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양희의 시의 숲을 거닐다
천양희의 시의 숲을 거닐다
- 시에서 배우는 삶과 사랑 -
■ 천양희 지음
0 부산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0 1965 박두진 시인 추천으로 현대문학 등단
0 1996년 제10회 소월시문학상, 1998년 제 43회 현대문학상
0 저서
<시집> -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 사람 그리운 도시
- 하루치의 희망. - 마음의 수수밭. - 오래된 골목
-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 - 너무 많은 집. 등
<사진 에세이 집> - WOMAN. 등
■ 저자의 말 : 삶의 목소리, 삶의 무늬
노을이 없는 나라가 있고 연애소설이 없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뭐?’ 하며 놀란 적이 있다.
노을이 없는 나라에 노을에 대한 시가 많고 연애 소설이 없는 나라에 성(性)에 대한 갈등도 없다는 것을 알고 또 한 번 놀랐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해가 지면 곧 어두워지기 때문에 노을을 볼 수 없다고 한다. 노을에의 그리움 때문인지 노을에 대한 시가 가장 많고, 스웨덴에서는 성이 개방적이고 자유스럽기 때문에 성에 대한 결핍과 갈등이 없어 연애소설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문학이란 실물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실감이 나도록 하는 것이며, 실재에 대한 결핍이 시를 쓰게 하는 요인이 된다.
시인이란 누군가의 아픔을 대신 앓아주는 환자가 되고, 시는 그 투병기가 되어야 한다면 너무 과한 말이 될까. 시인은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차서 가장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살아가도록 운명지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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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라고 시인 백석이 말했다. 세상이 가난하고 쓸쓸할 때 옛 시인들은 가난하나 높게 빛났다.
사막을 걷는 일로 일생을 보낸 테오도르 모노는 사막이야말로 진정한 생략하기의 삶이 무엇인가를 가르친다고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을 그 안에 감추고 있으면서도 아무 것도 없는 듯한 단순함이 사막의 철학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시는 철학 이상의 그 무엇이 아닐까. 시 쓰는 일로 일생을 보낸 이 책 속의 시인들은 시야말로 고통하기의 삶으로 진정한 희망 찾기의 삶이 무엇인가를 가르친다고 말하고 있다. - 천양희
◎ 1장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받고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것…아름다움을 헤아릴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무엇이 성공인가?>
■ 헤세가 가르쳐 준 우정
안개가 낀 늦가을, 산책을 나가 낙엽을 밟으며 지나간 일들을 돌이켜본다. 그때, 가장 먼저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내가 오리무중 속을 헤맬 때, 내 손을 오래 잡아준 친구였다.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고 슬픔을 함께 등에 지고 갈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한 세계를 갖는 것과 같다는 말이 그날따라 절실하게 생각되었다. 헤세의 시 <안개 속을> 음미해 보자.
안개 속을 걸어가는 것은 신기합니다. 숲마다 바위마다 호젓합니다. 나의 생활이 밝았을 때는 이 세상은 친구들로 가득했습니다. 이제 안개가 내리니 한 사람도 보이지 않습니다. 참으로 어둠을 모르는 사람은 현명하지 못합니다. 어둠은 자기를 어쩔 도리 없이 모든 것에서 가만히 떼어놓습니다. 인생은 고독합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모릅니다. 모두가 혼자입니다.
이 시를 읽는 내내 나는, 손으로 잡을 수는 없지만 뚜렷이 존재하는 안개같은 우정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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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만큼 친구의 깊이를 말해주는 것은 없는 것 같다. 사랑은 사랑할 때만 사랑하는 것이지만 우정은 언제나 가장 힘 있는 격려처럼 생각하는 마음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사랑보다 우정이 오래 가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한동안 잠기다가 헤세가 생각한 우정을 떠올려 보았다. 무엇을 구하지 아니하고 어린애처럼 단순한 심성으로 바라볼 때 세상은 아름다웠다는 헤세의 곧은 정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정한 사랑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혁명 같은 것이라면 우정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상의 혈맹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생텍쥐페리는 <어린왕자>를 헌정할 만큼 레옹 바르트를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친구라 했고, 에밀 졸라와 폴 세잔의 우정은 30여 년이나 변함없이 깊어서 다른 친구들이 부러워할 정도였다. 폴 세잔이 법학을 할까 미술을 할까 망설일 때 졸라의 우정 어린 격려의 편지를 받고 진로를 미술 쪽으로 돌려, 본격적인 데생공부를 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가 지금 위대한 작품으로 기억하는 시들도 사실 우정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이 많다. 백 수십 편이나 되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와 밀턴의 장시 <리시다스>, 테니슨이 수년에 걸쳐 쓴130편이 넘는 <인 메모리엄>은 모두 단 한 친구를 위한 우정의 표형이었다고 하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 시를 읽고 있으면 인간이 괴로운 건 관계 때문이라지만 관계 때문에 사람이 아름다울 때도 있구나 싶다. 아름다움은 진정한 마음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자랄 수 있는 것 같기에 나는 지금 나의 우정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과연 나는 어느 누구에게 진실한 친구였던가를.
4세 때부터 시를 쓴 독일의 천재 서정시인이자, 탁월한 소설가이며, 철두철미한 자유인이었던 헤세는, 나치 정권이 들어서자 독일을 떠나 스위스로 귀화해 버린 방랑자이기도 했다.
그는 시인으로도 전 세계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데미안>은 지금도 고등학교와 대학 교양수업에서 꼭 읽어야 하는 필독서로 삼고 있으며, 최근에는 초등학교 학생을 위한 ‘논술 대비’ 명작시리즈 중 한 권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헤세가 남긴 수많은 작품 가운데서 아마도 가장 많이 애송되는 시는 <안개 속을> 이고 가장 사랑받는 소설은 <데미안>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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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데미안>은 세계의 4대 성장 소설에 꼽히기도 하는 완성도 높은 소설이다.
* 세계 4대 성장소설
0 헤세의 <데미안> 0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0 플로베르의 <감성교육> 0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 진정한 성공
간혹, 인생을 너무 낭비한 것 같아 후회 막심할 때, 자신의 생을 너무 의미 없이 살았다고 자책할 때, 고통의 집을 보지 못한 사람은 우주의 절반 밖에 못 본 사람이라는 에머슨의 시 <무엇이 성공인가>를 떠올려 본다면 한결 삶이 따뜻해지리라. 위대한 시는 삶을 언제나 어루만지고 위안한다. 에머슨은 시 속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받고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것…아름다움을 헤아릴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현재 살아 있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이 시를 읽을 때면, 나는 과연 내가 살아있음으로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된다.
시인이며 미국 초월론의 창시자이자 사상가인 에머슨은 목사로서도 활발하게 강연 활동을 했으며, 자신의 사상보급과 실천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시인이다.
그는 늘 생각하고 배우면서 바르고 치열하게 살다 간 시인이었다.
“인생의 목적은 자신을 아는 데 있으며, 글 쓰는 목표는 글 속에 햇빛을 반짝이게 하는 데 있다”는 그의 빛나는 말은 칼라일을 감동시켜 다음과 같은 찬사의 편지를 쓰게 했다.
“이 세상에서 오직 인간의 목소리를 나에게 전해 주는 것은 당신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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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엘리엇에게는 작가 헤밍웨이가 있었다.
헤밍웨이는 생업에 쫓기는 엘리엇을 시작(詩作)에 몰두할 수 있도록 ‘벨 에스프리’기금을 만들어 대작 <황무지>를 출간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나타니엘 호손은 세관에서 파면 당했을 때, 1년동안 생활비를 저축해 둔 그의 아내의 격려에 힘입어 불멸의 명작인 <주홍글씨>를 썼다고 한다.
이렇듯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아름다움을 헤아릴 줄 아는 진정한 성공에 속하는 것일 터이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이란 영원한 기쁨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 네루다의 시(詩)와 숨결
“나더러 어디 있었냐고 물으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뒤에 두고 온 바다뿐, 오, 울고 있는 누이여… 어째서 하루는 다른 하루와 합해지는 것일까? 어째서 밤은 입속에 쌓여 있는 것일까?… 나더러 어디 있었냐고 물으면 나는 저 부서진 것들…그리고 내 무거운 영혼부터 얘기할 수밖에 없다…만나고 엇갈리는 게 기억이 아니라 망각 속에 잠든 노랑비둘기, 눈물 젖은 얼굴…그리고 잎새에서 떨어지는 그런 것이다. 흘러간 날의 어둠 우리의 슬픈 피를 먹고 자란 날의 어둠이다…우리가 좋아하는 모든 건 시간과 달가움이 어슬렁거리는 마음 쓴 연하장에서…그러나 우리는…침묵이 쌓이는 껍질들을 더 이상 씹지 말자. 왜냐하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니까…내가 잊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으니까.”
- 파블로 네루다의 시 <망각은 없다>
“사람은 의지만 있으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던 네루다의 말과 함께 <망각은 없다>도 연하장에 적어 보내고 싶다. 한 해의 희망이 허망으로 끝나 허탈하다는 사람들, 실패의 충격은 차마 말로 설명되지 않는 사람들은 네루다의 시를 읽으면서, 이 일 저 일 잊고 싶은 말이 있더라도, 내일에 사는 마음만은 잃어버리지 말라는 말도 함께 부치고 싶다.
그의 다른 시에서도 “사랑은 이다지도 짧고 망각은 그토록 길다”라는 구절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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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 구절 중에서도 특히 나를 사로잡았던 구절은 <여자의 몸>이란 시에 나오는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라는 구절이다. 터널이라는 말이 여성의 정체성을 절묘하게 건드리는 한편 외로움의 심사를 황홀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시와 삶이 누구보다 치열하고 열정적이었던 네루다는 “시인의 삶은 그의 시에 반영되어야 하며, 그것은 예술의 법칙, 인생의 법칙”이라고 주장한 사실주의자였다
칠레의 민중 시인이며 외교관이자 상원 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네루다는 7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천재 시인이다. 연애시의 혁명을 일으켰던 유명한 시집 <스무편의 사랑의 노래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는 그의 나이 19세에 씌어진 시들을 묶은 것이라니 놀라운 일이다.
네루다는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를 좋아했고 포도주를 좋아했으며 노래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좋아했던 것, 원하는 것은 다른 데 있었다.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1.끝없는 사랑, 2.가을을 느끼는 것, 3.겨울의 침울함과 4.여름 그리고 5.당신의 두 눈 등 다섯 가지였다.
네루다는 67세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수상 연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저는 지리적으로 다른 나라들과 동떨어진 한 나라의 변방에서 왔습니다. 그동안 저는 시인들 가운데서 가장 소외된 시인이었으며, 지역의 한계에 갇힌 저의 시 안에서는 고통의 비가 내렸습니다.”
나는 그가 남긴 말 중에서 “시는 내 구원이자 치유이며 숨통이다. 숨을 쉬어야 살 수 있듯이, 시를 쓰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 말은 시대와 사회의 거울이라는 것도 그의 문학적 삶을 통해 새삼 깨달았다. 노벨상의 수상한 2년 뒤인 1973년 9월 23일, 네루다는 69년의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 사랑하는 자만이 날 수 있다
“이런 가을에는 원수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던 어느 시인의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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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흘 달을 바라보다 문득 떠올랐다. 다 채워지지 않고 약간 기울어진 달이 그런 말을 생각나게 한 것 같다.
그때 나는, 내 마음이 기울어질 때, 다른 사람의 마음도 기울어졌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이런 달밤에는 나도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달빛 속에서 그런 생각을 하니 몹시 슬펐다. 쓰지 않아도 채워지는 것이 슬픔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 순간만은 모든 걸 다 잊고 텅 빈 공간 속에 나 자신을 열어놓고 맡기고 싶었다. 그런 소망을 품으니 “이 밝음 속에 소박한 거문고 하나를 놓아두면 가을의 아름다움을 견디다 못해 거문고는 조용히 울기 시작하겠지요.”라는 구절이 다시 떠올랐다.
다음의 시는 러시아의 시인 마야코프스키가 그가 사랑한 여인 릴리에게 보낸 시다. 그는 ‘사랑은 의지의 행동이 아니라 우리 삶의 조건’이라 했다.
나 만약 황제로 태어날 수 있다면 / 나의 백성에게 이렇게 명하리, /
햇빛처럼 반짝이는 금빛 주화위에 / 그대의 어여쁜 얼굴을 /
새겨 넣으라고 / 그리고 / 이 세계가 툰드라로 변하고 /
강물이 북풍과 사귀는 곳 /
거기에서도 나는 족쇄 위에 릴리의 이름을 새기리 /
그리고는 음울한 중노동 속에서도 자꾸만 자꾸만 입맞추리……
나의 가슴을 훔쳐간 그대 / 가슴 속에 모든 것을 빼앗아간 그대 /
나의 재능을 거두어 가오 / 어쩌면 난 결코 다른 어떤 창조도 못할 테니…
시로도 사랑으로도 어느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살다간 마야코프스키는 예술이라는, 사랑이라는 병을 철저히 앓다 간 시인이 아닐까 싶다.
마야코프스키는 러시아 혁명기와 소비에트 초기를 대표하는 시인이며 극작가이다. 15세 때 벌써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해 감옥을 드나들었고 시인의 길에 들어선 것은 16세 되던 1909년 독방에 6개월간 수감되었을 때 그곳에서 읽은 책 덕분이었다.
그는 1913년 20세 때, <나>라는 제목으로 첫 시집을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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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7월에 장시 <바지를 입은 구름>을 완성한 마야코프스키는 브릭 부부와 운명의 만남을 갖게 된다. 그 자리에서 마야코프스키는 자신의 시<바지를 입은 구름>을 낭독한다. 브릭 부부는 이 시에 깊이 매료된다.
<바지 입은 구름>
“전에 난 / 책들은 이렇게 만들어 지는 거라고 믿었다 / 시인이 오고 /
영감을 받았다는 그 바보가 / 경망스런 입술을 열면 /
노래가 터진다고 …그대가 원한다면 /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워지겠소 나는 사람이 아닌 바지 입은 구름…….“
마야코프스키의 <바지를 입은 구름>이란 시 한편에 매료된 브릭 부부와 처음 만났을 때 그의 나이는 22세였고, 브릭은 27세, 릴리 브릭은 24세였다. 슈클로프스키는 마야코프스키가 릴리에게 첫눈에 반한 순간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고는 영원토록, 사실 죽는 순간에도그녀를 사랑했다. 이렇게 해서 그녀에 대한 사랑의 시가 시작된 것이다.”
세 사람이 한 집에 살게 되어 기이한 삼각관계가 시작되었지만 그 생활은 남의 손가락질도 상관없이, 마야코프스키가 죽는 날까지 유지되었다.
살아내는 것이 죽기보다 더 어려웠던 것일까 러시아의 가장 유명한 시인으로서, 대중에게는 혁명 그 자체를 상징하던 인물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는 1930년 4월 14일 그의 나이 36세에 권총자살하고 말았다.
파스테르나크는 그가 죽은 뒤에 “나는 그를 잃었으나 나는 그를 잊지 않았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마야코프스키가 죽은 지 5년 뒤인 1935년에 브릭 부부는 그의 시가 잊혀지고 있음을 항의하는 편지를 스탈린에게 보냈다.
그 후“마야코프스키는 소비에트 시대의 가장 재능 있는 시인이라는 스탈린의 언급이 프라우다>지의 머리기사로 실렸다. 권력자인 스틀린의 한 마디로 하룻밤 사이에 마야코프스키는 ‘혁명의 시인이며 영웅’이 된 것이다. 모스크바에 있는 승리의 광장은 ‘마야코프스키의 광장’으로 그 이름이 고쳐졌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랑도 슬픔에 의해 해소되는 사소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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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과 같이 생각되는 오늘, 사랑하다가 죽어버린 시인에 내게 말한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라고.
■ 잃어버린 마음들
어제는 동네 근처 숲에서 뻐꾸기가 울었다. 아름답고도 애절하게 뻐꾸기가 우는 것은 남의 둥지인 암초휘파람새의 둥지에서 자라고 있는 제 새끼를 향해, “너는 내 새끼다. 이 어미의 목소리를 잘 듣고 익혀라”하고 소리쳐 대는 것이라고 한다.
그 사랑을 알고부터 아름답게 들리던 뻐꾸기 소리가 ‘비겁 비겁’으로 들리는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많은 것을 잊고 살아왔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잊고,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을 잊고, 잘잘못을 가리는 마음을 잊고, 양보하는 마음을 잊었다. 그렇게 잊고 잃으면서 아귀다툼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나부터도 잃어버린 마음은 찾을 줄 모르고, 가진 것만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 것은 아니었을까. 사람에게 욕망을 없애려는 것은 바다에서 파도를 없애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일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단어는 ‘전쟁’이다. 전쟁은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잔인한 짓이다. 모든 불행의 전범이며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 수 없게 만드는 허리케인 같은 것이다. 전쟁이란 단어에는 언제나 폐허의 냄새가 난다.
전쟁이 남겨놓은 가난과 비참과 고통 속에서도 마음을 잃지 않고, 굳세게 살아온 많은 이들을 생각하고 있으면 임화 시인의 시가 함께 생각난다.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폐허 속에서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숭고한 일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의 시 <네거리의 순이>를 읽으면서 다시는 인간의 욕망이 전쟁으로 이어지지 말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져본다.
…순이야 누이야…젊은 날은…그 여윈 손가락으로 지금은 굳은 벽돌담에다. 달력을 그리겠구나 … 오오 눈보라는 트럭처럼 길거리를 휘몰아간다…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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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네거리가 아니냐! 어서 너와 나는 번개처럼 두 손을 잡고 내일을 위하여 저 골목으로 들어가자…이것이 너와 나의 행복한 청춘이 아니냐.
사랑하는 어머니를 눈물 나는 가난 속에서 잃었던 1950년대의 황폐했던 종로 네거리, 나는 그때, 부산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피난민들에게 교실을 내주고 천막에서 공부하거나 산으로 들로 다니면서 공부했다. 교과서도 제대로 없이….
나는 담벼락에다 “나는 전쟁이 싫다”라고 써놓곤, 피난민 수용소가 되어버린 학교를 슬픈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운동장 구석 은행나무에 기대어 피난 온 내 또래의 아이가 나지막이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푸른 산 저 너머로 멀리 보이는 / 새파란 고향하늘 / 그리운 하늘 /
언제나 고향집이 그리울 때면 / 저 산 너머 하늘만 바라봅니다.”
나는 그 아이에게로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돌아서 나오는데 자꾸 눈물이 났다. 그 아이가 부른 노래는 전쟁이 내게 준 첫 상처였다. 어린 시절의 충격과 상처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내 가슴 속에 남아있는 어쩌지 못하는 슬픔의 근원이다.
“포도에 씨가 있는 것처럼 / 내 가슴에 슬픔이 있다 / 푸른 포도가 술이 되는 것처럼 / 나의 슬픔이여 기쁨이 되어다오.”
한 번씩 그때의 슬픔이 끓어오르면 일본 시인 다카마 준의 이 시를 읽어본다.
14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을 정도로 영특했던 임화는 19세 때 이미 여러 편의 시와 수필과 논설을 발표한 시인이며 평론가였다.
최인훈의 장편소설 <화두>에는 임화 개인이 도달한 문학 세계는 놀랄만하다면서 그의 <한국문학사 에세이>를 최고의 달성이라고 격찬하고 있다.
■ 고통은 위대하다
프랑스의 시인 알프래드 드 뮈세의 시 <슬픔>을 읽어보자. 이 시는 어떤 한계에 부딪힌 시인의 비통한 심정을 고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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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힘과 생기를 잃었다 / 친구와 기쁨도 잃었다 /
나의 천재를 믿게 하던 자존심도 잃었다 / 내가 진리에 눈 떴을 때 /
그것이 나의 벗이라 믿었다 / 내가 진리를 이해하고 느꼈을 때 /
이미 그것이 싫어졌다 / 그러나 진리는 영원하고 /
진리를 모르고 산 사람들은 / 세상에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 셈이다 /
신이 말씀하시니 / 우리는 답해야 한다 /
이 세상에서 내게 남은 유일한 진실은 / 내가 이따금 울었다는 것이다
이 시를 읽고 나면 슬픔이 점령군처럼 쳐들어와 내 마음의 영토까지 빼앗아간다. 1833년 23세 되던 해에 뮈세는 여성작가 조르주 상드를 만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그 사랑은 너무 지독해서 지금까지도 시사(詩史)에 남은 유명한 사랑이야기로 전해진다.
조르주 상드는 뮈세와 쇼팽의 애인이었고 플로베르와 발자크의 친구였으며 민중의 동지였다. 무엇보다 상드는 용기와 솔직함, 따뜻함과 관대함을 잃지 않으려고 한 매력적인 인간이었다.
뮈세가 상드와의 사랑이야기를 쓴 자전적 소설 <세기아의 고백>은 19세기 프랑스 문단의 화제가 되었고 논란의 대상이 될 정도로 큰 물의를 일으켰다.
뮈세는 첫 시집을 낸 뒤에 한동안 잊혀 진 시인이었다가 17년 뒤인 37세 때 희곡 <변덕>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다시 주목받아 베스트셀러 시인이 된다.
“시란 한 방울의 눈물로 진주를 만드는 것”이란 말과 “삶은 잠, 사랑은 꿈”이란 말로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뮈세. 그는 랭보나 베를렌 같은 천재의 신화를 확립한 최초의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 삶이 무겁게 느껴질 때
“오늘 나무들이 다 폭풍에 쓰러지는 것은 아닙니다 / 모든 씨앗들이 다 뿌리 내릴 토양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 모든 진실한 마음들이 다 인심(人心)의 사막에 유실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국의 여성 시인 수팅의 <이 또한 모든 것입니다>의 몇 구절만 읽어도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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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의 위안을 받고 한숨 돌리게 된다.
요즘은 어디를 가나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 않다는 말과 낙(樂)이 없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듣게 된다. 많은 이들이 마음 붙일 곳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희망적인 시 한 줄이 잠든 삶을 깨우고 아픈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다고 믿는다.
수팅의 모든 꿈들이 다 기꺼이 날개가 꺾이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한 구절을 읽고 나면 삶이 아무리 무겁게 느껴질 때라도, 다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꿈이라는 생각에 하루를 거뜬히 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요즘 신문이나 방송을 접하기가 두렵다.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싶은 추문이나 사건이 가슴을 서늘하게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등대, 어머니는 바다, 자식은 물고기, 삶은 배’라던 아름다운 비유도 이제는 옛말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겐 수팅이 남긴 시가 있다.
“모든 것이 다 당신의 말처럼 그런 것은 아닙니다 / 모든 불꽃이 다 자신만을 태우고 남을 비추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 모든 별들이 다 어둔 밤만을 가리키고 서광을 알리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시 말고 우리가 어디서 이처럼 지극한 위안을 받을 수 있을까.
옛 사람들이 말하는 삼락(三樂)이란 가족들 무사하고, 하늘 보고 부끄럽지 않게 하며, 아랫사람 가르치는 일이라고 한다.
어느 땐 삶이 몹시 불편하다고 생각 될 때가 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네게 불친절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이때에도 “모든 외침에 메아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 모든 손실이 보상받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 모든 심연이 멸망인 것은 아닙니다 / 모든 희망이 미래를 위해 머리 위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당신의 어깨 위에 올려놓으세요”라는 수팅의 이 모든 희망의 메시지를 나도 어깨 위에 올려놓는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독서광이었던 수팅은 5학년 때 <고향의 하루>란 산문이 모범작품으로 뽑힐 정도로 문학적인 재능을 드러냈으며 5언 단시를 교지에 발표하기도 한 신동이었다. 이처럼 탁월한 재능을 타고난 천재였지만 그의 최종 학력은 중학교 2학년 중퇴가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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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시단에 ‘몽롱시’ 논쟁을 일으키기도 한 수팅은 19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를 쓰기 시작할 때부터 수팅의 시는 동료시인과 평론가들은 물론이고,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수팅의 시에는 그 어떤 가식이나 꾸밈이 없었기 때문이다.
수팅의 시를 읽다 보면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따라 자란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 파리의 우울, 보들레르
바다는 온갖 물을 다 받아들이고도 넘치지 않고 밀려갔다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데, 사람의 물결은 왜 곤두박질치기만 하고 마음은 왜 또 수평을 지키지 못할까 생각하다가 바닷가 해송들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바다에 파도가 없다면 사람한테 사랑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한다. 사랑도 욕망인데 바다의 욕망인 파도가 없다면 사랑이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은 조선중기부터 쓰던 말로 그땐 ‘생각하다’였다고 한다.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해 제 스스로 갖게 되는 힘이 없는 사람들은 보들레르의 시 <음악>을 읽으면 시보다 먼저 마음이 바다에 가 닿을 것만 같다.
음악은 때때로 바다처럼 나를 사로잡는다 / 나는 출발한다 //
창백한 별을 향해 자욱한 안개 밑으로 / 때로는 끝없는 창공 속으로 /
돛대처럼 부푼 가슴 / 앞으로 내밀고 / 밤에 묻혀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를 / 나는 탄다 / 나는 느낀다 //
신음하는 배의 / 온갖 정열이 진동함을 /
순풍과 폭우가 그리고 그 진동이 / 나를 흔든다 //
광막한 바다위에서 / 음악은 때로는 고요한 바다 / 내 절망의 거대한 거울.
“음악은 때로는 고요한 바다 / 내 절망의 거울”이라는 구절과 “여행의 목적은 떠나는 데 있다”는 절묘한 말을 남긴 보들레르.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그는 사실 문학과 미술에 대한 평론을 통해 ‘현대성’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정립한 현대시의 기수였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자살한 작가도 있다. 일본 근대 소설의 귀재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인생은 단 한 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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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레르보다 못하다”며 35세에 자살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예술은 인간의 천성이며 천성은 신의 예술”이라는 그의 말이 더 잊혀지지 않는다.
보들레르도 시집은 <악의 꽃> 단 한 권만을 남겼을 뿐이다. 그는 평생 동안 수많은 시를 썼지만 활발한 저작활동을 폈던 같은 시대의 시인 빅토르 위고와는 대조적이다.
그는 자신의 글을 성급하게 출판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46년 이라는 그의 삶 자체가 너무 짧았던 탓이기도 하다. 비록 시집은 한 권 밖에 없지만 그 시집 속에 그는 삶의 경험과 진수를 다 모아 놓았다. <악의 꽃>외에 우리가 그의 시를 접할 수 있는 것은 소산문시 <파리의 우울>이 있다.
보들레르는 파리를 너무나 사랑했다. 46년 4개월 23일이라는 그의 짧은 생애에서 파리를 떠난 것은 단 두 번뿐이라고 한다. 국내의 몇 군데 여행과 1841년에서 42년 사이 1년 동안 남태평양 모리스 섬으로 여행했던 것이 전부다.
보들레르에게는 위대한 시인들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혹독한 시련의 시기도 있었다. 원 제목이 ‘지옥이 변방’ 이었다고 전해지는 <악의 꽃>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1857년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과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 함께 소송에 걸린 법정 사건은, 그 당시 프랑스 문단을 떠들썩하게 할 정도로 유명했다.
<악의 꽃>이 소송에 걸린 것은‘추잡하고 부도덕한 구절과 표현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중의 도덕과 미풍양속을 침해했다’ 이유 때문이었다.
재판결과 <보바리 부인>은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악의 꽃>은 유죄선고가 내려져 벌금형을 받았고, 6편의 시가 삭제되는 불운을 맞기도 했다.
<악의 꽃>의 명예가 회복되기까지는 100년이 걸렸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지금까지도 독자들에게는 가장 매혹적인 작품으로 읽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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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장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
그것이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만큼 밖에는 담지 못하리.
- 에밀리 디킨슨 <사랑이란 세상의 모든 것>
■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봄의 끝을 춘미(春尾)라 하는 데 여름의 끝은 무엇이라 할까. 여름이 물러나는 기운은 조금씩 가늘어지는 매미소리로부터 감지된다. 온몸으로 땡볕을 받아들여 제 몸을 태우는 듯 울어대던 매미 소리도 어느덧 나른하게 풀리는 것을 보면 바야흐로 여름이 지나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사랑이란 죽은 이도 소생시킬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던 미국의 여성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이란 시가 생각났다.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
그것이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만큼 밖에는 담지 못하리.
21세 때부터 ‘무슨 큰 일이 생기지 않는 한 절대로 집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는 에밀리 디킨슨, 그는 평생을 고향 마을에서 독신으로 은둔자처럼 살다 간 고독한 시인이었다. 그는 일찍이 이 우주가 얼마나 넓은가를 가르쳐 주는 것은 지독한 고독뿐이란 걸 알아버린 것일까. 살아 있는 동안은 겨우 7편의 시만을 발표한 그였지만, 1700여 편이나 되는 시를 남겨놓고 죽은 놀라운 시인이었다. 그는 죽은 뒤에도 다시 살아난 강한 여성 시인이었다.
특히 그의 시 중에서 <실연(失戀)의 시>들은 모두 날짜가 쓰여 있고 빠른 필적으로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에게 실연은 날짜까지도 잊어버릴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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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였고 죽음 같은 것이었으며, 글자를 빠르게 쓸 정도로 비명을 지르고 싶은 고통이었을 것이다.
살아 있을 때 한 권의 시집도 남겨놓지 않은 그였지만 사후에는 영국 시인 테드 휴즈의 도움으로 세 권의 시집이 발간되었다. 그 시집으로 디킨슨은 미국의 위대한 시인으로 재조명되기도 했다.
■ 국경을 뛰어넘은 사랑
어제는 빗속을 걸으며 나에게 주어진 삶을 제대로 살았는가 생각해 보았다. 한 사람의 지상에서의 삶이, 그토록 아름다운 것은 그가 직선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굴절되고 굴곡된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말이, 시인은 태어나기도 하지만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 말이 다 들어맞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운명이라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어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반되는 삶을 밀고 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럴 땐 눈을 뜨고 있어도 세상이 어둡게 느껴지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이 불편해 그냥 꽃 속에 숨고 싶어진다.
언젠가 시인이 되고 싶다는 한 학생이 내게 물었다. ‘신이 인간 세상에 제일 처음 준 꽃이 코스모스라는데, 향기 나는 라일락이나 국화꽃을 주시지 왜 하필 향기도 없는 코스모스를 주었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 학생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그게 코스모스의 운명이겠지.…코스모스의 본 뜻이 우주 또는 세계라는 듯이잖아. 그 자체 속에 질서와 조화를 지니고 있으니까. 우주를 인간에게 준 것이지. 신의 큰 선물이 아니겠니. 향기는 없지만 꽃잎이 얼마나 아름답니.
그날 그 학생은 내가 말한 그런 대답을 원했을까…. 지금까지도 그날의 그 질문이 마음속에서 오래오래 나이를 먹고 있지 않다.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기만 하면 거침없이 떠오르는 시인이 있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러시아 시인 예세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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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세닌은 아홉 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지만, 제대로 쓴 것은 열여섯 살 때 잡지에 기고한 뒤부터였다.
첫 시집 <초혼제(招魂祭)>를 낸 것은 1916년 그의 나이 21살 때였다. 첫 시집이 나오자 평단의 긍정적인 반응과 독자들의 환호에 힘입어, 학교를 그만두고 농촌과 도시를 오가며 시 쓰기에 몰두 했다.
예세닌의 시대는 러시아 역사에 있어서는 대변혁의 시기였다. 혁명 시기에 그는 10월 혁명 편이었지만 농민 편에 서서 변혁을 주장했다. 그때부터 예세닌은 러시아의 국민시인, 민중 시인으로 주목 받았다. 조국 러시아의 운명과 민중의 희노애락이 깃들어 잇는 그의 시는 내용이 민요에 가까운 어휘로 표현되어 민중시인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예세닌은 푸슈킨과 고골리를 좋아한 랭보에 못지않은 천재였다. 랭보가 세상의 혼돈에 환멸을 느껴 세계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니는 방랑과 모험의 길을 택했다면, 예세닌은 바뀐 시대의 변화에 환멸을 느껴 음주와 엽색행각으로 자학하며 생을 탕진했다.
예세닌은 시에 치열했듯이 사랑에도 몰두한 시인이다. 예세닌이 27세 때 그보다 17년 연상인 미국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을 어느 파티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예세닌은 덩컨을 보고 첫 눈에 반했지만 덩컨은 죽은 아들을 닮은 예세닌에게 끌려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들을 한다. 사랑은 마음으로 알고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녀는 유럽과 미국 공연에 예세닌을 동반하기 위해 결혼까지 한다. 그러나 그들은 미국과 러시아, 유럽을 거치는 동안 이별과 재회를 거듭하다 서로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헤어진다.
예세닌은 1923년 덩컨과 헤어진 2년 뒤에 자살했고 덩컨은 목에 두른 스카프가 차바퀴에 빨려 들어가 급사했다. 예세닌이 죽은 2년 뒤였다. 죽음을 예견한 듯, 죽기 얼마 전 예세닌은 <안녕 내 친구>라는 시를 남겼다.
잘 있거라 내 친구야 / 소중한 자네를 내 가슴속에 간직하려네 /
이별은 이미 정해진 것 / 저승에서 만남을 약속하는 것 /
나로 인해 슬퍼하지 말고 잘 있거라 / 악수나 조사 따위는 아껴두게 /
이 세상에서 죽음이란 새로운 것이 아니건만 /
삶 또한 새로운 것이 아니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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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세닌이 쓴 시의 마지막 결구를 이어받아 마야코프스키가 마무리했다.
“이 세상에서 죽는다는 것은 어렵지 않네 /
살아내는 것이 더 어렵다네.”
이런 결구와 애도의 시를 헌정한 마야코프스키도 예세닌의 자살한 5년 뒤에 자살했다. 마야코프스키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권총으로 자살했고, 예세닌은 레닌그라드에 있는 한 호텔에서 동맥을 끊은 뒤에 피로 쓴 시를 남겨놓고 자살했다.
톨스토이는 예세닌이 죽었을 때 “가장 위대한 시인이 죽었다. 그의 시는 마치 그의 마음의 보물을 두 줄 뿌린 것과 같다”며 슬퍼했다.
■ 삶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요즈음은 생활이란 말보다 생존이란 말이 더 절실하게 느껴진다. 많은 사람들이 생존 자체에 위협을 받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생활은 살아서 활동하는 것이고 생존은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다. 생존에 위협을 받는데 생활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열심히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것이 요즘 생활이고 최선을 다해도 최악이 거듭되는 것이 요즘 현실이라고들 말들을 한다. 왜 사는 지 삶의 의미조차 잃어버렸다는 말을 듣거나, 꿈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려지는 것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할 말을 잃게 된다.
생활이 힘든 사람들에게 한편의 시가 얼마나 위로가 되며, 한 그릇의 밥보다 얼마나 따뜻하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할 때도 있다.
오늘도 삶에 속고 마음이 깨어지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푸슈킨의 <삶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한 편을 따뜻한 밥처럼 차려주고 싶다.
너무나 많이 알려진 시라 새롭지는 않겠지만 지금처럼 삶이 자신을 속인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가슴으로 받으면 작은 위안이라도 얻게 될 것이다.
“삶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 실의의 날엔 마음을 가다듬고 / 자신을 믿으라 / 이제 곧 기쁨이 오리니 / 마음은 내일에 사는 것 / 오늘이 비참하다 해도 /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지나가 버린다. / 그리고 지나간 것은 / 언제나 그리워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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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읽다보면 “삶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구절과 “마음은 내일에 사는 것”이란 구절에 위안을 받게 되고 용기를 얻게 된다.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라도 이 시를 읽고 나면 웬일로 아, 사는 것만이 희망인가 싶다.
푸슈킨은 “지나간 것은 언제나 그리워지는 것이다”라는 한 구절로도 많은 독자들을 사로잡은 말의 거부(巨富)다.
그는 귀족 출신이었지만, 마음의 안정을 이뤄야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갖게 되고, 주위의 사물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일찍 깨달은 민중을 존중한 시인이었다.
그는 책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할 정도로, 거의 모든 시간을 시 쓰는데 바쳤으며, 소설과 희곡, 평론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인 시인이기도 했다.
대문호 톨스토이는 푸슈킨에게 ‘러시아 문학의 가장위대한 주인’이란 칭호를 서슴없이 바쳤고, 낭만주의의 거장인 주코프스키도 그의 시를 읽은 후에 ‘선생보다 나은 학생에게 못난 선생 드림’이라고 서명한 자신의 초상을 보내면서까지 격찬했다. 그야말로 그는 영혼을 건드리는 위대한 시인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푸슈킨을, 삶을 증언하고 내일을 예언한 희망의 시인이라 말하고 싶다. 사람은 배가 고픈 것도 견디기 힘들지만 마음이 고픈 것은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이다. 세계의 명작은 세월이 흘러도 세기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고 우리를 감동시킨다. 삶이 우리를 속이더라도.
■ 씨 뿌리는 계절과 레 미제라블
‘겨울이 깊었으니 봄이 멀지 않았다’는 시 한 구절이 요즘처럼 따뜻하게 생각된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한 겨울에 입춘(立春)이란 말을 들을 때처럼 마음까지 포근해진다.
올 봄은 새 마음으로 새 씨를 뿌리는 일이, 우리 모두의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무엇보다 앞선다. 봄이 되면 농부들이 겨울 동안 언 땅을 쟁기로 갈아 씨를 뿌리듯이 씨를 뿌리며 씨앗을 키워줄 땅에 허리를 굽히듯이 우리도 그렇게 새 씨를 뿌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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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씨처럼 뿌리고 삶을 꽃처럼 피우고 싶은 많은 이들과 함께, 오늘은 프랑스의 시인 빅토르 위고의 <씨 뿌리는 계절>을 읽고 싶다.
지금은 황혼 / 나는 문간에 앉아 / 일하는 마지막 순간을 비추는 /
하루의 나머지를 찬미 합니다 //
남루한 옷을 입은 한 노인이 / 미래의 수확을 한줌 가득히 뿌리는 것을 /
밤 이슬에 젖은 이 땅에서 / 마음 흐뭇하게 쳐다봅니다 //
그의 높은 그림자가 / 이 넓은 밤을 가득 채우니 /
그가 세월의 소중함을 / 얼마나 믿고 있는지 우리는 알겠습니다 //
농부는 넓은 들판에 / 오고 가며 멀리 씨를 뿌리며 / 별나라에까지 멀리 /
씨 뿌리는 이의 / 장엄한 그림자를 드리워줍니다 //
나는 지금도 밀레의 그림 <이삭줍기>를 보면 <씨 뿌리는 계절>이 함께 떠 오른다. 그럴 때마다 나도 씨 뿌리는 사람처럼 지난날의 모든 잘못된 일들을 갈아엎어 버리고 새로운 일들로 나를 끌고 가는‘땅’의 새로운 생명을 발견하려 애쓴다.
빅토르 위고는 이 시 한편으로도 씨 뿌리고 거두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를 깨닫게 해준다. 그 일이 바로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는 프랑스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낭만파 시인임과 동시에, 소설 <레 미제라불>과 <파리의 노트르담>으로 세계적 명성을 떨친 위대한 국민 작가이다. 그의 작품 중 특히 <레 미제라블>은 출간되자마자 대중들과 노동자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레 미제라블>의 원 제목은 ‘비참’이었으나 어둠을 밝힌다는 뜻으로 <레 미제라블>(기적)로 바꿨다고 한다. 그리고 이 소설은 빅토르위고가 1845년부터 1862년까지 17년에 걸쳐 쓴 소설이다.
서구의 문화권을 대표하는 문호를 꼽는다면 영국의 셰익스피어, 독일의 괴테, 이태리의 단테, 러시아의 톨스토이나 도스트예프스키, 프랑스의 빅토르 위고를 꼽을 수 있다고 평자들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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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망도 절창하면 희망이 된다
따뜻한 봄도 추운 겨울을 통해서 오고, 빛도 어둠을 통해서 온다는 사실이 예사롭게 생각되지 않는다. 그럴 땐 시대의 어둠과 아픔을 노래한 시인 오장환의 시 <마지막 기차>를 지금도 절망하고 있을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저무는 역두에서 너를 보냈다 / 비애야! / 개찰구에는 못 쓰는 차표와 /
함께 찍힌 청춘의 조각이 흩어져 있고 / 대합실에 남은 사람은 / 아직도 / 누굴 기다려 / 나는 이곳에서 카인을 만나면 /
거북이여! 느릿느릿 추억을 싣고 가거라 /
슬픔으로 통하는 모든 노선(路線)이 / 너의 등에는 지도처럼 펼쳐 있다.
* 카인 : 아담과 이브의 맏아들, 동생 아벨을 죽인 사람
“저무는 역두에서 너를 보냈다. 비애야!” 이 한구절로도 익는 이들의 가슴을 비애에 젖게 한 시인 오장환. 그는 ‘마지막 기차’로 절망의 절창을 들려주고 있다. 절망도 절창하면 희망으로 바꿀 수 있다는 듯이.
절망해 보아야만 진정한 것, 절실한 것을 알게 된다. 절망도 결핍이므로 절망은 시 쓰기에 자양분이 될 때가 있다. 오죽하면 절망 안 되는 것이 절망스럽다고 카프카가 말했을까. 희망도 절망을 통해서 오고 인간은 역경을 거치면서 현명해 지는 것이다.
오장환은 15세에 <목욕간>이라는 시를 발표해서 문단을 놀라게 했고 19세에는 <성벽>이란 시집을 출간해 또 한 번 문단에 화제가 되었다.
오장환의 <성벽>과 이용악의 <분수령>, 서정주의 <화사집>은 일제말의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독자성을 가졌던 대표적인 청년 시인들의 시집으로 유명하다.
<마지막 기차>를 읽는 내내, 사람에게는 침묵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나 분노가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술잔 없이 어찌 시절이 놓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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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의 소리는 곧 자유의 소리
웃음처럼 활짝 핀 목련꽃을 보면서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이라는 영랑의 시 한 구절을 떠올려본다.
4·19가 되면 ‘찬란한 슬픔의 봄’도 채 맞지 못하고 꽃잎처럼 떨어져 간 젊은 영혼들이 생각나 꽃을 보는 마음조차 슬퍼진다.
삶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삶은 찬란한 삶이 아니라 중심 있는 삶일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영혼도 나처럼 상처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은 날이나, 이제는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이 삶이라고 생각되는 날은 중국 시인 아이칭(개청 芥靑)의 <외침> 이란 시를 읽어보자.
* 개(芥) : 겨자 개, 작은 풀 갈
밤새 소리에 / 태양은 횃불 눈을 뜨고 /
밤새 소리에 / 바람은 부드러운 팔을 뻗어 /
밤새 소리에 / 도시는 깨어난다… 이것은 봄 /
이것은 봄의 아침 / 나는 어두운 곳에서 /
그 하얗게 밝은 우주를 바라본다 /
그곳에 / 생명은 돌고 있고 / 그곳에 / 시간은 달리는 바퀴처럼
그곳에 / 빛을 훨훨 날아 … 나는 어두운 곳에서 /
하얗게 밝은 / 파도처럼 도약하는 우주를 / 구슬프게 바라본다 /
그것은 / 생활의 절규하는 바다
그가 얼마나 옥중 생활의 억울함을 외치고 싶었던가를 ‘그것은 생활의 절규하는 바다’라는 구절만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자유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리라’던 아이칭은, 자유를 위해 평생을 바친 중국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며 화가이며 미술평론가이다. 20세기 중국의 정치와 사상 그리고 문학의 산 증인이며 중국어를 음악적으로 예술화한 언어의 개척자였다. 그래선지 아이칭의 연구가인 조우홍싱은 아이칭을 두고 ‘위대한 문학가일뿐만 아니라 정직한 사람이며 반드시 참된 말만 한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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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부터 20년 동안이나 숙청되어 감금생활을 한 그는 중국의 어느 시인보다 삶 자체가 드라마처럼 기복이 심했다.
그의 시작 활동은 옥중에서 본격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감방에서 깊은 사색과 번뇌와 회의를 하게 되었다고 <감방의 밤>에서 토로하고 있다.
“옛날 나는 그 노래 속에 누워 / 철근과 철골을 갖추고 / 창조자의 영광도 갖추었다 / 오늘 밤 / 그대 노래는 나를 야유한다 / … 사랑하는 사람 나를 버리고 멀리 가듯 / 적의 춤 속에 탐닉하고 있다.”
아이칭이 감옥에서 쓴 옥중시 25편은 그의 대표작이며 출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는 초년작과 만년작만 남아 있고 중년 작 특히1960년대의 작품은 거의 없다.
‘시의 소리는 곧 자유의 소리이며, 시의 미소는 곧 자유의 미소’라는 그의 말은 중국시의 정신을 대변하는 말로 유명하다.
오랫동안 감금생활을 하면서 시작 활동에도 박해를 받던 아이칭은 1976년 10월 6일 중국의 문화혁명을 주도했던 이른바 ‘4인방’이 심판대에 오르면서 비로소 해방된다. 1985년 이후에는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나 결실을 보지 못하고 1996년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통의 집을 보지 못한 사람은 우주의 절반밖에 보지 못한 사람’이라는 에머슨의 말이 오늘은 아이칭의 말인 듯 뼈아프게 다가온다. 웃음처럼 활짝 핀 목련꽃을 보는 순간에도.
2021. 9. 18
* 다음에 2부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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