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보해성산 2021. 3. 23.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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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 박완서 에세이

- 죽을 때까지 현역 작가로 남는다면 행복할 것 -

0 1931년 경기도 개풍 출생

0 소학교 입학 전 서울로,

0 숙명여고를 거쳐 서울대 국문학과에 입학, 6·25로 학업 중단

0 1953년 결혼 1남 4녀

0 1970년 여성동아에 ‘나목’ 당선, 불혹의 나이에 문단 데뷔

0 2011년 담낭암으로 타계

0 80여 편의 단편과 15편의 장편 소설 외. 동화, 산문집, 콩트 등 다수

0 한국문학 작가상, 이상 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이산 문학상, 대산문학상

만해 문학상, 인촌 상, 황순원 문학상, 호암상 등

0 2006 서울대 명예문학박사 학위

- ‘소박하고 진실하고 단순해서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한 작가 -

그의 글이 가리키는 방향은 희망과 사랑이었다. 그의 글은 삶을 정면으로 직시하여 아픔과 모순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기어코 따뜻한 인간성을 지켜내고야 만다. 오직 진실로 켜켜이 쌓아올린 그의 작품 세계는, 치열하게 인간적이었던, 그래서 그리운 박완서의 삶을 대변하고 있다.

■ 프롤로그 : 따뜻한 사랑의 입김으로

어머니의 글은 분명 여러 번 읽었을 터인데도 볼 때마다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중학교 정도의 학력이라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쉬운 글이라고 했지만, 저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친숙함보다는 긴장감이 느껴지면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습니다.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내면이 찔리는 것 같아 불편한 적도 있었습니다. 1970부터 2010년까지 생전에 쓰신 660여 편의 에세이 중이서 추린 글들을 다시 살펴보면서 글쓴이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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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에게 사랑의 입김을 불어 넣어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얼마나 간절하게 바랐는지 젊은이들이 밝고 자유롭게 미래를 펼쳐가기를 얼마나 기원했는지, 하찮은 것에서 길어 올린 빛나는 진실을 알려주려고 얼마나 고심했는지, 생의 기쁨과 아름다움에 얼마나 절절하게 마음이 벅찼는지.

그러면서도, 자신에게는 얼마나 정직하고 엄격했던지 그 담금질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죽고 싶었던 두려운 마음을 고백하며 쓴 글에서 “오늘 살 줄만 알고 내일 죽을 줄 모르는 인간의 한계성이야말로 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라는 대범한 목소리에 기운을 차립니다.

- 늦은 가을 아치울에서, 호원숙 ( 박완서의 맏딸)

◎ part 1. 마음이 낸 길

■ 친절한 사람과의 소통

지난겨울은 추위도 유별났지만 큰 눈은 또 얼마나 자주 왔는지. 나는 도시보다 기온이 3~4도는 낮은 산골 마을에 살기 때문에 거의 한 달을 집에서 꼼짝 못하고 갇혀 지내다시피 했다. 나는 눈 공포증이 있다. 어머니가 눈길에서 가볍게 넘어지신 줄 알았는데 엉치뼈가 크게 부서지는 중상이어서 말년의 5~6년을 집 안에만 계시다가 돌아가신 후부터이다.

눈을 핑계로 외출을 삼가게 되니 책볼 시간도 많아지고 밀린 원고 빚도 대강 갚을 수 있게 되어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지만 산에 못 가게 된 것은 여간 아쉽지가 않았다.

이 골짜기로 이사를 온 것은 순전히 산 때문이었다. 아차산은 등산을 즐기는 사람들이 도전하고 싶을 만큼 높지도 험하지도 않고 웅장한 명산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지만 아마 그 산세가 내 나이에 버겁지 않아보였기 때문일 터였다. 다음으로는 사람들한테 시달린 흔적 없이 청정해 보이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우리 마을에서 오르는 길도 너덧 갈래가 되지만 내가 개발한 길은 1년 내내 아무하고도 안 마주칠 정도로 사람들이 안 다니는 길이다. 딴 길은 가다보면 약수터도 나오고 배드민턴장이나 암자도 나오는데 내가 다니는 길은 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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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그냥 산길이다. 그 대신 하루도 같은 날이 없는 나무와 풀들, 새들과 다람쥐들을 눈여겨보게 된다. 사람들이 안 다니는 길은 꽃나무들이 온전하고 온갖 새들이 거침없이 지저귄다. 혼자 걷는 것이 좋은 것은 걷는 기쁨을 내 다리하고 오붓하게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가슴이 두근거릴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러나 산이 나를 받아주지 않으면 이런 복을 어찌 누릴까. 눈 온 산이 아니더라도 산에는 평지와 다른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이 노구를 받아주소서, 산에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도 울렁거림과 함께 차분한 경건을 맛볼 수 있는 기회이다.

그러고 보니 그 산책길은 나 혼자만의 길이 아니었고, 내가 낸 길도 아니었다. 본디부터 있던 오솔길이었으니 누군가가 낸 길이고 현재도 다니고 있어서 그 길이 막히지 않고 온전한 것이다.

길은 사람의 다리가 낸 길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마음이 낸 길이기도 하다. 누군가 아주 친절한 사람들과 이 길을 공유하고 있고 소통하고 있다는 믿음 때문에 내가 그 길에서 느끼는 고독은 처절하지 않고 감미롭다.

■ 유쾌한 오해

전동차 속에서였다. 아직도 한낮엔 무더위가 많이 남아 있었지만 3호선 전동차 안은 쾌적할 만큼 서늘했고 승객도 과히 붐비지가 않았다. 기술의 발달 때문인지, 경제 성장 때문인지는 몰라도 1호선보다는 2호선이 더 쾌적하고 2호선 보다는 3,4호선이 더 쾌적한 걸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늘 2호선을 이용하기 때문에 약간은 샘도 났다.

내 옆 자리가 비자 그 앞에 서 있던 청년을 밀치고 뚱뚱한 중년 남자가 잽싸게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넉넉하던 자리가 꽉 차면서 내 치맛자락이 그 밑에 깔렸다. 약간 멋을 부리고 나간 날이라 나도 눈살을 찌푸리면서 치맛자락을 끌어내려고 했지만 그는 꼼짝도 안 했다. 여간 무신경한 남자가 아니었다. 나는 별 수 없이 그 남자를 툭툭 치면서 내 치맛자락이 그의 엉덩이 밑에 깔린 걸 일러주었다. 그제야 몸을 조금 들썩했을 뿐 미안하단 말 한마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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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큰 소리로 하품을 했다. 하품을 하려면 그냥 할 것이지, 호랑이가 우짖는 것처럼 ‘어흥!’하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가락까지 붙이니까 졸던 사람까지 깜짝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남이야 그러건 말건 그는 자기집 안방에서처럼 거침도 없고 눈치도 없었다.

나는 그런 남자 옆에 앉아 있다는 불쾌감을 잊으려고 방금 탄 젊은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피부가 맑은 수수한 여자였는데 아주 화려한 모자를 들고 있었다.

그때였다. 내 옆에 앉았던 그 무신경한 남자가 엉거주춤 일어나면서 모자를 든 여자에게 손짓을 했다. 그 여자에게 자리를 내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 남자도 그 여자가 보기 좋았던 듯했지만 그렇게 노골적으로 여자에게 아부를 하다니. 오십도 넘어 보이는 남자가 20대의 젊은 여자에게 자리를 내주는 모습은 암만해도 부자연스러워 보였고 흑심까지 있어 보이는데도 남자는 그 방면에도 여전히 무신경했다.

마땅히 사양할 줄 알았는데 그 여자는 고개만 까딱하고 얼른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나는 그 여자가 만삭의 몸임을 알았다. 나는 화려한 모자에만 정신이 팔려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라 그 여자에겐 세 살쯤 되어 보이는 깜찍한 딸도 딸려 있었다.

더 즐거운 건 내가 여지껏 그 뚱뚱한 남자를 공연히 미워하고 오해한 게 풀려서였다. 그 남자가 뻔뻔하고 무신경하다는 건 순전히 나의 오해였다. 다시 한 번 쳐다본 그 남자는 듬직하고도 근사해보였고 매우 만족스러운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 한 몸이 자리를 내줌으로써 세 식구를 앉힐 수 있었으니 흐뭇할 수밖에.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나보다는 착해 보이는 날이 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고, 그런 말은 살맛이 난다.

■ 수많은 믿음의 교감

집집마다 친척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일은 점점 줄어드는 대신 각자가 마음에 맞는 친구들하고 만나는 날은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거북하고 의례적인 상하관계보다는 편하고 대등한 인간관계를 즐기고 싶은 건 당연한지도 모르지만 차츰 나이를 먹으니 사라져 가는 게 아쉬울 때도 없지 않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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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초에 친정어머니께 세배 드리러 갔다가 참으로 오래간만에 대소가가 함께한 자리에 끼게 됐다. 그러나 세배가 끝나자 역시 젊은이는 젊은이들끼리 큰 아이들은 큰 아이들끼리 어린이는 어린이들 끼리 패가 갈라져 잡담도 하고, 화투놀이도 하고, 텔레비전도 보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화투놀이 패가 가장 시끌시끌하고 활기에 넘치더니 차츰 잡담 패거리가 그 활기를 앞질러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무슨 얘기가 그렇게 재미있을까 싶어 슬그머니 끼어 들어봤더니 맨 봉변당한 얘기였다.

거액을 사기당한 얘기로부터 버스 칸에서 가방을 받아준 고마운 아줌마에 의해 만년필을 소매치기 당한 얘기까지, 도시 고위층의 공약에 속은 얘기로부터 100원짜리 상품의 용량에 속고, 바겐세일의 반값에 속은 얘기까지 두루두루 속은 얘기들로 경합을 벌이다보니 언성이 높아지고 분위기는 활기를 띠었다.

이때 언제부턴지 우리 이야기판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던 팔십 노모께서 혼잣말처럼 한마디 하셨다.

“난 원 복도 많지. 아 나이에 그런 못된 사람들을 별로 못 겪어봤으니…….”

그런 말씀을 하실 때의 어머니가 기를 쓰고 악담을 하는 우리보다 훨씬 곱고 깨끗하고 행복해 보이시는 걸 나는 놓칠 수 없었다. 그리고 뒤늦게 슬그머니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내가 어머니로부터 그런 무안을 당하긴 그게 처음이 아니었다.

 

요새는 근력이 안 좋으셔서 못 다니시지만 재작년까지만 해도 절에 열심히 다니셔서 나도 가끔 모시고 가 봤었는데 그때마다 절의 속악한 분위기라든가 스님과 신도들과의 상업적인 관계 등에 대해 나는 꽤 악랄한 비평을 했었다. 어머니는 이런 나를 이렇게 나무라셨다.

“원 뭐 눈엔 X 밖에 안 뵌다더니……, 넌 어째 그런 것밖에 못 보냐? 난 부처님 한 분 우러르기에 그저 감지덕지 하느라 그런 건 눈 귀에도 안 들어오더니만…….”

보는 눈에 따라 이렇게 한 가지 사물, 동일한 현상도 정반대로 보이는 수는 부지기수다.

믿었다가 속은 것도 배신당한 것에 해당하겠지만 못 믿었던 것이 실은 믿을 만한 거였다는 것 역시 배신당한 것일 수밖에 없고 배신의 확률은 후자의 경우가 훨씬 높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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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머니가 팔십 평생을 회고하며 자신 있게 못된 사람 만난일 없다고 술회할 수 있듯이 세상엔 믿을 만한 게 훨씬 더 많다. 우리가 믿음에 대해 쉬 잊고 배신을 오래 기억하며 타인에게 풍기지 못해하는 것도 우리의 평범한 일상의 바탕이 결코 불신이 아니라 믿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아직은 악보다는 선을 믿고 우리를 싣고 가는 역사의 흐름이 결국은 옳은 방향으로 흐를 것을 믿을 수 있는 것도 이 세상 악을 한꺼번에 처치할 것 같은 소리 높은 목청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소리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선, 무의식적인 믿음의 교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올 겨울도 많이 추웠지만 가끔 따스했고, 자주 우울했지만 어쩌다 행복하기도 했다. 올겨울의 희망도 뭐니뭐니 해도 역시 봄이고, 봄을 믿을 수 있는 건 여기저기서 달콤하게 속삭이는 봄에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 하늘의 섭리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 사십대의 비오는 날

<앉은뱅이 거지>

비가 오는 날이었다. 청계천 5가 그 악머구리 끓듯 하는 상지대(商地帶)도 사람이 뜸했다. 이 텅 빈 인도의 보도블록을 빗물이 철철 흐르며 씻어 내리고 있어 지저분한 노점상도 다 빗물에 떠내려간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날 그는 외톨이였고 빗물이 철철 흐르는 보도블록 위에 철썩 앉아 있는 그의 허리부터 발끝까지의 하체가 물에 흠뻑 젖어 있는 건 발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한 손으로 비닐우산을 펴들어 머리를 빗발로부터 가리고, 한 손은 연방 행인을 향해 한 푼만 보태 달라고 휘젓고 있었다.

나는 전에 그를 봤을 때 각별하게 불쌍히 본적도 없었고 그가 앉은뱅이 라는 것조차 믿었던 것 같지가 않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거리에서 거지에게 돈을 주어본 일이 거의 없다. 한겨울에 벌거벗고 울부짖는다거나 끔찍한 불구라든가 너무 어리거나 너무 늙었거나 해서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나게 가엾은 거지를 보고 주머니를 뒤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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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도 문득 마음을 모질게 먹고 그냥 지나친다. 이렇게 마음을 모질게 먹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 건 아니다.

그날도 나는 빗속의 거지 앞에서 핸드백을 열려다 말고 이 거지 뒤에 숨어 있을 번들번들 기름진 왕초 거지를 생각했고, 앉은뱅이도 트릭이란 생각을 했고, 빗물이 콸콸 흐르는 보도 위에 저렇게 질펀히 앉아 있는 것도 일종의 쇼란 생각을 했고, 그까짓 몇 푼 보태주는 것으로 자기 위안을 삼는 것 외에도, 대체 무엇을 해결할 수 있나를 생각했다.

요컨대 나는 내 눈 앞의 앉은뱅이 거지에 대해 알고 있지를 못하면서 거지라는 것에 대한 일반적이고 피상적인 예비지식을 갖출 만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예비지식 때문에 나는 거지조차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날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통증과 함께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누를 수 없다. 믿지 못하는 게 무식보다도 더 큰 죄악이 아닌가도 싶다. 거지에 대한 한두 푼의 적선이 거지를 구제하기는커녕 이런 적선이 있기 때문에 근본적이 구제책이 늦어져 거지가 마냥 거지일 뿐이라는 제법 똑똑한 생각을 요즈음은 어린이까지도 할 줄 안다.

사람들이 갈수록 똑똑해지고 있다. 그럴수록 불쌍한 이웃을 보면 이런 똑똑하고, 지당한 이론대신 반사작용처럼 우선 자비심 먼저 발동하고 보는 덜 똑똑한 사람의 소박한 인간성이 겨울철의 뜨뜻한 구들 목이 그립듯이 그리워진다. 나이를 먹고 세상인심 따라 영악하게 살다보니 이런 소박한 인간성은 말짱하게 닳아 없어진 지 오래다. 문득 생각하니 잃어버린 청춘보다 더 아깝고 서글프다. 자신이 무참하게 헐벗은 것처럼 느껴진다.

<철거되는 대학건물>

비오는 날 버스간 속이었다. 나는 돈암동 쪽에서 시내로 버스를 타고 나오고 있었다. 버스가 조용한 대학로로 접어들었다. 비 오는 날 그곳의 가로수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연둣빛 어린잎들이 신기하리만치 정갈하고 싱그러워, 덩달아서 살아 있다는 게 그저 고맙고 축복스럽게 여겨졌다. 젖어 있는 나무들 사이로 문리대 건물이 보였다. 철거 작업 중임을 알 수 있었다. 벽은 그대로 서 있는데 지붕과 내부가 헐어져 뻥 뚫린 창으로 저편하늘이 보였다. 아아,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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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문리대가 철거당하는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는 현실보다는 달콤한 감상이 더 짙었다.

나는 문리대 자리에 아파트가 선다는 소식도, 이를 반대하는 쪽의 서울대 보존운동에 대한 소식도 남이 아는 것만큼은 알고 있었다. 나는 어느 편도 아니었다. 그냥 담담한 방관자의 입장이었다. 학문과 사상의 전당이요, 젊은이들의 꿈과 야망의 고장인 유서 깊은 건물이 헐리고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게 못마땅했지만 아무리 떠들어도 종당에는 그렇게 되고 말걸 하고 체념하고 있었다.

그곳은 누구에게나 그리운 동경의 고장이었다. 또 내 자식이거나 손자거나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곳에서 입학식을 갖고 졸업식을 가졌으면 하고 벼르던 누구나의 희망의 고장이기도 했다.

아아, 마침내 헐리는구나, 나는 신음처럼 되뇌었다.

비로소 문리대가 헐리고 속악하고 호사스러운 고층아파트가 들어서게 된다는 현실감이 나에게 왔다. 그 현실감은 고약하고 고통스럽게 왔다. 그 혐오감은 유서 깊고 자랑스럽던 대학 자리에 호화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사실에 대한 혐오감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소도구로 쓰인 결혼사진>

비가 올 것 같은 날이었다. 마침 그날이 내 결혼기념일이라 나는 부부 동반한 2박 3일정도의 짧은 여행을 계획하고 나선 길이었다. 실로 얼마 만인지도 모르게 오래간만에 우리는 완행 3등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가 서울을 벗어나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물을 흠뻑 먹은 땅이 검고 부드럽게 보이는 들판으로 도랑물이 흐르는 게 가을 들판 못지않게 풍요로워 보였다. 문자 그대로 감우(甘雨)로구나 싶었다. 들과 풀과 나무와 배꽃, 복숭아꽃이 다디달게 목을 축이고 무럭무럭 자라는 게 보이는 듯했다.

얼마나 좋은 고장인가 이 땅은, 나는 제법 감동까지 했다 그런데 문제는 기차 속이었다. 쉴 새 없이 장사꾼이 드나들며 연설을 해댄다. 100원에 자그마치 빗이 다섯 개에 칫솔을 세 개나 껴주겠다는 장수서부터 바늘장수, 책장수, 사이다, 콜라, 사과, 삶은 계란, 김밥, 호두, 과자장수들이 다투어 목청을 돋우고, 물건을 떠맡기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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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는 한 푼 보태달라는 사람까지 찻간에 들어서자마자 유창하게 일장의 연설을 했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골병이 들고 회사까지 해고당해 제 입 한 입 굶는 건 문제도 아니지만 처자식이 굶는 걸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 염치 불고하고 이렇게 나섰으니 신사 숙녀 여러분의 동정을 바랄 뿐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좀 이상한 걸 갖고 다니고 있었다. 꾸벅 절을 하고는 무슨 증명서 꺼내 보이듯이 그걸 꺼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걸 봐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 사람이나, 그 사람이 꺼내 보이는 것을 똑똑히 보면 구걸에 응하게 될 것 같아 겁이 나는 것처럼 누구나 그 사람 쪽은 거들떠도 안보고 차창 밖만 열심히 내다봤다. 나는 그게 뭔가 몹시 궁금했다.

뜻밖에도 그건 낡은 결혼사진이었다. 족두리 쓰고 연지 찍고 다소곳이 서 있는 신부 옆에 사모관대의 신랑이 의젓하게 서 있는 촌스럽고 낡은 구식 결혼사진이었다. 그리고 그 사진 속의 신랑은 지금 구걸을 하고 있는 그 사람 자신이었다.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걸 보여주며 구걸을 하는 것일까, 나는 이상해 하면서도 어느 만큼은 감동 같은 걸 하고 있었다.

그도 꽃다운 시절이 있었고 결혼을 했다. 천지신명께 백년해로를 맹세했고 친척 친구들에게 앞날을 축복받으며 착한 여자의 지아비가 되었고, 지금 이 구걸도 그 무겁고 지겨운 지아비 노릇이다라는 생각이 뭉클하니 내 심장언저리를 뜨겁게 했다.

웬일인지 이 결혼사진도 구걸 행각의 소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약고 똑똑한 생각은 안 했다. 나는 구걸하는 사람에게 베풀기에는 좀 많은 돈을 꺼내서 얼른 그 사람의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아마 그 날이 내 결혼기념일이어서 내가 그럴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의문이 안 풀리는 건 그가 왜 하필 결혼사진을 꺼내 보이며 구걸할 생각을 했을까 하는 거다.

비 오는 날 있었던 사건이랄 것도 없는 몇 가지 얘기를 적어 놓고 보니 문득 서글프다. 빗속에서 같이 받은 우산이 인연으로 싹튼 로맨스가 한 컷쯤 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게 없는 걸 어찌하랴. 이래저래 사십대의 비오는 날 사건은 재미없을 수밖에 없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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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없는 아이

작년 크리스마스 무렵이었다. 손자들한테 만은 선물을 하고 싶어 큰 마음 먹고 L백화점에 들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크리스마스 전날이었다. 그 안의 혼잡은 내가 밖에서 상상하고 겁을 낸 것 이상이었다. 특히 장난감이나 아동복 파는 매장은 내 힘으로 물건을 만져볼 수 있는 거리로 접근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집에서 툭하면 누울 자리를 보듯이 나는 쇼핑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어디 앉을 자리가 없나 기웃대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근처에 다행히 의자가 있었다. 의자에 앉아서 바라보니 인파가 더욱 굉장해 보였다. 그 안에서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내 옆 의자에서는 중학교 1,2학년쯤 되는 여학생 셋이 고개를 각자의 무릎에 묻고 아까부터 꼼짝도 안하고 엎드려 있는 게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나는 참지 못하고 내 옆의 소녀를 살살 흔들어 보았다.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잠에서 깬 듯 부수수한 얼굴이었다. 내가 먼저 사과를 했다. 자고 있었다면 깨워서 미안하지만, 졸리면 집에 가서 편히 자야지 그런 불편한 자세로 자면 쓰느냐고 말하다 말고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소녀는 암말 안 했지만 참 별꼴 다 본다는 불손한 표정이 역력해서이기도 했지만, 소녀에게 집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느닷없이 들어서였다.

소녀의 옷차림은 초라하지도 사치하지도 더럽지도 않은 그 나이에 맞는 정상적인 거였고, 머리 모양도 약간의 멋을 낸 티가 귀여운, 그 나이의 평균치 머리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건물로서의 집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따뜻한 대화가 있고, 자유와 구속이 적당히 조화된 가정으로서의 집이었다.

공중전화를 찾아갔다. 손자하고 통화를 해서 이왕이면 그 애가 평소 갖고 싶어 하던 거를 사주고 싶어서였다. 매장만 대목을 맞은 게 아니었다. 공중전화 앞에 늘어선 줄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내 앞의 소년 차례가 되었다. 친구한테 건 전화인 것 같았다. “새끼야 집에 있었구나”로 통화는 시작됐다. 저쪽에서 뭐라는지는 들리지 않고 소년이 대답하는 소리만 들리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대답이었다. “뻥까지 마,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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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권태롭게 껌을 쩌덕거리면서 정말이지 딴 소리는 한 마디도 안 하고 간간이 “뻥까지 마, 쌔끼야”라는 같은 소리로만 일관하는 통화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소년의 통화는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끊음으로서 끝이 났다. 소년은 역시 “쌔끼가……”하면서 헛발질을 한 번 하고 그만이었다. 그 소년도 남보다 더 불량해 보이거나 초라해 보이지 않는 평균치의 소년이었다. 그러니 집이 없는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또 났다. 남부럽지 않게 거두어주는 집은 있을지 모르지만 타인과 제대로 말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가족이 있는 집은 없는 아이처럼 보였고, 괜히 백화점 안을 쏘다니는 소년 소녀들의 태반이 완전한 집은 못 가진 아이들이 아닐까 하는 근거 없는 생각도 들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연결된 손자와의 통화도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만들기가 복잡하고 어려운 조립을 사달라고 했다. 나는 손자가 완성된 장난감보다 조립을 좋아하는 걸 예쁘게 여겼기 때문에 쾌히 승낙했다. 그러나 덧붙이는 말이 이왕이면 일제로 사 달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국산은 부품끼리 잘 맞지를 않고, 완성된 후에도 작동이 제대로 안 되는 것도 있어서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산타 할머니도 못해 먹을 노릇이었다. 우울한 날이었다.

■ 보통 사람

남보다 아이를 많이 낳아 늘 집안이 시끌시끌하고 유쾌한 사건과 잔 근심이 그칠 날이 없었다. 늘 그렇게 살줄만 알았더니 하나 둘 짝을 찾아 떠나기 시작하고부터 불과 몇 년 사이에 식구가 허룩하게 줄고 슬하가 적막하게 되었다.

자식이 제때제때 짝을 만나 부모 곁을 떠나는 것도 큰 복이라고 위로해주는 사람도 있지만 식구가 드는 건 몰라도 나는 건 안다고, 문득문득 허전하고 저녁 밥상머리에서 꼭 누가 더 들어올 사람이 있는 것처럼 멍하니 기다리기도 한다.

딸애들이 한창 혼기에 있을 땐 어떤 사위를 얻고 싶으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고, 친구들끼리 모여도 화제는 주로 시집보낼 걱정이었다. 큰 욕심은 처음부터 안 부렸다. 보통사람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말이 쉬워 보통사람이지 보통 사람의 조건을 구체적으로 대라면 그때부터 차츰 어려워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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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들어본 보통 사람은 대략 이러했다.

살기는 너무 부자도 아니고 너무 가난하지도 않을 것, 식구끼리는 화목하되 가끔 의견 충돌 쯤 있어도 무방함, 부모가 생존해 계시되 인품이 보통 정도로 무던하여 자식에게 보통 정도의 예절과 공중도덕을 가르쳤을 것, 학력은 내 자식이 대학을 나왔으니 대학은 나와야겠지만 일류냐 이류냐 까지는 안 따지기로 하고 그 대신 적성에 안 맞는 엉뚱한 공부를 해서 대학을 나오나 마나이면 절대로 안 되고, 용모나 키도 보통 정도만 되면 되지만 건강할 것, 돈 귀한 줄 알고 인색하지 않을 것, 등등이었다.

나는 그만하면 욕심도 너무 안 부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사윗감은 쌔고 쌨으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웬걸, 막상 나서는 혼처는 하나같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보통 사람을 넘지 않으면 처졌다.

보통 사람은 나에게만 어려운 게 아닌 모양이다. <보통 사람들>이라는 연속극이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을 때 나도 그걸 꽤 열심히 보았지만 그 사람들이 보통 사람이라고 여겨지진 않았다. 그러나 보통사람이란 제목은 가장 광범위한 사람에게 동류의식을 일으켰음직하다.

진짜 보통 사람은 어디 있는 것일까? 과연 있기는 있는 것일까? 보통 사람이란 평균 점수처럼 어떤 집단을 대표하고 싶어 하는 가공의 숫자일 뿐, 실지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크게는 안 바라요. 그저 보통사람이면 돼요.” 가장 겸손한 척 가장 욕심 없는 척 이렇게 말했지만 실은 얼마나 큰 욕심을 부렸었는지 모른다. 욕심 안 부린다는 말처럼 앙큼한 위선은 없다는 것도 내 경험으로 알 것 같다. 아마 가장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가장 까다로운 조건만 내세워 자식들의 배우자를 골랐더라면 생전 시집 장가 못 보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제 마음에 드는 짝을 제각기 찾아내서 부모의 승낙을 받고 슬하를 떠났으니 큰 효도한 셈이다. 아직도 보내야 할 자식이 남아 있긴 하지만 보통 사람을 찾는 일은 그만두기로 한지 오래다.

모르겠다. 지금 누가 나에게 보통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이마에 뿔 안 달리면 다 보통사람이라고 대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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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t 2. 꿈을 꿀 희망

■ 꿈

일전에 시내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올 때의 일이다. 택시를 탔는데 동대문 쪽으로 가지 않고 돈암동 쪽으로 도는 것이었다.

한 번 잡은 방향을 바꾸기도 어렵거니와 거리상으로 큰 차이가 날 것 같지도 않길래 모로 가도서울만 가라고 하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운전사 쪽에서 뒤늦게 방향을 잘못 잡은 걸 알고 미안해하더니 질러간답시고 주택가로 접어들었다.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게 변하는 신흥 주택가나 도심지와 달라 안정된 한옥촌은 아늑하고도 구태의연했다. 그곳엔 내가 여학교 시절을 보낸 집이 있을 터였고, 택시는 뜻하지 않게 그 집 앞을 지나는 것이었다.

조그만 한옥인 그 집은 옛 모습 그대로인데, 그 집이 있는 좁은 골목은 한 쪽의 집들이 헐려서 큰 한길이 되어 있었다.

마침 하학 시간이라 여고 학생들이 삼삼오오 그 앞을 지나고 있었다. 여학교 시절을 보낸, 지금도 변하지 않은 옛집과 그 앞을 지나는 여학생들의 모습은 문득 나에게 시간관념의 혼란을 가져왔다. 울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 실제로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 조용히 흐느끼고 싶은 잔잔한 서러움이 목구멍까지 치올랐다. 차는 그 앞을 지났다. 나는 결국 울지 못했다.

그 집과의 만남은 쉰 살 여편네에게 열여섯 소녀의 감상을 일깨워줄 만큼 그 집에서 나는 참으로 많은 꿈을 꾸었다.

나는 매일 아침 하루의 계획을 세운다. 집에 있는 날은 집에서 할 일을 빠듯하게 짠다. 내가 할 일, 아이들에게 시킬 일, 파출부에게 시킬 일을 분류하고 내가 할 일을 또 가사와 원고 쓰는 일로 나누어 시간 배당을 엄격히 한다. 행여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 이 시간 배당에 차질이 생길까봐 전전긍긍한다.

나가는 날은 나가서 볼일을 또 그렇게 꼼꼼히 짠다.

계획한 시간을 예기치 않은 일에 빼앗길까봐 인색하게 굴다 보니 거의 시계처럼 살려니 꿈이 용납되지 않는다. 낮에 꾸는 꿈이란 별건가 예기치 않은 일에 대한 기대가 즉 꿈일 수 있겠는데 나는 그걸 기피하고 다만 시계처럼 하루를 보내기에 급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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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덜 바빠져야겠다. 너무 한가해 밤이나 낮이나 꿈만 꾸게나 말고, 가끔가끔 단꿈을 즐길 수 있을 만큼 만 한가하고 싶다.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계획 밖의 예기치 않는 일이 일어나길 소망하면서 가슴을 두근대고 싶다. 밖에 나갈 땐 정성껏 화장을 하고 흰 머릿카락이 비죽대지 않나 살펴 머리를 빗고, 어떤 옷이 어울리나, 이 옷 저 옷 입었다 벗었다 하고 싶다. 예기치 않는 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부풀어서.

이렇게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아마 밤에도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어려서 꾼 것 같은 색채가 풍부한 꿈을.

다시 꿈을 꾸고 싶다. 절박한 현실 감각에서 놓여나 꿈을 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 조금만 한가해지면 그럴 수 잇을 것이다. 아직은 꿈을 단념할 만큼 뻣뻣하게 굳은 늙은이가 돼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소녀 적에 살던 집 앞을 지나면서 울고 싶은 센티한 감정이 아직도 나에게 남아 있는 것만 봐도 나에겐 꿈을 꿀 희망이 있다.

■ 언덕방은 내방

나는 음식을 가린다든가 잠자리가 바뀌면 잠을 못 잔다든가 하는 까다로운 성질이 아니다. 여행을 다니는 데는 적합한 체질이나 어디 가서 친구나 친척 집에 묵는 일은 적극 피하고 있다. 심지어는 딸네 집에서도 여간해서는 자는 일이 없어서 유난하다는 별명도 듣고 섭섭하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직업적으로 손님을 접대하는 여관이나 호텔은 좀 불친절해도 잘 참는 편인데도 진척이나 자식이 나를 위해 이것저것 신경을 써준다고 생각하면 도무지 편안치가 못해서 될 수 있으면 안 하고 싶다.

누구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나 편하자고 그러는 것이니까 욕을 먹어도 할 말은 없다. 천성적으로 누가 나한테 너무 잘해주려고 하면 나는 그게 가시방석처럼 불편한 걸 어쩌랴.

자연히 내 집이 제일이다. 자주 여행을 다니는 것도 내 집에 돌아올 때의 감격을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부산에 있는 베네딕도 수녀원은 고향과 같은 곳이다. 마음이 시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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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헛할 때, 남의 눈이 아니라 내 눈에 내가 불쌍해 보일 때, 수녀원의 언덕방이나 그 뒷산의 바다가 보이는 의자 생각만 해도 크나큰 위로가 된다. 이 일만 끝마치면 거기 가서 쉬리라. 마음먹는 것만으로도 도무지 내키지 않던 일에 새로운 신명이 나기도 한다.

수녀원의 언덕방과 인연을 맺은 지도 어언 6년이 된다. 내 생애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1988년 가을이었으니까.

* 1988년 5월 : 63세 남편 폐암으로 사망

1988년 8월 31일 : 25세 아들 교통사고 사망

마침 그때 이해인 수녀님으로부터 수녀원에 편히 쉴만한 방이 있으니 언제라도 오라는 고마운 말씀을 들었다. 아마 수녀님으로서보다는 시인의 직관으로 나의 걷잡을 수 없이 황폐해져가는 심성을 들여다보고 안됐단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그렇게 거기가 가고 싶을 수가 없었다.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있을 때라 딸이 말리는 걸 무릅쓰고 나는 고집을 피워 드디어 언덕방의 손님이 되고 말았다.

심심할 만하면 다시 말동무를 해주는 수녀님도 계셨고, 구메구메 간식거리를 챙겨주시는 수녀님도 계셨고, 식사할 때마다 그렇게 적게 먹어서 어떡하냐고 근심을 해주는 수녀님도 계셨다. 그러나 그 모든 게 적절할 뿐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식사는 정결하고 맛있었지만 검소하고 평등했고, 아무도 나를 위해 전복죽이나 잣죽을 쑤어다가 먹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조금도 과하지 않고 적절했고 오직 수녀님들의 화평한 미소만이 도처에 넉넉했다.

그 후에도 거의 해마다 수녀원 언덕방의 손님 노릇을 다만 며칠이라도 하고 와야 마음이 개운해지는 버릇이 생겼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손님을 가장 불편하게 하는 것은 지나친 공경과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잘해주는 친척집보다 불친절한 여관방을 차라리 편하게 여기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필요한 것이 알맞게 갖춰져 있고 홀로의 시간이 넉넉히 허락된 편안한 내방이 언제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아릿한 향수와 같은 깊은 평화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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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멜다의 구두

봄기운이 도타워지면서 낮엔 집 안보다 집 밖이 한결 따습다. 오늘은 마음먹고 내복을 벗고 겉옷도 가볍고 밝은 색으로 차려입었다. 좀 더 봄기운 나는 새옷을 장만하고 싶다는 욕심도 생기면서 마음이 들떴다. 그러나 신발장을 열고 보니 마땅한 구두가 없었다. 어제까지 신던 굽 낮은 까만 구두 말고 상큼한 보라색이나 베이지색 구두를 신고 싶은데 없었다. 산 적이 없으니 없을 수밖에, 그래도 좀 나은 구두가 있을 것 같아 신발장의 구두를 거의 다 꺼냈다. 맙소사 식구가 세 식구밖에 안되는데 구두는 30켤레가 넘었고 그중의 20켤레이상이 여자구두였다. 식구 중 나 혼자가 여자라고 해서 그 구두가 다 내 것은 아니다. 딸이 시집가면서 버리고 간 것을 내 눈엔 말짱해서 껴둔 것까지 합쳐서 그랬다.

신을만한 게 단 한 켤레도 없는 30켤레의 구두 앞에서 나는 엉뚱하게도 이멜다의 3,000켤레의 구두(1965년부터 1986년까지 장기 집권했던 필리핀 마르코스 대통령의 부인 이멜다가 도망갈 때 남겨둔 구두의 수)를 연상하고 있었다. 우리 집의 30켤레의 구두와 이멜다의 3,000켤레의 구두는 양적으로도 그렇지만 질적으로도 비교가 안 된다.내 것은 문자 그대로 고물 장수도 안 집어 갈 헌신짝일 뿐이다.

가끔 얼토당토않은 것끼리, 또는 정반대되는 것끼리 묘하게 닮아 보일 때가 있다. 이를테면 한 달에 10만원 수입에서 7만원을 저금했다는 거짓말 같은 사실의 주인공과 남의 돈 내 돈 없이 몇 십억 몇 백억을 주무르고 사치의 극을 누린 큰손을 가진 사람이 닮아 보일 적이 있다. 그 지나침 때문에, 지나치면 만고의 미덕이라는 절약도 아름답지가 않고 누구나 누리고 싶어 하는 부도 혐오스럽게 된다.

내가 반 평도 안 되는 현관에 수북이 쌓인 헌 구두를 바라보면서 이멜다의 구두를 연상한 것은 그런 까닭이다.

3,000켤레의 새 구두는 이미 제정신을 가진 사람의 것이 아니다. 병적인 집착이요. 광분일 따름이다. 뭐든지 덮어놓고 아까워서 껴두는 걸로 자신을 가장 분수를 지키며 검약하게 사는 걸로 착각해 온 나는 그럼 제정신인가. 그 두 가지는 서로 상반되는 것 같으면서도 집착과 자기도취라는 공통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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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사상이 왜 중용을 인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나를 알 것 같다. 중용은 “마땅하여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으며 또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떳떳하여 알맞은 상태나 그 정도”를 말한다.

이멜다의 구두 덕에 나는 오랫동안 껴두었던 헌 구두들을 미련 없이 버릴 수가 있었다. 물론 다시 신을 만한 몇 켤레도 남겼다.

■ 천사의 선물

한 때 외국에 유학을 갔다 오거나 연수를 갔다 온 지식인들이 우리의 후진성을 개탄할 때마다 쓰는 상투어로 선진 외국에선 어쩌구 저쩌구……하는 게 있었다. 그러나 그 지식인들의 그런 말투에선 자신만은 우리 모두의 후진성이나 초라함과 무관하다는 교만한 착각 같은 게 느껴져서 아니꼽게 들릴 때가 많다.

그래서 그랬던지 내가 처음으로 유럽 여행을 하게 되었을 때 속으로 벼른 것도 많이 봐 두리라는 생각보다는 아무리 좋은 걸 봐도 쇼크 안 받기와 돌아와서 밖에서 본 거 풍기지 않기였다.

막상 밖에 나간 나는 그들의 잘 사는 모습에 정말 놀라지 않았다. 정말 놀랄만한 건 그들이 지니고 있는 문화유산이었지만 우리가 그 방면에 있어서 그들과 비교가 안 된다는 건 미리 알고 있었던 거고, 작어도 현재의 사는 모습에 있어서만은 우리도 세계 수준이었기 때문에 놀랄 게 없었다.

그 후 다시 몇 년 후 일본 구경을 갔을 때는 열등감은커녕 그들의 사는 겉모습이 우리보다 훨씬 궁상맞음을 딱하게 여겼다. GNP인가 뭔가 하는 게 우리의 몇 배라면서 왜 이렇게 못 살까가 수상하기도 하고 우리처럼 화끈하게 잘 살지 못하는 그들이 딱해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재작년에 다시 일본에 가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쪽의 어느 재단의 초청이어서 보고 싶은 걸 미리 신청하면 가능한 한 다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때도 철없이 여기처럼 명승지만 열거하고 맨 나중에 심신장애자를 위한 특수학교를 보고 싶다고 신청했다.

동경도내의 구(區)마다 하나씩 있는 심신장애자 시설은 다 도립이기 때문에 각기 특성은 있지만 빈부나 우열의 차이는 거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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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년으로는 중고교의 과정에 해당하는 장애자 교육기관인 어느 도립 양호학교에서 나는 비로소 이게 정말 잘사는 거로구나! 충격을 받았고, 감동했고, 그리고 열등감을 느꼈다.

그들이 국민의 세금으로 풍족하게 쓰고 있는 건 우리와는 질적으로 다른 거였기 때문이다. 그 학교는 넓고 밝고 세심하고, 어떤 종류의 장애자도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완벽하게 친절한데도 개선의 노력은 그치지 않고 있었고, 1인 1기를 가르칠 전문적인 시설을 갖추고 있었고, 장애자를 고용함으로써 세제 혜택을 받고자 하는 기업체와 연결이 돼 있어서 졸업생의 장래까지도 책임지고 있었다.

나를 안내해준 이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마음씨 좋아 보이는 노인이었는데 어찌나 명랑하고 부지런한지 안내를 하면서도 아이들하고 장난도 치고 떨어뜨린 걸 줍고 비뚤어진 걸 바로잡고 하는지라 오래 근무한 소사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분이 바로 교장선생님 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식당에서 맛있고 풍성한 점심을 먹고 소녀들이 직업교육을 받고 있는 재봉실을 돌아보았다. 뇌성마비 소녀가 네모난 주머니를 하나 재봉틀로 박음질 하는 데 드는 남다른 노력은 눈물겹도록 처절한 것이었다.

소녀는 그 각고의 대작을 선뜻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천사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내 친구 아들의 일그러지고 ‘병신’ 다움이 떠올라 가슴이 저렸다. 우리의 정박아가 천사 같지 못한 게 어찌 부모 탓 만이랴.

나는 그때 선물 받은 걸 아직도 간직하고 있고, 천사의 주머니라고 부르면서 미사포 주머니로 쓰고 있다.

■ 넉넉하다는 말의 소중함

가끔 무엇을 좋아하느냐 라든가 누구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대답을 못하고 난처해하면 먹을 것 중에서 무엇, 정치가 중에선 누구 하는 식으로 범위를 좁혀줘도 대답을 못하긴 마찬가지다. 싫고 좋고가 자주 변기 때문이기도 하고 대부분의 대상에 대해 싫고 좋고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말 중에서 어떤 말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서슴지 않고 대는 말이 있는데 그건 ‘넉넉하다’는 말이다. 나는 ‘넉넉하다’는 말을 아주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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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한다. 내가 좋아하는 ‘넉넉하다’는 말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나의 가장 궁핍했던 시절과 관계가 깊다.

6·25동란 중 집안이 망하다시피 해서 단칸방에서 끼니 걱정을 해야 할 때, 그러니까 가장 궁핍하게 살 때 우리 어머니는 이 ‘넉넉하다’라는 말을 거의 남용하다시피 하셨다.

어머니는 집에 온 손님을 끼니때 그냥 돌려보내는 일이 없었다. 번연히 우리 먹을 밥도 넉넉지 못한데 어머니는 한사코 넉넉하다면서 손님을 붙들어서 끼니는 때워 보냈다. 또 해 어스름 녘에 온 손님이면 방 넉넉하니 자고 가라고 붙들기가 일쑤였다. 밥도 방도 넉넉할 거 하나 없는데 어머니는 부자처럼 넉넉한 얼굴을 하시고 사람들을 먹여 보내고 재워 보내고 하셨다.

‘흉보면 닮는다’고 나도 내 큰 딸이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교복 맞추는데 따라가서 “좀 넉넉하게 해주세요” 했다가 딸의 눈총을 맞은 일이 있다. 요새 누가 옷을 넉넉하게 입느냐는 거였다.

요새는 옷 말고는 모든 게 옛날과는 댈 것도 아니게 넉넉해졌다. 옷을 꼭 맞게 입는 것도 실은, 입성이란 게 무진장 넉넉해졌기 때문일 게다.

그러나 자기보다 못 가진 사람에게 자기 가진 것을 나누어 줄만큼 넉넉해진 사람은 참 드물다.

‘광에서 인심난다’는 옛말도 말짱 헛것인 게, 있는 사람일수록 더 인색하다. 넉넉하다는 게 남에게 베풀 수 있는 마음이라면, 요새 부자는 늘어나는지 몰라도 넉넉한 사람은 자꾸 줄어드는 것 같다.

청소나 야경비 몇백 원 때문에 동네가 떠나가게 다툰 이악스러운 집, 쓰레기통에 궤짝째 쏟아버린 사과와 통째로 버린 비싼 생선을 본 적도 있다. 남 나무라 무엇하랴. 크고 작고의 차이만 있을 뿐 내 뱃속도 그 쓰레기통과 얼마나 다르랴 싶다.

가장 궁핍했던 시절을 넉넉한 마음하나로 가장 부자스럽게 살게 해주신, 그래서 그 시절만 회상하면 저절로 환한 미소가 떠오르게 해주신 어머니가 새삼스럽게 자랑스럽다.

아무리 많아도,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줄 생각은커녕 더 빼앗아다가 보탤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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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만 굴뚝 간다면 가난뱅이와 무엇이 다를까? ‘넉넉하다’는 후덕한 우리말이 사어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마음의 부자가 늘어나고 존경받고 사랑받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 Part 3. 무심한 듯 명랑한 속삭임

■ 다 지나간다

어느 날 부터인가 현관 처마 밑에 생긴 까만 반점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현관 처마는 거의 2층 높이여서 의자를 놓고 올라가 봐도 그 정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흰 회칠이 그만큼 벗겨졌다고 생각하면 그만인데 회칠 밑이 그렇게 까말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그만큼 신경이 써졌나 보다. 신경 쓰고 보니까 처음엔 일원짜리만 하던 점이 며칠 만에 오백 원짜리보다도 더 커지면서 도톰하게 부피를 더하고 있다는 것까지 눈에 들어왔다. 더 자주자주 쳐다본 끝에 그리로 말벌이 모여 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은 말벌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하게 알고 잇는 것도 아니다. 말벌은 가끔 신문에도 나른 벌이다. 등산하다가 말벌에 쏘여 죽은 사람도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보통 벌보다 크고 밉게 생긴 벌을 말벌이라고 단정하게 되었고, 그러고 나니 겁이 더럭 났다. 딴 데도 아니고 현관 처마 밑에 그 위험하고 흉측한 것들이 모여 무슨 모의를 하는 것일까.

우리 집에 거기에 닿을만한 긴 막대기는 없었다. 나는 마당에 물줄 때 쓰는, 샤워 꼭지가 달린 긴 호스 끝으로 그곳을 겨냥하고 물을 틀었다. 이윽고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와 함께 수많은 어린 말벌들이 떠내려 오기 시작했다. 세상에 어떻게 그 많은 애벌레가 그 안에서 자라고 있었을까.

그것들은 수공을 이기기엔 마직 무력했다. 폭포수에 휩쓸려 날갯짓 한 번 못하고 허무하게 떠내려갔다. 어미 말벌들은 저희들끼리만 어디로 도망쳤는지 보이지 않았다. 애벌레들이 더는 내려오지 않게 된 후에도 나는 벌집을 겨냥한 수공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은 내가 이겼다. 마침내 벌집이 천정으로부터 분리되어 내 발밑으로 떨어졌다. 육각형으로 된 여러 채의 벌집이 붙어 있는 걸 확인하고 나서도 나는 공포감을 이기지 못해 발로그것을 짓밟아 으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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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 물 공격을 피해 도망친 어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의 종족 보존의 본능을 모성애로 과장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복수심 같은 게 입력돼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더 기막힐 일은 그 다음날 아침부터 일어났다. 어제 그 자리에 말벌들이 삼삼오오모여 머리를 맞대고 있어서 벌집이 그냥 있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떨어져서 붙어 있는 벌들도 보였다. 그 많은 새끼들을 다 잃고도 왜 그 자리가 명당자리일까, 기가 막혀서 소름이 돋을 것 같았다.

그 후 매일 아침저녁으로 장대를 휘둘러 그들을 쫓아버린다. 쫓아내도 쫓아내도 그들은 한사코 그 검은 폐허주위로 모여들어 머리를 맞대고 쉬는지 모의를 하는지 한다. 혹시 그들이 떠내려간 새끼들을 못 잊고 모여서 같이 슬퍼하고 있을까 봐 두렵다. 그래서 장대를 휘두를 때마다 나는 소리 내어 그들에게 말을 건다. 아니 애걸을 한다.

거기는 현관 처마 밑이잖니, 난 너희들이 부섭단다. 접때 일은 사과할게 나 좀 이해해주라.

말벌집의 발본색원이 불가능 할 것 같다는 내 근심을 들은 어떤 이웃이 한 꾀를 내 주었다. 장대 끝에다 솜방망이를 매달고 거기에다 독한 살충제를 묻혀서 그걸로 말벌의 집터를 반복해서 문질러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돌연한 물 공격으로 그 많은 새끼들을 일시에 몰살시켜 놓은 주제에 살충제 공격만은 차마 못할 것 같아서 망설이는 것은, 아마도 인간의 전쟁 중에서 어떤 화력이나 파괴력보다도 화생방 무기를 부도덕허게 여기는 문화적 영향인 듯 싶다.

집 앞엔 숲이 있고 동네가 숲에 안긴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그것 때문에 지금 사는 집을 장만하게 되었다. 그만큼 숲이 주는 위안은 도시 문화권으로부터 한걸음 물러나 앉은 것 같은 소외감을 다독거려주고도 남는다. 그러나 그 작은 숲이 불안에 떨 적에 보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다. 특히 요새처럼 숲이 진녹색으로 두텁게 번들거릴 때 어디서 오는지 모를 수상한 바람이 숲을 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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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있다. 그럴 때 숲은 온 몸에 비늘을 뒤집어 쓴 한 마리 거대한 공룡으로 변한다.

이렇듯 남들이 말하는 나의 전원생활은 조금도 평화롭지 않다. 내가 여기 정착하려 한 것은 자연 친화적인 삶을 꿈 꿨기 때문에 도처에 도사린 불안을 몰라서도 아니었다. 그냥 아파트가 너무 편해서, 온 종일 몸 놀릴 일이 너무 없는 게 사육당하는 것처럼 답답해서 나에게 맞는 불편을 선택하고자 했을 뿐이다. 내가 거둬야 할 마당이 나에게 노동하는 불편을 제공해준다.

요새처럼 땅의 생명력이 최고도에 달했을 적엔 하루만 마당을 안 돌아봐도 표시가 난다.

내 유년의 뜰에도 말벌이 있었을 것이다. 내 유년의 뜰엔 뱀도 살고 땅벌도 살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요즈음 나는 행여나 그런 것들이 숨어들까 봐 하루 한 뼘씩 왕성하게 자라는, 담이나 나무 밑의 풀섶을 뽑아주고, 머위나 들깨처럼 저절로 자라는 것들도 웃자라지 못하게 솎아내는 일을 열심히 한다. 그 일은 내 반나절의 노동으로 삼기에 족한 분량이다. 더 일하고 싶으면 가위로 잔디를 깎아주기도 한다. 새벽의 잔디를 깎고 있으면 기막히게 싱그러운 풀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이건 향기가 아니다. 대기에 인간의 숨결이 섞이기 전, 아니면 미처 미치지 못한 그 오지의 순결한 냄새다.

다행히 집 앞으로 시냇물이 흐르고 있다. 요새 같은 장마철엔 제법 콸콸 소리를 내고 흐르지만 보통 때는 귀를 기울여야 그 졸졸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물소리는 마치 다 지나간다, 모든 건 다 지나가게 돼 있다, 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들린다. 그 무심한 듯 명랑한 속삭임은 어떤 종교의 경전이나 성직자의 설교보다도 더 깊은 위안과 평화를 준다.

■ 아름다운 것은 무엇을 남길까

건망증이 날로 심해 식구들을 애먹이는 일이 잦다. 비누·휴지·치약 등 제때제때 갖춰 놓아야 할 일용품이 떨어진 지 며칠이 지나도 사 오기를 잊어버려 식구들을 불편하게 하거나 공과금 낼 날을 잊어버려 과태료를 내는 정도는 다반사다. 식구들이 흘려 놓은 것 중 좀 중요하다 싶은 건 깊이 챙겨두긴 하는데 정작 필요할 때는 어디 뒀는지 깜깜이가 되고 만다. 이젠 아이들이 뭘 찾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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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엄마가 잘 뒀다는 말만 하면 좋아하기는커녕 숫제 찾던 손을 멈추고 미리 절망적인 얼굴을 한다. 아이들의 절망적인 얼굴을 보면 나도 덩달아 막막해지면서 자신이 싫어진다. 왜 잘 챙겼다는 사실은 기억이 나면서 그게 어디라는 건 생각나지 않는지 내 일이건만 참으로 딱하다.

이렇게 최근의 기억이 형편없이 희미해지는 반면 오래된 젊은 날의 기억은 변함없이 생생하고, 어린 날의 기억 중에는 미세한 부분까지 놀랄 만큼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도 있다. 때로는 그게 정말 있었던 것일까 의심스러울 적도 있다.

얼마 전 설악산에서의 일이다. 설악산 관광을 위해 간 것이 아니라, 강릉까지 볼 일이 있어갔다가 잠깐 들렀었는데 마침 단풍철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설악산이 네 번째였고 가을에만 세 번째였는데 골짜기마다 다만 ‘앗’하는 탄성 외엔 말문이 막히게 황홀했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뜻하지 않게 내가 그 짧은 절정의 순간과 만나고 있음을 느꼈다.

땅은 얼마나 위대한가? 일용할 양식과 함께, 그 아름다운 조락(調落)을 만들어낸 땅에 겸허하게 엎드려 경배드리고 싶은 충동과 아울러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느꼈다. 요새 나의 감동은 이상하게도 슬픈 느낌과 상통하고 있다. 하다못해 깔끔하고 입에 맞는 음식을 먹고 나서도 문득 슬퍼진다.

나는 어려서 대단한 울보였던 모양으로 너무 울어서 어른을 애먹인 에피소드가 다양한데 그중엔 노을이 유난히 붉던 날, 할머니 등에 업혀서 그걸 손가락질하며 몹시 울었다는 얘기도 있다. 등에 업혀 다닐 만큼 어릴 적 일이니까 그걸 보고 왜 울었는지 생각날 리는 없고, 아마 강렬한 빛깔에 대한 공포감이었겠지 정도로 짐작하고 있는데 그때 느닷없이 그게 생생하게 되살아난 것이다.

그건 이미 단풍이 아니었다. 고향 마을의 청결한 공기, 낮고 부드러운 능선, 그 위에 머물러 있던 몇 송이 구름의 짧고 찬란한 연소의 순간이 거기 있었다.

나의 어릴 적의 그 울음은 자연의 신비에 대한 나의 최초의 감동과 경외였다는 걸 살날 보다 산 날이 훨씬 더 많은 이 초로의 나이에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이 서글픈 시기를 그렇게 곱디 곱게 채색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내가 만난 아름다운 것들이 남기고 간 축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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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을 바꾸니

나는 노래를 잘 못한다. 잘 못한다고 하면 조금은 하는 것 같지만, 음정을 맞춘다는 자의식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남 앞에서 노래를 불러본 적이 학교 다닐 때 음악 시험 때 말고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노래를 못 부르면 불편한 점이 이루 말할 수가 없이 많다. 예전엔 무슨 모임이 노래자랑으로 이어질만하면 슬그머니 뒤로 꽁무니를 빼곤 했는데 근래에는 노래방이라는 게 생겨 거기까지 안 따라가면 되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딱하게도 듣는 음악까지 싫어하는 건 아니어서 집에서 혼자 음악을 들으며 이 세상에 태어난 걸 행복해하기도 하고, 산다는 것은 덧없음에 눈물지을 적도 있다.

노래방을 좋아한다고까지는 못 해도 노래를 시키면 어쩌나 하는 경계심은 안 품어도 되는 장소로 여기고 있었는데 일전에 따라가 본 노래방은 그게 아니었다. 어떤 모임 끝에 인사동에서 저녁을 먹고 들어오는 길에 몇 사람이 노래방으로 빠졌는데 나도 거기 끼게 됐다. 집이 같은 방향이어서 차를 얻어 탈 수 있는 이가 그쪽으로 붙기에 나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합류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일행은 내가 노래도 안 하면서 거기 끼어 앉아 있다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했다. 그렇다고 슬그머니 빠져나오려는 것을 묵인해 주는 것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좀 짓궂은 사람들한테 걸렸구나’ 하는 정도로 참아내려고 했는데 점점 더 집요하게 온갖 수를 다 써가며 남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나중에는 참다못해 “느네들한테 노래할 자유가 있는데 나한테는 왜 안할 자유가 없냐?”하고 외치고 말았다.

그 고약한 기분은 다음날까지 계속됐다. 7, 80년대를 끽소리 한 마디 못하고 살아남은 주제에 고작 노래방에서 웬 자유식이나. 생각만 하면 창피하고 혐오스러워 닭살이 돋을 것 같았다.

그러고 있는데 고등학고 동창한테 오랜만에 전화가 걸려왔다. 왜 목소리가 그 모양이냐고 먼저 이쪽의 우울증을 짚어내기에 나는 왜 노래도 못할까? 하면서 하소연을 시작했다. 친구는 딱하다는 듯이 네가 노래까지 잘하면 어떡하게, 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나는 그 간단한 한 마디를 뛸 듯이 반기며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재차 확인까지 했다. 기분이 단박 밝아졌다. 노래도 못한다고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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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할 적엔 나 같은 건 이 세상에서 무용지물과 다름없더니, 노래까지 잘하면 어떡하느냐는 소리를 들으니까, 노래만 빼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게 줄줄이 떠올랐다.

10년 전 참척(자손이 부모나 조부모보다 먼저 죽는 일)을 당하고 가장 힘들었던 일은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하는 원망을 도저히 지울 수 없는 거였다.

그때 만난 어떤 수녀님이 이상하다는 듯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당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래, 내가 뭐관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을 나에게만은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여긴 것일까. 그거야말로 터무니없는 교만이 아니었을까. 그 수녀님은 아직 서원도 받기전인 예비 수녀님이었다.

한 마디 말이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도 있지만 말의 토씨 하나만 바꿔도 세상이 달라지게 할 수도 있다. 손바닥의 앞과 뒤는 한 몸이요 가장 가까운 사이이지만 뒤집지 않고는 볼 수 없는 가장 먼 사이이기도 하다. 사고의 전환도 그와 같은 것이 아닐까. 뒤집고 보면 이렇게 쉬운 걸 싶지만, 뒤집기 전엔 구하는 게 멀기만 하다.

■ 행복하게 사는 법

젊은이들 앞에서 늙은이 티를 내기는 싫지만 나이를 먹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닥치는 피할 수 없는 운명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끄러워 할 것도 자랑스러워할 것도 없이 내가 요즘 겪고 있는 노쇠현상 중의 하나를 솔직하게 털어놓으려고 합니다. 워낙에 초저녁잠이 많고 아침잠이 없는, 소위 아침형 인간에 속했는데 그게 요즘 더 심해져서 아홉시 뉴스를 보다가 반도 못보고 잠자리에 듭니다. 그리고는 새벽 네다섯 시만 되면 깨어납니다. 아마 여섯 시간쯤은 꿈 없는 단 잠을 자는 것 같습니다.

전에는 그렇게까지 일찍 깨어나지 않았고, 눈 뜨자마자 시계먼저 보면서 이른 아침이면 시간을 번 것처럼 옳다구나 벌떡 일어나 어제 못다 한 일들을, 주로 원고 쓰는 일이지만, 계속하다가 해 뜨면 마당에 나가 잔디 사이의 잡초 뽑기, 새로 핀 화초하고 눈 맞추기 등 정원 일을 하며 부지런을 떨었습니다. 찾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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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사람도 걸려오는 전화도 없는 아침 시간엔 머리도 맑아 그 시간을 가장 능률적으로 보낼 수가 있는 걸 은근히 자랑스럽게 여겼지요.

그러나 근래 몇 년 사이에 그 버릇도 많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새벽부터 부지런을 떠는 일 없이 마냥 자리에 누워 게으름을 피우게 됩니다. 누워서 두서없이 하는 생각은 앞으로의 계획이나 소망이 아니라 주로 지난날의 추억이고, 그중에도 현재의 나에서 가까운 지난날이 아니라 아주 먼 어린 날의 추억입니다. 최근의 일은 어제 일도 잘 기억 못하는 주제에 어릴 적 일은 세세한 일까지 잘 생각이 납니다.

어린 날의 추억이 아무리 달콤하다 해도 기억이 미치는 한도는 대여섯 살까지가 고작이고 젖먹이 때 일이나 그 이전, 태어날 때 처음 본 가족이나 이세상의 첫인상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까지도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들어가고 나서입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30년대는 일제 식민지 치하였습니다. 창씨개명은 하기 전이었지만 한문으로 된 우리 이름을 일본식으로 발음해서 불렀습니다. 학교 가기 전에 집에서 꼭 배워가야 할 것이 자기 이름을 한문으로 쓰는 거였습니다.

1학년 때도 시험을 치는 일이 잦아 시험지에 이름을 쓸 때마다 나는 고민도 되고 짜증도 났습니다. 복잡하고 획수가 많은 내 한자 이름은, 성명을 기입하라고 마련된 네모난 빈칸을 삐져나오기 십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집에 가서 엄마한테 내 이름이 너무 어렵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더니 엄마가 하시는 말씀이, 나는 밤 열두시에 태어났는데 여아를 순산했다는 소식을 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두 분이 그때부터 밤새 머리를 맞대고 옥편을 찾아가며 지으신 이름이 내 이름이라는 거였습니다. 그 후 다시는 이름에 대한 불평을 안 하게 되었습니다. 불평은커녕 새 생명을 좋은 이름으로 축복해주려고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을 두 남자, 점잖고 엄하기로 집안에서뿐 아니라 마을에서도 알아주는 상투 튼 할아버지와 젊은 아버지를 떠올리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존중받고 사랑받았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 시절만 해도 남녀 차별을 많이 할 때였습니다. 그때는 여자 이름이 ‘간난이’ ‘섭섭이’ 등 아무렇게나 지은 애들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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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일찍 여의었지만 조부모님과 두 숙부님 내외와 고모까지 한집에서 사는 대가족이었습니다. 사촌이 생기기 전까지 집안에 어린애가 나 하나뿐이어서 귀염도 많이 받았지만 어리광이 심하고 음식을 많이 가리고 누가 조금만 나한테 언짢게 해도 할머니한테 일러바치는 질 나쁜 고자질쟁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 나쁜 버릇을 서서히 고쳐준 것도 엄마였다고 생각합니다.

학교 갔다 와서 동무들 하고 싸우거나 이지메를 당한 얘기를 하면서 그 동무를 미워하고 욕하면 엄마는 내 역성을 드는 대신, 그러지 말고 그 동무 좋은 점을 한 가지라도 찾아보라고, 며칠이 걸리더라도 그런 마음으로 동무를 대하면 반드시 한두 가지는 좋은 점이 보일 거라고 하셨습니다.

엄마의 잔소리는 철들고 어른이 되어, 엄마한테 그런 소리를 안 듣게 된 후에 오히려 더 자주 생각나고, 어떡하든지 지키고 싶은 생활신조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나한테 하신 것과 똑같은 잔소리를 내 아이들한테 하게 되었고, 내 성질까지 정말 그런 사람이 된 것처럼 느낄 때가 많습니다. 남의 좋은 점만 보는 것도 노력과 훈련에 의해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단언할 수 있으니 누구나 한 번 시험해 보기 바랍니다.

우리 삶의 궁극의 목표는 행복입니다. 행복하려고 태어났지 불행하려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각자 선택한 행복에 이르는 길은 제각기 다릅니다. 돈만 많이 벌면 행복해지리라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출세하여 권력자가 되면 행복해지리라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최고의 부자 최고의 권력자도 시시하게 여길 수 있는 게 아마도 학문이나 예

술일 겁니다. 그러나 미(美)나 진리의 추구처럼 천부의 재능 없이는 끝이 안 보이는 분야가 없고, 설사 재능이 있다고 하여도 좌절과 절망을 일용할 양식 삼을 각오가 돼 있지 않으면 도전하기 힘든 분야가 그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전문분야나 마찬가지입니다.

부자가 되거나 권세를 잡거나 전문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개인의 특별한 능력이듯이 행복해지는 것도 일종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성공한 소수의 천부한 재능과는 달리 우리 인간 모두의 보편적인 능력입니다. 창조주는 우리가 행복하길 바라고 창조하셨고 행복해할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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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셨습니다. 나이 먹어가면서 그게 눈에 보이고 실감으로 느껴지는데 그게 연륜이고 나잇값인가 봅니다.

하늘이 낸 것 같은 천재도 성공의 절정에서 세상의 인정이나 갈채를 한 몸에 받는다 해도 그 성취감은 순간이고 그 과정은 길고 고됩니다. 인생도 등산이나 마찬가지로 오르막길은 길고 절정의 입지는 좁고 누리는 시간도 순간적이니까요.

모든 불행의 원인은 인간관계가 원활치 못한 데서 비롯됩니다. 내가 남을 미워하면 반드시 그도 나를 미워하게 돼있습니다. 남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나는 잘못한 거 없는데 그가 나를 싫어한다고 여기는 불행감의 거의 다는 자신에게 있습니다. 자신이 그를 좋아하지 않고 나쁜 점만 보고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인간관계에서 뿐 아니라 지나간 날의 추억 중에서도 사랑받은 기억처럼 오래가고 우리를 살맛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건 없습니다. 인생이란 과정의 연속일 뿐, 이만하면 됐다 싶은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닙니다.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사는 게 곧 성공한 인생입니다.

* 예사로운 아름다움도 어느 시기와 만나면 깜짝 놀랄 빼어남으로 빛날 수 있 다는 신기한 발견을 올해의 행운으로 꼽으며 .안녕.

 

2021. 3. 6.

* 제 2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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