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무소유 (2)
행복한 무소유 (2)
■ 정찬주 지음
★ 입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라
■ 서는 곳마다 주인공이 되라
돌아가신 서옹스님께 세배를 하러 장성 백양사에 간 적이 있다. 스님께서는 세뱃돈과 붓글씨 한 점을 주셨다. 스님께서 직접 쓰신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란 붓글씨였다. ‘서는 곳마다 주인공이 되고 진리의 땅이 되게 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를 온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 바로 부처님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싯다르타 태자가 정각을 이루어 부처님이 되셨던 바, 이 장면에서 주인공은 보리수가 아니라 부처님이다. 부처님이 탄생하여 보리수가 유명해진 것이지 보리수가 유명하여 부처님이 탄생하신 것은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불교라는 깨달음의 종교가 비로소 생겼으니 부다가야부터 진리의 땅이 된 것이다. 부다가야는 ‘붓다의 가야’이다.
달빛이 푸르게 물결쳐 오는 새벽의 된서리가 수은 빛으로 빛나고 있다. 우주의 영혼이 있다면 바로 수은 빛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요하고 아름답다. 적요(寂寥)가 극에 달해서 그 은빛이 비밀스러운 심도(深度)를 지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최근에 깨달은 자각이 하나 있다. 우주의 영혼에도 된서리와 같은 독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다. 장미에 가시가 있듯이.
■ 자비와 사랑이 세상을 구원한다
“이기적인 수도자는 진정한 수도자가 아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 덕이다.” “수도자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자이다,” ”침묵은 내면의 통로를 열어준다.“ 라는 법정 스님의 말씀에 공감하지 않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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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 육조 혜능 스님도 “침묵하라. 그리하면 입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리라.”라는 말씀을 남겼다.
난세에 영웅 난다는 금언이 있다. 나는 이 금언을 ‘난세에 참 종교 난다.’로 바꾸어 부르고 싶다.
천주교와 불교 단체가 방역 당국에 협조하여 미사나 법회를 연기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은 기쁘고 한 가닥 위안을 준다. 종교가 자기 신도 속에서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이기적인 집단일 뿐이다. 사랑과 자비라는 기독교와 불교의 핵심 사상에도 벗어난 일이다. 불교 최대 종단인 조계종에서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한 달 뒤로 미루었다고 하니 흐뭇하다. 부처님이 지금 오신다고 해도 그런 결정을 내리셨을 것이다. 부처님 시대에 살았던 유마거사는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라고 했다.
집단 예배로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이 염려되고 있는데 이 시점에서 일부 교회 목사들이 “주일에 예배를 하지 않으면 교회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항변한다는 TV 뉴스를 접하고 나니 몹시 우울하고 어처구니가 없다. 종교가 무엇인지 그 존재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공동선(公同善)을 외면한 종교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부침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가 한때 인도에서 소멸한 까닭은 이슬람 왕조의 오랜 탄압도 큰 이유였지만 수행자들이 공동체 정신을 멀리한 탓도 작지 않았던 것이다.
★ 벽 하나만 무너뜨리면 허공
■ 나의 훈장은 불교 전문 작가
나는 10대에 학교, 가족, 사회 등 제도화된 것이면 무엇이든 반항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다. 나를 위로하는 것은 실존주의 사상이나 문학이었다. 어른들은 나를 부적응아라고 불렀을지 모른다. 20대에 나는 세상의 모든 고민을 혼자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오만상을 찌푸리고 다녔다. 습작한 작품들의 주제는 대부분 고발과 저항이었다.
30대 초반에 나는 법정스님, 서암스님 등 고승을 친견하면서 불교에 물들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 불교학생회 때도 불교를 접했지만 그 무렵에는 십우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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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를 찾아 나선 ‘심우(尋牛)의 시기였다고 할까. 뼛속으로 불교가 스며든 것은 30대 초반이다. 이후 욕심도 사라지고 명예를 바라는 공명심 같은 것도 녹아 없어져버렸다.
■ 마음의 주인이 되라
달마대사는 말했다. 마음이란 좁기로 말하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가 없고, 넓기로 말하면 허공 같다고 했다. 마음이 좁아진다는 것은 마음에 휘둘린다는 뜻이고, 마음이 넓어진다는 것은 마음의 주인이 되어 있다는 뜻이 아닐까.
달마대사는 수행 중에서 인연을 따르는 수연행(隨緣行)을 깨달음의 경지로 들어가는 최상의 문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모든 인연을 거스르지 않고 다 받아들이는 것이 수연행인데, 허공 같은 마음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마음의 벽 하나만 무너뜨리면 허공인데!
■ 눈보라도 고맙다
화목난로 덕분에 따뜻한 새벽을 보내고 있다. 연못을 얼게 한 새벽의 살얼음 같은 공기가 나는 고맙다. 잠시만 밖으로 나가 있어도 정신이 번쩍 든다. 밤새 동사하지 않은 새벽의 별빛도 또록또록 차갑게 내 눈에 든다. 내 산방은 평지보다 혹독한 추위를 주는 대신 흐릿한 정신을 투명하게 깨워준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런 날 차 맛은 나를 충만케 한다. 차가 지닌 맛을 오롯하게 느낄 수 있다. 한 잔의 차가 나의 실존을 명명백백하게 증명해 준다. 지갑은 늘 가볍지만 더불어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란 자각이 든다.
■ 생가 터에서
오늘 새벽에 ‘생가 터’에 대한 단상이 떠올라 몇 줄 적어봤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거룩하시듯 나에게 위대한 분은 오직 어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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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신조차도 부정하지 못하리, 나는 바람재 마을 이 터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맑은 꿈속에서 벼 익는 가을 들판 용샘을 보고 나를 낳으셨다.
검푸른 용샘에는 순한 물고기들이 용띠아기 탄생을 너울너울 축복했다.
젊은 날 어머니는 내게 말씀하셨다.
내 꿈속 가을 들판은 세상 사람들에게 누런 벼 향기같이 살라는 네 운명이다.
용샘 물고기들은 널 지켜줄 이웃이다.
어머니 꿈으로 소설가가 되었나보다. 그래, 한 문장이라도 함부로 쓰지 말자
늙은 어머니의 오래된 꿈 흩트리고 내 인생 남은 길에 허물 짓는 일이니까.
★ 여행은 깨달음이다
■ 너무나도 완벽한 모자의 조화
남인도 케랄라주 무나르 차밭 산자락을 넘으면서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 우연히 만난 모자(母子).
이보다 더 거룩하고 완벽한 종교는 없을 것이다.
모자의 티 없이 맑은 눈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간다.
숨기는 것 하나 없다. 진실하고 자애로울 뿐이다.
모자의 맑은 눈 속에 이 세상 현존하는 모든 종교의
교주들 말씀이 구구절절 다 녹아들어 있는 듯하다.
■ 우리말의 뿌리를 찾는 네팔과 인도여행
우리말 근원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바 있는 우랄알타이어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몇 만 년 전에 히말라야 어느 지역(파미르고원)에서 같은 말을 사용하고 살았는데 민들레 홀씨가 퍼지듯 인연 따라 집단으로 이동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들곤 한다.
총령에서 총은 파나 마늘, 령은 산 이름이다. 그러니 마늘이나 파가 나는 고원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피미르 고원에 가면 지금도 그 마을 사람들은 마늘밭과 파밭을 일구고 산다. 단군신화에서 곰이 먹고 사람 되는 것의 매개체는 마늘이다. 히말라야에서 이동한 집단들은 마늘을 먹고 산다는 어떤 공통분모가 있는 듯 싶다. 사람이 되려면 마늘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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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미르고원에서 발원하는 인더스 문명을 일으킨 드라비다 족이 사는 남인도에는 우리말과 비슷한 타밀어가 수도 없이 많았다. 엄마나 아빠는 기본이고 팽노리(팽이놀이)는 완전히 같았고 심지어 경상도 향토언어 궁디(궁뎅이)까지 있었다. 유사어가 무려 1천개가 넘는다 하는데 나도 직접 듣고 놀랐다.
■ 춤으로 기도하는 부탄의 무희
첫눈이 오면 공휴일이 된다는 부탄에 갔을 때 불교 사원 푸나카종 보리수 앞에서 만난 무희. 푸나카종을 순례 온 그녀는 자신의 춤을 가족과 세상을 위해소박하게 공양하고 있었다.
춤은 그녀의 수행이고 기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하는 일도 절절한 수행이고 기도인지 잠시 스스로 의문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거대한 보리수 이파리들이 신선한 기운을 내뿜었다.
■ 무슬림이 불상을 파는 비엔나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2주간 머무는 동안 슈베르트 생가를 찾아가는 중에 우연히 발견한 불상(佛像) 가게, 가게를 들어서는 순간 내 눈을 강렬하게 사로잡은 불상이었으므로 나는 즉시 구입해버렸다.
여주인은 히잡을 머리에 두른 무슬림이었는데 불상 가게를 하고 있어 조금 의아했다. 며칠 후 알아보니 비엔나 사람들에게 미소 짓는 불상을 가정에 들이는 게 유행이었다. 피를 흘리는 예수상보다 미소 짓는 부처상을 보면 마음이 더 편안해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내가 보름동안 머물렀던 숙소에도 관세음보살 상이 있었는데, 물론 주인은 성당 안의 꽃꽂이를 혼자 다 할 만큼 신심이 돈독한 기독교 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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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연
★사랑방에 법정 스님을 모시다
■ 법정 스님이 계시는 사랑방
사랑방에 나의 스승이신 법정 스님의 사진을 모셨다. 스님의 맏상좌 덕조 스님이 소장한 것을 복사한 사진인데 나는 법정 스님의 내면을 이보다 잘 표현한 흑백 사진을 본 적이 없다. 사진 앞에는 스님께서 인도에 가셨다가 간디 기념관에서 선물로 사 오신 세 마리 원숭이 상을, 또 아내가 장작가마에서 구워낸 백자 연꽃 연적을 향꽂이 대용으로 내놓았다.
세 마리 원숭이는 손으로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한 마리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고, 또 다른 한 마리는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고, 나머지 한 마리는 손으로 귀를 가리고 있다. 스님께서 불일암에 갔을 때 내게 주시면서 설명하셨다.
원숭이가 손으로 입을 가린 것은 나쁜 말을 하지 말고, 눈을 가린 것은 나쁜 것을 보지 말고, 귀를 가린 것은 나쁜 소리를 듣지 말라는 뜻이라고. 나는 그때 스님의 말씀을 반대로 바꾸어 마음에 새겼다. 입은 좋은 말을 하라고 있고, 눈은 좋은 대상을 보라고 있으며, 귀는 좋은 소리를 들으라고 있는 것이니 매사에 언행을 조심하라는 뜻이 아닐까 싶어서였다.
스님께서는 사랑방 이름인 ‘무염산방(無染山房)’을 한자로 써주시면서 스님다운 재치를 부리셨다. 오른쪽에서 쓰시다가 왼쪽 공간이 점점 좁아지니까 뫼 산(山)의 상형문자 봉우리를 두 개만 그리셨다. “왜 봉우리를 두 개만 그리십니까?”하고 묻자, “아래 절 이름이 쌍봉사이니 그렇소.”하며 웃으셨다. 또한 일부러 낙관을 찍지 않으셨다. 낙관을 찍는 것은 자기 글씨 자랑하는 거와 같다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나에게 낙관을 받았어야 가치가 더 올라갔을 거라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자기 질서를 지키는 스님의 치열한 정신을 보는 듯해 낙관이 없으므로 오히려 더 보배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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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방 돌아오는 길
내가 없는 사이에 아랫마을 농부가 대나무와 편백나무로 만든 사립문으로 바꿔 달아놓았다. 사립문을 열고 내가 산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산방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것 같다. 나를 손님의 위치에 놓고 보니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듯해서 고마울 따름이다. 1박 2일 동안 산방을 지켜준 행운이가 컹컹 격하게 짖는다. 제 시간에 산책을 못 했으니 억울했던 모양이다. 행운이가 머리를 내밀면서 쓰다듬어 달라고 한다.
■ 베토벤 영성이 내 마음에
월안 이상훈 감독의 배려로 아내와 함께 아시아 문화전당 예술극장의 손열음 피아노 콘서트에 다녀왔다. 구면인 MBC 음악감독의 안내를 받아 연주자 대기실로 가서 선물 받은 CD에 아내는 손열음 피아니스트의 사인을 받았다. 1시간 30분 동안 연주 했음에도 밝은 모습으로 맞아준 손열음 피아니스트의 겸손한 태도에서 거장의 그림자가 어른댔다.
클래식 마니아인 아내가 행복해하고, 드문 저녁 외출인데도 피곤해하지 않아서 더욱 다행이었다. 내 귀로 들어온 베토벤의 영성이 내 마음 어느 곳엔가 저장 되었을 것 같은 느낌이 어렴풋이 들었다.
■ 고요를 배우고 가십시오
내 산방인 이불재를 소개한 EBS 방송을 본 안성에 사는 치과 의사분이 첫 번째로 편지를 보내왔다. 주소가 틀렸지만 ‘이불재’라는 집 이름이 맞아서 우체부가 고맙게도 전해주고 갔다. 편지 내용 중에 인상적이 구절이 있어 모든 이들에게 공개하고 나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자연 속에서 외로움이 친구가 되고 그 외로움을 일상(日常)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씀에 일본의 어느 도예가처럼 스산하되 외롭지 않고 고요하되 무료하지 않은 경지. 유적(幽寂)의 미학(美學)과도 같아 공감하였습니다.’
그윽한 고요란 뜻의 유적이란 말을 혼자서 좋아했는데, 또다시 상기시켜주시어 고맙다는 말을 전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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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탄에 갔을 때였다. 내가 부탄 주민에게 “부탄에서 무엇이 볼만 합니까?”하고 묻자, 그는 내게 “부탄의 고요를 배우고 가십시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또 한 명의 친구를 얻은 느낌이었다. 내가 사는 산방 역시 고요가 특산물인 것이다.
★ 만남에 감사드립니다
■ 선도 악도 버려라
부산에서 1박 2일을 보내고 왔다. 안국선원 선원장 수불 스님을 뵙고 24일 오후 3시 30분부터 인터뷰했다.
드라마틱한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가슴을 먹먹하게 한 것은 스님의 도둑질(?)이었다. 범어사 행자 시절에 도둑질을 두 번 했다고 고백했다.
한번은 행자 한 사람이 공양을 못한 채 얼굴이 누렇게 떠 행자들의 동의하에 복전함에 든 돈을 훔쳐 공양주 보살을 시켜 장어국을 먹이게 했고, 또 한 번은 공양주 보살이 영양실조에 걸렸을 때 중국집으로 데리고 가 특식을 먹이고 남은 돈을 다 주어버렸다는 것이다. 스님은 도둑은 도둑일 뿐이니 변명할 생각이 없다고 하셨지만 나는 또 다른 생각을 했다. ‘도둑은 나쁘다’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구나 하는 그런 자책이었다.
육조 혜능 대사가 왜 ‘선(善)도 악(惡)도 버리라고 했을까?’에 대한 의문이 조금 가셨다. 편견이나 독선이 자신의 눈을 찌르는 가시가 될 수 있음을 때달았다.
■ 나를 께어줄 수탉
수탉 한 마리를 월헌 김천국 선생이 내게 선물했다.
어느 식당에 갔는데 장닭 조각품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꼭두새벽에 홰를 치는 모습이었다.
내가 사려고 하자, 월헌 선생이 먼저 값을 지불했다.
순간 선물이 되고 말았다.
날마다 저 수탉이 나를 꼭두새벽에 깨워줄 것만 같다.
문득 선물이 갖는 무게가 백두산만 해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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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라대왕 편지
설날인데도 하루 종일 허리가 아플 정도로 글을 썼다. 일부러 눕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군대 생활 할 때처럼 이부자리도 꼭두새벽에 각지고 반듯하게 개고, 신축년 달력도 거실과 서재에 무슨 의식을 치르듯 거룩하게 걸었다. 거실의 달력은 펜화가 김영택 화백께서 보내준 것이고, 서재의 달력은 송광사 수련원장 현묵 스님께서 보내준 것이다.
마침 폭설이 내려 손님들도 오지 않았다. 대신 신년인사 전화만 몇 통 받았다. 이제 내 나이도 일흔, 인사 받을 나이가 된 것이다. 나이 먹는다고 더욱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귀밑머리가 하얘졌다.
선가(禪家)에서 흰머리는 염라대왕이 저승에서 부르는 편지라고 한다. 흰머리가 많을수록 염라대왕 편지를 많이 받았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 잘 살 것인지, 못 살 것인지는 각자의 몫이다. 못 살고 저승에 간다면 염라대왕이 신발값부터 청구한다고 한다. 나는 헛걸음질을 많이 하여 신발값을 얼마나 낼지 자못 신경 쓰인다.
내가 명절에 놀지 않고 글을 쓰는 것은 돌아가신 천재작가 최인호 선생의 말씀을 듣고 나서였다. 최인호 선생께서 나에게 “찬주야, 나는 명절이 되면 글을 더 많이 쓴다. 명절이라고 해서 놀면 그게 프로냐? 아마추어지.” 고등학교 때 신춘문예에 당선한 천재작가가 타고난 문재(文才)에다 노력까지 얹히니 독자들의 사랑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구나 싶었다. 금상첨화(錦上添花), 비단 위에 꽃을 얹는 격이라고도 할 수 있다.
★ 나를 스친 비단 같은 인연들
■ 뜻밖의 선물, 39개의 촛불
희유한 사건이다. 오늘이 결혼 39주년 기념일 이지만 폭설로 산길이 얼어붙어 밖을 나갈 엄두를 못 내고 있는데, 부산에 사는 독자 두 분이 케이크와 빵을 사서 찾아왔다. 물론 두 분이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을 알 턱이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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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이 떠난 뒤 아내는 식탁위에 케이크를 꺼내 놓은 뒤 그 위에 39개의 촛불을 꽂아놓고 불을 켰다. 어둑어둑 하던 방이 환해졌다. 촛불이 켜지는 순간 마치 마술로 순간 이동을 하듯 신산하고 핍진했던 39년이 짧게 흘러갔다. 순간 ‘눈물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고 수저는 아래에서 올라간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눈물의 시간도 수저의 수고가 있었기에 삶에 거름이 되는구나 싶었다. 그것도 성찰이라면 성찰이었다.
■ 경사가 넘쳐야 할 사람
남도 산중으로 은거한 지 20여 년이 됐다. 최동기 씨는 그 무려 처음 사귄 지인중의 한 사람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심성을 보니 그와의 우정이 눈을 감을 때까지 갈 듯하다. 해외여행을 가도 그가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형으로 불러 달라고 해도 굳이 선생님으로 모시겠단다. 희유한 일임에 분명하고 더 없이 소중한 지인이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남은 인생에 경사가 넘치는, 혹은 경사가 넘쳐야 할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경헌(慶軒)’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 호를 지어 선물하다
저녁 무렵에 산책하면서 산이나 계곡물을 무심코 보다가 걸음을 멈출 때가 있다. 문득 나 홀로 잘 살아서 하루가 무사히 지나가는 것 같지 않다는 자각(自覺) 때문이다. 곧바로 자각은 상념으로 이어진다. 고마운 인연들이 떠오른다.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인연들이다. 누에고치에서 뽑은 명주실이 씨줄 날줄로 엮어져 비단이 되는 것과 흡사하다. 나를 스친 인연들에 의해 단층처럼 쌓인 사연들이 내 삶의 밑거름이 되었다가 훗날 에너지로 분출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 지역에 현재 거주하는 사람들 중에도 내 책 애독자가 여러분 있다. 나는 신간이 나오면 가장 먼저 이분들에게 선물한다. 이분들의 공통점은 모두 내가 호를 지어 주었다는 점이다. 홍인(弘人), 복산(福山), 덕헌(德軒), 송헌(松軒), 인담(仁潭), 다제(茶弟), 월헌(月軒), 무진(無盡), 동천(東泉), 등….
소나무 한 그루는 독야청청 돋보이기는 하지만 고독하다. 소나무도 끼리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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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여 사는 습성이 있다는 얘기를 나무박사로부터 들었다. 그래서 군락지를 자연스럽게 형성했을 터, 나무는 숲을 이뤄야 비로소 완미해진다. 한 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게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나’는 단수가 아닌 ‘우리’라는 복수가 되어 살아야 한다. 부처님은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고 했지만….
■ 가을이 떠나야 첫눈이 내리겠지요
지난주에 방송된 EBS <건축탐구-집>에서 내 산방 이불재 편을 보고 많은 분들이 문자를 주셨는데 인상적인 몇 분의 글만 그대로 소개해 본다. 그분들의 진심어린 육성을 내 책에 남기기 위해 보내온 그대로 기록해둔다.
이불재 집 영상을 통해 잘 보았습니다.
자연도 아름답지만 두 분의 모습이 더 아름다웠습니다.
때로는 인간이(인간도 자연의 일부이지만)
자연보다 더 아름다울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을의 떠남이 아쉽지만
가을이 떠나야 첫눈이 내리겠지요.
좋은 글 많이 쓰시는 가운데 늘 평안하시길 기도합니다
- 정호승 시인
방송 잘 봤습니다.
정 선생님이 어떻게 사시나 궁금했는데
화면으로나마 궁금증을 풀었습니다.
사람들은 다 자연을 말하지만 실천에 옮기긴 쉽지 않은데
정말 장하십니다.
부처님 가피 속에서 꿈꾸고 계신 작품 완성하시길 빕니다.
항상 청안하십시오.
-남지심 소설가
이불재를 보니 작가님과의 추억이 떠오릅니다.
아늑하고 조화된 느낌이 너무 인상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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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을 가꾸지 않고)
내버려두니 자연이 민들레 꽃밭을 선사했다는
말씀 멋지십니다.
(그러고 보니 무위자연이네요) - 김호철 변호사
선생님 안녕하세요?
너무 좋아 (EBS 홈피 들어가)두 번 봤습니다.
이불재가 영혼의 집이지만 공(空)이라는 말씀
가슴에 와 닿네요.
불의 심판을 받은 사모님의 도자기 작품들도 궁금합니다.
편안한 저녁 보내십시오.
- 정현상 (신동아 기자)
■ 곱빼기 밥의 정(情)
중국 도자기 한 점을 전남 신안군 출신 서양화가 정찬경 형님한테서 선물 받아 거실 2층장에 올려놓으니 더 어울린다. 올해 78세이신 문중 형님께서 죽으면 누구나 빈손으로 가는데 살아생전에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어야지 하고 선뜻 가지고 나오셨다.
홍익대 다니며 자취하실 때 김환기 화백 댁에 12시 30분 까지 가면, 사모님이 배고프면 그림 못 그린다고 항상 곱빼기 ‘머슴밥’을 주셨다고 회상하셨다. 김환기 화백 가족이 미국으로 들어가기 전인 1년 동안이나. 그처럼 베푸는 마음이 내게까지 전해진 듯하다.
■ 고향의 계곡물 같은 시인
싸락눈 내리듯 은강 이남섭 시인의 <사의재>라는 제목의 시가 메일로 와 있다. 내 장편소설 <다산의 사랑>을 열독 중이신 듯하다. <다정가>를 노래한 고려 시대의 문신 이조년의 후손이신데 조선시대 선비 같은 분으로 나와는 지음(知音)사이다. 군더더기 말은 절제하고 시를 음미해본다.
1801년 다산(茶山)이 강진으로 유배오던 첫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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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는 차가운 싸락눈이 내리고 있었다.
낯선 땅 모두 중죄인이라며 외면할 때
깨끗한 국밥 말아주며 뒷방까지 내주었던 밥집
할멈, 숨은 이야기 다산의 사랑으로 깨어난다.
유배의 실의에 빠진 정약용이
주막집 노파의 한 마디에 낡은 허물을 벗고
겸상을 청했다던 저잣거리의 사의재(四宜齋)
농사꾼 장사꾼을 함께 제자로 삼아 강학했던 곳
그곳에 가면 여전히 다산이 살고 있다.
*정찬주 단편소설 <다산의 사랑>내용과 제목을 인용
★ 소중한 사람은 지금 만나는 사람
■ 나눔은 인간을 돌아가는 길
작년 12월 5일 부산 안국선원에서 만난 인도 첸나이 TVS 그룹 베뉴스리니바산 화장과의 만남도 오래도록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인도에서 세 번째 부자로 자가용 비행기로 부산에 온 스리니바산 회장을 만난 것은 수불스님이 주선해서였다. 스리니바산 회장은 몇 년 전에 수불스님께 삼배의 예를 갖추고 난 뒤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몇 년 전 수불스님을 범어사에서 처음 만났을 때 마음속에 햇살 같은 빛이 가득했다고 회상했다. 그런 영적 체험을 한 뒤 수불 스님이 범어사 선방에 들어갔다가 나오라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 처음에[는 그 의미를 몰랐지만 3년 뒤에야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가 마음부처(心佛)를 찾으라는 것인 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스리니바산은 카르마((業)를 많이 얘기했다. 수불스님을 만난 것도 카르마요 기업이 흥하는 것도, 어려워지는 것도 카르마라고 했다. 이 부분에서 나는 아침저녁으로 무념무주(無念無主)의 명상을 한다는 그가 수행자로 여겨졌다. 특히 그의 기업경영 목적이 기업의 사회화에 있다고 하므로 부럽기조차 했다. 불가의 말로 표현하자면, 그의 회사는 모든 이웃을 이롭게 하는 요익중생(饒益衆生)의 사회적 기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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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이 벌이고 있는 요익중생 프로젝트를 전생에 진 빚을 갚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현재 인도의 130개 힌두사원을 보수 수리했고, 제일 큰 두 개의 사원은 세계문화유산이 됐단다. 가난한 인도인 380만 명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생계를 해결해 주고 있는데, 목표는 500만 명이라고 한다. 그들 중에는 무슬림, 기독교 신자, 힌두와 불교의 신자가 있는데 자신은 종교에 대한 편견은 없다고 했다.
■ 김수환 추기경님과 일타스님
김수환 추기경님을 길상사에서 뵌 일이 있다. 추기경님이 법정 스님의 초대로 길상사 극락전에서 강론하는 날이었다. 추기경님의 행동은 굼떴다. 행동이나 말이 느릿느릿했다. 그런대 왠지 일거수일투족에 믿음이 갔다. 더욱이 마음씨 좋은 시골 훈장 같은 얼굴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미남 미녀만 매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미남 미녀가 눈을 부시게 하는 햇살이라면 추기경님의 얼굴은 온화한 달빛 같았다.
수행자는 기도와 정진으로 자애롭게 바뀌는 것 같다. 불가에서 자비보살이라 불리던, 상좌들에게 단 한 번도 화를 낸 일이 없었던 일타스님이나 김수환 추기경님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생가가 있는 군위에 갔던 일이 엊그제 같다.
일타스님이 내게 준 휘호는 불일증휘(佛日增輝)였다. 내 식대로 풀자면 ‘부처님의 진리를 더욱 빛나게 하라’인데 불교적인 산문과 명상의 글을 쓰는 내게 합당한 휘호가 아닐까 싶다.
■ 내 가슴에 영원한 톨스토이의 말
중학교 2학년 때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을 읽었는데 다 잊다시피 했지만 한 구절만은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말뚝처럼 내 가슴이 남아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은 지금 이 순간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지금 이 순간 만나는 사람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일은 지금 이 순간 만나는 사람에게 사랑과 기쁨 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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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기쁨을 주는 일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일이라는 톨스토이의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중국의 임제선사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남겼던 것이 기억난다.
★ 심혼에 불을 당겨준 선지식
■ 불일암 오솔길을 오르며
지난 2월 3일 불일암에 다녀왔다. 감로암 쪽으로 가는 지름길로 가지 않고 일부러 산 아래서 올라가는 가파른 오솔길을 택했다. 삼나무가 쭉쭉 뻗은 이른바 ‘무소유길’이었다. 80년대 초만 해도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는 좁은 산길이었다.
스님들 말로는 ‘오솔길’이란 오소리가 통통한 배를 밀고 다니면서 만든 길이란다. 무소유 길을 오르면서 오소리에게 감사의 말을 전해본다.
지금은 억새가 보이지 않지만 80년대 초에는 억새가 장관을 이루던 골짜기 였다.
“무염거사, 저 누런 억새를 좀 봐요. 누렇게 죽은 억새인데 쓰러지지 않고 있어요. 파란 새끼 억새가 다 클 때까지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는 거지요. 새끼 억새가 다 자라면 그제야 넘어지지요. 억새를 보면 자연의 모성이 느껴져요, 억새를 흔들리는 여자의 마음이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양력으로 2월 19일이 법정스님 입적 10주기 날이다. 우리는 입적 10주기가 생각나 불일암에 오르고 있다.
불일암은 단순한 암자 그대로 변함이 없었다. 법정스님의 유지가 덕조스님에 의해 그대로 지켜지고 있었다. 위채와 아래채, 우물, 그리고 대나무 세면실, 재래식 정랑 등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큰절 규모로 변해가는 다른 암자와 달리 소박하고 정겨웠다. 물신(物神)의 손이 범접하지 못하는 청정 공간의 암자였다. 선택한 가난이야말로 맑은 가난, 즉 청빈(淸貧)이라고 말씀하셨던 스님의 가르침이 문득 떠올랐다. 불일암은 작아서 아름답고 가난해서 맑았다. 승속을 불문하고 최고 최대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한 번쯤 무엇이 진정한 아름다움인지 되돌아봐야 할 것 같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애른스트 슈마허의 금언은 여전히 유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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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두 살 아이가 그린 빠삐용 의자
길상사 행지실에 가면 법정스님 유물을 관람할 수 있다. 스님의 손때가 묻은 것들만 엄선해서 전시하고 있다. 유물 중에는 소품인 ‘빠삐용 의자’ 그림도 있다. 미국에 사는 내 조카 김미리가 열두 살 때 그린 그림이다. 얼마나 정성을 들여 그렸는지 고사리 같은 손가락에 습진이 생겼다고 한다. 그 그림을 나에게 보내 왔는데, 나는 스님께 선물하고 조카에게 또 그려달라고 부탁하여 두 번째 그림은 지금 내 산방에 있다. 스님께서 영화 빠삐용을 보시고 그 감동의 힘으로 불일암 뒷산의 굴참나무를 베어 만드셨던 의자가 바로 ‘빠삐용 의자’다. 한국계 미국인인 내 조카는 미국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스쿨을 졸업한 뒤 현재는 그림만 그리는 전업화가다.
영화얘기가 나왔으니 하나만 더 하겠다. 스님과 함께 본 영화중에 잊히지 않는 영화가 있다. <서편제>를 종로 단성사에서 조조프로그램으로 보았는데, 스님께서는 영화가 시작된 지 5분부터 끝날 때까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으셨다.
스님은 아무 잡지나 신문에 원고를 쓰시지 않았다. 그런데 원고 청탁을 거절하자 못하는 곳이 있었다. 여성단체 기관지나 <여성신문> 이었다. 살뜰하게 대해주지 못했던 속가 어머니와 여동생이 생각나서 차마 잡아떼지 못하셨다. 그렇게라도 해야 미안함이 덜어져 마음이 가벼워진다는 말씀을 내게 하신 적이 있다.
■ 스승이 없는 시대의 스승
법정 스님의 선생님은 누구였을까? 첫 번째 스승은 두말할 것도 없이 부처님이었을 것이다. 그밖에 또 누가 있을까? 스님이 의지하신 스승은 책이 아니었을까 싶다. 스님은 내게 몇 권의 책은 꼭 가까이 하라고 권유 하셨다. 거창한 고전이거나 관념적인 철학서가 아니라 스님께서 차를 마시듯 사랑하셨던 책들이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소로우의 <월든>, 신채호 선생의 <신채호 전집>,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사>등이었다.
어느 스님이 미국 여행을 간다고 인사하자, 스님께서 보곤 했던 <신채호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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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선뜻 주시면서 “어머니가 문둥이여도 버려서는 안 되듯이, 내 나라가 아무리 썩고 잘못됐다고 하더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셨다. 스님께서는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도 <신채호전집> 못지않게 마음으로 음미하면서 사색하고 영향을 받으셨다.
◎ 3부 법정 스님은 누구인가
★ 법정 스님의 사상과 진면목
■ 스님은 수행자, 글은 방편
사진첩을 펼치면서 보니 오래된 법정스님 사진이 눈에 띈다. 36년 전에 찍은 사진이다. 내 나이 34세 스님을 불일암에서 뵙고 난 뒤 송광사 도성암 앞에서 찍은 1985년 여름날의 기념사진이다. 현재도 성당에는 송광사 수련원장 현묵 스님이 계신다. 1대 송광사 수련원장은 법정스님이셨다. 법정스님이 수련원장 자리를 내 놓으신지 실로 몇십 년 만에 현묵스님이 취임한 셈이다. 그래도 제가 불자들이 수행할 수 있는 공간이 되살아나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승속이 하나라는 법정 정신을 잇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샘터사에 근무하면서 스님의 산문집 편집담당자였으므로 스님께 용무가 있어서 내려갔던 것 같다. 밀짚모자를 쓰신 스님은 아마도 54세 쯤 되셨을 것이다. 그때까지 스님은 상좌를 받지 않으셨다. 내게 고백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부처님께서 세납55세에 아난다를 상좌로 허락하셨으니 부처님보다 먼저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나는 스님의 뵌 지 몇 년 후에야 제자가 되었다. 스님께 허락을 받고 불일암으로 내려가 하룻밤을 잤다. 다음날은 단옷날이었다. 하룻밤 잔 뒤 아침에 스님께 삼배를 올리고 나서 무염(無染)이란 법명을 받았다. ‘저잣거리에 살되 물들지 말라’는 뜻이었다.
나는 스님을 잘못 이해하는 부분을 바로잡기도 했다. 중견 선승은 스님을 글줄이나 쓰는 학승(學僧)이라고 왠지 비하하는 듯한 말을 했다. 또한 보통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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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흔히 오해하는 지점으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기도 했다.
스님은 수행자인가? 수필가인가?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스님은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서 <무소유>같은 글을 발표했을 뿐이지 본업은 집필이 아니라 수행이었다. 하루에 글 쓰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 혼자 예불하고, 차를 마시고, 손수 끼니를 해결하고, 채마밭을 가꾸고 좌선하고 선어록 같은 책을 읽고, 안거를 마치는 해제 때는 만행하는 등 보통 스님의 일상에서 조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 생명 중심 사상과 무소유 가르침
스님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스님의 글’이라는 방편을 끌어올 수밖에 없다. 내 생각이지만 스님의 면목을 한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나는 <법정 스님의 뒷모습>이나 <그대만의 꽃을 피워라>, <법정 스님 인생 응원가>등 내 산문집을 통해서 스님의 면목을 헤아려보기도 했다.
스님은 철저하게 산승(山僧)으로,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처럼 자연주의자로 사셨다는 점이다.
스님은 산을 떠난 적이 거의 없었다. 길상사를 창건하시고 나서도 살아생전에는 단 하룻밤도 주무시지 않고 강원도 수류산방으로 가셨다. ‘살아생전’이란 조건을 단 것은 스님께서 임종하신 뒤 단 하루 길상사에서 머무셨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나는 스님의 산문집이 왜 독자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는지 의문이 들어 스님께 여쭈었다.
“스님, 스님의 산문집 10여권을 만들면서 느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독자들이 스님 책을 사랑하는 이유는 스님의 시적 감정이나 현실을 보는 예각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허허 그래요?”
“스님들의 글에는 일관된 사상이 있습니다. 그 사상에 공감하여 독자들이 스님 책을 꾸준히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스님 사상이라면 인간은 물론 벌레 한 마리,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 등 유무 정물의 생명 가치가 같다는 생명 중심 사상인 것 같습니다.”
이런 대화를 나누었는데 산승인 스님의 글은 깊은 산의 메아리처럼 울림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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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는 질서와 휴식이, 그리고 고요와 평화가 있다. 숲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안개와 구름, 달빛을 받아들이고, 새와 짐승들에게는 깃들일 보금자리를 베풀어준다. 숲은 거부하지 않는다. 자신을 할퀴는 폭풍우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너그럽게 받아들인다. 이런 것이 숲이 지니고 있는 덕(德)이다.’
산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산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다. 산은 곧 커더란 생명체요, 시들지 않는 영원한 품속이다. 산에는 꽃이 피고 꽃이 지는 일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시가 있고, 음악이 있고, 사상이 있고 종교가 있다.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나 종교가 벽돌과 시멘트로 된 교실에서가 아니라 때 묻지 않은 자연의 품속에서 움텄다는 사실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현대로 올수록 사람들은 ‘소유’를 강요하는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고픈 열망을 갖게 된 것 같아요. 내가 <무소유>란 책을 낼 때는 ‘무소유’란 개념이 없었지요. 또 ‘무소유’를 정신적 가치로 알아주지도 않았어요. 책 제목을 지을 때 출판사 사장이 난색을 표했는데 내가 우겨서 정한 제목이었지요.”
당시 출판사 사장은 범우사 윤형두 수필가였다. 그런데 스님은 나중에 무소유를 ‘나눔’의 개념으로 승화시켰다. 스님의 맏 상좌 덕조스님에게 들은 이야기다. ‘무소유는 나눔이다’라는 명제가 확실해지는 일화다.
스님이 소형차를 몰고 가는 것을 보고 한 신도가 말했다. “스님, 무소유라고 말씀하시면서 왜 차를 갖고 계십니까?”하고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스님께서 “아무것도 갖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말라는 것이 무소유지요.”라고 대답하셨다.
그 신도가 가고 난 뒤 스님께서 맏상좌 덕조 스님에게 말했다. “신도 집에 가보면 신발장에 신발이 가득한데 무슨 신발이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어. 필요하지 않은 신발은 나누어주면 서로 좋은데. 나는 덕조 스님에게 신발장 이야기를 듣고는 아하! 하고 무릎을 쳤다.
무소유는 목적이 아니라 나눔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확실하게 깨달았던 것이다. 그동안 나는 ‘무소유’를 스님의 말씀을 빌려‘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 무소유다. 군더더기를 버리라는 것이 무소유다.’라고 사람들에게 뜻풀이만 반복했던 사실이 부끄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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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님의 가풍은 법정선(法頂禪)
스님은 말씀하시기를 “아무리 위대한 석가모니 부처님이라도 한 분이면 족하다.” 라고 하셨다. 스님은 무엇에 의지하고 비교하면서 살기 보다는 자주적인 삶, 주인공이 되어 자기다운 꽃을 피우라고 스님의 여러 산문집에 남겼다.
풀과 나무들은 저마다 자기다운 꽃을 피우고 있다. 그 누구도 닮으려 하니 않는다. 풀이 지닌 특성과 나무가 지닌 특성을 마음껏 드러내면서 눈부신 조화를 이루고 있다.
스님은 중국의 선승들 중에 임제선사의 어록을 즐겨 보셨던 것 같다. 나 역시 임제선사의 ‘살불살조(殺佛殺祖)’나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라는 뜻을 늘 잊지 않고 있다.
살불살조는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라’는 말인데, 스님의 말씀하신 바를 그대로 옮겨보자면 인천(人天)의 스승이신 부처도 극복하고 일가를 이룬 조사도 극복하라는 뜻이다.
수처작주 입처개진은 ‘서 있는 곳마다 주인공이 되고 진리의 땅이 되게 하라’는 뜻인데, 스님의 어록집 <산에는 꽃이 피네>에서 스님은 ‘언제 어디서나 주체적일 수 있다면, 그 서 있는 곳이 모두 참된 곳이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어디서나 주인 노릇을 하라는 것이다. 소도구로서, 부속품으로서 처신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 법정스님 무소유 암자 순례
★ ‘무소유’ 산문집을 펴낸 송광사 불일암
■ 모란은 모란이고, 장미꽃은 장미꽃이다
후박나무 낙엽이 또다시 마당에 떨어지고 있다. 어느 작은 절에 살던 젊은 스님이 낙엽을 쓸어 한 곳에 모으자, 노스님이 낙엽을 이리저리 흩트리며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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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갈 곳을 찾아 제자리에 떨어진 낙엽을 네 마음대로 옮기지 마라.”
노스님의 한 마디는 내 영혼을 오랫동안 촉촉하게 적셨던 것 같다. ‘낙엽을 마음대로 옮기지 마라.’는 말씀은 자연을 거스르지 말라는 자애로운 당부였을 터 우주의 순리 속에서 뒹구는 낙엽 하나도 함부로 손대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 것이 스님의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소설 무소유>가 발간 됐을 때 나는 잠시 난감했다. 법정 스님이 이 세상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책을 보낼 주소가 사라졌던 것이다. 할 수 없이 나는 스님의 영정이 봉안된 불일암으로 가 영정 앞에 책을 바치는 것으로 대신했다.
스님은 흙을 만지고 밟기를 좋아하셨다. 사람이 흙에서 멀어지면 병원이 가까워진다고 늘 말씀하셨다. 내가 남도 산중에 산방을 짓고 들어앉자 스님께서는 누구보다도 환영하셨다. 어느 날인가 스님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왔다.
“내일 가정방문을 가겠소.”
스님은 예정대로 왔다가 한 나절 정도 내 산방에서 차를 마시고 가셨다. 그때의 일을 스님께서는 산문집 <홀로 사는 즐거움>에 남겼다.
현대인의 95퍼센트가 실내에서 일상생활을 보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움찔 놀랐다. 흙을 밟지 않고 사무실이나 교실 또는 공장이나 연구실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니 새삼스럽지만 놀라운 사실이다. 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손가락과 머리를 굴리면서 살아가는 일상을 과연 건강하고 건전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 홀로 마신즉 그 향기와 맛이 신기롭더라
차방인 수류화개실이 들어가 앉을 수 있는 정원을 굳이 말하자면 세 명 정도가 아닐까 싶다. 차를 우리는 스님이 한 명, 다기 앞에 손님이 두어 명 앉게 되면 방은 구석만 남는다. 서너 명만 앉아도 만원사례가 되니 한반도에서 가장 작은 차방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수류화개실은 낯선 손님들과 마주 앉아서 마음에 없는 객담을 나누는 접견실(?)이 아니라 스님 홀로 차를 마시는 차방이라고 해야 옳다.
스님은 차를 홀로 마시고 나서, 한지를 펼쳐놓고 다관과 찻잔을 그린 뒤 ‘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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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마신즉 그 향기와 맛이 신기롭더라’는 짧은 다시(茶詩)를 적어 지인들에게 보내주시곤 했다. 이를 통해 당신이 경험한 ‘턴 빈 충만’을 불가의 단어로 말한다면 진공묘유(眞空妙有)다. 텅 빈 상태는 진공이고 그 상태에서의 충만은 묘유인 것이다.
스님의 모든 그림에는 다관과 찻잔이 하나뿐이다. 찻잔이 두 개면 스님 식의 묵화가 아니다. 찻잔이 하나인 까닭은 스님께서 홀로 차를 마시는 모습의 상징일 것이다. 내 산방에 걸린 그림에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면 다시(茶詩)의 내용이다.
“명산에는 좋은 차가 있고
거기 또한 좋은 물이 난다 하더라.“
오늘은 스님의 다시를 흉내 내어 감히 나도 한 수를 지어본다.
“명산에는 좋은 스님이 있고
거기 또한 좋은 암자가 있다 하더라.“
법정스님만큼 다기를 사랑했던 분도 드물다는 생각이 든다. 찻잔 굽을 손가락으로 오므려 잡고서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그윽한 눈빛은 붓꽃이나 모란꽃을 바라볼 때와 흡사했다. 어느 때인가는 내게 다음과 같이 술회하신 적이 있다.
“무연거사, 다른 욕심은 다 정리했어요. 그런데 아름다움에 대한 욕심만큼은 잘 놓아지지가 않아요.”
멀리 동글동글한 조계산 자락의 봉우리들이 운무에 가려있다. 스님은 산자락을 바라보며 나이 드는 걸 절감하신다고 한다. 짐 같은 자잘한 욕심들은 나이 따라 저절로 정리가 되는데 단 한 가지만은 아직 내치지 못했다고 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욕심, 바로 그것을 어쩌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무소유를 추구하는 불교라 하더라도 심미안까지 놓아버리라고 한다면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란 존재는 로봇처럼 무미건조한 기계가 아니니까.
“최고의 차맛은 홀로 마시면서 음미하는 적적한 맛이지.”
차 한 잔에 자족하는 노승의 모습, 깨달음의 실존이 있다면 바로 그런, 적적한 맛을 즐기는 노승의 모습이 아닐까.
스님은 차를 마시고 나서 기분이 상쾌해지자, 학생이 선생에게 숙제를 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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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치는 것처럼 중국 당나라의 다인(茶人)이었던 노동(盧同)이 지은 <칠완다가(七椀茶歌)>를 빠르게 읊조렸다. 스님께서 의역한 ‘일곱 잔의 차노래’였다.
차 한 잔을 마시니 목과 입을 축여주고
두 잔을 마시니 외롭지 않고
세 잔째엔 가슴이 열리고
네 잔은 가벼운 땀이 나 기분이 상쾌해지고
다섯 잔은 정신이 맑아지고
여섯 잔은 신선과 통하며
일곱 잔엔 옆 겨드랑이에서 밝은 바람이 나는 구나.
스님은 처음 차를 마시는 나에게 차 마시는 마음가짐을 자상하게 당부하셨다.
“꿉꿉하고 더운 여름철에는 차 맛이 제대로 안 나지요. 선득한 가을바람이 불어와 정신이 맑아지고 생기가 날 때 차 향기도 살아나지요. 계절이 바뀌면 옷을 갈아입지요? 다기(茶器)도 바꾸어주면 새롭지요. 여름철에는 백자가 산뜻하고 가을철에는 분청사기나 찻잔 겉에 유약을 바르지 않은 갈색 다기가 포근해요. 여름철에는 넉넉한 찻잔이 시원스럽고 가을이나 겨울철에는 좀 작은 찻잔이 정겹지요.”
그때 수류화개실에는 두 폭짜리 가리개가 하나 있었다. 가리개에는 서산대사가 짓고 스님이 번역한 <선가귀감>의 한 구절이 쓰여 있었다. 어느 서예가가 정성을 들여 만들어 보낸 가리개인데, 스님께서는 차를 마시며 <선가귀감>의 구절을 거울삼아 수행자로서 자신을 엄하게 비춰보는 것 같았다.
‘출가하여 중이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편하고 한가함을 구해서가 아니며 따뜻이 먹고 배불리 먹으려고 한 것도 아니며 명예와 재물을 구해서도 아니다. 번뇌를 끊어 생사를 면하려는 것이고, 부처님의 지혜릃 이어 끝없는 중생을 건지기 위해서다.’
법정스님은 자기질서를 엄격하게 지켰던 수행자이자 맑은 다인(茶人)이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차를 기호식품내지는 습관적으로 즐기는 사람을 차인이라 하고, 차를 통해서 높은 정신의 경지에 오른 분들을 다인이라고 구분하여 부르는 데, 일리가 있다고 동조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사실로 보아 실없는 소리만은 아니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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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소유를 마음에 새긴 쌍계사 탑전
■ 걸레라도 꽉 짜지 마라
하동 화개골은 1년에 한 번씩은 꼭 ‘차나들이’를 하러 들르는 지리산 골짜기다. 차나들이란 낱말은 햇차가 나는 봄에 나들이를 한다는 뜻으로 내가 만든 말이다. 아직은 혼자 사용하고 있지만 순우리말을 사랑하는 차원에서 국어사전에 올랐으면 좋겠다. 차나들이 중에 차회(茶會)를 가진 적도 있다. 쌍계사 탑전의 복수(福水)는 차인들이 즐겨 찾는 샘물이다. 그래서 탑전은 차인들의 성소이기도 하다.
나는 대요스님과 동행하고 있다. 스님이 탑전으로 들어가기 위해 먼저 돈오문(頓悟門)으로 오르는 계단을 밟는다. 이 탑전이 법정스님이 효봉스님을 모시고 시봉했던 곳이다.
효봉스님은 걸레를 짤 때에도 걸레가 찢어지니 꽉 짜지 말 것. 비누도 조각이 완전히 다 놀아 없어질 때까지 쓸 것 등을 손수 시범을 보이시며 가르쳤다. 이러한 스승의 무소유 정신을 닮는 것이 시자로서는 진정한 수행이었다.
금당 편액 좌우에 ‘세계일화(世界一花) 조종육엽(祖宗六葉)’과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이란 추사 김정희 글씨가 걸려 있다. 금당으로 들어가 참배를 한다. 금당 안에는 불상대신 석탑이 봉안돼 있다. 석탑 안에 선불교를 완성한 중국의 육조 혜능 대사의 정상(頂相, 머리)이 실제로는 봉안 돼 있지 않지만 삼신산 산자락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탑전이란 금당의 석탑을 지키는 전각이란 뜻이다.
절하는 것을 두고 우상을 섬기는 행위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할 말이 있다. 지금 내가 하는 절은 나의 허망한 그림자를 지우고 없애는 행위이지 우상에게 나를 구원해 달라고 비는 의식이 아니라는 점이다. 저 석탑이 어떻게 나를 구원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렇게 믿는 이들이 있다면 당장 정신과 치료부터 받아야 할 것이다.
■ 진정한 도반은 내 영혼의 얼굴이다.
시지 생활을 하던 법정스님은 출가해서 입적 때까지 단 한 사람의 유일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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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도반을 만난다. 스님은 그 ‘진리의 짝’을 회상하실 때면 다소 감상적인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대나무 마디처럼 차갑고 단단하게만 느껴지는 법정 스님을 그 벗이 울렸다고 하니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출가해서 처음이었다니까 열이 나고 오한이 들어서 며칠 끙끙 앓아 누웠어요. 그런데 같이 겨울을 났던 스님이 팔십 리 구례읍까지 걸어가서 한약을 구해와 달인 뒤에 마시라고 내밀더라니까. 밤중이었어요 약사발을 보니 눈물이 나오더라고,”
스님은 지난 얘기를 할 때마다 거두절미하고 불쑥 꺼내시곤 했다. 그러니 앞뒤 사연은 스님의 글을 통해서 짐작해야 했다. 스님은 이 일을 두고 ‘진정한 도반은 내 영혼의 얼굴이다.’라고 하셨다. 말 한 마디 없이도 영혼의 대화를 할 수 있는 그런 벗이 도반이라는 것이다.
★ 무소유 삶의 오대산 쯔대기골 수류산방
■ 웬 중인고, 내가 많이 늙어버렸네!
법정 스님서 마지막 사신 곳은 강원도 오대산 쯔대기골 오두막인 수류산방이었다. 스님이 1992년 불일암 생활을 접고 강원도 오두막으로 거처를 막 옮기셨을 때 나는 스님으로부터 이런 당부를 들은 적이 있다. 스님의 건강이 걱정스러워 휴대폰 하나 사드리겠다고 제안하자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휴대폰이 있으면 강원도 오두막에 있는 것이나 서울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그리고 찾아오지 마시오. 그곳이 밝혀진다면 더 깊은 산골로 들어갈 것이오.”
내게 하신 말씀을 월간 <샘터>지에 글로 선언하시기까지 했다. 그 뒤 몇 년이 흐르자 누군가가 다녀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다시 10여년 뒤 스님께서 병이 깊어졌을 때는 상좌스님과 한의사가 자주 드나든다는 소식과 직접 다녀온 지인이 스님의 안부를 전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까지도 우직하게 오대산 쯔대기골로 갈 마음을 내지 않았다. 해인사 장경각 법보전의 주련을 떠올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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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계신 곳 어디인가.
지금 그대가 서 있는 그 자리!
- 圓覺道場何處 現今生死卽時 -
실제로 스님은 자주 만나는 사람보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자기 세계를 일구며 스스로의 질서를 흩트리지 않고 사는 사람을 더 신뢰했다.
나는 올 해도 해바라기 씨앗을 산방 주위에 군데군데 심을 생각이다. 쯔대기골 오두막 뜰에서 자란 해바라기 씨앗으로 스님께서 내 산방에 심으라고 주셨다. 해바라기 고향은 네덜란드다. 스님께서 파리 길상사를 가셨을 때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까지 올라가 고흐미술관 매점에서 사 온 해바라기 씨앗이라고 말씀하셨다. 유난히 달을 좋아하셨던 스님께서 태양의 화가인 고흐가 즐겨 그렸던 해바라기 씨앗을 구해와 쯔데기골 오두막 뜰에 뿌린 것은 무척 이채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오두막 수류산방이나 일월암에는 스님과 관련된 유품은 단 한 점도 없다고 한다. 스님의 유품 중에서 보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미국에 살았던 여동생의 딸이 열두 살 때 그린 불일암의 ‘빠삐용 의자’다. 스님께서 보시자마자 감탄하셨던 그림이다.
나는 빠삐용 의자 그림이 사람들에게 공개되기를 바랐는데 다행히 지금은 길상사 행지실 스님의 유물을 전시하는 방에 있다.
추사 김정희는 한 잔도 아닌 반 잔의 차향과 맛으로도 마음속에서 수류화개(水流花開)를 경험했다지만 오늘 나는 그림 한 점으로 미묘한 기쁨을 누리고 있다. 순간적이나마 내 마음이 선경(仙境)이고 극락이다. 오늘은 그림 한 점이 내게 법문을 한다.
무소유가 지향하는 것은 나눔의 세상이다.
나눔은 자비와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자비와 사랑은 인간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2021.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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