게 절절했다. 이들의 ‘부친살해’는 1987년 시민항쟁으로 시작해 30년 만인 2017년 대통령 탄핵으로 완료 되었다. 21대 총선은 그 사실을 재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부모에게 전쟁이야기를 듣고 자란 자식들이 이제는 부모가 되어 자식들에게 반독재무용담을 들려준다. 우리 세대는 어린 시절 반공 영화를 보고 자랐지만, 지금 젊은 세대는 <변호인> <1987> <택시운전사>를 보며 자랐다 <공동경비구역 JSA>를 비롯해 남북관계를 다룬 영화도 북한의 만행이 아니라 분단의 비극을 강조한다.
그 사이 할아버지 세대는 <국제시장>을 내놨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