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2인조

보해성산 2021. 6. 7.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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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조

- 우리는 누구나 날 때부터 2인조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과 잘 지내는 일이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

■ 이석원 산문

0 1971 서울 출생

0 2009 산문집 <보통의 존재>

0 2015 이야기 산문집 <언제 들어도 좋은 말> 외

0 가수 겸 작가

◎ 1월 어느 리트리버의 일생

■ 나는

이십오 년 만에 다시 그곳을 찾는 나의 마음은 그리 덤덤하지 만은 않았다. 나름대로 잘 버티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새로 선택한 병원엘 처음 가기 전 날, 육체적 통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치과에 갈 때보다 더 긴장되었던 이유는 마음의 치료를 받을 땐 마취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정말이지 오로지 아픈 게 싫다. 냄새나 울림 같은 것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언젠가 병치레 끝에 상흔처럼 남은 얼굴의 기미를 지워보겠다고 강남의 한 피부과에 갔을 때였다. 눈에 용접공처럼 커다란 고글을 쓰고선 내 얼굴에 푸른 광선을 쪼이던 의사는, 내가 거의 악 소리를 내며 괴로워하자 놀라며 말했다. “어린 아이도 참는 시술인데….”

그런 나였으므로 압도적으로 마취주사를 아프지 않게 놓는 지금의 치과를 선택한 것에 만족했다. 과연 고장 난 내 마음은 어떤 병원이 가장 안 아프게 치료를 해줄는지.

고심 끝에 내가 선택한곳은 모 대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자기도 이미 그곳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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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고 있으면서 내게 추천을 해준 이는 셀럽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라는 뜬금없는 말을 덧붙였는데, 글쎄 그게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으나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나는 셀럽일까 아닐까, 당연히 아니지만 조금 모호한 구석은 있다. 어디 가면 다 알아보는 유명한 사람은 아니지만 세상 아무도 모르는 삶은 또 아닌, 이상한 중간자적 존재랄까.

“셀럽” : 연예, 스포츠 등에서 인지도가 높은 유명인사.

진료 당일 아침 오랜만에 가 본 대학병원은 마치 호텔처럼 크고 쾌적해서, 공간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마취제 같았다. 고통과 두려움, 적막과 고독감 같은 질병을 다루는 공간 특유의 감정들이 건물들이 주는 산뜻함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것만 같았다고 할까. 과연 보이지 않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다를까.

2층 정신건강 의학과를 찾아 접수를 하고 항목이 무척 많은 우울증 검사지에 일일이 기입을 한 후 자리에 앉아 내가 대면할 의사는 어떤 분일지 상상했다. 세월이 그렇게나 흘렀어도 난 일주일에 한 번 대학로에 있는 병원을 찾던 순간을 여즉 기억한다. 그러고는 검은 뿔테안경을 쓴 채 차분히 나를 응시하던 선생님에게 지난 한 주간 있었던 일들을 털어 놓느라 감정이 극도로 복받쳐서는, 매번 탈진에 탈진을 거듭해서는 방을 나서던 기억들.

그러던 치료를 언젠가 중단하고 몇 년 뒤 우연히 시내 한 서점에서 선생님과 마주쳤을 때였다. 나는 마치 옛 담임선생님을 만난 것 같은 기분에 반가워 인사했지만 뜻밖에 선생님은 깜짝 놀라며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나셨다. 왜지? 왜 저러시는 거지? 나는 선생님의 그러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훗날 다른 의사를 통해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정신과 의사는 어떤 식으로든 진료실 밖에서 환자와 접촉 자체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잠시 후, 담당 의사와 만나기 전 먼저 다른 분과 예비 면담이란 걸 했다. 레지던트로 짐작되는 젊은 남자 의사가 따로 독방에서 내게 상세히 이것저것 사적인 것들을 물었다. 한순간에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사생활이 낱낱이 드러나는 순간, 과연 이 정보들이 지켜질까? 안다 내가 무슨 연예인도 아닌 만큼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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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은 할 필요가 없는 것일 테지. 허나 망상이란 이성으로 물리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나는 불쑥 고개를 쳐든 내 근거 박약한 불안감을 애써 누르며 면담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면담을 마치고 돌아온 진료실 앞에는 간호사가 둘 있었는데 한 사람은 초진 담당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재진 담당이었다. 정확한 속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어딘가 소속이 달라 보이는 두 사람 중, 초진 담당은 심할 만큼 친절했고 재진 담당인 다른 간호사는 놀랍도록 사무적이고도 차가웠다.

‘병원은 서비스를(친절을) 파는 곳이 아니에요.“

라며 내가 알던 어느 정신과 의사가 진저리를 치던 기억이 난다. 환자들이 조금만 자신이 불친절을 겪거나 무시당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들 쉽게 폭발하는지 수없이 겪은 끝에 생긴 일종의 노이로제였다.

나는 좀 모자라서 그런지 어디 백화점이라도 가면 내가 팔아주는 입장이면서도 매장 측의 눈치를 보는 타입이다. 조금 오래 골랐다 싶으면 미안해서 별로 마음에 들지도 않는 옷을 살 때가 있고, 식당에서는 혼자 먹는 게 눈치 보여 두 개를 시키는 일이 너무 많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기 때문에 누군가에겐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겠지만 어딘가엔 나와 같은 사람들이 꽤 있다는 것을 안다.

■ 어느 리트리버의 일생

나는 천성적으로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걸 좋아하기에 대중 앞에 서왔다. 그렇기에 반대로, 나는 나 때문에 누구 한 사람이라도 불편해 지는 상황이 생기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마치 누구와도 다투지 않는다는 “리트리버”처럼, 문제는 이런 성향이 시도 때도 없이 발휘된다는 것인데, 그건 아파서 찾아간 의사 앞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첫 진료 후 병원을 갈 때마다 난 환자인 나보다 의사의 기분을 맞춰주는 데 더 신경을 썼다. 객관적인 내 상태를 솔직히 말하기보다는 당신 덕분에 이렇게 좋아졌다며 익숙한 연기를 한 것이다.

어느 날 식사 약속이 있어 아는 분과 둘이 초밥을 먹고 근처에 있는 어느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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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자리를 옮겼는데 갑자기 티브이에서나 보던 유명한 스타일리스트가 합석을 하는 것이 아닌가. 아, 내일 모래면 나이가 오십이나 되면서도 낯선 인물의 등장에 여지없이 굳어버리는 내 얼굴과 혀, 잠시 후, 나는 내가 그 즐거운 자리의 방해꾼이 되어 있다는 생각에 더 이상의 뻘쭘함을 견디지 못한 채 도망치듯 그 곳을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조금이라도 낯선 사람과 자리를 하게 되면 백이면 백 원래 그렇게 말이 없냐는 말만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듣다가 늘 이렇게 중간에 혼자 빠져 나오곤 하는 것이다.

약을 종류별로 분류해서 넣어 놓을 서랍이나 박스 같은 걸 준비하자고 한 지가 10년은 된 것 같은데, 그 긴 세원 동안 결심은 실천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저 약들은 자기 자리를 갖지 못한 채로 대충 집안을 떠돌다 끝내는 나와 숨바꼭질을 할 것이다. 그럼 또 그때마다 스스로에게 짜증을 내면서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언젠가 또 같은 상황이 반복되겠지.

결심하고 실천하지 않고 또 깨닫지만 그래도 바뀌지 않는…. 반복해서 여러 번 깨닫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라고 책에 썼던 사람이 너(나) 아니었던가?

■ 스트레스 때문에

뭐지 이게? 말로만 듣던 공황장앤가?

2017년엔 오랫동안 해 오던 음악을 그만두고 얼마 뒤, 원인 미상으로 근 일 년을 걷지 못했던 적이 있다. 그러다 꾸준한 재활을 통해 조금씩 회복하는 듯 했으나 이번에는 이듬해 연말에 새 책을 내면서 다시 커다란 스트레스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누가 내 이름만 불러도 불안해 죽을 것만 같았고 소화 기능이 멎어버린 듯한 위는 한 달을 죽만 먹어도 낫지를 않는 것이었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심각한 몸의 이상을 확신하며 정밀 종합검진을 받았으나 결과는 발이 그랬던 것처럼 역시나 이상 무.

나는 사고로 가까운 사람을 잃는 큰일을 겪지도 않았고 전 재산을 날리는 사기를 당하지도 않았지만 일상을 지배하는 스트레스와 걱정 불안 등에 지속적으로 노출됐고 가랑비에 옷이 젖듯 그렇게 지쳐가다가 어느 순간 몸 안의 셔터가 덜컥하고 내려갔다.

그 결과 몸의 신경이 교란되어 바늘로 온몸을 찌르는 듯한 통증에 여덟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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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 화장실조차 기어가야 했던 보행 장애, 쉼 없는 불안과 공포 및 온갖 피부트러블, 이유 없는 가슴 두근거림 등 끝이 없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증상에 시달렸다.

그 모든 증상들은 의학적인 어떤 검사로도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기에 이제 나는 스스로 그것을 극복하려 한다. 살고 싶어서….

■ 미움 받는 연습

살면서 어떤 결핍감이 느껴질 때, 저는 ‘지금 내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들’을 적어 봐요. 그렇게 하나하나 적어 가다 보면 내 감정의 정체가 드러나서, 공연히 그러는지 이유가 있어서 뭔가 해결을 시도할 수 있는 것인지를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죠.

나는 의사의 처방은 그것대로 따르면서, 나를 치료하고 회복하기 위한 나름의 노력을 병행하기 시작했어요.

일단 지금의 이 증상들이 발화하기 시작한 지점이 언제였나를 더듬어 보았습니다.

그건 역시 음악을 그만두던 2017년 무렵이 아닐까. 전 뮤지션이었지만 오랫동안 그 일을 그만두길 바라왔어요. 저는 좋아했던 음악이 일이 되어버린 상황이 괴로웠고, 그게 내 음악 듣는 즐거움을 영영 빼앗아 가버렸다는 걸 알았을 때 더는 그 일과 잘 지낼 수 없었죠. 그래서 조금이라도 다른 일을 할 건수가 생기면 아무 거리낌 없이 그 일을 시작하곤 했어요. 와인도 팔고, 책도 내면서. 제게 음악이란 건 언제든 그만 둘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다시 돌아가게 되더라고요. 때로는 돈 때로는 나 자신을 담아내지 못하면 견딜 수 없는 상황이 생겨서….

어쨌거나 시간은 흘렀고 이제 음악은 관뒀으니 남은 한 가지 일을 해야 하는데 이게 또 여의치 않더군요. 저는 이제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은 마음에 음악을 관 둔 거였는데, 그러고서야 안거예요. 내겐 음악과 글이 서로에게 출구와 도피처가 되어주었다는 걸.

음악을 만들다 힘이 들면 글을 쓰고 책을 만들다 여의치가 않으면 음악으로 가면서, 나는 그 두 일이 내게 그런 긍정적인 역할을 했는지, 녀석들이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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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좋은 관계였는지를 하나를 떠나보내고서야 안 거죠.

그 난리를 치고 그 욕을 먹어가며 음악을 관뒀는데 이제 일로서의 글쓰기가 똑같은 표정으로 저를 노려보고 있었으니까요.

이것들이 2017년 한 해 동안의 이야기이고 그 직후부터 저는 걸을 수가 없게 되었어요. 족저근막염 그런 것도 아니었고 엠알아이나 신경전도 검사 등 어떤 것으로도 이상이 발견되진 않았죠. 11월 초쯤. 신작이 나온다고 알리니 사람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더군요. 출간 직후 반짝하던 책의 판매고가 곧 내리막길을 걷더군요.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한없이 가라앉는 내 자신을 통제할 길이 없더군요. 일단 멘탈이 무너지고 나니까 독자들을 대하는 일도 감정 노동이 되더라고요. 저는 방송출연도 하지 않고 남들이 하는 소위 홍보란 것도 잘 하지 않으니, 믿을 것은 오로지 저 사람들밖에 없는데, 저들이 내 은인이고 내 생사여탈권이 가지고 있는데, 그러다 그 일이 터진 거예요.

■ 미움 받는 연습(2)

때는 2018년 11월. 네 번째 책을 막 내고 서점에서 사인회를 가졌는데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이 왔어요. 여러분들이 기다리기만 하다. 사인도 받지 못한 채 돌아가는 일이 벌어지게 됐죠. 가뜩이나 남이 나 때문에 피해보는 걸 질색하는 저는 몹시 민감한 상태가 되어서 그 일을 수습하는데 그해의 남은 날들을 거진 쓰다시피 했어요. 당일 오신 분들의 연락처를 모두 확보해서 일일이 사과드리고 보상조로 사은품을 따로 직접 만들어서 배송하고 사인회 여러 번 다시열고 거듭해서 사과문을 쓰느라 한 달이 갔죠.

사건은 그 모든 일을 마친 후 불거졌어요. 한 독자가 사은품을 못 받았다면서 제 블로그를 통해 연락을 해 왔는데 화가 많이 나 계셨어요. 이분이 화가 난 이유는 단지 사은품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남들은 다 받았는데 자신만이 받지를 못한 거라고, 다시 말해 본인에게만 보내주질 않은 거라 믿고 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제가 그럴 리가 있느냐 다시 확인을 해 보겠다고 말씀을 드렸는데도 그분의 마음은 누그려지지 않았고 급기야 제게 해서는 안 될 말까지 하시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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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믿든 안 믿든, 저는 가능한 많은 이들에게 잘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어요. 남이 나 때문에 실망하거나 불안해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고 필요하면 연기까지 하면서요.

며칠 후, 제가 가슴앓이를 하고 있던 그때, 그분이 다시 블로그에 와서는 새 글을 남겼어요.

정말 죄송하다고, 동생이 물건을 받아서 자기 방에 두고 어딜 가버리는 바람에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그리고 그분은 덧붙이셨죠. 주소를 알려주면 사과의 뜻으로 선물을 보내고 싶다고, 자기가 조금 심했던 것 같다고.

저는 그 모든 일들이 힘겨워 며칠을 끙끙 앓다가 더는 상황을 이렇게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마침내 용기를 내었습니다. 그건 저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어요. 누군가에게 예의라는 이름으로 정해진 답변을 하는 것이 아닌 제 솔직한 심경을 밝혔던 건.

그 뒤로 블로그에서의 내 바뀐 모습에 가끔은 독자들의 이런저런 항의가 오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전 오히려 그들의 불편함이 반가웠어요. ‘신중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아무도 불편하지 않을 글을 쓰는 일은, 작가로서 가능하지도 않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저는 미움받는 연습을 조금씩 해 나갔고 그게 내 스스로 내린 첫 번째 처방이었습니다.

누군가를 두려워하는 것과 존중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 그 어떤 순간에도 ‘나’보다 중요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

비록 그게 가족이나 다른 어떤 중요한 존재라 할지라도.

저는 그렇게 다시 건강해지고 남은 생을 잘 살기 위한 내 삶의 매뉴얼의 첫 장을 써내려갔어요. 그게 내 치료이자 회복의 시작이었죠.

중요한 건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아니었어요. 나는 존중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이고 때로는 그 존중은 스스로가 이끌어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노’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미움 받는 것을 두려워하면 어떤 존중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죠. 어쩌면 진작부터 알았지만 이제 와서야 비로소 실천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죠. 태어난 지 사십팔 년 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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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좋은 습관이란 게 있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써온 것.

◎ 2월 이게 인간인가?

 

■ 5일

낮에 주문한 택배가 와서 박스를 뜯으려 카터 칼을 찾는데 아무리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살면서 이런 일들을 몇 번이나 겪어 봤을까. 백 번? 이백 번? 저녁땐 마트에 가서 면도날을 사려는데 무려 이십년 넘게 써온 면도기가 질레트인지 쉬크 울트라인지가 살 때마다 생각이 나지 않더니 오늘도 그랬다.

이게 인간인가?

정리해야 한다. 삶의 가능한 모든 것들을 더 이상 이런 일들이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도록 내버려두지 않으려면.

 

■ 7일

이 모든 사슬을 끊기 위해 매일 아침 그날의 할 일을 적고 일일이 지워나가면서 미루지 않고 하기로 했다. 같은 문제가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오랫동안 팽개쳐두었던 매뉴얼도 다시 구축하기로 했다. 단순히 건강 상태의 회복만이 아닌 앞으로의 생을 잘 살기 위한 내 삶의 총체적 지침을 마련해야 한다. 우선 분야별로 검색이 용이하도록 한 포털에 공간을 마련한 뒤 가장 먼저 이렇게 적었다.

‘내가 쓰는 면도기는 질레트 마하3 터보. 다시 마트에 가서 한 번만 더 그 이름을 헛갈리면 넌 인간이 아니’라고.

■ 13일

나는 세상에 내가 만든 무언가를 던져놓고 사람들의 인정과 평가를 얻어야만 살 수 있는 사람. 2017년에 발표했던 마지막 앨범의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았고 그 뒤에 낸 네 번째 책도 연달아 그러해서 지금은 꽤 깊은 무기력함에 빠져 있다. 자신감의 상실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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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세상으로부터 버려졌다거나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존재라고 느껴질 때, 다른 사람들은 어떤 방법을 쓸까.

■ 18일

병원을 다녀왔다. 오늘로써 세 번째

곧 종합검진을 받아야 하는데 수면제가든 성분이 있는 약을 먹으면 수면 내시경을 할 때 마취가 안 될 수도 있다는 말에 정신과 약을 먹지 못하고 있다. 하는 수 없이 검진이 끝난 뒤부터 먹기로 했는데 오늘 그 사실을 정신과 선생님께 말씀 드리지는 못했다. 지시에 잘 따르지 않는 문제 환자가 되기는 싫었기에. 하지만 이미 그러고 있으면서, 언제나 그렇지만 남을 실망 시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거짓말쟁이가 되는 쪽을 택하는 나.

■ 19일

지난 연말에 나온 네 번째 책의 성적이 계속 좋지 않다. 어떻게든 반등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판매 그래프는 계속 떨어져만 간다. 출판사와의 남은 계약문제도 있고, 어차피 이번 책의 결론은 난 만큼 가능한 서둘러 다음 책에 들어가고 싶은데 무서워서 글이 써지지 않는다.

거절이란 내게 무엇일까. 이십오 년 전 내 정신과 진단서에 ‘경계성 인격 장애’라는 병명이 있긴 했지만 그다지 의미를 두진 않았다. 난 그저 내 병을 크게 우울증으로 이해했으므로, 그런데 나중에 그 경계성 인격 장애라는 게 거절과 상실에 유난히 취약한 병이라는 걸 알고는 좀 의외란 생각이 들긴 했었다. 나도 거절당하는 일에 그냥 남들만큼 힘들어하고, 남들도 나만큼은 반응 한다 고 생각했기 때문에.

 

■ 22일

오늘도 쓴다. 내가 너무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닌지에. 그래서 이제 영원히 다시는 책을 낼 수도 없고 굶어죽게 된 게 아니라면 난 어째서 이렇게까지 결과에 관해 공포를 느끼고 있는 지에 대해, 어쨌든 상태가 이렇게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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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져 버렸으니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상황을 극복하고 체력을 회복해서 다음을 도모할 수 있을지에 대해.

아무것도 서두르지 말자. 아무 것도.

너(나)는 지금 환자니까.

◎ 3월 나를 살리기 위한 지침들

■ 나를 살리기 위한 지침들

1.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나를 회복시켜갔다. 건강뿐만 아니라 돈 문제, 일, 인간관계, 온갖 생활 습관, 취미 등 삶의 전반에 대한 모든 것들을 돌아보고 정리하고자 했다. 건강은 그 모든 것들과 관련이 되어 있었으므로, 계속 정리를 해가다보니 나름의 지침도 하나 둘씩 생기게 되었는데 그중 첫째가 ‘나를 탓하지 않기’ 였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너무 많은 일들에 내 탓을 하면서 살아왔고, 어쩌면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중인지도 몰랐다. 이럴 때 스스로에게 한없이 관대해지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또 있을까. 나는 내 몸과 마음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탓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설령 뭘 잘못했어도 다음에 잘하면 된다 격려하고, 손톱만한 일이라도 호들갑스럽게 자신을 칭찬해주려 애쓰면서 더는 어떤 자책감도 느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계속해서 나를 살리기 위한 두 번째 지침은 ‘미루지 않기’, 귀찮음과 필사적으로 싸워 이기기이다.

나는 안 그래도 게으른 기질에다 마음의 병까지 더해져서인지 아침에 눈을 뜨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조차 싫어서 미칠 것 같은 귀찮음과 싸워야 했다. 그래서 난 매일 아침 너는 벌레가 아니라고 외치면서 가까스로 일어나 하루를 시작해야만 했다. 그래도 조금만 긴장을 풀면 금세 다시 무기력해져버리곤 했

기에,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날의 할 일을 일일이 노트에 적고선 하나씩 지워가며 어떻게든 하려고 노력했다. 길 건너 구멍가게까지 걸어가서 20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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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리 쓰레기봉투 한 묶음 사 오기, 진공청소기의 먼지통 비우기…. 남들이 볼 땐 작은 일일지 몰라도 그때의 내겐 하나하나가 하기가 태산 같은 일이었다.

뭐든 애를 썼으면 보상이 따라야 하는 법, 그것이 살기 위한 나의 세 번째 지침이었다. 가능한 자주 나에게 선물을 해주기, 뭘 했으면 어떤 식으로든 보상해주기.

나는 이제껏 한 번도 해본 적 없으나

바로 지금 해야만 하는 그 일을 하기로 했다.

스스로에게 한없이 관대해 지는 것.

2.

나는 한국사람. 평생을 뭐든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것만을 미덕으로 알고 살아왔다. 어떻게 하면 잘 쉬는 것인지 그게 왜 중요한지, 쉬는 동안엔 무엇을 하며 보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어본 적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한다.

그래서 생겨난 네 번째 지침, 잘 쉬는 법을 익혀라. 그러기 위해서는 취미를 가져라.

나는 내게 평생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긴 휴식, 다시 말해 일종의 안식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때문에 그 시간을 채울 무언가를 찾는 것은 사뭇 절실한 과제가 되었다. 취미를 찾는 일이 절실하다는 게 조금 우습긴 했지만 그걸 찾지 못하면 쉴 수가 없고 사람이 쉬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이번 일로 충분히 경험했으므로.

나를 살리기 위한 지침 다섯 가지.

1. 내 탓하는 습관 버리기

2. (책에는 기술하지 않았지만)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끊임없이 긍정하 는 습관 갖기

3. 미루는 습관 버리기. 안 그러면 상황은 영원히 나아지지 않으니까.

4. 스스로에게 자주 선물을 해주기

빵 한쪽이라도 좋으니 무엇이든 보상하는 습관을 들이기.

5. 잘 쉬는 법 익히기

그러기 위해서는 취미를 갖기.(습관처럼 몰두할 거리를 찾자)

- 결국 나를 살리는 건 습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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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내가 알 수 있다면

인생의 많은 문제들이 지금보단 수월하게 해결될 텐데.

 

■ 박찬욱(영화감독)

친구가 낮에 자기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만나자길래 나갔더니 안 그래도 좋은 차를 타던 녀석이 재혼을 핑계로 더 좋은 차로 바꾼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때 왜 그랬는지 난 새 차 얘기를 하며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친구에게 대뜸 이런 말을 했다.

“야, 박찬욱은 차 없어 지하철을 타도, 버스를 타고 다녀도 박찬욱은 박찬욱이니까.” 친구는 내 말에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대꾸했다.

“석원아, 난 박찬욱이 아니잖아.”

순간 멍했다. 당연히 친구는 박찬욱이 아닌데 뭘 어쩌라고 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난 니가 비싼 돈 주고 명품차를 사기보다 니 자신이 명품이 되었으면 좋겠어. 뭐 이런 뻔한 얘기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거니와 오히려 그런 말 하는 사람 조금 식상하다고까지 생각하는데. 어쨌거나 일단 자극을 받은 친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야, 내가 깐느 가서 대접받는 세계적 거장도 아니고, 내 돈으로 저런 거라도 타고 다니면서 기분 좀 내는 게 그렇게 잘못된 일이냐?”

모르겠다. 난 그런 말을 하는 친구에게 그런 거 다 소용없느니, 차로 채워지는 자존감이라는 건 너무 슬픈 얘기가 아니겠느냐하는 말로 대꾸하지 않았다. 그건 그것대로의 가치가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남의 선택과 행위에 대해 함부로 평가를 하는 건 나부터가 가장 싫어하던 바였으니까.

영화를 전공했으나 다른 쪽에 더 성공을 거두었던, 그래서 원래도 많던 부모의 재산을 더 많이 불릴 수는 있었던 친구는 그날 비싼 호텔에서 비싼 술을 마시며 말했다.

“석원아, 난 내 인생에서 부질없지 않은 게 하나라도 있었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돈 주고 고급차 사는 거 소용없고 부질없다는 말 같은 거…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 12 -

그날 밤 잠들기 전, 친구의 말이 자꾸만 나를 때렸다. 부질없지 않은 게 인생에서 하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

그래 어쩌면 내개 지금 필요한 것도 그거였는지 모른다. 부질없지 않은 무언가. 아마도 난 그게 너무 필요한데 좀처럼 발견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돈이라도 주고 살까 말까를 고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비싼 돈을 들여 산 새 차를 부질없어 하지 않을 자신이 없어 이렇게 망설이고 있는 것이고.

- 누구도 스스로 생각하는 만큼 불행하지 않으며

또한 남들이 짐작하는 것만큼 행운아도 아니다.

◎ 4월 행복은 나로부터

■ 데이비드 호크니

- 사진작가, 영국 왕립예술학교 졸업, 20C 회화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 화가

나는 보통 남의 경조사에 가면 숨듯이 있다가 중간에 빠져 나온다. 물론 사진 촬영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유난한 외모 콤플렉스 때문에 스무 살 넘어 내가 좋아서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을 정도니까. 그런데 이번에 식을 올릴 친구 놈은 워낙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축사까지 맡는 바람에 아무렇게나 하고 갈 수도 없었다. 그 기쁘면서도 난감했던 친구의 경사가 그러니까 녀석의 생애 두 번째 결혼식이 그토록 길었던 내 새 차에 대한 고민을 끝내주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우선은 당일에 입을 옷이 필요했는데, 다들 그렇겠지만 옷을 산다는 건 보통일은 아니다. 일단 반복해서 뭘 입고 벗는 다는 게 체력 소모도 만만치 않은데다 수많은 선택지 중에 하나를 결정한다는 것도 쉽지만은 않고, 더군다나 결혼식인데 입고 갈 옷을 장만한다는 건 이래저래 더 신경이 쓰이고 신중할 수밖에 없는 일, 안 그래도 뭘 사든 한 번 가서 덥석 사는 체질이 아니다 보니 이번에도 같은 곳을 서너 번을 넘게 가고서야 어찌어찌 결정을 해 입고 겨우 식을 무사히 치렀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피로연 파티도 잘 끝내고 신랑 신부도 웃으며 떠나보내고 다 잘 마쳤건만 그 모든 게 끝나고 난 뒤에도 호텔 앞마당엔 호크니의 그림처럼 햇볕이 쨍하고 내리쬐던 오후였다. 내 결혼식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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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마음이 분주했던지. 나는 고생 끝에 행사 하나를 마치고 난 가수처럼 이상한 공허감에 시달리며, 이제 어딜 갈까 누굴 만나 무엇을 할까 방황하다가 나도 모르게 홀로 집이 아닌 압구정동 갤러리아로 향하게 되었던 것이다.

■ 옷

어려서 옷을 유별나게 좋아하긴 했지만 나이 들어서는 먹고 사는 것에 치여 그랬는지 그저 몸이나 가리자는 마음으로 살았다. 옷이라기 보단 차라리 껍데기에 가까운 것들을 입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꿈에라도 스티브잡스를 따라 하는 건 아니었지만 같은 옷만 입는 게 사실 편해서 시커먼 옷을 여럿 구비해 놓고는 꽤 오래 그것만 입었다. 양말도 같은 검은색으로 몇 십 켤레씩 사다 놓으면 짝을 찾을 필요가 없어 편한 것처럼 그때 친구 결혼식이라고 뭐 거창하게 칠보단장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고 그전 해에 걷지를 못해 누워만 있다 보니 살이 많이 쪄서 그거나 커버할 요량이었을 뿐, 때문에 식을 마친 뒤에도 다시 그곳을 찾을 줄은 몰랐는데, 왜냐하면 이렇게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저 원해서 백화점을 찾는 일은 거의 드물었기 때문이다.

난 우리집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별종이었다. 엄마 할머니 누나 고모들 포함 여자들이 여덟이나 되는 집에서 자랐어도 나보다 옷 욕심이 많은 사람은 없었다. 옷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마음에 드는 녀석을 발견해서 고민 끝에 집으로 데려오면 꼭 하늘을 나는 것처럼 황홀해지는 그 심정을, 그런대 그때 친구의 결혼식 이후 찾은 백화점에서, 언제 마지막으로 느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던 어릴 적 그 감정이 수십 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다시금 전해지는 게 아니겠는가.

그러다보니 보름이 지나고 한 달이 가까워 오도록 거의 매일 백화점엘 출퇴근하다시피 하는 일상이 지속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한 달이 넘어서면서부터는 정말 계속 이래도 되는 건지 슬슬 걱정이 되기고 했지만 나는 끝내 그 일을 멈추지 않았다. 나 자신을 위해 이렇게 돈과 시간을 써보는 일이 평생 처음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 행복은 나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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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내 손으로 부모님을 부양하고, 집안에 일이 있을 때마다 식구들 중 가장 많은 돈을 부담하는 데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껴온 지 꽤 되었다. 독자들이 내 책을 사 준 덕분으로 좁디좁았던 부모님의 집 평수를 늘려드린 일은 축복이기까지 했다. 비록 사드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던 것이, 왜 그런지 얼마 전부터는 가족들을 위해 돈을 쓰는 일이 전만큼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이상하게 그러고 나면 마음에 허기가 져서 그렇게 돈을 쓰고 나면 나한테도 꼭 그만큼은 써야 뭔가 심리적 갈등이 해소되는 상태가 되풀이되었다. 돈이 이중으로 들었지만, 그래도 멈출 수 없는, 돈과는 견줄 수 없는 뭔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타인을 통해 얻는 행복이란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을까?

그게 비록 가족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벌 받을 일 같지만 나는 올 해도 엄마의 팔순을 맞아 많은 돈을 쓰는 만큼 나에게도 쓰고 싶었다. 무리가 아니라고는 결코 할 수 없었지만 모처럼 스스로 준 휴가에 나라도 넉넉히 휴가비를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 드물디드문 열정의 대상에 시간과 돈을 들인 대가로 누가 뭐라 한들, 심지어 내게 손가락질하는 이가 나 자신이 된다 해도, 결코 헛된 일이 되지는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던 거다.

나는 그때 알았다.

정말로 좋아하면 고민하지 않게 된다는 걸

정말로 누굴 좋아하면

좋아하는 건지 아닌지

고민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처럼

 

■ 몰입이 내게 준 것

삶의 어떤 분야든 어느 하나를 집중적으로 경험해보고 심지어 잘하기까지 해 본 사람은 다른 일도 잘 할 수 있을까? 나는 (대체로) 그렇다고 생각한다. 세상일이란 게 분야는 달라도 원리는 대개 비슷하기 때문이다. 가령 평생 운동만 해온 사람이,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 교수가 된다거나,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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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가나 시인이 영화감독으로 데뷔를 해 거장이 된다든가 하는 예가 그렇다. 옷을 사는 일 역시 파고들고 몰두라는 걸 해보니 그저 허영의 퍼레이드만은 아니었다.

거기에도 성공과 실패가 있었고 낭비와 효율이 있었으며 옷을 보러 다니고 사는 과정에서 나름의 관계란 것들이 생기고, 그래서 소통도 하고 정보의 수집과 교류의 문제도 겪고, 재정에 대한 계획을 세워서 형편 내의 합리적 소비를 추구하는 경험도 해보고, 때로는 속이 뻥 뚫릴 만큼 부러 과소비도 해보고…. 그러면서 하여간에 옷에 관한 거의 모든 것들이 삶이었으며 끝내 그것들은 내 다른 일들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니, 나는 그 일을 통해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것들이 훨씬 더 많은 셈이었다.

그리하여 무엇보다 중요한 것. 짧지 않은 세월 동안 그래도 잘 살고 잘 견뎠다고 내가 나한테 선물로 준 것은 차가 아니라, 어떻게 보면 옷도 아니라, 그토록 원하던 ‘좋아하고 몰두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난 너무 좋았던 게다. 그렇다고 이 돈이 들어가는 일을 언제까지나 할 수는 없었기에, 이제 서서히 마쳐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뜻밖의 인연이 생기게 된 것은 5월의 일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를 안다는 건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게 바로 나 자신을 아는 일이었기 때문에, 결국 지금까지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몰라 그렇게 고민을 했던 것은 그만큼 나를 몰랐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만큼 나는 나 자신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것.

인생은 유한하고, 나는 그 유한성을 점점 더 절감해가는 나이가 되었어. 그러다보니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만나기 위해 당장 행동에 옮기지 않으면 기회는 영영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지금, 내 나름의 사랑하는 법을 실천해야겠다.

언제 올지도 모를 이별을 하기 전에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 해. 귀찮음과 싸워 이겨서, 사랑하는 게 곁에 있을 때 한번이라도 더 누리라고. 뭐 게으름을 사랑한다면야 그건 그것대로 좋지만 적어도 지금은 이렇게 부지런을 떠는 게, 지금의 내가, 나를, 내 삶을 사랑하는 방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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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이거 예쁜 거예요?

■ 질문

나는 여러모로 부족해서 내게 질문이란 행위는 무척 중요하다. 그래서 누가 내 질문에 대답을 잘해주면, 그리고 그 대답의 내용이 쓸모가 있다고 판단되면, 그 사람에 대해 큰 호감과 신뢰를 갖게 된다. 중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잠시 잠깐씩 짧은 평화밖엔 누리지 못한다는 점에선 초식동물이라 할 수 있다. 풀만 먹는 건 아니라는 점에선 너무 다르긴 하지만.

■ 책

어느 날. 한 일주일을 망설이던 옷을 계산하다가 카운터 한 켠에 책이 한 권 놓여 있어 무심히 보니 에세이였다. 요즘 유행하는 내 보기엔 별 근거도 없이 너는 예쁘고 소중하고 무엇이든 잘 될 거야 하는 풍의, 꽤 유명한 책이었다.

그런데 내가 무슨 정신에서 그랬는지 “이 책 좋아하시나 봐요”하고 약간 의외라는 듯, 마치 이런 것도 읽을 줄은 몰랐다는 듯 말을 건넨 것이 발단이었다. 그는 그런 내말의 의도를 간파해 이 책이 어떻길래 그러느냐고 발끈하거나,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그런 사적인 대화를 시도하느냐 반문하지 않았다. 그저 갑자기 너무도 절망적인 표정을 숨기지 않으면서 내게 이렇게 대답했는데 그 순간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거라도 읽지 않으면 미쳐, 아니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서요.”

■ 놀라움

모르겠다. 내가 그때 놀랐던 건 대체로 평안하던 그의 갑작스럽고도 격했던 감정의 표현만이 아니었다. 평소 난 손님과 메니저라는 관계에서 벗어나는 말을 그렇게 먼저 할 수 있는 사람이 결코 아닌데, 내게서 그런 돌발적인 행동이 나온 것에 우선 놀랐다. 그래서 어떻게 그렇게 대담한 행동을 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보니 이 옷 쇼핑을 시작하던 두 달 전만 해도 매사에 주눅이 들어 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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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은 이만큼이나 활력을 회복한 덕분이란 것을 알고는 두 번째 놀랐다. 그건 많은 돈을 들여 비싸고 좋은 옷으로 내 몸을 둘렀기 때문이 아니라 아프기 시작한 지난 넉 달 동안 끊임없이 나를 격려하고 작게라도 내게 선물을 하고 내 삶을 정리하면서 쌓아온 매뉴얼에 충실히 따른 결과였는데, 그래서 난 또 놀랐다. 그 한 마디를 함으로써 한 달 넘게 그저 내게 뭔가를 파는 사람일 뿐이었던 그가, 단 한 마디 표정 하나에도 예외를 두지 않던 사람이 그 후로 자기 얘기를 조금씩 하기 시작해 우리가 뭔가를 나누게 되었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이 내게 왜 이렇게까지 놀랄 일이냐 하면 나는 음악을 이십 년 넘게 하면서도 단 한 명의 음악친구도 사귀지 못했을 만큼 극단적으로 수동적인 관계 스타일을 지녀온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내가 무슨 바람이었는지 그날 그 작지만 사적인 한 마디를 던진 대가는 상상 외로 커서, 사람이 적극성을 띤다는 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게 그 모든 놀라움 중 으뜸이자 마지막 놀라움이었던 것이다.

■ 말

옷을 사는 일을 거듭하면서 처음에 가졌던 확신이나 기쁨이 조금씩 사그라들 무렵이었다. 처음엔 내게 없던 옷들이 차곡차곡 쌓인다는 생각에 뿌듯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같은 옷을 중복해서 사는 일이 반복되거나, 나만 이상하게 유행에서 동떨어진 옷들을 사는 것만 같아 스트레스를 받던 어느 날.

고민 끝에 난 “저……오버사이즈가 아닌 옷을 입으면 안 되는 건가요?” 하는 멍청한 질문을 던졌고 그런 황당한 질문에도 그만은 유독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게 이렇게 말해 주었던 것이다.

“손님, 그런 게 어딨어요. 손님이 입고 싶으신 대로 입으시면 되죠.”

뜻밖이었다. 트렌디(trendy, 유행의, 유행을 따라가는)한 매장에서 그렇게 세련되게 옷을 차려입은 전문가에게서 그런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그렇구나. 그냥 내가 입고 싶은 대로, 내 스타일대로 입으면 되는 거였구나. 그런데 왜 난 나는 모르는 세상의 방식이 있는 것 같아 그걸 궁금해 하고 나만 거기서 동떨어진 것 같아 소외감을 느끼고 그랬을까. 놀랍게도 그때 그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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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저의 대답을 듣기 전까지 난 어떤 옷을 보고도 그게 예쁜 건지 아닌지를 내 판단으로는 알 수가 없어서 항상 묻곤 했다.

“이거 예쁜 거예요?”

우습지 않은가. 옷이란 건 내 눈에 예뻐 보여야 하는 데, 내 눈에 그러면 되는데, 그 판단을 남에게 묻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질문을 받아야 했던 직원들이 매번 약간은 당황해하던 이유를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날 매니저의 그 한 마디는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잊고 있던 어떤 중요하지만 기장 기본적인 것을 떠올리게 했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세상 눈치를 보게 된 것일까. 어쩌다가 글을 쓰면서도 지금 맞게 쓰고 있는 건지 정답이 없는 일에 고민을 하고, 어쩌다가 내 돈 주고 내가 입고 싶은 옷 하나 사는데도 그토록 남의 눈치를 보면서 혼자 소외감을 느끼는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일까.

■ 2019년 5월 16일

아직도 뭔가와 계속 싸우고 있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는 막막함과 싸우고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싸우고

잘 할 것인가 하는 불안감과 싸우고

외로움과 싸우고

배고픔과 싸우고

귀찮음과 싸우고

후회와 싸운다.

그 외에도 허무와, 권태와, 무료함과……

요즘은

갑작스레 사들인 옷들이

정말 내게 필요한 건지

내가 원하는 게 바로 이거였는지

이게 이 돈을 쓸 가치가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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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도저히 모르겠는

확신을 갖지 못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과 싸우고 있다.

인생은 전쟁도 결투도 아닌데

왜 난 계속 나와 싸우고 있을까.

■ 전환점

누구나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는 게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그게 음악을 할 때도 글을 쓸 때도 아닌 바로 장사를 할 때 찾아왔다. 이천 년대 중반 와인을 팔 기회가 생겼는데 그땐 음악을 그만 할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주저 없이 그 일을 하기로 했다. 문제는 내가 그런 쪽에 일절 경험이 없었으므로 처음에는 주위의 권유에 따라 그 문야의 전문 컨설턴트라는 사람들을 만나 상담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내가 불과 한 이삼일 매장 주변을 돌며 나름대로 조사하고 파악한 것과 반대의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난 소위 그 요식업 컨설턴트라는 사람들의 전문성을 신뢰하기가 어려웠다.

그때 내 나름대로 구축한 나만의 방식이란 게 통하는 걸 보면서, 나의 인생은 많이도 바뀌었다. 그게 인테리어가 됐든 요리가 됐든 다른 무엇이 됐든 어떤 일을 할 때 내가 옳다 싶은 방식으로 누가 뭐래도 밀어붙이는 게, 안 돼도 될 때까지 해 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감한 덕분이었다.

그 후 내가 겪은 어떤 사건으로 인해 피치 못하게 음악을 다시 하게 되었을 때, 가게를 하면서 깨달은 방식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 다섯 번째 앨범과 그다음에 낸 첫 번째 책이었다. 그 두 개를 만들면서 나는 음악을 이렇게 만들어야 해, 책이란 이런 형식으로 이렇게 써야 해 라는 세간의 방식에 초연한 채, 그저 내가 옳다고 믿는 대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느껴질 때까지 작업에 임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았으며 방해를 용납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해야만 내 것이 나오고 그래야 성공이든 뭐든 노려볼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내 나이 서른여덟 즈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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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정과 평가

물론 나만의 방식이라고 해서 언제나 통하는 것은 당연히 아닐 테다. 당시 난 와인 가게에 이은 앨범과 책의 연이은 성과로 자신감이 고조된 상태에서 나만의 방식을 과신하게 되었다. 그 결과 참으로 치기 어리게도 소설 한 권 변변히 읽지 않았으면서 장편 소설 쓰기에 도전해 쓴 맛을 보기도 했었다. 소설의 쓰기와 읽기에 대한 그 어떤 흥미나 경험도 학습도 없었지만 여지껏 그래왔듯이 나만의 방식으로 돌파하면 된다는 생각이었고. 결과적으로 오만이었다. 덕분에 무려 4년의 세월이 허공으로 허무하게 날아가 버렸으니 말이다.

내가 세상에 창작자로서 데뷔한 건 지금으로부터 이십오 년 전인 1995년 봄이었다. 그때 나는 있지도 않은 그룹의 리더라고 치고 다니던 구라를 수습하기 위해 혼자서 뚝딱 만든 노래들을 친구의 도움을 받아 녹음했다. 그리고 그게 라디오에서 소개되었는데 반응이 생각보다 괜찮았다. 아마도 사람들의 그런 반응이 그 뒤 수십 년간의 내 인생을 결정지어 버렸던 건지도 모른다. 만약 그때 그 라디오를 들었던 사람들이 “뭐야, 저 녀석. 그냥 장난이었잖아.” 했더라면 내 성격상 다시 도전한다거나 그런 일은 없었을 테니까.

그 후 구라였던 밴드가 실제가 되어 정말로 앨범이란 형태로 세상 빛을 보게 되었는데 정작 그때의 세상의 반응은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또 달랐다. 한켠에서는 최초의 어쩌구 하는 수식어를 달아주며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 담긴 음악을 그저 풋풋하거나 때로는 비난하고 조롱했다.

어쨌거나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흘러 2018년, 이제는 음악도 그만두었고 책도 네 번째 것을 내고 난 뒤, 나는 아예 다 그만하고 싶어졌다. 타인의 눈에 들고, 좋은 평가를 얻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 하는 그 모든 일들을, 물론 지난 세월 동안 내가 오직 실패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만든 음악과 책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었고, 이 일을 하면서 내 입에 풀칠하고 부모님 생활비도 드릴 수 있었던 과분하고 감사한 시절을 보낸 것도 맞았으니까.

그러나 더 이상은 직업적으로 매 순간 나를 증명해야만 하는 이 일을 감당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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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없었다. 내가 만든 어떤 것을 세상에 던져 인정을 받고 남의 눈에 들고, 코멘트를 받고 누군가의 커트라인을 통과하고 그래서 남의 지갑을 열게 하고, 가능한 오래도록 많은 지지를 이끌어내려 노력하는 것, 그렇지 못해서 때로는 혹독한 악평에 시달리기도 하고, 때로는 오해도 받고,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해 좌절하기도 했던, 내가 성인이 되어 평생 해 온 그 일들을.

참 신기하죠.

내 고민엔 갈피를 못 잡고 허우적대면서

남의 고민을 들으면 해답이 너무도 선명히 보이고,

내 집 대청소를 할 땐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한데

남이 집 정리를 하는데 도와주러 가면

너는 어떻게 그렇게 정리를 잘 하냐는 소리를 들으니 말이에요.

- 「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 (2018) 중에서

◎ 6월 인정과 평가

■ 증명

1.

인간은 다양한 목적과 이유에서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하며 살아간다. 식당 주인이 손님들의 입맛이라는 허들을 넘어야 하듯 생존과 생계를 위해 피할 수 없는 경우도 있고, 인정 욕구라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 남의 인정을 갈구하기도 한다. 때로는 타인과 사회가 그것을 요구하기도 하며, 심지어는 주변 사람들에 의해 소위 평판이라는 이름으로 원치 않는 점수가 매겨지기도 한다. 내 집안 내 학벌 내 외모 성격 직업 행위 등 오만 것에 대해.

2.

물론 세상을 살면서 자신을 중명해야 할 순간들은 많다. 나 같은 창작자들은 내가 만든 결과물로 대중에게 끊임없이 증명을 해 보여야 하고 회사원은 회사에서 자신의 능력을, 꽃집 주인은 손님들에게 감각을 증명해보여야 한다. 그래야 선택받고 먹고 살 수 있으니까.

그러나 세상에는 이렇게 어쩔 수 없이 넘어야만 하는 인정의 허들 외에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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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이 많은 불필요하고 억압적인 증명이라는 이름의 장애물이 존재한다.

물론 지구를 반으로 쪼갤 수도 있을 만큼 엄청난 힘을 지닌 캡틴 마블이나 수퍼맨 같은 히어로들도 타인의 증명 요구들로부터 결코 완벽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느님조차 자기를 믿고 따르는 신도들로부터 언제나 능력을 보여 달라는 요청을 받지 않는가. 타인뿐만이 아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스스로를 증명해야 할 순간들이 살아 있는 한 계속되기에 오늘도 많은 이들이 뭔가를 증명하기 위해 애쓰며 살고 있다.

3.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에도 여러 가지 형태의 주드 로(영국 영화배우, 아카데미 상 2회, 골든 글러브상 4회, 미국배우 조합상 2회, 프랑스 예술 문화훈장 등)들이 있다. 때로는 스스로 마음속에 주드 로를 만들어 자신을 억압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를 증명해 보여야 해.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아야만 해, 물론 그조차도 사회적 억압의 일환일수 있지만 나는 살아오면서 가장 아깝고 무가치했던 시간들이 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하거나 사람들이 나에 대한 인식을 바꾸려 애를 쓰던 순간들이었다. 왜냐하면 사람은 타인에 대해 생각보다 너무 쉽게 결론을 내리고 여간해서는 그 판단을 바꾸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서로서로 비단 능력뿐만이 아니라 용모와 개성, 인간됨, 성격, 취향 등 극히 개인적인 면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서로를 평가하고 또 평가당하면서 살아간다. 나 역시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심사하는 심사위원이 된 적도 많았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일들이, 타인을 평가 한다는 것을 정당성여부를 떠나 그 자체로 사람의 내면에 너무나 강력하고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점이다.

■ 평가

나는 내가 만든 것들을 세상에 내놓고 불특정 다수로부터 다양한 평가를 받는 일에 오래전부터 노출되어 왔다. 그렇기에 이런 문제들에 대해 남들보다 좀 더 민감하게 반응할 기회가 많았다. 어떨 때는 한 번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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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이 쓰이다 못해 거의 스스로를 잃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상황을 겪기도 하면서, 왜 인간은 타인의 시선에 이렇게까지 휘둘리는 것인지 어째서 남의 백

마디 칭찬보다 한 마디 부정적인 말이 그 모든 다른 긍정적인 말들을 압도하며 지워버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내게 이렇게나 큰 영향을 미치는 타인이란 존재가 내게 주는 의미를 생각하게 되고, 그들이 내게 보내는 시선이나 평가 같은 것들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것이 살아가는 데 무척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남의 인정 없이는 살아가기 어려운 한 이간으로서, 한편으론 부작용 또한 큰 그 일에 필요 이상으로 휘둘리지 말자는 의지에 다름이 아니었다. 남이 뭐라든 자기 내면의 중심을 잡고 건강히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 말이다.

■ 이석원의 인정 매뉴얼

1. 인정받는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인정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할 것. 그러므로 인정 욕구는 원하는 만큼이 아닌 필요한 만큼 발현해야 한다. 막연하게 온 세상에 나를 보여주겠다는 생각은 인정욕구의 노예가 될 수도 있다.

2. 나를 평가해 줄 사람은 내가 고른다.(나의 청중은 내가 선택할 것.)

놀랍게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입 문제 등에 있어서 곧잘 가족이나 가까운 친지들을 관객으로 두는 경우가 많다. 내가, 내 자식이, 어디어디쯤은 가야 그들에게 뭔가를 보여줄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한데 정작 자기도 모르게 관객이 되어버린 가족 친지들이, 본인 생각만큼 그렇게 남이 어느 대학을 가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면 그 노력이 조금은 민망하지 않을까.

내가 (당연히) 백수인 줄 알고 직장을 소개시켜주려던 친척 아저씨에게, 더 이상 그들이 알고 있는 나에 대해 정정해 주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왜,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보다는 내 청중을 분명히 선택했고, 그에 따르면 이들은 더 이상 나의관객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단 한 번도 나라는 극장에 표를 사서 들어와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밖에서 날 어찌 생각하든 신경 쓸 이유는 없지 않은가.

나는 그때부터 그들보다 훨씬 더 나와 내가 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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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바로 그들에게 나의 관심과 노력을 집중하기로, 그들에게만 내 눈물과 땀을 쏟기로 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무작정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잘 보이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자는 것이다. 특히 창작자들은 직업적 특성상 이런 욕망을 갖기 쉬운데, 세상 모든 이들이 날 모른다고 해서 실망하지 말고, 누가 나의 청중인지, 누가 나를 제대로 보아줄 사람인지를 살피고 결정하면 좋겠다. 상처를 받아도 그들에게 받고 관심을 구해도 그들에게 구하라는 것.

그것은 인생에서 불필요한 감성과 수고를 덜어주게 된 소중한 깨달음이었다.

사람들은 남의 삶에 굉장히 관심이 많은 것 같지만

자기 문제가 아닌 한 대체로 곧 잊어먹고 만다.

 

2021.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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