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괜찮아 나도 그랬으니까

보해성산 2021. 1. 12. 09:55
반응형

괜찮아 나도 그랬으니까

- 이근후 정신과 전문의가 알려주는 서툴지만 내 인생을 사는 법 -

■ 이근후

0 이화여대 의대 신경정신과 교수

0 저서

-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 백 살까지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

■ 저자의 말

나는 원래 글을 쓰는 재주가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내게 글을 청탁했다. 그리고 나는 단 한 번도 청탁을 거절해 본적이 없다. 나처럼 글재주가 없는 사람에게 글을 청탁해 주는 것이 너무 감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마운 마음으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담아 정성을 다해 글을 썼다.

마음고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서투름’에 대한 불안과 공포이다. 나는 이런 불안과 공포로 인해 힘들어하는 분들을 치료하고 상담하며 일생을 살아왔다.

내가 보았던 분들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투름에 대한 불안이나 공포, 그 서투름을 다른 사람이 지적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을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이가 들어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을 서투름에 맞추어 되돌아보니 서투름이 서투름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쌓이고 쌓여 결국 익숙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이만한 세월이 지나야 하나보다.

서투르다는 것은 첫출발이고 여백이 많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여백이 많다는 것은 누구나 이 여백을 창의적인 삶으로 메꿀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서투름이 없다면 어찌 익숙함이 있겠는가. 서투름의 축적이 결

- 1 -

국 익숙함이 된다는 것을 굳게 믿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투름이 차곡차곡 쌓여 익숙해지면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완성품이 될 것이다.

2020년 10월 이근후

◎ 1부 나만의 인생

■ 엄마 말만 들어야 성공한다

세계보건기구의 요즘 기준에 의하면 17세 까지는 미성년자로 분류된다. 이 시기는 청년기를 맞아 자신이 독립적으로 스스로의 삶을 책임질 준비를 하는 시기임으로 ‘미성년’이라고 이름 붙였을 것이다. 즉 세상에 어떻게 적응하고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부모의 경험과 가르침을 통해 배워야 하는 시기이다. 그런데 부모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독립적으로 살아가야 할 시기의 아이조차 그들의 가치관대로 학습시키고 싶어 한다.

한 고등학교에 초대받아 정신건강에 대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강당에 들어가 잠깐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책상에 엎드려 자는 아이들이 한 둘이 아니다. 나는 어떻게 시작해야 이 잠자는 학생들을 깨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들려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칠판에 강연 제목을 이렇게 썼다.

“엄마 말을 안 들어야 성공할 수 있다.”

강연 제목이 엉뚱하게 보였는지 곁에 있는 학생들이 잠자는 학생들을 깨웠다. 엄마 말을 안 들어야 성공한다는 말은 설명 없이는 오해하기 쉬운 제목이다.

이 말을 한 의도는 이렇다. 부모로부터 학습 받는 시기는 미성년인 17세 까지이다. 그때까지 부모의 경험을 통해 사회적응 방법을 학습하고, 청년기에 이르면 독립적으로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만의 삶을 독창적으로 계획하고 살아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들의 과보호는 아이들이 독립적인 자기 계획을 갖고 삶을 살아가게 하는 능력을 잃게 만든다는 것이다.

■ 엄마에게 물어보고요

- 2 -

조금 진부하지만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의문이 생겼다. ‘왜 자식에게만 효도하라 하고 부모는 자식에게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이 없는가?’ 그래서 선배 교수에게 질문을 드렸는데, 이 말의 전체 문장은 원래 ‘부모는 마땅히 자녀에게 자애롭고 자녀는 부모에게 효도하라’라는 것이라고 답해주셨다.

답을 듣고 나서 또 의문이 생겼다. ‘그렇다면 왜 앞말은 빠지고 자식에게만 효도를 강요했는가?’그분은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지 말라고 해도 넘치게 사랑하고, 자녀는 효도하라고 해도 잘하지 않기 때문에, 부모의 이야기는 생략하고 자녀들이 효도해야 한다는 것만 강조되어 내려왔다고 했다.

대학교수로 있을 때 당황스러운 경험을 한 적이 있다. 한 수강생 어머니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자기 딸이 몸이 아파결석을 해야 하는데, 자기가 대신 와서 수업을 들으면 출석 처리가 되는지를 물었다. 또 한 번은 어머니가 딸을 데리고 상담실로 찾아왔는데, 옛날에는 딸이 말을 잘 들었는데 요즘은 청개구리처럼 말을 잘 듣지 않는 것이 고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딸이 이 나이에 남자 친구도 하나 없다고 푸념을 했다. 나는 당사자인 여학생을 면담해 보았다. 이 학생의 절규는 이렇다.

“내 생활이 없어요. 어머니가 지시하는 대로 행동해야 해요. 수강신청도 어머니가 했고, 끝날 시간이면 차를 가지고 와서 후문에서 기다리다가 나를 태우고 집에 가요. 이렇게 하고선 만나는 사람들마다 제가 순진해서 만나는 사람도 없다고 이야기를 해요.”

이 사례를 보면 어머니가 갑이다. 딸을 갑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마음대로 좌지우지 한다. 부모는 마땅히 자식에게 자애로워야 한다는 옛날의 가치관이 지나쳐도 너무 지나친 사례이다.

여러 사례를 본 결과, 부모가 자녀를 놓지 않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자녀가 부모의 기에 눌려 의존만 하는 경우도 있다. 이 둘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 부모는 자녀가 혼자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돕는 것이 바람직하다. 마찬가지로 자녀는 부모의 손바닥 위에서 말만 잘 들으면 일생을 편히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무의식적인 소망을 버려야 한다.

기회를 잘 맞추면 건강한 자녀가 된다.

자녀는 부모를 이길 수 있어야 건강하다.

- 3 -

■ 기획한 인생은 베스트라이프!!!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다양한 경험을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을 보면 거기서 거기다. 나라에 따라,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크게 보면 공통점이 더 많다.

나는 2013년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라는 수필집을 내어 40만 부가 넘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고맙고 즐거운 일이지만, ‘내가 낸 수필집이 한두 권이 아닌데, 왜 유독 이 책만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하는 궁금증도 생겼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전에 내었던 수필집은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원고를 모아 출간한 것들이다. 베스트셀러가 된 수필집은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기획, 인터뷰, 집필 등의 과정을 통해 출간되었다.

이 책 덕분에 전국 각지에서 강연 요청을 받고 즐겁게 뛰어다녔다. 나는 독자들과 만나기 전에 어떤 이야기를 해드리면 좋을까를 항상 생각한다.

수필집을 스무 권 가까이 출간했지만, 모두 재판 수준을 넘지 못했다. 기획한 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한 살이라도 젊을 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면…’하는 아쉬움을 가지며 젊은 독자분들께 이 말을 선물하고 싶다.

“명심하세요. 잘 기획한 책은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잘 기획한 인생은 ‘베스트라이프’가 됩니다.”

 

■ 나는 나다

학교를 졸업해도 마땅한 직장을 찾기 힘든 시대이다. 지인의 아들은 여러 곳에 시험을 봤는데 필기는 합격했으나 번번이 면접에서 낙방했고, 그러다보니 기가 많이 죽어 있었다. 면접에서 떨어지면 자기를 거부한 것으로 인식된다. 심하면 자기비하로 연결되어 삶의 용기를 잃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면접자가 면접관의 눈에 들기 위해 인위적인 태도를 보이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 4 -

대학생 때 심리학 강의를 듣는 첫 시간에 교수님이 교단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심리학이란 무엇인가? 심리학은 심리학이다.”

비슷한 예로 정신과 학회에서 경봉 스님을 모시고 ‘자아의 정체감과 주체성’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놀랍게도 스님은 “나는 나다”라는 첫 말씀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면접에서 실패한 지인의 아들에게 “나는 나다”라는 말로 지신을 회복하도록 권해 보았다. 면접관의 취향에 맞추어 답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가진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나를 표현해보라고 했다.

똑같은 대답을 일관하는 수많은 면접자 중에서 당당하게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나다’라고 보여주면 된다. 그럼 나와 맞는 회사의 면접에서 합격할 수 있을 것이다.

면접에 모범답안은 없다.

나는 나라고 자신 있게 표현하는 길밖에는 없다.

■ 나도 외모 콤플렉스가 있었다

“박사님 젊은 시절에는 참 미남이셨겠어요, 키도 크시고….”

처음 만나서 이런 인사를 받으면 무안하다.

우선 내 별명은 ‘꽁치’였다. 키가 178cm이니 당시 기준으로 큰 편에 속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미남이라는 것은 좀 그렇다. 키에 비해 몸무게가 55kg밖에 안되었으니 난민 같은 인상이다. 당시에는 몸이 좀 뚱뚱한 사람을 얼마나 존경하고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이것이 신체에 대한 나의 콤플렉스이다.

내가 경험했던 성형한 많은 사람은 객관적으로 그 정도면 성형을 하지 않아도 될 법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 사람이 성형을 습관적으로 하고 성형외과를 두루 순례하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이미 예쁜데 무엇이 부족해서 자기의 신체를 바꾸는 걸까? 정신과적 한 가설을 인용해 설명하면

첫째는 자기가 평가하는 자기의 신체상

둘째는 타인이 자기를 평가하는 신체상이다.

- 5 -

이 혼합과정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는가가 문제이다.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자기 신체상을 중심으로 타인의 주장을 참고한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기 신체상에 대한 확신이 없고 타인이 평가하는 신체상을 자기의 것처럼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것이 신체상에 대한 열등감이다.

한 때는 성형수술로 곱게 보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 곱게 꾸민 얼굴은 결국 내 얼굴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젊다는 것은 젊음 그 자체가 아름다움임을 알았으면 좋겠다.

이미 아름다운데 무엇을 덧칠하여 더 아름답게 만들겠다는 것인가? 신체상에 대한 열등감에서 벗어나기만 해도 아름다움을 더할 수 있다.

‘나는 나다’라는 나만의 자신감을 잃지 말자.

■ 착각이 있어야 통찰이 이른다

착각은 대상이나 상황을 잘못 지각하고 해석하는 경우를 말한다. 비슷한 용어로 환각도 있다. 이는 대상이나 상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있는 것처럼 지각하는 것이 착각과 다르다. 착각이든 환각이든 심하면 망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지각이다.

10년 동안 정말인줄 알고 있다가 어느 날 이것이 착각임을 알고 통찰에 이른 적이 있다.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 나는 내가 미술 대학에 갈 것으로 생각했다.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미술대학에 합당한 사람인지 궁금했다. 찬찬히 생각해 보았다. 결론은 ‘아니다’였다.

초등학교 때 미술 시간이었다. 베토벤이나 아그리파 같은 석고상을 걸어 놓고 데생을 하는 수업이었다. 미술 선생님이 내 그림을 가지고 가서 칠판에 붙여놓고 “그림은 이렇게 그려야 한단다. 구도를 이렇게 잡는 것이 창의적인 것이다”라고 말씀 하셨다. 선생님은 그 후로 창의성을 이야기 할 때마다 내 그림을 예로 들었다. 그 후로 내가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라고 착각하기 시작했다. 중학생, 고등학생 때까지 미술반에 들어가서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신이 나서 그리고 또 그리면서 많은 칭찬을 받았다. 미술전에 출품하여 상도 몇 번 타 보았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이나 선생님들에게는 내가 그림을 잘 그리는 학생으로 각인돼 있었다.

- 6 -

그런데 막상 미술대학에 진학하려고 깊게 생각해보니, 지난 10년 동안의 외부적인 칭찬만 믿고 내가 정말 창의적인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줄 착각하고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진로를 바꾸어 의과대학을 갔고 일생을 정신과 전문의로서 학생교육과 환자 진료를 하며 보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착각 속에서 그림을 즐겁게 그렸던 것도, 미술에 자질이 없다는 것을 통찰한 것도 모두 신기하다.

통찰이란 별 것이 아니다.

나를 바르게 볼 수 있는 것이 통찰이다.

흙수저는 평생 흙수저로 살아야 할까?

금수저, 흙수저, 출생 신분을 구분하는 유행어다. 친한 친구 중에 흙수저 출신이 있다. 집은 가난했지만 모든 것을 잘하는 친구였다.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무엇하나 빠질 것 없이 나보다 잘했다. 나는 금수저라고 할 수는 없지만, 흙수저는 면한 수준의 집에서 태어났다. 그러니 집안 사정을 빼면 내가 그 친구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내가 그보다 유일하게 나았던 경제력도 추월했고, 사회적으로도 명망 높은 사람이 되었다.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속담의 전형적인 경우이다.

흙수저는 평생 흙수저로 살아야 할까?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길 바란다. 본인의 뚜렷한 목적과 철학을 갖고 인생을 매진한다면 지금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오히려 과거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고 본다. 나는 흙수저로 태어났으니 흙수저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좌절과 포기로 일관한다면, 기회가 닥쳐도 잡을 수 없다. 흙수저임을 스스로 비하하거나 낳아준 부모를 원망만 하며 살면 인생은 결국 흙수저로 끝날 것이다.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다. 내가 개척하고 책임지는 것이 나의 인생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스스로 진지하게 자문자답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든 인생의 마지막 순간은 금수저로 마무리 할 수 있다.

- 7 -

■ 우리는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합니까?

인생은 팔자대로 산다고 하지만,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팔자를 고쳐가며 사는 사람도 많다. 팔자대로 사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해서 산다는 것이다.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자기 자신의 선택이다.

정신의학 발달사에 최면술과 관련된 일화가 하나 있다. 샤르코(Charcot)라는 정신의학자는 최면은 누구에게나 걸 수 있고 누구나 걸린다고 주장했다. 베른하임(Bernheim)은 최면은 최면에 걸리고자 선택하는 사람에게만 걸린다고 주장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베른하임의 주장이 옳다. 누구나 갈리는 것이 아니라 최면에 걸리고자 선택하는 자만 걸리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삶은 언제나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스스로 생각도 해보고 타인에게 자문도 해보지만, 결국 자기 선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타인이 보기에 남의 말만 듣고 산 것 같이 말하는 사람도 따지고 보면 그 말을 선택한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러니 모든 인생은 변명할 수 없는 자기선택에서부터 출발한다.

부처님이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들 때 제자들이 물었다.

“우리는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합니까?”

부처님은 “누구에게 의존하지 말고 자기 자신만을 믿고 의존하라”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자기 선택과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을 갖고 살라는 말씀이었을 것이다.

■ 뒤집기와 뒤집히기

우리나라 고유의 민속 씨름을 보면 참 재미있다. 씨름에는 두 가지로 선수들의 승부가 갈리는 것 같다.

하나는 힘이다. 힘에 센 선수가 이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힘이 세면 그 힘으로 자기보다 힘이 약한 선수를 찍어 누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기술이다. 내가 가장 스릴감을 느끼는 씨름 기술 가운데 하나가 ‘뒤집기’이다.

기술로 자신보다 큰 몸집의 선수를 공중으로 한 바퀴 돌려 쓰러뜨리는 것을 보면 전율이 오른다.

- 8 -

이 이야기를 언급한 이유는 인생도 지나놓고 보면 뒤집기와 뒤집히기의 연속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의 뒤집기는 내가 내 힘으로 상황을 바꾸는 것이다. 뒤집히기는 내 힘이 아닌 사회적 변동이나 상황의 변화 때문에 타의로 뒤집히는 것을 뜻한다.

의과대학을 다니면서부터 연세대학에 전임 강사로 안착할 때까지 15년의 세월동안 뒤집기와 뒤집히기의 연속선상에 있었다. 첫 뒤집기는 성격을 바꾼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내성적이었고 그것을 고치고 싶었다. 대학생활을 하며 뒤집기에 성공했고 외향적인 성격을 가질 수 있었다.

학생운동으로 감옥에 갔었고, 5·16 때 재수감됐다. 만기 출소하고 수련의 자격 박탈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군사정부 시절 무의촌을 없앤다는 정책으로 강제 동원되어 산골짜기에서 시간을 보낸 적도 있다. 보건사회부를 찾아가 이 산골짜기에는 정신과 의사가 필요 없다고 항변하고 내 자리를 국립 정신병원으로 옮겼다. 나의 두 번째 뒤집기였다. 군 제대 후 선배 교수들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드렸는데 예기치 않게 연세대학 의대에서 강사로 일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세 번째 뒤집기였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온다. 진부할 수 있는 말이지만 찾아온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항상 준비해 두고 있어야 한다.

‘세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기다리면 언젠가 뒤집힘의 기화가 있을 것이다.

■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

욜로, 나에겐 퍽 생소한 신조어다. 무슨 말인지 손자에게 물었다. 미래보다는 현재에만 집중하여 산다는 뜻이란다.

내게 이 말은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저축 없이, 오늘 당장의 삶과 쾌락을 위해 살아간다는 뜻으로 들렸다. 죽을 때까지 오늘 같은 조건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다.

1980년대 초에 한 달간 유럽에 배낭여행을 간 적이 있다. 알프스 산맥을 중심으로 기차가 연결된 곳들을 돌아다녔다. 샤모니에 갔을 때 아주 근사한

- 9 -

카우치버스(침대버스)가 한대 도착했다. 그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모두 노인들이었다. 노인들을 버스 옆에 세워놓고 가이드가 말했다. “선생님들, 저기 저 산꼭대기가 보이죠? 왼쪽에 보이는 봉우리가 그 유명한 몽블랑입니다.” 이 말을 들은 노인들은 저마다 그 쪽으로 눈을 돌려 가이드가 가리킨 봉우리를 찾으려 애썼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을 서 있기가 어려워 작은 등산 의자를 버스 옆에 놓고 앉아서 몽블랑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그들은 은퇴하고 자유로워지면 여행을 다니기 위해 일생을 열심히 일하며 저축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여유로운 시기를 맞이해보니 산에 오를 힘이 없다. 젊을 때 열심히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틈을 내어 산을 오르는 취미를 저축해 두었다면 지금 저 몽블랑을 올라가 볼 수 있었을 텐데…. 오로지 일에만 열중했기에 나이를 이기지 못한 것이다.

결론은 이렇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쾌락으로 소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반대로 미래만을 위해 전적으로 저축만 하는 것도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저축한 것을 미래에 쓸 수 있는 습관도 젊을 때 함께 익혀야 한다.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적절한 비율로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어떻게 살 것인지는 개인의 선택이다.

어떤 선택이든 우리의 목표는 인생을 즐겁고 유쾌하게 살아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

◎ 2부 성장과 성공

■ 성공이냐 성장이냐

 

사람은 누구나 목표한 뜻을 이루어 성공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이 성공을 만족스럽게 성취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이는 ‘성공’이라는 단어에 부여하는 의미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낯선 단어일 수 있으나 ‘성공 공포증’ 이라는 의학 용어가 있다. 이는 일종의 신경증으로 성공을 마지막 결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공 이후에 허탈해지고 우울해 지는 것을 말한다.

- 10 -

성공은 정점이다. 정점 뒤에는 내려오는 길밖에 없다. 반면 자기 성장은 끝이 없다. 신체적인 성장은 끝이 있지만 심리적인 성장은 한계가 없다.‘성장’에 목표를 둔다면 그 발전의 정도는 무한하다. 이 무한한 성장을 심리학에서는 ‘성숙’이라고 부른다.

성공은 마디가 짧은 나무이고, 자기 성장은 마디 없이 나의 노력만큼 늘어나는 나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성공에 집착해 자기 성장을 방해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성공은 한때의 즐거움이지만, 자기 성장은 끝없는 즐거움이다.

말은 쉬워도 자기 성장의 과정은 어렵다.

그래도 노력해보자.

자기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끝없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 한 우물을 팔까? 여러 우물을 팔까?

한 우물을 팔까. 여러 우물을 팔까. 참 쉽지 않은 선택이다. 나같이 나이든 사람에게 묻는다면 대부분 한 우물을 파라고 조언할 것이다. 우리 때는 직업군이 단순했다. 한 우물만 파도 오래 파면 팔수록 전통과 노하우가 생겨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다양한 직업군이 생겼다. 손주들이 내게 미래의 직업을 자문할 때가 있다. 내 딴에는 성심성의껏 답하지만, 손주들에게는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훈수이다. 오히려 손주들로부터 내가 배워야 할 직업군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내가 파는 우물은 하나지만, 그 우물과 관계된 우물은 수없이 많다. 한 우물을 파는 것이 좋을까? 여러 우물을 파는 것이 좋을까? 한 우물을 파되 그 우물과 연관된 여러 우물을 파는 것을 고려해보자. 한 우물을 파면서 전혀 연관도 없는 다른 우물을 파는 것은 시간 낭비일 수 있다. 그러나 연관된 소소한 우물을 여럿 파다 보면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우물 ‘군’이 되고, 결과적으로 큰 우물 하나를 판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요즘은 파볼 우물이 너무 많다.

하나의 우물 ‘군’을 다양한 각도로 파보는 것은 어떨까?

- 11 -

■ 아! 그래서 떨어졌구나

내가 대학에 갈 때는 합격자를 학교 게시판에 써서 붙였었기 때문에 합격여부를 확인하러 직접 학교에 가야했다. 지원했던 학교 게시판에 붙은 이름을 훑어보았지만 내 이름은 없었다. 이게 웬일인가? 당황과 충격이 함께 몰려왔다. ‘내가 떨어지다니….’

‘떨어질 내가 아닌데….’

‘왜 떨어진 걸까?’

이 물음에 스스로 답하기 위해 6개월 이상을 고심했다. 가장 객관적인 이유는 점수 미달이었다. 그런데 ‘떨어질 내가 아닌데’라는 전제를 깔고 있었으니 답이 나올 리가 없다. 학교에서 성적을 잘못 채점했거나, 떨어졌어도 1점 차이로 아깝게 떨어졌을 거라는 되지도 않은 변병을 하며 스스로 자존심을 세웠다. 거품 같은 포장으로 나를 속인 셈이다.

재수생이 견디기 제일 힘든 것은 공부의 힘듦이 아니라 떨어졌다는 자존심의 상처일 것이다. 그러나 나처럼 거품 같은 그럴듯한 거짓 포장으로 스스로를 위안하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나를 똑바로 본다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내가 나의 진짜 모습에 직면했을 때 성장한다.

■ 실패한 사람은 없다

“나는 항상 젊은 사람들의 실패를 흥미롭게 바라본다. 젊은 시절의 실패는 곧 성공의 토대가 된다. 실패하고 물러섰던가? 다시 일어섰던가? 젊은 사람 앞에는 이 두 가지 길이 있는데, 이 순간에 성공은 결정되는 것이다.” 독일의 군인이었던 몰트케(V. Moltke)가 한 말이다.

1977년 한국 산악회가 주관한 첫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가한 후배 한명이 있다. 그는 정상을 앞에 두고 악천후를 맞았고 그 자리(8,800m 지점)에서 비박을 한 후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다. 그는 이 첫 번째 등반에 실패했다는 자괴감 때문에 한동안 많이 괴로워했다.

- 12 -

나는 그에게 실패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실패가 아니라고 주장한 논리는 이렇다. 그리고 자부심을 가지길 원했다.

실제로 8,800m까지 올라간 사람은 드물다. 더욱이 그런 곳에서 비박(야영, 텐트 없이 밤을 세움)을 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더군다나 살아서 베이스캠프로 귀환했다. 얼마나 대단한가? 어찌 이것이 실패란 말인가?

실패라는 단어는 쓰지 말자. 실패라는 말에 함몰되면 새로운 도전에 이르기까지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괴롭히게 된다. 실패는 내 경험이고 나의 일부다. 즉 나의 ‘자산’이다. 실패하든 성공하든 그 주체는 ‘나’다. 실패했다고 나를 괴롭히면 가뜩이나 모자란 에너지는 어디서 찾을 것인가?

사람은 누구나 이번 생이 처음이기에 미흡하고 서툴 수밖에 없다. 그런 서투름과 부족함이 쌓여 이 세상 누구도 이루지 못한 나만의 체험적 실패가 된다. 그 실패가 쌓이고 모여 다시 실패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성공이다.

그러니 성공이라는 말을 더 많이 써보자. 그러면 실패한 사람은 없게 된다. 실패라고 생각하는 그 경험만큼 성공한 사람만 있을 뿐이다.

‘8,800M까지 올라간 사람’

‘8,800M까지 밖에 못 올라간 사람’

조사 하나, 부사 하나만 바뀌어도 성공한 삶이 된다. 실패한 사람은 없다.

■ 돌다리는 두들기지 말자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

이 속담을 보면 두 가지가 생각난다. 돌다리도 두들겨 봐야 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 돌다리는 두들기다 보면 기회는 저 멀리 가버린다는 생각, 어느 것이 옳은지는 선택하기 어렵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라는 말은 매사에 조심하고 잘 생각하여 계획하라는 뜻이다. 반면 돌다리도 두들기지 말라는 말은 매사에 너무 걱정만 앞세우지 말라는 뜻이겠다.

나는 돌다리는 두들기지 말아보기를 권한다. 돌다리는 건너라고 만들어진 것이다. 튼튼하든 부실하든 물 위를 건너는 용도로 만들어졌다. 강을 건너

- 13 -

려면 무조건 돌다리를 밟아야 한다. 돌다리가 튼튼한지 안 튼튼한지, 이것 저것 걱정하다보면 건너지 못할 수도 있다. 건너야 할 이유가 뚜렷하다면 앞뒤 가릴 것 없이 건너야 한다.

위기라는 말은 ‘위험’과 ‘기회’라는 뜻이다. 위험이 곧 기회라는 것이다. 돌다리라는 위험을 두드리고만 있으면 기회는 빠르게 사라지고 만다. 후회하지 않으려면 기회가 닥쳤을 때 서슴지 말고 붙잡아야 한다. 닥쳐온 기회가 나에게 맞느니 맞지 않느니 하는 복잡한 생각은 하지 않길 바란다.

돌다리는 두들기지 말자.

정 두들기고 싶다면 일단 건너고 나서 한 번쯤 두들겨 보자.

■ 비몽사몽 세상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어렴풋한 의식 상태를 비몽사몽 이라고 한다. 흔하지는 않은 증상인데 잠에서 깰 때 이런 증상을 경험하는 경우가 있다. 보통 나이가 들면 이런 경험을 많이 한다. 지하철에서 노인들이 출구를 찾지 못해 당황해 하는 경우를 여러 번 목격했다. 젊은 사람은 곧 출구를 잘못 나왔다고 해도 곧바로 바른 출구로 나갈 수 있다. 그러나 노인들을 보면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나이가 들며 겪는 증상 가운데 하나이긴 하지만, 막상 내가 경험하고 보니 조금 당황스럽다.

손자와 함께 사무실에서 책 준비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아침을 먹은 후 출근할 준비를 하고 흔들의자에 앉아 잠시 TV를 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잠깐 졸았나 보다. 깨고 나니 말 그대로 ‘비몽사몽’이다. ‘몇 시나 된 걸까?’ 시계를 쳐다보니 3시 50분이다 당황스럽다. 일을 마치고 퇴근한 것이 5시 반이었는데, 시간이 3시 50분이라니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초조한 마음에 또 시계를 쳐다본다. 역시 또 3시 50분이다. 문득 ‘그럴 리가…’라는 한 가닥 의문이 떠올라 시계를 가까이서 쳐다보았다. 가까이서보니 10시 20분이다. 10시 20분을 분침과 시침을 거꾸로 보았기 때문에 생긴 해프닝이다.

이론상 노인들이 겪는 이런 상황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생각하면 해결할

- 14 -

수 있는 문제다. 다만 이들은 차분히 여유를 가지기가 어렵다. 나는 이런 경험을 집에서 했으니 차분히 정리할 수 있었지만, 아마 지하철의 환승역이었다면 매우 당황했을 것이다.

지금 청년들은 앞서 말한 원래의 뜻과는 다른 ‘비몽사몽’을 겪고 있는 듯하다. 내 손주 또래의 청년들을 보면 항상 정신이 없을 것 같다. 학교 공부도 힘든데 일자리도 없다.

그래도 내가 손주나 청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정신을 차리고 출구를 찾는다면 출구는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출구는 좌절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보이기 마련이다.

■ 성공하려면 천천히 가라

어떻게 가는 것이 성공에 이르는 지름길일까?

이 질문에는 두 가지 해답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차근차근히 해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이룬 산업화의 압축과정처럼 빨리빨리 서두르는 것이다.

질문에 대한나의 담은 “성공하려면 천천히 가라”이다. ‘빨리 빨리’가 산업화를 성공으로 이끈 방법이라고 듣고 자란 젊은 세대들에게 이런 주문은 와 닿지 않을 것이다.

산업화를 몸소 겪은 세대가 지금 세대를 보면 걱정하는 것이 있다. 압축 성장 뒤에 숨은 피나는 노력은 생각하지 않고, 결과만을 보면서 즐기려고 한다는 점이다.

절대 빈곤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은 우리 세대에서 끝났다. 그런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의 결과도 없었을 것이다. 성공에 이르는 과정은 우리가 처해있는 당시의 사회 상황이 어떠했는가에 따라 자연스럽게 결정되는 문제이다. 이제는 우리도 어느 정도의 여유는 생긴 사회이다. 차근한 여유를 가지면 좋은 점이 많다. 사회가 안정되고 부실이 적고 사회발전의 부작용도 적을 것이다.

그러니 천천히 가는 습관을 성공으로 가는 길로 삼았으면 좋겠다.

- 15 -

■ 스펙 VS 경험

요즘은 자격증 시대이다.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사회다 보니 자격증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나 보다.

선배 교수인 이화여대 김재은 교수가 주장한 자격증이 있다. ‘많은 자격증이 있는데, 왜 부모가 될 자격증은 없는가?’ 부모가 되려면 부모 역할을 확실히 해낼 수 있는 것을 증명하는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그때는 농담처럼 들렸는데, 지금은 그것조차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되니 정말 자격증 시대인가 보다.

취직을 하려면 번번이 면접에 떨어진 사람이 있다. 그런 그가 이번에 사회복지과에 합격하고 즐거운 목소리로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자리 하나 차지하기가 여간 어려운 시기가 아닌데 합격했다니, 축하하고 또 축하한다고 덕담을 주었다. 그런데 문득 ‘이번에는 어떻게 해서 그 심한 경쟁을 뚫고 합격하였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그에게 물어보았다.

면접관이 이런 질문을 했단다.

“선생님 이력을 보니 박사 학위도 받으셨고 스펙도 이렇게 좋은신데…. 경험이 전혀 없네요.”

질문을 받고 그는 화가 났단다. 떨어질 것도 분명하고 해서 기왕 화가 난 김에 할 말이나 해 보고 떨어지자는 생각에 이렇게 대답했단다.

“스펙 쌓느라고 시간도 오래 걸리고 노력도 많이 했는데 어디 써주는 곳이 없어서 기회가 없었어요. 누가 나를 채용해 주어야 경험이라도 쌓지 않겠습니까?”

떨어졌다고 생각하고 집에 와 있으니 합격했다고 연락이 왔단다. 그 면접관도 그 항의가 일리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스펙과 경험은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경험이 조금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경험은 자기가 자기에게 확신을 주는 자격증이 될 수 있다. 스펙은 아무리 쌓아도 스펙이다. 경험하기 위해서 스펙을 쌓는 것이지, 스펙 그 자체가 경험을 쌓게 할 수는 없다.

스펙은 단기간에 쌓을 수 있지만 경험은 단기간에 쌓을 수 없다.

스펙은 위장할 수 있지만, 경험은 절대로 위장할 수 없다.

- 16 -

■ 대기업에서 퇴사하고 싶어요

단순히 업무량이나 스트레스가 많아서 사표를 낸다면 다른 직장을 가도 똑같은 문제에 봉착할 것이다. 대기업이든 소기업이든 사표를 낼 때는 지금보다 더 발전할 수 있다거나, 자기 소신이 뚜렷하여 직장 이외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계획이 있어야 한다.

일에 비해 보상이 적거나,

자신이 지향하는 바와 회사가 지향하는 바가 다르거나

직장 외 다른 생활에 대한 신념이 확실할 때

그때 사표를 내면 좋을 것이다.

◎ 3부 관계와 소통

■ 눈치를 보면 내가 없어진다

사람이 살다보면 여러 고통스러운 일을 많이 겪는다. 물론 즐거운 일도 있겠지만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일들을 더 많이 경험하고 회상한다. 오죽하면 부처님은 “인생은 고(苦)다”라고 했을까….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있는 동물이 아니다. 가족으로부터 사회에 이르기 까지 집단생활을 하는 속성을 지닌 것이 인간이라고 보면 나의 주장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주장을 들어야 할 것도 많다. 자기의 주장만 고집하다보면 따르는 사람이 멀어져가고, 내 주장은 없이 다른 사람의 말에 이끌려 다니다 보면 나라는 존재는 없다 그래서 사는 것은 어렵다.

세계 보건기구에서도 개인의 건강 기준을 독립성에서 상호의존성이란 용어로 바꿨다.

결혼생활의 어려움과 불편함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나 같으면 이렇게 하겠는데, 배우자가 자기의 생각과 주장을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로 똑같은 주장이었지만 각각 이야기를 들어보면 모두 일리가 있다.

두 사람이 건강한 부부가 되려면 자기의 독립성이 중요한 만큼 타인의 독

- 17 -

립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점을 소통하고 조정하여 최적화된 공통점을 찾아 합의해 가야 한다.

내 주장을 하지 못하고 타인의 주장에 맞추어 살아간다면 스스로를 억압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고, 이런 습관이 지나치면 건강할 수 없다. 이런 분들을 정신과에서는 ‘신경증‘으로 진단하여 치료의 대상으로 삼는다. 지나치게 소심한 분들은 남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이러다 보면 나의 욕구보다 남의 욕구에 나를 맞추게 되는 데 이것이 뭉치면 화병이 된다. 다만 지나치게 자기 생각만을 고집하는 편견도 심리적 질환으로 발전될 수 있음 또한 알아야 한다. 건강한 사람은 누구나 주체를 자기로 삼는다.

내가 나의 주인이다. 이 주인이 다른 주인과 함께 살기 위해서 소통해 나가는 관계가 건강한 관계이다.

■ 경청하면 갈등 없는 소통을 할 수 있다

상담 교과서에 “내담자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 훌륭한 상담자다”라는 말이 있다. 수련의들에게 이 말을 설명하면 환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잠자코 한 시간 이상 듣고만 있는 수련의가 있다. 잘 들으라고 했으니 내담자가 하는 이야기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듣겠다는 자세다.

그러나 상담학에서 강조하는 경청이란 대담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전부 듣고만 있으라는 뜻이 아니고 환자가 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의 말 중 핵심적인 말이 무엇인지 집중해서 들으란 뜻이다.

앞서 말했듯 잘 들으라는 말을 곡해하면 상대방의 이야기를 무조건 다 들으라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훌륭한 경청은 그런 뜻이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대화하는 것을 보면 상대방에게 어떤 감정을 전달하려고 할 때 직설적으로 그 감정을 토로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서론적인 언어를 먼저하고 나중에 가서 핵심적인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듣는 사람이 서론적인 이야기를 다 듣고 단정적인 결론으로 그에 대한 해답을 준다면 그것은 정당한 대답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경청의 뜻은 그 핵심을 명확히 판단하라는 말인데…. 사실은 말이 쉽지 경청은 참 어려운 것이다.

- 18 -

대인관계에서 소통이 잘 안된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을 보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나 같으면 이렇게 할 텐데….”

다른 사람도 나와 같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내가 아니지 않은가? 또 다른 말도 있다.

“저 사람은 내 말을 하나도 듣지 않아요.”

들을 수 있는 말이 있고 들을 수 없는 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말을 안 들으면 무조건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소통이란 말을 주고받는 것이다. 서로 경청하면 갈등 없는 소통을 할 수 있다. 경청은 핵심을 잘 들으라는 뜻이다. 핵심을 잡지 못하면 소리만 들을 뿐 말을 듣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 바늘로 이마를 찌른다면

바늘로 이마를 찌르면 어떻게 될까?

“바늘로 이마를 찌르면 피가 나겠죠.”정답이다. 이마뿐 아니라, 혈관이 있는 곳을 찌르면 사람의 몸은 피가 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바늘로 이마를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있다. 도대체 어떤 점 때문에 사람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일까? 단순히 짐작해보면 선입견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빈틈없는 사람, 융통성이 없을 것 같은 사람, 원칙주의자일 것 같은 사람에게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

나는 일전에 바늘로 이마를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인상의 환자를 치료한 적이 있다. 그는 그 자신의 곁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따돌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고민을 나와 함께 풀어갔다. 그때 한창 유행하던 커피 광고가 있었는데 이런 대사가 있었다.

‘나도 알고 보면 부드러운 여자예요.’커피 한잔을 놓고 한 여성이 나와서 이런 말을 했던 짧은 광고였다. 나는 그것을 활용했다. 그분에게 ‘나도 알고 보면 엄청 부드러운 사람이야’라는 인상을 상대방에게 심어줄 방법을 생각해 보라고 했다. 상담 중에 내가 겪은 그는 정말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 19 -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입견 때문에 따돌림을 받았으니 고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대인관계가 굉장히 중요하다. 대인관계는 말이나 표정 등 여러 가지의 소통으로 이루어진다. 소통에서 가방 걸림돌이 되는 것은 선입견이다.

■ 빨간 오리새끼

어른들은 자기 경험을 토대로 아이를 바라본다.

아이가 어떤 상상을 하고, 어떤 말과 감정을 표현한다 해도

어른의 선입견대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선입견은 온전한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아주 끔찍한 방해물이다.

나와 함께 사회봉사를 오랫동안 했던 친지 한 분이 계신다. 이분의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을 때의 이야기다. 그는 아이가 입학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호출 받았다고 했다. 담임선생님은 아들이 그렸다는 그림 한 장을 보여주며, 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고했단다.

그림에는 어미 오리가 있고 그 오리를 쫓아가는 새끼 오리를 새빨갛게 칠한 것이 보였다. 선생님께선 이 오리 하나만 빨갛게 칠했던 것 때문에 상담을 권했다고 한다.

그분은 집에 와서 아들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잘 그렸네. 어미 오리 따라가는 새끼 오리가 여섯 마리네, 그런데 왜 이 오리 한 마리는 빨간 색이니?”

그분은 아들이 그렇게 그렸을 만한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들의 설명은 이랬다.

“이 빨간 오리는 한눈 팔다가 엄마와 형제를 놓치고 말았어요. 그래서 불안한 마음으로 엄마와 형제를 찾아 헤맸어요. 갈대밭 속을 이리저리 찾아 헤매는 동안 불안하고 공포에 질려 울기도 하고 몸부림도 쳤어요. 한참을 헤매다가 겨우 엄마와 형제 오리를 찾았어요. 혼자 있는 동안 얼마나 불안

- 20 -

하고 무섭고 열도 올랐겠어요? 그래서 이 오리는 아마도 빨갛게 변해있지 않을까 상상해서 빨간 오리 새끼를 그렸어요.”

소통을 원활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가 선입견이다. 선입견은 자신이 경험했을 한두 가지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모든 경우에 자신의 경험을 투영시키는 것이다. “왜 빨갛게 그렸니?”라고 쉽게 물어봤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질문을 하지 못하니 선입견대로 해석한 것이다.

■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내 고향은 대구이다. 대구 사투리는 무뚝뚝하고 남이 들으면 싸우는 것 같은 막말로 들리는 사투리들도 많다. 이런 사투리에는 내가 들으면 친근하게 들리지만 다른 지역 사람이 들으면 거북할 수 있는 말도 많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지금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대학 졸업 때까지 친한 사람을 만나면 반가운 인사를 이렇게 표현했다. 독자분들이 이해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때 나누었던 인사말을 그대로 옮겨본다.

“야~ 이 새끼, 아직도 안 디지고 살았구나! 이 문디이를 염라대왕이 눈이 멀었지 안 잡아가니….”

이 인사말이 당시에는 친한 친구 사이가 아니면 나누지 않는 일상화된 인사말이었다. 이 인사말이 내포한 뜻을 아직까지 안 죽고 살아있어서 너무 다행스럽고 반갑다는 뜻이다. 욕이 아닌 것이다. 이런 인사를 들으면 서로 굉장히 친근감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었지만, 이는 막말이기도 하고 세련되지 못한 말이다. 지금은 이런 인사말이 없어졌으니 다행이다.

요즘 정치가들이나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서로 상대방을 비방하며 막말을 거침없이 쏟고 있는 것을 보면 참 안타깝다. 오래전 영국 대처 수상이 한국을 방문해 국회에서 연설한 적이 있다. 그때 그녀가 한 말 가운데 이 한마디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국회의원이 서로 의견이 달라 토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토론할 때 쓰는 용어를 품위 있게 사용해야 합니다. 정치인이 막말을 한다는 것은 이미 토론에서 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 21 -

말이란 사람의 품격을 나타내는 것인데 막말을 왜 그렇게 많이 하는지 모르겠다. 막말하는 순간은 감정적으로 조금 시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스스로 자기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말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고운 말을 쓸 필요가 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가는 말이 막말이라면 되돌아오는 말은 두 배나 더 강한 막말로 되돌아온다. 그러니 막말이 없는 사회를 만들자면 나부터 막말을 삼가야 한다.

■ 말실수

사람은 소통하기 위해 말을 한다. 말이 소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잘 소통할 수 있는 말을 선택하여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소통하다 보면 단어 하나 잘못 선택하여 오해가 생기기도 하고, 이 오해가 앙금으로 남아 평생 소통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말실수라고 하는 것은 해서는 안 될 말을 자기도 모르게 불쑥 내뱉게 되는 것이다. 이를 의식하고 자제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무의식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말을 하고 나서야 이것이 실수라는 것을 깨닫는다.

내 친구 이야기를 하나 하자. 이 친구 부부는 신혼 초부터 별 것 아닌 주제로 사랑싸움을 자주 했다. 다투는 것을 재미삼아 하는 부부인데, 하루는 부인이 심각한 얼굴로 나를 찾아와 이렇게 하소연했다.

“이 박사님, 이제부터 내 남편을 친구로 사귀지 마세요.”

왜 그런 얘기를 하는지 물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나를 나무라는 것은 참겠는데 내 부모까지 욕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어요.”

자기가 다투던 남편이 대뜸 “어이구 장모님도 000(친구 부인) 낳았다고 미역국 자셨겠지”라고 했단다. 싸우면서 나를 폄하하는 것은 참겠으나 내 부모까지 욕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단다.

상대방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주의를 조금만 더 기울인다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상대방이 평소에 어떤 상황이나 단어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있다면.

- 22 -

그것이 바로 상대방에게 가장 가슴 아픈 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의도가 선의였든 유머였든 상대방에게 앙심이 생긴다면 그 실수는 너무도 큰 것이다. 말을 가릴 줄 알아야 좋은 소통을 이룰 수 있다.

■ 막말

한번은 또래 친구 셋이 모여 점심을 먹고 조용한 카페에서 몇 시간을 노닥거리다 헤어졌다. 남자들이 모여서 서로 충돌 없이 대화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주제는 군대 이야기이다.

나도 한 가지를 이야기 했다. 이미 50년도 지난 이야기다. 군의관으로 입대한지 2년차였던 나는 의정부에 있는 한 후송병원에서 진료부장을 맡고 있었다. 우리 병원의 전방에 있는 병원은 이동 외과병원이었는데, 그 병원의 원장은 내 의과대학 동기생이었다. 하루는 그가 총상환자를 수술하던 중 피가 모자란다며 피를 두 병 빌려달라고 했다 나는 차용증을 받고 피 두 병을 빌려주었는데, 그 병원에서 수술을 마무리하기 어려워 환자를 우리 병원으로 후송했다. 우리 외과팀은 노력 끝에 환자의 생명을 건지고 수술도 깨끗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 일이 있은 지 며칠 안 되어 병원에 정기 감사가 왔다. 그런데 이 감사에서 내가 피 두 병을 빌려준 것이 문제가 된다고 이를 해명하라고 했다. 나는 사실대로 이야기 했다. 이 같은 주장에도 불구하고 감사관은 나를 수사관에 나를 고발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본 내 친구가 나에게 많이 미안했었나 보다 그는 당시 1군 사령부의 헌병 참모를 찾아가 내 선처를 구했다. 그 덕분으로 나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이후 그 친구와 함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 위해 헌병 참모를 찾아갔다. 그는 나를 보자 대뜸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피 팔아먹은 친구야?”

이 무슨 황당한 상황인가? 사건은 이미 해결되었기에 다시 미주알 고주알 나의 셈법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50년도 지났는데 이 생각이 왜 지금에 와서 떠올랐을까?

당시 나는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 달라는 것까지 바라지는

- 23 -

않았다. 그러나 ‘팔아먹다’니…. 그는 어떻게 이런 표현으로 내게 막말을 할 수 있었을까? 막말했던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다.

 

그러니 우리 막말은 하지 말자. 고운 말을 두고 왜 막말을 하는가. 막말은 비수가 되어 상대방의 가슴에 꽂힌다. 그리고 부메랑이 되어 언젠가 내 가슴에도 꽂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내탓이로다

시어머니 말을 들으면 시어머니 말이 옳고, 며느리 말을 들으면 며느리 말이 옳다는 옛말이 있다. 이처럼 쌍방의 말을 들어보지 않고 진위를 아는 것은 어렵다. 어느 한쪽이 전적으로 옳고 다른 쪽이 전적을 틀렸다는 논리는 성립하기 어렵다. 절대의 악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손해를 보거나 실패를 하면 누구나 그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이때 “내 탓이로다”라는 말의 뜻을 원용해보자. 실패의 원인에는 물론 내 탓도 있고 다른 사람의 탓도 있겠으나, 먼저 내 탓부터 해보자는 뜻이다. 반성하는 순서를 나부터 시작해보자. 내가 실수한 것이 없는가를 먼저 생각해보고, 그 후에 타인의 탓으로 돌려도 늦지 않기 때문이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전체가 흐려진다. 처음부터 문제를 다른 사람의 탓으로 규정하면 상황을 올바르게 인식하기 어렵다. 그리고 후에 자신의 탓이라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이러한 사실에 직면하지 않으려는 습관이 생긴다.

내 탓이 지나치면 우울증에 걸리고, 남 탓이 지나치면 정신병적 망상이 생긴다. 내 탓과 남 탓이라는 선택 중 어느 것이 먼저 택하는 것이 나을까?

나는 “내탓이로다”를 먼저 생각해보기를 권한다.

그래도 내 탓을 먼저 하는 게 나을 것이기에….

■ 모든 관계에는 예절이 필요하지만…

예절은 소통과정에서 상대방에게 걸맞은 예우를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나만의 기준이기 때문에 예절이 무엇인가 하는 기준과는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 24 -

예절은 나라마다 다르다. 심지어 가족 문화에 따라서도 다른 예절을 가지고 있으니, 예절은 소통에 도움도 되지만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재벌 회사의 사장을 지낸 친구 하나가 상의할 것이 있다고 찾아온 적이 있다. 자기 부서에 채용된 외국인이 한 명 있는데,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사도 조금 공손히 하면 될 것을 한 손을 번쩍 들며 “Hi”하고 지나간다고 했다.

나는 친구에게 그 외국인 직원이 일을 잘하는지를 물었다. 친구 말로는 그가 능력이 많고 시키는 일도 똑 부러지게 한단다. 그래서 나는 예법보다 그 직원의 능력을 사는 것이 회사에 더 큰 이익이 될 것이라고 상담해 주었다. 손을 들고 인사하는 것이 그 나라에서는 일상적인 예법이다. 우리와 다를 뿐, 우릴 무시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예절은 나 혼자만 지킨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예절을 지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공경 일변도로 가라는 말이 아니고, 그 친구에게 걸맞은 수준에서 인정하고 존중하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예절은 차리는 사람의 품격과도 관계있지만, 예우를 받는 사람도 받을 만한 소양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조화될 때 진정한 소통이 이뤄질 것이다.

 

■ 어른을 대하는 게 어렵다면

우습지만 내 이야기 하나를 고백해본다. 수도육군병원 정신과에 근무 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원장실에서 호출이 왔다. 가보니 원장실에 별 두 개 장군이 있었다. 원장님께서 그분이 수면장애가 있으니 나보고 잘 치료해달라는 당부를 하셨다. 나의 당시 계급은 대위였는데, 그분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따라오세요.”

그분은 아무 말 없이 내 뒤를 따라왔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기 전 복도를 걸으며 갑자기 내가 한 말이 부적절했다고 느꼈다. 장군보다 한참이나 낮은 계급인 내가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따라오세요”라고 했으니…. 갑자

- 25 -

기 예절에 어긋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군대에서 엄청난 어른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을 때는 긴장되지 않았는데, 그것이 인식되는 순간 이 상황이 굉장히 긴장된 것이다.

지나친 예의와 긴장은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스스로의 의사를 누구에게나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습관이 필요하다.

■ 격식은 때에 따라, 형편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격식을 우선으로 차려야 할 일도 있고, 격식은 무시하더라도 좋아하는 것을 찾을 수 있는 일도 있다. 때에 따라 형편에 따라 선택하면 될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내가 좋아하는 식당에서 먹을 수 있게 해주었다면 그는 나에게 최고의 대접을 한 것이다.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과 격식을 따지고 밥을 먹자면 어떤 고급 식당에 가더라도 밥맛이 좋을 수가 없다.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는 어디서 어떤 음식을 먹어도 최고다.

■ 아는 체하면 망신당한다

요즘은 깊이 아는 전문가보다 얕고 넓게 아는 사람이 더 전문가처럼 보인다. 나는 어떤 말을 할 때 꼭 누구한테 들었는데, 아니면 어디서 읽었는데 등의 단서를 다는 버릇이 생겼다. 출처를 밝히지 않고 아는 체하다 보면 망신을 당하는 수밖에 없다.

◎ 4부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것

■ 생각이 많으면 고통스럽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다”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생각해 보면 뇌를 가진 동물이라면 사람정도는 아니더라도 제 나름대로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 26 -

생각이란 참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도 정당해야지 너무 많아도, 너무 없어도 탈이다. 내가 접해본 환자 중 생각이 너무 많아서 탈이난 사람들이 꽤 많았다. 생각이 많으면 복잡하기도 하겠지만, 서로 다른 생각들이 얽히고설켜 모순된 생각 속에 파묻히게 되기도 한다. 마치 흐트러진 실타래처럼 어디가 처음이고 끝인지도 모르게 되는데, 이런 사람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가장 흔하게 발생하는 병적인 생각이 망상이다. 망상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굳게 믿고, 행동으로 반응하는 수준의 복잡한 생각을 말한다. 망상 중 임상적으로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피해망상이다. 이는 막연하게 타인이나 주변으로부터 위해를 받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반대로 자기가 이 세상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과대망상도 있다. 내가 만난 과대망상 환자들 가운데는 예수님이나 부처님을 자처하는 환자도 있었다.

세상의 이치는 단순한데 사람들은 그 단순한 것을 이리 얽고 저리 얽으며 스스로 복잡하게 만든다.

■ 부당한 일을 당하면 괴롭다

요즘은 권력이 있거나 돈이 많은 사람이 약자에게 고통을 주는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를 일컬어 사회적으로는 ‘갑질을 한다’고 표현한다. 예전에도 이런 갑질은 있었겠지만 지금처럼 갑질에 저항하는 모습은 많이 보지 못했다.

 

옛 속담에 ‘억울하면 출세를 하라’, ‘참을 인(忍)자 석자면 살인도 면한다’라는 말이 있다. 앞은 억울함을 당하면 힘을 키워 스스로 벗어나라는 뜻이고 뒤는 참고 또 참으면 분노를 참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리석은 말이다.

갑질은 누구나 겪을 수 있지만 억울함을 푸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요즘 갑질을 당하는 사람들의 대응 방법을 보면 두 가지 유형이 있는 듯하다. 하나는 주관적인 감정으로 갑질에 대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논리적으로 다투어 저항하는 방법이다. 감정적으로 흥분하면 순간의 억울함에서 벗어날

- 27 -

수는 있어도 결과적으로 해결되는 일은 없다. 또한, 감정적인 대처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려울뿐더러 남은 감정은 한으로 맺혀 증폭될 것이다.

갑질로부터 온전하게 벗어나려면 감정적인 대응보다는 논리적인 대처가 훨씬 유효하다.

■ 실수가 본심이다

우리가 하고 싶지 않은 말이나 행동을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면 그게 바로 실수다. 실수 중에는 말실수가 참 많다. 말은 사람이 소통하는 가장 간편한 수단이기 때문에 자연히 말이 많게 되고, 말이 많다 보면 하지 말아야 할 말도 불쑥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실수라고 하는 것은 깊이 파고 들면 실수를 가장한 본심이거나 진담인 경우가 많다. 실수 없이 산다거나 대인관계에서 실수 없이 소통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실수는 누구나 다 하는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 실수의 의미를 혼자서 한 번 생각해 본다면 자신의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다. 실수를 변명하려고 하다보면 더 많은 실수를 하게 된다.하나의 실수를 변명하기 위하여 또 얼마나 많은 실수를 저질러야 한다는 말인가?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이 맞다. 내가 한 말도 내 말이고, 내가 실수한 것도 내 실수다. 실수가 오히려 감추려고 했던 내 본심이다.

■ 선입견이 있으면 바로 보일 것도 보이지 않는다

선입견이란 어떤 대상에 대해서 이미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고정적인 관념이나 관점을 말한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은 다를 수 있으나 일반화되어 모든 사람이 믿고 있는 선입견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이야기지만, 나는 어릴 때 들었던 일반화된 선입견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키 큰 사람치고 싱겁지 않은 사람 없다.’, ‘안경 쓴 사람은 재수가 없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사람이다’등 생각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자라면서 이런 일반화된 선입견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믿지 않았지만, 막상 이런 사람을 만나면 무

- 28 -

의식 중에 제일 먼저 이런 말들이 떠오른다.

선입견이 있으면 바로 보일 것도 보이지 않는다.

■ 결혼은 필수일까요?

나는 내년이며 결혼 60주년을 맞이한다. 참 오래도록 살았다. 옛말에 결혼을 해도 바보고 안하는 사람은 더 바보라고 했다. 하든 안 하든 바보라는 이야기인데, 기왕이면 해보고 바보가 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나는 ‘인구 미래학’이라는 과목에서 결혼과 성에 관한 강의를 할 때 이 말을 했다. 같은 시간에 내가 한 말이니 두 말하지는 않았을 텐데 듣는 학생의 질문은 두 가지이다.

“선생님은 왜 우리보고 결혼하라고 강요 하시나요?”

나는 강요한 적이 없다. 내가 한 말은 한가지인데 듣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결혼을 하라는 뜻으로 듣기도 하고 하지 말라는 뜻으로 듣기도 한다. 이는 오로지 그 강의를 듣고 소화하는 수강생들의 마음이 반영된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왜 결혼을 마다하는 걸까? 손자, 손녀와 이야기 하다 보면 그들이 주장하는 이유 몇 가지가 있다. 우선은 경제력이다. 혼자 살기도 힘든데 배우자와 자식까지 부양해야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혼자가 자유롭다는 것이다. 결혼에 묶여 자유를 잃기 싫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가족이라는 집단에 적응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며 자녀를 낳고, 손자 손녀가 커가는 모습을 보며 그들이 생각하는 결혼과 내가 생각하는 결혼의 괴리가 아주 크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겪은 과거의 가치가 꼭 옳다고만 내 세울 자신이 없다. 세월이 흐르면 사회관습도 변한다. 요즘 세상은 어떤 결혼관이 옳고 틀린지를 이야기하는 자체가 너무 진부해졌다.

그래도 한마디 남기자면 “결혼은 필수가 아니고 선택이다”라는 말이 옳다는 것이다. 마음 가는 대로 선택하고, 그 선택의 결과를 자신이 책임질 수 있다면, 어떤 선택도 가치 있는 일이다.

■ 같이 살면 되지요

- 29 -

동거가 좋으냐, 나쁘냐 하는 윤리적 판단은 의미 없는 기준이다.

삶이나 결혼의 형태는 필요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지,

과거처럼 규격화된 틀 속에 콕 집어넣어서 생각한 문제는 아니다.

다만 서로 자유롭게 살더라도 서로 약속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충실히 이행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도 확실히 알았으면 한다.

학교에 재직했던 이유로 제자들의 주례를 많이 섰다. 결혼이란 넓은 의미에서 서로의 평생을 함께 하자는 계약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계약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서로 다섯 가지씩 자발적으로 제안하게 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결혼서약을 시켰다. 그리고 결혼 후에도 사회는 진화할 테니 이 서약을 그때 사회 환경에 맞도록 수정하고 다시 서약하면서 새롭게 결혼하기를 새롭게 결혼하기를 권했다.

결혼이란 서로가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는 만큼, 계약을 충실하게 이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세대는 이런 제약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듯하다. 그러니 결혼이라는 제도적 속박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나 보다.

동거가 좋으냐, 나쁘냐 하는 윤리적 판단은 의미 없는 기준이다. 삶이나 결혼의 형태는 필요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지, 과거처럼 규격화된 틀 속에 콕 집어넣어서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다만 서로 자유롭게 살더라도 서로 약속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충실히 이행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도 확실히 알았으면 한다. 이 또한 속박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유로움이 아니다.

■ 인싸와 아싸

인싸와 아싸는 성향 차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집단을 가도 자기 주도적이며 밀집된 형태를 지향하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비교적 수동적이고 개별적인 형태를 지향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서로 추구하는 방향이 다를 뿐이다. 이 둘은 공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구분만 짓는 것 같아 안타깝다. 소위 ‘인싸’는 모든 것에 중심이 되는 빛나는 사람, ‘아싸’는 상대적으로 잘 어울리지 못하고 업무 능력도 낮은 사람으로 취급된다.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 30 -

인싸는 자기 설계대로 일이 흘러가야 하는 마음 때문에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주도적인 습관으로 인해 적응력이 빠르니 능력 또한 높다고 평가된다. 아싸는 그 일에 대해 자기 의견보다 대세를 따르려는 ‘배려’와 자신만의 길을 가는 ‘확고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자기 생각이 확고하더라도 그것을 강요하지 않고 밀고 나가는 ‘우직함’도 있다.

열심히 정진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이 모든 것은 단순한 성향 차이일 뿐, 서로의 장단점이 뚜렷하다.

자신이 ‘아싸’라고 생각되어 ‘인싸’를 부러워하고 자신을 타박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스스로 자신을 타박하지 말자.

■ 학벌이 사라지는 시대가 온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여러 상황이 급변했다. 그중 하나가 ‘영상교육’이다. 일찍이 사이버 대학이라는 영상 강의만 하는 대학이 생겼다.

“앞으로 오프라인 대학은 사라질 것이다. 명문대도 명문대가 아닌 학교도 모두 사라지고 남는 것은 오직 사이버 대학일 것이다.”

그리고 그중 가장 큰 변화는 이런 영상이나 인공적 능력 같은 분야의 발전이 아닐까 싶다. 그런 시대를 맞이하면 대학이 꼭 교수를 가질 필요가 없다. 교실도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런 시기에 과연 명문대나 명문대가 아닌 대학이 따로 있겠는가? 결국 ‘학벌’이 아니라 능력과 맞는 ‘학과’가 중요한 시기가 도래할 것으로 생각한다.

코로나가 주는 사회 변혁의 영향은 이미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학벌이 사라지는 시대도 곧 올 것이다.

■ 아무거나

옛날에는 식당에서 성질 급한 한 사람이 무엇을 먹겠다고 하면, 나머지 사람은 너도나도 같은 음식을 주문하곤 했다. 한 마디로 자기주장이 없었다.

요즘엔 여럿이 식당을 가더라도 자기가 먹고 싶은 음식을 따로 주문하고 계산도 각자 한다. 처음에는 이런 광경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방식이 참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 31 -

손주나 또래의 청년들과 함께 식사하면 무엇을 먹을 건지 스스로 선택하고 주문한다. 그래서 별로 걱정할 것이 없다. 그런데 내 나이 또래의 친구나 후배들과 식사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냥 각자 무얼 먹을지 결정해서 주문하면 될 텐데, 꼭 “너는 뭘 먹을래?”라고 하며 굳이 다른 사람이 무얼 먹을지 묻는다. 그렇게 묻고도 결정하지 못해서 빨리 메뉴를 정하라고 하면 “아무거나”라고 답한다. 아무거나 주문한 사람은 음식이 마음에 안 들면 남의 탓을 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가 결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혼자 별나게 다른 음식을 주문하면 눈총을 받던 시기가 있었다. 요즘 청연들의 문화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나이든 우리가 배워야 할 좋은 문화이자 습관이다.

■ 범사에 감사하라고?

살다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부딪히는 일이 많다. 생각이 다를 수도 있고, 서로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 다툴 수도 있다. 대부분 사람은 서로 고마운 감정보다 섭섭한 감정을 더 오랫동안 잊지 않고 간직하는 경우가 많다.

젊었을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할까? 범사라면 모든 일인데, 모든 일에 감사하라니…. 물론 감사해야 할 일도 있겠지만, 감사하지 못할 일도 있을 텐데….’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은 성경에 나온 말이지만.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일반화하여 덕담으로 주고 받는다.

나이가 들면서 이 말이 조금씩 가슴에 와 닿았다. 지금은 확실히 이 말의 뜻을 가슴으로 새겨 범사에 감사하고 있지만, 나이가 지금보다 조금 어렸을 때는 ‘범사’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 모든 일인가

나이라는 것이 그냥 먹는 것은 아닌가보다. 나이가 들수록 나에게 해를 준 친구의 일조차 감사함으로 둔갑하다니…. 참 신기한 일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면 젊었을 때 미처 생각지 못했던 모든 것이 감사하게 느껴진다. 이제는 잠을 자고 나서 아침에 깨어나는 일도, 깨어나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소일거리가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 되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감사함이 느껴지는 것 또한 감사한 일이다. 늦었지만 지금 이 나이에 범사라는 의미를 알아차렸다는 것만 해도 감사하다.

- 32 -

지금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시간이 걸려도 깨닫기만 하면 된다. 감사함을 모르고 일생을 마치는 사람도 많을 것이기에….

■ 느림의 미학

1982년 히말라야 마칼루봉을 등정하기 위해 네팔 땅을 밟았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크게 두 가지를 보고 놀랐다. 하나는 처음 보는 이질적인 문화였고 다른 하나는 네팔 사람들의 느릿한 행동이었다. 몇 개월 동안 네팔에 있으며 이 두 가지를 더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서두르는 법이 없고 조용했다. 카트만두 시내에도 차가 별로 없어 많은 사람들이 느긋하게 걸어 다녔고 상점 간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Open : Sunrise, Close : Sunset’

(해가 뜨면 열고 해가 지면 문을 닫는다.)

해가 지고나면 카트만두는 어둡고 적막했다. 우리는 무엇이든 빨리 하려는 습관이 몸이 배어있는데, 그런 습관으로 본 네팔 사람들은 퍽 게으르다는 인상이었다.

우리는 급하게 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그래서 삶의 여유를 즐기는 휴식에서조차 급함에 쫓기곤 한다.

여유는 시야를 넓혀주고 더 많은 행복과 즐거움을 안겨 줄 수 있다.

이제는 느림의 미학을 느끼는 삶을 지향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2021. 1. 3 - 끝 -

- 33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